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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친다고 애썼지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워야 하는 이유
by 박혜영
2023-05-12
교회의 큰 절기가 되면 내 “영혼의 크기”가 작은 것을 실감하곤 합니다. 절기가 기념하고 선포하는 교리의 크기를 저의 그릇으로 담지 못해 버거운 느낌이랄까요?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으니, 저의 방침은 이랬습니다. 웅장하게 선포하지 못한다면, 그 내용이라도 철저하게 가르치자! 그래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가르쳤습니다.왜 이렇게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철저히 배우는 게 중요할까요? 그래야 조금이나마 교리가 지시하는 세계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만 들었을 뿐, 그 이름 안에 있는 세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면, 과연 그 교리를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교리가 마음에 와닿은 적이 없는데, 그 교리를 믿고 따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으니, 저는 그동안 교리와 성경 내용을 가르치려고 많이 노력했으며, 저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늘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컸습니다.지난 수난 주간에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치면서도 그랬습니다. 사실 이 크고 중요한 책은 한 주에 한 과씩, 뒤에 나오는 복습 문제까지 풀이하면서 철저하게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만 모든 교인을 상대로 그런 기회를 찾기란 무척 어렵지 않습니까? 그런 핑계로 20년을 보내고 나서, 이번에 큰맘 먹고 시도했지만, 또 철저하게 가르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여전히 남습니다. 한 주에 한 과씩 나가야 할 진도를 이틀에 무려 다섯 과나 나가버렸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런 식으로 대해서는 안 될 텐데….이 책을 읽고 가르치면서, 전에 좀 더 체계적으로 철저하게 가르쳤다면 이 책이 더 잘 이해되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다시 생각하게 된 ‘새 언약’이란 말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수난 주간에는 ‘성찬’을 받기 때문에 더 깊게 다가왔습니다. 존 스토트는 예수님의 ‘다락방 최후 만찬’의 목적은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하면서 출애굽기를 언급했고, 예레미야를 언급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시내산 언약을 맺는 전 과정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어떻게 나타나 있으며, 모세는 언약을 수립하기 위해 희생 짐승의 피를 어떻게 뿌렸으며, 시내산 언약을 세우고 나서 계명을 준 것은 무슨 의미인지 확실히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 언약에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며, 저들이 실패한 자리에서 선지자 예레미야가 예언한 ‘새 언약’의 의의는 무엇이며, 그 내용은 무엇인지도 가르쳤어야 했습니다. 곧 ‘새 언약’이라는 말에 담긴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전체로 가르쳐, 교회의 신자들이 ‘성찬’을 받을 때 큰 유익이 되게 해야 했습니다.이것만이 아닙니다. ‘새 언약’에는 더 큰 그림이 있습니다. 성경 시대의 언약 형식은 무엇이고, ‘사랑’과 ‘충성’이라는 성경 용어가 언약의 형식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십계명과 신명기 전체를 통해 가르쳤어야 합니다. 그래야 할례, 계명, 안식일이 시내산 언약과 어떤 관계인지, ‘새 언약’에 참여하는 신자들에게 십계명은 어떤 의미이며, 할례는 어떻게 적용되며, 주일을 지킨다는 건 왜 중요한지, 교회의 신자들은 조금이라도 느끼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세례[입교]와 성찬식은 어떻게 ‘새 언약’이라는 전체에 통합되어 있는 것인지 배운다면, 예수님이 자기 피로 세우고자 하신 ‘새 언약’이 얼마나 중대한 주제인지 알게 되고, 그 ‘새 언약’을 오늘의 것으로 살리기 위하여 교회의 신자들이 세례를 받아 성찬을 받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됩니다. 나아가 주일 예배를 왜 공(公)예배라고 하는지, 사도신경은 교회를 왜 “거룩한 공회(公會)”라고 부르는지, 우리는 왜 ‘공회 가입’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단어를 쓰는지, 주일에 공예배로 모이는 일이 왜 중요한지, ‘새 언약’의 맥락에서 확실하게 배운다면 알게 됩니다.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이 십자가라는 말만 알 뿐, ‘새 언약’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알지 못해서 주일을 휴일로 여기거나, 성찬식에 큰 의미를 부여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요. 만약 이게 다 목사가 ‘새 언약’을 전체로, 체계를 세워, 철저히 가르치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라면, 저는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할까요? 다만 성경의 표현(요 21:25)을 슬쩍 바꿔 변명할 따름입니다. “만일 낱낱이 가르치고자 하면, 전 생애라도 시간이 부족할 줄 아노라.”
성경
교리
성경공부
그리스도의십자가
새언약
예배에서 중요한 건 ‘나’도 ‘우리’도 아니다
by Bob Kauflin
2023-05-11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1997년이었다. 그전까지 12년 동안 목사로 섬긴 나는 워싱턴 D.C. 지역에 있는 큰 교회에서 새로운 직분을 맡고 있었다. 그 교회에서 내 초점은 목양이 아니라 음악과 예배였다. 피아노로 학위를 받았고, 기독교 밴드와 연주 여행을 했고, 무려 20년 넘게 회중 예배를 인도했으며 심지어 예배 앨범 몇 개에도 이름을 올린 나는 찬양 예배와 관련해서 더 이상 준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그 교회에 도착하고 몇 달이 지났을 때 마하니(C. J. Mahaney) 담임 목사님이 불쑥 내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책 세 권을 내밀며 읽으라고 했다. 그중 하나가 생전 처음 들은 데이비드 피터슨이 쓴 Engaging with God: A Biblical Theology of Worship(하나님과 관계 맺음: 성경적 예배 신학)이었다. 내 눈에 그 책은 예배에 관한 책이라기보다는 학술서로만 보였다. 게다가 피터슨은 음악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마하니 목사님이 추천한 책인 만큼 나는 읽기 시작했다. 두 번째 페이지에 다음 구절이 나왔다. 그렇다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경험이나 감정인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humiliation)의 느낌과 동일시되어야 하는가? 기독교 집회에서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특별한 순간이 있는가? 예배 수준이 참가자들의 체험 정도에 따라서 측정되어야 하는가? 예배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주관적인 접근 방식을 종종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 (16)책 여백에 나는 “좋은 지적”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몇 달이 지나고 이 구절을 계속 생각하는 중에 점점 더 그가 한 마지막 말에 마음이 불편했다. “감정적 체험은 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지성소 밖에서 그때까지 나는 예배를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으로 여겼다. 보통 찬양 두세 곡을 부르고 나면 그런 순간이 도래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그러면 우리는 감정적으로 예배에 더 깊이 참여했고, 뭔가 자발적인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확신했다. 내 생각에 이건 성전이 등장하는 구약의 양식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우리는 바깥뜰에서 시작하여 안뜰을 거쳐 마침내 지성소에 들어가니까 말이다. 예배 인도자로서 나는 교회를 “지성소”를 체험하는 현장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가운데 계신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또 그 순간을 기대한다(사 12:6).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예배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피터슨의 글은 나로 하여금 그때까지 잘 모르던 예배 신학과 대면하게 만들었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 또는 일종의 종교적 엑스터시, 그게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의 깊은 낮아짐의 느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면, 도대체 예배는 무엇이란 말인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다음 다섯 가지 귀중한 교훈을 포함하여 내가 놓치고 있던 진리를 더 분명히 보게 되었다. 1. 예배의 중심은 내가 아니다. 예배의 중심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예배의 중심에 나를 놓으려고 했다.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 내가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내가 체험한 것과 놓친 것이 무언인지가 중요했다. 설혹 나를 뺀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예배의 중심에 우리를 두었다. 몇 명이나 모였는지, 규모는 어떠했는지, 손을 들고 찬양한 사람은 얼마나 되었는지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정작 내가 놓친 것은 우리의 욕망과 계획과 행동이 예배의 본질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여기시고 기뻐하셨듯이(요 17:5), 예배의 본질은 영원으로부터 존재했다.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자신이 하고 계신 일 가운데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우리의 응답은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그리스도의 화해 사역에 근거하며, 또 그분의 영에 의해 가능해진다(요 4:23-24; 엡 2:18; 빌 3:3). 피터슨의 말이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실지 안 받으실지는 인간의 직감이나 창의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 있다”(26). 우리의 역할은 단지 예수님이 이루신 온전한 제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의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바치는 모든 제물이 하나님께 향기 나는 제사가 되게 바꾸셨다(벧전 2:5).2. 찬양 체험으로 예배를 정의해서는 안 된다. 몇 년 전에 나는 예배가 단지 찬양할 때만 드리는 게 아니라 삶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내가 쓰는 말은 나의 신학을 드러냄과 동시에 내 신학 수준을 형성했다. “마지막 찬양에 이르러서 우리는 정말로 제대로 된 예배를 드렸어요.” “설교 끝나고 다시 예배에 돌입하겠습니다.” “늦으면 예배를 놓치게 됩니다.” 이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곤 했다. 이런 식의 말은 결국 예배란 수도꼭지처럼 하나님이 틀었다가 잠그는, 영적으로 주입된 음악적 경험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강화했다. 찬양과 예배를 거의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경향에 비추어 볼 때, 성경에 이 둘이 함께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은 매우 놀랍다. 모든 소유물이 사라지고 자녀까지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욥은 땅에 엎드려 경배했다(욥 1:20). 요한복음 4장을 보자.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이 찾으시는 진정한 예배에 관해서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은 음악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으신다(요 4:21-24). 우리가 성경에서 예배로 번역하는 다양한 히브리어와 헬라어 단어는 경건, 봉사, 복종, 명예와는 관련이 있지만, 음악과는 거의 관련이 없다.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예배의 한 부분이 될 순 있지만, 결코 예배의 핵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3. 예배는 시작하고 끝나는 게 아니다. 사실상 인간이란 예배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단 한 순간도 예외 없이 우리는 애정과 관심과 충성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에게 향하거나, 그게 아니면 결코 만족과 위로와 구원을 줄 수 없는 우상을 향한다. 결국 나는 이미 무언가를 예배하는 상태에서 매 주일 교회에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배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 올바른 화음이나 좋은 말씀, 은혜 넘치는 “분위기”를 굳이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참된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집회의 특별한 순간”과는 거리가 먼,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고전 10:31) 모든 삶을 추구할 때 형성되는 우리 마음의 자연스러운 상태이다. 주일 아침에 교인에게 인사함으로써 나는 하나님께 예배한다. 찬양하는 목소리를 높임으로써 예배를 계속한다(히 13:15-16). 기꺼이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는 것, 설교를 주의 깊게 듣는 것, 예배 후에 친구를 위해 기도하는 것, 모두가 다 예배 행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점심 식사를 위해 손님을 초대할 때도, 손님을 보내고 청소할 때도, 그리고 그날 오후 늦게 낮잠을 자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그리고 가정과 직장, 학교와 이웃에서도 복음으로 변화된 감사하는 종의 마음을 보임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이고자 신실하게 추구하는 나의 예배는 멈추지 않는다.성경이 별개의 예배 행위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사실이다(시 29:2; 행 13:2). 그러나 그 예배는 삶 전체에 걸친 “영적 예배”(롬 12:1)라는 더 큰 맥락에서 일어나야 한다. 4. 예배는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특별한 감각”과 동일시되지 않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느끼든 느끼지 못하든 예배는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경이로움, 감사함, 경외감, 예배의 상태에 있을 수밖에 없다(사 6:3; 계 4:8; 5:13-14). 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음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그와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엡 2:6).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시온 산,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 축하 행사에 모인 수많은 천사들”(히 12:22)에게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우리뿐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몸은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여러분은 성령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모시고 있습니다”(고전 6:19).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오늘도 코람데오의 삶을 산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그분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마 28:20; 요 14:16; 히 13:5). 그러나 여럿이 모일 때 하나님은 종종 주권적 방법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좀 더 경험적으로 자신의 임재를 느끼게 하신다(행 4:31; 고전 12:7; 고전 2:4; 살전 1:5). 넓든 좁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드리는 예배에서 감정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건 성경과 모순된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벧전 1:8), 마음의 악함을 통회하고(고전 14:24-25), 거룩함을 더 추구하도록 도전받고(고후 6:16-7:1), 확신이 더 강화되며(히 13:5-6), 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진다(벧전 1:8).하나님의 영은 우리가 함께 모일 때 더 분명하게 역사하시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모이는 시간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그 시간을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러나 이때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유일한 시간이 아님을 기억하자!5. 예배는 끝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우리는 예배한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골 3:17). 예배는 생각과 마음과 의지를 통해서 행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영광을 높이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한 성령의 지속적인 응답이다. 예배는 굳이 음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코 감정의 영역으로 제한될 수 없다. (그러나 얼마든지 이 두 가지 모두를 다 포함할 수도 있다!)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기쁨을 찾도록 우리를 거듭거듭 초대하시는 천국 아버지께서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형제자매여, 언제나, 어디서나 예배드리자! 할렐루야.무엇보다도 가장 큰 소식이 남아있다.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씻긴 사람들에게 예배는 결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원제: Worship Isn’t About You: What I Learned After Years of Leading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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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 정
2023-05-02
경쟁과 성과를 위해 잠을 쫓으며 살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불면증은 쫓아내기 힘든 불청객이 되었다. 이 불청객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의미 있는 한 가지 방법이 내 눈에 들어왔다. 진한 아이스티를 마신 탓에 잠들지 못해 컴퓨터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다양한 자연의 소리가 컴퓨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천둥소리, 빗소리, 물 흐르는 소리, 또 여치나 귀뚜라미 같은 벌레나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려주었다.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는데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심신이 안정되어 느지막이 잠들 수 있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벌레들은 왜 그리도 밤새 울어댈까! 하루 미션에 지친 한 인간 잠재우려고 그리 울지는 않을 텐데….곤충을 인간에게 백색소음이나 제공해 주는 예능 충 정도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 그 이상의 존재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수가 심상치 않게 많다. 지구에 있는 동물 중 80퍼센트 이상이 곤충이다. 현재 150만 종의 곤충이 있다고 보고 되지만, 과학자들은 200만 종 이상이 될 것이라고 추산할 정도다. 이렇게 종과 수가 많은 이유는 가장 일반적이고 중요한 일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다.그들의 미션이 분명히 있다. 첫째는 꽃가루를 매개해 확산시켜 꽃나무가 성장하고 번식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은 죽은 동식물을 먹이로 삼아 배설해 썩어가는 물질을 토양의 영양소로 재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을 벌, 나비, 딱정벌레, 개미 같은 벌레들이 수행한다. 수분 활동이나 유기물을 분해하여 영양소를 재활용하는 일 모두 살아있는 생물이 열매 맺고(Be Fruitful) 번성하도록(Increase in Number) 지원하는 일이다. 이런 지원이 없다면, 지구는 생태계가 붕괴하여 먹거리가 사라지고 썩지 않는 동식물이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죽음의 터가 되어 버릴 것이다. 페드로 카르도소(Pedro Miguel Cardoso) 같은 학자는 곤충이 사라지면 다른 동물뿐 아니라 인간들까지 사라지게 된다고 하며 곤충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시사하고 있다.이상과 같이 곤충의 미션을 광의의 개념에서 보면 생육하고 번성하라(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응답으로 보인다. 단지 곤충 자신뿐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물의 생육과 번성을 지원하는 넓은 의미에서의 미션 수행으로 보인다.그럼 곤충 자신들을 위한 생육과 번성을 위한 협의의 미션은 어떻게 수행할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다시 한번 그들의 천부적인 재능, 울음소리에 귀 기울여 봐야 한다.곤충들은 그 울음조차도 ‘생육과 번성’을 위한 미션 수행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츠르르’ 소리를 내는 여치와 베짱이는 생김새가 비슷하다. 이들의 수컷들은 앞날개를 위로 들어 가슴 근육을 당겼다 늘였다 하며 날개를 비벼 소리를 증폭시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이들은 다른 수컷들보다 더 청량한 소리로 멀리 전달하려고 날개가 닳도록 비벼가며 경쟁하며 밤을 지새운다.귀뚜라미도 여치류와 같이 날개를 마찰시켜 소리를 낸다. 늦여름이면 풀밭에서 시끄럽게 울다가 가을이 익어가면 점차 사람이 사는 집 주변에서 울어 댄다. 가을이 다 지나 추운 겨울이 되면 집 안까지 들어와 드문드문 힘 다 빠진 소리를 낸다. 가을 내내 날개를 비벼 날개에 구멍이 나고 헐거워져 더 이상 매력적인 리릭 테너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더 이상 귀 기울이는 암컷이 없어 그 노총각 귀뚜라미의 임 타령 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다.여치류나 귀뚜라미류와 다르게 메뚜기들은 낮에 활동한다. 그들의 수컷은 여치류와 다르게 까칠한 돌기가 있는 뒷다리를 신속히 날개에 비벼가며 소리를 낸다. 이런 곤충들은 현 역할을 하는 다리에 날개가 쉽게 상처를 입는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여름 내내 우는 이유는 ‘생육과 번성’의 수행 외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다.수컷 곤충들이 때로는 날카롭고 강한 소리를 낼 때가 있다. 구애 활동을 할 때 다른 수컷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신사협정을 맺는데 이 거리가 좁혀지거나 구애 활동에 방해를 받으면 다른 수컷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경고를 하는 것이다. 개구리들도 다르지 않다. 개구리들은 밤에 단체로 모여 노래하며 암컷을 부른다. 수컷들이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경계하며 제창을 하면 이를 듣고 사방에서 암컷들이 호응하며 같이 울어 댄다. 비가 오면 더 즐겁게 노래한다. 노래 부르기 좋게 목청에 습도를 제공해 주고 피부로도 호흡하는 개구리에게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짝을 찾은 개구리는 결혼에 대한 찬가로, 반대로 짝을 못 찾은 개구리는 애가를 부르며 밤이 무르익는다.곤충들이 존재하며 살아가는 이유는 지구의 생존과 번영을 벗어나서 설명하기 힘들다. 심지어 곤충들이 자기 몸에 생채기를 내가며 노래하는 이유조차도 자신들의 결혼과 후손의 번성을 위해서이다. 이것을 진화론자들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진화론자들은 곤충의 짝짓기와 산란을 본능을 통한 생존과 진화 그 이상으로 설명하지 않는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귀뚜라미 노랫소리에서조차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결혼 명령을 듣는다. 그리고 그 작은 벌레가 이를 수행한다.벌레들이 부르는 구혼의 노래가 평화로운 자장가로 들리는 이유가 있다. 주파수 1000에서 1,0000헤르츠 소리의 규칙적인 리듬은 사람들에게 안정감을 주어 편안한 잠자리에 들게 한다고 한다. 흐르는 물소리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이 범주에 들어간다. 수컷 벌레들이 부르는 사랑의 세레나데가 남의 것 차지하기 위해 애쓰며 하루를 살다 겨우 잠자리에 드는 우리에게 잠을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치열한 생업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벌레의 노래가 그리 자연스럽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이런 구차한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인간이 존재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이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결혼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 명령을 온 우주가 수행하도록 생태계를 관리하고 돌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20년 지구의 날 50주년을 맞이하여 목회자를 대상으로 Christianheadline.com에서 지구의 온난화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 명령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무심함을 뚜렷이 알 수 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개신교 목회자들의 53퍼센트만이 지구의 온난화가 실제적이며 사람에 의한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일반인에 비해 지구의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관심이 적었다고 한다. 복음주의 교회 목회자(39%)일수록 그렇지 않은 목회자 (71%)에 비해 지구의 온난화와 인간의 책임에 대해 무관심함을 볼 수 있다. 보수적이고 복음적인 미국 교회의 정치적 지지를 받는 공화당의 많은 지도자가 지구의 온난화가 인간의 책임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 것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복음주의자들이 개인의 구원에 머무르는 신앙의 한계성을 복음주의 목회자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곤충들의 수가 지난 10년간 41퍼센트나 사라졌다. 산업화와 도시화를 위한 난개발로 대기, 수질, 토양이 오염되어 곤충들의 서식처가 사라지며 인간의 삶조차도 위협받고 있다. 개인의 구원이 실존적이지 못하면 그 존립의 근거가 편협하고 유치해 보인다. 타인의 가난과 고통, 약자의 눈물과 설움을 비켜서면 내 개인의 구원이 손가락질받기 쉽다. 인간의 잘못 때문에 자연이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데 인간 자신이 구원받아 만족하고 그친다면 내 구원은 자연에게 얼마나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까. 세상을 지으시고 보기 좋다고 하시며 계속해서 번성해 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지구를 살펴보자. 오늘도 귀뚜라미는 열심히 울어대며 하나님의 미션을 수행한다.
역학, 세상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창
기독교 세계관의 적용을 위한 세 가지 제안 3: 역학
by 김경호
2023-04-28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에서 역학dynamics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어떤 집단이든 그런 행위가 복합적이고 연속적으로 일어날 경우, 그 반복성 때문에 그것을 관행practices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 집단의 기본적인 사회적 관행들과 그런 관행들이 지닌 만연된 특징들이 그 사회의 구조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으며, 현대 사회 구조의 이런 측면이 우리의 분석 대상이 될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 나는 한 사회의 기본적인 관행을 가리켜 역학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리고 때로는 한 집단의 사회 제도들과 사회적 관행들로 구성된 이중 복합체를 가리켜 그 집단의 사회적 체제(혹은 질서)라고 부를 것이다.” 여기서 나는 관행 혹은 역학의 긍정적 의미와 작용뿐만 아니라 부정적 의미와 작용에 주목합니다. 따라서 나는 역학의 의미를 주로 부정적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실천할 때, 그 실천에 대해 저항하는, 개인이나 집단, 제도, 전통, 문화 등의 힘dynamics 또는 그 힘의 매커니즘mechanism을 의미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역학에 대한 적용을 위한 사례를 세 가지 차원에서 제시하고자 합니다: 신학적 차원에서 죄와 우상의 역학; 사회 경제 구조와 사회적 행위자의 차원에서 배제와 포용의 역학; 정치적 차원에서 권력의 역학. 죄와 우상의 역학 죄의 역학. 존 오웬John Owen은 죄의 역학을 잘 보여 줍니다. 먼저 죄의 목적은 신자 안에 지배권을 행사하는 데 있습니다. 이 지배는 동의를 기반으로 그 권리를 포기하고, 자발적으로 죄의 지배 아래로 들어갑니다. 이러한 죄의 지배의 정도는 전적인 지배와 부분적인 지배가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죄의 역학에서 나타나는 매커니즘은 적의enmity로부터 시작하여, 반감aversation과 대적opposition으로 나누어집니다. 반감은 태만, 싫증, 육욕, 형식적 의무 이행, 무관심으로 나타납니다. 반면에 대적은 속임과 강압으로 나타납니다. 야고보서 1:14에 이 속임과 강압이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의 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욕심”과 “이끌림”이라는 두 요소가 바로 “속임”과 “강압”에 해당합니다.우상의 역학. 리차드 미들톤Richard Middleton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순종하든지, 아니면 주님께 불순종하고 우상을 섬기든지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피조세계의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고는 그것을 신적 지위로 격상시킬 것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 신들의 특징은 원래 좋은 피조물인데, 우리가 궁극적인 성취를 염원하면서 그것들을 우상처럼 절대화하고 종교적으로 추구한 결과 우상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예들로 과학주의(전지), 기술주의(전능), 그리고 경제주의(물질의 풍요라는 구원)가 있습니다. 배제와 포용의 역학 사회경제구조의 역학. 먼저 사회경제구조에 나타난 배제와 포용의 역학이 있습니다. 사회경제 구조적 차원에서, 밥 하웃즈바르트Bob Goudzwaard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풍요와 빈곤의 인과관계를 배제와 포용의 역학으로 설명합니다.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서구 부유한 나라의 화폐들을 기반으로 한 풍요의 역학은 세계금융시장에 기인합니다. 서구의 금융시장은 폐쇄성을 통해 더 부유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배제의 역학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새로운 재산인 금융권에 닫혀 있고(새로운 재산의 배제), 서구의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에 아무런 제약 없이 진입하지만, 가난한 나라들은 서구의 높은 관세와 무역 장벽으로 인해 진입하지 못하며(진입의 배제), 서구의 새로운 희소성(신제품의 개발)에 의해 가난한 나라의 옛 희소성이 배제됩니다(희소성의 배제). 이런 배제의 역학은 곧 가난의 역학을 초래합니다. 이에 대해 하웃즈바르트는 포용의 힘을 제안합니다. 배제의 역학은 사실상 금융시장의 불안정성과 환경 문제로 인해 불안정한 토대에 있습니다. 따라서 하웃즈바르트는 사치보다 실제 필요를 향하는 내적 경제 성장으로 향해야 하며, 덜 요구되고, 덜 오염됨으로써 더 다양한 포용을 향해 나아가야한다고 제안합니다. 사회행위자의 역학. 다음은 사회적 행위자의 관점에서,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배제의 역학에 대해 자아가 타자와의 상호 의존관계를 벗어나 독립적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타자를 무시하고 쫓아내거나 또한 타자를 자아에 종속하고 동화시킨 것이라고 설명합니다(배제의 구성요소). 이러한 배제는 자신의 마음의 악을 제거하기보다는 세상에서 타자를 제거하려고 합니다(배제의 작동방식). 볼프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뒤틀린 셈법에 의한 죄의 만연성(죄 안의 연대)과 “선택의 여지가 없음”이라는 방어기제를 통해 작용하는 악의 연쇄 작용(배제의 힘)을 통해 배제의 역학이 나타난다고 설명합니다. 이에 대한 포용-화해의 역학은 가해자와 희생자(증오)의 ‘회개’; 복수의 회오리를 멈추기 위해 분노를 하나님 앞에 꺼내 놓음으로써 가능하게 되는 ‘용서’; 적대감을 넘어 사귐으로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 안에 ‘타자를 위한 공간 만들기’; 완전한 화해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단계인 ‘기억의 치유’를 제안합니다. 사랑과 정의의 역학; 진보와 보수의 역학 사랑과 정의의 역학. 정치적 차원에서 사랑과 정의의 역학과 진보와 보수의 역학이 있습니다. 먼저 힘의 작용에 따라, “사랑과 정의의 역학”에는 첫째, 악에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악이 번져가지 않고 무력해지며, 악이 악으로 드러나게 하는 무저항(디트리히 본회퍼), 악의 연쇄반응을 끊고 사랑의 힘으로 역시 악이 악으로 드러나게 하는 무저항(마틴 루터 킹), 그리고 비폭력을 넘어 비저항을 통해 원수에 대한 창조적 관심을 가지게 하는 무저항이 있습니다(존 하워드 요더). 둘째, 그 반대편에서는 프랑스 혁명의 기존체계를 인정하지 않고 전복시키는 혁명성으로 나타나며, 죄악의 상황이라는 판단 아래 나타나는 대항적 폭력이 있습니다(구스타보 구티에레즈). 셋째, 앞의 두 가지 힘의 작용을 종합한 견해로서, 개인과 친밀한 인간관계의 영역에서 사랑으로, 개인을 넘어 집단의 경우 정의, 즉 강제력에 의한 견제의 방법을 사용합니다(라인홀드 니버). 진보와 보수의 역학. 정치적 이념에 따라 “진보와 보수의 역학”이 있습니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설명에 의하면, 기독교 보수의 역학은 미국이 기독교 국가로 설립되었다는 신화의 역학에 의해, 미국이 세속화의 잘못된 길에 빠졌다는 분노의 역학으로 표출되며, 이 분노는 다시 행동으로 옮겨져, 정치적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그리고 이 정치적 참여의 성격은 친-공화당 성향과 지배와 영향력에 대한 열망과 야망으로 나타납니다. 기독교 진보의 역학은 동일한 패턴을 따라서 계몽주의의 유산과 프랑스 혁명의 자유, 평등, 박애라는 신화의 역학에 의해, 기독교 우파가 기독교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해를 끼쳤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수십 년 동안 자신들이 공적 영역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권력의 자리에서 밀려난 분노의 역학으로 표출되며, 이 분노 역시 행동으로 옮겨져, 정치적 성격을 지니게 됩니다. 헌터는 이런 점에서 기독교 좌파도 기독교 우파와 같이 동일한 정치, 권력의지, 참여의 틀, 방법, 스타일 면에서 비슷하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헌터는 양쪽 진영에서 리더십에 나타난 지위, 명성의 역학을 비판합니다. 지위를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배제하는 배제의 역학으로 나타나며, 리더가 엘리트적 방식으로 행동하려고 함으로써, 지도자의 이미지를 드러내고, 금전적 이익을 중요시하는 명성의 역학이 있음을 비판합니다. 여기서 짐 월리스Jim Wallis는 대안으로 좌파와 우파의 공통 토대로서의 “도덕 정치”를 제안합니다. 월리스는 기독교 좌파와 우파를 이념적으로 범주화하지 않고, 개인적 책임과 사회적 책임, 신앙과 공적 영역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좌파와 우파의 낡은 범주를 초월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초월은 좌-우파 정치인들이 공통의 기반을 위해 더 높은 기반인 도덕적 기반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초월은 정치인들과 같이 바람(여론)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월리스는 이 초월을 비난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불평의 정치가 아니라 예언자적 정치, 하나님의 정치, 도덕 정치,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라고 부릅니다. 변혁, 규범, 역학에 대한 아홉 가지 제안 변혁, 규범, 역학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각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보완되어야 할 요소들을 아홉 가지로 제안하고자 합니다.첫째, 변혁과 관련한 제안입니다. 제안 1-개혁주의 세계관의 목표는 “변혁”입니다. 제안 2-개혁주의 세계관은 성경적 동인(창조, 타락, 구속)을 가지고, 이 동인 안에서 “창조”(존재론)는 구속(인식론)보다 우선합니다. 제안 3-개혁주의 세계관은 “시대 상황”을 고려함으로써 발전합니다. 둘째, 규범과 관련한 제안입니다. 제안 4-개혁주의 세계관은 “성경적 규범성”을 가집니다. 제안 5-개혁주의 세계관은 “창조질서의 규범성”을 가집니다. 이때 2차 규범인 창조질서의 규범성은 1차 규범인 성경의 규범성에 연결되며, 서로 충돌할 때는 성경의 규범성에 종속됩니다. 제안 6-개혁주의 세계관은 개인과 집단, 또는 각 영역에서 “규범의 동시적 실천”을 지향합니다. 셋째, 역학과 관련한 제안입니다. 제안 7-개혁주의 세계관은 “역학”의 요소를 고려해야 합니다. 제안 8-개혁주의 세계관은 권위, 권력, 목적(이데올로기)이 규범을 “수단화”하지 않아야 합니다. 제안 9-개혁주의 세계관은 개인과 집단(제도-영역들)의 역학을 구분하고, 사회의 각 영역에서 “역학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라!” 나의 거인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였습니다. 이제 이 글을 통해 또 하나의 누군가에게는 작은 어깨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해 봅니다.
기독교세계관
역학
배제와포용
죄와우상
사랑과정의
교회를 분열시키는 네 가지 방법
열왕기상 12장 묵상
by Wyatt Graham
2023-04-18
세상에는 훌륭한 기업가와 비즈니스 리더가 많다. 그중에서도 스티브 잡스와 일론 머스크는 성공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들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어떤 면에서 솔로몬 왕과 비슷하다고 말할 수 있다. 솔로몬에게는 “자신만의 지혜”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다른 많은 사람처럼 지혜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는 문제가 있다. 지혜로운 솔로몬은 마음을 끝까지 지키지 않았다. 어겨서는 안 되는 많은 명령을 어겼다(신 17:14-20). 말(horses)을 늘이기 위해서 이집트까지 갔다. 수백 명의 이방인과 결혼했고, 아스다롯과 밀곰을 숭배함으로써 그릇된 길에 들어서는 마음을 방치했다. 그는 감람산에 그모스와 몰렉을 섬기는 산당까지 지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그에 관한 이야기는 금과 은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한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준다. 모세의 율법은 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금지한다. 하나님이 솔로몬의 왕국을 찢으신 이유이다. 그러나 그 비극은 그의 시대가 아닌 다음 세대에 일어났다(왕상 11:11-13).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원칙을 배운다. 1세대 리더들이 뿌린 씨앗이 맺는 비극의 썩은 열매는 해당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왕국을 다스릴 만한 솔로몬의 지혜가 부족할 때, 왕국은 산산조각이 난다는 사실이다. 열왕기상 12:1-24의 이야기는 왕국이 어떻게 무너지는가에 대한 것이다. 열왕기상 12:25부터 열왕기상 14장 끝까지 이야기는 이 무너짐이 어떻게 재앙으로 이어지는지를 보여준다. 분열은 파괴로 이어진다.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열왕기상 이야기는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하는 네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첫 번째, 전 세대의 지혜로운 장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새로운 교회로 오라. 가장 젊지만 나름 많은 경험도 가진 교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라. 그러나 교회 창립 멤버 또는 최소한 수년간 다닌 사람들의 말은 무시하라. 이게 바로 교회를 제대로 쪼개는 방법이다. 그러다 보면 실수가 너무 많아서 아예 회중 전체를 파괴할 수도 있다. 열왕기상 12장에서 왕이 된 르호보암은 부족한 지혜로 인해서 첫 번째 위기를 맞았다. 이집트를 떠난 여로보암은 한 무리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와서는 왕이 된 르호보암에게 도전한다(왕상 12:2-3).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왕상 12:4).르호보암은 결정하는 데 사흘이 걸렸다(왕상 12:5). 겉으로만 봐서는 현명한 것 같다. 그는 먼저 지혜로운 솔로몬과 함께 일했던 장로들과 상의한다(왕상 12:6). 그들은 현명한 조언을 한다. 여로보암의 요청에 “예”라고 말하라고 한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그 충고를 거절하고 젊은이들에게 간다(왕상 12:8-11). 그들은 한층 더 과격한 조언을 하는데, 백성들을 더 열심히 일하도록 몰아붙이라고 한다. 백성을 과하게 부리는 것은 왕국의 경제적 번영에 유리할 것 같다. 추상적으로 볼 때 최선의 통치 결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13절 말씀대로 가혹하기만 했다. 연로한 현자는 아무리 옳은 일이더라도 때로는 미루는 게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젊은이는 인내심이 부족하다. 그들은 르호보암에게 강하게 나가라고, 일을 완수하고, 가혹하게 통치하라고 부추겼다.르호보암은 아버지 솔로몬이 말을 들었어야 했다.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히지만, 거친 말은 화를 돋운다”(잠 15:1).가끔 이런 말을 듣는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성경은 도리어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말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엡 4:15). 진실이 없는 사랑은 감상주의에 불과하다. 사랑이 없는 진리는 가혹할 뿐이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만 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았다고 말할 수 있다.르호보암은 가혹할 뿐만 아니라, 무례하기까지 했다. 그는 “내 새끼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벅지보다 굵다”(왕상 12:10)고 말했다. 자, “새끼손가락”과 허벅지 또는 문자 그대로 “허리 부분”은 르호보암의 생식기를 가리키는 조잡한 남성형 완곡어법이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다. 왕국을 살리겠다고 젊은이들이 열정에 불타고 있다. 그들은 솔로몬 치하 때보다 백성이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조언한다(왕상 12:10-11). 그들은 또한 거칠고 무례한 언어를 사용한다. 바보처럼 행동하고 있다. 사실 르호보암은 그렇게 젊지도 않았다. 그는 마흔한 살이었다(왕상 14:21).예상했던 일이 일어났다. 왕국이 분열되었다. 교회가 갈라졌다. 아무리 기술적으로야 르호보암이 옳았다 하더라도, 여로보암이 이집트에서부터 올라온 이유는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기 위해였음이 분명하고, 르호보암의 대처는 왕국의 분열이라는 결과로 이끌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께서 예언하신 그대로이다(왕상 11:11-12, 14-40).두 번째, 잘못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말라.르호보암은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인해 분열된 왕국을 목격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해결책을 향해 달려가지만, 우리가 아는 한, 그는 장로들에게 조언을 구하지 않았다. 대신에 아도람을 이스라엘 장막으로 보낸다. 아도람은 이스라엘의 강제 노역장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싫어하는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자,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날까? 르호보암은 이제 말뿐 아니라 아예 행동으로 애초의 정책을 고수했다. 그는 핵심 인물을 보냈고, 백성은 보란 듯이 그를 돌로 쳐 죽였다(왕상 12:18). 목숨이 위험해진 르호보암은 온 이스라엘이 모여 있던 세겜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도망간다(왕상 12:1).자, 당신이 지금 교회에서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고 치자.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지금이야말로 화해를 위한 최고의 시간일 수 있다. 양 당사자가 의견을 경청하고 서로를 인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타협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나 젊음의 패기로 가득하고 언젠가 왕이 될 거라 믿는 사람일수록 어떤 타협도 믿지 않는다. 세상에는 오로지 자신만 옳을 뿐 다른 누군도 결코 옳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진리의 전사로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성령의 은사를 주신 예수님의 의도를 무시하고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일 뿐이다. 누군가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손이나 발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어쩌면 그리스도의 몸에 달린 귀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에는 내가 가장 똑똑하고 최고이며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식으로 스스로를 미묘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배우는 교훈은 재주 많은 죄인에게도 여전히 구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르호보암은 애초에 현명한 조언자를 의지했어야 했다.상대방의 말을 들을 때까지 누구나 자신의 견해에 확신을 갖기 마련이다. 솔로몬은 그런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똑같은 일은 교회에서도 일어난다. 그리고 신학에서도 발생한다. 목회자가 신학교에 다니고, 주석서를 읽고, 다양한 책을 읽고, 또 친구와 성경과 신학을 주제로 토론하는 이유는 나 자신의 명철에만 의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목회자에게만 해당하지는 않는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다. 물론 당신이 이 세상 최고의 아버지 또는 어머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장담할 수 있다. 당신과 나는 모두 다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기에 인생은 너무나 크고 다양하다. 르호보암은 아도람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냄으로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그는 듣고 배웠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 왕국을 쪼개고 말았다. 세 번째,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하는 대신 주변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르호보암이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자, 그곳 백성이 그를 왕으로 삼았다(왕상 12:20). 여기서는 두 가지가 문제가 된다. 첫째, 오직 유다만이 그의 왕권을 확증한다. 다른 부족은 그렇지 않다. 둘째, 그는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 사울, 다윗, 솔로몬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르호보암은 그렇지 않았다.기름부음이 없다는 사실은 르호보암이 옛길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보여주는 여러 사례 중 하나이다(렘 6:16-17). 르호보암은 심지어 이집트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같다.열왕기상 9장을 보면, 가나안 사람을 노예로 삼은 솔로몬은 마치 이집트인처럼, 그리고 게셀에서 가나안족을 멸망시킨 파라오는 마치 이스라엘인처럼 행동했다(왕상 9:16, 20-21; 신 7:1-2; 삿 1:29). 르호보암도 이와 비슷한 반전을 행동으로 반복한다.열왕기상 12:4에서 여로보암이 묻는다. “임금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우셨습니다. 이제 임금님께서는, 임금님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지워 주신 중노동과 그가 우리에게 메워 주신 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우리가 임금님을 섬기겠습니다.” 이건 마치 출애굽기 5장에서 파라오에게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해 사흘 휴가를 요청하는 모세의 말처럼 들린다. 그러나 파라오는 이스라엘 민족이 노동에서 쉬어서는 안 된다며, 모세의 요청을 거절한다(출 5:5). 바로는 심지어 그들의 짐을 더 무겁게 만들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더 힘겨운 일을 시키고, 그 일만 하게 하여서, 허튼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하여라”(출 5:9).모세가 안식과 예배를 요청한 것처럼, 여로보암도 솔로몬이 이스라엘에게 부과한 가혹한 짐에서 벗어나 안식을 구한다(왕상 12:4). 그러나 르호보암은 파라오처럼 대답한다. “내 아버지가 당신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웠소.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보다 더 무거운 멍에를 당신들에게 메우겠소. 내 아버지는 당신들을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였지만, 나는 당신들을 쇠 채찍으로 치겠소”(왕상 12:14).르호보암이 이집트 사람처럼 병거를 타고 있는 사이에 그는 핵심 간부 아도람을 이스라엘에게 보낸다. 솔로몬은 이방 나라 중에서도 특히 이집트의 방식에 거의 전적으로 굴종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이방 나라 사람처럼 살게 된 건 따라서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피터 라이하트(Peter Leithart)는 다음과 같이 통찰력 있게 논평한다. “솔로몬은 말과 병거를 얻기 위해서 이집트를 의지하고 이방 열국의 신들을 숭배하며, 그의 왕국을 이집트의 폭정으로 변모시킴으로 백성이 해방을 갈구하도록 했다. 결국 여로보암은 백성이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광야로 인도한다”(1 & 2 Kings, 2006:91). 그리고 열왕기상 12장에 기록되어 있듯이 여로보암은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행한 것처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든다(왕상 12:28).르호보암은 파라오처럼 행동한다. 금송아지를 만든 여로보함은 모세 또는 아론의 역할을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게 다 엉망진창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그만 이집트처럼 되어버렸다. 나는 사실 르호보암이 왕이 되기 위해서 예루살렘이 아닌 세겜에 모인 이유도 궁금하다(왕상 12:1). 내가 아는 한, 그때까지 거기서 왕이 된 유일한 인물은 아비멜렉이다(삿 9:6). 아비멜렉은 난폭하고 사악하며, 여자가 그의 머리에 떨어뜨린 돌에 맞아서 죽는다. 아마 우리는 이 장소에서 무언가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다 떠나서,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라도 이곳은 가야 할 장소가 아닌 것 같다.르호보암은 그곳을 떠나 그를 따르는 유다 족속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서둘러서 왕이 되어야 했다. 나머지 부족은 그를 따르지 않는다. 네 번째,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아무리 자신감에 넘치는 리더라도 끊임없는 실패로부터 배울 수 있다. 르호보암은 이 이야기에서 딱 한 번 옳은 일을 한다. 열왕기상 12장에 한 선지자가 나타나 여로보암과 전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이제 그는 예루살렘으로 도피한 후 이스라엘을 되찾기 위해 18만 명의 군인을 소집한다(왕상 12:21). 다시 말하지만, 그는 빠른 결정을 내린다. 그러나 곧 멈춘다. “하나님의 사람”인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르호보암에게 말한다. “나 주가 말한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내가 시킨 것이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아라. 너희의 동족인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저마다 자기 집으로 돌아가거라”(왕상 12:24).이 시점에서 르호보암과 18만 명이 순종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아마도 18만 명의 유다 족속이 모두 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건 르호보암이 싸움을 강요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본문은 24절에서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고”라고 말한다. 결코 르호보암이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고 쓰여있지 않다. 따라서 ‘그들’이라는 복수형이 의미하는 것은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르호보암이 단순히 그들 가운데 있었기에 자신이 원하는 바를 밀어붙일 수 없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한다.우리는 이 모든 점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스마야는 이 모든 것이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왕상 12:24). 우리는 이미 열왕기상 11장과 열왕기상 12:15에서 요약한 내용을 통해 이 점을 알고 있다. “왕이 이렇게 백성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일을 그렇게 뒤틀리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시켜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려 하심이니라.”피터 라이하트는 여기에서 사용된 “사건의 전환”이라는 문구에 주목하는데, 이것은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여호와(YHWH)의 변형(twist)”으로 번역될 수 있다(Leithart, 1 & 2 Kings 2006:94). 그리고 그게 바로 모든 일의 실체이다. 앞선 열왕기상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기서 일어날 일을 어떻게 예언하셨는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그러나 본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를 보내신 바로 그 시점에만 개입하셨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주체가 항상 우리 자신인 상황에서, 이 본문의 경우에는 자신의 몰락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의 분열과 멸망까지 초래한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놓고 볼 때, 하나님께서 미래를 아시고 심판을 예언하신다는 사실을 너무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이리저리 꼬이기 마련이다.열왕기상 12장과 13장은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르호보암과 이어지는 여로보암의 악행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파괴적인 요소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솔로몬은 잠언 21:1에서 이렇게 말한다.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 고작 몇 분에 불과한 짧은 설명으로 하나님의 섭리를 제대로 이해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가장 쉽게 얘기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완벽하게 아신다. 처음부터 끝을 다 아신다.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동시에 우리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과정을 주관하신다. 우리가 가진 죄성을 그토록 끔찍하게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 비난할 대상은 우리 자신 외에는 있을 수 없다. 비난할 다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문제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르호보암은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했다. 그는 왕국을 나누었다. 솔로몬은 거기에 못난 아버지로서 기여했다. 성경은 죄가 삼사 대까지 내려온다고 말한다(출 34:7). 죄는 가족을, 심지어 왕족까지도 병들게 한다. 죄의 여파는 세대에 따라 다르다. 당신은 악을 배운다. 그리고 악을 행한다. 악은 감염되고 부패하고 또 강력하다. 악은 삶을 나쁜 방향으로 바꾼다. 르호보암과 18만 명이 스마야의 말을 듣지 않았다면 왕국은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으로 멸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파멸을 막으셨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가능한 역사였다. 그 결과 다윗의 씨, 예수 그리스도가 돌아올 때 하나님의 왕국에 또다시 새 생명이 불어넣어지도록 예비하셨다. 할렐루야!교회를 하나로 만들고 강화하는 방법열왕기상 12장은 교회를 분열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법을 보여준다. 누구라도 12장이 보여주는 단계를 쉽게 따를 수 있을 것 같다. 모든 이야기의 흐름이 자연스럽기만 하다. 그러나 잠시만 시간을 내어 질문해 보자. 어떻게 해야 우리는 반대로 교회를 더 하나로 만들고 강화할 수 있을까?첫째, 이전 세대 현명한 장로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물론 나는 이런 조언이 모든 상황에 다 적합하지 않다는 건 안다. 아예 이전 세대의 현명한 장로가 없을 수도 있다.그렇더라도 젊은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이전 세대의 신학과 사상을 알아야 한다. 교회 역사와 신학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전 세대의 현명한 장로들을 존경하는 방법일 수 있다. 예수님이 직접 교회를 세우실 것이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을 때, 그건 교회가 1517년이나 1956년에 시작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성장시키신 2천 년 역사의 성령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둘째, 실수로부터 배우자. 아무 생각 없이 어깨를 쟁기에 대고 미는 것은 쉽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밀면 어떻게 될까? 바위에 걸리면 돌아서야 한다!셋째, 주변 문화 대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를 받자.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자. 그러면 당신은 성장하고 또 성장할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그분에게로 묶는다. 히브리서 4:12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동력이 있으며 어떤 쌍날의 칼보다 더 예리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말한다. 말씀이 살아 있다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말씀이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천 년 전에 쓰인 책, 열왕기상의 경우 무려 삼천 년 전에 쓰인 책이 당신의 마음을 형성하고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면, 그 누구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가 누구인가? 전 세계에 걸쳐서 흩어져서 포로가 된 우리를 그의 몸으로 모으기 위해 오신 나사렛 예수님이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는 열두 사도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결합하신다. 자신의 몸을 통해서, 그는 열국에 의해 파괴된 하나님의 성전을 다시 세우신다. 모든 부족이 연합한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할렐루야!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그분의 영은 우리를 하나로 묶으신다. 우리는 모두 다 아버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었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교회 분열을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다. 성도의 하나됨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명명하고 정의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모든 교회가 다 함께 그리스도의 한 몸으로 하나됨을 고백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은 복음이 가져다준 축복이자 능력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용서받고, 거룩해지고, 영화롭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모두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고 우리는 그의 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순간 교회의 연합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연합보다 더 큰 연합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연합은 복음의 문제이다.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함께 거하신다. 연합은 결코 목표가 아니다. 당연한 것이다. 종교 개혁가는 분열을 이단만큼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분열을 피해야 한다. 오직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써만 우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것만이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신 분과 직접 관계를 맺는 길이다. 거기에는 연합이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이시고, 우리는 몸이다. 원제: Four ways to Divide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솔로몬
지혜
열왕기상
여로보함
르호보암
교회분열
교회의하나됨
[거룩한 7일간의 도전_7일] 주님 거기 안 계신다!
by 최성은
2023-04-09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태복음 28:1-20)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예수님을 증오하는 사람들부터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자칭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서 내려오지나 않을까 기적을 기대하는 호기심에 가득 찬 군중까지,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주님은 분명히 돌아가셨다. 열한 제자들은 슬픔에 잠겼다. 주님을 사랑했던 여인들도 깊은 비통에 빠졌다. 그런데 여인들의 믿음이 더 깊었던 것일까? 여인들은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시신이 안치된 무덤을 찾아갔다. 십자가 사건 후 3일째 되는 날, 지금의 일요일이었다(마 28:1).사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찾아간 여인들의 믿음은 대단한 것이다. 제자들도 찾지 않는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온 것을 보면 주님이 부활하시지 않았다고 해도 여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믿음이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가르쳐 주신 생명의 말씀, 예수님이 보여 주신 기적, 예수님에게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그들에게 보여 주셨던 사랑…, 이런 모습들만으로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은 것이다.그렇지만, 놀랍게도, 사실은 누구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의 부활을 기다리거나 실제로 믿은 사람은 없어 보인다. 여인들이 달려가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제자들은 그 여인들의 말이 “허탄한 듯이 들려” “어처구니없는 말”(새번역)로 들려 믿지 않았다고 누가는 기록한다(눅 24:11).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명대답을 남긴 베드로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못 했다. 왜 그랬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그토록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자기 생명처럼 좋아했던 사람들조차도, 살아생전에 예수님이 부활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 말씀을 기억하지 못했을까?제자들은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 주시면서, 그들이 (가롯 유다만 빼고) 이미 목욕을 했다는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이 예수님을 통해 이미 구원받았음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한 여인들도 물론 예수님을 굳게 믿는 참다운 신앙인들이었다.그런데도 예수님을 그토록 사랑하고 가까이 있었던 그들 가운데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이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두개인의 전통을 따른 사람들을 빼고 유대인들은 대부분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나사로의 여동생 마르다는 자기 오라버니가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예수님께 고백했다.그러한 믿음이 있는 그들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실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이상하지 않은가? 왜 그럴까?죽음의 권세의 참혹함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신은 죽었다”고 말했는데, 니체의 이 말의 의미는, 신이 정말 죽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인간의 고통에도 함께하시지 않는 하나님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항변이었다. 니체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면서 당하신 고난을 만나보지 못한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니체는 삶에 대한 절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니 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사람도 오직 인간 자신뿐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니체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비참한 고통보다도 더 무서운 지옥의 권세가 임하는 고통이었다. 십자가를 목격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주님이 짊어지신 십자가의 무게 때문이었다. 그들은 지독한 죽음의 권세를 눈앞에서 똑똑하게 목격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맞으신 죽음은 인간의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는 참혹한 죽음이었다그들이 본 십자가에는 온 인류가 지은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고통스럽고 아주 처참하게 돌아가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비참하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은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버림받은 예수님의 모습, 철저하게 저주받은 예수님의 모습,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예수님의 모습, 살려 달라고도 외치는 예수님의 모습, 그것은 우리의 모든 형벌의 모습이었다. 그 십자가의 무게는 감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단순히 육신이 고통받는 무게가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죄의 무게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모든 사람을 사랑한 무게만큼,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신 죽음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그래서 비록 마지막까지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조차 부활에 대한 소망을 생각해 내지 못하였다.코미디에 불과한 ‘사탄의 승리’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한쪽에선 대형 파티가 벌어졌다. 사탄은 잔치를 크게 벌이며 큰소리로 웃고 있었다. 사탄은 정말로 모든 죽음의 권세를 동원하여 예수님을 쓰러뜨리기를 원했는데, 그 꿈이 이루어진 날이기 때문이다.멜 깁슨이 감독한 영화 ‘패션’을 기억할 것이다. 피를 흘리며 고통스럽게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군중 가운데 바라보는 섬뜩한 모습 하나가 출현한다. 핏빛 없는 얼굴, 두건을 쓴 어두운 얼굴이 예수님을 희한하게 비웃고 있다. 그렇다. 사탄은 예수님 탄생부터 줄곧 어두움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예수님을 파괴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리고 마침내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승리를 외치며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이게 얼마나 우스운 코미디인지 아는가? 왜 그런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면 실은 사탄은 완전히 패배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부활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보다 한 단계 뛰어난 영의 존재인 사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기뻐하고 자기가 다 이겼다고 믿는 것은 무슨 뜻인가?그렇게 예수님을 죽여도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면, 사탄은 그런 부질없는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신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다 안다. 그러함에도 사탄이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었던 최대의 약점은 바로 사탄은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믿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니, 꿈도 못 꾸었다. 그것이 이 땅에 속한 무덤의 세계의 한계이다.공중 권세 잡은 자, 어둠의 권세자, 사탄이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것이 있다. 생명의 존재가 무엇인지, 사랑의 존재가 무엇인지, 용서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결코 사탄은 알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목숨까지 다 내어 주는 희생이 무엇인지, 그 무서운 죽음의 권세보다 강한 그 십자가의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신을 배신한 인간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사탄은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이다.왜? 사탄은 무덤에 속한 존재이기 때문이다!!!그렇기에 그 죽음의 권세의 핵폭탄을 짊어 지시고 돌아가시는 예수님을 바로 눈앞에서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아무리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다시 살아나실 수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그만큼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상상을 초월했다. 광야의 요한은 십자가에 수난당하실 예수님의 고난을 예언하며 한마디로 표현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그것이 무덤의 권세이고 죽음의 권세이다.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오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때에무덤을 찾은 여인들은 기가 막힐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랬으면서도 그들은 예수님을 찾아왔다. 신앙에 있어서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주님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붙들고 있어라! 그러면 하나님의 때를 만난다.부활의 기적여인들이 무덤을 찾아올 시점에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천사가 번개와 같은 형상으로 하늘로 내려와 지진이 일어나고 그 여파로 무덤의 돌을 굴려 내었다. 그리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위엄 때문에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은 죽은 사람처럼 움직이지 못하고 공포에 질려버렸다(마 28:2-4).천사들을 본 여인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다. 그때 천사들은 아직 십자가의 공포와 천사를 만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들을 이렇게 위로한다(마 28:5).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두려워 말라, 무서워 말라.” 우리가 절망과 공포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포해 주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두려움 가운데 거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 천사들은 여인들에게 예수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다고 일러 준다. 그가 늘 말씀하시던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일깨워 준다(마 28: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 그는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 이 한 문장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평생토록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누가도 동일하게 이야기한다(눅 24:5-8). 여자들은 두려워서 얼굴을 아래로 숙이고 있는데, 그 남자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너희들은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아라. ‘인자는 반드시 죄인의 손에 넘어가서, 십자가에 처형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고 하셨다.” 여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회상하였다.천사는 두려워하는 여인들에게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찾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사건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느냐며 격려한다. 그리고 그때야 비로소 여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낸다. 그리고 여인들은 천사의 권유대로 무덤이 있는 동굴 안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만 예수님께서 그냥 쓱 바로 빠져나가신 것처럼 있던 그 자리에 있다!(요 20:6-7). 이제 천사는 부활의 증거를 보여 준 후에 이렇게 도전한다(마 28:7).그리고 빨리 가서 제자들에게 전하기를, 그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그들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니, 그들은 거기서 그를 뵙게 될 것이라고 하여라. 이것이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이다.마태가 전해주는 천사의 말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1. 무서워 말라2. 그가 여기 계시지 않는다.3.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4. 그가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다.5. 가서 증언하라.천사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여인들을 위로할 뿐만 아니라,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으니 이제는 무엇보다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명령한다.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이제 내가 삶 가운데 해야 할 사명이 생길 때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내가 무덤에 먼저 간 것 같고, 내가 십자가에 먼저 간 것 같고, 내가 갈릴리로 먼저 간 것 같지만, 주님은 늘 우리보다 먼저 가서 계신다.기억하라! 주님은 나의 고통보다 먼저 십자가를 경험하셨고, 나의 죽음보다 먼저 죽으셨다. 그리고 가장 희망이 되는 것은, 나의 부활보다 먼저 살아나셔서 갈릴리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여인들은 큰 두려움과 큰 기쁨이 교차했다. 그러나 여인들은 더 이상 빈 무덤에 머물지 않았다. 그들은 지체하지 않았다. 삶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걷지 않았다. 그들은 뛰었다. 이 아줌마들은 한걸음에 갈릴리로 뛰었다(마 28: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그리고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여인들을 만나 주셨다(마 28:9-10). 그런데 갑자기 예수께서 여자들과 마주쳐서 “평안하냐?” 하고 말씀하셨다. 여자들은 다가가서, 그의 발을 붙잡고, 그에게 절을 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 그 여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무서워하지 말아라. 가서, 나의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러면, 거기에서 그들이 나를 만날 것이다.”지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영광을 안게 되었다. 얼마나 놀라고 기뻤을까?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나는 그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발생할 만한 사건들을 늘어놓았다. 부활이 정말 없다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헛것이요,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가 다 헛된 것이요,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미련하고 불쌍한 자일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부활을 믿지 않는 것처럼 비참한 인생은 없다.무덤에서 부활을 찾으려는 세상의 헛된 노력세상이 살아 있는 것 같고, 영원히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장소 같지만, 세상은 늘 무덤에서 생명을 찾으려고 하는 허망한 짓을 한다. 무덤은 이 땅에 있는 것들이 잠시만 존재하는 것을 상징한다.과학과 의학은 생명체를 창조하려 한다. 그러나 과학과 의술은 피 한 방울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헌혈을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식과 논리를 가지고도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없다. 세상의 물질과 권세는 생명을 연장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물질과 권세는 오히려 영생을 방해할 뿐이다. 그것은 다 무덤에 속한 것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셔서 우주의 역사의 막을 내리시기 전까지는 빈 무덤에서 예수님을 찾으려는 노력은 계속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빈 무덤에서 영생을 찾으려고 하고, 빈 무덤에서 능력을 찾으려고 하고, 빈 무덤에서 부활을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으신다. 주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상징하는 무덤에 더 이상 계시지 않으신다. 수많은 천국 환송 예배를 치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유가족들도 가족같이 지낸 교인들도 사랑하는 고인의 육신의 얼굴을 보며 하염없이 슬퍼한다. 누구에게나 너무도 당연한 슬픔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고인은 더 이상 그 슬픔에 계시지 않는다. 무덤 앞에서 과거의 추억이 생각나고 다시 말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슬픔 때문에 그렇지, 사실 이미 고인의 영혼은 거기 계시지 않는다. 믿는 자의 영혼은 죽음과 동시에 이미 주님 품에 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주님 품으로 먼저 보낸다. 우리는 거의 매주 그런 천국 환송 예배를 드린다. 그러나 간절히 격려하기는 이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을 무덤에서 찾지 마라. 무덤은 죽음을 뜻하고 소망이 없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덤을 만들어 돌아가신 고인을 기념하며 함께 모여 추억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믿는 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한다.부활의 의미우리 주님이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사는 삶이 아니다.그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부활이다. 그 영생은 또한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권세에 종노릇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 이상 어두움과 혼돈과 아픔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다. 아픔과 슬픔과 거짓도 그 어떤 어둠이나 죄에 권세가 근접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함께 왕 노릇 하게 되는 것이다.주님은 우리를 빛 가운데로, 소망 가운데로, 승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위해 어둠의 권세, 죽음의 권세,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주님은 우리의 죗값을 다 치르셨고, 또한 영생의 복락을 누리게 하시려고 부활하셨다.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내일을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고, 주의 복된 이름을 늘 찬송할 수 있고, 영원한 구원을 확신할 수 있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다.주님의 부활이 있기에, 죄와 사망에 대한 싸움에서 이길 수 있고, 시련의 때에도 담대할 수 있고, 하나님과 놀라운 평화를 가질 수 있고, 소망을 가지고 요단강을 건널 수 있고, 천국에서 주님과 영원히 살 수 있다.주님은 살아 계신다. 빈 무덤에 계시지 않으신다. 세상의 썩어질 허무로 점철 지어진 빈 무덤에서 주님을 찾지 말라! 갈릴리로 달려가자. 거기서 주님을 만나자!
부활
빈무덤
사탄의승리
죽음의권세
[거룩한 7일간의 도전_6일] 용감하게 행동하라
by 최성은
2023-04-08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태복음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성경에는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낸 두 사람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고, 또 하나는 니고데모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고, 세리 마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을 중심으로 이야기한다.아리마대 요셉을 보기 이전에 먼저 그의 친구인 니고데모를 살펴보자.니고데모의 이름은 요한복음 3장에 처음 등장한다. 그는 유대 종교 지도자 그룹 중 가장 세력이 강한 바리새파의 일원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평신도 그룹으로 당시 부유한 귀족 상인들과 경제를 이끄는 사람들 가운데서 유대교의 전통을 철저히 지키는 보수파 엘리트 그룹이었다. 그 일원인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리고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어떻게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질문한다. 평생을 유대 종교 지도자로 살았으나 니고데모는 영생을 얻고 천국에 가는 법을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너무도 답답하고 공허한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보려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법을 가장 쉬운 말로 풀어 니고데모에게 설명해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에게 바로 이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그런데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 나눈 이 흥미진진한 대화는 요한복음 3장에서 결말 없이 끝나버린다. 요한은 니고데모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응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서 스토리가 이렇게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 니고데모의 반응이 없이 끝났을까? 왜 요한은 더 설명을 안 할까?그런데 디고데모가 요한복음 7장에서 다시 등장한다. 사람들 사이에서 예수님을 두고 “그가 참 선지자다. 아니다”를 두고 격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리고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에도 심각한 논쟁이 있었다. 7장 서두에 보면 예수님은 갈릴리에 주로 계셨다. 유대로 가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논쟁은 예수님에게 더욱 불리한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하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앞에 예수님을 변호하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 중에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요 7:50). 그렇다. 바로 니고데모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니고데모의 응답을 여기서 보여준다. 이제 니고데모는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겁도 없이 예수님을 변호한다. “우리의 율법으로는,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거나, 하지 않고서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오?”(요 7:51, 새번역) 이 말이다: 어떻게 말만 듣고 사람을 판단하느냐? 그의 행한 열매들을 확실히 알고 하는 이야기냐? 우리가 믿는 율법이란 것이 겨우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그런 유치한 것이냐? 그러자 동료 바리새인들이 니고데모에게 말한다. “당신도 갈릴리 사람이오? 성경을 살펴보시오. 그러면 갈릴리에서는 예언자가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요 7:52, 새번역).요한은 니고데모가 앞서 예수님과 나누었던 대화의 결론을 그의 단순한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보여준다. 니고데모의 이러한 행동은 그의 삶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본질적인 변화가 있음을 보여준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이미 대부분이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다. 그런데 니고데모는 자신이 종교 국회의원이고 바리새인임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회적 흐름 앞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말을 당당히 선언한 것이다. 아직 다 드러내놓고 하지는 못하지만, 니고데모는 서서히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가고 있다. 조금씩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예언하신 대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배경으로 예수님을 사모하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도 니고데모처럼 드러내놓고 예수님을 따르지는 못했지만, 늘 옆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흠모했던 사람이다.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십자가 사건)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요 19:38). 아리마대 요셉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부자였다(마 27:57). 마가는 그를 “존귀한 공회원이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막 15:43)라고 기록한다. 누가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눅 23:50-51)이라고 기록한다. 아리마대 요셉은 산헤드린의 공회원이지만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결정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마태는 “그도 예수의 제자”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적극적으로 예수님을 변호하고 “내가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드러내놓고 다니지도 않았다. 니고데모와 비슷한 데가 많다. 신중하고 천천히 변화되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었다. 동료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드러내놓고 자신의 신앙을 지키지 못했다. 저명한 신학자 윌리암 거날(William Gurnall)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토록 많이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그만큼 적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후자의 두려움이 전자의 두려움을 치유한다. 사람이 당신을 겁나게 할 때는 하나님의 진노를 향해 당신의 생각을 돌려라.”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맞서 싸우거나 유대인들 앞에서 정면으로 맞서 신앙을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예수님의 죽음 앞에 드디어 용기를 내었다. 성경은 “이 일 후에”라고 기록하여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후에 변화되었음을 알려준다. 요셉은 당돌하게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했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해서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삼았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 장례를 치르려고 한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과 로마 군인들이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반감을 생각한다면, 요셉의 이 행동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더군다나 예수님의 시체를 받아서 장사지낸 동굴 무덤은 바로 요셉의 소유였다. 나중에 유대인들에게 보복당할 수도 있는 그런 일이지만, 이제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놓은 것이다.그런데 여기서 아리마대 요셉의 친구가 한 사람 더 등장한다.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요 19:39).앞에서 말한 그 니고데모다. 어떻게 이 두 사람이 아는 사이인지 성경은 말하지 않지만, 이 두 사람은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고 친구가 된 것 같다. 니고데모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의기투합하여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 지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예수의 시신을 모셔다가, 유대 사람의 장례 풍속대로 향료와 함께 삼베로 감았다”(요 19:40, 새번역). 몰약은 시신이 급격하게 썩는 것을 방지하고, 침향은 시신에서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을 방지했다. 몰약과 침향의 값어치는 금을 넘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값진 것이었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가져온 것도 바로 이 몰약이었다성경은 니고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의 무게를 일부러 자세히 기록하는데, 예전 성경은 “백근”으로 기록하고, 개역개정은 예수님 당시의 로마 측량 단위로 백 리트라라고 기록한다. 1 리트라는 무게가 326그램이므로 100리트라는 33킬로그램 정도인데, 베다니에서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용한 나드 한 근의 100배 분량이다. 나드 한 근은 노동자 1년치 삯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을 지금의 값어치로 다 환산하는 것은 무리지만, 노동자 한 사람의 일 년 치 임금을 3천만 원으로 쳐서 계산해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장사 지내기 위해서 가져온 향수와 몰약의 양은 무려 30억 원의 값어치로서 한 나라의 왕을 장례 치르고도 남을 양이다. 노동자 100명의 1년 월급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니고데모의 전 재산일 수 있다. 니고데모가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몰약과 침향을 가져왔는지도 모르겠다. 바리새인인 니고데모와 산헤드린 공회원인 요셉은 이제 더 이상 은밀한 제자가 아니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용기를 내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신을 빌라도에게 요청하고, 나아가 자신의 땅과 무덤을 기꺼이 예수님을 위해 헌신했다. 니고데모는 자신의 전 재산일 수도 있는 몰약 100근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렀다.이 두 사람은 의심 많고 은밀한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용기를 내어 아무도 찾지 않고 돌아보지 않는 예수님의 찢긴 시신을 품에 안은 채 장사를 지내고 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도 다 도망간 마당에 은밀하게 자신이 제자인 것을 숨겨온 그들은 오히려 자신을 드러내어 주님께 헌신하고 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까지 가장 외로운 바로 그 시간, 늘 은밀하게 예수님을 사모하던 이 두 제자는 드디어 주님 곁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종려 가지를 들고 환호할 때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예수님이 버려졌을 때 용기를 내었다. 니고데모와 요셉은 향유와 몰약을 예수님 시신에 바르고 세마포로 싸매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가시 면류관 쓰셨던 예수님의 머리, 태장과 채찍에 맞아 온몸이 찢기고 부서진 몸, 옆구리에 난 창 자국, 구멍이 난 손과 발에 못 자국을 보면서…. 이렇게 가까이서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사람은 이 둘뿐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사지내며 예수님께서 전에 그에게 하셨던 그 말씀을 눈물로 깊이 묵상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니고데모를, 아리마대 요셉을 십자가에 돌아가실 만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내어 주셨으니, 이스라엘의 율법사야, 선생아!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시려는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단다.”예수님과 마음 터 넣고 선생님과 제자로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은 없지만, 요셉과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시신을 장례 지낸 용감한 사람으로, 또한 사랑을 행동으로 옮긴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들로 영원히 우리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헌신이 진정한 섬김이 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그리고 그다음으로 우리는 그 무덤 가까이에서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두 여인을 발견한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다. 예수님의 시신을 데리고 가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를 몰래 따라온 것이다. 두 여인은 이 두 남자가 예수님의 제자인 줄 꿈에도 모르고 있다. 어쨌든 이 여인들은 이렇게 예수님을 열심히 쫓아다니더니, 결국 이틀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인류 역사상 최초로 부활을 목격한 증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또 한 부류의 “용감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대제자장들이다. 예수님을 그렇게 잔인하게 십자가에서 죽이고도, 그들은 아직 안심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빌라도를 찾아갔다. “각하, 세상을 미혹하던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에 사흘 뒤에 자기가 살아날 것이라고 말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사흘째 되는 날까지는, 무덤을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혹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훔쳐 가고서는, 백성에게는 ‘그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번 속임수는 처음 것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마 27:63-64, 새번역).그리고 빌라도도 이것을 합당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에게 잘 훈련된 로마의 병사들을 빌려주었다. 악인들은 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언제든지 다시 하나가 된다. 그들은 로마의 군인들과 함께 동굴 무덤에 큰 돌을 굴려서 막아 놓았다.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고이 장례 치르기 위해 그 만신창이가 된 예수님의 몸을 달라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은 시신을 지키려고 빌라도를 찾아갔다. 둘 다 생각한 대로 행동했다.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것을 우리는 “용감하다”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생각은 하는데 행동에 옮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두 부류는 생각하고 믿는 대로 행동했다. 그런데 문제는 선택이 달랐다. 한 부류는 악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고, 또 한 부류는 선한 일을 계획하고 행동에 옮겼다. 앞의 악한 부류의 사람들도 ‘이 예수가 진짜 메시아일 수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순간순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얼마나 “용감한” 행동인가? 인류 역사는 늘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용감하게 실천에 옮기는 사람들에 이끌려 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을 용감하게 생각하고, 무엇을 용감하게 행동하느냐이다.정말 인생은 길지 않다. 쓸데없는 일에 용기를 내지 말자. 영원하신 예수님을 위한 행동에 용기를 내자. 영원 속에서 칭찬받을 행동에 용기를 내자!
아리마대요셉
니고데모
요한복음3:16
용기
[거룩한 7일간의 도전_5일] 진리를 붙들라
by 최성은
2023-04-07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태복음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마태가 기록한 제 육시는 지금의 정오, 낮 열두 시를 가리키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 삼시 즉 지금의 아침 아홉 시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가량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면서 고난을 견디어 내신 것이다.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정오에 해가 나야 할 텐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표현은 요엘 2장 말씀처럼 마지막 ‘주의 날’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종말을 생각나게 한다.그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시험들 수 있는 외침이다. 시편에서 다윗이나 아삽이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 정말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실 수 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의 고통에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신다.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들 대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 가운데, 가장 극한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어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외롭게 죽음을 맞으셨다. 십자가에 당하는 육신의 고통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분리일 것이다. 또 한 가지 동시에 주님의 절규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이 절규는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 빛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후의 삶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죽음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인생, 모든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주님께서 외쳐 주신 것이다. 그런 나를 위해서, 주님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절규하신 것이다.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이런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까? 예수님의 절규는 곧 고난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야만 했다. 그냥 하나님의 자리에서 ‘구원이 있어라’ ‘용서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꼭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하나?’ 그러나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반쪽짜리 신이 아니다.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볼모처럼 내려보내신 하나님이시다.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33년을 인간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죄인들의 친구”로 사시다가 가장 비참하게 모든 인간의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고통 가운데서 돌아가신 분이시다.예수님은 나의 슬픔을 아시는 분, 나의 질고를 아시는 분, 나의 허물을 아시는 분, 나의 수치를 아시는 분, 나의 상처를 아시는 분, 나의 고난의 깊이를 아시는 분, 나의 울부짖음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구주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규는 나의 죄의 형벌의 무게를 견디시면서 동시에 나의 아픔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대신 외쳐 주시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의 외침이다.이런 절규를 듣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주님의 이 모습을 불쌍히 여겨 스펀지에 포도주를 적셔서, 극심한 갈증과 탈수 현상에 계신 주님께 마시게 했다(48). 그 와중에도 “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가 또 무슨 기적을 베풀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 엘리”라는 주님의 외침을 주님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들은 (이 말은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활용어로 쓰던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어디 놔두어 보자. 엘리야가 와서 저 예수를 구원하는지 한번 지켜보자”(49).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때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준다는 미신이 있었다. 정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하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가 무엇인가 마지막 기적을 일으키는지 구경하려 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더 큰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안 보여주시겠다고, 기적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은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하다. 그렇게 수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 속에 담겨 있는 참된 구원의 진리를 붙들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재미를 찾는, 또 다른 기적만을 원하는, 기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사랑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외면하는 그 세대를 향해서 주님께서 채찍질하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다가와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은 단 한 번도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으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는 인간들은, 그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지만, 죄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기적을 재미 삼아 부르는,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인간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는 주님을 본다.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 내쉬며 크게 소리 지르시고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셨다(50).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잇는 커다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갈라졌다(51). 성소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이제 죄인된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예수님께서 다 없애 주셨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그렇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몸이 쪼개지신 것이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다. 광야에서 맺은 피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신 것이다. 율법을 폐했다는 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율법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필요가 없어서 폐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이루어서 폐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구약에 있는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한점 흠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없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그 거룩한 보혈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시고,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우리의 삶도 주님의 성전이 되어 간다.그리고 이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죽었던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52-5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이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보다 주안에서 먼저 자는 자들이 먼저 이런 부활을 경험하며 육과 영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서는 우리에게 격려한다. 지금까지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대낮이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다. 땅이 진동한다. 그리고 자는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 엘리야가 와서 어디 구해주나 보자! 재미 삼아 구경하던 자들, 그토록 예수님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예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 예수님을 비웃던 유대교 지도자들, 그들 모두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수님 말씀처럼 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는 여전히 이 진리를 붙들지 않는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매수하여 빈 무덤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이신 그분이 앞에 서 있는 데도,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데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데도, 예수님을 조롱하던 그들은 진리를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교만하고 강퍅하면 이토록 진리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보지 않는다.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놀라운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이 모든 십자가형을 진두지휘하던 로마의 백부장과 그 십자가형의 집행을 도왔던 군인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백한다(54).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아보아야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누구신지조차 모르는 이방인들은 진리를 알아본 것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시는 말씀들을 듣고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백부장은 수년간 십자가형을 집행해 왔을 것이다. 수많은 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빌라도처럼 그는 예수라는 자에게서 어딘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어쩌면 특별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끔찍하게 형벌하고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자,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며 용서할 수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이 사람이 숨을 거두자마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었던 자들이 깨어난 것이다.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진리를 붙드는 방법은 같다.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간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 두려워했다. 첫째 날 두려움에서 벗어나자고 했는데, 그 두려움은 사탄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기적과 권능을 보고 심히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진리를 붙드는 유익한 두려움이다.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당시 가정 사회적 약자이고, 가장 힘없는 여인들이었다.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5-56).무시무시한 십자가 사건, 조롱과 핍박의 연속 가운데,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예수를 섬기던 여인들이라 했다. 갈릴리부터 따라왔다고 했다. 많은 여자라 했다. 어느 교회를 보아도 여자 성도들이 많다. 아마도 에덴동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깨어있는 여인들의 노력인듯 싶다.도대체 이 시간에 예수님이 훈련하시고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들은 어디 있을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을 보면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는 누구도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데, 오히려 형을 집행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했다. 오히려 여자들이 예수님께 의리를 지켰다. 그 여인 중에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로 전해진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치료해 주셨던 그 여인이다. 한 귀신도 아닌 일곱이나 되는 귀신이 괴롭혔으니,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녀를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며 주님의 임종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연약한 여인들은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군중에 끼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힘겨루기를 할 수도 없었고, 베드로처럼 칼을 빼 들 수도 없었고, 정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대인관계도 아니다. 답은 너무도 단순하다.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다.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적을수록, 주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더 크다.진리이신 하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라.아무것도 없어도 그런 용기만 있으면 진리를 붙들 수 있다. 기다리지 말자. 오늘 붙들자.
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
고난
부활
[거룩한 7일간의 도전_4일]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6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태복음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삶을 마감하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결국 이 세상에 속했던 것들은 단 하나도 내가 가져갈 수 없다는 신념이다. 남미의 와오라니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그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것들을 위하여, 결국은 붙들 수 없는 그것들을 포기하는 자, 그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우리가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또 붙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붙들 수가 없는 것들, 이 둘을 분별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짐 엘리엇이 20대에 깨달은 진리이다.마태복음 2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주변에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는지, 그들의 대화와 반응을 살펴보자.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다. 총독 관저 안에 200명이 넘는 군대가 소집되었다. 잘 훈련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먼저 채찍질을 가한다. 그 끄트머리에 납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 있는, 그래서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그런 채찍이었다.사도 바울도 핍박당할 때 이런 채찍에 맞았다. 유대인의 태장은 40에 하나 적은 39대를 맞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그런 자비가 없다. 죄인이 지칠 때까지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 채찍을 맞으신 예수님은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탈진한 상태셨다.빌라도의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로마 장교들이 입는 홍포를 입힌다. 날카로운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다. 그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시뻘건 피가 얼굴로 흘러내린다. 주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희롱하고 조롱한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철저히 조롱하고 재미를 보고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면서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사탄이 아니면 누가 사람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주겠는가?예수님의 무기력한 모습에 로마 군인들은 재미를 더해간다. 가학의 기쁨을 느낀다.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람,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특별히 유대의 권세 잡은 자들과 힘겨루기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란 자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면서, 혹시나 어떤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내심 갖고서 그를 더 조롱한다. 그러면서 뭔가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소문과 전혀 다르다. 유대 독립운동가의 패기 같은 것도 없고, 자기변호도 없고, 발악도 없고, 계속 당하면서도 도무지 아무 말도 없다. 재미가 없다. 그럴수록 더 조롱하고, 더 괴롭히고, 더 핍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수난이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52:14-53:6).다시, 무릎을 꿇고 있던 군인들은 이제 일어나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다시 손에서 빼앗아 그걸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조롱한다.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예수님은 자신이 못 박혀야 할 십자가를 지고 비탄의 길, 슬픔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걸어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다.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대략 1.5킬로미터 거리이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할 죄수들은 모두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갔다. 그러나 너무도 심한 채찍과 구타로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탈진하신 주님은 대략 4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나무 십자가를 지기에 버거우셨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신 주님의 어깨에 지탱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무게였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시몬은 유월절 성지순례를 왔거나, 아니면 원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라고 기록하고 있(막 15:21). 루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로마의 동역자일 것이다(롬 16:13). 지금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지금 자신이 진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 모르지만, 그 “재수 없는 날”은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의 날이 되었고, 그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은 골고다, 해골의 못이라는 곳에 도착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보리’도 ‘골고다’에서 파생한 말로, 같은 “해골”이란 뜻이다.) 마태는 지치신 예수님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기록한다. 마가는 여기에 몰약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마취 효과가 있어 고통을 줄여주는 포도주였다. 그런데 주님은 조금 맛보시고 거절하신다.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니라.”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뭔지 모른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주님의 육신 또한 인간의 육신 그대로셨다. 그 육신의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시면서 인내하시느라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하다.이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두 손목과 두 발목에 대못을 박는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그림들과 달리, 십자가는 우아하지 않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찌른 피가, 등짝에는 채찍에 맞은 피가, 팔과 다리에는 대못에 박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피가 흥건했다. 따귀와 주먹으로 맞은 얼굴은 일그러지고 부어 있었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긴 채 예수님은 겨우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다.누가 보아도 이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죄패가 보여주듯이, 로마에 대항했다가 실패한 반역자일 뿐이다. 지나가는 유대인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다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에게 욕을 해 댄다. 아마도 이런 욕이었을 것이다. “꼴 좋다. 그렇게 까불고 다니면서 기적을 행하더니, 결국 다 사기였지.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무슨 헤롯 성전을 사흘 만에 헐어버리고 다시 짓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디 지금 당장 자기부터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39-40절).양옆에 달린 사형수들도 예수님을 욕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 하나는 마지막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기록에 남을 만한 위대한 일을 하고서도, 이렇게까지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이가 또 있을까?이제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그동안 저 예수 때문에 얼마나 당했던가?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대못보다 더 날카로운 혀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한다.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도, 그가 선포하신 말씀도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권세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며 그를 따라다녔던 무리가 이들이다. 종교가 세속화되면 철저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유대 지도자들은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 믿겠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기적과 하늘의 말씀의 권세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보여달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도 더 큰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졸라댔다. 그때도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능력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세속주의의 특징은 늘 보여달라고 한다는 데 있다. 보았지만 또 보여달라고 한다. 축복을 받았지만 더 큰 것을 강요하고 요구한다. 즐거움을 보여달라고 한다. 돈의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성공을 보여달라고 한다.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에게 받았던 세 가지 유혹이 모든 세속주의를 대표한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믿음은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힘이라고 말한다.십자가의 육신의 고통 이상으로 로마의 군병들이 조롱하고 외치는 이 말들이 주님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육신의 고통보다도 이런 것들이 더 예수님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거기서 내려와 봐라.”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께 사탄에게 받았던 시험과 비슷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와 봐라.” 세속주의의 공격이다. 그 뒤에는 사탄의 어두운 음모가 숨어 있다. 믿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행했으면서도 왜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가?”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로 고난을 받으면서 사탄에게 정죄 받는 그러한 내용들이다. 시편에서도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많이 발견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면 너를 구원할 텐데.” 욥이 받았던 경멸과 조롱도 마찬가지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이 외침에서 우리는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깊고 넓으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무게를 이렇게 표현하셨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의 형벌은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지옥의 모습이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형벌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세속주의는, 세상은 성공을 보여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속주의가 원하는 성공의 끝이 어디인지를, 죄의 대가와 결과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세상이 원하는 성공 속에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의 결과, 세속주의 성공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그 고통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두 팔을 벌려 감수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 은혜도 긍휼도 용서도 자비도 이 세상을 이끄는 힘들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십자가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어 있으면 아무리 보여주고, 아무리 들려주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깨닫지 못한다.사랑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즐거움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세속주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랑을 기뻐해야지, 즐거움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현대는 세속적 쾌락주의에 물들었다. 질병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도 세속주의의 물결이 거세다. 세속주의는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와 인본주의이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중심이 된 세속주의는 이 고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우리를 구원할 신이 어떻게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세속주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로 그 모습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고, 내가 받아야 할 대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세상의 모든 근본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 지나가는 유대인들, 양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다들 세속주의에 눈이 멀어서, 눈을 뜨고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심령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들, 하늘에 속한 것들을 경시하게 된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는 늘 끊임없이 표적을 구한다. 기적을 구한다.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외에는 더 이상 보일 기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눈을 뜨고도 믿지 못하겠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신다.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또 바울은 “오직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한다. 그의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바꾼, 새롭게 변화된 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성공주의를 외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그러나 그 끝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이 살 수 있는 길을 그가 깨달았던 것이다.세속주의 신앙은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것이고, 참다운 신앙은 믿으면 보게 되는 것이다. 대신,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듦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16세기 청교도 목회자 제레미야 버러우즈는 세속주의를 경계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 순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우리의 소유로 남길 수 없는 것에 여러분의 생각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속적인 마음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가장 작은 죄의 모습도 제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의지하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결국 세상은 진리를 말해 주지 않는다. 즐거움을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만, 진리를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세상은 불확실해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이 세상에서 살아갈 나의 시간은 제한적으로 정해져 있다.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에 최대한 시간을 투자하라.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고 경험하라.세속적인 것들이 틈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을 과도히 생각하지 말고, 죄로 인해 오히려 겸손해지고, 나의 삶 가운데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많이 묵상해야 한다.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가 바벨론이고, 지금 여기가 페르시아다. 그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에게 여기서 빛과 소금이 되라 말씀하신다.
세속주의
빛과소금
구레네시몬
로마군병
[거룩한 7일간의 도전_3일]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
2023-04-05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부터 36년까지 10년 동안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을 다스린 로마 총독이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통치했고 그들을 경멸했다. 유대인들 역시 그런 빌라도를 무척 증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증오하는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증오하는 이방인과도 타협하며, 그들 스스로 율법을 위배하는 악함 태도를 보였다.잡혀 온 예수를 응시하며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옳도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고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빌라도는 예수님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여러 가지 증언들로 예수 당신을 반대하는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느냐?” 또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빌라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법정에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전혀 변호하지 않으신 것이다.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그런 죄목은 로마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는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 반역죄로 예수님을 고소했다.이 얼마나 기가 막힌 행태인가? 만약에 예수님의 죄가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 되어야 할 것이다.역사가들은 평가하기를 빌라도는 유능한 장수이면서, 로마 정계 진출을 꿈꾸는 정치가이면서, 사악한 협잡꾼이었고 말한다. 빌라도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자를 시기해서 없는 죄목을 씌워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걸 잘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반문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여러 번 고백한다(요 18:38; 19:4, 6).빌라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니 그의 눈은 맑고 선하고, 사람을 죽일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제국을 전복하려는 혁명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그들이 시기하는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빌라도는 머리를 굴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려 한다. 유월절에 유대인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행을 그는 활용하려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독립운동가인 바라바 예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바는 재미있게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 ‘바라바 예수’는 유대 혁명가요 독립운동가였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영웅인 바라바 예수와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나사렛 예수, 둘 중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수님을 풀어줄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듦으로써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영리한 모사꾼이다.또한 빌라도는 이 예수 사건이 유대 전역에 가장 큰 이슈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에 예수를 풀어준다면, 유대 전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민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빌라도의 아내가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보냈다. 재판을 하고 있는 자리에 빌라도의 아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그날 꿈에 나사렛 예수가 죄가 없는 사람인 것을 계시로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는 더욱 책임을 회피하기로 작정한다. 빌라도는 질문한다. “유대인들이여, 바라바 예수와 나사렛 예수 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바라바 예수”라고 답한다. 빌라도가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군중은 주저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이 무리 중 상당수는 얼마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예수를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라 외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며칠 후에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이들은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없이 잡혀 아무런 능력도 발휘 못하는 목수의 아들 예수를 보자, 좀전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했던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세상을 선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주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대충이라도 신앙생활을 한다면 예수님 안 믿는 악한 사람보다는 덜 나쁘다? 가장 큰 착각이다.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삶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모르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두 가지 종류의 회색지대가 있다. 하나는 불신앙의 회색지대다. 바로 빌라도다. 그런데 두 번째는 신앙의 회색지대다.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신앙이다.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분이 내 눈앞에 나타나셔도 깨닫지 못하는 눈먼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며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빌라도의 눈에도 이것이 기가 막히게 보였다. 빌라도가 오히려 예수님을 변호한다. “유대인들이여, 어찜이뇨?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 예수가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행했느냐?” 그렇게 파렴치한 정치꾼 빌라도가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기적일 정도이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보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은 보지 못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영적인 눈이 완전히 멀어 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눈이 멀고 더 악해져 있다. 빌라도의 질문에는 귀를 막은 채 유대인들은 더 악을 쓰며 외친다(23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빌라도는 너무 놀랐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소동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지 않으면, 곧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감지한다. 빌라도는 두려웠다. 예전에 폭동이 일어나 로마 황제에게 밉보인 적이 있는 그였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일을 약점 잡아 빌라도를 협박했다.사도 요한은 이 일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유대 총독 빌라도까지 협박하는 용기를 보이는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이 사람들을 보라! 이들을 왜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는지, 그 증거가 여기 있다: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요 19:13-15, 새번역)신앙의 회색지대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당연히 유대의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맞는데, 그들은 빌라도보다도 더 가이사에게 충성스럽다. 진짜 그랬을까? 아니다.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팔려고 들기 때문에, 애국심도 팔고, 하나님도 팔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그러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빌라도는 어떤가?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요 19:7-10, 새번역) 그렇다. 성경이 기록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럴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라. 빌라도가 이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고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바로 가롯 유다가 뉘우치며 대제사장들에게 왔을 때 제사장들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들이 그 똑같은 말을 되돌려 받고 있다.손을 씻는 행위는 로마의 관습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의 관습이다. 빌라도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씻는 유대의 의식을 행했다. 그래서 빌라도의 죄가 없어졌는가?예수님 돌아가시고 2천 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한순간의 위기는 모면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그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부당하게 재판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결국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인생으로 어둠 가운데 슬피 울며 지내고 있다. 회색지대 불신앙의 특징은 한순간에 위기를 모면하고자 검은색이나 흰색이 아닌 늘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결코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떤가?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5절).예수님을 죽인 것은 단순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다. 25절을 자세히 보라. “백성이 다….” 참으로 대단하다. 악을 행하는 데 참으로 용기가 대단하다. 자기들만 그 죗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받겠단다. 그만큼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너무나 섬뜩한 맹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믿음대로 되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80년이 걸려 완공되었던 헤롯 성전도 불탔다. 무려 110만 이상의 유대인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유대인은 나라 없이 1,900년을 떠돌아다녔다. 신앙의 회색지대의 삶의 결과이다. 정치에는 회색지대가 있다. 경제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인간관계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철학과 문학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포스트모던은 분명한 색깔을 싫어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회색지대가 인기 있고, 신앙도 적당히 생활하는 회색주의가 유행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진리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세상은 늘 중간지대를 선호하지만, 진리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선과 악만 존재할 뿐이다.북왕국의 악명높은 아합 왕 시절에 바알 숭배로 열을 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우리는 국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아니면 세상 나라의 백성인가?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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