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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Zach Howard
2022-08-18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이상한 책이다. 많은 옛 책들이 그러하듯이 스타일과 어조는 현대 독자들에게 너무 낯설다. 그러나 고백록의 장르와 구조가 시대를 떠나서 누구에게나 워낙 이례적이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의 동시대인에게조차 이 책은 낯설고 이례적이었다. 그러하면서도 고백록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지만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여러 우려 사항과 질문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설명함으로써 지난 수 세기 동안 독자들을 놀라게 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관심사는 너무도 보편적이어서 항상 현대적이며, 그의 대답은 지금까지 그 숱한 세월을 다 견디어 왔다. 그렇기에 고백록은 계속해서 여러 세대의 독자들을 당황하게 하면서도 또 동시에 만족시켜 왔다.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고려하기 전에 먼저 이 책을 처음 대하는 독자를 당황하게 만드는 세 가지 서로 관련 있는 퍼즐, 곧 청중과 장르와 구조라는 퍼즐을 해결해야 한다. 고백록은 어떤 책인가?지금 여러분 앞에 고백록이 놓여있다고 상상해보자. (더 나은 방법은 선반에 지금 그 책이 있으면 꺼내서 앞에 놓거나 아니면 고백론의 미리보기를 클릭하는 것이다.)독자 퍼즐첫 장을 넘기는 순간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대상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오히려 시편 기자들처럼 그는 자신의 죄뿐 아니라 찬양까지 더불어 하나님께 말하고 있다. “당신은 위대합니다. 주님이시여,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1.1.1). 그는 사람에게 직접 말하지 않는다.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당신은 이 책의 정체가 당신이 엿듣도록 고안된 300쪽짜리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는 것을 바로 깨달을 것이다. 장르 퍼즐아우구스티누스의 과거 이야기가 전반적인 책 속 풍경에서 이런저런 스토리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지만, 자기 삶을 연대순으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놓는 것이 애초 그의 목표가 아님을 당신은 바로 알게 될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럼에도 굳이 자신의 개인사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과거에 자신이 지은 죄의 어두움을 통해 그리스도의 자비의 빛이 더욱 빛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2.1.1). 구약의 예언서 및 복음서와 유사하게, 고백록은 자전적 반성, 철학적 탐구, 주석적 묵상을 통합한 혼합 장르의 글이다. 저자의 개인 이야기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섭리의 역사를 더욱더 영화롭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적 회고록이다. 구조 퍼즐마지막으로 목차를 보면 1-9권은 일반적으로 연대순이지만, 10-13권은 기억, 시간과 영원, 하늘과 땅, 그리고 창조의 날과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책의 구조가 복잡하다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고백록의 주제는 광범위하다. 수사학자로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예술가가 모자이크를 배열하거나 작곡가가 악보를 배열하는 방식으로 고백록을 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각각의 내용을 전체 내용과 밀접하게 연결한다. 거기에 더해, 과거 중요한 에피소드(배 훔치기, 친구의 죽음을 슬퍼함,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뿐 아니라 현재의 유혹(육체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교만)을 서술하는 데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이런 세부 내용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전체 삶에, 더 넓게는 우주 역사(특히 11-13권의 창세기에 대한 그의 성찰)와 어떻게 관련되는지까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다. 당신 앞에 지금 놓인 고백록은 회고록처럼 쓰인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합당한 관계에 대한 심오한 신비를 탐구하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적인 기도이다. 왜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가? 이제 나는 고백록을 읽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인 동시에 일곱 가지 핵심 주제를 통해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고백록을 손에 들도록 유혹하려 한다. 1. 하나님과 인간, 그 관계에 관해서첫 문단에서 마지막 문단까지 아우구스티누스는 세 가지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을 엮어간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여러 층의 답변을 제공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 다 다음 첫 번째 단락의 주제를 발전시킨 변형이다. “주님이 우리를 당신께 나아가도록 지으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주 안에서 안식할 때까지 쉼을 얻지 못합니다”(1.1.1). 하나님은 안식이지만 우리는 안식할 수 없는 존재이다. 결국 우리라는 존재는 하나님 안에서만 안식을 찾는다. 그게 과연 진실이라면,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를 찾아가는 것이 이 책이 다루는 큰 과제이다. 우리 모두 그가 제기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깊은 명상이 당신을 인도하도록 하라. 2. 고백: 죄, 신앙, 그리고 찬양아우구스티누스가 이 책에 붙인 라틴어 ‘콘페시오’(confessio)는 이 책의 폭넓은 성격을 알려준다. 그는 이 용어를 최소한 세 가지 중복되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첫째, 그는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그것이 ‘고백록’이라는 제목의 지배적인 의미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참되다고 믿는 것을 신앙(faith)으로, 마치 신경(creed)을 믿는 것처럼 고백한다. 마지막으로 첫 번째 줄부터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향해 찬양과 경배를 고백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단순히 죄를 회개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의 신앙을 선언하고, 고백 속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까지 포함하도록,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고백의 의미를 확장한다. 3. 바르게 정렬된 사랑과 슬픔아우구스티누스의 어린 시절 장면을 통해 우리는 그가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체험한 격렬한 사랑은 그가 결코 슬픔에 관해 낯선 사람이 아님을 의미한다. 어느 날 영혼의 반쪽인 것처럼 사랑했던 소꿉친구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마음은 “슬픔으로 검게” 그을렸다. 회심하지 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영혼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11)고 명령했지만, 그는 순종할 수 없었다. 왜였는가? “내 영혼이 사랑하는 잃어버린 소중한 친구가 내가 영혼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한 상상 속의 신보다 더 고귀하고 더 현실적이기 때문입니다.” 당시를 돌이켜 생각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무질서한 사랑에 이렇게 이름 붙였다. “오, 인간을 인간답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광기여!”(4.7.12). 그는 마치 친구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랑했다. 그리고 그는 잃어버린 친구로 인해 하나님이 마치 상상에 불과한 존재인 양 슬퍼했다.젊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충격적인 경험을 통해 나중에 인간이 피조물을 올바르게 사랑할 수 있는 법을 고민했다. 그의 대답은 이것이다. “너는 그것들을 하나님 안에서 사랑하도록 하라”(4.12.18). 아우구스티누스는 피조물로부터 아예 고립된 상태에서도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는 스토아의 금욕주의를 거부했다. 또한 하나님과 떨어져서도 얼마든지 피조물 세상에서 행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에피쿠로스의 방종도 거부했다. 오히려 우리는 피조물이기에 피조물을 사랑해야 하고, 피조물을 적절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 자신이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바른 질서를 가진 사랑만이 올바른 질서를 가진 슬픔으로 이어진다. 고백록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는 인생을 사는 우리가 항상 불안한 마음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다른 피조물을 올바로 사랑할 수 있다. 4. 회심: 이야기의 힘모든 사람의 회심은 다 특별하다. 그럼에도 모든 회심 이야기에는 죄에 대한 속박, 용서와 자유에 대한 열망,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은혜 같은 특정 요소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 항복하는 회심이라는 일련의 사건이 사람에 따라서 아무리 극적이거나 또는 지극히 단순하더라도, 모든 회심 이야기 속에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는 과정에서 반드시 나타나는 유사한 특징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진리를 인식한 아우구스티누스는 1-9권의 절정에 해당하는 회심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에 불을 붙인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먼저 세 가지 회심 이야기가 자신의 회심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설명한다. 빅토리누스를 통해서 그는 명예와 부, 그리고 치명적인 교만의 매력을 극복하게 하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다고 말한다. “나는 그를 닮고자 열망했습니다”(8.5.10). 다른 사람의 회심 이야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열망을 불러일으켰으며, 자신의 영혼을 보여주는 거울처럼 “내가 얼마나 가증스럽고 마음이 비뚤어져 있으며 더러운지”(8.7.16)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다. 다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미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그는 단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넘어 하나님을 통해 변화된 삶을 목격함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아우구스티누스 자신의 회심에 얼마나 다른 이들의 회심 이야기가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지를 고려할 때, 그가 자신의 강력한 회심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하다. 생을 마감할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다시 읽으며 과거에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감동했다. 그리고 그는 독자들도 자신과 같은 은혜를 받기를 기도했다!5. 우리 자신에게 낯선 자들(내면성)아우구스티누스는 여러 면에서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내면에서 분열되어 있고, 자신에게 숨겨져 있으며, 따라서 자신에게 문제가 된다. 그가 자신 안에서 낯선 자를 발견한 것은 죄가 그의 마음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사람으로서 삼위일체의 신비를 반영하는 그 무언가를 드러내는 자아 속 어떤 신비를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미지의 영역을 표시하는 지도 제작자처럼,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추구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현재 내면의 삶을 지도로 만들어간다. “영혼의 가장 안쪽 부분”(10.25.36)에 해당하는 기억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는 그는 치유가 여전히 절실하게 필요한 “상처 난 마음”(10.41.66)을 발견한다. 자아 깊숙한 곳에 있는 이 비극적인 상처를 의식한 그는 그리스도를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의사”(10.3.4)로서 갈구한다. 그는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치유하시고, 자신을 하나님께로 다시 인도할 “진정한 중재자”(10.43.68)가 되어달라고 요청한다. 6. 시간 안에서 구원받음(임시성)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현재 자신이 누구인지에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궁극적으로 그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에도 관심을 둔다. 그리고 그는 성경의 증거를 통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지 잘 알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스스로에 회의감을 갖게 될 때도, 그는 바울처럼 미래를 향해 시선을 확장한다(빌 3:12-14). 마지막을 바라볼 때 그의 시작은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 때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시간에 맞게 우리를 구속하신다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이다. 7. 책이 가진 변혁의 능력청년 시절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책으로 “개종”했다. “이 책은 내 열정을 바꾸어 놓았고 내 기도가 당신께 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 나로 하여금 다른 소망과 갈망을 갖도록 했습니다”(3.4.7).그러나 고백록 속에 성경보다 더 큰 책은 없다. 철학자의 책이 진리에 대한 열망을 일깨워주었다면, 성경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주었다. 그의 회심의 절정은 “톨레 레게”(tolle lege)를 외친 어린이의 목소리에 대한 응답으로 드러난다. “그것을 집어들고 읽어라.”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서 13:13-14을 읽었다. “그 구절 끝에 이르자마자 즉시 확신의 빛이 내 마음 안에 부어졌으며 모든 의심의 어두움이 사라져 버렸습니다”(8.12.29). 그는 창세기 1-2장에 대한 확장된 묵상으로 고백록을 끝맺는다. 왜냐하면 창조로 시작해 완성에 이르는 성경의 구원 이야기 안에서만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백록을 읽어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를 어떻게 변화시키셨는지를 확인하라. 그리고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놀라운 드라마에 빠져보라. 톨레 레게, 지금 당장 고백록을 집어 들고 읽어라!원제: Confessions: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백록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Wayne Grudem
2022-08-17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나는 젊은 지구에 찬성하는 드루치 박사가 사려 깊고 명확한 주장을 전개한 점에 대해서 감사하고 싶다. 또한 이번 토론이 지구의 나이와 관련해서 얼마든지 다른 관점을 가질 수 있지만, 여전히 교리적 정통 내에서 우리가 피차 한 형제라는 사실을 확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 강조한 그에게 동의를 표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전개한 여섯 가지 논증에 설득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라는 주장대답 1: 어떤 구절을 읽었을 때 처음 이해되는 내용이 항상 정확한 것은 아니다.드루치 박사는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라고 말한다. 그는 창조의 6“일”이 왜 “비록 나흘째까지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도(창 1:14-19), 일관되게 이 계시의 전달자가 하루를 달력상 24시간에 해당하는 날로 묘사하고 있는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젊은 지구 관점이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성경 읽기의 결과”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하게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 표현을 “읽었을 때 드는 첫인상”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일반 독자가 어떤 구절을 처음 읽을 때 가장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바로 그 의미 말이다. 그러나 여러 번 본문을 반복해서 조사한 결과 첫 번째 이해가 옳지 않았음이 드러난 사례는 성경 안에 많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를 읽고, 성경이 해가 밤에 되면 빠른 속도로 지구 주위를 돈다고 가르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해는 다음날 아침이면 동쪽에서 다시 나타난다. 그러나 결국 과학적 관찰은 지구가 축을 중심으로 자전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했고, 첫인상 또는 “가장 자연스러운 읽기”가 옳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전도서 1:5은 지상에 서 있는 관찰자의 눈에 보이는 태양의 움직임을 묘사했을 뿐이다. 비록 태양 중심이 우리가 읽은 첫인상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올바른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창세기 1장의 여섯 “날”에 대해서 읽고 이해한 우리의 첫인상은 올바른 게 아닐 수 있다. “날”은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창 2:4에서와 같이) 얼마든지 긴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그리고 최초의 독자는 나흘째까지(창 1:14)는 어차피 “날과 해”를 구분하는 데 필요한 태양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따라서 창조의 처음 사흘은 (적어도) 보통의 날과는 어떤 형태로건 달랐으리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을 것이다. 그럼 과학은 어떻게 되는가? 대답 2: 과학적 증거는 설명을 요구한다. 나는 드루치 박사가 젊은 지구 지지자로서 지구, 달, 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 수많은 별 사이의 수십억 광년 거리, 우주의 팽창률, 수백만 년 전에 타버린 먼 별의 관찰, 대륙 이동 속도, 북극의 수십만 년의 얼음층, 호수에 있는 수만 년에 걸친 퇴적층 등등을 통해서 드러나는 극단적으로 많은 나이를 가진 우주, 특히 지구의 나이에 관한 증거에 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은 것에 약간 놀랐다. 이러한 과학적 관찰은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오래된 지구라는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이며, 이 증거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적 해석이 제공되지 않는 한 우리의 마음이 바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창세기 1-4장 전체를 다 ‘태초로’ 대답 3: 신약성경은 창세기 1-4장 모두를 “시작”으로 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성경의 주요 이야기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한 인간의 창조, 타락, 구속의 역사를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4장의 사건이 모두 다 “태초”로 언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문학적 관점에서 바로 그 사실이 창세기 1-4장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관련하여 기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창조가 드루치 박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야구의 “9이닝”이 아니지만, 창세기 1-4장은 모두 첫 번째 이닝과 더 비슷하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은 노아, 아브라함, 그리고 다윗을 통해서, 나아가서 바벨론 유배와 귀환, 예수의 삶과 사역 및 죽음과 부활, 교회의 설립,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서 진행되는데,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구속 이야기 속 남아있는 나머지 8이닝을 구성한다. 족보의 역할대답 4: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는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그리스도까지 이어지는 계보를 보여주는 신약성경의 토대가 된다. 그리고 족보는 홍수 이전 세대의 놀라운 장수 능력과 건강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지, 결코 지구의 나이 또는 인류의 나이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드루치 박사는 성경에서 아들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손자 또는 증손자를 의미할 수 있다는 데에 동의한다. 따라서 그는 (원칙적으로) 아일랜드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가 만든 창조가 발생한 날짜, BC 4004년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족보에 담긴 나이를 다 더하면 인류의 나이가 약 6,000세임을 알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면 사실상 어셔 주교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족보에 얼마든지 공백이 있을 수 있고, 족보가 특정 개인만 강조해서 표시했으며, 초기 세대의 많은 개인이 수백 년을 살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인류와 관련해서 10,000년 또는 20,000년이라는 숫자를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 하나님의 영원성과 오래 참으심대답 5: 수십억 년 동안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던 지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더 큰 영원하심과 그의 무한한 오래 참으심을 경이로운 마음으로 숙고하도록 자극한다.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이 말씀이 말하는 현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138억 년이 전혀 긴 시간이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한 그 시간은 초속 186,000마일로 여행하는 먼 별에서 오는 빛이 땅에 닿아 우리의 경외심을 일깨우고, 그토록 광대한 우주를 만드실 수 있는 창조주의 무한한 지혜와 권능을 생각하면서 경배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평화로운 동물의 죽음이라는 가능성대답 6: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전에는 식물처럼 동물도 정상적인 수명을 살다가 조용하고 평화롭게 죽었을 가능성이 있다.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경고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그들이 죽는 것이지, 결코 짐승도 죽는다는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한다. 타락과 더불어 죽음은 동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anthropos의 복수형, “사람, 인간”)에게만 퍼졌다(동물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라).1975년에 변증가 프랜시스 쉐퍼는 과학의 사실과 성경의 가르침 사이에 결코 “결정적인(final) 충돌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타락 전에 동물이 죽었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따뜻한 굴뚝 구석에서 개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면, 거기에는 그 어떤 고통이(struggle) 없다. 그것은 마치 나무에서 잎사귀가 떨어지는 것 같다. … 인간을 포함하지 않는 모든 동물에게는 쫓기거나 괴로움이 아닌, 평화로운 죽음이 드러내는 자연적인 순환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1]드루치 박사는 다가올 시대에 우리가 먹을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동물의 죽음이 허용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식물처럼 동물도 얼마든지 이 지구에서 지난 수백만 년 동안 정상적인 삶의 과정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었다는 생각에 원칙적으로 이의가 없어야 한다. 그 동물의 시체가 부패하고 죽은 식물과 함께 분해되어 오늘날 지구에서 발견되는 석탄 및 석유와 같은 화석 연료를 생산하는 물질을 제공하고 있다. 나는 드루치 박사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논증에 대한 답을 제공할 타락 전 평화로운 동물 죽음에 대한 아이디어에 대해서만은 적절한 고려를 했다고 믿지 않는다. 그렇기에 드루치 박사의 사려 깊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시작한 곳에서 끝을 맺겠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지구의 나이를 알려줄 의도를 갖고 있지 않으시다. 대신 다양한 과학 분야의 압도적인 양의 증거가 우리로 하여금 우주의 나이는 138억 년이고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는 결론을 내리도록 인도한다. 하나님은 참으로 놀랍고, 참으로 거대하기 이를 데 없는 우주를 창조하셨다.[주]1. Francis Schaeffer, No Final Conflict (Downers Grove, IL: InterVarsity Press, 1975), 31. 원제: A Response to Young-Earth Argumen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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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Jason DeRouchie
2022-08-16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그루뎀 박사는 전반적으로 기독교 교리와 윤리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는다. 그러나 오래된 지구에 관한 믿음에 있어서만은 성경의 증거는 거의 제시하지 않을뿐더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도되는 과학자들의 제안마저 일축한다. 그는 오로지 자연주의적 동일과정설 가정(과거의 자연환경에 작용했던 과정이 현재의 자연현상과 같을 것이라고 하는 가설_역자)에 기초하여 우주의 나이를 계산하는 과학자들이 제시한 관측 가능한 데이터의 해석을 따를 뿐이다. (분량의 제약으로 인해 다음 답변을 요약 형식으로 제공한다. 자세한 설명과 자료는는 내 개인 웹사이트에서 참조하라.)날이 긴 시간(ages)을 의미한다? 날의 의미를 결정하는 건 맥락이다(예: 낮 vs. 창세기 1:5 및 2:4에 나오는 지정되지 않은 시간). 창세기 1:1에서 2:3에 나오는 일주일이라는 구조와 하루를 단위로 반복되는 끝의 공식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 23, 31)는 날이 긴 시간이 아니라 24시간임을 나타낸다. 일주일이라는 구조가 (일부 고대인이 주장하는 것처럼) 비유적일 수 있지만, 모세는 결코 “날”을 긴 시간으로 묘사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창조 주간(출 20:11)에 맞춰서 이스라엘의 주간(6+1)을 만들었기 때문에, 창세기 1장 속 6일은 24시간으로 보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다. 지구는 저녁과 아침을 생성하기 위해 고정된 광원과 관련하여 단지 회전만 하면 되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은 단순히 “있었다”(창 1:3). 하나님은 다른 모든 것을 “만들거나” “창조했다(창 1:7, 16, 25, 26; 1:21, 27). 또는 창조에 필요한 과정을 인도하셨다(창 1:11-12). 더 나아가서 “하나님은 빛”이시요(요일 1:5) 또한 예수님은 “세상의 빛”(요 8:12)이시며,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만물을 지으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사람들의 빛이 되셨다(요 1:3-4). 완전한 새 창조물에는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마찬가지로,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땅을 붙드시고 자기 아들을 중심으로 한 자신의 영광으로 고정시킨 빛을 통해 저녁과 아침을 마련하셨다고 암시한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 피조물에 빛을 비추시고 있다(고후 4:6). 하나님께서 첫 사흘 사이에 광명체와 별도로 빛을 주셨다는 사실은 “두 개의 큰 빛이…그리고 별들”이 “신들”이라는 기존 이교도 세계관에 반대하여 그것들은 단지 참 창조주가 자신의 우주에 생명과 질서를 공급하는 데 사용하는 이차적이고 불필요한 대리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족보 안에 갭이 있다?“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창 5:6). 그루뎀에게 있어서는 성경 다른 곳에서 만나는 선택적인 족보의 존재(예: 마 1:8-9)가 “창세기 5장과 11장 속 족보에 공백이 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낳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Hiphil yld)는 족보상의 공백(이름 없는 후손)을 허용한다. 즉, 주어가 후손으로 지정된 사람의 오랜 조상, 그러니까 직계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참조, 신 4:25; 왕하 20:18). 따라서 에노스는 셋의 아들, 손자 또는 더 먼 친척일 수도 있다.아무튼 그루뎀은 창세기 5:6이 연대기적 간격 또는 갭 (즉, 누락된 연도)을 허용한다고 추론한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바는 에노스가 셋의 직계 아들이든 더 먼 친척이든 상관없이 에노스가 태어났을 때 셋이 백오 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셋의 나이는 그 어떤 시간적 갭이 없이 행동과 결과가 발생한 바로 그 시점을 나타낸다. 어느 정도의 족보적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창세기 5장과 11장은 젊은 인류를 암시하는 연대기적 타임라인을 제공한다.타락 전에 죽음과 고통이 있었다? 드러내서 쓴 것은 아니지만, 그루뎀의 입장은 수백만 년 동안의 동물 죽음과 타락 이전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요구한다. 그러나 성경은 피조물의 죽음과 불행을 오직 저주와 연관시킬 뿐이다(젊은 지구에 대한 나의 원래 주장을 참조할 것).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과학적인 ‘증거’?그루뎀에게는 오래된 지구를 믿을 만한 설득력 있는 성경적 이유가 없다. 게다가, 젊은 지구에 대한 나의 성경적 논증이 건전하다면, 성경은 그루뎀의 과학적 해석에 심각한 결함이 있으며 성경의 무오한 증언과 반드시 일치해야 함을 지적한다. 그루뎀이 말하는 “팩트”는 사실상 현재 측정 가능한 프로세스가 먼 과거를 이해하는 열쇠라는 그의 믿음에서 생긴, 하나의 관찰 가능한 데이터에 대한 해석일 뿐이다. 그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는 젊은 지구 옹호론자를 비웃고 있지만, 요점은 바뀔 수 없다. 과학적 수단만으로는 결코 지구의 나이를 결정하지 못한다고 아무리 성경과 과학이 주장한다 할지라도, 그에게는 동일과정설 가정이 있다. 그가 주장하는 과학적 주장 6가지 모두를 주도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첫째, 성경은 창조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묘사한다. 그루뎀도 이 점을 지지하지만, 빛(light)과 지상의 초목(창 1:3, 11)이 지상의 생명체를 유지시키는(창 1:14) 것과 더불어 여호와의 약속(창 15:5; 렘33:22)과 능력(사 40:25-26; 암 5:8)의 강조라는 유일한 계시 목적을 가졌던 광명체(luminaries)보다 먼저 있었다는 성경의 증언 앞에서 그는 주저한다. 태양이 없이도 생명을 주는 빛을 비추는 하나님을 묘사하는 데에 모세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주저해야 하는가? 둘째,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벧후 3:4)라고 주장하며 비웃는 자들에게 베드로는 “이로 말미암아 그 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벧후 3:5-6)라는 말씀을 통해서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확신이야말로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처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인식하지 못하는 방식으로(예, 요 2:9-10), 기적은 정상적인 시간 속도를 얼마든지 변경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홍수가 일으킨 열과 압력이 지리, 지질학, 그리고 기후 등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을 것이다. 에너지와 힘은 물질의 형성 시간을 극적으로 단축할 수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하나님이 대홍수를 통해 지구를 구성했기에(창 7:10-24 참조), 홍수가 영향을 끼친 사물의 진행 속도는 분명히 오늘날 측정되는 속도와 매우 달랐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다.과학만으로는 지구의 나이를 알 수 없는 세 번째 이유는 너무 많은 가정이 과학적 해석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여섯 가지를 언급하겠다.1.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그루뎀은 빛의 단방향 속도가 (불필요한) 왕복 속도와 같으며, (성숙한 우주와 대조적으로) 우주는 크기 없이 시작되었고, 또한 우주의 냉각 및 팽창 속도가 지난 수십억 년 동안 일정하게 유지되었다고 가정한다 (우리가 알 수 없고 또한 많은 물리학자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부분이다).2. 움직임(travel)은 시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빛의 왕복 속도만 측정할 수 있다(예: 오프 미러 = 186,000mi/sec 또는 300,000km/sec). 그루뎀은 빛의 속도가 모든 방향에서 일정하다고 가정하지만(등방성), 빛의 단방향 속도는 사실상 얼마든지 순간적일 수 있다(비등방성). 이것이 창세기 1:14-15이 제안하는 것이다. 3. 극지 빙하의 나이와 형성은 코어에서 예상되는 연간 층 압축 두께를 결정하며, 바로 그 점은 나이를 계산하기 위해 산소 동위원소의 주기를 측정하도록 한다. 만약에 홍수 후 단일 빙하기 어떤 주간에 있었던 폭풍우가 얼음덩어리를 빠르게 형성했다면, 연간 두께는 더 커질 것이며 (아무리 압력이 강하다고 해도 두꺼워졌던 만큼 다시 얇아지지는 않는다),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단일연도에 닥친 여러 폭풍 주기를 마치 폭풍우 하나가 일 년을 의미하는 식으로 잘못 취급했을 것이다. 4. 오래된 호수 퇴적물의 연대 측정은 패턴과 비율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홍수, 허리케인 및 화산 폭발과 같은 재앙은 움직이는 점토 또는 슬러리(slurries)를 생성하며 그 결과, 연간 계절 퇴적물(varves라고 함)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폭풍 또는 홍수 퇴적물(rhythmites라고 함)을 만들어낸다. 또한 바브 계산(varve count), 나이테 계산(tree-ring count), 그리고 방사성탄소-14 연대는 상호 보정을 위해서 사용되어야지, 각각의 결과를 강화하는 목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5. 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은 지구 역사에서 상대적 형성 순서를 확립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루뎀은 우리가 이미 시작 조건(예: 오로지 우라늄[=모 동위원소]만 있고 납[=딸 동위원소]이 없음)을 알고 있으며 오염이나 침출이 암석의 구성을 변화시키지 않았다고 가정한다(그러나 이것은 독립적인 벤치마크 없이는 측정할 수 없다). 또한 그는 붕괴 속도가 일정하게 유지되었으며, 붕괴를 가속화할 수 있는 그 어떤 열이나 압력의 변화(즉, 재앙)가 주는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가정한다. 6. 판 구조론은 대륙이 더이상 합쳐지지 않는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지만(창 1:9-10), 그루뎀은 대륙의 분리 속도가 과거에도 오늘날과 같이 항상 점진적이었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급속 분리를 일으켰다고 보는 재난 모델(catastrophe model)도 얼마든지 데이터와 일치한다. 더불어서 재난 모델은 왜 대홍수 이후에 판 이동이 급격히 느려졌는지, 또한 해양 퇴적물의 압축 부족과 해양 지각의 불규칙한 자기 극성 (혼돈스러운 바닷물과의 접촉으로 인한 불균일한 방식으로 일어난 급속 냉각을 암시)까지도 설명한다. 결론하나님은 말씀과 세상이라는 두 개의 “책”을 기록하셨다. 전자의 무오하고 오류 없는 본질(nature)이야말로 항상 말씀이 후자, 세상을 읽는 데에 지침이 되어야 함을 요구한다. 그루뎀은 오로지 과학만으로 지구의 나이를 정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너무 많은 가정을 하며, 대부분은 하나님의 강력한 통제와 홍수 재앙에 대한 성경의 증언에 반대되는 동일과정설 사고에 근거한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태초에 임재하셨고, 그의 말씀은 젊은 지구를 강하게 가리킨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관찰 가능한 데이터에 대한 우리의 과학적 해석을 인도해야 한다. 원제: A Response to Old-Earth Argumen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창조론
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유신진화론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Wayne Grudem
2022-08-15
요약: 창세기가 지구의 나이를 가르치기 위해 기록된 것이 아니므로, 젊은 지구 또는 오래된 지구 관점 중 무엇이 맞든지 창세기는 진리이다. 그러나 천문학과 다양한 지구 과학의 증거에 따르면 우주와 지구의 나이는 수십억 년이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입장이 없는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오래전에 창조되었다(an old creation)라는 관점에 맞게 창세기 1장을 해석해야 한다.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의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 나는 하나님이 지구의 나이를 알려주려고 성경을 쓰셨다고 믿지 않는다. 이어지는 자료를 통해서, 나는 성경에 관해서 내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한 요인을 설명하고 지구의 나이에 대한 몇 가지 과학적 징후를 요약하겠다.[1]날 또는 하루라는 단어의 뜻창세기 1장에 사용된 날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욤(yom)에서 번역되었는데, 이는 종종 24시간의 하루를 의미하지만, 또 어떤 문맥에서는 분명하게 길이가 지정되지 않은 기간을 나타내기도 한다. 바로 그렇게 쓰인 욤의 사용을 우리는 천지창조가 시작하고 바로 이어지는 창세기 2:4의 문맥에서 볼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여기서 날은 24시간 하루가 아니라 엿새 동안 있었던 창조 작업 전체를 의미한다. 일정 기간을 의미하는 날이라는 단어의 다른 예로는 시편 20:1(“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잠언 24:10(“네가 만일 환난 날에 낙담하면 네 힘이 미약함을 보임이니라”), 잠언 25:13(“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전도서 7:1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등이 있다.창세기 1장에서 날이라는 단어가 처음 사용된 경우에도 24시간의 하루가 아니라 단순히 낮 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창 1:5).과학에 비춰본 창세기 1장무엇보다 창세기 1장의 문맥을 보면 본문은 결코 날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딱 한 가지로 고정하지 않는다. 다양한 학문에서 도출되고 또 유사한 답변을 제공하는 과학적 데이터가 지구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면, 오랜 기간이라는 의미로 날이라는 이 단어를 해석하는 것은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문맥 안에서 볼 때 가장 좋은 해석일 수 있다. 오래된 지구라는 생각을 고수하는 사람들에게, 지금 현실은 지구가 자전하고 태양 주위를 돈다고 처음 주장했던 그리스도인이 처한 상황과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해가 뜨거나 진다는, 전도서 1:5에 대한 설명이 필요했다. “해는 뜨고 해는 지되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시 104:22; 약 1:11 및 기타 구절을 참조하라). 그렇다고 그들이 그 구절 때문에 행여 독자들이 오해할까 봐 태양 중심의 태양계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할 필요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그 구절에 대한 가장 자연스럽고 쉬운 해석이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단지 태양이 움직인다고 표현한 전도서의 구절은 관찰자의 관점에서 서술한 것이라고 이해했을 뿐이다. 그렇기에 과학적 관찰을 근거로 할 때, 태양 중심의 태양계가 해당 텍스트를 해석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반대에 대답하기창세기 1장의 각 날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와 같은 표현으로 끝난다. 그럼 이런 표현 때문에 꼭 각각의 날이 24시간으로 되어 있었다는 결론내려야 할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이 구절은 단지 첫 번째 창조의 “날”(즉, 아주 오랜 기간)이 끝나고 다음 창조의 “날”이 시작했음을 알리는 저자의 말투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추가로, 예민한 독자라면 처음 세 번 창조의 “날”에는 땅에 비치는 빛이 없기 때문에 아예 저녁과 아침으로 표현할 수 없었다는 점을 인식할 것이다. 왜냐하면 태양은 넷째 날까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창 1:14-19). 그러므로 창세기 1장 속 “저녁과 아침”이라는 언급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보통의 저녁과 아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요일의 하루하루가 일일히 매겨지는 게 정말 중요할까? 젊은 지구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히브리어 욤이 다른 곳에서는 더 긴 기간을 가리킬 수 있겠지만, 최소한 창세기 1장에서만큼은 하루, 이틀이라는 숫자가 붙어 있기 때문에 다르다고 말한다. 욤에 숫자가 붙는 경우, 그건 24시간, 하루를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본다. 그건 마치 “하루 24시간”이라는 원하는 답을 얻기 위해서 미리 필터를 붙이고 숫자가 붙은 히브리어 욤에게 그 의미를 강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날”은 긴 기간이 아니라 24시간이다. 단지 창조 이야기는 어쩌다 보니 날이라는 단어에 더 긴 기간이 적용된 유일한 맥락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기 1장의 날이 24시간이어야 한다고 보는 해석자들에게는 또 다른 선택지가 있다. 각각의 창조가 일어난 날은 24시간이고, 그 사이에 수백만 년이 있는 경우이다. 나는 이런 해석이 창세기 1장을 오래된 지구와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또 하나의 가능한 방법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족보 사이의 갭1650년대에 저명한 역사가이자 성서학자인 아일랜드 대주교 제임스 어셔(James Ussher)는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족보를 근거로 창세기 1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 날짜가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이라고 주장했다. 이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그는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뿐 아니라 성경 외 모든 역사적 자료를 사용했다고 한다.그러나 하나님이 성경에 족보를 넣은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창조 시점이 언제인지 계산하도록 하기 위해서인지는 의문이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의도였다면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쓰도록 했을 것이다. “아담부터 아브라함까지 2004년이 흘렀다”(또는 비슷한 시간). 그러나 창세기 5장이나 창세기 11장에 그런 요약문은 없다.반면에 창세기 5장과 11장 속 족보에는 공백이 담겼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의 족보는 요람이 “웃시야를 낳고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마 1:8-9)라고 알려준다. 그러나 역대상 3:10-12을 보면(본문에는 웃시야 대신 다른 이름 아사랴를 사용했다), 마태는 요아스, 아마샤, 그리고 아사랴까지 세 세대를 생략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창세기 5장에서 “셋이 105세에 에노스를 낳았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셋이 꼭 에노스를 아들로 낳았다는 게 아니라 한참 아래의 후손이 에노스였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따라서 창세기 5:6-8에 나오는 에노스는 사실 셋 이후 여러 세대 이후에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족보가 드러내는 이 사람, 저 사람의 많은 연수는 인류의 나이를 알도록 하는 연대기 제공이 목적이 아니라, 많은 나이에도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당시 사람의 건강과 장수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당시 사람은 백 살이 넘어서도 아이를 낳았고, 912세까지 살 수도 있었다.영원히 사는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벧후 3:8). 그런 하나님은 아마도 138억 년이라는 시간, 아주 먼 별들의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데 필요한 그 시간마저도 그리 길지 않은 적절한 수준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 시간이 흐르는 와중에 점차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기뻐했을 것이다. 우주의 나이와 크기에 대해서 점점 더 알아갈수록, 우리는 이 거대한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의 위대하심에 경탄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영원한 존재는 138억 년보다 훨씬 더 길고 위대하다.오래된 지구를 지지하는 과학적 증거천문학과 지구과학의 다양한 관측 (또는 과학적) 증거는 지구와 우주가 모두 극도로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우주는 138억 년, 지구는 45억 년).[2]우주의 팽창 비율천문학자들은 지구에서 다양한 별과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할 수 있다. 그들은 또한 별들이 우리에게서 멀어지는 속도까지도 측정한다. 이 두 값을 사용하여 시간을 역순으로 돌리는 게 가능하고, 자연스럽게 우주가 얼마나 오랜 기간 팽창해왔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우주의 팽창을 측정하는 세 가지 방법을 요약한 휴 로스(Hugh Ross)는 이렇게 말했다. 우주의 평균 나이는 “137억 년에서 플러스마이너스 9,600만 년”이고, “세 가지 독립적인 방법이 보여주는 결과의 일관성은 매우 놀랍다.”[3]먼 과거로부터 도달하는 별빛 많은 별들이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의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걸린다. 이 사실은 빛의 속도에 대한 간략한 논의가 필요한 증거를 제공한다. 빛의 속도(진공 상태)는 초당 약 186,000마일이고 태양은 지구에서 약 92,960,000마일 떨어져 있다. 즉 태양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에는 8분 이상이 걸린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일출이나 일몰은 바로 그 순간의 태양이 아니라 8분 전 태양이다. 이 원리는 다른 별의 빛에도 적용된다. 망원경으로 알파 센타우리 자리(태양 다음으로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별)를 볼 때, 우리는 4.4광년 떨어진 별을 보는 것이다. 즉, 그 별에서 시작한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4.4년이 걸렸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가 보는 건 4.4년 전에 존재했던 알파 센타우리이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별 중 일부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빛이 우리에게 도달하는 데 무려 13,800,000,000년이 걸리기도 한다. 이런 사실은 우주가 아주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젊은 지구 지지자라면 아담과 하와가 창조되고 첫날 밤에 바로 수천 개의 별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이미 존재하는 광선으로 우주를 창조했다고 대답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이다. 동물도 다 성장한 동물로 창조된 것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도 갓난 아이가 아니라 “성인으로” 창조했다. 그러나 이런 제안에는 문제가 있다. 첫째, 별의 수명이 다해서 핵연료가 고갈될 때 형성되는 백색왜성이라는 게 있다.[4] “별이 모든 핵연료를 다 태워 백색왜성이 되는 데에는 최소한 수백만 년이 걸린다.”[5] 따라서 우주의 나이가 겨우 10,000년이고, 하나님이 광선으로 별을 창조했다면, 왜 수십억 년 전에 죽은 별에서 나오는 물질처럼 보이는 착시 현상을 만드었을까? 애초에 그렇게 오래된 별은 존재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천문학자들이 우주에서 관찰하는 다른 사건과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초신성은 거대하고 극도로 밝은 폭발이며, 별이 거의 타버릴 때 발생하는 그 현상은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지속된다. 그러나 로스(Ross)에 따르면, 젊은 지구 옹호자는, “천문학자들이 163,000광년 떨어진 대마젤란운에서 발생했다는 말하는 초신성 폭발이 163,000년 전에 발생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한다고 한다. 사실, 젊은 지구의 견해에 따르면, 10,000년 전에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기, 우주에서는 그 어떤 일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천문학자들이 폭발한 후 빠르게 사라지는 초신성에 관해서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수십만 년 전에 초신성이 발생했다고 (잘못) 생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우주 공간에 배치된 착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속이는 것이 말이 되는가? 거짓말은 하나님의 성품에 어긋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6]일부 젊은 지구 옹호자 중에는 이렇게 대답하는 이도 있다. 빛의 속도가 바뀌었고, 아마도 수천 년 전에는 빛이 훨씬 더 빠르게 이동했을 것이다라고. 그러나 빛의 속도는 물리학에서 가장 보편적인 상수 중 하나이며, 빛의 속도가 크게 달랐을 수 있다고 추측하는 것(예를 들어, 백만 배 더 빨랐다고)이야말로 젊은 지구라는 관점 전체를 의심하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얼음층과학자들은 남극 중앙부와 그린란드 북부의 얼음층 깊숙이 구멍을 뚫었다. 그들은 “남극 대륙에서 3개의 얼음 코어가 … 각각 과거 800,000년, 720,000년 및 420,000년에 대한 연속적인 기록을 제공한다”라고 말한다.[7] 젊은 지구 옹호자는 일 년 내에 얼마든지 여러 층이 쌓일 수 있다고 대답하겠지만, 로스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층(layers) 내에는 이미 알려진 화산 폭발의 먼지 흔적이 있다.” 그것은 서기 79년에 발생한 베수비오 화산 폭발을 비롯해서 472, 512, 968, 1037, 1139, 1631, 그리고 1944년의 분화를 포함한다. “연구원들은 이러한 분출 사건의 먼지 흔적을 포함하고 있는 층 사이를 일일이 세어서 각 층이 실제로 일 년에 해당한다는 것을 확인했다.”[8]호수 바닥의 퇴적층지질학자인 그레그 데이비슨(Gregg Davidson)과 켄 월게무스(Ken Wolgemuth)는 “[일본의] 스이게츠 호수에서 미세하게 층을 이룬 퇴적물이 50,00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매년 퇴적되었다”는 광범위한 연구 문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또한 이 퇴적층 중 가장 최근의 층은 14,000년 이상 된 나이테와 밀접하게 일치하며, 탄소-14 붕괴율 (퇴적층의 다양한 깊이에서 채취한 다양한 샘플로 측정함)은 “변하지 않고 일정하게 유지되었다”라고 보고했다.[9]암석의 방사성 연대 측정화성암은 용암이나 마그마(지하에서 발견되는 매우 뜨거운 용융 물질)가 냉각되어 액체에서 고체로 변할 때 만들어진다. 화성암 중 일부는 암석이 응고되자마자 붕괴하기 시작하는 방사성 물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붕괴하면 다른 원소로 변한다. 예를 들어, 우라늄-238은 붕괴하어 납-206으로 변한다. 우라늄-235는 납-207이 되고, 토륨-232는 납-208이 된다.[10] 우리는 모든 유형의 방사성 물질에 대해 붕괴 속도를 측정할 수 있다. 그 정보를 가지고 지질학자는 암석에 포함된 다양한 종류의 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의 양 및 각각의 종류에 포함된 납 동위원소의 양을 측정할 수 있고, 동시에 암석의 나이를 여섯 가지 독립적인 방법으로 측정할 수 있다.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는 각각 다른 속도로 붕괴하기 때문에, 만약에 한 암석 표본에 세 가지 우라늄과 토륨 동위원소가 모두 있고, 또한 생성된 납의 세 가지 동위원소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면, 각 종류의 우라늄, 토륨, 그리고 납의 비율은 암석의 나이에 대한 여섯 가지 독립적인 측정이 가능하도록 한다. 로스는 이렇게 말한다. “특정 납에 대한 서로 다른 방사 측정 요소의 비율과 그것과 다른 납의 측정 비율은 일관되고 정확한 날짜를 제공한다. 모두 결과가 지구의 나이가 수십억 년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11]대륙 분리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해안 근처의 화석을 함유한 암석 지대는 분명히 이전에 이 두 지역이 붙어있다가 대륙 이동에 의해 점차적으로 멀어지면서 분리되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지구본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북아메리카 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을 동쪽으로 이동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대륙을 서쪽으로 움직여서 약간의 회전만 주면 양 대륙붕의 각이 서로 맞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서양 아래에는 중부 대서양 능선이라고 하는 큰 산등성이가 있는데, 이 산등성이는 이 두 대륙 사이 중간 선의 곡선 패턴을 따른다. 이 모든 것이 판 구조론, 즉 대륙이 놓여 있는 판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과학적 연구의 증거이다. 대륙이 얼마나 오래 전에 분리되었는지를 결정하는 두 가지 별도의 방법이 있다. 대륙의 가장자리에 있는 대서양 지각에서 표본을 채취하면, “대서양 지각의 최대 연대는 약 1억 8,000만 년”임을 알 수 있다.[12] 이는 이 대륙이 약 1억 8,000만 년 전에 분리되어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갈라졌음을 시사한다. 북미 해안선의 한 지점에서 아프리카 해안선의 해당 지점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면 거리는 3,480마일이다. 3,480마일을 180,000,000년으로 나누면 “연간 평균 1.2인치가 나온다.”[13] 여러 지점에서 반복되는 계산에 따라 수치는 연간 1.1인치에서 1.7인치로 아주 조금씩만 다르다. 그럼 이 대륙들이 지금도 같은 속도로 멀어지고 있을까? 장기간의 정밀 위성 관찰 결과, “북미와 북아프리카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측정은 현재 연간 약 1인치의 속도로 떨어지고 있고, 그것은 방사 측정으로 확인된 속도와 현저하게 일치하는 값이다.”[14] 이것은 대륙이180,000,000년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러나 지구의 나이가 만 년 미만이라면, 그건 불가능한 소리가 아닌가? 결론: 오래된 지구나는 젊은 지구 옹호자들이 내가 지금까지 제시한 증거에 대한 나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빛의 속도가 크게 달랐을 수도 있고, 호수의 퇴적물 퇴적 속도가 크게 다를 수도 있으며, 또한 지구의 지각판의 이동 속도가 크게 다를 수도 있다고. 더불어 아마도 암석에서 방사성 원소의 붕괴 속도도 현저하게 다르다고 주장할 것이다. 결국 이런 주장은 내 귀에 이렇게 들릴 뿐이다. “팩트가 다를 수만 있다면, 모든 팩트는 결국 내 입장을 지지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은 사실 모든 팩트가 자신들의 입장을 뒷받침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지 성경적 증거만을 근거로 하는 경우라면, 오래된 지구 또는 젊은 지구, 두 가지 중 어떤 것을 주장하더라도 전혀 이상할 것 없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우리에게 지구나 우주의 나이를 알려 주기 위해서 쓰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주]1. 오래된 지구를 주장하는 입장을 더 자세히 알고 싶으면 다음을 참조하라. Systematic Theology, 2nd ed.(Grand Rapids: Zondervan, 2020), 385-413. 2. 내가 이 글에서 사용한 자료의 대부분과 관련 문서는 기독교 천문학자 휴 로스(Hugh Ross)가 쓴 ‘A Matter of Days: Resolving a Creation Controversy, 2nd ed’의 2015년 판(Covina, CA: RTB Press, 2015)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스는 그의 주장에 대해서 젊은 지구를 주장하는 이들과 반복적이고 구체적으로 토론하고 있다. 3. Ross, A Matter of Days, 147, 150. 4. “White dwarfs are the final state of all stars possessing less than enough mass to become either black holes or neutron stars”(Ross, A Matter of Days, 156). 5. Ross, A Matter of Days, 156. 6. ‘창세기에 응답하기’(Answers in Genesis) 사역이 비록 젊은 지구를 지지하지만, 하나님이 별들과 지구를 포함해서 단지 제자리에 있는 광선을 바탕으로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생각을 거부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쁘다. see Jason Lisle, “Does Distant Starlight Prove the Universe Is Old?” December 13, 2007, https://answersingenesis.org/astronomy/starlight/does-distant-starlight-prove-the-universe-is-old/. 7. Ross, A Matter of Days, 190. 8. Ross, A Matter of Days, 190. 9. Gregg Davidson and Ken Wolgemuth, “Testing and Verifying Old Age Evidence: Lake Suigtsu, Varves, Tree Rings, and Carbon-14,” Perspectives on Science and Christian Faith 70, no. 2(June 2018): 75-89. 10. Ross, A Matter of Days, 187. 11. Ross, A Matter of Days, 187. 12. Roger Wiens, “So Just How Old Is That Rock?” in The Grand Canyon: Monument to an Ancient Earth, ed. Carrol Hill, Gregg Davidson, Tim Helble, and Wayne Ranney(Grand Rapids: Kregel, 2016), 94. 13. Wiens, “So Just How Old,” 94. 14. Wiens, “So Just How Old,” 94. 원제: Our Old Earth: Arguments For Billions of Yea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창조론
유신진화론
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by Jason DeRouchie
2022-08-14
요약: 아무리 오래된 지구 견해가 기독교 정통의 범위 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수백만 또는 수십억 년이 아니라 수천 년 이내에,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에 지구를 창조하셨다고 믿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창세기 1장은 문자적인 노동의 관점에서 창조를 묘사하고, 신약은 초기 인류 역사를 “태초”와 연관시키며, 창세기 5장과 11장의 족보에는 간격이 없으며, 인류는 성경에서 창조의 절정(the head of creation)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성경은 반복해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타락과 연결한다. 이러한 주장 중 그 어느 것도 결정적이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모든 근거가 모여서 젊은 창조(young creation)라는 주장을 더 설득력 있도록 만드는 사례를 제공한다. 지구는 얼마나 오래되었는가?우리는 웨인 그루뎀 교수와 제이슨 드루치 교수에게 각자 오래된 지구와 젊은 지구 관점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 다음 서로 응답하도록 요청했다. · 젊은 지구_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_제이슨 드루치 · 오래된 지구_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_웨인 그루뎀 ·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웨인 그루뎀 ·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_제이슨 드루치 지구의 나이라는 논의에 걸린 문제는 다름 아니라 과연 우리가 과학적 데이터를 바르게(faithful) 해석할 수 있을 정도로 제대로 된(faithful) 성경 본문 주석을 하고 있는가 여부이다. 태초에는 하나님 외에 아무도 없었고, 성경은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기에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 답하는 데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 따라서 그 어떤 주제라도 관계없이 성경의 가르침은 창조된 영역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평가하는 지침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는, 거기에 걸맞은 무게를 가져야만 한다. 분명히 하자.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의 역할,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 그리고 첫 부모로서의 아담과 하와의 역사성은 기독교 신앙에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다. 더욱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진화론적 창조론(즉, 유신론적 진화론)은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많은 것이 걸려 있는 건 사실이지만 지구의 나이가 반드시 그리스도인을 분열시킬 정도로 중심 교리는 아니다. 보수적 그리스도인은 (유아세례 문제 또는 다양한 천년설과 유사하게) 젊은 지구 창조론과 오래된 지구 창조론 모두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내가 젊은 지구 창조론자인 이유는 거기에 관한 압도적인 성경의 데이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입장을 반대하는 모두를 단숨에 굴복시키는 마법과 같은 성경적 또는 과학적 논증은 내게 없다. 따라서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는 내가 제시하는 각각의 주장에 대해서 얼마든지 정당하고 사려 깊은 답변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제시하는 주장은 통합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그럼에도 과연 내가 지금 제시하는 주장 하나하나를 과연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의문을 가진다. 첫째 주간의 인류논증 1: 창세기 1:1-2:3은 인류의 창조를 창조의 첫 주 안에 배치한다. 성경의 서문을 가장 자연스럽게 읽을 때 우리는 젊은 지구를 받아들이게 된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창 1:5, 8, 13, 19, 23, 31)라는 후렴구에 쓰이는 히브리어 ‘욤’(날을 의미한다)의 사용, 빛과 어둠 및 낮과 밤에 대한 언급, 그리고 강력한 일주일이라는 구조는 비록 나흘째까지 태양이 창조되지 않았더라도(창 1:14-19), 일관되게 이 계시의 전달자가 하루를 달력상 24시간에 해당하는 날로 묘사하고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여기에서 인류는 하나님의 첫 번째 주간의 엿새째 날에 창조된 것으로 묘사된다. 날-시대 이론(day-age theory, 하나님이 무에서부터 무한한 기간에 걸쳐서 연대기적으로 모든 물리적인 것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이런 문맥에 맞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갭 이론(gap theory, 창세기 1:1과 1:2 사이에 매우 긴 간격이 있다는 주장)은 히브리어 본문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창조에 대한 이후의 묵상(예: 시편 104편)은 결코 “날”에 대해 언급하지 않지만, 여호와께서 창조 주간의 패턴(출 20:11) 위에 이스라엘의 6+1이라는 삶의 형태를 세웠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이미 오래전부터 창조 주간이 6+1의 패턴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출 16:23-29 참조; 창 7:4, 10; 8:10, 12과 비교하라), 결코 그것을 비유적이거나 유비적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사건으로 보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안식일을 지키라는 이스라엘의 부르심은 결코 유비적으로 읽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원래 일하셨던 경험에 근거한다(출 20:10-11).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태초에논증 2: 신약은 창세기 2-4장의 역사를 세상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시킨다. 오래된 지구 모델은 인류의 창조가 수백만 년 또는 수십억 년 동안 진행되었기에 “태초”라는 특정 순간으로부터는 분리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창세기 1:1의 “태초”는 성경이 그 이후 묘사하는 모든 시간보다 훨씬 더 긴 기간 동안 펼쳐져 있을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전자는 창세기 1:1의 “태초”와 1:26-28의 인류의 창조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는 것이고, 후자는 “태초”라는 용어를 이상하게 사용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니까 이미 9이닝이 시작한 야구 경기를 보면서 여전히 경기가 막 “시작”했다고 말하는 꼴이 된다. 신약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결혼제도를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결하시는 것을 본다(막 10:6; cf. 마 19:4, 8; 창 2:21-25 참조). 하와를 속이는 사탄의 살인에 가까운 행위(단지 사탄의 성향뿐만이 아니라)가 창조의 시작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예수님은 선언하셨다(요 8:44). 예수님은 사탄의 살인적이고 죄에 넘치는 행동을 여자의 후손이 뱀 그리고 그의 후손과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라는 약속과 연결하셨다(요일 3:8; 참조, 창 3:1-6, 15). 또한 예수님은 인간이 겪은 첫 번째 환난이 창조의 시작 시점에 있는 것으로 보셨다(아마도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을 언급하신 것 같다)(막 13:19; 마 24:21; 창 4:8 참조). 그게 다가 아니다. 예수님은 아벨의 순교를 세상이 만들어지던 시점 근처에 두셨다(눅 11:49-50; 참조 마 23:35; 창 4:8 참조).히브리서 기자는 또한 “세상의 기초”를 여섯째 날의 결론으로 간주하고, 인류의 반역 (그래서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심)을 이 시기 바로 옆에 두었다. 그리고 이 기초를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실현된 “시대의 끝”과 대조했다(히 4:3-4; 9:25-26).직선 족보논증 3: 창세기 5장과 11장에 나오는 직선(linear) 족보는 최근의 인류를 가리킨다. 성경 속 족보 중 일부는 분명히 선택적이지만(예: 마 1:1; 1:2-17),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족보는 너무 구체적이어서 선택적 읽기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 족보는 읽는 이로 하여금 인류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존재했음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창세기 5장과 11장에 있는 직선 족보는 나이와 관련한 세부 사항 때문에 특히 성경 전체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갖는다(예: 창 5:3-11 참조). 비록 “아들”이 때때로 손자나 증손자를 의미한다고 할지라도(그런 묘사는 종종 성경에 있다), 시대의 특수성은 긴 시간 차이 또는 간격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더욱이, 겉보기에 “아버지-아들/손자/증손자”로 보이는 많은 관계가 다른 본문에서 실제로 그런 관계임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아담과 셋(창 4:25), 노아와 함, 셈, 그리고 야벳(6: 10), 또한 아브라함과 데라(11:31)가 그렇다.이 족보에 특정한 시대가 담겨있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창세기가 가진 메시아적 그리고 선교학적 목적 때문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아담에서 노아까지, 셈에서 데라까지,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대에 걸쳐 소망의 가계를 보존하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조금은 무리한 시도를 한 것 같다. 각각 지정된 연도는 모두 다 앞으로 오실 후손을 약속하는 창세기 3:15에 담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강조한다. 따라서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생략하는 것은 명백하게 저자의 집필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다. 족보에 담긴 나이를 다 더하면 인류의 나이가 약 6,000세임을 알 수 있다.창조의 클라이맥스논증 4: 첫 창조의 머리로서 아담에게 주어진 큰 역할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자 창조의 클라이맥스로서 인류의 위치는 모두 다 젊은 지구를 지지한다. 하나님이 수백만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감독자 없이 피조물을 방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창세기 1:1에서 2:3까지는 첫 번째 모든 창조의 주요 “통치자”를 인류와 연관시킨다. 빛은 낮과 밤을 구분하고 지구의 달력을 설정하지만(창 1:14), 동시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징표”로도 사용된다(창 15:5, 렘 33:22). 인간은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 1:28)는 사명을 받았다.인간은 창조의 절정이고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유일한 대리자이다. 그중 일부는 다음과 같은 존재이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4-6). 유독 여섯째 날에만 정관사 “the”가 쓰였다. (“a first day, a second day, a third day … the sixth day”). 본문에서 여섯째 날에는 가장 문학적이고 긴 연설이 들어있다. 여섯째 날이 끝났을 때만 하나님은 창조를 “심히 좋았더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여섯째 날에만 하나님은 창조물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선언하심과 동시에 인류에게 세상을 감독하게 하셨다. 성경은 첫 사람 아담을 첫 창조물에 대한 언약적 머리로 묘사한다(창 2:15; 롬 5:18-19; 고전 15:45).또한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감독, 공급, 그리고 보호(시 104:14, 21, 24, 27; 145:14-16; 147:9; 마 6:26; 눅 12:24)는 인류를 통해서 드러난다(창 1:28; 2:15; 시 8:6-8[7-9]).동물의 고통과 죽음논증 5: 성경은 일반적으로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고통과 죽음을 타락으로 인해 받은 저주의 일부로 묘사한다. 따라서 인류의 타락 전에도 이미 수백만 년 동안 동물이 죽고 고통을 겪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을 저주하셨다. 따라서 육지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은 인류의 타락으로 인한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오래된 지구 모델의 요구와는 달리 타락 전에 동물의 고통과 죽음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에덴동산 인류의 반역이 가져다준 결과는 육체적이고 영적인 인간의 죽음이었다(창 2:17; 3:16-19; 롬 5:12). 그러나 동산에서 범한 인류의 죄는 인류뿐 아니라 피조물 전체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하나님은 동물까지 저주하셨다(창 3:14). 하나님은 땅도 저주하셨다(창 3:17-19). 하나님은 온 세상을 썩어짐 속에서 종노릇하도록 두셨다(롬 8:20-21).성경은 줄곧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그리고 동물의 생명을 축복과 연관시킨다. 이 두 가지 현실 다 동물과 새의 죽음과 고통이 타락으로 인해 발생했으며, 그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첫째, 뱀이 들에 있는 모든 가축과 짐승보다 “더 많이/이상”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은 모든 육지 동물이 실제로 인간의 타락에 의해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창 3:14; 참조, 3:1).둘째, 땅의 저주(창 3:17)는 노아 탄생(5:29)의 배경을 형성하고 홍수라는 심판 저주는 홍수 후에 인간 외 육지 생물을 보존하기 위해 구별되어 방주에 들어간 동물을 제외하고(6:19-20; 7:3), 모든 짐승과 새와 기는 것의 죽음을 포함한다 (7:21-23).셋째, 이집트에 내린 열 가지 재앙 가운데 여덟 가지 재앙은 동물이 인간에게 해가 되거나 또는 가축의 몰살 등으로 인해 인간의 생존에 동물이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출 8-12장).넷째, 유월절 어린양의 형벌하는 대속의 피만이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장자의 생명을 보존하였다(출 12:12-13).다섯째, 모세에 의한 (구약) 언약의 축복 아래, 인류는 짐승의 포식으로부터 안전하게 살 것이며(레 26:6), 가축 떼가 번성하고 또 번성할 것이다(신 7:13-14, 28:4, 11). 이와 대조적으로, 저주 아래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두려워하고(레 26:22), 가축 떼가 쇠약해질 것이며(신 28:18), 죽은 인육은 짐승과 새의 음식이 될 것이다(신 28:26). 이러한 현실은 모든 선지자에 의해서 확증되었다(예: 렘 7:20; 12:4, 학 1:9-11, 말 3:9-12; 4:6).여섯째, 심판의 전쟁이라는 맥락에서 이스라엘을 부른 여호와는 동물을 포함하여 호흡하는 모든 것을 도살하도록 하셨다(신 13:15; 20:16; 삼상 15:3).일곱째, 전도서의 설교자는 동물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과 연관시키고(전 3:19-20), 두 죽음의 현실을 타락으로 인한 저주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연결한다. “다 흙으로 말미암았으므로 다 흙으로 돌아가나니”(창 3:19-20 참조). 이런 연결은 동물과 인간의 죽음이 동시에 시작되었음을 강력하게 가리킨다. 오래된 지구 창조론자는 저주로 인해 동물 세계에서 실제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명확히 하려고 애를 쓴다. 왜냐하면 그들도 (수백만 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 인간의 타락이 없었는데도 동물이 죽고 고통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저주한 그 순간을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지적하고 있고, 일반적으로 동물의 죽음을 저주와 연관시킨다. 육식과 저주의 목적논증 6: 에덴의 회복으로서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제한하는 것은 모든 지상의 죽음이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암시한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육식은 저주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하기에,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을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하는 것은 에덴을 넘어서는 확대라기보다는 에덴의 회복을 보여줌과 동시에 지상에서의 모든 죽음이 다 타락 이후에 시작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지구는 젊다.성경은 모든 형태의 죄, 고통, 그리고 죽음을 오로지 타락하고만 명시적으로 연결한다(창 3:14-15; 롬 1:24, 26, 28; 8:18-23).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인간의 반역과 그 결과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인간 반역의 결과 속에는 암과 자동차 사고와 같은 자연적 악과 더불어 하나님에 대한 반역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도덕적 악을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악이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만물을 회복하고(행 3:21), 만물을 하나로 연합하고(엡 1:10), 만물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골 1:17), 사망과 눈물과 고통을 없애며(사 25:8; 계 21:4), 나아가서 모든 저주와 부정한 것을 근절하기 위해서(계 21:27; 22:3) 계획되었다고 가르친다.영원한 구속의 실재는 (타락 전) 에덴동산을 회복하는 것으로 그리고 첫 아담이 확보하지 못한 것을 완성함으로써, 태초의 에덴 그 너머로 확대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새 창조/재창조는 타락 전의 원래 창조와 유사한 요소를 포함할 것이다(겔 36:35; 사 51:3; 롬 8:20-21; 계 2:7; 22:1-5, 14, 19). 그러나 동시에 새 창조 속에는 구원을 주신 왕 되신 예수를 향한 경외심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받은 자들에게 꼭 필요한 반역 이전의 사실 몇 가지를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것 외에는, 과거의 악이나 저주가 주는 잠재적 영향은 전혀 없을 것이다(계 21:27; 22:3). 과거를 생각나게 하는 것의 예로는 죄에 대한 탄식(겔 36:31), 한때 사해 주변 습지에 있던 소금의 존재(47:11; 참조 창 13:10; 19:24-26), 단일 언어가 아닌 변형된 여러 언어(습 3:9; 계 5:9; 7:9; 참조 창 11:6-9), 그리고 시각적으로 희생적이며 정복하는 어린양으로 그리스도를 식별하는 것(계 5:5-6, 12-13, 7:10, 14, 17:14, 19:9, 21:22-23, 22:1, 3) 등이다.이처럼 회복, 화해, 그리고 근절의 맥락에서 볼 때, 동물 사이에서 포식 활동이 중단되고 오로지 인간의 육식을 위해서만 동물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타락한 시대에 동물의 포식 활동은 가축과(삼상 17:34-35; 사 31:4; 암 3:12) 인간을 위협하지 않는 한(시 104:23; 신 7:22; 삿 14:5; 왕하 17:25), 하나님의 계시된 목적의 일부이다(시 104:21; 욥 38:39-41). 인류의 타락과 전 지구에 걸친 저주 이후에야 인간까지도 동물이 자행하는 약탈 행위의 표적이 되었고, 부분적으로 하나님은 동물이 인간을 두려워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람에게 육식을 허락하셨다(창 9:2-3; 참조 1:30). 이 저주받은 세상에서 육식은 인간으로 하여금 주권을 행사함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닮고 또 대표하라는 인류의 소명을 확인시킨다(1:26, 28; cf. 시 8:6-8[7-9]). 또한 저주를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을 증언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동산에서 인류를 추방한 초기부터 인간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했다(창 7:2-3, 8). 하나님은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한 이후, 오로지 정결한 동물만 먹도록 하셨다(레 20:25-26). 성경은 어떤 식으로든 동산의 뱀처럼 보이는 모든 동물을 부정한 것으로 취급한다. 그 이유는 교활하고 약탈적이며 살인적인 본능과(창 3:1-5, 2:17; 참조, 요 8:44, 10: 10), 또는 죽음 및 낭비와 연결된 먼지를 먹는 것이기 때문이다(창 3: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악한 자를 이겼기 때문에(엡 2:16; 골 2:15; cf. 눅 10:18; 요 12:31; 계 12:9), 이제 모든 음식이 깨끗해졌다(막 7:19; 행 10:10-15, 28; 롬 14:14, 20; 딤전 4:4). 십자가로 인해서 모든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증거가 된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 사역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복된 새 피조물과 새 언약은 짐승과 새와 기는 동물에까지 미침으로 전 세계가 안전해질 것이다(호 2:18; 사 35:9). 그리고 한때 포식자였던 동물(아마도 적대적인 국가의 상징)이 채식 동물이 되어 어린 양, 어린 왕과 함께 평화롭게 거주하므로 이제 그 어떤 피조물도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게 된다(사 11:6-9; 65:25; 참조 9:6-7). 그 완성의 날에 하나님은 모든 원수의 압제를 엎으시고 모든 인간의 질병과 고통과 사망을 폐하시고 저주를 끝낼 것이다(사 25; 65:17-25; 계 21:3-5, 22:3).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인간은 포식 동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동물이 다른 동물의 먹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그리스도가 타락으로 인해 잘못된 세상을 고친 새로운 세상의 일부이며, 타락 전 상태가 아니라 그보다 더 나아진 상태로 복귀하는가를 식별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 저주를 완전히 극복하셨다는 지속적인 증거로서, 인간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계속해서 동물을 먹을 것이다(예: 사 25:6, 8, 겔 47:9-10, 마 22:2-4; 눅 22:15-18, 29-30; 계 19:7, 9; 21:1, 4, 10; 참조 눅 24:41-43; 요 21:12-13).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후에야 인간에게 육식을 허락했고, 그것은 저주를 이기는 그리스도의 승리를 증언한다. 그렇기에 십자가에서 부정한 뱀을 물리침으로 예수님은 승리의 절정에 이르렀다. 영원한 상태에서 동물의 죽음이 단지 구속된 인류의 육식이라는 용도로만 제한되는 것은 동물의 죽음이 타락 이전에는 없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모든 사실은 젊은 지구를 의미한다. 결론: 젊은 지구성경은 지구가 젊다는 믿음을 뒷받침한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음을 통해서 확인한다. (1) 성경이 창조를 문자 그대로 일하는 주간으로 묘사하는 방식, (2) 신약이 인류의 초기 역사를 태초와 연결하는 방식, (3) 창세기의 직선 족보에 시간적 갭이 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 (4) 성경이 일관되게 인류를 지상 피조물의 머리로 묘사하는 방식, (5) 성경이 지속적으로 동물의 죽음과 고통을 저주와 연관시키고, 타락 이전에는 그런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 그리고 (6) 영원한 상태에서 인간의 육식이 예수님의 저주 극복 사역을 증언하는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원제: Our Young Earth: Arguments for thousands of year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진화론
창조론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은 골짜기에 빠진 우리를 어떻게 만나주시는가?
by Joe Rigney
2022-08-12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웜우드, 속지 말거라.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신참 악마인 조카 웜우드에게 보내는 여덟 번째 편지 끝에 있는 이 짧은 문장이, 내게는 인생을 바꾸는 문장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믿음을 굳건히 지켜주는 문장이라고는 할 수 있다. 이 사실을 내가 얼마나 자주 이 문장을 되새기고 있는지 최근에 알아차리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이 문장을 내가 쓴 나니아에 관한 책에서 두 번 인용했다. 또 C. S. 루이스에 대해 강연할 때마다 인용했다. 그중에는 전혀 계획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학생이나 교인과 상담할 때도 이 문장이 내 혀에서 맴돈다. 가장 중요한 건 심령이 건조해질 때면 이 문장을 사용해서 나 자신을 향해 설교한다는 사실이다. 기복의 법칙이 문장은 스크루테이프가 편지에서 웜우드에게 “기복의 법칙”(law of undulation)을 이야기하는 중에 나온다. 기복(undulation, 起伏)은 “파도 같은 리듬”을 표현하는 멋진 단어이다. 기복의 법칙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라는 인간 삶의 영구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스크루테이프는 인간을 양서류라면서 조롱하는데, 한 발은 (천사처럼) 영원한 세계에, 한 발은 (동물처럼) 물질의 세계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영적 존재로서 우리는 영원한 세계에 속하지만, 동물로서 우리는 유한한 시간 안에 살고 있다.영혼은 영원한 대상을 향할 수 있지만, 우리의 몸과 열정과 상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 결과가 바로 기복이다. “골짜기로 떨어졌다 꼭대기로 올라갔다 하며 끊임없이 후퇴했다 복귀”하는 것이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한때 풍요로운 감정과 활력에 넘치는 육체를 경험하는 시기를 맞는다고 해도 다시 건조함과 둔감함, 무감각과 빈곤의 시기를 만나기 마련인 것이다. 꼭대기와 골짜기스크루테이프는 하나님이 인간을 기복의 법칙에 복종시킨 이유를 설명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우주를 자신을 닮은 작은 복제품으로 채우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가 그분의 뜻에 자유로이 순응함에 따라, 당신의 형상을 지닌 우리 피조물의 삶이 하나님 속에 피조물로서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와 연합하는 동시에 그분과 구별되기를 원하신다. 골짜기, 특히 영적 골짜기는 바로 이런 더 큰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때때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하나님은 강하게 임재하심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고 우리가 생생하게 느끼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참으로 지혜롭게도 우리가 유혹을 더 쉽게 이길 수 있도록 능력을 주는 감정적인 감미로움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다. 그럴 때면 순종은 마치 살아 있는 샘에서 솟아오르는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기도는 호흡처럼 자연스러워진다. 우리 삶에서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가장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것이다. 이때가 바로 그리스도인 삶이 정점에 도달했을 때이다. 그러나 그다음에 계곡 또는 골짜기가 따라온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거두어버리신다. 실제로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적 경험, 또는 우리가 느끼는 현실로부터 하나님이 스스로를 감춘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게 함으로, 그분은 순종을 매우 자연스럽고 힘들지 않게 만드는 정서적 지원과 영적 동기를 제거한다. 그런 시점이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임재가 제공하는 감정적 풍요와 즐거움 없이도 의무를 수행하라고 하신다. (물론 그렇다고 그분이 항상 주시는 은혜까지 거두신다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더 온전하게 부합하는 피조물로 성장하게 된다. 갈망 대 의도이런 현실이 우리를 믿음을 지키도록 하는 바로 이 문장으로 이끌고 간다.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을 때는 없다.” (김선형 옮김,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77)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 문장을 부분으로 나눠보자. 루이스는 여기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싶어 하는 갈망과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의도”를 구분한다. 이 구별은 기복의 법칙에 의해 만들어진다. 골짜기에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어렵게만 느껴진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감미로움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무겁고 부담스럽기만 하다. 이 시기에 우리는 자신과 분리된 느낌을 받는다. 아예 갈망을 느끼지 못하기도 한다. 오로지 우리 몸과 밀접하게 연결된 현실에 대해서 거의 본능적이고 직관적인 반응이라는 열정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차원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분명하게 느낄 수 없기에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열망을 느끼지 못한다. 도무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기에, 우리의 열정은 (즉, 무엇을 하고자 하는 마음은) 아예 자극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성과 의지라는 또 다른 차원이 있다. 바로 의도가 작동하는 단계이다. 이 수준은 열정의 수준보다 높거나 더 깊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깊고도 근본적인 헌신이 있다. 심지어 어떤 상황을 만나도 그 뜻을 따르겠다는 깊고 본질적이며 지속적인 열망이 깔려있다. 그런 순간에 우리는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처럼 된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뜻이 아니다”라는 건 “이것을 하고 싶지 않다” “나는 이 잔을 마시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수준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나이다” 외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여전히 당신의 뜻을 행할 생각이며, 이 의도는 내 마음 더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사라지지 않는 갈망을 반영합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원하는 것과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격루이스는 말콤에게 보내는 편지(Letter to Malcolm, Chiefly on Prayer)에서 기도에 관해 말하면서 이 구분을 다시 언급했다. 그는 기도가 성가시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기도는 분명 귀찮네. 기회만 생기면 얼씨구나 하고 기도를 빼먹게 되고…”(113). 기도에 대한 이런 의무감이 우리를 정말 거북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장미꽃을 피우기 싫어하는 장미나무를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혹은, 그런 장미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장미나무는 장미꽃을 피우고 싶어 해야 마땅하지 않나?”(홍종락 옮김, 개인기도, 1667, 167쪽)우리가 완전해진다면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기쁨이 될 것이라고 루이스는 말한다. 우리가 의무로 분류하는 다른 모든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의무라는 범주는 자발적인 열망과 꼭 해야 할 의무 사이에서 생기는 간격 때문에 생긴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 사이의 거리가 도덕적 노력이라는 전체 범주를 만든다. 그렇지만 루이스는 “언젠가 우리는 의무와 도덕을 초월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천사들은 당위라는 단어의 의미를 (체험적으로) 알지 못한다. 언젠가는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단지 의무를 넘어서는 수준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기도와 사랑이 “종달새의 노래처럼, 꽃의 향기처럼 자연스럽게”(169) 우리에게서 흘러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 우리는 의무의 영역에서, 곧 시도 때도 없이 열망과 해야 할 일이 나눠지는 곳에서 살아야만 한다. 루이스는 우리를 격려하는 방법을 알고 있다. “실제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드린 최악의 기도가 최선의 것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니까 경건의 느낌이 조금도 없고 전혀 내키지 않는데도 억지로 드리는 기도 말일세. 거의 의지만으로 이뤄지는 이런 기도들이 감정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오기 때문일세”(172). 그러나 여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하나님의 은혜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온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 다시 스크루테이프로 돌아가서, 우리의 열망을 자주 질식시키는 것은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모든 흔적이 실제로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런 것 같다”는 말이 중요하다. 그분의 모든 흔적은 사실상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모든 실재는 창조주를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다. 하늘이 지금도 영원히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시 19:1).그러나 골짜기에서 이런 실재를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은 줄어든다. 실제로 느끼는 현실은 종종 현실 그 자체와 일치하지 않는다. 그럴 때면 하나님이 마치 “사라진 것 같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은 매우 강력하다. 겉으로 드러나는 힘, 그러니까 ‘그런 것 같은’ 때의 그 힘을 우리는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단지 주기적인 (심지어 영구적인) 겉모습이 우리 행동을 지배하는 독재자로 만들어서도 안 된다. 루이스는 더 나은 방법을 소개한다. 골짜기 인정하기골짜기에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할까? 정직하게 시작하라. 골짜기에 있음을 인정하라. 그 골짜기의 이름을 정하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으면, 그렇다고 큰 소리로 말하라.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그렇게 말씀드리는 것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속 환자는 “왜 그가 버림받았는지를 묻는다.” 그는 마치 자신을 버린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향해, 관찰의 방향을 위로 바꾼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위대한 성경적 혈통을 따르고 있다.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시 10:1).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겉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부재에 직면하여 신실한 성도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왜?”라고 간청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오래?” 또 “여호와여, 일어나소서!”라고 외친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되풀이한다. 예수님은 시편 저자를 인용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시 22:1). 이것이 바로 골짜기에 빠졌을 때 바른 믿음의 모습이다. 절망과 혼란 속에서 터지는 외침은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이 느껴질 때 드러나는 믿음의 모습이다. 그래서 루이스는 메마른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야말로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주는 풍부한 소통의 지원 없이, 신앙의 정점이 주는 정서적 감미로움이 없음에도 드리는 기도는 우리의 가장 깊고 끈질긴 갈망과 헌신을 담고 있는 영혼의 깊은 곳, 즉 마음의 중심에서 나온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마지막 세 단어와 함께 이 문장이 주는 울림이 점점 더 커진다. “그런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열렬한 열망이 없고 하나님의 명백한 버림 앞에서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순종한다. 하나님의 부재는 결코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 감정의 빈곤과 건조함과 둔감함이 결코 불순종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실수하지 말라. 그것은 골짜기에 숨겨놓은 악마의 계략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리게 하려고 악마는 끊임없이 하나님이 부재한 것 같다고 느끼는 우리의 경험을 악용한다. 그렇기에 모든 합리적인 지원이 끊어진 상태에서도 오로지 예수님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인처럼 사탄의 대의를 더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도 없고 또 하나님의 부재가 주는 압박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을 붙들고 빛 가운데 행하려 한다면, 그런 상황에서 이 마귀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그게 다가 아니다. 그늘진 골짜기를 통과하면서 갈고 닦은 신실한 순종은 종종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는 길이 된다. 루이스의 영웅 조지 맥도날드(George MacDonald)는 “순종은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주인의 부재야말로 오히려 주인의 존재가 주는 기쁨으로 이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원제: Pray and Obey Anyway: How God Meets Us in the Valle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C.S.루이스
신앙의위기
순종
조지맥도날드
사탄의전략
스크루테이프의편지
개인기도
위무와순종
실낙원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Leland Ryken
2022-08-11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지난 반세기 동안 기독교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가 얼마나 변화했는지를 알려주는 작은 지표로, 1941년 프린스턴 대학의 한 영어 교수는 프린스턴 대학교 출판부에서 특별히 목사를 대상으로 한 책을 출판했다. 나는 교사와 작가로서 살았던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책을 참고했으며, 심지어는 ‘은총의 수단으로서의 시(Poetry as a Means of Grace)’라는 그 책의 제목을 필요한 경우에 변형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첫 장에서 저자는 목사 (암시적으로 모든 교회 지도자와 문학에 관심 있는 평신도를 위해) 정말로 적절한 조언을 하나 한다. 그리스도인도 한 사람의 저자를 확실하게 ‘우리의 저자’로 지정하고 문학을 연구하는 학자가 특정 저자를 파고들 듯 전문가를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조언을 저자뿐 아니라 평생에 걸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하나의 걸작을 선택할 가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확장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게 폭넓은 독서를 방해하는 건 아니다.)바로 이 조언을 염두에 두고 내가 평생 친구로 지낼 후보로 추천하는 책은 다름 아닌 실낙원(Paradise Lost)이다. 실낙원에 관한 논문을 썼고, 실낙원을 200번이나 가르쳤으며, 밀턴에 관한 기사와 책을 저술했고, 또한 밀턴 컨퍼런스(Milton conferences)에서 연설까지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밀턴의 이 걸작을 사랑한다. 그리고 이 사랑은 다른 이들과 나누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다. 목사에서 시인으로실낙원은 17세기 중반 존 밀턴(John Milton)이 쓴 책이다. 어린 시절부터 밀턴은 여러 정황상 목사가 될 운명이었다. 목사의 길을 예상한 밀턴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남아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생각지 못한 장애물이 그가 의도하던 성직자의 소명을 무산시켰다.신념에 따라 청교도가 된 밀턴은 영국국교회에서 목회 후보자로 환영받지 못했다. 밀턴 자신도 “고위 성직자들에 의해 쫓겨난 교회”에 관해 말한 적이 있는데, 다름 아니라 성공회를 지배하는 계층에 의해 교구 사역을 거부당했음을 의미한다. 밀턴 학자들은 밀턴이 정확하게 언제 목사를 포기했는지를 놓고 꽤 오랫동안 토론해 왔으며, 그에 관한 가장 좋은 결론은 그가 결코 목회적 소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자밀라 라레스(Jameela Lares)가 ‘밀턴과 설교 예술(Milton and Preaching Arts)’에서 효과적으로 주장했듯, 그는 단지 강대상에서 시로 장소를 변경했을 뿐이었다. 이 부분에 관한 한 산문에서 밀턴은 그리스도인 시인의 소명을 “강대상 직분 바로 옆에” 두었다.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까지는 강대상에서도 열매를 맺었다. 밀턴에 대한 많은 논평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제10장로교회에 가입한 어떤 사람의 간증에서 나온 것이다. 그는 “나는 존 밀턴에 의해 주님께 인도되었습니다”라는 말로 간증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사람의 회심에 중요한 역할을 한 도구가 바로 실락원이었다. 진짜 삶보다 더 차원 높은실낙원의 내용을 논의하기 전에 나는 C. S. 루이스가 그의 획기적인 책 실낙원 서문(A Preface to Paradise Lost)을 시작한 바로 그곳에서부터 시작할 필요성을 느낀다. 필요한 출발점은 시가 속한 장르 파악이다. 그리고 그 장르는 서사시이다. 서사시는 고대부터 17세기까지 가장 중요한 문학 장르로 여겨졌다. 당당하게 책의 위상을 가진 긴 시로서 서사시는 하나의 장엄한 활동이다. 서사시의 목적은 범위에 있었다. 문학 이론가 노스롭 프라이(Northop Frye)가 말한 대로, 서사시는 “만물의 이야기”였다(The Return of Eden, 3). 이와 유사하게, C. S. 루이스는 서사시는 한 시대가 말하고자 하는 모든 바를 요약한다고 주장했다(English Literature in the Sixteenth Century(Excluding Drama), 339).서사시는 하나의 이야기(사실상 그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들어있다)를 말하지만,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은 현대 독자가 익숙한 방식과 크게 다르다. 긴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서사시를 계승한 것은 소설이고, 소설을 특별히 새롭게 만든 점은 사실주의였다. 소설은 우리에게 일상에서 만나는 삶의 조각을 제공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서사시는 초자연적인 인물과 사건과 장소를 이야기하는 신화이다. 따라서 서사시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점은 그것이 사실주의에 기반한 게 아니라 신화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서사시 때문에 놀라는 또 다른 이유는 시라는 사실 때문이다. 보통 긴 허구의 이야기라면 산문으로 쓴다. 그러나 문학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는 18세기 중반에 들어서 책을 읽는 주된 대중으로 중산층이 등장하면서 생긴 최근의 변화이다. 서사시는 시와 이야기의 혼합체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 두 가지 측면에 다 동등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밀턴의 신학 이야기서사적 범위를 유지하면서 밀턴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범위는 영원한 과거에서 영원한 미래까지의 전체 역사이다. 첫 번째 주요 사건은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 그리고 사탄과 그 추종자들의 추방이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천지창조, 아담과 하와의 낙원 생활, 순결에서 타락, 타락한 인류 역사에 대한 조사, 타락이 초래한 파멸을 역전시키는 수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 그리고 종말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매우 친숙하게 들린다. 왜냐하면 이게 다 성경이 말하는 우주 역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내가 실낙원을 처음 가르쳤을 때, 한 학생이 나에게 청교도인 토마스 보스턴(Thomas Boston)이 쓴 ‘사중 상태의 인간 본성’(Human Nature in Its Fourfold State)이라는 책을 건넸다. 그러면서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보스턴의 책이 가진 연관성을 내가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인간 본성의 완전성과 타락,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하늘에서의 영광에 대하여 보스턴이 그리는 패러다임은 밀턴의 이야기를 구체화한다. 실락원이 “교리적이고 국가에 모범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 밀턴의 말은 유명하다. 실낙원을 읽을 때 우리는 즐거움뿐 아니라 교화를 받는다. 밀턴의 상상력으로 풀어낸 큰 주제들은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중심성과 주권, 우주와 인간의 영역 모두에서 발생하는 선과 악 사이의 큰 갈등, 선과 악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피조물의 운명, 인간이 하나님과 반드시 풀어야 할 문제들, 죄의 본질상 불순종의 본성을 가진 인간이 삶의 가장 큰 의무로서 수행해야 할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 그리고 죄에 찌들어 타락한 상태에 빠진 인간에 대한 해독제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이것들은 큰 주제이지만,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의 삶을 묘사한 것처럼, 선한 삶의 본질과 같은 소소한 주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와서 보라실낙원을 깊이 탐독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러 조언이 있다. 실낙원은 문학 이론가들이 소위 백과사전 형식(상부 구조 내 개별 단위를 모아놓은 형태)이라고 부르는 것이므로 꼭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서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또한 실낙원이 암시하는 풍부한 성경과 고전 신화의 내용 때문에 겁먹을 필요가 없다는 점도 강조하고 싶다. 그것들은 사실상 실락원을 처음 읽는 독자라면 굳이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글을 쓰는 나의 의도는 실락원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독자들이 실낙원과 깊은 만남을 갖도록 유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점은 실낙원은 아름다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세계라는 것이다. 밀턴의 서사시는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많은 신학적 아이디어를 다룬다. 그러나 문학적 동기는 말하기보다 보여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상적으로 논의하기보다는 구체화하고 구현하려고 한다. 신학자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미지를 만들고 또 이미지를 사용하는 피조물이다. … 그리고 우리는 마음속 이미지에 의해 인도되고 만들어진다”(The Responsible Self, 151).우리가 실낙원을 읽는 방법은 아이디어 모음집이 아니라 등장인물과 배경과 사건이 있는 이야기로, 또 보고 즐길 수 있는 이미지와 상징과 은유로 구성된 시로 읽는 것이다. 밀턴은 그가 쓴 20권이 넘는 주석(조직 신학 포함)을 읽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가 그의 이 서사시를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문학 작품에는 “부가 가치”로 따라오는 미적 요소가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실락원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저명한 문학 이론가 프랭크 커모드(Frank Kermode)가 받은 느낌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영국 문학의 주요 운동과 작가(셰익스피어 포함)에 관해 약 50권의 책을 쓴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가 최고의 찬사를 보낸 책은 다름 아닌 실낙원이다. 그는 실락원을 “영국 시가 이룬 가장 완벽한 성취,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풍부하고도 가장 복잡하며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극찬했다(Romantic Image, 196). 원제: Paradise Lost: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존밀턴
실락원
C.S.루이스
서사시
순전한 기독교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by George Marsden
2022-08-04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가 많은 사람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책이 잠시 인기를 얻었다가 사라졌지만, 루이스의 이 변증서는 처음 발간이 되었을 때보다 21세기가 된 지금 더 많이 팔리고 있다. 영어로 출판된 것만 해도 2001년 이후 400만 부 넘게 팔렸다. 이 책은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이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책이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었을 때 지인들이 그에게 300권이 넘는 책을 보내주었는데, “그중 100권이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였다.”사실 순전한 기독교는 원래 책으로 출판하려던 게 아니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모두가 고통 속에 있던 시절, 루이스가 BBC 라디오에서 네 차례에 걸쳐서 강연한원고다. 루이스는 방송을 한 후에 이 글들을 각각의 작은 소책자로 출판했다. 그러나 1952년이 되어서야 그는 이 글들을 하나로 묶어서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으로 출판했다.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이 책의 성공을 바라보면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도대체 루이스가 신앙에 대하여서 어떻게 말하였기에 이 책은 이토록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는가? 우리 중 누구도 C. S. 루이스가 될 수는 없겠지만, 우리 모두 루이스를 통하여서 우리의 신앙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1. 루이스는 영원한 진리를 추구했다루이스의 시대나 오늘 우리들의 시대나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습관의 하나는 삶과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그에 대한 오래된 이해보다 더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루이스는 역사를 전공한 학자답게 우리 시대의 “최신 사상”도 다음 세대에게는 진부한 얘기가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루이스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신앙의 여정을 시작하면서 잠시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유행보다는 오랜 시간 지속될 수 있는 영원한 진리를 찾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순전한 기독교”를 “모든 시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믿음”(viii)으로 정의했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최신의 현대적인 사상들을 제시하기보다는 “그가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그가 좋아하든지 그렇지 않든지”(ix) 관계없는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하려고 했다.그는 역사에 기초하여 기독교를 설명함으로써 될 수 있는 대로 그 시대의 사회적, 정치적 문제와 연관하여 기독교를 설명하려는 시도를 피했다. 예를 들어서 그는 “기독교와 채식주의자” 또는 “기독교와 새로운 세계 질서” 같은 방식으로 기독교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책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보면, 삼촌 마귀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마귀 웜우드에게 그가 담당하는 환자(참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날 위험이 있는 젊은 남자)를 다음과 같이 유혹하라고 가르친다. 그 젊은 남자가 기독교를 잘 활용하면 정치적으로 중요한 담론을 제시할 수 있고, 이를 통하여서 앞으로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유혹하라는 것이다”(135). 이와 같은 정치적인 편향성을 가지면 그 환자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더욱 멀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루이스는 현대 신학 사조에 맞추어서 기독교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시도는 “기독교와 물”을 분리하는 것처럼 생명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기독교의 본질을 희석하는 시도라고 보았다. 당시의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 사조는 기독교를 비신화화하려고 노력했지만, 루이스는 수백 년 동안 복음의 중심 메시지였던 기독교의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더욱 강력하게 옹호했다.2. 루이스는 불변하는 인간의 속성에 초점을 맞추었다루이스는 영원한 진리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대와 지역을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가졌다. 문학사를 전공한 사람으로서 루이스는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인간의 본질적인 속성을 찾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래서 그가 BBC에서 모든 영국인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도 루이스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로 모든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었다.그는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 기준을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그 보편적 기준에 대한 경험에 호소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다른 사람(예를 들어서 당시에 그들이 싸우고 있었던 나치)들이 선과 악에 대한 보편적인 기준에 맞추어 살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사실 그들도 정직하게 그들 자신을 되돌아보면 자신들도 항상 그 기준에 맞게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루이스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 인식하도록 유도하면서 강연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들을 치유하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3. 루이스는 다양한 상징들을 사용하여서 근거를 제시했다순전한 기독교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이 책이 사용하는 언어의 선명함이다. 특별히 루이스는 상상, 은유, 비유를 효과 있게 사용했다. 어떤 사람들은 루이스를 합리주의적인 변증가로만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무관심하기도 하고, 심지어 어떤 이들은 21세기에는 루이스가 가진 그러한 합리성이 유효하지 않다고 무시하기도 한다. 물론 순전한 기독교 안에는 몇몇 탁월한 논리적인 주장도 들어있다. 그러나 많은 평론가가 강조했듯이 루이스는 더 많은 경우에 다양한 상징들을 활용하여 순전한 기독교의 본질을 제시했다. 문학 작가로서 그는 비유와 상징을 통하여 현실을 이해할 줄 알았다. 나니아 연대기와 다른 문학 작품들을 저술한 루이스는 동일한 방식으로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했다. 순전한 기독교의 독자들은 루이스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묘사하려고 사용한 다양한 상징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지나오는 여정과 같다. 또는 반역을 하던 손을 내려놓고 항복하는 것과 같다. 또는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며, 자신의 일부분을 죽이는 것과 같다. 또는 걸음마를 배우거나 글쓰기를 배우는 것과 같다. 또는 하나님께 선물을 사드리는 것과 같다. 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자신을 구하러 온 구조대원의 손을 붙잡는 것과 같으며, 장난감 병정이 살아나는 것과 같고, 말이 날개를 달고 날아가는 것과 같다. 또는 나침반의 자침이 북쪽을 향하여서 움직이는 것과 같고, 어두운 온실 하우스에 갑자기 햇빛이 비치는 것과 같다. 이외에도 루이스는 더 많은 비유를 사용하면서 기독교의 본질을 설명했다. 4. 순전한 기독교는 분명한 복음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루이스는 동시대를 살았던 디트리히 본회퍼가 언급한 “값싼 은혜”를 말하지 않았다. “순전한 기독교”는 최소한의 기독교가 아니다. 이것은 결코 쉽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다. 도리어 이 책의 독자들은 기독교 복음이 그들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먼저 “자기 자신”을 포기해야 한다고 요구받는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들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사셔야 한다.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고 부르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자신에게서 나와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야만 한다”(224). 또한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이것이 기독교의 전부이다. 이외에 다른 것은 없다. … 교회는 사람들을 이끌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여 그들을 작은 예수들로 만들기 위하여서만 존재한다"(199). 우리는 “너희는 온전하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변화되고 있는 중이다(198).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에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변화되고 가고 있다(220). 이것은 오직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진정한 포기”이다(226).“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요구는 대중적 부흥주의 전통에서는 간과되었던 요구이다. 부흥주의 전통에서는 “거듭남”을 마치 개인이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겼다. 그러나 루이스에게 있어서 강조점은 그가 자신의 자서전의 제목으로 붙인 “예기치 못한 기쁨”에 있었다. 복음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얻는 예기치 못하는 기쁨만이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포기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 전통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자신의 사랑을 근본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면서, 마치 태양을 돌고 있는 행성과 같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사랑이 제자리에 자리 잡은 모습이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들을 사랑하게 된다. 5. 루이스는 독자들에게 복음 자체의 아름다움을 제시했다1939년에 루이스는 The Personal Heresy라는 제목의 글을 문학 비평으로 출판했다. 이 글에서 그는 시를 시인의 정서적인 상태와 연결하여서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시인은 자신을 보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시인은 저것을 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가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을 따라서 바라본다면, 나는 더이상 사람을 바라보지 않을 것이다”(14).루이스는 변증가로서 순전한 기독교를 저술할 때에도 같은 방식으로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관심을 끌게 하거나 자신의 독특한 견해를 반영하여 글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실 그의 책이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은 것은 루이스가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자신이 아니라 복음 그 자체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이 발견한 것들을 그저 다시 설명하는 수준에 머물러있지 않았다. 그는 친절한 여행 안내자처럼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마치 등산에 동행하며 설명해 주는 해설자와 같았다. 그래서 혼자 갈 때는 놓치기 쉬운 온갖 종류의 꽃과 풀을 보게 해주고, 멋진 암석들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런 안내자가 우리에게 평생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멋진 산봉우리와 호수의 전경을 보여주었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에게 무척이나 고마웠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평생 잊지 못할 것은 바로 당신이 보게 된 그 아름다움일 것이다. 원제: Mere Christianity: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박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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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
by 정현구
2022-07-30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온유한 자 예수님이 산상수훈 이야기를 하셨다. 팔복으로 시작되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우리에게 복을 가르치는 내용이 아니다. 팔복은 천국의 원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팔복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하는데,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란 사실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심령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중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잘 알려주는 내용이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는 구절이다. “온유한 자”는 성품이 온순하고 유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순종하는, 하나님의 다스림 앞에서 유순한 사람이다. 그 온유한 사람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은 그가 주어진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왕처럼 살아간다는 뜻이다. 온유한 자는 땅을 다스린다.민수기 12:3에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고 했는데, 모세는 원래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광야 40년의 용광로 속에서 제련되어나온 다음 성품이 굉장히 유순하게 바뀌었다. 사실 성격이 바뀌었다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체질로 바뀐 것이다. 온유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비로소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 자격을 얻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가정도 잘 다스린다는 말처럼, 하나님께 훈련을 잘 받았기 때문에 백성을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이 불평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며 권위에 도전하자 모세는 분노한다. 백성이 물이 없다고 불평하자 하나님이 바위를 명하라고 하셨는데, 그는 지팡이로 바위를 쳐버렸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분노의 다스림을 받은 것이다. 이후 하나님은 모세가 이 사건 때문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가나안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사람이 주어진 땅을 다스리며 사는 곳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다. 이런 사람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오직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성령충만에 관련된 구절을 둘러싼 에베소서 4, 5, 6장은 부부 관계, 부자 관계, 노사 관계, 국가와의 관계 등 삶의 다양한 현실들이 나온다. 부부를 향하여 “피차 복종하라” 하고, 부모를 향하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하고, 자녀에게는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관계의 현실이 나오는 본문의 중심에서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명령이 주어진다. 성령의 충만은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성령의 다스림을 받으면 부자 관계, 부부 관계, 노사 관계와 같은 현실의 땅에 속한 여러 문제를 다스리면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와 갈등에 정복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그 문제를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림으로 가나안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변화시켜가는 것이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이다.우리는 이 땅에서 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는 왕 같은 존재로 부름받았다. 에베소서 2:5-6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한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유명한 중국 전도자 워치만 니(Watchman Nee)가 에베소서를 강의하면서 좌행참:앉으라, 행하라, 서라라는 얇은 책을 썼다. 그중 좌(坐)는 ‘앉다’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 앉히신다는 말은 그냥 쉬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왕의 의자에 함께 앉는다는 의미다.사도신경에도 “예수께서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되어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편한 소파에 앉아 쉬고 계신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 의자에 함께 앉아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지금도 하늘에서 통치하고 계신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예수님이 그러하신 것과 같이, 신자들도 영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 옆에 앉아서 다스리듯이, 우리도 영적으로 그리스도 옆에 앉아서 다스린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스림을 받아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릴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한다.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임한다는 것은 우리가 성령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다양한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염려를 감사로 바꾸며, 문제를 기도로 돌파해 나가고, 사고를 만나도 절망하지 않고, 상처를 입어도 오히려 치유자가 되어 주어진 삶의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최우선으로 구해야 할 것이 바로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솔로몬이 성전을 준공한 다음에 일천 마리 양으로 엄청난 제사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구할 것을 물으셨다. 솔로몬은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며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9)라고 대답한다. 하나님은 그 대답에 매우 흡족해하셨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기도를 드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솔로몬이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겠다고 하셨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듣는 마음’이었는데, 그 듣는 마음은 바로 순종하는 마음이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다. 실제로 솔로몬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다스림을 받았을 때 그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채워주셨다.주기도문이 나오는 마태복음 6장의 마지막 부분은 이 말씀으로 끝을 맺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마 6:33). 하나님은 기도할 때 이 한 가지를 구하라고 하신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의 나라와 의는 그분의 다스림이다. 주기도문 전반부의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와 같은 내용이다.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것은 이렇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기도문 후반부에 나오는 것처럼 삶의 현실에서 왕처럼 다스리며 살게 해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신구약 성경에 흐르는 큰 줄기는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 하고, 다스림을 받는 만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해야 할 매일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다스림’이다. “하나님이 나를 다스려주셔서 내가 딛고 있는 땅과 역사를 주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기도를 드려야 한다. 이런 기도를 드리고, 이런 기도를 살아낸다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서 있는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다.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아나가는 사람의 가슴 속에, 그리고 그 사람의 현실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비로소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된다.예루살렘은 유대 종교의 중심지였다. 당시 헤롯은 금을 칠한 성전을 짓고 있었다. 수많은 양이 제물로 바쳐지고 있었다. 제사장들이 형식적으로 많은 제사를 드렸지만 마음속에 진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간절히 구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형식적이었다. 그런데 다스림을 참으로 구하는 소수가 주변부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베드로, 요한과 같은 어부 몇 사람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역사가 완전히 바뀐다.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이야말로 역사의 중심지이고, 그곳에서부터 역사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역사는 갈릴리, 즉 주변부에서 일어났다. 어디서부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역사가 일어나고 역사가 동심원을 그리면서 확장되는가? 하나님의 다스림을 잘 받고 삶에서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일어난다. 그러니 주변부가 중심부가 되고 중심부가 주변부가 되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핵심은 주기도문이 말한 바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제대로 깨닫고 이 기도를 드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우리는 주기도문이 보여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게 하소서, 다스림을 받아 다스리게 하소서’라는 분명한 두 가지 원리가 어떻게 구약과 신약에 흐르는지를 살펴보았다. 주기도문을 통해 앞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어떤 삶을 추구해야 하는가 하는 교훈을 얻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대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주기도문을 간구함으로 주기도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의 땅을 다스리면서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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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
by 정현구
2022-07-29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문제의 뿌리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는 기도다. 기도의 제목이 많을 텐데 예수님은 왜 ‘하나님의 다스림’을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믿는 사람이 반드시 구해야 할 핵심적인 기도 제목으로 가르치셨을까? 그 이유는 인간이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가 바로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잘못된 뿌리에서 수많은 죄악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열매의 종류는 많지만 뿌리는 하나다. 그 하나의 뿌리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하는 불순종이다. 문제의 핵심인 뿌리를 해결해야 참된 응답이 주어지기에, 먼저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는 것이다.창세기는 모든 것의 시작을 알려주는 책이다. 죄의 시작을 다루는 창세기 3장의 타락 사건을 보면 죄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 에덴동산이 나온다. 에덴동산은 단순한 동산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초기 모델이다. 그곳에 다스림을 받는 백성으로 아담과 하와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거하는 땅인 에덴이 있었습니다. 그 땅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뜻하는, 선악과 명령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법이 있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서 먹는다. 선악과 사건의 의미는 이렇다. 선악과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다. 선악과를 금지한 명령은 마치 하나님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 자체를 나쁜 것으로 여기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선악과를 먹는다는 것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선과 악을 ‘결정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정하신 선과 악의 구분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선과 악을 구분 짓는 입법자의 역할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한 행위다. 이렇게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기에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이처럼 인간 죄의 뿌리에는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에 대한 거부와 반역적 독립 선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치실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하셨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은 똑같은 내용의 기도를 반복하지 말라는 의미 그 이상을 담고 있다. 옛날 사람들은 인격적인 신 앞에 기도한다는 의식이 약했기 때문에, 기도할 때 주로 주문을 외웠다. 주문을 외움으로 신이 기도를 꼭 들어주게 만들고자 하는 일종의 종교적 주술을 행했다. 이것이 ‘중언부언’이다. 이것은 인간이 기도로 신을 조종해 자기의 욕망을 성취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이렇게 종교에까지도 깊이 들어가 있다. 이처럼 신의 다스림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면, 인간 문제를 푸는 핵심은 그 뿌리를 뽑아내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겠다는 기도를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은 근원적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진정한 응답주기도문은 기도의 진짜 응답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신다.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는 것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라는 큰 맥락에서 볼 때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내 삶의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이것이 진짜 응답받은 것이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를 생각해보자. 기도를 했더니 내게 필요한 양식이 주어졌다. 표면적으로 기도가 응답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내일에 대해 염려한다면, 아직 기도의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경제적 삶의 현실을 다스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가 보살펴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며 산다면, 그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음으로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자로 살아가는 것이다.우리는 물질이 많음에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욕망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 그렇다면 그는 비록 일용할 양식이 풍족하더라도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한 것이다.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지 않고, 도리어 물질에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의 주인이 하나님이라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 물질을 기꺼이 사용할 수 있다면, 그때 그는 물질이라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그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의 참 응답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경제 현실이라는 땅을 다스리고 있기 때문이다.용서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용서의 가르침의 핵심은 “내 죄를 용서해 주소서”의 기도가 아니라 “내가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주소서”의 기도다. 사실 남을 용서하는 것 만큼 어려운 것도 많지 않다. 내 죄를 용서해달라는 기도는 쉬운데, 남의 죄를 용서하게 해달라는 것은 정말 어렵다. 하나님이 자기를 용서해 주신 것에 감격하고 기뻐한다고 할지라도, 그가 남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그는 온전한 응답을 받은 것이 아니다. 기도의 진짜 응답은 나를 용서하신 그 사랑의 엄청난 무게와 은혜 때문에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기꺼이 용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다스림을 받아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갈등의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그는 진짜 응답을 받은 것이다. 바로 그의 삶의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한 것이다.그러므로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내용은 두 가지다. 첫째는 위로 하늘의 다스림을 받는 것, 둘째는 아래로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 삶의 현실을 다스리며 살게 해주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핵심 내용이자, 구약과 신약을 통한 하나님의 말씀 전부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이다.하나님의 형상으로 산다는 것종종 ‘믿고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내가 딛고 있는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다스리며 사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삶의 모습이다. 이렇게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를 보자.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을 때, 굉장히 원대한 목적을 가지고 만드셨음을 볼 수 있다. 창조 세계는 어마어마하며, 볼수록 기가 막힌 세계다. 그런데 이 창조 세계가 창조의 절정인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도록 만들었으니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목적이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을 닮는 것이었다. 창세기 1:26은 인간 창조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는데,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에 대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다양하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에서 형상과 모양이라는 두 가지 단어가 나온다고 하여 의미를 둘로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성경신학이 발전하면서 이 의미가 보다 뚜렷해졌다. 창조 세계 가운데 하나님은 왕 중의 왕으로 계신다. 그 왕이 자신을 닮은 존재를 만드셨다. 하나님을 대신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땅을 다스릴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을 만드셨다. 즉 인간을 하나님을 대리하는 작은 왕들로 만드셨다는 것이다.고대 사회는 황제를 신의 형상이라고 불렀다. 오직 황제만이 신의 형상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시로는 상상할 수 없는 혁명이었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으니 남자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까지는 생각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경은 여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시대에는 굉장히 놀라운 이야기였다.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은 우주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시고, 인간은 하나님이 할당한 일정한 영역을 다스리는 책임을 맡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청지기이다. 인간은 자기의 땅에서 죄에 지배당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다스리는 왕으로 살아가도록 만들어졌다.다스림을 받아 다스리다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왕처럼 살아가는 비결이 무엇일까? 하나님께는 그분보다 높은 존재가 없다. 하나님 위에 왕이 없다. 그러나 인간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왕이 있다.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존재도 인간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에 계신다.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의 다스림을 받아 삶의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왕 노릇 하도록 만드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대로 사는 것에 달려 있다. 이것을 삶의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 삶이 굉장히 힘들고 고달파, 순간순간 여러 상황과 그 상황이 주는 감정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자비와 은혜로 다스려주시기를 기도하면서 다스림을 받게 되면, 어려운 상황과 염려가 밀려올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며 감사할 수 있다. 우리가 그분의 통치 아래 있다면 풍랑이 이는 바다와 같은 삶이라고 해도 그 바다를 딛고 가는 왕처럼 살아갈 수 있다.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주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계명을 지키는 길십계명도 살펴보자. 십계명 중에는 ‘하지 말라’는 계명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십계명을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내용의 계명으로 읽지만, 사실 십계명이 그렇게 쓰인 것은 당시의 사회·문화적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을 정하다 보니 “거짓말하지 말라”와 같은 부정적인 명령어를 사용했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거짓말하지 말라”에서 끝나지 않고, “참을 말하되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실을 말하라”와 같은 적극적인 명령까지 그 속에 포함합니다. “살인하지 말라” 역시 “그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헌신하라”는 적극적인 명령을 담고 있다. 그래서 십계명을 제대로 지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칼뱅이 십계명 주석을 굉장히 길게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을 믿고 의롭게 된 사람이 성화되어갈 때 중요한 도구가 십계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소극적 명령에 한정하면 지키기 어렵지 않을 것같이 보이지만 적극적 명령까지 더하면 굉장히 깊어서, 제대로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그런데 어떻게 하면 십계명을 지킬 수 있을까?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여섯 가지 계명이 인간에 관한 계명이다. 처음 네 가지 계명은 “내 앞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신상을 만들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어기지 말라”이다. 이 네 가지 계명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의 다스림이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하나님이 나의 왕이심을 온전히 고백하며 살게 해주소서”라는 뜻이다. 이것은 주기도문 전반부 내용과 같다.제5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에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문제가 다 들어있다. 이 계명을 어기지 않고 사는 삶이 곧 바른 삶이다. 즉 삶의 문제에 정복당하지 않고, 오히려 다스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때 우리는 내 삶, 내 땅을 다스리며 갈 수 있다.언약궤, 하나님의 통치 의자구약에는 언약궤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이스라엘 진영의 정중앙에 성막이 있었고, 성막 제일 안쪽의 지성소 안에 언약궤가 있었다. 언약궤는 아카시 나무로 만든 상자인데, 이 속에 십계명을 넣어두었다. 지성소 안에 놓인 이 언약궤는 무엇을 의미할까? 언약궤라는 상자를 보면, 그 위에 권능의 천사를 상징하는 날개 넷이 세워져 있다. 역대상 28:2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이에 다윗 왕이 일어나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헌할 성전을 지을 마음이 있어.” 다윗이 성전을 짓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성전 지을 준비를 하는데, 그 이유가 하나님의 발판인 언약궤를 봉헌하고 싶어서이다. 보통 왕의 의자가 높기 때문에 왕의 다리를 두는 발판을 둔다. 그런데 그 발판이 바로 언약궤다. 언약궤가 발판이라면 언약궤 위에 세워진 네 갈래의 날개는 왕이 앉은 의자의 다리에 해당된다. 즉 언약궤 위에 하나님이 앉아 계신 왕좌가 있다는 뜻이다.언약궤는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언약궤를 발판 삼아 하나님이 왕좌에 앉아 계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왕좌에 앉아서 무엇을 하시는가? 그 의자에 앉아 쉬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신다. 지성소에 언약궤가 있다는 것은 지성소에 하나님의 통치 의자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이스라엘 백성 중에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준다. 성전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셈이다.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라. 그럴 때 너희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것이 바로 지성소 속에 언약궤를 둔 의미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때 가끔 언약궤를 어깨에 메고 나갔다. 언약궤를 하나님의 이동용 왕좌로 만든 것이다. 레위인의 어깨에 메인 언약궤는 백성을 승리로 이끄는 하나님의 이동용 지휘소가 된 것이다. 이런 의미를 지닌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 가운데에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를 잘 받을수록 그들은 전쟁에서 이기며 강한 백성이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적 선한 영향력을 온 세계에 뻗칠 수 있는 제사장 민족이 된 것이다.사울과 다윗 이야기언약궤는 하나님의 통치를 의미한다. 사울이 왕이 되었을 때 이스라엘은 언약궤를 빼앗긴 상태였다. 블레셋과 싸우다가 패배하자 엘리의 두 아들은 언약궤가 자신들을 이기게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하고 가지고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패하고 언약궤를 빼앗긴다. 사실 언약궤는 요술상자가 아니다. 언약궤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의미인데,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언약궤 자체를 요술방망이처럼 믿고 나갔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이 언약궤를 빼앗기도록 하셨다. 이후 사울이 왕이 되었지만 그는 언약궤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것은 그가 자기 위에 계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통치하려고 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한번은 전쟁을 하고 돌아오는데, 백성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다”라고 말한다. 이 말 한마디에 질투심이 화살처럼 사울의 가슴에 꽂혔다.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았던 그는 결국 질투심의 지배를 받아 쓰러지고 말았다. 대단한 것에 지배받았으면 또 모르겠는데, 왕이라는 자가 고작 질투심에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울은 겉은 왕인데, 실제로는 평생 종으로 살았다. 실제로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위대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는 굉장히 잘 사는 것같이 보여도 대부분 욕심이나 경쟁심이나 시기심의 지배를 받아 살아가게 된다. 그러다가 인격적 성숙도 변화도 없이 인생이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그러나 다윗은 어떻게 했는가? 왕이 되자마자 그가 행한 첫 번째 국가적 시책이 언약궤를 가져오고, 언약궤를 위한 성전을 봉헌하려는 것이었다. 언약궤를 찾아오려고 했다는 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사모함이 있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는 이전부터 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며 살았다. 다윗은 어려운 상황에 많이 처했다. 이럴 때 대다수의 인간은 그 상황이 주는 수많은 부정적 감정의 지배를 받기가 매우 쉽다. 한 인간이 삶의 최고의 경지와 최저의 경지 가운데 일어나는 수많은 종류의 감정의 파도를 어떻게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을까? 그가 지은 수많은 시편이 보여주듯이 다윗은 그 감정을 영적인 시로 승화시킬 수 있었다. 그것은 그가 상황과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다윗이 썼던 시편들은 다윗이 여러 외적 상황, 내적 감정들과 싸워 이겨 얻은 영적 전리품에 해당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았기 때문에 그 절망의 감정까지도 다스릴 수 있었다. 질투에 지배당했던 사울의 모습과 얼마나 다른가! 다윗은 진작부터 하나님 나라의 원리대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주기도문의 가르침은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이다.이스라엘 역사이스라엘 역사도 하나님 나라의 원리를 보여주는 텍스트에 해당한다. 우리가 많은 민족 중 하필 이스라엘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이 민족의 역사를 하나님의 계시를 담고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보여주는 도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 역사가 우리에게 참 중요하다. 구약은 이스라엘의 역사다. 그런데 다양한 역사 중에서 원형 역사가 있다. 신·구약의 여러 역사적 사건들은 결국 이 원형 역사가 여러 형태로 변주되면서 계속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이 40일간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것도, 유월절에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도,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것도 전부 이스라엘 역사라는 틀 안에서 반복된다. 이스라엘 역사라는 하나의 작은 이야기에서 더 큰 본질적 역사,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 우주적 역사까지 나선형으로 확장되어가는데, 그 원형이 이스라엘 역사인 것이다.이스라엘 역사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된다. 첫 번째 단계는 이집트에서의 역사다. 그다음은 광야에서의 역사, 또 하나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파라오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잘못된 왕의 지배를 받는 역사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함한 하나님 아닌 존재에 지배받아 영적 의미에서 사실상 노예로 살고 있다. 죄의 노예요 죽음의 노예다. 성경이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영적으로 인간이 사실상 이집트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이집트에서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일어났던 한 번의 구체적 역사이지만 영적으로는 온 세대를 통틀어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을 바라보는 하나의 렌즈가 된다. 두 번째는 광야에서의 역사다. 출애굽 했음에도 불구하고 방황한다. 누가 주인인가? 여전히 자아가 주인이다. 자아가 주인이 되어 방황하는 역사가 광야의 역사다.세 번째는 가나안에서의 역사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하는데, 사실 이 말에는 하나님의 수사학이 들어있다. 가나안은 역설적으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어둡고 가장 절망적인 곳이었다. 당시 하나님이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40년을 방황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시간표였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40년을 방황한 셈인데, 가나안의 측면에서 보면 가나안 땅이 견딜 수 없어 토해내고 싶을 만큼 가나안 원주민들의 죄가 관영하는, 이른바 임계점에 이를 때를 기다린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고 마침내 가나안을 정복하던 바로 그때가 정확하게 가나안 땅이 더 이상 가나안 백성의 죄악을 견디지 못하고 토해내는 때이다. 하나님의 우주적 역사에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방황이 필요해서 40년을 방황시켰다. 가나안은 가나안대로 죄가 관영할 때를 보다가 두 가지가 마주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했는데,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만들어놓은 후 들어와서 살게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가나안 땅은 말 그대로 죄가 가장 관영한 곳이다. 가장 어두운 곳에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간다. 하나님의 백성이 들어가면 가나안이라는 가장 어두운 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장 이상적인 곳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죄의 다스림을 받음으로 땅이 토하고 싶어 할 만큼 어둡고 지옥 같았던 곳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이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지금 어느 땅에 머무느냐는 중요하지 않고, 어느 땅에 머물든지 누가 통치하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나안 땅은 주기도문이 성취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가나안이라는 미움, 원망, 갈등, 음란, 폭력의 문화 속에서도 영향을 받거나 물들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오히려 주변을 한 사람씩 변화시키고 바꾸어나가는 사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 그 사람의 땅에 임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다. 하나님 나라 원리가 바로 이렇게 성경 속에서 여러 사건을 통해 연결된다.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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