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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by 김형익
2020-10-30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너무 섬뜩하게 들리는가? 이 말은 목회를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말은 아니지만, 목회의 중요한 본질을 설명해준다. 대부분의 동료 목회자들처럼, 나도 목회 현장에서 다양한 죽음들을 보아왔다. 연로하고 기력이 다하여 돌아가시는 죽음은 물론, 사고로 인한 죽음 그리고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 심지어 살인사건의 죽음까지 말이다. 죽음은 우리 일생에서 자신의 것으로는 단 한 번 직접 겪는 일이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많이 경험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죽음 이전에, 부모의 죽음은 물론, 배우자나 자녀의 죽음 그 외에도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겪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죽음은 그리 멀리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학의 발달로 과거 100년이나 200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죽음으로 인한 사별을 경험하는 일이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죽음은 드문 일은 아니다. 그리고 목사는 원하든 원치 않든 이런 모든 죽음 앞에서 남은 가족들을 위로하면서 장례예식을 집례해야 한다.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도록 준비시키는 목회내가 목회를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장례예식을 은혜롭게 치러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장례예식에서 적절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가족을 적절히 위로하고 모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중요하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언젠가 우리도 다 눕게 될 관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도록 살아생전에 신실한 믿음으로 영원을 준비하는 인생을 살게 하는 일이 목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목회는 영원을 목표로 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교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나는 거짓되거나 과장된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을 것입니다. 잘 사십시오. 여러분의 죽음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지라도 영광스러운 죽음이 될 수 있도록 믿음으로 오늘을 잘 사십시오.” 그리고 약간의 엄포를 놓을 때도 있다. “제가 여러분의 장례식에서 ‘여러분, 이 분처럼 살지 마십시오. 그렇게 산다면 그 죽음은 비참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도록 잘 사십시오.”라고 말이다. 비록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더라도,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고 개선하는 장군들의 뒤에서 전쟁 포로들로 하여금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고 외치게 했던 로마의 장군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자들었던가!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일지라도 언젠가 너의 죽음도 찾아온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겸손히 행하라”는 말을 들을 만큼 그들은 지혜로웠다. 이에 비하면,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어리석은 시대다. 팀 켈러가 그의 책 ‘죽음에 관하여’에서 말했듯이, 의학의 발달 위에서 비종교화, 세속화된 현대 사회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삶의 쾌락 뒤로 숨겨두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헬무트 틸리케의 말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섣달 그믐날 큰 소리로 떠든다. 마치 우리의 무덤 위로 자라나는 풀의 섬뜩한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처럼.”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교우들로 하여금 자신의 죽음을 기억하고 준비하게 하는 목회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르는 일이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피하고 외면하고 싶은 주제를 매주일 마다 상기시켜 주어야 하는 일이니 말이다. 나는 강단에 설 때마다 교우들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아있는 오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살 수 있도록 말씀으로 깨우치려는 수고를 감당한다. 그리고 성경이 신자들에게 약속하는 영원의 소망을 상기시켜 주려고 한다. 이 세상에 목을 매고 살아가려고 하던 마음이 번쩍 깨어나고 영원의 관점에서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말이다. 목회의 이런 초점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더 진지하게 대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는 정말 진지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사별을 믿음으로 직면할 수 있게 하는 목회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고 할 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하나 더 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통한 이별이다.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기 전에, 다양한 죽음으로 우리 곁을 떠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먼저 대면하면서 살아간다. 몇 번을 경험한다고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은 결코 익숙해질 수도 없고, 감당하기 쉬운 일도 아니다. 목회는 자신의 죽음만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라는 아픈 현실을 신앙으로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시킨다는 의미에서도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요즘 교우들과 함께 ‘상실의 아픔을 딛고 서다’(사랑플러스 간)를 읽으면서 ZOOM으로 독서 나눔을 하고 있다. 유전적 병을 안고 태어난 두 아이를 각각 6개월 만에 잃은 데이비드와 낸시 거쓰리 부부가 쓴 책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죽음으로 잃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또 어떻게 믿음으로 이 상황을 직면해야 하는지를 잘 정리해준 책이다. 사별은 특히 배우자와의 사별은 인생에서 비교할 수 없는 큰 상실의 경험이다. 토마스 홈즈와 마수수(Thomas Holmes and M. Masusu)는 생활의 다양한 경험에서 생기는 스트레스를 측정할 수 있는 표를 만들었는데(1974, 오래 되기는 했지만 그들이 다룬 인생의 스트레스의 문제는 여전하다), 여기서 그들은 스트레스 지수를 0점에서 시작해서 최고를 100점으로 정하였는데, 최고의 스트레스를 받는 1-3 순위는 이렇다: ①배우자와의 사별 100점, ②이혼 73점, ③가족과의 사별 63점. 홈즈와 마수스는 스트레스는 축적되는데 한 해 동안의 스트레스 지수를 합산하여 150점이 안 되는 사람들의 1/3 정도가 향후 2년 내에 큰 병에 걸릴 수 있고, 150-300점인 사람들은 4/5가 향후 2년 내에 심각한 병에 걸린다고 말한다. 가정은 물론, 좀 더 큰 가정인 교회에서는 먼저 가는 성도들을 보내는 사별의 사건들이 쉼 없이 일어난다. 목회는 이런 상실의 경험을 교우들이 믿음으로 직면하고 잘 감당하도록 돕는 일이다. 이렇게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사별이라는 죽음을 준비시킨다는 점에서, 목회는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죽음아무리 신자가 죽음의 순간을 영광스럽게 맞을 수 있게 하려고 한다 해도, 죽음이 본질상 선한 것이 아님을 부정할 수는 없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인간에게 들어왔고, 죽음은 죄의 삯이다(롬 6:23). 그럼에도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히브리서 2:14–15)” 주셨다. 믿는 자들에게 말이다.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성도들이 경험하는 죽음의 의미를 역전시켰다. 여전히 죄의 결과로 주어진 죽음은 슬프고 비통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되고 그들의 죽음은 영광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이 말은 진리지만,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리 쉽지만은 않은 말이다. 우리가 이 진리로 자신을 무장시키고 살아왔을지라도, 정작 자신의 죽음 앞에 서게 될 때에는 잠깐의 두려움이 엄습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결코 달가워할 수 없는 일이다.나는 존 번연이 ‘천로역정’에서 죽음의 강에 이르게 된 ‘크리스천’이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는 모습을 그려준 것이 감사하다. 성도들 중에는 ‘소망’처럼 죽음의 강을 의연하게 건너는 이들도 있고, ‘크리스천’처럼 죽음의 강 앞에서 두려움이 차오르기는 이들도 있지만, 결국 성도는 영광스럽게 그 천성문으로 들어가 사랑하는 주님을 뵙게 될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의 고백은 목회가 죽음을 준비시키는 일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나는 결코 다시는 설교를 하지 못할 사람처럼 설교를 했습니다.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듯이 말입니다.” 죽음을 준비시키는 목회의 본질이, 이 땅의 교회들에서 회복되기를 고대한다.이 글과 함께 읽으면 좋은 글: 죽음을 더 많이 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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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관하여
낸시거쓰리
사별
천로역정
리처드백스터
변증적 설교 :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0-10-13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가장 큰 특징은 변증적 설교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인생 베이직 시리즈’는 팀 켈러 목사의 설교의 핵심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서 그의 설교를 분석하고 이해하기 적합한 책이다. 앞으로 두 번에 걸쳐 팀 켈러 설교의 변증적 방법과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이야기 하려고 한다. 팀 켈러 목사 변증적 설교 방식은 코넬리우스 반틸의 ‘전제주의 변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화해서 사용한다. ‘전제주의 변증’이란 복음을 선포할 때 단순히 성경의 진리를 선포하는 방식이 아니라, 성경과 복음을 믿지 않는 이유를 파헤치고 상대방 안에 있는 잘못된 전제 즉 그 사람이 가진 신념의 모순을 드러낸 후, 복음으로 초대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팀 켈러의 설교에는 청중과의 ‘접촉 요소’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청중과 접촉되는 요소를 통해 그들의 생각 속에 있는 잘못된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파헤친다. 이 접촉요소를 위해 팀 켈러는 일반서적들을 읽으면서 문화적 내러티브를 파악하고, 다양한 서적과 자료들을 통해 문화 내러티브에 대해 반대하는 자성의 목소리를 연결하여 설교에 자주 인용하는 편이다. ‘인생 베이직 시리즈’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를 분석하고 그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1.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라 1) 결혼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오늘날 결혼에 대한 문제 중의 하나는 결혼의 시기가 늦어지고 결혼의 비율도 낮아진다는 것이다. 왜 현대사회는 이전 시대보다 결혼을 선택하지 않는 비율이 높은가? 팀 켈러는 두 가지 이유를 설명하는데 하나는 경제적 스트레스이고 또 하나는 팽배한 개인주의라고 분석한다. (결혼에 관하여 12쪽)결혼을 하면 경제적으로 자원이 축난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담은 더 해질 것이라는 불안과 결혼은 개인의 자유를 제약한다는 신념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더라도 자신의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배우자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것은 더욱 상대방에게 과도한 짐을 안겨주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건강한 결혼의 기초를 놓을 수 없게 된다고 설명한다.(결혼에 관하여 18-22쪽)현대의 결혼관은 결국 자기중심적 결혼관이며, 그것이 결국 결혼을 통해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을 얻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고,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상대방에게 전 인격을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연합하는 것임을 이야기 한다. 팀 켈러는 강요하지 않지만 두 가지 세계관을 대비시켜주고, 세상의 문화적 관점은 모순이 존재하고, 성경적 관점으로 결혼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하고 이치에 맞는 삶임을 드러내준다. 이 과정을 충실히 할 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팀 켈러는 이렇게 말했다. “청중은 비록 설교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설교의 논리 전개에는 강하게 공감할 것이다.”(센터처치 22쪽) 2) 죽음에 대한 문화 내러티브 과거와는 달리 현대인들은 죽음 자체에 대해 준비가 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왜 오늘날의 사람들은 선조들에 비해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일까? 그 이유를 팀 켈러는 네 가지로 말한다. 첫째는 현대 의술의 발달로 죽음을 우리 눈에 띄지 않게 가려놓았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죽음과 시체를 보는 경우도 많았는데 요즘은 병원 영안실에서 모든 것을 처리하기 때문에 죽음과 일반 사람들의 삶이 동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는 세속화를 통해 현재의 의미와 만족을 추구하는 세계관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죽음을 부정하다보면 깊은 존재의 허무감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도록 노력하는 경향이 강하다. 네 번째는 죄와 죄책감 그리고 용서라는 범주가 사라졌기 때문에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런 문화 내러티브의 분석은 단순히 팀 켈러의 생각이 아니라 어네스트 베커의 ‘죽음의 부정’과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일반서적들을 인용함으로 더욱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죽음에 관하여 14-34쪽)팀 켈러는 ‘설교’에서도 포스트모던 시대의 사람들에게 설교할 때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권위있는 사람들의 말을 활용해 논지에 힘을 실으라”고 말한다. 특히 성경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신뢰할 수 있는 자료를 동원해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설교 144쪽)팀 켈러는 이런 문화적 내러티브에 영향을 받은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신념이 가진 모순과 그 뿌리를 알려줌으로 그 신념이 바르지 않은 기초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복음으로 초대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전개한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죽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그 죽음은 인간의 힘이 아닌,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일임을 선포한다. 특히 팀 켈러가 문화 내러티브 안에 있는 신념을 드러낼 때는 일반 서적들을 사용해서 모순을 드러낸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사람들의 생각의 모순을 드러낼 때 성경을 통해 반박을 하게 되면 으레 반발이 일어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적군의 칼을 통해 적군 스스로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방식을 사용한다. 문화 내러티브를 형성하게 된 다양한 신념들을 동일한 문화 내러티브 안에서 반대의견을 통해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2. 성경적 대안이 가장 합리적임을 증명하라성에 대한 오늘날의 문화 내러티브는 결혼이라는 제도 밖에서도 자유로운 성관계를 허용하는 것이 개인의 자유를 극대화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이 말하는 혼인 안에서 성관계는 자유를 제약하는 규제같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팀 켈러는 그 문화적 내러티브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2018년 ‘뉴욕 타임즈’에 기고한 Courtney Sender라는 여성의 ‘He Asked Permission to Touch, but Not to Ghost’(그는 내 몸을 터치할 때는 늘 허락을 구했지만, 그 뒤에 그냥 종적을 감춰버렸다)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이 여성은 데이트 앱에서 한 남자를 만나 성관계를 가졌는데, 남자는 사사건건 여성의 합의를 구했다. 스웨터를 벗겨도 되는지, 그녀가 허락하자 탱크톱과 브래지어를 벗겨도 되는지 차례로 물었다. 그것이 자신을 향한 일종의 배려로 느껴져 아주 친밀함이 들었다는 그 여성은 그 다음날 문자를 보내자 답이 없고 그 남자는 그냥 잠적해 버렸다. 그 사건을 경험한 여성은 오늘날 남자와 여자들 사이의 합의에 의한 성관계라는 것의 폭이 너무 좁다는 것을 깨달았다. 팀 켈러는 뉴욕 타임즈의 글을 그대로 설교에 인용하여 오늘날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그 여성의 목소리로 들추어낸다. “합의를 성적인 부분으로만 국한 시키면 의미가 없어진다. 몸은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일부분일 뿐이다. … 육체만 배려하는 합의가 아니라 … 상대의 전인격을 배려하는 것이면 좋겠다. … ‘내가 당신을 배려하는 것처럼 행동하다가 다음날 사라져 버려도 될까요?’라는 물음에 그러라고 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테니 말이다.”이런 예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면서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에게 삶 전체를 내어주지 않으면서 몸만 준다면 이는 자아의 통합성을 인식하지 못한 처사이다. 하나의 오롯한 인격체에서 몸만 떼어날 수는 없다. 남녀 간의 성관계는 진정 서로의 삶을 주고받는 행위여야 한다. 나중에 제멋대로 떠날 사람에게 몸만 내주는 것은 인간성이 말살된다. 그 사람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결혼에 관하여 27-30쪽)문화 내러티브를 따라 생각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순을 뉴욕 타임즈의 기사를 통해 더 쉽게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들의 문화 내러티브는 인간의 인격을 총체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몸만 떼어내서 생각하는 잘못된 관점임을 깨닫게 된다. 아울러 그토록 고리타분한 규제라고 생각했던 성경적 관점이 더 총체적으로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임을 인식하게 된다. 팀 켈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합의에 관해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관점이 가장 깊고 폭넓다. 부부 사이에서만 잠자리를 허용할 수 있다는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성행위는 전인적 합의가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팀 켈러의 변증의 방식은 지혜롭다. 성경과 문화를 대비시키면서 싸우는 작업을 거치지 않고 쉽게 사람들의 생각 속에 있는 신념들의 모순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성경적 해답에만 집중하지 말고,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낼 수 있는 일반서적들을 잘 활용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신념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은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다. 일반서적은 삶의 문제에 해답을 제공해 주지 않지만 다양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져준다. 이제는 더욱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신앙서적을 포함한 다양한 일반서적의 독서를 통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들이 필요한 시대이다.
목회
설교
팀켈러
인생베이직
결혼에관하여
죽음에관하여
태어남에관하여
문화내러티브
전제주의변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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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리더는 자신의 한계를 잘 안다
by Paul Tripp
2020-10-11
남자들을 위한 컨퍼런스를 인도할 때 한번은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초능력을 하나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떤 것으로 하겠냐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하늘을 날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엄청난 힘을 갖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내 대답은 이것이었다. “일주일을 10일로 만드는 능력을 갖고 싶습니다.”나는 한계가 싫다. 나는 시간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하도록 하는 더 큰 능력과 굳이 조사와 연구에 시간을 쏟지 않아도 결과를 낼 수 있게 하는 더 큰 지혜를 가졌으면 좋겠다. 나는 무한하고 싶고 또 전능하고 싶다. 아직까지도 내게는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순간이 있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한계로 인한 좌절에서 내가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결코 나는 그럴 수 없다. 사역을 하다 보면, 현실적이고 건강하게 감당할 수 있는 정도보다는 좀 더 일을 하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내 능력으로 책임감 있게 처리할 수 있는 일보다는 더 많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이력서를 쓰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한다. 게다가 지도자의 경우, 그의 업무가 사역의 성공에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서 일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한계를 가진 지도자우주에서 유일하게 무한한 존재는 창조주이다.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은 한계를 가지도록 하나님에 의해 설계되었으며,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의 경계 밖에서 살고, 사역하고, 인도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게 창조되었다. 리더십 커뮤니티가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떤 작업을 수행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정확한 한계를 정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커뮤니티 구성원이 영적으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유지하는 데에 너무도 중요하다. 모든 지도자는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더불어 하나님이 부여한 한계의 꾸러미들이다. 그렇기에 은사와 한계, 이 두 가지 중에서 오로지 한 가지에만 집중할 때 위험한 일이 생긴다. 아무리 리더라도, 당신은 결코 강점과 은사 그리고 경험으로만 이루어진 패키지가 아니다. 당신은 약점과 취약성의 모음이기도 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실로 감미로운 격려를 제공한다. 우리는 한계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혼자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는 곳에는 하나님도 같이 가신다. 우리의 약점은 그분의 은혜를 드러내기 위한 작업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약점을 저주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한계와 약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하실 수 있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립적인 힘이 가진 한계와 망상을 부인하는 도구가 된다. 그래서 나는 창조주의 지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설정하신 한 가지 구체적인 한계를 여러분과 함께 생각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한계를 얼마나 지속적으로 인정하고 또 겸손하게 받아들이는가의 여부가 리더십 커뮤니티가 사역을 계획하고, 업무를 할당하고, 건강성을 평가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말하고 싶다. 그건 바로 모든 리더가 성숙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한적인 영적 성숙도리더십 커뮤니티의 모든 구성원이 영적 성숙도에 있어서 한계를 가진다는 사실은 모두가 다 인정해야 하는 중요한 점이다. 모든 지도자는 다 성화의 과정 속에 있다. 사역 리더십에 얼마나 오래 있었든, 아무리 훈련을 잘 받았든, 신학적으로 얼마나 성숙했든 관계없이 우리 모두는 여전히 미래에도 영적 진보가 필요한 존재이다. 누구에게나 사각 지대가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유혹에 취약하다. 각 사람은 다 성격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에게는 지금도 여전히 구원시키고, 확신하게 하고,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이 필요하다.따라서 리더십 커뮤니티는 리더라도 복음에 다 도통한 사람처럼 간주해서는 안 된다. 리더십 공동체는 그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양육하는 데에 전념해야 한다. 단 한 사람도 영적 고립과 분리를 경험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적인 복음 사역뿐만 아니라 “서로”를 돕도록 부르셨다. 타락하거나 시험에 빠진 목회자와 대화를 나눠보면 그런 사역자 주위에는 언제나 목회적 사랑과 보살핌과는 거리가 먼, 취약하거나 또는 역기능적인 리더십 공동체가 있기 마련이다. 모든 지도자는 지속적인 제자 훈련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모든 지도자는 상황에 따라서 자기 자신을 직면하는 힘든 순간을 가져야 한다. 또한 모든 지도자는 복음의 위로가 필요하고, 자신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형제자매의 도움이 필요하며, 여전히 속에 남아있는 옛 사람의 공격과 맞서 싸우기 위한 사랑과 격려가 필요하다. 상황이 이런데도, 복음 사역을 구상하고, 설계하고, 유지하고, 평가하고, 재설계 하느라 너무 바빠 이끄는 사람들의 영혼을 돌볼 시간을 만들기 힘들다는 말을 어떻게 감히 할 수 있을까? 한계를 갖고 살면서 사역하기천국에 가기 전까지 우리는 한계를 가지고 사역할 것이며, 타인과 관계하며 삶을 살 것이다. 우리의 한계는 절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려는 일을 방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한계조차도 모두 그분의 지혜와 사랑이 가져다 준 결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우리는 그가 만드신 한계 내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나 또 리더십 커뮤니티 내에서의 대화에서도 그러한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명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런 한계를 벗어던지고 살고 싶은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또한 한계에 대처할 때에는 겸손하고 현명한 방식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한계가 있는 사람들을 복음적 리더십으로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적 겸손함과 소망으로 이러한 한계를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한 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드러나더라도 내가 가진 한계를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다져야 한다. 그리고 그런 작업은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이루시는 그분의 일이 완성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od Leaders Embrace Their Limit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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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주
피조물
영적성숙도
리더십커뮤니티
복음적리더십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배우는 다섯 가지 목회 멘토링
by Pete Schemm • Vince Oliveri
2020-10-04
목양, 설교, 전도, 양육 및 상담을 비롯해서 목사가 짊어진 책임은 적지 않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유독 한 가지, 많은 이로부터 제대로 조명받지 못하는 역할이 하나 있는데, 기독교 리더라면 누구나 감당해야 할 멘토십이라는 책임이다. 멘토십은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견습뿐 아니라 개인적인 제자 훈련을 포함하며 특히 인격 형성과 방향 설정 및 친밀함을 중시하는 현대 교회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데에도 적합하다. 멘토링은 교회의 건강을 증진하고 목사의 삶과 사역에 활기를 불어 넣을 뿐 아니라, 미래의 지도자를 육성하는 잠재력까지 가지고 있다.그럼 어떻게 해야 좋은 멘토가 될까? 목회적 멘토십의 핵심이 되는 활동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행히도 오늘날 멘토십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에게 방향이 없는 게 아니다. 성경과 개인 멘토링 외에도 교회 역사는 이와 관련해서 풍부한 통찰력의 유산을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조나단 에드워즈의 경우 워낙 유명한 신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숙련된 멘토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리스 베잔트(Rhys Bezzant)는 최근에 출간한 저서 ‘에드워즈, 멘토(Edwards the Mentor)’에서 에드워즈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바꾸려고 노력했을 뿐 아니라, 그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목회적 멘토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를 보여준다. 베잔트의 책에서 발췌한 다음 다섯 가지 관행은 미래 목회자 개발과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취한 전략적 접근 방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1. 우정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답답한 신학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베잔트가 지적했듯이 인류 번영과 관련해서 에드워즈가 가졌던 비전은 특히 그가 멘토링한 사람들과 나누었던 우정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에드워즈가 그의 친구이자 사역의 멘티(mentees)였던 젊은 남성들에게 가졌던 신뢰감이 얼마나 깊었는지는 그가 뉴저지 대학(현재의 프린스턴 대학)의 총장직을 맡을 것인지 여부에 대한 결정까지 그들에게 맡겼다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에드워즈는 개인적인 조언을 구하기 위해 그들을 불렀고, 자신은 총장직 제안을 거절할 생각이라고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그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릴 통일된 지혜로운 결정에 복종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에드워즈의 멘티들은 그가 총장직을 맡아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일치했고, 에드워즈는 약속한대로 그들의 결정에 따랐다.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멘티 중 한 사람은 에드워즈가 프린스턴에 안착하는데 도움이 준 일종의 조사위원회를 맡기도 했다. 동료애, 지혜, 다양한 목소리, 깊은 신뢰가 특징인 기독교 형제애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요소가 에드워즈의 우정 속에 수렴되었다. 교회에 복음 변화(gospel change)를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기독교 우정에 기반한 목회적 멘토링이다.2. 대화에드워즈의 첫 전기 작가인 새뮤얼 홉킨스는 우정의 멘토링 내 대화에서 이루어지는 에드워드의 의도적인 훈련 방법 중 하나라고 제안했다. 대화는 서로 존중하는 관계라는 맥락에서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교환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대화는 18세기 런던과 뉴 잉글랜드에서 유행했으며 커피 숍, 클럽 및 기타 공공 장소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대화를 단지 교양있는 기술, 그 이상의 것으로 보았다. 그에게 대화는 은혜의 수단, 즉 하나님의 말씀을 토론함으로써 서로 복음 안에서 서로의 정체성을 키우는 방법이었다. 멘토링 관계 내에서 대화는 중요하다. 대화는 강의가 아니기에 단지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지시 수준을 뛰어넘어서 사람을 발전시키는 방법이다. 베잔트가 설명했듯이 에드워즈의 대화 방식은 다른 사람들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무엇보다 형제애와 박애감을 조성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우리 모두가 창조받은 존재로서 스스로의 존엄성을 높이는 쉬운 방법이기도 하다. 불행하게도 교만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보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 유용한 대화 기술을 배우지 못하게 만든다. 무지한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기꺼이 배우고자 할 때,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 교만과 과시하려는 마음 없이 지식을 바로 전달할 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상호 교화와 교육을 위해 마음을 여는 진지한 대화에 더 많이 참여하려고 할 때, 과연 사람들이 얼마나 더 경건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를 에드워즈는 궁금하게 생각했다. 3. 견습견습은 목회 훈련에 의도적으로 맞춤화된 실제 상황 안에서 사역을 배우는 것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단순한 정보 전달보다 학습자의 고유한 요구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하나의 교육적 모델(pedagogical size)을 모두에게 다 적용할 수는 없다. 물론 그런 모델을 만든다면, 그건 멘토링의 천재일 것이다.”여기 에드워즈가 채택한 몇 가지의 견습 모델이 있다.- 에드워즈는 제자도 안에서 반복적으로 자기 성찰을 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필연적으로 이것은 그의 멘토링에 영향을 미쳤다. 에드워즈는 금식, 기도, 겸손, 자기 성찰, 회개의 반복되는 습관을 통해 스스로를 훈련한 후에만 멘티들이 다른 사람들을 훈련할 수 있도록 했다(딤후 2:2 참조).- 에드워즈는 목회를 배우는 학생들이 설교뿐 아니라 더 넓은 사역 분야에서도 성경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배우도록 도왔다. 에드워즈는 결코 능력있는 설교자가 아닌 학생들조차 성경 신학적 이해와 웅변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 에드워즈는 대화식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멘토링에 대한 그의 이해는 우정과 대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즈는 학생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종종 소크라테스식 토론 방법으로 전환하곤 했다. 그는 무엇보다 경청과 질문 기술이 목회자들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보았다.기독교 가정이 멘토링을 위한 이상적인 맥락이고 에드워즈가 종종 그 사실을 실천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베잔트는 신학 교육에 대한 에드워즈의 새로운 실험을 우정, 교리 및 영적 형성이 수렴되는 가정을 의미하는 “목사 사택 신학교"라고 불렀다. 4. 편지대면 대화와 견습을 통해 제자에게 시간을 투자하지 않을 때면 에드워즈는 편지를 통해 그들을 지도했다. 그의 편지는 누구라도 목사로부터 기대하는 “친절하고 대화적이며 교육적인 자질”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의 편지는 단순히 목회적, 신학적 문제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기르던 양을 판매하는 계획에서부터 결혼의 역동성에 대한 고찰,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교리에 대한 토론에서부터 빨리 방문해 달라는 간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편지를 그의 멘티였던 조셉 벨라미(Joseph Bellamy)에게 보냈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에드워즈는 직접 대면하는 대화를 선호했겠지만, 멘토링 관계는 편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만족스럽게 구현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신학적인 의견, 개인적인 관심사 또는 행정 지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논의를 편지를 통해 나누었다. 에드워즈가 특히 멘토링에 성공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 그가 편지를 통해서 … 자신의 개인적이고 목회적인 목소리를 멘티들에게 전달했다는 사실 때문이다.”오늘날 목사는 전화, 이메일, 문자, 소셜 미디어 등 의사 소통을 하는 데에 유용한 훨씬 더 많은 옵션을 가지고 있다. 편지 쓰기가 비록 다른 방식에 비해서 불편하기는 하지만 훨씬 더 의미있고 가치있다. 개인 편지, 특히 손으로 쓴 편지는 미래의 리더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지금이야말로 멘토들은 사라져버린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손편지를 통해 세상 문화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여줄 좋은 때이다. 5. 리더십베잔트는 기독교 리더십을 모방할 가치가 있는 “영웅적인 영성”이라고 썼다. 리더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의해 형성되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에는 비용이 많이 드는 예배 뿐 아니라 희망을 전하는 모든 노력이 다 포함된다. 에드워즈는 목회 리더십이라는 도전에는 희생적인 헌신과 봉사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베잔트의 말대로, “절망적인 시기는 헌신적인 지도자를 필요로 한다.” 1743년에 있었던 한 안수식에서 그는 “영혼을 위한 파수꾼의 큰 관심사”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에드워즈는 비싼 값을 치러야만 하는 리더십을 기꺼이 받아들이라며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했다.“그리고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들은 이 세상 백성을 향해 그리스도 대신에 우뚝 서서 그의 대사로 행동해야 합니다. 이 세대가 쫓아가는 동일한 영을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이 다른 영혼에게 보여주는 것과 같은 수준의 동일한 사랑을 모방해서는 안됩니다. . . 여러분은 예수님을 닮아 그들을 위해 수고하고 또 자신을 부인하며 고통까지 받을 준비가 되었습니까?”리더십은 멘티와 친구들을 위해 내 자신의 삶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나의 전부를 다 소진하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또한 기독교 리더십에는 우리가 멘토링하는 사람들의 번영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비전이 에드워즈로 말미암아 목회적 권한을 사용하여 열망에 찬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의 성장 및 효율성을 높이도록 만들었듯이 오늘날 우리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 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를 비싼 값을 치른, 또 희망을 보여주는 기독교 리더십의 가장 좋은 예들 중 하나로 보았다.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와 뉴저지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브레이너드의 모범에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에드워즈는 그의 개인 일기를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The Life of David Brainerd)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해 그의 짧은 인생을 기리기도 했다. 브레이너드는 수년 동안 약하고 병들었을 지 모르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베잔트는 이렇게 썼다. “그는 절뚝거리면서도 인도했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는 19세기 선교사 사역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하나씩 · 특별하게 · 친밀하게베잔트는 에드워즈가 윌리암 페퍼렐(William Pepperrell) 경에게 보낸 편지에서 멘토링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을 포착하는 세 단어를 찾아냈다. “하나씩, 특별하게, 친밀하게(singly, particularly, and closely).”- ‘하나씩’은 한 번에 한 명씩을 의미한다. 이는 미래의 리더가 조립 라인에서 수천 명씩 한꺼번에 만들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리더는 의미있는 우정과 대화 그리고 편지를 통해 만들어졌다. - ‘특별하게’는 개인별 맞춤을 의미한다. 미래의 두 지도자는 결코 동일하지 않다. 어떤 견습생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역 훈련은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미래의 지도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맞게 맞춤형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 ‘친밀하게’는 멘토링 과정에서 실제 공유된 삶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정, 식사, 동지애, 실망, 웃음, 신뢰 및 상호 존중은 우리가 멘토링하는 사람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 꼭 필요하다. “하나씩, 특별하게, 친밀하게”는 차세대 목회자, 선교사, 교회 개척자 및 기타 지도자에게 투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거대한 비전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다음 세대를 잘 훈련하도록 도와 주시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5 Ways Jonathan Edwards Teaches Us to Mentor Future Pastor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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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십
조나단에드워즈
데이비드브레이너드
편지교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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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교회가 인터넷 전쟁터에서 지고 있는가?
by Brett McCracken
2020-09-24
2020년이 목회자들에게 가져다준 어려움 중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은 COVID-19가 전통적인 교회 생활과 신앙 습관(formational practices)이 아닌 온라인과 당파적 이데올로기 생태계에 의해 악영향을 받고 있는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가뜩이나 부정적인 문제들을 훨씬 더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 COVID 전에도 목회자들에게 세상과의 싸움은 승산이 없는 것이었다. 디지털 시대, 아니 좀 더 광범위하게 말해 세속적인 시대는 이제 그 영향력을 넓혀서 기독교인이 무엇인가라는 주제까지 다루고 있을 정도이다. 이제 교회는 기독교인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수많은 목소리 중 하나로 점점 더 전락하고 있다. 교회 예배가 차지하는 시간은 단지 일주일에 두 시간 남짓이지만, 팟캐스트, 라디오 쇼, 케이블 뉴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서비스, 그리고 각종 종류의 미디어가 기독교인의 삶에서 차지하는 시간은 일주일에 90시간에 육박하고 있다.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단지 몇 시간에 불과한 예배(COVID 시대 속에 아예 0시간이 되기도 한다)를 가지고 미디어 광풍에 휩싸인 세상 속에서 진정한 크리스천을 제대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목양에 최고 권위를 가진 목회자라도 지금과 같이 수많은 목소리가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서는 제대로 양떼를 관리하기 힘들 것이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이런 도전이 주는 무게를 지속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COVID 환경은 단지 그런 상황을 좀 더 극적으로 노출시켰을 뿐이다. 그 결과 점점 더 악화되는 상황에 앞으로 몇 년 안에 탈 목회자를 선언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게 별로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경계하라, 그러나 겁을 먹지는 말라목회자들이 직면한 압박(pressures)을 경계해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양떼의 마음과 정신을 똑바로 지켜주기 위해서 싸우는 일은 목회자에게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예수님은 일찌기 늑대가 양을 채가고 흩을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요 10:12). 바울도 에베소 장로들에게 양떼를 아끼지 않는 ‘사나운 늑대들’을 ‘경계하라’고 경고했다(행 20:29-31). 목회자에게 ‘늑대’가 주는 위협은 결코 새로운 게 아니다.새로운 건 이것이다. 인터넷 시대에 한 마리 양은 말 그대로 수백 만 마리 늑대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단지 클릭 몇 번에 양은 늑대들이 가져다주는 노골적이거나 은밀한 위험에 바로 노출될 수 있다. 목회자가 이 모든 늑대들을 상대로 양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회자가 그렇다고 교인들의 인터넷 활동 기록을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것도 한 사람이 아니라 수백 명의 교인인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다. 검색 창은 우리 시대가 만난 영적 전쟁터이지만, 일대일 전투에서 마음과 정신을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대부분의 신앙생활에서는 숨겨진 전쟁터이기도 하다. 설혹 목회자가 이 싸움에 뛰어들어서 교인들을 지키겠다고 결심하는 경우에도 100명의 교인이면 100개의 다른 전쟁터가 있는 것이다. 사람마다 온라인 생활은 다 다르다. 그런 상황에서 오래지 않아 목회자가 지쳐서 나가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검색 창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특징인 ‘보이지 않음’을 훨씬 더 보이지 않도록 만드는 특징을 가진 ‘전염병 시대’에는 상황이 더 나빠진다. 격리된 상태에서 기독교인들은 완전한 온라인 존재로 바뀌고 있다. 인터넷 담론이라는 독이 든 우물에서 자꾸 물을 퍼서 마시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독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의미있는 전통적 기독교인의 신앙 습관 형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인터넷 환경 속에서 이제 기독교인은 온라인을 집이라고 부르며, 아예 그 집이 원하는 형태의 기독교인으로 점점 바뀌어가고 있다.그렇다고 목회자들이 양떼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독점적인 영향력을 요구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위험한 접근 방식은 또 다른 문제들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문제는 인터넷 시대에 양들이 사방팔방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목자라고 생각하면서 따라간다. 그 목자도 누가 따라오는지 모를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게다가 이런 경우 대부분의 경우 목자라고 생각했던 이는 늑대로 밝혀지기 십상이다.목회자들은 여러 가지 위험한 이데올로기적 방향으로 끌려가는 양들을 모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양들의 일부는 극좌파로, 또 일부는 극우파로 향하고 있다. 조만간 빌 게이츠가 주도한 “코로나 사기(scamdemic)”의 일환인 마스크 착용 의무화를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교회를 떠나겠다는 협박이 담긴 이메일을 보수적인 교인으로부터 받는 목사들이 생길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메일을 받고 한 시간이 흐른 후, 트럼프 대통령이 그 주간에 말한 내용에 대해 교회가 충분히 분노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교회를 떠날 지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어느 진보적 교인을 같은 목사가 상담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패배감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피차 이질적으로 형성된 무리에게 일관된 기독교적 정체성(Christian formation)을 이끌어내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있기는 한 것일까?목회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아니, 아마도 21세기 교회가 직면한 가장 큰 메타 위협인 동시에 결코 글 하나로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그러나 구글 시대에 목회자들이 기독교 제자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전술적인 일들과 관련하여, 향후 관련한 더 많은 대화를 촉발시키는 데에 도움을 주고자 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나누고자 한다. 1. 이제 미디어 습관이 제자도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목회자들이여, 온라인에서 소비하는 시간 때문에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변해가는 지를 성도 스스로가 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당파적 뉴스거리, 케이블 뉴스, 트위터 등에서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보낼 때, 그게 얼마나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제대로 알려주어야 한다. 미디어를 가려서 보고 들을 수 있도록(media literacy) 인도하라. 디지털 금식을 제안하라. 무엇보다 신뢰할 수 있는 지혜의 원천을 향하도록 그들의 눈을 돌리라. (이것이 곧 나올 나의 책 ‘지혜의 피라미드’(The Wisdom Pyramid)가 다루는 내용이다). 신뢰할 수 있는 온라인 리소스로 안내하라. 뉴스피드 스타일의 리믹스된 영성의 공허함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라. 미디어 중독과 과도한 인터넷 사용 시간을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다뤄야 할 심각한 목양적 문제로 삼아야 한다. 바람직한 온라인 습관을 들이도록 교인을 인도하는 것은 이제 당신 교회의 성도가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문제가 되었다. 2. 주일이 지나서도 기독교인 정체성을 만드는 노력을 우선시하라주일 예배 모임은 필수적이며 결코 무시되거나 뒷전으로 밀려서는 안된다. 동시에 기독교인 양성을 위한 다른 다양한 기회를 모색하는 것도 동일하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이미 차고 넘치는 미디어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 기독교 버전의 Netflix 및 TikTok을 만들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속임수를 쓰거나 기술 유행을 쫓자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 중심의 공동체, 교육, 아름다움, 일 및 여가를 촉진하기 위해 주일 뿐 아니라 주중에도 내내 창의적인 리듬을 장려하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목회자에게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러나 21세기에 거룩한 기독교인의 정체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거룩한 기독교인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관해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지금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이다. 3. 교회는 이제 ‘스스로 만족’하는 데에서 머무르면 안 된다단지 훌륭한 설교, 최고의 예배 음악 경험을 제공하는 콘텐츠 전달자로 스스로를 파악하고 있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오래지 않아 죽은 교회로 전락할 것이다. 구글 시대에는 클릭 한 번으로 언제나 더 나은 설교와 더 나은 예배 음악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그 온라인 “컨텐츠”(TGC를 포함해서)도 결코 교회를 대체할 수 없다. 이제 목회자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때이다. 구글 검색이 주지 못하는, 과연 그 무엇을 지역 교회가 지금 제공하고 있는가? 현재 교회에게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이 질문에 대해 설득력 있고 매력적인 답변을 제공하는 것이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여, 용기를 잃지 말라. 물론 힘든 시간을 맞고 있지만, 이건 그리스도의 신부가 직면한 가장 최근의 도전일 뿐이다. 교회는 살아남을 것이다. 인터넷에 흩어져 있는 양떼들에 대해서 경계심을 가지고 그들을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주인 또는 창조자가 아니라 그들을 섬기는 청지기이다. 우리 같은 연약한 목자들은 위대한 우리의 목자로부터 힘을 공급받지 않는 한 양떼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존재들이다. 주님이 책임지신다. 교회를 세우신 분은 주님이다. 전염병, 분열을 일으키는 정치적 문제, 심지어 지옥의 문(마 16:18)조차도 교회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re Churches Losing the Battle to Form Christian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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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여, 당신 자신을 알라
by Aaron Menikoff
2020-09-23
지금 사역하고 있는 교회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종종 오래된 교인들에게 전임 목사에 대해서 묻곤 했다. 무슨 험담을 하자는 의도가 아니라 교회에 대해서 좀 더 잘 알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나는 그들이 목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되었다. 그들의 대답에는 하나의 패턴이 있었다. 거의 언제나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참 좋은 목자였어요.” 결국 나는 행간을 읽어내야 했다. 그 목사의 강점(목양)을 강조함으로 그들은 동시에 그의 약점(설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그 전임 목사가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까 궁금했다. 아마도 그는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특히 목사에 대해서는 더 그렇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굳이 목사가 이런 사실까지 다 알 필요가 있을까? 목사가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알고 있는 게 얼마나 중요할까? 너무 너무 중요하다. 좋은 목사는 자신이 뛰어난 분야와 채워야 할 분야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왜 목사에게 자기 점검이 필요한지 네 가지 이유를 밝혀보자.1. 하나님께 더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야고보 사도는 모든 좋고 완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온다고 말한다(약 1:17). 여기에는 우리의 강점이 포함된다. 하나님은 당신을 만드셨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영적 은사로 당신을 채우셨다. 인내심이 뛰어난 경우라면 설교 준비를 위해 시간을 쏟는 게 더 쉬울 것이다. 희락을 느끼는 면에서 뛰어나다면, 더 큰 열정을 쏟으면서 설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은 궁극적으로 다 은사이다. 그러므로 강점에 주목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뛰어난지 이해하는 것은 결코 오만한 게 아니다. 결국 하나님은 주는 자이시기에, 그는 찬양을 받으신다. 자신의 강점을 더 잘 알수록 우리는 더 정확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건 약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그의 약함을 자랑하는 법을 배웠다(고후 12:9). 약점까지 포함해서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 더 잘 알면 알게 될수록, 바울은 그의 삶속에서 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더 집중했다. 2. 강점과 단점은 고정된 게 아니다약점 때문에 패배감을 느끼기 쉽다. ‘나는 너무 형편없는 설교자야.’, ‘내가 조언하는 사람 중에 변한 사람은 여태 한 명도 없어.’, ‘책상 서랍도 제대로 정리 못하는 내가 교회를 운영한다고? 어림도 없지.’ 반대로 자신의 강점을 보고 교만해지기 쉽다. ‘외향적이어서 그런지 난 전도가 참 쉬워.’, ‘나는 타고난 리더라서 회의 진행하는데 탁월해.’이 두 가지 반응 모두 현명하지 않다. 강점과 약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다. 결코 굳어져 고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목회자는 강점과 약점을 서로 조절하고 배양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설교에 있어서 그저 그런 목사라고 해도 기도와 타인의 피드백, 피나는 연습을 통해 설교에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다. 반대로 평소에 자연스럽고 웅변적인 기술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침체기를 만날 수 있고, 그에 따라 설교 능력과 효율성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성장해야 할 지점을 바로 안다면 그 성장은 일어날 것이다. 결코 쉽지 않다. 성장에는 언제나 비용이 따른다. 그럼에도 모든 목사는 진보하기 위해 싸워야한다. 그러나 정확한 자기 점검이 없다면 어떤 분야에서 싸워야 할지 결코 알 수 없다. 3. 누가복음 6장 40절의 원칙“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하게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눅 6:40)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목사는 선생이다. 그들은 제자를 만드는 사람이다. 단지 지식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가 본받고 싶을 정도로 삶에 있어서 모범이 되어야 한다.이 말을 깊이 새기라. 교인은 목사인 당신을 닮기 마련이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이 목사에게 왜 그렇게 중요한지 이제 더 잘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당신의 강점과 약점이 무엇이든지, 그것은 당신이 섬기는 회중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교회가 지금 전반적으로 성경 공부는 훌륭하지만 전도에는 좀 부진한가? 쉽지 않겠지만 거울 속 당신 자신을 바라보라. 여기에도 누가복음 6장 40절의 원칙이 적용된다. 사과가 나무에서 결코 멀리 떨어진 곳에 떨어지지 않듯이, 제자는 선생을 닮게 되어있다.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아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 나무 둥치만큼 엄청난 이두박근에 얇은 나뭇가지 같은 장딴지를 가진 남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큰 강점과 더불어 아주 큰 약점까지 가진 교회는 보기 흉하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불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기 전까지 목사는 결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4. 디모데전서 4장 16절의 명령언젠가 신학교 예배당에 앉아서 들었던, 이 구절을 본문으로 돈 휘트니(Don Whitney)가 했던 설교를 결코 잊지 못한다. 메시지의 세부 사항은 기억나지 않지만, 쩌렁쩌렁한 그의 음성은 여전히 내 귀에 울린다. “자신의 인생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목사님, 자기 자신을 아십시오. 하나님은 건전한 교리 이상으로 당신에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은 건전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6) 아마도 디모데전서 4장 16절과 누가복음 6장 40절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내가 보여준 삶의 모범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구원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목사의 가르침과 삶을 사용하여 양들이 끝까지 인내하도록 도와주신다.신실한 목사라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 것 이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17세기 런던의 목사였던 아브라함 부스(Abraham Booth)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시 그는 대서양 노예무역을 반대하는 설교를 해 유명해진 사람이다. 어느 젊은 목사의 안수식 설교에서 그는 디모데전서 4장 16절을 가지고 “너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라”고 권고했다.부스는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데에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만약에 사탄이 우리가 사역하는 중에 스스로의 약점을 보지 못하게 한다면, 우리는 이미 사역에서 추락하는 길을 열심히 닦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부스의 말은 예리하면서도 따뜻하다.“유용한 지식을 얻기 위한 노력에 영향을 주는 여러 동기들을 중시하면서 당신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오로지 강단에서 존경받고 싶은 마음만으로 열심히 읽고 공부한다면, 또는 대중적인 인기를 더 얻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모든 동기는 육신적이고 타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결코 합당하지 않은 것이지요.” 천국에 갈 때까지 우리의 동기는 결코 완전히 순수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나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내 속에 숨은 동기가 육신적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Know Thyself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순수한_동기
자기점검
자기성찰
아브라함부스
목회자
교회가 나를 해고했다. 이제 어떡하지?
by Jeremy Todd
2020-09-16
압도적인 투표로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하기로 했다는 그 교회의 전화를 받은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나와 교인들은 흥분했고, 우리의 미래는 장밋빛으로 빛났다.그로부터 삼 년이 지나고 나는 잊을 수 없는 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몇 가정이 나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교회는 나를 해고했고 나는 사역지를 떠나야만 했다. 목사를 해고할 때 성경적인 바른 이유도 있겠지만, 강제로 쫓겨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선택도 없다고 느끼면서 교회를 떠나는 목사의 경우라면, 그에게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긴 걸까? 그리고 그런 해고를 당하는 경우 어떻게 생각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분명히 잘못된 이유로 교회에서 해고되었다. 그런 해고를 당하고 난 이후 깨닫게 된 다섯 가지 교훈을 함께 나누고 싶다.1.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기억하라해고되거나 사임하고 난 이후는 고독의 시간이다. 실패, 후회, 불확실 등의 감정이 당신을 감쌀 것이다. 자존심은 한 순간 산산조각이 나 버렸고 인생과 사역에 관해 “당신이” 가졌던 계획도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런 어두운 날을 만나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위로를 찾아야 한다.그런 일은 왜 당신에게만 생기는 거냐고 사탄은 속삭일 것이다. 믿지 마라. 결코 그렇지 않다. 물론 당신이 겪은 일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또 그로 인한 고통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일은 아니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해고로 인해 고통과 불확실성을 겪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2. 슬퍼하고 치유할 충분한 시간을 가지라당신이 겪은 건 일종의 영혼의 트라우마이고 그로 인해 받은 상처는 생각보다 더 깊을 것이다. 조금의 안도감도 주지 않겠지만, 단지 직장을 잃은 것 보다 더 큰 것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라. 당신은 지금 주님께서 당신을 믿고 맡기셨던 지역교회를 잃은 것이다. 시시비비를 떠나서 이런 자각은 고통스럽다. 고통은 몸이 잘리는 것과 다르지 않고 상처는 결코 빨리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정반대로 생각하고 싶은 유혹이 크면 클수록, 당장이라도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그런 충동을 거부해야 한다. 당장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는 것은 마치 팔다리가 잘린 환자의 상처 부위에 대일밴드를 붙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또 가족과 미래에 만날 교회에게도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자존심을 잠시 옆으로 밀어놓고 아주 잠시라도 사역 외에 생계를 유지할 방법을 찾아보라. 설교 초청이 온다고 해도, 또 청빙 인터뷰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거절하는 것이 좋다.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상처를 공개하는 것보다는 그게 더 좋은 선택이다. 대신 교인들을 돌보던 삶에서 잠시 떨어져서 오로지 당신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상처를 치유할 충분한 시간과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3. 교회 공동체에 참여하라, 그러나 다시 교회를 시작하지 마라지금 상황을 교회를 개척하는 기회로 바라보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아니, 유혹이 아니라 기회가 맞다며 충동질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절대 교회를 개척하면 안 된다.개척을 시작해야 하는 여러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건 당신도 또 당신에게 그런 충고를 하는 사람들도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상처받은 사람은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상처를 유발할 수 있다. 대신 건강한 교회를 찾고 조사하는데 충분한 시간을 보내고 또 그런 교회를 찾아 뿌리를 내려 보라. 건강한 교회는 반드시 존재한다. 건강한 공동체를 찾는데 이사까지 해야 한다면, 기꺼이 이사를 가라.치유 과정에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 지금 당신과 가족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한 공동체가 제공하는 사랑과 지원 그리고 격려 속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물론 힘들겠지만, 이런 시간을 하나의 선물로 바라보라.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건 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할 것이고, 또 당신 속에 남은 쓴 뿌리의 원인을 파악하고 극복하는 데에도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제 막 겪은 그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소그룹에 참여하는 게 꺼려질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당신과 가족이 한 단계 더 도약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사랑과 지원을 제공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교회로 하여금 당신을 다시 건강하게 회복시키도록 하라. 그건 결국 미래의 사역에 필요한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도 큰 도움일 될 것이다. 4. 주님을 기다려라기다림은 힘들지만 그 속에는 목적이 있다. 오월에 꽃이 피기 위해서 사월에 비가 와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꽃이 자라고 향기를 내기 위해서는 비가 필요하다. 기다림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준비시키고 단련시키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 중 하나이다.지금과 같은 시간은 다름 아니라 과거와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사역을 바라보고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이 준비한 기회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 그토록 불타던 목양 사역에 대한 열정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깨달을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괜찮다. 주님께서는 목양 사역 밖에도 삶과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 그와는 반대로, 기다림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목양 사역과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이 더 크게 불타고 있음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 부서지고 상처받은 마음을 주님께서 치유하시도록 기다리라. 가장 큰 소리로 비판하던 사람들로부터라도 배울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역에 마음이 준비될 수 있도록 주님이 도우신다. 기다리라. 5.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안식하라“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지금 당장은 마음 속에 대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에는 당신이 지금 처한 상황도 포함되어 있음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 편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을 대적하겠는가(롬 8:31)? 하나님은 아직 당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는, 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의 말씀인가?비록 부당한 이유로 해고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건 결코 우연히 생긴 사고가 아니다. 하나님은 당신 안에서 지금도 인간이 알지 못하는 방식으로 일하고 계신다. 더 간절히 하나님을 의지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y Church Fired Me as Pastor. Now Wha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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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빙
공동체
교회개척
사임
해고
리더십 전문가가 좋은 목사가 되는 건 아니다
by Chase Replogle
2020-09-09
‘목사’라는 타이틀을 좋아한 적이 없다. 원래 나의 계획은 법률 쪽 일을 하다가 정치계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나는 일찍부터 리더십에 매료되었고, 그동안 진로와 관련된 모든 테스트의 결과들은 내가 리더십을 행사하는 분야에 꽤 소질이 있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하게 고등학교 3학년 교회 수련회에서 나는 목사가 되라는 강한 부르심을 받았다. 고등학교 토론 클럽 교사에게 더 이상 대학교에서 주는 토론대회 우수 장학금에는 관심이 없고 대신 중서부에 있는 작은 신학교에 갈 거라고 말했을 때, 교사 중 한 사람은 내게 이렇게 호소했다. “왜 하나님이 네게 준 소질을 갖다버리려는 거니?” 그 말을 했던 교사처럼 나도 목사가 되는 길은 지루하고 아웃사이더 같은 일, 그러니까 나의 잠재력과 애초 계획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었다.리더십에 두는 희망21세기 후반은 기독교 사역 전반에 걸쳐 리더십 테크닉과 그 잠재력이 각광을 받고 있다. 요즘은 ‘담임 목사’(senior)라는 타이틀 대신 좀 더 리더십과 연관이 있는 ‘리더 목사’(lead pastor)라는 호칭이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목사는 서재 대신 ‘사무실’ 또는 ‘회의실’을 가지고 있다. 이런 흐름에 반응이라도 하듯이 신학교는 ‘목회 신학’(pastoral theology)이라는 학위를 ‘교회 리더십’(church leadership) 학위로 이름을 바꾸었다. 리더십과 관련한 전문용어는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리더십 컨퍼런스, 리더십 도서, 리더십 팟캐스트, 리더십 잡지, 그리고 리더십 개발 과정 등등 … 우리는 리더십이라는 단어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대부분의 목사들이 리더십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더 좋은 목사가 되고 또 더 건강한 교회를 만들기 위한 순수한 열망 때문이다. 나의 경우도 그랬다. 목사라는 일은 힘들고 애초에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광범위한 일들을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좀 더 나은 리더가 되는 방법을 배울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나은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유라면 어느 목사가 리더십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겠는가?처음 교회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다이어리 맨 뒷장에 이렇게 썼다. “리더십 교훈들” 그리고 틈이 날 때마다 거기에 리더십과 관련한 소소한 지혜를 적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적어놓은 이 내용들이 담임 목사가 되어 교회를 이끌게 될 나에게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말이다.“리더십은 영향력이다.”“계획을 세우지 않는 것은 실패하려고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리더는 독서하는 사람이다.”“위대한 리더는 만들어지지 태어나지 않는다.”“모든 것은 리더십에 따라서 번성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한다.”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이런 나의 열망이 절망으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모든 교훈들이 내가 이전에 꿈꾸던 리더로 나를 만들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들이 말하는 대로 현실에서 적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리더십에 대한 나의 욕망이 영혼을 돌보겠다는 바람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목사로 산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깊은 고민도 없이 목사로 살아가는 경우가 너무도 흔하다. 이것이야 말로 리더십에 집착한 목사가 치르는 대가가 아닐까? 결국 리더십에 대한 나의 낭만적인 관심이 사실은 좀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과 더불어 내 속에 내재하고 있는 불안감을 감춰주던 싸구려 금박 포장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리더가 되고 싶은 간절한 욕망이 사실은 평범한 일개 목사로 끝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의 표출은 아니었을까?물론 목사라면 누구나 다 리더로서의 책임을 가진다. 나는 지금 리더십 자체에 반대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고 사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조직을 이끄는 리더의 역할을 피할 수 없고 또 피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더 좋은 리더가 된다고 더 좋은 목사가 되는 건 아니다. 목회 사역은 결코 리더십 개발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는 수준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영향력과 테크닉을 발휘하는 것 이상을 위해 부름 받았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가 단지 교인들의 리더가 되라고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사가 되라고 부름 받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이 차이를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새로운 방식으로 ‘목사’ 이해하기언제부터인가 나는 리더십과 관련한 그 어떤 책도 더 이상 읽지 않았다. 그것을 거창하게 엄청난 전환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게 있어서 “목사”라는 타이틀의 의미를 좀 더 제대로 받아들여야겠다고 결심했던 중요한 순간이었다.교회를 개척한 첫 해 어느 날, 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멕시코 식당에 있었다. 처음 본 번호로 전화가 울렸고 나는 식당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전화한 사람은 교인이었지만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내게 전화한 적이 없던 사람이었다. 지금 막 병원으로부터 자기 동생에 대한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는 말을 그가 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동안 준비했던 리더십 교훈 중에서 이 상황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단지 누군가에게 마음을 털어놓으며 아픔을 나누고 싶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함께 간절히 기도했다. 지금 되돌아보면 그렇게 긴 대화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계속 상황을 알려달라고 말했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기도하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기 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목사님.” 그 순간 그가 나를 부른 “목사님”이라는 호칭은 내 타이틀도 아니었고 또 교회 내에서 내 직책도 아니었다. 그건 내 소명에 대한 확인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부르신 이유였다. 멕시코 식당이 제공해주는 아주 맛깔난 음식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시간을 들여 하나님 앞에서 기도로 그 사람과 함께 하라고 나를 ‘목사’로 부르신 것이었다. 나는 이제 목사가 되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자주 자주 느끼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사실 그날 그 순간까지 목사가 되었다는 게 어떤 것인지 제대로 느낀 적이 없었다. 그날의 경험은 내게 그런 의미였다.목회 정체성(pastoral identity)과 복음의 능력목회적 리더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독특한 목회 정체성을 세워온 역사가 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목사의 소명을 단지 그때그때 완수해야 하는 과제(task)가 아니라 무의식의 단계까지 포함한 삶 전체를 관통하는 소명(habitus)으로 이해하고 있는 목사들과 작가들이 적지 않다. 그렇기에 그들은 목회적 기질 또는 습관을 개인적으로 훈련받아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1세기에는 리더십이 가진 잠재력이라는 면에서 좋은 롤 모델이 있었다. 위대한 왕 헤롯은 조직을 이끌고 건물을 짓는 면에서 훌륭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또한 혁명을 일으킨 마카비 가문도 리더십의 좋은 모델이 되었다. 게다가 정치적 권력이라는 면에서 리더십을 발휘한 수많은 로마 황제들이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런 리더십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들이 소유한 독특한 리더십은 따로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은 리더를 따랐고, 그랬기에 그들은 스스로 양들을 이끌도록 부름 받은 겸손한 목자로 인식했다. 그들 중에서 초대 교회를 이끄는 직업적인 성취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있었을까? 기도를 인도하고 설교하고 또 양들을 위로하는 목사로서의 이미지가 중요했던 사람이 있었을까? 목회적 소명이 주는 특별함은 결코 조직의 리더라는 값싼 이미지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행여 그렇게 된다고 할 때, 우리의 경력을 잃는 것보다 더 큰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다름 아니라 복음의 능력,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독특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바로 그 능력을 잃을 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초에 부름 받은 고유한 소명을 재발견하고 그 소명을 더 신실하게 붙잡아야 한다. 훌륭한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 그러나 결코 좋은 목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훌륭한 리더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eadership Savvy Doesn’t Make a Pastor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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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에는 ‘맞춤형 설교’가 제격이다
by Stephen Witmer
2020-07-29
작은 교회 목회자인 당신은 지금 강단으로 올라선다. 모두들 성경을 펼치고 눈을 들어 당신을 주목한다. 하지만 성도들의 수가 너무 ‘적다.’ 40여 명 정도나 왔을까? 게다가 설교가 시작되면 어떤 사람들은 졸기 시작할 것이다. 설교 녹음 장치도 없지만, 녹음을 한다 해도 그것을 올릴 웹사이트도 없다. 성도들은 팟캐스트가 뭔지도 모르고, 성도들 외에는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 없다. 설교는 삼십 분 정도 하겠고, 이제 그 설교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다시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녹음되어 웹사이트에 올린 것도 아니니 당신이 한 설교는 그 자리에 모인 그 성도들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한 주 내내 이 설교를 준비했는데, 헛되이 시간을 낭비한 것일까? 작은 교회 목회는 목회자로 하여금 많은 고민을 하게 한다. 이 경우 당신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것보다 더욱 큰 것을 사모하여, 결국 더 큰 도시의 더 큰 교회로 옮겨가기로 결단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당신이 갈망하는 그 큰 기회가 바로 지금 당신 앞의 그 성도들 안에 있을 수도 있음을 당신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성도들을 버리지 말고, 오히려 그들 안으로 더욱 깊이 들어가라. 더 작은 것에 감사하기내가 아는 대부분의 목회자들 중 적은 예산, 작은 건물, 적은 수의 회중, 약한 영향력을 갈망하는 이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런 것을 우리에게 주시면 우리는 그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이 주는 기회를 보지 못한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문화는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 문화에서마저 사람들은 작은 것보다 크고 빨리 성장하는 것들을 일반적으로 선호한다. 하지만 성경은 종종 작은 것들이 좋은 것이라 한다. 결국 하나님의 왕국은 땅 속에 묻힌 씨앗 같은 것이고, 이 세상은 단 한 사람의 신실함과 희생으로 구원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의 논리는 작은 것이 지닌 가능성과 유익을 감사히 받고 그것들을 살펴볼 수 있게 해준다. 나는 이것이 설교에도 적용되는 것이라 믿는다. 스케일이 큰 설교, 다시 말해 수천 명의 청중에게 하는 설교나, 라디오, TV, 팟캐스트를 통해 퍼져나가는 설교에 이점이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경적으로 풍성하고, 신학적으로 충실한 설교가 큰 회중을 만난다면 절실하게 필요한 진리를 많은 이들이 들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교에 은사가 있어서 그들의 설교가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많은 사역자들의 설교를 들으며 나 자신 역시 큰 유익을 누렸다. 개인적으로 만나보고 악수를 하거나 그들에게 개인적으로 목사님이라고 부를 기회는 아마 전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선포한 진리들이 내게 전해졌고, 많은 경우 나를 감화시켰고, 나를 목양해주었다. 큰 스케일의 설교가 굳건한 진리를 전하기만 한다면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 주일마다 세계 각처에서 행해지는 설교의 대부분은 무명의 목사가 무명의 회중에게 전하는 설교고, 대부분은 녹음이나 녹화가 되지 않아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설교다. 하지만 이렇게 작은 스케일로 행해지는 설교에 큰 유익이 있다. 작은 스케일로 설교하라작은 교회 목회자인 당신에게는 ‘맞춤형’ 설교를 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맞춤형(bespoke)”이라는 말은 특정 고객이나 사용자에게 맞춰 제작된 옷이나 가구를 묘사할 때 흔히 사용하는 용어다. 대량 생산된 것이나 기성품이 아니다. 특정한 누군가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을 말한다. 그 사람에게 꼭 맞는 것이다. 설교도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 좋은 설교를 작은 스케일로 하면 큰 스케일의 설교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해낼 수 있다. 만일 성도들이 85명이고 당신이 최소한 신실한 목회자라면 당신은 성도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친숙하게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각 사람의 과거사, 슬픔, 고난, 불안, 약점, 기쁨과 열망들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또한 성도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에 대해서도 익히 알 것이다. 갈등이나 스트레스가 어디에 있는지,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 말이다. 대형 교회 목사들에게는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신은 성도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그리고’ 회중 전체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설교하라. 당신의 설교는 성도들의 삶에 ‘녹아들어갈 수’ 있다. 팟캐스트 용으로는 전혀 쓸 수 없는 설교를 해도 무방하다. 당신의 설교가 지구 반대편에 살면서 당신 마을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직업에 종사하는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이 섬기는 성도들과는 전혀 다른 수준의 교육을 받은 이들에게는 맞지 않는 설교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의 삶과 당신의 교회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이 특정한 사람들을 전적으로 섬길 수 있는 그런 설교를 하라. 윈 콜리어(Winn Collier)의 ‘Love Big, Be Well'에 나오는 시골 목사 조나스 매컨(Jonas McAnn)은 자신이 섬기는 그 마을에만 꼭 맞는 설교를 하고 싶다고, 그 마을에만 꼭 맞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한다. 그게 바로 맞춤형 목회다. 맞춤형 설교를 하면 뭔가를 잃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이 항상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방송이나 팟캐스트를 안 하기 때문에 영향력을 행사할 기회는 잃겠지만, 방송이 허용하는 정해진 시간 안에 설교를 끼워 맞춰야 하는 압박감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다. 설교가 자유로워질 것이다. 또한 자신의 설교가 녹음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때 설교자는 부자연스러워지곤 하는데, 이로부터도 자유를 얻게 된다. 작은 교회 목사는 온 세계를 향하여 선포할 필요가 없다. 또한 교회 웹사이트를 우연히 방문한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도 그리 할 필요가 없다. 그저 자유롭게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중요한 이야기들을 하면 된다. 온 세상이 당신 설교를 듣기 시작할 때 느껴지는 교만의 유혹으로부터도 자유를 얻게 되고, 당신의 설교를 맹렬히 비판하는 인터넷의 익명의 무리들 때문에 절망하는 것으로부터도 자유를 얻게 된다. 당신의 성도들을 사랑하라마릴린 로빈슨(Marilynne Robinson)은 자신의 소설 'Home'에서 설교를 “인류의 상한 마음을 분석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의 마음을 찬양하는 것”이라 묘사한다. 인류의 마음을 정말로 분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당신 앞에 있는 당신의 성도들 말이다. 우리는 특정한 본문에서 특정한 진리를 찾아내어 특정한 사람들에게 선포한다. 우리가 전한 말을 다시는 ‘들을 수’ 없을지라도 성도들의 삶 속에서 다시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우리의 설교는 오랜 시간에 걸쳐 성도들의 삶을 형성해간다. 교회 밖의 다른 사람들, 늘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은 시골 사람들이 그러한 변화를 눈으로 보게 될 것이다. 맞춤형 양복을 만드는 사람이 브룩스 브라더스(Brooks Brothers)에서 매주 수천 벌씩 팔려나가는 양복들을 보며 끝없는 질투심을 느낄 수 있을까? 맞춤형 가구 제작자가 이케아(IKEA)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왜 나는 이렇게 많이 만들 수 없을까 한탄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는가? 당연히 안 될 것이다. 작은 교회 목회자여,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기회를 낭비하지 말라.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오랫동안 잘 섬겨라. 그들의 삶에 꼭 맞는 진리를 그들에게 들려주라. 그들의 깨어짐, 영광, 취해야 할 태도에 대해 설교하라. 당신이 만나고, 알고, 손을 잡을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라. 맞춤형 설교를 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mall-Town Pastor, Preach Bespoke Sermon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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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by 이춘성
2020-07-22
타임(Time)지가 선정한 25인의 복음주의 지도자 중의 한 명이며, 20세기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을 대표했던 신학자 패커(J. I. Packer)가 향년 93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땅에서의 그의 사명을 다하였다. 199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니며 대학생 선교단체를 통해 신앙의 깊이를 다졌던 나와 같은 X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제임스 패커(J. I. Packer), 존 스토트(John Robert Walmsley Stott), 로이드 존스(David Martyn Lloyd-Jones)는 성경과 세상을 보는 바른 관점을 형성하도록 도와준 고마운 신학자이자 설교자들이었다. 특별히 이 세 명은 영국의 복음주의의 부흥을 이끈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 중에서 둘은 현직 목회자와 설교자였지만 패커는 영국 버밍햄(Birmingham)에서의 3년간의 짧은 목회 기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간 동안 사역자를 교육하고 양성하는 신학교에서 신학자와 교회의 교사로서의 소명을 다하였다. 특별히 그가 캐나다로 건너가 몸담았던 리젠트칼리지(Regent College)는 복음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사역자를 길러내는 데 크게 기여한 곳이었다.패커는 은퇴 이후에도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단독 저자로 쓴 단행본만 26권 이상이며, 공저자로 참여한 책들과 단편 논문 등을 합하면, 그의 저술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방대하다. 앞에서 언급된 그의 동료 존 스토트와 로이드 존스가 설교단과 목회 현장, 선교지에서 목소리를 통하여 영국과 전 세계의 기독교인들과 대화하였다면, 패커는 그의 낡은 수동 타자기를 통해 쉴 새 없이 생산했던 글과 책으로써 대화하였다. 그가 쓴 청교도 저작에 관한 연구들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와 실천, 예를 들어 ‘삼위일체’, ‘성경관’, ‘십계명’, ‘기도’ 등에 관한 책들은 그만의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로 읽는 이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특히 그가 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전 세계적으로 백만 부 이상 팔린 금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기독교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다.‘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비교적 패커의 초기작이지만 다른 어떤 책들보다 영향력 있는 그의 대표작이다. 존 스토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은 후 “패커가 다루고 있는 진리는 가슴에 불을 붙인다. 적어도 나의 가슴을 뜨겁게 할 뿐 아니라, 돌아서서 경배드리고 기도하게끔 강권하는 힘이 있다.”고 극찬하였다. 패커의 대표 저작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피상적인 앎에 대해 깨닫게 만들었다.이 책이 세상에 나온 1973년은 1968년에서 1972년에 완성된 프란시스 쉐퍼의 3부작(Francis A. Schaeffer Trilogy)으로 알려진 ‘존재하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이성으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Reason),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He Is There and He Is Not Silent)이 완성된 바로 그 다음 해였다. 쉐퍼는 그의 책에서 당시 서구 유럽 사회에서 내용 없이 종교적인 구호로 불렸던 ‘십자가’, ‘예수’, ‘하나님’ 등의 공허한 단어의 위험성에 대해서 경고하였다. 사람들은 이런 기독교적 용어들에 익숙하여 성령,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이 누구이며, 역사 속에서의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단지 이것들이 풍기는 이미지와 자신의 실존에 미치는 의미에만 집착하였다. 쉐퍼는 당시 교회 안에 만연한 이러한 신앙의 피상성에 대해서 심각한 우려를 표하였다.패커도 쉐퍼의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쉐퍼가 현대 사회의 세속적 문화와 사조에 물든 교회의 문제점을 진단하였다면, 패커는 이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화석화 된 기독교 교리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패커는 그의 책을 통해 지금도 유효하고 중요한 질문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어떤 차이점이 있는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했을 때의 앎이 무엇인지에 관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 물었다. 그는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란 인격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통한 앎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리고 앎의 대상인 하나님이 알게 해주시는 것을 통해 더 깊이 알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패커의 설명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앎이 샤머니즘과 같은 신에 의한 일방적인 신탁이 아니며, 또한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화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격적인 지식이라는 의미다. 이 사실은 당시 사람들에게 기독교 신앙이 오래된 신화나 박물관의 화석이 아니라 창조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유효할 뿐 아니라 살아있는 지식이라는 사실을 설득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렇게 패커는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을 살아계신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가 떠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나에게도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의 의도에 따라서 지금도 바르게 작동하고 있다. 정확히 언제인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꽤 오래전부터 매년 한 번씩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읽기로 다짐하였고, 실천하고 있다. 내가 그렇게 결정한 이유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나의 신앙을 살아 숨 쉬게 하기 위해서였다. 자칫 기독교와 교회의 문화 속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지식으로 변하여, 감동 없이 사람들에게 지식과 정보를 자랑하는 수단으로 변질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의 책은 나에게 소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패커는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보물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어거스틴의 ‘고백록’처럼 많은 사람을 영적으로 각성시키는 메가폰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이다. 생전에 패커는 그를 영적으로 각성시킨 청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매년 한 번씩 읽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두 눈으로 볼 수 없게 된 2016년 이후, 그는 더이상 ‘천로역정’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천로역정’을 읽을 필요가 없을 만큼, 그의 몸 구석구석 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패커에게 ‘천로역정’이 있었다면, 이제 우리에게는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다. 그를 추모하는 방법이 여럿이겠지만, 나는 그가 남긴 위대한 선물인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책장에서 꺼내어 읽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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