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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 영혼을 지키는 네 가지 방법
by Matt Smethurst
2020-08-03
인터넷이 사람의 진을 다 빼기도 한다. 그런데, 그것도 옛날 이야기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스크린의 유혹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적으로 피해를 입힌다. “오, 이거 정말 끔찍한데”라고 말하면서 디지털 세상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다. 디지털 세상에 머무는 대부분의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와우, 이제 사는 맛이 나.” 성경은 “뭇 사람을 공경하며”(벧전 2:17)라고 말한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그 어느 때라도 결코 쉽지 않겠지만, 지금같은 SNS 시대라면 더 힘들지 않을까? 감사하게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지침을 준다. 여기 신실한 기독교인이 온라인에서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려주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자판으로 치는 말을 심각하게 여겨라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이 말에 대해서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그에 관한 구절은 수도 없을 정도다. 우리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고, 결코 혼란스럽거나 애매하지 않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잠 18:21)“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행여나 온라인에 쓰는 글은 말로 하는 것 보다 덜 중요하고 덜 직접적이라는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을까?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 설마, 최후의 심판날에 다루기에 트위터에 쓴 글은 너무 사소하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 왕 되신 예수님 앞에 우리가 서는 날, “온라인 속 나 자신” 또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사실 온라인 속 내가 진짜 나다.2. 상대를 인간으로 받아들이라알란 제이콥(Alan Jacobs)은 그의 책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서로 상충하는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이드(How to Think: A Survival Guide for a World at Odds)’에서 적으로 인식한 상대와 자신이 다름을 더 명확히 하기 위해 점점 더 관계를 멀리하고 싶어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진 경향에 대해서 자세히 고찰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상대를 가치 없는 존재(delegitimize)로 몰아가기 위해서 비인격화(depersonalize)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적 습관에는 높은 비용이 따르기 마련이고, 그 상대는 이제 비단 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제이콥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토론과 논쟁을 전투로 받아들여서 대화하는 상대를 악마로 여김으로써, 우리가 가지고 있던 인간성의 한 측면을 잃었다. 누군가가 우리가 근절하고자 하는 입장을 대표해서 나올 때, 그 상대는 이제 우리 눈에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고, 정말로 열의를 다해서 그 상대를 이기고 싶은 마음에 우리 속에 있던 인간을 향한 공감까지 소멸시키고 만다. 나와 다른 사람이 가진 욕망과 원칙 그리고 두려움을 이해하고자 하는 마음은 이제 우리 속에서 찾을 수 없게 된다. 논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너무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기독교 진리까지 가볍게 다루자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 말을 기억하자. 한 개인은 그가 잘못 알고 있는 여러 의견들을 모아 놓은 종합체가 결코 아니다. 그들이 인간으로서 지니고 있는 형상은 결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의견만으로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생각도 틀릴 수 있다. 그렇기에 겸손해야 한다. 겁을 먹자는 것도, 미지근해지자는 것도, 침묵하자는 것도 아니다. 단지 겸손하자는 것이다. 3. 최대한 좋은 쪽으로 이해하라“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마 7:12)는 예수님의 말씀은 너무도 익숙해서 쉽게 잊는다. 그러나 이 황금률은 사실상 누군가를 상대하는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필요하다. 소셜 미디어로 증폭된 유혹 중 오늘날 가장 교활한 것 가운데 하나는 상대를 비방하고 수치심을 유발하는 것이다. “왜 상대를 좋게 생각해야 하지? 왜 더 강하게 치고 나가면 안 되는 거야? 저 사람들이 나를 아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한다. 게다가 리트윗이라는 방법도 있다. 성경에 34번 나오는 비방이라는 단어는 다 사탄을 가리킨다. 사탄은 엄청난 고소자다. 사탄의 행위를 소셜 미디어에서 따라하는 것은 단지 유감스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수도 아니다. 그것은 사탄적 행동이다. 비방은 훼손의 한 형태다. 다름 아니라 지구상에서 하나님이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분의 신성한 창조물을 훼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무모한 말은 지옥에서 나온다고 말한 것은 당연하다(약 3:6). 그는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에 근거해서 말씀을 이어간다(8-9절).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모든 사람은 무한한 위엄과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거기에 맞게 취급되어야 한다. 대충 훑어 내려가면서 읽은 댓글이나 사진 등은 금방 잊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소셜 미디어 속 언어라고 해도 인격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 온라인에서 대화할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4. 서로를 격려하라성경은 나누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자신의 권리까지 포기하라는 명령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다음 명령은 서로 간에 선의의 경쟁을 부추긴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롬 12:10). 우리는 이 경쟁에서 잘 하고 있는가?오늘날 성경적인 격려를 찾기는 매우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격려는 너무도 소중하다. 다른 사람을 보면서 최선을 가정하고 최선를 보고 또 최선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나 자신밖에 모르는 죄인인 우리에게는 너무도 힘든 일이다. 그래서 자신을 부인하는 노력, 자신을 잊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비록 힘들지만, 그것은 실로 훨씬 더 멋진 방법이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겸손한 기독교인을 “자신의 허물과 다른 이의 탁월함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그 순서를 뒤집어서 나 자신의 탁월함과 다른 이의 허물을 연구하기 시작하면, 아마도 우리는 좀 더 나은 위치를 누리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대가로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잃어버릴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Not to Be a Jerk Onlin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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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형상
그리스도인이 읽어야 할 다섯 권의 소설
by Leland Ryken
2020-07-24
기독교인에게 추천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학 작품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리스도가 태어나기 약 20년 전에 글을 쓴 로마 작가 호라티우스(Horace)는 시간을 뛰어넘는 문학 작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기준을 남겼다. 그 후 후대 작가들은 흔히 지혜와 기쁨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여 문학이 가진 기능과 보상이라는, 호라티우스의 기준을 묘사해왔다.나 역시 이 두 가지 기준에 근거해서 문학 작품을 읽고 또 읽는다. 성장하기 위해 문학 작품을 읽다보면 종종 즐거움까지 따라오곤 한다. 또 어떤 경우에는 깨달음을 주는 확실한 재미를 제공할 작품을 찾아서 읽기도 하는데, 그러다보면 또 성장이라는 부산물이 따라온다.성장과 즐거움이라는 이 두 가지 기준을 바탕으로 삼아, 내가 생각할 때 어느 기독교인에게 권해도 좋은 다섯 권의 소설이 여기 있다.1.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위대한 유산'(Great Expectations)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 읽다보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서사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이야말로 독자가 이야기 속에서 찾고자 하는 모든 종류의 즐거움이라 할 수 있는 액션, 갈등, 배경과 성격 묘사, 그리고 서스펜스까지 빠짐없이 갖추고 있다. 누구나 소설을 읽을 때면 그 속으로 빠져들기를 바라기 마련인데, 이 소설을 읽을 때면 나는 어김없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으로 빠져들어간다. 나는 이 책보다 영국 땅과 영국 사람에 대해 제대로 소개한 책을 여태 만나지 못했다. 반짝거리는 문체 스타일은 물론이고,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머는 실로 탁월하다. 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도덕적 지향점은 다름 아니라 가식과 반대되는 성실함, 동정심, 충성심, 자족함, 그리고 평범한 삶 속에서 누리는 즐거움과 같은 미덕을 고양시키는 기독교인이다. 2. 나다니엘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글씨'(The Scarlet Letter) 이 책은 말 그대로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이다. 또한 기독교 고전이기도 하다. 그러나 세속적인 학교 교실에서 워낙 잘못 소개되는 바람에 이 책이 가진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죄책감과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는 열쇠는 호손이 제시하는 세 가지 세계관에서 찾을 수 있다. 처음에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은 청교도 행동주의와 낭만주의 세계관 사이의 싸움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그 싸움에서 로맨틱 여주인공인 헤스터 프린(Hester Prynne)의 편을 들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세 번째 세계관이 점차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것은 진정한 청교도 정신, 또는 기독교 세계관이다. 끝에서 두 번째 장에서 만나는 딤즈데일(Dimmesdale) 목사의 구원 달성은 문학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클라이맥스 장면 중 하나다. 호손은 실로 스타일의 대가다. 묘사와 상징 그리고 인물 묘사는 가히 탁월한 수준이다. 3. 레오 톨스토이(Leo Tolstoy)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The Death of Ivan Ilych) 이 책은 긴 소설이 두려운 독자에게 알맞다. 약 60페이지로 중편에 해당하는 이 소설은 픽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가 어떻게 이토록 철저한 기독교적(Christian) 작품이 될 수 있는 지 놀라울 따름이다. 스토리는 평범한 인물인 주인공의 삶과 죽음에 관한 것이다. 화자는 이반의 삶이 “가장 평범했고 그렇기에 가장 끔찍했다”라고 말한다. 이반이 살고 있는 사회가 지향하는 얄팍한 가치(이반 또한 그런 얄팍한 가치에 기대서 살다가 결국은 그를 죽음으로 이끈, 그의 삶 전체를 바꾸는 사고를 만나게 된다)에 대한 묘사는 현대 사회를 투영하는 거울이다.이 책은 사물의 핵심을 꿰뚫는 면에서 성경에 버금갈 만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현대 삶에 대한 냉철한 고발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결국 끝에 이르러서, '주홍글씨' 속 개종 장면과 비슷한 방식으로 주인공은 구원을 얻는다.4. 보 기에르츠(Bo Giertz)의 '신의 망치'(The Hammer of God) 이 책은 대중에게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최고의 기독교 소설이다. 저자는 20세기 중반 스웨덴 루터교 교회의 저명한 성직자다. 3부작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기간 동안 시골에 있는 같은 교구에서 사역하는 세 명의 목사들의 삶을 추적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의 소설처럼 읽을 수 있다. 각 소설은 첫 목회 현장에서 2-3년을 지내는 동안 그들이 경험하는 영적 회심을 추적한다. 주인공은 하나같이 막 신학 훈련을 마치고 사역지에 도착한, 진정한 기독교인이 아닌 이름만 기독교인인 목사들이다. 이 책은 크게 볼 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세 명의 젊은 목사가 영적 순례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성숙하는 과정”이 하나고, 나머지는 스웨덴 어느 시골 교구에서 일어나는 가상의 에피소드다. 내용과 관점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처럼 가장 깊은 영적 현실을 복음주의 시각으로 따뜻하게 묘사하고 있다. 5.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방인'(The Stranger)기본적으로, 기독교 문학과 비기독교 문학이 여러 면에서 모두 훌륭한 면을 가지고 있다고 보더라도, 나는 비기독교 소설에서보다는 기독교 소설에서 얻는 게 훨씬 더 많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리 비기독교 소설이라도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는 소설이라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방인이 나의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그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이 소설은 사람을 죽여서가 아니라 어머니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 혐의를 받고 유죄 판결까지 받은 한 사람의 이야기다. 이 책의 스타일은 읽는 내내 나를 꼼짝도 못하게 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세계관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실존주의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삶의 한 관점인데, 왜냐하면 우리 문화 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은 배경은 무엇보다 저자가 자동차 사고로 죽었을 당시 기독교 신앙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여가를 주셨다우리가 읽는 소설에 하나님이 관심을 가질까? 물론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시간을 잘 활용하기를 원하시고, 그것은 여가를 잘 보내는 것 또한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관점에서, 소명을 실천하는 시간임을 깨닫는 것까지 포함한다. 이런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여가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성장하는 것이다. 풍요로운 여가 시간은 우리를 영적으로 성장시킨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Novels Christians Should Read번역: 무제
문화예술
기독교소설
찰스디킨스
위대한유산
주홍글씨
톨스토이
기에르츠
이방인
알베르카뮈
죄와 싸우는 나를 돕는 미래의 나
by Trevin Wax
2020-07-14
올해 초, 기독교 대학 캠퍼스에서 한 학생이 내게 다가오더니 죄와 싸우는 문제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그 학생은 포르노의 유혹을 이기는 데 헌신하는 젊은이 모임에 가입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모임에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돕고 있는지 설명해 주면서, 혹시 내게 그 모임에서 적용할 수 있는, 죄와 싸우는 데 필요한 추가적인 전략이나 전술이 있는지 물었다. 내 첫 번째 반응은 그 모임에 꾸준히 참석함으로 회개와 책임감이라는 측면에서 최대한 유익을 누리라는 것이었다.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는 언젠가 죄가 얼마나 우리로 하여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게 하고, 또 죄와 싸울 때 혼자 싸우도록 놔두는 걸 즐기는지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다. 교회의 경우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고는 은혜가 넘치는 형제 자매가 모여서 함께 거룩을 추구할 때 느끼는 동지애를 제공하는 게 전부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죄를 정복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서로 서로 돕기 위해 구성된 책임 그룹(accountability groups)의 경우, 의를 추구하는 것보다는 특정 죄를 얼마나 멀리했는가에 더 초점을 맞추기 마련이다. 한 사람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지난 모임 이후 특정 죄를 지었는지 안 지었는지를 물어보는 방식으로까지 형식이 발전하는 경우, 성숙한 인격 대신 죄에 대한 저항이 “성공”으로 정의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모임에서 주인공은 죄다. 거룩함은 단지 조연이 되어 저쪽 구석에 머물 뿐이다. 죄로부터 멀리 초점을 옮기기체중 감소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생각해보자. 그 모임에서의 대화가 지난 주간 먹지 않은 음식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 목요일, 레이첼은 그렇게 갈구하는, 고기가 많이 들어간 치즈 버거를 먹지 않았다. 금요일, 아론은 의지력을 발휘해서 M&M 초콜릿 큰 봉지를 손에서 내려놓았다. 토요일, 존은 친구들과 놀러 나갔을 때 항상 먹던 피시앤칩스 대신 샐러드를 먹었다. 의지력이 가져다준 작은 승리를 축하하고 서로 더 좋은 결정을 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모임에서 대화의 초점은 온통 먹지 않은 음식이다. 달리 말해, 주목의 대상은 다름 아닌 유혹이다. 그러나 죄에 승리를 거두는 데는 더 나은 길이 있다. 피하고 싶은 죄가 아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으로 초점을 돌리는 것이다. 너무도 자주 우리의 관심은 내가 죄책감을 느끼는 과거의 죄 또는 지금 싸우고 있는 현재의 유혹을 향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미래다. 미래에 더 큰 관심을 두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가? 하나님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 유혹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는 길은 나를 무너뜨리는 죄에 주목하는 대신, 나를 그의 형상을 닮은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구세주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우리에게는 미래의 내(future self)가 필요하다. 당신의 미래 모습왜 유혹을 이기기 힘든가에 대한 다니엘 골드스타인(Daniel Goldstein)의 TED 강의 일부를 살펴보자. 이것은 지금의 나와 미래의 나 사이의 불평등한 싸움이다. 내 말은 이것이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현재의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나를 주관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있는 힘이다. 강한 팔을 가지고 내 입에 도넛을 넣을 수 있는 힘이다. 그러나 미래의 나는 근처에 없다. 저기 멀리 미래에 있다. 미래의 나는 약하다. 변호사도 근처에 없다. 미래의 당신을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래서 현재의 내가 나의 모든 꿈을 짓밟는다. 두 자아 사이에는 계속적인 싸움이 있으며, 우리에게는 이 둘 사이의 싸움이 불평등한 싸움이 되지 않도록 도와줄 약속 장치(commitment devices)가 필요하다. 이 강의와 관련해서 매튜 리 앤더슨(Matthew Lee Anderson)은 이렇게 썼다."약하거나 희미하게라도 미래의 자신이 존재한다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현재의 유혹에 저항하는데 도움을 주는 전략이 생긴다. [중략] 미래의 삶을 보다 더 생생하고, 보다 더 강렬하게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지금 할 일을 행하는데 필요한 더 많은 내적 자원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종말론적 제자도’(Eschatological Discipleship)에서 강조했던 포인트 중 하나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종말론적 소망은 그에게 동기를 부여했고 또 윤리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 그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에게 명백한 종말론적 소망에 근거하여 예수님에게 순종하라고 권고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미래의 약속에 근거하여 현재의 순종을 요구한 것이다. 따라서 “내가 어떤 죄를 이겨야 하지?”라는 질문 대신 이렇게 물어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가?”미래의 나로 가는 길‘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 S. 루이스(C. S. Lewis)는 작고 겉보기에는 미미한 선택이 가져다주는 평생에 걸친 효과에 대해서 설명한다. 그는 승리뿐 아니라 좌절로 점철된 궤도 속에서 조금씩 자신을 형성해 가는 존재로 모든 인간을 묘사한다. 당신이 뭔가 선택을 할 때, 당신은 자기 중심에 있는 뭔가를 바꾼다. 그 작은 선택이 당신을 과거의 당신과는 아주 조금은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것이다. 삶 전체를 놓고 볼 때, 당신이 선택한 그 수많은 결정들은 당신의 중심을 아주 조금씩 천국의 피조물 또는 지옥의 피조물로 바꾸고 있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는 피조물 아니면 전혀 다른 피조물로, 즉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는 존재로 바꿀 수도 있다. 천국에 어울리는 피조물이 될 수도 있다. 거기에는 기쁨과 평화, 지식과 능력이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피조물이 되는 결과는 광기, 공포, 어리석음, 분노, 무능 그리고 영원한 외로움이다. 우리 각자는 다 매 순간 아주 조금씩 이 둘 중 하나를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 미래의 나를 그리며 정욕과 싸우기자, 정욕과 싸우는데 효과적인 전략을 물어온 그 학생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가벼운 섹스”라는 환상에 빠진 오늘날 수많은 학생들은 또한 “가벼운 포르노”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니까 포르노는 그냥 어쩌다가 잠깐 빠질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은 얼마든지 축소되거나 정당화될 수도 있고 또 우리 영혼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도 않기에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는 식이다. 고맙게도 서로가 서로를 지켜주는 모임을 만든 학생들은 이런 죄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고 있기에 정욕과의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평생에 걸친 정욕과의 싸움에는 특정한 죄에 초점을 맞추어 서로를 돕는 책임 그룹을 만드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에게는 교회 전체가 필요하다. 승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갈등을 겪기도 한다. 그럼에도 어떤 특정한 죄 또는 유혹으로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으로 하나가 된 사람들이 모여서 의로움을 갈망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천국에서 영원히 만족할 것임을 믿기 때문에 가능하다. 지금 이 순간 나를 가장 괴롭히는 죄에 집중하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되어갈 미래의 자신을 향한 영광스러운 비전이다. 평생 포르노에 탐닉했는데 단 한번도 걸리지 않았다면 어떨까? 녹음기의 빨리 감기처럼 10년, 20년 또는 30년 후를 한번 빠르게 돌려서 상상해보라. 당신의 미래 모습은 과연 어떨까? 포르노와 같은 육체적 정욕을 탐닉한 당신은 속에서부터 텅 빈 구멍을 가진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관련해서 당신이 기쁨을 느끼는 것은 매우 힘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당신의 감각은 아예 죽어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제 다른 궤도를 한번 상상해보자.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뒤로 물러서기도 하면서, 그러나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강렬하게 느끼면서, 죄악된 정욕으로부터 멀리 떨어지려는 당신의 갈망은 그 어떤 여지를 두지 않는 집중력을 갖고 온전히 성령님만을 의지한다. 그럴 때 당신은 점점 더 순도 높은 불타는 의로움에 헌신한 전사의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당신은 하나님이 부여한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잡고, 일곱 번 넘게 쓰러지는 의로운 사람들처럼, 비록 실패했을 때라도 다시 일어나 그 전투를 이어간다. 당신의 시선은 결코 당신을 쓰러뜨린 죄를 향하지 않는다. 대신 그 경주에서 당신을 붙들고 있는 구세주를 향한다. 당신의 미래 자아는 지난 몇 년 동안 절뚝거린 힘 없는 영혼이 아니라, 성령님이 주시는 에너지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동원해서 죄와 싸워내는, 영적으로 강건하고, 의로움의 힘으로 빛나고 또 은혜와 용기로 가득찬 모습이다. 미래의 당신이 어떤 모습이 되기를 원하는가? 이제부터 다음 번 유혹을 받을 때, 죄 너머를 보기 바란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당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있는 타임머신을 통해 미래 당신의 모습을 보면서 검을 집으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Your Future Self Helps You Fight Present Sin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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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5: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주권
by 김은득
2020-07-06
한국교회 성도 여러분, 미국 뉴욕의 5번가에 가 본 적이 있나요?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오드리 헵번이 5번가의 티파니 매장을 선망의 대상으로 봤던 것처럼, 여러분 역시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바로 그 화려한 명품가를 활보하며 쇼핑하는 자신을 꿈꿔 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5번가에 위치한 모건 스탠리 건물이나 록펠러 센터가 보여주듯이 이 5번가는 역사적으로 도금 시대(Gilded Age, 대략1870-1900)에 어마어마한 부를 획득한 재벌들(밴더빌트, 록펠러, 카네기, 모건 등)의 거리로 출발했습니다. 5번가에 자신의 호텔을 소유한 트럼프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대선 슬로건을 제시했을 때, 아마도 그런 5번가의 찬란한 역사를 의식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보기도 합니다. 갑작스레 웬 미국 뉴욕 5번가 타령인가 싶으신가요? 사실 제가 1898년 프린스턴 신학교의 스톤 강연에 초대를 받고, 대서양을 건너 뉴욕에 도착해 처음 숙소를 잡은 곳이 바로 메디슨 스퀘어에 위치한 5번가 호텔(the Fifth Avenue Hotel)이었습니다. 구 유럽 대륙에서 온 한 여행자로서 그 호텔에서 바라본 뉴욕, 아니 신대륙 미국에 대한 첫 인상을 이야기하자면, “하나님께서 이 미국 땅에 심으신 놀라운 잠재력이 드디어 휘황찬란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기 시작해서 경이로울 정도의 강대국으로 발전할 것(Lectures on Calvinism, 9)”이라는 기대감 그 자체였습니다. 또한 그 호텔에 숙박하면서 당시 뉴욕 주지사 선거를 근접해서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는데, 무엇보다 공화당 후보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와 민주당 후보 어거스터스 밴 위크(Augustus Van Wijk) 모두 화란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더욱 제 흥미를 끌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여러분의 관심은 화란 출신 주지사 후보들이 아니라 바로 제 정치적 성향, 즉 제가 그 두 후보 중에 누구를 선호했는지, 어느 정당을 지지했는지에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제가 미국에 방문했을 때, 수많은 기자들이 제게 가장 궁금해 했던 질문들 중 하나였습니다. 심지어 한 지역 언론은 저의 기독민주당(Christian Democrat)성향 때문에, 제 허락없이 저를 민주당원으로 보도해서 그 기사를 내려달라고 부탁한 적도 있으니까요. 만일 미국 양당 정치, 더 나아가 진보와 보수 혹은 좌파와 우파에 관해 제 정치적 입장이 어디에 속하는지 물으신다면, 제가 숙박했던 5번가 호텔에 위치한다고 대답하고자 합니다. 제가 묵은 5번가 호텔, 바로 그곳에서 공화당 루스벨트는 자신의 주지사 캠페인을 이끌었고, 그 호텔 바로 근처에 미국 민주당의 본부가 위치했다고 말입니다. 한편 제 정치적 성향을 보수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당시 민주당의 본부가 5번가 호텔 근처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저와 공화당 루스벨트의 공통점에 집중할 것입니다. 제가 당시 신생 정당인 공화당 대통령 후보 아브라함 링컨을 공개적으로 지지했던 사실을 기억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미국을 방문했던 바로 그해 11월 30일, 공화당 출신의 미국 대통령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를 만났고, 그를 “기도의 사람”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맥킨리가 암살된 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뉴암스테르담을 개척하러 온 전형적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후예인데요. 그는 나중에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저와 동일한 스톤 강연을 한 제 후배 신학자인 바빙크와 백악관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저를 보수주의자라고 성급하게 지칭해도 될 것 같지만,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트럼프의 공화당, 아니 적어도 레이건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물론 아까 언급한 5번가의 재벌들이 링컨의 상공업 우대 정책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미국 연방과 분리되어 자기들만의 독자적 연합을 구성한 남부에 대항해 벌어진 남북 전쟁의 폐허에서 새롭게 미국을 일으키는 과정은 무엇보다 미국 국민 전체를 하나로 아우르는 정치 사회적 비전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링컨은 추수감사절을 국경일로 지정하면서 미국의 역사는 정치와 신앙의 자유를 위해 메이플라워(Mayflower)호를 타고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청교도에 기원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플리머스 개척을 이끈 목회자 윌리엄 브래드포드(William Bradford)의 분실된 일기를 영국으로부터 다시 돌려받는 것에 미국이 그렇게 목맨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영혼의 하나됨을 위해 미국에게 청교도 정신이 필요했다면, 미국을 한 몸이 되게 하기 위해 링컨은 재임시 미국 전역을 철도로 다 연결시킵니다. 그러나 이런 정책의 부작용으로 철도(밴더빌트), 은행(모건), 석유(록펠러), 철강(카네기)등의 독점이 가능했고, 바로 5번가의 재벌들이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링컨의 공화당이 현재 공화당의 선조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지 밴크로프트(George Bancroft)와 같은 동시대 역사가들처럼, 저도 미국이 칼빈주의의 영향 아래 뉴욕 5번가로 상징되는 정치 경제적 번영을 누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미국 공화당 지지자라고 주장한다면, 일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유 방임형(lasses faire) 자본주의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로서 노동자들이 재벌들의 독점적 지위에 대항하도록 기독교인 노동 조합을 구성하도록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링컨의 공화당이 지금 공화당과 같은 보수주의라고 말하기엔 상당히 어려움이 뒤따릅니다. 바로 노예 해방 정책이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듯이, 링컨의 공화당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의 공화당이 백인 중심주의인 것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합니다. 이런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제가 매킨리 대통령을 만났을 때 건의했던 것은 남아공 보어인(Boer)을 위협하는 영국 제국주의에 맞서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그때 매킨리의 정신적 상태가 불안해 보여서 그와의 만남에 대해 매우 실망했다고 제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후에 매킨리 대통령은 신경질적 정신분열증세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집니다. 루스벨트에 이르러 공화당의 진보적 성향은 더욱 강화됩니다. 심지어 루스벨트가 공화당에서 분리돼,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불무스당(Bull Moose Party)이라는 급진 정당을 세우기도 합니다. 이때 공화당 내에서 진보적 색채를 띄는 당원과 유권자들이 루스벨트의 정당으로 이동하였고, 1960년대 시민 운동 이후, 공화당의 핵심 지역 기반을 남부 지역으로 바꾸면서 지금의 보수적 공화당에 이르게 됩니다. 다른 한편으로, 제 정치적 성향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제가 묵었던 5번가 호텔과 민주당 본부 당사의 근접한 거리에 주목하면서, 저와 동일한 호텔에서 유세를 시작하고 끝맺은 루스벨트에 눈을 감습니다. 먼저 제가 기독교 사회(Christian Society)의 필요성을 강조한 것을 마치 전근대적 기독교 국가(Christian State) 개념을 옹호한 것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크리스텐덤의 시대를 살았던 장 칼뱅이나 청교도들이 기꺼이 국가가 참된 종교와 예배를 장려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것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와 바빙크는 프랑스 혁명에 영향 받은 세속 국가가 종교적 이슈를 판단할 만한 능력, 즉 어떤 종교가 참된지 아닌지를 결정할 만한 분별력이 없다고 보았고, 오히려 국가 권력이 이런 영적 문제에 간섭하면 할수록 더 많은 부작용이 발생함을 역사를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저는 프랑스 혁명이 강조한 정교분리의 세속화(Secularization as Social Differentiation)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없다는 세속주의(Secularization as Secularism)에 반발합니다. 이런 식으로 공적 영역에서 아예 개인적 신앙을 배제하면서 누군가의 양심, 특히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짓밟는 것이 정녕 프랑스 혁명이 약속한 자유와 평등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니 기독교인들, 적어도 칼빈주의자들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고 믿습니다. 기꺼이 기독교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성도들은 다양한 공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사회, 학문,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하고 또한 참여해야 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사회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단체들을 통해 프랑스 혁명의 개인적 자유주의나 공산주의 혁명의 사회적 국가주의를 보완하는 제 3의 길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의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은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가 바로 이런 기독교적 제 3의 길이라면서 예찬했습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이며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의 종교적 자유 개념과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대한 개념이 저와 거의 흡사한데, 바로 매디슨의 정당이 민주당이라는 점입니다. 사실 매디슨처럼 저도 작은 정부를 지지하고, 시민 단체들의 자유를 극대화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정부 예찬론자이며 주정부 독립을 강조하는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 대한 제 개인적 오해가 너무 커서, 저는 민주당의 제퍼슨보다 연방론자(the federalist)인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이 제 입장과 더 유사하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것이 저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상당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즉 당시 제가 진보적 의제를 주창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저를 보수주의자로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이 또한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 지역의 변천으로 인해서 지금의 민주당은 큰 정부를 선호하고, 공화당은 작은 정부를 선호하는 역사적 아이러니 때문에, 저를 오늘날의 공화당과 동일한 보수주의로 여기는 경우가 생겨납니다. 이런 미국의 일례만 살펴봐도 진보와 보수라는 개념만큼 유동적이며 상대적인 개념도 없을 것입니다. 예전의 진보가 지금의 보수가 되며, 예전의 보수가 지금의 진보가 되는 일이 다반사입니다. 스스로를 진보로 또는 보수로 지칭하는 분들조차도 그 정도의 차이가 상당합니다. 누구나 자신을 중도라고 지칭하지만, 비교 대상에 따라서 언제라도 극좌와 극우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보냐 보수냐 판단의 대상이 되는 제 자신이 그런 판단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저는 진보도 보수도 아닌, 칼빈주의 정치인으로 제 자신을 규정했고, 또 그렇게 기억되길 바랄 뿐입니다. 한국 교회가 카이퍼라는 제 이름을 좌로나 우로나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주권을 모든 삶의 영역에 나타내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Pro Re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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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4: 미국형 칼빈주의를 극복하라
by 김은득
2020-05-24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제가 1898년 가을 뉴저지의 아름다운 한 신학교(Princeton Seminary)에서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할 때, 나름 예상할 만한 칼빈주의의 장밋빛 미래로 인해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프린스턴 신학교는 미국에서 가장 큰 신학교로서 훌륭한 교수진과 아름다운 건물들을 보유했고, 특히 수많은 장서와 새로운 신간들이 가득찬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제가 설립한 자유대학교보다도 더 많은 (외국) 학생들을 유입하고, 미국 내 정통 칼빈주의의 최후 보루의 역할을 넉넉히 해내는 곳이었습니다. 그런 프린스턴에서 칼빈주의를 강연할 때, 저는 그저 미국의 한 신학교가 아니라, 미국 전체를 대상으로 강연한다고 느꼈습니다. 아니, 저는 비저너리(Visionary)답게, 유럽에서 시작한 칼빈주의가 미국 전체를 너머 아시아로, 궁극적으로 전세계로 확장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시겠지만, 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오히려 “미국 칼빈주의에 장밋빛 미래는 없다(There is clearly no rosy future awaiting Calvinism in America)”고 단언한 제 후배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예상이 더 맞아 떨어졌습니다. 저와 달리, 왜 바빙크는 미국 칼빈주의에 대해 비관적이었을까요? 더욱이 미국의 경우는 청교도로 상징되는 칼빈주의가 자체 건국에 이념적 영향을 제공하지 않았습니까? 우선 제가 간과한 것은 1890년대 프린스턴신학교의 상황이었습니다. 1893년에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가 그랜드래피즈의 작은 신학교(Theological School in Grand Rapids,현재의 Calvin Theological Seminary)를 떠나 프린스턴의 새로운 성경신학 분과의 학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간적으로 보스가 그 조그만 시골 신학교에서 온갖 격무에 시달리며, 조직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더 좋은 환경의 신학교로 옮기는 것을 매우 격려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프린스턴신학교 입장에서 보스의 임명은 찰스 브릭스(Charles A Briggs) 박사가 뉴욕의 유니온신학교(Union Seminary)에서 성경 신학을 조직 신학과 완전히 분리하면서 정통주의(특히, 프린스턴을 향해)를 공격하고 자유주의의 영향력을 극대화시키는 것에 대한 방어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반세기의 장로교 역사, 아니 더 나아가 미국 기독교 역사는 유니온의 공적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미국의 공론장에서 유니온은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을 뿐만 아니라, 장로교단 내에서조차 프린스턴보다 더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냅니다. 20세기 초반 유니온의 공공성에 대해 물으신다면, 저는 폴 틸리히(Paul Tillich),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디트리히트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를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깁니다. 이런 프린스턴에서 유니온으로의 공적 권위의 이동은 이미 바빙크에게 보낸 보스의 개인적 서신에도 잘 드러납니다: “프린스턴에서 우린 투쟁 중이야. 그런데 어떤 승리를 이뤄낼지 확실치 않아. 가장 최악은 독일 신학과 역사비평주의가 미국의 모든 교단, 모든 신학 분과에서 강력하게 나타난다는 점이야. 심지어 브릭스의 극단적 경우에서조차 우리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애를 먹고 있으니 말이야.” 이런 면에서, 프린스턴에서 저를 스톤 강연(Stone Lectures)의 스피커로 초대한 것은 미국에서 점점 영향력을 잃어가는 프린스턴식 정통주의에 대한 변호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영향력을 확대해 가고 있는 자유주의의 도전 앞에서 프린스턴을 변호하러 미국에 갔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 칼빈주의자들에게 자유주의자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공공성을 회복하라고 도전하러 갔던 것입니다. 바로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종교, 정치, 학문, 예술 등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라고 말입니다. 무엇보다 프린스턴과 웨스트민스터로 대표되는 미국 개혁주의 신학교는 교리적 색채를 매우 강하게 띄는 소위 신앙고백적(confessional) 신학교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신앙고백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신학과 교단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Karl Barth) 이후 현대신학에서 신앙고백적이라는 의미가 신학이나 교단 자체의 헌법조항에만 적용되는 것으로 축소되었지만, 사실 종교개혁가들, 특히 칼빈(Calvin)이 염두하고 17세기의 개혁신학자들이 생각한 신앙고백적(confessionalization)이라는 의미는 종교의 영역을 너머 개혁파 대학교(제네바대학교, 하이델베르크대학교, 레이든대학교 등)를 세우고, 개혁파 (도시) 국가(제네바, 취리히, 네덜란드 등)를 설립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정교가 분리된 사회고, 더이상 크리스텐덤은 불가능한데, 어떻게 그런 앙시앵레짐(ancien regime, 구체제)을 세우는 것이 가능하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제가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강연할 때, 바로 포스트크리스텐덤(post-Christendom) 사회에서 기독교는 어떻게 공공성을 획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담은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트뢸취(Ernst Troeltsch)를 인용하자면, 국가의 종교가 된 교회 모델(the church type)과 그 국가 종교에 속하지 못한 섹트 모델(the sect type)로 기독교 교회의 사회적 모델을 구분합니다. 교회 모델은 국가 내 공공성을 획득하는 강점과 달리, 교리적 순수함이 훼손될 수 있다면, 섹트 모델은 정반대로 교리적 순수함을 지키는 강점에 비해 공공성을 훼손시킬 수 있습니다. 사실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교회 모델을 취하였지만, 개혁파 국가에서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면서도 공적인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정통주의 교리 훼손을 근거로 국가 교회(Nederlandse Hervormde Kerk, NHK)와 분리하여 새로운 개혁파 교단을 세웠을 때, 대두된 비판이 섹터리안(Sectarian)으로서 공공성을 어떻게 획득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한 이유인데, 충분히 교리적 순수함을 지키면서도 공공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종 미국에서는 용어나 개념, 혹은 현상들을 한 측면으로 축소 혹은 환원하여 강조하는 경향성을 보입니다. Evangelicals이라는 용어는 유럽에서 기독교인으로 통용되지만, 미국에서는 복음주의자로 축소 혹은 환원되어 사용됩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American Abraham Kuyper)로 불리는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가 네덜란드에서 이룩한 성취를 웨스트민스터의 이상적 모델로 제시하면서 제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의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그러나 메이첸이 인용하면서 강조한 것은 모든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세계관이 아니라 교리적 순수함을 위한 것입니다. 저와 바빙크의 뒤를 이어 교의학 교수가 된 헤프(V. Hepp)는 메이첸을 가리켜 “칼빈주의 세계관을 위한 전사(Warrior for the Calvinist Worldview)”로 지칭했는데, 실상은 세계관을 정통 교리로 축소 혹은 환원시켰던 셈입니다. 물론 메이첸과 웨스트민스터신학교는 그 비전에 걸맞게 정통 교리를 수호하는 워치독(watchdog)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고, 특히 한국 정통 칼빈주의자들에게 거의 독보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설립한 자유대학교의 명칭이 교단과 정부와 관련해 자유롭다는 것을 강조했듯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역시 어떤 교단에도 속하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교권의 간섭에서 자유로운 신학교를 지향했습니다. 특히 설립 당시의 교수진들, 대표적으로 반틸(Van Til), 카이퍼(R. B. Kuiper), 스톤하우스(N. B. Stonehouse)에서 보여지듯이, 웨스트민스터의 화란 커넥션과 지향성은 엄청났습니다. 무엇보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현대주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와 다르게, 메이첸과 미국식 칼빈주의는 전형적인 섹터리안 문제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공공성 획득은 고사하고, 교리적인 순수함을 강조하면 강조할수록 계속된 분열과 갈등에 처하게 됐습니다. 메이첸은 먼저 개신교 세계에서 자유주의에 대항했고, 이후 미국장로교단(PCUSA)과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에 대해 충분히 전투적이지 않은 것에 실망하여 새로운 교단(Presbyterain Church in America, PCA)과 신학교를 설립합니다. 이런 분열적 사고방식은 메이첸의 후예들에게도 이어져, 이후 PCA교단은 메이첸과 궤를 같이 하는 5,549명의 멤버들로 이뤄진 OPC(Orthodox Presbyterian Church)교단과 분열됩니다. 제가 메이첸에게 인간적으로 아쉬운 면은 그가 너무나 전형적인 미국 남부 명문가(Southern aristocracy) 출신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당시 남부 귀족층에서 보여지는 “공격 아니면 죽음(attack and die)”의 철학을 공유했을 뿐만 아니라, 약간이라도 자신의 비전과 일치하지 않는 대상들과는 연대하지 않는 경향성을 보여줍니다. 반틸 이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이런 순혈주의 경향성은 더욱 강화됩니다. 바르트가 개혁주의자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 즉 바르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가 주된 신학적 관심사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반틸은 가장 탁월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바빙크조차 개혁교의학에 중세철학(대표적으로 로고스 이론)을 활용하기 때문에 충분히 성경적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이지도 않다고 비판합니다. 더 나아가 OPC교단은 자체의 모든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타교단과 신학교와는 어떤 공식적인 왕래, 심지어 서신 교환까지 거부합니다. 이것이 가져다 준 중요한 결과 중 하나가 OPC 50주년에 그 교단의 멤버가 겨우 19,422명이었다는 점입니다. 놀랍게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 설립식에서 인용한 제 칼빈주의 강연이 일종의 예언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개혁교회가 큰지 작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건강한지 그리고 생명으로 빛나는지가 문제입니다."교리적 순수함만을 내세우며 신앙의 공공성을 멀리하는 것이 과연 건강한 교회의 모습일까요? 한국 교회 여러분, 제가 천국에서 메이첸과 반틸을 만나면 반드시 바빙크가 쓴 아티클인 <교회의 분열에 앞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에 대하여>를 선물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마도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catholicity)에 대한 바빙크의 주장을 인용했다면, 미국 개혁주의의 역사는 확실히 지금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입니다. 부디 한국 교회가 미국 칼빈주의의 과오를 그대로 밟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교회의 순결과 공공성이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는 분들이 있다면, 오해하지 마십시오. 바빙크가 위의 책에서 잘 제시해주었듯이, 기독교와 교회의 보편성, 즉 공공성은 성경이 주장하고 기독교의 역사가 지지하는 것으로 이에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일하게 천지를 만드신 창조주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게서 나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있고, 하나님을 위하여 존재합니다(롬 11:36).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의 거룩한 공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와 성도의 교제(the communion of saints)가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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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인 영화를 즐겨도 되는가
by Kathryn Butler
2020-04-20
난 영화를 추천한 친구를 믿었다. 그런데 영화는 처음부터 아주 끔찍한 살인 장면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내 친구를 째려보았다. 이어서 추격 장면이 나왔는데 길에 서 있던 무고한 사람을 난자하고 몽둥이로 때렸다. 영화의 마지막, 끝까지 살아남은 주인공은 악당을 펜치로 고문했다.내 친구는 팔꿈치를 무릎에 올리고 스크린을 향해 몸까지 기울이며 완전히 영화에 빠져 있었다. 반대로 나는 소파에 파고드는 자세로 앉아있었다. 감독은 관객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도록 자극적인 복수의 언어를 사용하여 해설했다. 잔혹함을 엔터테인먼트로 위장한 영화를 보며 복수와 잔혹함 속에서 승자의 통쾌함을 맛보고, 피에 물든 손가락을 흔들면서 사람들은 환호한다. “이제 좀 끄지,” 난 쏘아붙였다.내가 농담을 한다고 생각한 친구는 웃었지만, 이내 농담이 아닌 걸 알고는 친구의 눈이 커졌다.“아니, 외상 수술(trauma surgeon)을 하는 사람이 왜 그래? 이거랑은 비교도 안 되는 더 끔찍한 걸 다 봤으면서” 친구가 말했다.나는 이를 악물었다. 물론 현실에서 이보다 끔찍한 것을 더 많이 보기는 했지만, 이런 영화처럼 끔찍한 것을 본 적은 없으니까. 사실 피가 튀고 내장이 보이는 이런 영화는 비극이 가져다주는 진짜 후유증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슬픔에 젖은 부인과 고아가 된 아들들에게 칼날과 파편, 그리고 박살 난 자동차 유리창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고들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절대로 상처의 흔적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고, 폭발로 인해 엉망이 된 피부 조직이 앞으로 겪어야 할 수많은 수술도 표현하지 못한다. 총알이 뚫고 지나간 흉터가 어떻게 사형 선고를 대신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흘린 피를 깨끗하게 닦은 후에도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상처받은 영혼의 고통을 외상 치료 센터에서 일하는 내내 보았다. 생명을 앗아가는 방아쇠의 위력을 몇 번이고 목격했다.“나는 저런 거 많이 봤어, 그러니까 제발 좀 꺼 줘” 나는 말했다.폭력적인 미디어는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가?폭력적인 미디어에 대한 논쟁은 반세기 이상 과학계에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10년 전, 미국 소아과학회(AAP)는 부모와 소아과 의사에게 경고하기 위해 폭력적인 미디어와 공격적인 사고 사이의 연관성을 알리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후로 이뤄진 연구는 그 성명서의 내용을 더 보강했는데, 폭력적인 영화와 비디오 게임에 노출된 젊은이들 속에 잠재한 분노, 실제 폭력에 대한 무감각, 그리고 공감 능력 약화 등 분명한 상관관계가 있음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이 주제는 아직도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여전히 뜨겁기만 하다. 일부 비평가들은 AAP와 같은 조직이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공포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특히 이런 연구는 미디어 노출이 실제로 삶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데이터는 상대적으로 빈약하고, 실험실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볼 때 생긴 생각과 느낌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고 지적한다. 잔인하고 참혹한 영화(gory movies)가 공격적인 생각을 가져올 수 있지만, 이것이 실제로 타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증명한 연구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회의론자의 입장에서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없는 상황의 경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의료계의 논쟁은 공공 부문으로 흘러 들어간다. 작년에 있었던 유명한 총격 사건이 전국적으로 충격을 주었을 때, 정치인들은 영화와 비디오 게임을 잠재적인 원인으로 지목했다. 거기에 대한 반발은 신속하고도 격렬했다. 인터넷에는 그런 비난에 대항하는 네티즌으로 넘쳐났다. 총격 사건 이후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유가족의 슬픔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서 공포 영화 ‘The Hunt’의 개봉을 취소했다. 몇 달 후, 영화 ‘조커’(Joker)는 잠재적으로 주인공을 모방한 살인자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논쟁을 일으키기도 했다. 논쟁이 가열될수록 양측에서는 감정의 불꽃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엔터테인먼트가 사랑에 해를 입힐 때그리스도의 제자는 이런 논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스크린에서 끔찍한 장면이 벌어질 때, 우리는 봐야 할까 아니면 고개를 돌려야 할까?폭력적인 미디어와 실제 끔찍한 행동을 연결하는 데이터는 없지만, 현실에서 드러나는 증거는 우리의 숨을 멈추게 한다. 한 평론가는 다음과 같이 썼다. “폭력적인 미디어는 사람이 폭력에 무감각하게 만들고, 타인이 받는 고통과 괴로움에 덜 민감하게 만든다.” 비록 영화 속 유혈이 낭자한 장면이 당장 나가서 폭력을 저지르게 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런 장면이 우리의 공감 능력을 둔감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이런 사실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을 내적 가치와 존엄으로 가득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죄의 짐을 지고 도움을 구하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 동정심을 보이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요 13:34–35).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요1 3:16-17).화면 속 무의미한 폭력에 빠지게 될 때, 우리는 고통받는 형제자매들이 겪고 있는 곤경을 외면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을 사랑하는 우리의 능력이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결국 컴퓨터 그래픽이 주는 스릴을 만끽하기 위해서 우리의 열린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화면이 꺼진 후에 느끼는 고통미디어 속의 모든 폭력이 다 타락한 건 아니다. 단순히 엔터테인먼트를 위해서가 아니라 폭력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해서 폭력이 쓰일 때, 영화적 사실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타락한 자신을 한 번 더 만나게 된다. 몸과 영혼을 모두 파괴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는 우리를 더 깊은 묵상으로 이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가 얼마나 간절하게 구세주가 필요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한다. 무모함이 아니라 정직하고 예민한 태도로 폭력에 접근할 때, 사실적인 영화는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영화는 폭력을 정죄하기보다 폭력 그 자체의 묘사를 추구한다. 많은 영화는 폭력을 마치 금단의 열매처럼, 즉 고삐 풀린 죄가 아닌 화려하고 멋있게 묘사한다. 그래픽 기술은 전례가 없을 정도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살과 사방에 튀는 피를 묘사하지만, 그러한 폭력적인 장면이 내면에 남기는 영향은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은 응급실의 임상의가 알고 있는 것에 별 관심이 없다. 폭력은 아이들을 장애인으로 만들고, 또 부모가 없는 고아로 만든다는 사실 말이다. 순간적으로 쉽게 당기는 방아쇠는 수십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끔찍한 슬픔을 가져온다. 순간적으로 폭발한 분노는 사랑하고, 꿈꾸고, 희망에 찬 수많은 생명을 사라지게 한다. 그로 인한 고통은 순간이 아니라 몇 세대를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다. 폭력은 결코 흥분의 원인이 될 수 없다. 폭력으로 인한 고통은 악이 남긴 표식이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몸은 찢어지고, 살과 피로 물든 사탄의 솜씨가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무엇을 봐야 할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영화가 되었든, 비디오 게임이 되었든, 또는 인쇄물이 되었든 어떤 미디어를 봐야 할 것인지 그 가이드를 얻기 위해서 우리는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아야 한다. 분별에 관한 실로 아름다운 주석을 통해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폭력적인 영화가 참되며 경건한 마음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런 영화가 정결하며 사랑받을 만하며 또 칭찬받을 만한 마음을 일깨우는가? 우리는 바로 이 말씀에 근거해서 옳은 것을 분별할 수 있지 않은가? 폭력적인 이미지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의 길로 이끄는가? 우리의 눈을 뜨게 만드는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키워주는가? 대답이 “그렇다”라고 한다면, 분별하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과 타인을 향한 사랑의 마음으로 영화를 시청하는 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약에 대답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타인을 위한 사랑의 마음을 근거로 해서 화면을 끄도록 하라. 대신 참되고 사랑스러운 것, 즉 하나님과 일치하는 것을 통하여 눈을 즐겁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et Not Violence Entertain You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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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퍼 통신 2: 위기의 시대, 참된 리더십을 바라며
by 김은득
2020-04-09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어느덧 한국은 선거철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위기의 시대에는 더욱더 탁월한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그런 리더십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Seminary, PA)의 설립자, 그레샴 메이첸(J. G. Machen)은 미국에도 아브라함 카이퍼와 같은 참된 기독 정치인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We pray God that he would give us an American Abraham Kuyper – a true Christian statesman…”). 정통 장로교회 교인들(Orthodox Presbyterians)이 메이첸을 미국의 아브라함 카이퍼로 여긴 것은 어쩌면 그의 기도가 실제로 응답된 측면이 있다 할 것입니다. 사실 메이첸과 저는 교회와 사회 전반에 만연한 모더니즘(modernism)에 대항하여 새로운 교단과 학교를 세웠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메이첸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설립식에서 제 ‘칼빈주의 강연’(Lectures on Calvinism)을 인용한 것은 우리 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저와 메이첸의 차이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한국 교회가 받아들인 카이퍼는 사실 제 본연의 모습이라기보다는 미국형 아브라함 카이퍼에 더 가깝기 때문입니다. 또 무엇보다 작금의 한국 교회에 시급한 것은 교리적 순수함(dogmatic purity)이 아니라 공공성(publicity) 회복이라는 것에서 더욱 그러합니다. 한국 교회에는 웨스트민스터 출신 신학자와 목회자가 즐비하다고 들었습니다. 메이첸이 제 강연의 일부를 인용했을 때 무엇을 강조했는지 아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저의 책, 칼빈주의 강연을 읽어보신 분들의 예상과 달리, 혹은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메이첸은 제가 그토록 강조했던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Calvinism as Worldview)에 대해서는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메이첸은 자신과 팔로워들의 상황에 걸맞게 정통 칼빈주의 교리를 방어하기 위한 새로운 개혁주의 교단과 신학교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바로 이 역사적인 장면은 제 본연의 모습과 다른 미국식 아브라함 카이퍼를, 더 나아가 미국식 개혁주의의 특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저에게 있어서 칼빈주의는 그저 교단이나 신학의 영역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일종의 세계관입니다. 여기서 세계관(Weltanschauung, world-and-life view)이라는 것은 사실 제가 창안한 것이 아니라, 칸트가 착안하고 독일 관념론자들에 의해 유행하게 된 용어입니다. 계몽주의 시대 이전의 유럽은 개개인의 신앙이 무엇이든지 간에 초월적 세계관이 우세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는 유럽 전체를 하나 되게 하는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의 자율성을 원칙으로 세워진 모더니즘의 세계관은 정치의 영역에서 프랑스 혁명을, 학문의 영역에서 자연과학 혁명을, 사회의 영역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끌어내면서 유럽인들의 삶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지배적인 시스템이 됩니다. 또한, 세속화 과정(secularization process), 즉 현대성을 기반으로 한 사회적 분화 과정(social differentiation)은 공적 영역(public spheres), 특히 정치와 학문의 영역에서 더 이상 유신론적 사고를 할 필요가 없으며, 그저 신앙과 종교는 사적인 영역에서 개인의 신념과 견해로서 기능할 뿐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아니, 유신론적으로 삶의 영역을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만큼 구시대적이며 미신적인 것도 없다고 여겨졌습니다. 심지어 이런 사회적 발달은 종교라는 미몽에서 현대인들을 깨어나게 하고, 종교 자체를 없애야 할 것이라는 과격한 주장도 있었습니다. 이런 역사적 배경 가운데, 저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세상을 설명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소위 세계관이라는 프레임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주체적인 삶과 객관적인 세상의 실재들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은 모더니스트들의 방법론입니다. 모더니스트들은 다양한 삶과 세상의 실재들을 유기적이든 혹은 기계적이든 하나 되게 연결하는 원칙으로 조직화하기를 선호했습니다. 이 세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원칙으로 발달(development) 개념이 있는데, 자연과학의 영역에서 진화(evolution)로, 사회과학의 영역에서 진보(progress)로 통용되었습니다. 물론 세계관적 방법론이 가지는 환원주의적 경향성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의 다양성을 다치게 할 때가 많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양한 현상들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들 너머의 무언가를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면에서, 모더니스트들의 기획은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현대인들이 경험한 세상의 변화들, 아니 혁명(Revolution)으로 묘사되는 급진적 변화들(그것이 산업 혁명, 과학 혁명,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 혁명 등 무엇이든지 간에)은 누군가의 설명과 해석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왜 그토록 유행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상에 대한 설명과 해석이 세계관이라는 정의에 해당할까요? 세계관에 해당한다면 적어도 인간이 경험하는 근본적인 관계들의 문제(예를 들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세상과의 관계, 인간과 신과의 관계)나 다양한 삶의 영역에 포괄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일관성을 가진 설명이 가능해야만 합니다. 모더니즘은 인간의 이성이라는 원칙을 통해 위의 설명들이 가능하다고 하는 측면에서 세계관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유럽에서 맹위를 떨친 모더니즘은 제 모국 네덜란드에서도 신학(종교)에서부터 정치, 학문, 예술 등 전체 삶의 영역을 아우르는 강력한 세계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더니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정책들, 특히 무신론적인 교육 정책(예를 들어, 가치 중립을 근거로 무신론적 교육을 제공하는 학교에만 국가가 재정지원을 하는 정책)은 유신론적 관점을 가진 학부모들과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학생들의 양심에 큰 불편함을 주었습니다. 저는 인간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든지 간에, 인간으로서 동등하게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자유가 침해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는 종교적 신자라는 정체성이 어떤 성이나 인종, 지위, 민족 등에서 획득하는 정체성보다 더 강력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제 모국에서는 대다수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개혁주의 성향의 민중들이 부유한 엘리트 중심의 모더니즘 신봉자들에게 무시당하고, 이렇다 할 사회 정책적 보호를 받지 못하던 상황이었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 인생의 두 번째 회심은 제가 첫 번째로 사역했던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네덜란드 최고의 대학에서 모더니즘 신학을 배운 제가 사회와 경제적으로 별 볼 일 없는 발투스(Baltus)라는 한 여성의 삶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개혁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강력하게 표현되는지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녀는 그 세계관을 체계화할 수 있는 학문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는 그 회심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개혁주의 성향의 대중들을 대변하기 위해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하부문화의 소셜 네트워킹(언론 기관과 정당, 대학교, 교단, 교원/노동조합 등)을 조직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칼빈주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은 제 모국에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제가 미국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교리나 교단의 신학이 아니라, 세계관으로서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세워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작부터 반정립적(antithetical)이며, 전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제가 모더니즘을 비판한 가장 큰 이유는 다양성을 부정하고, 획일성을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꾸는 네덜란드는 일렬종대로 획일적으로 심은 튤립만 있는 꽃밭이 아니라, 다양한 꽃들이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경쟁하는 꽃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구조화된 다원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자체의 확신으로 경쟁에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또 제가 제시한 칼빈주의는 기존의 신학적 범주를 따라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잘 알다시피,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 over all spheres of life)을 칼빈주의의 중심 원리로 삼았습니다. 그 중심 원리 위에 몇몇 신학적 원칙(영역 주권, 예정, 일반은총 등)들을 가지고 삶의 다양한 영역들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을 통해 행사됩니다. 가령 학문의 영역에서는 진리가, 예술의 영역에서는 아름다움이, 정치의 영역에서는 정의로움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기존의 예정 교리(doctrine of predestination)는 신론이나 구원론에 속했다면, 저는 예정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중재자 없이 어떻게 한 개인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런 면에서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동등하고, 각자가 가진 양심의 자유를 따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국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 확장된 정치적 자유의 기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 성경과 칼빈에게서 발견한 일반은총 교리를 통해 신자들이 학문이나 예술의 영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도왔습니다.최근 몇몇 학자들이 공공신학을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거나 공적 이슈들에 대한 참여로 해석한다면, 바로 제가 세계관으로 제시한 칼빈주의가 일종의 공공신학이 되는 셈입니다. 저는 모더니즘에 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모더니즘의 방법론, 즉 세계관을 활용하였습니다. 사실 이런 방법론의 활용으로 인해 등장한 신칼빈주의라는 용어는 기존의 칼빈주의와 다르다고 조롱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는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통해, 적극적으로 개혁파 대중들이 공적 영역에 참여하고, 다양한 세계관과 경쟁하며, 특히 획일적인 세속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에 대항해 싸우도록 독려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제가 네덜란드에서 성취한 개혁파 민중 해방운동의 성공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메이첸과 미국식 개혁주의와의 비교는 지면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만일 저와 같은 리더십을 한국 교회에, 그리고 한국 정치에 허락하신다면 그 리더십은 무엇보다도 팔로워들이 세상을 등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은 세계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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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신앙적 인식론과 기독교 세계관
by 노승수
2020-04-08
1945년,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인문주의일까”라는 강연에서 최초로 언급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라는 표현은 그 강연 제목처럼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카르트가 진리의 기초로 놓은 방법적 회의, 곧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은 어거스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말의 오마주이다. 이처럼 어거스틴과 근대, 현대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한 구조를 하고 있다. 어거스틴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말의 의미는 우리 마음만이 계시의 빛의 조명을 받아 진리를 간직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계시는 우리 의식을 수납처로 하는 구조를 보여준다. 계시를 받는 우리 인식이 오류를 범하더라도 계시를 대면해서 인간의 자아가 드러난다. 이것은 칼뱅이 기독교 강요의 인식론적 기초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나를 아는 지식”으로 나눈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연계는 근대와 현대에 들어서 무너지고 만다. 앞서 언급했던 데카르트의 오마주는 계시를 걷어낸 채 인간의 의식으로부터 자기동일성을 확장해서 만들어낸 세계였다. 데카르트 당시만 해도 스콜라적인 구조가 신학과 과학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 세계관은 “하늘의 하나님과 땅의 인간”이란 구조를 띠고 있었다. 이 둘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스콜라 체계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재해석으로 본질은 신을 내재하는 관념이었다. 그런데 사르트르가 실존을 말할 때, 실존은 “밖에 서 있다”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바로 무한하신 분, 곧 신의 밖에 서 있다는 개념을 담고 있다. 사르트르는 데카르트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그들의 세계관은 우주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성경은 위로 하늘과 아래로 땅, 그리고 그 아래로 지하 세계의 구조를 지닌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이사야 42장 5절, 44장 24절에서 땅을 조성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묘사한 히브리어 동사 ‘라카(רקע)’는 ‘두드려서 넓고 편편하게 펴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에 비해 하늘은 둥글다고 믿는다. 예컨대 시편 104편 2절에 하늘을 휘장처럼 친다는 표현은 평평한 땅 위에 하늘이 텐트처럼 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사 40:22). 그뿐 아니라 땅은 음부 위에 놓인 것으로 생각했는데 바다 위(시 24:2, 136:6)나 빈 공간(욥 26:7) 위에 달아 놓으신 것으로 묘사하며, 땅에는 4개의 귀퉁이가 있다고 생각했다(사 11:12, 겔 7:2). 땅의 기둥들(욥 9:6, 시 75:3), 주초(시 104:5), 기초(삼하 22:16, 잠 8:29) 등의 표현도 이런 이해를 반영한다. 창조세계 전체는 하늘의 하나님과 통일적 전체로 이해되는 구조를 하고 있다. 로마인들이 판테온 돔의 천장에 구멍을 하늘의 눈(oculus)이라고 부른 것은 하늘과 땅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건축물에 담긴 고대인의 세계관은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8)하는 세계관과 같았다. 이 세계관은 12세기 이슬람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주석을 붙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천체론’(Περὶ οὐρανοῦ)의 라틴어 번역판에서 최초로 사용된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과 소산적 자연(natura naturata)이란 용어에서도 확인된다. 아베로에스의 능산적 자연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하늘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의미하고, 소산적 자연은 피조물의 세계를 가리킨다. 이렇게 창조주와 자연, 초월과 자연은 실질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며 그렇게 하나로 엮여 있는 세계관을 하고 있다.이런 아리스토텔레스 방식의 우주 이해와 신학 이해는 근대에 들어 중력이 발견되면서 큰 변곡점을 맞이했다. 물리학과 미적분학의 발달이 가져온 중력의 발견은 스콜라 신학으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계시를 담는 그릇이 아니라 지식의 기초로 인간의 의식을 확립한 근대의 데카르트 방식은 신학에서도 변곡점을 불러왔다. 코케이우스는 대표적인 데카르트주의를 채택한 신학자였다(바빙크, ‘개혁주의 교의학1’, 116-117). 신적 작정을 중심으로 이해하던 위로부터의 방식은 중력의 체계에 의해서 다양한 중심에 의한 상호작용으로 이해되었다. 스콜라적인 체계는 불가피한 변화에 직면했다. 코케이우스는 최초의 성경신학자로 성경 전체를 언약으로 관통해서 이해했다. 그의 신학은 스콜라적인 전통신학과 대조를 이뤘으며 조직신학의 작정에 따른 이해와도 대조를 이뤘다. 언약의 실체(substantia foederis)는 언약의 경륜(oeconomia)이란 이해를 담게 되었다. 이 변화는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런 데카르트의 방식은 다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자기동일성으로부터 확보된 세계는 전체주의의 문제를 파생시켰다. 칸트, 헤겔, 후설, 하이데거에 이르는 독일 철학은 전체주의의 문제를 낳았다. 그것이 결국 나치즘을 불러왔는데 하이데거는 1933년 5월 1일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선출된다. 이것이 그의 나치 참여의 시작이었다. 전체주의가 빚은 비윤리성을 러시아계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가 지적했다. 그는 데카르트의 제3성찰, 곧 신의 명증성으로부터 타자의 관념을 도출했다. “타자는 나의 일부일 수 없다. 타자는 사유 될 수도 없다. 그는 무한이며, 무한하게 인식된다. 이 인식은 사유로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으로 도출된다.”*라고 했다. 타자 인식이 바로 우리 윤리의 출발점이다. 절대 타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 우리를 윤리적이게 만든다. 더 신학적으로 표현하자면 계시하시는 타자에 대한 인식이 참된 기독교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데이비드 웰스가 지적한 윤리 실종도 이런 자기동일성의 무한 확장이 빚은 계시의 결여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구조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존재한다.”(Si fallor ergo sum)라는 어거스틴 신학으로 돌아가야 함을 의미하며 칼뱅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기를 아는 지식”이라는 인식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______________* Emmanuel Levina, Totality and Infinity: An essay on exteriority, trans. Alphonso Lingis, (Pittsburgh: Duquesne University Press, 2001).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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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그래피 산업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
by Joe Carter
2020-03-30
얼마 전, 네 명의 미국 하원의원이 법무장관에게 편지를 보내어 “외설적인 음란물 생산과 유포를 중대한 범죄 사항으로 기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주기를 당부했다. 법조계 인사들을 통해서도 “그러한 자료를 생산하고 유포하는 자들”에 대한 기소를 조속히 실행해 주기를 요청했다.그 네 명의 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후보자 시절에 음란물을 단속하는 법안을 마련하기로 공약하며 걷잡을 수 없이 퍼져 나가는 포르노그래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외설금지법을 시행하겠다고 말한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까지 트럼프 정부는 그 공약을 간과해 왔다. 결과적으로 불법적인 음란물의 유해성은 감소하지 않은 채 노소를 막론하고 큰 영향을 미쳐 15개 주 의회에서는 포르노그래피가 국민의 건강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한다.”그런데 이 편지와 그 내용을 지지하는 일부 사회단체의 목소리는 정치적으로 우익 성향을 지닌 대중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래서 (스스로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을 포함해) 수많은 보수주의자와 자유주의자는 음란물을 단속하거나 금지하는 법안이 다름 아닌 자신들의 정치적 원리에 위배가 된다고 우려를 표명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외설금지법을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들에 대해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로스 도댓(Ross Douthat)은 다음과 같이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포르노 자체에 대해서 법적으로든 문화적으로든 어떤 다툼이 일어나든 간에 ‘외설금지법은 반(反)보수적이다’라는 주장은 20세기 후반 미국 정치계의 미스터리를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을 제외하곤 거의 모든 이들에게 난센스로 들릴 거다.”기독교인이 음란물에 대한 혐오를 공표하던 시절이러한 변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수많은 기독교인이 외설금지법을 반대하는 입장을 내세우거나 그런 입장을 은밀히 지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다. 특별히 복음주의자들은 음란물의 확산과 보급을 막는 일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여길 정도였다.1976년을 예로 들면, 당시 복음주의자들은 한 대통령 후보자가 ‘플레이보이’ 잡지사와 인터뷰 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했다. 이에 침례교 목사이자 ‘모럴 머저리티’(the Moral Majority)의 공동 창립자인 제리 폴웰(Jerry Falwell)은 이렇게 말했다. “플레이보이와 인터뷰하는 짓은 단시간도 내줄 가치가 없는 추잡하고 야한 잡지에 국가의 최고직이 지녀야 할 신용과 위엄을 넘겨 버리는 행위와 같다.”그러나 40년 후 (폴웰의 아들을 포함한) 여러 복음주의자는 플레이보이 잡지사와 인터뷰를 했을 뿐 아니라 그 표지에 등장하기도 한 대통령 후보자를, 심지어는 플레이보이가 만든 소프트코어 포르노 영화에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했으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어느 플레이보이 모델과 바람까지 피운 대통령 후보자를 지지하게 되었다.누구나 음란물의 발칙한 영향을 생각하며 걱정을 표출할 순 있지만, 자신이 진정으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는 그 행동을 통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같은 기독교인이 포르노그래피의 해악을 다시 한번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지 여기에 그 네 가지 이유를 설명해 보도록 하겠다.1. 포르노는 대부분 규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위험하리만치 해롭게 제작된 상품이다정부는 공공의 안전을 위해 음식을 포함하여 다양한 상품을 통제 및 관리한다. 예를 들어 사람과 동물이 섭취하는 약품이라든가 인간에게 사용하기 위해 개발된 생물학적 약제와 의료 기구, 또 식품 보조제와 방사선이 방출되는 전자기기 또는 화장품과 담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상품을 관리한다. 2018년에 도댓은 ‘포르노를 금지하자’(Let’s Ban Porn)라는 제목이 달린 한 칼럼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좌익과 우익의 도덕주의자들이 함께 씨름하는 구조적인 문제와 달리, 포르노는 단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다시 말해, 제작되고 분배되고 판매되는 상품이다. 따라서 우리가 원한다면, 규제와 단속을 받는 게 마땅하다.”육체의 외관과 성적인 기능 면에서 볼 때, 포르노는 사회 불안과 우울증, 동기 저하, 발기 부전, 집중력 감소, 부정적인 자기 인식 등 여러 가지 문제를 유발하는 상품이다. 게다가 이 상품은 외로움과 이혼 증가, 성폭행, 성희롱이 수용되는 현상과도 관련이 깊다. 그럼에도 포르노는 소비 시장에서 가장 유해한 상품으로 취급되지 않고 정부의 규제 없이 대부분 자유롭게 유통되고 있다.2. 포르노는 두뇌 활동을 방해한다성적으로 노골적인 행위를 다루는 소재는 남성의 두뇌에 있는 거울 신경을 자극한다. 행동을 모방하는 방식과 관련하여 활동하는 거울 신경은 특정 행동을 계획해 내는 운동계를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포르노그래피를 보게 되면, 거울 신경은 흥분을 일으키는데 이는 성적인 긴장감과 더불어 그 충동을 분출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만든다. 그러니까 음란물을 통해 욕구를 해소하려고 하면, 당연히 호르몬 분비와 신경계 활동에 변화가 일어나 결국에는 자기가 주목하는 대상에 종속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하나님의 계획대로 바로 그 대상은 자기 아내가 되어야 하는데, 많은 남성에게 그 대상은 스크린에서 본 이미지가 되고 말았다”라고 휘튼대학교 심리학과 부교수인 윌리엄 스트러더스(William Struthers)는 말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이처럼 포르노그래피는 그 장면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특정 이미지에 종속시키고 만다. 그리고 한 남성이 자기 아내와 연합하는 데 사용되는 생물학적 반응을 강탈함으로써 마침내는 그 연합의 끈을 풀어 버린다.”3. 포르노는 성매매를 조장한다2019년 10월, 두 군데의 유명한 포르노 웹사이트 운영자들과 직원들이 성매매 및 다른 범죄 사실로 인해 기소되었다. 그 범죄에는 몇몇 여성을 강제로 인터넷에 올라가는 포르노 비디오에 출연하도록 한 혐의까지 포함되었다. 이러한 범죄에 대한 수사가 상대적으로 드물게 일어나긴 하지만, 실제로 포르노 산업은 성매매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성매매를 반대하는 비영리단체인 ‘레스큐 프리덤’(Rescue:Freedom)이 아홉 개 나라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성적으로 착취당한 여성의 49퍼센트가 자신들이 성매매에 이용당하는 동안 포르노그래피가 제작되었다고 밝힌 바가 있다.“만일 저들의 상품 중 일부가 아동의 노동력까지 동원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 회사의 상품을 구매하겠는가?” 음란물 제작에 반대하는 단체인 ‘파이트 더 뉴 드러그’(Fight the New Drug)가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이렇게 도전한다. “과연 어떻게 ‘포르노는 거기에 출연하는 자들의 동의를 얻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괜찮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실제로는 당신이 생각하는 정도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그렇지 않은데 말이다.”이에 말로 사피(Marlo Safi)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혹 누군가가 지난해만 285억 뷰를 기록한 무료 포르노 웹사이트에 단 한 건이라도 접속했다면, 그는 협박을 당해 어쩔 수 없이 카메라 앞에 서게 된 성매매 희생자를 본 셈이다.” 기독교인은 음란물을 보며 자신의 몸에 해를 끼쳐서는 안 되듯이, 그렇게 악한 상품에 대한 수요를 조금이라도 늘려 타인의 몸에 해를 끼쳐서도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포르노가 대량으로 소비되는 현실을 알면서도 눈감고 지나간다면, 이는 수많은 아동과 여성 그리고 남성까지 포함해 심각하게 벌어지는 강간 및 성폭행에 공범으로 참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4. 포르노는 미성년자의 정신을 해친다아동 노동 착취를 예방하려고 설립된 기구인 ‘프리벤트 차일드 어뷰스 어메리카’(Prevent Child Abuse America)는 어린아이나 청소년이 포르노그래피를 볼 때 자동으로 성적 흥분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 이런 경험은 그들이 눈앞에 있는 장면을 실제로 ‘좋다고’ 여기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사실은 그들의 두뇌에서 그 장면이 좋다는 ‘승인’이 떨어지기도 전에 몸이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과정일 뿐인데 말이다. 게다가 어린아이와 청소년은 그러한 음란물에 둔감하게 되어 아무렇지도 않게 성적인 행동을 다른 아이에게 묘사할 수 있으며, 특히 청소년은 위험 수위가 높은 행동까지 따라 할 수 있다.많은 사람은 포르노그래피에 자녀들이 노출되지 않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부모에게 있다고 쉽게 말하지만, 여러 조사에서 드러나듯이 부모 홀로 그 책임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다.10년 전 몬트리올대학교의 한 연구팀은 가정과 여성 폭력에 관한 학제 간 연구를 진행하는 센터의 후원으로 포르노그래피가 남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연구자 중 한 명이었던 사이먼 루이스 라쥬네스(Simon Louis Lajeuness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원래 우리는 20대 남성 중 포르노그래피를 본 적이 없는 대상부터 조사를 시작하려 했는데, 그에 해당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포르노는 젊은 세대 가운데 너무 많이 퍼져 있어 18세 미만 남성 중 93퍼센트가 또 같은 연령대의 여성 중 62퍼센트가 포르노를 본 적이 있다고 추정된다. 미국에서는 자녀들의 성 의식이 형성되는 데 포르노만큼 악영향을 미치는 상품이 없다. 따라서 포르노 산업을 더 강력히 규제하고 가능한 대로 금지해서라도 우리 가족과 다음 세대를 지키는 게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이다.때로는 ‘어린아이를 생각하라’는 식의 대의를 내세우는 접근이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에 대한 변명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포르노는 존재해서는 안 될, 그야말로 구제 불능의 악독한 상품이다. 따라서 포르노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일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이 아니라, 잘못된 성 의식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리 아이들을 지키는 일이다.모든 시대와 문화에는 극도로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는 죄악 된 행동이나 관습이 나타난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영혼을 파괴하는 가장 끔찍한 관행을 들라면, 포르노를 소비하는 행태를 꼽을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이웃을, 그중에서도 어린아이와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을 사랑한다면, 더 이상 포르노가 유통되는 현실에 대한 어떤 구실도 만들지 말고 그 산업을 금지하는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만일 당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는 상식적인 의무나 인류 사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도와야 한다는 하나님의 기준과 다른 정치적 원리를 고수하고 있다면, 바로 그 견해를 재평가해 보길 바란다. 혹 당신의 정치철학으로 빚어진 우상을 만들고 있진 않은지 확인해야 할 테니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Reasons Christians Should Support Banning Pornography번역: 장성우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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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노
성매매
미성년자
위험
나는 왜 계속해서 클릭하고 있을까?
by Adam Pohlman
2020-03-19
마침내 아이들을 침대에 눕혔다. 평상시와 다름없이 지친 일과를 보낸 나는 뭔가 재미있는 게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SNS를 열고 살펴보기 시작했다.이곳저곳 클릭을 하면 할수록 나의 영혼은 점점 더 불만족의 구덩이로 빠졌다. 그게 무엇이든지, 뭔가 내 시선을 끌 대상을 찾았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만족을 주지 못했다. 이미 가지고 있는 물건을 사라는 광고가 수도 없이 화면에 떴다. 정치 토론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화려한 꽃을 배경으로 한 최신 뉴스는 내 지친 영혼에 그 어떤 힘도 주지 못했다.내게 필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찾았다. 거기에 중독되어 있었다. 왜?이곳저곳을 클릭하고 찾아봐도 별다른 게 없다는 것을 알면서 우리는 왜 마우스 클릭하는 것을 멈추지 못할까? “이 정도면 충분해!”라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도, 왜 내 손가락은 계속 움직이는 걸까?오래된 문제종종 삶이 지겹게 느껴진다. 일찍 일어나 온종일 일을 하지만 꾸중을 듣기도 한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매일매일, 언제나 똑같다. 우리는 이런 단순한 일상을 깨고 싶다. 그래서 소파에 몸을 묻고 넷플릭스 최신 드라마를 보거나, 의자에 앉아 그날 신문을 뒤적인다. SNS를 열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지 들여다본다. 뭔가 새로운 것을 향한 열망은 쉽게 소모적인 행동으로 바뀐다.스트리밍 영화와 비디오 게임, SNS가 주는 악영향에 맞서 싸워야 한다. 새롭고 흥미로운 것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래된 습성이다. 바울은 사도행전 17장, 아테네에서 전도할 때 바로 이 문제에 직면했다.동역자를 기다리는 동안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바울은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에 자극을 받았다(행 17:16). 거짓된 신을 예배하는 것으로 가득 채운 것은 어리석은 남자들과 여자들이 아니었다. 나름 위대한 철학으로 무장된 사람들에 의한 우상숭배였다. 위대한 철학자들은 아테네의 언덕(Areopagus)에 모여서 세계관을 토론했고, 또 사회를 위해 가장 좋은 종교가 무엇인지를 탐구했다. SNS의 고대 형태라고도 할 수 있는 이곳에서는 세상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나누는 모든 형태의 의견이 다 환영받았다.그들은 자신의 지식 창고를 채우고, 대화를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최신 트렌드와 뉴스를 갈망했다. 온종일 더 큰 흥미를 가져다줄 새로운 정보를 찾아서 보내곤 했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행 17:21). 아테네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찾았고 결코 만족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기꺼이 그들의 식탁에 초대했다. 그에게서 뭔가 재미있는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우리 귀를 간지럽히는 호기심아테네에서 바울이 설교한 주민들은 그가 나중에 디모데에게 말한 사람들과 비슷하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딤후 4:3). 우리는 이런 경고를 번영 복음을 가르치는 설교자 또는 컬트 종교 정도에만 국한한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제자에게 경고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그리스어 knēthō로서, 종종 가려움으로 번역된다. 이것은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싶은 호기심을 묘사하는 것으로 어떤 사전의 정의에 따르면 “새롭고 신선한 정보 조각”을 향한 충동을 의미한다. NET 성경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서 이 단어의 뉘앙스를 드러냈다. “그들은 욕망을 따르며, 또한 자신들을 위한 선생을 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충족되지 않는 새로운 것을 듣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만족하지 않는 마음을 드러낸다. 언제나 좋은 소식을 찾지만, 결코 찾을 수 없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잠 27:20).새로운 소식을 위한 이 끝없는 여정은 미묘한 방식으로 우리 삶에서 드러난다. 현재 세상의 흐름에 대해서 최신 정보를 제공하는 지속적인 뉴스 피드, 운전하는 중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메시지 알림, 한 번 더 클릭하라는 웹 사이트 화면의 유혹, 친구와 함께 나누는 잡담, 최신 기계를 갖고 싶은 욕구, 최신 TV 드라마 또는 스포츠 이벤트에 관한 대화에서 뒤 쳐지고 싶지 않은 욕망.이런 욕망이 과거에 우리를 만족시킨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같은 시도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새로운 무언가를 찾고 있는가? 이렇게 쉬지 않는 호기심으로부터 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끝없는 육체의 추구를 위해서 우리는 이 죄로 가득한 세상 밖에서부터 오는 뭔가가 필요하다.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진‘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에서 C.S. 루이스(C.S. Lewis)는 이렇게 썼다. “이 세상 그 무엇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이 우리 속에 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설명은 우리는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것이다”(136-37). 우리의 욕망은 마치 부츠를 신고 운전할 때 느끼는 발바닥 가려움과 같다. 부츠를 신은 발바닥의 가려움은 그 어떤 것으로도 긁을 수 없다. 우리의 귀를 진정으로 만족하게 하는 것은 오로지 복음뿐이다. 새로운 소식이 만족하게 할 수는 없다. 오래된 이야기, 모든 세대에게 이미 들려진 최고의 소식밖에는 없다. 예수님만이 사탄의 속삭임과 공격하는 유혹을 피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길 수 있었다. 승리의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른 소식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헛된 노력에서 해방을 약속했다. 생명을 향한 유일한 길, 충만한 기쁨, 끊임없는 즐거움은 그를 따르는 것이다(시 16:11).육체의 욕망이 끄는 막다른 삶의 길에서 우리를 완벽하게 구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리에게 성령과 그의 말씀을 주심으로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을 해소하는 가장 분명한 소식, 그것을 언제나 상기할 수 있도록 하셨다. 수다 떨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운전하다가 막 도착한 메시지를 보고 싶을 때, 세상 현안이 궁금할 때,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라.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 107:9).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Scrolling for Significanc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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