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목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설교자여, 불편한 주제를 피하지 말라
by Brett McCracken
2019-01-21
성(性)에 관하여 설교하겠다고 냉큼 달려들 목회자는 거의 없다.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우리 교회의 설교일정표에 계획된 “잠언 5-6장에 나타난 성(sexuality)에 대한 지혜”라는 주제 옆에 내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일단 그 순서를 피하고 싶었다. ‘좀 더 성숙한 장로가 이 문제를 다룰 순 없을까?’ 하고 고민했다.하지만 나는 그 주제를 피하지 않았다. 결국 설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다루며 설교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내가 인간의 성에 대한 하나님의 지혜로운 의도를 설명하는 40분 동안 예배당은 남극만큼이나 차가웠지도 모른다. 상호 보완적인 성과 성적 타락의 문제, 그리고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라는 구절을 다루며, 내 목은 사하라 사막처럼 건조해졌다.하지만 설교를 마친 뒤에 따라오는 청중의 반응은 놀라웠다. “이런 주제에 대해 들을 수 있어서 기쁩니다.” “불편할 수 있는 내용을 피하지 않고 담대히 전해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설교를 더 듣고 싶습니다.”청중은 우리가 이런 주제에 대하여 다루기를 원한다. 그들은 오늘날 문화에서 직면하는 여러 이슈들에 대해 분명하고 섬세한 방식으로 성경적인 가르침을 받기 간절히 원한다. 성, 남녀 및 인종 차별, 지옥, 하나님의 진노, 전쟁과 폭력, 성령의 은사, 그리스도의 배타성과 같은 주제가 다뤄지기를 원한다.성경에는 이 모든 주제에 대해 말한다. 따라서 설교자 역시도 이를 다루어야 한다.하나님의 모든 뜻하나님의 모든 뜻을 설교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언급했던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음이라”(행 20:27)라는 말은 간혹 어떤 주제들의 경우 꺼리지 않고 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하나님의 모든 뜻을 다루는 일은 두려운 일이다. 여러 문화적 맥락에서는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줄 정도로 그 뜻의 일부는 무섭다. 많은 부분은 직접적이라서 두렵고, 또 다른 부분은 단순히 ‘세 가지 포인트로 구성된 설교’에는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기에 두렵다.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계시된 모든 뜻은 설교하기가 쉽지 않다.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모든 뜻을 설교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깨끗하지 못하게 된다(행 20:26).구도자 중심의 예배는 진정성이 없는 예배를 말하는가?비신자를 고려하여 구도자 중심으로 교회의 공적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일 아침 강단에서 불편한 주제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마찬가지로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성장을 위해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기분 좋은 설교만을 듣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청중은 우리가 어려운 주제에 대해 설교하면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가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여긴다. 과연 그러한가?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주일학교 시절, 거리낄 내용이 없는 설교만을 듣고 어려운 질문은 하지 못하는 중고등부 모임 속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밀레니엄 세대의 복음주의자로서 나는 이제 교회들이 어려운 주제도 다루고 곤란한 질문도 던지기를 진정으로 바라고 있다. 아마도 내 또래들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동일하게 느낄 것이다.내가 요즘 만나서 훈련하는 대학생들은 그저 친절하고, 쉽고, 거리낄 게 없으며, 편안한 기독교를 찾고 있지 않다. 이런 기독교는 인공적이며 진정성이 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그런 기독교는 실제로 진정한 기독교와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기독교는 불가피하게 큰 대가를 요구할 뿐 아니라 어떤 차원에서는 불편한 종교이다. 이 신앙은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라고 말한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이는 대중의 심기를 건드릴까 염려했던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라우리는 기독교의 여러 불편한 내용을 숨기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찰스 스펄전이 말한 것처럼, 위험 부담을 안더라도 불편한 내용을 숨기지 말아야 한다.“십자가의 효력을 없애 버리지 않도록, 그 십자가의 불편함을 숨기지 말라. 복음의 날카로운 측면에서 그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복음의 불편한 부위를 잘라내는 일은 그 능력을 없애는 일이다. 복음을 순하게 만들면, 그 능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라져 버린다.”우리는 성경을 순하게 만들 필요도 없고, 복음을 길들일 필요도 없다. 우리는 복음을 있는 그대로 용감하게 설교해야 한다.청중석에 앉은 이들은 불쾌한 부분을 제거한 거짓된 기독교, 그들이 어떤 삶을 살든 지지해 주고, 자신들을 성장시켜 주지도 않으며, 자신들에게 도전하지도 않는 기독교를 원하지 않는다.그들은 진리를 원한다. 아무리 듣기 어려운 내용이라 하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Don’t Avoid Uncomfortable Topics번역: 하늘샘
목회
설교와교육
하나님의모든뜻
불편한주제
구도자중심의예배
찰스스펄전
진리
당신은 지옥에 관해 어떻게 설교하는가?
by Peter Gurry
2019-01-16
나는 최근에 지옥에 관한 교리를 두 번 가르쳤고, 그 두 번을 다 눈물로 끝마쳤다.지금도 두 번째 강의 때 일어난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수업이 끝났을 때, 하나님을 오랫동안 섬겨 온 나이가 많은 한 부인이 침울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분은 울면서 자기 어머니에 대해 질문했다. 혹시 현재 지옥에 있지는 않은지 알기를 원했던 것이다.나는 그런 상황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대답하는 상투적인 대답을 했다. 우리는 개인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어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실제로 나는 몰랐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다.그런데 나는 그녀에게 또 다른 말도 했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의 어머니가 지옥에 있다면, 그에 대한 정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또 만일 하나님이 나와 당신을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 옳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옥 심판은 죄를 지은 우리에게 마땅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 부인은 내가 결코 잊을 수 없는 진지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부둥켜안고 서로의 죄와 지옥의 무게를 느끼며 함께 울었다.지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우리가 가진 지옥에 대한 견해는 우리가 죄와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와 깊은 연관이 있다. 지옥에 관해 생각할 때 흔히 저지르는 두 가지 잘못이 있다. 한 가지 잘못은 지옥은 없다고 여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지옥을 자신과는 생각이 다르고, 정치적인 견해가 다르고, 삶의 방법이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할 장소로 여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복음의 은혜는 물론 우리와 같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무관심을 가져온다.조나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런 문제점을 잘 파악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지옥을 인정하면서도 그곳이 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장소라고 믿을 때, 오직 나 아닌 타인들만 가게 될 장소라고 확신할 때, 그런 사람은 오히려 지옥을 부정하는 상대에게 강력한 반대 의견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믿으면서도 그 장소가 결코 자신들과는 관계없는 곳이라고 여기며 우월감을 느낀다고 한다. 오늘날 계속해서 주장되는 지옥 교리는 대개 이 교리를 반대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약학자인 데일 알리슨(Dale Allison)은 그가 젊은 시절에 가졌던 지옥 교리에 대한 반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나는 기독교와 다른 종교에 관한 소책자를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소책자는 모든 유대인, 무슬림, 힌두교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로 고통을 당한다는 교리를 분명히 가르친다. 그 소책자의 저자는 성경 본문을 인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입증했다. 나는 그때 이런 주장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졌다. 나는 그 글을 읽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아픈 마음으로 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죽은 후에 지옥의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개념은 내가 자유주의 신학을 만나기 오래 전부터 혐오스럽게 다가왔다.”나는 이런 지옥 개념이 혐오스럽다는 견해를 인정한다. 우리는 그와 같은 지옥 개념을 반박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개념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가야 하는 장소로 지옥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옥이 나와 상관없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장소라는 개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판단할 때 거짓된 것으로 드러난다.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당신과 같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그 누구도 지옥에서 형벌을 받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들 역시 당신과 똑같다는 이유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지옥에 관한 충격적인 진리이다.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진리는 우리도 다른 사람도 모두,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 때문에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라고 선언하는 성경의 말씀은 외적인 기준으로 서로를 비교하고 판단하는 우리의 오만을 깨뜨린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지옥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지옥에 가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옥을 피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죄 없는 아들이 우리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우리처럼 되셨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어떤 방법으로 지옥을 가르쳐야 하는가? 우리가 지옥에 관한 설교와 교육을 실천할 때,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해야 한다.1. 사랑의 하나님이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이유를 설명할 때, 다른 사람들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시는 하나님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역사 속에 악명 높은 히틀러나 스탈린과 같은 사람을 예로 들려는 유혹에 쉽게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악한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죄악이 우리 속에도 실재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 내면에 있는 강력한 증오, 깊게 뿌리박힌 자기중심적 아집, 마음과 뜻과 영혼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순종할 수 없는 전적인 무능을 솔직히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우선적으로 지옥 교리를 적용할 때,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진리가 예수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과 그 결과로 우리가 지옥의 실재를 믿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이 분명히 보고 알게 될 것이다.2. 지옥을 믿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형벌을 입술로는 부인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옥 형벌을 강하게 믿는다. 하지만 자신들이 믿는 지옥에 대해 솔직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지옥을 말할 때 진지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또한 그들은 자기가 먼저 공적인 대화에서 지옥에 대해 말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에 관해 설교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기 때문에 지옥을 언급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고, 또 영원한 고통 속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싫어한다. 나도 그런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지옥 형벌의 엄중한 무게를 숨기면, 예수님이 죄로 인해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자기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복음의 위대한 가치를 온전히 드러낼 수 없다. 결국,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한다(눅 7:47). 3 지옥에 대한 믿음은 우리의 복음 선포에 필수적이다우리가 지옥을 우리가 마땅히 가야하는 곳으로 여기지 않고 설교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것으로 설교하게 된다.이 둘은 필연적으로 서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느끼는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움은 늘 함께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옥과 복음이 어우러질 때 나타나는 엄중함과 절박함, 그리고 경외감을 가지고, 그 둘을 함께 설교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도 바울처럼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re We Proclaiming a Hell We Don’t Deserve—and a Christ We Do?번역: 김재덕
목회
설교와교육
죄와그리스도
조나난에드워즈
지옥교리
데일알리슨
복음선포에필수적
지옥과복음
목회자에게 고통을 허락하시는 이유
by Dan Steel
2018-12-31
간혹 우리는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2006년 여름이었다. 나는 성장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가진 모든 소유를 뒤로하고 영국 버밍엄에 있는 파송 교회로 돌아가라는 부름을 받았다. 2년 전에 떠나온 곳에 돌아가서 그곳의 교회 개척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교회 개척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모든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분주히 움직이며, 2006년 가을까지 숨 가쁘게 준비했다. 핵심 팀을 만들고 꿈을 꾸며 계획하고 기도하는 인내의 시간을 거쳐, 우리는 드디어 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감격스러운 첫 부활절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나의 삶을 바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이는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아픈 순간들 중의 하나였다.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였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섭리나는 버밍엄과 옥스포드를 수없이 오갔고, 8주 후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항상 활동적이었고 건강하셨다. 그래서 정말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버지는 헌신적인 신앙인이었지만 그분의 죽음은 나를 힘들게 하기에 충분했다.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이 교회 개척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좋은 질문이다. 지난 12년 동안 나는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교회의 개척 사역에 협력하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아는 한, 교회를 개척하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이는 교회를 개척하기 바로 전이나 혹은 바로 후에 내적으로 겪는 고난이 있다는 점이다.“하나님은 자주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특유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다.”그것이 관계나 건강 문제일 수도 있고, 외적 핍박일 수도 있고, 내적 갈등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교회 개척 목회자들에게 나름의 고난을 겪게 하신다. 하나님은 한이 없는 지혜로 우리에게 유익을 주시려 한다. 반직관적 수단인간적으로 말하자면, 그 말은 이상한 소리로 들린다. 우리가 원했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훌륭한 정원사라면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화분에 나눠 심으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영양분을 골고루 공급받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싹이 나기 시작했을 때는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겨울에는 가장 이상적인 조건에서 자랄 수 있도록 화분을 온실에 넣어야 한다.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는지 수시로 확인해야 한다. 또한 어느 정도 성장한 다음에는 비바람에 노출하여 튼튼하게 뿌리내리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그러나 하나님의 길은 우리의 길과 다르다(사 55:8-9). 하나님의 경륜에서 고통과 고난은 우리를 겸손으로 성숙시키는 열쇠이다. 목적이 있는 고통도대체 왜 고통을 주실까? 각각의 상황과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고통의 문제로 자신을 의지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고후 12:10). 스펄전이 “파도에 의해 이리저리 던져지더라도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법을 배웠다”라고 말했듯이 인생의 파도는 우리가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한다.때때로 우리는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화 통화를 받거나, 또 다른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혹은 애통하는 성도들과 함께 있기 때문에, 가장 필요한 순간에도 스스로를 성찰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교회 개척 안내서에서도 이에 대한 궁극적인 답을 찾을 수 없다.우리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폭풍과 파도를 만나는 때이다. 물론 그것은 고통스럽다. 그리고 정말 피하고 싶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모르실까? 하나님은 오직 능력이 있으신 그분만을 보배롭게 여기도록 우리의 연약함을 부드럽게 나타내신다.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교회 개척이 우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이다. 둘째, 문제와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를 더 나은 목자로 세워 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고통을 겪게 하신다. 내 경험에 의하면, 여러 교회 개척자들은 에너지로 가득하고 용기가 있으며 대담하다. 그들은 열정으로 임한다.하지만 병상에서 죽어 가는 사람 옆에 앉아 있거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로 씨름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많은 목회자들은 알게 모르게 힘들어 한다.아마도 주님은 우리를 일부러 고난의 ‘온실’에 넣어 두신 것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고후 1:4) 할 수 있게 하신다.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가장 잘 배우고 진실한 내 모습을 살피게 된다. 우리는 계획을 세우지만 이를 이루시는 이는 주님이시다.아버지의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나의 관점이 많이 바뀐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생명, 사역, 교회 개척, 설교, 목양을 새로운 렌즈로 보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나와 다른 사람의 삶에 복음을 더 잘 적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은 정말로 나를 아프게 했다. 여전히 아프다.왜 주님은 시험을 주실까? 죽음이 없는 것처럼 사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죽음의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심은 아닐까. 아마도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현실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의 유한한 생명과 복음의 필요성, 그리고 주님의 풍성한 은혜를 상기시켜 주려 하시는 것은 아닐까.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주님은 우리를 서서히 그분이 원하는 모습의 목회자로 만드시는 것이 아닐까.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 Your Pain has a Purpose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성숙
주님의은혜
섭리
고통
복음
내가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40년 목회에 대한 반성
by Steve Timmis
2018-12-27
이 글을 쓰게 된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첫째,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이는 주님이 이루신 모든 것을 돌아보고 나를 반성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둘째, 이것이 아마 더 중요한 이유가 될 텐데, 나는 최근에 60번째 생일을 기념했다. 기쁘고 놀라운 일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원숙한 나이에 도달했는지 나조차도 모르겠다. 하나님은 지난 40년 동안의 목회에서 나를 자비로 붙들어 주셨다.지난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교회 개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혹은 많은 책임을 담당했다. 성공적인 경우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상황도 있었다. 이제 내가 배운 교훈을 정의하기에 적절한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다. 바라건대, 이 정리 중 일부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교회 개척의 세계에 새롭게 뛰어든 자들뿐만 아니라 경험 많은 목회자들에게도 유익이 되었으면 한다.1. 개척의 착수보다 삶에 초점을 맞추라첫 개척을 시도할 때는 경험이나 이와 관련된 지식이 전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첫 모임은 꽤 성공적이어서 오래되고 비좁은 예배당에 약 30명 정도의 사람이 모였다. 하지만 일주일 후, 교외로 차를 몰고 나와야만 하는 그 교회에는 아무도 다시 오지 않았다.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인데, 이는 좋은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이 일로 인해 아내와 나는 크리스천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정말 열심히 살았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관계를 형성하고, 지역 사회에 참여했으며, 복이 되는 삶, 즉 그리스도를 빛나게 하는 모든 일에 힘썼다.개척에 관한 강연과 자료의 대부분은 ‘착수’에 초점을 맞추며, 이것이 교회 개척의 처음과 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착수는 교회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는 것이 진정으로 가능할 때에 실행할 수 있는 영역이다. 여기서 교회는 그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동시에 모여 노래하고 기도하고 설교를 듣는 것에 그치는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교회 개척은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작업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매일같이 예수님을 따르고, 복음을 알리려고 힘쓰며, 서로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고찰 이후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교회를 위해 움직여라. 개척의 방식은 곧 당신이 목표하는 교회를 표현하는 방식이 되어야 하며,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통상적인 혹은 동떨어진 방식이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개척 이후 사람들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하더라도, 당신의 교회는 여전히 깨지기 쉽고 목표를 이루기에 비효율적인 상태로 남을 수 있다. 모임 안에서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함께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은혜를 얻고, 그분의 영광에 기뻐하며, 서로와 잃어버린 세상을 향해 날마다 그분의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일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날 때 비로소 ‘개척 착수’를 고려하라.2. 핵심 팀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마라핵심 팀은 개척을 성공시키거나 반대로 무너뜨릴 수 있다. 따라서 핵심 그룹을 구성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하라. 순진함을 피하고 예민하게 판단하라. 같은 곳을 바라보며 일할 수 있는 사람들, 재정이나 역량으로 도와줄 사람들, 또 당신이 약해져 있을 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을 고려해야 한다.반드시 기도하며 신중하게 팀을 구성하라. 나도 늘 그렇게 했던 것은 아니다. 간혹 나는 당장의 시급함이나 하고자 하는 열정, 또는 사역을 도울 누군가가 단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팀을 꾸렸다.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이 선택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했으나, 좋지 않은 모습으로 끝나기도 했다. 주님은 우리의 능력이나 계획과 무관하게 그분의 교회를 세우신다. 하지만 이 당연한 진리를 믿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곧 사려 깊은 생각의 불필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하라.3. 여성들도 복음 사역자다나는 보완주의(곧 남녀가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여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서 결혼과 가정 및 신앙 생활 등을 이루어 간다는 입장)를 지지하는 사람이기에 여성 역시 복음 사역자로서 자신의 부르심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나 부가적인 유익이 아니다. 우리는 이 위대한 과업을 함께할 파트너인 여성이 필요하다. 그들은 뛰어난 복음 전도자, 성경 교사, 제자 훈련 지도자, 조직 운영자, 일꾼, 리더가 될 수 있다. 그들은 교회의 다른 역할만큼이나 교회 개척에도 반드시 필요하다.목회 사역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여성들이 성장하고, 기회를 제공받고, 훈련되며, 파송되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당신의 교회에 속해 있는 여성들을 격려하고 또 강하게 하라. 그들로 하여금 단지 어린이 사역만 섬기게 하지 말라. 여성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영향을 끼치며, 문화를 이끌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여성을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다.4. 비난받을 정도로 복음에 정통하라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청년이었던 나는 바울이 디모데는 할례를 받게 하면서, 반대로 디도는 할례를 받지 않게 하는 상반된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두 상황 모두가 복음에 관한 것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울은 상황에 맞게 행동하려 한 것이지, 그 행위에 있어서 불일치를 저지른 것은 아니었다. 그는 원칙에 따랐고, 실용주의적으로 행동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바울을 변덕스러운 자라고 비난했다.내가 교회 개척을 통해 깨달은 점은 갑자기 일어난 사건들로 마음이 분산되거나 심지어 그 방향성을 잃거나, 혹은 주시하는 사람들 때문에 겁먹지 않으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복음은 함부로 수정되지 말아야 한다. 다만, 여러 상황 속에서 다양한 적용점을 갖고 있을 뿐인데, 그 지점에 다다르려면 복음에 정통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알고, 복음을 사랑하며, 복음을 기뻐하고, 복음이 비난받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5. 교회의 성장을 곧 복음의 확장으로 오해하지 말라‘교회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교회는 성장할 수 있다.’ 주변에 다른 교회들이 있어 서로 경쟁할 수 있는 환경이 된다면, 그 자체만으로 원동력이 되어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이는 ‘경쟁’이라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옳은 논리일 수도 있다. 주변 다른 교회보다 최신 유행을 더 잘 알고, 최근 경향을 더 잘 따르고, 더 화려하고, 더 크고, 더 큰 소리를 냄으로써 교회가 성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성장한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의사들이 종양에 대해 설명하는 내용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주변 교회와 경쟁하는 마음으로 개척하지 말라. 차라리 복음의 증인이 없는 곳으로 가서,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분명 성장은 느리겠지만, 복음이 확장될 가능성은 훨씬 높다.나의 지난 경험들을 돌이켜 보았을 때, 숫자적으로 회중을 성장시키는 일은 고되었지만 최고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이보다 훨씬 더 크고 많은 대가를 요구하지만 더욱 아름다운 사역은 무엇일까? 바로 회복된 죄인들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복음이 드러나도록 이끄는 일이다. 이런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이다. 새해를 맞이하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분명 이러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자신을 낮추신 위대하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감사드리게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ings I Wish I’d Known: Reflections on 40 Years in Ministry번역: 주영식
목회
리더십
개척착수
핵심그룹
교회성장
상호보완주의
여성사역자
공동체
목회의 고통이 알려 주는 최고의 가치
by Ray Ortlund
2018-12-11
오늘날 젊은 목회자들 중에는 멋있고, 영향력이 있으며, 대중적 인기가 있는 인물들이 있다. 그러나 지난 수 세기 동안 영원한 삶을 위해 애써 온 앞선 목회자들의 사역은, 오늘날과 비교해 볼 때 더욱 깊이가 있고, 웅장했으며, 그 생명력이 뛰어났다고 말하고 싶다. 그 예로 사도 바울은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한다”(골1:24)라고 고백하였다. 바울은 목회 사역을 관통하는 두 가지의 거룩한 힘인 ‘고통’과 ‘기쁨’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겪는 고통은 아마 바울의 고난만큼 거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보면서 자기 연민, 분노, 불평 없이 고난을 통과해야 함을 배워야 한다. 더불어 바울을 통해 기쁨으로 고난을 이기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고통(혹은 고난)에 반응하는 자세가 어떠한지에 따라 우리는 비로소 복음을 전파하는 단계로 뛰어오르게 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그 힘은 바로 우리가 성취하게 될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 고통을 참으신 그리스도(히12:2)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에서 온다. 나는 젊은 목사로서 고통이 아닌 기쁨을 꿈꾸며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혼동들과 서러움이 찾아왔을 때, 특히 거부당하는 경험을 할 때마다, 나는 이 사역을 감당할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 아마 당신도 그러할 것이다. 이러한 낙심이 비록 타당할지라도, 너무 절망할 필요는 없다.주님이 나를 인도하시면 할수록, 성경의 다른 구절들은 물론이거니와 특히 아래의 구절이 나에게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벧전 4:12).“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주님이 우리를 목회자로 부르실 때 결코 거짓을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분은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겪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의 고난은 은혜이고, 특권이며, 곧 주님이 주시는 영광의 명류관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값비싼 피로 물든 고난의 길을 걸으며 그분을 따르고 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또 다른 진리를 알게 될 준비가 된 것이다. 그 진리란 내가 이 고난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참된 진실이며, 우리를 고난 중에도 기쁨으로 이끄는 힘이다. 목회 사역의 특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귀결된다. 즉, 예수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존재하며, 그분을 대리하고, 그분을 위하여 나의 삶을 내려놓는 모든 행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목회자의 특권이다. 내가 본 최고의 목사인 나의 아버지는 돌아가시던 날 이렇게 당부하셨다. “목회가 전부가 아니란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전부임을 기억하거라.” '열두 명의 신실한 제자들: 용기와 인내의 목회 사역'(In 12 Faithful Men: Portraits of Courageous Endurance in Pastoral Ministry)이라는 책에서, 콜린 한센(Collin Hansen)과 제프 로빈슨(Jeff Robinson)은 목양의 고통과 열매가 주는 영원한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늘날의 목회자들이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신다고 불평하지 말자.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목회자들은 지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이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는 최고의 가치이심을 증명한다. 그리고 그 가치를 붙드는 것이야말로 우리를 영원한 기쁨으로 충만케 한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 Wasn’t Ready for in Pastoral Ministry번역: 고갑균
목회
리더십
고난
은혜
특권
영광의면류관
가치
콜린한센
제프로빈슨
그리스도
사역이 예상보다 더 어려울 때
by Tyler St. Clair
2018-12-10
또 다시 주일 사역으로 녹초가 된 나와 아내는 거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물었다. “우리에게 사역은 왜 이토록 어려운 걸까?” 나는 (눈물을 참으며) 아내에게서 애써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나즈막이 말했다. “나도 모르겠어.”우리는 10년 넘게 사역하며 겪었던 승리와 시련에 대해 세세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2016년 시작한 교회 개척은 하나님의 은혜 덕분에 건강하고 아름답게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그 대가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때때로 그 고통은 마치 출산을 했는데도 여전히 진통을 겪고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확실한 불확실성수년째 평온한 지역에서 잘 지내던 어느 날, 나는 마음의 준비를 할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아내에게 폭탄과 같은 말을 던졌다. 주님이 안정적인 지금의 직장을 정리하고 교회 개척 사역에 전념하도록 나를 이끄시는 것 같다고 말이다. 그렇게 하려면, 당시 내가 벌던 수입으로는 필요한 자금의 6-70%밖에 충당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가족을 데리고 디트로이트로 이사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당연히 아내의 마음은 여러 감정으로 복잡해졌다. 그녀는 당황함과 두려움으로 내게 화를 냈다. 또 분석적인 성격을 따라 내 생각이 왜 잘못된 결정인지에 대해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는 오랜 시간 기도하고 토의하였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기로 결정했다.그날 저녁의 결정은 이후 여러 해 동안 우리가 겪게 될 험난할 시간의 출발점이었다. 예를 들면, 디트로이트의 악명 높은 우범 지역으로의 이사, 연봉의 대폭 삭감과 좋은 사보험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는 상황, 자금 충당을 위해 쉬지 않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려야 하는 일, 우리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삶을 노출하는 일,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우리 자녀들을 떼어놓는 일, 극심한 가난, 깨진 관계, 학대를 겪는 사람과 깊은 관계 맺는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우리에게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삶의 ‘불’확실성이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한 지 막 2년이 된 지금도 비슷한 여정에 있다.새로운 이 공동체를 섬기다 보면, 폭풍 구름과 같은 경제적 어려움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하고, 때로는 결국 그 폭우에 흠뻑 젖기도 한다. 이제 거의 2년이 지났는데도, 우리는 다른 교회가 이즈음이면 가질 법한 인력과 재정을 여전히 채우지 못하고 있다.교회 침입과 차량 도난을 여러 번 경험했고, 건물주에게 금전을 강탈 당한 적도 있다. 혼란의 도시에서 사역하며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예측 불가능함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난의 중첩이처럼 어려운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하며 많은 힘든 일을 겪었지만, 내가 잘못 계산했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내 가족이 치르는 희생의 값이었다. 아무리 자주 아내와 데이트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고 해도, 아내와 자녀들이 치른 대가를 벌충할 수는 없을 것이다.“미안해, 우리는 그럴 돈이 없어.” 나의 바람과 상관없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나는 슬픔 혹은 후회와 씨름했다(그리고 여전히 종종 씨름한다).오해는 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교회 개척에 많은 고통이 따를 것이라는 점은 예상했다. 다만 이렇게까지 힘들 줄은 몰랐다. 내 자녀들은 인간의 타락을 전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생활 환경으로 인해서, 어린 시절에 누려야 할 순수함을 잃었다. 아이의 친구들은 그들 가정에 지낼 곳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또 부모가 투옥되는 바람에 그 친구들이 어딘가로 떠나야 하는 일도 우리 자녀들은 보았다. 한 번은 내가 마약을 구매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는 바람에 체포된 적이 있다. 다행히 일이 잘 풀려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이들은 엉엉 울고 말았다. 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때마다, 아내와 자녀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나를 위해 기도해야 했다. 이처럼 우리 아이들은 보통의 어른들조차 쉽게 경험하지 못할 일들을 경험하고 있다.거기에 지난 수년간 아내가 겪은 어려움에 대해서는 도저히 설명할 도리조차 없다. 그녀는 교회 개척으로 인해 경제적 안정과 이전에 살던 집을 포기해야 했고, 이상적인 교육과 휴가의 기회를 잃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날을 남편 없이 보내야 했다.지금도 아내는 집안을 돌보면서 동시에 다른 자매들을 양육하느라 엄청난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있다(게다가 우리는 이 와중에도 여러 번 이사하였고,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삶의 전환점을 겪었다). 아내가 치르는 희생 때문에, 나는 여러 번 이 사역을 그만둘까 생각하기도 했다.지속하게 만드는 은혜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이 이 가족을 지켜 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다. 우리는 왜 이 큰 대가를 치러 왔는가? 바로 예수님이 그럴 가치가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가치를 지니신 분이기 때문이다.수년 전, 주님은 내 마음에 이 말씀을 새겨 주셨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15).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무한히 큰 인간의 죄값을 지불하셨다.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다가올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셨다(히 12:2). 죄 없는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자기 의를 우리에게 주셨다(고후 5:21).어려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하는 일은 많은 희생을 요구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신 모든 것을 생각했을 때, 과연 우리가 희생한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언젠가 선교사 데이비드 리빙스턴(David Livingstone, 1831-1873)이 말한 것처럼, “만약 이 땅의 왕에게 파송 받는 일을 영광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하늘의 왕에게 파송 받는 일을 희생으로 여길 수 있겠는가?”우리는 바울처럼 주님이 요구하시면 무엇이든 하리라고 결심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그분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희생하셨기 때문이다.그리스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그 어떤 손실보다도 가치 있는 분이시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얻고(엡 3:8),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았다(엡 1:3).내 이야기는 간단하다. 주님이 들려 주신 숨겨진 보화나 값진 진주의 비유와 같이(마 13:44-46), 아내와 나는 그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라면 이 모든 일을 감수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우리는 영웅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웅을 섬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Ministry Is (Way) Harder Than You Expected번역: 하늘샘
목회
난관
확실한불확실성
고난의중첩
데이비드리빙스턴
가치
희생
강해설교란 무엇인가?
by Mark Dever
2018-12-07
강해설교는 한 성경 본문의 요점을 주제로 삼아, 그 주제를 오늘날 청중의 삶에 적용하는 설교이다. 다시 말해, 강해설교는 특정 성경 본문의 의미를 밝힌 후 그 의미가 청중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설교이다.이와 같은 강해설교를 진행할 때에 다음의 오류를 범해서는 결코 ‘안 된다.’1. 지엽적으로 한두 구절에만 초점을 맞춘다.2. 해석상의 복잡한 논쟁이나 끝없는 역사적 배경을 제시한다.3. 무미건조하거나, 생명력이 없거나, 사람들의 삶과 분리된 해설을 한다.4. 본문이 의미하는 바와 일치하지 않는 적용을 뒤섞어 놓는다. 특히, 설교자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본문의 구절을 인용한다.결국, 강해설교는 길이가 짧든 길든 특정 성경 본문을 취하여 그 본문의 핵심 의미가 오늘날 청중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실제적 설교라고 할 수 있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at Is an “Expositional” Sermon?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설교와교육
강해설교
청중의삶
적용
본문의핵심의미
실패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by Cole Huffman
2018-11-26
누군가에게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하길 바래”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사람을 경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혹 약간만 실패하길 바란다고 말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피겨스케이트 선수였던 스콧 해밀턴(Scott Hamilton)은 1984년에 메달을 딴 이후, 오랫동안 이 종목의 분석가로 활약해 왔다. 2018년 동계올림픽 기간에 스콧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선수 생활동안 내가 넘어진 횟수를 계산해보니 41,600번이나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는 41,600번 다시 일어났다.” 그는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 넘어지면 무조건 일어나도록 단련된 ‘강한 정신 근육’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정신 근육은 실패할 때 만들어진다. 물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비극적인 실패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수천 번 넘어져야 한다. 해밀턴의 점프와 백플립이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년간의 연습과 대회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대변인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패로 인해 심각하게 실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악관 일은 실패를 고통스럽게 인식하지 않는 이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영적인 근육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특히 목회자들은 곳곳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신의 실패에 가슴 아파하며 나눌 줄 알아야 좋은 목회자이다. 나는 목회자를 무너뜨리는 도덕적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게으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여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만성적 실패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소명에 필요한 역량, 곧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목회자는 학자의 정신, 어린아이의 마음, 그리고 코뿔소의 가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왜 코뿔소의 가죽인가? 물론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바로 그 사람들이 간혹 비평과 공격으로 당신을 실패하도록 몰고 가는 상황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실패를 모조리 피한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언젠가 항불안제의 후유증에 대해 웃으며 설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가볍게 여겼지만, 내 말을 듣고 한 젊은 엄마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남편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결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감사하게도 나를 용서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교인들의 상처에 관해 알게 되었다. 실패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었을 무언가를 그 날의 실수를 통하여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유일한 방법그 무언가를 배울 다른 길이 없었기에 실패를 통해 배워야만 했던가?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말했다. “화가 났을 때 말하라. 그러면 정말로 후회하게 될 말을 할 것이다.” 나도 그래본 적이 있는데, 바로 설교할 때였다. 나는 그 날의 설교를 정말 후회한다. ‘그 주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자주 생각한다.나는 실패한 교회개척자이다. 몇 년 전 개척된 이 교회는 다행히도 잘 되어가고 있지만, 오늘의 결과는 내 덕분이 아니다. 나는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 부었지만, 내가 이 사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어떤 이들은 내 아이의 문제를 보며 내가 양육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마약 치료센터에서 내가 만나 본 대부분의 부모들은 스스로를 양육의 실패자로 여긴다. 그런데 중독자를 둔 부모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녀들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시도하는 방법들이 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더 실패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방식으로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녀들을 계속 실패하게 만든다. 아마도 부모의 직관에는 반대되겠지만, 우리 자녀들은 홀로 있어야만 한다. 그가 공동체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도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가 주체가 되어 그들을 회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자신의 두 발로 서서 회복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가 잘못된 양육의 길을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패에 대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실패에 관한 한, 나는 결정론자가 아니다. 나는 소망주의자이다. 나는 젊은 목회자나 부모들에게 “도중에 실패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성공이며, 실패 없이는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이 실패로부터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늘 도움만 받는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그러므로 실패할 때 주님께 감사하자. 실패의 원인이라든가 그 실패가 가져오는 고통이나 혼돈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겸손과 감사와 인내를 배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eaders, the Way Up is Down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실패
정신근육
린든존슨
영적인근육
성장
감사
겸손
인내
하나님은 아무나 설교자로 부르지 않으신다
by Matt Hodges
2018-11-21
콜로라도의 한 교회가 올린 구인광고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은 스티븐 퍼틱(Steven Furtick)과 같이 최고의 설교자가 작성해 준 설교 원고를 외워서 읽을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당신은 어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강력한 힘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왜 그 설교자를 모방하지 않죠?”라는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물론 그들이 갖는 의문이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즉, 교회가 목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설교를 통한 특별한 의사소통 기술이다. 특히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하는 개척 교회 목사들이 이 논리에 취약한 편이다.비교의 위험교회 개척자는 늘 불안감을 안고 산다. 자신을 비슷한 형편에 놓인 다른 목사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우리는 날마다 온라인(소셜미디어, 팟캐스트, 설교 클립 등)을 통해 훌륭한 설교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온라인에서 듣거나, 읽은 설교들과 나의 최근 설교를 비교하게 된다. 물론 항상 자신의 설교가 그들보다 더 탁월하길 원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만큼 큰 좌절과 빠른 포기를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우리는 앞서 말한 설교자 구인광고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고 싶다면, 내가 ‘그 설교자’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설교자의 타고난 기질, 카리스마,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전개 방식, 확신에 찬 말투 등이 나에게는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설교자처럼 재미있게 말할 수 있지?’, ‘나도 그 설교자처럼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말겠어’ 등의 생각들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물론 탁월한 설교자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회 개척자로서 최고의 설교를 위한 노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특히 설교에 대해 특별한 은사를 가진 설교자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운다는 것이 모방하는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한다.아무 생각 없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은 자신의 강단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를 약화시키는 행동이다. 다른 설교자를 무조건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길 때 기억하면 좋을 두 가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한다.1. 설교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선 행위이다당신은 커뮤니케이터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설교자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일반적인 연설가 혹은 커뮤니케이터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설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갈 때 …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바울은 설교자의 확신에 찬 어조와 설득력 있는 언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행 17장). 바울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설교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궤변가들과 수사학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설득을 위한 스킬’들이 자신의 설교에서는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설교는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능력이 있었다.우리는 종종 다른 설교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설교를 꾸미려는 욕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는 설교의 능력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다.2. 하나님은 양떼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셨다 나는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가 교회 개척자들을 방 한 가득 모아 놓고 팀 켈러(Tim Keller)를 따라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당신은 그리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팀 켈러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바라셨다면, 하나님은 그분을 당신 교회의 목사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은 주로 지역 교회를 통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실 때는 설교단도 함께 맡기신다는 의미이다.이 말을 믿기 어려운가? 당연하다. 그러나 당신이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수차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당신은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살고 있는 장소나 직장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당신을 세우신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에게 맡기신 설교단에 대해 의심하는 목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 당신을 통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계획하시고, 당신을 선택하셨다. 만약 다른 사람을 원하셨다면, 그 사람을 당신의 교회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모방이 아닌, 성숙설교자로서 배움과 성장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종종 배움과 모방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아마도 당신의 교회가 생각만큼 부흥하지 못하거나, 다른 교회들이 먼저 부흥,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설교에 필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지금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마음속의 거짓과 싸우고,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을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선택하셨다. 당신이 믿는 그분은 가장 선하신 분이며,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이 당신과 교회의 주권자이심을 알고 설교하라. 분명 성령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주셨음을 알고 설교하라. 당신의 가치는 설교에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이 가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설교하라. 당신은 매주, 매순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특권을 가진 설교자임을 잊지 말고 설교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Didn’t Call Someone Else to Preach to Your Church번역: 김형용
목회
설교와교육
비교의위험
설교의능력
성령의역사
모방이아닌성숙
특권을가진설교자
배움과성장
팀켈러
리더에게는 어떤 친구가 필요한가?
by Matthew J. Hall
2018-11-20
리더가 되는 일은 외로운 모험의 길을 걷는 것일까? 교계 안팎에서 리더십에 대한 권위 있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리더에게는 대체로 외로움이 따름을 알 수 있다.리더는 가끔 홀로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리더로 하여금 의사 결정과 중압감의 부담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CEO의 절반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교회 리더들도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교회 리더들에게는 짊어져야 할 고유한 부담들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우정은 필수요소이다. 나는 제한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부여 받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 축에 속한다. 나는 경험과 반성을 통해, 즐겁고 효과적인 리더십을 위해서는 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정은 운이 좋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 그 이상의 것이다. 우정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준다. 우정으로 인해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 감사하게도 교회 리더들도 그들을 위한 우정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역사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의 현명한 말을 들어보자. “위인들의 삶에서 우정의 질이나 결여는 그들에 대해 다른 특징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나는 종종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에서 살며, 우리가 오래된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라.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의 소명을 우정에 의존했다.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배워 나갈 세 가지 교훈이 있다.1. 참된 친구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 준다우리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닮았다. 그리고 그런 우정의 기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우정의 행위로써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진실을 말하기를 요청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서 경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가장 참되고 최상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우정은 이 진실을 반영한다.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 그리고 복음에 대해 진실을 말해 준다. 리더십은 판단을 내리고 현명한 조치를 내리는 일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리더가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나는 종종 나의 판단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했거나 불완전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때는 더 정확한 관점을 제공해 줄 참된 친구가 필요하다. 누군가 리더를 실망시킬 때, 그들을 해고하거나 관계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친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친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 대해 최선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필요한 경우, 친구는 공동체의 사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와 경고를 대신해 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친구가 필요하다. 오직 진정한 친구만이 리더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해 줄 수 있다.또한 친구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리더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취약하다. 죄와 교만은 자신의 약점들은 과소평가하고, 능력과 덕목들은 과장하는 일을 즐겨한다. 간혹 아부하기 위해서나 혹은 당신을 실망시킬까 두려워서 이런 사각 지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선지자적 용기를 가지고 리더의 책임을 지적한다. 당신은 친구를 교만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켜 주는 은혜의 선물로 보는가?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크리스천 친구는 우리에게 복음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우리 앞에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용어들로 복된 소식을 상기시켜 준다. 친구는 리더에게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매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은, 심지어는 리더로서의 역량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의 성공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임을 일깨워 준다. 진정한 친구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히 지속될 하늘의 것에 희망을 갖도록 우리를 도와준다.2. 참된 친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인다우정은 선호적인 사랑이다. 기독교적 우정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더 선호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참된 우정을 갖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은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문화를 요구하는 제도들과 조직들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복도에서, 회의에서, 사교석상에서 동료들을 만난다. 온정, 예의, 우호적인 선의의 문화는 분명 건강한 조직적 기풍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대화들과 순수한 거래 관계를 뛰어 넘는 참된 우정은 보기 드문 선물이다.그 이유는 만물의 태초에 기초하고 있는 오래된 진실이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창조되었다. 이 계획의 중심에는 사랑의 역동적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이기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거래의 기회로 삼게 한다. 그리고 안정, 동의, 확인, 쾌락을 위한 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화하게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 관계 속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은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우정의 상업화는 우리로 하여금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한다. 심지어 사람들을 일종의 서비스로 바라보게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있는 기쁨의 교제를 본받는 대신 우정은 훨씬 더 가치가 떨어지는 목적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우정에 있어 왜곡되고 편향되어 있다. 교회 리더들은 이기심이 교묘하게 우정으로 가장하는 구체적인 방식들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정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치명적인 모조품이다.3. 참된 친구는 당신의 리더십이 실패했을 때도 곁에 남는다일정한 시점이 되면 당신의 리더십은 약화될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패는 이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친구들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공의 시절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회사가 망하고 조직이 파산하거나 또는 당신이 더 이상 역량과 기술로 명성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성경에는 우정을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인생을 살다가 위기의 순간을 만나면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과 함께한다. 형제자매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정에는 우정을 훨씬 달콤하게 만드는 자발적인 성질이 있다. 친구는 우리를 거부하고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적인 역학은 우정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을 위한 잠재력이 드러나기도 한다.당신이 만일 리더이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다고 자만한다면, 너무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한편, 직업적 관계의 피상성과 기회주의적 성격을 너무 의식하여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훨씬 더 성경적이고 현명한 전략은 현실주의적으로 관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당신의 외로움을 악화시키고, 타인을 불신하게 만들며, 우정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현실주의는 당신에게 참된 우정의 가치를 밝은 눈으로 보게 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로 인해 실망감을 느낄 때, 환멸로부터 당신을 지켜 줄 것이다.참된 친구는 모든 이들이 떠났을 때에도 계속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충성과 신실함은 우리에게 더 큰 실재를 보여 준다. 즉 우정을 완전하게 지니고 계신 분, 바로 하나님이라는 실재를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한 찬송가의 가사가 이를 확실히 보여 준다. “죄인들의 친구 예수여! 내 영혼의 사랑 예수여! 친구들은 날 버리고 대적들은 날 해하나 구주는 날 온전케 하시네.”면식 관계와 친구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친구의 수는 적을 것이다. 사회관계망(SNS)과 유사 우정의 시대 속에서, 우리를 쉽게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유해한 모조품들이 존재한다. 당신에게는 아마도 수백 명의 ‘지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서넛 정도 밖에 없을 확률이 높다. 이 말이 실망스럽게 들리는가? 당신은 아마도 우정의 본질을 오해했거나, 잘못된 기대들로 인해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많은 이들이 C. S. 루이스가 우정과 교제를 구별한 설명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동료들에 의해 발생한다. 곧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고유한 보물(또는 부담)이라고 믿었던 어떤 통찰이나 관심, 혹은 선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순수한 교제로부터 출발한다.”다시 말해, 우정은 “뭐라고요? 당신도요? 나는 내가 유일한 줄 알고 있었는데”라는 말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Kind of Friend Every Leader Needs번역: 주영식
목회
리더십
하나님과교제
외로움
하나님의섭리
순수한교제
참된친구
CS루이스
우정
면식관계
처음
이전
열린
21
페이지
22
페이지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