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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청소년을 위한 탁월한 성경공부 교재이다
by Kristen Hatton
2019-02-12
기독교 서점에서 청소년을 위한 여러 서적들을 살펴보면서 내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 혼란스러워졌다. 그러면서 정작 10대 청소년 모임에서 가르치고자 했던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서점에서 살펴본 10대를 위한 거의 모든 자료들은 그들이 겪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 피상적인 조언만 제공하고 있었다. 즉 청소년의 마음속을 깊이 다루는 데 관심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행복하고 성공적인 청소년기를 보내도록 도와줄 수 있는 메시지로 복음을 적용하지 못하는 교재들이었다.나는 이런 자료들보다 더 나은 무엇인가를 찾기 원했다. 청소년기를 보내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인가를 말이다.10대 시절에 청소년은 자신의 시야와 관점을 넓혀야 한다. 그들의 신앙은 성경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가 되었다. 이제는 주일학교에서 노래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우고 알았던 수준을 넘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직접 배워 가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전체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 질서도 없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교훈이나 규칙을 수집한 책으로 성경을 받아들이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다. 그 결과, 성경을 보는 눈이 열리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그저 하루의 일과처럼 목표치를 채우기 위해서만 성경을 읽고 사용한다. 이럴 때 성경은 당연히 잘못 적용되고는 한다.출애굽기에 나타난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나는 그날 서점에서 빈손으로 걸어 나왔다. 복음을 분명히 설명하지 않는 교재들에 만족하기 싫었던 것이다. 인터넷으로 다른 옵션을 찾아봤지만 실패했다. 그 후에 나는 목회자인 남편이 쓴 설교 시리즈를 기초로 해서 성경공부 교재를 직접 만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교재를 만들기 위해 출애굽기를 선택했다. 출애굽기가 하나님의 구원 패턴을 너무나도 분명히 말해 주기 때문이었다.결과적으로, 내가 인도하는 소그룹에 참여한 학생들이 구약성경에서 예수님을 보게 되자 성경을 보는 그들의 눈이 열리게 되었다. 그 학생들은 열 가지 재앙, 광야, 그리고 성막과 같은 내용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보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또한 우리가 얼마나 과거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지도 예상하지 못했다.이처럼 이스라엘이 감사 대신 불평을 늘어놓고 우상 숭배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자가 필요한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더 넓은 구속 이야기의 렌즈를 통해 출애굽기를 읽으면, 출애굽기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된다. 출애굽기는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법과 통치를 떠나서 거짓 우상을 섬기는 삶을 산다. 우리 역시 우상 숭배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다.죄를 분명히 보여 주는 출애굽기우리는 10대 청소년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가르쳐야 한다. 또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죄를 우리가 그저 나쁘다고 생각하는, 좋지 않은 행동으로만 설명하면, 우리가 얼마나 절박하게 그 죄로부터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나쁘다고 생각하는 그 일들만 스스로의 노력으로 피해 가며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여기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매주 교회에 꼬박꼬박 출석하고, 술도 마시지 않고, 외박도 안하는 학생은 주위에 나쁜 행동을 하고 살아가는 친구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스스로를 꽤 의로운 사람이라고 느끼게 된다.그러나 출애굽기는 우리가 자신을 평가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심각한 죄로 우리의 마음이 오염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죄가 우리의 동기와 욕망까지 오염시킨 결과, 우리는 누구를 경배해야 하는지, 무엇을 경배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그대로 방치할 때, 죄로 오염된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 아닌 헛된 신들을 숭배하게 되어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자연스럽게 외모나 능력이나 완벽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려는 마음과 또한 그 모습에 대해 인정받고 칭찬받기 원하는 마음을 갖게 될 때, 결국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에 절하고 뛰노는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우상 숭배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이런 내용을 다루고 있는 출애굽기가 전하려는 복음의 메시지가 있다. 우상 숭배로 대변되는 죄의 모습이 출애굽기 이야기의 결론이 아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이런 이스라엘과 함께하시고 그들을 위해 일하셨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달려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상상하기 힘든 충격적인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가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친히 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관계를 수립하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스스로가 죄악된 이스라엘 백성과 절대 떨어질 수 없도록 언약 관계 속에서 그들과 연합하셨다. 예수님 역시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믿는 모든 자들과 연합하셨다.죄인을 향한 은혜우리는 출애굽기 전반을 통해서 자기 백성을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 그들을 홀로 버려두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그들이 그럴 만한 가치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인에게 은혜 베풀기를 좋아하시고 자기 자녀에게 선물 주시기를 기뻐하는 분이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가득한 10대, 바로 온갖 유혹에 넘어지기 쉽고, 걱정과 불안을 품고 살며,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마음에는 의심이 가득하고, 또래에게 주목받고 행복해 하면서도 자신의 진짜 정체성은 깨닫지 못하는 청소년들에게 허락되는 놀라운 복음이다.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실 때 행하신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다 이루신 일들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의 소망과 우리의 소망은 바로 자신의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근거하며, 이는 그분의 말씀에 의해 보증된다.바로 이 말씀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모세에게 계시하신 그 존재이다. 이 말씀은 나중에 자신의 영광을 모세에게 드러내신다. 그리고 스스로를 다음과 같은 존재로 선언하신다.“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출 34:6-7).이 동일한 말씀이 유월절 희생양이 되셔서, 결국 하나님의 진노가 우리를 넘어갔다.10대 청소년들이 바로 이 말씀, 즉 출애굽기에서 펼쳐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면, 그들도 모든 시대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서만 남겨진 진리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또 그렇게 되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참된 생명의 떡에 더욱 목말라하며 사는 인생이 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odus Is a Good Study for Teens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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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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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모른다고 말씀하신 '그 날'
by R. Carlton Wynne
2019-02-11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요일 3:20). 하나님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만사를 철저하게, 영원히, 변함 없이 아신다. 그분은 자신의 완전하심과 계획과 행동과 목표를 아신다(시 147:5; 사 46:10; 행 15:18). 그분은 빛 가운데 있는 수많은 천사들을 아시고(단 7:10), 지옥의 구석구석뿐 아니라(잠 15:11) 우리의 죄악(시 69:5)과 감춰진 생각(시 139:2), 그리고 모든 고통의 무게까지도(시 56:8) 아신다. 아주 작고 세밀한 대상부터(마 10:29–30) 우리를 구원하는 사건에 이르기까지(롬 8:29; 딤후 1:9), 하나님은 모든 가능성과 우연한 사건들을 포함하는 과거, 현재, 미래를 오류없이 알고 계심으로써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신다(삼상 23:10-13; 마 11:21). 그리고 성부의 영원하신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전지하신 속성을 지닌 신성을 충만하게 지니고 계신다(빌 2:6; 요 21:17).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신적 지식과 마태복음 24장 36절의 내용을 양립시켜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본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모르는 내용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막 13:32).과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며, 왜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예수님은 무엇을 모르셨을까거의 모든 주석가들은 마태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이 두 가지 ‘심판’에 대해 예언하셨다고 설명한다. 한 가지는 주후 70년에 예루살렘과 성전에 임한 심판이고(마 23:38; 26:61), 다른 한 가지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세상의 마지막 때에 임하는 심판이다(마 24:3, 14, 23–27). 학자들은 어느 구절이 무슨 사건을 의미하는지, 두 심판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무슨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그 날과 그 때”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예수님 자신이 돌아오실 때라는 점에 대해서는 거의 동의한다(마 25:31–34).바로 여기서 궁금증이 발생한다. 어떻게 세상의 심판을 집행할 그분께서 그 날이 언제인지를 모르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이는 우리만 느끼는 어려움이 아닌 듯하다. 아마도 교리적 난제를 피하기 위해서인지, 몇몇 신약성경 사본에서는 “아들도 모르고”라는 표현을 생략해 놓았다. 물론 그러한 교정이 진실을 바꾸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분명 그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 내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성부가 아는 것은 곧 성자가 아는 것삼위일체 교리는 성부, 성자, 성령 모두가 단일한 존재와 생각과 의지를 소유하고 계심을 의미한다. 세 위격(the three persons)이 이루는 관계는 그 안에서 한 위격이 다른 위격에게 어떤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활동을 할 수 있는 그런 조직이 아니다. 오히려 한 위격이 아는 것은 다른 두 위격들도 철저히 영원하게 알고 계시다. 서로 구별되어 상호 교통하는 위격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한 분 하나님으로 계시기 때문이다.그러므로 마태복음 24장 36절이 무엇을 의미하든지 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신 예수님이 어떤 내용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계시다거나 그런 상태에 계셔 온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삼위일체의 정통적인 교리와 성경 전체에 기록된 계시는 그러한 개념을 배제한다. 무한하며 불변하는 지혜의 근원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어떤 내용을 배우지 않으신다. 이러한 사실은 성부와 성령만이 아니라 성자에게도 해당된다.지식이 자라신 예수님그런데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삼위일체의 제2위격(로고스)이신 그분은 2천 년 전에 놀라운 은혜 가운데 변할 수 있는 “참 몸과 지각 있는 영혼”(웨스트민스터 대요리 37문답)을 취하심으로 사람이 되셨다. 따라서 그로부터 영원히, 완전히 다른 두 개의 본성(신성과 인성)이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 연합을 이루었다. 인간으로서 성자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더욱 사랑스러워”(눅 2:52) 가셨다. 그리고 타락 후 인간이 경험하게 된 바와 같이 허기지고(마 4:2), 피곤하며(요 4:6), 고통을 느끼실 뿐 아니라(마 26:38), 자신이 알게 된 사실에 놀라기도 하셨다(마 8:10; 막 6:6; 눅 2:46; 7:9). 예수님은 이러한 변화들을 오직 그분의 인성으로만 경험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분명 예수님의 신성에는 어떤 제약이나 변화가 있을 수 없지만, 그분의 인성에는 실제적인 제한과 시간에 따른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언제 돌아올지를 모른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제한된 지식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입술을 통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이해할 수 있다.혹여 (마태복음 24장 36절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언급하신 “아들”이라는 표현이 ‘인자’(the Son of Man)가 아니라 (신적 로고스에 대한 일반적인 칭호인) ‘하나님의 아들’(the Son of God)을 짧게 줄인 표현이라고 하더라도, 위에서 내가 제시한 견해에 상반되는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는다. 성경은 때때로 성자를 그분의 신성에 따라 소개함과 동시에 성육신하신 그분의 위격이 인간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하기 때문이다(행 20:28; 고전 2:8). 따라서 제한된 지식(곧 인간의 속성)은 그러한 지식이 인간으로서 중보자가 되신 분의 위격에 속하는 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분리되지 않은 채 설명될 수 있다. 이처럼 주의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다 아신다고 단언할 때조차(요21:17), 그분은 자신이 재림하실 날을 모르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말씀을 다 이해한 것일까? 완전히 그런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단지 우리에게 신학적 난제를 주기 위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에 대해 물어야 할 중요한 질문은 ‘어떻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돌아오는 날을 모르실 수 있는가?’가 아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가?’이다.우리를 도우시는 예수님마태복음 24장의 문맥은 36절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언이 우리의 헛된 호기심을 저지시키고 그분의 말씀에 우리의 마음을 두어 마침내 그분과 대면하기를 갈망하는 열정과 경각심을 갖도록 고무시키는 데 그 의도가 있음을 보여준다(마 24:42, 44; 25:13, 46).만일 하나님과 가깝고(히 12:22; 계 3:5) 힘과 지혜에서 사람을 능가하는(삼하 14:17, 20) 천사들도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그 때를 알지 못한 채 하나님께 기쁘게 순종한다면, 우리는 모든 일에서 얼마나 더 그분을 신뢰해야 하겠는가?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도 완성의 때를 알지 못한 채 당신의 승귀를 바라보며 십자가로 나아갔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영광스러운 본향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하나님이 계획하신 다양한 고난의 정도와 기간을 우리는 얼마나 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이래로 매일 매일이 우리가 기다려오던 바로 그 주님이 오시는 날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즐겁게 하루 하루를 맞이 해야만 하겠는가?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내용을 말해 준다. 주님은 하늘로부터, 구름을 타고, 빛 가운데, 영광과 능력으로, 홀연히 오시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게 임하시며, 세상의 마지막 때에, 천사들과 성도들을 거느리고 오실 것이다. 그 날에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그분 앞에서 울게 될 것이다. 어디에서 그리고 특별히 언제 이런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성부와 성령과 승천하신 성자, 바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우리의 구원자(마 28:18) 외에는 누구도 그 날을 알지 못한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ne Thing Jesus Didn’t Know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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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그날
완전하심
마태복음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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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림
사랑을 품고 무신론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라
by Dan Dewitt
2019-02-08
뭔가 어색하지만 유머러스하고, 무례한 듯하면서도 경건한 모습이 연출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하나님을 언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잊지 말라고 이야기할 때, 청중의 웃음은 갑자기 진지한 반응으로 바뀌었다. 바로 영화배우 크리스 프랫(Chris Pratt)이 2018 MTV 수상 소감에서 믿음과 은혜에 대해 언급했을 때의 상황이다.그는 수상 소감에서 네 번째 포인트를 말하면서 자신의 화법에 숨겨 놓은 전략이 무엇인지를 내비쳤다. “강아지에게 약을 먹일 때는 그 약을 햄버거 조각에 넣어 주십시오. 그러면 강아지는 약을 먹고 있는지도 모를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소감은,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청중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트로이목마였던 셈이다.비록 그의 접근이 복음을 전하는 데 필요한 충분한 가이드가 되지는 않을지라도, 이는 바울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골 4:3) 주시기를 구하라고 당부하면서 “외인에게 대해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곧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사용하라]”(골 4:5)라고 권면하는 내용이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과연 누가 MTV 시상식이 재치 있는 예를 들며 하나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자리가 되리라고 생각했겠는가?무신론자의 마음을 부숴 버려라?최근에 앤서니 데스테파노(Anthony DeStefano)는 자신이 저술한 ‘무신론자들의 마음속’(Inside the Atheist Mind: Unmasking the Religion of Those Who Say There Is No God)이라는 책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대안적인 접근을 제시했다. 만일 우리가 무신론자들을 설득할 수 없고 그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없을 때는, 그들의 주장을 아예 “부숴 버려야 한다”(crush them)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시도한 작업은 ‘불쾌하고 공격적인’ 신무신론자들(new atheists)의 주장을 누설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우리가 성경을 읽다 보면, 아무런 부가 설명도 없이 누군가에게 경고하거나 심판하는 직언(直言)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비위를 맞추거나 변명을 하실 필요가 없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라며 메시지를 선포할 때 다른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듣는 자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도 대적들을 질책할 때 차분하게 말씀하지 않으셨다.아마도 가장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작금의 신무신론자들이야말로 그와 같은 직언이나 정죄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데스테파노는 이렇게 말한다. “사이비 지성인들의 기독교 비판에 대응하고자 수많은 책이 저술된다. 그런데 요즘 출판되는 이러한 책들은 하나같이 너무 친절한 태도를 보여 준다.”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책을 읽는 어느 무신론자라도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스스로의 입장을 이렇게 표명한다. “이 책에는 어떤 아첨이라든가 다른 견해에 대한 존중, 친밀한 논쟁이나 대화 따위는 없을 것이고, 상대편에게 다른 뺨을 돌려 대는 일도 없을 것이다.”여기서 데스테파노는 무신론자의 종류를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인터넷 상에서 열심히 신이 없다고 말하는 전도자이고, 나머지 하나는 더욱 주의 깊고 사색적인 생각을 펼치는 회의론자이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고 결국 일반화된다. 더불어 책의 구성은 소셜 미디어에서 볼 수 있는 장광설을 연상케 한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 무신론자들이 보여 주는 한결같은 특징은 모두가 오만함에 뒤따르는 무지함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는 문제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 7:6)라고 말씀하신 내용을 거론하며 무신론자에게 접근하는 행위를 반대할지도 모른다. 이 말씀에 대해 많은 학자들은 신앙을 우습게 여기는 자들과 믿음의 축복을 나누지 말라는 예수님의 경고라고 이해한다. 또 어떤 이들은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려는 행동에 이 경고를 적용하기도 한다. 어찌됐든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만일 어느 동네이든지 그들이 전한 복음에 반응하지 않거든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떠나기를 분부하셨다(마 10:14).신앙이 없는 자들을 대하는 자세와 관련해서는 지혜가 분명 필요하다. 사도들은—다메섹에서 바울이 도망쳤을 때 그러했듯이(행 9:25)—언제 다른 지역으로 떠나야 하는지, 또는—그가 로마에서 그러했듯이(딤후 4:6-7)—언제 자신의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를 분별하기 위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랐다.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만일 형제들, 곧 우리 자신의 의도에 동의하는 자들만 사랑한다면 세리나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시며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 5:44)라고 가르치셨다.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일반 사람들이 취하는 행동, 그 이상을 기대하신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진주를 돼지 앞에 던져서도 안 되지만, 그 진주를 진흙으로 덮어 저 똑똑한 논적들에게 거칠게 던져서도 안 된다. 물론 무신론자들을 향한 데스테파노의 변증적인 논의는 복음 전도를 위해 새롭게 사용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부숴 버리기를 서슴지 않는 그의 어조와 공격성을 무작정 따라해서는 안 된다.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저자인 데스테파노는 (대중적 무신론자로 알려진) 크리스토퍼 히친스(Christopher Hitchens)에 대해 언급하며 책을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그러면서 G. K. 체스터튼(Chesterton)의 ‘영원한 인간’(The Everlasting Man)에서 어느 긴 본문을 인용하며, “21세기의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이 반드시 주의 깊게 숙고해야 할 내용”이라고 설명한다.히친스는 죽음을 앞두고 체스터튼의 유명한 작품들을 수백 페이지 정도 읽었고, 그 작가에 관하여 자신의 마지막 에세이를 저술했다. 그리고 2011년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났다. 체스터튼에 관한 히친스의 에세이는 그로부터 두어 달이 지난 2012년 3월에 ‘디 애틀랜틱’(The Atlantic) 매거진에 수록되었다.이 에세이를 읽어 보면, 히친스가 무신론자였음에도 신앙과 불신앙의 본질에 대해 잘 묘사하고 있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내용을 통해 짐작해 보건대) 우리는 미처 다 표현되지 못한 질문과 고민과 의심으로 가득 찬 누군가의 내면 세계에서 그 사람이 궁극적으로 어떤 마음 상태에 이르게 되었는지 결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무리한 추측과 풍자와 발췌를 통해 다른 사람을 부숴 버릴듯이 공격하는 일은 위험한 작업이 될 수 있다.우리는 주변에 있는 비신자들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무신론자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반드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렇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골 4:6) 사랑 가운데 진리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혹 필요한 경우에는, 그 진리를 햄버거 조각에 넣는 지혜도 겸해야 할 것이다.원제: Climb Inside the Atheist Mind–with Lov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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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
사랑
무신론자
크리스프랫
바울
앤서니데스테파노
무실론자들의마음속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을까?
by Matt Smethurst
2019-02-07
기독교를 비판하려는 친구의 논증을 들어보면, 외딴 섬에 살기 때문에 복음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의 경우가 등장하곤 한다. 어쩌면 당신도 동일한 의심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겠다.“어떻게 선하고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 들어 보지도 못한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실 수 있을까?”라는 질문 말이다.정서적으로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이런 질문에 대한 입장은 포용주의(inclusivism)와 배타주의(exclusivism), 두 가지로 양분된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동의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의식적인 믿음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이 중 하나의 견해에서만 강조된다.포용주의의 유혹포용주의는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지만 그분을 알지 못하고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견해이다.이와 같이 포용적 해석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2장 1-16절을 하나님의 특별계시 없이도 구원이 주어질 수 있다는 내용을 암시하는 본문으로 자주 인용한다. 그러면서 일반계시의 내용, 즉 사람의 외부에 있는 창조 질서(롬 1:19-20)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보고 그분을 믿는 것과, 그 사람의 내부에 자리하는 도덕성(롬 2:14-15)이 바로 구원에 대한 충분한 기반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밀라드 에릭슨(Millard Erickson)은 “구원에 대한 포용주의적 견해는 심지어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유행하는데, 이는 일반계시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의 범주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라고 설명한다.포용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받은 구약 성도들의 사례를 그 근거로 삼는다. 이에 대해 에릭슨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의 긍휼이 어떻게 제공되는지를 모른 채, 자기 자신을 창조주의 긍휼에 맡긴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런 사람은 구약 성도들과 같은 상황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스도와 그의 속죄 사역에 관한 교리는 구약 성도들에게 완전히 계시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가 이루어지되 이는 창조주의 자비에 의해 이루어질 뿐, 그들 자신의 행위에 기초해서는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들은 복음의 전체 내용은 알지 못했어도 그 형태는 인식한 채로 구원을 받았다.”그런데 이런 설명이 혹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하찮게 만들지는 않을까? 에릭슨은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 혜택의 근원이시기에 전혀 그럴 수 없다고 강조한다.“[구약 성도들의 경우처럼] 비록 구원받는 사람이 자신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작용하는지를 알지 못할지라도, 이때도 구원의 근거는 역시 그분의 사역이다. [중략] 이 구원은 언제나 믿음을 통해 이루어져 왔다. 이 점에서 바뀐 것은 없다.”포용주의자들은 하나님이 일반계시에 반응하는 인간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신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 누구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의 구원 여부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 목회자는 이런 견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내가 믿기로는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이 이 문제에 대해 불가지론의 입장을 견지한다. 하나님은 복음에 반응해야 하는 우리의 책임에 대해서는 매우 엄숙하게 경고하셨지만,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실지에 대해서는 계시하지 않으셨다.”많은 포용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하나님의 속성을 강조한다. 즉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말한다. 클락 피녹(Clark Pinnock)은 “포용주의는 성경에서 다루는 주된 논제도 아니고 그에 대한 증거도 불충분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성경의 관점이 너무나도 명백해서 이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배타주의의 증거포용주의와 대조되는 배타주의는 복음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이 가능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는 교회사 전체에 걸쳐 견지되어 온 기독교의 주된 관점이며, 오늘날 성경에 그 믿음의 기초를 두는 복음주의자들에 의해서도 지속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을 옹호하기 위해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성경 본문이 있는데, 여기서는 그중 다섯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1. 로마서 1장포용주의자들은 로마서 1장 18-23절을 일반계시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하지만, 더욱 자세히 살펴보면 이 본문은 배타주의적 견해를 뒷받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창조 세계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일반계시가 구원이 아닌 심판을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 외딴 섬에 사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롬 1:21), 자연에서 나타나는 그분의 존재에 대한 진리와 이에 대한 인식을 억누르기 때문에(롬 1:18), 핑계를 댈 수 없다는 것이다(롬 1:20). 인간은 복음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이 죄인인 이유는 그에게 어떤 것(믿음)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떤 것(반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그렇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이 외딴 섬에만 있는 결백한 사람을 심판하신다는 말인가? 이는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결백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긍휼과 용서를 흐릿하게나마 갈망하는 고상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묘사하지 않는다. 게다가 인간은 의식이나 제례나 희생물 등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고자 하는 깊은 충동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섬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하겠는가? 포용주의자의 상상으로는 그가 막연하게라도 긍휼과 용서를 갈구하며 자신의 공로를 부정하는 겸손을 보이리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 그는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는 우상숭배적인 민속 신앙에 참여할 것이다.2. 로마서 10장로마서 10장은 구원을 받기 위해 복음을 믿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설명한다.“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중략]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3-15, 17).이 본문에서 나타나는 바울의 논리는 명백하다.1.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2.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믿는 것이다.3. 복음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복음을 듣는 것이다.4.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주는 것이다.그리스도의 말씀에 근거한 믿음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이 본문과 조화되기 어렵다.3. 요한복음 14장우리는 예수님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선포하신 내용을 정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포용주의자들은 이 내용이 믿음에 대하여 명백하게 언급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하지만,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분명히 함축되어 있다. 결국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독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하려는 데 있다(요 20:30-31). 이 목적은 요한복음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요 3:36; 5:23-24; 7:38; 8:19, 24, 42; 11:25; 12:46).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믿음에 대해 아흔일곱 번이나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인 문맥에서 볼 때,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조건은 “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4. 사도행전 4장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 12절에서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요점은 베드로가 단순히 세상에 다른 구원자가 없다고 말하며 포용주의자들도 동의할 만한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구원을 받게 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자의 이름을 아는 것, 그 구원자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구원받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이다.5. 사도행전 10장사도행전 10장에는 우리가 지금 다루는 질문을 분명하게 풀어주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여기서 하나님은 고넬료라고 하는 독실한 이방인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에게 사람들을 보내어 베드로를 청하라고 하신다(행 10:5). 그래서 그가 보낸 사람들은 이튿날 베드로의 집에 도착해서는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라고 알렸다(행 10:22).이에 베드로는 그 사람들과 함께 고넬료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때 고넬료는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라고 말한다(행 10:33).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고넬료가 베드로에게서 아무런 말이나 듣기를 기대한 것이 아니라, (사도행전 11장 14절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자신의 모든 집이 “구원 받을 말씀”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넬료가 아무리 진실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이 말씀이 없이는 영원히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이 이야기를 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로, 정말 복음이 닿지 않은 곳에 살면서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고넬료에게 하신 것처럼 선교사나 꿈을 통해 복음의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 주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두 번째로 더 중요한 이유를 들자면, 혹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받는 일이 가능하다면 고넬료야말로 이미 일반계시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독실했고 그가 받은 계시에 대한 최고의 경외를 하나님께 표현했다. 하지만 이야기가 전개되며 드러나는 사실처럼, 그의 놀라운 신앙적 열심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베드로가 원래 있던 집을 떠나 48km를 넘게 이동하여 그에게 복음의 메세지를 전하러 가야만 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성경이 보여 주는 사실은 복음의 메시지 없이는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장 잘 반응하는 사람이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이런 주제가 왜 중요한가결국,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이는 추상적인 신학 관념을 위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인 적실성과 영원한 중요성을 두루 갖춘 질문이다. 예를 들어, 선교에 대한 우리의 관점은 외딴 섬에 있는 사람의 운명 등과 같은 긴급한 현실성과 그 본질적이고도 영원한 사명 모두에 따라 형성된다.여전히 배타주의가 불공평해 보일 수 있지만, 우리는 결국 측량할 수 없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지혜를 신뢰해야 한다. 어쩌면 이 말이 대답을 회피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 대답은 겸손한 자세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대답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우리가 가진 유한하고 타락한 개념으로서의 공평함이라는 기준에 종속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고 그분의 마음을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은 인간인 우리의 방식과는 다르고 또 그보다 훨씬 높다(사 55:8-9). 하나님은 조언자가 필요 없으시다. 그분은 선해서 늘 선한 일을 행하시기 때문이다(시 119:68; 롬 11:34). 그리고 하나님은 공의롭게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창 18:25). 무엇보다도 우리는 지혜의 절정이며 공의와 사랑이 교차하는 지점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한다. 온 세상의 심판자가 이 로마 제국의 나무 형틀 위에서 그분을 거절한 반역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받기 위해 대신 매달리셨다.언젠가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좋은 책들이 잠시 방문해야 하는 장소라면, 성경은 당신이 살아야 하는 집이다”(Visit many good books, but live in the Bible)라고 조언했다. 이 글에서 다룬 주제와 같이 우리가 감정적으로 격해질 수 있는 주제를 맞닥뜨렸을 때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겸손한 자세로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기도한 후에, 그로부터 주어지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Happens to Those Who Never Hear the Gospel?번역: 조현빈
복음
변증
구원
포용주의
배타주의
로마서1장
로마서10장
요한복음14장
사도행전4장
사도행전10장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이상을 행하셨다
by Gavin Ortlund
2019-01-31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대작인 ‘그리스도의 십자가’(The Cross of Christ)에서 에밀 브루너(Emil Brunner)가 했던 다음의 말을 인용했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신앙, 그들의 교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나타내는 표징이다. [중략] 십자가를 올바로 이해하는 사람은—이는 개혁자들의 견해이기도 한데—성경을 알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다.”내가 생각하기에도 이와 같은 십자가 중심성은 성경적인 근거가 탄탄한 진리이다. 우선 십자가는 대속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하나님과 회개한 죄인 사이의 화목을 보여 주는 사건이다. 그러나 어느 중심적인 사건에만 배타적으로 집중할 경우, 거기에는 언제나 다른 주변적인 사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수 있는 위험이 자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죽음 외에도 더 많은 일들을 행하셨다는 것이다. 만일 그 죽음만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이었다면, 그분은 자기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던 그 목요일(혹은 금요일 이른 아침)에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곧바로 다시 살아나서 해가 지기 전에 승천하셨을지도 모른다. 하루 만에 죽음으로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죽음 이전에 30년을 허비하는 일이나 그 후에 40일을 낭비하는 일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흔히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에서 (죽음 이외에 성육신이라든가 부활 이후의 영광스러운 상태와 같은) 나머지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긴 하지만, 우리의 구원과 관련해서도 그 측면들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만일 예수님의 생애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과 그에 함축된 의미가 그분의 죽음과 함께 어딘가로 사라진다고 생각한다면, 이러한 관점은 신약성경의 각 본문들이 가진 미묘한 의미를 흐릿하게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부활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 부활하셨다고 말한다(롬 4:25). 또한 베드로는 구원의 효력을 다름 아닌 부활에서 찾고 있다(벧전 1:3; 3:21). 그리고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다윗 언약의 성취이자(행 2:30-32; 13:30-37), 성령 강림의 이유이며(행 2:33), 최후에 있을 심판의 현재적인 증거(행 17:31)라고 선포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빈 무덤이라든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 또는 마지막 날의 나팔 소리 같은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고도 십자가의 중심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또 어느 정도로 성(聖) 금요일만이 아니라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에도 복음을 설명해야 할까?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그분이 시험을 받으신 일이나 형체가 변화되신 사건에 대해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너무 단순히 취급하여 그 중심적이며 역동적인 의미를 상실해서도 안 될 것이다.결국 우리는 성경 이야기의 전환점이 되는 십자가뿐 아니라 (심지어는 십자가와 부활만이 아니라) 더욱 넓게 자리한 다른 이야기도 함께 바라보는 균형 잡힌 관점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된 다른 요소들을 언제나 십자가와의 관계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소설을 읽을 때 그 이야기에서 절정에 이르는 터닝포인트뿐 아니라 그 포인트가 자리하고 있는 넓은 문맥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나는 이런 차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보여 주는 더 넓은 문맥에 대한 사고를 열기 위해 예수님의 죽음 외에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포인트를 설명하고자 한다.1. 성육신 및 동정녀 탄생(Incarnation and Virgin Birth)중세 교회의 라틴어를 공부하며 예배문을 살펴보던 중, 나는 초대 및 중세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동정녀 탄생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결코 분리시키지 않으면서) 얼마나 강조했는지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다. 이는 브룬너와 같이 동정녀 탄생에 의문을 가지는 현대 신학자들의 무모함을 드러내 준다. 그들의 주장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탄생 기사만이 아니라 수세기에 걸친 기독교 예배의 무게 있는 전통과도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다.이레니우스(Irenaeus)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또는 안셈(Anselm)과 같은 신학자들은 성육신 자체가 인성(human nature)을 회복하고 영화롭게 하는 사건이라고 이해했다. 나는 이런 관점이 매우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한 인격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연합을 이루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일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공관복음서들에서 쉽게 지나치는 이야기인 변화산 사건(the transfiguration)의 의미 때문이기도 하다. 이 사건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몸이 심지어는 부활 전부터 독특했다는 사실,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부활은 어떤 외부적인 영광을 그분에게 부과한 사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함축된 의미가 처음부터 성육신과 완전히 분리될 수 없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2. 무죄한 삶(Sinless life)그리스도의 무죄한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사명에 실패했던 아담이나 이스라엘을 새롭게 재현하고, (최소한 개혁주의적 관점에서 볼 때) 능동적이며 수동적인 차원 모두에서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여 신자들이 회심할 때 그 의가 전가되도록 만들어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혹자는 재현(recapitulation)이라든가 전가(imputation)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일에 불편해하거나 주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순종적인 삶의 연장에서 대속적인 죽음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분의 삶은 반드시 구원 사건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십자가에서 일어난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분이 보여 주신 무죄한 순종의 일부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간적으로 어느 한순간에 ‘무죄한 삶’이 끝나고 ‘대속적인 죽음’이 시작되는 일이 가능했겠는가?나는 팀 겔러(Tim Keller)가 “그리스도는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을 사셨고,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죽으셨다”라고 수없이 반복하여 설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켈러가 진술한 그 명제의 두 부분은 서로 분리되어서는 안 되는 내용으로 여겨졌다.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은 궁극적으로 능동적인 성취(positive fulfillment), 즉 우리가 살아야 했던 삶과 수동적인 수용(negative absorption), 곧 우리가 죽어야 했던 죽음을 나타낸다. 더 나아가 그 두 가지 측면은 성경에서 “그 안에서”(in him)라고 표현되는 대표(representation)와 “우리를 위해”라고 표현되는 대체(replacement)의 원리를 모두 포함하는 하나의 유기적인 실재(one organic reality)라고 할 수 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그분의 삶에서 이미 시작된 과정의 절정에 해당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루터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커다란 ‘교환’(exchange)의 ‘한 순간’(one moment)이라고 언급했고,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제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와 하나님 간의 분리를 철폐하셨으며, 더 나아가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호의를 가지시도록 의를 획득하셨는가? 이에 대해 우리가 대답할 수 있는 바는, 그분이 바로 우리를 위하여 그 모든 순종의 과정을 통해서 그 일들을 성취하셨다는 것이다. [중략] 그분은 종의 형체를 취하신 때부터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자유의 값을 지불하기 시작하셨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3절).3. 장사(Burial)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활동에서 발생된 사건 또는 사실이 그 목적이나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고 전제한다면, 이와 같은 질문을 해 볼 수 있다. “왜 예수님이 단지 몇 시간 동안 하나님의 진노를 십자가 위에서 받으신 일만이 아니라 실제로 거기서 죽으신 일이 중요한가?” 또는 “왜 그분이 죽으신 후에 곧바로 살아나지 않고 죽음과 부활 사이에 시간(즉 금요일 오후에서 일요일 새벽에 걸친 시간)을 두신 일이 중요한가?”이 질문에 대하여 다시 한번 중세 신학자들의 글을 읽어 보는 일은 매우 흥미롭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구원이란 죄의 범위만큼 넓어야 하며, 죄 자체만이 아니라 죄책이나 죽음과 같은 죄의 결과까지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주장이 옳다고 생각한다. 즉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anzus)가 언급한 고전적인 격언인 “떠맡으심 없이는 치유됨도 없다”(that which is not assumed is not healed)라는 말을 조금 변형한다면, 이런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경험하지 않고는 대속할 수 없다.” 병을 고치기 위한 해독제는 모든 아픈 부위에 닿아야 하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 즉 죄악, 진노, 죄책,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만이 아니라 결국 영육의 사망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문제들에 자신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C. S. 루이스가 ‘사자와 마녀와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에서 말했듯이 ‘생명’(요 14:6)이신 이가 죽음의 상태에 들어갈 때에만 죽음 자체가 ‘후퇴’하는 것이다. 곧 해독제는 전 영역에 퍼져야 한다.4. 부활(Resurrection)그리스도의 부활은 많은 주목을 받지만, 흔히 그 사건의 역사적 신뢰성 또는 변증적 목적과 관련해서만 주목을 받는다. 우리는 자주 고린도전서 15장 17절을 인용하며 부활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이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왜 이 내용이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그만큼 자주 살펴보지 않는다. 부활의 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 사건이 우리의 일상 생활에 대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이 주제와 관련하여 리차드 개핀(Richard Gaffin)의 ‘부활과 구속’(Resurrection and Redemption)은 특히 통찰력이 있는 책으로서 더욱 널리 읽히고 연구되어야 한다. 그는 바울의 사상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분의 죽음과 같이 전적으로 메시아만이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며, 그 부활이 없이는 심지어 대속도 완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5. 승천 및 천상 사역(Ascension and Heavenly Session)존 오웬(John Owen)은 ‘그리스도의 영광’(The Glory of Christ)에서 승천하신 이후 예수님의 삶은 여전히 인간으로서 육체를 가진 삶이라는 점을 매우 강조한다. “그분이 지상에서 지니셨던 인성을 지금도 지니고 계시며 또한 동일한 영혼과 육체를 지금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 조항이다.” 왜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이후로도 육체를 지닌 삶을 영위하신다는 사실이 그토록 중요한가? 그 이유는 육체를 지니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지금도 신자들을 위해 중보하시고(롬 8:34; 히 7:25; 요일 2:1-2), 열방을 통치하며 다윗 왕에게 약속된 그의 나라를 확장하고 계실 뿐 아니라(행 2:30-31), 성령을 보내셔서 비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의 진리를 확신케 하심으로써 교회를 이루시기 때문이다(행 2:33; 요 16:7-11; 엡 4:7-8). 이처럼 지금 이 순간과 모든 교회 역사 가운데 예수님은 구원 활동(곧 중보와 통치와 성령을 보내 주시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행하신다.6. 재림(Second Coming)그리스도의 재림도 신약성경에서 구원 사건의 일부로 묘사된다(히 9:28). 그 이유를 생각하는 일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흥미를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할 사실은 바빙크(Bavinck)와 같은 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리스도가 재림 이후에도 하나님과 이미 영화롭게 된 백성들 사이에서 중보 사역을 지속하실 것이라는 내용이다. 곧 (성육신이 하나님의 영원한 행동이었음을 고려할 때) 삼위일체의 제2위(the second member of the Trinity)는 언제나 신인(the God-man)이시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과 유한한 인간 사이에서 그리스도가 행하시는 중보의 역할도 영원토록 지속된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바빙크는 그리스도가 맡으신 ‘화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reconciliation)은 마지막 날의 새 땅에서는 중단되겠지만, ‘연합의 중보직’(mediatorship of union)은 영원히 지속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성자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자신의 인성을 벗어버린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데, 이는 성경적인 근거가 전혀 없는 발상이다”(개혁교의학 3권).이제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 중심성’(cross-centeredness)을 그 자체로 존중하면서도 전체 이야기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징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와 관련하여 반드시 유념해야 할 두 가지 사항을 설명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십자가 사건의 주변부에 자리한 모든 ‘순간들’이 동등하게 주변적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활 사건은 그리스도가 40일 동안 받으신 시험이라든가 그분이 대제사장으로서 드리는 기도보다도 우리의 구원에서 훨씬 더 지배적인 역할을 행사한다. 물론 의미의 차이는 있겠지만, 십자가와 부활이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함께 중심을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을 논의할 때, 우리는 마치 중심부와 주변부가 관심을 끌기 위해 서로 다투는 것처럼, 즉 그 요소들이 서로 경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자리한 다양한 ‘순간들’을 깊이 이해하는 일이 십자가에 대해 제한된 시야가 아니라 확장된 시야를 가져다 줄 수 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순간들은 십자가 사건이라는 위대한 한 순간과 관련을 맺게 될 때 가장 심오한 의미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메타포를 다시 사용한다면, 소설의 넓은 문맥에 자리한 주변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대한 이해를 더욱 강화하듯이, 주변부가 주변부로서 보여질 때 우리의 시야에서 이 중심적인 사건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된다. 결국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 사역은 (그분의 인격이 이루는 하나의 연합처럼) 각 요소가 구별될 수는 있으나 분리될 수 없는 한 연합체라고 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Did More to Save Us than Die번역: 장성우
복음
예수그리스도
존스토트
그리스도의십자가
성육신
동정녀탄생
무죄한삶
부활
승천
재림
빈 무덤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
by Paul Rezkalla
2019-01-30
십자가 처형을 받은 나사렛 예수의 무덤이 실제로는 빈 무덤으로 발견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거짓말을 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빈 무덤의 역사성은 이처럼 기독교 신앙에 중대한 역할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빈 무덤을 둘러싼 역사적 정황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1. 빈 무덤에 대한 믿음은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 기록되기도 전에 존재했다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초대 교회가 고백했던 가장 이른 형태의 신조를 언급한다.“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여기서 ‘받은 것을 전하였다’라는 공식적인 표현은 바울이 그 당시 교회가 공유했던 구전 전통(oral tradition)을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는 이 서신을 대략 50년대 중반에 기록했다. 따라서 이 신조의 내용은 그보다 더 일찍 형성되었다고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예수님이 기원후 30년 즈음에 죽으셨다면, 이 신조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십자가 처형 이후 25년 정도가 지났을 때는 완성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1장 18-20절은 바울이 이 신조를 30년대 어느 시점에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로부터 받았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오늘날 바트 어만(Bart Ehrman), 제임스 던(James Dunn), 게르트 뤼데만(Gerd Lüdemann)과 같은 진보적인 학자들조차 이 신조의 형성 연대를 예수님의 죽음 이후 2년에서 5년 정도로 생각한다. 그중 뤼데만은 이렇게 말한다. “이 구전 전통의 내용은 십자가 처형이 있고 나서 2년 후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고, 3년 이상 넘어간 시점에 만들어 졌다고는 추정하기 어렵다. 고린도전서 15장 3-8절에서 언급된 예수의 출현에 관한 공식 내용은 대략 30년에서 33년 경에 그 기원을 둔다.”즉 예수님이 죽으시고 3년도 채 지나기전에, 초대 교회는 이미 그분의 육체적 부활을 확증하는 신조를 구전으로 공유하고 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는 당연히 예수님의 빈 무덤도 공인된 사실로서 그들이 인정하고 있었음을 전제한다.2. 예수님의 육체는 예루살렘에서 장사되었다우리는 기독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공개적으로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장사되셨던 바로 그 도시에서 그분이 부활하셨다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다녔다. 이 어부 출신의 제자들이 일으키던 운동을 진압하려면, 그냥 예수님의 무덤으로 가서 그 죽은 육체를 끄집어 내어 제자들이 거짓말쟁이임을 세상에 드러내면 되었을 것이다. 또는 로마인과 유대인이 모두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 새로운 그룹의 사람들을 싫어했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만일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 몸의 일부를 어떻게든 찾아내서 기독교 운동의 불씨를 끌 수 있었을 것이다.그러나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전개하는 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누군가가 무덤에서 그 몸을 끄집어냈다든가, 아니면 무덤 속에서 결국 죽은 몸이 발견되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았다.3. 예수님의 빈 무덤은 여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되었다이 소제목이 함축하는 역사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했는지를 알아야 한다.“여자들은 그 성(性)의 특성상 경솔하면서도 뻔뻔하기 때문에, 여자들의 증언을 인정하면 안 된다. 또한 노예들은 그 영혼이 비천하기 때문에, 그들의 증언 역시 인정하면 안 된다. 이를테면, 그들은 모두 어떤 이익을 얻고자 하는 바람이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사실을 말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 요세푸스(Josephus)“여자들이 제시하는 증거는 유효하지 않으며, 그들이 무엇인가를 제시하는 일도 정당하지 않다. 예를 들어, 랍비가 강도라고 간주하는 사람이라도 여자가 제시하는 증거와 동일한 증거를 제시할 만한 자격을 가진다.” — 탈무드 중 로쉬 하샤나(Rosh Hashanah)“율법이 여자한테 전달되기 전에 태워지는 편이 낫다.” — 탈무드 중 소타(Sotah)모두 얼마나 거친 표현들인가! 당연히 1세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세계 여성의 날’(International Women’s Day) 따위를 기념할 일도 없었다.이처럼 여자들은 신뢰할 만한 증인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부족한 존재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왜 굳이 복음서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첫 번째 증인으로서 여성을 거론했을까? 만일 그 저자들이 빈 무덤에 대해 기록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실증하고 싶어했다면, 베드로나 요한이나 다른 유력한 제자들을 첫 번째 증인으로 언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 제자들 중에 누구를 선택했더라도 여자들보다는 그 결과가 나았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복음서 저자들은 여자들을 첫 번째 증인으로 거론했다. 왜 그렇게 했을까? 아마도 빈 무덤의 사건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어떤 기록이 가진 당황스러운 요소(embarrassment)는 역사가들이 기록된 사건의 역사성을 측정할 때 사용하는 한 가지 기준이 된다. 만일 어떤 저자가 자기 글의 역사성이 의심 받을 수 있는 위험 부담을 끌어안으면서까지 당황스러운 요소를 삽입했다면, 그가 그 글의 내용을 지어냈을 가능성은 희박해 진다는 것이다. 즉 복음서 저자들이 빈 무덤의 증인으로서 구체적인 여자들을 거론하는 특징은 상당히 당황스러운 요소로서 그 빈 무덤의 이야기가 꾸며졌다고 주장하기에는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4.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몸을 제자들이 훔쳐갔다고 주장했다마태복음 28장 11-15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여자들이 갈 때 경비병 중 몇이 성에 들어가 모든 된 일을 대제사장들에게 알리니 그들이 장로들과 함께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며 이르되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둑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인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왜 굳이 유대인들은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렸겠는가? 또 만일 마태복음의 저자가 그 무덤이 실제로는 비어 있지 않았다고 생각했다면, 왜 그런 소문이 두루 퍼졌다는 이야기를 했겠는가?2세기에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이 소문이 당시에도 여전히 돌아다닌다는 내용을 기록했다. 곧 ‘트리포와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문에 의하면] 제자들은 밤에 한 무덤을 찾아갔는데, 그 무덤은 예수님의 몸이 십자가에서 풀려난 후 안치된 곳이었다. 거기서 그들은 그 몸을 빼내어 훔쳐갔고, 결국 그분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고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주장하며 사람들을 속였다고 한다.”우리는 만일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지 않았다면, 제자들이 그분의 몸을 훔쳐갔다는 소문을 퍼뜨릴 필요도 없고, 또 그 소문이 퍼질 수도 없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이 모든 정황을 미루어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무덤이 십자가 처형이 있고 3일째 되는 날 몇몇 여자들에 의해 빈 무덤으로 발견되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할 때에만 제대로 설명될 수 있는 위의 정황들과 얽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잠시 생각해 봐야 한다. 만일 복음서 저자들이 빈 무덤을 둘러싼 세부적인 정황들을 진실하게 기록했다면, 그 기록의 역사성이 드러내는 하나의 사실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to Believe in the Empty Tomb번역: 장성우
복음
부활
무덤
복음서
장사
역사적정황
예루살렘
여자
유대인
오순절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
by Trevor Laurence
2019-01-28
그리스도가 승천하시고 열흘 후, 모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 있을 때였다. 불현듯,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는 일이 일어났다(행 2:2-3).바로 오순절 사건이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임하신 것이다.여기서 바람과 불이 등장한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구름과 불길이 있었는데, 이런 현상은 출애굽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백성보다 앞서 가거나 뒤에서 따라갈 때 그분의 임재를 나타내기도 했고, 또는 그 영광이 성막에 거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민 9:18). 그리고 나중에 솔로몬 성전이 세워졌을 때는 그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도 했다(왕상 8:10-11). 그런데 이제 오순절 사건에서는 그 영광이 하나님의 새로운 처소를 가득 채우는데, 여기서 그 처소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백성, 곧 죄로 얼룩진 사람들이다.이 사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바람은 강력하게 불어오지만, 그 백성을 쓰러뜨리지 않는다. 또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불은 그 백성 위에 타오르지만, 그들을 소멸시키지 않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를 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마주하는 고통을 받으신 결과,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성전으로 삼아 은혜 가운데 거하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바로 이 신비로운 순간에,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충만히 임하셔서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는 이적이 일어난다. 이미 예수님은 제자들이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증인이 되도록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리라고 약속하셨다(행 1:8). 그리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이 되자 이 약속을 지키신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오순절 사건은 전체 구속사에서 어떤 부분을 차지할까? 그리고 이 사건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어떻게 연결시킬까? 또한 우리는 그 사건과 관련된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질문들을 생각해보기 위해, 우리는 먼저 이 사건 현장부터 살펴봐야 한다.바벨탑 사건의 역전“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다가(행 2:5), 큰 소동이 일어나자 서로 모여들었다. 그런데 이때 놀랍게도, 외국에서 자란 그 유대인들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언어로 어떤 사람들이 설교하는 광경을 보게 된다.여기서 우리는 바벨탑 사건을 잠시 떠올릴 필요가 있다. 그때 하나님은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사람들을 분리시킴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심판하셨고 또한 그 죄악된 일이 성사되지 못하게 하셨다(창 11:1-9).그런데 지금 오순절 사건에서 하나님은 그 많은 사람들을 한데 곧 예수님에게로 모으기 위해 여러 가지 언어들을 사용하셔서 그들의 죄악을 용서하기까지 하신다. 다시 말해, 성령의 강림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복음이 그 사람들에게 적용되어 죄악의 결과가 더 이상 그들한테 미치지 못하는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다.따라서 우리는 오순절 사건에서 바벨탑 사건의 역전 현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 사건은 구약성경에 약속된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보여 준다. 이를테면, 구약성경은 장차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가 통치하는 시대가 오면 하나님의 분열된 백성이 하나가 되어 결국 그분의 나라가 회복된다는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겔 37:15-28).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토록 대망하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은 이제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 즉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믿음으로 하나가 되는 방식을 통해 성취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회복의 역사는 이방인에게까지 미친다.종말의 시작이렇듯 그 기이한 일들을 목격하며 당황스러워 하던 사람들이 “이 어찌 된 일이냐”(행 2:12)라고 묻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행 2:13)라고 대꾸한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만해도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베드로는 이제 목소리를 높여 그 물음에 답변하기 시작한다.그는 거기에 모인 청중이 이미 알고 있는 성경 본문들을 인용한 후에,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가 성취하시는지를 설명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성경 해석을 배운 사도들(눅 24:44; 행 1:3)이 어떻게 구약성경의 궁극적인 의미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먼저 그는 요엘 2장 28-32절을 인용한다. 이 본문은 하나님이 새 언약의 복을 실현하여 그 모든 백성에게 자신의 영을 부어주시는 종말의 현상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예언의 말씀대로, 이제 성령께서는 기름부음 받은 지도자들에게만 임하시지 않는다. 그분은 남녀노소와 종과 상전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언약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임하신다.즉 요엘이 내다본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 그가 바라던 성령도 찾아오신 것이다. 지금까지 에덴동산과 성전과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던 하나님이 이제는 성령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시게 된 것이다.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를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행 2:19; 욜 2:30) 드러내시겠다는 예언은 바로 주의 날의 도래, 즉 심판과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친히 역사에 개입하시는 날이 시작되리라는 사실을 의미했는데, 바로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흥미롭게도 그와 같은 기사와 징조는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수반된 사건들을 통해 실현되기 시작했다(마 27:45-54; 28:2). 왜 그럴까? 바로 하나님이 죄를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위해 구원을 성취하시는 십자가에서 주의 날은 역사 속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 종말의 날에,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은 성령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다윗의 후손을 위한 다윗의 기도베드로는 계속해서 복음을 뚜렷하게 선포한다.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사망이 그분을 매어 놓을 수 없었기에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를 대변하는 사망은 오직 죄인들에게만 합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완벽하게 거룩하고 흠이 없는 의인이셨기에, 하나님은 그를 감고 있던 죽음의 사슬을 풀어 버리신 것이다.그리고 베드로는 시편 16편 8-11절을 인용하며,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었던 다윗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가르친다. 이 시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죽음에 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소망을 고백하는데, 베드로는 이 소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다고 선포한다. 즉 다윗이 과거에 자신을 가리켜 한 말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그의 보좌에 영원히 두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 자신의 아들을 가리킨다는 것이다.비록 다윗 왕은 죽었지만, 진정으로 거룩하신 왕인 예수 그리스도는 죽어서도 그 몸이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행 2:27)이라고 간구했던 다윗의 기도가 그의 후손인 그리스도 안에서 응답된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무덤에 버려져 썩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는 다윗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모든 자들이 영생을 선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오순절 사건의 의미베드로는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여 지금 하나님 아버지의 우편 곧 절대적인 권능과 권위를 상징하는 자리에 앉아 계신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그분이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 보내심으로써 이제는 우리가 성령이 하시는 사역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선언한다.그렇다면, 이와 같은 오순절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지금까지 유대인들이 믿고 있던 성경을 인용해서 그들이 목격한 현상을 해석해 온 베드로는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려는 역사에 대해 선포하고자 한다. 그런데 그 선포에 앞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한다.“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행 2:36).이 사실은 그리스도가 부활하여 바로 지금도 통치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구속사적으로 확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바로 여기에 오순절 사건의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결국 이러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성령께서는 새 생명을 주시는 역사 가운데 사람들의 마음을 찌르셨다. 그 결과,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또한 그들은 언약의 표인 세례를 받아 교회의 일원이 되고자 했다. 이처럼 반역했던 사람들이 회개하고 믿음을 고백하며 세례를 받음에 따라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이 되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용서하심과 성령의 내주하심을 포함한 모든 약속된 복을 받게 되었다.“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행 2:39). 이 베드로의 외침 속에는 아브라함 언약(창 12:1-3; 17:1-8)이 메아리치는데, 그 이유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고자 한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에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궁극적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고 있기 때문이다.오순절 사건이 발생한 그 하루 만에, 교회는 120명에서 3,000명으로 확장되었다. 오순절에 이루어진 성령 강림은 유일한 사건이지만, 예루살렘에 찾아오신 그 성령은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 가운데 내주하신다. 그리고 베드로가 선포했던 그 약속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통해 성령을 받은 모든 이들을 붙들어주고 평안케 하며 고무시키는 소망이 된다.구약성경에서 오순절은 곡식을 수확하도록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따라서 바로 그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신 사건은 영혼을 수확하는 일, 곧 그리스도의 제자가 늘어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오순절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의미는 바로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가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분의 교회를 쉬지 않고 친히 세워 가신다는 것이다. 이렇듯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는 그분의 약속은 자기 백성의 삶 가운데 이 순간에도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entecost Was First of the Last Days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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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경
오순절
성령
종말
다윗
기도
베드로
예수그리스도
부활
예수님은 과연 몇 시에 죽으셨을까?
by Justin Taylor
2019-01-25
마가복음은 ‘제삼시’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이야기한다(막 15:25). 그런데 요한복음은 ‘제육시’에 예수님이 십자가형 판결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있다(요 19:14-16). 그렇다면, 우리는 거기서 언급되는 두 시간을 서로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두 본문은 서로 모순된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일까?이런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1세기 지중해 세계의 ‘시간’ 개념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시대착오적인 접근을 해서 원래 상황에는 없던 시간의 정확성을 본문 해석에 무리하게 부과하기가 쉽다.유대인들이 낮과 밤 시간을 이해했던 방식첫째,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시간을 초 단위까지 재며 시간에 대한 의식을 극단적으로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조니 밀러(Johnny Miller)가 언급했듯이, “그리스도가 활동하던 때와 그 이전 시대의 시간 표기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정확했으며 오늘날의 시간 엄수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1세기에 해시계는 일반적으로 사용되지도 않았고, ‘시’(hour)보다 작은 시간 단위도 없었다.둘째, 유대인들은 하루를 일출에서 일몰까지로 생각했고, 그 간격을 12시간으로 구분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에서도 나타난다.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요 11:9).셋째, 유대인들은 하루를 보통 세 개의 분기점을 설정해서 나누었다. 예를 들어,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예수님은 ‘제삼시’, ‘제육시’, ‘제구시’를 언급하신다(마 20:1-9). 이는 각각 중간 아침(mid-morning), 정오(mid-day), 중간 오후(mid-afternoon)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들이었는데, 바로 이 표현들이 십자가 기사에서 사용된 유일한 시간 표기들이다(마 27:45; 막 15:25, 33; 눅 23:44; 요 19:14).넷째, 1세기 로마인이나 유대인이 밤 시간을 이해하던 방식도 유사하다. 예수님은 자신의 재림을 대비하여 제자들에게 깨어 있으라고 명령하시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막 13:35). 여기서 우리는 밤이 일몰에서 일출까지 총 네 단위(저물 때, 밤중, 닭 울 때, 새벽)로 구분되어 있음을 본다. 이에 대해 케빈 리프(Kevin Lipp)가 제시한 시각 자료는 큰 도움을 준다(아래의 도표를 참고하라).마가복음 15장 25절과 요한복음 19장 14절에서 일어난 일먼저 마가복음 15장 25절의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이 본문에서 언급되는 ‘제삼시’는 정확하게 오전 9시를 가리킨다기보다 대략적으로 오전 7시 반 내지 8시부터 오전 10시나 10시 반에 해당하는 시간대를 가리킨다고 해석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9장 14절에 언급되는 ‘제육시’도 오전 10시 반 혹은 11시에서 오후 1시나 1시 반에 해당하는 어떤 시간이든 가리킬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hour)가 하늘에서 해가 움직이는 경로를 사분의 일로 나눴을 때 그 하나의 위치를 가리키는 대략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말하자면, 십자가 처형에 대한 판결이 10시 반 경에 내려졌는데 두 목격자가 동시에 하늘에 떠 있는 해의 위치를 쳐다보았다면, 그중 한 사람은 현재 시각을 ‘제삼시’라고 앞당겨 잡을 수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제육시’라고 늦추어 잡을 수 있다. 이는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주제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예를 들면, 요한복음의 저자는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최종 판결이 내려진 시간이 마치 유월절 만찬을 위해 어린 양을 잡는 시간인 정오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묘사했을 수 있다.결론적으로 말해서, 두 본문 사이에 모순은 없으며, 이는 요한복음 19장 14절이 ‘제육시’ 앞에 ‘약’(역주: 이 단어가 한글성경의 번역에서는 생략된 경우가 많지만, 원문에는 ‘호스’[ὡς]라는 단어가 사용되어 영어성경에서도 이를 보통 ‘about’이라고 번역한다)이라는 대략적인 의미를 나타내는 수식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도 더욱 명확해 진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Time Did Jesus Die?번역: 장성우
복음
십자가
제삼시
제육시
케빈리프
호스
로마인
유대인
마가복음
요한복음
회의적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
by Elliot Clark
2019-01-22
기독교 변증법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복음 안에서 살아야 하는 이유를 논증을 통해 설명해 내는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포스트모던 시대 혹은 후기 기독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독교 변증법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성적으로 설득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복음을 이미 알고 있지만, 의심이 많아 이를 잘 수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 복음을 어떻게 전할 것인가? 의사이며 신학자이고 복음주의자로서 샘 찬(Sam Chan)은 ‘회의적인 사람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할 수 있을까?’(Evangelism in a Skeptical World: How to Make the Unbelievable News about Jesus More Believable)라는 그의 새 책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다룬다. 그는 현재의 문화적 환경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변증법을 사용하여, 의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한다.정확한 진단찬은 이 책의 첫 번째 장에서 먼저 복음과 복음주의를 정의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제시한다. 그 다음 장들에서는 복음의 상황화(contextualization)와 현대에 새롭게 떠오르는 문화적인 이야기를 포함하여 일상에서 복음을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를 다루고 있다. 그는 복음을 전할 때 당면하는 여러 상황을 면밀하게 살펴봄으로써, 회의적인 사람들의 복음 수용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을 정확하게 진단한다. 찬은 그 첫번째 요인으로 개연적 신앙 구조를 언급한다. 그는 신호등 비유를 사용하여, 이러한 신앙 구조를 “초록색 신호등이 켜지면 가고, 빨간색 신호등이 켜지면 멈추는 식으로,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 되어야 진리를 받아들이는 신앙과 신념과 이해”라고 설명한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모든 신앙을 형성하고 있는 골격이다. 찬에 의하면, 개연적 신앙 구조는 공동체와 경험과 증거라는 세 가지 주요 요소로 구성된다. 현대적이고 계몽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궁극적으로 무언가를 믿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신빙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보고, 사실에 의해 정확하게 지지되는 것만을 믿는다. 찬은 더 나아가 현대인의 신앙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요소를 주목한다. 우리는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의 주장을 더 잘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에서 자신이 주장하는 진리를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들을 목격할 때, 우리는 특히 그 주장을 더 잘 믿게 된다. 찬이 설명하고 있듯이, 포스트모던 사회는 공동체와 경험을 더 높이 평가한다. 현대인들은 부활을 이론적으로만 증명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그다지 무게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친절과 사랑의 경험을 하면 그들은 마음에 걸어놓은 빗장을 열 것이다. 의심 많은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진리를 목격하고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을 제공할 수 있다. 결국, 찬은 "기독교 공동체가 제공하는 환대는 타당성을 증명해야만 진리를 받아들이는 회의적인 현대인의 이성적 사고 구조를 해체시킨다"고 본다. 찬은 우리가 어떤 신념을 형성할 때 작용하는 공동체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공동체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사실, 임상적으로 검증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보통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이 있다. 공동체에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것을 진리라고 이해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3장 16절의 복음을 제시할 때 공동체에서 수용되지 않은 신념을 앞세워 전달하려 한다면, 이는 효과적인 방법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대체 의학의사인 찬은 요즘 사람들이 대체 의학에 관심을 가지면서 점차로 순수 자연과학과 멀어지는 현상을 주목한다. 그는 현대 사회가 새로운 것(예를 들어, 천연 오일이나 침술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새로운 방식을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는 관찰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이런 면에서, 찬은 자신이 만든 복음 전도의 새로운 방식을 제안한다. 만약 다양하고 활기찬 성격이나 반대의 모습을 가진 공동체에 복음을 전하려면, 그 각각의 공동체에 적합하도록 복음을 새롭게 상황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찬은 복음 전도의 메시지와 방법, 말과 행동, 소통과 공동체 양쪽 모두를 중요하게 여긴다. 그는 우리가 비신자들의 세계에 들어가는, 비신자들과 연결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찾으라고 제안한다. 그는 복음 전도의 방법을 사적 차원의 복음 선포 방식에서 참여와 상호작용을 격려하는 공동체적 방식으로 나아가기를 주장한다. “복음주의와 함께 그냥 굴러가는 삶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어 복음전도자의 삶을 살도록” 요청한다.처방전어떤 이들은 찬의 접근 방법을 수정 복음주의라고 딱지를 붙이거나 지나친 상황화라고 그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살펴보면, 나는 그의 처방전이 통찰적이라고 본다. 찬은 성령의 궁극적이고 초자연적인 방법을 귀하게 여기면서도 자연적인 인간의 방법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의 목적은 명백하게 실천적이다. 그는 복음에 점점 더 적대적인 세상에서 현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 성경적 상황화를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하여 찬은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라고 한다. 그들로부터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지내라고 말한다. 그는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으면서 그들의 생각과 관심에 공감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그는 상대방의 신념과 가정을 매력적으로 해체시키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Lordship)과 사랑을 부각시키는 복음 전도 모델을 제시한다.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모든 책이 완벽하지 않듯이, 이 책에도 논란이 될 만한 주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후기 기독교 사회에 대한 진단은 명확하지만, 찬이 제안하고 있는 몇 가지 점들은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예를 들어, 찬의 주장은 관계적으로 신뢰성을 쌓기 위하여 복음 전도를 늦추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새로운 접근이라기보다는 전형적으로 실패하게 할 수 있는 방식인 것처럼 보인다. 또한, 이 책의 어조는 반전투적이다. 찬은 복음 선포 문제를 두고 추론과 관계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의 주장은 마치 상황화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해하기 쉽고 그들의 구미에 맞게 만드는 방법이라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결과적으로 복음이 수용되기 어려운 문화에 복음을 전하려 할 때, 상황화라는 명목으로 사람들의 호기심만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이와는 반대로 성경 속에서 바울이 부활을 의심하는 사두개인을 강하게 지적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또한 예수님이 사람들의 죄와 불신앙의 문제에 얼마나 예리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는지도 생각해 보라.찬은 사도행전에 나타난 복음의 상황화를 예로 들면서, 현대의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에도 복음의 상황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심판이나 회개에 대한 강조가 확실히 약하다. 사실, 사도행전에서는 회개를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고 있다. 따라서 찬이 제안하는 복음 전달 행위가 그러한 권위와 긴급성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복음 전도는 그저 "예수님이 나의 깊은 갈망에 대한 답변을 주신다"라고 고백하게 하거나, 또는 내가 속한 문화적 가정이나 공동체적 가치에 기독교가 잘 맞는다고 인정하게 만드는 활동이 아니다. 찬이 시인하듯이, 복음은 예수님의 주인 되심에 관한 소식이다. 따라서 복음의 진리가 이와 상반되는 문화에 전달될 때는 자연히 공격적이고 생경할 수밖에 없다. 복음은 죄로 물든 자기를 포기하고 부패한 세상으로부터 돌아서도록 부르기 때문이다. 회의적인 세상에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을 찾게 하라는 찬의 제안은 여러 면에서 설득적이다. 찬의 접근 방법은 복음전도적이기보다는 변증법적이다. 그의 접근은 기존의 구태의연하고 왜곡된 방법을 바로 잡아 줄 수 있는 매력적인 복음 전도 방법이며, 아마도 분명히 효과적인 실천 방법이 될 것이다. 바라건대, 교회가 찬의 비전을 따라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더 정확하고 알맞게 소통하는 방법을 적용하되, 공동체 안에서 복음의 진리와 사랑을 모두 염두에 두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hare Your Faith in a Skeptical World번역: 정은심
복음
변증
회의적인사람
샘찬
복음주의
복음의상황화
복음전도적
변증법적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
by Stephen Witmer
2019-01-21
작은 방에 가득한 긴장감을 의식하면서, 나는 불편한 듯 의자에서 자세를 바꿨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내 목회에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불만족에 관한 대화가 곧 오갈 것임을 짐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몰랐지만, 혹 그들이 상처가 될 말을 하며 교회를 떠나는 불행한 결말이 연출되지 않을까 염려했다. 나는 칼빈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과 대화를 할 때, 나는 하나님의 역할에 관해 거의 생각하지 않았고, 내 앞에 앉아있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소중히 여겨야 할 교리그 후로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교리를 소중히 여기며, 이 교리를 통해 힘을 얻고 격려를 받았다. 나는 섭리에 관한 교리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내는지를 배우게 되었다. 칼빈은 이 교리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했다. “섭리에 관한 무지는 최고로 비참한 상태라고 할 수 있으며, 최상의 복은 섭리를 아는 지식에 놓여 있다.”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개혁주의 견해를 옹호한다 하더라도, 이 교리를 통해 “최상의 달콤한 열매”를 거둔다거나 “이 교리를 아는 것보다 더 유익한 일은 없다”라고 말할 사람이 우리 중에 과연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나는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칼빈의 글을 읽으며, 이 중요한 교리의 실제적인 유익을 경험하는 일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두 가지 차원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견해는 인간의 사고, 선택, 행동을 포함하여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일어난다고 믿는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어떤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으며 그의 아버지의 손에 의해 발생한다”라고 선언한다. 섭리에 관한 고전적인 견해는 인간이 야기하는 원인도 고려하여 신적(神的) 요인과 인적(人的) 요인이 함께 작용한다고 전제한다.그러나 인적 요인과 구별되면서도 바로 그 인적 요인을 지배하는 신적 요인 안에 궁극적인 원인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견해는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창세기 45장 본문에서 확인된다. 창세기 45장 4-8절에서 요셉은 ‘자기 형제들이’ 자신을 애굽에 팔았다고 두 번 말하고, ‘하나님이’ 그를 애굽으로 보내셨다고 세 번 언급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섭리 교리가 적용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특징이 있다. 요셉은 형제들의 역할을 두 번 언급하고 나서, 그 역할을 부인하는 것처럼 말한다.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 45:8). 여기서 요셉이 일부러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의 말은 분명히 이 문제에 관한 ‘궁극적인’ 책임이 형제들에게 있지 않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요셉의 형제들과 하나님은 모두 어떤 역할을 실제로 했지만,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역할을 하셨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인간의 선택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섭리 건망증이 말은 요셉이 관념적으로 부적절하게 판단하고 내뱉은 신학적인 언급이 아니다. 실제로 여기에는 즉각적이고 실천적인 함의가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창 45:5)라고 요셉은 형제들에게 말한다. 왜 그럴까?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창 45:5). 하나님의 행위는 요셉의 형제들이 근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된다. 그렇다. 형제들은 진정으로 죄를 범했고, 이 사실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형제들의 행동을 통해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계셨고, 이 목적이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쳐야 했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그들의 죄악된 의도가 아닌 이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의도에 더 집중하라고 촉구한다. 이제 형제들은 아버지 야곱에게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세우셨고(창 45:9), 그 결과로 하나님이 가족 전체를 구원하실 것이라고 보고해야 했다(창 45:10-11). 나중에 우리는 바로 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원인 때문에, 요셉이 복수하려 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친절하게 말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창 50:19-21).칼빈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상처를 받을 때,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의 고통은 증가되고 마음은 복수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눈을 들어 원수가 악하게 행한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로운 섭리에 의해 허용되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한다.” (마치 창세기 45장의 요셉처럼) 여기서 칼빈은 과장법을 사용해서 논지를 전개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타인의 선한 의도나 악한 의도, 또 그에 따른 말과 행동을 완전히 무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칼빈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기독교인의 마음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일어난다는 점과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완전히 납득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물의 제1원인으로 바라보고 제2원인들은 그 본연의 맥락 안에서 주목하게 된다.” 이에 따르면, 동일하게 악한 행동을 두고서도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악이 각각 드러나는 방식대로 양자를 명확하게 고찰하게 된다.” 따라서 “그들의 악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하나님을 향해서는 눈을 들라”는 칼빈의 권고는 우리의 주된 초점이 인간의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있어야 함을 강조하는 그의 논법이라고 할 수 있다.이는 모든 기독교인에게 주어지는 매우 유익하고 실제적인 권고이다. 우리는 심술궂고 악의적인 원수들을 마주할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배후에 궁극적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잊기가 쉽다. 그분의 섭리에 관한 교리에 대해서는 입술로만 고백하고, 우리의 감정과 반응의 대부분은 눈에 보이는 행위자에게 기울어지기가 쉽다. 결국 눈에 보이는 행위자, 즉 인간이 더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며 인간은 그분의 선한 계획을 이룰 뿐이라는 믿음은 너무나도 쉽게 잊혀져서 우리의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섭리 건망증’(providence amnesia)으로 고통받고 있다.보이지 않는 손을 보기우리는 모든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하루를 시작해야 한다. 폴 트립(Paul Tripp)은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이렇게 드린다고 한다. (1) “주님, 오늘 저는 도움이 간절히 필요합니다.” (2) “당신의 은혜 가운데 저를 도울 자들을 보내 주소서.” (3) “도움이 주어질 때는 그 도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한 마음을 제게 주소서.” 예상하지 못한 사람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날마다 준비시키는 일은 스스로의 눈을 열어 모든 상황에서 우리를 도우시는 그분의 자비로운 행동을 보게 한다.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의 손길을 지켜보아야 한다.게다가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줄 때, 우리는 그들의 악한 의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숙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힘들다면, 다른 이의 악한 의도에만 집중하는 자들에게 주는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Robert Murray M’Cheyne)의 충고대로, 하나님의 섭리를 열 번만 바라보라. 이는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권했던 일이다. 그리고 욥이 했던 일이기도 하다(욥 1:21).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완전하게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해 아무 생각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는 자들의 악한 의도를 그저 무시한다고 해서, 그 의도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면,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묵상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삶을 위한 교리이 글을 시작하며 이야기했던 그 작은 방에서 혹여라도 그렇게 고통스러운 대화를 다시 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선한 의도를 얼마나 생각할 수 있을까? 아마도 여전히 내 손바닥은 땀에 흠뻑 젖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전에는 갖지 못했던 확신을 이제는 갖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화가 난 사람들이 내뱉는 날카로운 말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일하시기를 기대하고 싶다.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문제가 사라지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분의 위대하고 자비로운 목적 속에서 우리를 빚어가기 위해 진행된다. 따라서 섭리에 관한 교리는 우리의 삶을 위한 가르침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n’t Underestimate the Doctrine of Providence역자: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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