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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훈육 방법
by Tilly Dillehay
2020-10-26
올해 들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 2020년이 주는 여러 가지 압력 외에도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육아에 대해 늘어난 중압감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자녀와 보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녀에게 더 많은 죄를 짓고, 또 부모를 향한 자녀의 죄도 같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간을 더 많이 함께 보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족과 생활하는 게 과연 장기적으로 옳은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더 많아진 시간은 더 많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균열은 2020년에 새롭게 나타난 게 아니다.얼마 전 예쁜 딸을 낳은 젊은 크리스천 엄마는 지금 시대를 지배하는 육아 철학을 초조하게 탐색하는 중이다. 딸과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두렵다고 털어놓은 세 살짜리 아이를 가진 자기 친구에 대해, 그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엄마가 ‘율법 기반 육아(law-based parenting)’를 믿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끊임없는 아이의 울화와 반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이 이야기를 했던 젊은 엄마도 “율법 기반 육아”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엄격하게 대하는 것 또는 뭔가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젊은 엄마도 불순종하는 경우에 엉덩이를 맞으면서 자랐고, 또 부모가 때리는 게 다름 아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친구 중 그 누구도 잠언에서 “회초리(막대기)”라고 부르는 것을 자녀에게 사용하는 거 같지는 않다고 내게 고백했다. 나는 같은 현상을 발견했다.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들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공포 기반 양육 또는 율법 기반 양육 등)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문제는 그런 그들이 어린 자녀를 훈육해야 하는 방법과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복음적 대화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들과 대화를 하도록 인도하는, 아주 훌륭한 기독교 양육책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을 쓴 저자는 지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는 몇 가지 기본 도구를 당연히 써야 한다고 가정했던 것 같다. 실생활에서 훈육 메커니즘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출발점을 제공하는 일종의 관계적 신뢰를 확립하는 데에 회초리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데에 회초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를 수 있다. 훈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밀레니엄 세대의 어느 부모가 지금 내 또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권위”라는 한 단어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젊은 부모들 사이에서는 ‘은혜 기반 육아’ 대 ‘율법 기반 육아’라는, 잘못된 이분법이 설정되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최근 방청소를 하라는 말을 무시하는 아들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들을 대신해서 청소를 하는 “은혜를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아들로 하여금 강제로 청소를 하도록 하는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물었다. 온라인에서 아이들에게 억지로 저녁을 먹도록 하는 것을 꺼리는 엄마들의 댓글을 본다. 왜냐하면 그게 아이들로 하여금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도록 함으로, 아이들을 어떤 의미에서 작은 바리새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과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은 절대 믿을 게 못된다. “노”가 노의 의미가 아니고, 또 “예스”가 항상 예스를 의미하지도 않는다(마 5:37). 우리는 끊임없는 논쟁, 속임수, 잔소리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가정 속에 기본적인 질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해도, 우리가 하는 명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는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아이들 눈에 반복해서 부모가 하는 말과 실제 의미가 다르게 보이는 경우, 아이들은 하나님도 부모처럼 얼마든지 말씀과 실제 의도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에게 은혜를 보여주신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녀에게 은혜를 보여줄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가족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필요한 권위, 순종, 관계, 축복이라는 자질을 자녀들이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육아가 주는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차원에서 이미 그들과 교제하고 있으며, 교제가 어떤 느낌인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갖고 있다. 그건 웃음소리 같은 거다. 그건 좋은 음식 같은 거다. 그건 명령 같은 느낌이다. 또 축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훈육이 주는 고통스러운 결과처럼 느껴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5–9, 잠 3:11–12 인용)이 구절은 형벌을 받을 운명인 하나님의 적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고 계시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아빠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면밀히 살펴봐야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분노에서 비롯된 변덕스러운 채찍질이 아니라, 이미 그분에게 속한 자녀들을 사랑과 인내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 종류의 훈육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잠언 속 회초리가정에서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단어를 찾고자 한다면 잠언은 우리에게 많은 근거를 제시한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 29:17)분명히 이 구절들은 회초리를 쓰는 방법과 이유, 그리고 예외에 대한 다른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를 거의 찾을 수 없는, 확실한 진술이다. 잠언이 회초리의 사용을 칭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잠언은 회초리의 원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잠언을 규범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잠언은 규범집이 아니라고요. 이건 지혜 문학입니다!”). 그런 시각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묻고 싶다. 우리는 지혜롭게 되기를 원할까 아닐까? 성경 저자는 지혜롭게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성경이 회초리를 사용하는 육체적 규율을 왜 그토록 강력하게 지지하는지, 또 다른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회초리에 대한 반대집에서 사용하는 육체적인 훈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몇 가지 상식적인 회초리 반대 이유가 떠오를 수 있다.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은 어떤가? 입양된 자녀, 학대 경력이 있는 자녀는 어떤가? 또한 회초리가 합법적인가?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나? 그리고 신체적 학대로까지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큰 문제 많은 부모는 또 어떤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회초리는 단순히 육체에 가해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다. 회초리 속에 담긴 원리는 이것이다. 죄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가해지는 현재 약간의 고통은 장기적인 열매를 거둘 것이다. 따라서 자녀 또는 부모가 육체적 훈육을 현명한 방법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병력이나 질병이 있는 경우에도 이런 회초리의 원리가 관계적인 상황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세상에는 질서(structure)가 있음을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며, 부모는 사랑과 함께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죄가 어떤 유치한 형태로든 겉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올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부모는 아이들 스스로 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라도 죄를 똑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의 상황에서조차도 죄를 제대로 처리하기를 원한다. 회초리 없이도 그런 부모의 권위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것은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경험 많은 부모들에게 겸손하게 의견을 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자녀가 앞에서 말한 소수에 해당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예외가 성경의 명령을 무시하는 변명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적인 질문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현재 미국 50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 모두에서 가정에서 행해지는 신체적 징계는 합법이다. 게다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주(주로 남부 및 중서부)에서는 학교에서 쓰는 회초리도 합법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서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회초리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스코틀랜드는 모든 종류의 신체적 규율을 금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거기에 동조한 국가가 되었다. 즉, 여기에는 시민 불복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지혜, 특히 인간의 지혜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allegiance)이 필요하다. 권위와 세속 선각자들지난 몇 년 사이에 양육의 권위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단어 중 일부는 세상의 연구 결과에서 나왔다.‘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신드롬’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이 현상은 오늘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진술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가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에서 임상 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피터슨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원죄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많은 부모와 아이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만 노는 아이는 “작은 괴물”이 될 수 있다(125). 자치가 허용된 아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이다. 피터슨은 어른이 위치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때 아이들은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회초리도 거기에 필요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한다(141).‘부모 양육의 붕괴(The Collapse of Parenting)’를 쓴 레오나르드 색스(Leonard Sax)는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 또 뭘 하고 놀지, 가고 싶은 학교까지 결정하도록 허용한 어느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30년 동안 권위는 엄청난 속도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옮겨졌다”(7). 그는 이러한 권위 이전에 관한 사항을 과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 미국 학교의 학업 성취도 저조, 취약한 학부생 등 다양한 문제와 연결시킨다. 피터슨과 색스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까지 기꺼이 한다. 피터슨의 책 중 한 챕터는 “당신이 자녀가 싫어지도록 만드는 일을 아이들이 하지 않도록 하라”이다. 기독교인 부모라면 자녀가 하는 어떤 행동 때문에 부모인 내가 그 자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색스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12살짜리 소년이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다. “차 돌리라니까, 입 닥쳐. 넌, 그냥 운전이나 해”(6). 우리는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강한 경고는 지혜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더 강한 표현도 나온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 19:18). 다음처럼 이 구절을 번역한 성경도 있다. “네 아들을 훈육하라 … 매맞는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찰스 브리지(Charles Bridges)는 1847년에 이렇게 썼다.“거짓된 부드러움보다 겉으로는 가혹해 보이지만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자비가 있다. 아이에게 우리가 결심한 것을 보게 하라. 약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도록 하라. 자녀가 건강한 교정을 받으면서 우는 게 훨씬 낫다. 자녀가 맞으면서 흘리는 눈물이 나중에 자신과 자녀들을 소홀히 훈육한 결과 맺은 쓴 열매 앞에서 후회하며 흘리는 부모의 눈물보다는 훨씬 더 낫다.”(271)이런 식의 언어는 자녀가 아주 어린 부모의 눈에는 좀 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죄가 나중에 그 애가 중년이 되었을 때 짓는 죄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육아에 대해 교훈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냉정한 언어는 성서 속 지혜서를 쓴 저자들에게는 전혀 지나친 게 아니다. 게다가 색스와 피터슨과 같은 세속적인 선각자들에게도 지나친 게 아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도 지나친 게 되어서는 안 된다. 멘토링과 회초리경건한 양육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 이상이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그리고 회초리 사용에 대해서 성경이 비중있게 다루는 말씀을 통해 우리 젊은 부모는 회초리를 왜,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배워야 한다. 일부 기독교 자녀교육 책에는 회초리에 대한 유용한 언급이 있다. 레이첼 젠코비치(Rachel Jankovic)는 ‘어린 시절을 사랑하라(Love the Little Years)’에서 훈련을 위한 즐거운 비전을 제시한다. 진저 허바드(Ginger Hubbard)가 쓴 ‘셋까지 세게 하지 마(Don’t Make Me Count to Three)’는 매우 실용적인 책이다. 그리고 테드 트립(Tedd Tripp)은 ‘자녀의 마음을 목양하기(Shepherding a Child ’s Heart)’에서 한 장에 걸쳐서 회초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나는 밀레니엄 세대의 부모가 이 일을 잘한 이전 세대의 부모에게 다가가 가장 기본적이고 또 실용적인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떻게 사랑으로 징계합니까? 언제 징계합니까? 회초리로 무엇을 사용합니까? 징계하고 나서 자녀들과 어떻게 기도하나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기는 어렵다.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은 모범 답안을 듣도록 하라.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당신이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경우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훈육을 받지 못했고, 또 밀레니엄 세대 중 상당수도 당신과 비슷한 처지라면, 개인적인 영향과 지원 없이는 자녀 교육을 위한 좋은 비전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나는 또한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교회의 젊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엄한 모습을 보여줄 경험 많은 부모들도 만나고 싶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파견된 대사이다. 은혜, 사랑, 기쁨, 질서의 대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자녀를 징계할 때 자녀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 이것이 바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즐겁고도 복잡하며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육아라는 책임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he Rod Can Point Children to God번역: 무제
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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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교육
회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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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승수
2020-10-07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는 신앙 감정론에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표현을 읽을 때 마음에서 떠올리는 것은 가슴에서 뜨겁게 솟아오르는 감격과 같은 감정을 상상할지 모르겠다. 신앙 감정론이 말하는 참된 신앙의 감정이란 어떤 끌림이다. 동물들 중에 밤에 다니는 동물을 야행성이라고 하고 빛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들을 주광성이라고 한다. 이런 본성에 새겨진 성질처럼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심으시는 “초자연적인 본성”이다.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은 믿음을 정의하기 위해서 몇 가지 심리학적인 개념을 동원했는데 habitus라는 습관의 개념을 동원했다. 통상 습관이란 환경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반복 숙달된 일종의 적응 기제다. 이런 적응 기제는 기본적으로 획득되는 성질을 지닌다. 그런데 이렇게 획득된 습관이 아니라 “주입된 습관(infusa habitus)”을 말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성품을 향해 끌리는 감정을 말한다. 인간은 부모가 생식을 통해 유전해준 오염을 가진 채 태어난다. 인간의 전 존재는 죄가 스며들어 그 부패가 미치지 않은 영역이 없다. 그 부패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독특한 습관을 형성한다. 구체적 예시로서 나 자신의 사례를 들어보고자 한다. 내 십대와 이십대에는 이상한 현상이 있었다. 좋아하는 여자가 생겨 혼자 짝사랑 할 때는 가슴이 뜨겁다가 막상 상대가 관심을 보이면 마음이 식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경우에도 거절당하는 것 같은 정서가 늘 있었고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혼자인 게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 같다. 그런 과정을 통해 사랑하는 사람으로 서기까지 한 평생이 걸렸다. 지금도 나를 지배하는 밑바닥 정서로 남아 있다. 내 첫 연애는 이런 나를 각성하게 했다. 헤어짐의 과정도 나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월말에 아르바이트를 마치던 날 잠깐 보고 가라는 점장의 말에 누구보다 성실히 일했음에도 관두라는 말을 상상한다. 그러나 현실은 추석 선물이고 상여금이다. 이런 태도는 어린 시절 주요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양육자의 태도를 거절로 이해하고 거기에 반응했던 내 태도와 세계관에서 비롯되었다. 정말 거절당하지 않으려는 생존을 위한 절실한 몸부림 같은 것이었다. 정말 진심을 다하는 태도도 거절에서 비롯되었다. 상대를 진심을 다해 이해하려는 태도도 내가 거절당할 때 아팠던 것을 다른 사람이 겪게 하고 싶지 않았던 데서 비롯되었다.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대해서도 깊은 통찰이 일었다. “그분이 날 사랑할리가 없어”라는 막연한 느낌은 늘 나를 괴롭혔고 어떤 성경공부나 지적 이해도 이런 내 정서와 정체성을 바꿔놓지 못했고 늘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움츠러드는 나는 늘 자신을 관계에서 소외시키는 선택을 했었다.이제 그런 마음의 고통을 안고 있는 누군가에게 진정한 사랑의 관계로 나아가도록 가이드를 할 만큼 사랑하며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삼위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은총이다. 이런 변화는 서서히 찾아왔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전혀 다른 결의 습관이었다. 내가 하나님 안에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한 분명한 정서가 내 안에서 생겼다. 내 청년 시절 이 습관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이것이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설명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 안에 있다”는 표현의 의미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믿음은 주입된 습관이고 본성의 한 부분에 심겨진다. 이 습관은 초자연적인 습관이다. 자연적 방식으로 체득되지 않으며 이 심겨진 습관은 교회에서 베풀어지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만 자란다. 믿음은 칭의의 도구적 원인이다. 우리가 믿음을 사용하여 은혜의 수단을 강구하게 되면 은혜의 주입이 일어난다. 이 사건이 성화이다. 은혜는 죄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그렇게 주입된 은혜는 믿음의 습관이 계속 자라고 강성해지게 한다. 믿음의 습관이 자라서 소망과 사랑의 습관을 불러온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습관은 모두 은혜의 주입의 결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난 초자연적인 습관 곧 덕이다. 이 습관은 그 시초에서 심겨지기는 했으나 은혜의 주입을 통해서 은혜를 먹고만 자라난다. 그것이 자라나는 현장이 교회며 공동체의 현장이다. 성화는 공동체적인 사건이다. 로마 가톨릭과 달리 종교개혁 전통은 특정 개인을 가리켜 “성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를 향해 거룩한 무리라고 일컬은 바울 사도의 저술을 따라 “성도”라고 부른다. 이것은 거룩함이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누가복음 17장 21절의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ἡ βασιλεία τοῦ θεοῦ ἐντὸς ὑμῶν ἐστιν).” “너희 안에”는 우리 개개인 안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midst)” 혹은 “사이에(among)”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관계 가운데 임한다. 바벨탑 사건은 지금도 계속된다. 우리가 부모로부터 유전한 것은 생물학적 본성뿐만 아니라 우리 부모의 죄의 습관을 유전했다. 그 습관은 하나의 세계관을 형성하고 우리는 그 습관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다. 내가 사람들의 호의가 모호한 신호로 전달될 때, 나도 모르게 거절로 해석하는 것처럼, 또 그 해석이 우리를 소통하지 못하게 하고 움츠러들게 해서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한다. 바벨탑은 단지 언어의 장벽만이 아니다. 오순절 사건이 각기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듣게 하는 것은 단지 이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안에 심겨진 믿음의 습관이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 공동체 안에서 사랑이 실천되고 유통되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은 심겨진 것이지만 사랑은 연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이 강화된다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습된 습관이라는 말이다. 은혜가 우리를 지배하므로 은혜의 의해서 형성된 습관이다. 그리고 그 연습은 바로 어머니인 교회를 통해서 신뢰 관계 속에서 영적 걸음마를 배우는 일이다. 가정과 어머니로부터 우리가 걷고 말하고 일어서며 좌우를 분간하고 옳은 일을 배우는 것처럼 영적 어머니인 교회로부터 우리는 이 영적 습관을 연습하고 익혀야 한다. 그 소통의 감정이 바로 거룩한 감정이다. 현대 심리학은 아이가 어려서 형성하는 애착이 아이가 장차 사회성을 결정한다고 말한다. 건강한 애착은 타인을 신뢰하게 만들고 그 신뢰의 경험이 공동체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한다. 사람의 성장과정이 이러하듯이 영적으로 출생한 신자는 교회로부터 이런 애착을 경험적으로 체득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건은 주권적이며 우리 노력에 의해서 획득되지 않으나 성화의 과정은 바로 이 은혜의 분여(impartation) 과정을 통해서 사랑의 교제에 대한 경험의 누적으로 형성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사랑의 교제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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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7장이 이혼에 관해 말하는 것
by David Schuman
2020-10-06
결혼은 신성한 것이다. 결혼할 때 당신은 친구, 가족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오로지 배우자 한 사람만을 평생 동안 사랑하겠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폭력이 조금씩 심해진다. 분노로 인해 종종 발생하기 시작한 게 어느새 밀침과 구타 그리고 또 다른 공포의 상황을 만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당신은 수치스럽고 슬프고 화가 난다. 아니, 이 모든 감정이 다 뒤섞여 있다. 뭐가 뭔지 모를 정도로 혼란스럽고 갈등을 느낄 것이다. 하나님과 배우자에게 다 신실하고 싶었는데, 뭐가 잘못된 건지 더 이상 집에 있는 게 편안하지만은 않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학대(abuse)를 싫어하신다. 그건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나는 일이다. 남을 학대하는 사람은 힘과 영향력을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이 되셨다(빌 2:5-11). 학대자는 당신을 가치없고, 외롭고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든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스럽고 소중하며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보시며 그 고통이 끝나기를 원하신다.결혼과 외도하나님은 결혼을 신성한 결합으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결코 이혼을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마 19:3–6).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이 이혼을 허용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신 24:1-4). 그래서 그들은 다시 물었다.“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7–9).하나님이 바라시는 결혼은 평생 동안 유지되는 연합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성으로 마음이 완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시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한다. 첫 번째 상황은 “성적 부도덕”이다. 섹스는 오로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 공유되어야 한다. 누군가가 외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은 결혼의 유대를 끊게 되고, 그 죄는 하나님을 슬프게 한다. 당신의 배우자가 외도를 저질렀다면, 당신은 용서하고 화해를 모색할 수 있다. 그런 경우라면 목사나 또는 상담사에게 도움을 받는 게 현명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하나님의 허락 하에 얼마든지 이혼해도 된다.결혼과 버림(Marriage and Desertion)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이혼을 허락하시는 또 하나의 상황을 알려준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고전 7:15). 결혼은 두 사람의 연합이다. 만약에 믿지 않는 배우자가 돌아오겠다는 의도가 없이 떠나는 경우라면, 그 자체는 결혼이라는 연합을 깨는 행위이다. 그렇기에 외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화해 또는 이혼 중에 무엇을 선택해도 관계없다.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은 학대가 일종의 버림이라고 간주한다. 당신의 배우자가 당신으로 하여금 집을 떠나야할 정도로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그런 경우라면 그런 식의 강제적인 유기(abandonment)는 배우자가 돌아올 생각 없이 가방을 싸서 떠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집에서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다면 도망가야 한다. 목사 또는 경험 많은 상담사에게 조언을 구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폭력적인 경우, 주저하지 말고 119에 신고하라. 당신의 외침을 들으시는 하나님은 결코 당신이 이런 식으로 고통 받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배우자의 행동이 당신의 잘못이 아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모두는 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으며, 당신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아니면 하지 않았는지 여부에 관계없이 당신은 결코 배우자로부터 학대를 받아서는 안된다. 배우자는 모든 게 다 당신 책임이라고 주장할지 몰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21-23). 우리의 죄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한 어떤 일 때문에 생기는 게 아니다. 우리의 죄는 우리 내면에서 나온다. 배우자가 학대하는 것은 그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학대는 이혼의 근거가 될 수 있지만, 그런 결정을 혼자서 내려서는 안된다. 교회의 장로나 목사님의 조언을 구하라. 그들은 당신과 함께 곁에서 진짜로 학대가 일어나고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종류의 학대인지를 분별할 뿐 아니라 당신이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할 지에 대해서도 도움을 줄 수 있다(불행히도 이런 학대의 피해자를 돕는 시스템이 없는 교회를 다니는 경우에는 다른 곳에서 도움을 찾으라.)앞에서 살펴 본대로 고린도전서 7장 15절은 이렇게 말한다.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당신의 배우자가 학대를 자행하면서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교회는 권징을 실천해야 한다. 가장 먼저 배우자를 훈계하고,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를 출교 처리해야 한다. 출교는 실질적으로 당신의 배우자가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선언이고, 따라서 당신은 이제 얼마든지 이혼해도 된다. 학대를 알아차리기미국 여성 세 명 중 거의 한 명은 일생의 어느 시점에서 애인 또는 배우자로부터 폭력을 경험한다. 그리고 그런 폭력 중에 40에서 45 %는 성폭력이다. 비극적이게도 가정 폭력은 아주 흔하다. 그러나 그런 폭력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학대를 일삼는 배우자는 종종 매우 교활하다. 그들은 그들이 저지르는 학대가 별로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앞으로는 좋아질 거라고, 그리고 다름 아닌 당신이 그런 상황을 초래한 것이라고 설득할 것이다. 게다가 당신의 배우자가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사람이고 사회적으로 성공했거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교회의 지도자인 경우에는 학대를 인식하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무엇보다 그런 경우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으로 하여금 혼란을 초래하여 무슨 생각을 해야할 지 어려움을 줄 수 있다. 누구도 배우자를 두려워하면서 살아서는 안된다. 무엇을 해야 할 지 잘 모르겠다면 목사나 다른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이야기하라. 종종 제 삼자인 그들이 상황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다. 배우자는 당신이 그런 사람들을 만나지 못하도록 만들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명확한 학대의 신호이다. 집을 나갈 수 없다고 느끼거나 아는 사람과 이야기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경우라면 전국 가정 폭력 상담소인 ‘지역번호+1366’으로 전화하라. 모든 학대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을 다 글로서 기록해 놓는 것도 도움이 된다. 이런 기록은 나중에 학대 패턴을 식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학대는 대개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악화된다. 자신의 안전이나 자녀의 안전이 염려되는 경우에는 꼭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신다하나님에게 당신의 안전은 중요한 문제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고통을 보고 계시고 그 고통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바라신다. 학대는 절대로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학대가 존재하는 결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배우자가 당신을 학대한다면, 하나님께 더 간절히 기도하라. 그리고 교회의 장로와 목사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당신을 사랑과 지혜로 인도해달라고 간구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1 Corinthians 7 Says About Desertion and Divorce번역: 무제
가정
결혼
이혼
가정폭력
성경적이혼
고린도전서7장
배우자
학대
연합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왜 논쟁을 좋아할까?
by Russell Moore
2020-10-02
월터 퍼시(Walter Percey)의 소설 ‘영화보러 가는 사람’(The Moviegoer)의 주인공인 빙크스 볼링(Binx Bolling)은 이렇게 회고한다.“기분이 좋지 않으면 난 도서관에 가서 논쟁적인 잡지를 읽는다. 나는 자유주의자도 그렇다고 보수주의자도 아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면서 싸우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상 내게 있어서 미움은 이제 이 세상에 몇 개 남지 않은 생명의 증거(signs)처럼 느껴진다. 이 세상이 거꾸로 뒤집혀 돌아가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이제 다정하고 착한 사람들은 내게 죽은 것처럼 느껴진다. 미워하는 사람만이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퍼시는 아마도 이 한 구절 속에서 그가 살았던 시대를 요약하는 거 같다. 아니, 그는 사실상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묘사하고 있다. 중요한 문제일수록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게 세상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논쟁이야 어느 시대에나 일어나기 마련이고, 또 종종 무엇이 진짜 중요한 문제인가를 놓고도 서로 간에 팽팽한 기 싸움을 벌이는 게 인간이다. 그러나 성경은 반복해서 사도 바울이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딤전 6:4)라고 경고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물론 바울 자신도 그 누구보다 기꺼이 논쟁에 뛰어들곤 했던 인물이다. 한때는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는 이유로 베드로를 면전에서 꾸짖었고, 또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아주 거친 편지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부부의 사랑이 난교와 다른 것 만큼이나 바울의 경우는 논쟁 자체를 위한 논쟁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실, 바울이 경고하는 다툼은 바로 난교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일”(갈 5:17-21)에 대한 경계이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을 때 다툼과 성적 부도덕은 결국 정죄와 죽음이라는 동일한 운명을 맞게 된다(갈 5:21). 끊임없이 “어리석은 논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은 시정되어야 하고, 경고와 꾸짖음에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뒤틀린 자” 그리고 “스스로 정죄한 자”(딛 3:9-11)로 간주되어야 한다. 주님의 종이라면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또한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에서 “다툼이 나오기” 때문이다(딤후 2: 22-23). 여기서 우리는 다시 성경이 성적 부도덕을 논쟁하고 싶어하는 투쟁심과 연결하고 있음을 확인한다. 왜 그런 걸까? 가십거리가 주는 엔터테인먼트를 향한 열정지난 수년 간 나는 필요할 때 논쟁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을 보았고, 그들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논쟁에 뛰어든 이유는 다름 아니라 선함에 대한 사랑과 잘못된 것을 믿는 사람들을 바로 인도하기 위한 열정 때문이지 결코 논쟁 자체를 사랑해서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진리를 위한 열정” 때문에 논쟁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사실은 그냥 열정 그 자체를 느끼고 싶은 욕심 때문에 싸우는 경우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깊은 상처와 종종 심각한 스캔들을 일으키는 죄를 숨기던 사람들의 진실이 수면 위에 드러나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자연스럽게 빛 가운데로 드러나는 것을 보았다. 어느 연로한 목사님은 내게 말했다. “자기 자신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는 것보다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게 만드는 것도 없어.” 그말은 수없이 진실로 입증되었다.그러나 퍼시의 소설 속, 영화관에 가는 사람의 삶은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생명을 주는 성령님이 없을 때 인간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오로지 감각적인 자극을 통해서만 추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은 소설가, 퍼시가 죽은 개구리의 다리를 움직이게 만든 전기 충격과 비교한 인간 삶의 모습이다. 종종 다툼은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거나 나 자신이 중요하다고 느끼기 위해서, 또는 매일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을 갉아먹는 지루함 속에서도 나름의 의미를 찾아내기 위해서 인간이 벌이는 필사적인 시도이다. 지금은 천국에 가신 또 다른 노 목회자는 오래 전 사람들이 자기에게 와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게 얼마나 절망감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내게 토로한 적이 있다. “누구누구가 목사님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이야기 하다니, 정말 너무한 거 아니에요? 게다가 지난 주 설교에 관해서도 그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고요…” 등등.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런 말에 신경쓴다는 게 아니에요. 아니, 문제는 내가 신경을 너무 쓴다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든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런 모든 게 물론 삶의 계획과는 무관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얼마나 인정하는가 여부에서 나의 가치를 찾는 쪽으로 나를 유혹하거든요. 또 다른 문제는 나에 관해서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내가 정말로 바라는 방식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에요. 그들이 나에 관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아예 몰랐다면 훨씬 더 쉽게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요.” 나는 왜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목사님에 관해서 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옮겨다주는지 물었다. “글쎄요. 내가 알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거 같고요. 또 그들이 내 편이고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그럴 수도 있을 거에요.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는 그냥 인간의 본성 때문이에요. 가십거리는 재미있거든요. 게다가 가십에 관한 가십은 더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자기는 가십거리를 옮기고 있으면서도 스스로는 아니라고 착각하게 만드니까요.”잠시 멈췄다가 목사님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엔터테인먼트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그게 직장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교회든지 간에 남의 이야기를 하는 건 일종의 텔레비전 드라마와 비슷한 거거든요.” 목사님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병원 심방을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 목사님에 대해서 자주 생각한다. 그리고 그 목사님이 지금 살아계신다면 SNS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실지 궁금하다.다시 말하지만, 때때로 다툼은 일어나기 마련이고, 상황에 따라 그러한 논쟁이 성령님께 충실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적인 부도덕에 연루된 사람이 그런 부도덕을 “사랑”, “소울 메이트” 또는 “운명”이라는 식으로 의미부여를 하면서 스스로 특별하다고 확신하는 것처럼, 논쟁에 대한 불건전한 갈망을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자기 자신을 스스로가 초래한 논쟁 열정에 사로잡힌 포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죄에 갇힌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끊임없는 다툼에 빠져있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가질 수 있다. 이런 연민이 우러나오는 것은 우리가 강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러나 연민을 가진다고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리더십의 위치에 두거나 대화 과정을 지시하도록 허용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면, 그건 이웃 동네 나이트클럽에서 알코올 중독자가 전도지 배포를 담당하게 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자기 패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연민은 논쟁을 위한 논쟁이라는 불건전한 갈망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사랑하고 기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인생을 사는 사람의 종말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거의 기억을 살펴보면 된다. 남북 전쟁 당시 역사 재현(Civil War re-enactor)을 주장하거나 또는 한때 이단 사냥을 재현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을 말이다. 자신에게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고 가치를 주던, 쓰라린 분노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주장을 하는 내내 그들은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모든 게 다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이다”라고 말하고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행동하는 것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게 진실이다. 위협과 두려움으로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려고 했지만, 그런 시도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결코 주거나 받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이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켜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신다. 확실히 예수님도 논쟁을 많이 하셨지만, 그의 논쟁은 결코 선민사상(tribalism)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가 선민사상에 굴복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마 21:45–22:22; 눅 4:26–28; 19:7). 더욱이, 예수님이 촉발한 논쟁을 볼 때, 당시에도 많은 논쟁이 줄을 잇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람들이 이미 논쟁하는 주제와 관련해서 예수님이 덧붙여서 논쟁한 경우는 거의 없다는 사실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젤롯파는 헤롯파와 원수였고, 사두개인은 바리새인을 반대하는 등, 예수님 시대에 이런 식의 적대감은 만연했다. 예수님은 때때로 그들이 제기한 논란이 되는 질문에 대답하셨고, 때로는 그들이 실제로 진실에 관여하기보다는 단지 다투고 싶어하는 진심을 간파하셨기 때문에 아예 대답을 거부하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는 당시에 전혀 제기되지 않은 질문을 던짐으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성전이 실제로 모든 민족을 위한 기도의 집인지 여부에 관해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는지 여부에 관해서, 그리고 사람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인지 여부에 관해서 말이다. 드물지만 우리는 분노한 예수님도 만난다. 그것은 결코 자신의 가치관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었고, 이스라엘 민족에 의해 받아들여지기 위해 관행과 관련한 분노도 아니었으며, 무엇보다 권력을 얻는 것과 관련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분노는 다툼을 위한 게 아니었다. 동물적이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육체의 소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분노하는 것은 마귀이다.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하더라”(계 12:12). 마귀는 갇힌 동물에 불과하지 결코 양치기도 또 양도 아니다. 결국 다툼을 위해 다툼으로 이끄는 지루함과 생명 없음은 논쟁에서 당신이 옳다고 결론이 난 경우에 조차 당신으로 하여금 논쟁을 그만둘 수 없게 만드는데, 그건 논쟁이 주는 즐거움이 지루함과 생명 없음을 잊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다다르는 곳은 결코 진리를 추구하는 선함이 아니다. 그건 단지 행여나 “적”이 말실수를 하길 기다렸다가 함정에 가둘 기회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자세로 이어질 뿐이다.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가졌던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견디신(마 22:15) 예수님은 결코 스스로 그런 본보기를 만들지는 않았다.요즘과 같은 세상에서는 항상 다툼을 일으키는 주체인 상처 입은 영혼들이 의제를 정하고, 누군가가 거기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움직이기 마련이다. 지도자에게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신은 응답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모든 화재의 원인이 가솔린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성경에서 예수님은 군중의 칭찬(요 15장)과 다른 사람들이 정한 다툼의 의제(마 26:51-56)로부터 스스로를 멀리하셨다. 어리석은 논쟁으로부터 멀리하기사도 바울은 “어리석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한 논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딛 3:10). 이것은 전혀 다른 종류의 논쟁이다. 이 논쟁의 시작은 온유함과 이성이고, 다른 쪽의 반응에 따라 논쟁에 더 깊이 빠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런 논쟁 태도는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단점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추수감사절 테이블에서 총기를 휘두르거나 가구를 뒤집으면서까지 굳이 논쟁에서 이길 마음이 없는 사람들도 기꺼이 감수하는 “단점”이기도 하다. 물론 논쟁에서 마지막 말을 뱉는 사람은 아마도 거칠게 욕설을 지르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가? 전혀 아니다. 당신의 결론이 다음과 같기를 원하는가? “내년에 우리 의견이 좀 더 영향력을 가지려면, 아무래도 코카인과 무기가 더 많이 필요할 겁니다.” 아니다. 대신 당신은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건 역기능입니다. 내년 추수감사절에 우리는 여기에 없을 겁니다. 아니, 우린 지금 떠납니다.”오래 전 마크 놀(Mark Noll)은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을 썼는데, 그가 말한 스캔들이란 제대로 된 지성이 별로 없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 현재의 스캔들은 복음적 변연계(limbic system, 성적 흥분을 포함해서 흥분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의 스캔들이고, 스캔들이라고 해봐야 그나마 변연계가 남아있는 전부라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논쟁 중에 던질 “한마디 말”을 준비해야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 말을 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영혼을 더 소중히 여기는, 전혀 다른 방법을 모델로 삼는 것이다. 다툼이 생명인 사람들을 상대로 승리하는 방법은 논쟁이라는 게임 자체에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게임의 법칙을 추구하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Unhealthy People Crave Controversy번역: 무제
생활
관계
논쟁
다툼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가십거리
엔터테인먼트
복음주의지성의스캔들
부모가 가르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교훈
by Melissa Kruger
2020-09-21
엄마로 산다는 건 기쁘지만 벅찬 일이다. 아이가 계속 크기 때문에 엄마로서 전문가가 되었다고 말하는 건 쉽지 않다. 아장아장 걷던 아기가 금방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 대해서 좀 이해했다 싶으면 어느새 눈앞에는 사춘기가 된 아이가 서있고, 거기에 조금 적응하다 보면 아이는 손을 흔들고 대학으로 떠난다. 부모라면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적합한 바른 교육을 위한 주제들로 항상 분주하기 마련이다. 두뇌가 잘 발달하도록 클래식 음악을 틀어놓으세요. 장난감은 가장 교육적인 것으로 선택하세요.여행을 하면서 경기하는 스포츠 팀을 일찍 시작하여 대학에서도 운동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건강한 음식만 먹도록 하세요.악기 하나 정도는 할 수 있게 하세요. 좋은 학교에 가려면 좋은 이웃이 있는 동네에서 살아야 합니다.과외 선생을 고용하여 모든 시험에서 좋은 점수를 얻도록 하세요. 부모로서 할 일을 모두 제대로 하기 위해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종종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하는 혼란 속에서 길을 잃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나 목적을 찾고 있고 또 성공이라는 것을 향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 부모로서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어야 할 것, 우리 아이들이 예수님을 아는 것, 바로 그 목표를 놓치고 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사는 게 바로 사는 것인지 알려주는 것을 잊고 있다. 나는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Wherever You Go, I Want You to Know)’를 썼는데, 그건 우리 아이들에게 최대한 내가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정확하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네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고 또 따르는 것이다.” 어떤 직업을 갖든지, 어떤 운동을 하든지, 성공 또는 실패를 하든지,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가 모르는가의 문제이다. 이게 바로 우리 아이들과 부모들이 들어야 할 메시지이다.어린 자녀들은 계속 들어야 한다우리의 자녀들은 매일 수도 없이 많은 잔소리를 듣는다.방 치워라.양발 주워라.머리 빗어라.안전벨트 매라.숙제해라.삶의 모든 오고가는 일에서 일상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영원한 진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 버리기 쉽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전할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복음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부모인 나의 입술을 통해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이 그들을 만드셨고, 그들을 사랑하시고, 또 예수님은 선하고 친절하며 참되다는 것을 말이다. 책은 우리가 가장 소통하고 싶은 이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대신 말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또한 책은 아이들이 이 중요한 메시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이미지를 따뜻하고 기발한 방식으로 제공함으로 부모를 도울 수 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메시지는 그들의 마음과 정신에 자리 잡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힘을 갖게될 것이다. 십대는 계속 들어야 한다나는 아이들이 십대가 되었을 때에도 ‘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를 썼다. 사람들과의 관계 뿐 아니라 얼굴의 변화 때문에도 십대는 쉽지 않은 시기이다. 아이들이 듣는 세상적인 성공과 칭찬의 중요성이라는 메시지는 십대에 접어 들면서 점점 더 커지고 빈번해진다. 주변에서 받는 압력은 강해진다. 선의를 가진 어른들은 정기적으로 “무엇이 되고 싶니?”, “대학은 어디로 갈건데?” “전공은 뭐로 할 거니” 등을 묻는다. 아이들 주변의 모든 것이 올바른 대학에 진학하고, 올바른 전공을 선택하고, 올바른 배우자를 찾는 것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것만 같다. 그 누구도 당신이 남은 생애 동안 무엇을 하고 싶은지 17 살 때 확실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대화를 하고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거의 매일 이런 질문을 접하는 청소년들이 받는 느낌은 어른의 생각과는 다르다. 십대에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이것이다. “네가 무엇을 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다. 좋은 성적을 위해 노력하고 열심히 스포츠 팀에서 뛰고 또 봉사활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 다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많은 압박 중에서도 우리는 최대한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인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다. 부모는 계속 상기해야 한다‘네가 어디에 가든지 꼭 알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는 어린 자녀와 십대에게는 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이건 부모에게도 하나의 책이다. 자녀를 좋은 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시험 점수를 조작하고 또 불법적으로 수십만 달러를 지불하는 부모가 있는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스스로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은 우리 아이들 뿐만이 아니다. 부모도 자신의 성공이 자녀의 성공에 달려 있다고 느낄 수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 문화적으로 우리는 지금 자녀의 행복과 우리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잘못된 것을 바라고 있다.그렇기에 부모는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교훈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부차적이다. 자녀들에게 예수님에 대해 가르칠 때, 우리는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자녀들에게 가장 중요한 선물은 오직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이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부모가 하는 양육만으로 자녀를 구원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복음이 뿌리를 내리고 번성할 수 있는 좋은 토양을 조성하기 위해 가정을 사용하신다. 그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가르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를 상기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선택, 희망, 자녀를 위한 기도에까지 영향을 미친다.아이들과 함께 하는 날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세월은 흐르기 마련이다. 부모라면 여러 활동과 교육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전달하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전부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Most Important Lesson Parents Teach번역: 무제
가정
자녀양육
복음전달
자녀교육
세상적성공
관계
오직예수
십대교육
우리의 고통까지 사용하시는 하나님
by Vaneetha Rendall Risner
2020-09-19
최근 나는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내 첫 반응은 화를 내는 것이었고 그리고 나서 그녀에게 상처 받았던 모든 다른 경우를 떠올리며 불만에 대한 목록을 정신적으로 분류하기 시작했다. 이 일은 거기서 마무리 되었을지 모르지만, 내가 우연히 A. W. 토저의 글을 읽게 되었을 때, 이 상황에 대해서 다르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처럼 보이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때, 그것은 많은 불안을 해소한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것이 나를 더욱 더 그리스도와 같게 만든다는 것이다. 어떤 것도 예외는 없다. 기쁨과 고통. 평안과 혼란. 충만함과 공허함. 고통과 안락함. 나를 사랑해주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나에게 상처를 주고 무시하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세밀한 것까지 다스리신다하나님께서 모든 상황을 통하여 나를 더욱더 그리스도를 닮은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나를 덜 근심하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겪는 어려움은 결코 하나님의 정죄하심이 아니다(롬 8:1).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나를 위하시는 분이시다(롬 8:32). 그분은 나의 영원한 선을 위하여 모든 상황을 계획해 주신다(롬 8:28). 내 삶의 모든 것들은 내가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도록 한다. 진정 그러하다.갑자기 난 친구의 조언에 대해 불안해하는 것을 중단하고 왜 하나님께서 이런 상황을 내 삶에 허락해 주셨을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았다. 단순한 질문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보다 내 마음에 대해서 더 많이 밝혀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어쩌면 얼버무리고 넘어 갔을지 모르는 내 삶의 죄의 한 꺼풀을 드러내기 위해 내 친구의 행동을 방편으로 사용하셨다. 내 반응 속에 드러난 죄를 발견하게 되었을 때, 나는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할 수 있었다.짜증나고, 좌절하고 혹은 화가 날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마도 내가 외부에 집중하는 것 대신에 마음을 잘 점검할 수 있도록 인도하고 계신다. 나의 불편한 감정은 아마도 나를 주님과 더 깊은 관계로 인도하시려는 주님의 초대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사건보다 내 안에서 더욱 더 중요하고 지속적인 무엇인가를 이루어가고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 길에 마주하는 모든 일들을 다스리시기 때문에 그 어떠한 경험도 결코 버릴 것이 없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 선을 위하여 일하시기 때문에, 내 삶의 경험은 전부 내가 그리스도께로 돌아가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 어려운 상황들은 그리스도께 의존하도록 장려한다. 더 간절하게 기도할 것을 가르쳐 주며, 사역을 위한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성공의 순간들은 내가 하나님께 찬양하며 감사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내 교만함을 발견하게 하여 고백하도록 인도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는 순간 속에서도 낮은 자리를 취하게 하시며 겸손을 배우게 하신다. 삶의 모든 일들이 거룩으로 나아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벼랑 끝의 축복친구의 배려심 없는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것은 배우자의 배신이나 쇠약케 만드는 질병으로 고통받는 것과는 동 떨어진 세상이지만, 하나님의 초대와 동일하다. 난 세 가지 이 모든 시련을 경험했고, 비록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눈물의 시간을 통과해야 했지만, 하나님께서 각각의 상황을 사용하셨다고 간증할 수 있다. 그리고 내가 그분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주님 품에 안기게 될 때에, 나는 더욱 그분의 아들처럼 되어 갔다. 유진 피터슨(Eugen Peterson)의 산상 수훈 강해는 이러한 생각에 대해 아름다운 울림을 준다. 그가 쓴 ‘메시지’(The Message) 성경은 마태복음 5장 3–4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기록하였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벼랑 끝에 서있을 때 복이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에 복이 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정신 나간 말이다. 이것은 세상이 정의하는 “축복”과 정반대의 개념이다. 세상에서 축복을 받는 것은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 그 이상을 소유하는 것이다. 당신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벼랑 끝에 서있는 상황이나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잃었을 때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축복을 받는 삶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 인간적 자원이 남아있지 않는 순간에 우리는 복된 삶을 살게 된다.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 그 어떠한 것도 남아 있지 않은 때.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 상황이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하나님과 그분의 통치하심이 우리 삶 속에서 확장되는 순간이다. 우리의 자아는 더 약화 되며 하나님이 드러나게 된다. 이 땅에서 가장 사랑하던 것을 잃게 된 그 순간,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맞아주심을 더욱 더 사모하게 된다. 그분의 안아주심은 우리가 잃어버릴지도 모르는 그 어떠한 것보다 더 사랑스러우며, 더 소중한 것이며 더 경이로운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라1600년대 프랑스 가톨릭 작가인 마담 귀용(Madame Guyon)은 질병과 무시와 수치로 얼룩진 힘든 삶을 살았다. 그녀가 16세 때, 아버지는 그녀를 속여서 22살이나 나이가 많고 통풍을 앓고 있던 남자에게 시집을 보냈다. 그녀는 시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악의적인 거짓말을 퍼뜨린 후에도 시어머니 집에 살면서 남편의 간병을 맡아 끊임없이 그를 돌보았다.귀용의 기도는 그녀의 깊은 신앙과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오 하나님, 제가 수녀가 되고자 했을 때 당신은 아버지가 나를 속이게 하셨고 그래서 제가 주께로 향하며 주님께 사랑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 오 나의 하나님, 주님은 제 시어머니가 나에 대한 거짓을 퍼뜨리도록 허락하셨기 때문에 제가 겸손한 마음으로 주께 돌아갈 수 있었고 주님께서 저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녀가 겪은 고통의 순간 속에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며 억울함과 분노를 키우는 것 대신에, 그녀는 그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을 바라보기로 작정했다. 그녀는 모든 그녀의 삶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고 모든 그녀의 상황이 하나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기회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기꺼이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였고 모든 것을 그분께 내려놓았다.모든 만물이 그분의 종시편 119편 90–91절은 말씀한다.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백성들의 영원한 기쁨과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선하신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용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마주한 모든 것들은 우리를 더욱 더 거룩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짜증냄은 우리의 죄성을 드러낸다. 우리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육체의 질병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반항하는 자녀들은 우리가 멈추지 않고 기도하도록 훈련시킨다. 우리 삶에서 힘들고 잘못된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한 그분의 초청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온전하게 살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삶의 매 순간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드러내시는지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언제나 함께 하고 계심을 인지하고 모든 상황을 통해 우리를 그분께 더 가까이 인도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우리를 더욱 더 그리스도 닮은 자들로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Uses Everything: Why Our Suffering Is Never Wasted번역: 정진호
영성
영적성장
고통
축복
사랑의손길
유진피터슨
메시지성경
산상수훈
마담귀용
삼위일체 하나님, 가정, 그리고 질서
by 노승수
2020-09-08
성경이 말하는 남녀의 질서는 가부장제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문화가 가부장제 문화여서 성경이 말하는 질서가 가부장제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eisegesis라고 하는데 성경 본문에 자기가 속한 문화적 경험과 세계관을 개입시켜서 하는 해석을 말한다. 성경의 진리는 당연히 석의(exegesis), 곧 본문에서 참된 의미를 이끌어내어야 한다.우리가 가부장제의 사회에 살기 때문에 성경의 질서가 가부장적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과 맞지 않다. 라쿠나(Catherine Mowry LaCugna)는 삼위일체와 가정을 유비적으로 빗대었다. 성부에 대한 성자의 순종이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의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부부관계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와 같다. 존엄성은 동등하지만, 성부는 창시자이고 성자는 응답자이다. 그러므로 성삼위일체 제2위격에 유비되는 아내는 감응, 복종, 순종으로 특징지어 진다”(Catherine Mowry LaCugna,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인의 삶, 대한기독교서회, 385쪽)잘 아는 대로 성부 성자 성령은 동일본질(home ousios)로서 위격에서 구분되시나 동등하시다. 그 동등하신 성자께서 질서를 따라 성부께 순종하신다. 같은 원리가 남녀의 질서 안에 있다고 보아야 한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가정의 질서를 논하면서 아내에게 순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아내의 지위가 남편보다 낮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재적 질서의 반영이기 때문이다.타락으로 인해 더러워진 우리 눈이 이 질서를 사시를 뜨고 볼 뿐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아래에 있지 않다. 남자는 여자보다 위에 있지 않다. 성부와 성자가 동등하시듯이 하나님은 아담의 발이나 머리에서 하와를 취하지 않고 그의 갈비뼈에서 취하셨다고 창세기 본문을 메튜 헨리는 주석했다. 이런 비유적 해석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섬기는 삼위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에 따른 예배가 우리의 일상의 삶이라면 자연스럽게 이런 이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예수님 당시 여자들은 사람의 숫자로 헤아려 지지조차 못했다. 복음서는 그런 시대에도 여인들을 인격체로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장 먼저 증언한 이도 여인들로 기술하고 있다. 이런 방식은 당시 문화로 볼 때, 정당성을 얻기 어려웠을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이런 기록 방식을 취했다는 것은 남녀의 질서를 평등하고 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사실 우리 전통 문화에서도 가부장제가 원래 유교적 문화도 아니었다. 하버드 대학의 한국학 학자인 마크 피터슨(Mark Peterson)은 조선시대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17세기 후반 이전까지도 재산 상속, 족보의 기재, 제사 문제 등에서 남녀가 평등했다는 것을 박사논문으로 밝혔다(Mark Peterson, ‘유교사회의 창출-조선 중기 입양제와 상속제의 변화’, 일조각). 현재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는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반 은총의 관점에서 보면, 조선의 정치 철학이었던 유교의 경전들은 남녀의 질서로부터 사회 질서를 창출했다. 오경 중 하나인 예기(禮記)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다. 남녀 구별이 있은 연후에 아비와 자식이 친하게 되고, 아비와 자식인 친한 연후에 의(義)가 생기고 난 연후에 예가 일어난다. 예가 일어난 연후에 만물이 안정된다. 구별이 없고 의가 없으면 금수의 길이다(男女有別, 然後父子親. 父子親, 然後義生. 義生, 然後禮作. 禮作, 然後萬物安. 無別無義, 禽獸之道也) “예기_교특생(郊特牲) 중에서”남녀의 구별이 있다는 것은 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 역할에서 차이가 난다는 의미다. 역할 상의 차이에 대해 성경은 여성을 돕는 자로 만드셨다고 기록한다. 돕는 자라는 표현에 열등함을 떠올리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자시라”고 할 때, 그 단어가 그대로 쓰였다. 부부는 동등하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으로 대해야 하며 아내는 남편을 인정하고 순종으로 대해야 한다. 가정에서의 이 질서는 교회에서도 적용된다. 원래 리더십이란 지배가 아니라 섬김이다. 주님의 정복은 전쟁이 아니라 십자가였다. 미 해병은 지휘관이 맨 마지막에 식사를 한다. 수고한 해병들에게 열매가 가장 먼저 돌려지는 것이다. 인도받는 자보다 인도하는 자의 책임이 더 크다. 교회에서 여성의 순종이 합당하게 요구되려면 먼저 남성이 바르고 참되게 인도하는 자로서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해병들처럼 교회에서도 수고한 여성들에게 가장 먼저 돌려져야 한다. 이런 삼위일체적인 사랑의 관계가 없다면 단지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디모데전서 2장 11-14절에서 타락의 문제로 인해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라고 말씀하는데 이 역시 삼위하나님의 내적인 질서를 따른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타락에 따른 질서를 말하는 것이지 남녀의 본질적인 지위의 차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선악수 열매에 대한 금령을 직접 들었고 하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전해 들었다. 직접 들은 금령을 잘 설명하지 못한 죄가 아담에게 있다. 그래서 성경은 죄의 유전을 설명할 때, 하와를 대표자로 하지 않고 아담을 대표자라고 하며 대표 원리를 따라 새로운 우리의 대표이신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말씀하신다(고전 14:45). 디모데전서는 이 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질서는 현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위계의 구조가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상호 이해와 돌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는바 하나님께서 상호 동등의 원리 안에서 사랑과 순종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면 당연히 그 영광을 반영하는 사람 역시 그것을 드러내는 존재여야 한다. 말라기 선지자는 아담 하나만을 지어 그의 갈비뼈로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이렇게 주석했다. “그에게는 영이 충만하였으나 오직 하나를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만드셨느냐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라 그러므로 네 심령을 삼가 지켜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지니라”(말 2:15). 경건한 자손을 얻는다는 말씀은 부부간에 삼위하나님의 관계 안에 반영된 사랑과 순종의 원리가 반영된 자손을 얻는다는 의미다. 삼위하나님의 “내재적 자기-관계됨”(internal self-relatedness)은 신자의 신앙의 양식(mode)이며 생활의 방식이다.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타인으로서 아내와 남편에 대한 질서의식이 교회 안에 있어야 참된 교회다.
가정
가족
부부관계
삼위일체
창조질서
가부장적
유교사회
예기
선악수
멘토링이 필요한 세 가지 이유
by Melissa Kruger
2020-09-06
“나의 멘토가 되어주시겠어요?” 이 말을 들은 당신은 아마도 방안을 둘러보며 이 젊은 여성이 도대체 누구한테 하는 말이지 하고 의문을 가졌을 지도 모르겠다. 절대로 나한테 이런 말을 할 리는 없잖아 라고 생각하면서. 아니, 이 여성은 나보고 정확하게 뭘 요구하는 거야? 나는 아는 것도 별로 없는데, 무엇보다 이 여성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데 말이다. 내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생각에 빠져 사는 우리들 대부분은 지금 나야말로 멘토링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기 쉽다. 이론적으로만 생각하면 나도 교회와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기독교 여성을 만들기 위해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 건 사실이다. 주변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양육되어 하나님 왕국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 자신이 멘토가 되어 그 역할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겁부터 나는 게 현실이다. 올해 봄 성경 공부를 하던 한 사람이 내게 자신의 멘토가 되어달라고 요청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멘토가 되기에 내가 얼마나 부적합한가라는 것이었다. 지난 2년 간 멘토링에 대한 책을 쓴다고 세월을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내 머리에 든 첫 번째 생각은 이것이었다. “이 여성은 이미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있어, 내가 줄 게 거의 없어. 그런데 왜 나한테 멘토가 되어달라는 거지?”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 외에 사람들에게 흔히 떠오르는 또 하나 걱정거리는 멘토링 관계에서 무엇을 해야 할 지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다는 것이다. 멘토링을 받아본 여성이 거의 없기에 멘토링이라는 관계를 가지면서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다. 물론 모든 멘토링 관계가 다 다르고 또 무엇보다 타인에게 시간을 투자한다는 그 자체로도 유익한 점은 많다. 여기 언젠가 나를 멘토링 해준 한 나이 많은 여성으로부터 배운 몇 가지 지혜가 있다. 1. 멘토링은 당신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멘토링의 성공여부가 당신에게 달린 건 아니다어렸을 때 어느 날 오후가 기억난다. 아버지는 잡초를 뽑는 등 앞마당을 가꾸느라 바빴고 나는 아버지 가까이에서 놀고 있었다.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춘 아버지가 차고로 가서는 기구 하나를 들고 나오더니 내가 그때까지 본 적이 없는 어떤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앞마당에는 얼마 전 불어닥친 폭풍우 때문에 휘어진 어리고 가는 나무가 하나 있었다. 아버지는 밧줄로 그 휘어버린 어린 나무를 훨씬 더 크고 단단한, 그리고 똑바로 뻗은 오래 된 나무에 묶었다. 왜 나무 두 개를 묶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렇게 하면 큰 나무가 지지대가 되어 어린 나무가 더 이상 휘지 않고 똑바로 자라도록 만든다고 했다. 큰 나무는 오랜 세월 바람과 폭풍우를 견딘 나무였다. 그런 나무 곁에 있는 것만으로 작고 어린 나무는 이제 걱정할 게 없는 것이다. 제자도를 생각할 때마다 그 때 생각이 난다. 핵심만을 말하자면, 영적 멘토링은 아직 신앙이 어린 사람을 당분간 보다 더 성숙한 사람에게 묶어 그 사람이 믿음에서 보다 더 자라게 함으로 사역에 필요한 준비를 더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나로 하여금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두려움을 가라앉혀 주었고, 또 나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다. 큰 나무가 어린 나무를 자라게 하는 건 아니다. 그건 태양과 물의 몫이니까. 마찬가지로 멘토가 멘토링 하는 사람의 영적 성장을 책임지는 게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니까. 멘토는 단지 하나님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게 하실 때에 필요한 힘을 공급하면서 어린 사람 곁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항상 기억해야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모든 질문에 해답을 다 갖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냥 바른 말만 하면 된다. 멘토링은 당신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나 멘토링의 성공 여부가 당신에게 달린 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영적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 2. 명확한 기대 수준을 정하는 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세상에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지 않은 관계란 없지만 멘토링 관계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몇 달간 한 젊은 여성을 만나고 나서 나는 우리가 멘토링과 관련해서 완전히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보기에 나는 그녀가 상상하던 멘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우리 만남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쏟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바란 건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친구로서 재미있게 노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요구하는 건 성경 공부 커리큘럼에 따라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고, 과제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녀 때문에 나는 나대로 절망을 느꼈다. 우리는 점점 더 정기적인 미팅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관계는 “언제 시간 되면 한 번 만나요”라는 식으로 이상하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나는 그 때 많은 것을 배웠다. 그녀와의 멘토링 이후, 나는 몇 가지 중요한 부분에서 방법을 바꿨다. 그 중 첫 번째는 바로 시작 시점에서부터 무엇을 달성할지에 대한 목표를 정확하게 규명하는 것이었다. 멘토링 관계의 목표는 언제나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성경을 함께 읽으면서, 함께 기도를 하면서 또는 책을 함께 읽으면서도 달성할 수 있다(멘토링 커리큘럼이 필요하다면, 곧 나올 나의 새 책 “함께 성장하기(Growing Together)”를 참고하라). 무엇을 하기로 결정하든지 간에, 함께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낼 지에 대해서 처음부터 명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하나의 중요한 디테일은 만나는 횟수와 함께 있을 때 보낼 시간의 길이를 정확하게 정하는 것이다. 특정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장소를 정하라. 한 달에 한 번, 한 달에 두 번 또는 일주일에 한 번? 매달 첫 번째 화요일 아침 시간에 만나는 것으로 또는 격주 목요일 저녁에 공원에서 만나는 것으로? 언제가 서로에게 가장 좋은지 결정하고 그 시간에 충실하라. 또 하나 중요한 건 나중에 다시 재검토하기 전까지 한 번 만났을 때 보내는 시간의 길이를 정하는 것이다. 6개월 또는 일 년을 일련의 과정을 마치는 기간으로 정했다고 할 때, 한 번 만났을 때 보내는 시간을 어느 정도로 해야 서로가 끝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명확하게 정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이 함께 보내는 시간에 대한 건강한 기대 수준을 유지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3. 멘토링을 하는 데에 더 나은 때라는 건 없다너무 바빠서 멘토링 할 시간이 없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완벽하게 딱 좋은 시간은 결코 생기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나름 바쁘기 마련이다. 시간이 날 때를 기다리지 말고 누군가를 당신의 삶 속으로 초대하는 것을 하나의 자연스런 삶의 일부로 여기라.주변을 돌아보고 당신의 하루 일과를 점검해보라. 혹시 주변에 함께 있으면 즐거운, 당신보다 나이 어린 여성이 있지는 않은가? 매주 일요일 저녁 식사에 초대하거나 토요일 아침에 함께 산책을 하는 건 어떨까? 교회에서 함께 유아부를 봉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이미 당신이 하고 있는 무언가에 그 사람도 참여하도록 초대하는 건 어떨까? 그녀를 당신의 삶에 초대함으로 그녀는 배우게 될 것이다. 당신으로부터 친절함을 느낄수록 그녀는 맘 속에서 친절함을 키워가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당신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애정도 키울 것이다. 말씀을 삶에서 어떻게 적용하는지를 배워감에 따라서 말씀에 대한 그녀의 이해도 자랄 것이다. 당신과 함께 기도하면서 그녀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도 배우게 될 것이다.당신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이 주님과 함께 걷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다른 누군가와 나눌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그 지혜가 누군가가 필요로 하는 바로 그 지혜이다. 다른 여인과 함께 기도하라. 성경 구절을 함께 외우고 또 함께 읽으라.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주라. 그리고 신실하게 그녀가 예수님께로 향하도록 하라. 모든 노력은 다 가치가 있을 것이고 멘토링을 통한 축복은 당신 두 사람 모두에게 다 쏟아질 것이다. 당신들은 함께 배움으로, 함께 자라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You Can Say ‘Yes’ to Mentorin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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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by John Perritt
2020-09-01
나는 잠을 잘 못 이룬다. 머리가 베개에 닿으면, 마치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처럼 내 모든 불안을 불러내 “자, 와서 먹어라” 하는 것 같다. 마감일, 약속, 관계의 어려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 가정, 그리고 교회의 책임, 모두가 1순위가 되기 위해 밀고 밀치고 있다. 나는 데이비드 머레이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몇몇 가지는 수면처럼 신학적이다. 내게 잠자는 패턴을 보여주면, 나는 당신에게 당신의 신학을 보여주겠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잠결에 설교를 하기 때문이다.”많은 수면 전문가들은 잠자리에 들고 한 시간 이내 잠이 오지 않으면 침대에서 나오라고 말한다. 여러 날 밤마다 나는 그렇게 해왔고 결과는 매번 엇갈렸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몰래 침대로 돌아가려고 할 때면 한 번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다. 아내를 깨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내게는 무릎에서 나는 소리를 조용히 시킬 능력이 없다. 조용한 밤을 깨우는 건 나도 미처 생각지 못한 갈라지는 큰 소리이다. 그리고 이 소리는 종종 내 아내에게 남편이 침대로 되돌아왔다고 알린다.나의 모든 치밀한 계획과 닌자 같은 은밀한 솜씨가 내 몸 때문에 좌절된다는 것이 종종 나를 화나게 했다. 그러나 내 무릎이 갈라지는 소리는 수면방해보다 더 큰 문제를 보여준다. 그게 무엇을 말하는지 아는가? “존, 너는 죽어가고 있어.” 필연적인 죽음의 무덤우리는 죽음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당연하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인간은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를 위해 창조되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부자연스러운 일이고 에덴동산에서 창조주에게 저지른 인류의 반역의 결과이다. 부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종말을 생각하는 것은 불편한 진실이다.성경은 바로 지금 우리가 영원한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죽음은 끊임없이 이 사실과 충돌한다. 우리는 육체이기도 하다. 관절이 쑤시든지, 수면 부족이든지, 만성적 통증이든지,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가능한 현실이라는 진리이든지 간에, 이것들은 우리 영혼에 달갑지 않은 현실이다. 지구상에 모든 존재는 걸어 다니는 역설이다. 우리는 육체적 죽음을 경험하게 될 영원한 존재이다.우리 몸은 닳고 있을 것이다. 당신이 이 글을 읽는 도중에도 늙어가고 있다. 여러분 중 몇몇이 쓰고 있는 안경으로 증명할 수 있는데, 시력은 유통기한이 있다. 이 글의 문장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뇌가 피곤하고 지쳤다는 것을 말한다. 어쩌면 일종의 만성적 통증일지 모른다. 당신이 소중히 생각하는 가족이나 친구들일 수도 있다. 그들의 끊임없는 필요는 우리가 다른 곳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시켜 준다.더 냉정하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묻히는 것을 이미 목격했거나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이 땅에 묻히는 것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사실이다. 당신이 죽음과 병에 대해 읽을 때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무언가가 잘못된다는 증거이다. “원래 이런 식이 아니었어! 이것은 내가 창조된 삶과 모순되는 것이야.”텅 빈 무덤질병과 죽음이 당신이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다고 생각할 때 당신이 느끼는 두려운 감각과 감정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당신은 육체와 분리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창조주와 함께 육체와 영혼의 대연합을 갈망한다. 요컨대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원하지만, 사후에 당신의 영혼이 부활한 육체와 재회할 때까지 어떤 불완전성이 있을 것이다.하나님의 자녀들은 창조주 앞에서 몸과 영혼, 완벽한 존재를 누리기를 갈망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완벽한 존재를 가지셨고 인간의 본성에 그분의 신성한 본성을 더해주셔서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다.그분은 신성에 인성을 더하셨다. 그분은 병과 슬픔의 존재로 들어오셨다. 천사들의 기쁨을 주는 소리를, 부정과 거짓, 가십, 기만 등의 비명소리와 맞바꾸셨다. 불화와 분열을 위해 평화와 연합을 제쳐두셨다. 채찍과 가시, 창, 못 박힘의 고통을 느끼셨다. 숨이 끊어지고 심장 박동이 멎고 눈이 죽음으로 감기는 것을 경험하셨다.창조주는 스스로 창조세계에 내려오셨다. 왕은 종이 되셨고 무죄한 사람이 형을 선고받았다. 죄 없으신 분이 죄인으로써 우리의 자리에서 벌을 받으셨다.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으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두려움과 고통, 어려움, 질병, 슬픔 그리고 심지어 당신의 죽음까지도 떠맡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안고 무덤으로 가셔서 그곳에 남겨두고 몸과 영혼이 영광스럽게 되어 걸어 나오셨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모든 백성들을, 영혼과 몸 둘 다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 원제: Fear of Disease and Disability번역: 송유희
죽음
질병
두려움
예수_그리스도
불면증
부활
건강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
by Brett McCracken
2020-08-29
몇 주일 전 우울한 헤드라인 소식과 한숨만 나오게 하는 소셜 미디어에 지친 한 주를 끝내고 나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동네 공원으로 나갔다. 한 살이 된 아들 체트는 나뭇가지를 모으거나 벌레를 잡았고 나는 잔디에 누워서 하늘을 향해 뻗은 캘리포니아 플라타너스 나무를 보고 있었다. 위를 향해 뻗은 나뭇가지는 마치 내 눈에 찬양을 하기 위해 위로 올린 팔처럼 보였다. 이사야서 55장 12절에 나오는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라는 구절과 더불어 이 나무는 실로 창조된 모습 그대로, 창조 질서에 순종하며 기쁨 속에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나무는 끝없이 이어지는 디지털 인생에도 무심하며 오로지 단순하고 조용하게 나무로서 받은 소명인 가지를 뻗고, 그늘을 만들어주며, 산소를 생산하고, 그리고 나무에게 생명을 주는 빛을 향해 위로 또 위로 뻗어가는 소명을 완수하며 묵묵히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다. 나무의 나무됨을 온전히 느끼던 그 순간, 나는 순식간에 평안과 경이로움 그리고 예배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무가 다 이 플라타너스 나무처럼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창조주를 향한 끝없는 찬양을 올리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우리 인간은 사실상 이런 나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더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기쁨에 찬 감사와 예배를 드리는 단순한 생활을 하기에 우리 인간은 너무도 바쁘기만 하다. 아마 당신도 이런 순간, 그러니까 하나님의 창조물과 온전히 하나가 된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방향을 잃어버린 이 세상 속에서 어떤 방향과 목적을 느끼던 순간 말이다. 꼭 나무 아래 누었을 때가 아니더라도, 어쩌면 강, 바닷가 또는 놀라운 산세를 바라보면서 그런 느낌을 가졌던 때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은 우리에게 말을 한다(시 19).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게 하며 또 감사하게 한다(롬 1:19-21). 자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자연은 가상 세계가 가져다주는 혼란 속에서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보여줌으로 온라인 세상을 견디며 생긴 트라우마와 피로를 치료하는 반가운 진통제의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내가 나의 지혜 피라미드에서도 자연을 가장 중요한 위치에 놓은 이유이다. 밖으로 나가서 하나님의 창조물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언제나 웹 서치를 하거나 소셜 미디어에 시간을 보내는 것 보다 삶에 활력을 주고 지혜를 솟구치게 한다. 여기 왜 그런지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자연은 객관적이다사실과 진실은 이제 어려운 시대를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객관성이란 것은 불가능하다”는 좌파에 대한 비판적 이론과 더불어 “전문가는 엘리트주의자!”라는 우파에 대한 회의론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대화는 점점 더 편협해지고 있고, 그 결과 이제 현실은 “사실(facts)”이란 것은 거의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런 세상에서 조차도 객관성에 대해서 주장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면, 그건 바로 자연이다. 몇 년 전 LA 타임즈에서 나는 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탈 진리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자연은 그렇지 않다.” 자연은 인간의 정치에 신경쓰지 않는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을 무시하고 날씨를 정치적으로 사용하려고 노력한다고 해서 날씨를 바꿀 수는 없다. 날씨는 비가 오거나 오지 않을 뿐이다. 그게 다이다. 눈이 내리고 또 태양이 떠오른다. 날씨는 민주당원이나 공화당원에게 똑같다. 자연은 차별하지 않는다. 자연은 선입관에 의해서 훼손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중력의 지배를 받는다. 아무리 당신이 스스로를 수퍼맨이라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은 하늘을 날 수 없다. 자기가 원래 물고기인데 인간이라는 잘못된 몸을 입고 태어났다고 느끼는 사람이라고 해도 물 속에 들어가면 몇 분 안에 죽을 뿐이다. 자연은 이래야 하고 또 저래야 한다는 인간이 가진 주관성에 지배받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티모시 트레드웰(Timothy Treadwell, 미국의 곰 애호가이자 환경보호론자)에게 비극이 생긴 이유이다. 그는 알래스카 곰과 함께 가족 같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다는 환상을 품었지만 결국 곰에게 잡아먹혔다. 베르너 헤어초크(Werner Herzog)는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리즐리 맨(Grizzly Man)’을 제작했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이지 인간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게 아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선물인가. 미친 세상에서도 여전히 온전함을 유지하는 자연에는 선천성(givenness)이 있다. 그 선천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자연이 주는 선천성을 무시하고 마치 생물학적 성이 존재하지 않는 양 남자와 여자를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연에 관한 연구라고 정의할 수 있는 과학을 그리스도인들이 더 포용하고 사랑해야 하는 이유이다. 믿음의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점점 더 손상되어만 가는 진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다면, 또 뭔가를 진정으로 제대로 아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면, 그런 사람에게 과학은 적이 아니라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밖으로 나가서 자연을 연구하고 관찰하라. 그렇게 함으로 자연이 가진 객관성이 우리 시대가 가진 형태가 허물어지는 비정상적인 상태에 명확한 경계를 그리도록 만들라. 우리 속에 제대로 된 생각을 불어넣도록 만들라. 자연은 지친 마음과 영혼에 안식을 준다너무도 바쁘고 자극성이 강한 지금 사회에서 자연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은 우리를 느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자연은 우리의 영혼과 폐와 뇌에 좀 더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준다. ‘자연은 고친다: 왜 자연은 우리를 더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만들까(The Nature Fix: Why Nature Makes Us Happier, Healthier, and More Creative)’에서 플로렌스 윌리암스(Florence Williams)는 실제로 도시 생활이 인간의 뇌를 어떻게 바꾸는지를 보여준다. 도시 생활은 정신분열증, 불안감 그리고 정서적 장애의 가능성을 훨씬 더 높인다. 게다가 오늘과 같이 수많은 정보를 처리하고 필터링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의 뇌는 엄청난 과부하에 시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자연 속에 있을 때 뇌가 처리하는 정보량은 훨씬 더 줄어든다. 그 결과 깊은 사고와 명상 또는 묵상과 같이 높은 수준의 일을 처리하는 데에 뇌가 최적화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나온 두 개의 논문에 따르면 테크놀로지에 중독된 아이들을 숲으로 보내서 시간을 보내게 하고 돌아온 후 뇌를 조사했는데, 뇌 속의 코르테솔(cortisol, 부신피질 호르몬의 하나) 분비가 줄어들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늘고 초조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자연이 주는 안정 효과에 대한 경험적 증거는 한국과 일본과 같은 국가로 하여금 과도하게 작동하는 디지털 유령이 지배하는 도시를 탈출해서 걷기와 산소 호흡, 그리고 재조정 등을 할 수 있는 “치유의 숲”까지 지정하도록 만들고 있다. 미국에서도 “숲 요법”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으며 일부 의사들은 “자연 처방전”을 작성해서 환자들이 더 많은 시간을 야외에서 보내도록 처방하고 있다. 왜 이런 방식이 효과가 있을까? 경험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 이유를 알아내려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영적인 현실이 그 답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자연 속에 있을 때 더 평화를 느끼는데, 그건 인간 역시 하나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보다 더 직접적으로 느끼게 될 때(그건 우리가 자연 속에 있을 때인데 고도가 높은 곳에서 거칠게 숨을 쉴 때나 또는 습도 높은 벌판에서 땀을 흘릴 때 등등), 우리는 자연스럽게 창조주에게 더 가까이 가게 되고 그 결과 더 깊은 행복감을 느끼게 된다. 궁극적으로 있어야 할 바른 곳에 우리가 있기 때문이다.자연은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한다내가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가 웬델 베리(Wendell Berry)가 쓴 ‘거친 것들의 평화’인데, 이 시는 정신적으로 초조한 세계에서 자연이 주는 선물을 잘 표현하고 있다.세상에 대한 절망이 커지면그리고 나는 아주 작은 소리에도 자다가 깬다나와 내 아이들의 삶에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무서워서나는 청둥오리가 있고 큰 왜가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물가로 내려가 눕는다나는 야생이 주는 평화 속으로 들어간다거기에는 아무도 슬픔을 미리 예측하면서 고통을 주지 않는다나는 고요한 물이 주는 존재감을 느낀다그리고 나는 내 머리 위에 뜬, 찬란하게 빛날 시간을 기다리는 별들을 느낀다아주 잠깐 나는 세계가 주는 은혜 속에서 쉬면서 자유를 느낀다‘거친 것들이 주는 평화’는 내가 공원에서 플라타너스 나무 가지를 보면서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관점을 변화시키는 하나의 깨달음이었는데, 우리의 삶이 아무리 정신없고 분주하더라도 이 자연은 여전히 원래 갈 길을 변함없이 간다는 것이었다. 새 아침을 맞아 우는 새소리에서부터 석양에 우는 귀뚜라미까지,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서 여름날 습기찬 천둥번개까지, 아기의 첫 울음에서부터 죽어가는 노인의 마지막 숨까지, 자연의 사이클과 리듬은 우리로 하여금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전 3:1). 아이러니하게도 자연은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 거대한 창조라는 설계 속에서 얼마나 초라한지를 깨닫게 함으로 평화를 준다. 절벽 끝에 한번 서보라. 굉음을 내는 폭포 앞에 서보라. 아니면 그냥 별들로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면서 당신이란 존재가, 그리고 그 존재가 갖고 있는 수많은 문제라는 것이 사실상 얼마나 작은지를 생각해보라. 우리의 인간됨이 의미가 없다는 게 아니다. 놀라운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다윗이 시편 8편에서 표현한 것처럼 일종의 예배하는 마음과 경이로움이라는 영감을 불어넣는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3-6)우리의 작음을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연이 하나님의 크심을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크심이야말로 진짜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곳이다. 개미집뿐만 아니라 안데스 산맥을 만드신 분, 플라타너스 나무의 견고한 몸통 뿐 아니라 장미의 섬세한 꽃잎까지 만드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진정한 평화를 맛보게 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rained and Depressed by the Internet? Go Outsid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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