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예술과 문화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카이퍼 통신 3: 직장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by 김은득
2019-04-11
To 한국의 기독 직장인들에게 여러분, 제 이름은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입니다. 한국의 크리스천 직장인들에게 어떻게 여러분의 일터에서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이 드러나도록 할지 권면의 편지를 쓰게 되어 기쁩니다. 종종 제가 “열 개의 머리와 백 개의 손을 가진” 괴물같이 묘사되곤 하는데, 제가 경험한 직업들을 열거하면, 여러분들조차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목사, 저널리스트 (2만여 아티클의 기고자이며, 일간 신문과 주간 신문의 편집자), 베스트셀러 작가, 대학교수이자 대학 설립자, 교육 및 사회 운동가, 국회의원, 국무총리에 이르기까지 (저의 시대엔 직업이 아니었으나, 분명 여러분의 시대에는 직업이 되었을 것까지 예상한다면) 왠만한 직업은 다 경험해 보았고, 각각의 직업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요즘 한국에선 평생 직장의 개념이 깨졌다고 들었는데,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저야말로 이직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경험들을 토대로 여러분을 위한 구체적이며, 실천적인 지침을 제시하는 것을 다음 기회로 미루고자 합니다. 그것보다는 저의 이상주의적(idealistic) 성향에 따라 우선 원칙적으로 크리스천 직장인 여러분들과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각자가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더 심화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대개의 크리스천들이, 심지어 기독 직장인들조차, 교회 일에는 매우 헌신 될지라도, 세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경우가 많고, 그런 무지가 저에 대한 혹은 제가 한 말에 대한 무수한 오해를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는 제 말이 그렇습니다. 이 말 자체가 상당히 신정주의적(theocratic) 색채를 띄는 것도 사실이지만,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전근대적 인식도 오해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 주권을 강조할 때 청중은 경건주의적 칼빈주의자들(화란에서) 혹은 근본주의적 칼빈주의자들(미국에서)인데,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그 곳에 실현하는 것보다, 세상을 멀리하면서 교회든 신학교든 자신들만의 게토에서 안주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기독직장인 여러분, 저는 결코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경향성에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선합니다. 한때 한국에서 신앙이 좋으면 세상에서의 직업을 가지는 것보다 목회자가 될 것을 부추기는 경향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세상에 드러내는 가장 좋은 교두보를 가지는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저는 교회에서 소명을 추구하는 것은 성스럽고, 세상에서 꿈을 이루는 것은 속되다는 그런 이원론을 격파하는 의미로써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제 삶에서 정치에 참여한 이후, 더 이상의 목사직을 수행하지 않았으며, 또한 제가 경험한 여러 직업 가운데, 제 스스로 저널리스트로서의 직업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겨 온 것을 상기시켜 드립니다. 또한 성스러운 영역과 세속적인 영역으로의 중세적 구분은 성스러운 영역을 상부에, 세속적인 영역은 하부에 위치시키는 잘못된 위계질서를 부여합니다.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직업이 성스럽다는 의식을 통해 이런 잘못된 도식을 깨뜨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적으로 계몽운동 이후, 정치적으로 프랑스 혁명 이후 발생했습니다. 교회 혹은 종교라는 영역을 제외한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하나님은 제거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누구도 교회의 장벽을 넘어서, 하나님을 삶의 영역의 준거인 것처럼, 말하고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설령 하나님을 기준으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하기라도 하면, ‘구시대의,’ ‘전근대적인,’ ‘미신적인,’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과 더불어, 프랑스 혁명의 시대정신은 모든 삶의 영역을 현대적이 되라고 부추겼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자유와 관용 및 다양성의 증진을 촉진시키는 부분이 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의 정체성에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는데, 소위 근대성 혹은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무신론적 인간은 공적 영역에 마음껏 참여하고, 반대로 유신론적 인간은 신앙을 가지고 공적인 삶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을 억압하였습니다. 이것이 정녕 프랑스 혁명이 약속하는 자유와 관용 및 다양성의 증진입니까? 왜 신앙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전근대적인 혹은 미신에 빠진 사람과 같은 대우를 받아야합니까?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자칭 기독교인들이 세상이 자신들을 무시하니, 소위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세상과의 관계를 잘못 해석/적용한 것입니다. 즉 세속화되어져 가는 세상과 격리됨을 통해, 우리들만의 신앙과 경건을 추구하는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미국의 기독교인들은 대학이라는 공적 세계를 떠나 그들만의 신학교(seminary)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대학교, 심지어 기독교인들이 세운 대학교마저, 온통 무신론자들의 전당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창조하신 세상을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계속해서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인간의 칭의를 강조하여 교회 영역에 머무는 루터란이나 세상을 필요악으로 보기 때문에 세상과 거리를 두는 재침례교도와 달리, 역사적으로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칼빈주의자는 교회의 영역을 너머, 세상의 영역에까지 나아갈 수 있는 신학적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고백하는 칼빈주의자들이 교회와 세상, 은혜와 자연, 신앙과 이성의 반립적 도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한국은 드물게도 칼빈주의 신학이 우세한 나라 중 하나라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 청년들을 신앙으로 잘 키워서, 공적 영역에 참여함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활동들을 하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의 우물 안 개구리처럼 가둬놓는 일이 빈번하다고 하니,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너무 교회에만 매몰되어 있는 거룩한 백수가 많다고 듣기도 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도록 돕기 위해 제 자신이 구성한 기독교 세계관이 80년대 사회참여를 위해 유행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또 최근에 한국 교회의 공공성 회복이라는 화두와 더불어 다시금 유행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으로 요약된 기독교 세계관은 사실 기독 직장인들에게 너무나 필수적이어서, 약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적으로 창조 영역 자체의 선함을 강조함으로써, 자연과 은혜를 이원론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을 버리도록 도울 뿐만 아니라, 은혜가 자연을 회복하는 것을 통해 세상에 참여하면서, 세상을 변혁시키도록 돕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할 때, 특히 한국 직장인들의 경우, 대개 그 영역 자체를 변혁시키는 것이 그저 신우회를 조직하는 것으로, 예배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만드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무능하면서도, 충분히 회사 내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게 됩니다. 직장에서 예배와 성경 공부에 열심을 내는 것을 너머 직장에서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고 탁월함을 발휘하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에 걸맞습니다. 직장은 일을 제공함으로서 인간이 이 세상에서의 존재 의의를 갖도록 도우며, 인간 자체의 번성을 위해서도 중요한 처소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학문의 세계는 진리를 추구함으로서, 예술의 세계는 아름다움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번영을 추구합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모든 삶의 영역을 관장했던 중세 교회로부터 국가나 학문, 예술 세계가 분화과정을 거쳐 독립된 영역으로 세워진 것을 늘 지지해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각각의 영역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 때 심으신 각 영역의 원칙과 규범대로 운영되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렇게 각 사회 영역을 분화시키는 현대성 혹은 합리성은 충분히 성경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가 각 영역을 주관하는 것처럼, 전근대적으로 그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려 한다면, 다원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삶의 영역에 참여할 때, 우리의 신앙을 벗어 던지라는 합리성은 문제가 많을지라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각 영역에 걸맞는 원칙과 규범에 충실하라는 합리성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대 사회에 걸맞는 “세상에 거하나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개념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참여해 세상을 바꾸어야 할 젊은이들을 교회 내 거룩한 백수로 세상을 멀리하게 하거나, 혹은 그나마 세상에 참여할 때조차도 회사에서 성경공부를 자주 하는 것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한국의 기독 직장인들 여러분, 세상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합시다. 바로 여러분의 직장이 바로 세상을 섬기는 귀한 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 정하신 세상의 각 영역 원리를 존중합시다. 죄악으로 타락한 부분을 걸러내고,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창조 목적에 걸맞게 여러분의 직장을 회복하도록 열심을 냅시다. 다만 그 회복이 성경공부나 신우회 만이 아닌, 여러분 직장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도록 탁월한 직장인이 됩시다.
문화
세계관
카이퍼
하나님의주권
기독직장인
창조목적
회복
정체성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by Jon Bloom
2019-04-10
예수님과 부자 청년의 만남은 언제나 나를 불편하게 한다. 나는 중산층 미국인이다. 이 말의 의미는, 지구에 사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전혀 알지 못하는 부유함을 내가 누린다는 것인데,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본다면 이 부요함의 수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숫자는 앞으로 훨씬 더 적어질 것이다. 전 세계적인 면에서나 또 역사적인 면에서, 내가 속한 상대적 환경은 이러하다. 부자 청년에 대한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그가 풍요로운 형태의 종교적, 문화적 환경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자신이 영적 현실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점이다.그 청년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아마 비슷했을 것이다. 공관복음서가 그리는 그에 관한 짧은 묘사와 또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그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보건대, 이 부자 청년은 야고보서 5장 4절부터 6절에 등장하는 거만한 부유한 억압자와는 많이 다른 것 같다. 이 청년 주변의 사람들은 어쩌면 그가 누리는 풍요야말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시는 증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아무튼 이 청년은 예수님께 달려와서 무릎을 꿇은 채 구원받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를 물을 정도로(막 10:17) 영적으로 열심이었다. 그는 경건의 모든 모양을 지키고 있었다. 예수님이 열거한 계명을 어린 시절부터 모두 지켰다고(또는 그랬다고 혼자 착각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고백했다(막 10:19-20). 또한 그는 신실했다. 마가가 “예수께서 그를 눈여겨보시고, 사랑스럽게 여기셨다”(막 10:21)라고 기록했을 정도이다. 그는 이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부족했다.영적 열심, 신실함, 그리고 겉으로 드러나는 경건함에서 그는 주변의 그 누구보다 뛰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러한 면모들이 과연 믿음의 모습일까? 아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믿음은 '신뢰'로 드러나고, 신뢰는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우리는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신뢰하는 법이다.네가 무엇을 믿는지 보여다오열정이 넘치고 신실한 이 젊은이에게 예수님께서 주신 가장 큰 사랑은 그가 섬기는 진짜 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 10:21). 그제서야 그는 자기가 믿는 진짜 신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의 초대를 뒤로 하고 떠나갔다. 매우 '슬퍼하면서.' 그는 왜 예수님의 초대를 저버렸을까? 왜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갔을까? 그 답은 바로 청년에게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다(막 10:22). 예수님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엄중한 판단을 내리셨다:"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막 10:23–25).부자 청년이 진짜 결정적인 순간을 맞았을 때, 그는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믿음의 대상으로 부와 소유를 선택했다. 즉 그의 부요함이 곧 그의 신이었다. 그러나 그가 믿는 풍요의 신은 이 청년이 천국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당황스럽지 않은가? 예수님의 판단을 들은 제자들이 이렇게 말했을 정도였다.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막 10:26). 전세계적인 빈곤을 고려했을 때 상대적으로 큰 풍요 속에 사는 중산층으로서, 나는 이 이야기가 마치 내 이야기인 듯하여 무척 당황스럽다. 스스로의 믿음에 관해서 나는 자가 진단이 아닌(고전 4:3), 오로지 하나님의 진단을 신뢰할 뿐이다(고전 4:4). 진짜 믿음의 여부는 결정적인 순간에만 드러나기 때문에(벧전 1:6-7; 약1:2-4; 고후 13:5), 우리는 시편 속의 청년처럼 예수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만약에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유함을 버리라고 하지 않고 대신 부요함 속에서 신실하게 살라고 하신다면, 우리는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부요함 속의 믿음이 필요하다.부요함 속의 믿음바울은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말했다."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2–13).선택권이 있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부요함 속의 믿음을 원하지 가난함 속의 믿음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 그럴까? 이는 우리가 아직까지 물질적 번영이 가진 위험한 본질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로움을 감당하는' 데에는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고 했던 바울은 말은 진담이었다.'부요함'(번영)과 '필요함'(궁핍)은 전혀 다른 환경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전혀 다른 이 두 가지 환경을 제대로 다루는 믿음이 필요하다. 완전하게 다른 이 두 가지 환경에서 쓰이는 믿음 근육(faith muscles)은 절대 동일하지 않다. 궁핍할 때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근육이 필요하다. 반면, 부요함 속에서는 풍요로운 물질적 안전이 아닌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 근육이 필요하다.사람은 누구나 궁핍을 두려워하지 번영을 염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우리는 부요할 때보다 궁핍할 때 믿음을 더욱 잘 발휘할 수 있다. 궁핍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확실하게 파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에서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궁핍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리며 그분을 더욱 찾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이다.그러나 부요할 때 발휘하는 믿음은 다르다. 영적이고 또 심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풍요로울 때 우리는 훨씬 더 속기 쉽다. 이 때는 많은 유혹 앞에서도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 진정으로 하나님 한 분만을 소중하게 섬기는 믿음이 필요하다. 물질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는 위기감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공급이 갈급하지 않기 마련이다. 풍요는 나의 손에 많은 선택지가 있음을 의미하고, 또 갖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돈과 시간을 쓸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우리의 믿음 생활에 너무도 위험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힘들다고 경고하신 것이다. 스스로를 시험해 보라. 당신이 열심을 다해 하나님을 찾았던 때가 언제인가? 궁핍할 때인가 아니면 부요할 때인가?하나님을 선택할 때물질적인 안정을 갈구하는 것은 쉬울지라도 이미 누리던 부요함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풍요까지 버리려는 사람에게는 조금은 다른 종류의 믿음 근육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유일한 선택지일 때보다 내가 가진 선택지가 많을 때에, 우리에게는 훨씬 더 큰 믿음이 필요하다.이와 같은 이치 때문에 추수할 대상은 많은데 일꾼이 적은 것이다(눅 10:2). 풍요로운 하나님 나라를 더 깊이 경험하기 위하여 세상의 궁핍함을 맛보려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렇기에 조지 뮬러(George Muller)나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와 같은 성도가 보여준 믿음이 위대한 것이다. 이들에게는 얼마든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돈을 모아서 사역을 감당하고, 힘든 상황을 피할 선택지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발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선택했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상황을 맞은 게 전혀 아니었다. 그들이 이렇게 행한 이유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그분이 자신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히 11:6). 바울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부요함과 궁핍함 모두를 다루는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 비밀은 그들의 보물인 하나님만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이었다.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상대적 부요 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부자 청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청년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교회 역사가 보여주는 바는 명확하다. 교회에 돈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타락하고 분별력을 잃으며,죄에 대해 점점 더 무감각해졌다. 그리고 잃어버린 영혼을 향한 갈급함이 점점 더 식어갔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지금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이 더 힘들어진 세상이다.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희망없이 버려두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막 10:27). 그러니 우리 모두 예수님께로 뛰어가자. 불가능한 일을 하게 하시는 그 분의 힘에 의지하자. 그리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이렇게 간구하자.주여,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오로지 당신만을 나의 가장 소중한 보물로 믿고 의지하게 하소서. 내가 가진 경제적인 안정을 잃더라도 당신의 나라를 얻게 하시고, 유혹에 휩쓸려 영혼을 잃는 우를 범치 않게 하소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나의 생명, 가족, 시간, 돈, 소유물, 그리고 미래까지 주님이 원하는 곳에 제가 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비록 다 잃을지라도 그리 하겠습니다(빌 3:8). 주님, 지금 내게 오셔서 내 마음을 살피시고 나의 믿음을 시험하여 주소서.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Lord, All I Have Is Yours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영적열심
신실함
경건함
부유함속의믿음
자족하는법
조지뮬러
허드슨테일러
생명과 자유
by Robert Godfrey
2019-04-03
'생명'과 '자유'는 강력하고 긍정적인 용어이다. 우리는 "생명을 옹호하고"(pro-life) 또 "자유를 옹호"(pro-liberty)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정의할 때는 주의가 필요한데, 이성뿐 아니라 감정을 자극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명 및 자유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국가의 역할을 고려할 때, 이 두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생명'을 정의하는 데에는 정치적 또는 종교적 방법이 있다. 정치적 측면에서 생명은 생물학적으로 정의된다. 국가는 생물학적으로 생명에 손상을 주거나 앗아갈 수 있는 행동이나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국민의 '삶'을 지킨다. 국가는 이를 위해 때로는 방어적인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 이 모두가 다 시민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국가는 국민의 육체적 안녕을 보호하고 봉사하도록 경찰을 운영할 뿐 아니라, 우리가 숨 쉬는 공기를 오염하는 물질까지도 규제한다. 그러나 이 '생명'이라는 단어가 종교적으로 정의될 때에는 좀 더 풍성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얼마든지 죽은 상태일 수 있다고 말한 바울처럼 말이다(딤전 5:6). 또 예수님은 어떠한가? 모세를 인용하면서 단순한 생물학적 생명과 진정한 종교적 생명을 분명하게 구분하셨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마 4:4). 빵은 생물학적 건강을 유지하고 증진시킬 수 있지만, 영적이고 종교적인 생명은 오로지 우리를 새롭게 하고 구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유지된다. 이런 종교적 의미까지 포괄한 생명을 지지하거나 보호하는 정부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생명은 오로지 은혜를 통한 성령님의 축복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바울이 로마서 13 장에서 불의한 행동을 하는 자가 두려워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은 로마 황제였다. 로마 황제가 정한 법과 악은 모세의 율법이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런 맥락에서 악은 그때나 지금이나 공공을 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의미한다. 다른 사람의 신체 또는 재산을 훼손하는 행위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신앙, 우상 숭배, 신성 모독, 탐심 등을 포함하는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의미의 '악'은 아니다. 로마 황제는 그런 악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로마 황제에 대해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라고 했다(롬 13:4). 국가는 생물학적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과 정책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함으로써 삶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평범한 시민이 살아가는 데 있어 정부가 생물학적 삶을 증진하고 보호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비록 증진까지는 아니더라도 영적인 삶을 허용할 것도 기대해 본다.'자유'라는 말도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정의할 수 있다. 종교적으로 말해서, 최상의 자유는 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모순적으로 들리겠지만, 그건 또 다른 얽매임을 의미하는데, 바로 의의 종이 되는 것이다.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 한편 정치적인 자유는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 나 자신에 대해서 완전한 책임을 갖고 나라의 간섭을 받지 않으며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자유가 타인과 타인의 자유 또는 재산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제재를 받는다.다른 말로 하면, 정치적 자유는 내가 짓는 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죄를 지을 정치적 '권리'까지 포함한다. 침례교 친구들은 내가 아기들에게 침례를 베푸는 것을 죄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말해서, 양심을 걸고 그 문제를 놓고 깊은 연구까지 했던 성직자로서 나는 침례 의식을 행하는 것에 대해 자유롭다. 침례는 침례를 받는 아이 또는 그 부모에게 아무런 정치적 해를 끼치지 않는다. 침례는 다른 사람의 건강, 재산 또는 자유를 해치지 않는다. 나는 다른 침례교 형제들이 행사하는 정치적 권리를 변호하며 그들 또한 양심에 따라 얼마든지 필요한 의식을 행할 수 있는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들 또한 내게 동일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듯이 말이다. 모든 사람이 자유를 적절하고 현명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또는 자유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에 자유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기독교 신학에 따르면 자유는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 즉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순종이라는 목적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야 한다. 억지로 하는 종교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이 그분의 놀라운 은혜에 감동되어 절로 우러나오는, 자유롭게 터져나오기를 바라신다.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딤전 1:5). 바울의 관심은 사랑이 올바른 동기에서 나오는가, 그래서 그 사랑이 신실하고 양심적인가의 여부였다.바울은 교회에 닥친 기근 구제라는 냉엄하고 실질적인 문제를 다룰 때조차도 행동 그 자체와 더불어 동기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기부가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은 그 행위를 좋아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정치적 자유를 수호하는 데 가장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왜냐하면 정치적 자유는 종교적 신실함을 지키려는 우리의 관심과도 동일선상에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또한 문화적 유익 때문에 자유를 옹호한다. 문화는 사람들의 재능, 통찰, 그리고 각종 공헌이 모여 만들어진다. 만약에 재능과 공헌을 억누르는 정치적 환경이라면, 사람들은 재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고, 하더라도 다른 나라를 찾을 것이다. 퀴리 부인(Marie Curie)은 고국 폴란드에서 방사능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없었기에 파리로 올 수밖에 없었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Mstislav Rostropovich)는 자신의 첼로 경력 대부분을 고국 러시아 밖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보냈고, 소련이 완전히 몰락한 이후에야 말년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1932년 고국 독일을 떠났다. 자유로운 문화였다면, 이 사람들이 고국을 떠날 필요가 없었다. 결국 이들의 고국은 그들의 기여를 압수해 버린 셈이다. 버지니아 장로교인들은 18세기 후반 이미 정부와 자유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1776년 10월 24일 하노버 장로회가 버지니아 주의회에 종교 자유를 위해 제출한 탄원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다. "우리는 종교 시설이 공동체의 일시적인 이익에 매우 해롭다는 사실을 천명할 것을 간청하며 [중략] 그런 시설은 인구를 크게 줄이고 결과적으로 예술, 과학 및 제조업의 발전을 현저히 저해하기에"(역주: 하노버 장로회가 제출한 탄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종교와 정부의 역할 분리에 대한 심도 있는 내용이 담겨있을 뿐 아니라, 정부가 교회를 도우려 하면 오히려 해롭다는, 매우 급진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에 인용된 내용은 타락한 성직자 봉급을 포함해서 필요 이상으로 교회 운영에 돈이 많은 들어가는 데도 주정부가 손을 놓고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주정부가 적극적으로 교회의 개혁을 추진하기를 바라는 동시에 버지니아 주가 다른 주에 비해 뒤떨어지는 상황을 막기 위한 탄원으로 이해된다).자유와 소위 말하는 '문화 전쟁''문화 전쟁'은 필요 없다. 존 위더스푼(John Witherspoon)과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힘을 합쳐 미국이라는 공화국을 설립한 이후, 세속적 세력과 종교적 세력은 항상 함께 노력해 왔다. 세속적 관점과 종교적 관점의 정확한 차이가 반드시 경쟁 또는 ‘전쟁’일 필요는 없다. 신정 국가를 추구했던 이슬람교나 중세 기독교, 또는 나라 차원에서 세속주의를 강요하는 프랑스(무슬림은 학교에서 히잡을 착용할 수 없다)와 달리, 미국은 그 중간을 선택했다. 미국이라는 공화국에서는 (세속국가인 프랑스와 달리) 정부가 종교를 보호하지만, 그렇다고 (이슬람교나 중세 가톨릭과는 달리) 정부가 종교를 강요하지는 않는다.평상시 시민 사회에서는 결코 용인될 수 없는 일들, 예를 들어 살인과 야만 행위까지도 전쟁 중에는 허용된다. 그러므로 '전쟁'이란 의미는 총체적 갈등, 더 이상의 규제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세속적이든 아니면 종교적 두려움 때문이든, "지금 우리의 문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라고 설득된다면, 문명 보존이라는 절대 목표를 가진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웬만한 구속과 인간됨은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는 문명을 위해 문명의 가장 기본인 정중함, 예의가 희생된다.왜 우리는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으며 또 승리해서도 안 되는가기독교인은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문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첫째, 행여 과반수를 얻어 강제적으로 우리의 의지를 강요할 수 있다고 해도, 그건 이긴 게 아니라 진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순종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일말의 기회조차 앗아간 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감옥에 가지 않으려고, 또는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겉으로만 기독교 원칙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는 회심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된 사람이고,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문화조차 사라지게 된다.둘째, 영향력을 끼치는 도구로 강압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발전을 만들어 내는 두 가지 도구를 상실하게 된다. 도덕적 설득과 (당신의 선행을 볼 수 있는) 모범이다. 강압에 의존함으로 우리는 도덕적 설득과 모범에서 실패한다. 강압을 선택할 때, 우리는 사도들이 사용하기를 거부한, 바로 그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다("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고후 10:4). 따라서 소위 말하는 문화 전쟁에서 질지도 모르는 게 아니라, 우리는 이미 졌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른 이들을 회심시키기는 커녕, 그들이 우리를 회심시킨 꼴이 된다.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의 도구였던 전체주의와 강요를 사용하며 양심적 신앙과 순종을 버리도록 할 것이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Life and Liberty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정지척자유
종교적자유
순종
문화적유익
문화전쟁
생물학적
종교적생명
영적 싸움에 지친 사람들에게
by Brian G. Hedges
2019-03-27
거룩한 싸움에 지쳐서 이제는 더 버틸 힘이 없다고 느끼는가?육상 선수들은 간과 근육에 글리코겐이 고갈되어 극심한 피로를 경험할 때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다고 말한다. 크리스천들도 영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한다. 만일 당신의 영적 삶이 계속해서 몇 걸음 진보했다가 다시 몇 걸음 퇴보하는 식이거나, 당신이 기도하며 결심한 후 여러 번 다시 시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죄로 여전히 씨름하고 있다면, 그리고 너무나 지쳐서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영적 투쟁을 이제는 그만 두고 싶다면, 당신은 영적 난관에 부딪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상태이다.하지만 실망하지 말라. 영적 싸움에 지친 사람들에게도 희망은 있다. 다음의 진리를 가슴에 품으라. 영적 갈등은 늘 존재한다. 영적 전투는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전쟁은 끝날 것이다.영적 갈등은 늘 존재한다군인들은 전쟁에서 전투를 해야 한다. 육체의 정욕은 영혼을 거슬러 싸움을 청하고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2:11; 5:8). 우리는 늘 죄와 사탄의 유혹과 씨름하고 있으며, 이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J. C. 라일은 그의 고전 ‘거룩’(Holiness)에서 “참 기독교는 투쟁하고 싸우고 전쟁하는 종교이다. 은혜가 있는 곳엔 갈등이 있다. 크리스천은 군사이며, 전쟁 없이 거룩에 이를 수는 없다. 구원받은 영혼들은 항상 영적 싸움을 해 온 사람들이다”라고 했다.놀라지 말고 용기를 내라. 이런 경험을 하는 사람은 당신 혼자가 아니다. 사도 바울도 내재하는 죄와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지키는 기쁨 사이에서 그의 마음이 분리되는 괴로움을 인식하고 있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 7:18-19).이 성경 구절은 영적 삶에서 사려 깊은 분별력이 요구되는 현실을 말해 준다. 하지만 이는 또한 우리가 최종적인 구속을 아직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진리도 상기시켜 준다.영적 전투는 이길 수 있다내적 갈등이 늘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외적 유혹 및 내재하는 죄와의 전투에서 우리가 매일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길이 있다.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들이여, 과거에 실패했다고 해서 오늘의 전투에서 또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우리의 형제이고 대장이며 왕이신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분이 이미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다(창 3:15). 죄에 묶여 있는 당신의 상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으로 인해 자유함을 얻는다(롬 6:6). 믿음과 성령의 감화로 인해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고 다시 사신 예수님과 함께 연합됨을 기억하라(갈 2:20). 당신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연합하여 세례를 받고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기 위해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롬 6:4). 당신은 더 이상 죄의 노예나 포로가 아니다. 오히려 자유인이다. 이는 모든 거듭난 신자들에게 결정적이면서도 변경될 수 없는 사실이다.“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 6:11-12). 죄와 사욕에 대항하는 싸움에서 당신은 그 규모가 크든 작든 이길 수 있다. 하지만 유혹이 올 때 당신이 승리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승리로 인한 결과임을 알 필요가 있다.실수하지 말라. 오늘의 전투가 중요하다. C. S. 루이스가 말했듯이, “오늘의 전략 포인트를 포착하는 일은 작아 보이지만 가장 훌륭한 행동이다. 몇 달 후, 당신은 꿈꿔 보지 못했던 승리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사소한 정욕이나 분노에 방종하면, 적이 틈타고 공격을 개시할 수 있는 능선이나 철도 또는 교두보를 내어주는 일이 된다.” 즉 어제의 패배로 인해 우리 영혼이 마비되지 않도록 하면서, 이 패배가 현재와 미래의 영적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해야 한다.영적 전쟁은 끝이 난다“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벧전 1:13). 그 은혜는 완전한 성화와 영화를 마지막에 주시는 선물을 말한다. 싸움을 마치고 전쟁이 끝나는 날이 오면, 죄와 사욕에 대항하는 괴로운 갈등이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개시일이 도래했고, 승리의 날이 오고 있다. 이 ‘복스러운 소망’은 경건을 추구하는 현재의 삶을 살게 하는 동력이 된다(딛 2:12-13).육상 선수들은 에너지의 고갈을 겪은 후에도 조금 쉬고 탄수화물로 에너지를 충전하면 계속 달릴 수 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영적 싸움을 위해 복음을 깊이 묵상함으로써 에너지를 끌어올릴 필요가 있다.죄와 싸우는 일에 관하여 17세기 청교도 존 오웬(John Owen)보다 더 잘 서술한 사람은 없다. “당신의 죄를 없애기 위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행하라. 그분의 피는 죄로 물든 영혼을 고치는 훌륭한 치유책이다. 그 안에서 살아라. 그러면 당신은 끝내 승리자가 될 것이다. 곧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을 따라 살며, 당신의 정욕이 발아래 엎드러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영적 갈등은 늘 존재한다. 또한 영적 전투는 이길 수 있다. 그리고 영적 전쟁은 끝날 것이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Your Fight Against Sin is Normal번역: 정은심
문화
세계관
영적갈등
영적전투
루이스
영적전쟁
존오웬
J.C.라일
참된 행복의 추구
by Ken Myers
2019-03-19
인간에게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행복할 권리이다.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인간의 이러한 기본권을 묘사하기 위하여, 오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행복 추구'라는 개념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와 그 이전부터, 행복은 모든 사람들이 정당하게 누려야 하는 기본 권리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성경의 저자들처럼 행복을 어떤 느낌이나 감정적 상태가 아니라 객관적 현실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회자되는 말처럼 “당신이 행복하다면”이라는 어구는 히브리인, 헬라인, 크리스천 모두에게 용납되지 않는 말이었다. 왜냐하면 그 말은 도덕적 질서를 따르지 않아도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이다.행복은 ‘축복’이라는 성경적 개념과 유사한 단어이다. 중세의 기독교 윤리에서, 행복은 진정한 선에 버금가는 번영이나 안녕의 상태를 의미했다.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에 맞게 행동하고 생각해야 하며, 욕망과 야망도 이를 벗어나지 않아야 했다. 따라서 행복은 윤리적인 과제이지 심리적인 과제가 아니었다. 행복은 인간에게 필요한 기본적인 조건이지만,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욕망과 행동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개념이기도 했다. 이 말은 인간이 본능적으로는 진정한 선을 추구하지 않으려 하거나, 어떤 매혹적인 쾌락에 의해 본성이 왜곡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의 추구라는 개념은 하나님 형상을 소유한 우리가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의 영광을 드러낼 때 비로소 행복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죄와 어리석은 행동이 순종이라는 인간의 참 정체성을 잃게 했기 때문에 행복의 추구는 오직 은혜로만 가능해졌다.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죄의 무질서함에 저항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참된 행복의 추구는 성화와 관련이 있다. 즉 참된 행복의 추구는 우리가 거룩한 순종을 하도록 이끌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장하게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생각은 대부분의 현대인들, 아마도 크리스천들조차도 쉽게 따르기 어려운 개념일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반기독교적 행복의 개념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쩌다가 반기독교적인 행복의 추구에 이토록 영향을 받게 되었을까?그 원인은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일어난 윤리 사상의 급진적인 변화에 일부분 기인한다. 그때는 철학자들이 인간의 악한 본성에 대한 논의를 꺼리는 시기였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들은 죄의 개념을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 알레스데이 맥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에 따르자면,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 본성이 선하다는 성선설을 근거로 하여 모든 학문을 이해했다. 따라서 개인의 자유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 궁극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여겼고, 국가 철학은 개인의 생각이나 도덕성에 권위를 부여하게 되었다(MacIntyre, After Virtue, 62).이러한 상황에 영향을 받아 행복의 추구라는 말은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즉 행복은 주관적 즐거움이자 개인이 원하는 바를 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행복의 추구라는 개념을 객관적으로 정의할 수 없게 되었고, 단지 정서적으로 평온한 상태를 얻기 위한 개인적인 쾌락의 추구나 지속적인 재미의 추구를 지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를 윤리나 삶의 질서와도 연결짓지 않았다. 실제로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간통죄를 저지르거나, 부모를 모욕하거나, 낙태를 행하거나, 자신의 신체를 학대하는 등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선택을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 행복을 단순히 기분 좋은 주관적인 상태로 간주하면, 인류에게 정해진 기본적인 삶의 질서들은 그렇게 무너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20세기에는 대중 매체의 증가와 다양한 오락 거리들이 더해져서, 행복의 추구를 재미를 지향하는 식으로 여기는 풍조가 더욱 강화되었다. 1950년대 중반, 심리학자 마사 울펜슈타인(Martha Wolfenstein)은 ‘재미 도덕성’이라 부른 윤리의 등장을 주목했다. 지금까지의 도덕성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질서와 목적에 부합했다면, '재미 도덕성'이라는 윤리는 행복에 즉각적이고 충동적인 재미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는 개념이다. 그녀가 주목한 측면은 다음과 같은 윤리의 등장이었다.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다들 재미를 추구하는데 혼자 재미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가?' [중략] 전통적으로 금지된 것들에서 만족을 느끼는 일은 죄책감을 일으키지만, 재미를 느끼지 못하면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 행복은 개인적인 쾌락과 완전히 동일시되었을 뿐 아니라, 예전에는 행복의 근원이라고 여겨졌던 즐거움들이 점점 더 사소하고 덧없는 것으로 평가절하되었다. 재미를 추구하는 일로 인해 바이올린을 배우거나, 문학을 좋아하거나,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은 더 섬세하고 노력이 요구되는 즐거움은 경시되는 반면, 신경을 자극하는 순간적인 오락은 더욱 주목받고 있다.그러나 행복을 즉각적 소비의 유형으로 정의하는 경향이 우세해질수록 오히려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 존 페리 발로우(John Perry Barlow)는 ‘공허의 추구’라는 최근 에세이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프로작(항우울제)을 사용해 본 사람들 중에서 이 약이 그들을 실제로 행복에 더 가까워지게 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우울제는 오히려 그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그들을 불행의 구렁텅이로 다시 밀어냈다. 그들이 행복을 추구하고 있다고 볼 수 없을 뿐더러, 자살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발로우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미소를 관찰하는 실험을 진행하였다. 그는 자신이 주로 장을 보는 ‘중산층 유기농 슈퍼마켓’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11개월 후, 그는 “건강하고, 아름답고 매우 잘 단장한” 수많은 얼굴들 가운데서 미소 지은 얼굴을 겨우 일곱 차례 보았는데, 그중 세 명의 미소는 거짓된 미소로 판정되었다. 슈퍼마켓과 그밖의 장소에서 그가 발견할 수 있었던 표정은 거의 “자신에게 몰두된 괴로운 얼굴”이었다. 창조자가 우리 본성에 심어 주신 행복이 아니라 자신의 주관적인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우리는 피곤함과 실망을 느끼게 된다.‘더 좋은 기분’(Better than Well)이라는 책을 집필한 칼 엘리엇(Carl Elliott)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 노력하며 이를 위해 다양한 ‘강화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해 언급한다. 엘리엇은 현대 사회에서 행복의 추구라는 과제는 매우 절박한 나머지 “그것을 공격적으로 무차별적으로 추구하기 때문에” 이제는 “이를 다시 억눌러서 무의식 속에 집어 넣는 일”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사람들은 행복을 붙잡고자 여러 시도를 한다. 예를 들어 마약을 먹거나, 공상에 빠지거나, 돈을 소비하거나, 나쁜 관계에 빠져 너무나도 긴 시간을 낭비한다.이러한 무차별적이고 공격적인 행복의 추구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엘리엇 외에도 여럿 있다. 올해 초에 발간되 에릭 윌슨(Eric Wilson)의 성명서, ‘행복에 반하여: 우울을 찬양하며’(Against Happiness: In Praise of Melancholy)는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았다. 윌슨은 삶에서 비극이 찾아오면 그냥 슬퍼하는 것이 때로 우리를 정서적으로 더 건강하게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늘 낙관적으로 행동하려는 태도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행복의 추구에 대한 풍성한 비전을 회복하는 일은 크리스천들에게 고유하게 남겨진 과제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과 달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기뻐하며, 우리가 피조물로서 그분의 방식대로 살아갈 때만 만족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우리는 죄로 인한 무질서한 세상에서 살고 있기에,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때까지 진정한 축복은 종종 고통과 박해 및 희생을 포함한다. 행복은 우리가 누릴 권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대속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미있느냐?”라고 결코 묻지 않으셨다. 오히려 신실한 종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한다고 가르치셨다. 행복은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에 맞게 살아갈 때 얻게 되는 결과이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 15:10-11)라고 약속하셨다. 단순한 재미를 따르지 않고 신실하게 순종할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ursuit of Happiness번역: 정은심
문화
세계관
축복
성화
주관적행복
윌슨
행복추구
신실한종
참된행복
발로우
권위에 순종하는 삶
by R. C. Sproul
2019-03-12
신약성경을 읽다 보면, 계속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주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다양한 유형의 권위를 위임하셨으며, 크리스천들은 그 권위에 순종해야 한다는 점이다. 현 시대가 권위에 반항적이라는 점을 놓고 볼 때, 이는 우리가 진지하게 접근하고 깊게 묵상해야 할 사항이다. 오늘의 우리는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상황에 처하기가 매우 쉽기 때문이다.베드로전서 2장 11-16절을 살펴보자.“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베드로는 여기에서 잔인하고 험악하며 폭력적인 박해에 노출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그는 최악의 대응을 하도록 부추길 수 있는 우리 안의 분노, 분개, 증오 등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베드로는 박해받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문화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존중하는 태도로 대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베드로는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라고 여러 번 권하고 있다.이는 곧 우리가 인간의 법에 순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왜 인간의 법에 순복해야는가? 그에 대한 답은 다름 아닌, 바로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순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의 이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인간의 법에 순종하는 일이 어떻게 주님을 위해 하는 일인가? 나의 교수, 상사, 혹은 나라에 순종하는 일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위하는 일이 되는가?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성경 말씀이 다루고 있는 죄의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해야 한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으로 보면, 죄는 상위법과 입법자에 대한 반항과 불순종의 행위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는 일이다. 많은 이들이 폭력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며, 또 전쟁에서 장애를 입는 이유는 사람들이 법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한발 더 나아가 우리는 세상의 법에 앞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지 않는다. 모든 창조물 안에 있는 근본적 문제는 법에 대한 불순종과 권위에 대한 대항에 있다. 그리고 우주를 다스리는 최고의 권위는 하나님에게 있고, 우리는 그 궁극적인 권위에 맞서려 한다.하나님은 창조 세계를 다스리는 측면에서 권위를 위임하시고, 인간 정부를 세우셨다. 처음에 정부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롬 13장). 따라서 크리스천들은 국가의 지도자를 존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하며, 세금을 내고, 가능한 한 그 권위에 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최고의 권위를 공유하신다.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하나님이] 내게 주셨으니”(마 28:18)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이 세상의 어느 통치자도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왕 중의 왕인 그리스도에 의해 권위를 위임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들은 다스릴 권위를 위임받았기 때문에, 우리가 땅의 권세에 불순종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불순종하는 일이 된다.세상은 무차별적으로 법을 무시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한다. 우리가 권위 아래 있으면, 우리는 그 권위에 순복해야 한다.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사람 이상의 상사를 두고 있다. 나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은 한 사람 이상의 권위자에 대하여 임무를 다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롭지만, 우리는 그 자유를 마치 죄를 지어도 되는 면허증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편으로 자유롭다고 해도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종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다. 따라서 나머지 세계가 반권위와 반복종의 방향으로 가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 경향을 따르지 말고 양심적으로 질서를 지켜야 한다. 하나님 자신이 우주 안에 위임하신 법과 질서가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권위자들의 법이라도 합법적인 규칙이라면, 불안하고 불편하며 때로 고통을 당하더라도 우리는 법을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권위자라 하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셨기 때문이다.우리 모두 전혀 동의할 수 없는 권위와 명령에 치를 떨어본 적이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폭군적이고 불공평한 인간 혹은 기관에 우리가 개별적으로 또는 제도적으로 복종하고자 노력할 때,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제안을 하고자 한다. 당신은 이들에게 좋은 태도로 복종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든 그들을 살펴보고 주시함으로써 아버지 하나님이 아들 그리스도에게 주신 궁극적인 권위를 그들 안에서 보게 된다면, 우리는 그 권위에 더 쉽게 순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복종하는 궁극적인 대상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면, 순복하는 일로 씨름하는 문제에 도움을 얻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나를 곤궁하게 하거나 학대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Living under Authority번역: 정은심
문화
세계관
권위
창조세계
지도자존중
기도
법과질서
하나님의종
순종
그리스도
인간의 욕망
by R. C. Sproul
2019-02-20
우리는 창세기의 처음 몇 장을 통해 초기 인류 역사의 사건들을 다시 살펴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어떻게 인류가 최초의 욕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아마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시각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는 예화가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이야기일 것이다. 1절은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고 밝히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원래 타락 이전의 피조 세계에 보존되었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다. 에덴동산에는 통역자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언어로 말했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비록 창조의 조화를 파괴하려는 죄의 침투가 있었지만, 적어도 인류가 팽창하는 처음 몇 해 동안은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똑같은 언어로 말할 수 있었고, 어느 정도의 조화 가운데서 서로 소통할 수 있었다.그런데 이 인류는 같은 언어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자신들의 도시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창 11:4). 처음부터 인간의 욕망은 하늘의 꼭대기에 이를 정도로 웅장한 성읍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는 사람의 업적을 자랑하고자 기념비를 내세우는 인간 본성의 일부였다. 그 증거로 우리는 세상의 여러 도시에서 화려한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파리의 거의 모든 지점에서 에펠탑을 볼 수 있고, 뉴욕의 관광객들은 자유의 여신상이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보게 된다.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빼놓을 수 없는 증거이다. 우리는 자신이 의미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또 죽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기억되게 하기 위해 벽돌, 회반죽, 강철, 유리 등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 왔다.성경이 표현하는 그들의 정서를 느껴 보라. “우리 이름을 내자”(창 11:4). 19세기의 무신론 철학자였던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하기를, 인간 행동의 가장 근본적인 원동력은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인 “권력에의 의지”(will to power)라고 했다. 타락한 인류를 예부터 유혹하는 실체가 바로 이 권력욕이다. 그것은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뱀의 유혹에 이끌렸던 에덴의 유산이다. 그 유산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하도록 부추긴다. '왜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가?' '왜 이 세상의 기념비는 오직 창조주의 찬양과 영예에만 국한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할 수 없는가?' ' 우리는 주권적인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는가?' ' 우리가 함께 모여 한 성읍을 건설하자. 심지어 하나님도 무너뜨릴 수 없는 기념비, 영원히 존속될 기념비를 만들자. 조각상, 성벽, 망루, 마천루,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많은 것들을 만들자.'나는 (20세기 미국의 유명한 방송인인) 월터 크롱카이트와 예전의 몇몇 우주인들이 최초의 달 착륙에 대해 묘사하는 바를 뚫어지게 주시했던 적이 있다. 니일 암스트롱이 “그 사건은 한 사람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었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었다”라고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완전히 새로운 개척지를 정복한 이 믿기 힘든 업적에 대해 다른 사람들만큼이나 흥분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었을 때, 이내 심기가 불편해지기도 했다. 그의 말은 “ 하나님, 이는 주님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에덴에서 우리에게 온 땅을 통치하라고 주셨던 사명의 성취입니다”라고 하는 고백과는 전혀 다른, 인간의 업적과 바벨탑의 건설을 또다시 자랑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땅을 통치하도록 부름 받았지만, 오히려 인간의 영광을 위해 땅과 하늘을 지배하고자 애를 쓴다. 이는 바벨에서부터 진행되었던 일로서,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신 정당한 과업을 왜곡하고 악하게 뒤트는 일이다. 건축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일에도 잘못된 것은 없다. 그러한 일들은 하나님이 창조의 때에 우리에게 주신 과업이지만, 오직 그분의 권위 아래서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한 일들은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권위 아래서, 그리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이다.그러나 우리 안에서 어떠한 반역이 일어났는가? 인간은 자신들의 왕국을 향한 끊임없는 욕망을 표출해 왔다. 인간인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그 이름을 높이고자 했다. 바벨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인간적 사업을 대표하는 사건으로서, 그들은 바벨에서 “우리 함께 한 성읍을 건설하자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라고 말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도망자, 방랑자, 무명인, 환영 받지 못하는 자들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말이었다. 이는 단지 고대 인류의 결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과 나의 이야기이다. 이제 창세기 11장 5절의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라는 말씀을 읽어 보자. 하나님은 인간이 건설한 성읍을 감찰하셨고, 그분이 본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창 11:6-9).역사상 인류가 시도했던 가장 큰 건축 프로젝트는 하나님께 저지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는 혼란과 혼돈으로 끝을 맺었다.인간 자신의 궁극적인 왕국을 건설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혼란으로 끝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성공 역시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숨겨진 죄, 온갖 은밀한 생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전 12:14). 인간의 영광을 위한 건축은 어느 하나도 하나님의 정확한 심판을 피해갈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진 일만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출처: www.ligonier.org 원제: Our Story 번역: 김장복 (개혁된실천사)
문화
세계관
욕망
권력욕
바벨탑
하나님의영광
죄
은밀한생각
심판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위한 조언
by 김은득
2019-02-08
2018년 11월 30일 국민일보는 <세계관, 한국 교회의 숨구멍 될까>라는 제목 아래, 최근 한국 교회에 다시금 불어오는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다루었다. 무엇보다 필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인터뷰 내용이 있었는데, 도서출판 CUP 김혜정 대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침체되고, 1세대 운동가 중 일부는 극우보수 성향까지 보이면서 갈수록 한국의 기독교는 폐쇄적이고 세상과 말이 통하지 않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다.” 아마도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에 적게나마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김 대표의 진단이 얼마나 통찰력이 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군사정권 치하에서조차 부단히 세상과의 연결을 위해, 세상의 변혁을 위해 고민하던 청년 그리스도인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던 것을 기억한다면, 작금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침체와 폐쇄적 이미지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시급하다. 뼈대만 소개된 기독교 세계관 운동“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스코틀랜드 장로교 신학자 제임스 오르(James Orr)가 처음 언급했을지라도,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관련해서 본다면 실질적으로 화란의 신칼빈주의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의 입을 통해 처음으로 전파되었다. 카이퍼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주된 계기는 당시 국가 교육 정책(가치 중립을 근거로 세속 공립 교육에만 국가의 재정을 지원하는 정책)에 대해 반기를 들면서, 학부모는 각자의 세계관에─즉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이든지 혹은 로마 가톨릭 세계관이든지 간에 관계없이─부합하는 자녀 교육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부터이다. 카이퍼에 따르면, 세속적 공립 교육과 달리, 종교적 사립 교육을 받는 학생들의 부모가 모든 교육 비용을 대는 것은 납세자의 입장에서 불공정한 처사이므로, 모든 시민은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자녀 교육을 선택하고 그것이 공립 교육이든 사립 교육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공통되게 국가의 지원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카이퍼는 이런 자신의 교육 정책에 걸맞는 입법 활동을 위해 정치에 참여하게 된다. 역사적 칼빈주의자들이 상상도 못할 로마 가톨릭과의 정치적 연합을 통해 수상이 된 후, 자신의 교육 정책을 입법하는 일에 성공하게 된다.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소위 창조-타락-구속으로 패턴화되어 알려져 있는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그 운동의 뼈대만 다루는 것이어서, 그 운동의 부요하고 다양한 살점들을 다 발라버리게 되는 것이다.적어도 카이퍼가 생각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하나님의 은혜가 창조 세계를 회복한다(Grace does not abolish nature, but restore it)는 삼위일체적 신념 아래,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강조한다. 창조 세계가 원래 선하며, 죄에 의한 타락한 세상을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하는 것(소위 창조-타락-구속)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잘 요약한 것이라면, 그 운동성은 모든 창조 세계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나게 하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카이퍼의 신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정치, 학문, 예술, 종교 등을 회복하려고 적극적으로 각각의 영역에 참여하게 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카이퍼와 바빙크는 신학의 영역에서 당시 세계 3대 칼빈주의자로 알려졌다. 카이퍼나 바빙크는 상원 활동을 하면서 반혁명당에서 당수로서 활동하였다. 카이퍼는 화란 자유대학을 세웠고, 네덜란드의 수많은 초・중등 기독교 학교 이름이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의 이름을 딴다. 카이퍼는 일간 신문과 주간 신문을 창립하고 편집자로서 자신의 직업군 중에서 제일 오래 일한다. 바빙크는 네덜란드 왕립 학술위원으로 신학이 아닌 다른 분야 즉 심리학이나 교육학 등에서 열심히 활동한다. 삶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려 했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창립자인 카이퍼나 바빙크와 달리, 한국에서는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마치 기독교 세계관 자체를 연구하는, 지성의 활용만을 강조하는 경향성을 띄어 왔다. 초기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한 단체들, 즉 기독교 대학 설립 동역회(DEW)나 기독교 학문 연구회(KSCS)가 나름 대학 설립과 기독교 세계관에 기초한 학문 양성을 목표로 시작했을지라도, 주로 기독교 세계관 자체 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근본주의적 태도사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미국 개혁주의 진영을 통해서 매개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미국을 보면, 카이퍼가 직접 “기독교 세계관으로서 칼빈주의”를 프린스턴신학교 스톤 강좌에서 소개했다. 교리 체계로서의 칼빈주의가 아닌 삶의 전 영역에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러내는 “세계관으로서의 칼빈주의”를 주창하였다. 그러나 미국에서 카이퍼의 주장이 잘 먹히지 않았는데, 당시 미국 칼빈주의자들, 더 정확히 말해 장로교도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대항마로서 전투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창조 세계의 영역들, 예를 들어 학문이나 예술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대안 체계를 제공하기보다는 근본주의적 자세를 취하면서 몇몇 중요한 기독교 교리들을 보호하는 데만 급급하였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대표 신학자인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의 당시 별명이 미국의 카이퍼(American Kuyper)였다. 정치, 교육, 학문, 언론 등 거의 삶의 전 영역을 아우르는 카이퍼와 프린스턴신학교의 좌경화에 대항해 기독교 근본 교리를 사수하고자 필라델피아에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운 메이첸의 이미지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러하다.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와 카이퍼가 설립한 화란 자유대학을 졸업하신 손봉호 교수를 통해서 소개되었다. 손 교수를 통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소개된 80년대 초반에는 자유주의 혹은 진보주의 신학적 토대를 가지고 사회에 이미 참여하는 그룹과 마땅히 사회에 참여하고 싶으나 어떤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지 못한 보수주의 그룹으로 한국 교회가 이원화되어 분열되어 있었다. 이런 분열 상황에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을 적극적으로 흡수한 곳은 당연히 보수주의 그룹이었는데, 그 그룹의 신학적/문화적 성향은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창시자인 화란의 카이퍼보다 미국의 카이퍼에 가까웠다. 아니, 미국의 카이퍼보다 신학적으로 더욱더 보수적이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더욱더 이원론적이었다. 하나의 이데올로기기독교 세계관 자체는 타 세계관과 구분된 혹은 심지어 반립된(anti-thetical) 기독교 세계관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비기독교적 관점의 통찰력이나 진리를 단순히 기독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배제하는 해석학적 프레임이 되어버린다면, 바로 그때 기독교 세계관 운동 그 자체가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편승하게 된다.구체적으로, 필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코넬리우스 밴틸(Cornelius Van Til)의 경우, 이교도 철학, 구체적으로는 스콜라 철학(대표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제공하는 진리를 인정하기를 거절한다. 또한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주창자 중 하나인 헤르만 도예베르트(Herman Dooyeweerd) 역시 카이퍼나 바빙크가 자신들의 신학에서 온전히 성경적이지도 종교개혁적이지 못하고, 스콜라 철학을 차용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후, 개혁신학자들은 이교도 철학이나 세속적 사상가들에게서도 진리의 빛이 있으므로, 그 진리의 파편들을 그들의 신학에 절충적으로 사용하였다. 한국에 전파된 밴틸리안/도예베르트안 전제주의가 극명하게 보여주듯이, 기독교 세계관이 성경과 일반적 진리(과학이나 이교도 철학 등)를 양립불가한 사실로 전제할 때,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사실상 기독교 세계관의 게토화가 일어나게 된다.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과 연관이 깊은 창조과학 주창자들이 왜 과학계에서 게토화되었는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것은 바로 과학에서의 진리와 성경 진리의 양립불가성을 전제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또한 이런 전제를 받아들일 때,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기독교 세계관 주창자들의 주장을 자체적으로 교정하거나 혹은 다른 관점에 의해 교정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친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고, 자기와 다른 세계관 주창자들이 오류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 세계관 주창자들 가운데,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이미 정답으로 전제하고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해지는 분들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즉 극우든지 극좌든지, 그것은 기독교 세계관 공식(창조-타락-구속)에 의거해 정답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작금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시의적절하지 않으며 용도 폐기되어 마땅한가? 아니다! 필자는 고쳐서 사용할 수 있다고 본다. 어떻게 해야 기독교 세계관이 한국 교회의 숨구멍이 될 수 있을까? 사실 완벽한 대안은 없다. 다만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지금까지 잘못한 부분들을 수정하고, 나름 그 운동이 성공했던 사례들에서 지혜를 얻고자 한다. 예배를 통한 습관형성적 세계관 운동먼저 포스트모던 사회가 발견한 진리 중 하나는 이데올로기의 변화가 반드시 인간 삶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관이라는 단어가 엄밀히 번역하면, life and world view 혹은 view of life and of world에 가깝다. 세계관 운동을 시작할 때, 우리의 생각(view)이 바뀌면 우리의 삶(life)이 변화되고, 우리의 삶이 변화되면 세상(world)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가 분명하였다. 그러나 누구나 지식과 삶을 일치시키는 것보다 분리하는게 더 쉽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깨닫게 된다. 자신의 삶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최근 기독교 세계관 운동 내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Smith)가 주장하는 새로운 흐름은 우리가 충분히 적용할 만하다. 인간은 생각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열망에 의해 변화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즉 인간의 존재를 이성과 연결시킨 데카르트와 달리, “나는 바로 내가 바라는 무엇, 열망하는 무엇, 혹은 예배하는 무엇”이라면서 인간됨을 인간의 열망/욕망으로 연결시킨 것이 어거스틴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지혜를 가지고, 우리의 욕망을 거룩한 욕망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예배라는 것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무언가에 대한 사랑/열망이 하나님의 대한 사랑/열망으로 변화됨을 보게 된다. 우리 사랑의 대상이 바뀌고, 예배가 삶으로 삶이 예배가 되면, 또한 이것을 계속해서 반복하게 되면, 이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의 습관이 되어, 나의 삶을 변화시키게 된다. 세계관 운동과 관련해 생각하면,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창조-타락-구속이라는 원리 중심의 운동에서 예배를 통한 습관형성적 운동으로 변해야 한다. 일상성과 공공성을 회복하는 세계관 운동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영향력이 있으려면, 그 세계관이 각자의 삶과 시대의 문제에 실제적으로 해답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계관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영어로 “View of life and world,” 혹은 “life system”으로 번역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미 이 영어 단어 속에 일상성(life)과 공공성(world)에 대한 제고가 있었다. 19세기에 세계관이라는 개념이 그렇게 유행했던 이유는 근대화에 의한 사회적 분화과정(Social differentiation)과 연관이 깊다. 서구 기독교사회에서는 다양한 종교나 종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유신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사회분화과정으로 인해서, 주체적인 자아는 각 사회영역에서, 특히 학문과 정치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의식할 필요가 없게 된다. 고로 교회에서 신실한 예배자라도 학문의 영역에선 무신론자처럼 연구를 할 수 있고, 심지어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언제나 이성의 요구와 감정의 필요, 양쪽 모두 충족되는 세계관을 필요로 한다. 이런 상황에서 카이퍼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모든 영역에서, 그것이 사적이든 공적이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시도로서, 그리스도인에게 사회분화과정 속에서도, 신실하게 일상의 영역, 공공의 영역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왔다.카이퍼는 당시 상황 속에서 칼빈주의 세계관을 각자의 세계관에 따라 자녀들을 양육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교육 열망과 연결했다. 카이퍼가 대변한 학부모들은 사회주도층이 아니었고, 당시 사회에서 소외된 민중 계층이었다. 바빙크는 당시 유럽에 여성 참정권이 없었는데, 성경적 원칙에 따른 여성 참정권을 주창하였다. 마크 놀(Mark Noll)이 그의 책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에서 강조하듯이, 미국의 학문 세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들이 그 영역을 무신론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에게 뺏겨 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크 놀이 이 지성의 스캔들에서 자유로운 곳으로 카이퍼리안(예를 들어, 앨빈 플랑틴가,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리처드 마우, 제임스 스미스 등)이 가득한 칼빈칼리지를 예로 든다. 한국의 기독교 세계관 운동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의 설립에서 보여주듯이, 일상성과 공공성을 기반으로 그 운동을 시작하였다. 한국 역사에서 그나마 절대적 왕권의 영향 아래서 목소리를 내어왔던 것이 종교(예를 들어 고려 왕조에서는 불교, 조선 왕조에서는 유교)라는 손봉호 교수의 역사 인식과 또한 민주주의 경험이나 시민사회 활동이 빈약했던 한국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기독 시민이 자발적으로 세상의 변혁과 윤리적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는 손 교수의 현실 인식이 결합된 정신이 기윤실의 설립 근거이다. 카이퍼, 카이퍼리안, 그리고 손봉호 교수가 추구한 기독교 세계관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강조점은 다를지라도, 사실 일상성과 공공성을 위한 기독교 세계관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세계관이라 할 수 있겠다.이슈에 대한 결론이 아니라 심성과 태도 형성을 위한 토론 문화기존의 한국 기독교 세계관 운동은 어떤 이슈를 중심으로 그 이슈에 대한 결론 혹은 찬반을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이 컸던 것도 사실이다. 창조-타락-구속의 원리 중심의 세계관 운동은 결국 세상 가운데 벌어지는 쟁점에 대해 이것이 기독교적이다 혹은 반기독교적이다 라는 식의 결론을 맺을 수 있을 때 그 세계관의 원리가 삶의 현장과 연결되고 실제적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전제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기독교적이라고 굳게 믿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누구든 앞다투어 결론을 내리려는 태도는 찬성과 반대로 이분화되며, 반대편을 악마처럼 여기는 경우도 생기게 되는 것이다.그러므로 단정짓는 태도 대신에 진지한 토론을 통해서 다양한 의견을 마주하는 심성과 태도를 형성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교회에서의 토론회는 자칫 분열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자신과 다른 성도의 의견 차이에도, 그 성도를 사랑으로 받는 훈련이 무엇보다 필요하다고 하겠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 대해 겸손히 경청하며,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훈련이 된다면, 어쩌면 이런 훈련들이 이기적이며 교만한 세상 가운데 정말로 필요한 심성과 태도를 형성해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실 성령 충만한 교회는 토론해도 싸우지 않는 교회이며, 대화와 상식이 통하는 교회이다. 왜냐하면 성령 충만하면 우리의 이성은 더 빛이 나며, 우리의 감성은 더 배려하기 때문이다.
문화
세계관
기독교세계관
카이퍼
창조세계
하나님의주권
칼빈주의
어거스틴
이데올로기
일상성과공공성
나니아 이야기에서 그려지는 존재론적 증명
by Gavin Ortlund
2019-01-18
내가 참 좋아하는 문학 작품의 한 단락이 있는데, 바로 C. S. 루이스의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퍼들글럼(Puddleglum)이 녹색 마녀(the Lady of the Green Kirtle)에게 대답하는 장면이다. 이 이야기에서 녹색 마녀는 지하세계에 몇몇 캐릭터들을 가두어 두고, 자신의 마법으로 그들을 꾀어 나니아(Narnia)나 아슬란(Aslan)이나 지상세계(the Overland)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득한다. 바로 그 캐릭터들이 마녀의 논리에 넘어가기 직전에, 퍼들글럼이 마법의 불길 위를 걸어 나오며 말을 하는 장면이 등장한다.“그는 고통으로 절뚝거리며 불길 속을 빠져나와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한 마디만 하죠. 지금까지 당신이 한 말은 대체로 옳지만, 별로 놀라워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알고도 최선의 표정을 짓고 싶어했던 사람이니까요. 그러니 당신이 한 말은 하나도 부인하지 않겠어요. 그러나 한 가지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자, 우리가 그저 꿈을 꾸었다고 칩시다. 아니면, 그 모든 것들, 가령 나무와 풀과 태양과 달과 별들, 그리고 아슬란까지도 만들어 냈다고 칩시다. 혹 그렇다 치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처럼 만들어진 대상들이 실재하는 대상들보다 훨씬 더 중요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 암흑의 소굴 같은 당신의 나라가 유일한 세계라고 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어쩌죠? 이 세계는 제가 보기에 가엽기 짝이 없는 곳일 뿐입니다. 당신이 이 사실을 알아차린다면, 재미있어지겠군요. 만일 당신의 말이 맞다면, 우리는 그저 일종의 놀이 세계(a play world)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놀이를 하고 있는 이 네 명의 아이들이 당신의 진짜 세계를 쓰러뜨릴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 낼 수가 있죠. 내가 그 놀이 세계를 좀 더 지켜보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혹여 그 세계를 이끌어 갈 아슬란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슬란의 편에 설 것입니다. 또는 나니아라는 세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나니아인처럼 살 것이고요. 그러니 우리에게 근사한 식사를 차려준 일은 고맙지만, 만일 이 두 명의 신사들과 저 젊은 아가씨가 준비만 되어 있다면, 우리는 당신의 궁정을 즉시 떠나 이 암흑을 지나서 지상세계를 찾는 일에 우리의 인생을 바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길지 않다는 사실은 나도 알지만, 당신이 한 말처럼 세상이 그리 지루한 곳이라면, 인생을 바치는 일이 별로 큰 손해는 아니겠죠.’”어떤 이들은 이 장면을 플라톤이 묘사한 동굴의 비유에 대한 일종의 각색이라고 간주하지만, 나는 최근까지 이 이야기가 존재론적 증명이라든가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플라톤의 세계관을 적용한 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얼마 전에, 루이스 자신이 1963년 10월에 낸시 와너(Nancy Warner)에게 보낸 편지에 쓴 글을 읽게 되었다. 와너는 그녀의 아들이 ‘은의자’에서 존재론적 증명을 발견했다고 언급한 내용을 전했고, 이에 대해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제가 생각하기에는 부인의 철학자 아들이 분명 퍼들글럼이 발로 불을 끄는 장면을 두고 그렇게 이야기했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그 아들은 제가 아니라 안셈(Anselm)이나 데카르트(Descartes)에게 고마워해야 합니다. 저는 단순히 그들이 논증한 존재론적 증명을 아이들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표현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저의 이야기는 부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 대단한 업적도 아니죠. 부인도 울리치의 주교보다는 더 깊이 아이들의 머릿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그러나 C. S. 루이스가 아니고 누가 그처럼 실존주의와 존재론적 증명을 아동문학에 함께 그려낼 수 있을까 싶다. 그렇게 쉽게 읽어볼 수 있는 책을 통해, 그처럼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묘사를 할 수 있다는 데서 그의 천재성이 돋보인다.마음에 호소하는 논증내가 보기에 이 퍼들글럼이 등장하는 단락은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해체주의자(deconstructionist)들이 가진 관점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만일 허무주의가 사실이며, 기독교의 견고하고 아름다운 모든 교리들, 가령 하나님과 천국과 객관적 선에 관한 모든 가르침들이 거짓이라고 하더라도, 나의 머리속에 있는 바로 그 가르침들이 단지 나의 머리를 존재하게 만드는 이 현실보다 훨씬 더 비중 있게 여겨진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정말 이 사실을 부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현대 사회에서는 ‘물자체’(즉 개인의 주관적인 인식과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대상 자체)의 역할은 끝났고, 오직 우리가 인식하는 대상만을 신뢰할 수 있다는 견해가 부상하고 있다. 따라서 초월적인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모든 사상은 사회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조건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형이상학은 그저 ‘놀이를 만들어 내는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다.때로는 인생의 어두운 순간에, 나 역시도 그런 두려움에 사로잡혀 이 세상이 제안하는 세계관과 싸우게 된다. 바로 그러한 시간에, 퍼들글럼이 이야기하는 이 단락은 내게 도움을 준다. 이 단락은 의심이 가진 허위성만이 아니라 그 의심의 취약성, 곧 의심하는 바가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우리가 거기에 충성할 만한 가치가 없음을 암시한다.나는 점점 더 현대 문화의 흐름 속에서 기독교의 아름다움이 꼭 우리에게 익숙한 변증의 방식으로만 되풀이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환멸(幻滅) 또는 각성의 시대(an age of disillusionment)에 사람들은 논리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 진리를 발견하는 경우가 흔하다. 즉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호소하는 일이 승산이 높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효과적으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복음 자체의 순수한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말하자면, 어린아이가 나니아 이야기를 읽으며 느끼는 매혹과 향수 같은 감정을 그들도 느낄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단 복음이 사실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그들이 갖게 된다면, 그때부터 그 마음을 떨쳐 내기란 어려워질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 S. Lewis Put the Ontological Argument for God in Narnia번역: 장성우
문화예술
루이스
나니아
복음
경이로움
해체주의자
물자체
퍼들글럼
실존주의
존재론적증명
하나님의 새 창조가 우리의 창조성에 중요한 이유
by Thomas Terry • Ryan Lister
2019-01-10
창조성은 낙원 건설을 위한 가장 훌륭한 도구였고, 앞으로도 계속 가장 훌륭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적 작업을 통하여 에덴동산의 아름다움이 온 세상에 퍼지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창조적으로 만드셨다. 하지만 죄가 끼어들면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낙원 건설을 중단하고 우리 자신의 낙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창조성으로 낙원 건설을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낙원을 건설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가 이기적인 목적 달성을 위하여 창조성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은 더 나은 일을 하도록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 하나님은 새 예루살렘으로 향한 길, 왕의 진입로를 건설하는 데 우리의 창조성을 사용하기 원하신다. 우리는 영원한 세상이 필요하다우리가 창조성을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을 위하여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충격을 받는다. 미래에 대한 소망이 없다면, 창조성을 근시안적으로 사용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기 위해 남겨 놓으신 부분을 우리 것으로 채우려 하게 된다.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분의 창조 사역을 덮어 버리기 위하여 우리의 창조성을 사용할 것이다.결과적으로, 우리의 창조적 작업을 포함하여 우리에 관한 모든 것은 이 세상 속에 갇히게 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일환으로 우리는 세상을 바꾸고, 우리 앞에 산적한 편견과 불의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의 창조성을 부지런히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업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주목해 보라. 정의에 대한 충동이 어디에서 오는가, 그리고 완벽한 정의를 실현할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 보라. 더 나아가, 변화가 영구적이 되려면 우리는 영원한 세계가 필요하다. 영원성이 없다면, 정의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내일 죽을 터이니 그냥 먹고 마시자"(고전 15:32)고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과 그분의 의를 우리 삶에서 없애려고 하면서도, 우리는 창조성을 사용하여 정의롭고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몰래 하나님을 들여온다. 이것은 중요한 진리를 말해준다. 창조적 작업이 많이 필요한 정의 구현은 종말론적이며 신성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정의는 우리 미래가 걸려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그리고 우리 미래는 하나님이 의로운 종말로 인도하며 모든 것을 새롭게 함으로 모든 악을 한번에 이길 때만 의미가 있다. 우리가 창조성으로 미래를 만들려고 하는 것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창조성 자체를 만들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나은 것을 주셨음을 잊게 된다. 이는 자기가 만든 캠프파이어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불꽃이 춤추는 것이 아름다워 잠시 지켜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지 못하는 일은 없도록 하라. 하나님은 그 불꽃보다 훨씬 더 멋진 빛과 불꽃을 내는 별들을 하늘에 뿌려 놓으셨다.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에 너무 오랫동안 취해 있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세계와 그분의 비전을 위하여 창조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이 벌어지면, 우리 삶은 그냥 아름다운 것을 만드는 기계처럼 되어버린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가 되어버린다. 우리의 시간과 삶은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행할 때 가치 있어 보인다. 미래가 없으면 우리는 우리 눈 앞에 있는 것과 우리 손으로 만든 것에 만족한다. 그리고 우리가 만든 보잘것없는 것이 우리가 가진 전부가 되어버리면,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원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단절되게 된다. 미래가 없는 창조성하지만 그러한 예술은 우리의 필요와 생각과 욕망과 목적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예술이 이러한 것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미래를 우리의 마음대로 만들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 때, 우리는 그것을 왜 만드는지 더 이상 알지 못하게 된다. 기껏해야 우리의 창조성은 우리 자신의 욕구를 채우는 것이 되어버린다. 공적 장소에서 선을 이야기 하지만, 혼자 있을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공허를 느낀다. 그때 우리는 우리의 창조적 작업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우리는 겉치레를 위하여, 비평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대중을 속이기 위하여, 돈이나 인기나 기계가 계속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그냥 뭔가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창조성은 우리 자신을 재창조하기 시작하고, 우리가 주인공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항상 돌보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기를 싫어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허하지만 멈추지 않고 계속 만든다. 우리는 처음에 이것을 시작한 이유를 모두 잊고 계속 우리 생각대로 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술 활동을 하는 동기와 이유 그리고 우리의 정체성에 의문을 갖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러한 예술 활동을 이제 그만둘 수가 없다. 우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우리가 멈추는 것을 원치 않으며,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창조성’이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미래가 없는 창조성은 문제가 있다. 이것은 우리를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나 우리가 원하는 세계가 되게 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정체성을 잃게 된다. 우리의 창조적 작업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나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우리의 예술은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는다이것이 새로운 창조가 중요한 이유이다. 새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예술이 세상에 소망을 두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준다. 그것은 눈물과 사망과 애통과 곡하는 것과 고통이 더 이상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이 인류와 함께 하실 것임을 말한다(계 21:1-4). 이것은 우리의 목적과 가치와 정체성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도와준다. 이것은 우리의 창조성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가르쳐준다.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새 창조를 위하여 창조성을 사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 창조 사역에 창조성을 사용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다. 첫째 이것은 우리가 창조성을 사용하는 목적을 바로잡아 준다.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과 당신과 당신의 창조성을 창조하셨고, 당신과 당신의 창조성과 세상을 재창조하셨고 또한 재창조하실 것이다. 실제로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의 주인이시다. 둘째, 이것은 당신이 세상을 지탱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이미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쉼은 새 창조로 이어진다. 잠간의 휴식이 아니라 깊고 불안을 없애며 평안을 가져오는 쉼은 새 창조를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새 창조의 쉼은 여러 면에서 이 세상에서 일어난다. 당신이 다음에 만들 예술품이 이 세상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마음에 큰 평안이 올 것이다. 당신의 예술품이 세상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없고 당신이 그것을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창조적 작업에 있어 하나님께 초점을 두는 것과 창조적 쉼을 갖는 것, 그리고 이와 더불어 새 창조에 대한 소망을 갖는 것은 당신의 창조성에 불을 지필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작업을 잘 시작하고 완벽하게 마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 재창조한 것 그리고 앞으로 재창조할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해 보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the New Creation Matters to Your Creativity번역: 정은심
문화예술
창조성
영원성
예술
소망
창조적작업
하나님께초점
창조적쉼
약속한미래
처음
이전
11
페이지
12
페이지
열린
13
페이지
14
페이지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