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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 간의 불일치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가?
by Robert Plummer
2018-11-27
우리는 성경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었을까?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언급하며, 두 명의 저자를 그 시편에 적용한다. 처음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윗의 글에”(히 4:7)라며 동일한 시편에 대해 두 저자를 언급한다. 이는 성경의 오류일까?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중 저작, 즉 성경의 공동 저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옳다.하나님은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을 전하실 수 없다.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내용은 완전하게 진실이다. 크리스천은 이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나란히 펼쳐 놓고 보았을 때, 표면상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이렇지?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복음서들이 불일치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다른 목격자에 의해 같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재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증인의 서술은 요약, 부분적 보고, 대안적 표현(paraphrasing), 자료의 연대기적 재배열 등을 거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정확히 이런 식의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복음서들이 모순을 포함하는가?1세기 인물인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는 복음서의 기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상술한다. 파피아스에 의하면, 마가는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후에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적 이유로 인해 그는 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반영하지 않았다. 최초의 독자들은 복음서가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의 뒤바뀜이 있다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엄격하게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면, 복음서의 기록을 ‘실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은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복음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 같은 시험이 두 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순서로 시험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강조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마태는 산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래서 5-7장에 걸쳐서는 산상설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마지막 장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마 28:16-20). 이런 측면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반면, 누가는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을 강조했기에 성전 모티프에 관심이 깊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전 시험을 마지막에 배치했다.이렇듯 마태와 누가는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복음서도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연대기적 특수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과거 성경의 저자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진리가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얼마 전, 약국 주차장에 세워 둔 아내의 미니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다행히 내가 나의 경차를 가져다 주어 아내와 세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그 사이 나는 미니밴을 지키며 수리공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메일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어제 제 아내의 미니밴이 주차장에서 고장났습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 차가 어제 고장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웃에게는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는 어제 본인의 차가 고장나서 제 경차를 운전했습니다.”수백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위와 같이 그 묘사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경우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아마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에게는 미니밴이 있는가, 아니면 경차가 있는가? 무슨 차가 그녀의 차이며, 도대체 어떤 차가 고장난 것인가?” 구어체에서 ‘차’(car)는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혼이라면, 남편의 소유는 아내의 소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이 그녀의 미니밴 호칭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니밴은 내 차이지만, 아내가 항상 몰고 다닌다.당신이 고장난 차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상세히 조사한다면, 내가 부분적인 사실만 언급했거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해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거짓은 아니다.이는 복음서의 상세한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마태복음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라.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서로 다른 이름들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이어가는 세대들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차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300년대 전반에 글을 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설명하며,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견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율리우스는 16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이복 형제자매의 육체적 후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초기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아프리카누스에 따르면, 계보상 불일치는 ‘계대 혼인’(곧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과 결혼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과부가 된 여성을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과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갔다. 이 제도는 법적인 계보와 생물학적인 계보를 둘다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법적 계보를 따르느냐,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르느냐에 따라 계보상에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더 자세히 보기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들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계보의 복잡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반영한다. 따라서 면밀한 연구에서 표면상의 불일치가 관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초기 크리스천들은 불일치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를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했다.만약 당신이 성경에 회의적인 독자라면, 스스로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염려되는 부분을 놓고 기도하라.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 본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라.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후 답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이미 역사 속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다. 더불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또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계시에 관한 확실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 Inconsistencies in the Gospels Undermine Scripture’s Inerrancy번역: 이주일
복음
변증
복음서
성경의무오성
진리
정확성
시편95
다윗
베드로
우리 신앙은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by Kathy Keller
2018-11-26
‘도븨라이, 노 프로븨라이’(Doveryai, no proveryai)라는 러시아 명언이 있다. 이 명언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뜻은 ‘신뢰하되 검증하라’이다. 이는 주로 다양한 국제 협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신뢰하지만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신뢰는 정말 좋으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이 명언이 크리스천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신앙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한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처럼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Faith is believing in what you know ain’t true)이라고 정의한다. 둘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가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에는 신화나 사실이 아닌 것, 혹은 거짓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인생이 거칠고 비참할 때, 하나님의 진리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최근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역사적이면서도 검증 가능한 사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한다. 그중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존 및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가 죽지 않고(즉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증거도 없었다면(곧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부활해서 걷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제자들과 교제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불쌍한 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운의 토끼발(lucky rabbit’s foot)과 같은 부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당신에게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부적이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때 회의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신앙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과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신앙, 심지어는 과학, 교육, 정치 권력 등에 뿌리를 두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기초이자 존재의 의미는 좋은 교훈(the good advice)에 국한된다.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삶을 위해 중요한 규칙들을 잘 지키고 선한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삶은 인류 문명에도 괄목할 만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훌륭한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혹 지금 당장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당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 산다든가(이슬람), 환생의 삶을 경험한다든가(힌두교), 무존재(non-existence)의 평화를 누린다든가(불교), 아니면 ‘뉴욕타임스’에 당신의 부고가 게재되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이 신앙은 성경의 윤리적 교훈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도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신앙, 회복을 향한 소망,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어떤 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실제 역사 가운데 살고,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만들어진 이야기(a fairy tale)나 쫓으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바보처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말이다.베토벤과 목격자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한다. 바울은 엄격한 로마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철학과 성경에 정통한 자였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교육 배경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을 실제로 보았던 그 목격자들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이끌어 내었다.나 역시 이런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본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일탈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나는 낡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며 생각하는 일을 즐긴다. 그것도 대부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 Overture)을 들으면서 말이다(다행히도 나의 오래된 러닝머신에는 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TV가 달려있지 않다). 이 서곡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 중에 하나다. 나는 그 음악의 마지막 부분, 승리 파트를 들으며 상상한다. 말하자면, 그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상상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다. 천사들이 돌을 굴리고 예수님은 부활한 몸을 입고 기뻐하며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가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이런 상상을 하며 음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합창단원에게 부활의 승리를 표현하는 나팔을 불도록 사인을 준다.그런데 나는 그때 마태복음의 부활 기사를 읽으며 내 상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낸다(그 돌은 몇 톤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테투리에서 입구 쪽으로 갈수록 경사는 더 높았다. 아마도 돌이 굴려져서 입구가 막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돌을 다시 밖으로 굴려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때(즉 천사가 돌을 굴려 냈을 때)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러 온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마 28:6), “먼저 갈릴리로”(마28:7) 가셨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엘비스는 이미 쇼를 끝내고 공연장을 떠난 것이다(천사가 돌을 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천사가 돌을 움직이도록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셨지만, 자신을 싼 수의를 통과해서 돌로 봉해진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요 20:19).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덤을 나가실 때, 천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천사는 ‘왜’ 돌을 굴렸을까? 만약 천사가 돌을 굴리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위에 그대로 앉은 채,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마 믿었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사는 여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설득력 있는 천사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빈 무덤이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빈 무덤을 보지 않은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헛것을 보았다고 취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여전히 무덤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천사가 돌을 굴려야 했던 진짜 이유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시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천사의 행동은 우리를 무덤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놓여 있던 수의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 신앙은 천사가 무덤을 열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빈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검증된다.그러므로 늘 질문하고 의구심을 표출하길 바란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역사는 성경을 뒷받침한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ith Is Historically Verifiable—Or It’s Nothing번역: 김재덕
복음
부활
검증
진리
천사
무덤
역사
성경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by Thomas Schreiner
2018-11-23
성경의 내용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또한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흐름의 특징을 갖는다. 이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새 창조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회심은 어느 부분에 들어갈까? 그것은 구속 부분에 속한다. 분명, 회심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건 아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대목은 회심이 지향하는 ‘목적’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 목적은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장차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며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계 22:4). 동시에, 회심은 성경 이야기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심하지 않고는 새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우 분명한 결론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흑암의 지배로부터 건져 내신 하나님을 천국에서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역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올리는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 줄거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왜 회심이 그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지를 여기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실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어졌다(창 1:26-28).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 통치자여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신뢰하며 순종함으로써 그의 통치권 아래에서 만물을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했으며, 창조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고 피조물인 자신들을 숭배했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다(창 2:17). 그들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회개하지 않는 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운명이었다.죄를 범한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은 회심이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상태일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 그분의 축복을 세상에 확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과 뱀의 후손을 이기리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초기 인류 역사는 인간들의 철저한 죄악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아들과 딸로서(롬 5:12-19), 그리고 뱀의 후손으로서(마 13:37-38; 요 8:44; 요일 5:19) 세상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사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다. 예컨대, 가인은 의로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창 4:1-16).악의 힘이 얼마나 강했을까? 노아 당시의 세상에는 여덟 명의 의인들만 남았다! 인류는 철저히 악했고, 창세기 6장 5절은 죄가 만연한 상태를 증언한다. 뱀의 후손이 땅을 지배했지만, 하나님이 홍수로 죄인들을 멸함으로써 당신의 거룩하심과 통치권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창 8:21). 바벨탑 사건은 새 창조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창 11:1-9). 세상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다. 즉, 새 창조는 새 마음 없이는 도래할 수 없었다.바벨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심판 받은 후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3). 악한 세상에서 다시 한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은 복을 약속 받았다. 다시 말해, 가나안을 새로운 에덴으로 만드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브라함은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후손이 될 것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결과적으로 온 세상으로 확산될 계획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대로,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약속들은 거의 2천 년이 지나도록 성취되지 않았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되었던 그들의 후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족장들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못했으며, 온 세상에 확산되는 축복을 보지도 못했다.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실을 회고한다(출 1:15). 이제 하나님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한 약속을 성취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일종의 새 에덴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실행될 계획이었고, 만민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백성의 의와 평안과 형통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굽을 떠났던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20-38). 그들은 애굽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과 하나님의 모든 표적 및 기사들을 본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길 거부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대부분은 완고하고 반역적이었며,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고전 10:1-12; 히 3:7-4:11). 그들에게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할례, 즉 회심이 필요했다(신 30:6).광야 세대 이후에 일어난 후손들은 예전 세대가 실패한 일에 성공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수 21:45; 23:14).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새 에덴에서 살며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보여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 속 벌레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만민에게 복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이방 민족들을 모방하고 이교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이 회개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악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했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로 거의 1000년이 지났다. 엄청 늘어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살았지만, 전 세계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은 실현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처럼 왕을 원했고, 그들이 세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삼상 8:5).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처럼 또 한 명의 새 아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여호와께 반역함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삼상 13:13; 15:22-23).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는 사울의 통치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셨고, 그는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다(삼상 13:14). 하지만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을 온 세계에 임하게 할 대행자가 아님을 드러냈다(삼하 11장).솔로몬이 즉위했을 때에는 새 창조의 낙원이 곧 눈앞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왕상 2:13-46). 그는 평화 중심의 통치를 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장엄한 성전을 지었다(왕하 3-10). 솔로몬이 이처럼 처음에는 지혜롭게,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호와를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였다(왕상 11장). 그 결과,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왕상 12장), 오랫동안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왕하 17:6-23; 24:10-25:26). 아브라함의 소명 이후로 약 1500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후손 및 축복에 대한 약속들은 성취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가나안 땅이 아닌 유배지에 머물렀고, 그들은 온 세계를 복 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나라들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까? 무엇이 문제였는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거듭 가르친다(사 42:24-25; 50:1; 58:1; 59:2, 12; 64:5).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새 출애굽과 새 창조를 약속하신다. 하지만 새 출애굽과 새 창조는 오직 죄 사함의 역사 안에서만 이루어 질 계획이었고(사 43:25; 44:22), 또한 이 용서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을 통해 현실화될 예정이었다(사 52:13-53:12). 예레미야도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할례 받은 마음이었다(렘 4:4; 9:25). 달리 말해서, 그들에게는 거듭남과 회심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새 언약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1-34).이와 동일하게, 에스겔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그 날을 내다보았다(겔 36:25-27). 그들의 변화된 마음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결과일 것이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길을 걷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전 536년에 포로로 살던 땅으로부터 돌아왔지만, 선지서들에 나오는 위대한 약속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말라기 시대에도 고투를 벌였고, 약속된 성령의 사역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새 창조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심 없이는 이스라엘이나 세상을 향한 축복도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죄 사함과 할례 받은 마음 없이는 새 창조와 새 출애굽도 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의 뜻을 거듭 불순종하고 거역한 일들로 점철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죄 사함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사야는 고난 받을 종을 예언함으로써 그러한 죄 사함이 실현될 것임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 즉 회심이 필요했다.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회심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곧 성경 이야기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세상에 약속된 복은 그들의 회심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Conversion and the Story of Israel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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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구속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민스러운 문제
by John Piper
2018-11-22
구원의 확신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고민스러운 문제다. 여기서 고민하게 되는 점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객관적 사실들의 진실 여부가 아니다(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는지,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하시는지 등). 이 객관적 사실들은 우리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주관적 확신이다.구원의 확신이 있는가?이는 ‘내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압축된다. 이 문제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은 구원받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따라서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은 진짜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물론, 그들은 선의로 그럴 수 있다). 즉, 구원받는 믿음이란 어떤 진리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결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못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변화를 통하여 믿음의 참됨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데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특정한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같은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진리를 잃게 한다. 또한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줄 것이다.새로운 빛, 새로운 안식우리는 기적적이고 심오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의 속성을 축소시키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와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객관적 보증과, 바로 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주관적 보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객관적 보증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히 10:14)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적 보증은 ‘성화되는 과정’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다.다음으로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의 두가지 정의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로, 믿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또는 아름다움)을 보는 '영적인 시각'이다. 즉,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의 역사를 듣거나 읽게 될 때, 이 복음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기 이전에도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런 일이 있다. 나는 이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4장 4 절에서 얻었다. 바울은 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했다. 믿음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다.믿음은 이 영광의 복음 안에서 ‘보장된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장된 안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보장되지 않은 안식‘을 가진 사람들(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영원한 벌에서 구원받기 위해 믿음을 선택할 뿐,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장된 안식을 받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보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보장된다.빛이 비추는 곳우리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는 십자가와 또한 그분의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엡 1:18).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풍성히 임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Agonizing Problem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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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by Russell Moore
2018-11-21
딱 세 단어만 사용해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주 전에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그때 나는 "세 단어로 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더 큰 도전이 되어,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세 단어로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세 단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세 단어는 바로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1. 주(Lord)‘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은 통치하는 왕이시며 사랑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창조주로서 그분이 가진 주권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만물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요 1:1-5; 골 1:16).또한 이 단어는 우리 생명의 절대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단절시키면서, 다른 주인들이나 황제들, 가령 파라오나 가이사와 같은 우상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거나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이 처하게 된 곤경도 지적하는 의미를 가진다.2. 예수(Jesus)다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이렇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가 말씀하시는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다윗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자를 보내시는 사건과 또한 그 이면에 있는 언약의 역사를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지금 이 사람으로 집약되고,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씨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전달한다.‘예수’라는 단어는 ‘구원’과 ‘죄’의 정의를 필요로 한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둘이 함께 만나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롬 1-3장). 이는 우리 죄에서 기인한 저주와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과 희생을 통해 그 저주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함축한다.또한 ‘예수’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이라는 구절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중에 거하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고,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보혈과 기도와 생명으로써 중보하실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와 ‘아멘’으로 나타난다(고후 1:20).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의 상속자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 약속들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갈 3:29).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다.성령에 의해 머리와 몸으로 연합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3. 그리스도(Christ)마지막 단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칭호다. 무엇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의 성령이다. 누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 아버지다. 무엇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왕권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다윗을 통해 예표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소유하신 언약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실이 되며, 더불어 미래에 완성될 소망으로 다가온다. 이 왕권은 죽음과 지옥에서 해방된 온 가문의 장자로서(롬 8:2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구원을 되돌아보았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미래를 바라본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 주시고(엡 1:10-11), 우주적 사명의 완성을 그의 아버지께 넘겨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도록 역사하신다(고전 15:28).우리는 사방에서 타락으로 파괴된 모습을 보며 신음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성령으로 빚어지고,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교회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써 현존하는 그분의 세계로 기쁘게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며, 오실 왕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간다.물론 할 말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66권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말씀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단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You Explain the Gospel in 3 Words?번역: 고갑균
복음
변증
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66권
하나님의음성
공동상속자
신성
절대근원
구약과 신약의 그리스도
by Burk Parsons
2018-11-20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대의 금언을 들은 적이 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 이때 ‘감추어지다’라는 단어와 ‘드러나다’라는 단어가 신구약의 관계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즉 신약은 구약에서 씨앗으로 심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활짝 꽃피운다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신약은 단순하게도 ‘새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신약’이라고 불린다. 신약은 단지 과거의 계시에 대한 주석이 아닌 새로운 계시이다. 신약은 단순히 초대교회 사도들의 구약에 대한 묵상을 기록해 놓은 전집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와 그분의 약속된 나라, 그리고 새 언약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죄악 된 인간들을 감독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계속되는 계시는 구약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하나님은 과거에 행하셨고, 현재 행하고 계시며, 미래에 행하실 모든 일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신약의 여러 지면을 통해 주권적으로 상기시키신다. 다시 말해, ‘말씀대로’라는 신약의 언급은 결코 가볍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계시의 진실성과 창조부터 영화까지 이어지는 구속사라는 파노라마를 보게 된다. 또 우리는 그 가운데 나타나는 신구약의 아름다운 조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조부터 영화까지의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따른 것이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향하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서 자신과 관계된 일들을 해석해 주실 때 직접 제시하셨던 내용을 하나님은 율법서, 선지서, 성문서라는 구약의 세 부분에 걸쳐 웅장하게 제시하신다.그러나 이 사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이야기에 숨어 계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건전한 주해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구약의 모든 페이지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전체 구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성경의 모든 배경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계심을 알고 구약과 신약을 읽어 나가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hrist of the Old and New번역: 매일배움
복음
예수그리스도
구약
신약
감추어지다
드러나다
말씀대로
초대교회
계시
예정은 성경적이고 아름다우며 실용적인 교리
by Jeff Robinson
2018-11-20
일부 교인들에게 ‘예정’이라는 단어는 변덕스럽고 나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 임의대로 인류 중 얼마는 구원하시고, (일찍 생을 마감한 영유아까지 포함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크리스천 중에는 예정을 저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이런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목사가 예정에 대해 언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목사는 쫓겨나거나 주먹다짐 혹은 그 이상의 심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예정하시는 하나님은 반(反)민주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정을 청교도적인 종교의 산물이요, 16세기의 광적인 목사가 만들어 낸 교리적인 창작물로 여긴다. 그 후손들이 예정 교리에 근거해서 신학적인 ‘주의’(ism)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이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교회들은 예정을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성경 교리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단어로 생각한다. 예정은 이 세상의 분자나 원자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미세한 개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제 속에 존재한다는 위로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는 말이다. 그리고 예정이 주는 위로와 확신은 구원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성경적인 교리미국 종교 역사에서 몇 가지 교리들은 다양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예정 교리는 가장 분명하고 변증할 필요가 없는 교리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장 5절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또 에베소서 1장 11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었다”라고 말씀한다. 이 에베소서의 말씀은 로마서 9장과 요한복음 6장의 많은 부분들과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와 함께, 나를 자원하여 신학에 헌신하게 만든 말씀이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48절은 나를 완전히 그 앞에 엎드리게 했던 말씀이다.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또 그와 비슷한 교리인 ‘선택’은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미움 받는 교리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해석가들은 예정 교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그러나 많은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이 예정 교리를 방치해 둔다. 또 이를 통해 신학적인 열매를 거두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매우 문제가 많고 위험한 교리로 여기기도 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 예정론은 그저 신학교 수업의 한 토론 주제일 뿐, 삶의 전반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예정론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 다들 잘못 인식하는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존 칼빈은 앞서 언급한 복음 전도자들이나 목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이 위대한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단순히 까다롭고 격한 논쟁만 일으키는 주제가 아니다.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피곤하게만 하는 추상적인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경건한 자들의 섬김에 유익을 주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정 교리는 우리를 온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한다. 예정 교리는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예정론에 관한 주제를 지금까지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책을 쓴 로레인 뵈트너(Lorraine Boettner)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예정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갑고, 쓸모없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상한 교리들을 부자연스럽게 엮은 체계도 아니다. 오히려 예정론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살아 있는, 가장 생명력 있고 중요한 설명이다. 예정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갖게 하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적용될 수 있는, 차원 높지만 실용적인 진리의 체계이다.”아름다운 교리예정은 아름다운 교리이다. 예정의 아름다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정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칼빈과 뵈트너가 지적한 것처럼, 예정은 크리스천의 삶에 중요하고도 실용적으로 적용되는 교리이다. 예정은 단순히 호기심을 가진 신학생들을 위한 토론이나 논쟁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첫째,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세심하게 인류 역사를 써 나가신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은 없다. 전능하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에 계획되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둘째,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라는 말씀이 실제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로 인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롬 5:8).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자신의 생명을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내어주셨다(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셋째,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죄인 된 우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자들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신다(롬 10:14-15).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바로 그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하신다.넷째, 하나님의 영광은 무궁하지만 인간의 영광은 무궁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다(사 42:8). 그러므로 인생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과 관련되어 행해진다.또한 예정 교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고, 죽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엡 2:1). 그러므로 우리가 예정을 무시해서 살면, 영적 영양 실조에 걸리게 된다.실용적인 교리사람들에게 자주 왜곡되어 온 예정 교리는 우리의 영적 진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강화해 준다.첫째, 예정은 우리를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고 완전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장차 받을 하늘의 기업은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장차 받을 기업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기업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없다. 또한 우리에게서 그 기업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도 없다(롬 8:31-39). 분명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들은 끝까지 보존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예정을 통해 배우는 진리는 매일 고난과 아픔의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 진리로 인해 매일의 영적 전투를 치루느라 연약해진 성도들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확실히 지키실 것이다(요 10:28).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신앙을 세워가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가 예정에 대해 들을 때,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확증하신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불변하며 선한 의지 때문임을 우리가 보고 알게 하신다. 무엇도 이 예정을 철회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폭풍우도, 사탄의 공격도, 어떠한 변화나 육신의 결함이나 연약조차도, 하나님의 선택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그 원인을 찾을 때만 안전하다.둘째, 예정은 우리의 구원이 주권적이고 선하신 하나님께 영원한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과 핍박과 실패가 우연이 아님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의 사냥개는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케 하실 때까지 재갈을 물고 있다.”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결코 늦게 오시지 않는다. 결코 다른 주소로 가시지도 않는다. 당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은 당신을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한 그분의 끊임없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늘 함께하시는 절대적인 주권은 인간의 근심을 위한 가장 좋은 처방이다.셋째, 예정 교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논쟁을 불러 일으켜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고 감사하게 한다. 왜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선택하셨을까? 왜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적어도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이웃은 믿지 않을까? 왜 나는 교회를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매주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을까?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분은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 내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 나를 겸손하게 한다. 모든 순간마다 내 입술에 감사가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이 없다. 내 인생이 이런 모습이 되기에는 자격이 없고, 철저하게 거리가 멀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금의 나 되게 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늘 나에게 선을 베푸셨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나를 참아 주셨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예정 교리와 씨름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전해야 한다.더 필요한 것은 없다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처음 예정론을 접했을 때,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 불의를 피력했다. “하나님의 예정은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실 수 있습니까?”이런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듣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다. 하지만 참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평하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나의 눈을 열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예정 교리의 아름다움과 삶에 안정감을 주는 그 교리의 힘을 보게 하셨다.만일 하나님이 내가 따지고 들었던 바로 그 의(justice)를 따라 행하셨다면, 나는 그 의에 근거하여 지금 이 순간 지은 죄에 합당한 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비롯하여,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바로 ‘자비’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redestination Is Biblical, Beautiful, and Practical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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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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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리문답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by Caleb Flores
2018-11-19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 보통은 “죄로부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와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종종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요?”라고 묻고 싶다. 하지만 이렇듯 귀찮게 하는 질문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입으로만 믿는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 받는다면, 좋은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 교리들이 교회에 흘러 들어온다. 그리스도가 왜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엇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들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성경은 왜곡되고 있다.여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것들이 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성공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당신의 건강, 부귀, 안전, 평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혹 당신이 현재 그런 상태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태가 당신이 누려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영적인 징벌이 아닌 일시적인 평안을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영적인 번성이 아닌 일시적인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물리적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는 치명적이며 해로운 가르침을 주장한다. 이런 가르침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종종 빈곤한 환경에서 극심한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심한 범죄에 해당한다.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의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졌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신다(엡 2:7). 이것이 바로 당신의 삶에 약속된 유일한 부요함이다. 이것은 독생자의 무한한 비용으로 당신을 구원하신,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알 때 찾아오는 기쁨과 평강이다.2. 예수님은 당신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자유? 보수? 환경운동가? 동성애혐오자? 예수님의 이름은 이런 온갖 ‘사상’(ism)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 우리 자신의 전통, 세계관, 또는 명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여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예수님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보적인 민주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취임식이지, 우리 자신의 작은 왕국을 합법화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이용해도 좋다는 초대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사회적, 정치적 명분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주지는 못한다. 죄악된 마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다. 결국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어떤 삶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크리스천들에게는 최고의 메시지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복음이다.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을 설교하고 그 외의 다른 모든 문제들은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3. 예수님은 당신이 변화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변명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칭의도 없다. 또한 우리의 적대적인 영혼을 고치시고 예배의 작은 행동들을 가치 있게 만드시는 성령의 오심도 없다. 예수님 없는 우리는 올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된 욕망의 노예들이고,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죄 가운데 남겨 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오직 은혜를 베풀고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된다.그렇다면, 여전히 죄를 범할 것인가? 그렇다. 어리석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짓는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신자는 인내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과 다른 지체들을 더 사랑하도록 성장시키고,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여 가실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느리고 꾸준한 행진일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재조정이다.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의 죄에 대항하여 예수님 편에 서도록 가르친다. 이 은혜는 당신을 회개하게 한다.4. 예수님은 단지 당신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교회 주변을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 도덕을 찾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보다 율법을 원하는가?당신은 은혜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이것은 소비자 상품이 아니다. 상품화할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자율성의 부족,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그러나 은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적인 바리새인의 마음은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우리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도덕적인 수준에 우리는 평안을 느낀다. 그런 다음, 그만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한다. 우리의 교만과 자기 의는 창녀와 포주의 죄 만큼이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목사의 죄는 알코올 중독자 만큼이나 불쾌하게 만든다. 그들은 둘 다 십자가 밑에서 발견되는 구원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영원토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요를 상속받게 하셨다.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작은 사회적, 정치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세대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있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선행으로 영적인 이력서를 쓰게 하려고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겸손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Jesus Didn’t Die For번역: 고갑균
복음
십자가
죽음
구원
축복
은혜
순종
사랑
예수님
은혜란 무엇인가?
by R. C. Sproul
2018-11-16
우리는 수십 년 전 리고니어 밸리스터디센터에서 추수감사절 카드를 보냈다. 거기엔 크리스천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신학의 본질은 은혜이고, 성화의 본질은 감사이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사람과 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무엇인가 논쟁할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승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사의 이유도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요리문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조건적 호의다.”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은혜를 공로와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닌 줄 앎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은혜는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잘 보여 준다. 그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처음으로 ‘완전함’과 ‘공평함’과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걸쳐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모든 입술이 그 말을 그치게 될 것이다. 정죄는 오직 죄인들을 향한 선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타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 칭의는 의무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써 주어진 것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만일 그의 구원과 칭의의 기초가 칭찬받을 만한 예배나 순종에 있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자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한 공로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믿음 뿐이었고, 그 믿음 자체도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엡 2:8-10).로마서 4장 4-8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는 핵심 본문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은혜다. 일하는 자에게 은혜는 오히려 빚이다. 만일 은혜의 기초를 공로로 삼는다면, 이는 은혜 이전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하면 100달러를 주겠노라고 가정하면, 나는 당신이 여덟 시간을 일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의무를 이행한 것에 대한 몫을 받을 뿐이다. 당신이 계약을 지키면, 나는 그에 합당한 삯을 주어야 할 의무을 갖게 된다. 주님께 우리는 보상할 길이 없는 빚진 자다. 성경은 경제 용어를 이용해서 구속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6:20). 하지만 우리는 그 값을 도저히 갚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빚을 갚으실 수 있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다. 우리는 어떤 자격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은혜로 그의 공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즉, 은혜의 본질은 자발적인 베푸심이다. 조건이 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의인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이고 온전한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로를 가지고 계시며, 예수님은 그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다. 우리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어떤 것도 없다.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길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알려 주는 참된 성화의 출발점은 우리의 죄인된 본성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며, 사랑과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도 더해 갈 것이다.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셨음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향한 크리스천의 동기는 단순히 율법이나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감사에 기초해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계명을 지키라.” 은혜,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는 항상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Grace?번역: 강화구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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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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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믿음
아브라함
성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
by John Piper
2018-11-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위의 두 본문을 통하여 나는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혹 회개함을 주사"라고 기록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바람 중 일부는 다른 조건들로 인해 실행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발휘된다. 하나님이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일부 죄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둘째, 진리를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문은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선물이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이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에 닿을 기회를 얻게 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도록 이끈다.셋째, 여기서 본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인도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진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인이 볼 수 없는 진리란 무엇일까? 자연인은 복음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넷째,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보는 눈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멀어 있다. 사탄은 우리를 계속 눈이 먼 상태에 머물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복음의 진리를 보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주시면’ 우리의 눈이 열린다. 다섯째, 우리는 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기도 혹은 전도는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희망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영적인 죽음과 사탄의 꾀를 극복할 능력을 가지셨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기도와 말씀의 증거를 붙들어 매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기를 신뢰하며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새기도록 하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Desires All to Be Saved and Grants Repentance to Some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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