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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차원에서 살펴보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by David Strain
2019-04-29
나는 3D 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그런 타입의 영화는, 그저 돈만 쓰게 하려고 만들어진 인위적인 영상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만 아플 때가 많다. 화면이 그럴 듯하게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런데 우리 애들은 나처럼 냉소적이지 않다. 오히려 3D 영상에 넋을 잃곤 한다. 영화 속 세계를 스크린에서 입체적으로 경험하는 기분이 말 그대로 새로운 차원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교리를 살펴볼 때도, 신약성경이 세 가지 차원에서 그 가르침을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면 좀 더 생생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말하자면 3D 렌즈로 이 교리를 들여다보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색감과 깊이가 더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그 세 가지 차원에서 첫 번째로 살펴볼 부분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 즉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선택 받았다는 의미의 연합이다. 에베소서 1장 3-6절은 그 진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 1:3-6). 여기서 바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칼빈은 다음과 같이 아름답게 표현한다.“바울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택하심을 받았다고 가르칠 때, 그는 우리 편에 있는 어떤 가치를 고려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성부 하나님이 아담의 후손 가운데 선택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하나도 찾을 수 없기에, 기름 부음 받은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생명의 교제 가운데로 부를 사람들을 그 몸의 지체로서 선택하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신자라면 자신의 힘으로는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없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고귀한 기업을 얻도록 하나님께 택하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성부 하나님은 저주받아 마땅한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 이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다든가 결국에는 그분을 믿게 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아시고 그 믿음 때문에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미리 정하신 바대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자신에게 순종하고 피 흘려 죽은 후에 부활하리라는 사실을 미리 아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이 정하신 희생양, 곧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공로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신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창세 전에, 곧 영원한 차원에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두 번째로 살펴볼 차원은, 우리가 구속사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연합으로 인해 시간 속에서 펼쳐진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은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된다. 바울은 언제나 그리스도인의 정체를 묘사할 때, 다름 아닌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함께 장사되었으며,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원인이 된다(롬 5:19).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순간에 그분과 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살아있을 수 있는 근거가 된다(엡 2:4-6). 마찬가지로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엡 1:7)을 얻게 된 이유도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공생애 초기부터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대표할(representative) 뿐 아니라 대신하는(substitute) 자로 사역하셨다. 이런 차원에서 사탄이 광야에서 그분을 시험한 사건은 단지 유혹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된 사례가 아니다. 그 사건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로서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대표하여 시험을 당하며 하나님께 순종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아담(눅 3:38)은 타락하기 이전 세상에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에 실패하였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이스라엘 백성(출 4:23)도 시내 광야에서 그 순종을 이루는 일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순종하셨다. 그분이 성취하신 순종은 스스로를 위해 행하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택하신 목적대로 자신 안에 있는 자들, 곧 자신이 대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해 행하신 순종이었던 것이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보여 주는 세 번째 차원은,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차원에 기초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를테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죄인들을 선택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과 계획(첫 번째 차원)에 그 근원을 두고 있으면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대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과 죽음(두 번째 차원)을 통해 확립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바로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마음과 생활 가운데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말한다. 우리는 이를 경험적 또는 실존적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연합의 차원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신 모든 역사적 사건은 현재적으로, 경험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우리를 위한 일들로 적용된다. 바로 이 연합을 통해 우주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계획된 구속 언약의 영원한 경륜이 성취되기에 이른다. 에베소서 2장 4-10절은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낸다.“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4-10).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게 될 때, 그 선물에는 복음 가운데 우리에게 주어지는 믿음도 포함된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이때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우리를 연합시키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이다. 이는 요한복음 14장 16-18절에서 언급된 약속이 성취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리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6-18). 여기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로 오신다고 한 그 약속은 다름 아닌 그분 자신이 “또 다른 보혜사”라고 칭하신 “진리의 영”을 통해 성취된다. 바로 이 그리스도의 영, 즉 아들의 영은 우리에게 구속의 은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누리게 하신다. 왜냐하면 그 영을 통해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알아가며 깊은 사귐을 경험한다. 곧 그분의 의는 우리의 의가 되며 그분이 지니신 부활의 생명도 우리가 소유하게 된다. 그리하여 거룩한 성장을 통해 그분을 닮아가는 길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 아들의 신분을 누리게 된다. 더 나아가 그분의 영광스러운 임재 가운데 우리도 영화롭게 되어 마침내는 그분의 빛나는 광채와 기쁨을 반영하며 상급을 얻게 되리라는 확신을 얻는다. 이 모든 일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 가운데 이루어진다. 이렇듯 우리의 생명은 그분과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 3:3).그러므로 주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 세 가지 차원에서 보게 하시기를 소망한다. 즉 영원 속에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현재의 경험 속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이러한 관점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바라본다면, 머지않아 우리 눈앞에는 경이와 아름다움이 가득하고, 영원한 안식과 평안이 샘솟으며, 나아가 참된 만족이 기다리고 있는 새로운 전망이 펼쳐지게 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Union with Christ in 3-D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그리스도
연합
바울
구속사적
자유의지
에베소서
예수님은 왜 성령을 필요로 하셨는가
by Mark Jones
2019-04-25
흔히들 그리스도가 기적을 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다. 그러나 굳이 논쟁을 하자면, 그리스도의 신성은 언제나 필연적으로 그의 인성을 통해서 발현되었다. 따라서 기적을 행할 때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는데, 특히 그리스도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에 대해 말하는 많은 본문을 읽을 때면 그렇다. 만약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이신 분이 인간 본성에 직접 작용하고 일하셨다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진지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도대체 그리스도의 삶에서 성령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탁월한 신학자를 포함해 많은 크리스천은 그리스도의 인성과 사역을 이야기할 때 성령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곤혹스러워 한다. 성령에 의한 구세주예를 들어, 로마 가톨릭이나 루터교 신학자처럼 전통적인 그리스도론(christology) 기본에 의거한 경우라면 그리스도의 삶에서 의미있는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은 힘들다.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의 은사와 은혜(예를 들어, 신앙과 희망)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다.그러나 청교도인 존 오웬(John Owen)은 다른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가진 두 본성의 관계를 통찰력 있게 설명했다. 내가 생각할 때, 존 오웬 이전에 이 점을 명확하게 설명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완전하게 보호하는가의 여부였다. 그것을 위해서 그는 다소 과감한 주장을 했는데, 삼위일체의 신성한 두 번째 위인 하나님의 아들이 인성을 가진 그리스도에게 행한 단 한번의 즉각적인 행위는 성육신할 때 신성을 함께 취하기로 한 그 때 뿐이라는 것이다. 그 외 인간 본성을 가진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모든 신적 능력은 다 성령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기적을 행사했지, 자신이 가진 신성한 능력으로부터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다른 말로 하면, 신성한 본성은 “그리스도라는 단 하나의 인격체 안에서 이뤄지는 두 본성의 결합(hypostatic union)”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작용했다. 그리스도의 기적을 이해하는 전통적인 방식은 그리스도가 스스로 소유한 신성한 본성을 사용해서 기적을 행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존 오웬과 다른 청교도의 모델을 따르자면, 성령이야 말로 그리스도 은혜의 직접적인 저자이다. 성령과 그리스도의 인성과의 관계에 대한 이런 방식의 이해야말로 그의 인성을 보존할 뿐 아니라, 다양한 성경 본문에서 야기되는 여러 질문에 대한 답도 효과적으로 제공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입었다그리스도의 경우에 인간의 영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신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도 적지 않다. 이런 생각이 가진 선의는 이해하지만, 이건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스도는 도덕적 행동의 원칙의 잣대가 되는 합리적인 영혼을 가진 완벽한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인간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 2위로서의 인식이 그리스도의 자아 의식이라고 주장하지만,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인격은 행위가 아니라 어떤 방식 또는 정체성이다.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그의 인간됨에 관한 것이라면 거기에 대한 대답인 "그는 인간이 된 하나님(God-man)"은 그의 정체성을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육체와 영혼을 포함한 그리스도의 인성이 결코 그의 신성에 의해 망가지거나 훼손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인성은 하나님과 교제하기 위해 성령을 필요로 했다. 하나님께 드리는 그의 기도는 단순히 사람의 기도가 아니며 또 그렇다고 인간이 된 하나님(God-man)이 아버지께 드리는 기도도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 기도는 성령의 권능으로 아버지께 드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도였다. 그의 입술에서 나온 기도 중에 성령의 힘이 역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가 그를 통해서 말하도록 하신 것만을 기도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도 주님처럼,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진정한 인간이 된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와 분리될 수 없었던 동반자가 성령이었다. 그렇기에 중요한 그리스도 사역의 중심에는 언제나 성령이 있었다. 성령은 즉각적이고 신성하며 또 효율적인 성육신의 원인이었다(마 1:18, 20; 눅 1:35).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대로, 메시아는 성령을 받은 존재였기에 성령으로 인함은 가장 적합한 그리스도의 “시작”이었다(사 42:1; 61:1).신약성경은 여러 곳에서 이사야의 말씀을 확증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는 아낌없이 성령을 받으셨다는 점을 기억하자(요 3:34).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머리 위로 임하셨다(마 3:16). 그리고 성령은 예수님이 유혹을 받기 전과 그 과정 가운데 그리고 이후까지 그리스도를 이끌고 지키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눅 4:1,14). 그리고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2 절 "주님의 영이 내게 임했다"라는 본문을 읽고는 그 예언이 자신으로 인해 성취되었음을 선언했다(눅 4:21). 그리스도는 성령의 힘으로 기적을 행하셨다(마 12:18, 행 10:38). 히브리서 9 장 14 절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영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자신을 내어주셨음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의 부활은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했고(롬 8:11) 또한 그는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된 분"이다(롬 1:4; 딤전 3:16; 벧전 3:18 참조).이처럼 성령은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 중에 가장 중요한 동반자였기에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로마서 8 장 26-27절 속 암시적인 그리스도론의 강조처럼 오로지 가능케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기도하셨다고 확신할 수 있다. 이처럼 그리스도 사역 속에 드러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한 강조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개혁주의 성경 해석의 핵심 중 하나이다. 그는 자신을 낮추셨다앞서 언급한 기본적인 그리스도론을 토대로, 휴 마틴(Hugh Martin, 1821~1885)은 예수님이 필연적으로 자신을 낮췄다고 주장했다.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허약한 위치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갈망해야 하는 그런 위치로 자신을 낮췄다는 것이다. 그는 여인의 몸에서 태어났다. 그는 또 율법 아래에서, 무엇보다 기도의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고는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주님께 간청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는 바로 그 율법 아래에서 예수님이 태어났다(겔 36:37).그리스도는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는 진정한 인간이 행사하는 신앙, 사랑, 경외, 기쁨, 그리고 은혜에 따라 살았다. 그런 그였기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소리 내어 간구하고 간청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으로 충만해 하나님을 찬양했을 것이다. 그는 또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거룩한 결단으로 하나님을 찾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서, 참되고 올바른 인성은 오로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서만 이뤄진다.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선물그럼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세 가지 진리를 명심하자. 첫째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다(행2:33). 우리에게 보여 주셨듯이 십자가 상에서 하늘로 올려져서 성령의 주(Lord of the Spirit)로 고양된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계속해서 사역을 이어가신다. 그렇기에 성령은 이제 그의 이름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에게 온다. 둘째로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처럼 만든다.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살아가신 모범을 우리가 그대로 본받아 살도록 함으로써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 같은 형상을 갖도록 하신다(롬 8:29).마지막으로, 성령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신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사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던 성령은 이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아버지께 영광돌릴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와 아들에게 영광돌리도록 하신다. 다시 말해서, 성령이 성도 속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선언한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아들과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이 땅에서 사는 존재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결코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으셨다(요 14:18). 예수님 자신이 지상에서 사는 동안 흠없이 살도록 도우셨고, 죽으시고 또 승리 속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도우셨던 동일한 그 성령을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부어주심으로 우리를 도우신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y Jesus Needed the Holy Spirit번역: 무제
복음
예수그리스도
예수님
성령
구세주
그리스도론
존오웬
그리스도의선물
첫째 부활과 둘째 부활
by Dennis Johnson
2019-04-23
사탄이 결박된 후 이어지는 “천년”에 대한 환상에서 사도 요한은 보좌들과 거기에 앉아 심판하는 자들, 곧 예수님을 신실하게 증언하다가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을 보게 된다(계 20:4-6). 여기서 그 영혼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는데, 이때 “살아서”라는 표현은 곧 이어 언급되는 “첫째 부활”을 의미한다. 이는 바꿔 말하면, “둘째 사망”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고통(계 19:20; 20:10, 14-15)이 첫째 부활을 한 이들에게는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의미하기도 한다.이 문맥과 관련하여 일부 전천년주의자들은 “첫째 부활”이 그리스도의 재림 때 신자들에게 이루어질 육체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한다(살전 4:13-17; 고전 15:20-23; 참고로, 전천년주의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 묘사된 천년왕국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견해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을 요한이 실제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이는 비신자들이 경험할 육체 부활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다음 구절에 함축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계 20:5). 따라서 종말에 대한 전천년주의 관점에서는 천 년을 기준으로 두 가지 육체 부활(곧 신자의 육체 부활과 비신자의 육체 부활)이 나눠지게 된다. 요약하자면, 신자들의 육체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강림하실 때 부활하게 되며, 그렇게 부활한 상태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이 땅을 다스리게 된다. 그런 후 “천 년”이라고 상징되는 오랜 세월이 지나 비신자들의 영혼이 최후 심판을 받기 위해 부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전천년주의 관점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본문을 좀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만일 우리가 요한계시록에서 집약적으로 사용된 구약의 이미지들에 관심을 두고 이 환상을 이해한다면, 더욱 깊은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요한이 보좌들을 바라본 후에 그 위에 앉은 이들로 시선을 옮긴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 순서는 그가 성령에 감동되어 하늘의 환상 가운데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바라보던 일을 상기시킨다(계 4:1-2; 20:11). 그리고 이는 또한, 보좌 위에 좌정하여 옛적부터 항상 계신 하나님과 그분의 심판대를 보았던 다니엘의 환상을 상기시키기도 한다(단 7:9-10). 이 중첩되는 이미지들은 우연히 사용된 것이 아니라, 모두 하늘에 위치하고 있는 법정과 보좌들을 보여 주기 위해 사용된 것이다. 이는 곧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리는 자들도 하늘에서 통치하지, 땅에서 통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그렇다면, 그 보좌에 앉은 이들은 누구일까?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위해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다. 그들은 단지 참수형을 당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돌에 맞거나 십자가형 내지 화형을 당하거나 칼에 베임으로써) 순교한 사람들을 대표한다. 이미 요한은 희생의 피를 쏟으며 죽은 자들을 하늘 성전의 제단 아래에서 목격한 바가 있다(계 6:9-11). 여기서 이 사람들이 특별하게 구별되는 이유는, 그들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라기보다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충성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든 그렇지 않았든 “주 안에서 죽는 자들”(계 14:13)이라면 그 사람들 가운데 다 포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사람들의 정체(즉 주 안에서 죽어 하늘 보좌에 있는 상태)는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하는 장소가 하늘 법정임을 다시 한번 확증해 준다.혹 이런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가령, 본문에 진술된 바와 같이 그들이 살아서 첫째 부활을 한다는 내용은,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왕 노릇을 하기 전에 그들의 영혼이 육체와 먼저 재결합하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부활의 육체를 가지고 보좌에 앉게 된다고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 마디로, 과연 ‘부활’이라는 단어가 문자적인 의미에서 육체적인 부활 외에 다른 사건을 의미할 수 있느냐는 반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답변하자면, 신약성경에는 육체적인 부활 외에도 다른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부활’이라는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는 것이다.예를 들면,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1, 5-6). 이 내용은 요한계시록 20장 4-6절의 사건 순서와 동일하게 진행된다. 곧 죽은 자가 살아나고, 일으킴을 받으며, 결국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기 위해 하늘 보좌에 앉게 된다. 여기서 바울은 미래에 그들이 육체적으로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서 보좌에 앉게 되리라고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에도 경험했고 현재도 경험하고 있는 은혜, 즉 성령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실 때 경험할 수 있는 은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엡 2:8).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변화될 재림을 기다리는 중에도(롬 8:11; 빌 3:10-11, 20-21), 부활하신 그분의 생명과 천상의 통치를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골 3:1-4; 롬 6:4).이처럼 예수님이 새로운 생명을 주시는 현재적 권능과 육체를 일으켜 부활하게 하시는 미래적 권능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가령, 현재에 일어나는 일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 5:25). 이 말씀은 혹 우리의 육체가 죽음을 앞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로 지금 적용되는 약속이다. 이 내용을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포하기도 하셨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바로 이 사건, 즉 육체의 죽음으로 무덤 속에 있는 자들에게 장차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가 요한계시록 20장 12-13절에 묘사되어 있다.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계 20:12-13). 이 장면을 보면, 어린 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들만 심판에서 살아남게 된다(계 20:15). 여기서 비록 ‘둘째 부활’이라는 표현이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이 사건이 바로 “첫째 부활”(계 20:5-6)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고된 둘째 부활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그러므로 성경에서 ‘살아났다’라든지 ‘부활’이라고 하는 표현들은 때때로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요한계시록 20장 5-6절에서 언급된 “첫째 부활”도 그렇게 해석해야 할까? 즉 육체의 부활이 아니라, 영혼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해석해야 할까? 간혹 미래에 일어날 일에 관해 바울이 산문체로 서술하는 내용은 요한이 생생한 환상을 통해 전달하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데 유용할 때가 있는데, 이 경우가 그러하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22-26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가 자신의 대적들을 어떻게 정복하시는지 그 순서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2-26).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이미 부활하셨는데, 이는 자신과 연합한 자들이 마지막 날에 경험하게 될 부활을 보여 주는 첫 열매였다. 그리고 현재 그분은 자신의 대적들을 정복하며 다스리고 계신다. 이 과정에서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인데,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의 부활과 더불어 발생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순서가 요한계시록 20장에 나타난 사건 순서와 일치한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대적인 사탄은 오랫동안 결박된 채로 있다가(계 20:1-3), 잠시 그 결박이 풀리면서 이내 멸망하게 되는데, 바로 이때 그동안 죽은 자들이 다 살아나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이다(계 20:11-13). 그리고 최후에는 사망 그 자체도 불못에 던져진다(계 20:14). 어떤 대적도 이 마지막 대적인 사망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이런 점에서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설명하는 신자의 육체 부활은 결국 모든 사람이 경험하게 될 마지막 날의 부활(곧 의인의 부활과 악인의 부활)을 보여 주는 일면으로서, 이는 역사의 마지막 단계인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일어날 둘째 부활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요 5:28-29; 계 20:11-13).따라서 이와 같이 “첫째 부활”이 육체의 부활을 가리키지 않는다면, 이제 그 부활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야 할 과제가 남는다. 혹 요한복음 5장과 에베소서 2장이 보여 주듯이, 복음 가운데 전달되는 효과적인 부르심을 통해 하나님이 죽은 사람을 영적으로 일으키시는 사건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보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요한계시록 20장 4절은 “영혼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영혼들은 죄나 불신이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신실한 증언으로 인해 죽은 자들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이를 위해 우리는 요한계시록에서 사용되는 이미지가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는 다른 의미를 전달하는 역설적인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을 유념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요한은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열기에 합당하다는 음성을 듣게 된다(계 5:5). 그런데 이와 동시에 그는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이 서 있는 모습도 목격한다(계 5:6). 여기서 어린 양은 피를 흘리고 죽임을 당했다는 바로 그 이유로 인봉을 떼기에 합당한 자처럼 여겨진다(계 5:9).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 양의 죽음이 사자의 승리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일까? 그 비밀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대변되는 약함에서 나타난다는 사실에 있다(고전 1:18-25). 요한계시록 11장 7절과 13장 7절을 보면, 사탄에 의해 세워진 짐승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싸워 이기며 그들을 죽인다. 표면적으로 보면, 순교자들이 피를 흘리며 죽는 사건은 완전한 패배같이 여겨진다. 그런데 이 상황 가운데 요한은 진짜 현실이 무엇인지를 바라본다. 즉 한때 사탄에게 고소를 당했던 자들은 이제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다]”(계 12:11). 예수님의 보혈과 그분의 의를 신뢰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놓은 순교자들이 사탄을 이기는 승리자들이 된 것이다.이와 같이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하여 승리하셨고,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신실하게 죽음으로써 승리하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이 제시하는 이 역설적인 논리는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결론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즉 첫째 부활이란, 다름 아닌 핍박을 받아 순교한 자들의 참혹한 죽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로 그 죽음을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나아가 지금도 제사장으로 예배하며 왕으로서 통치하고 있다(계 7:9-12; 20:6). 비록 이 순교자들은 하나님이 정의로운 심판으로 그들의 피를 갚아 주시기를 기다리며(계 6:10) 지금도 “몸의 속량”을 바라고 있지만(롬 8:23),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세상을 떠난 것이 자신들에게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빌 1:23). 그 좋음이란 바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전 15:54)라는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에 이루어질 둘째 부활을 미리 맛보는 달콤함 같을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irst and Second Resurrection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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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양
승리
예수님의 비유는 설교용 예화가 아니다
by Greg Lanier
2019-04-22
“설교할 때 예화를 더 넣으세요. 사람들이 좋아합니다. 예수님도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게끔 비유로 말씀하셨으니까요.”몇 년 전 다른 목사로부터 받은 설교 피드백이다. 내가 예화를 많이 쓰지 않는다는 건 어느 정도 맞는 말이지만, 그가 예수님에 대해 그렇게 주장한 근거가 무엇인지 몰라 잠시 당황스러웠다. 예수님은 정말 사람들을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비유로 말씀하셨을까?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안에 바로 이 질문이 들어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모르면 다른 비유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시며(막 4:13),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가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듣더라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그들이 회개하거나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신다. 이 어려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예수님의 의도마태복음 13장 1-23절, 마가복음 4장 1-20절, 그리고 누가복음 8장 1-15절에 모두 나오는 이 비유는 예수님이 드신 비유 중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곧이어 설명하시듯, 이 비유는 각기 다른 마음의 상태에 씨(“말씀”)가 떨어졌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오는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길 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사단”)이 먹어버리고, 돌밭에서 싹을 틔운 씨는 해(“환난과 박해”)가 돋은 후 말라버리며, 가시떨기 사이에 떨어진 씨는 기운이 막혀(“세상의 염려”) 결실을 맺지 못하지만,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풍성하게 결실한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곧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라고 언급하셨다는 사실이다(마 13:23). 예수님은 비유를 그곳에 모인 무리에게 말씀하시고 또 따로 제자들에게도 말씀해주신다(마 13:10). 하지만 예수님이 들려 주신 설명은 오랫동안 성경 독자들을 어리둥절케 해 왔다. 세 복음서 기록자들(마태, 마가, 누가)은 이 비유를 약간 다르게 묘사하지만 다음의 두 가지 핵심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동일한 가르침을 전한다: •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의 “비밀스러움/신비”이다.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각 복음서에 나온 이 비유가 동일하게 내포하는 바는 예수님이 선포하시고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속성이다. • 비유는 놀라운 역할을 수행한다. 왜 비유로 이야기하는지를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사람들이 재미있는 예화를 좋아하니까” 또는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이라는 이유를 들지 않으셨다. 예수님이 제시하신 이유는 오히려 거의 정반대다. 마태 그리고 마가와 누가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는데, 마태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도록”이라고 쓰여져 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마태복음의 기록이 상대적으로 덜 가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마태의 긴 설명을 읽어보면, 비유의 목적은 마가복음과 마찬가지로 결국 듣는 자들이 돌이켜 죄 사함을 얻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듣기도” 하고 임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도” 하지만 진실로 “듣고 보는” 것은 불가능하게 하여 궁극적으로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우리를 불안케 하는 긴장이 있다. 예수님은 자신의 가르침이 결국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인가?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람들을 내치시는 것인가? 비유의 결과예수님의 말씀을 푸는 열쇠는 텍스트 안에 묘사된 우리의 모습을 직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는 직접적으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암시적으로 자신이 이사야의 예언을 이루고 계심을 드러내신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이사야가 부름받던 그 장면에서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이렇게 명하신다."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사 6:9-10)세 복음서의 기자는 이 명령을 조금씩 달리 표현하지만 기본적인 의미는 같다. 일견 가혹해보이는 예수님의 “하지 못하도록” 이라는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는 여호와의 환상을 보았고 이스라엘을 향해 선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에 따라 그는 많은 이들에 대한 임박한 심판과 남은 자의 회복을 선포하는 데에 자신의 삶을 드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사야의 선포가 그 자신의 기대에 반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말씀해 주셨다. 즉, 이사야의 선포를 들은 이들 중의 일부는 하나님에 대해 덜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무뎌져서 결국 그분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될 것임을 알려주셨다.실제로 이사야의 사역을 통해 어떤 이들 안에는 믿음이 생겼으나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다른 이들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완악해져 버렸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사야의 예언 사역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가운데 이스라엘 안에서 회개하는 자와 회개치 않는 자를 나누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사야의 부르심에 관한 구절을 직접 그 입술을 통해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사역 역시 동일한 결과를 가져올 것임을 미리 알려주신 것과 같다. 그렇다면 왜 비유를 사용하셨을까?비유의 참 목적예수님이 왜 비유를 사용하여 말씀하시는지를 알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비유라는 단어 자체를 살펴보는 것이다. “비유(parable)”는 영어에서 문자적 의미, 도덕적 의미 등 여러 측면의 뜻이 내재된 짤막한 이야기를 가리키는 비교적 친숙한 단어이다. 그러나 그리스어나 히브리어에서는 비유가 이야기, 수수께끼, 잠언 등의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며, 복음서에서도 역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그들의 사역에서 비유를 사용했다. 예를 들어 시편 78장 2-4절에서는 선지자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에 대하여 예언하라고 명하셨을 때(겔21:7), 에스겔은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겔 21:4)라며 불평한다. 선지자들은 각종 비유를 사용하여 진리를 감추거나 드러내었고, 이로 인해 듣는 이들이 자신에게 임할 심판을 깨달아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이끌었다.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정확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님은 자신이 선지자로서(마 13:57; 눅 13:33) 이사야가 보여준 예언 사역을 계속하는 것이며 심지어 그 사역을 극치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예수님도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셨고, 죄에 대한 깨달음을 촉구하시며,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이끄셨으나, 그에게 완악해져 있던 이들에게서는 정반대의 결과가 초래되었다. 좋은 땅처럼 마음이 잘 준비되어 있는 이들, 즉 들을 귀가 있는 이들(마 13:9)은 예수님이 들려주시는 비유에 녹아 있는 영광스러운 단순함과 심오한 진리 안에서 기쁨을 누린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하셨다(마 13:11).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 완악해져 있는 이들에게 비유란 그저 농업, 포도원, 그물, 땅, 여행 또는 연회 따위에 대한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한 자들에게 비유는 불분명하고, 베일에 가려져 있으며, 심지어 기이하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복음마저도 그렇게 보이게 된다. 유심히 살펴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일부러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분의 비유는 복음과 그것이 요구하는 바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성경 다른 곳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복음을 듣고 나면 어떤 이들의 마음은 부드러워지나 어떤 이들의 마음은 완악해진다. 사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부드럽게 함과 완악케 함의 비밀을 통해 전진한다. 요한복음 12장 40절은 이사야 6장 9-10절에 근거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들 중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 말씀을 믿지 못했는가를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사도행전 28장 24절도 이사야 6장 9-10절에 기대어 바울의 사역 결과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라고 묘사한다(비교. 행 28:26-27). 이러한 극명한 결과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은 바로 십자가 사역이다. 마음이 완악해진 자들은 예수님을 거부하고 십자가로 몰았으나, 그 십자가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이들에게 그들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주권적 신비 요약하자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 담겨있는 신학,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요한의 묘사, 그리고 자신의 사역을 이사야의 사역에 빗대어 묘사한 바울의 말에 담겨있는 메시지는 동일하다. 즉, 구원에 있어서 여호와의 주권은 때로 우리를 어리둥절케 하기도 하나 궁극적으로는 그분 자신께 영광이 되도록 실행된다는 것이다. 복음의 씨앗은 값없이 그리고 사랑으로 모든 이들에게 뿌려질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토양의 질이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그 토양의 질을 준비시키셔서 씨앗이 뿌리내리고 많은 회개와 죄 사함의 열매를 맺도록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설교자는 자유를 얻게 된다. 왜냐하면 목회자는 그저 신실하게 씨를 뿌린 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의 죄악된 마음을 당신의 주권적 뜻에 의해 변화시켜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면 되기 때문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s Parables Are Not Heartwarming Sermon Illustrations번역: 이정훈
신학
신약성경
예수님
비유
설교
예화
하나님
주권적
신비
내 죄가 그분을 거기 매달았네
by Greg Morse
2019-04-18
고난 주간의 금요일이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픈 날을 기념한다. 바로 그분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던 그날이다. 곧 가시나무를 만드신 이의 머리에 커다란 가시 면류관이 쓰여진 날,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이의 입에서 고통의 신음이 터져 나온 날, 병사들이 그 몸을 때리고, 채찍질하고, 고문한 날이다.그날 예루살렘 밖으로 난 길을 힘들게 걸어갈 때마다, 어깨에 짊어진 십자가는 상처투성이가 된 그분의 등을 짓눌렀고, 군중은 그 모습에 몸서리를 쳤다. 저 옛날에, 모세가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던 하나님의 얼굴은 이제 사람의 몰골로 보기도 어려울 만치 상하였다(사 52:14). 온몸이 피로 얼룩진 그 끔찍한 광경을 보지 못하도록 여인들은 아이들의 눈을 얼른 가렸다. 그리고 남자들은 그 십자가를 진 죄수를 향해 악담을 퍼부었다. 병사들은 계속해서 매질을 했다. 이에 천사들도 두려워 떨었으리라.이 날의 수난을 미리 내다보았던 모든 예언은 그렇게 성취되고 있었다. 그분은 그렇게 정죄와 고통을 받으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셨다. 대적들이 나타나 그분을 쳤을 때, 함께 있던 제자들은 다 도망쳤다. 그중 하나는 그분을 팔아 넘기며 배신의 입맞춤을 남겼다. 밤새도록 사람들이 때리고, 침 뱉고, 모욕하는 일이 그칠 줄 몰랐다. 아침이 되었을 때, 또 다시 그 등에는 채찍질이, 뺨에는 수염을 뽑는 조롱이 행해졌다.그렇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그분은 갈보리 언덕을 향해 걸어갔다.그 끔찍한 광경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처음 보았던 때가 떠오른다. 그 영화에서 로마 병사가 내려치는 채찍에 달린 발톱이 예수님의 등에 박혀 살점을 뜯어낼 때마다, 마치 “칼이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듯”(눅 2:35) 내 마음도 찌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거기에는 그분의 피가 낭자했다. 비명이 들려왔다. 고통의 울부짖음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본 후로, 나는 아무 감정도 없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분이 고난 받는 장면은 나의 통념을 깼다. 그 광경은 매우 잔혹하며 끔찍했기에, 영화는 아이들이 볼 수 없는 등급으로 상영되었다.평소에는 눈물을 잘 흘리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로마 법정의 온 뜰을 피로 적시며 고문 당하시는 장면을 볼 때 흐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병사들이 그분의 손과 발에 못질을 하려고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내 가슴도 조각나는 듯했다. 그런 광경은 마음이 굳어버린 사람이 아닌 이상, 감정 없이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더 비통한 장면이 있었을까?나는 그분이 겪은 상처가 어떠했을지를 다 추측할 수도 없었다. 또 내가 슬퍼하며 울어야 할 만큼 그분의 고통에 대해 눈물을 다 흘리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처럼 견디기 힘든 수난의 사건을 (일년에 한 번) 고난 주간의 금요일이면 기념하곤 하는 우리에게 그분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2천 년 전 그날, 예수님은 자신을 위해 우는 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침묵이 감도는 장면갈보리 언덕 위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광경을 볼 때, 가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요소는 그 사건이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점이다(히 12:2). 그분은 다름 아닌 공개 처형을 받는 수모를 겪으셨다. 보통 이 처형을 받는 죄수는 온몸이 벗겨졌다. 이에 시편 저자는 이렇게 예언한 바가 있다.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시 22:7-8). 그분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는 장소에서 수치를 당하신 것이다.그런데 조롱하는 소리만 예수님을 뒤따르지 않았다. 일단의 여인들이 그분을 쫓아가며, 그 죽어가시는 모습에 슬피 울었다. 오늘날 우리처럼, 그 여인들도 피를 흘리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바로 이 흐느끼는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계속되던 고문에 상하고 찢긴 얼굴을 그들에게 돌리시며, 자비로우면서도 충격적인 말씀을 남기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그날 예수님은 자신에게 비방과 저주를 퍼붓던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큰 소리로 슬피 울며 동정한 자들을 돌아보시며 그들을 침묵하게 만드신 것이다. 그분은 더 이상 그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배웅하지 못하게 하셨다. 그렇게 다른 이들의 슬픔을 거절하며, 어두운 새벽에 골고다 언덕으로 향하셨다.나를 위해 울지 말라그와 같이 2천 년 전 예수님은 여인들의 눈물을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또 (대중적인 생각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의 눈물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이 당하신 고난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며 고민하게 만든다.‘나를 위해 울지 말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일까?‘나는 내 백성을 구원하고자 한다. 그러니 놀라지 말라. 나는 이 순간을 위해 기도했고, 이 잔을 허락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알고 있으니, 내가 내 잔을 마시지 아니하겠느냐(요 18:11). 나의 양식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데 있으므로(요 4:32, 34), 기꺼이 이 나무 형틀을 지고 가노라. 내 아버지의 뜻은 자비로워 이 백성을 위한 대속물로 나를 보내사 나의 생명을 바치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는 너희를 위해 내 몸을 깨뜨리고 이 피를 쏟으리라(눅 22:19-20). 자기 친구를 위하여 생명을 내놓음보다 더 큰 사랑은 없나니, 너희가 받을 구원과 영원한 기쁨을 위해 당하는 이 고통을 바라보며 울지 말라(요 16:20-22).’‘나를 위해 울지 말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일까?‘나는 절망적인 희생자가 아니라, 내 뜻대로 수많은 천사를 부릴 수 있는 왕이므로(마 26:53), 한 마디에, 이 고난을 끝낼 수 있느니라. 한 마디에, 로마 제국을 멸망시킬 수 있느니라. 그리고 한 마디에, 모든 이들을 영원토록 심판할 수도 있느니라. 그러나 나는 세상을 심판함이 아니라 구원하러 왔노라(요 3:17).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나 군대라도 함부로 내게서 생명을 빼앗을 수 없음을 신뢰하라. 나는 내 생명을 스스로 내려놓고, 또 스스로 되찾으리라(요 10:11-18).’‘나를 위해 울지 말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인가?‘자, 이제 나는 승리하리라. 너희는 내 발꿈치가 상한 모습을 보고 슬퍼하지만, 믿음의 눈을 열어 뱀의 머리가 짓밟힌 광경을 보라(창 3:15). 나는 어린양처럼 걸어가나, 사자처럼 싸워 이기리라.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십자가에 있으리라(계 5:5-6). 나는 그 나무에 달린 후 온 우주를 다스릴 왕이니라. 바로 그 십자가를 통치의 지팡이로 삼으리라. 대적이 나를 들어 올릴 때, 나는 그를 던져 나의 발등상으로 두리라(시 110:1). 이렇게 승리의 입성을 하고 있으니, 왜 내가 영광 받을 시간에 너희는 우느냐(요 12:27-28).’‘나를 위해 울지 말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인가?‘내가 제삼일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너희에게 말한(마 16:21; 17:22-23; 20:18-19) 그날이 다가오고 있느니라. 오늘은 비록 너희가 형언할 수 없는 어두움과 상상할 수 없는 아픔, 그리고 생각하지 못한 두려움이 가득할지라도, 나의 부활이 이루어지리라. 내 아버지가 잠시 나를 내주어, 저들은 나를 죽이고 제자들은 나를 떠나 도망쳤지만,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날이 다가오리라. 바로 그날의 기쁨이 내 앞에 있어 나로 하여금 이 고난을 견디게 하느니라(히 12:2). 곧 승리의 왕관이 나를 기다리며, 나를 영원히 기념하는 찬양이 내 앞에 있느니라. 피로 산 백성이 나를 기다리며, 영원한 영광이 나를 기다리노라. 그리고 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기다리시니, 나를 위해 울지 말라.’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여인들이 전혀 울지 못하게 하시기보다는 그 눈물의 대상을 바꾸셨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들의 죄 때문에 그들에게 미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메시아를 거절한 이스라엘이 그 진노를 받는 처지에 이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눅 23:29-30).‘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 그렇다면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인가?‘나는 나의 잔을 받을 수 있어도, 너희는 그럴 수 없으리라. 로마는 네 자녀들을 네 눈 앞에서 죽이리라. 너희가 오늘 동조한 그 짐승(로마 제국)이 내일은 너희를 둘러싸서 엄습하리라. 그날 너희의 고통이 극심하리니 그 두려운 날을 위하여 너희의 눈물을 비축하라.’‘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인가?‘나의 고통은 죽음과 함께 끝나지만, 너희의 고통은 그렇지 않으리라. 너희 중 많은 이들이 산들을 향하여 우리를 감추어 달라고 하겠으나, 로마의 심판이 아닌 하나님의 심판에서 피할 자는 없으리라. 사냥개처럼 추적해 오는 그분의 공의는 죽음에서 멈출 수 없노라. 그분은 산 자와 죽은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행 10:42). 그러니 복수는 그분의 것이니라. 그분이 원수를 갚으시리라(히 10:30).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운 일이라(히 10:31).’‘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 이는 과연 무슨 말씀인가?‘그렇기에 너희 자신을 위해 울라. 예루살렘의 딸들아, 죄로 인해서는 울지 않으면서 나를 위해 우는 일은 헛된 일이니라. 많은 이들이 나의 고통을 보며 울지만, 그 고통을 가져온 죄에 대해서는 슬퍼하지 않노라. 너희는 내 백성을 위해 내가 그들의 죄를 끌어안고 그들이 받아야 할 진노를 받는 두려운 광경을 보고 있으니, 이는 내 백성이 나의 의를 얻게 하기 위한 일이니라(고후 5:21). 만일 너희가 운다면, 내 손과 발에 못을 더 깊이 박아 넣게 만든 너희의 탐욕과, 이마에 가시관을 찔러 넣게 만든 너희의 거짓과, 내 몸에 상처를 날카롭게 낸 너희의 비겁함과, 결국 나로 하여금 갈보리 언덕에 오르게 만든 너희의 교만함에 대해 울어야 하리라.’나의 죄가 그렇게 했다나는 4년 동안 해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보았다. 볼 때마다 감동이 있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그 시절에 나는 진정으로 거듭난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내 자신이 그 영화를 보며 울기 때문에 스스로를 괜찮은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 눈물이 나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뿌려지면 내 죄에 대한 심판이 넘어가기라도 하듯이 착각했던 것이다. 예수님의 고통을 보며 우는 일에는 거듭난 마음이 꼭 필요하지 않았다(이 세상에는 그저 슬픈 일을 보며 눈물을 흘리는 비신자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내가 거의 슬퍼하지 않았던 죄에 대해 비통하게 가슴을 치며 우는 일에는 거듭난 마음이 필요했다(약 4:8-10).예수님이 당하신 공개 처형을 2천 년 전에 목격한 자들은 그들의 죄가 십자가에 함께 못박혔음을 보지 못했다.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바로 거기에서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그들은 순진한 구경꾼과 같이 단지 그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십자가 사건의 의미와 눈부신 영광을 보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울고 또 울었지만,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진정으로 ‘그 뜻이 다 이루어지기까지, 내 죄가 그분을 거기 매달았네’라고 고백할 수 없다면, 그 수난을 바라보며 우리가 쏟는 눈물은 헛될 뿐이다.그렇다. 참으로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울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동정심으로 울어서는 안 된다. 믿음을 가지고 울어야 한다. 그럴 때 흘리는 눈물은, 부활절이 지난 후에도 마르지 않을 것이다. 그 눈물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나의 죄를 슬퍼할 때 흘리는 눈물이다. 그 눈물은, 나를 위한 싸움에서 승리한 왕을 찬양할 때 흘리는 눈물이다. 그리고 그 눈물은, 나를 위한 그 죽음을 영원히 기념하며 흘리는 눈물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It Was My Sin That Held Him There: Weeping At the Foot of the Cross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고난주
허물
죄
슬픔
눈물
침묵
승리
부활
고고학으로 성경을 증명할 수 없는 네 가지 이유
by Rusty Osborne
2019-04-15
필자는 이스라엘 안팎에서 매년 여름에 진행된 주요 발굴 결과들을 요약하여 가을에 발표하는 언론 기사들을 즐겨 읽곤 한다. 지난 가을 기사 역시 기대했던 대로였는데, 히스기야 왕 통치기에 이방 우상들을 헐어 만든 변소, 고대 도시 가드(Gath)에서 발견된 팔레스타인 매장지, 솔로몬 왕 시대에 속한 것으로 보이는 궁전 구조물 등에 대한 것들이었다.이런 발견들이 공개되면, 언론에 종사하는 이들이나 그러한 언론 기사를 읽는 독자들은 매한가지로 “이 발견은 성경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해줄 것”이라는 식으로 주장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보수 기독교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주장이야말로 인터넷에서 인기를 모을만한 꽤 괜찮은 소재이겠지만, 성경 고고학과 성경 자체의 증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고찰하는 데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래에서 필자는 왜 성경 고고학에서의 발견들이 성경을 증명해줄 수 있는 것처럼 말해서는 안되는지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성경을 증명하는 것이 성경 고고학의 목표는 아니다고고학 앞에 '성경(biblical)'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근거가 뭘까? 일반 고고학과 성경 고고학을 구별시켜주는 것은 발굴 결과물이 아니라 해당 연구를 촉발시킨 질문 그 자체이다. 성경 고고학 역시 일반 고고학과 동일한 방법론을 사용한다. 연구 대상이 다를 뿐이다.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오래 전에 성경 고고학이 성경의 문화적 배경에 빛을 비춰주고, 예를 들어주며, 확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바 있다. 그러므로 성경 고고학의 목표는 변증이라기보다 해석이라 할 수 있겠다.필자가 정의하는 성경 고고학은 “현대 고고학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성경 텍스트와 연관된 지역과 문명이 남긴 유적을 연구한 후, 이것이 성경의 기록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이렇게 정의하긴 했지만, 성경의 기록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자료들이 매 발굴 프로젝트마다 쏟아져 나올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자료 자체에 대한 우리의 제한된 이해 또는 그릇된 해석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성경 고고학은 땅에서 무언가 발굴해냈을 때 그것에 대해 어떤 경직된 역사적 설명을 부여하기 전에 발견물을 그 자체로서 평가한다.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을 증명해준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양분시키는 위험이 따른다. 왜냐하면 어떤 발견은 성경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여도 어떤 것들은 오히려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고학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고 만다. 성경 기록의 참됨을 증명하고자 애쓰는 이들과 성경의 오류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들로 말이다. 우리가 자료를 해석할 때 전제와 방법론이 영향을 끼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성경 고고학의 범위가 좁다는 사실을 특히 고려한다면, 고고학적 발견물들을 이 두 개의 범주만으로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임을 알 수 있다. 자료는 거의 항상 복잡하고, 다양한 해석을 부르며, 정리하는 것만 해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2. 성경에는 고대 세계에 대한 역사-지리학적인 묘사가 넘쳐난다성경이 다루는 역사적 기간만 해도 2,000여년에 달하고, 지리적으로는 오늘날 이라크에 있는 유프라테스 강둑으로부터 이집트의 나일 강 삼각주에 이르는 지역을 포괄한다. 성경이 묘사하는 세상은 이렇게 광활한데도 고고학이 사용하는 도구는 계속 협소해져 왔다. 학생 한 명이 내게 “의심하는 사람들을 잠잠케 할 결정적인 고고학적 발견이 하나 있다면 그게 뭘까요?”라고 물었을 때 내 대답은 그런 건 없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표적을 구했던 바리새인들처럼 회의론자들의 전제 자체가 이미 굳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고고학 자체의 범위가 제한되어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다윗 왕에게 바쳐진 원시 히브리어 비문들 같은 엄청난 고고학적 발견이 이루어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래도 이것이 “성경이 진리임을 증명”해주지는 못한다. 이 발견은 그저 다윗이라는 이름의 통치자가 이스라엘에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성경 외적 증거물이 성경의 한 부분과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성경 안에 들어있는 어마어마한 역사 기록을 고려할 때, 고고학의 소규모 발굴들을 기반으로 귀납적인 추론을 전개하는 것은 무리이다. 약 사십 년 전에, 에드윈 야마우치(Edwin Yamuchi)는 자신의 저서, '돌들과 성경'(The Stones and the Scriptures)에서 '고고학적 파편'(archaeological fractions)이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유적 중의 지극히 일부(파편)만 남아서 발견된다.유적지 중의 지극히 일부만 조사되었다.알려진 유적지 중 지극히 일부만 고고학적으로 발굴되었다. 발견된 것 중의 지극히 일부만 학술적인 결과물로 출판되었다.발견되고 출판된 것 중의 지극히 일부만 성경과 연관된 것들이다. 고고학의 범위가 이렇게 좁기에, 우리는 어떤 발견 하나에 의지해 성경이 옳다거나 성경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일에 지극히 신중을 기해야 한다. 3. 고고학은 성경의 신학적 주장을 다룰 수 없다 성경 고고학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의 세계를 재현해볼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지만 성경의 신학적인 주장들을 다루지는 못한다. 한 예로, 바벨론에 있었던 '유대인 거주지'에서 나온 설형 문자 텍스트가 최근에 출판되었는데 이로 인해 기원전 6세기에 바벨론 주위에 거주하던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서들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듯 하다. 그러나 이 설형 문자 텍스트들은 성경 저자들이 묘사하는 것과 달리, 왜 그들이 바벨론에 거주했는지, 혹은 그들의 바벨론 거주가 만연했던 우상 숭배 및 언약에 대한 불순종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 문서들은 성경의 이야기를 확증해주지만 이스라엘 포로기가 신학적으로 실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4. 고고학적 발견들은 성경의 내용을 확인해줄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성경 고고학의 발견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그 발견들은 성경의 역사적 묘사들을 확인해주고 지지해줄 수는 있어도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귀납적으로 '증명'해줄 수는 없다. 우리의 제한된 이해나 잘못된 해석으로 인해, 고고학적 발견들 중 어떤 것들은 성경의 내용을 확인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다. 또한 성경을 확증해주는 것으로 여겨졌던 발견들이 나중에는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한 것으로 드러날 때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발굴기가 새로 시작되고 분석 결과들이 출판되며 몇 가지 해답을 제시하는 듯하나, 또 그만큼의 질문을 던지며 고고학적 지평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지난 가을의 발견들은 성경의 다양한 분야를 지지하는 듯하다. 이는 대단한 일이고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전적인 확증을 해주기 보다는 다양한 단계의 증거들을 제시해주는 것에 가깝다. 고고학은 다른 모든 역사 관련 학문들처럼 추론에서 시작하여 최선의 설명을 찾아가는 귀추(歸推) 논증(abductive reasoning)을 사용한다. 고고학자들은 주어진 정보를 평가하여 가장 타당해 보이는 설명을 찾아내는데, 매 발굴기마다 새 정보가 발견되고 이로 인해 이전에는 최선으로 받아들여졌던 설명이 바뀌기도 한다. 유한하나 유용한 성경 고고학필자는 성경 텍스트를 연구하는 학생들에게 성경 고고학에 관심을 가지고 최근의 발견들 중 성경과 연관된 것들을 공부해 보라고 격려하고 싶다. 하지만 고고학적 탐구는 회의론자들이 사용할 만한 문구나 헤드라인을 찾아 헤매는 변증학적 보물찾기가 아니라 성경이 다루는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울 해석학적 작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성경 고고학이 성경 전체가 사실임을 증명하기에는 매우 역부족이긴 하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셨던 그 세계를 더욱 명료하게 볼 수 있도록 돕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Archaeology Cannot Prove the Bible역자: 이정훈
신학
구약성경
고고학
증명
케네스키친
신학적주장
에드윈야마우치
논증
죄 사함을 받았는데, 왜 회개해야 할까?
by Stephen Wellum
2019-04-08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해서도 용서를 받았다면, 왜 계속해서 사죄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모든 죄에 대해 이미 용서받지 않았는가?”우리는 성도이자 죄인이다이런 물음을 대할 때,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을 반드시 함께 생각해야 한다.첫째, 하나님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의 의와 그분의 대리적 죽음에 근거하여 의롭다는 선언을 내리신다(롬 3:21-26; 5:1; 8:1, 30, 33-34). 이러한 칭의는 우리 안에 의가 주입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언적 행위로서 신자에게 영단번(once for all time)에 발생하는 사건이다(롬 5:12-21; 빌 3:8-9; 고후 5:19-21). 분명 종국에는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서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맞는지에 대해 공적인 판결을 받게 되겠지만(고후 5:10), 신자에게는 그 마지막 판결이 현재적으로 발생한다. 즉 우리에게는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선언이 내려진다(요 5:24; 롬 8:1). 그리하여 한번 주어진 칭의는 취소될 수 없다.둘째,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자백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요일 1:9). 이 말씀은 처음에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을 때에만 적용되어서는 안 되고, 요한일서 1장의 문맥이 뚜렷하게 밝히듯이 신자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중략]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8-10).셋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자백하라는 말씀만 하시지 않고, 우리를 또한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용서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지의 여부에 따라 주어진다고 하셨다(마 6:14; 18:15-35).하나님의 사죄와 인간의 회개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고려 사항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위의 세 가지 사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의미도 축소하지 않으면서 종합적인 신학을 도출할 수 있을까? 바로 이 문제를 풀어가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고려 사항을 이어서 설명해 보겠다.첫째,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실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죄만이 아니라 미래의 죄까지 용서하시는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의 미래는 그분 앞에 펼쳐진 책처럼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의 관점에서는 칭의가 과거와 현재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사건이며, 미래의 죄에 대해서는 용서의 법적 '근거'가 미리 확보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가 살아가면서 죄를 지었을 때는 반드시 회개와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로 돌이켜서 그분의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우리는 한 번 의롭다 하심을 받았던 시점에 우리에게 적용되었던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서 그렇게 하게 된다. 따라서 이는 새로운 칭의가 아니라 이미 받은 칭의가 다시 적용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우리가 죄를 짓게 되면,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는 의식뿐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할 때 누리던 행복감도 상실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령의 사역을 쫓아서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를 상기할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셔서 자신과 우리와의 관계를 굳건히 회복시키고 구원의 확신도 더하신다. 따라서 신자는 매일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을 가지고 다시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는 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늘 아버지께 자녀의 확신을 가지고 나아가는 일이다.둘째, 우리가 다루는 이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시간과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해결할 수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될 때 우리의 과거와 현재 및 미래의 모든 죄는 용서받고 그 값이 치러지는데, 이 과정은 다름 아닌 역사 속에서 진행된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고 그 백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게 되지만, 이러한 구원 계획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점진적으로 펼쳐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여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공생애를 사시고 마침내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일들이 실현되는 데는 역사의 과정이 필요하다.또 이에서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사역이 적용되는 하나님의 백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 존재해서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 전에 세워졌지만, 그 계획은 시간 속에서 실현된다. 우리가 시간 속에 있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실 때 성령을 통해 시간 속에서 그리하신다.셋째, 우리는 삼위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안에서 살아간다. 즉 실제 역사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가짐으로써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관계 안에서 영화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지으며, 삼위 하나님은 그런 죄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이 언약 관계는 우리에게 지속적인 회개를 통해 죄 사함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의무를 요구한다. 또한 하나님은 그 관계 안에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해서 우리 죄를 사하시는 일을 하신다.모순은 없다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함 없는 백성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관계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진리는 보편적인 인간관계를 떠올릴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나의 경우를 예로 들자면, 아버지로서 나는 다섯 명의 자녀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이 관계에서 그 아이들은 나의 가족이기에 결코 버려지는 일이 있을 수 없다. 부모와 자녀라는 가족 관계는 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아이들이 나에게 잘못하거나 또는 내가 그들에게 잘못하면, 이 관계는 긴장 상태에 빠지고 회복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언약 관계가 꼭 그러하다.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얻게 된 완전한 칭의와 성경이 가르치는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성을 함께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죄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사역에 그 무엇을 더하려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언약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다 이루신 사역, 곧 칭의의 근거를 (현재 우리의 죄로 인해 경험하게 된 하나님과의 불편한 관계 속에) 다시 적용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하는 은혜와 지속적인 회개의 필요성 사이에는 결코 모순이 자리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미 행하신 사역에 대한 확신 가운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기 위해 사죄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도는 오직 은혜에만 빚진 자들이다. 칭의는 영단번에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회개하며 용서를 체험하는 일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어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f All My Sins Are Forgiven, Why Must I Continue to Repent?번역: 장성우
신학
교리
죄사함
회개
성도
죄인
사죄
영단번
칭의
두려움이 사라진다
by Marshall Segal
2019-04-04
우리 모두는 죽음이 초래하는 아픔을 안다. 사랑하는 이를 암으로 잃은 경험을 갖고 있다. 우리 자신의 약함으로 하루하루를 견딜 뿐 아니라 과거의 실패를 부여안고 살아간다. 깨어져 버린 인간 관계, 그리고 죄가 초래한 끔찍한 결과와 매일 싸우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이 세상이 얼마나 간절하게 부활을 염원하는지를.어떻게 죽음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죽음이 주는 아픔을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언제일까? 누구나 어두운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수많은 책과 신제품 광고와 끊임없이 나오는 최신 기술(lifehack)을 믿었다가 실망한 아픈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위로와 구원, 그리고 생명에 관한 약속으로 넘친다. 부활은 어떻게 보면 아주 하기 쉬운 약속이다. 그러나 사실상 달성이 불가능한 약속이기도 하다.너무 쉬운 인생은 때가 되면 서서히 우리를 질식시키기 마련이다. 무덤에서 빠져 나오는 유일한 길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이의 피로 우리를 덮는 것이다. 결국 죽음을 이기는 길은 죽음밖에 없다.만약 예수님이 다시 살지 않으셨다면고린도전서를 쓴 사람은 죽음이 주는 어두움을 맛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직접 죽인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기 위해 기꺼이 그들을 살해했다. 그가 죽음에 대해 쓸 때, 그의 손에는 그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순교한 형제자매들의 피가 묻어 있었다. 그러나 부활한 왕이 그 살인자를 만났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켰다. 비록 지금 이 순간 가장 어둡고 두려운 인생 한복판에 당신이 있다 해도 바울과 같은 인생에 생명을 불어 넣으신 하나님이 그 인생을 일으키지 못하시겠는가?그러나 만약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전직 살인범이었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중략]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 만약 그리스도가 다시 숨을 쉬지 않고 무덤을 떠나지 않으셨다면, 또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지 않고 하늘에도 올라가지 않으셨다면, 즉,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우리는 매일 죄와 수치, 그리고 고통을 짊어지고 이 무덤 같은 삶을 지나 죽음보다 더 나쁜 어딘가로 가는 존재가 될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말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몰아쉰 그 숨이 만약 그분의 마지막 호흡이었다면, 하루하루 죽음 속에서 사는 우리의 이 짧고 희망 없는 삶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아닌 두려움이리라.그러나 죽음은 결코 예수님의 숨을 틀어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고전 15:20). 죽음을 향한 영원한 승리를 선언하기 전까지 우리의 왕은 딱 이틀 밤 동안 무덤을 빌렸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가 정말로 그분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꺼이 죽기를 원한다면, 그뷴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될 것이다.이 사실을 믿는가그러나 우리에게는 공포가 승리보다 더 피부에 와닿는다.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 이 말씀을 하신 때는 마리아와 마르다가 그의 오라비 나사로의 죽음을 본 직후이다. 그 누이들은 예수님의 도움을 청했지만 그분은 바로 오지 않으셨고, 그 결과 나사로는 죽고 말았다. 마르다는 절망했고 왜 더 빨리 오지 않으셨냐고 예수님께 물었다. 우리도 마르다처럼 때때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너무 늦게 개입하신다고 느낄 때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이 지금 당장 뭔가 하실 수 있는데도 내가 고통받는 상황을 그냥 보고만 계신다고, 그렇게 생각할 때가 있지는 않은가?예수님이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는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마르다는 믿었고,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된 나사로에게 무덤에서 나오라고 명령하셨다. 그러자 나사로가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당신은 이 말씀을 믿는가?우리가 믿을 때 죽음은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힘을 잃게 된다. 두려움이 다시 슬금슬금 파고든다면, 사도와 선지자가 불렀던 이 노래를 불러보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 15:54-57). 두려움보다 더 강한 상대 앞에서, 즉 두려움을 정복하는 왕 앞에서 두려움은 녹아 없어질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의 승리이다. 우리의 죄, 수치, 죽음을 정복하는 승리의 이름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의 약함이 빚어낸 삶의 모든 끔찍한 결과들까지 다 정복하는 승리가 될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진다두려움에 얽매여 부활을 고대하는 이 비참한 세상을 구하려고 예수님이 오셨다. 그리고 우리처럼 살과 피를 지닌 인간이 되셨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4-15).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역에서, 또 심지어 육신의 약함에서 느껴지는 우리의 절망이야말로 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셨는지를 알려 주는 증거가 된다.죽음과 거기에 달린 모든 촉수는 죽음보다 더 강한 능력이 그 죽음을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전까지만 위세를 떨친다. 생명이 침투해서 죽어가던 자를 구하고 포로된 자를 자유롭게 할 바로 그 때까지만 죽음은 지배할 뿐이다.우리를 사로잡던 공포가 사라지네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그분 앞에서십자가에서 내쉰 그 마지막 숨결이제 내 속에 살아있네그분 안에서 우리는 더 이상 공포와 죽음의 종이 아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그분 때문에 다시 살아난 존재이다. 따라서 이제는 죽음조차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이제는 그 끔찍했던 두려움이 우리를 그분이 계신 본향으로 이끄는 도구가 되었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All We Feared Now Gives Way번역: 무제
복음
부활
죽음
죄
무덤
믿음
두려움
공포
승리
내가 닮고 싶은 바울, 고난 중에 기뻐한 사람
by John Piper
2019-04-01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이 받는 고난을 핑계 삼아 그분을 등진다거나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저버리지 않았다.물론 그가 받은 고난은 가볍지 않았고 어쩌다가 한 번씩 일어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 고난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무거웠고 자주 찾아오기도 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고후 11:24-25). 우리는 이렇게 반복되는 고난 중에도 어떻게 그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우선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기 위해 자신을 전적으로 내어드린 사람이었다. 그는 부활하신 권능의 주님께 성실히 헌신하여 그 순종의 여정에서 반복되는 고난을 겪게 되었다. 우리 자신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한때 크리스천이라고 공언했으나 인생의 고난에 직면하여 쓰라린 아픔을 맛본 후에는 기독교 신앙을 버린 이들이 있다.누가 고난을 일으키는가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고난 때문에 신앙이 흔들리는 자들은 마치 하나님이 그런 고난을 주신 것처럼 오해하며 신앙을 저버리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바울은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고난에 관해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욥에게 일어난 고난이 어떠했는지를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욥의 이야기를 보면, 처음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며 비참한 상황을 조성해 내는 이는 사탄이다. 그는 욥의 자녀들을 죽이고 욥의 몸에서는 종기가 나도록 역사할 수 있는 권한을 받아 시험을 일으킨다(욥 1:6-19; 2:7). 그런데 욥 자신은 이 재앙 가운데 일어난 일들의 궁극적인 원인이 바로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한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 2:10). 그러면서 자녀들을 잃고 종기가 나게 된 상황에서도 입술로 범죄하지 않는다(욥 1:22; 2:10). 그리고 이야기의 종결부에 가서는 “[욥의 가족과 친구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한다(욥 42:11).마찬가지로 바울도 그 사실을 알았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임의로 발생한다든가, 마귀가 홀로 결정해서 일으켜 낸다든가, 아니면 사람의 손에 의해 결정적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처음부터 고난을 받게 되리라고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님이 그 모든 고난을 정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행 9:16).고난이 일어날 때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울의 자리에서 그처럼 지속적인 고난을 받게 된다면, 과연 그 느낌이 어떠할지 또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반응할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이렇게 반응할지도 모른다. “예수님, 보십시오. 저는 제 인생을 주님께 다 드리기로 서원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하시는 말씀도 전해 들었습니다. 주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 하신 말씀이요(마 11:30). 또 내게 평강과 만족을 주신다고도 약속하셨죠(빌 4:7, 11-13). 그런데 거의 매번 주님을 세상에 증언하려고 할 때마다 무엇이 돌아왔는지 아시나요? 바로 고난입니다. 어떻게 주님처럼 강하고 온유한 리더로부터 이런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종을 이렇게 대우하시리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인생이 계속 꼬이기보다 좀 쉽게 풀리도록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시면, 이제 제 신앙을 버릴까 합니다.”사실 주님은 이와 같이 반응하는 피상적인 신자가 있으리라고 예언하셨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막 4:17).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장차 학대를 받게 되리라고도 경고하셨다.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눅 21:16).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눅 11:49). 주님은 또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 그에게 일생의 사명을 주실 때, 이 점을 분명히 드러내셨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행 9:16).따라서 바울이 예수님께 충성하다가 고난을 만나게 되었을 때, 그는 결국 자신이 속았다는 식으로 그분을 비난하지 않았다. 또한 예수님이 자신을 인도하시는 방식을 비판하거나 그 주권 속에 감춰진 지혜에 대해 투덜거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분께 도움을 구했다. 물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을 때도 있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난에 대한 반응언젠가 바울은 자신이 겪는 고난에서 헤어나오지 못하자, 그 시간을 감당하기 매우 힘들어 했다. 그리고 그 고난을 “내 육체에 [속한] 가시”(고후 12:7)라고 부르며 이렇게 고백했다.“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고후 12:8-9).여기서 예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하신다. 만일 우리라면 그에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이렇게 말하겠는가? “주님의 능력이요? 그 능력이 제가 약할 때 온전해진다고요? 저는 지금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영광을 드러내려 하십니까! 차라리 이 고통에서 나를 건지시는 은혜를 베푸셔서 영광을 받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안타깝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자신의 삶에서 겪는 고난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화를 낸다. 더 나아가 바로 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영광을 더욱 드러내시는 일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만이 아니라 그 말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격분한다.고난 가운데 발견한 기쁨그러나 그런 분노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되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주님 앞에서 바울이 보인 반응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이런 기쁨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크게 기뻐하는가? 고통 가운데서 건져 달라고 세 번이나 간구하고 거절당한 후에 하는 말이,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겠다는 것이다.우리는 이 대목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얼마나 그분의 영광을 추구하며 살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는 주님의 영광이 자신의 고난을 통해 더욱 선명히 드러날 수만 있다면, 그 고난 중에서 기뻐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추구한 최고의 가치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영광이 크게 드러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라도 기뻐하겠다고 외친 것이다. 이 사람 바울, 내가 그를 존경하고 닮고 싶고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Sufferer I Want to Be: Why I Love the Apostle Paul번역: 장성우
신학
신약성경
바울
고난
반응
기쁨
그리스도
사명
영광
예수님은 치어리더가 아니다
by Melissa Kruger
2019-03-28
오늘날,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전하는 경건한 책이든지, 블로그이든지, 혹은 거대한 컨퍼런스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의 말씀이 주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지하기 위해서만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고 우리가 서로에게) “당신은 훌륭해요! 잘했어요! 당신 자신이 되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고 하는 말을 매우 듣기 좋아한다.명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용기를 주신다. 예수님은 지친 자에게 힘을 주고 상처입은 자에게 위로하는 말씀을 하신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에 늘 미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자주 받기 때문에, 매일 그분의 격려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의 메시지 중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면, 예수님을 우리의 영적 기분을 북돋우는 치어리더로 축소시키는 잘못을 행할 수 있다. 또한 우리도 서로에게 영적 치어리더의 역할만을 하게 된다는 우려도 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칭찬의 말을 하지만, 조언이나 꾸짖는 말은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용서의 말을 하지만, 회개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분의 은혜를 바르게 기뻐해야 하지만, 죄를 슬퍼하는 일은 종종 잊고 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예수님과의 관계와 우리 서로의 관계가 생명을 주는 관계임을 놓치고 있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는 내가 죄를 지었을 때 나를 불러서 직언을 해줄 친구이다. 그들은 내가 조언과 지혜를 얻기 위하여 찾고 또 찾을 사람들이다. 그들이 나를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내가 바른 길을 걷지 않을 때 직언을 해줄 것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가르치시고, 명령하시고, 꾸짖으시고, 부르시고, 촉구하신다. 우리가 예수님을 관중석에서 우리를 응원하는 치어리더의 위치로 축소시키면, 우리는 우리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신실한 친구를 놓치게 된다. 당신의 사역에서 당신이 주로 듣는 말이 “당신은 훌륭해요!”라는 말이라면, 당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초대하고자 한다.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 보자.예수님은 가르치신다: ‘나는 ~이다’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에 대해 명확하게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신다. 예수님은 때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가르치신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참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어떤 사람들에게 이 목록은 모든 대화를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자기 중심적인 사람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하므로, 예수님은 자신에 대하여 우리에게 다양하게 가르쳐 주신다.당신의 성경 공부 그룹이나 컨퍼런스가 예수님이 누구신가보다는 당신이 누구인가에 더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새 책을 선택하거나 다른 그룹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 안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찾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절실하게 그분에 대해 알아야 한다.예수님은 명령하신다: ‘말씀에 순종하라’예수님은 우리가 행하고 말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바리새인들과 달리, 예수님은 말과 행동뿐 아니라 우리의 욕망과 감정 면에서도 진정한 순종을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의 온 삶으로 그분의 명령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1).우리에게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 때로 짐이나 고역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기쁨으로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분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를 원하신다. 그분의 명령대로 사는 것이 항상 기쁨이 넘치는 일은 아닐 수 있지만, 그것은 기쁨으로 가득한 삶으로 우리를 인도한다.예수님은 꾸짖으신다: ‘죄에서 달아나라’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보고 “별일 아니다. 네가 즐거운 것이면 뭐든지 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 대신 예수님은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마 5:29)라고 꾸짖으신다.예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죄를 싫어하신다. 죄가 우리 영혼을 좀먹는다는 사실을 아신다. 죄가 만족함이 없고 항상 우리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아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죄에서 달아나기를 원하신다(마 18:15-17). 가르치는 자가 자기 충족의 수단으로 죄악된 행동을 장려할 때, 예수님은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며 경고하신다(눅 17:1-3).예수님은 부르신다: ‘너의 십자가를 지라’종은 주인보다 크지 않다. 예수님은 스스로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신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야만 한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이 말했듯이, “십자가를 지신 자의 추종자가 되는 일은, 바로 십자가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십자가는 항상 상실을 수반한다.”우리의 교사들이 우리의 삶을 잃는 것보다 찾는 것에 관하여 더 말한다면, 우리는 놀라운 크리스천의 삶을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좁은 길로 가도록 권하고 희생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우리가 두려움을 느낀다면, 우리는 소망을 아직 이 현세에 두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고정시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열심히 살면서도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정확하게 그것을 발견하게 된다.예수님은 촉구하신다: ‘온 세상으로 가라’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위한 놀라운 목적과 사역을 가지고 계신다. 그것은 당신을 포함하지만 당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분, 그분의 나라, 그분의 뜻, 그분의 영광에 관한 것이다.형제자매들이여, 모든 세상에서 이보다 더 좋은 목적은 없다. 예수님이 당신을 어디에 두시든지 그분은 당신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기 원하신다. 예수님은 당신이 씨를 뿌리고 추수한 곡식을 즐기기 원하신다(마 28:19-20).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수용하기 힘든 가르침을 포함하여 그분의 말씀 모두를 필요로 한다. 예수님을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하여 그분의 진리를 축소시키는 일은 사실 정반대의 효과를 가져온다. 그렇게 하면, 그분의 풍성함을 모두 잃게 되고, 그분을 본받는 일이 그저 무미건조하게 되어버린다.예수님은 구원하신다: ‘복음을 들으라’우리는 우리 힘으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구세주가 절실히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미래에 가게 될 천국을 그냥 약속하지 않고 오늘 우리를 변화시키겠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 우리를 부르신다. 우리를 구속하신다. 우리를 양자삼으신다. 우리 안에 부활의 능력이 작동하게 하신다. 우리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노예가 아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하여 살 자유가 있다. 우리가 나누어야 할 소식은 ‘괜찮아’라는 말보다 훨씬 더 좋은 말이다. 형제자매들이여, 용기를 가지라. 당신의 감정이 아닌 예수님 안에 당신을 심어라. 다른 사람의 말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라. 예수님은 우리의 기분을 고취시키는 치어리더보다 더 낫다. 그분은 우리의 시작과 끝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isters, Jesus Is Not Your Cheerleader번역: 정은심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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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에순종
십자가를지라
세상으로가라
복음을들으라
요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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