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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기독교는 싸움이다
by Scott Hubbard
2022-10-2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라일(J. C. Ryle)은 고전 ‘거룩’(Holiness)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이라면 그 두 가지를 뭐라고 썼겠는가? 믿음과 회개? 사랑과 소망? 찬양과 감사? 겸손과 기쁨? 라일의 책을 읽기 전이었다면, 나도 내가 무엇을 꼽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내가 결코 라일이 꼽은 두 가지를 생각하지는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두 가지 큰 특징이 있다. … 그 사람에게 있는 내면의 평화로 그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의 싸움으로도 그를 알 수 있다. (72)전쟁과 평화. 전투와 휴식. 군대 간 충돌과 조약이 가져다주는 평온.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두 가지보다 훨씬 더 많은 특징을 가지면 가졌지 결코 더 적지는 않다. 그리스도인은 아버지의 집에서 행복을 누리는 어린아이인 동시에 구주의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다. 라일의 이 문장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하는 데에 적지 않은 역할을 할 것이다. 전쟁터 한가운데 떨어지다나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내가 전쟁터에 들어서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처음엔 낙하산을 타고 구원의 영광 위로 살포시 내리는 것처럼 황홀함을 느꼈다. 마침내 깨어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죄로부터 안전해졌으며, 무엇보다 나는 천국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착륙한 곳은 내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치열한 싸움터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갈등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 느낀 내적 분열은 차원이 달랐다. 몇 달 동안 평화의 땅처럼 느껴졌던 내 영혼이 전쟁터가 되었다. 참호를 팠고 전선이 그어졌다. 나는 과거에 한 번도 직면한 적이 없는 의심에 시달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알지? 게다가 죄를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죄가 내 속에서 고개를 쳐들었다. 이리저리 마구 얽힌 육체의 숲 사이를 기어 다니는 교묘하고 위장된 죄, 자기 아첨이라는 환상, 다른 사람을 향한 반사적인 정죄와 판단, 제멋대로이고 때로는 사악하기까지 한 생각,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변덕스러운 감정. 예수님 안에서 어느 정도의 평화를 누린 건 사실이지만, 그런 평화조차 마치 적에게 포위당한 것처럼 느껴졌다.뭔가 단단히 잘못된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식의 흑암과 깊은 분열에 직면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국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나처럼 영적 곤경에 처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분께 속했을 리 없다는 생각에, 한동안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기독교 싸움바로 그때에 라일을 만났다. 간단하지만 적절하기 이를 데 없는 “싸움”(The Fight)이라는 제목의 장에서 그는 나를 압도하는 강렬한 논증을 바탕으로 “진정한 기독교는 싸움이다”(66)라고, 그리고 모든 성자는 하나같이 군인이었다고 말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싸움이 있다”라고 그는 참으로 남자다운 단호함으로 썼다. “싸움이 없이는 거룩함도 없다. 구원받은 영혼은 항상 자신이 싸움터 한 가운데에 있다는 것을 알기 마련이다”(70).일련의 성경 본문이 뒤따랐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야 다 아는 구절이었지만, 또 다른 수준에서는 전혀 모르던 말씀이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 6:12).“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참고 골 3:5).“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1).“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깨어 기도하라”(마 26:41).“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선한 싸움을 싸우며”(딤전 1:18).하나님과 화평하게 하는 복음이 가져다주는 것은 죄와 벌이는 치열한 싸움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다”라는 말은 “죄는 나의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고, 따라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마귀에 향한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위로로 우리를 감싸시는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히신다. 라일의 글은 나를 묘한 위로로 채웠다. 몇 달 동안 나는 마치 전투에 뛰어든 민간인처럼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제대로 전선에 배치된 군인처럼 느낀다. 내 전쟁은 당연한 것이었고, 진짜 중요한 것은 이게 꼭 싸워야 하는 좋은 전쟁이라는 사실이다. 전쟁은 정상이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라는 말씀이 사실이라면, 그리스도인에게 내면이 분열되어 갈라지고 또 찢어지는 듯 느끼는 것보다 더 정상적인 것은 없다. 라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안에 두 가지 원칙이 있으며 각각이 나를 지배하기 위해서 지금도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72). 우리가 영과 육을 모두 가지고 있는 한, 전쟁은 정상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 순간에조차 모락모락 피어나는 유혹, 기도하고 싶지 않다는 끔찍할 정도로 강한 충동을 만날 때 놀라지 말아야 한다. 거부해야 함을 알고 있는 음식, 수면, 음료, 섹스, 그리고 오락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고통스러운 욕망이 솟아날 때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가족에게 복음을 나누라는 성령님의 강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든지 영적 나태함에 빠질 수 있다. 아침에 충만하던 영적 충만함이 오후가 되면 어느새 사라져버리는 변덕스러운 영적 건망증도 만난다. 그리고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보다 나 자신의 이해에 더 의존하려는 충동적인 강박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적의 포격에 놀라는 군인이 없듯이 우리는 이런 때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용기를 내야 한다. 라일은 말한다. “우리는 결코 사탄의 친구가 아니다. 이 세상의 왕들처럼, 사탄도 자신을 추종하는 자들과는 결코 전투를 벌이지 않는다”(72). 내적 분열과 반발심은 결코 우리가 사탄과의 전투에서 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선한 싸움그리스도인의 싸움은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알려진 전쟁이다. 라일은 이렇게 썼다. “기독교의 싸움은 선한 싸움, 정말로 선한 싸움, 뭐라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싸움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자”(80). 그렇다. 치열한 전쟁이다. 우리는 전투에서 부상당하고 피를 흘리기도 한다. 바닥에 떨어졌을 때는 절망의 유혹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싸움이 얼마나 선한 것인가? 정말 좋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밟을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미 7:19). 정말로 좋다. 가장 힘든 전투를 만날 때면 하나님이 우리를 더 강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사 41:10). 진짜로 좋다. 넘어지는 사람조차 예외 없이 다 용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요일 1:9). 좋은 전쟁이다 우리가 죽이는 건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죄와 마귀이다(롬 8:13). 너무나도 좋다. 이 전쟁으로 인해 우리의 인간성은 파괴되는 게 아니라 회복되기 때문이다(골 3:5, 9-10).무엇보다도 특히 좋은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아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해 싸우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결코 우리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한 위대한 대장이자 전우이시다(마 28:20). 라일은 이렇게 묻는다. “믿음의 군인으로 살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 있는 한 하루도 빠지지 말고 그리스도를 굳게 붙들어야 한다”(76).그렇기에 우리는 오늘도 “그리스도가 더 낫다”는 깃발을 높이 들고 행진한다. 어떤 일을 만나도 놀라지 않고 낙담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닮지 않은 모든 사악한 것을 향해 우리는 칼을 휘두른다. 그리스도인의 “두 가지 큰 특징”이 하나가 되고, 마침내 전쟁이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평화에 의해 사라지는 날을 바라보며 우리는 오늘도 전진한다. 원제: True Christianity Is a Figh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싸움
거룩
라일
그리스도인의특징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③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16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하는 한 가지 방법은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사건이자 과정으로 설명하는 것이다.[15]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음의 시작과 믿음의 진보를 구분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사건 언어와 과정 언어를 모두 쓰고 있음을 본다.[16]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그런 구분을 한다.[17] 예를 들어, 시편 67편을 설명하면서 그는 “행위보다 믿음이 우선”임을 상기시킨다. “공로가 없어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바울 사도가 말했듯이,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이 말씀은 후에 믿음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역사하기 시작함을 의미한다.”[18] 아우구스티누스는 의롭게 되는 근거로서의 행위를 의롭다 함을 받는 행위와 분명하게 구분한다. 이것은 단순하게 지나가는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전체 단락을 정의한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의 여정은 다름 아니라 믿음에서 시작한다”[19]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랑을 통해 역사하는 믿음의 여정으로 묘사한다.두 번째 예는 로마서 8:30-31에 대한 설교에 등장한다. 여기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받은 의로움(justice)은 더 커질 수 있다.”[20] 의롭게 되었다는 바울의 말이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이미 칭의의 상태에 도달했다”를 의미한다고 이해했다. 그러한 상태는 “중생의 씻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날로 진보함으로”(딛 3:5 참조) 발생한다. 칭의는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날로 발전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해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우리는 의로움을 가질 수도 있고 동시에 의로움 속에서 자랄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라는 용어를 선언적 사건으로 제한하지 않았다. 칭의는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여정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하나님을 대면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결코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완전한 의를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여정은 죄 사함을 받고 계속해서 죄와 싸우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인간의 의지를 치유하시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초기의 신앙과 과정의 신앙 사이에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가 존재한다. 물론 둘 다 같은 믿음이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라고(갈 5:6) 말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가 의미하는 바는 죄 사함을 받고 성령님을 의지하는 믿음과 더불어 날로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이 커가는 믿음 사이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 것, 즉 성령이라는 인격체를 통해서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그 순간부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15. 나는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사건이자 과정으로 설명하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하지만(Alister McGrath, David Wright, Robert Dodaro, Peter Dubbelman),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를 사건으로만 본다고 주장하는 두 사람(Gerald Hiestand and Dongsun Cho)의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도다로(Dodaro)는 Augustine Through the Ages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이렇게 정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칭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다고 보시는, 즉 하나님께 순종하는 합당한 관계로 회복시키는 능동적인 과정이다.” 그는 계속해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의 구속에 대한 적극적인 믿음이 인간의 영혼을 훈련시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합당한 사랑으로 이끌리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그 결과 “개개인의 영혼은 거룩함에 있어 점진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482). 16. 데이비드 라이트(David Wright)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에 대해 완료 시제와 종종 수동태로 말하는” 몇 가지 예를 지적한다(66). 다음을 보라. “Justification in Augustine,” in Justification in Perspective: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Challenges, ed. Bruce McCormack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6), 55-72.17. 또 다른 명쾌한 예로는 다음을 보라. The Spirit & the Letter 29.50 (WSA 1.23:175?76). 18. Augustine, Expositions of the Psalms 67.41 (WSA 3.17:360). 19. Augustine, Expositions of the Psalms 67.41 (WSA 3.17:360). 20. Sermon 158.5 (WSA 3.5:117).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칭의론
사랑으로역사하는믿음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②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09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하나님의 해결책이 인간 본성의 변화에 있다고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구원에 대한 그의 모든 표현은 궁극적으로 그 해결책을 변화(transformative)에 두고 있다. 왜냐하면 성경이 우리가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고후 3:18)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현대 개신교인이 특히 놀라는 사실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러한 변화를 구원이라는 단어가 아닌 칭의라는 용어와 더 자연스럽게 연결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데에는 특정한 언어적이고 주석적인 이유가 있다. 그는 성경에서 칭의와 관련해서 사용되는 라틴어 용어를 “의롭다고 선언된”(declared righteous)이 아니라 “의롭게 된”(made righteous)으로 이해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대 라틴어 성경은 그리스어 ‘디카이오오’dikaioō를 정당화하다iustifico로 번역했으며, 그는 이 용어를 문자 그대로 사용했다.[11] 한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 “라틴어 번역에 철저하게 의존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이 불의한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made)라고 말한 것으로 잘못 이해했다.”[12]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과 편지’(Spirit & Letter)에서 칭의iustificatio와 관련해 로마서 4:5을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의롭게 되었다’가 아니라면 ‘의롭게 되다’에서 무슨 의미가 가능한가? ‘그가 의롭게 하셨다’는 말은 결국 의롭지 않은 자를 ‘의롭게 만드셨다’는 의미가 아닌가?”[13]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용어인 디카이오오를 오해했고, 그 결과 칭의를 선언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자를 면해 주신다)보다는 주로 변형적 의미(하나님이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심)로만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영혼과 편지’의 같은 부분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에 대한 다른 의미, 즉 “의롭게 여김을 받음‘(counted righteous)을 인정한다.[14] 그는 칭의에 대한 대안적 해석을 이렇게 제시한다. “그들이 의롭게 여겨질 것이라는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의롭다고 간주될 것이고 따라서 그들이 의롭게 될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의롭다 하려는 것(눅 10:29)은 결국 의롭다고 여겨지고 또 그렇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자들이 죄를 씻어내다(sanctify)라는 단어를 “거룩하게 만들다”(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와 “거룩하다고 선언하다”(마 6:9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말씀)를 모두 의미하는 것으로, 그 용어에 대한 이해 방법을 비교한다. 그의 요점은 sanctify라는 단어가 ‘만들다’와 ‘선언하다’를 모두 함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굳이 이런 구분을 왜 해야 하는지에 관해서도 또한 그 의미를 발전시키거나 성경의 다른 구절과 연결한 추가적인 설명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아우구스티누스가 칭의 속에 선언적 의미까지 들어있다는 점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가진 칭의에 대한 일차적 이해는 하나님이 인간의 본성을 치유하심으로써 경건하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만드신다는 데에 있다고 결론 내리는 것이 적절하다. 따라서 다음 질문이 따라온다. 만일 칭의에 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가 “의롭게 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생하는 내적 변화를 요구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형상 안에서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의롭게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11.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를 “의롭게 된”이라는 변형적인 의미로 해석한 이유에 대한 추가적인 언어학적 이유를 지적한다. 여기에는 이 용어가 오로지 라틴 서부의 기독교 저자들이 사용하는 “탈고전적”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가 iustificare의 의미를 명확히 하기 위해 고전 작가들을 참고할 수 없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다. Iustitia Dei: A History of the Christian Doctrine of Justification, 4판 참조.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20), 46-47. 12. Robert Dodaro, “Justice,” in Augustine Through the Ages: An Encyclopedia, ed. Allan D. Fitzgerald (Grand Rapids: Eerdmans, 1999), 481?83.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5장에서 “의롭게 하고 정당화하는”이라는 문구를 설명하면서 iustificare라는 용어를 문자 그대로 읽는다: Sicut vivificans vivum faciens, sicut salvificans salvum faciens, sic et iustificans iustum faciens. 여기서 라틴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독서가 지닌 문자주의를 보여주지만 영어로 번역하기가 어렵다. 한 번역가는 그것을 이렇게 번역한다. “생명을 살리는 자가 살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또한 구원자가 되는 것이 안전하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의인이 된다는 것은 칭의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See sermon 130A.3 (WSA 3.11:120n10). 13. The Spirit & the Letter 26.45 (WSA 1.23:172). Quid est enim aliud, iustificati, quam iusti facti, ad illo scilicet qui iustificat impium, ut ex impio fiat iustus? 14. 이 구절에서 “간주된” 또는 “전가된” 의인에 대한 설명 외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 15:2을 암시하거나 인용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에게는 의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 The Punishment and Forgiveness of Sins and the Baptism of Little Ones 1.18; The Deeds of the Pelagians 14.34; Expositions of the Psalms 70(71).2.4.등을 참조하라. 그러나 그는 어디에서도 법적 의미에서 전가의 개념을 설명하지 않으며, 창세기 15:12 또는 로마서 4:5와 같은 텍스트를 설명하면서조차 그 의미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
주님의 사역은 주님의 방법으로
by Ray Ortlund
2022-10-07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나는 도무지 피할 수 없는 문장들을 만났고, 또 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문장들은 깊고도 또 지속적인 방법으로 나를 도왔다. 주님께 감사한다. 예를 들어, ‘복음주의란 무엇인가’(What Is an Evangelical?)에서 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제도(institution)는 그 반대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4). 수십 년이 지났지만, 이 문장은 여전히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제도란 무엇인가? 제도는 바람직한 경험이 쉽게 반복하도록 돕는 사회적 메커니즘이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는 하나의 제도이고 또한 좋은 일이다. 주일마다 사역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면 어떨까? 그러나 동시에 생명을 주는 제도도 얼마든지 생명을 고갈시키는 것으로 표류할 수 있다.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제도가 그 자체로 목표가 되고 목적이 될 때 심지어 우상이 되는 경우이다. 그 결과 바람직하지 않은 경험이 절대화되고 영속화된다. 그런 끔찍한 배신은 결코 먼 가상에서나 존재하는 가능성이 아니다. 모든 제도는 그 반대를 만들어내는 경향이 있다. 우리 모두 교회에서 이런 경향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을 보지 않는가? 교회의 맥박을 부여잡고 개혁과 부흥으로 교회를 재정비하자. 동역자들이여, 주님이 이미 죽었거나 아니면 나날이 죽어가는 종교 제도나 관리하라고 우리를 부르셨는가? 진정한 기독교는 부흥 운동이다. 우리가 최종 권위라고 부르는 성경 속에 사도행전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권위에 의지해서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갱신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다. 주의 방식으로 하시는 주님의 사역내 마음에서 결코 떠나지 않은 또 다른 문장은 프랜시스 쉐퍼가 쓴 ‘작지 않은 사람’(No Little People)에 있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주님의 방법으로 해야만 한다.”(74)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세대뿐 아니라 모든 세대가 당면한 결정적인 문제라고 믿는다. 나의 강점과 냉철함, 심지어 포스트모던이 가져다준 아이러니한 자기 조롱으로 주님을 섬긴다면, 그건 결코 주님을 섬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주님을 섬긴다는 자만에 빠져 사실상 주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방법으로, 오로지 주님의 방법만을 의지해서 주님의 일을 한다면, 그분께서는 친히 영광스러운 능력으로 우리 사역에 임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축복하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사역을 친히 당신의 손으로 감당하신다면, 그것은 훨씬 더 놀라울 것이다. 이 둘의 차이는 겉으로도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세상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처음에는 격변, 그리고 영광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문장은 지금 소개한 두 문장이 이미 설정한 궤적을 따른다. 청교도 운동에 관한 책, ‘거룩의 추구’(A Quest for Godliness)에서 제임스 패커는 이렇게 썼다. 청교도의 관점에서 모든 교회가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39).사역의 우선순위와 목회적 용기에 관해 강력한 비전을 선포하는 패커의 대담한 문장은 이사야서 40:3-5을 생각나게 한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이사야 예언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먼저 어떤 것은 예비하고, 어떤 것은 재배치하며 또 어떤 것은 격변을 일으키고, 그 후에야 주의 영광이 나타나리라.” 이 세상은 주님의 영광을 맞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너무 많은 교회가 주의 영광을 위해 준비되지 않았다.역사 속에 드러나는 주님의 영광을 가로막는 장벽은 세상의 유행하는 혼란과 우리 교회의 형식에 찌른 예배 속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완전히 준비된 유일한 분은 오로지 그리스도 자신뿐이다. 패커는 그 점을 이해했다. 교회가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와 권능으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미신 및 영을 그릇 인도하고 소멸시키는 모든 것의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는 것을 그는 바로 이해했다.동역자여, 당신은 패커가 외치는 예언자적 소명을 받아들이겠는가? 우리는 더 적은 것을 갈망할 것인가?그렇다. 이 신성한 목적을 교회 안에서 추구하는 어리석고도 무모한 방법이 있다.생명을 고갈시키는 제도화의 모든 산을 낮아져야 하고, 상한 마음과 절망이 빠지는 깊은 계곡은 얕아져야 한다. 주님의 사역은 언제나 겸손하고 끊임없는 기도, 죄와 궁핍에 대한 정직한 고백, 그리고 위로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살아있는 권능으로 이뤄져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식이다. 그러면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걸쳐서 주님의 영광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날 것이다. 얻는 것이 더 적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확신을 마음에 새기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바꾸겠다는 목회자라면 내 아버지의 지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는 목회 리더십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교인보다 한 걸음 앞서가면 리더가 될 것이다. 두 걸음 앞서면 선구자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세 걸음 앞서간다면, 너는 순교자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지혜의 길은 의도적으로 한 발, 또는 두 발만 앞서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당신도 참을 수 있다. 은혜에 의지해서 그냥 앞으로 뚜벅뚜벅 나아가라. 소명은 분명하다성경이 주는 지혜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인도하라. 교회를 이 높고 거룩하고 즐거운 방향으로 계속 인도해 나아가라. 죄인이 구원받는 것도 오로지 이 영광을 위해서였으며, 또한 영적으로 활기가 넘쳐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들을 세워가는 이유도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기도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 사역은 마라톤이다. 이렇게 사역하는 것이 매달 월급만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버티는 사역, 편안할지는 몰라도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는 사역으로 교회에 기생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지 않겠는가? 동역자여, 장애물은 현실이다. 나도 안다. 그러나 당신의 소명이 분명하다는 것도 나는 안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책임지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여러분도 책임질 것을 나는 안다. 우리의 친구 패커의 문장을 다시 보자. 패커는 당신에게 새로운 마음을 넣었다! 주님께서 친히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 원제: The Lord’s Work in the Lord’s Wa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복음주의
소명
모험
하나님의영광
건강한교회
목회
제도화
공룡에 관한 작은 신학
by Scott Hubbard
2022-10-04
나는 요즘 티라노사우르스 렉스, 스테고사우르스, 트리케라톱스, 그리고 벨로시랩터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더불어 목이 길고 작은 뇌를 가진 디플로도쿠스와 머리 볏이 있는 파라사우롤로푸스처럼, 사람들에게 비교적 덜 알려진 공룡도 알게 되었다. (당신도 조금만 익숙해지면 어려운 공룡 이름을 술술 발음할 수 있게 될 것이다.)나는 고생물학자도, 그렇다고 박물관 큐레이터도 아니다. 쥬라기 이야기의 가장 최근 영화는 아직 보지도 못했다. 나는 그냥 두 살 사내아이의 아빠일 뿐이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처럼, 내 아들도 공룡에 관해서 읽고, 공룡과 놀고, 또 공룡 소리를 낸다. 지난 몇 달 동안 아들의 공룡 셔츠와 책(그리고 피규어와 스티커)은 나의 오래된 매혹을 다시금 기억나게 했다. 대부분은 어린 시절 보던 만화 ‘공룡시대’(Land Before Time)와 엄지손가락으로 넘겨 가며 읽던 브론토사우루스 책 이후로 묻혀있던 것이었다. 아들 덕분에 추억뿐 아니라 몇 가지 새로운 질문도 생겼는데, 그건 내가 아들이 공룡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창조 설계를 이해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기이한 창조물이 그분을 찬양한다면(시 104:24), 오래전에 멸종한 놀랍고도 거대한 이 파충류도 그분에 대해 뭔가 장엄한 것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뭘까? 오래된 뻔한 소리?공룡과 관련해서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할지는 공룡이 수백만 년 전에 지구를 배회했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상대적으로 최근에 살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두 관점 모두 다 성경적 가치가 있다. 그리고 둘 다 어렵다.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나도 이 질문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갖고 있지만, 이 글의 목적을 위해 그 부분은 아예 배제하겠다. 내 아들이 커서 젊은 지구론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늙은 지구론을 받아들일지, 나는 별로 개의치 않는다. 내 관심은 오로지 그가 공룡을 (그리고 온 땅을)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바라볼지 아닐지의 여부이다. 그리고 공룡이 가르치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사실상 공룡 뼈의 나이와는 거의 관련이 없는 것 같다. 공룡이 중생대에 살았든 노아 시대에 살았든 달라질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공룡이 사나웠고, 또 많은 공룡이 환상적이었다. 또한 많은 공룡이 절대적으로 거대했다.그럼 공룡처럼 놀라운 생물에게서 배울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많은 교훈 중에서도 다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지혜의 하나님을 의지하라스티브 브루사테(Steve Brusatte)의 인기 있는 2018년 책, 완전히 새로운 공룡의 역사(The Rise and Fall of the Dinosaurs)는 공룡의 지배에 대한 흥미진진한 역사를 알려준다. 불행히도, 그 책은 또한 공룡이 하나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대중적 견해를 드러내고 또 강화한다. 그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역할을 맡은 것은 자연주의 진화(Naturalistic evolution)이다. 맹목적이고 두뇌가 없는 힘이 어떻게 된 셈인지 엄청난 선견지명을 부여받았다. 거대한 용각류와 같은 “진화 창조된” 짐승들(108), 그리고 “진화는 모든 조각 하나하나를 올바른 순서로 모았다”(117). T. 렉스와 비슷한 부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진화의 위업”이었다(225).자연주의 세계관은 그 자체로 비교적 새로울 수 있다. 그러나 표면 아래 숨은 근본적인 동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대중이 열광하는 신화에 맞서 하나님의 창조 역사를 고백해야 했다. 고대 세계에서 이스라엘의 이웃 가나안 사람들은 탄니님(tanninim, 두려운 바다 생물, 때때로 “뱀” “용” 또는 “괴물”로 번역됨)이 “태초에 바알이 직면한 혼돈의 힘”(Derek Kidner, Genesis, 54)을 대표한다고 생각했다. 그에 반해서, 모세는 창세기 1:21에서 “하나님이 큰 바다 생물을 창조하셨다”고 기록했다. 가나안 사람들은 단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말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놀라운 괴물조차도 하나님이 창조한 걸작임을 안다. 비슷한 방식으로 욥기에서 하나님은 거대한 육지 동물인 베헤못과 사나운 물의 짐승 리워야단(가나안 신화의 또 다른 괴물)을 언급하며, 그들을 하나님의 피조물로 묘사한다. “베헤못을 볼지어다 내가 너를 지은 것 같이 그것도 지었느니라”(욥 40:15).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욥 41:11). 따라서 하나님이 공룡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하실 건지, 더 이상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많은 학자가 베헤못과 리바이어던을 하마와 악어와 동일시하지만, 시적 묘사가 그려내는 크기로 볼 때 단지 하마와 악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베헤못과 리바이어던은 용각류나 티라노사우루스류로 쉽게 오인될 수 있을 정도이다.자연주의 시대에 자라는 어린이는 시편 시인의 창조 신조를 자주 그리고 즐겁게 들을 필요가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들을 다 지으셨으니 주께서 지으신 것들이 땅에 가득하니이다”(시 104:24).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피조물을 뼈까지 아름답게 장식한다. 가장 먼저 기억할 점은 공룡이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창조주라는 이름이 붙은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초대한다는 것이다. 능력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몸통에서 꼬리까지 7톤의 살과 뼈가 온몸에 퍼져 있는 가장 큰 코끼리를 상상해 보라. 이제 가능하다면 이 코끼리 몸무게의 7배, 길이의 서너 배에 달하는 생물이 우뚝 솟은 목, 통배, 그리고 나무줄기 꼬리를 가지고 땅을 가로질러 뒹굴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이제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큰 육상 동물인 아르젠티노사우루스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뭔가를 느꼈을 것이다. 이제 아르젠티노사우루스보다 훨씬 작지만 비교도 안 되게 더 사나운 다른 생물을 생각해보자. 코끼리와 같은 톤수(그런데도 10피트는 더 길다)를 가진 그놈은 근육으로 두꺼워진 허벅지로 마구 뛰어다니고, 거대한 머리는 6톤의 압력으로 무엇이든 내리누를 수 있는 엄청난 턱을 갖고 있다. 말 그대로 차를 부수는 힘이다. 이제 당신은 아마도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사나운 육상 동물인 T. 렉스에 대해 어렴풋이 생각할 수 있다. 이제 그 짐승들 앞에 서 있는 당신을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서 리바이어던에 대해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 중에 감히 “그런 동물을 격동시킬 만큼 사나운 사람은 없다”라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따라서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 “누가 내게 감히 대항할 수 있겠느냐?”(욥 41:10)공룡은 우리를 떨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진짜 떨리는 건 공룡 앞에서가 아니다. 허리케인처럼 그들도 단지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살고 움직이고 또 존재하도록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는 그 하나님 앞에서 서게 될 것이다. 매튜 헨리(Matthew Henry)가 베헤못에 대해 말했듯, 우리는 모든 공룡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그런 거대한 짐승을 만들고 그가 가진 능력을 그런 짐승에게 주신 분과 과연 싸울 수 있는지, 아니면 그에게 복종하고 그와 화해하는 것이 지혜롭지 않을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An Exposition of the Old and New Testament, 223)하나님은 T. 렉스의 입에 있는 모든 이빨을 만드셨다. 그는 아르젠티노사우루스의 몸통에 모든 무게를 추가했다. 비록 죽었지만 그들의 뼈는 여전히 하나님의 능력을 증거하고 있다. 우리에게 그것들은 창조주의 지혜를 신뢰하고 그의 능력을 두려워하라고 외치고 있다. 놀라운 하나님을 찬양하라가장 무서운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찬양의 이유가 된다. 믿음은 두려운 대상을 경외의 대상으로 바꾸어 놓았다. 우렛소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고(시 29:3), 광대한 우주는 그분의 손가락의 작품이 되고(시 8:3), 또 거친 바다는 우리 주님을 위한 포장도로가 된다(마 14:25). 가장 사나운 짐승조차 그의 영광의 빛을 발한다.하나님의 자녀는 리바이어던을 (더 나아가 공룡까지) 볼 줄 알고, 짐승 같은 모습뿐 아니라 그의 “늠름한 체구”(욥 41:12)까지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짐승의 발자국 안에 앉아서 놀라운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다(시 104:31-32). 그들은 짐승의 비늘을 추적할 수 있고, 이제 번개 아래에서 외쳤던 다윗 왕처럼 우리도 “영광!”이라고 소리칠 수 있다(시 29:9).시편 104편은 공룡에서 영감을 받은 찬양이 어떤 것인지 잘 알려준다. 여기에서 시편 기자는 흐르는 시내와 노래하는 새와 같은, 피조물의 부드러운 아름다움만을 찬양할 뿐 아니라 피조 세계의 좀 더 잔인한 측면, 먹이를 노리는 어린 사자와 놀랍게도 바다에서 노는 리워야단을 보면서까지 하나님을 찬양한다(시 104:21, 26). 어떤 사람은 오래전에 멸종한 종(species)의 뼛속에서 단지 “무의미한 생명의 덩어리”만을 볼 뿐이라고, 데렉 키드너(Derek Kidner)는 썼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창조주의 부요하심과 그의 생각의 범위와 정확성이 얼마나 세밀한지를 암시하는”(시 73-150, 405) 바를 보도록 가르친다.고생물학을 통해 우리는 시편 시인이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등장인물과 함께 시편 104편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 생물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우리가 발견해주길 오랫동안 기다려왔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이런 고대 짐승의 화석은 하나님을 찬양할 때 꼭 필요한 악기가 된다. 복음주의 조각칼최초의 공룡이 발견되기 1세기 전(1820년경), 목사이자 자연 애호가인 제임스 하비(James Hervey, 1714-1758)는 당시에 새로운 뉴턴식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항상 복음주의 망원경으로 가시계를 보아야 한다. … 그리고 또한 복음주의 현미경으로 바라보아야 한다”(The Spirit of Early Evangelicalism, 150). 별을 연구하라. 그들의 거리를 측정하라. 세포를 연구하고, 그 특징을 표시하라. 또 세포의 기능을 설명하라. 그러나 별과 세포, 그 모두를 다 하나님의 작품으로 연구해야 한다. 공룡을 발견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비가 말한 복음주의 망원경과 현미경에 복음주의 조각칼을 추가할 수 있다. 공룡을 연구하라. 공룡의 이름을 알아내고, 나이를 고려하라. 공룡에 관한 수십 권의 어린이 책을 읽으라. 그러나 공룡이 가르치는 더 큰 교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공룡에 대한 내 아들의 열정은 사라질지 모른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안킬로사우루스 피규어에서는 하나님의 지혜를, T. 렉스 티셔츠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그리고 두 살짜리가 내뱉는 공룡 포효에서는 하나님의 찬양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원제: A Little Theology of Dinosau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공룡
진화론
리워야단
창조
영성이란 무엇인가?
by 최창국
2022-10-03
한국 교회 안에서 영성에 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영성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수많은 논의와 다양한 이해 속에서 혼돈과 유행의 언어로 흐르는 아쉬움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영성이란 용어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 막연하게 기독교적 언어라는 전제 아래 사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나아가 영성에 대한 잘못된 주장과 오해들도 있다. 개신교 학자 중에는 성경에 영성이란 용어가 없기 때문에 영성은 성경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 이는 대단히 단순한(naive) 관점이다. 예를 들어 보자. 성경에 이성과 감성이란 용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성과 감성이란 용어를 일반적으로 쓰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 의미와 가치를 논할 때 중요하게 사용한다. 이성을 비성경적인 용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단지 이성이 때로 비성경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을 뿐이다. 또한 신학이란 용어도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신학이란 용어는 빼놓을 수 없는 기독교적 언어요 기독교 정체성을 설명해 주는 개념이다. 게다가 윤리란 용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지만, 기독교 윤리란 말은 이미 일반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용어로 자리 잡았다. 영성이란 용어가 성경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성경적 개념이 될 수 없다는 견해는 바른 견해가 아니다. 게다가 성경에는 영성이란 용어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영성이란 개념을 근본적으로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개념이 등장한다. 바로 ‘영적’(spiritual)이란 용어이다. 바울은 ‘영적’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고전 2:14-15). 이성이 있어야 이성적 삶이 가능하고 감성이 있을 때 감성적 삶이 가능하듯이, 영성이 있어야 영적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은 보편적인 논리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성이란 용어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하여 영성을 성경적 용어로 볼 수 없다고 말하기보다는 성경에는 영성이란 용어가 직접적으로는 등장하지 않지만 간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다고 보아야 더 타당하다. 개신교 학자 중에는 영성이란 용어보다 경건을 사용해야 한다는 견해들도 있다. 이들은 영성은 종교개혁 전통의 언어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이는 바른 이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증거로 칼뱅의 멘토였던 마르틴 부쳐(Martin Buchers)가 ‘참 신앙을 위한 투쟁 가운데 있는 슈트라스부르그와 뮌스터 1532-1534’에서 경건과 영성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1533년에 베른하르트 바커(Bernhard Waker)의 말씀의 종의 능력에 관해서 기술하면서 말씀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가질 때만이 경건도 영성도 의미가 있다고 하였다(Martin Buchers, Strasburg und Munster im Kampf um den Rechter Glauben 1532-1534, 426). 부쳐는 영성을 내적인 차원 또는 세계로 경건은 외적인 차원 또는 세계로 구분하였다. 이러한 그의 구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영성과 경건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에게 많은 의미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경건과 영성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성경은 경건을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적 또는 실천적 삶으로 설명한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약 1:26-27). 하지만 영성은 경건한 삶을 위한 영적 능력(capacity)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 교회 안에서 영성이란 의미는 내적 열정, 성령 체험, 영적 경험, 기도, 하나님 사랑, 경건, 신앙, 신명에 이르기까지 그 의미는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더욱이 문제는 그 용어를 쓰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그 용어의 의미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사용하기도 하고, 한 저자의 글이나 책에서도 다양한 의미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단지 좋은 용어이고 현재 유행 언어이기에 그냥 쓰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교회 안에서 영성을 말할 때 ‘영성’이란 용어 대신에 ‘신앙’이란 말을 넣어도 거의 다 말이 된다. 국내에서 쓰인 영성에 관한 논문들과 책들 가운데 영성이란 말 대신에 신앙이란 말로 대체해도 글의 흐름이나 내용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한국 교회 안에 ‘영성’이란 단어가 혼란스러운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용어 사용에서 구분의 미비에서 기인하는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정신’이란 용어가 인간과 관련하여 단독으로 사용될 때는 일반적으로 ‘인간 본성의 한 요소 또는 차원’을 의미하지만 수식하는 용어가 붙으면 그 의미가 제한되거나 달라진다. 예를 들면, ‘한국인의 정신’이라고 할 때다. 이때의 ‘정신’이란 의미는 ‘어떤 상태’나 ‘지향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영성’이란 용어 사용도 이런 맥락과 같이 구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영성이란 용어가 ‘어떤 영적 상태’나 ‘지향성’을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된다면, 모든 기독교적 경험이나 행위는 영성이 되어버린다. 하나님 경험, 기도, 경건, 예배 등은 모두 영적 경험과 관련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물론 영성이라는 용어는 매우 애매한 용어일 뿐만 아니라 간결하고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정의하기 어려운 특성도 있다. 커쯔(Ernest Kurtz)와 켓참(Katherine Ketcham)은 영성에 대한 정의의 어려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영성이란 무엇인가? … 진리, 지혜, 아름다움, 장미의 향기 등 이 모든 것은 영성과 비슷하게 막연하거나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우리가 그것들을 알지만 결코 그 특성을 색으로 칠하거나 그 성질을 설명해 낼 수 없고; 이것들은 인치나 도수로 이해될 수 없으며; 소리를 내지 않아 데시벨로 측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실크나 나무나 시멘트와 같이 독특한 촉감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향기를 내지도 않고, 맛도 가지고 있지 않고,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것들은 존재하고 있다. 사랑도 존재하고, 악한 것도 존재하고, 아름다움도 존재하고, 영성도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 존재를 정의할 때 항상 인식되는 실체들이다(Ernest Kurtz, Katherine Ketcham, The Spirituality of Imperfection: Storytelling and the Journey to Wholeness, 15-16). 모든 인간은 영적 존재이다. 하지만 이러한 진술이 갖는 의미는 사람마다 다를 뿐만 아니라 시대마다 다르고, 이론적 주장 또한 다양하다. 따라서 영성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정확한 정의는 어려운 과업이 아닐 수 없다.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가 지적한 것처럼 “요즘 ‘영’(spirit), ‘영적’(spiritual), ‘영성’(spirituality) 등의 말은 점차 흔해지고 있다. 피할 수 없는 말이다. 그러나 대개 의미가 불확실하며, 그것은 위험할 수 있다”(달라스 윌라드, 마음의 혁신, 27). 때문에 우리는 이 용어를 사용할 때 신중해야 한다. 바바라 보우(Barbara Bowe)는 영성이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하여 1984-1995년 사이에 출판된 영성에 관한 책과 글을 분석하였다. 보우는 이 분석을 통하여 영성의 의미가 23가지로 각기 다르게 이해되고 정의되고 있음을 밝혔다(Barbara Bowe, Biblical Foundations of Spirituality, 10). 물론 영성이라는 말을 명확하게 정의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은 그 용어가 전통적으로 너무나도 다양하게 이해되어 왔을 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창조적 선물로서 영성 이해가 간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영성이란 용어는 기능론적 용어이기보다는 존재론적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선물로서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는 영성 이해에 중요한 시금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 즉 지·정·의와 같은 능력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은 주로 인간의 구조적 차원으로 이해된 이성과 도덕성 등으로 이해하고 인간의 기능적 차원은 인간의 구조성에 첨부되어 있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최근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차원인 능력과 가능성은 좀 덜 강조하고 ‘관계’를 보다 더 강조하였다. 인간 존재는 필연적으로 관계 속에 있는 존재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들은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돌보는 일들은 하나님 형상으로서 인간의 본질적 요소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하나님의 형상을 기능적이고 경험적 차원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구조적 차원으로만 하나님의 형상을 이해하려는 유혹과 동일하게 잘못된 것이다. 전자가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또는 존재적 차원에만 강조점을 두었다면, 후자는 하나님의 형상의 기능적 또는 경험적 차원만을 강조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은 구조적 차원과 기능적 차원의 양면성을 모두 포함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구조적 차원은 인간의 이성적, 감성적, 영적 능력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칼뱅(John Calvin)은 하나님의 형상은 신성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하나님과 동료 인간과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향하여 반응할 수 있는 능력과 이러한 반응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구조적 차원의 하나님의 형상에 해당된다. 이러한 능력들은 인간의 이성, 감성, 몸, 영성 등과 같은 차원들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합리적, 감성적, 체현적(embodied), 영적 능력들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들이다. 즉, 인간의 합리적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이성을 반영하고, 인간의 감성적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감성을 반영하고, 인간의 체현적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가시적인 몸을 통해 실현되며, 인간이 하나님과 생동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영성을 반영한다. 이러한 창조적 선물들은 통전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합된 전체를 이루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적 선물들은 각각의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구별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분리할 수 없다.모든 인간은 그 형태와 반응은 다르지만 영적 삶을 위한 창조적 선물로서 영성을 선물로 받았다. 창조적 선물인 영성은 하나님, 자기 자신, 이웃, 창조 세계와의 생동적인 관계를 위한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영적 삶과 경험은 존재적 영성(capacity)으로 인해 발생한다. 이는 마치 인간이 창조적 선물인 이성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성적 삶을 경험하며 누리는 것처럼, 인간은 영성을 창조적 선물로 받았기 때문에 영적 삶과 경험이 가능하다. 이러한 영적 경험을 경험적 또는 기능적 영성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영성’(spirituality)이 아니라 ‘영적 생활’(spiritual life) 또는 ‘영적 경험’(spiritual experience)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재적 차원의 ‘영성’과 경험적 차원의 ‘영적 삶’은 구분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성은 행위적 개념이기보다는 존재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적 선물인 영성은 하나님과 생동적인 관계를 위한 능력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영성의 경험적 또는 기능적 차원은 타락으로 인해 기능을 상실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복, 유지, 성화의 여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영성 이해는 존재적 차원의 영성을 간과하고, 기능적 또는 경험적 차원으로만 이해하여 영성을 신령한 성품 또는 거룩한 성품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영성의 존재적 차원과 기능적 차원을 모두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영성의 존재적 차원에 대한 이해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성의 존재적 차원에 대한 이해 없이 기능적이고 경험적인 차원만을 강조하게 되면, 인간의 능동성만을 강조하는 영성이 될 위험성이 있다. 만약 인간의 기능과 행위만을 강조하고 존재의 은혜, 즉 창조적 선물인 영성을 간과하는 것은 성경적이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존재론적 영성을 간과한 신령한 성품으로서 영적 추구도 자칫 성령을 고작 우리의 목표를 이루는 수단으로 여기기 쉽기 때문이다.
영성
경건
창조적선물
하나님의형상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잘못 이해했는가?①
개혁자들과 함께 아우구스티누스 읽기
by Zach Howard
2022-10-02
요약: 장 칼뱅 같은 개혁자들이 성경을 빼고 가장 많이 인용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들은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다른 주장보다도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는 것이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라는 진리를 이 교부가 어떻게 옹호했는지에 관한 부분을 집중적으로 참고했다. 그렇지만 개혁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에 관해서만은 이 위대한 교부에게서 원하는 만큼의 명료성을 찾지 못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체계적으로 다루지 않았으며, 그의 저작을 주의 깊게 읽으면 그가 이 교리를 다루는 데 있어서 모호함을 드러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에 관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주안점을 두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declaring)는 점이 아니라, 의롭게 만드신다(making)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료성을 중시하는 종교 개혁자들에게는 아무리 아우구스티누스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을 의롭다 하심의 유일한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의를 부정하지는 않았더라도, 이런 식의 교리 표현 방식을 모호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목회자, 지도자, 교사를 위한 특집 기사 시리즈를 위해서 우리는 베들레헴 신학교에서 신학 및 인문학 조교수로 일하는 잭 하워드에게 아우구스티누스의 칭의 교리를 탐구하도록 요청했다.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이해 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 2. 경건하지 않은 자를 경건케 만드는 칭의 3. 사건과 과정으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_평가 1. 칼뱅의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평가 2. 믿음과 사랑의 관계 3. 은혜의 면류관을 씌우시는 하나님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Hippo, 354-430)는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실 때 그의 행위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옹호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1]는 바울의 질문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조차도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반복해서 강조했다. 개혁자들도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구원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동일한 관점으로 이 성경적 교리를 이해했다. 더불어 당시 교부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당대의 거짓 가르침과 관행에 대항하여 은혜로 받는 구원이라는 진리를 회복하고 선포하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장 칼뱅 외에 많은 개혁자가 성경 본문 이외의 다른 어떤 저자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더 많이 인용했을 정도로 아우구스티누스는 풍부한 신학적 통찰력을 제공한 인물이다.[2]그렇지만 칼뱅과 대부분의 다른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교리를 선포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를 인용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게 하시는 방법이 행위의 공로가 아니라 믿음의 은혜를 통해서라고, 갈라디아서 2:16과 로마서 3:20 같은 본문을 근거로 말한다. 그러나 칭의의 의미를 로마서 4:5과 같은 본문(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을 설명할 때, 또는 칭의를 성화의 과정과 구별할 때면 칼뱅 같은 개혁자들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생각이 달랐다. 기독교에서 칭의라는 주제가 갖는 중심 위치와 더불어 개혁주의 구원론에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갖는 중요성을 고려할 때, 칼뱅이나 루터 또는 이후의 개신교 신학자들의 책을 즐겨 읽는 많은 독자에게 이 사실은 충격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글의 목적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다. 그럼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를 어떻게 이해했을까?그러나 이 질문에 답하는 건 절대로 쉽지 않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 마지막 20년을 지배한 펠라기우스 논쟁이 16세기에 벌어진 신학 논쟁에서도 똑같이 메아리쳤지만,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최소한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의 의미를 둘러싸고 16세기와 비슷한 위기는 없었다. 달리 말해서, 아우구스티누스로 하여금 신학적 성찰에 매진하도록 한 심각한 위기가 없었기에 그는 어쩌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해서 굳이 체계적으로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오히려 칭의에 관한 그의 견해는 당대 관련한 논쟁 속에서 필요했던 답변과 더불어 관련 성경 본문에 대한 설교에서 나타난다. 바로 이런 난관 때문에 우리는 칭의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이해를 별도의 주제로 구분해서 파악하는 대신에 구원에 관한 그의 넓은 신학적 성찰이라는 맥락 안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 파악하기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 신학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것은 사역 전반에 걸쳐 그가 분명히 밝힌 구원에 관한 통일된 시각 때문이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그 어떤 전임자들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적 증거를 통합하여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진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변호하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합창단 지휘자처럼 성경이 이곳저곳에서 부르는 노래를 하나의 합창으로 모아서 하나님이 죄인의 공로에 근거하여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은혜로 구원하신다는 진리를 기가 막히게 조화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더 이상 중재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친교가 가져다주는 선행의 삶에서 절정에 이르며 귀결된다는 것이다.[3] 우리의 목표는 합창이라는 큰 화음 안에서 칭의라는 주제로 울리는 음표를 주의 깊게 듣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적어도 세 가지 방식으로 칭의의 의미를 상상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상한 본성에 대한 치유, 경건하지 않은 자의 변화,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사건이자 동시에 과정으로서 이해, 이 세 가지이다.1. 인간의 본성에 대한 치유로서의 칭의아우구스티누스가 원죄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점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에 관한 그의 해석을 파악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로마서 5:9을 해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인간은 자신의 뜻대로 범죄한 아담의 살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기에 아담으로부터 기인한 죄에 대한 책임을 떠안게 되었다. … 그리스도를 옷 입은 어린이들과 같이…. 그로부터 의로움에 참여하는 자격을 얻게 된다.”[4]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지은 첫 죄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타락했다는 결과이기도 하다.[5] 오염된 물이 하류의 모든 것을 감염시키는 것처럼 아담의 죄는 모든 인류를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원죄는 인간의 본성을 타락시켜 모든 인류가 스스로 어떤 특정한 죄를 짓기로 선택하기 전에 이미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원죄의 문제는 칭의와 관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칭의는 단지 개인의 특정한 범죄 행위뿐만 아니라 인간 본성의 본질적인 타락도 관련한 문제이다. 칭의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회복이라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올바른 관계가 오로지 성령의 은사가 가져다주는 인간 본성의 변화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이해했다. 하나님 앞에서의 의롭게 되는 것은 단지 지위의 변화(“용서받지 않음”에서 “용서됨”으로)뿐만 아니라, 일차적으로 본성의 변화(환자에서 건강한 사람으로)를 포함해야 한다.이러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즐겨 사용한 비유 중 하나가 그리스도를 의사로, 그리고 우리를 환자로 설명한 것이다. 스스로 자신을 고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 힘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사람은 신성한 의사를 의지하게 되고, 병을 고치기 위해서 그를 향한 전적인 신뢰를 바치게 된다. 의사는 질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한 다음 완전한 회복을 위해 약을 처방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칭의는 나를 고쳐 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하는 믿음이며, 또한 완전한 회복을 위해 온전히 의사의 처방을 따르겠다는 믿음이기도 하다.[6]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이루신 칭의의 행위를 행위에 따른 당연한 보상이 아니라 은혜로운 선물로 묘사한다. 또한 칭의 행위를 사람의 의지(will)를 고치시는 성령의 은사와 동일시한다.[7]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이 드러내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약하다는 것이고, 따라서 은혜가 우리의 의지를 치유하고 그 결과 건강하게 된 의지가 율법의 지배를 받거나 율법을 필요로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율법을 완성할 수 있는 것이다.”[8]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의 의미를 인간 의지의 치유로 생각한다. 더불어 인간의 본성도 치유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 결과 인간은 이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9] 이러한 치유는 죄의 용서로 시작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의 지상 생활 내내 계속되었다. 또한 예수님의 병 고침이 기적이었던 이유는 환자가 단지 병이 나았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죽은 상태였기 때문이다.[10]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과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즉 똑바른 상태가 되기 위해서는(to be iustus), 하나님이 인간의 법적 지위뿐 아니라 의지를 치유하심으로써 본성 자체를 변화시켜야만 한다. 1. 아우구스티누스는 반펠라기우스 저작에서 자주 이 점을 지적한다. 칭의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라고 논의할 때, 그가 구체적으로 반박하는 두 가지 예는 Spirit & Letter 9.15(WSA 1.23:152) 및 Letter 186.3.10(WSA 2.3:214)을 참조하라. 아우구스티누스 텍스트의 모든 번역은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21st Century by New City Press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인용을 따라가기 어려울 때가 있으므로 인용 방법을 설명하겠다. 작품명(예: Spirit & Letter) 뒤에는 보편적인 섹션과 단락 번호(예: 9.15)가 온다. 괄호 안의 WSA는 The Works of Saint Augustine이라는 특정 컬렉션을 나타내며 숫자 “1.23:152”는 시리즈의 1부, 23권, 152페이지 순으로 해당 권을 나타낸다.2. Anthony N.S. Lane, John Calvin: Student of the Church Fathers (Grand Rapids: Baker, 1999). 3. 통일된 구원의 비전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점을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Matthew Levering, The Theology of Augustine: An Introductory Guide to His Most Important Works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13)을 참조하라.4. Gerald Hiestand quotes from Augustine’s Unfinished Work Against Julian VI, as quoted in Eugene Portalie, A Guide to the Thought of Saint Augustine (London: Henry Regnery Company, 1960), 211. See also Augustine, On Original Sin, chs. 43, 252. 5. See Gerald Hiestand, “Augustine and the Justification Debates: Appropriating Augustine’s Doctrine of Culpability,” Trinity Journal 28, no. 1 (Spring 2007): 115?39. 6. 아우구스티누스는 설교에서 자주 이 비유의 버전을 제공하지만, 이 주제를 설교 360B에서 가장 완전하게 발전시켰다. 특히, sections 14-20 (WSA 3.11:372?76). 예를 들면, 설교 49, 80.2, 113A.13, 374.8.를 참조하라.7. Peter Dubbelman, “Augustine’s View of Justification and the Faith That Heals,” Southeastern Theological Review 11, no. 1 (Spring 2020): 53-78. 8. Augustine, The Spirit & the Letter 9.15 (WSA 1.23:152). 9. 우리가 사랑을 통해 율법을 완성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임을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한다. 10. 아우구스티누스는 원죄를 영적, 육체적 사망과 동일시하며 종종 에베소서 2:1을 인용한다. 원제: Did Augustine Get Justification Wro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아우구스티누스
칭의론
인간본성
칭의
개혁된 목회자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Chad Van Dixhoorn
2022-09-29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나는 모든 기독교 목사가 리차드 백스터가 쓴 개혁된 목회자(Reformed Pastor, 국내 역간본 서명은 ‘참된 목자’ 또는 ‘참 목자상’)를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다른 목회 지침서보다 더 많이 그러니까 적어도 두 번씩은 읽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심지어 이런 말까지 덧붙이고 싶다. 이 세상에 목차를 읽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책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이 책을 내용을 꼼꼼하게 안내하는 저자의 글에서부터 백스터는 목회와 관련한 강력하고도 실용적인 사례를 소개한다. 청교도는 마침내 설교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오랜 싸움에서 승리했다. 이 승리의 빛 속에서도 백스터는 마냥 기뻐만 하지 않고 심방과 신앙 교육이 너무도 무시되어 더 이상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 심각한 현실을 직시한다.여러분은 이게 오늘날에도 전혀 변하지 않은 심각한 문제라는 점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심방하고 교인을 일대일로 가르치고, 교인의 집에서 지내거나, 또는 백스터가 때때로 그랬던 것처럼 교인을 사택으로 초대하는 등의 개인적인 목회 활동은 오늘날 너무도 많은 곳에서 사라진 일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런 목회 활동이야말로 그것이 자신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그 필요조차 모르고 있는 교인들을 돕는 가장 좋은, 아니 유일한 방법이다. 심방 목사꾸준한 심방으로 유명한 백스터는 설교로도 유명했다. 그는 천국이 마치 경각에 달린 사람처럼 살았고, 그 점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공감하게 만들었다. 설교할 때면 그는 마치 죽어가는 사람이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하듯이 외쳤고, 바로 그 점은 자신의 설교를 더 진지하게 만들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그가 목회한 교회는 때때로 정원을 초과하여 가득 찼고, 영국 전역에서 그는 설교자로 끊임없이 초청받는 목사가 되었다. 그는 한마디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지금 같은 유명 연예인이 있기 전 당시의 기준으로 볼 때 일종의 연예인이었으며, 그때 요즘 같은 콘퍼런스가 있었다면 끊임없이 불려 다녔을 주요 강사였다. 끊임없이 설교 요청이 쇄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주일에 이틀, 또는 최소한 이틀의 반나절을 심방에 투자했다. 심방할 시간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한 그는 자신의 급료를 깎아서 부목사를 고용했다. 그건 백스터가 담임 목사로서 심방을 줄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책임진 영혼에게 최대한 더 많이 다가가기 위한 방법이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자세한 이야기를 그의 방대한 자서전과 개혁된 목회자에서 만날 수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백스터는 교인과 믿지 않는 이웃 방문의 중요성을 더 절실하게 깨달았다. 더불어서 기독교 신앙에 무지한 어른들과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 더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것이야말로 목회자의 의무라고 생각한 그는 그 지역의 모든 목회자를 모아서 일종의 세미나를 열어 자신의 신념을 전했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다 예외 없이 자신과 같이 목양에 힘을 써야 한다고 설득했다. (나는 이런 열심을 좋아한다.)그 결과 백스터의 동료 목사들은 두 가지 합리적인 걱정을 제기했다. 그건 백스터의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이 다 가질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다. 첫째, 사람들은 이 개인적인 목양에 어떻게 반응할까? 둘째, 목양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백스터는 다른 목회자도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통해서 첫 번째 문제를 해결했다. 양들에게 다가가는 목자들의 필요성과 심방이 가져다주는 축복에 관해서 설득하는 글이었다. “목사로서 행여나 교인들이 심방을 거부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1] ‘개혁된 목회자’는 목회자로 하여금 교인들이 목양의 축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을 조언한다. 그리고 백스터는 지역 교회 목사들에게 실제 설교를 통해서 그들의 사역을 격려하고 어떻게 목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로 계획했다. 그러다가 병에 걸려 더는 설교할 수 없게 되자, 그는 계획했던 설교를 큰 책으로 냈다. 사실 그것 또한 그가 항상 하던 사역이었다. 백스터의 접근법‘개혁된 목회자’는 일련의 큰 장과 그 속에 소주제별 파트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목사의 자기 감독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백스터에게 목사는 자신의 설교를 삶에서 실천해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책의 다음 부분은 전반적인 교회 관리, 왜 우리가 회심하지 않은 자들을 만나고, 믿음을 의심하는 자들을 도우며, 성도들을 세우며, 또 병자들과 방황하는 자들을 심방해야 하는지를 다룬다. 백스터는 이런 사역에 꼭 필요한 마인드와 관련한 내용을 길게 설명한다. 그리고 또 다른 부분에는 양 떼에 투자하도록 만드는 강력한 동기가 주의 깊게 목록화되어 다뤄진다. 이런저런 내용이 꽤나 따라 나오는데, 긴 책 제목—Gildas Silvianus; The Reformed Pastor. Shewing the nature of the pastoral work; especially in private instruction and catechizing(길다스 실비아누스; 목양의 본질을 보여줌; 특히 개인 교육과 교리 교육에서)—에 어울리게 이 책은 매우 길다. 나누어서 읽을 것을 추천한다. 독자는 단지 목양에 관한 지식을 얻겠다고 고집해서도 안 되고, 각자의 상황에 맞게 바로 적용하는 방법에 대한 지혜를 구하면서 천천히 백스터의 조언을 숙고해야 한다. (전화 심방, 때로는 줌 심방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 책은 또한 한 주제를 놓고 여러 장이 겹치기 때문에 에세이처럼 주제별로 나눠서 읽는 것이 가장 좋다. 백스터는 간결함보다는 철저함에 훨씬 더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목양의 동기, 목양에 대한 반대, 그리고 심방에 필요한 실용적인 방법 등에 관해서 여러 번 반복해서 설명하기 때문이다. 백스터가 제공하는 팁은 한마디로 말해서 심방 때에 꼭 필요한 황금 덩어리이다. 어떻게 하면 최대한 친근하게 질문을 던질까? 위협적이지는 않은가? 분명한가? 백스터가 샘플 대화를 바탕으로 자세하게 알려줄 것이다. 유용한 게 단지 목회자의 말뿐이 아니다. 시간을 쓸 때, 그러니까 교인들의 삶 속에 나의 삶을 투자할 때,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시간과 편안함을 포기하는 대신 교인들의 애정을 얻는다는 사실을 백스터는 바로 이해했다. 백스터의 첫 번째 전기 작가(백스터가 아니다!)는 이렇게 말한다. “양 떼에게 선을 행하려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근면함은 그에 상응하는 사랑과 감사로 응답되었다.”[2] 심방은 단지 심방이라는 목적의 달성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심방 사역은 우리의 마음을 보호할 수 있다. 백스터는 언론과 마찬가지로 “강단은 위선적인 목사의 무대”라고 날카롭게 논평한다.[3]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우리는 오로지 하나님만이 보시는 내면에도 집중해야 한다. 오늘날 그리고 미래의 목회자를 위해서목회자를 위한 백스터의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25년 전이고 이후로 나는 정기적으로 부분 부분을 읽고 또 읽고 있다. 나는 2006년에 처음으로 목회 인턴을 시작했고, 모든 인턴은 이 책의 일부 또는 대부분을 읽어야 했다. 나중에 나는 신학교 교수로 사역했고, 목회 신학에 관한 모든 수업에서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대(大)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의 책은 필수 독서 목록이었다. 학생들은 목회 사역에 관한 개신교 개혁자의 저작 및 목양에 관한 19세기 최고의 교재를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백스터를 읽어야 한다. 백스터는 항상 목회의 부름을 받은 젊은이를 주시했다. 그는 경건한 교사와 경건한 학생을 연결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편지를 썼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하는 학생의 모습을 주시했다.[4] 나는 백스터야말로 목회자 양성에 가장 이상적인 독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백스터가 이 책을 쓴 것은 현직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이웃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하는 목회자, 사람들이 앞에 오는 것만큼 빨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게 되는 목회자, 그리고 교회는 나오지만 도통 변화가 없는 교인들 때문에 아파하는 목회자를 위한 책이다. 그러나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이 책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내 아내는 막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이 책을 읽었다. 나는 책 여백에 적은 아내의 메모를 보았다. 어떻게 기도해야 목사인 남편을 위해 더 잘 기도할 수 있는지를 배웠다고 아내는 적어놓았다. 얼마 전에야 나는 아내의 메모를 보게 되었는데, 아내는 교인을 향한 백스터의 마음을 통해서 사모로서 자신이 좀 더 목회에 관여해야 한다는 점을 배운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섭리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초신자를 위한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책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길다스 실비아누스(Gildas Silvianus)는 백스터가 솔직한 스타일 때문에 존경했던 두 명의 교부에 대한 언급이다. 한 명은 영국인의 결점을 폭로하는 용기 때문에 존경했고, 다른 한 명은 로마인을 향한 책망 때문에 존경하게 되었다.[5] 백스터는 그들의 작업을 쉽게 말하기의 사례로 여겼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책 속 각각의 섹션은 이미 잘 알려진 그의 율법주의적 행진의 예이기도 하다. 물론 귀중한 조언과 함께, 그는 여러 목회자의 실패를 보고 은혜와 용서가 필요한 목회자에게 더 많은 격려를 제공할 수 있었다.어떤 판본이 좋을까?가장 읽기 좋은 판본은 무엇일까? 1656년 판은 1657년에 들어서 확장본이 나왔고, 시간이 흘러 1829년에는 요약본으로 다시 나왔다. 그 요약본은 나중에 ‘진리의 깃발’(Banner of Truth)에서 다시 인쇄되었다. 요약본이 되면서 비록 백스터 스타일의 특징이 희석되었지만, 요약본은 읽기에 적합하다. (물론 목양에 대한 백스터의 설명을 “너무 행복한 사역”에서 “너무 위대한 사역”으로 바꾸는 순간, 뭔가를 잃었다고 생각한다!)[6]팀 쿠퍼(Tim Cooper)의 전문 편집 하에 크로스웨이(Crossway)가 제작한 최근 요약판에서 우리는 졸지에 보다 더 공감적이면서도 동시에 더 엄격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그 책의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백스터의 ‘개혁된 목회자’에서 섹션을 구분하는 경우에, 나는 항상 칼로 본문 여기저기를 큰 덩어리로 자르면서 도살하는 것처럼 느꼈다. 이에 반해 쿠퍼 박사는 외과용 칼을 가지고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꼭 있어야 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집함으로 책을 훨씬 더 날씬하게 만들었다. 이번 백스터 책의 경우에, 그의 수술이 가져다준 효과는 실로 놀랍다.”[7]어떤 판이든 중요한 것은 책을 주의 깊게 읽는 것이다. 또한 백스터의 조언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즐겁게 사역을 시작하는 것이다. 겸손하게 사역하는 목사를 우리의 왕이 높이 들어 존중할 것이다. 1. Richard Baxter, Reliquiae Baxterianae, ed. N.H. Keeble et al.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2020), 1:476. 2. Baxter, Reliquiae Baxterianae, 4:380. 3. Richard Baxter, The Reformed Pastor (1829;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7), 255. 4. 그 보기로는 다음 책을 보라. N.H. Keeble and G.F. Nuttall, eds., Calendar of the Correspondence of Richard Baxter, vol. 1, 1638-1660 (Oxford: Clarendon Press, 1991), 201 (letter 289), and Frederick J. Powicke, A Life of the Reverend Richard Baxter, 1615-1691 (Boston: Houghton Mifflin, 1924), 142. 여기에서 보면 마치 백스터가 학생들에게 Arrowsmith의 강의와 설교를 들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5. Baxter, Reliquiae Baxterianae, 1:476. 6. 다음 두 책을 비교해 보라. Baxter, Gildas Silvianus; The Reformed Pastor (London, 1656), 413; The Reformed Pastor (1829; Banner of Truth: Edinburgh, 1997), 231. 7. Chad Van Dixhoorn, foreword to The Reformed Pastor: Updated and Abridged, by Richard Baxter, ed. Tim Cooper (Crossway: Wheaton, 2021). 원제: The Reformed Pastor: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리차드백스터
개혁된
목회자
목양
심방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성들
by Davy Ellison
2022-09-28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고대하는 중요한 실마리 하나를 잊어버리곤 한다. 예언하는 모세에게서, 제사장 아론에게서, 다윗 왕에게서 그리스도가 어떻게 예표되고 있는지는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자들은 지나쳐버릴 때가 많다.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 육신을 가지고 남자로 오셨다. 그러나 이것이 구약의 여성 인물들은 우리 구주의 다종다양한 사역을 밝히지 못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물며 성막과 같은 무생물을 예수님의 사역의 예표로 보고자 하는 우리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여자도 마찬가지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세 가지 예를 들어보겠다.야엘, 구원의 결정타사사기 4장은 하나님께서 거두신 승리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한 두 여성을 보여준다. 첫째, 드보라는 바락에게 지혜로운 조언을 하고 엄한 책망을 한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바락과 가나안 사령관 시스라가 전장에서 맞붙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은 여자 야엘의 손을 통해 승리를 허락하신다. 시스라의 관자놀이에 장막 말뚝을 박은 여자 야엘의 손으로 승리를 허락하신다. 데일 랄프 데이비스(Dale Ralph Davis)는 이를 두고 “구원의 결정타”(smashing salvation)라고 부른다.사사기 4장에 나오는 야엘의 치명적인 타격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창세기 3:15의 약속을 반영한다. 야엘의 행동은 그 사령관의 머리만이 아니라 사탄의 머리도 부숴버리실 메시아를 예표한다.룻, 변함없는 사랑목회자들은 흔히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기업을 무른 보아스의 행동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한다고 설교한다. 나도 그렇게 설교했다.그러나 룻 또한 예수님을 예표한다. 절망스러운 처지에 놓인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룻기 첫 장의 말미에서, 우리는 구약 이야기에서 가장 감동적인 언설 하나를 읽는다. 룻은 나오미에게 달라붙어 말한다(룻 1:14).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룻 1:16-17)주석가들은 대부분 룻의 이 행동을 제자도와 헌신의 본보기로 꼽는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룻의 모범을 따르라고 권한다. 그러나 우리는 룻의 행동에서 또한 하나님의 사랑을 본다. 14절에서 “달라붙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창세기 2:24에서 첫 남자와 첫 여자의 결합에 사용된 단어와 동일하다. 이 단어에는 친밀하고 깨지지 않는 유대가 담겨 있다.하나님은 나오미를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그녀의 가족은 방랑했고 그에 따른 고난을 겪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룻이 나오미에게 “달라붙은” 것에서 우리는 이것을 생생하게 본다. 룻기의 화자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 베푸시는 언약의 사랑의 메아리를 보기를 바란다.룻의 행동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을 어떻게 굳게 붙드시는지를 예표한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떨어질까 두려워하지만, 예수님은 누구도 우리를 그의 손에서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요 10:28). 우리도 나오미의 가족처럼 방황하고 다른 곳에서 구원을 구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그는 우리를 굳게 붙드시고,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약속하신다(롬 8:38-39).에스더, 담대한 중재에스더서는 명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책이 어떻게 메시아를 예표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왕비 에스더를 통해서 그렇게 한다.백성의 참상을 듣고 모르드개의 온유한 격려를 받은 에스더는 담대하게 행동한다. 왕의 부름이 없었지만, 에스더는 목숨을 걸고서 왕 앞에 나아간다. 그리고 자기 동족을 옹호하고 그들의 대의를 변호한다. 그녀는 그 변호를 통해 그들의 안전을 실제로 확보한다. 그녀의 성공은 왕의 눈에 든 그녀의 신분, 곧 왕이 다른 모든 여자보다 더 그녀를 사랑했다(에 2:17)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히브리서나 요한일서를 훑어보기만 해도 에스더의 행동과 그리스도의 행동 사이에 공통점이 있음이 금세 드러난다. 히브리서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중보자로서 행하려고 성소에 들어가신다(히 9:11-15, 23-28). 당신의 신분 때문에 하늘 보좌에 계시는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말씀하신다(히 10:1-18). 에스더의 중재가 예수님의 중재를 예시하지 않는가?요한일서 2:1에서 예수님은 아버지 앞에 서서 우리가 죄로 인한 심판을 받지 않도록 변호하신다. 마찬가지로 에스더도 왕 앞에 서서 자기 백성이 하만의 손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변호했다. 에스더의 변론이 메시아의 계속되는 하늘 사역을 예표하지 않는가?구약이 메시아를 고대하는 방식이 너무나 다양하고 다면적이어서 우리가 그 깊이를 놓칠 때가 종종 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밤하늘을 오래 바라보고 있자면 우리 눈에 점점 더 많은 별이 들어오듯이, 구약성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으면 메시아를 고대하는 깊은 층이 겹겹이 드러난다.천천히 더 찾아보라. 가만히 바라보라. 예수님이 얼마나 다양하게 구약성경에서 기대되고 예고되고 있는지를! 성령께서 도우셔서 우리가 그 모두를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여성들을 통해서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원제: Women Who Foreshadow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그리스도예표
룻
야엘
에스더
칼빈주의가 나의 고통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by Jane Story
2022-09-26
이십 대 중반에 건강이 나빠졌다. 수면 문제, 정신 문제, 큰 어깨 부상과 수술, 그리고 희귀한 편두통까지 빠르게 또 연속해서 나를 덮쳤다. 고통은 무려 5년이나 이어졌고, 때때로 도무지 나을 거 같지 않다는 절망에 빠지곤 했다. 나는 고통이 시작한 그 계절을 희망적인 전망으로 시작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또 신앙 공동체를 찾았다. 그런데 몇 달 만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벽 4시에 차 안에서 하나님께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엄두가 나지 않아 이불 속에 숨었다. 비참함 속에서 나는 길을 잃었다.잘못 자리 잡은 소망돌이켜보면, 가장 큰 문제는 영적 피로와 혼란이었다. 일부는 내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부분은 내가 신학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고난의 계절이 시작하기 몇 년 전, 나는 구원에 대한 칼빈주의적 이해를 오로지 머리로만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때까지 그 진리를 실생활에 적용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고난을 잘 감당하게 하는 능력을 무너뜨리는 교묘한 거짓 아래서 활동하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 매달리고 믿음을 잃지 않는 게 내게 달렸다는 사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서기 위해서 무엇보다 “충분히 또 넉넉하게”(good enough)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물론 성경에는 끝까지 견디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억하고, 믿음으로 고대하라는 수많은 말씀이 있다. 그러나 나의 소망은 그리스도의 신실함보다는 신실할 수 있는 나의 능력에 있었다. 나는 칼빈 학자와는 거리가 멀지만, 그의 가르침에 대한 단순한 이해만으로도 나의 잘못된 생각이 드러났고 결국에는 큰 소망을 갖게 되었다. 고난 중에 도움이 되었던 많은 교리 중 두 가지만 언급하겠다.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에게는 그가 결정하신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능력과 권세가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했다. 하나님께 감히 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 누가 하나님을 잔인하다고 판단하는가?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성품을 설명한다. 게다가 나는 하나님이 나의 선을 위해 자비롭게 일하시며, 또한 죄인들에게 관대하시다는 약속을 받았다.나의 가장 암울한 순간에 하나님의 주권 교리는 위로가 아니라 더 큰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친구가 남긴 믿을 수 있는 상처였다(잠 27:6). 그의 주권이 없다면, 나의 고통에는 목적이 없고, 그것은 결국 훨씬 더 나쁜 운명을 초래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가 나의 고통을 의도적으로 허용하거나 심지어 야기했다는 것까지도 받아들임을 의미했다. 그건 어려웠다.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통치에 복종하고 그를 선하다고 고백하는 것은 소망과 기쁨의 길이 되었다. 하나님이 내 삶을 마구 명령하신다고, 내 마음대로 우기는 것은 오로지 분노와 의심을 가져다줬을 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상황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면서 나는 자유를 느꼈다. 나의 시련이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반증”하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 대신, 나는 모든 고난이 궁극적으로 나를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발견했다(벧전 1:3-9). 이런저런 삶의 기복에 흔들리지 않도록 하나님의 주권이 나의 든든한 터가 됨을 발견했다.성도의 견인구원은 은혜로 받았지만 거룩하게 할 책임은 내게 있다고, 어린 시절부터 나는 암묵적으로 배웠다. 믿음을 굳건히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려 있고, 심지어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고 믿었다. 나중에는 건강 문제로 인해 화가 나고 낙심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도망치고 싶을 정도였다. 믿음이 약해져서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잃을까 봐 걱정했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달콤한 교리로 나를 인도했다. 한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 이것은 무조건적 선택(내게는 구원이 필요하다는 사실 외에 내가 구원에 기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과 불가항력적 은혜(하나님이 나를 부르신다면, 나는 무조건 구원받음)를 포함한 몇 가지 다른 교리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종합해보면, 이 교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구원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또는 내가 얼마나 많은 믿음을 가질 수 있는지를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적 씨름과 의심에도 불구하고 나는 안전하다는 것이다. 나의 안전은 나 자신이 아닌 외부에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어려운 시기일수록 더 믿음을 키우고 그리스도께 매달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나의 안전은 내가 완벽하게 고난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가 아니라, 나를 대신하여 완벽하게 고난을 당하신 유일한 분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의 손에서 그 누구도 나를 빼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와 의심이 더 이상 무섭지 않게 되었다(요 10:28-30).변화끔찍한 세월을 거치면서 내 기도와 예배가 바뀌었다. 나는 경험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핑계로 그를 믿지 않는 불경한 죄를 포함한 모든 죄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것을 이해했다. 믿음과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더 깊이 깨달았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또 연약함 속에서 오히려 내 속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더 커졌음을 깨달았다.전보다 더 커진 인내와 믿음으로 앞으로의 시련을 이겨내길 바란다. 그러나 더 큰 위로는 내 믿음이 부족할 때도 주님께서 여전히 나를 붙드신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택함 받은 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선물로 주셨다. 나의 인내는 나의 행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행함으로 보증된다. 이것은 바로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랑 앞에서는 고통의 칼날도 무디어진다. 심지어 내가 품은 의심이나 시련 그리고 죄조차도 그 사랑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롬 8:35-37).원제: How Calvinism Changed My Suffer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칼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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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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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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