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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더 나은 의”
by 이춘성
2020-10-23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의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마태복음 5-7장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산상설교’로 불린다. 산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이 설교가 산 위에서 행해졌기 때문이다. 5장 1절에는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만 보면 예수님만 산에 계시고 무리와 제자들은 산에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로핑크(Gerhard Lohfink)와 같은 신약학자들은 예수님이 산으로 올라가셨고, 무리 중에 제자들만이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라갔다고 설명한다. 그렇다고 이것이 누가 예수님을 따라 산행을 하였는지, 특별히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 고된 산행을 할 만큼 적극성이 있는 자들이며, 이들은 소수라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고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은 구약의 어떤 사건을 가리키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시내 산에서 갈릴리 이름 없는 산으로산상설교의 도입부는 시내 광야에 있는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가나안에 세울 하나님의 나라의 삶의 원리와 법을 가르치시는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이 모습은 출애굽기 19장 20절 이하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곧 그 산꼭대기에 강림하시고 모세를 그리로 부르시니 모세가 올라가매”(출 19:20) 하나님은 시내 산에 계시고 모세를 불러 말씀하셨다. 그리고 모세와 장로들은 광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산상설교에서도 예수님이 산에 계시고 제자들이 나아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다. 이런 구도는 구약의 시내 산 설교와 신약의 산상설교가 서로 비교되도록 한다.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백성을 가르치시며 주신 것이 무엇인가? 십계명 두 돌판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이다. 이것은 앞으로 세워질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들이 지킬 삶의 원리, 윤리이며 법이다. 그렇다면 산상설교는 무엇일까? 예수님이 이루실 대속의 구원 사건 이후에 죄에서 탈출한 사람들로 만들어질 하나님 나라의 삶의 윤리와 법이 산상설교이다. 그러기에 산상설교는 오래전에 있었던 좋은 말씀, 혹은 따르기에는 너무 높고 숭고한 이상적인 말씀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은 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며, 지켜야 하는 삶의 윤리이며, 법이 산상설교이다.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은 이제 산상설교의 내용으로 우리의 삶을 판단 받고 우리가 얼마나 부패한 존재인지, 의롭지 않은지 알게 된다. 더 높은 기준과 본질적인 기준으로 우리의 삶이 판단 받는다는 의미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알아볼 ‘더 나은 의’다.산상설교의 주제산상설교의 핵심 주제는 ‘더 나은 의’다. 이 내용을 담고 있는 17-20절에는 비교급으로 표현된 ‘더 나은 의’의 비교 대상이 무엇인지 나온다. 그리고 그 관계성을 규정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17) 예수님은 시내 산의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이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고 한다. 완전이란 가득 채워서 부족한 부분은 메꾸고 채워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과거 시내 산의 윤리와 법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충분히 요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앞으로 이룰 하나님 나라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 고차원의 완전한 법과 원리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를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창세부터 발전하여 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계시의 점진성, 하나님 나라 윤리의 완전을 향한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이 무엇이며, 신자들이 어떻게 이를 극복할 수 있는지 설명하고 있다.율법 혹은 선지자우선 17절의 내용을 자세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율법이나 선지자(τὸν νόμον ἢ τοὺς προφήτας·)”는 무엇을 의미할까? 앞과 뒤가 동일한 운율과 단어로 끝나는 시적인 용법인 대구법과 같이 ‘율법과 선지자’는 산상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인 7장 12절에도 나온다. 예수님은 설교의 마무리에서 “율법과 선지자(ὁ νόμος καὶ οἱ προφῆται)”라고 말씀하셨다. 차이점은 17절은 ‘율법 혹은 선지자’로서 이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지만, 7장 12절은 ‘율법 그리고 선지자’로 둘 다를 뜻한다는 것이다. 당시에 7장 12절의 ‘율법과 선지자’는 일반적으로 통용하는 관용어로 구약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 이유는 구약성경은 토라로 불리던 율법이 기록된 모세 오경과 그 외의 선지자들에 의해서 구전, 기록된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법, 말씀으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에게 받은 십계명과 그 외에 모세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한 5개의 성경책을 가리킨다.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법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하자(삿 21:25),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의 토라로 이끌기 위해 선지자들을 대언자로 보내셨다. 이들 선지자에 대한 기록은 역사와 시, 지혜, 예언 등의 다양한 문학적 장르로 기록되었고, 히브리어 성경은 이것들을 선지서라고 불렸다. 그러한 이유로 구약 성경은 토라로 불리는 모세 오경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을 “율법과 선지자”라고 불렀던 것이다.하지만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은 토라와 선지서에 대해서 이해하는 방식과 그 위상의 문제 때문에 크게 두 파로 갈라져 있었다. 이것은 성경 해석을 둘러싼 신학적 이유에 근거하였다. 먼저 성전의 제사장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두개인들은 모세 오경, 즉 토라만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였다. 이들은 하나님이 직접 모세에게 말씀하여 주신 토라만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이와 달리 지방을 중심으로 개혁 운동을 일으키며 신앙과 삶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던 신진 세력이었던 바리새인들은 토라 외에 선지서의 말씀들도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토라를 재해석하고 토라로 돌아오라고 가르친 선지자들의 가르침은 단지 토라를 쉽게 풀어쓴 것이 아니라 발전된 토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토라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선지자들을 통해 더 발전되고 향상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진보적인 주장이었다. 바리새파는 토라도 중요하지만, 더 향상, 발전된 내용을 담은 선지서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더 나아가 바리새파의 랍비들은 주석과 책들에 근거해서 십계명과 그 부속 조항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파는 토라 외에 더욱 더 많은 항목의 법을 만들어 이것을 따르는 것을 경건의 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두 세력의 어느 편의 손도 들어주시지 않았다.율법예수님은 율법(토라) 혹은 선지자 중 하나를 폐하고 이 중의 하나만을 선택하여 긍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오히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긍정하였고, 더 나아가 이 둘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주장하셨다. 예수님은 먼저 18절에서 율법(토라)이 무엇인지 가르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 말씀은 토라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원래 의도대로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루리라”는 헬라어의 중간태의 동사이다. 중간태란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상태를 의미한다. 능동태는 주어의 의지와 주도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수동태는 주어의 뜻이 아닌 타인의 뜻에 따라 주어가 움직인다. 하지만 중간태란 주어가 주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동적이지도 않은 상태,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서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고 성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유한한 인간의 모습에 대한 묘사이다. 유진 피터슨은 중간태의 신앙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우리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특유의 환경 속에는 극단적인 대비가 불가능한 순간이 너무나 많다. 두 가지 의지가 작용하지만, 두 가지 모두 상대편을 배척하지 않고, 상대편을 소멸시키지 않으며, 서로 존중하는 경우가 있다. 헬라어 문법책은 이렇게 말한다. “중간태는 어떤 행동의 결과에 참여하는 주어들을 묘사하는 동사의 용법이다.” … 나는 다른 존재 - 창조와 구원을 이루신 주님 - 에 의해 시작된 행위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 속에 참여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가 그 행위를 한 것이 아니며, 그것이 나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나는 이미 의도된 행위 속에 참여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 우리는 하나님의 사역을 우리 삶 속에서 촉진시키기 위해 줄을 잡아당기지 않는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독단적인 정체성에 굴복하도록 억지를 부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조작(능동태)하거나 하나님에 의해 조작(수동태) 당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행위 속에 포함되고 거기에 참여하지만 그것을 조종하거나 제한하지 않는다(중간태).” (유진 피터슨, ‘묵상하는 목회자’, 좋은씨앗, 157-159쪽)선지자이어서 예수님은 선지자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여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19) 여기의 ‘가르치는 자’는 선지자에 대한 것으로 생각한다. 선지자들은 계명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버리지 않고 가르치며, 이를 따라 살아서 모범을 보였던 자들이었다. 선지자들은 토라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토라를 해석하고 당시의 사람들에게 토라로 다시 돌아오라고 가르친 사람들이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율법을 가르치고, 원래 의미를 밝혀 주는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각성시켰고, 이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오길 그들의 삶으로 보여준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과거의 법이 과거의 관습이나 문화가 아닌 영원한 하나님의 법, 불변하는 삶의 원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예수님은 이런 이들의 삶에 대해서 긍정하시면서 이들을 천국에서 큰 자로 칭찬하셨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은 이러한 이들의 좋은 삶이 일종의 새로운 법과 규정이 되는 것을 경계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20)율법과 선지자예수님은 제자들이 취해야 할 바른 입장에 대해서 가르치셨다. 20절의 말씀은 토라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던 사두개인이 다수였던 제사장과 서기관, 상대적으로 선지자를 중요시여긴 바리새파 중의 하나를 선택하도록 부추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양쪽을 다 취하라는 기회주의적 가르침도 아니다. 예수님은 이 둘을 모두 인정하시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이 둘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가르치신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 일차적으로 더 낫다는 것의 결론은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에 해당하는 황금률이라 불리는 7장 12절에 나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또한 산상설교 전체는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에 산상설교의 결론에 이르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더 낫지 못하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은 하나님 나라의 윤리’, ‘정의’가 무엇인지 분명해질 것이다. 앞으로 “산상설교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윤리” 시리즈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논리를 따라서 ‘더 나은 의’가 무엇인지 알아볼 것이다.그리스도인의 길마지막으로 예수님이 과거를 대표하는 보수와 현재와 미래를 대변하는 진보라는 두 프레임 속에서 ‘더 나은 의’가 하나님 나라 윤리를 어떠한 방식으로 제시하고자 하는지 간략히 알아보고자 한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서기관이 다수인 사두개파로 대표되는 사회의 보수주의자들과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개혁적인 진보주의자들의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들 중 하나의 편에 서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이들 중 한 편에 서는 것이나 이 둘을 적절히 조화하고자 하는 중도에 서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을 뛰어넘는 더 나은 길에 서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과거를 보수하고 지키려는 사두개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에만 집착하고 현재와 미래를 무시하는 비전 없는 보수주의자를 보셨다. 과거를 재해석하고 새롭게 나가려는 진보파인 바리새인들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은 과거를 재해석한다고 하면서 전통을 무시하고 새로운 법을 만들어 새로운 기득권으로 자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위선을 보셨다. 이를 보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런 자들에게 농락당할 수 없는 거룩한 말씀이라고 가르치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인 이 두 세력의 해석과 가르침보다 낫지 않으면 결국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들 중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강하게 경고하신 것이다(마 5:20).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에도 강한 경고의 말씀이다. 보수 기독교, 진보 기독교와 같은 정치 진영화 된 기독교와 교회가 ‘더 나은 의’를 추구할 수 있는 교회라 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강요받는다. 예수님의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두고도 율법 혹은 선지자로 나누고 이를 현실 정치의 진영으로 나눠 싸운 것처럼, 지금도 보수 혹은 진보라는 선택지 속에 기독교인들을 프레임화 하려는 세력과 유혹이 있다. 결국, 이 때문에 교회 안에서 편 가르기를 하고 서로를 향해 미움을 만든다. 하지만 예수님의 길은 이 선택지를 모두 취하겠다는 어정쩡한 중립이 아닌 이것들을 모두 뛰어넘는 ‘더 나은 제3의 길’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신자가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분명한 것은 이 제3의 길은 보수와 진보를 모두 담을 수 있으며, 이 둘을 모두 조화롭게 하는 길일 뿐 아니라 이를 뛰어넘는 더 나은 길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천 년 전이나 지금도 산상설교를 통해 세상 속에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신 예수의 길, 하나님 나라의 윤리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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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ett McCracken
2020-10-20
2017년, 반 트럼프 저항의 일환으로 파생된 세속적 의미의 “종교적” 부흥이 시작되던 그해에, 나는 그런 사회적 변화를 처음 알아차렸다. 실버레이크(L.A.), 포틀랜드, 샌프란시스코 및 기타 진보적 정치 세력이 주도하는 지역의 커피숍과 빈티지 미용실 창문에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여기서는 여러분을 환영합니다”라는 말과 함께 다양한 소외 집단의 목록이 열거되어 있는 문구 또는 표지판(sign) 이야기이다. 이 표지판은 점진적인 동맹과 포용성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표지판을 내건 곳은 “안전지대”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사실 나처럼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성 윤리를 믿는 기독교인도 거기서 환영받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는 일반 주택 마당에 이 표지판의 2.0 버전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기독교인이 고백하는 신조(신앙고백)와 비슷한 언어로 시작하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표방하는 “세속적 종교”라는 모티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 …” 외에도 다양한 버전이 있지만 가장 자주 본 것(남가주 지역에서만 최소한 12군데에서 보았다)은 다음과 같다.이 집에 사는 우리는 믿기를:흑인 생명은 소중하다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과학만이 진짜이다사랑은 사랑이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런 표지판을 마당에 자랑스럽게 세워 두는 사람들의 정치관을 공유하지 않을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이 메시지가 가진 중요성까지 무시해서는 안 된다. 이런 주장은 기독교인들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확신을 주어야 한다. 다름 아니라 진보적인 이웃과 해야 할 것은 논쟁이 아니라 공유점을 찾는 상호간의 연결이라는 점이다. 탈 기독교 신조표지판의 언어가 주는 깨달음은 이것이다. 한 줄 한 줄의 의미 속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정치적 부담을 내포한 정치적인 함의가 포함되어 있는 게 사실이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내포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안타깝게도 그 진리를 왜곡하고 있다. 이제 이 신조를 한 줄 한 줄 살펴보자.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문제 많은 BLM 조직은 잠시 잊자. 어느 특정 그룹의 생명만 중요시하는 게 내포한 부작용도 잠시 옆으로 밀어 놓자. 이 구호가 가진 핵심 메시지는 다름 아니라 인간 생명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의 확인에 있다. 이 경우에는 그게 흑인에게만 해당되지만, 이런 메시지는 사실상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라는 성경적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7). 기독교인이라면 흑인 생명이 소중하다는 주장에 동의해야 할 뿐 아니라, 이 세상 그 어떤 다른 종교도 생명의 소중함에 관해서 기독교만큼 강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피력해야 한다. 여자의 권리는 인간의 권리이다안타깝게도 이 문구를 올려놓은 사람들은 ‘여성의 권리’ 속에 무제한적인 낙태의 권리가 포함된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에 대한 도덕적 권위가 바로 그 순간 훼손된다는 점이다. 태어나지 않은 인권도 결국은 인권이다. 또 하나 중요한 점은 이것이다. 여성의 존엄성과 평등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은 실제로 그리스-로마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여성을 전면에 내세우고 존엄하게 했던 성경(창 1:27, 갈 3:28)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가 여성들에게 그토록 매력적이었던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게다가 레베카 맥래플린(Rebecca McLaughlin)이 지적했듯이, 보편적 인권에 대한 개념 자체는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불법적인 인간은 없다진보적 정치 신념의 맥락에서 볼 때 이것은 미국 이민 정책에 대한 진술이다. 그러나 국경과 정책의 특수성이라는 맥락에서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이 주장 또한 신학적 진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9절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또는 골로새서 1장 21-22절 “전에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를 보라. 모든 인간은 죄 때문에 “불법” 상태에 있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합법적이라고 인정을 받았다. 과학만이 진짜이다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마도 기독교인이라면 가장 동의할 수 없는 진술이 이것일 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장이 말하는 메시지는 특히 기후 변화와 과학 거부(science denialism)와 관련한 특정한 정치적 분열이다. 물론 많은 경우에 과학이 기독교 신앙에 대적함에도 불구하고, 과학이 말하는 현실과 모순되거나 과학의 가치를 저해하는 그 어떤 메시지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과 같은 과거의 과학자 또는 프란시스 콜린스(Francis Collins)와 같은 오늘날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신앙과 과학을 조화시키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사랑이다이 짧은 문장으로 된 슬로건은 동성애, 이성애, 양성애 등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모든 ‘사랑’을 다 긍정하려는 LGBTQ 운동의 주장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표지판에 적힌 내용 중에 가장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는 의미론적으로 무의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실로 성스럽고 소중한 것을 단지 “당신이 원하는 수준까지” 한없이 자유롭도록, 그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세상 모두가 다 사랑이라면, 그건 결국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같다. 그리스도인 또한 사랑이 사랑이라고 단언하지만, 반역적인 피조물이 아닌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식의 자기 참조 문장(역자 주: ‘이 문장은 거짓이다’라는 것처럼 문장 자체가 역설을 담고 있다는 의미. self-referential sentence)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준다.”친절은 모든 것이다이 말이 의미하는 진보적 확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절이다.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친절하고(엡 4:32), 황금률에 순종해야 한다(마 7:12). 이것은 중요하고 또 성경적이지만, 이 슬로건이 틀린 부분은 인간의 친절이 마치 타락한 인간의 죄성까지 극복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인간의 능력을 과도하게 신봉하는 점이다. 기독교적으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이 모든 것이다.” 즉, 하나님이라는 중요한 단어를 추가해야 한다. 하나님의 친절은 인간의 친절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회개로 이끄는 친절(롬 2:4)이고 또 구원을 가져다주는 친절(딛 3:4-6)이다. 연결점(bridges)을 인식하자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바탕으로 우리는 진보 진영의 신조가 결코 성경적 진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평등, 존엄성, 사랑, 친절에 대한 진리를 생각할 때, 처음 형성한 기독교 문화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고, 또 기독교의 가치를 철저하게 담고 있는 ‘탈 기독교’ 신조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에게는 “이 집에 사는 우리는 …”이라고 써서 마당에 세워놓은 표지판이 결코 정치적 도발의 상징이 아니라 신학적이고 복음적인 초대가 되어야 한다. 종종 모든 문제를 다 휩쓸어버리는 정치적 욕지거리와 두려움만 뛰어넘을 수 있다면, 이 표시야 말로 얼마나 생산적인 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 이 표지판에 담긴 성경적 사상 중 일부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심지어 파괴적인) 정치적 방식으로 왜곡되고 재구성되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왜곡은 보수적 우파의 메시지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성경적 진리가 당파적 목적 때문에 왜곡되거나 잘못 사용되는 것을 제대로 분별하고 또 필요한 도전을 던져야 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공통으로 인정할 수 있는 은혜의 발판을 만들어낼 수 있다. “우리는 믿는다”라고 표현한 신조의 문장 구조는 모든 인간이 종교적이며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를 믿어야만 하는, 예배하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마당 표지판에 숨은 진짜 메시지가 무엇이란 말인가? 달리 말해, 이 표지판을 내건 사람들이 믿고자 갈구하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바로 여기가 기독교인이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지점이다. 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만족시킬 사랑과 정의 그리고 진리의 원천과 표준 속으로 그들을 이끌어야 한다. 종교적 감상주의로 가득한 이 표지판은 사실 기독교인을 향해 사랑과 호기심이 넘치는 대화를 하고 싶다는 간청이기도 하다. 대화를 시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흑인의 생명 또는 인간의 생명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덕적 근거는 무엇이지요?” “사랑은 사랑이라는 말에서 ‘사랑’은 어떻게 정의해야 하나요?” “누군가 남들 앞에서는 친절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사람이라고 할 때, ‘친절이 모든 것이다’라는 이 말은 어떻게 되는 것이죠?”탈 기독교 시대를 맞아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는 과거와 다른 종류의 많은 새로운 도전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조가 적힌 마당 표지판은 우리에게 여전히 새로운 기회가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Your Neighbor’s New Creed: ‘In This House, We Believe . . .’번역: 무제
복음
변증
탈기독교시대
하나님의형상
인권
낙태
신앙고백
기독교신조
BLM
우리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by Eric B. Watkins
2020-10-19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식을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출애굽기 12장 13절에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소개된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라].” 이 말씀은 성경 전체에서, 아니면 최소하나마 구약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위안을 주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보면, 위안이란 위기의 한복판에서 찾아올 때가 많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을 때도 그들은 결코 안락한 상태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수백 년 동안 애굽인 아래서 거친 종살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셨지만, 수세기 동안 철저히 침묵하고 계셨다. 그리고 애굽은 이방 신들로 가득한 땅이었으며, 그 신들 가운데 하나로 자처했던 바로는 앞서 활약한 요셉이나 그 요셉이 섬기던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렇듯 세월이 흘러 과거의 따뜻한 기억은 서늘하게 식어 갔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뿐 아니라 애굽인 전체를 위해 행하신 모든 역사조차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제 하나님 백성은 불타는 태양처럼 내리쬐는 바로의 허영 아래서 말라가며, 끊임없이 일하고 또 일하는 종살이로 수척해져만 갔다. 그렇게 위기의 시간이 무르익었다.바로 이러한 어두움을 가르는 서광은, 다름 아닌 구속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셔서 이전에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며 그 약속을 이행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더불어 찾아오게 된다. 그래서 한 장면 한 장면이 지나며, 바로가 신봉하던 신들이 그분 앞에서 하나씩 무너진다. 마치 맹렬히 도전하는 성읍을 공격하기 전 그 성읍의 외곽 지역부터 짓밟아 들어가는 군주와 같이, 하나님은 바로의 신들을 하나씩 정복해 나가신다. 그러나 바로는 지나치게 교만해진 자기 자아를 요새로 삼아 그 안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완고한 마음을 키워 나간다. 이에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더 완고해지도록 내버려 두신다. 이러한 긴장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신 그분 앞에서 바로의 권력이 공중의 연기처럼 무력히 사라지는 장면을 통해 더욱 극대화된다. 바로가 신뢰하던 애굽의 모든 신들은 그분의 심판이 바로 자신을 향해 엄습해 올 때까지 차례대로 고꾸라진다. 그러다가 결국 마지막 재앙이 이르게 되자, 바로의 주변부를 치는 공격이 아니라 바로의 우상 숭배가 일어나는 그 현장, 다시 말해 그 마음을 치는 습격이 이루어진다. 곧 바로의 장자를 앗아가는 재앙이 들이닥친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을 급히 읽고 넘어가면 안 된다. 애굽인의 신앙에서 바로는 대대로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애굽에는 수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바로가 그들 중 하나로 간주되었고, 그 신들의 주요 임무 중 하나도 다름 아닌 바로와 그 가족을 지키는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런 점에서 바로의 장자는 단지 왕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아닌 미래의 왕, 즉 애굽의 왕좌에 올라 온 땅을 다스리는 신의 권세를 누릴 자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바로의 장자와 애굽인의 모든 장자를 치신 일은 바로의 그 마음뿐 아니라 전체 애굽인의 세계관에 결정타를 날리신 사건이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심판은 애굽 전역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어린 양의 피가 뿌려지지 않은 애굽의 모든 장자를 덮쳤다. 심판자가 그들을 심판하신 것이다. 이로써 바로는 처참하게 패배해 무너졌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이 시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에 담긴 구속의 소망은 죄와 고통과 사망으로 얼룩진 흑암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곧 심판이 다가오는 중에도 하나님은 그 백성을 절망 가운데 두지 않으셨던 것이다. 마지막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날 밤, 이스라엘 백성은 흠 없는 어린 양을 잡아 죽이고 그 피를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렸다. 이는 예고된 그날 밤 심판자가 애굽 전역을 지나가다가 어린 양의 피를 보면 ‘넘어가게’ 되리라는 약속에 근거한 의식이었다. 그 약속은 하나님의 구속을 보여 줌과 동시에 그분의 무시무시한 심판을 보여 주기도 했다. 즉 어린 양의 죽음에서 예시되는 그 끔찍한 심판을 상기시키면서도, 또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대신하여 심판을 당하도록 다른 대속물을 제공하신다는 사실 역시 그 어린 양의 피를 통해 확신시켰다. 바로 여기에 이중적인 전가가 암시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우선 어린 양은 흠 없고 순결했으며, 눈에 띄는 결점도 없었다. 그런 양은 때가 묻지 않은 만큼 값도 비쌌다. 이처럼 흠 없는 어린 양이 각 집안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게 되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은 본성상 죄악되었지만, 어린 양이 그들 자리를 대신해서 자기 피를 대속 제물로 흘림으로써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를 가로막던 죄악이 속하여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심판자가 그 피를 볼 때, 그들을 심판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언약을 맺으시고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주신 위안의 약속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위기가 역전된 것이다.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큰 위안의 약속이 있다. 우리의 위안은 단순한 어린 양과 같이 한 마리의 짐승이 보여 주는 구속의 약속을 통해서가 아니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흘리신 구속의 보혈을 통해 찾아오는 참된 위안이다(요 1:29). 이 어린 양은 혈과 육을 입은 세상의 대적들이 아닌 우리가 지은 죄의 삯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이에게 임할 캄캄한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드려진 제물이었다. 이 모든 점에서 오랜 세월 애굽에서 종살이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우리 영혼의 노예 상태를 생생히 보여 준다. 이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남자나 여자, 혹은 노예나 자유인이나 상관없이 모든 이에게 해당되는 사실이다. 우리 모두는 본성상 죄에 종노릇하여 그 죄의 삯인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지닌 가장 큰 위기가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출애굽기에서 애굽 전역을 지나갔던 그 심판자가 마지막 날 종말론적 심판을 행하실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 최후 심판은 그분의 은혜 아래 몸을 숨기지 않은 모든 이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복음은 바로 그 구원을 하나님이 행하신다고 증언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가리셔서 최후 심판을 행하실 때 그 피를 보며 우리를 넘어가신다고 증언한다. 나아가 이보다 더 좋은 소식도 들려주는데,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깨끗하고 순결하고 거룩할 뿐 아니라 사랑 받는 자녀로 받아주신다고 증언한다. 왜냐하면 흠 없는 어린 양의 피가 우리를 가려 주기 때문이다.이처럼 복음은, 유월절 사건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여 주던 진리를 오늘날 우리에게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그 진리는, 우리의 어떤 능력이나 성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드러난 그분의 은혜와 자비 때문에 이처럼 죄악된 우리에게 소망과 위안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이렇듯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던 모든 사항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충족되었다고 말한다. 이 복음의 위안을 어떻게 받겠는가?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는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을 가지고 문설주와 인방에 어린 양의 피를 뿌려야 했듯이, 오늘날 하나님 백성인 우리 역시도 믿음으로 그분의 약속을 붙들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뿌려졌기에 마지막 심판 때 심판자가 우리를 넘어가게 되리라는 그 약속을 말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종살이하던 시절의 두려움을 벗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그 거룩한 임재 가운데 우리를 기쁘게 받아주실 하나님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큰 위안이란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rist Our Passover번역: 장성우
심판
재앙
유월절
하나님의언약
애굽
종말
복음
구원
예수그리스도
신자에게 있어 ‘은혜’와 ‘기도’에 관하여
by 장대선
2020-10-17
우리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단어는 단연코 ‘은혜’(Gratia)일 것이다. 물론 은혜 외에도 ‘감사’나 ‘기쁨’같은 단어들도 흔히 사용되지만, 신앙의 대화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단어가 바로 은혜이며 거의 일상의 감탄사라 할 만큼 자주 사용되는 단어이다.하지만 동시에 은혜에 대한 이해와 그 용법에 있어, 보편적으로나 광의적(broad sense)으로 사용되는 실정이어서 종종 그 의미와 실천에 혼란을 야기하기도 한다. 예컨대 우산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비가 자주 내리는 일을 은혜라고 하겠지만, 또 소금을 판매하는 신자에게는 되도록 비가 내리지 않은 것이 은혜가 되는 모순의 상황에 종종 직면하는 경우가 있게 마련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은혜라는 단어는 다분히 주관적인 개념이며, 자신에게 감사와 기쁨을 야기하는 일련의 현상들이 바로 은혜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흔히 볼 수가 있다.그런데 사실 신학적 의미에서의 은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이해하고 통용하는 주관적인 개념과 다르게 아주 보편적이고 공적인 개념의 단어다. 대표적으로 우리의 신학과 신앙에 있어 기초적인 바탕을 이루는 인물인 어거스틴(St. Augustine, 354-430)은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와 수고(노력)를 반영하는 신학인 펠라기우스 주의(Pelagianism)를 반박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문제 가운데서 다루어지는 전적인 은혜(summa gratia)가 바로 은혜라고 설명한다. 즉,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에 따른 반응으로서의 선행(beneficium)에 반대하여, 전적인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이뤄지는 역사와 은총만을 그 은혜로 설명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칼뱅(Jean Calvin, 1509-1564)을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개혁적 신학자들이 말하는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전가되는 일련의 내용들을, 특히 구원과 관련한 예수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총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이미 로마 가톨릭의 신학과 교리 가운데서 편만하게 용인된 인간의 자유의지와 그것의 발현으로서의 선행, 그리고 공로(meritum) 등의 사상을 개혁하여,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로서의 은혜를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교개혁의 맥락 가운데 있는 ‘은총론’(gratia doctrina)의 요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그러한 은혜에 있어서 인간의 역할이나 수고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란, 전적으로 하나님 안에서만 기인하는 것이며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반면에 펠라기우스 주의의 자유의지론과 선행의 이해를 충분히 수용한 로마 가톨릭 신앙에 있어서 은혜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되, 우리의 의지와 노력(수고)이 충분히 반영되어 제시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전적인 은혜를 베푸시되, 아무런 준비나 기대도 없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준비하며 소망하는 자들, 곧 스스로를 돕기 위해 노력하는 자들에게 베푸신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있어서 바로 그러한 공로의 수단 가운데 하나가 바로 ‘기도’다. 고행(ascetismus)을 비롯한 온갖 공로적 도구로서 이해되는 것이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인 것이다.사실 로마 가톨릭의 기도에 대한 이해는 종교개혁의 후손들이라고 믿고 사는 우리에게도 별로 생소하지 않은 실정이다. 개혁된 교회에 속한 신자들마저도 기도에 대해 공로적 이해가 편만해 있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이해를 바탕으로 ‘은혜’ 혹은 ‘은혜의 방편’으로서의 기도에 대한 보편적인 인식이 형성되어 있기도 하다. 간단히 말하자면 간절하면서도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는 것으로 은혜에 대한 진솔한 고백들이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마태복음 7장 7-8절에서 주님은 간절하면서 열심이 있는 기도를 통해 소망하는 바를 응답받게 되는 은혜에 대하여 다소 지지하시는 듯한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구절들 가운데서 또 이르시기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신다. 마치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바 소망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가장 최상의 것으로 응답해 주시는 분이 분명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7장 12절에서 조금 이상한 뉘앙스의 말씀이 이어진다. 갑자기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시며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말씀하신다. 더구나 동일한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10장 13절에서는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또한 전체적인 문맥과 다소 상충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이다.하지만 누가복음 11장의 본문에서는 마태복음 7장과는 다르게 상당히 축약 기록하여 주님께서 전체적으로 어떤 취지의 말씀을 하시려는지를 더 넓게 파악해 볼 수 있다. 즉 기도의 모범인 ‘주기도문’(Lord's Prayer)에 관한 언급 가운데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것이 바로 이어지는 말씀의 문맥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구하여 기도할 것이 바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과 교훈으로 축약되는 율법의 취지를 따라 행하는 것이며, 아울러 이러한 율법의 취지를 깨닫고 따라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시리라는 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 13절의 언급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성경의 문맥과 취지를 따라서 우리의 개혁된 신앙에서는 기도가 자신의 소망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한 의지와 노력의 도구가 아니라 이미 주어진 은혜,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적용된 구원의 은혜에 대해 반응하며 감사해야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사실 이 같은 성경의 취지는 이미 개혁된 교회들의 유산인 신앙고백과 교리문답들 가운데 잘 정리되고 반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년)은 제18장에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교리 가운데서 ‘은혜’를 고백하고 있고, 또한 제21장의 경건한 예배와 안식일로서의 주일에 관한 교리 가운데서 ‘기도’에 관해 다루고 있다. 다만 그 맥락과 의미가 좀 더 포괄적인 범위 가운데서 다루어지고 있어 그 요지를 정확하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다. 예컨대 ‘은혜의 상태’에 관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8장은 1항에서 고백하기를 “주 예수를 참으로 믿으며, 그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분 앞에서 전적으로 선한 양심에 따라 행하려 애쓰는 사람들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자신이 은혜의 상태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소망으로 확신할 수 있는데, 이러한 소망은 결코 그들을 부끄럽지 않게 한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또 제21장에서는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 ‘기도에’ 관해 언급하고 있다.하지만 기도에 관해 개혁된 신학의 설명이 항상 전체적인 맥락으로서만 다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기독교 교리를 강론하는 일련의 문답서들, 특히 토마스 카트라이트(Thomas Cartwright, 1535-1603)의 ‘기독교 신앙에 대한 논문 또는 신학의 전체와 실체’(a treatise of christian religion or, the whole body and substance of divinity)라는 책에 담긴 교리문답 가운데서 확연하게 구별하여 살펴볼 수가 있다. 카트라이트의 교리문답 제40장은 기도 혹은 기원(invocation)에 관하여 설명하며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라고 물은 뒤에 “기도와 맹세다.”라고 답하여, 기도의 성격이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로 돌려야 할 것으로 설명한다. 계속해서 “첫째로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해야 하는가, 둘째로 누구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는가, 셋째로 어떤 힘과 능력에 의해, 넷째로 어떤 이유로 기도해야 하는가?” 라는 일반적 질문들을 통해 기도의 속성을 설명한다. 그는 계속해서 기도는 ‘간구’와 ‘감사’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간구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을 우리가 구하는 것”이며, 이는 마태복음 6장과 7장, 그리고 누가복음 10장에서 주님께서 설명하시려는 의미와 맞닿아 있다고 설명한다. 또 카트라이트는 기도의 다른 부분인 ‘감사’에 대해서 설명하면서 “기도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한다”라며 “일반적으로는 세상의 통치에서, 특히 교회의 통치에서 보여 지는 그 분의 선하심, 지혜, 권능, 긍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한다. 또한 간구에 의해서 주신 그 특별한 은총들로 인해 찬양하며, 그밖에 우리가 그 분의 긍휼의 손길로부터 받았던 것들로 인해 찬양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교리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기도라는 주제에 더욱 집중한 교리의 맥락에서도 확연하게 기도가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하고 끌어내는 수단(혹은 도구)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미 받은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하나님께 반응하며 수반되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요한 한 요소를 이루는 것이다.끝으로 기도에 관해 주님께서 말씀하신 순간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여 보면, 우리가 마땅히 구할 것들에 대해서는 성령을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가 있다. 이는 곧, 누가복음 11장 13절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에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성령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합당하게 구할 것은, 이미 우리에게 주신바 율법과 선지자들의 강령들이니(마 7:12),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 6:31절) 염려하며 간구하는 기도가 아니라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33절)는 것이야말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9-10절)라고 하는 주기도문의 가르침에 충실한 기도인 것이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가르침 가운데 우리들이 구하는 것들 대부분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구하는 것들이라면, 우리들이 기대해야 할 것은 은혜라기보다는 믿음의 형태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과 관련해서 이미 주님께서는 가르쳐 이르시기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8절)고 말씀하신다. 바로 그러한 믿음으로 기도하는 신자들이라면, 아마도 주기도문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이라고 한 문구의 의미를 깊이 실감할 것이다. 그런 신자들의 기도는 이미 받은 은혜 가운데 있는 믿음으로 기꺼이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감사의 기도, 곧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1장에서 고백한 것처럼 “경건한 예배에 속하는 하나의 특별한 요소”로서의 기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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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주기도문
시편 73편에서 아삽이 말하는 좋은 죽음
by Timothy Kleiser
2020-10-14
“줄거리를 포기하는 것이 나의 의도는 아니지만, 마지막에 내가 죽는 걸로 하지요.” 이건 마가렛 에드슨(Margaret Edson)에게 퓰리처상을 안긴 연극 ‘위트(Wit)’의 시작 부분에 나오는 비비안 베어링(Vivian Bearing)의 대사이다. 이런 암울한 장면은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관객들로 하여금 비비안이 죽을 지 말 지에 대한 추측을 하게 하는 대신, 죽음 자체를 향한 비비안의(그리고 우리의) 태도에 집중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이다. 누구나 다 죽음을 맞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시간은 실로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누구나 다 살기를 갈망하지만 동시에 죽는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며, 우리는 예외없이 이런 현실을 회피하는 데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 제프 그린버그(Jeff Greenberg)가 이름 붙인 그대로, 죽음은 우리 삶의 “본질에 자리잡고 있는 벌레”이다.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Roth)는 또 이렇게 말한다. “침착하고 합리적인 모든 사람 속에는 죽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는 두 번째 사람이 숨어있다.”죽음이 무서운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게 끝(finality)이기 때문이다. 죽음은 지금도 다가오고 있고, 죽음의 도래가 가져다주는 질문은 너무도 많다. 내 인생은 가치가 있었던가? 내가 그동안 살면서 이룬 것에 어떤 목적이 있었던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이런 질문들을 직면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면 우리는 “나는 이제 죽음을 맞이할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는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좋은 죽음”을 갈망한다. 내가 “좋은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궁극적으로 증명하는 죽음 앞에서 누리는 평안한 준비 말이다. 페트라르카(Petrarch)는 이렇게 썼다. “좋은 죽음은 한 평생에 대한 영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는 이를 보다 더 시적으로 표현했다. “잘 보낸 하루는 행복한 잠을 가져다주고, 제대로 산 인생은 행복한 죽음을 가져다준다.”좋은 삶= 좋은 죽음?기독교인에게 좋은 삶이 좋은 죽음이라는 공식은 역설을 가져다준다. 왜 거룩한 자가 고통받는데 악한 자가 잘 먹고 잘 살다가 평안하게 죽는가? 이 질문은 열두 편의 시편을 쓴 이스라엘의 음악가 아삽을 괴롭힌 문제였다(시 50, 73–83편).시편 73편에서 아삽은 인생의 문제와 슬픔에서 벗어나서 행복한 삶을 살다가 평안하게 죽음을 준비하면서 맞는, 사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다(4-5절). 이미 쓰고도 남을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람들은 부와 지위를 더 높이기 위해 폭력과 각종 억압을 사용하는 교만한 자들이다(6-7절). 이런 모든 과정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교만하여 하나님이 자신들이 하는 일을 알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의 생각을 비웃으며 조롱한다. 죽음 뒤에 자신들의 삶을 판단하는 그 어떤 심판도 있을 리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아주 편안하게 죽음을 맞는다(8-12절).이런 사람들과는 정 반대로, 다윗 왕 밑에서 수석 음악가로 또 예루살렘에서 언약궤 앞에서 찬양 사역을 감당했던 아삽은 실로 의로운 사람이었다(대상 16:1-5). 그러나 이런 아삽의 모든 신실함에 대한 보상은 그를 죽을 때까지 괴롭혔던 만성적인 고통과 각종 고난이었다(14 절). 그는 점점 더 악인을 질투하게 되었고(3절), 한 걸음 더 나아가 궁금해졌다. 내가 고통받는 동안 악인이 내내 번영하는 이런 현실 속에서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게 무슨 소용이 있다는 걸까(2, 13절)?믿을 수 없는 인간의 재치비비안 베어링이 ‘위트’의 말미에서 죽을 것이라고 밝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청중은 그녀가 어떻게 죽을지를 알게 된다. 바로 난소암이다. 난소암의 예후를 들은 비비안은 자신이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확신하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누구야? 나는 영어로 된 그 어떤 작품보다도 더 깊이 있게 죽음을 탐구했던 ‘존 던의 신성한 소네트(Donne 's Holy Sonnets)’를 연구한 학자니까.” 매우 성공적인 학자인 비비안에게 죽음은 본능적인 현실이 아니라 일종의 지적인 궁금함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놀라운 재치를 적용하기에 딱 알맞은 수수께끼이기도 했다. 그러나 암이 그녀의 몸을 갉아먹기 시작하고, 죽음이 보다 더 본질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아삽처럼 비비안은 자신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녀는 아삽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인간의 지혜 또는 재치(wit)야 말로 죽음에 대한 가장 비참한 준비라는 사실이다. 인간의 지혜는 고통이 없고 번영으로 가득 찬 현실이야 말로 좋은 삶의 가장 확실한 표시이자, 동시에 좋은 죽음에 대한 가장 순수한 약속이라고 말한다. 물론 건강과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건 본질적으로 전혀 잘못된 게 아니다. 이러한 축복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시편 73편에 등장하는 악인처럼,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임재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더 갈망할 때 발생한다. 아삽의 지혜가 그에게 하나님의 면전에서 피하라고 말했을 때, 그는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고통과 당혹함을 하나님 앞으로 가져왔다(17절).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주시는 주께서는 또한 빼앗을 수도 있음을 아삽은 깨달았다(욥 1:21). 사악한 자들에게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들이 이 땅에서 누렸던 축복과 함께 언젠가는 “순간에 황폐하게 될 것”(19절)을 의미한다. 갑자기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하나님은 일어나서 “그들을 파멸에 던지시고”, 또 그들은 “완전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18-20절).죽음으로 이끄는 평안‘위트’ 속 중요한 한 장면에서 비비안은 그녀의 교수였던 애쉬포드(E. M. Ashford)와의 대화를 회상한다. 그는 비비안에게 존 던(John Donne)의 시(sonnet) “죽음아, 교만하지 마라”에 대한 논문을 다시 작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처음 논문에서 비비안은 세미콜론과 느낌표를 사용하여 존 돈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분석을 어색하게 병치하는, 달리 말해 “엉터리로 구두점을 남용하는” 방식에 의존한 것 같다. 올바른 버전을 통해서 이 극적인 구두점은 단순한 쉼표로 대체된다. “그리고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죽음은 죽을 것이다.”“죽음은 이제 더 이상 무대 위에서 느낌표를 붙여서 연기해야 하는 게 아니야.” 애쉬포드는 말한다. “단지 호흡일 뿐이야. 삶과 삶을 영원히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쉼표라는 거지.” 그러나 비비안은 여전히 지적 게임에만 몰두하고 있다. “그럼 재치가 중요하군요!” 비비안은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애쉬포드는 이렇게 주장한다. “베어링 양, 재치가 아니야, 중요한 건 진리야.” 죽음은 실로 인간의 호흡처럼 순간에 지나가는 것이다. 시편 73편에 나오는 악인처럼, 많은 사람들은 죽음이 쉼표가 아니라 마침표, 확실한 중단(hard stop), 삶의 이야기를 구성하는 문단의 마지막 결말이라는 확신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견디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런 믿음을 붙잡은 사람들은 그 어떤 어리석은 신이나 최후의 심판도 기다리지 않는다는 안도감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한 인생을 살다가 평화롭게 죽을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이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사악한 자들이 임종시에 느끼는 안도감은 평안의 표시가 아니라 마비의 증거가 된다. 자기도 모르게 뱀에게 물려서 마비된 사람처럼, 악인은 치명적인 독이 지금도 자신의 혈관 속을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번영하던 악인이 평화롭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들의 평화는 끝없는 죽음으로 이끄는 일시적인 평화일 뿐이다. 영원한 멸망이 악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아삽은 단 한 순간도 이 땅에서 행복한 악인을 부러워하지 않았다(21-22절).생명으로 이끄는 고통‘위트’의 이야기는 이제 비비안이 받은 항암 치료가 그녀를 일종의 구원으로 이끌어가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암에 걸리기 전 비비안은 비할 데 없는 재치를 통해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런 성공은 그녀로 하여금 자신만을 의지하게 만들었고 또 오만한(highbrow) 자만심으로 타인과 거리를 두는 관계의 단절로 이어졌다. 그러나 항암 치료가 끝날 무렵, 비비안은 그토록 자신하던 재치에 대한 확신은 떨어지게 되고, 오히려 별로 배운 거 없는(lowbrow) 간호사 수지를 어린 아이처럼 의존하게 된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어린아이처럼 바뀐 그녀의 변신이 완성된다. 애쉬포드 교수가 방문해서 존 던을 읽어주겠다고 말했지만, 비비안은 거부한다. 이 장면은 그녀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그녀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붙잡고 있던 번영의 수단을 거부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신 애쉬포드의 품에 안긴 비비안은 늙은 교수가 읽어주는 동화책을 듣는다.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집에서 도망칠 것을 꿈꾸는 새끼 토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생각을 알아챈 엄마 토끼가 새끼 토끼를 끝까지 쫓아가겠다고 말했을 때, 새끼 토끼는 이렇게 대답한다. “에이, 그냥 지금 있는 곳에서 엄마의 새끼 토끼로 사는 게 낫겠다.” 애쉬포드 교수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 이야기, 우리 영혼에 대한 우화 같지 않아? 우리의 영혼이 어디에 숨어있든지 하나님은 반드시 그 숨은 영혼을 찾아내시거든. 안 그래? 비비안?” 비비안은 교수의 말에 동의하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는다. 아삽도 그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잠시 무식한 동물처럼 행동했지만(22절), 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생각도 했지만, 그는 하나님이 결코 그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기뻐했다(23절).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가 가져다주는 세 가지 유익을 생각했다. 하나님은 (1) 아삽을 그의 손으로 지키신다, (2) 아삽의 길을 인도하신다, 그리고 (3) 아삽이 죽을 때 그를 당신의 영원한 안식처로 맞아주신다(23-24절). 헤아릴 수 없는 이런 축복을 자신의 힘과 지혜만 믿고 사는 가난한 악인과 비교해보라.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만으로도 번영하는 삶과 평화로운 죽음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무덤 너머에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실로 비참할 정도로 인간의 지혜는 부족하다.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다가 죽은 이들은 죽음이라는 짧은 잠을 자고 지옥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그들의 소망이 마침내 영원토록 이뤄졌다는 사실을 똑똑히 확인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비교를 하고 나서야 아삽은 자기가 처한 상황이 한때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쁨을 느낀다. 오히려 반대로, 그를 슬프게 만들었던 고통은 오히려 새로운 종류의 축복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하나님은 고통이라는 도구를 통해 하나님이 아닌 인간을 의지하는 처참한 구덩이에서 아삽을 들어올림으로 오로지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생명과 지속적인 만족을 알도록 하신 것이다. 감사함에 넘쳐서 그는 이제 이렇게 선언한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25-26절). 고대 희곡 작가인 아이스킬로스(Aeschylus)는 이렇게 말했다. “번영 속에서 삶을 마친 사람에 한해서만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번영(prosper)”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따라 이 말은 사실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아삽이 배운 것처럼, 우리는 그 번영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인간의 지혜와 재치를 감히 믿지 않는다. 인간의 지혜와는 달리 좋은 삶과 좋은 죽음은 악인이 누리는 평화로 정의되지 않으며, 의인이 견디는 고통 때문에 부정되지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외부 상황과 관계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27절)은 가장 끔찍한 고통이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것”(28절)은 가장 고귀한 번영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죽음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Good Death in Psalm 73번역: 무제
신학
구약
시편73편
죽음
아삽
고통의의미
천국과지옥
악인의번영
하나님의임재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까?
by 이승구
2020-09-27
하나님의 섭리는 온 세상을 창조하신 “선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후에 그것들을 우연이나 운에 맡겨두신 것이 아니고, 그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온 세상을 인도하시고 통치하셔서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어떤 일이라도 하나님의 질서 있는 관여 없이 일어나지 않게 하시는” 일이다. 성경 말씀에 따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은 다 이런 의미의 섭리를 믿어야 한다. 이런 성경적 섭리 이해는 기본적으로 몇 가지를 배제한다.성경적 창조와 섭리 이해를 가질 때 배제되는 사상들첫째로, 이 복잡한 세상이 그저 있게 되었고, 이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이 배제된다. 성경적으로 판단할 때, 하나님이 없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과 말일 뿐이다(시 14:1). 이 세상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무신론적인 생각을 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들은 이 세상이 말하는 “합리적”이라는 말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조정된 합리적인 판단에 의하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한다. 그러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 1:20)는 바울의 말이 심각한 말이다. 결국 모든 문제는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롬 1:28). 사실 여기서 “마음에”라고 번역된 말은 우리 말 성경 난하 주에서도 잘 밝히고 있듯이 “지식에”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일반적인 것이다. 그러니 “지식에서 하나님을 분별하거나 인정하거나 생각하기를 싫어하매”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1장 28-32절 말씀은 이론적 무신론과 실천적 무신론이 인간의 모든 악의 근원이 됨을 잘 지적하고 있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다.둘째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셨으나 그 후에는 그 피조계를 그냥 내어 버려두셨다는 생각이 배제된다. 특히 물론 그 이전에도 비슷한 생각이 있었으나 17세기 말에 시작해서 18세기에 만연해 나간 소위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배제된다는 말이다. 록크(John Locke)와 뉴톤(Isaac Newton)의 영향을 받아 출현한 이신론은 영국의 콜린스(Anthony Collins), 미들튼(Conyers Middleton), 톨랜드(John Toland), 틴달(Matthew Tindal), 쳡(Thomas Chubb), 그리고 울스톤(Thomas Woolston), 허버트(Lord Herbert of Cherbury), 프랑스의 볼테르(Voltaire), 독일의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 렛싱(Gotthold Lessing), 그리고 칸트(Immanuel Kant), 미국의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워싱턴(George Washington), 제퍼슨(Thomas Jefferson), 그리고 페인(Thomas Paine) 등이 그 대표자들이다. 대개 기독교권(Christendom) 안에서 자라나서 하나님과 그의 창조를 아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사람들 가운데, 창조 이후에는 일종의 자연 법칙이 주어져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그 자연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지 매순간 하나님께서 관여하시는 일은 없다는 생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이런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1642-1727)이라고들 논의합니다), 이런 것이 구체화된 것이 이신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자연적인 과정을 중요시 하니 이를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도 한다. 성경을 따라서 생각하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는 합리성(그러므로 잘못된 합리성)을 따라서 생각하다가 나타난 잘못된 생각이다. 이신론의 아이러니는 섭리는 부인하는 사람들이 창조와 창조자의 의도와 그 창조자의 존재는 인정하고 변호한다는 것이다. 대개 이신론은 초자연을 거부하면서 자연만을 인정하는 자연 종교(natural religion)와 구속과 이적과 기도 등을 거부하고 도덕률 중심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도덕 종교(moral religion)를 참된 종교로 제시하려고 했다.셋째로, 이 세상이 신과 동일시 될 수 있다는 고전적 범신론(汎神論)과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의 전개 과정이라는 헤겔적인 범신론, 그리고 이런 생각들에 대한 많은 공격과 비판을 감안하면서 근자에 나오는 이 세상의 과정이 하나님 자신은 아니지만 이 세상의 전개 과정 중에서 신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 또는 범재신론(汎在神論)이 배제된다. 근자의 만유재신론은 이 세상에 넓게 퍼진 생각이고 점점 더 영향력을 확대해 가기에 우리의 주의를 요한다.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적으로 믿는 사람은 만유재신론적 생각을 할 수 없다.성경적 섭리론의 의미이런 잘못된 사상들이 배제되고 성경이 말하는 대로 나아갈 때 우리는 다음 세 가지를 말하게 된다.첫째로, 창조 이후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보존하심을 인정해야 한다. 한순간도 하나님께서 보존하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존재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한다. 매순간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관하시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유지된다.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붙드시지 아니하시면 이 세상은 사라진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시편 기자와 같이 다음 같이 말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샘을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산 사이에 흐르게 하사, 각종 들짐승에게 마시게 하시니, 들 나귀들도 해갈하며 공중의 새들도 그 가에서 깃들이며 나뭇가지 사이에서 지저귀는 도다. 그가 그의 누각에서부터 산에 물을 부어 주시니 주께서 하시는 일의 결실이 땅을 만족시켜 주는도다”(시 104:10-13). 이 하나하나가 다 하나님께서 보존하시므로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스스로 존재하거나 유지해 갈 수 있는 것은 없다. 바울이 이테네의 아레오바고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가 그를[즉, 하나님을]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행 17:28)고 해야 한다.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과정을 그저 보존하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정하신 목적지로 이끌어 가시고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것을 통치하고 계심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온 세상을 통치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해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분이시다(엡 1:11). 온 세상이 그의 기쁘신 뜻대로 통치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이것을 “권능의 왕국”(regnum potentiae)이라고 해왔다. 이 세상의 되어지는 모든 일은 숨겨져 있지만 결국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그래서 옛날에 이것을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참으로 인정해야 한다.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위해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엡 1:10)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것이 궁극적 목적이기에 이 목적을 이루시려는 그 계획은 이미 창세전부터 있었던 것이다(엡 1:3). 이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그 경륜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이 이 세상의 역사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이 목적을 떠나서 발생하지 않는다. 우리로서는 그 모든 것을 능히 다 미루어 살필 수 없지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다(엡 1:11).셋째로,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역사하시지만, 대개는 이 세상의 과정과 함께, 그러므로 소위의 제2의 원인들(causa secunda)과 함께 섭리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즉 비상섭리와 일상적 섭리를 모두 다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직접적 역사를 비상 섭리(extra-ordinary providence), 즉 이적이라고 한다. 이것을 부인한 것이 앞서 말한 이신론이나 이신론을 향해 나가는 생각들이다. 필요하면 제2의 원인이 없이 또는 이 세상의 일상적 과정에 역행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가 없이도 마리아에게 수태되도록 놀랍게 역사하신 것이다. 또한 예수님과 사도들의 놀라운 이적들이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다. 이적은 우리의 필요나 우리의 열심이나 우리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일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시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이런 비상 섭리(非常攝理)를 제외하면 구체적인 과정이 이 세상의 제2의 원인들과 함께 일어나는 것이다. 이를 일상적 섭리(日常攝理, ordinary providence)라고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입장은 제2의 원인을 배제하지 않는다. 우리 부모님이 있어야 우리가 태어난다. 우리의 존재에 있어서 부모님이 제2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심지어 이적도 제2의 원인을 사용해서 일어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홍해를 가르신 사건도 다음과 같이 일어난 것이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마른 땅이 된지라”(출 14:21). 그러니 비상섭리가 아닌 일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섭리를 참으로 믿는가?이제 중요한 것은 이런 섭리를 과연 믿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가 없이는 그 어떤 일도 일어 날 수 없다. 그러므로 섭리를 참으로 믿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섭리를 참으로 믿는가에 달려 있다.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어야 한다. 사실 모든 것이 잘 될 때 하나님의 섭리를 말하고 믿는다고 하기는 비교적 쉽다. 물론 그런 순경(順境)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부인하는 이신론적 사고가 나타나고 한 것을 보면 순경 가운데서도 섭리를 믿고 말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그런데 지금과 같은 역경(逆境)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믿음의 행위이다. 우리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고 한 선배들처럼 우리는 모든 정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서 그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의존해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 신앙이 있다. 이 상황이야 말로 참으로 우리의 믿음이 있는지 없는 지가 드러나는 위기(crisis)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위기는 종국적인 위기(the final crisis)를 바라보며 우리에게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위기”라는 말이 “판단하다, 심판하다”라는 뜻을 지닌 헬라어 “크리노”에서 왔음을 잘 생각하면서 이 위기의 순간에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음을, 하나님의 섭리를 믿음을 드러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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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그 무게와 경이로움
by David Mathis
2020-09-25
오늘날 기독교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라는 말처럼 자주 거론되면서도 동시에 가장 이해되지 않는 말도 없을 것이다. 낙태를 반대하기 위해서, 사회 정의를 주장하기 위해서, 노인과 장애인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때로는 인간이 가진 모든 차이를 초월한 인간 보편의 가치를 강조하는 의미로 기독교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라는 구호를 외친다. 그건 맞는 말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이 말을 제대로 설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행여 그런 경우에도 단지 추측에 불과할 때가 많다. 누군가는 이 말을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로, 의도적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라고 주장한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자유롭고” 결코 본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럼 인간의 보이지 않는 이런 능력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설명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성경은 왜 이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 걸까? 픽셀, 그림 그리고 인간놀랍게 들릴지 모르지만, 간단하게 말해 명시적인 주제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은 결코 성경의 중요 주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주제는 성경의 시작 부분에서 가장 극적으로 선포되는데, 그것도 다른 이가 아닌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이다. 불과 세 줄에 불과한 하나님의 시는 신학적 인류학(인간이 무엇인가에 관한 기독교적 교리)의 토대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6–27).여기서 첫 번째로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형상이 무엇인가?” 형상, 즉 이미지는 스크린에 넘치고 우리가 보는 잡지를 채우고 있으며, 또한 길가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고판에도 가득하다. 이런 이미지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아니, 너무도 넘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이미지에 점점 더 둔해지고 있다.고대 시대에는 이미지가 픽셀 또는 그림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동상 또는 기념물로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이교도는 보이지 않는 신을 표현하기 위해서 물리적이고 시각적 표현과 같이 조각된 이미지를 사용했다. 우리는 당시에 이해하던 형상의 의미인 바로 이런 맥락에서 한 분이자 참 하나님이 성경 첫 장 속 클라이막스에서 하신 말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를 바라보아야 한다. 타락한 인간이기에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미지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참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만드셨고, 그 결과 이 세상에서 당신을 드러내도록(image himself) 하셨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분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해 살아서 숨 쉬고, 말하고, 노래하며 움직이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이 하나님을 기억하고 경외할 수 있도록 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닮고, 드러내고 오로지 그분만을 향하고 따라가도록 만드셨다. 그가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의 행동과 말을 통해서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어, 그들에게도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으로 그분께 감사하고 경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드러내는 이미지가 위대한 누군가를 떠올릴 뿐 아니라, 존경할 만하고 칭찬할 만한 그분의 특성까지 드러냄으로 결국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의 이미지가 떠올리는 그 주인공을 경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주제가 비록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성경에서 여전히 매우 심오한 주제인 이유이다. 인간 생명의 가치명시적으로 드러났다는 측면에서 볼 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주제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에는 단지 두 개의 구절이 더 있을 뿐인데, 그 두 구절 다 창세기 초반에 등장한다. 먼저 창세기 5장 3절이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여기에 나오는 자기의 모양 곧 형상이라는 구절은 창세기 1장 26절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비록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야 한다는 인간의 소명은 아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죄로 인해서 인간이 하는 말과 행동은 오히려 하나님을 드러내기는 커녕 그 반대의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다는 구절이 나오는 곳은 창세기 9장 6절인데, 방주가 땅에 자리를 잡은 후 노아에게 주어지는 말씀 속에 나온다. 이 말씀 역시 하나님의 음성이고 매우 시적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의 독특함과 존엄성 때문에 다른 인간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은 가장 중대한 죄악이며, 그것은 사람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서 짓는 죄악이다. 그 죄악이 너무도 중하기에 다른 사람을 죽인 사람은 반드시 죽음으로 그 죄값을 치러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생명이 가지는 가치이다. 이렇게 딱 세 번에 걸친 언급이 있고 구약 성경에 그 이후로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구절이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거의 그렇다는 것이다.이미지가 손상된 자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이라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지만 비슷한 개념을 가진 구절은 계속 등장한다. 예를 들어서 시편 8편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은 없지만 누가 봐도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가진 특별한 위치를 찬양하는 구절이 나온다. 그 뿐 아니라 “조각된 형상” 그리고 “금속 형상” 이라는 구절 등을 통해서 “형상”이라는 단어는 쉰 번 이상 구약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미 앞에서도 암시했듯이, 여기에는 연관성이 있다. 두 번째 계명과 함께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4-5). 물론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온 나라가 다 함께 저지른 죄가 되었다. 시편 106편은 출애굽기 32장 사건을 말한다.“그들이 호렙에서 송아지를 만들고 부어 만든 우상을 경배하여 자기 영광을 풀 먹는 소의 형상으로 바꾸었도다 애굽에서 큰 일을 행하신 그의 구원자 하나님을 그들이 잊었나니”(시 106:19–21).그 결과는 민족 전체가 거의 멸망당할 뻔한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멸하리라 하셨으나 그가 택하신 모세가 그 어려움 가운데에서 그의 앞에 서서 그의 노를 돌이켜 멸하시지 아니하게 하였도다”(시 106:23).그 이후로도 우상을 만들고 싶은 유혹은 이스라엘을 가만두지 않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그들이 결과적으로 죄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그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다른 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그것은 죄가 가진 반전적이고 비합리적이고 자기 파괴적인 본질의 결과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한탄했다.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2–23).그 형상을 보라 그리고 수 세기에 걸친 침묵이 지나고서야 바울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깊은 진리가 세상 속에 드러났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를 통틀어서 거룩한 형상(divine image)을 아홉 번 언급했는데, 그것은 다음 두 개의 명확하고 확실한 계시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서였다.1. 예수님이 바로 그 형상이다첫 번째로 예수님,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두 번에 걸쳐서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이 진리를 드러냈다.“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골 1:15).“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사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단지 성자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되신 성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대해서, 그 전까지 성경이 명확하게 주지 않았던 바로 그 수수께끼에 대한 위대한 답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예수님은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이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로서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주는 완벽하고 완전한 구현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성자의 인격을 통해서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하나의 창조물, 즉 “그의 형상을 닮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바로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첫 번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면서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하신 말씀, “자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지었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인간이라는 것은 피조물이자 몸과 영혼을 가진 존재이고, 하나님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계심으로 스스로 그런 존재가 되셨다. 인간의 몸을 설계하시고 만드셨을 때 이미 하나님은 언젠가 이 세상에서 피조물이 된 당신의 아들이 바로 그 몸을 통해서 완벽하게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고, 죽기 전날 이렇게 기도했다.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요 17:4; 참조 17:6,26).하나님의 형상이신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 완벽하게 살았을 뿐만 아니라, 조금도 손상되지 않은 완전한 삶을 산 그의 생명을 그의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기꺼이 바쳤다(요 12:27-28).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을 손상하고 훼손시킨 죄로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애초에 인간이 창조된 목적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명을 우리가 완수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셨다.2. 오로지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운명은 결정된다바울이 두 번째로 드러내는 진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기독교인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작은 예수들”이다. 예수님은 닮아야할 형상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이 세상으로 비취도록 하는 유일한 등불이다(계 21:23).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되었는데, 그건 그리스도를 나날이 점점 더 닮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때에 가능하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확실해진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전 15:49). 이 모든 것은 다 “주의 영광을 바라볼 때” 가능하다. 그것은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 하나님의 형상을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게”(고후 3:18) 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변화되어야 한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골 3:9–10).우리의 지성, 마음 그리고 의지?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이 되었다는 사실(그 결과 우리는 이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드러내는 능력을 회복하였다)에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형상이 가지는 본질적인 의미를 찾았다. 그러나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아있다. 인간성을 구별하는, 인간만이 가진 보이지 않는 특성들은 무엇이 있는가? 그러니까 신학자와 평신도 구분없이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말을 들었을 때 가지게 되는 생각과 느낌, 또는 의지와 같은 특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그토록 우리가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또 의지력을 갖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 왜 중요한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예수님이 얼마나 완벽하게 하나님을 드러냈는가? 의심할 바 없이, 그의 지성과 마음 그리고 의지는 다 관련이 있다. 형상은 보이는 것이지만 지성과 마음은 오로지 행동이나 말을 통해 겉으로 드러날 때에만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과 관계성을 가질 수 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생각과 감정 또는 의지가 그 자체로는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능력이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한 하나님의 부르심과 전혀 관련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실상 인간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고 또 선택하는가는 결국 이 세상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말과 행동에 의미를 주는 원천이 된다. 인간으로서 내면의 삶이 가진 중요성을 알기에 우리는 말과 행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생각하고 묵상하고 숙고하는 존재이기에 거기에 따른 말과 행동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는 말의 의미를 단지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보고 들을 수 있는 말과 행동의 영역으로만 축소해서는 안 된다. 빛이 있으라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회복된 존재로서 우리가 져야할 사명을 미리 알고 계셨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가 할 일이다. 빛을 비춰야 한다.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은 우리의 임무는 이 땅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천국에서 조차 결코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지루한 임무로 전락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지루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안에는 우리가 영원히 보고 즐거워할 것으로 가득차 있고, 그렇기에 그 형상을 닮은 우리가 보여줄 것은 끝이 없다. 우주에서 가장 흥미롭고, 끝이 없고, 창의적이며, 끊임없이 열광하도록 하는 부르심은 바로 그가 창조한 세계 속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가시적으로(그리고 청각적으로) 형상화(메아리가 치도록)하는 사명이다. 이것은 놀랍도록 존엄한 일이며, 그렇기에 인간 존엄성을 위한 가장 큰 토대가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이 세상에서 그의 특별한 대표자로 설계해서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재창조까지 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창조된 아담과 하와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더 위대한 이유는 우리가 죄없는 하나님의 형상 그 자체인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예수님의 형상을 나날이 닮아가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형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따라서 지금부터는 태어나지 않은 태아, 가난한 사람, 학대받는 사람, 장애인, 노인, 외국인 체류자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삶과 존엄성과 정의를 옹호할 때, 우리의 호소가 단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정도로 그쳐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으로서 그러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할 말이 훨씬 더 많고, 또한 그 사실은 영광스럽기 그지없다. 나쁜 소식을 먼저 보도록 하자. 죄로 인해서 우리가 가졌던 하나님의 모든 형상이 다 오염되었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이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이 우리가 닮아야 할 형상으로 오셨고, 이제 그분은 인간의 운명을 나누는 경계선(dividing line)이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창조의 정점을 능가하는 인간 존엄성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형상” 이하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면 우리는 그 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꿈꾸기에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말하는 것은 단지 창조로의 복귀가 아닌, 그 이상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창세기 1장으로 “돌아가는 것” 이상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으로 우리는 죄와 구원에 대해 말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될 수 있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리고 아버지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인, 실제적이고 가시적이며 희생적인 사랑과 선한 일을 우리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mages of the Invisible God: The Weight and Wonder of Being Human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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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 ‘언약과 성취’
by 고상섭
2020-09-22
복음은 단순하지 않다. 틀에 맞춘 복음은 늘 식상해진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동일한 복음의 선포는 오늘날 그리 효과적이지 못하다.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성경은 복음을 단일표준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복음의 풍성함을 깨닫고 전하려면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을 통해 복음의 씨줄과 날줄을 엮을 수 있어야 한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다양한 주제들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를 세 가지 주제로 소개하고 있다. 추방과 귀향, 언약과 성취, 왕국과 도래이다. 추방과 귀향에 대해서는 2020년 3월 19일 칼럼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추방과 귀향’에서 다루었고 오늘은 ‘언약과 성취’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언약과 성취(The covenant and its fulfillment)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약속하신 언약과 그것의 성취로 이루어져있다. 구약과 신약이라고 말할 때도 구약은 옛 언약이고 신약은 새로운 언약을 의미한다. ‘추방-귀향’의 주제에서 우리에게 세상을 치유할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언약-성취’는 우리가 법을 어긴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 창조의 목적은 무엇인가?여호와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언약에 신실하신 분임을 드러낸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아무 약속이 없으셔도 피조물은 전적으로 창조주에게 순종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를 낮추심으로 피조물인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 인간은 하나님과 신실한 언약적 사랑의 관계를 맺는 대상이 된 것이다. 2. 죄의 정의와 결과는 무엇인가?죄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죄에는 기준이 있다. 만약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있다면, 사랑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을 넘어서는 적극적 범죄이고, 사랑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소극적 범죄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 단순히 한 번의 실수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신뢰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된 것이다. 모든 죄는 교만이 뿌리이며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악한분노, 선한분노’에서 자동차를 운전하다가 차가 막힐 때 짜증과 분노가 나는 이유는 내 마음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며, 내 마음대로 세상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내가 하나님이 되어서 내 마음대로 세상을 통제하고 싶은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3. 이스라엘은 어떻게 했는가?이스라엘은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그래서 율법을 수여받았지만 그 율법을 지키지 못하였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2)성경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이 결혼 언약이었으며, 하나님이 남편이 되었지만 언약을 깨뜨렸다고 고발하고 있다. 이제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긴 대가를 받아야 할 운명에 처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약을 깨뜨린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고, 그럼에도 공의를 지키셔야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다.4. 예수님은 무엇을 행하셨는가? 어떻게 하나님은 자신의 공의를 지키시면서도 그의 백성을 사랑하실 수 있는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은 언약 속에서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사야는 그 해결책을 말하면서 언약의 주님과 고난당하는 언약의 종을 둘 다 강조한다. 예수님은 언약의 저주를 담당하심으로써 언약의 축복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갈 3:14-15)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언약을 지키지 못하는 저주를 받는 언약의 법칙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언약을 지키지 못한 우리를 대신해서 형벌을 받으시고 자신이 지키신 언약의 의로움을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은 조건적인가 무조건적인가?‘ 라는 질문에 둘 다라고 대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순종적이고 신실한 언약의 종으로서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을 받으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언약의 요구 조건들을 완벽히 성취하셨다. 그래서 그분은 신실한 언약의 주님으로서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5. 마지막 날의 언약의 회복은 어떻게 성취되는가?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입맞춤한 곳이다. 하나님의 법과 사랑이 동시에 만족되었다. 언약을 깨트린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도시에는 더 이상 저주도 정죄도 없다. 유월절의 어린양 되신 그 분이 우리의 모든 저주를 받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분의 백성과 신부가 될 것이며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 언약과 성취의 역사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 완성된다. 우리가 본래 지음 받은 궁극적 사랑의 관계가 성취되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아담의 저주가 언약에 순종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회복된 것이다. 성경은 언약하시는 하나님과 그것을 깨뜨리는 인간, 그리고 우리를 회복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이다. 이 모든 언약을 이루는 힘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 언약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칼빈의 고백처럼 지옥이 없을 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죄를 멀리 하는 것이다. 언약을 깨뜨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헤세드의 사랑 때문에 언약이 성취되는 것이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오래된 찬송가 가사처럼 주 달려 죽은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는 내 삶의 모든 헛된 것들을 버리게 된다. 언약을 깨뜨린 인생들을 언약에 순종하는 사람들로 삼으시기 위해 가장 고결하신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
복음
십자가
창조주
악한분노선한분노
데이비드폴리슨
마지막날
칼빈
언약
성취
혼인잔치
십계명에 나타난 복음
by 박용기
2020-09-20
복음은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 구약에도 나타난다.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모든 민족이 그를 통해서 복을 받는 ‘복음’(갈 3:8)이 아브라함에게 전해졌다고 했다. 복음은 모세의 율법에도 담겨 있고 십계명에도 녹아 있다. 복음의 안경을 쓰고 십계명과 율법을 살펴보자. 1. 십계명은 복음으로 시작한다십계명에는 ‘하라’는 두 가지의 명령과 ‘하지 말라’는 여덟 가지의 명령이 나온다. 그러나 십계명은 이런 명령들 이전에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먼저 선포한다. 구약성경에서 복음은 내가 행한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신 일이다.“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십계명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행해야 할 일보다 먼저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선포되고 있다. 김형익 목사는 ‘율법과 복음’에서 율법과 복음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은 문장구조로 설명한다. 율법은 ‘만약 이렇게 행하면, 그러면 살리라’(if/then)는 문장 구조를 갖지만, 복음은 ‘내가 너를 위해서 다 했다. 그러므로 너는 살 것이다’(because/therefore)는 순서를 가진다고 강조한다. 십계명에서 이런 복음적 문장 구조가 발견된다. 십계명은 ‘만약 네가 이 일을 행하면 그러면 내가 너를 구원 하겠다’로 시작하지 않는다. ‘나는 너를 구원했다. 그러므로 너는 살았다’는 복음의 구조로 시작한다. 2. 십계명은 인격적인 관계에서 시작된다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네 하나님 여호와’(The Lord your God)로 소개하며 시작한다(2절). 이것을 행하라, 행하지 말라는 명령 이전에 하나님이 누구 신지를 먼저 소개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구원자 하나님이시다. 출애굽 3개월 만에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창세기 족장들이 경험하지 못한 구원자 하나님을 경험하여 알게 되었다.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십계명에 나타나는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를 모른 채로 이것을 행하라, 저것을 행하지 말라는 명령은 십계명을 오해하게 만든다.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관계가 먼저 선포한다. 3. 십계명은 매력적인 공동체를 만든다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출 19:6)의 역할을 감당하게 하려고 십계명을 주셨다. 십계명은 신자의 구원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신자의 구원이 외부로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다. 십계명은 구원받은 백성이 이 땅에서 어떻게 이웃을 배려하고 살아야 하는지 그 기준을 알게 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거짓증거 하지 말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는 명령은 구원받은 개인이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는 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세상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고 명령하셨다.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만, 사람들 앞에서 ‘행함’을 통해서 의로움을 인정받게 된다(약 2:24). 4. 십계명은 ‘계명’을 포함하는 ‘말씀’이다“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And God spoke all these words), 십계명은 히브리 성경에서는 ‘열 마디 말씀’(아세렛 하데바림, The Ten Words)표현된다(출 34:28; 신 4:13; 10:4). ‘계명’은 히브리어로 ‘미츠봐’(mitswah)이다. ‘계명’은 종종 ‘말씀’(다바르)과 동의어로 사용되나, 일반적으로 계명은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을 의미하며, 말씀은 계명을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된다. 십계명에는 열 가지 ‘계명’도 있지만, 구원자 하나님(2절), 창조주 하나님(11절)을 소개하는 말씀과 하나님이 그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말씀도 포함되어 있다. 5. 모세가 설교한 복음 모세는 신명기에서 신세대를 대상으로 다시 한 번 ‘말씀’(다바르)을 선포한다(신 1:1). 모세는 율법을 선포하는 한복판에서 갑자기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께서 장차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을 그 백성에게 알게 하실 것이며(신 18:18),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신 18:15)라는 말씀을 전한다. 베드로와 스데반은 설교를 통해서 모세의 율법에 예언된 선지자가 바로 예수님이며(행 3:22; 7:37), 그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율법이 완성된다는 복음을 설교한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그의 설교를 마무리하는 절정에서 다시 한 번 복음을 선포한다. 모세는 율법이 지키기 어려운 것도 아니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황당한 말씀을 전한다(신 30:11-14). 어떻게 인간이 ‘말씀’과 ‘계명’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모세는 이런 말씀을 전한 배경에는 하나님이 행하실 미래적 사건이 있다. 하나님이 장차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할례를 행하셔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신 30:6)이라는 미래적 사건을 전제해서 율법을 전했다. 바울은 이 말씀(신 30:11-14)을 예수님에게 적용하여 ‘말씀(로고스, 다바르)이 네게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니 …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을 선포했다(롬 10:8-10).모세가 선포한 ‘말씀’은 토라, 율법으로도 불린다. 히브리어 성경에서 토라(torah)는 130회가 사용되는데, 원래 의미는 교훈(instruction), 지시(direction)이다(The Lexham Bible Dictionary). 예수님은 ‘모세의 토라’를 구약의 처음 다섯 권의 책으로 말씀하신다(눅 24:44). 유대인들은 토라를 잘 지키기 위해서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에서 248개 ‘하라’는 명령과 365개 ‘하지 말라’는 총 613개의 명령을 찾아낸다. 이 613개 명령이 강조되면서, 토라는 후대 70인역 헬라어 성경에서 율법(노모스, law)으로 번역된다. 토라는 넓은 의미로 모세 오경, 좀 더 좁히면 613개 율법들, 더 축약하면 십계명이 되며, 예수님은 율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다(마 22:3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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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시민의 두 정체성: 소금과 빛
by 이춘성
2020-09-18
1. 하나님 나라와 정체성우리는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자주 한다.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개념은 18세기 이후에 서구 유럽에서 만들어졌다. 일종의 시민 구성원들 사이의 계약과 관련되어 있다. 국가의 3대 요소 하면 국민, 영토, 주권이라 한다. 거주지가 있고 주권을 지닌 사람들이 있으며 이들 간의 계약 관계 속에서 정부와 국가가 탄생한다. 하지만 고대에는 국가의 개념이 지금과 차이가 있다. 고대의 나라란 국가(Nation)보다는 왕국(Kingdom)에 더 가깝다. 약 2000년 전의 나라는 지금처럼 획일화된 개념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와 개념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대인들에게 나라는 다윗 왕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의 개념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로 이후에 메시아의 의미가 더하여져, 국가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메시아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통치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은 지금도 적용된다. 현재 우리 신자들이 알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란 예수님을 왕으로 섬기면서 그분의 통치 아래 개인의 주권을 굴복시키고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나라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는 단지 구호로 끝날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내용이 있다. 그것을 필자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윤리적 정체성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산상설교의 시작 부분의 소금과 빛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마 5:13-16)는 이를 명확하게 규정한다. 예수님은 신자의 정체성을 두 단어로 규정하셨다. ‘소금’과 ‘빛’이다.2. 로마의 소금과 하나님 나라의 소금첫 번째는 “너희는 세상(땅)의 소금이다. Ὑμεῖς ἐστε τὸ ἅλας τῆς γῆς·”라는 선언이다. 이 문장을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너희는 땅의 소금이다.” 이다. 땅이란 단어는 세상의 물질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세상을 땅 혹은 흙이라는 물성을 지닌 물질로 이해하고 이 물질이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다른 물질이 소금이라는 것이다. 또한 소금의 짠맛은 그 특유의 짠맛 때문에 물질이 변질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도록 만들어 준다. 구약 성경에서 소금에 대해 언급된 구절을 찾아보면 대부분 변치 않고 원래의 모습을 지키는 소금의 역할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런 소금의 기능을 성결하게 하는 기능이라고도 규정한다(출 30:35).당시에 이스라엘과 주변의 사람들은 사해에서 생산된 소금을 사용하였다. 바닷물을 정제하여 소금을 만드는 기술은 이미 로마에서 상용화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로마는 소금을 생산하는 기술 때문에 막대한 부를 얻었고, 그 후에 세계를 통치하는 로마의 평화란 뜻의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로마의 막대한 군사력을 통한 평화의 시대, 그러나 로마만의 평화의 시대를 견인한 권력은 소금에서 나왔다. 라틴어 ‘sal’은 소금이란 뜻으로 여기에서 파생된 단어가 솔져(soldier), 샐러리(salary), 샐러드(salad) 등의 영어 단어들이다. 로마에서 소금을 임금으로 받았던 군인들을 솔져라 불렀으며, 그 군인들의 급여가 샐러리였다. 후에 소금에 절인 채소를 샐러드라고 불렀다. 로마는 소금 생산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으로 세계 제일의 강국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소금이 지니는 강력한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예수님의 선언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들렸을까? 예수님의 소금 정체성의 선언은 하나님 나라는 소금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로마의 막강한 힘에 대항할 만큼의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정체성에 대한 선언은 우리가 지금 느끼는 충격보다 더 강력하였다.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세상의 권력을 넘어서는 더 큰 권위와 힘을 의미하였다. 소금으로 민족과 종교를 지배하고 굴복시키는 로마의 권력과 권위가 아닌 이보다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3. 참된 권위와 거짓 권위만약 소금이 특유의 짠맛이 없다면 그 소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님은 그러한 소금은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사해에서 생산되는 소금은 순도 높은 로마의 소금과 달리 순도가 높지 않고 불순물을 많이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소금이 짠맛의 기능을 충분하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런 소금은 소금이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소금처럼 투명하지만, 물에 녹지 않는 알갱이에 불과하며, 단지 쓰레기 덩어리였다. 로마의 권력, 권위에 대항하여 더 큰 권위가 있다는 것을 세상에 알려야 할 제자와 신자들이 세상의 순도 높은 소금 보다 그 순도가 낮고 불순물이 가득해서 정작 소금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상의 웃음거리, 더 나아가 예수님을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의 소금이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순도 보다 더 높고 성결한 그 무엇을 요구한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권위가 세상에 세워지는 것이다.4. 소금의 존재감과 지혜예수님이 제자들을 소금이라 규정하실 때, 이들은 자신의 존재감이 상승했을 것이다. 소금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로마의 막강한 소금의 권력에 대항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쓸모없는 소금도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제자 중에 소금처럼 생긴 쓸모없는 소금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금이란 무엇을 은유하고 있는 것일까.성경학자들은 소금이 주는 은유가 지혜를 가리킨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당시 랍비 문헌을 연구하면 소금을 지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골로새서 4장 6절에는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는 소금이 말, 더 자세히는 말의 내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말로 표현하는 지혜를 의미한다. 프란스(R. T. France)는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하였다. 어리석은 자, 지혜 없는 자가 짠맛을 잃은 소금이다. 그러므로 신자의 존재감, 자존감은 지혜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자의 존재를 세우는 지혜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제자들, 더 나아가 인간은 하나님에 대한 앎을 통해 순도 높은 소금의 존재감과 기독교 윤리를 세운다.5. 그리스의 빛과 하나님 나라의 빛두 번째로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Ὑμεῖς ἐστε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라고 선언하셨다. 이것도 직역하면 “너희는 질서의 빛이다.”로 번역할 수 있다. ‘세상’으로 번역된 코스모스(cosmos)는 ‘질서’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에도 구체적인 통치 질서와 법이 있다. 그리고 ‘빛’은 이 질서를 세상에 밝히고, 알리는 역할을 한다. 당시 그리스 철학자들도 ‘빛’을 ‘이성’, ‘오성’의 유비로 사용하였다. 이는 자연의 법칙과 인간 삶의 원리(윤리)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능력은 아무에게나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 성인 자유인 중에서도 소수의 철학자에게만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해 “너희는 질서를 찾고 깨달을 수 있는 빛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라고 선언하신 것이다.사실 예수님은 이러한 능력이 자신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9:5;요 12:35-36, 46).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예수님은 세상의 참 빛이다. 이 세상의 질서와 원리를 밝히는 참 빛이 예수님이다. 만약 어둠 속에서 길을 찾던 어떤 여행자에게 빛이 비치고 그가 가야할 길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이것은 이들에게 복음일 것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고 복음이다.6. 빛을 본 사람의 삶빛, 바로 복음을 접한 자의 삶이 요한복음 9장에 나와 있다. 예수님은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어떤 사람을 만났다. 이때 난데없이 제자들 사이에서 신학 논쟁이 일어났다.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인 자는 왜 시각장애인이 되었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들의 부모나 조상의 죄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 사람의 죄 때문일 것이라고 하였다. 이때 예수님은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이 된 원인을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사람을 통해 앞으로 하나님이 하실 놀라운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이들의 대화의 주제를 바꾸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맹인의 눈에 진흙을 바르시고 실로암 호수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다. 이 사람은 말씀대로 하였고, 그는 눈을 뜨고 세상을 보았다.그런데 이 기적이 일어난 때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바리새인과 율법 학자들은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고 빛을 보았다는 놀라운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시 신학 논쟁을 시작하였다. 율법을 어긴 사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논하였다. 예수님과 시각장애인 모두 처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였다. 이들은 기적이 일어나고 진리의 빛이 비취는 데도 이를 보지 못하는 영적 시각장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이었던 자는 바리새인 앞에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다.“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요 9:30–33).바리새인은 진리를 말하는 시각장애인을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 빛을 본 자들, 빛을 통해 사실을 본 자들은 그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자신이 본 빛을 증거 한다. 그래서 그들도 그 빛이 된다. 예수님은 자신이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행 13:47) 바울과 바나바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이것은 예수님이 모든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에게 주신 그들의 정체성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진리를 알리고 그 길로 인도하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은 신자의 삶의 선택이 아니라 존재 이유이며 목적이다. 하지만 빛과 소금의 인생을 살 때,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7. 도덕적 우월주의가 아닌 감동을 통해(소금과 빛의 역할)예수님의 삶은 빛이 되어 스스로 빛나고 주목받는 인생이 아니었다. 우리는 빛이라 하면 주목받고 돋보이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예수님은 주변을 밝게 하여 빛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방향을 알게 하는 것이 빛의 역할이라고 가르치셨다. 우리는 종종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서 주변의 사람들을 정죄하고 죄인으로 낙인찍는 일을 하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도덕적인 원리와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은 자신의 의를 자랑하지 않는다고 가르치셨다. 그러기에 이들은 빛의 자존감을 자랑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이 하나님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비추는 역할을 한다. 이것이 기독교의 겸손이다. 교만한 빛은 빛이 아니다. 나만을 따라오라는 것, 주목하라는 것은 기독교의 빛이 아니라 세상 나라의 빛이다. 하나님 나라의 빛은 내가 아닌 타인과 하나님을 빛나게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 주변에 있으면 그 사람은 그가 당연히 가야 할 방향을 찾고 성부 하나님을 만난다.뉴욕 시 한 가운데 위치한 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를 목회하는 팀 켈러(Timothy J. Keller) 목사는 성경의 복음과 세상의 복음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며, 더 나아가 서로 대척점에 있다고 말하였다. 켈러 목사는 1997년 5월 4일 주일 예배 “Thomas Meets Jesus”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상의 복음은 ‘나(I)’, ‘자아(ego)’에 대해서 말하지만, 예수님의 복음은 ‘그(He)’에 대해서 가르친다고 설교하였다. 복음은 내가 아닌 나 밖의 존재에 대한 소식이며, 관심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온통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무엇을 먹을지, 내가 누구인지 등 인간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다. 정작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를 벗어나야 함에도 말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나 밖의 존재’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기독교의 복음은 나를 벗어나 나 밖의 어떤 존재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 나와 우리를 보게 한다. 만약 기독교가 세상과 같이 나를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나’라는 유사 복음을 말하는 아류 중의 하나일 뿐, 유일한 ‘그 복음’(The Gospel)이 될 수 없다. 오직 기독교만이 ‘나’가 아닌 ‘나 밖’을 보게 한다. 그래서 기독교는 나 밖의 두 존재를 인식하게 한다. 하나님과 세상의 타자들이다. 먼저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만난다. 예수님의 시각으로 타인을 마주하고 세상을 바라본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다시 어려움에 직면한다. 예수의 눈은 있는데, 예수님의 손과 발은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괴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빛이라는 증거이다. 빛과 소금의 삶을 매진해야 하는 우리 삶의 이유이다. 빛이 눈에서 손과 발로 내려 올 때까지…. 그렇게 하여 예수님의 말씀처럼 빛과 소금의 정체성은 세상을 감동시킬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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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논쟁
팀켈러
리디머장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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