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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대처하는 잘못된 반응
by Ashley Chesnut
2018-11-30
삶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홀리(Holly)는 그녀가 싱글맘으로서 직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외롭고 지쳐 있었다.우리가 만났던 날, 최근 서른이 된 제시카(Jessica)는 비슷한 또래의 크리스천 싱글맘을 만난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독신으로서 고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원했던 것이다.이러한 대화는 주로 싱글인 사람들과 나누게 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다. 전업주부로서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는 엄마도 외로움을 느끼고, 가정에서 홀로 신앙생활하는 10대도 외로움을 느낀다. 또한 선교사도 사역지에서 언어와 문화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외로움은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외로움이 삶에 불쑥 찾아온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여기서 나는 외로움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을 소개하고자 한다.1.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느끼고 관찰하며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왜’ 그런 식으로 느끼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신학생 시절에 한 상담학 교수는 모든 감정은 신학적 표현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의 외로움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 그리고 현재 상황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당신이 현재 갖고 있지 않지만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외로움의 뿌리가 될 수 있는 당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라.2.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한다외로움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죄를 범할 수 있다.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한 여성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포르노와 자위, 그리고 지나친 의존 관계(codependent relationship)를 선택했다. 이 지나친 의존 관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외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생겼다. 그는 동성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지만, 그가 누구이든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고 만족시켜주면 좋겠다. 또한 나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나를 위로해주기 원한다. 나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관계는 우상이 되었고, 그는 나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그리고 포르노와 자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지루하고 외롭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진정시킬, 최소한 한동안 지연시킬 무엇인가를 찾을 것이다. 나는 스크린 속에 있는 사람이 나를 원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나를 자극해서 위로할 것이다.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다른 무엇으로 관심을 돌리기 쉽다. 따라서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추구, 자위, 하나님을 향한 분노 등 외로움이 부르는 건강하지 못한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책임감을 갖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3. 진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정은 죄로 더럽혀져 있다. 따라서 단지 우리가 무엇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감정은 무조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신 31:6).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릴 때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셨다(마 27:46; 사 53:3).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시다(고후 1:3-4). 당신이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하나님은 당신의 상황과 고통에 엄청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롬 8:28). 그 목적은 철회되지 않는다.이런 사실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외우고, 스스로에게 설교하라.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당신의 외로움을 즉시 해결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외로움의 길’(The Path of Loneliness)에서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외로움이 항상 치유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때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뀔 수가 있다. 외로움은 마치 귀중한 보물이 묻혀 있는 밭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밭을 사야 한다. 혹 그 밭이 아름다운 초원이 아닌 황량하고 텅 빈 벌판일지라도, 거기에 보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주변의 모든 그림은 변하게 된다. 버려진 찌꺼기와 같이 잊혀진 그 땅은 갑자기 가능성이 가득한 장소가 된다. [중략] 이처럼 외로움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을 통해, 전에는 아무도 원치 않는 잊혀진 땅과 같았던 외로움은 이제 보물이 숨겨진 장소로 변하게 된다.”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또 당신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외로움을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꾸실 수 있다. 따라서 외로움을 하나님께 맡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만일 또 다른 외로움이 닥친다면, 당신의 구원자이고 친구가 되시는,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 그 외로움을 가지고 나아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Unhealthy Responses to Loneliness번역: 김형용
생활
감정
외로움
인식
위로
진리
엘리자베스
용기
죄성
방어벽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
by Ric Rodeheaver
2018-11-28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할까? 아마 전이라면 아니라고 답변했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하고, 어두운 현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례식은 분명 어두운 현실이다.자녀들을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마음은 일반적이기도 하고 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 속 지혜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긍정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1. 장례식은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려 준다우리 자녀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은 죽음을 비현실적인 단면으로 경험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에서 죽음이 멋지게 포장되거나, 혹은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이 아무렇지 연출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 자녀들이 대중 문화를 통해 죽음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죽음이라는 개념은 그들에게 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또한,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죽음이 주는 슬픔을 지우는 문화가 발달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예만 보아도 그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무덤’이라는 말이 ‘묘지’가 되었고, 이제는 ‘추모공원’이라는 장소도 생겼다. ‘장례식’은 ‘추도식’이 되었고, ‘생애 축하행사’라는 용어가 생겼다. 과거에는 묘지가 보통 교회 뜰에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죽음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많은 묘지들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더 깊이 숨어 들어가고, 그중 대부분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가 갈수록 젊음, 건강, 활력, 그리고 죽음과 노화를 방지하는 음식 등에 집착하는 현상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자녀들은 죽음이 세상에 실재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잘 배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장례식은 자녀들에게 생명의 유한함과 그 무게를 충분히 깨닫도록 돕는다.2. 장례식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자녀들에게 보여 준다우리는 자녀들과 재미있게 노는 법을 알고 있다. 그에 반해, 그들과 함께 우는 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녀들을 삶의 기쁨에만 노출시키고, 시련은 철저히 피하도록 양육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죄의 결과로 신음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제대로 준비시키고 있는 것일까(롬 8:28)?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슬픈 감정을 회피하거나 절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거나 슬픔을 전혀 주체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삶 속에서 슬픔이나 절망의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훈련의 기회를 잃는 것이다.자녀들은 상실을 느낄 필요가 있고, 솔직하게 그 감정을 겪어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도 볼 필요가 있고, 어둠의 순간에도 부모가 하나님께 기대는 자세 역시 눈으로 봄으로써 배워야 한다. 상실을 함께 겪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세 가지 주제가 늘 등장하는 이 세상에서 자녀들을 미리 준비시킬 수 있는 적절한 훈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장례식은 죽음을 대면할 때 슬퍼하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빛에 소망을 두는 방법을 알도록 돕는다(요 11:25).3. 장례식은 자녀들이 어둠 속에서 복음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밝게 빛난다. 장례식보다 삶에 대해 더 명백한 깨달음을 주는 경우는 없다.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리고 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복음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 참석함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은혜와 소망의 결심을 볼 수 있었던 반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엄청난 슬픔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소망의 목소리와 더불어 절망의 흐느낌도 한자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어렸기에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과 눈빛은 그들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이 복음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대화의 옥토를 만든다. 삶과 죽음, 영원, 그리고 예수님과 그가 주시는 구원이 왜 중요한지를 나눌 수 있는 대화 말이다. 장례식이 다른 경험과 차별되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자녀들이 복음의 능력과 필요를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장례식은 참석하기 쉬운 행사가 아니다. 장례식은 감정을 뒤흔들고 비극적인 죄의 결과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지혜와 소망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와 같은 경험을 사용하실 수 있다(전 7:1-4).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이 삶의 어두운 면을 보며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 속에 거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된 이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로써 진정한 소망 안에서 담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기회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장례식이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to Take Your Children to Funeral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장례식
삶의일부
죽음
영원
예수님
구원
슬픔
분노 죽이기
by John Piper
2018-11-27
결혼생활에서, 분노는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정욕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분노가 정욕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다른 여러 종류의 동지애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분노를 품고 있다. 분노가 위장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의지력으로 격분을 억누를 때, 분노는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다. 또 영혼의 치아는 좌절로 부득부득 갈린다. 분노는 마치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눈물로도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마음의 상처를 더해 줄 뿐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할 때, 분노는 침묵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분노는 까다로운 비판과 가차 없는 비난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분노는 분노하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종종 분노는 잘못된 원인에 근거하여 정당화되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예를 성경에서 잘못 찾기도 한다. 가령 예수님도 분노하셨다든가(막 3:5), 바울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했다며(엡 4:26) 분노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이 선한 분노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말한다(약 1:19-20). 그리고 바울은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또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라고 말한다(엡 4:31).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큰 전투 가운데 하나는 단지 분노의 표현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인 ‘분노를 없애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아래에 제시하는 아홉 가지 성경적인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첫째, 분노할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서 십자가를 어떻게 참으셨는지 생각해 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둘째, 당신이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긍휼을 입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셋째,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넷째, 과연 자신이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를 얼마나 원치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성경은 마음속의 분노가 마귀에게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라고 초청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다섯째, 자기 학대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라. 분노하는 사람에게 그 분노가 미치는 수많은 해로운 영향들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영향, 정서적인 영향, 신체적인 영향, 그리고 관계적인 영향까지도 분노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 3:7-8). 여섯째, 자신이 분노한 죄를 믿음직한 친구에게, 또한 가능하다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에게 고백하라. 이것은 크나큰 치유 행위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일곱째, 당신의 분노를 마음속 교만과 자기 연민의 차단제로 사용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대체하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여덟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신뢰할 때 그분이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한다면, 그 사람까지도 당신의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아홉째, 하나님이 당신의 정의를 옹호하고, 모든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해결하실 것임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지옥에서 대가를 치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이미 대가를 치르셨다. 당신이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보복하실 것을 고려하면)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두 번 처벌하는 셈이거나, 십자가에 대한 위반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Killing Ang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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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
들보
마귀
자기학대
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
by Christopher Ash
2018-11-23
나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다음의 일곱 가지 이유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 1. 시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모든 크리스천은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또 기도에 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눅 11:1). 비록 거듭난 후일지라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주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의 구조는 시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편은 주기도문의 주제들이 더 확장되고 구체화된 기도이다. 물론, 모든 시편이 다 기도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시편은 여러 측면에서 기도의 틀을 만들고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시편으로 기도했다. 우리 역시 그들의 모본을 따를 필요가 있다(엡 5:19).마틴 루터는 그의 ‘시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선생님이 모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나 짧은 글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듯이, 하나님도 시편을 통해 기도의 언어와 기도하는 방식을 미리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기도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신다.”2. 시편으로 기도하면, 풍성한 성경의 진리에 반응하며 살도록 훈련된다하나님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법을 배우도록 성경에 있는 모든 놀라운 진리를 시편 속에 가득 채워 놓으셨다. 초대교회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성경의 각 권이 각각의 특별한 과일을 가진 정원이라면, 시편은 성경 각 권에 있는 모든 종류의 과일들이 자라는 정원이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이 과거에 성경을 통째로 들고 다닐 수 없는 곳에서는 신약과 시편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시편을 통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시편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기도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각 부분을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시편으로 기도하면,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항상 기도하는 균형 잡힌 기도자가 된다시편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축약해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내가 만난 어느 학생은 시편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묘사하고 이해하며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의 색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팔레트와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림의 기본만 배운 어린이는 그저 몇 가지 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그림을 배우게 되면, 점차 자신만의 섬세한 색조를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도 시편에 점점 젖어 들어감에 따라 어린아이의 단순한 경험을 넘어서서 점점 더 풍부하고 복잡 미묘한 내면의 삶을 경험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시편은 어떤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고, 그 감정을 거울 속에 보이는 것처럼 고정되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편에는 성령님이 각각의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인생의 수많은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감정들은 모든 사람들이 삶 속에서 당면해야 하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우리 내면에 출몰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 슬픔, 두려움, 의심, 희망, 걱정거리, 혼란스러움 등이다.”4. 시편으로 기도하면, 무질서한 애정(affections)이 하나님의 선한 질서 속에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우리는 무질서한 애정을 너무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산다. 싫어해야 마땅한 것들을 갈망하고, 깊이 갈망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본성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가장 필수적인 일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도록 만드시는 일일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허락되는 때와 곳에서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영국 성공회의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있는 고전적인 기도문 중 한 편을 살펴보자.“전능하신 하나님, 죄인의 통제되지 않은 의지와 애정에 질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이 명한 것을 사랑하고, 당신이 약속한 것을 갈망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확실히 고정하고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시편이 바로 이 일을 해 준다. 시편은 우리의 애정을 개선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며 복음의 약속된 축복을 깊이 갈망하게 한다. 5. 시편으로 기도하면, 쓰린 감정이 달콤해 질 수 있다우리가 자신을 적대감, 괴로움, 분노 혹은 절망에 방치할 때,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고 삶 전체를 씁쓸하게 만든다. 시편은 이런 어두움의 감정들을 기꺼이 수용해서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주는 정서로 변화시킨다.칼빈이 언급하듯이, 시편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이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가장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는 고난이 도리어 달콤한 경험이 되도록 각자를 성장시킨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 고난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6. 시편으로 기도하면, 개인주의적 경건에 치우칠 위험에서 보호받는다서구 문화에서 기독교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우리’란 모든 시대마다 세상에 존재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 시편을 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시편이 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시편을 읽을 때마다, 당신은 지금까지 존재한 수많은 충성스런 증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같다. 당신이 지금 읽는 시편은 이전에 수천 번, 수백만 번 언급된 말씀이다. 당신이 시편을 읽거나 노래하거나 기도할 때, 당신의 오른편에는 모세와 미리암이 함께 서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으며, 당신 앞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당신 뒤편에서는 제롬과 어거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더 나아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신자들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7. 시편으로 기도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뜨거워진다마지막으로, 시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제이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를 전율케 하고, 식어진 마음을 뜨겁게 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때로 우리의 가슴은 매우 차갑고 무감각하며 열정과 뜨거움이 전혀 없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가워진 영혼의 상태가 다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오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시편을 읽어야 한다.나는 이 글을 통해 당신이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을 시작하기 바란다. 또한, 내가 오랜 시간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샘솟는 애정을 공급받았듯이, 당신도 동일한 복을 누리기를 고대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Reasons You Should Pray the Psalms번역: 김재덕
영성
묵상과기도
시편
기도
기도하는법
성경의진리
균형잡힌기도자
선한질서
바른방향
경건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가?
by Dane Ortlund
2018-11-21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양이나 비둘기 같은 영혼과 성품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크리스천의 마음이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떠올릴 때 온유함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주제는 아마도 ‘열정적인 청교도’일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온유함이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온유한 성품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많이 경시되는 미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에드워즈는 그의 다이어리에 “나의 성품에 아름다움과 광택을 더하기 위해 더 많이 필요한 한 가지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온유함이다. 나에게 온유함이 더해진다면, 나는 더욱더 다듬어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그에게 이 말이 적용되는 진실이었다면, 그 말은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온유함은 남성다운 것인가?어떤 크리스천 남성들은 온유함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유함을 여성스러움과 동일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강함과 온유함은 상호배타적인 가치들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남자답게 가족과 교회에서 리더가 된다는 상상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온유함을 남성다움보다 앞세우는 데 있지 않다. 남성다움이라는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먼저 올바르게 정의하는 데 있다. 결국 진정한 남성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환전상들을 예배당에서 내쫓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내쫓으려던 어린아이들을 기쁨으로 안아 주셨다(마 19:13-15). 이방인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셨고, 친구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또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자답고 건강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13장 23절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기록한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도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18).그러나 예수님의 남성다움은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목숨을 내어 준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남편 됨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남편의 머리 됨과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동일한 희생임을 언급하고 있다(엡 5:25-33). 이러한 희생은 남자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남자다움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미숙한 남성은 강압적이고, 부주의하며, 사랑이 없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남자만이 온유할 수 있다.위풍당당함과 온유함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닮아가는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이 경외로운 장엄함과 부드러운 온유함을 함께 결합시킨다는 사실이다.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장례식 설교에서 성도들이 천국에서 보게 될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한한 장엄함과 위대함만이 아닌 무한한 자비함과 낮아짐과 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끌어안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그들에게 공포가 아닌 기쁨과 놀라움이 배가 되는 일일 것이라고 설교했다.조나단 에드워드가 보기에 진정한 남성다움은 딱딱하고 강인한 겉모습과 부드럽고 연약한 내부를 가진 상태가 아니었다. 도리어 강철 같이 단단한 내부를 통해 아름다운 온유함이 겉모습으로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남성다움은 마초적인 모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불완전한 모습을 완화하려 가식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으로 온유함은 비굴한 것이 아니다. 온유하지 않은 남성다움과 남자답지 않은 온유함은 피해야 한다.우리는 용감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강인하지만 부드럽고, 남자답지만 온유한 삶을 쫓아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합당하게 행하기에드워즈는 에베소서를 통해 크리스천의 삶에서 온화함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논증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 후에, 이 사건이 개인 행동에 대해 무슨 뜻을 가지는지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_____과 _____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2).사도 바울이 빈칸에 어떠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희생과 열정 또는 담대함과 용기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겸손’과 ‘온유’라는 말을 사용했다.에베소서의 1장에서 3장의 결론이 바로 이 부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요점을 이해했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의 아주 높은 신학적 담론은 우리를 평범한 크리스천의 일상생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화함의 향기가 있는 자리로 초대한다. 하지만 그 향기는 결코 일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다. 왜냐하면 그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자리까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ant to Be Like Jesus? Be Gentle번역: 조현빈
영성
영적성장
에드워즈
온유함
남성다움
온화함
겸손
온유
질투를 정복하는 네 가지 방법
by Tilly Dillehay
2018-11-16
질투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죄 중에 유일하게 재미없는 죄다. 질투는 열등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시작해서 원한이라는 불쾌한 감정으로 진척되었다가, 결국 옹졸하거나 공격적인 다른 죄를 양산한다. 설사 질투가 원하는 것, 곧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면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드디어 보게 된다 하더라도, 질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다른 부분으로 촛점을 옮겨갈 뿐이다.이중 어떤 부분도 두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지 않는다. 식탐, 탐욕, 색욕, 허영, 교만, 그리고 다른 유사한 죄악들은 적어도 그 죄만큼의 쾌락을 준다. 하지만 질투는 그 감정이 주인이 되고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죄다. 즉 질투라는 죄는 사람의 마음, 영혼, 생각, 에너지를 지배하지만 그 대가로 쾌락은 물론 그 무엇도 주지 않는다.질투를 벗기 위해 사랑을 입으라감사하게도 크리스천에게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일이 권리인 동시에 의무다(엡 4:22-24).질투라는 죄와 싸우는 크리스천은 자신이 전쟁이 아닌 마음 속 작은 갈등을 겪고 있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질투는 비밀로 숨기기 쉽고, 심지어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상상력이 질투라는 죄를 작은 것으로 착각하게 유혹하기 때문이다. ‘질투는 간음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해치지 않으니까.’ 그런 뒤 질투가 또 다른 죄를 파생시키면, 우리는 질투라는 뿌리는 제거하지 않고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 잘라 내려 한다.이런 태도로는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질투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이는 질투가 ‘은밀한 죄’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판단인지를 보여 준다. 마치 태양 아래 두 사람이 어느 한명 숨김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하나님은 당신의 질투와 간음을 나란히 볼 수 있으시다. 은밀한 죄란 없다.둘째, 성경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마 12:34; 15:18). 질투는 다른 모든 마음의 죄와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질투는 안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으며, 불쾌한 행위와 함께한다.질투는 괴물이며,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을 벌여야 한다. 에베소서 4장의 정신을 따르자면, 질투라는 죄를 ‘벗는’ 훌륭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덕목을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으로 질투와 싸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의 성공을 하나님께 감사하라예수님은 우리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 중 하나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43-48).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은 친구조차도 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질투심은 친구나 지인이 당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원수라고 믿게 만든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졌거나, 당신이 되고 싶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만약 이러한 상태 중에 있다면, 원수라 여기는 그 동료를 위하여 말씀에 순종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그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 함깨 감사하라.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성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 당신이 질투하는 그 사람이 더 성공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그렇다. 그 사람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질투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기도하라.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일류 대학에 진학한 친구가 있다면, 그가 그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도록 기도하라는 뜻이다. 또는 당신이 무척이나 선망하는 스타일의 이성과 친구가 결혼을 했다면, 그 친구가 배우자와 더욱 친밀해지고 그 결혼을 통해 성장하도록 기도하라.곧, 자신을 위해 간구했을 만한 내용들을 가지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라. 영적 안녕 뿐만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하라.3.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즐거워하라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지성, 미모, 은사, 대인 관계와 같은 그 사람만의 특색을 많이 질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선물은 단지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복이 될 수 있다.매력과 유머 감각을 가진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신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동료가 여러 사람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들음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에게 재능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일 당신의 형제자매가 음악을 잘 연주한다면, 좋은 음악을 접할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이처럼 오랫동안 피해 왔던 일, 곧 타인이 가진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선물들을 즐거워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보라.4.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을 칭찬하라일반적인 상황에서 칭찬이란 무언가를 즐기는 행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친구나 지인이 받은 은사를 통해 내가 누리는 것이 있음에도 칭찬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는다면, 이는 사실 부자연스럽다. 마치 좋은 것을 누리다가 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에베소서 4장 29절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하지만 이 명령과 다르게 질투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모든 칭찬 속에 가시를 담아 낸다. 그는 자신의 질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험담을 만들어 낸다.본문은 이와 반대로 행동할 때 기쁨과 은혜의 영향이 늘어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질투하는 대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을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모든 좋은 선물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자유롭고도 자연스럽게 칭찬할 수 있다.질투가 끝나는 시간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그의 약속처럼 우리 안에 사랑을 만드실 수 있다(갈 5:22). 우리 안에서 사랑은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다른 죄들을 밀어내고 있다.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자신이 새롭게 하실 세상에서 모든 질투의 흔적을 지우실 것이다. 단언컨대, 천국에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무엇으로도 그 좋은 일을 전부 담을 만큼 넘칠 것이다. 핵심은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반응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 사랑이 역사하여 참된 기쁨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질투는 지금 잠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전 13:8-1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Conquer Your Envy번역: 하늘샘
생활
감정
질투
은밀한죄
영적전쟁
감사
간구
은사
칭찬
성령
자녀와 매일 ‘하나님 대화’를 나누라
by Julie Melilli
2018-11-15
탁자 위에는 지저분한 낙서들과 찢겨진 노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러진 연필, 지우개가루와 다 마신 음료수 병들이 한껏 구겨진 과자봉지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들리는 낮은 신음소리가 내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이곳은 범죄 현장인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고등학생 아들의 방이었다. 아들은 기하학 숙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팔로 머리를 감싼 아들이 주저 앉아 외치고 있었다. “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은 자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했는지 보여 주며, 자기가 선택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분명히 아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답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나는 맛있게 요리하고, 울창한 정원을 가꾸고, 떨어진 셔츠단추를 달거나 바짓단을 줄이는 일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하학 숙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기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자녀가 기하학 숙제와 같이 답하기 어려운 성경 질문이나 신학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나는 그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강조하자면, 당신이 모르는 문제에는 답을 줄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부모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신앙 교육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어느 순간, 자녀가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그에 대답할 준비가 항상 필요하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공부해야 한다. 어려운 신학 문제를 이해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벧전 3:15),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약 1:5).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자녀를 그리스도의 제자(마 28:19)가 되도록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신학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 얼마나 감사한가! 복음의 기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셨던 모든 일과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녀에게 당신이 경험한 복음에 대해 알려 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성경과 신학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말라. 말씀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하고 흠이 있는 말(입술)을 사용하실 것임을 신뢰하라.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아닌 하나님께 달린 일임을 기억하라. 당신은 그저 자녀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하면 된다.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7). 당신에게 주어진 양육의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이 모든 임무를 위해 당신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고, 신앙 서적을 읽고, 팟캐스트의 성경 강의를 듣고,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영적 멘토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신 일을 깊이 이해할 때, 복음을 나누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일상에서 자녀와 함께하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일단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성경 말씀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7-9)이제부터 ‘하나님 대화‘(God Talk)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화는 내가 일상에서 자녀들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즉, 모든 이야기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때, 그날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은 정말 춥구나. 나는 주님이 만들어 주신 날씨를 기뻐하고 감사해.” 또 당신의 기도 제목을 아이들에게 나누고,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지 아이들과 함께 점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불평거리를 찬양과 감사로 바꿔 준다. “오늘도 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주무시지 않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아이들과 함께 기도한다. “하나님, 이 밤도 평안한 쉼이 있도록 돌봐 주세요.”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일상 대화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이끄는 것이 좋다. 짐작했겠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더 많이 할수록 당신은 자녀와 가까워질 것이다. 당신의 자녀는 이 대화를 통해 삶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이제 당신은 자녀와 복음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나눌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최고의 스승으로 삼았으니, 담대할 필요가 있다. 자녀가 “죄가 뭐죠?”라고 묻기를 기다리지 말라. 당신이 먼저 죄에 대해 가르치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친구나 동생과 다툴 때,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라. 죄의 결과와 회개의 방법, 용서에 대해 말해 줘라. 일상생활 속 예화와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있다면, 잘 정리하여 당신과 자녀가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바란다. 이해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복습해 보는 것도 좋다.하나님에 관한 대화가 힘들 때때때로 자녀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때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당신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음을 자녀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녀 앞에서 인정하는 일은 큰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전으로 인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대화하지 않는 것보다는 답을 모르는 편이 더 낫다.마지막으로, 자녀와 이런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 권면하고 싶다. 분명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 대화에 도전한다면, 당신의 자녀는 신앙 성장의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십대 자녀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의 시도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일련의 과정이 당신 마음을 괴롭힐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인하여 자녀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자녀에게 열린 마음과 들을 귀를 허락하셔서 말씀을 깊이 깨닫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라. 비록 자녀가 당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동안 딴짓을 하더라도, 분명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이야기의 서두에 등장한 기하학 숙제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은가? 결국 아들은 기계 공학을 전공한 이웃에게서 도움을 얻었고, 덕분에 꽤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결말은 그 이웃이 기하학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이 신학에 대해 ‘기계 공학을 전공한 사람’ 만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녀의 바른 신앙 교육을 위해서라면, 전공자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녀의 기하학 숙제는 학원이나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담당 교역자가 아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필수 구성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를 위한 첫 번째 신앙 선생님은 바로 ‘당신’이다.부모에게 자녀의 신앙 교육은 가장 큰 소명이고, 특권이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에게 능히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원제: Make ‘God Talk’ an Everyday Part of Family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고갑균
가정
양육
그리스도제자
자녀의신앙교육
부모의특권
하나님에관한대화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아홉 단계 화해법
by John Piper
2018-11-12
하나님의 은혜는 오랜 인내와 즉각적인 실행, 그리고 꾸준함으로 나타난다. 화해를 시도할 때 우리가 종종 저지르는 실수는 그 방법에 대해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먼저 사과할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하면 마치 사과의 기회가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생명력 있는 결혼생활은 골로새서 3장 13절 말씀을 실제의 삶에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이 구절에는 "서로 용납하여"와 "용서하되"가 함께 있다. 이 두 가지가 결혼생활에서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배우자와 화해에 이르는 방법을 아홉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자 한다. 마음이 죄로 가득한 나머지, 진심을 담아 배우자에게 사과를 건네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가? 그렇다면, 다음의 아홉 단계가 유용하리라고 생각한다. 이 방법은 실제 자주 일어나는 상황을 기초로 형성되었기 때문에 잘 기억해두고 활용한다면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당신 자신만이 아니라 배우자의 입장에서도 다음의 단계들을 살펴보기 바란다). 1단계배우자가 당신의 말이나 행동의 잘못된 부분 또는 자신의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지적한다. 2단계그 말을 들은 당신은 화가 난다(순간 당신이 화를 내야 하는 대여섯 가지의 이유들이 떠오른다). 3단계그러나 그 분노가 경건한 반응이 아니며, 지적 때문에 화를 낸 것은 사과해야 할 일임을 머리로 먼저 깨닫는다. 4단계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미 화가 났기 때문에 진심으로 미안함을 느끼기 어렵다. 마음은 다정하지 못하고,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미안함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머리로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미안하다고 말한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이 침묵보다는 낫다. 이런 행동은 은혜의 부분적인 결과이다.5단계배우자는 당신이 화가 나 있는 상태를 느끼게 되고, 진심이 아닌 사과에 만족하지 않는다. 6단계하루이틀의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거룩하신 성령은 당신을 그대로 두지 않으신다. 성령께서는 당신으로 하여금 화내기를 멈추게 하신다(약 1:19-20). 그리고 복음의 진리들을 다시 상기시키신다(엡 4:32). 또한 부드러운 마음을 허락하신다(겔 36:26). 이 같은 성령의 사역은 말씀을 읽거나 친구와의 대화 중에, 또는 책을 읽다가, 혹은 예배를 통해서 일어날 수 있다. 그동안 당신의 배우자는 당신과의 대화를 기다리고, 궁금해 하고, 기도하며, 화해를 소망하게 된다. 7단계이제 화는 누그러진다. 다정함이 솟아나며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또한, 죄에 대한 반성과 슬픔이 자라난다. 8단계당신은 배우자와 마주보고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게 된다. 처음에 했던 사과는 당신의 죄성으로 인해 그 순간 할 수 있는 최선의 사과였으며, 충분하지 못한 사과였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배우자를 어떻게 느끼는지 다정하게 말해 주며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9단계자비로운 마음으로 배우자는 당신을 용서하고 모든 상황은 나아지게 된다. 나는 당신이 결혼생활에 도움이 되는 이 아홉 단계의 화해법에 대해 배우자와 함께 나누길 원한다. 그리고 이 방법을 어떻게 두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하길 원한다. 이를 실천할 수 있다면 상대방을 함부로 몰아붙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이 분노를 절제할 수 있을 때, 화가 잠잠해지기 전까지의 단계(1-6단계)가 두 사람에게 너무 큰 절망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 Possible Marriage-Saver in Nine Steps번역: 매일배움
가정
결혼
지적
분노
성령
사과와용서
자비
분노절제
화해법
몸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y Kendra Dahl
2018-11-11
건강, 운동, 다이어트는 새해 결심의 최상단을 장식하는 키워드로 매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잘 맞던 청바지를 움켜쥐고 이 옷을 다시 입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피트니스 연간 회원권이나 요가복의 세일은 우리의 결심을 더욱 부추긴다. 또한, 페이스북에는 몸매와 운동에 대한 게시물이 넘쳐난다.나 역시 살을 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어린 시절, 수영장에 가면 남자 아이들의 놀림이 두려워 항상 헐렁한 티셔츠로 몸을 가렸다. 그러다 열두 살 즈음에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친구들로부터 그토록 원했던 선망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그 이후로 내 몸매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식이 조절과 운동, 심지어는 일부러 구토까지 하면서 이 모든 과정을 줄기차게 따랐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몸매에 대하여 늘 부족함을 느꼈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친구들보다 빠른 임신과 출산의 경험은 몸에 대한 불만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젊고 늘씬한 친구들의 몸에 비하면 나의 몸은 처지고 모양새가 없어 보였다. 물론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끊어질 수 없는 그분과의 관계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사랑하는 남편과의 강한 유대감이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내 안에 지속되어 온 몸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후로 여러 해가 지나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더 갖게 되었다. 그러나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불평하는 자아와 크리스천으로서의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여러 신학자들은 로마서 8장을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손꼽는다. 이 장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의 풍부한 교훈은 추상적이거나 서로 동떨어진 개별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크고 원대한 통찰로서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알려 준다. 이제부터 로마서 8장을 통해 하나님이 몸에 관해 알려 주시는 세 가지 진리를 살펴보려 한다. 이 교훈들이 당신의 내년 새해 다짐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1.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아름다움의 기준은 문화마다 다르고, 유행의 흐름에 따라 제각기 변화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풍만한 하체를 아름답게 본다. 반면,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날씬함을 넘어 가느다랗고 마른 다리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 갈망해야 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상적인 몸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 몸의 형태가 아닌 마음의 상태, 즉 우리에게 부족한 영의 모습에 대하여 가르친다. 멋진 몸매를 향한 열망은 결국 자부심에 대한 목마름이다. 늘어난 몸무게, 또다시 실패한 다이어트, 등록만 한 채 가지 않은 헬스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을 정죄하는 점점 더 많은 조건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이 정도면 자부할 만하다고 평가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기준을 세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고군분투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로마서 8장 1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주시는 이러한 자유는 나의 겉모습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토록 바라는 신체적 화려함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타인의 눈을 사로잡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가 아름답고, 섹시하고, 자신만만하고,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눈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갈망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변치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그 사랑의 뿌리가 우리의 외양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찬사나 사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쉽게 변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몸매를 만드는 것과 그 결과인 타인의 선망은 결코 자아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몸에 대한 욕구라는 주제 아래 영적인 문제와 죄성에 관하여 논할 부분들은 충분히 많지만 그중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두려움이나 욕망의 외피를 벗어 던질 자유를 얻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껍질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정죄함이 없는 그 사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몸매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늘 거울 속 자신의 몸매가 자부할 만한 모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보혈의 은혜는 그 모든 정죄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자유롭게 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정죄는 물론이요, 약한 자아가 스스로를 정죄하려 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2.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선(善)을 위하여 모든 일에 역사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이룬다 함은 우리의 성품이 변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심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잘 알려 준다. 멋진 몸매 만들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혹은 거룩하지 못한 삶)과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서 우리의 몸과 거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가꾸고 훈련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외양이 아닌,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꾸는 데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멋진 몸매를 만드는 시간 속에서 종종 반복되는 좌절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황조차도 우리 영혼의 성숙을 위해 사용하신다. 당신은 식이 조절과 피트니스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오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우상을 보게 하시고, 자만을 뿌리뽑으시며, 진정한 거룩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이는 우리가 몸을 위하여 애쓰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내가 무려 354번째 다이어트에 실패했을 때이다. 하나님은 이날의 실패를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한걸음 더 성숙해지는 데에 사용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빌 1:6).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몸로마서 8장 23절은 연약한 몸 때문에 마음으로 탄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기를 열망하고 기다린다. 더욱이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과 아프거나 죽지 않을 영원한 부활을 이미 약속 받았다. 하지만 육체는 여전히 약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아직 부활하지 않은” 세상 속의 육체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육체의 노쇠를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멋지고 강하게 만들라고 권하지 않는다. “너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 오히려 그는 교회인 몸으로 죄짓는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 몸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전 6:19-20). 그런데 매일 운동을 하는 것, 유기농 제품을 챙겨 먹는 것, 주님이 아닌 타인의 찬사를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몸을 헌신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가?몸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매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힘으로 성취하실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은 흙으로 빚은 연약한 몸 안에 복음이라는 보화를 담고 다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러한 모습으로 만드셨을까? 우아하면서도 충격에 강한 값비싼 도자기처럼 만드실 수는 없었을까? 왜 하필 약한 질그릇의 형태로 만드셨을까? 그 이유는 몸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원대한 힘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4:7).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 친구가 내게 당부했다. 만약 몸을 관리의 대상으로 본다면, 좀 더 강하고 멋진 신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육체는 연약하지만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물리적, 외양적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관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겉모습이 아닌 역할에 있음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해야 한다. 즉, 우리 몸을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 드리도록 관리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크리스천은 한낱 풀과 같이 시들어질 외양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며몸을 대하는 방식은 곧 영혼의 상태를 대변한다. 음식에 대한 강박, 인정에 대한 욕구, 멋진 몸매가 만족을 완성한다는 환상까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영혼의 상태이다. 물론 신체를 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건강과 멋진 몸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도, 육체는 여전히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크리스천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넘어 영원히 다시 살아날 그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고전 15:42). 우리는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그 소망 안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롬 8:24).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s You Start that Diet: 3 Truths About Body Image번역: 정새롬
생활
건강
몸
정체성
정죄
영혼의성숙
성령의전
질그릇
부활
꾸준히 기도하라!
by John Piper
2018-11-11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골로새서 4:2-4.본문은 지금 우리도 들어야 할 기도에 대한 다섯 가지 지침을 준다. 첫째, 꾸준히 기도에 힘을 써야 한다. 흔히 우리가 특별 기도 주간에만 보여주었던 부지런한 모습을 평소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꾸준한 기도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간청하는 벗’(눅 11:5-8)이라든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눅 18:1-8)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꾸준함은 참된 성도의 삶을 검증하는 최고의 테스트이다. 나는 성도 가운데 60년, 70년, 혹은 80년을 꾸준히 기도해 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들이 많은 교회는 얼마나 복된가! 둘째,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울은 이 지침을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했지만 그들은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네가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할 때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산만하게 흐트러져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황하지 않아야 하며, 헛되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진부하고 의미 없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분명히 우리 안에 기도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경험하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기도하는 성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써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더욱 감사함으로 기도에 매진하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넷째, 말씀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도할 수 있다. 먼저는 주일마다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주중에 우리가 복음을 나눌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여자[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행 16:14).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일에도 주중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딤전 3:16). 이 비밀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일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 얼마나 내게 과분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택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으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다. 그리고 꼭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제: Persevere in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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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히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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