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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이 아닌 예수님을 바라보자
by Jen Oshman
2019-01-16
당신의 믿음이 충분한지 생각해 보았는가? 당신이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때로 당신의 약한 믿음을 부끄럽게 여겨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자신의 믿음이 충분한지에 대하여 의문이 들 때가 많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드는 그 의심은 우리를 늘 괴롭힌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19세기의 훌륭한 설교가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은 ‘신자의 삶에 나타나는 믿음의 승리’(The Triumph of Faith in a Believer’s Life)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삶은 스스로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를 바라보는 일’(히 12:2)에 달려있다. 믿음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그 힘은 우리가 지닌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의심이 들 때에 반드시 이 고귀한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비행기 은유여러 해 전, 대만으로 비행을 하던 중 나는 화장실에서 4살밖에 되지 않은 딸과 함께 난기류를 만났다. 경고도 없이 들이닥친 난기류로 우리는 갑작스런 곤두박질을 거듭했고, 잠겨진 화장실 문이 완전히 열릴 만큼 세게 부딪혔다. 비행기 밖의 기류 변화에 따라 나와 딸은 무기력하게 이리저리 흔들거렸고, 이는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았다. 한참 후에 난기류는 잦아들었고, 나는 딸과 함께 남편과 다른 아이들이 있는 자리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마치 롤러코스트라도 탄듯이 신난다는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나는 그 일로 인해 비행기를 타는 것이 정말로 싫어졌다.그때는 그 일이 지독히 두려운 경험이었지만, 그 이후로도 수없이 비행기를 타야 했다. 더불어 비행기를 탈 때마다 불길한 상상을 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난기류를 통과할 때는 남편의 손을 꽉 잡은 채 안전을 위해 간절히 기도한다. 비행기에 대한 내 믿음은 한없이 약하다. 반면, 비행기에 대한 남편과 아이들의 믿음은 강하다. 그들은 비행기의 상태나 우리의 안전 문제에 대하여 어떤 의심도 하지 않는다. 난기류를 통과할 때 그들은 모두 “와 신난다”라며 소리를 지른다.이렇듯 비행에 대한 나와 내 가족의 믿음은 정반대일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같은 목적지에 도달하게 된다. 앉아있는 내내 나는 안전 문제로 씨름을 하고 내 가족은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 같은 장소에 도착하게 된다. 기장이 내게 와서 “미안합니다만, 당신이 비행기의 상태와 나의 능력을 의심하니 다음 도시에 착륙하여 내려드리겠습니다. 당신은 믿음이 약하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가지 못하게 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믿음의 강도 vs 믿음의 대상나를 목적지까지 가게 하는 것은 내 믿음의 강도가 아니라 비행사의 능력(과 비행기의 상태)에 달린 것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은 내 믿음의 크기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에게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히 12:2).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적인 노력을 통해 믿음을 성장시키라고 밀어붙이시지 않는다. 또한 그분은 만약 우리에게 충분한 믿음이 없으면 그만 떠날 것이라고 위협하시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요 3:14-15), 자신에게 나아오라고(마 11:28) 말씀하시며, 자신이 바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라고(요 14:6) 밝히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이 겨자씨만큼 작아도 그것을 사용하신다고 약속하신다(마 17:20).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자신의 능력이나 자랑거리가 이니다. 바울 역시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엡 2:8-9)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이 바로 능력의 원천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만물은 다 그로 말미암고, 또 그를 통하여, 그리고 그를 위하여 있다(골 1:16).떠맡으심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은 비행기를 타기 위해 발걸음을 내딛는 행위와 같다. 비행기가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기 때문에, 큰 불안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생명을 걸고 비행기에 올라간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앙의 여정에서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그 여정을 계속해서 이어간다. 성경 말씀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명확하게 말한다.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의심의 문제로 씨름을 하지만, 그리스도의 능력을 아는 지식은 나의 시선이 스스로를 향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신의 믿음이 약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일을 완성하겠다고 하신 확실한 약속을 의지할 필요가 있다. 스펄전이 말했듯이, 우리를 구하는 능력은 “우리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안에 있다.” 비행기가 당신을 운반하듯이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을 떠맡아 인도하신다. 신앙의 여정 중에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Is Always Bigger Than Your Fait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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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모르는 산상설교의 특징들
by Jonathan Pennington
2019-01-14
산상설교에 대해 연구하고 가르치며 글을 쓰는 작업은 내게 큰 기쁨이 된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산상설교에 관한 새로운 저서를 완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본문은 끊임없이 나에게 새로운 내용을 가르친다.이런 측면에서 나는 사람들이 잘 생각하지 않는 산상설교의 세 가지 특징을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한다.1. 산상설교는 전적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아니다예수님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갖게 되는 생각이 있다. 바로 그분의 메시지가 이전에는 결코 들어보지 못한 새롭고 놀라운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다.물론 산상설교는 새로운 메시지가 맞다. 그 메시지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계시이며 육신이 되신 말씀이 직접 선언하신 내용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전적으로 새롭다는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한번, 1세기 지중해 세계라고 하는 문화적인 맥락에서 산상설교를 이해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그 설교가 성경의 다른 메시지들과 구별되는 불연속성만큼이나 연속성도 풍부하게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외딴 세계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으시고, 현실적인 문화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나타내셨다는 것이다.이런 차원에서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문화적인 맥락에 자리한 두 가지 배경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배경들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신지를 알려 준다. 또한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이 전혀 색다른 메시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도 한다. 그중 한 가지 배경은 ‘유대 전통’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이들처럼 한 명의 선지자로 그려진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이 창조 세계에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도록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러면서 자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로서 겉으로만 드러나는 의로운 행동이나 종교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감찰하신다는 메시지를 전하신다.이런 가르침은 이사야나 예레미야, 그리고 다니엘과 다른 수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으로 이어져 온 구약 예언의 전통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즉 예수님의 말씀과 성경의 나머지 부분들 사이에는 깊은 연속성이 있다는 것이다.산상설교에서 확인되는 또 다른 배경은 ‘그리스-로마 철학의 세계’이다. 예수님은 단지 선지자에 머물지 않는다. 그분은 일종의 지혜로운 현인으로서 사람들이 세상에서 참된 윤리적 비전을 따라 자신의 인생을 재조정하도록 요구하신다.진정한 철학자로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참으로 선한 삶(또는 참된 인간의 행복)을 약속하는 길을 따르도록 그들을 부르신다. 제자들을 모으고 가르치는 교사로서 말이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은 기억하기 좋은 격언들로 한데 모아진다. 그래서 인생의 지복에 대해 연속적인 경구들이 함께 기록된다. 더 나아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참된 윤리의 총체를 (특히 5장 48절에서) 요약하신다. 분명히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과 다른 철학자들이 가르쳤던 내용 간에는 차이가 있지만, 설교의 형식과 느낌은 1세기의 청중에게 친숙했던 방식을 드러낸다.설교의 끝부분에 가서 청중이 놀라워하는 이유는 내용 자체가 새롭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나타나는 명료성과 강세와 그 권위 때문이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급진적이었지만, 이전에는 없던 완전히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던 것이다.2. 산상설교는 불가능한 모범을 제시하는 데 목적을 두지 않는다산상설교는 다음과 같이 보편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즉 이 설교에서 예수님이 강조하신 높은 윤리적 요구들은 우리가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상황을 보여 주기 위해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리스도께로 나아가 그분의 은혜와 그로부터 전가되는 의를 구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색욕이나 증오를 품지 말라는 가르침, 한 뺨을 맞으면 다른 뺨을 돌려 대라는 가르침, 하나님을 중심에 둔 완전한 동기로 경건하게 행하라는 가르침, 미래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가르침, 그리고 다른 이들을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모두 준행하기가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산상설교는 우리 인생에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기록되었다고 해석된다.물론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 구원을 얻는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진리이다. 하지만 이 일반적인 관점을 산상설교에 적용하여 해석하면, 그 설교의 장르와 요점과 목적을 놓치는 부분이 발생한다. 이 설교는 단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필요를 보도록 만드는 ‘율법’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현재와 미래 속에 동시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우리를 소명하고 계신 것이다.(예수님을 제외하고) 누구도 산상설교가 보여 주는 비전을 완전히 실현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곧 그 메시지가 우리의 삶과 무관한 비현실적인 내용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수님은 믿음과 은혜를 따라 제자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삶으로 우리를 부르신다. 그렇게 부름 받은 우리는 세상에서 하늘 아버지를 신뢰하고 그분의 나라를 기대하는 삶의 방식을 (불완전하지만) 드러내며 살아간다.물론 산상설교가 우리가 알아야 할 가르침의 전부는 아니다. 또한 복음서의 전체 내용도 아니다. 이 복음서의 결론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드러난다. 곧 예수님은 자신의 신실하심을 통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새로운 언약을 이루신다. 오직 이 토대 위에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는 생명을 얻은 자들이 된다. 이 모든 일들은 은혜로 이루어진다. 이 내용들은 핵심 진리이다.그러나 산상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은 이 은혜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르심에 반응한다. 우리가 살아오던 방식과 습관은 이제 예수님의 가르침과 모범을 통해 해체되며 개혁된다. 한 사람의 제자가 되는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마땅한 반응이다. 산상설교는 이 부분에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3. 산상설교는 암송과 지속적인 묵상에 사용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넘치는 성경들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문맹률은 현저하게 낮아졌다. 따라서 예수님과 산상설교에 흥미를 느끼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내용을 쉽게 찾아 읽을 수 있다. 즉 ‘산상설교’를 검색하면, 수많은 번역과 해설들을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자체는 바람직한 현상이다.그러나 이런 상황은 원래 산상설교가 전달되던 방식이나 그 설교가 의도적으로 구성된 교육적인 맥락과는 거리가 있다. 산상설교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에 집중하던 문화로부터 주어진 메시지이다. 즉 (예수님이 원래 말씀하신 설교로서나 혹은 마태가 저술한 강화로서의) 산상설교는 귀로 듣고 암송할 수 있도록 제작된 묵상 자료이다.이 설교는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태가 한데 모아 놓은 총 다섯 파트의 이야기 가운데 한 파트이다. 생생한 이미지와 시적 언어를 사용해서 제자들이 쉽게 듣고 기억하여 그 스승이 가르친 내용을 묵상할 수 있도록 (보통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암송식의 주제 배열을 가지고 있다. 당시 제자가 된다는 것은 곧 스승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의 모범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했다.아쉽게도 나는 아직 산상설교 전체를 암송하지 못했다. 하지만 규칙적으로 꾸준히 산책하며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들을 떠올리며 암송한다. 그때 나는 그 설교의 가르침이 갖는 능력과 그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발견한다. 그뿐 아니라, 이전의 다양한 독서와 자세한 문학적인 연구를 통해서도 미처 알지 못했던 성경의 많은 연결고리들이 산상설교와의 관계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바로 여기에 산상설교가 기록된 이유가 있다. 당신도 이 설교를 다시 읽어보며, 그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되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Things You Didn’t Know About the Sermon on the Mount번역: 장성우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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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상설교
예수님
암송
묵상
은혜
진리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사랑
by 전재훈
2019-01-11
우리가 믿는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라는 말의 어원을 한울님 혹은 하늘님이라고도 하지만, 생태여성신학자인 구미정 교수는 《한글자로 신학하기》에서 이는 조상들이 신을 부르던 ‘한늘님’에서 변화된 이름이라고 추정했다. 무한히 크다는 뜻의 ‘한’과 언제나 존재한다는 ‘늘’이 합쳐진 말로서 조상들은 신을 무한히 크고 언제나 존재하는 ‘한늘님’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신명이 한늘님이건 한울림이건 그것은 신이 우리 조상에게 계시해 준 이름이 아니라 조상들이 신의 존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상상해서 붙인 이름이다.이스라엘 민족은 신을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이는 전능자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능한 자를 ‘엘’이라고 불렀고, 그 능력이 무한히 발휘되는 전능자를 ‘엘’의 장엄복수형태인 ‘엘로힘’이라고 불렀다. 엘로힘은 야훼 하나님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싸움을 하던 때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엘로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엘로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말했다. 즉 엘로힘이라는 말은 신을 지칭하는 그들의 언어였다. 그런 탓에 엘로힘을 번역할 때, 영어로는 ‘GOD’이라고 하고, 독일어로는 ‘GOTT’라고 하며, 한국어로는 ‘하나님’이라고 한다.하나님이라는 명칭은 고유 명사가 아니기에 천도교에서도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한때 천도교에서 하나님이라는 명칭을 자신들의 고유 명사라고 주장하며 기독교에서 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일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는 고유 명사가 아니라 보통 명사이므로 어떤 종교에서 사용하든 문제가 되지 않는다.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이다. 이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는 뜻으로 ‘자존자’로 해석되어 왔다. 이는 보통 명사가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고유 명사이기에, 번역해서 사용하기보다는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스스로 존재한다는 뜻의 ‘야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함부로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기 때문에 주인이라는 뜻의 ‘아도나이’로 불렸다. 스스로 존재하는 신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생명의 근원이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라는 고백을 담아 ‘아도나이’라고 부른 것이다.우리가 전능자라고 여기는 엘로힘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신 이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적으로 고백한 신명이었다. 하지만 출애굽기 6장 3절 말씀에 나오는 ‘전능의 하나님’은 관주에서 ‘엘로힘’이 아니라 ‘엘샤다이’로 기록되고 있다. 엘로힘과 엘샤다이는 둘 다 전능자로 번역되지만, 둘 사이의 뜻은 미묘하게 다르다. 엘로힘의 전능자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는 자’인 반면,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완전한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엘로힘은 하나님의 능력에 초첨을 맞춘 이름이고, 엘샤다이는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둔 이름이다. 에베소서 1장 11절에서 바울이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라고 정의 내린 분이 바로 엘샤다이 하나님이다.엘로힘 하나님과 엘샤다이 하나님의 차이는 기도의 차이로 이어진다. 우리의 소원을 이뤄 줄 램프의 요정 지니나 도깨비 방망이 같은 신을 원할 때에는 엘로힘이 편하다. 하지만 엘샤다이 하나님을 부를 때에는 나의 소원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한국적 기복 신앙 안에서는 엘샤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엘로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좋아 보인다.그러나 신으로 섬기기에 엘로힘 하나님이 더없이 좋아 보일지라도, 구원의 문제 앞에서는 엘샤다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 편하고 좋다.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그 자녀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 우리는 그분을 구원자로 여겨야 더 마음이 놓인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는 구원에 이를 만한 선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뜻을 정하면 그 뜻을 온전히 이룰 수 있는 이가 어떤 뜻을 정하고 또 그 뜻을 이루기 위해 가장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면, 그 뜻은 가장 완벽하고 완전하게 이뤄질 것이 분명하다. 그저 뜻을 정하기만 해도 되는데 그 뜻을 이루고자 아들의 생명을 걸었다면, 그분은 이 일에 대해서 실수할 수가 없고, 중간에 포기하지도 않으며, 끝내 실패하지도 않으신다. 그렇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엘샤다이 전능자이기 때문이다.뜻을 정하기만 해도 그 뜻을 이루실 이가 아들의 생명을 걸고 성취하려던 뜻은 무엇이었을까?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대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증언했다. 즉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로 뜻을 정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 주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에 실수도, 실패도, 포기도 없는 엘샤다이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이런 하나님을 경험한 사도가 그분을 ‘사랑’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신앙의 가장 기본은 우리가 섬기는 이가 누구이며, 그 분의 뜻이 무엇이고, 그 뜻을 어떻게 이룰 수 있는지를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신앙인이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당신의 아들을 내어 주신 분이며, 우리는 그 사랑을 경험하고 누리는 자임을 믿는 사람이다.그대는 하나님이 변함없이 영원토록 사랑하시는 가장 존귀한 자녀임을 기억하라.
신학
교리
하나님의이름
하나님의사랑
이스라엘민족
엘로힘
야훼
구약성경에서 발견하는 예수 그리스도 (하)
by Glen Scrivener
2019-01-08
모리아 산에서 말씀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22장)예표된 그리스도: 이 본문은 믿음을 극단적으로 시험하는 장면을 보여 주지만, 사실 그 시험은 아브라함의 믿음 이상을 요구하는 테스트였다. 하나님이 다음과 같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구절은 이 본문을 읽는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으로 다가온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창 22:2). 이 내용은 독자들이 이 본문에 암시된 예표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이해하기가 까다롭다. 그 아들이 누구였는가? 그는 아브라함의 씨이며 세상의 소망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바로 그 사랑받는 아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따라서 만일 그가 희생제물이 된다면,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고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하기 위해 그 아들을 다시 살리셔야 했다.우리는 여기서 훗날 예루살렘이 될 지역에 속한 어느 산에서 그가 희생제물이 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창 22:1-14; 대하 3:1). 그는 나무를 등에 지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될 장소를 향해 힘겹게 올라간다(창 22:6). 그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을 죽여도 그를 다시 찾게 되리라고 믿었다(창 22:5; 히 11:17-20). 바로 이 (아들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예표를 이해하게 될 때, 창세기 22장은 우리의 이해를 가로막는 난관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신앙을 끌어올리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된다.약속된 그리스도: (전통적으로 모세라고 간주되는) 창세기 22장의 저자가 이제 어떻게 그 산을 설명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수백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산을 가리키며 미래에 그들을 위해 준비될 대속을 기대했다. 그들은 어디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있었다. 수세기 동안 구약 시대의 성도들은 이 일을 위해 약속된 메시아를 대망하며 그들의 소망을 품었던 것이다.현존하는 그리스도: 창세기 22장 11절에서 아브라함의 행동을 가로막는 이는 ‘여호와의 사자’(the angel of the Lord)였다. 그리고 그 사자는 15절에서 다시 아브라함을 부르는데, 이때 그 사자가 가진 정체성은 매우 인상적으로 보인다. 이 사자는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그 사자는 비록 여호와께로부터 보냄을 받았지만, 여호와가 직접 말씀하시는 것처럼 말씀을 전달한다.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중략]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창 22:16-17). 우리가 성경에 등장하는 다른 천사들을 보면, 그들은 (요한계시록 22장 9절에서처럼) 자신이 하나님과 다른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히 드러내곤 한다. 그러나 창세기 22장에 등장하는 사자는 매우 독특하다. 그의 이름은 말 그대로 ‘보냄 받은 자’(the Sent One)라고 번역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여호와로부터 보냄 받아 그 자신이 여호와로서 말씀하는 존재이다. 교회사의 신조에서 사용된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God from God)인 것이다.바로 이 사자의 정체에 관해 칼빈은 그 앞선 시대의 해석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교회의 정통적인 학자들이 정확하고도 지혜롭게 설명하기를,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God)은 최상의 사자(the supreme angel)였다가 마치 예정된 바와 같이 중보자의 직분(the office of Mediator)을 수행하기 시작했다”(기독교강요 1권 13장 10절).창세기 22장에서 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하나님’은 이삭에게 떨어지는 심판의 칼을 가로막는다. 그로부터 2천 년 후, 바로 그 중보자는 동일한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내리시는 심판을 다시 가로막게 된다.떨기나무에서 타오르시는 예수 그리스도 (출애굽기 3장)예표된 그리스도: 불타는 떨기나무는 성경 여러 군데에서 사용된 다른 이미지들과 유사성을 지닌다. 일단 나무는 흔히 하나님의 백성이나 그들을 대표하는 왕을 비유하는 데 사용된다(삿 9장; 사 5장; 요 15장). 그리고 애굽에서 당한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은 풀무불로 자주 묘사된다(신 4:20; 왕상 8:51; 렘 11:4). 이와 같이 우리는 이 불타는 떨기나무에서도 고통의 풀무불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는 더 나아가 예표된 그리스도가 자리하고 있다. 즉, 그들을 대표하는 왕이 ‘나다’(I Am)라고 자신을 드러내며 그 백성과 함께하고 또한 그들을 건져 내기 위해 불길 속으로 내려오신 것이다.약속된 그리스도: 출애굽 자체가 약속의 성취이다. 창세기 12장 이후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씨’가 만민에게 복이 되며 그들을 다스리게 될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씨에 대한 약속에서 애매한 부분은 그 ‘씨’가 복수(이스라엘)인가, 아니면 단수(그리스도)인가 하는 문제이다. 대답은 ‘둘 다 맞다’이다. 그 ‘씨’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으로 이루어지고, 때가 이르면 단수로서 그 민족을 대표하는 그리스도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갈 3:16). 이렇게 그 씨에 대한 약속이 발전되는 것처럼, 우리는 창세기 15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씨가 겪을 고난(죽음)과 회복(부활)의 패턴을 미리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게 된다. 곧 그 씨는 장차 종노릇하며 고통을 겪겠지만, 심판을 통해 더 큰 영광 가운데로 나오게 된다는 것이다(창 15:13-15). 이 죽음과 부활의 패턴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이 경험하지만,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를 지켜보면, 그 사건이 바로 다가오는 복음 이야기의 예고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출애굽 사건 전체가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의 약속인 것이다.현존하는 그리스도: 하나님의 이름인 ‘나다’(I Am)라는 선언은 우리가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해의 토대가 된다. 이 선언의 의미는 구약성경에서 약 6800번이나 사용된 ‘여호와’라는 이름 속에 잘 담겨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본래대로 말하면 “가시떨기나무 가운데에 계시던 이”(신 33:16)이다. 그가 누구인가? 그는 여호와의 사자로서 그 자신이 바로 여호와로서 소개되는 이다(출 3:2, 6, 14). 존 오웬(John Owen)은 그가 “언약의 사자이자,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큰 사자로서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을 가졌다. [중략] 이와 같은 사자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설명했다. 이런 점에서 유다서의 저자는 출애굽 사건을 돌아보며 이와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시고”(유 5; 참고 4절). 결국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성경 전체의 주인공이 되신다.만유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한 젊은 목회자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라며 구약성경의 해석이 그리스도로 귀결되는 과정에 대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을 때, 도대체 어떤 문제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나는 이런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곧 그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임에 참석한 다른 목회자들도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그들은 구약성경이 이미 그 자체의 문맥과 용어를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크리스천 성경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구약성경은 처음부터 주 메시아를 선언하는 책이라는 것이다.분명 구약성경에는 여러 ‘예표’들이 자리하고 있다. 구약성경에서 복음을 나타내는 이미지는 수세기에 걸쳐 층층이 쌓여 가며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참된 성전이자 속죄양이시고, 제사장이자 왕이며 또한 선지자이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위대한 요셉이고 다윗이며 요나와 같은 분이시다. 이 모든 내용이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창세기 3장 15절 이후로 성경 전체에 걸쳐 발견되는 핵심적인 ‘약속’들도 있다. 그 약속들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씨, 즉 여자의 씨, 아브라함의 씨, 그리고 다윗의 씨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분은 땅과 평화와 축복과 관련된 모든 약속들을 성취하신다. 이 모든 내용도 사실이다. 그러나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이러한 내용들에서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구약성경 속에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우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사이에 마치 그리스도로 방향을 전환하는 장치가 있다는 식의 생각을 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걸쳐져 있는 그 무엇은 단지 어떤 계획이나 약속이 아니라 존재이다.곧 예수님이 바로 그 성경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다. 그분은 마치 운동 선수들이 한창 이기고 있는 경기를 벤치에 앉아 관람하며 4쿼터 출전이나 기다리듯이 그렇게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지켜보고만 있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선수이자 코치이며 매니저로서 모든 경기를 직접 주관하신다.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그분은 지존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중보자로서 성육신을 통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날을 향하여 계속 전진하신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늘 존재하신 주님이시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ere Is Jesus in the Old Testament?번역: 장성우
신학
구약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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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모리아산
떨기나무
예표된
약속된
현존하는
만유의주님
구약성경에서 발견하는 예수 그리스도 (상)
by Glen Scrivener
2019-01-07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나는 젊은 목회자들과 어떤 주제에 대해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한 모임을 인도했다. 그 모임에서 어느 목회자가 우리의 토론을 위해 사사기 14장에 관한 해석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그는 그 해석의 결론으로 “자기 백성을 영원히 구원하러 오실 또 다른 구원자”가 있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서 어떤 부연 설명이라든가 ‘예수’라는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런 내용을 결론으로 제시했던 것이다.발표 후 토론 시간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런 내용으로 결론을 내리셨나요?” 그러자 곧바로 다른 목회자가 내가 지금까지도 잊지 못할 답변을 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니까요.”모든 목회자들이 그 말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 모두가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 모임에 참석한 어느 누구도 ‘왜’ 우리의 해석이 예수님께로 방향을 전환해야 하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지만, 그런 해석법은 하나의 규칙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나는 이런 현상을 기독교인들이 모인 장소에서 흔히 보게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크리스천 성경(Christian Scripture)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왜’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읽어야 하는지는 분명히 알지 못한다. 그저 구약성경은 예수님께로 방향을 전환하는 익숙한 장치와 같이 여겨질 뿐이다. 왜 그런 것일까?이런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의 핵심으로 보도록 도와주는 해석 렌즈를 통해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렌즈를 통해 살펴보면, 구약성경은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약속하며, 그분의 존재를 드러내기 때문이다.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구약성경홍수와 방주, 유월절과 홍해, 광야와 약속의 땅, 유배와 귀환, 전쟁과 평화, 나라와 왕, 선지자와 제사장, 성전, 희생제사와 의식, 삶과 죽음에서 나타나는 지혜, 슬픔과 기쁨의 노래, 의인의 고통과 순교자의 피 등, 구약성경의 모든 요소들은 특별한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구약성경의 전체 이야기와 그 각각의 부분들은 마치 프랙털(fractal)과 같이 부분이 전체를 보여 주는 구조를 갖는다. 따라서 그 이야기의 세부적인 부분에서 뒤로 물러나면 결국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큰 사이즈로 드러나게 된다(고린도전서 10장 1-11절에서 구약성경을 읽는 방식이 그 예이다). 그런데 바울은 구약성경에 있는 복음의 예표들을 설명하며 (고린도전서 10장 4절과 9절에서 그러하듯이) 그리스도가 단지 예표되는 수준을 넘어 구약의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약속되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셨다고 설명한다.그리스도를 약속하는 구약성경구약 시대 백성들은 마치 전체 모자이크의 조각들처럼, 그들도 알지 못하는 복음의 예표를 하나씩 증언하며 무심결에 그리스도라는 그림을 만들어 가는 자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도 역시 그 예표들의 성취를 바라본 자들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약속들을 통해 그럴 수 있었다. 예수님과 바울, 베드로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구약성경에서 그 성취를 보았다(눅 24:25-27; 행 26:22-23; 벧전 1:10-12). 각각의 약속들은 구약성경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을 선포한다는 사실을 특징적으로 표현하는데, 그 약속들을 통해 주어진 메시지는 모세와 다른 선지자들이 직접 ‘쓰고’, ‘말하고’, ‘예언하고’, ‘예견한’ 내용들이었다. 따라서 그렇게 주어진 구약성경 자체가 요구하는 참된 신앙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즉 ‘메시아를 대망하는 신앙’(messianic faith)이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구약의 신자들에게도 붙들고 의지해야 할 대상이었던 것이다.그리스도의 존재를 드러내는 구약성경구약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약속한다는 사실을 넘어 그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사실은 가장 간과되기 쉬운 특징에 속한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신약 저자들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존재에 관해 명백히 언급하는 내용은 매우 인상적이다.- “내가 있느니라”라고 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이 보고 기뻐했던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8:56-58).- 고난 받는 모세에게 동기를 부여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히 11:26).- 애굽에서 그 백성을 구원하여 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유 5).- 광야에서 따라 다니던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이다(고전 10:4).- 이사야가 성전 환상에서 보았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2:40-41).이렇듯 그리스도는 단지 구약성경에서 예표되고 약속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 이야기 속에 함께하셨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을 신뢰하는 믿음의 본질적인 성격은 첫 언약에서부터 새 언약에 이르기까지 변함이 없기 때문에, 이런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언제나 삼위일체의 존재 양식으로 사역해 오신 것이다. 즉 성부로부터 시작해서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의해 완성되는 사역을 하신다는 의미이다. 어느 날 갑자기 이런 사역이 시작된 것이 아니다. 말하자면, 성탄의 시점에 이르러서야 중보자의 사역이 필요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요 1:1-14). 성경이 가르치는 참된 신앙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참된 신앙이란 단지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을 의탁하거나 개별적인 약속을 신뢰하는 수준이 아니다. 그 신앙은 바로 약속하시는 ‘존재’를 받아들이는 일이다.칼빈이 자주 언급했듯이,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는 “복음을 입고” 오셨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옷을 걸치듯 입고 계신 그 복음의 약속들을 기억해야 하지만, 그 약속들만 따로 떼어내서 설교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는 신앙의 중심부에 있어야 할 대상은 바로 그 성자의 ‘존재’이다.과연 처음부터 그랬을까?지금까지는 모두 신약성경에서 인용한 본문들만 언급했다. 물론 이 본문들만 가지고도 구약성경이 그리스도를 선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런 주장이 오직 신약성경에서부터 뒤로(backward) 돌아가서 구약성경을 읽을 때만 성립하는 기독교적 해석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성경의 순서대로, 즉 창세기에서부터 앞으로(forward) 나아가며 성경을 읽을 때도 그와 동일한 그리스도 중심성(Christ-centeredness)을 발견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이 글에서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구약성경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약속하며, 또한 그분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본문에서는 그리스도가 그 세 가지 방식으로 한꺼번에 그려지기도 한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세 군데 본문을 선택해서 보여 주려고 한다. 그리고 이 샘플들을 통해 당신이 성경 전체를 그와 같은 렌즈를 통해 볼 수 있기를 소망한다.에덴동산을 거니시는 예수 그리스도 (창세기 3장)예표된 그리스도: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죄로 인한 수치심 때문에 나무 사이로 숨는다. 그러고는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그들의 몸을 가린다. 그들은 잘못을 감추고 거짓된 변명을 함으로써 자신들의 죄를 스스로 다뤄 보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해결책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신다. 그분은 나뭇잎이 아니라 가죽으로 된 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히신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허물을 가릴 가죽옷을 위해 하나님이 어떤 무죄한 동물을 희생시키셨는지 알 수 없지만, 이사야와 바울은 대속 개념으로 이런 일을 설명한다. 곧 그들은 우리의 허물을 다른 외부적인 의(an alien righteousness)가 가린다는 개념을 전제한다. 우리는 이를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사 61:10; 갈 3:27).약속된 그리스도: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졌을 때, 아담과 하와만이 아니라 다른 피조물도 함께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내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여자의 씨’(the seed of the woman)를 약속하신다. 여자는 스스로 ‘씨’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여자가 기적적으로 누군가를 출생하는 사건을 암시한다(창 3:15). 이 여자의 씨는 비록 그 발꿈치가 상하는 희생을 치르겠지만 악한 자의 머리를 깨뜨리게 될 것이라고 선언된다. 여기서 우리는 그 ‘씨’를 통해 이루어질 기적의 출생과 승리의 고통에 대한 약속을 받는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갈라디아서 주석’(Commentary on Galatians)에서 이렇게 설명했다.“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에 관한 첫 번째 약속으로 소급된다. 구약 시대에 선조들이 가진 신앙이나 신약 시대에 우리가 가진 신앙은 모두 하나로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동일한 신앙이다. [중략] 시간이 흐른다고 참된 신앙의 대상이 바뀌거나 성령의 사역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참된 신자들은 과거에 살았든, 현재에 살고 있든, 아니면 미래에 살든 상관없이,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마음과 정서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현존하는 그리스도: 여기서 우리는 흔히 간과되는 그리스도의 존재를 알아차려야 한다. 곧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던 하나님은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창 3:8).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교부들과 종교개혁자들, 그리고 청교도들이 지지했던 가장 보편적인 견해를 그의 ‘구속사’(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하나님이 모든 시대에 걸쳐 그 백성과 교회를 위해 행하신 거룩한 역사와 그분이 자신을 그들에게 계시하신 방식을 살펴볼 때, 우리는 특별히 삼위일체 가운데 제2위(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 즉 인간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이 자신을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신 장면을 살펴볼 때는 통상적으로 삼위일체 가운데 제2위를 염두에 두고 이 문제를 이해해야 한다.”이 설명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을 다 해결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 처녀 마리아를 통해 성육신이 되기 이전에는 육신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존재를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등장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골로새서 1장 15절과 요한복음 1장 18절을 염두에 둔 에드워즈가 여기서 주장하는 내용은 언제나 성자의 중보를 통해서만 성부가 계시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에서 단지 예표되고 약속되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신다고 이해해야 한다(하편에서 계속).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ere Is Jesus in the Old Testament?번역: 장성우
신학
구약성경
예수
그리스도
예표하는
약속하는
현존하는
드러내는
존재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by Jeff Robinson
2019-01-07
복음은 죄인을 구속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좋은 소식이다. 이러한 복음을 기뻐하는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장 소중히 여긴다. 크리스천은 성금요일에 그리스도의 희생을 묵상하는 일년 중 가장 영광스러운 예배를 드린다. 그리스도의 희생에 관한 성경구절을 읽고 기도하며, 이와 관련된 찬송을 부르고 설교를 한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온전한 해방을 기뻐하며 축하한다.기쁜 소식인 복음은 인간의 이성적 사고로는 이해가 불가하다. 죄 없으신 예수님이 죄인인 인간의 위치에서 돌아가셨다. 우리가 당연히 짊어져야 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노여움을 예수님 자신이 모두 담당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법을 온전히 지키려고 그의 생명을 자진하여 버리셨다. 흠 없으신 이가 사형 선고를 당한 죄인을 섬기기 위하여 그리 하셨다. 심판의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리스도가 죄 값을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죄 사함을 얻었다. 그리스도는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고, 이제 하나님을 적대시하고 죄인 되었던 우리는 그분의 만찬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다.하지만,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에만 몰두하면, 부활절에 예수님의 몸이 부활함으로써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간과하기 쉽다. 결국 부활절이 없다면 성금요일은 그냥 다른 금요일이나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증한다(골 2:12).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요 20:18)고 선언한 막달라 마리아의 선언이 없으면, 우리는 십자가를 좋은 소식이라고 부를 수 없다. 부활에 대한 논쟁 오랜 세월 동안 무신론자들과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부활 문제를 가지고 논쟁해왔다. 예수님은 죽은자의 부활을 부인하는 사두개인들을 경고하셨다. 그리고 영국의 계몽기 실용주의자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타당한지를 놓고 논쟁을 일삼았다. 흄과 사두개인과 같은 비평주의자들은 누군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임을 밝히면 크리스천의 신앙과 이의 초월적 능력은 허름한 요새와 같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있을까?힘없이 무너져 버릴 요새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죄악으로 가득한 세계는 참혹한 결과를 맞을 수밖에 없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2-22절에서 그 비참함을 깊이 생각해 본다. 부활 사건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 신앙을 기둥처럼 떠받들고 있는 사실은 먼지와 같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성금요일은 진짜로 참담한 금요일이 될 것이다.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 외에 빈 무덤에 대하여 다른 설명이 없으면 어떤 여파가 있을까? 1.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조차 부활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가장 먼저 현저하게 떠오르는 결과이며, 기독교의 핵심 진리를 흔들 수 있는 가장 큰 여파를 일으킨다. 흄과 사두개인이 제기하듯이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의 몸은 개가 먹었거나, 도둑이 훔쳐갔거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몰래 옮겼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아니라면 예수님이 정말로 부활하셨다는 또 하나의 설명이 자연스럽게 존재한다. 수백명의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2.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좋은 소식이 좋은 소식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은 실제로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일 것이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은 죄의 고통이나 죽음을 정복하지 못한 것이 되고, 불경한 정복자가 창조된 질서를 영원히 지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정사정 없는 얼간이 법집행관은 광장에 모인 군중들에게 여기에는 기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3.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은 가치가 없을 것이다. 중동의 어딘가에 묻힌 시체를 믿는 신앙은 어느 누구도 구속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살아나지 않았다면, 히브리서 11장은 ‘신앙의 전당’이 아니라 ‘바보들의 전당’으로 불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4.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부활을 보았다고 하는 모든 증인들과 부활을 전하는 모든 설교자들은 거짓말쟁이일 것이다.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사도들과 그들을 따르는 모든 복음 설교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이 단순히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없는 신화가 사실이라고 뒷받침하는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했기 때문에 거짓말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5.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하나의 전래 동화라고 할 수밖에 없다. 성경은 신화와 미신을 혼합해 놓은 의미 없는 구닥다리 역사를 기록한 하나의 책에 불과하게 된다. 선교와 복음전파는 시간과 에너지와 돈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소설이 사실임을 뒷받침하느라 우리의 모든 노력과 자원을 들이지 않는다. 이러한 고대 이야기가 사실임을 지지하려고 우리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을 것이다.6.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인류는 죄의 포로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라고 하는 바울의 말은 저주하는 선언이 된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죄의 포로로 남아 있고 우리는 여전히 죽음의 노예로 있게 된다. 그리고 부활이 없으면 로마서 8장은 우리에게 아무 의미가 없는 말씀일 것이다. 7.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모든 죽은 자들은 지옥에 떨어진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죄를 짊어질 희생물이 없기 때문이다. 인간과 하나님을 중재할 중재자가 없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의 노여움을 대면해야 할 것이다. 8.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크리스천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는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다.” 정말이다. 이것이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으로 보는 이유이다. 복음의 모든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사망을 이기도록 도움을 주지도 못하는 하나님을 추구하느라고 우리의 생애를 낭비하는 꼴이 된다. 우리가 불쌍한 사람들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주변의 회의론자들은 우리에게 정말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것이다. 천국의 존재를 믿으면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고 변증하는 블레이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그 유명한 ‘내기’도 우리가 영원성을 얻도록 돕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악한 사탄은 먹이를 찾아 나서고, 결국은 승리의 개가를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진정으로 부활하심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며 복음에 대해서 계속 이야기한다. 그리스도가 사망에서 다시 사셨고 무덤에서 나오셨기 때문에 사망은 승리하지 못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새 예루살렘 밖에 있는 강에 도착하면 사망을 향하여 넘치는 기쁨으로 말할 수 있다. “오 사망이여,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는가?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는가?” 성금요일과 부활절은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날들이다. 이 사건에 관하여 우리가 가르치고 이야기하고 신학화할 때에, 우리는 이 둘 중 어느 하나를 빼고 온전하게 이야기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기쁨으로 축하해야 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f Christ Is Not Raised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성금요일
논쟁
요새
바울
중재자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하)
by Jeremy Treat
2019-01-04
서로를 넉넉케 하는 관계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관계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만 강조하거나 십자가에만 매달리지만, 성경은 이 관계를 서로를 넉넉케 하는 관계로 묘사한다. 이 관계는 이스라엘의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오며 왕이신 그리스도의 못박히심에서 절정에 이른다. 구속의 이야기가 보여 주는 사실은 대적에 대한 승리, 죄의 용서, 그리고 새 출애굽처럼 하나님 나라가 약속한 내용들이 성취되는 장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각기 맡은 역할이 다르므로 구속 이야기 안에서 자리 싸움을 할 필요가 없다. 십자가는 이 이야기에서 절정에 해당하므로 그 자리는 중심부이고, 하나님 나라는 이 이야기의 최종 목적에 해당하므로 그 위치는 마지막 부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의 영광은 종말의 하나님 나라가 메시아의 죽음을 통하여 인류 역사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요약하자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메시아이며 자신의 대속적인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이 땅 위에 실현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연결된다. 십자가의 최종 목적은 하나님 나라이고, 그 하나님 나라가 실현되는 수단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메시아 사역의 실패도 아니고 왕으로서 그의 영광을 알리는 단순한 서곡도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사역의 정점이다. 예수님이 다스리시고 자신의 나라를 세워 가시는 왕좌가 바로 십자가이다. 타락한 인류의 논리에 비추어 볼 때,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라는 충격적인 역설은 그야말로 어리석기 짝이 없는 개념일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본다면, 이 역설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이다.하나님 나라는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 땅 위에 이루어진다. ‘이루어진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긴 하지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한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공생애를 통해 임하였고, 그분의 가르침 속에서 선포되었으며, 기적과 축사 사역으로 희미하게 드러났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 확립되고, 그분의 부활을 통해 출범하였다. 이 하나님 나라는 교회를 통한 성령의 사역으로 진전되며,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극치에 이를 것이다.이렇듯 십자가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살아가는 구속 받은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일으킨다.십자가 형상을 가진 나라그렇다면, 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사이의 상호 관계가 오늘날 기독교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첫째, 하나님 나라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 세워지고 그 십자가에 의해 영원히 모양을 갖추어 가는 한,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 형상을 가진 나라(a cruciform kingdom)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전히 십자가의 상흔을 지닌 채 죽임 당하신 어린양으로서 왕좌에서 다스리신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왕이라면, 그 왕이 다스리는 나라는 참으로 희한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이는 이상한 나라임이 분명하다. 이 세상의 나라들은 무력에 의해 세워지나 하나님 나라는 은혜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둘째,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겸손한 방법 통해 당신의 나라를 세우신 것처럼, 여전히 하나님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성령의 권능을 힘입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그 나라를 확장해 가신다. 하나님 나라와 관련된 이야기에 매혹된 그리스도인들이 많지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히 11:28).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잠재력과 노력이 절정에 이른 상태가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의 은혜가 죄로 가득하고 깨어진 이 세상 안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역사이다. 우리의 소명은 바로 그 나라를 증언하는 일이며, 우리는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그 일을 감당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한다.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은 섬김과 희생으로 드러난다.셋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로 인해 죄사함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왕을 섬기는 백성이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우리는 죄와 어둠의 나라로부터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그 빛의 나라를 위해 구원받은 것이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자기를 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타인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드리는 그분의 백성을 일으킨다. 하나님 나라의 표식은 정의이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은 이들이야말로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약한 자, 가난한 자, 압제 받는 자들을 위한 정의가 실현되도록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십자가 위에 달린 푯말에 쓰인 글귀인 ‘유대인의 왕’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의 관계를 밝히 보여 주긴 하지만, 가시 면류관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가장 잘 나타낸다. 아담의 저주와 실패의 표식이었던 가시는 이제 그리스도의 주권적 통치와 우리 죄를 짊어지는 희생 간의 역설적 통합을 상징한다. 여기서 일그러진 가시는 역사의 최종 목적으로서의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방법으로서의 속죄가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구속의 전체 이야기 내내 우리에게 보여 준다. 하나님 나라는 능력으로 임한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은 바로 못박히신 그리스도이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Kingdom and Cross: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Let Not Man Separate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통치
어린양
면류관
본회퍼
메시아
죄사함
나라
백성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상)
by Jeremy Treat
2019-01-03
“예수님이 자신의 온 생애를 통해 가르치신 내용 중에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일까요?” 그 설교자는 이 주제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이들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답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았다. 기독교를 통틀어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매주 교회에서 배우며 자랐기 때문이었다. 가장 중요한 주제,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였다. 정답을 알지 못했던 이들이 마음에 찔림을 느끼던 그 몇 초 간의 정적 속에서, 나는 자신만만하고 능글맞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 중 첫째 주제는” 하고 운을 뗀 설교자가 다음과 같이 이어 말했을 때, 나는 의자에서 거의 떨어질 뻔했다.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뭐라고? 하나님 나라? 십자가는?’ 그 순간, 내게 있던 확신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고 이내 위기감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관해 그렇게 많이 가르치셨다면, 왜 나의 신학과 교회 생활, 또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나의 인식 안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개념이 조금도 없는 것일까?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두 주제인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가 왜 크리스천의 신앙과 삶 속에서 그렇게도 분리되어 있는지에 대한 나의 탐구는 그날 시작되었다.하나님 나라인가 십자가인가많은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에만 매달리거나 하나님 나라만 강조함으로써 균형을 상실한다. 성경의 두 주제들이 양극화되자 이에 대한 접근법 역시 갈라졌다. 다시 말해, 어떤 이들은 죄인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십자가 중심 신학을 주장하고, 또 다른 이들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하나님 나라 중심의 실천주의를 주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어쩌다가 교회는 중요한 성경의 주제들끼리 싸움을 붙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20세기에 발현한 사회복음운동(social gospel movement)은 하나님 나라에 너무도 집중한 나머지 십자가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죄 없는 인간들을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심판 없는 나라 안으로 인도하셨다”라는 정확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보수적인 크리스천들은 십자가의 중심성을 다시금 강조하며 야심 찬 반격에 나섰지만, 하나님 나라를 오로지 내세와 관련된 개념으로 축소시키거나 그 개념 자체를 완전히 무시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에 대한 논의를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결과를 초래했다.성경의 이 두 핵심 주제들이 서로 유리되었을 뿐 아니라 종종 대척점에 선다는 사실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해서는 안 된다.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못 박히신 메시아 이야기하나님 나라와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통치하지만 십자가에서 고난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류의 영웅이 아니다. 그분은 망가진 피조 세계를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그 은혜로운 하나님이 전개하시는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약속된 분, 곧 메시아이다. 구속에 대한 이 광대한 서사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된다.이 이야기는 동산에서 시작된다. ‘하나님 나라’라는 표현 자체는 나중에 등장하지만, 그 개념은 에덴동산에 뿌리를 둔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들을 통해 다스리시는 자애로운 왕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우리의 기대와 달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끝없는 휴가를 즐기게끔 에덴동산에 두지 않으신다. 늦잠을 자고 장난이나 치며 지내는 것이 아니라, 아담과 하와는 그 동산을 잘 가꾸고 하나님의 통치에서 흘러나오는 복을 온 세상에 확장시켜야 할 임무를 가졌다(창 1:26). 즉,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 온 땅 위에 펼쳐지는 그분의 통치를 실현하는 비전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본래 목적이었다.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 땅을 다스리기는커녕, 교활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인 뱀의 통치에 복종하여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 금이 가게 하고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바라던 계획을 망가뜨리고 만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왕이신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부터 나오는 복을 세상으로 흘려보내기 위해 에덴동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나 방황하는 신세가 되어 복이 아닌 저주를 퍼뜨리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은 땅에서는, 장차 뱀의 머리를 깨뜨리고 자신의 발꿈치를 다치게 될 여자의 ‘씨’에 대한 약속을 보여 주는 구속 역사가 싹터 오른다(창 3:15). 이 씨의 승리는 죄로 인한 저주를 극복하고,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화목케 하며, 온 땅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실현시킬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신다. 바로 창세기 3장 15절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승리의 약속 안에 고난의 대가를 포함시키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이 시점 이후로, 우리는 아담과 이스라엘의 이야기에서 승리는 고난을 통해, 높아짐은 낮아짐을 통해,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일정한 패턴을 볼 수 있게 된다.구약성경에서 바로 그 이야기는 하나님이 일련의 언약들을 통해 그분의 나라를 통치해가는 과정을 통해 전개되고, 또한 자기 백성은 구원하고 그 대적은 심판하는 행위를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의 목적이 성취되리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 저주를 역전시키는 약속을 허락하시고, 그분의 희생으로 인을 친 언약을 통해 왕으로서의 신실하심을 확증하신다. 또한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은 백성을 종살이로부터 구속하여 자신의 나라로 옮기셨고, 이 구속 역사의 중심에는 제물로 드려진 양이 있었다. 더 나아가, 다윗은 허술한 무기로 악한 거인을 무너뜨렸고, 그의 왕권은 의로운 자가 받는 고난으로 그 특징이 묘사된다. 그리고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의 승리는 여호와의 종이 당하는 고난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신약성경은 전 생애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으나, 십자가 위에서 죄인으로 사형을 당한 예수님의 놀라운 역설을 보여 준다.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예수님이 행하신 하나님 나라의 사역은 십자가 위에서 실패한 것일까?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 제거해야 하는 장애물일까? 하지만 그리스도의 공생애에 대한 사도 요한의 묘사에 의하면, 모든 일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들려지심’을 통해 영광 가운데 보좌에 앉으시는 이 결정적인 ‘시간’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다(요 3:14; 8:28; 12:23-32). 이렇듯 십자가는 구속사의 중심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논리를 뒤집어 놓는 근거가 된다. 즉, 수치는 영광이 되고, 어리석음은 지혜가 되며, 낮아짐은 높아짐이 된다. 바로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세상을 다스리시는 왕좌가 된 것이다.바울은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통해 사탄을 권좌에서 쫓아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신다고 증언한다(골 1:13-14; 2:15). 하나님 나라와 십자가에 대한 ‘큰 그림’은 히브리서 2장 5-10절에서도 볼 수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복구하셨을 뿐 아니라 자신을 십자가에서 드리심으로 인류를 위한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탈환하신 마지막 아담으로 묘사된다. 끝으로, 요한계시록은 왕이신 예수님이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우리를 나라로 삼으셨음을 밝히 드러낸다(계 1:5-6).요약하자면, 창세기 3장 15절의 상한 발꿈치로부터 요한계시록 1장 5-6절의 다스리는 어린양에 이르기까지, 성경은 대속적인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시는 바로 그 못박히신 메시아에 대한 구속 이야기이다(하편에서 계속).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Kingdom and Cross: What God Has Joined Together, Let Not Man Separate번역: 이정훈
복음
십자가
통치
에덴동상
저주
고난
아브라함
어린양
메시아
구속
그리스도의 부활은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
by Matthew Barrett
2019-01-02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중요성 면에서 부차적인 교리로 여겨진다. 부활의 의미는 해마다 부활절이 오기 전까지는 무시되고 잊혀진다. 그 경향은 우리가 복음을 나누는 방식에서도 보여진다. 크리스천들이 복음에 대하여 나눌 때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거기서 그냥 끝나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십자가에 달리심에서 ‘회개하고 믿으라’로 곧바로 가버린다. 이는 베드로가 사도행전 2장 22-24절과 4장 26절에서 말하는 예와는 다르다. 십자가는 구원의 핵심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성취하려는 것은 부활절 아침의 빈 무덤이 없이는 완성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니케아 신조를 빌려서 말하면)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면 정확하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우리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 부활 이야기를 읽고 나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리스도가 부활하셨기에 내가 거듭났다!”고 말해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런 적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것임을 진정으로 알게 된다면, 우리는 거듭남을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거듭남은 오직 예수님이 다시 사셨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가르쳐 준다. 우리의 거듭남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단독적인 행위로, 우리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바꾸는 것이다.베드로에 따르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벧전 1:3) 하셨다.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살리신 그 하나님이 우리를 영적 사망에서 영적 생명으로 살리셨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었지만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그리고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 2:5-6; 참고로 골 3:1)라고 말한다.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 있게 하실 수 있다.우리의 칭의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음을 믿는 사람들은 의롭다고 여겨진다. 로마서 4장 23-25절에서 바울이 말하듯이,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의롭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확증하셨다.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이 완성되었다고 선언하셨다. 우리 죄 값이 지불되었고 아무 죄도 남지 않았다.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은 그의 저서 ‘조직 신학’(Systematic Theology)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모든 죄 값이 지불되었기에 너에게 어떤 죄도 찾을 수 없고 내 눈에 의롭게 보인다’고 하나님이 하신 말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구원에 대하여 그리스도를 한번 신뢰하면 우리에게도 그것이 적용된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는 마지막 증거가 되었다.”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도 이 문제를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다.“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죄 값이 모두 지불되었는지에 대하여 아직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다. 부활은 하나님이 흡족하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부활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은 완성되었다. 중보자로서 그리스도는 의롭다고 여겨진다”(Miscellanies, Vol. 13, 227).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리지 않았다면 “죄인들을 위한 너의 속죄 사역에 흡족하지 못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만일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여전히 죄로 인해 죽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죄로 인하여 여전히 죽어 있다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고 의롭지 못하며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의 말에 의하면 우리는 가망이 없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다시 시신 것이 문자 그대로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우리의 형벌이 감당되지 않았고, 우리의 죄는 다루어지지 않았으며,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된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The Assurance of Our Salvation, 492). 우리의 성화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한다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는 계속 죄 가운데 있지 않다. 바울이 질문하듯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떻게 그 가운데 더 살겠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롬 6:3-4) 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계속해서 부활과 우리의 성화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롬 6:5-11). 바울의 마지막 두 문장은 특히 강력하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그리스도가 죄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도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가 다시 사신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육을 따라 살 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의 죄로 가득하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는 불신앙의 옛 자아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며 성령의 능력으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무덤에 그대로 있으면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죄의 권세를 이긴 우리의 승리이다.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이 있고 성화된 삶을 살 능력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근거하여 우리가 성화된 삶을 살 수 있다는 우리의 확신을 더욱 강조한다.“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 3:1-4). 구속 역사의 정점리처드 개핀(Richard Gaffin)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울의 구원론에서 핵심 요소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신자 개인이 구속 역사의 풍성함을 구체적이고 고유하게 경험하게 하는 요소이기도 하다”(Resurrection and Redemption, 135).진정으로 그의 말에 동의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구속의 풍성함을 누리게 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놓치면,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이 살펴보고 있듯이, 우리는 복음을 오해하고 그리스도의 주인 되심과 우리의 구원을 연결시키지 못하게 된다(Resurrection and Redemption, 6). 칼빈이 설명하듯이,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구원 전체와 그와 관련된 모든 부분들을 이해하는" 크리스천에게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된다(기독교강요 2권 16장 19절).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Neglected Resurrection번역: 정은심
복음
부활
거듭남
근거
성화
구속
권세
승리
계시록 설교에서 배운 열 가지 교훈
by Sam Storms
2018-12-27
나는 지난 6월, 서른 여덟 번의 계시록 설교 시리즈를 마쳤다. 지금 그 순간들을 돌이켜 보면 열 가지 진리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 이 글은 숫자적 상징, 666, 짐승, 음녀, 천년왕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음을 밝힌다.1. 성도의 삶은 박해와 동떨어질 수 없다현대를 사는 크리스천은 불신과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강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 이는 모든 크리스천에게 예외 없는 일이다.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을 실망시켜서 받는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르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겸손과 용기로 이 고난을 받아들일 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완전하고도 아름다운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2.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은 모든 인간사(affairs)에 대해서 절대적이고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신다. 그러므로 아무리 악한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와 권세 밖에 있을 수 없다. 오늘날 전 세계의 여기저기에서 연이은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종려주일에 ISIS의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의 크리스천이 죽었다. 피비린내 나는 내란과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끊이지 않는다. 세상은 온통 극도의 불안과 혼란, 그리고 통제 불능의 상태로 보인다. 하지만 계시록은 하나님이 이렇게 혼란스러운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고 계심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3.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다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권세자보다 높고 강한 분이다. 하지만 죄로 가득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이나 혹은 힘을 가진 누군가를 신으로 받들면서 예수 그리스보다 더 높은 존재로 추앙하고는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왕들 위에 군림하는 유일한 왕이시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진 자들의 주인이시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살아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주권자들을 자신의 완전한 통치권으로 다스리신다. 중동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중남미뿐만 아니라 북한, 중국, 러시아에서 발생하는 온갖 일에도 예수님은 그 주권을 행사하신다. 예수님은 ‘세상의 왕들을 다스리는 분’으로서 모든 권력 있는 자와 온 나라의 대통령들을 통치하신다. 그분은 세상의 모든 왕과 대통령이 하는 일을 알고 있고, 종종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정리하며 통제하신다. 때로는 그들이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고, 또 때로는 그들의 계획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일의 방향을 바꾸신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예수님은 그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결국 하나님의 목적을 향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떻게 그 일을 행하시는지 온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은 분명히 그렇게 하신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노릇 하시리니”따라서 성도는 신문을 문자 그대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인터넷 기사의 표면적인 의미만 파악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의 눈을 통해 그 모든 기사와 사건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벽한 통치를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상황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며 예수님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4. 모든 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인 완성에 이를 것이다우리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목적대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이끄시고 마침내 완성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우리 눈에는 현재의 상황이 나빠 보일 수 있다. 또한 교회는 여러 모양으로 핍박을 받을 수 있다. 당장은 세상과 악한 자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고, 악인의 길이 형통하게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 그 어떠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어린양의 혼인 잔치를 여시고 신부를 신랑에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은 방해받지 않는다.5. 교회는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교회에 대한 전 세계적인 핍박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심지어 교회가 완전히 파괴된 것처럼 보이는 시기가 다가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교회의 외침은 들리지 않고, 심지어 교회의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외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 하나님이 보내신 추수꾼들이 영혼의 추수를 진행함으로써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들림을 받을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어디에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알고 있는가? 계시록 11장을 천천히 읽어 보기를 바란다.6. 사탄은 두려운 존재이지만 이미 패배한 적이다사탄은 하나님을 증오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와 교회도 증오한다. 사탄은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확신을 무너뜨리려 한다. 또 성도로 하여금 믿음을 포기하도록 한다. 그러나 사탄은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다. 그러므로 어린양의 피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하는 우리의 고백으로 사탄을 이기고 죽기까지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을 때, 우리는 온전하고 최종적인 승리를 보장받게 된다(계 12:11).7.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다재림의 때가 다가올수록 죄와 우상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더 크고 넓게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이때 성도는 그 진노의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은 천국에 이르기까지 안전하고 확실하게 성도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모든 종들을 성령으로 인봉하셨다. 그러므로 어떤 고난과 역경도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빼앗을 수 없다.8. 우리는 앞으로 하나님이 보이실 크고 놀라운 일들을 다 헤아릴 수 없다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위해 새 하늘과 새 땅에 예비하신 형언할 수 없는 복에 대하여 직접 보고 들은 이는 없다. 바울은 로마서 8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9.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날 것이다핍박으로 가득한 세상을 사는 성도는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마음을 갖기 쉽다. 이를 위해 계시록이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반드시 올 것이며, 그때 하나님은 이 땅에 그분의 공의를 시행하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날 진리는 밝히 드러나고, 악은 합당한 진노를 받게 될 것이다. 10. 그리스도가 곧 오신다계시록에는 상징, 이스라엘 문제, 휴거, 그리고 환란과 관련된 논제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이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우리가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할 진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해 인격을 가진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모든 성도에게 가장 기쁘고 복된 소망이다.그러므로 다음을 기억하라. 어떤 이들은 계시록이 어렵고 이해하기 모호한 부분이 많다고 말한다. 그들은 계시록을 읽거나 묵상하는 것은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신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계 22:7).계시록은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거나, 믿고 순종하기 힘든 책이 아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것을 지키는 모든 자에게는 약속된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를 놓치지 말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Lessons I Learned from Preaching Revelation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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