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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가 충돌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by Jon Bloom
2020-01-15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삼하 19:25). 지친 왕은 앞에 앉은 이, 힘들어하는 장애인을 바라보며 엄하게 물었다. 다윗은 지금 막 그의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일을 겪었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고 왕좌를 차지하려다가 실패한 아들 압살롬의 죽음을 깊이 슬퍼하고 있었다(삼하 15-18). 쿠데타는 실패했고 반란군은 죽거나 흩어졌다.다윗에게 충성을 지킨 많은 사람에게는 축하의 시간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야 하는 힘든 시간이었다. 그의 슬픔은 탕자 아들의 비극적인 종말을 보는 것보다 더 깊었다. 자신이 아들의 죽음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인생의 복잡함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앞에서 펼쳐졌던 하나님의 말씀은 아직도 그의 귀에 생생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냐?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서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여호와께서 또 이와 같이 이르시기를 보라 내가 너와 네 집에 재앙을 일으키고 내가 네 눈앞에서 네 아내를 빼앗아 네 이웃들에게 주리니 그 사람들이 네 아내들과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삼하 2:9-12).그는 참기 힘들었다.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 바로 그 이웃이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다윗은 이 말을 소리내서 계속 할 수 없었다. 백성의 사기를 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삼하 19:5-7). 그러나 그는 영혼 깊은 곳에서 계속 같은 말을 외치고 있었다.이 비극은 그의 아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로 인해 동요된 모든 사람 - 그중 일부는 지금 새로 만든 무덤에 누워 울부짖는 어머니와 아내를 보고 있다 - 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악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과 불가피하게 엮여 있다. 그랬기에 다윗은 압살롬의 군대가 한창 세를 얻어갈 때 그를 버렸을 뿐 아니라 그를 저주한 사람에게까지 자비로울 수 있었다. 다윗은 격렬하고도 복잡한 시대의 흐름 속에 빠졌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초래한 데에는 어느 정도 자신의 책임이 있음도 알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상황의 복잡함은 이 위대하고 슬픈 왕으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조차 혼란스러운 일로 만들었다. 그는 지금 누구를 믿을 수 있는가? 그에게 합류하지 않은 사람들의 불충한 말은 단순히 두려움과 혼란스러운 전쟁의 소동 속에서 나온 바람과 같은 것에 불과한가? 다윗이 복귀했을 때 전과는 전혀 다른 찬양을 하는 이들의 모습이 진짜 모습일까 아니면 단지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연기일까?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라 하였도다”(시 116:11). 다윗은 그 “모든 사람” 속에 자신도 포함했다.그리고 지금 여기 므비보셋이 있다. 그의 배신은 특히 아팠다.므비보셋은 요나단의 아들이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으로 인해 그는 어린 시절에 장애인이 되었다(삼하 4:4). 다윗은 가장 친한 친구(삼상 20:42)에 대한 깊은 사랑과 언약을 지키기 위해 므비보셋을 찾았고, 그에게 할아버지 사울의 땅과 더불어 사울의 종 시바를 붙여주었다. 시바에게는 15명의 아들과 20명의 하인이 있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왕과 함께 식사할 수 있는 명예로운 자리를 주었고,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대했다(삼하 9:7-8,11).그러나 반란군이 들어와서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망쳤을 때 그와 함께 한 사람은 정작 므비보셋이 아니라 시바였다. 그리고 시바의 보고에 따르면, 므비보셋은 그의 왕좌를 향해 창을 겨눈 또 다른 위험한 “아들”처럼 보이기도 한다(삼하 16:3-4). 다윗은 그가 므비보셋에게 주었던 모든 재산을 시바에게 줌으로 시바의 충성을 보상했다. 모호함이 떠오른다그런데 지금 승리한 다윗이 예루살렘에 다시 입성할 때 므비보셋이 그를 맞이하는 현장에 있다. 그는 초라하고 냄새가 날 정도로 비참한 상태다. 한 보좌관은 다윗에게 보고하기를 므비보셋은 다윗의 망명 내내 면도와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고 했다(삼하 19:24). 그리고 므비보셋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것은 시바의 보고 내용에 심각한 의구심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상황이 모호해졌다.“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지친 장애인이 대답했다.“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삼하 19:26-28).므비보셋의 진실함은 설득력이 있었다. 그는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건 바로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를 속였던 방법이기도 하다(수 9:3-6). 게다가 시바는 다윗이 가장 위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자신의 생명을 걸고 그의 곁을 지킴으로 충성을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윗 자신도 후새에게 생명을 걸고 압살롬에게 충성하는 척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던가(삼하 15:32-37)? 시바가 다윗 곁에 있었던 건 충성이라기 보다는 오만함으로 가득한 왕자가 아닌 경험 많은 왕에게 베팅을 한 것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아닐까? 여기서 누가 진실을 이야기하는 걸까?그가 할 수 있었던 최선그래서 다윗은 새로운 판결을 내렸다. 사울의 이전 재산을 므비보셋과 시바에게 반반으로 나눠주었다(삼하 19:29). 그들 중 하나는 분명히 거짓말을 했기 때문에 마땅히 받아야 할 것보다 적게 받은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더 많이 받는 셈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두 사람의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게다가 상황의 시급함을 고려할 때 거짓말에 대한 조사가 우선순위가 될 수도 없었다. 그에게는 다시 하나로 모아야 할 왕국과 가족, 그리고 민심이 우선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적을 만들 시간이 아니었다.두 사람은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히 그에게 충성을 나타냈으며, 다윗은 그들 각자로부터 가장 좋은 쪽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진정한 정의 구현은 하나님께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때로는 다윗처럼 하는 게 복잡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일 때가 있다. 가족, 우정, 목회 및 직장 상황에서 복잡한 일이 발생했을 때, 증거가 충분하지 않거나 상황이 너무 모호하거나 또는 시간이 너무 제한되어 있어 우리가 원하는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기 힘들 때가 있다. 모든 상황을 고려한 최선의 결정은 관련된 당사자의 선의를 믿고 최대한 관대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완전한 공의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다 아신다. 그리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다”(신 32:4). 그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공의를 실행하신다. 인간 또는 사탄이 의도한 악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을 통해 완벽한 공의로 바꿈으로 선을 가져다 주신다(창50:20; 롬 8:28). 그리고 우리의 불완전한 판단과 이 시대의 불의를 사용하여 그분의 선을 성취시킬 것이다. 비록 한정된 능력이지만 불완전한 판단을 최대한 활용하여 믿음을 바탕으로 선한 결정을 하도록 우리는 부름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한정된 능력” 뒤에 숨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비밀리에 악과 타협하는 것이 “정의를 행하는 것”(미 6:8)보다 더 쉽기 때문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ometimes We Must Settle for Peace번역: 무제
생활
관계
충돌
배신
므비보셋
진실함
나단
다윗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
by Scott Hubbard
2020-01-13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이미 거룩에 대한 열망을 심어 놓으셨다. 그 거룩은 당신을 가두는 좁은 방처럼 불편하게 느껴지기보다 즐거움이 깃든 정원처럼, 하늘의 메아리처럼, 다시 찾은 에덴의 눈부신 경관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따라서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데서 만족하지 않고(물론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와 같이 의롭게 되기를 진정으로 사모한다. 그분이 거룩하시듯 당신도 거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그렇다면 거룩은 어떻게 이루어질까? 구체적으로 말해, 어떻게 하면 늘 더듬거리며 샛길로 빠지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만 집중하는 영적 대화로 바뀔 수 있을까? 또 어떻게 하면 잔걱정에 사로잡혀 사는 우리가 인생에 산적한 고민을 그분께 다 맡길 수 있을까? 더 나아가 어떻게 하면 헛된 자랑을 추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가난한 심령으로 변화되어, 의에 대한 무관심이 뜨거운 갈망으로, 인색한 태도가 관대한 손길로, 쉼 없는 고달픈 일상이 평온한 생활로 바뀔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하면 인생의 궁극적 선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으며, 그분을 알 때만 생명을 얻고 가장 고상한 유익을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을까?하나님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서 그러한 거룩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대하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치곤 한다. 바로 거룩이란, 너무나도 자주 사소한 일들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를 주목하라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거룩을 어떻게 추구하라고 권하는지 한번 살펴보자. 그는 전반부에 걸쳐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를 파노라마처럼 펼쳐 놓는다. 즉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고, 용서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생을 보증하셨다고 찬양한다(엡 1:3-14). 또한 우리의 영혼을 살리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으며(엡 2:1-10)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선포한다(엡 3:14-19).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사랑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이어지는 본문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 걸쳐 바울이 하는 작업은, 그 복음을 일상의 소소한 생활 속에 적용해 나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나열한다. 서로에게 진실하라(엡 4:15). 빨리 화해하라(엡 4:26). 정직하게 일하라(엡 4:28). 선하게 말하라(엡 4:29).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품으라(엡 4:32).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 종과 상전으로서 그리스도를 의식하며 서로를 대하라(엡 5:22-6:9).이 각각의 교훈은 그 자체로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거기서 강조되는 순종의 가르침은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종의 대부분은 일상에서 쉽게 잊히는 순간, 어딘가 방치된 영역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스타프 빙그렌(Gustaf Wingren)은 루터의 직업소명에 관해 설명하며 “성화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속에 숨어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너무나도 평범해서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놓칠 수밖에 없는 일상의 영역, 바로 거기서 거룩이 이루어진다.눈을 땅 끝에 두지 마라그래서인지 거룩을 추구하면서 미련한 자의 오류에 빠지는 이들이 많다. “지혜는 명철한 자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 끝에 두느니라”(잠 17:24). 저 멀리 있는 놀라운 광경만 바라보다가 정작 발끝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마찬가지로 먼 미래에 실행하려고 거창한 순종을 계획하는 데만 마음을 둔 나머지 당장 코앞에 있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순종은 실천하지 못할 수 있다.날을 잡아서 아내와 아이들을 섬기는 데 하루 종일 헌신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지금 당장 가사를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할 수 있다. 이다음에 미전도 지역에 가서 교회를 개척하게 해 달라고 뜨겁게 기도하는 선교사가 현재 자신에게 주어진 소그룹은 소홀하게 돌볼 수 있다. 언젠가 비영리 단체를 개설하여 사회에 공헌하기를 바라는 청년이 맡겨진 계산대 아르바이트는 대충 때울 수 있다. 앞으로 닥칠 어떠한 시험에도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대학생이 조금 전 룸메이트가 치우지 않고 나간 그릇 더미를 보며 투덜거릴 수 있다.이 모든 일상의 영역에서 때가 되면 순종하리라는 마음은 오늘의 순종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곤 한다. 앞선 잠언에서 솔로몬이 밝혔듯이, 명철한 자는 자기 앞에 있는 지혜를 본다. 그는 오늘의 의무, 오늘의 과제, 오늘의 대화, 오늘의 은혜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그 모든 게 사소해 보일지라도 말이다.마찬가지로 지혜로운 크리스천은 그때그때 쌓이는 낱장의 벽돌로 웅장한 예배당이 지어지듯 거룩도 그렇게 이루어짐을 알고 있다.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는 일은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과정임을 그는 잘 알고 있다.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순종하라그렇기에 거룩을 추구하는 일은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더 쉽기도 하고 더 어렵기도 하다. 더 쉬운 이유는, 우리의 성장이 대부분 한 번에 한 단계씩 은혜 안에서 꾸준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이유는, 성화의 과제가 일상의 전 영역 속에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범한 일과, 즉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그 모든 일을 통해 거룩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 3:17). 우리의 영적 성숙은 바로 이 “무엇을 하든지”에 달려 있다. 남들에게 보이는 곳에서든 보이지 않는 곳에서든, 특별한 일을 할 때든 평범한 일을 할 때든, 인생의 중대한 순간에든 일상적인 순간에든,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따라서 하루 열두 번도 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하나님이 10년 후에는 어떤 사명을 맡기실 것인가?’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그래서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잘못된 생각에 빠지려 할 때마다 그 생각을 바로 멈추는가?’,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시간에 쉬지 않고 기도하려고 힘쓰는가?’, ‘한눈팔지 않고 오늘도 정진하고 있는가?’, ‘상대를 향해 따뜻한 말을 하고 있는가?’이처럼 일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는 생각은 우리에게 부담이 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격려가 되기도 한다. 일단 부담이 되는 이유는, 주님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우리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 자신만의 시간이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격려가 되는 이유는, 주님이 우리가 애쓰며 순종하고자 하는 모든 노력을 매순간 지켜보시며 그 일로 기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으로 행하는 작은 일, 말하자면 냉수 한 잔을 떠 주는 일조차 잊지 않으신다(마 10:42). 반드시 그 일을 기억하시며 그에 맞는 상급을 준비하신다.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게 된다(엡 6:8).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의 순종에 어떤 결함이 있든, 언제나 부족할 수밖에 없는 그 순종을 자신의 은혜로 덮으신다.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시작하라그렇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거룩을 실천해야 할까? 당연히 다른 곳이 아닌,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C. S. 루이스는 ‘개인기도’(Letters to Malcolm)에서 다음과 같은 기도의 원리를 제시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에서 기도를 시작하라.” 이를테면 매번 기도할 때마다 “창조와 구속과 ‘인생의 모든 복락’에 관해 생각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모조리 고백하는 식으로” 기도를 시작하지 말고,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작은 대상들에 주목함으로써 기도의 말문을 열라고 권했다. 창가 너머로 보이는 나무 한 그루라든가 이제 막 끝마친 아침식사 또는 옆방에서 자고 있는 아이를 생각하며 감사의 고백으로 기도를 시작하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루이스가 지적했듯이, “가장 사소한 일로 하나님께 경배하는 습관을 들이지 못한다면, 가장 고상한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결코 예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이 원리는 우리의 순종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세를 배운 자만이 큰 일에도 충성할 수 있다. 이 사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 모두에게 적용된다. 작은 일을 통해 훈련되지 않고는 큰 일을 감당할 수 없다.우리가 세운 계획대로 일정이 진행되지 않고 엉망이 되었을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를 익혀야만 자녀들의 구원과 같은 큰 일에 대해서도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수입이 부족할 때도 자신의 소유를 내어주며 섬길 줄 알아야만 수입이 넉넉해졌을 때도 똑같은 마음으로 섬길 수 있다. 오늘 만나는 이웃과 부끄러움 없이 예수님을 나눌 수 있어야만 언젠가 자신을 핍박하는 사람 앞에 섰을 때도 그분의 이름을 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상의 작은 순종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오늘 하루가 우리에게 대단한 순종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또 수십 년간 형성된 우리의 성품도 하루만에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한 변화는 긴 세월이 흐르며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 하루는 오히려 그보다 작아 보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친구를 용서하기, 부끄러운 생각을 멈추기, 아이에게 관심 갖기, 진심어린 말로 격려하기,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기 등. 그렇다면 이와 같은 일상의 순종을 과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Offensively Ordinary Steps to Godliness번역: 장성우
영성
묵상과기도
거룩
구스타프
루이스
순종
평범
일상
개인기도
당신의 배우자가 힘들어 한다면?
by Glen Scrivener
2020-01-03
한번은 아내가 자신이 겪은 정신적 문제를 용감하고 또 아름답게 글로 쓴 적이 있다. 나는 종종 남편으로서 그런 아내를 어떻게 돕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나는 여기서 내 아내가 인정한 열 가지 도움이 되는 생각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게 꼭 당신의 상황에 적용되지는 않을 수 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나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1.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은 소중하다예수님은 아버지 앞에서 당신을 그의 마음에 두셨다. 당신의 감정상태(혹은 감정의 부족)가 어떠하든지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관계이다. 불안하거나 위험에 빠져서 감정적으로 어둠 속에 있을 때는 누구라도 자신의 감정을 믿을 수 없다. 당신은 심지어 자신을 믿고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당신의 지위를 확실하게 지킨다는 사실만 믿으면 된다. 당신이 감정적으로 아무리 요동을 치고 흔들려도 예수님은 언제나 당신을 지키고 있다. 영원히 깨어서 지키고 있다.2. 의지의 속박은 진짜이다인간은 결과를 계산해서 합리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기계가 아니라는 사실을 당신은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모든 이를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끔찍한 주인을 마치 연인과 같이 생각하여 내 자신을 맡기는 어리석은 존재와도 같다. 비합리적인 결정을 하는 존재이다. 중독의 이야기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은 타의에 의하여 중독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원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중독의 틀에 갇혀 있다. 정말로 갇혀 버렸다. 당신을 괴롭히기 위해서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한 게 아니다. 선택했지만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거기서 빠져나올 수도 없다. 당신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들을 미워할 뿐이다. 의지의 속박을 믿지 않는 한 당신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3. 십자가 신학은 핵심이다마틴 루터(‘의지의 속박’에 대해 가르쳤고 깊은 우울증으로 고생했다)는 하나님과 삶에 대해 생각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한 가지 방법은 영광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 계시고 우리는 스스로 힘을 통해 거기까지 올라간다. “터널 끝에 빛이 있어. 열심히 파고 나가.” 다른 하나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힘이 없기 때문에 여기로 내려오신다. “어두워. 그러나 그리스도가 여기 함께 있어.” 이것이 십자가의 신학이며, 고통을 겪는 사람들, 우리 모두에게는 없어서는 안 되는 신학이다. 4. ‘괜찮았던 그때’를 목표로 삼지 마라당신은 알고 있다. 또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도 알고 있다. 그들이 과거 그 오래전의 자아가 더 이상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가장 큰 유혹은 “그때 그 모습”을 되찾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또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현명하지 않다. 구원 역사는 작동하는 방식이 다 다른 것 같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가 주던 음식과 머리 위를 덮어주던 지붕을 갈망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옛 장소로 다시 보내지 않았고 사막을 통해 새로운 곳으로 데려갔다. 진정한 고향은 앞에 있다. 아직 보지 못한 넓은 땅이다. 이것이 우리를 다루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우리는 정원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있다. 나는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실수라고 생각한다. “괜찮았던 그때 그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어쩌면 애초에 당신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혼란에 빠지게 한 원인인지도 모른다. 5. 무력감은 끔찍하나 좋은 것이다아마도 이런 상황에서 간병인이 받는 가장 압도적인 느낌은 무력감일 것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구덩이에 갇히거나 이른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을 보는 것은 고통스럽다. 이런 무력감을 피할 수는 없지만 좋은 것으로 바꿀 수는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결코 육체의 노력만으로는 가장 깊은 수준에서 사람을 도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만이, 오로지 그의 복음만이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무력감을 기도로 바꾸라. 남편으로서 나는 “주권”(headship)이 실제로 어떤 일을 수반하는지 100% 확신하지 못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의 군대 “머리”에서 천둥 소리를 내신다고 확신한다(요나 2:11). 나는 내 신부를 위해 전투를 해야 한다. 따라서 바른 형태의 무력감은 좋은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 무력감에 도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무력감으로 인하여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다음 포인트이다. 6. 당신은 변해야 한다중독은 전염성이 있다. 중독자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부부로서 건강에 해로운 영향이 있기 마련이며 당신의 삶에서 해결해야 할 패턴과 죄가 있다. 당신이 죄인이라면 -당연히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상황을 악화시킬 수도 있다.이것은 정죄하려는 게 아니다. 도리어 큰 희망을 준다. 무력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도하고 자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회개하기 시작하면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전투는 함께 싸우는 전투이다.이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7. 부부의 하나 됨은 문제보다 더 깊고 심오하다결코 “당신 vs. 당신의 문제 있는 배우자”가 아니다. 이건 언제나 “당신과 배우자 vs. 이 문제”이다. 절대로 사탄이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문제로 보도록 허락하지 말라.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6번째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다. 계속 회개하라. 그것도 배우자가 보는 앞에서 하라. 당신이 당신 문제에 관해 투명하기만 하다면, 이런 기도를 통해 배우자는 당신과 하나 됨을 더 잘 느끼고 힘을 얻게 된다. 8. 굳건하고 융통성 있는 사랑이 핵심이다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파괴를 하는 경우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두 가지 자연스러운 반응은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욕망에 따라 움직이며 자기 파괴를 더 가속화 하거나 아니면 분노에 넘쳐서 브레이크를 밟는다. 나는 둘 다 차례로 한다. 나는 한동안 멋지게 인내한다. 결국, 사랑은 “예스”라고 말하는 거니까. 그리고 나는 우리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 화를 낸다. 그래서 나는 “단 맛 나는 좋은 사람”과 “쓴 맛 나는 시무룩함” 사이에 숨어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정답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굳건하고 융통성 있는 사랑으로 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8장에 나오는 주님의 방식이다. 사라가 아이를 준다는 약속을 듣고 웃었다. 하나님이 묻는다. “왜 웃니?” 사라가 대답한다. “안 웃었어요.” 하나님이 대답한다. “아니, 너 웃었어.” 이게 바로 이 장면의 마지막 단어이다.이건 놀랍다. 주님은 사라 때문에 위협을 느끼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사라를 위협하지도 않는다. 주님은 그녀의 의지에 반해서도 또는 그 위에 군림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님은 진실을 위해서는 확고하다. 만약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이 중독으로 고통받는다면, 당신은 이런 굳건하고 탄력 있는 사랑을 보여줄 수많은 기회를 가질 것이다. 그중에서 990번을 망칠 수도 있겠지만 때로는 우리 주님의 성품을 드러낼 때도 있을 것이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이 결코 멸망하도록 놓아두지 않는 그런 사랑 말이다. 9. 함께 춤추며 빛으로 나아가라당신은 이런 영적인 융통성을 결코 혼자 힘으로 가질 수 없다. 춤을 비유로 삼아 이야기하자면,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주변에서 웅크리고 앉아서 어둠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지 모른다. 단지 그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고 싶은 유혹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당신은 당신 부부에게 너무 중요한 공동체에서 도태될 수 있다.형제자매들의 도움을 받아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당신의 부르심은 파트너를 빛으로 이끌어 승리하고 춤추게 하는 것이다. 이 계획을 누구나 다 좋아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동체에 다시 들어가는 “십자가”가 고립의 “지옥”보다는 훨씬 낫다. 어느 시점에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어둠에서 밖으로 나오도록 도와야 한다. 이런 관점을 가지고, 기도와 교회 지체의 실질적인 도움을 통해 고립의 어둠에서 공동체의 빛으로 함께 움직여야 한다. 10. 이것은 진짜 삶에서 이탈한 것이 아닌 진짜 삶이다이런 고통은 당신이 머물고 싶은 궤도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있다. 인생은 끊임없는 상승으로만…잠깐만… 그건 영광의 신학이 아닌가? 그러나 십자가 신학자로서 우리는 예수님이 지금 여기서 일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심지어 그분은 우리의 고통을 잘 알고 계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모든 악에서 기꺼이 구속하시고 싶어 하신다(창 48:16).우리는 애초 계획에서 벗어난 이런 “출발”을 피하거나 우리의 능력으로 이기려고 하면 안 된다. 주님은 메뚜기가 망쳐버린 그 엄청난 재해를 어떻게 극복할지 알고 있다(요엘 2:25). 아마도 당신은 고통 중에 받은 위로로 다른 이를 위로할 수 있을 것이다(고후 1:4).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겨도 당신은 하나님이 이 모든 일을 주관하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친구들이여, 예수님으로부터 공급받아 공동체에 들어가고, 당신의 죄를 바라보고, 배우자를 사랑하라. 무엇보다 기도, 기도, 기도하라. 예수님은 이런 힘든 상황에도 들어오셔서 말한다. “여기 내가 있다. 우리 함께 이겨나가자. 지금 바로 여기에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 Partner Is Down and Can’t Get Up번역: 무제
가정
결혼
융통성
마틴루터
무력감
중독
회개
사랑
기도
새해에 꼭 필요한 셀프컨트롤
by Jen Wilkin
2020-01-01
새해가 밝았다. 올 새해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연말에 과식을 했다든가 이제부터 체중 관리에 좀 신경을 써야겠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새해란 모름지기 셀프컨트롤에 다시 도전하는 시간이니 그런 대화가 이상할 것은 없다. 그런데 올해 나는 좀 다른 형식의 자기 훈련을 시작해 볼 참이다. 이 훈련은 허리 사이즈를 줄이려는 계획보다 더욱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작년 이맘때, 나는 우연히 어느 신문 기사에 실린 1930, 40년대 광고를 읽게 되었다. 그 광고는 살찌는 식품을 선전하고 있었다. 내용이 하도 진지해서 얼마나 코믹하게 보였는지 모른다. “일주일이면 당신도 5파운드나 살을 찌울 수 있다.” “나는 10파운드를 늘렸다. 그 결과 원하는 상대를 자신감 있게 만나고 있다.” 내가 이 광고를 딸에게 보여 주자, 이렇게 반응했다. “엄마, 믿기지 않는데요. 이거 진짜 광고인지 인터넷에서 확인하셨어요?”물론 내용이 터무니없어 보이긴 했지만, 그 광고는 모두 진짜였다. 말하기가 좀 창피한데, 내가 그 내용을 읽으며 즉각적으로 보인 반응은 이랬다. “아, 나 너무 늦게 태어났어.” 오동통 살이 오른 부인이 매력적인 여성으로 존중받는 시대를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남미 여자들이 그 문화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몸매를 갖추려고 히프에 살을 찌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런 가혹한 운명이 있나! 여기서 태어나는 게 아니었어. 히프에 살이 쪄도 아무 문제가 없는 데서 태어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먼 옛날부터 모든 여자는 이런 생각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이상적인 신체의 아름다움이 분명 존재하니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인류 역사의 상당 기간 동안은 여자의 몸이 풍만하고 곡선이 뚜렷할 때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 시대에 만들어진 여성 조각상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관점에서는 ‘대형 사이즈’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몸매를 드러내고 있다. 지난 역사에서는 그렇게 살이 오른 여성이 아름답게 여겨졌다. 왜냐하면 한가하게 빈둥거릴 수 있는 부유한 여자만이 그런 몸매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그런 풍만한 육체가 다산을 상징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과거에 그런 풍만함은, 매일같이 잘 먹으면서 일은 안 해도 될 만큼 돈이 많지 않은 한, 대부분의 여자로서는 이룰 수 없는 꿈의 몸매였다. 오늘날에는 트랜스 지방이나 과당, 시럽 등으로 인해 그 꿈이 사라지고 말았다. 오히려 지금은 그와 반대로, 부유하고 한가한 사람들이 영양 결핍에 시달리며 과로한 상태처럼 보이려고 애를 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도 그런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그렇다면 살찐 여성이 아름답다고 칭송받던 시대에 살았으면 정말 더 나았을까? 그렇게 보기는 힘들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는 ‘뚱뚱하냐 말랐느냐’가 아니라 ‘완벽하냐 그렇지 않냐’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언제나 세상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신체의 아름다움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평가해 왔다(혹은 스스로를 그 기준에 속박시켜 왔다). 그 기준은 시대가 흐르며 바뀌게 마련이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 아름다움의 기준이란 우리가 도달하기 힘든 이상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이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풍만하기 힘든 시대에는 풍만해지기를 원했고, 날씬하기 힘든 시대에는 날씬해지기를 원하고 있다.이러한 완벽한 몸매에 대한 기대 의식은 오늘날 여성에게 더 빨리, 그리고 더 자주 일어나고 있다. 중학교만 들어가도, 여학생들은 이상적인 신체를 가져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중년의 부인도 마찬가지인데, 다만 의사에게 실제로 메스를 들어 자신의 몸을 시술해 주기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듯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혐오감을 실제로 육체의 살을 깎아 내며 몸에 새기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우상(몸)을 깎아 조각함으로써 스스로를 훼손시키고 있다. 현대 문화에서 완벽한 몸매는 과거 어느 때보다 여성다움을 더욱 드러내는 비결이 되었다. 이 비결은 엄마로부터 딸에게로 세심하게 전수된다. 이때 엄마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친절, 화평, 관용을 추구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추도록 본을 보이는 수고보다 더 정선된 말과 행동을 동원하여 그 비결을 전수한다.이런 현상을 볼 때,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소망이 있다. 곧 때가 이르면, 자기 혐오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우리 자신의 겉모습을 기뻐하는 마음 가운데 살아갈 수 있다는 소망이다. 그날 우리에게는 썩지 않는 새로운 몸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그 몸은 더 이상 무덤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육체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날씬한 허벅지라든가 예쁜 외모에 마음을 뺏겨 장래의 소망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런 허영심이 각자에게 얼마나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될지를 생각해야 한다.그렇다면 그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당연히 우리 각자의 신체를 청지기로서 잘 관리해야 한다. 단순한 외모가 아니라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두 명의 여자가 똑같은 러닝머신 위를 달릴 수 있지만, 그들의 동기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그렇게 뛰는 진짜 이유는 각자가 알 것이다.이미 말했지만 1월은 칼로리와 운동 또는 체중 감량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올해는 그런 이야기를 안 해 보면 어떨까? 허리 사이즈가 변했다며, 친구나 자녀들 앞에서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면 어떨까? 더 나아가 부활 때까지 기다리기보다 오늘부터 우리의 몸을 건강하고 바르게 관리해 보면 어떨까? 거울 앞에 설 때마다 절망적인 심정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불만을 토로하기보다, 또는 그렇게 때가 이르면 우리의 몸도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라며 미래의 소망에 호소하기보다, 그 영광스러운 진리 가운데 오늘을 똑바로 살아 본다면 어떨까?그래서 올해는 단순히 식사량을 줄이기보다 외모에 관한 대화를 줄여 보면 어떨까? 당연히 헬스장에도 가고, 식단을 짤 때 채소와 과일 섭취량도 늘리며, 목부터 무릎까지 내려오는 운동복을 입고 하루에 10킬로씩은 달려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노력에 대해 떠벌리며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친구에게 야위어 보인다는 말도 하지 말자. 그 대신 그녀의 매력적인 정신이 참 좋다고 말해 주자. 그런 식으로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보다 오랫동안 지속될 것을 추구하도록 상대를 칭찬해 주자. 만일 상대가 우리의 외모나 몸매에 대해 언급한다면, 고맙다고 반응만 하고 얼른 주제를 바꾸도록 하자. 자신의 연봉이 얼마나 되는지 또 인맥이 얼마나 넓은지, 이런 끝도 없는 대화의 리스트에 몸에 관한 이야기도 집어넣자. 그리고 우리가 운동하며 키운 자기 통제력을 입술을 다스리는 데도 적용해 보자. 올해부터 다른 지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러한 실천에 힘쓰다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진정한 여성다움의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탄수화물을 피하는 데보다 성품을 일구는 데 힘쓰고, 미모를 가꾸는 데보다 경건을 이루는 데 주력하는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이여, 우리는 완벽한 몸매가 아니라 거룩을 이뤄 가도록 함께 부름 받았다. 그렇다면 새해에 우리는 어디에 에너지를 쏟아야 할까? 더 이상 체형이나 사이즈에 대한 이야기로 영혼의 식단을 채우지 말고, 진리의 말씀을 즐기며 포만감을 누려 보자. 우리 자신과 친구와 자녀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에게 한 해를 열어 주신 주님과 그분의 나라를 위해 그렇게 실천해 보자. 그러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ew Year, New Self-Control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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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
미모
말씀
새해의 핵심 형용사 ‘그리스도-높이기’
by John Piper
2019-12-30
낱말 중간에 하이픈을 넣어서 동사나 명사를 형용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건 거기에 중요한 신학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중심’, ‘그리스도-높이기’, ‘성령-의지하기’, ‘성경에-빠지기’, ‘복음에-뿌리박기’, ‘진실에-묶이기’, ‘영혼-만족’, ‘죄-죽이기’, ‘정의를-앞세우기’, ‘사탄-죽이기’, ‘자기-희생’, ‘위험-감수’, ‘선교-추구’ 등 이것 외에도 많다. 이렇게 동사를 형용사로 만드는 이유 중 하나는 문장의 의미를 백 가지 이상으로 수정해서 확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건 조금 있다가 다시 이야기하자.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리스도-높이기’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당신의 새해기도 제목 속의 핵심 형용사가 되기를 바란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지금부터 이게 왜 중요한 새해 결심이 될 수 있는지 세 가지 이유를 말하려 한다.왜 ‘그리스도-높이기’인가?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주님,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높이도록 도와주세요.” 아니면 “아버지, 오늘 예수님을 많이 생각하도록 도와주세요. 그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세상에 보일 수 있게 도와주세요.” 또는 이렇게도 기도한다. “아버지, 오늘 내가 당신의 아들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해주세요. 그를 높이도록 내 마음을 붙잡아 주세요.”이건 정말로 멋진 기도이다. 나는 이런 기도를 수도 없이 했다.그럼 우리가 “주님, 오늘 내가 그리스도를 높이도록 도와주세요.”라는 기도에 형용사를 사용한 ‘그리스도-높이기’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 형용사는 명사를 꾸며준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주님, 오늘 내 입술을 그리스도-높이는 지혜로 채워주세요, 그리스도-높이는 격려의 말로 채워주세요, 오늘 내가 그리스도-높이는 기쁨을 체험하게 해주세요, 그리스도-높이는 희생을 기꺼이 하도록 해주세요, 그리고 그리스도-높이는 도움으로 내 가족과 주변을 돕도록 해주세요.” 다른 말로 하면 새해 결심의 목표, ‘그리스도-높이기’를 기도의 핵심 형용사가 되도록 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우리 존재가 누릴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 감정 그리고 행동에서 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이런 작은 문법적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를 더 소중하게 여기고 새로운 열정을 일깨울 수 있게 된다. 삶과 죽음에 있어서 우리의 큰 목표왜 ‘그리스도-높이기’가 새해의 훌륭한 목표가 될 수 있을까? 첫 번째로 성경은 우리에게 삶과 죽음의 가장 위대한 목표가 바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라고 알려주기 때문이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기도했다.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살후 1:11-12).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목표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영광을 받으시도록’ 모든 일에 ‘결심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빌립보서 1장 20절에서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목표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지 사례를 들면서(빌 3:17; 4:9) 바울은 인생의 가장 큰 목표를 이렇게 말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중략]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다른 말로 하면, 그의 최고 목표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높이는 죽음을 맞는 것이다.따라서 ‘그리스도-높이기’를 새해 결심의 첫 번째로 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사나 죽으나 그리스도를 높여야 한다고 가르쳐주고 있기 때문이다.모든 일 속에 그리스도, 단지 옆에 추가로 붙어있지 않은두 번째로 내가 처음에 언급한 대로, 동사를 형용사로 바꾸는 것은 추가로 하나가 더 생기는 게 아니라 당신이 할 수 있는 백 가지 이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당신이 기도 리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주님, 제가 인내하고, 친절하고, 온화하고, 충실하고, 정직하고, 순수하고, 자아를 부인하고, 사랑하며, 용기를 내고, 위험을 감수하고, 관대하고, 기뻐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여기에 다음 기도 제목을 추가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리스도를 높이도록 도와주십시오.” 문제는 이 기도 목록에서 분명하지 않은 게 한 가지 있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다른 기도 제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모호하다는 점이다. ‘그리스도를 높이기’를 단지 다른 것에 추가하는 별도의 기도 제목이 아니라 다른 모든 기도제목을 묘사하는 형용사로 바꿀 때, 실로 극적이고 심오한 성경적인 역사가 생긴다. 주님은 내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인내와 그리스도를 높이는 친절, 그리스도를 높이는 온유와 그리스도를 높이는 신실함 등을 보여 주도록 도와주신다.이런 작은 문법상의 변화를 통하여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은 추가되는 게 아니라 다 들어 있어야 한다는 핵심을 알도록 한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삶의 모습에도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빠질 수는 없다. 일상의 평범한 생활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과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그리스도를 높이면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이런 결심을 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리스도-높이기’를 형용사로 취급함으로, 달리 말해 이 진리를 모든 말 속에 포함하여 그리스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의 행동이 아니라 진리 자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 단지 다른 것들에 추가되는 사항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 가운데 항상 존재해야 하는 가장 높은 목표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믿지 않는 자처럼 기도하지 말라세 번째로 이런 단순한 문법적 변화는 우리가 더 이상 불신자처럼 기도하지 않도록 막아준다.불신자들도 기도하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그들도 기도한다. 무슬림, 힌두교인, 유대인이 기도한다. 무생물에도 영혼이 있다고 믿는 물활론자(animist)나 사교도들, 심지어 사탄 숭배자들도 기도한다. 뿐만 아니라 세속주의자도 가장 절망적인 순간에는 기도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형식상의 교인들도 기도한다.그들도 당신과 내가 요구하는 백 가지를 하나님께 구한다. 매일 먹는 음식, 보호, 건강, 즐거움, 결혼의 온전함, 현명한 아이들, 칭찬받고 싶은 마음, 나쁜 습관 깨기, 나쁜 행동에 대한 용서 등 불신자들도 이 모든 것을 원한다. 그래서 기도한다. 그러면 이런 것들에 대한 그들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은 무엇인가? 중요한 차이점 중 하나는 이런 모든 욕구의 가장 깊은 곳에는 그리스도를 높이는 마음이라는 사실이다. 당신은 그리스도를 사랑한다. 당신은 그를 최고로 소중히 여긴다. 당신은 그리스도가 주는 모든 만족스러운 영광을 맛보았고, 눈으로도 보았다. 그리스도는 당신의 집사(butler)가 아니다. 그리고 기도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울리는 벨도 아니다. 당신은 그가 모든 사람에게 높임을 받고 영광스럽게 여겨지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기도할 때 잘 들어보라. 그들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지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높이기’라는 형용사를 사용해 당신의 모든 기도를 다 바꿔야하는 세 번째 이유는 바로 당신이 무엇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지 알려주기 때문이다. 당신의 기도를 믿지 않는 자들의 기도와 구분하기 때문이다.나는 당신을 위해 기도한다. 그러니 새해에는 당신도 나를 위해 기도해주길 바란다. 우리에게 최고의 해를 달라고 기도하자.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쁨, 그리스도를 높이는 사람, 그리스도를 높이는 열매로 가득한 새해를 달라고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New Year, New Adjective: “Christ-Exaltin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새해
목표
결심
그리스도
높이기
열매
더 나은 크리스마스를 고대하며
by Matt Chandler
2019-12-26
9년 전, 추수감사절에 나는 발작을 일으켰다. 그 발작으로 오른쪽 전두엽에 종양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12월 4일, 외과 의사들은 내 뇌의 종양을 제거했다. 그때 나는 34세였다. 수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왼쪽 팔과 다리에 힘이 없음을 느꼈다. 12월 16일 머리에 수술 자국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로 재활 센터에서 퇴원했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18개월간의 항암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했다.첫 번째 외출은 한 주 후에 내가 다니는 교회의 성탄절 전야 예배에 갔을 때였다. 예배당 뒤쪽에 앉았지만, 예배에는 거의 참여할 수 없었다.‘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은’의사로부터 “살 날이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라는 말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그 때는 침착한 척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가족에게도 힘든 크리스마스였다. 혹여 이번이 내 마지막 크리스마스는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하지만 괜찮았다.크리스마스를 망치고 내 삶을 마감시키려고 위협하던 종양이 내 희망을 가져가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는 우리가 처한 상황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셨기 때문에 아름답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움은 그 이야기의 시작일 뿐 끝이 아니라는 사실에 있다. 그 이야기는 구유에 누운 아기나 십자가에 달리신 분, 혹은 산비탈에 있는 빈 무덤으로도 끝나지 않는다. 그 아기가 하늘의 통치자로서 이 땅에 다시 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5)고 말하는 날 이야기는 끝난다.우리 모두가 매우 기다리고 있는 그 날, 모든 것이 완전해질 그 날이 오고 있다. 올 해나 다음 해 혹은 어느 해의 크리스마스 날 아침은 아닐 것이다. 그 날은 우주의 왕이 다시 오시는 날일 것이다. 그 날 그분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그의 오심을 고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모두 바라고 있듯이 완전해질 것이다. 더 이상의 우울함, 더 이상의 불안, 더 이상의 상실, 더 이상의 아픔은 없을 것이다.모든 슬픔, 모든 어둠, 모든 잘못된 것들은 기억에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 어디에 계시나요?”라고 묻던 혼란스럽고 의문 가득했던 순간은 사라질 것이다. 이제 우리는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 기대어 들쑥날쑥한 글라스의 조각들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다음 우리는 뒤로 물러가서 그 모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을 것이다.크리스마스는 그 이야기의 시작이다. “살 날이 몇 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말이 내 머릿속에서 맴도는 상태로 크리스마스를 보냈기 때문에, 나는 크리스마스를 더 좋아했다. 하나님이 내 삶에 관여하셨고, 내게 희망을 주셨다. 내 믿음이 소중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셨음을 내가 감사하게 된 때가 크리스마스이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내게 훨씬 더 의미 있게 되었다. 일 년 내내 나는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그리고 12월이 시작하기 전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올라가는 것도 좋아한다.궁극적인 크리스마스 선물방사선 항암 치료가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후유증은 종종 끔찍했다. 나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내가 믿고 알게 해 달라고 계속 기도했다. 가족을 도와주시기를 기도했다. 나를 치유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리고 9개월 후, 뇌 스캔 검사 결과가 깨끗하게 나왔다. 몇 차례의 방사선 치료 후에 나는 완쾌 판정을 받았다. 종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그 다음해 11월, 아내의 할머니가 추수감사절에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그래서 우리는 한 달 동안 이 선물을 거실 선반 위에 올려 놓고, 열어 볼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해 8살이었던 내 딸은 그것을 한 달 내내 그냥 쳐다보아야만 했다. TV가 방영되고 있어도, 그녀는 그 선물을 말 그대로 쳐다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빨리 열어보고 싶어”하는 마음으로 들떠 있었다.2천 년 전, 하나님은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 자신을 이 세상에 선물로 주셨다. 그분은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은 하늘을 다스리고 계시며,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완전하게 하실 것이다. 이 선물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모든 것을 기대해도 된다. 당신 앞에 최상의 날들이 있을 것임을 늘 알 수 있다. 삶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분이 언제 오실까”하는 들뜬 마음으로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다.그분이면 충분하다해마다 12월이면, 상업 광고들은 우리에게 완전함을 약속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때마다, 그 완전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고 오래 가지도 않는다.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영원히 완전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그 이상을 바라봄으로써 당신은 원하는 모든 것을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크리스마스에 오신 분이 다시 오실 것을 바라봄으로써 말이다. 내게 종양이 있던 그해 크리스마스에는 많은 양의 눈이 내렸다. 텍사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풍경이다. 쌓인 눈으로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을 만큼 많이 왔다.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아이들이 밖에서 놀고 있었다. 나는 막 수술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수술을 마치고 난 후에 얼음 위에서 넘어지고 싶지는 않았다. 실내에서 물끄러미 밖을 내다보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하지만 나는 그때 예수님이면 충분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셨고, 나를 위로해 주셨다. 그분은 내게 기쁨을 주셨고, 평화와 소망을 주셨다.그리고 뇌종양은 내게 중요하고 진정으로 기뻐할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나는 안정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11월이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다.나는 당신이 어떤 한 해를 보냈는지 어떤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지 모른다. 아마도 기쁨이 넘치는 한 해를 보냈을 것이고, 당신의 크리스마스는 멋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영원성에 초대해 주기를 기도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그분이 오실 때 함께 올 것의 그림자일 뿐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을 찬양하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되 그 이상의 것을 바라보라.고대하라당신은 두들겨 맞고 부상을 입은 것처럼 느끼고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올 해가 배우자 없이 보내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 일 수도 있다. 외로울 수도 있다. 당신이 목표한 곳에 이르지 못했을 수 있다. 당신이 아프거나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수도 있다. 한 해 동안 일어난 일로 당신은 모든 것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것인지를 자각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다가 아님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엉망인 이 세상에 관련되어 있기에 그는 지금 당신과 그분의 기쁨을 나눌 수 있고 언젠가 당신에게 그분의 완벽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분을 당신 안에 초청하고, 인생의 높고 낮은 순간들을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앞으로 다가올 것을 고대하라. 해마다 크리스마스는 재빨리 막을 내린다. 우리가 고대하는 것은 곧 우리 뒤에 숨는다. 하지만 당신은 결코 끝나지 않을 날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을 미래를 고대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ook Forward to a Better Christmas번역: 정은심
생활
건강
희망
치유
종양
동행
선물
크리스마스
우리 가정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자
by Jani Ortlund
2019-12-20
“혹시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 때만 하는 특별한 일이 있나요?” 며칠 전 이웃과 저녁 식사를 할 때 그 집 아이가 물었다. 이 시즌에 나올 법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른 절기보다도 크리스마스를 더 손꼽아 기다린다. 그날을 둘러싼 신비로운 옛이야기에 경외심을 품기도 하고, 그 이야기에 담긴 영원한 메시지를 묵상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시즌의 의미가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또한 크리스마스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온전히 기념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결혼 후 맞이한 첫 번째 크리스마스가 생각난다. 그때는 유난히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나는 남편과 함께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를 기념하기 위해 이전처럼 가족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출산 예정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집에만 있었다. 크리스마스트리나 장식을 하며 집을 꾸미지도 못했다. 심지어 오 헨리(O. Henry)의 ‘크리스마스 선물’(The Gift of the Magi)에 나오는 짐과 델라 부부처럼 서로에게 작은 선물을 해 주지도 못했다.하지만 그날은 어쨌든 크리스마스였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러니 일 년 중 가장 행복하고 믿음도 충만해져야 하는 날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기대와 경이감을 회복하고 우리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가기로 했다. 그러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주님을 생각하며 다른 이들을 돌아보는 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두자고 다짐하게 되었다.사도 바울은 서로가 함께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분명히 밝혔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빌 1:25). 여기서 말하는 “믿음의 진보와 기쁨”은 우리가 매해 만들어 온 크리스마스 전통의 목적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묻는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무엇을 하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따라가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 또 무엇을 하면 그분 안에서 큰 기쁨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되겠는지를 말이다.크리스마스 장식과 이야기, 그리고 함께 나누는 식사우리 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은 추수감사절 다음 날부터 시작된다. 부엌에서는 칠면조 수프가 끓고, 거실에서는 캐럴이 들리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연출된다. 추수감사절 때 사용된 호박과 곡물 바구니는 사라지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소품과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녹색으로 집이 꾸며진다. 그리고 성탄의 느낌이 물씬 풍기도록 커다란 달력을 벽에 걸며 카운트다운을 시작한다. 우리는 서랍과 옷장을 열어 온갖 장식품을 꺼낸다. 오래 보관된 물건을 싸 놓은 포장을 벗겨 내며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기도 한다. 힘들었던 결혼 첫해의 크리스마스 때부터 쓰던 도구들도 나온다. 40년이나 된 쿠키커터도 보인다. 거기에는 알록달록한 리본이 붙어 있다. 과거에 남편은 크리스마스트리 판매상을 찾아가 가지가 무성한 나무를 싼값에 사 온 적이 있다. 당시 우리는 트리를 장식할 만한 조명이 없었지만, 펠트 조각이나 손수 만든 장신구를 매달아 트리를 돋보이게 했다. 이와 같이 전통은 작게 출발하여 해가 거듭될수록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더해 가며 성장할 수 있다. 마치 우리의 믿음과도 같다.우리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은 추수감사절부터 새해 전야까지 다양한 캐럴과 이야기를 즐기는 특색이 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가정 예배를 드리면서 크리스마스용 화환이나 그림 성경책을 사용하여 아이들이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다른 크리스마스 책들도 구해 시즌만 되면 읽어 주었다. 나는 지금 이 글을 살펴보는 당신에게도 권하고 싶다. 2천 년이 지난 그 오랜 이야기를 진실하게 들려주는 책, 그러면서도 매번 성탄의 느낌을 신선하게 전달해 주는 책을 해마다 한 권씩 장만해 보기를 말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에만 펼쳐보는 아름다운 책들로 작은 서재를 꾸미고 저녁 시간이나, 거실에 함께 모였을 때, 그 이야기를 나누며 성탄의 기쁨을 누려 보기를 권한다.만일 당신만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 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크리스마스 당일에만 즐기는 음식을 준비해 볼 것을 추천한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즐겨 먹던 음식을 마련해도 좋겠다. 그런 음식이 없다면 현재 당신이 좋아하는 메뉴를 선정해도 괜찮다. 나의 경우는 매년 어머니가 구워 주시던 다섯 가지 모양의 쿠키를 만든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남편의 고향 음식을 기념하기 위해 스웨덴식 뷔페를 즐긴다. 거기에 과일 수프나 쌀로 만든 푸딩을 곁들인다. 이렇게 전통 음식을 먹을 때 믿음의 대화도 함께 나눈다. 음식만이 아니라 믿음도 양가의 가족을 통해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의 경우, 부모님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신 후부터 믿음의 꽃이 활짝 피게 되었다.선물을 나누는 크리스마스 전통크리스마스이브에 교회 행사를 마치고 돌아와 밤늦게 ‘멋진 인생’(It’s Wonderful Life)이나 ‘스크루지’(Scrooge) 같은 영화까지 보고 나면, 우리는 아이들을 재우고 조용히 선물을 꺼내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크리스마스 아침이 밝으면 계단 위에 막내부터 첫째까지 차례로 줄을 세우고 마지막 꼬리에는 내가 섰다. 남편은 앞사람의 눈을 손으로 가리라고 말한 다음, 우리 모두를 계단 아래 크리스마스트리로 인도했다. 거기서 하나, 둘, 셋을 세고 각자의 손을 거두게 하면 네 명의 아이들은 흥분과 호기심, 기쁨을 이기지 못해 껑충껑충 뛰며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양말을 열어 선물을 확인하고는 아침을 나누었다. 그 후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간을 보냈다.해가 지나며 우리는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주는 행동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선물을 주는 자와 받는 자 모두에게 기쁨이 넘치는 경험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임을 알려 주었다. 우리가 선물을 주는 이유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남편과 나는 매년 서로에게 묻는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나눔으로써 그 ‘부요함’을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베풀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경험하게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기쁨을 누리며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 때로는 우리가 저축해 놓은 돈에서 선물 비용을 마련하기도 하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그 예산을 절감하기도 한다. 해외에 있는 학생들에게 성경책을 보내기도 하고, 빈곤 가족을 위해 식사를 제공하기도 한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돈을 대신 내주는가 하면, 때로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필요한 사역에 참여하기도 한다. 크리스마스는 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우리의 형편이 어렵고 가난하게 살았을 때, 어떤 사람이 크리스마스 당일에 100달러짜리 지폐를 문 앞에 놓고 간 적이 있다. 자기 가정의 크리스마스 전통을 따라 선물로 놓고 간다는 쪽지만 붙어 있었다. 그날 우리는 백만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남에게 무언가를 주는 일을 크리스마스 전통으로 삼게 되었다.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또 다른 전통은 한 해 동안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노트에 기록하는 일이다. 우리는 매번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 가족만이 아니라 집으로 초대한 친구들에게 이 소중한 노트에 자신의 생각을 한 마디씩 기록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무엇이 감사했는지를 적고, 또 다른 이들은 기분 좋았던 추억이나 선물에 대해 기록한다. 어린아이들은 그림을 그려 놓기도 한다. 그리고 상황이 허락되면 작은 스냅 사진을 찍어 거기에 붙여 놓는다. 이 노트는 우리가 경험한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기록물인 셈이다. 매년 우리는 그 노트를 펼쳐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들을 떠올리며 기뻐하기도 하고, 또 다가오는 새해에는 어떤 일을 행하실지 기대하기도 한다.이처럼 당신도 소중한 크리스마스 전통을 만들어가며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이 시즌을 기념하다 보면, 어느덧 당신의 크리스마스도 그동안 이루어진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드러내고, 나누는 날이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Traditions: For Progress and Joy in the Faith번역: 장성우
가족
전통
나눔
선물
은혜
믿음
진보
기쁨
중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
by Andy Farmer
2019-12-12
가족 중에 중독 문제를 경험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인내의 고통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것이다. 중독이 주는 가장 파괴적인 것 중 하나는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차적인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많이 도우려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상처를 입기 때문이다.중독과 투쟁 중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는 어려움을 계속해서 견딜 수 있는 지구력과 회복력, 헌신이 요구된다. 만일 아무런 준비 없이 접근한다면 중독에서 구하고자 하는 노력은 실패할 것이다. 자비롭게 생각한 마음은 짓밟히고, 인내는 바닥날 것이며, 사람에 대한 신뢰는 무너질 것이다. 심한 상처를 입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냥 돌아설 수 없다. 중독에 빠져있다고 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우리의 삶에서 완전하게 제외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싸워나갈 수 있을까? 혼란 중에서 어떻게 행동할 수 있을까? 혼동 속에서도 안정을 제공해주는 진리익숙한 사도 바울의 말씀에 심오하고 놀라운 진리가 있다.“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바울의 서신서에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이 세 가지 ‘은혜의 요소’가 여러 차례 나온다. 믿음ㆍ소망ㆍ사랑은 성도의 삶의 지표이며(골 1:3-5), 시련 속에 있을 때도 사역을 계속하여 유지하도록 하고(살전 1:2-3), 어둠의 시기에도 안정적인 일관성을 제공해 준다(살전 5:6-8).만일 사랑하는 사람을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돕기 원한다면, 믿음ㆍ소망ㆍ사랑을 기억하라.믿음을 기억하라믿음은 힘든 시기에 있는 당신이 흔들리지 않고 바른 것에 집중하도록 돕는다.중독자는 이미 여러 번 중독된 행위를 그만하겠다고 약속했다.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는 고백을 했으며, 재활이나 자기 혁신을 위한 시도를 수차례 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고백은 거짓말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 더 신뢰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중독자를 돌보는 사람은 자신이 어떻게든 회복시켜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다. 반면에 중독자들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많다. 그렇게 함으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의무의 무거운 짐을 돌보는 사람에게 떠넘기려 한다.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중독자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다루시며, 더 명확하게 말씀하고, 행하신다. 중독자가 회개와 변화를 이루어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분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다루신다. 치료와 회복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을 통하여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짐을 그리스도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맡기며 자비로운 은혜를 구하고, 건져 주실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소망을 기억하라중독의 환경에서 사는 것은 중독된 사람의 망가진 모습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 모습을 반복해서 보다 보면, 망가진 모습이 그 사람의 삶의 방식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하여 절망하기 쉽다.사랑하는 자녀는 중독으로 인해 그들의 많은 잠재력을 낭비한다. 절제를 잃은 배우자나 부모는 가족의 삶을 비극의 방향으로 천천히 이끈다. 중독 문제가 가족의 삶 전체를 좌우하고 있어서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래 그랬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 가족의 내력이며, 그 가족의 미래인 것처럼 보인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도 미래를 소망하도록 선물을 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을 것이며, 주께서 잡은 손을 결단코 놓지 않으시겠다는 약속이다. 주님께서는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장 완벽한 곳을 준비해두고 계신다. 비록 우리가 그곳에 있지 않지만, 그곳의 삶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소망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인내하고 가는 길 끝에 영광을 마련하시는 분이다. 그분은 영광의 소망 그 자체가 되신다(골 1:27).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당신의 미래는 이미 영광을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투구인 소망이며(살전 5:8), 중독자로 인해 망가진 환경 속에서도 피폐해지지 않고 온전히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소망이다. 사랑을 기억하라자기 자신에 빠져있고, 스스로 파괴된 삶으로 향하는 중독자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거짓말과 속임수를 쓰고, 다른 사람의 긍휼한 마음을 이용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 또한 쉽지 않다.성경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말한다(벧전 4:8). 하지만 그러한 사랑은 오히려 중독자 안에 있는 죄를 허용하는 일처럼 어리석게 느껴진다. 중독자를 사랑하는 일은 고통을 동반한다. 사랑이 죄로 짓밟히고 조롱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사하시려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사랑이 죄에 대한 궁극적 해결책이었다.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죄가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었다. 누구든지 사랑 없이는 중독으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우리의 죄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대속의 사랑, 우리가 겪을 고난을 대신 당하신 그분의 은혜,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신 그분의 죽음, 바로 이러한 사랑이 곁에 있는 중독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중독자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십자가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중독자와 그를 돌보는 사람 모두에게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중독자와 나누어야 한다는 확신이 있다면, 그것은 중독자를 돌보는 과정에서 지치고 힘들더라도 인내하고 버틸 수 있도록 도울 것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사랑은 곁에 있는 사랑하는 중독자를 한 번 더 신뢰할 수 있도록 하고,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돕는다. 사랑은 중독으로 인한 아픔과 그에게 만들어진 우상을 긍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사랑만이 중독에서 자유롭게 하는 능력이며, 변화시키는 동력이다. 사랑만이 중독자를 진정한 자유로 인도하며, 예배자로 바꿀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이미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믿음ㆍ소망ㆍ사랑을 기억하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은 당신이 해 줄 수 있는 그 어느 것보다도 이 세 가지가 필요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Do Addicts Need from You?번역: 정은심
가족
중독자
믿음
소망
사랑
신뢰
인내
묵상의 불길로 영혼을 덥혀라
by David Mathis
2019-12-09
인간은 하나님을 묵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인간에게 주셨다.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고 깨달으라고 말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골똘히 생각할 수 있고, 그 의미를 깊이 느껴볼 수 있다. 어떤 실재에 대하여 머리로 생각하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시선으로 보고 그 의미를 더 잘 파악하려는 특성이 있다.이러한 자질을 성경적으로 ‘묵상’이라고 부른다. 돈 휘트니(Don Whitney)는 묵상을 “이해와 적용 및 기도를 목적으로 성경에 계시 된 진리와 영적 실재를 깊이 생각하기”(Spiritual Disciplines)라고 정의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크리스천의 삶에 베푸시는 놀라운 은혜이다.기독교적인 묵상인간에게 있는 묵상할 수 있는 능력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다양한 활동을 한다. 뇌 건강과 혈압 저하를 위해 묵상을 하며, 묵상을 통한 가시적이고 실천적인 효과를 만들려고 한다. 세계 여러 종교에서도 묵상에 관련한 활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기독교적인 묵상은 여러 비기독교적 단체에서 대중적으로 말하는 ‘묵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기독교적인 묵상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생각을 채우는 것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와 그 묵상한 내용을 생각으로 채우는 것이다. 크리스천에게 묵상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게(골 3:16)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동시에 자신의 생각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묵상과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그것을 천천히 소화 시킨다. 말씀의 의미를 음미하고, 즐기며 깊고 풍부한 맛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한다.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행위이다.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못하므로 묵상을 통해 말씀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주야로 하는 묵상우리는 지금 믿음의 선배들이 행하였던 묵상의 모습을 많은 부분 잃어버렸다. 죄의 오염으로 손상된 현대의 삶은 쉴 틈이 없을 만큼 빠르고 분주하다. 이러한 분주함으로 인해 묵상을 잃어버렸다. 창세기에서는 “이삭이 저물 때에 들에 나가 묵상[했다]”(창 24:63)고 한다. 성경은 묵상을 위해 분주함을 버리고 차분하게 앉아서 집중하며, 방해 거리를 차단하고 진지하게 생각하는 방식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묵상에 관한 내용은 성경의 여러 곳에서 등장한다. 모세의 죽음 이후에 구속 역사의 핵심 연결 고리로 여호수아를 사용하신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강하고 담대하라”(수 1:6, 7, 9)라고 세 번 명령하신다.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강함과 담대함을 얻을 수 있을까? 그것은 묵상을 통해서다. 하나님은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수 1:8)고 방법을 가르쳐 주고 계신다.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명하신 말씀의 의미는 단지 율법책을 친숙하게 읽어내려가라는 뜻이 아니다. 말씀에 붙잡혀 그 진리로 그의 삶을 세우라는 말이다. 그의 생각과 느슨한 마음이 말씀을 향하도록 그 줄을 잡아당겨 팽팽하게 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말씀으로 그의 삶을 풍성하게 하며,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풍성한 정서를 통하여 행동에 영감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다.시편에서의 묵상묵상에 관해서는 시편 두 곳에서 길게 나온다. 시편 1편 1-2절은 여호수아 1장을 떠오르게 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복 있고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말씀을 단숨에 읽고 끝내지 않는다. “주야로 묵상한다.” 시편 119편에서는 묵상과 하나님 말씀을 즐거워하는 내용이 주로 나온다. 시편 기자는 “주의 법도들”(15, 78절), “주의 교훈들”(23, 48절), “주의 기이한 일들”(27절)을 묵상한다고 말한다. 그는 “내가 주의 증거들을 늘 읊조[린다]”(99절)고 했고,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97절)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에게 구약의 교훈이 귀중했다면, 신약의 복음은 우리에게는 얼마나 귀중한 묵상이 되고 있는가. 묵상은 잃어버린 연결 고리이다성경 묵상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가장 잘 누리게 하는 수단 중의 하나로 오랫동안 교회 역사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청교도들은 무엇보다도 많은 묵상의 선물을 즐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말씀 섭취) 귀 기울이는(기도)데 주목했다. 휘트니는 유명한 청교도들이 언급한 묵상의 효과를 인용하며, 묵상은 “말씀 섭취와 기도를 연결해 주는 잃어버린 고리”라고 했다. 여러 묵상가들은 기독교의 전통적 묵상 방식을 다시 찾아 삶에서 실천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한다. “읽기나 듣기로 시작하라. 묵상으로 나아가고, 기도로 마치라”(윌리엄 브릿지[William Bridge]).“말씀은 묵상으로, 묵상은 기도로 이어진다. [중략] 묵상은 듣기를 뒤따르고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중략] 말씀으로 섭취한 것은 묵상으로 소화 시키고 기도로 내보내야 한다”(토마스 맨튼[Thomas Manton]).“우리가 말씀 읽기에서 그리 멀어진 이유는 묵상의 불길로 우리 영혼을 덥히지 않기 때문이다”(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우리의 기도가 효과적이지 못한 주된 이유는 기도 전에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윌리엄 베이츠[William Bates]).크리스천에게 묵상은 기능 면에서 다른 훈련들과 관련 있다. 묵상은 성경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그분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완전히 동떨어진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묵상은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음성 듣기와 그분께 말하기 사이에 있는 간극을 좁혀준다.묵상할 때, 우리는 잠시 멈추고 말씀을 곰곰이 생각한다. 마음속으로 이리저리 생각해보고 그것이 우리 가슴에 불을 붙이게 한다. 묵상의 불길로 우리 영혼이 뜨거워지도록 말이다. 우리는 질문을 하고 답을 찾는다. 하나님의 계시에 깊이 들어가서 그것을 우리 영혼 속으로 가져온다. 그분의 진리로 인하여 변화된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께 응답한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말하듯이, “묵상은 기도를 위한 최상의 준비이므로 기도는 묵상이 내놓는 최상의 것이다.” 참된 치유기독교의 묵상은 우리 몸의 자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영혼의 자세에 관한 것이다. 책상 다리를 하고 앉거나, 발을 바닥에 대고 곧게 등을 펴며, 손바닥을 위로 향한 채로 의자에 앉는 등 어떤 형식적인 자세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다. 기독교의 묵상은 눈을 성경에 두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혹은 암기한 성경 말씀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는 일이다.우리의 이목을 끄는 특정 구절을 택하여 그것을 좀 더 폭넓게 읽고, 시간을 할애하여 그 속에서 깊이 머무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다음에 의식적으로 펜을 들거나 키보드에 손을 얹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이해하려고 집중한다. 그분의 사랑으로 깨달음으로 우리 영혼을 따뜻하게 하며, 우리를 기도로 이끌고 그날 하루로 이끌도록 한다.쉼이 없고 분주한 사회에서, 묵상은 우리의 정신 건강에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혼에 참된 치유와 회복을 선물해준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arm Yourself at the Fires of Meditation번역: 정은심
영성
묵상과기도
돈휘트니
치유
시편
은혜
보험금이 당신을 대체할 순 없다!
by Jay Hohfeler
2019-12-06
의사가 내게 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려 줬을 때, 나의 첫 반응은 이것이었다. “잘됐네.”의사 앞에서 소리 내어 말한 건 아니지만, 나는 우리 가족에게 꼭 필요한 기본 계획이 갑자기 제자리를 잡아 간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우리의 은퇴 연금은 더 늘어날 것이고, 55세의 나이에, 그러니까 내 생명보험이 만료되기 전에 죽음을 맞음으로 진짜 큰 돈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나는 아내와 세 딸이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순식간에 필요한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처음으로 재정적인 성공을 느꼈다.내가 이 이야기를 다른 남자들에게 하면, 대부분 그들은 공감을 표했다. 그러나 여자들의 경우에는 이런 내 생각에 예외 없이 충격을 받았다. 사실, 여자들의 그러한 반응이 옳다. 비록 내 생각이 남자들에게는 일반적이더라도, 이는 왜곡된 판단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우상 숭배의 증거이자 거짓 신을 의지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친구인 한 의사는 “글쎄, 나는 자네 부인 베스와 아이들 생각을 했어”라고 말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숙한’ 나의 확신, 즉 내가 이 세상에 연연하고 있지 않다는 확신의 이면을 꿰뚫어 보았다남은 가족을 먼저 고려한 의사 친구의 생각은 정확했다. 나는 내가 죽었을 때 가족이 느낄 고통과 트라우마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생명보험이 유효한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죽는 경우, 보험금의 차이가 얼마나 되는지를 비교하여 베스에게 설명했다. 결과는 좋지 않았다.“당신은 정말로 보험금이 당신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글쎄, 뭐, 그렇지 않을까? 처음에야 힘들겠지만, 당신하고 애들은 잘 이겨낼 거야. 그리고 또 다들 그렇게 인생을 살아가는 거지, 뭐.”“우리는 극복 못해요. 당신은 우리 가족에게 당신이 어떤 의미인지를, 그 가치를 너무 깎아내리고 있어요. 당신이 없는 경우 우리가 느낄 충격도 너무 과소평과하고 있어요.”이 대화는 하나님이 내 생각과 마음을 바꾸시기 시작한 중심점이 되었다. 나는 정말로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우리가 가진 것 안에서 자족하며 사는 삶보다, 내가 죽어서 받게 될 큰 돈으로 풍족하게 사는 게 가족에게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이런 식의 우상을 부자 청년 비유를 통해서 경고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눅 12:15).거짓말을 리허설하기남자들이 특히 쉽게 믿는 몇 가지 공통된 거짓말이 있다. 내 직장이 가족에게 풍요함을 가져다 줄 것이다. 내가 미래의 경제 상황을 예수님께 맡기면 내 삶의 질은 떨어질 것이다. 부를 얻는 것이 내가 할 일이니까, 결혼 생활 및 가족과 관련된 일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어도 괜찮다. 병원 침대에 누워 있던 그 주간, 새벽 3시 정도에 나는 거의 죽음의 문턱에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나를 꾸짖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눅 12:20). 내가 정말로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솔직히 말해 뭐가 더 나은가? (1)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과 함께 기존의 저축 금액으로 사는 것, 또는 (2) 가족에게 엄청난 현금을 남기고 죽는 것.5년 동안 이어진 상상할 수 없는 림프종 고통, 그리고 골수 이식으로 두 번이나 겪은 거의 죽음에 이르는 합병증을 통해, 주님은 내 영혼을 변화시킴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준비해두신 맞춤형 고통 없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우상 문제에도 손을 대셨다. 처음 아팠을 때에는 아무도 나를 필요로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인생은 계속되었고 모두 다 바빴다. 그러나 내가 더 이상 가족에게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도, 또 보험금이 얼마나 가족에게 큰 힘이 될지를 생각하는 중에도, 내 아이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아버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변화의 기초이고 핵심이었다. 아내는 내가 미래를 두려워하기 보다는 가족에게 더 가치를 두기를 원했다. 또한 아내는 나의 용기, 그리고 냉소를 누르는 유머 감각을 보고 싶어 했다. 그리고 우리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순간에조차,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오고 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했다. 우리 가족은 돈보다 나를 더 필요로 했다. 내가 너무도 늦게 깨달은 교훈이었다. 진리를 리허설하기나는 이제 나를 유혹하는 거짓말과 싸우기 위해 진리를 리허설해야 한다. 부를 얻는 힘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지 내가 아니다(신 8:17-18).하나님에게 나는 가치가 있다. 그분은 내 필요를 아신다. 그분은 내게 주저함 없이 그분의 왕국을 주셨다(눅 12:24, 28, 32).가정에 돈을 가져다준다고 내가 할 일이 끝나는 게 아니다. 돈이 좀 없다고 열매 없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거짓 신이 그런 삶을 가져다준다.내가 사랑하는 이들은 나를 필요로 한다. 내가 주는 부요함이 아니다.오늘날, 우리는 여전히 그 진리를 붙잡고 살고 있다.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높은 의료비, 세 명의 대학생, 그리고 투병생활 5년간의 실업으로 인해, 우리의 퇴직 연금은 상당히 소진되었다. 긴 투병 시간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손실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시절은 내 인생의 가장 위대한 시간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변화된 삶을 위해서라면 그 시간을 기꺼이 반복할 것이다.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우리는 미래에 대해 걱정한다. 하지만 더 이상 냉소적이지 않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과 당신이 구원하신 자녀를 향한 흔들림 없는 관심을 본다. 나는 항상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너의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신 그 의미를 알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알 수 있다. 그 은혜는 결코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몇 방울이 아닌 강하고 자애로운 흐름이다. 몇 년 전, 나는 병원에서 구원을 위해 물질적 풍요에 매달렸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붙잡는다. 그리고 내 통장의 잔고가 아무리 적더라도 그분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그분이 이끄시는 한 어디라도 따라갈 것이다. 그것이 바로 풍요롭게 사는 삶의 진정한 모습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Family Needs More Than Money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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