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예술과 문화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영화 쇼생크 탈출에 대한 신학적 읽기
by 노승수
2021-01-14
영화 쇼생크 탈출은 1994년 개봉한 영화다. 제대 후 복학생이었던 나는 우연히 당시 유행하던 비디오 방에서 세 명의 친구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설명할 수 없지만 가슴 한구석이 시원해지는 그런 느낌이 오래도록 남았다. 원래 이 영화는 스티븐 킹의 단편소설인 '리타 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을 영화화 한 것이다. 스티븐 킹은 원래 종교가 없는 사람인데 그래서인지 그는 그의 소설에서 종교를 신랄하게 다루기도 한다. 예컨대, 영화화 된 '미스트'라는 그의 작품은 안개와 거기에 나오는 괴수들 때문에 등장하게 되는 사이비 종교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미스트'가 종교의 어두운 면을 다루었다면 '쇼생크 탈출'은 종교의 긍정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적인 복음의 서사를 영화로 옮겨 두었다. 이 서사를 위한 영화적 장치는 이렇다. 영화에서 쇼생크라는 감옥은 자유가 없는 세상에 대한 유비다. 실제로 쇼생크는 애굽의 제23왕조인 세송크(Sheshonk)의 또 다른 이름이다. 열왕기상 14장 25-26절에 보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 5년에 애굽으로부터 침공을 받는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침공해 온 왕의 이름이 시삭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애굽 역사에는 시삭으로 이름하는 파라오가 없다. 이 문제는 애굽의 이름을 모음이 없이 자음으로만 된 히브리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음가가 상당히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시삭의 히브리어는 שׁישׁק인데 음가를 옮기면 sysq가 된다. 그것이 바로 애굽의 22왕조와 23왕조의 파라오의 이름인 쇼생크다. 저자의 이런 작명은 이 작품이 성경적 서사를 토대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스티븐 킹은 출애굽 서사를 염두에 두고 이 작품을 구성한 것으로 보인다. 죄수들이 갇혀 지내는 감옥을 쇼생크라 명명하고, 영화 속 주인공 앤디(팀 로빈슨 분)가 15년 간 굴을 판 조그만 조각용 손도끼를 손도끼 모양으로 오려서 파낸 성경 안에 보관한다. 그리고 앤디가 탈출한 당일 교도소장이 개인 금고에 넣어둔 앤디의 성경책을 펼쳤다가 바닥에 떨어뜨리는 장면이 묘사되었는데, 그 때 출애굽기의 첫 페이지가 클로즈업 된다. 이는 감옥의 노역과 자유 없는 삶과 출애굽 사건을 서사로 유비한 것이다. 이 서사에는 또 다른 장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메인 플롯에서 탈출의 당사자인 영화의 주인공 앤디는 회계사로서 아내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쇼생크에 들어온다. 마치 죄 없으신 예수께서 죄 많은 세상에 성육신 하신 것과 유사한 플롯을 구성한 것이다. 영화 속 죄수들은 간수가 허락하지 않으면 화장실에 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가면 소변도 제대로 볼 수 없는, 자기 육체에 대한 자유도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앤디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 편지 이중창인 아리아를 감옥 전체에 울려 퍼지게 하는데 이는 앤디의 자유를 묘사한다. 모든 죄수들은 안 될 거라 했지만 그는 계속해서 주정부를 비롯한 관공서에 편지를 보냈고 그 결과 감옥 내에 도서관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도서관에 보내진 기증품 중에 있던 LP판 중 하나를 튼 것이다. 이 장면에서 앤디의 친구인 레드(모건 프리먼)는 “그 목소리는 이 회색 공간의 누구도 감히 꿈꾸지 못했던 하늘 위로 높이 솟아올랐다. 마치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우리가 갇힌 새장에 날아 들어와 그 벽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고 독백을 한다. 이는 앤디의 자유에 대한 묘사이자 그로 말미암은 구속의 묘사이기도 하다. '피가로의 결혼'의 선곡 역시 모종의 장치다. 세빌리아 이발사인 피가로의 연인인 수잔나가 백작부인이 남편 알마비바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아 적는 부분을 노래하고 있다. 보통의 중창들은 하모니를 이루고 다른 음역대의 가수 예컨대 테너와 베이스, 소프라노와 알토가 함께 노래하는 반면 이 중창은 소프라노들만의 중창이다. 또, 보통 중창에서 테너나 소프라노의 비중이 다른 반면 받아쓰기 형식의 이 이중창은 같은 비중으로 가사를 반복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를 본받는(Imitation Christ) 삶처럼, 혹은 구원자와 구원받는 자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영화적 장치는 앤디에게 외부 물건을 공급해주던 죄수 레드와 도서관에서 사서 일을 하던 죄수 브룩스(제임스 휘트모어)다. 둘은 모두 가석방 심사를 통해서 석방이 된다. 그들은 가석방 후, 같은 슈퍼마켓에서 일을 하고 같은 숙소에서 남은 삶을 산다. 그러나 앤디와의 약속이 없었던 브룩스는 자살을 선택하고, 앤디와 약속이 있었던 레드는 약속을 따라 약속의 나무 아래로 가서 앤디의 편지와 돈을 찾아 앤디가 있는 약속의 땅 멕시코 만의 파라다이스로 간다. 그렇게 앤디를 찾아가는 여정으로 영화가 마친다. 이는 성경에서 약속 있는 자와 약속 없는 자의 차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영화의 메인 플롯에서는 앤디가 쇼생크를 탈출하지만 실제로 앤디는 그 마음에서는 쇼생크에 갇힌 적이 없는 자유인이자 죄 없는 자였다. 반면, 레드는 죄인으로 감옥에 갇혔고 그의 마음은 죄로 인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존재로 쇼생크에서 벗어난 가석방의 삶이 오히려 불편했으며 브룩스처럼 자살을 고민하던 이였다. 그런 레드가 앤디와의 약속을 따라 위수지역을 이탈하여 파라다이스로 가는 사건이야말로 이 영화가 진정으로 묘사하고자 하는 출애굽이다. 그런 점에서 서브 플롯의 레드의 탈출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탈출이며 이것이 모차르트의 아리아 이중창을 선택한 이유가 아닌가 싶다. 또 하나의 영화적 장치는 이 영화에서 간수들과 교도소장이 마치 율법처럼 묘사된다는 점이다. 그들의 엄중한 태도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성경이 자주 인용된다. 그리고 이 율법의 상징인 교도소장은 앤디의 탈출로 인해서 자살하고 마는데 그리스도의 구속이 율법의 고소를 무력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영화적 묘사라 할 수 있다. 영화는 자유 없는 우리 삶에 대한 묘사다. 무신론자였던 스티븐 킹이 천국과 내세의 삶을 묘사했을 리는 없다. 그러나 이 천재 작가는 기독교의 서사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하게 간파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임한다면 그것은 “자유” 혹은 “해방”이라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영화는 분명히 해방을 말하고 있다. 영화 속에서는 감옥으로부터의 해방이지만 이 영화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갇혀 있는 내면의 감옥과 사슬로부터의 해방일 것이다. 이 영화를 감상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멋대로 사는 해방과 자유가 아니라, 앤디가 모든 불의에 맞서서 자유를 갈망했던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가는 자유를 소망하는 사람들이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의 7개 부문에 후보에 올랐으며, 미국 의회도서관의 National Film Registry에 영구 보존되었다.
문화
영화
쇼생크탈출
출애굽기
미스트
사이비
스티븐킹
피가로의결혼
하나님나라
자유
이 시대에 필요한 문화 변증학
by Elliot Clark
2021-01-04
기독교 신앙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기 위해 교회는 오랫동안 변증학이라는 수단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서구 문화가 기독교를 향해 던지는 물음이 급변함에 따라, 변증학의 대응도 바뀌어야 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예컨대 최근에 일어나는 기독교에 대한 의문은 순수하게 이성적인 물음에 속한다고 분류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이제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개연성을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잘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활이 왜 중요한 문제인지조차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활의 소식이 왜 ‘좋은’ 소식인지도 당연히 알지 못한다.이에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자들은 합리성의 문제를 넘어서는 다른 접근을 통해 교회에 변증학을 가르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런 시도를 하는 학자들 가운데 한 명이 오클라호마 침례 대학에서 철학과 변증학을 가르치는 폴 굴드(Paul Gould)다. 그는 최근에 ‘문화 변증학: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세상에서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회복하는 법’(Cultural Apologetics: Renewing the Christian Voice, Conscience, and Imagination in a Disenchanted World)이라는 제목이 달린 유익한 책을 저술했다.이 의미심장한 작품에서 굴드는 다양한 문화적인 질문을 다루며 그에 대해 깊이 있고 폭넓은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 한스 부르스마(Hans Boersma), 피터 크리프트(Peter Kreeft)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주장을 많이 활용한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교회 역사의 사상가들도 깊이 반영하여 어거스틴으로부터 아퀴나스를 거쳐 그의 논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C. S. 루이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설명을 제공한다.아마도 ‘문화 변증학’에서 굴드의 접근 배후에 자리한 가장 중요한 사상은 바로 루이스가 자신의 에세이 ‘자전거에 관한 이야기’(Talking about Bicycles)에서 선보인 사색일 것이다. 이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평범한 사람들이 살게 되는 인생을, 환상에 빠질 수 없는 시기(Unenchantment), 환상에 빠지는 시기(Enchantment), 환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시기(Disenchantment), 그리고 간혹 이상적으로 경험하곤 하는,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Re-enchantment)라는 네 단계로 구분해서 묘사했다. 굴드의 저술 목적은 신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 ‘환상에 다시 빠지는 시기’를 경험하게 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경험이 효과적인 문화 변증학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굴드가 이해하는 ‘환상’이란, 평범한 일상을 영광스러운 선물로 받아들이며 그에 대해 예배로 반응할 줄 아는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그 환상은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이 제시한 비전인 ‘선교적 충돌’ 즉 복음과 문화의 충돌이 이미 환상으로부터 벗어난 서구 문화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확장되는 카테고리이와 같은 굴드의 시도는 ‘총체적인’(holistic)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기독교인의 목소리와 양심과 상상력을 다시 구축하려고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세상이 어떻게 우리의 메시지를 인식하는지에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세상이 어떻게 우리를 인식하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이런 관심이 책의 논조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그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의문을 관대하게 받아 주면서도 그에 대해 올바른 논증을 제시하는 접근을 취하는데, 이는 구체적인 변증학의 과정을 보여 준다. 이런 방식으로 굴드는 변증학의 카테고리를 명제 중심의 방법 너머로 확장시키고 있으며, 문화의 옷을 입은 실천적인 신앙의 필요성을 구체화하고 있다. 즉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할 뿐 아니라 그 복음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더욱이 굴드의 방법은 사실과 증거만을 취급하지 않는다. 그는 기독교의 매력을 중요하게 다룬다. 즉 그가 제시하는 문화 변증학은 하나의 체계로서 기독교의 진정성을 논증하되 어떻게 기독교가 존재해야 하는지만이 아니라 기독교가 과연 어떤 세계인지를 보여 주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따라서 그가 이해한 대로라면, 우리의 사명은 기독교 신앙을 이성적일 뿐 아니라 갈망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제시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굴드의 논의에서 반복되는 주제가 있다면, 이러한 변증학적 접근은 상위문화와 대중문화 모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은 문화가 대규모로 소비되고 구현되는 대중문화에 참여해야 할 뿐 아니라, 사상과 창조 활동의 중심부로서 문화의 원류가 흘러나오는 상위문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따라서 교회는 학계와 예술과 정치 모두에 대한 기독교인의 투자를 장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굴드는 이러한 포괄적인 접근이 세계적인 수준과 지역적인 수준에서 함께 일어나야 한다고 설명한다.이미 언급했듯이, 굴드의 작품은 최근 등장한 더욱 총체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틀에 속한다(이에 대한 또 다른 예로는 홀리 오드웨이[Holly Ordway]의 ‘변증학과 기독교인의 상상력’[Apologetics and the Christian Imagination]을 들 수 있다). 이 새로운 기독교 변증학의 주창자들은 계몽주의 시대 이후에 일어난 순전히 이성적인 접근에 반대한다. 그래서 변증학의 방법론에 그동안 자리해 온 ‘증거주의자’(evidentialists) 대 ‘전제주의자’(presuppositionalists)라는 대립과 그에 따른 논쟁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굴드는 그의 방법론이 인식론에 대한 여러 가지 접근들과 통합을 이룰 수 있을 만큼 그 어떠한 체계와도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굳이 성격을 규정한다면, 그는 문화 변증학이 근대 이후의 방법론보다 더욱 통합적인 형태를 갖춘 고전적인 방법론을 지향한다고 간주한다.의문의 여지가 있는 전제비록 굴드의 시도가 ‘기존의’ 접근과는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논증이라는 방법 자체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와 달리, 책의 상당량은 갈망과 이성과 도덕성을 모티프로 삼아 (일반적으로는 유신론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는 삼위일체적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변증하는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 가운데 많은 논의가 정말 통찰력 있게 개진되며, 굴드 자신의 경험적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아름답게 제시될 뿐만 아니라, 최근 학자들의 의견까지도 반영하고 있다. 사실 나는 굴드가 주장하는 내용에 거의 동의하기 때문에, 그의 논증을 여기서 비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책을 형성하는 일부 전제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을 조심스럽게 제기하고자 한다.첫째로, 서구 사회가 진정으로 환상에서 벗어난 세상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많다. 물론 세속적인 서구 문화가 이성주의(rationalism)와 자연주의(naturalism)의 영향으로 영적 실재에 무감각해졌다는 관찰은 일리가 있다. 게다가 유물론(materialism)이 여전히 득세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잘못된 영적 존재나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교 사상이 또한 현대 문화 속에 확산되고 있다(개인적으로는 내가 사는 미니애폴리스 지역에도 그와 같은 이교 신앙이 침투했음을 작년에야 알게 되었다). 이는 굴드 자신도 인정하는 바와 같이 단순히 환상이라는 주제만으로는 변증을 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왜냐하면 거짓된 환상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추측하건대, 민간 설화나 신화와 같은 다양한 문화적 현상을 통해 이미 그런 환상은 우리 가운데 만연해 있다고 볼 수 있다.둘째로, 교회가 ‘탑다운’ 즉 위에서 아래로 하달하는 방식으로 문화적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생각에 성경이 정말 동의하는지 의문이 든다. 나는 이 의문이 어쩌면 앞서 제기한 의문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로드 드레허(Rod Dreher)의 ‘베네딕트 옵션’(Benedict Option)과 같이 세속 문화에서 완전히 철수하는 대안을 옹호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굴드가 제안하는 방식만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가장 우려가 되는 내용은, 굴드가 반복해서 강조하는 부분으로서 바로 교회가 복음을 더욱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기 위해 ‘반드시’ 상위 문화에 동참해서 그 문화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다. 나는 이런 주장이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사도들의 전도에서도 그러한 접근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내가 이해하기로 신약성경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는 경험이 일종의 유배 생활과 같다는 관점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하고 구현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으로 복음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기 위해 힘써야겠지만(딛 2:10), 성경이 가르치는 사실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고] 미련”하게 보인다는 것이다(고전 1:18).이 정도의 의문만 제외한다면, 나는 굴드의 작품이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가 지닌 신앙을 충실하게 변증하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마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다른 변증학 방법들과 같이, 그의 논증 역시도 비기독교인에게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하고 유익한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분명 복음의 메시지를 믿을 만하고 받아들이고 싶게끔 제시하는 일은 교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신자들은 다시금 진정한 환상을 보며 문화에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후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으로 보냄 받아 복음과 문화의 충돌을 일으켜 내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t’s Time for a Holistic Apologetic번역: 장성우
문화
세계관
변증학
루이스
이성주의
자연주의
어거스틴
아퀴나스
베네딕트옵션
탑다운
주 하나님 지으신 이 세상의 경이로움
by Marshall Segal
2021-01-01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어떤 것을 보고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하며 깊고도 부인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잠시나마 움직일 수 없었던 적이 있는가?바쁜 삶 중에 그렇게 멈추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피조계를 통해 우리에게 끊임없이 주시는 메시지를 계속 외면한 채 살아간다. 기적으로 가득한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에서 그야말로 헤드폰을 낀 채로 걸어가고 있는 셈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연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는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동차, 스마트폰, 팟캐스트, 그리고 유튜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혹(fascination)과 경이로움(wonder) 같은 것에는 이제 관심을 주지 않고, 자녀들이나 손주들에게 물려 줄 요량으로 그것들은 서랍 속 깊숙이 처박아 놓았다.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들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을 만큼 내면이 강하지 못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조로움 속에서도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성숙하신 분이다. 매일 아침 태양에게 같은 일을 시키시고 매일 밤 달에게 같은 일을 명하시니 말이다. 데이지꽃들이 모두 비슷하게 생긴 것은 당연히 그래야만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데이지꽃을 하나하나 만드시면서도 결코 싫증을 내신 적이 없으시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의 순수함을 영원히 소유하고 계신 분 같다. 우리는 범죄하였고 나이가 들었지만 우리 아버지께서는 우리보다 젊으신 게 아닐까? 자연에서 일어나는 반복은 단순한 재발이 아니다. 연주회에서 보는 앵콜(encore) 같은 것이다”(‘Orthodoxy,’ 58쪽).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당신 스스로 만드신 것들을 진심으로 즐거워하신다(창 1:31)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성인인 우리들은 시큰둥해지고, 주의가 산만해지고, 또 너무 바빠진 것 같다. 경이로움이 사라진 일상우리 일상이 얼마나 많이 인공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지 잠시 생각해보라. 집 안을 보면, 우리가 자는 침대부터 욕실, 식탁에 이르기까지, 또한 자동차와 사무실 그리고 책상, 전화기, 컴퓨터 그리고 TV까지 모든 것이 사람이 만든 것들이다. 내 자동차까지 걸어가거나 복도 끝에 있는 창문까지 걷는 것 외에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거대하고 놀라운 세상을 거의 완전히 무시하고 지낸다. 특히 도시 환경에서는 우리가 하루 중 접하는 거의 대부분의 것들이 하나님이 아닌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하지만 인간의 모든 창의력과 지식은 우리 집 앞마당에 있는 나무 한 그루 앞에서 부끄럽게 된다. ‘누가 과연 이런 나무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우리 집 나무는 비상하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우리 집 앞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보면 더 크고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해 우리 집 나무는 눈에 띄지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멈춰 서서 우리 나무를 본다면, ‘정말로‘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놀라운 ‘하나님으로 가득한‘ 나무라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멈춰 서서 그 나무를 본다면 말이다. 숲과 나무를 그리며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피조계에 ‘분명히’ 편재하신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밤하늘과 아름다운 해돋이, 파도가 치는 바다와 평화로운 초원, 퓨마와 개미탑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들을 무시해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댈 수 없는 경건치 못하고 불의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핑계를 댈 수 있을까?우리는 성경을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쓰신 다른 책들을 놓칠 수 있다. 피조계는 성경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계의 모든 부분들을 전혀 틀림이 없고(infallible), 무오한(inerrant)하며, 충분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말씀의 창을 ‘통해’ 바라봐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듣는 목소리를 사랑한다면, 나무, 거북이, 폭풍, 그리고 오늘 아침 앞마당을 짝지어 걷던 오리 두 마리를 통해 들려오는 동일한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출애굽기, 이사야, 마태복음과 로마서에서 읽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바다에서 그를 보고 꽃에서 그의 내음을 맡으며 꿀에서 그분을 맛보고 햇살의 따스함이나 첫 눈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지만, 피조계를 통해서도 성경에서만큼 크게 말씀하신다. 물론 피조계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 언어가 우리로 온전히 기댈 수 있을 만큼 명확하지는 않지만 말이다.피조계에서 하나님을 보려면로마서 1장을 보면 알 수 있듯,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냄새 맡고, 듣고, 맛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것 안에서 광대하고 섬세한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다. 그리고 그후에 우리를 그가 창조하신 피조계 속으로 보내셨다. 하지만 동시에 로마서 1장은 우리가 발견하는 모든 아름다움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하는데, 우리가 이 세상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으면(롬 1:17), 우리는 이 세상’만을’ 사랑하게 되어 파멸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진리를 억누르고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버렸던 죄인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 영광은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었으나 죄인들은 이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롬 1:23) 바꾸어 버렸다. 새 자체의 아름다움을 그 새를 만드신 하나님보다 더 귀하게 여김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새들의 진짜 아름다움, 진짜 노래를 상실하고 말았다. 그들이 본다고 착각했던 그 영광은 사실 끔찍한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기루일 뿐이었다. 실체를 오독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의 나락 안으로 떨어지고 말았다(롬 1:24–25).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피조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었다.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6). 그 빛이 우리 안에 ‘그의 말씀을 통해’ 비추어졌을 때, 동일한 빛은 해처럼 떠올라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을 비추기 시작한다. T. M. 모어(T. M. Moore)는 “피조계의 전적이고도 최종적인 목적을 알려면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눈으로 봐야 한다”(‘Consider the Lilies,’ 89쪽)라고 말했다. 피조계를 바라볼 때스티브 드윗(Steve DeWitt)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보기 전에는 다른 어떤 것에서도 진정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라고 썼다(‘Eyes Wide Open,’ 116쪽). 파랑새가 부르는 블루스, 펭귄의 어기적거림, 강의 급류와 호수의 잔잔함, 백합 꽃잎, 절벽을 타고 내려가는 산사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영원히 예수께 고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분으로부터 눈을 ‘떼면’ 피조계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없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그분을(히 1:2) ‘통해서만’ 그 아름다움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그 아름다움을 보기 ‘원할 때’ 예수님은 다른 모든 것들의 아름다움을 풀어놓아 우리로 하여금 보게 하신다. 다윗왕의 시편을 떠올리며 ‘평범한’ 하늘을 올려다보면, 우리도 그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게 되지 않을까?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 8:3–4).이런 종류의 경외감을 가지려면, 특히 그간 피조계를 피하거나 무시해왔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의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기억하라. 언제나 시간이 ‘걸린다.’ 다윗은 “주의 하늘 … ‘내가 보오니’”라고 했다. 하지만 피조계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고 그를 즐거워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평범치 않은 당신의 ‘영원한’ 능력을 드러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평균 이상이 아닌 ‘신적인’ 본질이다. 하늘과 땅이 만날 때이 땅에서는 우리가 ‘그의 피조계를 통해’ 그를 보고 즐거워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나, 다가올 세상에서는 그리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천국은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과 경험을 풍성케 해줄 것이다. 창조된 세계는 썩어짐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것이고 ‘우리도’ 피조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던 소경 됨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것이다. 그 영원한 날이 오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의 의미에 대해 더 알게 될 것이다. 일반계시에 대해 우리가 조심스레 가졌던 그 긴장과 조바심은, 항상 우리 눈앞에 있었지만 우리가 보지 못했던 것,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에 드러난 하나님의 자취를 발견해내고 드러내는 그 기쁨 앞에서 사그러들고 말 것이다. 그날이 오기까지는, 타락하여 망가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이지만 우리는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안에서 그의 음성 듣기를 연습한다. 조 리그니(Joe Rigney)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이 세상을 무로부터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을 정확히 드러낸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피조계에 대한 깊고 심오하고도 어울리는 사랑으로 이어져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를 이루어내었다. 우리 역시 그래야 한다.”(‘The Things of Earth,’ 62족)라고 말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더 주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그를 즐거워함이 마땅하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Wonder We Once Had: Unearthing the World God Made번역: 이정훈
세계관
창조
일반계시
안식
삼위일체
자연
피조세계
GK체스터턴
성경
피조물
남성다움(masculine)의 미래
by Greg Morse
2020-12-14
“당신은 남성다움(masculine),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거야. 황금 사자, 수염 난 황소와 같이 크고, 방해가 되지 않는 소유물은 난장이들이 조심스럽게 만든 침대를 마구 흩어놓을 때 울타리를 뚫고 나가서 당신의 원시 왕국을 흩어지게 만드는 거지.” 감독은 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남성다움 그 자체에 불쾌감을 느낀다니.바로 이 지점에서 C. S. 루이스(C. S. Lewis)의 우주 이야기 3부작의 피날레 ‘그 가공할 힘’(That Hideous Strength)에서 불행하게 결혼한 주인공 제인은 오늘날 우리가 현대 여성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런 인물이 된다. 소설 속에서 제인은 강하지만 복종하는 기독교인 아내인 미세스 딤블이 드러내는 여성성과 정반대 위치에 자리잡은, 직업을 추구하는 평등주의 비기독교인이다. 지금까지 존경심과 경외감을 갖고 바라보던, 사실상 황금 사자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감독을 제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살던 세상이 기울어지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평소에 갖고 있던, “인간이 아닌 물물 교환의 대상이자 욕망 및 소유의 목표물로 취급되는, 도무지 잊을 수 없는 여성으로서의 공포”가 다시금 떠올랐다. 그녀는 이제야 남성다움을 어느 정도 멀찍이 둘 수 있을 정도로 힘든 한숨과 비웃음의 세월을 보냈었다.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서 남편 마크를 선택했다. 마크는 그녀를 “정말로 이해했다”. 이해한다는 말의 의미는 마크가 제인의 자주적인 행동에 그 어떤 위협을 가하지 않았고, 그녀가 원치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인은 갑자기 현실이 그녀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턱수염에 당황해서우리는 지금 제인으로 붐비는 사회에 살고 있다(비록 운전면허증 속 이름은 제이슨이라고 해도).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페미니스트들은 턱수염 난 황소에게 반항하며, 그에게 거칠고 억압적이며 위험한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다. 많은 사람들이 우주의 포효, 인류의 머리, 창조의 왕, 남자, 등등의 단어에 불쾌감을 느낀다.오늘날의 “덕이 있는(virtuous) 남자”는 그냥 남자보다 훨씬 더 큰 미덕으로 묘사된다. 그는 순응하고, 존중하며 또 부드럽다. 무엇보다 그는 나이스한 사람이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세금을 내며, 항상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스캔들과 “학대”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는 사람이다. 그는 안전하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이 죄악으로 물든 세대를 향해서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할 뜨거움도, 열정도, 힘도, 그리고 그 어떤 목적도 그에게서는 찾을 수 없다. 전통적인 남성다움-근육질이고, 대담하며, 무게감이 있는 것-은 이제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오히려 불쾌감을 유발한다. 그렇기에 현대를 사는 남자라면 결코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이 제인의 관점에 빠져 있다. 오래된 진리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머리와 돕는 자(역자 주: 아담과 이브에게 붙여진 호칭, 즉 남자와 여자를 의미함) 둘 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을 따라 만들어졌다. 또한 두 사람 다 그 가치라는 면에서 서로 동등하고, 서로가 서로를 의존하며 또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의 은혜를 공동으로 상속한다(창 1:27; 고전 11:11-12; 벧전 3:7). 그러나 이런 진실도 서로에 대한 구분이 남아있는 한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그런 사람들은 다음 구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고전 11:7). 여자가 남자를 위해 만들어졌다는 말에 불쾌감을 느낄 뿐이다(고전 11:9). 그들은 공동체 모임에 대한 바울의 말을 읽을 때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흔든다.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딤전 2:12–13).그들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신 것처럼 모든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며 합법적인 한 모든 일에서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결혼 서약서에서 실질적인 중요성을 보지 못하겠다고 주장한다(엡 5:22-24).남성다움이 과거에는 지배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었다면, 이제는 무관함(irrelevance)이라는 형태로 타락해서 왜곡되고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남자의 시대는 지났다고 결론 내리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그렇기에 이제 남자는 여자에게 권한을 부여해야 하고 대신 남자는 여자가 힘을 써도 된다고 허락할 때에만 움직이는 존재로 인식하라는 것이다. 제인의 많은 아들과 딸이 생각하듯이, 이제 미래는 여성다움이 다스리는 시대라고 한다. 우리가 도망칠 수 없는 그 남자감독의 다음 말은 은유의 힘을 통해서 제인에게 충격을 줬다. 그리고 우리도 조금만 깊이 생각한다면 똑같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당신이 탈출할 수 있었던 수컷은 생물학적 수준에서만 존재해. 그러나 남성다움, 그 자체에서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어.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 더 늦기 전에 당신의 적과 동의하는 게 좋을 거야.”(313)저 위에 왕관을 쓰고 앉은 그는 도무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남성적이다.우리 세대가 남성다움을 조롱하고, 비하하고, 또 왜곡하는 정도에 상관없이 감독은 제인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것이 일시적인 일이 아니라고 상기시킨다. 이 땅에서야 남편, 아버지, 그리고 왕을 피하고 부끄러워하고 누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영원하신 그가 오신다. 그는 남편이자 아버지이고 또 심판자이자 왕이시다. “영혼은 이 땅의 남성을 우회하여 훨씬 더 남성다우며 또 훨씬 더 높은 분을 만나러 나아갈 수 있으며, 그 분 앞에서 더 깊이 굴복해야 한다.”오늘날 고대 바리톤 안에서 아름다움을 만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매혹적인 반주, 바리톤의 목소리에 맞는 또 다른 목소리,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여성스러운 음색에 감동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제 같은 음표가 피아노에서 연주되고 남자와 여자 목소리가 동등하게 울려 퍼지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영원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따라다닐 차이를 결코 보지 못하게 된다. 저기 머무는 이의 소리가 천둥과도 같고 그의 낮은 울림이 참나무를 떨게 하고 숲 전체를 벌거벗게 하신다 (시 29:9). 당신이 만나는 거룩한 성도들 중에서, 비록 불완전하지만 진실된 남성다움을 사랑할 수 없다면, 지금 당신이 눈으로 볼 수 없는 거룩한 그 분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아빠라는 이름의 여자?그런데 하나님이 남자(he)라고? 그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나 여성이 아닌데 왜 우리는 피조물 영역에서나 존재하는 그런 사소한 성적 구별을 하나님에게까지 해야 하는가? 제인도 처음에는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 또한 영적 영역에서는 성별과 같은 구분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영적 세계로 가는 상승의 모든 단계에서 서로 간의 대비가 주는 차이가 더 풍부하고 더 날카롭고 오히려 더 치열할 수도 있겠다는 의혹이 생겼다”(312).다시 말해, 그녀는 이제 평등한 결혼은 중성적인 영원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라는 애초의 가정을 재고해야 했다. 그녀는 이제 그녀가 지상에 있는 자신을 침범하는 남성적 머리라는 직분의 흔적이 사실상 “가장 높은 영적 세계에서는 훨씬 더 크고 혼란스러운 수준(modes)에서 반복되는 현실과의 충격적인 접촉의 첫 번째이자 사실상 가장 쉬운 형태”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312).하나님의 남성성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이야기되어 왔다. 여성적인 은유(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향해 여성적인 칭호나 대명사를 쓰는 것은 절대로 아님)로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는 본문의 경우에는 반드시 제대로 된 설명이 따라온다(예: 사 66:13; 호 13:8; 마 23:37).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영화 ‘오두막’(The Shack)이 악명 높게 묘사한 것처럼 결코 “아빠”(Papa)라는 이름을 가진 흑인 여성이 아니다. 남성을 여성으로 대체해버린 기독교의 성경을 잠깐 상상해보라. “하늘에 계신 그녀가 웃으심이여 그녀가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그 때에 그녀가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여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시 2:4-6)“그 숙녀(Lady)는 전쟁의 여왕이시니 그 숙녀(Lady)가 그녀의 이름이시로다”(출 15:3)“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딸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녀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녀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어머니라, 평강의 공주라 할 것임이라”(사 9:6)“그녀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녀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녀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녀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녀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녀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영원토록 하나님은 생물학적으로 남성이 아니라 영이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남성이라고 밝히셨지만, 신약에서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성을 가진 인간의 영혼과 몸을 취함으로써 논쟁을 단번에 해결하셨다. 아들은 남자이다. 완전한 하나님, 완전한 인간. 성경적인 남성다움에서 많은 사람들이 탈출했다. 그러나 모든 성경이 가리키는 남성다움에서 달아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전하지는 않지만 좋은남성다움 자체에 대한 반란은 깨어질 것이다. 그런 메시지를 담은 표지판은 거리에 흩어져 나뒹굴 것이다. 아담의 아들들을 다스리려는 현대의 욕망은 침묵할 것이다. 그는 돌아올 것이다. 전쟁의 레이디가 아니라 전쟁의 왕자로서 그가 구출하러 올 것이다. 결코 여왕이 아니라 왕으로서. 암사자가 아니라 유다의 사자로서 말이다.자, 중요한 건 이거다. 내가 지금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그런 식의 공격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 내가 말하는 것은 현재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이다. 비록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권위와 머리됨이라는 직분 자체의 구분을 무시할 정도로 무섭게 공격하고 있지만, 그런 세상은 단번에 끝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게 남자들에게 자랑거리가 되는 건 아니다. 이런 반역의 큰 죄를 지은 사람들 중 일부가 남성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최고의 남자들조차도 다음 이 말을 깊이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 위에 또 그 너머에 있는 그것은 너무도 남성다워. 그래서 그와 관련해서는 우리 모두가 다 여성적일 수밖에 없지.”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할 때 우리는 인간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아버지와 아들,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목사들과 신적 힘을 가진 통치자들 조차도 여성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이런 모든 관계는 창조 세계 속에서는 자연스럽고 또 확실히 남성적이지만, 영원한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해서는 모두가 다 신부인 것이다. 언젠가 이 사실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피조물에게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이 세상이 결코 피할 수 없는 남성다움은 바로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가 도망치고 싶지 않았던 바로 그 남성다움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향해 그 어떤 잠재적인 두려움 없이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다.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는 결코 안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하시다. 원제: The Future of Masculinit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남녀평등
C.S.루이스
남성다움
신랑
신부
그가공할힘
페미니스트
자소사대(字小事大)와 주체적인 언약 관계
by 노승수
2020-12-12
유학의 고전인 사서오경 중에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며 공자가 직접 집필한 것으로 알려진 춘추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워낙 간략해서 주석 없이 볼 수가 없는데 잘 알려진 주석으로는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그리고 춘추좌씨전이 있다. 이 책은 춘추 시대 노나라의 역사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중에서 춘추 좌씨전이 가장 유명하며 거기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예(禮)라는 것은 작은 자가 큰 자를 섬기고, 큰 자가 작은 자를 아끼는 것을 말한다(禮也者, 小事大, 大字小之謂).”여기서 온 말이 “사대주의”다. 사대주의는 사대를 매우 부정적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산물이기도 하다. 주체성을 결여한 노예근성이라고 일본이 우리에게 붙인 꼬리표다. 사무라이들의 복종으로 특징지어지는 질서를 일본인들이 한국을 지배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우리 민족의 사대 전통을 왜곡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춘추에 나오는 자소사대(字小事大)는 국제 질서이기 전에 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예절이라 할 수 있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아끼고 어린 자는 큰 자를 섬기는 질서는 정치 질서 이전에 우리 사회의 근간이었다. 국제관계에서 조선이 명나라와 사대외교의 구체적인 예시라 할 수 있는 조공무역에 관한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고 사대의 구체적 의미를 들여다보자.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 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 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태종실록 1년 10월 3일)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 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 이에 그대로 따랐다(세종실록 8년 1월 7일). 조공무역의 주요 품목은 말과 포였다. 명에 보내는 말 값이 상등품은 500필이고 여진에 보내는 말의 상등품은 45필이다. 당시 평균적이 말 가격은 30필 정도였으니 거의 17배 정도의 시세차익이 발생한다. 그에 비해 작은 나라인 여진에 대해서는 말의 시세가 면포 30필 정도였음에도 45필로 정해 더 많은 금액을 사여(賜與. 하사품)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번은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를 할 테니 말을 먼저 달라고 했지만 태종은 거절했다. 이처럼 사대(事大)는 자소(字小)를 배경으로 한다. 오히려 섬기는 쪽이 큰 이득을 보는 구조를 하고 있으며 태종의 거절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굴종이나 복종을 의미하지 않으며 주체적인 외교질서를 의미한다. 사대란 기본적으로 윗사람을 잘 섬기는 원리며 자소란 아랫사람을 아낄 줄 아는 원리이자 힘이다. 사실 한국인에게는 이게 몸에 베여 있다. 예일대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 홍유니가 "눈치의 힘(The Power of Nunchi)"이라는 책을 썼는데 눈치는 번역할 적당한 영어 단어가 없는 단어다. 한국인의 이 눈치가 바로 자소사대의 원리다. 공동체 의식의 발로이자 이웃과 더불어 사귀면서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사대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뉴욕의 할렘가 극빈층 거주 지역에 극빈층 아이들을 완전 한국의 교육방식을 그대로 이식해서 가르치는 데모크라시 프렙 공립학교(Democracy Prep Public School)는 80프로 정도의 학생이 미국 명문대에 진학하는데 이 학교가 가르치는 것이 한국의 정신이 바로 사대 곧 윗사람에 대한 존경이다. 한국인의 위기를 극복하는 국난 극복의 DNA에는 모두 이웃을 배려하는 사귐의 정신과 윗사람을 잘 섬기고 아랫사람을 아끼는 자소사대의 전통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IMF 때의 금모으기, 태안 기름 유출 사건에 보인 전 국민의 자원봉사, 세월호에서 보인 이웃에 대한 배려가 사대의 힘이다. 조선의 선비가 언제 왕의 말만 듣고 그 말에 동의만 했던 적이 있는가? 예문관은 임금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기록했다. 생전에 임금은 자신의 사초를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사후에 작성된 실록은 전국 4개의 서고에 보내져 그 기록을 후손에 보존했다. 여기 임금을 섬기는 조선의 선비의 사대에 어디 사대주의가 있는가? 오히려 왕권에도 굴하지 않는 선비의 기개와 질서가 있다. 사대주의적 굴종은 일본의 사무라이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몰라도 조선의 선비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것들이다. 군신 간에 의가 있고 부부 간에 구별됨이 있고 부모자식 간에 친밀함이 있는 이 원리가 사대의 힘이다. 고려가 상인으로 유명했던 것 역시 사대하면서 주체적인 한국인의 특성 때문이다. 서희가 강동 6주를 외교로 얻은 것도 이런 주체적인 힘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은 성경의 언약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언약 공식이라고 알려진 출애굽기 19장 5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에서 “소유(segullah סְגוּלָּה)”라는 단어는 원래 고대 근동의 외교문서에 나오는 정치 외교적 단어다. 신명기 26장 18절에서는 “보배로운 백성(segullah סְגוּלָּה)”이라 번역했고 말라기 3장 17절에서는 “나의 특별한 소유”라고 번역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언약 관계와 언약 백성이 보석으로 비유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예컨대, 계시록 21장에서 어린양의 신부를 보이리라고 하면서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는데 이는 모두 보석으로 치장되어 있으며 이 보석은 어린양의 신부인 교회를 보여준다. 이 단어는 고대 근동의 종주, 곧 큰 자가 봉신 곧 작은 자들을 부르던 말이다. 종주가 봉신을 내 보석이라고 부른 것이다. 여기에 바로 자소의 원리가 들어 있으며 그렇게 사랑을 받는 봉신은 종주를 향해서 사대의 예를 다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고대 근동의 정치 질서에 세례를 베풀어 성경의 언약관계를 대표적으로 설명하는 신학적 개념으로 삼았다. 동아시아의 정치질서인 군신간의 의(義)는 다말이 그 남편에 대한 의리를 다하고자 자신의 시부 유다와 동침하여 후손을 얻고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계보에 든 사건에서의 다말의 의와 거의 같은 개념이다. 자소사대의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때 그것을 성경은 의라고 표현한다.춘추에서 사대는 큰 나라를 잘 예우하면서 그것으로부터 제대로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동아시아가 유럽과 같은 많은 전쟁이 없이 근대의 시기를 보낸 것도 바로 이 자소사대의 정치 원리에 기대어 있기도 하다. 한국인은 항상 외국과 자신을 비교한다. 선진국의 모습을 보며 배우려 한다. 그런데 이제 더 배울 데가 없는 자리에 왔다. 한국의 이런 비약적인 발전은 패스트 팔로워를 넘어서 선진국 반열에 오르게 된 이 힘에는 주체적인 사대의 힘이 자리하고 있다. 이제 사대는 미국의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처럼 세계에 봉사하는 정신으로 거듭나는 지점에 와 있기도 하다. 이 미국의 예외주의의 기원은 청교도들이다. ‘언덕위의 도시(A city upon a hill)’를 건설하고자 했던 이들이 바로 이 예외주의 탄생의 주인공들이다. 최근 미국의 한 언론은 이 미국적 예외주의를 한국의 방역모범에 적용해서 기사를 냈다["한국의 코로나19 예외주의 이면에 있는 것은 무엇인가"(What's Behind South Korea's COVID-19 Exceptionalism”, The Atlantic, May. 6. 2020,)]. 한국 사회와 국가가 이런 평가를 받는다면, 하나님을 사대하며 주님으로부터의 자소를 입은 언약 백성인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얼마나 더 성숙하고 거룩한 삶과 공동체로서 이 세상 속에서 소금이며 빛이어야 하겠는가? 우리는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가?
문화
세계관
사서오경
공자
사대주의
조공무역
눈치의힘
예외주의
자소사대
코로나19
불변의 하나님 말씀을 겸손하게 해석하기
by Trevin Wax
2020-12-08
이 시리즈의 첫 번째 글에서 나는 다른 문화와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들로부터 통찰력을 얻고 싶어 하는, 점점 더 그 숫자가 늘어나는 복음주의자들이 가진 열정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이러한 변화(development)가 우리와 성경 본문 사이의 문화적 거리를 과장함으로 우리를 특정한 사회적 위치(social location)에 가두게 되고, 그 결과 성경의 권위를 약화시킬 수도 있다는 우려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한편으로, 우리는 텍스트를 접할 때 갖는 “선이해”를 최소화해서는 안된다. 해석을 좀 더 정교하게 다듬기 위해서라도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회적, 문화적 위치가 주는 영향을 과장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머리를 맞대고 마음을 모아 본문을 주의깊게 연구할 때 발견하는 광범위한 합의를 기뻐해야 한다.우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그렇다고 모든 해석을 다 상대화하거나 텍스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준 포스트모던적인(quasi-postmodern) 관점 이론을 채택하자는 게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문화와 배경이 전혀 다른 번역자와의 교류를 최소화하는 상식적 현실주의로 돌아가자는 것도 아니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인식론적 겸손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한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신학적 덕목으로서 바라볼 때, 우리는 가빈 오틀런드(Gavin Ortlund)처럼 다음과 같이 겸손을 정의할 수 있다.“겸손 … 자신이나 또는 자신이 가진 신학에 대해서 낮은 의견을 가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모든 수단을 통해 열렬하게 진리를 추구하는 자세를 가지는 동시에 아직까지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이다.”이번 마지막 글에서 포스트모던이나 현대적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도움을 주는 몇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성경 독자(Bible readers)로서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점에 관해서 고민하라 우리는 유한하다. 인간인 이상 우리는 성경 독자로서의 한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한계 중 일부를 얼마든지 인식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문화적, 사회적 위치가 성경 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다 더 잘 알 수 있다.성경 읽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화적 힘(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관계없이)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그런 힘이 아예 없다고 가정하면서 무시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문화와 개인적인 경험이 성경 해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하게 되면,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 쓰고 있는 렌즈를 “보게 되며”, 그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성경을 공부하면서 나름의 관점을 구축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례: 개인주의적 직관의 영향을 많이 받는 미국인들은 신약성경 속에 나오는 명령들을 주로 개인에게 주어진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성경의 오리지널 언어의 표현뿐만 아니라(교회로 지칭되는) 성경의 수신자가 복수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경이 ‘당신’이라고 할 때 그 단어가 복수를 가리키고 또 그렇기에 복수형 동사 형태가 쓰인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읽어야 한다. 이처럼 성경이 복수로 지칭되는 공동체를 향해서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오늘날 영어권 독자들에게 쉽게 간과된다. 성경의 명령은 개인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명령의 주된 초점은 교회라는 집단적 순종을 위한 것이다. D. A. 카슨(D. A. Car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프리카 신자들이 교회의 집단적 특징(corporate character)을 놓고 쓴 바울의 은유를 더 빨리 발견하는 것에 비해, 서양의 많은 사람들은 개인주의의 유산 때문에 그런 측면을 알아채는 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해석학적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경우, 당신의 책읽기가 개인주의적 배경(assumptions)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한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 결과 당신은 더 나은 성경 독자가 될 수 있다. 이 사실은 다음 사항으로 이어진다. 2.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다른 이들이 주는 지혜에 의존하라리처드 린츠(Richard Lints)는 그리스도의 지체가 각기 다른 지체로부터 유익을 받을 때 누리는 풍요로움에 관해서 깊은 통찰을 준다. “교회의 행복(well-being of the church)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 하나의 복음을 얼마나 잘 수용하는가에 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의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은 다양한 은사를 부어주신다. … 다양한 교회 지체는 성경 해석이라는 작업에서도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서로를 잘 이해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견(divides)을 뛰어넘는 이해를 위해 서로의 의견에 경청하는 힘든 노력이 필요한데, 이를 통해서 우리는 얼마든지 이견을 뛰어넘는 이해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함에 대한 깊고도 변함없는 확신(commitment)이다. 단순히 “우리는 서로가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일부 사람들은 서로가 필요하다는 진리를 지나가는 유행 또는 비정상적인 의제 또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무릎을 꿇기보다 오히려 성경 위에 서게 만드는 포스트모던 철학을 장려하는 도구로 악용하기 때문이다. D. A. 카슨은 이 과정에서 성령님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성경의 필수불가결함을 지적하는데, 그의 지적은 지극히 옳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진리를 행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만큼 우리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성령님의 도움이 필요하다. 중재하는 성령님의 도움이 얼마든지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고는 해도, 사려깊은 기독교인의 목표는 결코 성경의 주인이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의 백성의 선을 위해 성경에 순종하는 종(be mastered)이 되는 것이다.”우리가 성령님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을 알게 하며 동시에 하나님 말씀의 의미를 밝히고 바른 해석을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기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겸손하게 기도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좋은 성경 해석의 전제 조건과 최종 목표는 계시의 말씀이 주는 경외심과 놀라움으로 성경말씀의 궁극적인 저자를 예배하는 것이다. 예배와 성경 주석은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다. 3. 모든 읽기가 다 똑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우리와 동일하게 성경의 권위를 믿는 다른 문화권의 신자들이 텍스트를 이해하는 방법에 있어서 우리와 상충하는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포스트모던 시대의 유혹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차피 모두가 다 각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서 성경을 읽기 마련이니까, 성경이 진짜로 의미하는 바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대신 우리는 모든 성경 읽기가 다 똑같지는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카슨은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한다. “어떤 개인이나 그 어떤 단일 공동체도 특정 성경 구절이나 주제에 대해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인식하는 것은 현실적일 뿐 아니라 겸손한 행위이다. 서로의 말을 경청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더 풍부한 해석을 얻을 수 있으며, 때로는 기존 해석에 직접적인 수정을 하게 될 때도 있다.” 모든 진실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진실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와 여러 시대에 걸친 기독교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광범위한 동의가 바로 공통적 신앙의 증거이다. 사이몬 챈(Simon Chan)은 ‘Grassroots Asian Theology’라는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방식을 형성하는 것은 지역 문화이다. 그러나 지역 신학이 거기서 그치지 않고 진정한 기독교가 되기 위해서는 더 큰 기독교 전통과 실질적인 연속성을 가져야 한다.”카슨은 또 이렇게 말한다.“신약 성경에는 거짓 교리, 거짓 그리스도, 거짓 복음에 관한 많은 경고가 있다.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한 건 결코 아니며 또한 이런 저런 해석이 특정 공동체에 의해 지지되고 옹호된다고 해서, 그 해석이 반드시 성경에 충실한 해석이라는 것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또 성경을 다시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 속에서 다른 이의 해석이 더 본문에 충실하다면 얼마든지 나의 해석을 고치겠다는 열망을 가져야 하며, 무엇보다 마치 우리가 최종 판사인 것처럼 성경 위에 서지 않아야 한다. 오로지 성경 말씀만이 우리의 판사가 되어서 우리 위에 서도록 해야 한다.”4.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문화에 도전할 것을 기대하라다른 문화권에 사는 기독교인의 해석을 포함해야만 성경 해석이 더 좋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근시안적 착각이다. 기억해야 할 진실은 모든 문화가 어떤 식으로든 다 부패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기독교인들의 책읽기 방식이 우리가 가진 문화적 우상을 어느 정도 드러낼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다른 지역에 사는 기독교인들 역시 우리의 해석이 그들의 우상들에게 던지는 도전이 될 수 있음을 기대해야 한다. 이것은 다른 모든 해석을 판단해야 하는 기준으로 “살아있는 경험”에 호소할 때 생기는 주요 문제 중 하나이다. 인간의 경험이란 것은 빛을 비추기는 커녕 아예 더 모호하게 만들 수도 있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성경 읽기까지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철학적 원칙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그는 해방 신학을 예로 들고 있다.“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에 대한 타협할 수 없는 헌신으로 시작하는 신학의 경우, 만약 그런 헌신이 비 성경적 관점의 사고 형태를 통해 표현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면, 이제 그런 신학은 신학 자체에 해를 끼치는 신학적 통제를 행사하게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절차는 성경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나는 가난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성경을 훼손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가난한 사람들의 해방이라는 생각이 비 성경적 관점까지 형성하는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다.” 클락이 ‘다 방향 리더십’을 구현하는 곳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전 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포스트모던 이론 뿐 아니라 순진하고 개인주의적인 해석 모두에게서도 우리는 위험을 발견해야 한다. “전통적인 복음주의 신학은 때때로 문화적 가정(assumptions)을 간과한다. 그러나 성경 해석에 관한 문화적 순진함을, 마치 모든 경험은 다 중립적이기에 경험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경험 속에는 언제나 이론적 기본(commitments)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에스더 아콜라체(Esther Acolatse)와 같은 학자들이 성공한 영역이다. 권력과 권세에 관한 작업을 통해서 그녀는 단순히 어느 한 곳의 문화적 해석을 다른 것과 비교해서 수정하는 것으로 그치는 대신, 모든 문화가 예외 없이 타 문화권의 신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반복해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성경적 도전이 문화에 관계없이 세계 모든 곳에서 항상 강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5. 한 사람의 민족적·문화적 배경이 신학적으로 모두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아시아 신학자라면 아마도 아시아 신자들의 경험이나 교리를 반영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일부 기독교인들에 관해서 사이몬 챈은 우려를 표한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일부 아시아 신학자들이 채택한 것은 “문화에 대한 수용과 문화적 경멸자들에게 기독교를 칭찬하는“자유주의 프로그램”일 뿐이다. 문화가 신학자들이 고민할 의제를 정해줄 때가 있다. 이건 문화가 신학이 마땅히 다뤄야 할 규범(norms)을 정해주는 데 있어서 필요한 단지 작은 단계일 뿐이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시아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이런 식의 매우 선택적인 이해는 마땅히 도전받아야 하는데, 그건 계몽주의 인식론의 무비판적 동화와 그에 따른 신학적 분별력의 결여뿐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일어난 광범위한 기독교 운동을 완전히 무시하는 방식, 즉 복음주의와 아시아 대부분의 오순절 운동, 특히 인도, 일본 및 중국의 토착 기독교 운동에 대한 몰이해로 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 풀뿌리, 민중으로부터 시작한 신학을 무시함으로써 이른바 아시아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이 제시하는 것이 단지 오래된 사상을 재창조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챈은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된다고 말한다. “엘리트 신학자라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든지 새로운 신학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신학은 결코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많은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다. 그런 신학의 실패는 ‘해방 신학은 가난한 사람들을 선택했지만, 정작 가난한 사람들이 선택한 건 오순절주의다’라고 언급한 한 라틴 아메리카 신학자에 의해 정확하게 집약 표현되었다.”마찬가지로, 신학에 “흑인 신학”이라는 라벨이 붙었다고 해서 그것이 흑인 교회에서 제자화된 대다수의 흑인 기독교인을 대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떤 특정한 민족적 또는 문화적 배경(label)을 가진 어떤 신학이 또는 신학자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함을 믿고 말씀을 실천하며 사는 모든 기독교인을 제대로 대표한다고 가정하지 말라. 결론이 시리즈를 마무리하면서 겸손한 성경 읽기를 안내하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하는 데이비드 클락을 다시 한 번 인용하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복음주의자라면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1) 우리는 모든 신학적 해석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라는 현실을 인식해야 한다. (2) 우리는 모든 문화에 대해 의도적으로 자기 비판적 입장을 취해야 한다. (3)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 관련성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도 신학의 필요성을 주장해야 한다. (4)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모든 문화적 가정을 뛰어넘는 성경의 우선 순위에 순종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두 가지 실수가 가능하다. 하나는 문화적 또는 철학적 선이해가 아예 존재하지 않거나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척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거에 너무도 많은 복음주의 신학이 실패를 저질렀다. 다른 실수는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가정에 너무 깊게 함몰됨으로 그 가정이 결과적으로 구체적인 신학의 전체 의제를 다 결정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바로 여기가 주류와 자유주의 신학을 망라해서 맥락화의 오류에 빠진 신학이 계속해서 헛발질을 하는 지점이다. 사실상 현대 사회가 던지는 의제에 항복하는 경우 주변 문화와 구분 자체가 불가능한 신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신앙이 더 이상 문화와 구분할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신앙에서는 더 이상 생명(vitality)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함정을 피하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돕는 인식론적 겸손을 목표로 하자. 우리의 왕 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또 꿇도록 하자. 이 세상 모든 문화에 유익을 끼치는,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통해 그분의 권위가 말씀을 통해 이 세상에 훤히 드러나도록 다 함께 노력하자.원제: Becoming Humble Interpreters of God’s Unchanging Wo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읽기
겸손
성경해석
권위
DA카슨
복음주의
선이해
우리와 성경 사이 간격 제대로 이해하기
by Trevin Wax
2020-12-04
지난 첫 번째, 두 번째의 글에서 나는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데에 조심해야 할 두 가지 위험에 관해서 지적했다.- 첫 번째는 포스트모던 관점 이론의 영향을 받아 성경을 읽는 경우이다. 이럴 때 우리는 사회적, 문화적 위치 또는 특정 공동체의 “살아있는 경험”의 영향을 강조하는 해석학을 채택함으로, 애초에 철저한 본문 해석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상대주의적 해석 방식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는 텍스트를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또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다양한 대화 상대 자체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모더니스트 또는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으로 돌아감으로 포스트모던 식의 해석학에 반응하는 위험이다. 이전 글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제시했다. 우리는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시간, 문화, 지리, 언어) 영역을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과장해서도 안된다. 이번 글에서 나는 거리를 최소화해서는 안되는 이유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를 과장하는 위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 거리를 과장하게 될 때 우리는 아예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자괴감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 읽기에 있어서 “선이해”의 영향을 어디까지 인정하고 또 본문 속 바른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노력해야 할까?1. 진짜 지식과 전지적 지식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라참된 겸손과 거짓된 겸손을 구별해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진짜(genuine)” 지식과 “전지적(omniscient)” 지식을 구별해야 한다. 계몽주의 시대의 확실성(현실에 대한 “객관적인” 또는 “하나님의 눈”이 존재한다는 관점)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비판에 설득된 일부 성경 독자들은 진정 겸손한 자세는 우리가 진짜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두 손을 들고 항복 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건 진정한 겸손이 아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진짜 지식을 얻기 위해 전지적인 지식을 추구할 필요는 없다. 어떤 진실을 완전히(전지적)는 모르더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부분적으로나마 진실(진짜)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D. A. 카슨(D. A. Carson)은 이렇게 썼다. “성경은 우리의 창조자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을 향한 생각과 적극적인 믿음, 그리고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에 적절한 확신으로 응답함으로 인간이 얼마든지 지식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사실을 종종 암묵적으로 그러나 때로는 명시적으로까지 보여준다.”지식에서 자라나는 성장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거나 또는 우리가 알 수 없다는 사실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게 된다. 그분의 말씀에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것에 귀를 막기 위해 종종 편리하게 사용되는 변명인 “겸손함”에 호소함으로써, 우리는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포기하게 된다. 2. 모든 성경 해석을 문화적 산물로 축소하지 말고 성경 해석에 문화가 미친 영향을 정확하게 인식하라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문을 대할 때 가지는 “선이해”의 측면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사회 및 문화적 상황(location)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성경 공부에서 중립적이지 않다. 문화는 우리의 해석에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이 해석학에 미치는 영향은 모든 것을 문화로 축소시킨다는 사실이다. 케빈 벤후져(Kevin Vanhoozer)가 경고했듯이 모든 것이 “위치, 위치, 위치”가 된다. 그 결과 해석학적 과제는 진짜 지식이 가지는 보편성에서 각각의 성경 독자가 가진 위치와 상대성으로 옮겨진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케냐의 로잔 문서는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다름 아닌 성경의 권위에 대한 기능적 거부라고 설명하고 있다. “보편성에 대한 모든 주장이 그 주장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상대적일 뿐이고 또 관점의 차이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근거 자체가 없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그 어떤 관점으로도 누리지 못하는 특권 지위라는 우월성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듯 다양한 관점에 혈안이 된 세상이다. 관점의 다양성이 칭송받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대한 권리가 있고, 그 의견이 원칙적인 측면에서 도전받지 않는 경우라면, 이 세상에 잘못된 의견이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성경이 다른 종교 서적보다 더 권위가 있을 이유가 없다. 모든 경전은 다 각각 서로 다른 종교적 맥락에서 관련이 있으며, 이제 그 누구도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경로를 주장할 수 없다.”물론 사회적 상황(social location)이 성경 이해에 미치는 영향을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또 다른 문화권의 신실한 기독교인들과 대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성경 본문에 대한 더 넓고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진리가 개인의 관점에 달려 있다는 생각에는 강하게 저항해야 한다. 로잔 문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러한 평등주의는 진리의 기준이 다양한 진리 주장자들(truth-claimants)이 살고 있는 삶의 형태나 사회적 맥락 속에 엄격히 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합의된 표준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는 대신, 여러 관점과 차이를 포용하도록 하는 관용의 문이 열린다.”3. 흔하디 흔한 문화적 분열을 가로질러 광범위한 합의를 이룬 영역에 기뻐하라다시 말하지만, 성경을 이해하는 능력에 대한 사회적 위치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된다. 거리가 주는 차이를 최대화하는 것을 막는 방법 중 하나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는 사람들과 우리가 함께 찾아낸 광범위한 합의점을 인식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D. A. 카슨은 이렇게 말했다. “성경이 최종적인 권위이며 누구라도 성경 말씀에 따라서 수정될 수 있다는 사실에 있어서만 서로 동의한다면, 성경이 말하는 가르침과 관련해서 얼마나 많은 합의를 얻을 수 있는지 실로 놀라울 정도이다. 나는 지금 행복했던 나의 십 년이라고 부르는, 당시 세계 복음주의 펠로우십(World Evangelical Fellowship)이라고 불렸던 곳에서 사역하던 때를 기억한다. 실로 다양한 배경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대한 각자의 생각이 옳다고 하기 보다는 열심히 노력하고 인내하며 토론과 상호 비평을 하며 겸손하게 본문의 바른 의미를 찾으려는 목마름 등으로 우리 모두가 하나 되었던 그때를 기억하면 나는 지금도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다.”물론 핵심은 모든 해석자가 다 성경이 최종적 권위라는 데 동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자세는 성경에 복종하는 자세이며, 같은 본문에 대해 같은 마음과 열정을 공유하는 형제자매들의 통찰력에 마음을 여는 것이다. 이런 경우, 결과는 일반적으로 불일치보다 합의일 때가 훨씬 더 많다. 여기 의미있는 사례를 가지고 카슨이 다시 이야기한다. “몇 년 전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출판되었을 때, 출판사와 마케터들은 마침내 우리가 다른 대륙에 사는 기독교인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에 대해 그들의 해석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고, 그럼으로 기독교인에게 더 풍성한 성경 해석의 기회를 주게 되었다면서 흥분했었다. 물론 어떤 면에서 이것은 놀라운 진실이다. 아프리카 성경 주석은 서양에서 나온, 퇴마에 관한 책 한 권 전체 분량의 주석보다 더 많이 그 주제를 다뤘다. 그 뿐 아니라 마법, 조상 숭배를 둘러싼 질문 뿐 아니라, ‘건강과 부요함을 약속하는 번영 복음’을 향해서도 중대한 도전을 던졌다. 그러나 그 주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이 사실이다. 주석의 90% 또는 95%의 내용은 전 세계 어느 곳에서 복음을 믿는 그 어떤 기독교인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그 어떤 신학자가 썼다고 해도 90% 또는 95%의 내용은 일치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똑같은 책을 소유하고 있기에, 이런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좁은 시야에 갇혀 독자의 반응(reader-response)에 연연하는 해석학에 너무 매혹되기 전에 우리는 아프리카 성경 주석이 어떤 면에서 혁신적이지 않고 또 결코 혁신적이어서는 안 되는지를 자문해야 한다.”그러면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다음 글에서는 인식론적 겸손(epistemic humility)을 유지하면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을 제시하려고 한다. 인식론적 겸손이란 다른 문화와 배경이 던지는 목소리의 장점을 인정하는 동시에 또한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참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겸손한 자신감을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원제: Understanding (Not Exaggerating) the Distance Between Us and th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해석학
성경읽기
선이해
관점이론
D.A.카슨
성경해석
로잔문서
선이해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적 해석의 3원칙
by Trevin Wax
2020-12-02
이전 글(성경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까?)에서 나는 다양한 민족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성경 주석가를 찾는 데에서 열정을 느끼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서 언급한 바 있다. 번역자가 가진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배경이 작업 자체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할 때,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읽으며 또 우리가 가진 문화적 시각 장애(cultural blinders)를 제거해 주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할 수 있다. 이런 흐름과 동시에, 해석학에 적용되는 관점 이론(standpoint theory)의 변형이 생겨났는데, 이 이론에 따르면 성경 본문을 대할 때에는 배타적 통찰력(exclusive insight)을 제공하는 “살아있는 경험”이 담긴 억압받는 집단이나 소수 집단의 목소리를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식의 논리적 결론을 유도하는 관점 이론은 자연스럽게 수수께끼 하나를 던진다. 특권이나 억압이라는 측면에서 너무도 깊게 얽혀 있는 사회적 위치로 인해 특권 집단의 해석은 결국 피할 수 없는 편향성(다른 말로 하면, 오류)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또한 모든 지식은 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구성되었기에, 텍스트가 가진 “객관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결국 무의미한 노력(exercise)으로 그치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단지 문화라는 새장에 갇힌 포로에 불과하다. 단지 어떤 새장이 그나마 좀 더 나은 새장인가 아닌가의 여부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세계 다양한 지역 기독교 신학자들의 의견을 듣고 싶어하는 진지한 소망을 가진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스로를 과거 신학적 권위자들의 지혜에서 단절시킬 수도 있는 일종의 관점 이론에 빠질 위험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 관점 이론에 대한 적절한 반대를 표명하는 다른 복음주의자들은 “현대적” 도구로 포스트모던 문제에 맞서 싸울 수 있으며, 우리가 텍스트에 주입하는 “선이해”의 영향을 최소화하면서도 다양한 목소리라는 지혜를 차단할 수 있다.이번 글과 다음 두 글에서는 이런 두 가지 오류로부터 우리를 보호하는 원칙을 제시할 생각이다. 이 글의 목표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에 대한 우리의 믿음(commitment)을 약화시키는 철학(현대이든 포스트모던이든)에 결코 속지 않는 더 나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다.1.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거리가 주는 차이(areas of distance)를 최소화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필요 이상으로 과장해서도 안 된다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대한 복음주의 표준 교과서라고 볼 수 있는 그랜트 오스본(Grant Osborne)의 ‘해석학적 나선형'(The Hermeneutical Spiral)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에 도전하는 네 가지 거리 영역을 언급하고 있다. ① 시간② 문화③ 지리④ 언어성경의 “명료성” 또는 “명확성”에 대한 우리의 확신은 현대 세계와 성경이 기록되던 시대 사이의 거리를 줄이려는 그 어떤 진지한 연구를 배제하지 않는다. 성경의 명확성을 믿는다고 말할 때, 다른 건 몰라도 성경 속에 담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내용만”은 교육을 받았든 교육을 받지 않았든 대상에 관계없이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모든 사람에게 명확하게 전달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동시에 성경의 명확성에 관한 교리는 모든 성경 구절이 똑같이 명확하다거나 또는 문화적, 지리적, 언어적 차이에 대한 주의 깊은 연구가 불필요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관점 이론, 즉 성경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다른 문화나 배경을 가진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에 저항하는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스코틀랜드의 상식적 현실주의(Scottish Common Sense Realism)로 회귀할 수도 있다. 오스본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상식적 현실주의는 이렇게 주장한다. “텍스트는 그 자체로 의미를 드러내는 데에 충분하다. 따라서 문화적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해석학적 원리의 필요성은 무시되어도 되고 개인주의적 해석으로 충분하다.” 우리는 누가 봐도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가진 현대 계몽주의 시대의 해석 이론을 옹호함으로써 포스트모던 해석 이론을 반대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한다. 어떤 기독교인은 거리가 주는 차이 자체를 무시한다. 그러나 또 어떤 기독교인은 지금 시대에 하는 그 어떤 해석도 정확할 수 없다는 식으로 그 차이를 과장하기도 한다.(다음 글에서 이 차이를 과장할 때 생기는 문제에 관해서 다룰 것이다)2. 우리는 누구나 다 성경 구절에 “선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스본은 “문화유산과 세계관이 해석에 미치는 영향을 적절하게 고려할 것을” 촉구한다. 또한 그는 “지식에 관한 사회학은 현실을 자각하는 모든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가치를 놓치지 않는다. 이것은 해석 과정에서 선이해의 위치를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라고 지적한다. 성경을 읽을 때 백지 상태로 시작하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다 특정한 질문과 어떤 가정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아지스 페르난도(Ajith Fernando)는 죄책감/용서 패러다임과 명예/수치 관점 사이의 몇 가지 차이점을 설명한다. 또 다른 예는 에스더 아콜아떼(Esther Acolatse)이다. 자신의 저서 ‘권력, 공국, 그리고 성령(Powers, Principalities, and the Spirit)’에서 그녀는 북미에 살든 아니면 지구 남부에 살든 간에, 힘과 권력에 관한 성경적 언어와 관련해서만은 우리가 어떤 특정한 틀이나 또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 속으로 통합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계몽주의 이데올로기는 북미에 영향을 미치는 반면, 이원론은 지구 남쪽 지역에 더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세계관을 조사하기 위해 아콜아떼는 서구의 성경 독자들 뿐 아니라 지구 남쪽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도전거리를 던진다. 비슷한 맥락이기는 한데, 랜돌프 리차드(E. Randolph Richards)와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의 저서 ‘개인적 눈으로 성경을 잘못 읽기’(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는 개인주의적 직관에 의해 형성된 개념적 범주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고대 문화에서 발생하는 성경 이야기의 중요한 측면을 놓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탕자의 비유를 예로 들면, 미국인보다 러시아인이 비유 속 기근을 기억할 가능성이 훨씬 더 높을 뿐만 아니라 독립하겠다는 어린 아들의 요구(이로 인해 가족 관계가 무너짐)도 미국인에 비해 훨씬 더 심각한 잘못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반해 미국인들은 이 비유 속 그 어떤 측면보다 아들이 느낀 절망감의 주된 원인으로 자원 낭비와 자급자족의 실패를 강조할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것이다. 이처럼 전혀 다른 문화는 우리가 본문을 읽을 때 가지는 “선이해”로 인해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조명되도록 한다. 성경에 문화가 없다는 게 아니다. 성경 독자도 그건 마찬가지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탁월한 신학 방법을 서술한 그의 책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기(To Know and Love God)’에서 복음주의자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문화를 반영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내가 추구하는 신학에는 문화적 요소가 주는 선입견이 없는 것처럼 간주한다. 물론 최대한 그런 신학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그건 그 누구에게도 가능하지 않다.”그럼 모든 성경 해석이 결국은 다 문화라는 감옥 또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뜻인가? “선이해”를 인정한다는 게 텍스트가 가진 진실하고 진정한 이해에 도달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의미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 세 번째 요점을 살펴보자. 3. 우리는 지식에 대한 모든 주장이 다 권력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 반박해야 한다2007년 케냐의 리무루(Limuru)에서 세계 복음주의 로잔 회의와 관련된 실무 그룹은 “완전한 지식(exhaustive knowledge)과 인간 진보에 대한 현대인이 가진 신화(myths)”를 폭로하는 한도 내에서 어떻게 포스트모더니즘도 복음주의자들에게 동맹이 될 수 있는지를 지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계몽주의의 오만에 구멍을 뚫었고, 이건 복음주의자들이 기뻐할 일이다. 그러나 로잔 문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서술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지식을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이며 지식을 소유했다는 주장을 권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시도로 간주한다.” 이런 이유로 복음주의자들은 관점 이론에 반대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확실성을 주장하는 계몽주의 요새로 후퇴하기를 원해서가 아니라,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부분적으로 알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성경이 확증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클락(David Clark)은 이렇게 말했다. “최상의 상태에 있는 복음주의 신학이라면 관점(perspective)이 모든 사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단호한 모더니스트 주장을 적절하게 해체하는 것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복음주의 신학은 문화적, 역사적 장소로 인해 신학이 특정 시대의 생각에 갇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계획적인 전략이 필요함을 잘 알고 있다.”리차드 린츠(Richard Lints)는 그의 저서 ‘성경의 지속적 권위'(The Enduring Authority of the Christian Scriptures)에서 선이해가 실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모든 통역은 통역사의 독특한 경험에 영향을 받는다. 이 독특한 경험의 일부는 통역사의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맥락이다. 어떤 사람이 무엇을 보는가는 그 사람이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이처럼 무엇을 보고 싶어하는가 등등의 기대는 개인 및 사회적 지향의 복잡한 상호 작용으로 인해 만들어진다.”그러나 린츠는 이런 선이해가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도록 하는 게 불가능하도록 만드는 건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또한 선이해를 인정하는 게 반드시 모든 해석을 다 상대적으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문화적 서사의 한 부분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해석이 똑같이 타당할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들거나 또는 누군가의 해석이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나오는 비판에서 자유롭다고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얇팍한 지식이 담긴 서사를 조금 보탠 이 더 큰 이야기는 오히려 반대 방향을 가리킨다. 모든 해석이 다 동등하지 않다는 것이다. 문화적으로 선한 영향을 받은 해석이 있고 나쁜 영향을 받은 해석도 있기 마련이다.”후자의 요점에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한다. 해석의 다양성이 결코 해석학적 상대주의를 의미하지 않는다. 다음 칼럼에서는 우리가 관점 이론으로 미끄러지거나 계몽주의의 확실성으로 후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런 진실에 눈을 뜨고 있는 게 왜 중요한지를 살펴볼 예정이다.원제: Preunderstanding and Postmodernism: 3 Principles for Bible Interpret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포스트모더니즘
성경해석의원칙
로잔회의
문화차이
성경의명확성
로잔문서
해석학적나선형
선이해
성경을 이해하려면 다양한 목소리가 필요할까?
by Trevin Wax
2020-11-29
성경 해석에 인종적 다양성이 중요할까? 주석책을 하나 산다고 할 때, 그 주석을 집필한 저자의 배경과 경험을 고려해야 할까?문화적 맥락과 사회적 위치가 성경 해석에 과연 어떤 영향을 미칠까?복음주의자 지도자들은 최근 들어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다. 혹자는 문화적 눈가림(cultural blinders)이 성경 해석을 왜곡하거나 우리에게 도전을 줄 수 있는 영감 받은 말씀의 여러 다양한 요소마저 제거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한다. 또 동시에 번역자의 인종이나 개인적 경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하나님 말씀의 권위와 충분성을 최소화하는 상대주의를 낳을 지도 모른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문제는 다방향(multi) 리더십을 요구하는 영역이다. 즉, 다양한 각도에서 위협을 인식하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 영역이라는 의미이다. 이 글과 이후 나올 세 개의 글을 통해서 나는 성경을 공부할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원칙을 설명하려고 한다. 지역 교회에 의지하기첫 번째로 세계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다양한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열망은 지역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옳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원칙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원칙이다. 말씀을 올바르게 이해할 것, 그리고 오류가 없으며 영감으로 기록된 명확한 말씀이라는 귀중한 교리는 결코 성경 해석학이 다른 사람들의 지혜와는 별개로 나 혼자 수행하는 “단독” 작업(discipline)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역 교회에 함께 모여서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성장시켜야 한다. 제대로 된 성경 공부를 하면서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은 본문이 당신에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가 아니라(마치 특정 본문의 중요성이나 적용이 그 구절을 읽는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끝없이 변할 수 있는 것처럼), 본문 자체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이다. 성경을 읽고 토론하기 위해 모인 우리는 다 배경이 다르고 그렇기에 던지는 질문도 다를 수 있으며, 사람마다 특정한 신학적 틀 속에서 본문을 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의 소망은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과 사랑을 키우고 하나님이 말씀을 통해서 드러내는 진리에 겸손하게 복종하는 것이다. 본문에 비추어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가정(assumptions)을 검토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말씀만이 우리의 궁극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복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공동체 안에서 말씀에 관한 우리의 이해도를 더 증진시킬 수 있게 된다. 세계 곳곳의 교회에 의지하기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 지역 교회가 필요하다면, 다른 교회와 문화권의 신자들의 의견을 들음으로 우리는 성경 읽기 능력을 향상시키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먼저 공동체 안에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이라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리고 그 적용 범위를 넓히는 것이다. 같은 교회를 다니는 기독교인들끼리 서로 배우는 것처럼 다른 문화의 기독교인들과도 똑같이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필요하다. 마크 앨랜 파웰(Mark Allan Powell)의 설명은 이 원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례 중 하나이다. 그는 탕자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가 미국과 러시아에서 어떻게 각각 전혀 다르게 “들리는지에” 대해서 썼다. 지금 내 기억이 맞다면, 미국인들에 비해서 러시아인은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탕자 아들의 절망을 촉발시킨 기근에 훨씬 더 큰 관심을 보인다고 한다. 레닌그라드의 포위 공격 당시 기아로 사망한 러시아인은 2차 세계대전 때 사망한 미국과 영국 군인을 합친 숫자보다 많았다고 파웰은 설명한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비극은 아직까지 살아있는 수많은 조부모와 증조부모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을 것이라고 파웰은 추정한다. 바로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탕자의 비유를 듣는 러시아 학생에게 가장 먼저 꽂히는 단어는 기근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랜돌프 리차드(E. Randolph Richards)와 리차드 제임스(Richard James)가 쓴 ‘개인적 눈으로 성경을 잘못 읽기(Misreading Scripture with Individualist Eyes)’는 고대의 친족 관계, 후견인, 명예와 수치심에 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에서 종종 드러나는 특정 공동체 기반 요소는 개인주의 문화에서 자란 우리에게 이상하고 또 이해하기 어렵게 보일 수도 있다. 수년 동안 중동에서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케네스 베일리(Kenneth Bailey)가 훌륭하게 풀어놓은 비유에 대한 훌륭한 업적은 해석적 통찰력을 제공한다. 물론 후기 전통이나 현대 중동의 경험에 지나치게 의존해서 해석한 경우도 종종 있지만 말이다.복음주의자들은 이러한 노력을 기뻐하고 다양한 배경을 가진 신학자와 학자들의 부상을 응원해 왔으며, 그들이 발표하는 타 문화권 신학적 대화와 주석은 성경을 더 잘 듣고 순종하려는 우리의 열망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생각한다. 물론 가장 중요한 목표는 더 나은 성경 해석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성경 연구 작업에 최대한 많은 글로벌 목소리를 통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 주류 세계(majority world) 또는 주류 문화 속 복음주의자들은 그들의 독서 목록을 “다양화” 할 수 있게 되고, 결과적으로 다양한 사회적 위치와 경험을 가진 성경 독자들로 인해 우리가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의례히 가지게 되는 가정과 선입견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관점 이론은 그럼 어떤가?그러나 성경 해석의 지평을 넓히려는 최근의 이러한 경향은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는 게 애초에 가능한지에 관해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학계 및 더 넓은 문화의 경향과도 일치한다. 지식과 의미 그리고 의도성(significance)에 대한 포스트모던적 견해는 “관점 이론”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 이론에 관해서 제임스 린지(James Lindsay)와 헬렌 플럭크로스(Helen Pluckrose)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관점 이론은 두 가지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첫 번째는 인종, 성, 성 인식, 능력, 지위 등으로 드러나는 정체성에 따른 사회적 지위가 같은 사람들은, 그들이 경험을 올바르게 이해한다고 가정할 때, 동일하게 지배와 억압 경험을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동일하게 그 경험을 해석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정은 다음 가정이 이어지는데, 이러한 경험이 그들에게 더 권위 있고 완전한 그림을 제공 한다는 것이다. 관점 이론이 바탕을 두고 있는 두 번째 가정은 사회적 권력의 역동성 내에서 가지고 있는 각각 다른 상대적 위치가 해당 사람으로 하여금 아는 것과 알 수 없는 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특권층은 특권에 눈이 멀어 있는 반면에 억압받는 사람들은 지배적 위치와 억압 받는 경험을 모두 이해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이중적 시야를 소유한다.”간단히 말해서 더 많은 특권을 가진 사람일수록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란 더 어렵다는 것이다. 특권이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성경 해석에 이 이론을 적용시키는 경우, 기독교 역사 속 너무도 많은 주석가와 신학자, 그러니까 너무도 많은 특권을 가졌던 수많은 백인 남성들이 연루되게 된다. 그 결과 가장 주의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한 주석 내용에조차도 우리는 의심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그리고 반대로 억압과 가난이라는 “살아있는 경험”을 한 주석가의 주석을 더 큰 점수를 주는 결과를 빚게 된다. 전통적인 복음 해석학과 달리 관점 이론이 성경 해석에 적용될 때, 그 결과는 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는데 필요한 도움이 아니라 오히려 해당 본문에 정말로 제대로 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하는 불안감만을 더 증폭시킨다. 그 누구도 성경 해석에서 완벽하게 “객관적”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왜냐하면 객관성이라는 것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참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렇게 될 때 우리에게 남은 것은 나의 진실 또는 당신의 진실이며, 우리의 진실은 문화적 관점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해석자의 진실로 남을 뿐이다. 관점 이론의 부상에 대응하는 방법에는 옳은 방법도 있지만 그른 방법도 있다. 앞으로 소개할 세 개의 글에서 우리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함정을 피하는데 도움이 되는 동시에 우리를 최고의 전통적인 복음 해석학과 일치시켜주는 원칙을 찾아볼 것이다. 원제: Do We Need Diverse Voices to Understand the Bible Right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관점이론
포스트모던
성경해석
전통해석학
돌아온탕자비유
성경해석의다양성
문화적눈가림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별력’
by 이승구
2020-11-24
온 세상을 돌아보거나 심지어 교회와 교계를 돌아보아도 도처에 참으로 이상한 일들이 많이 발생하고 있는데,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그 문제를 정확히 살펴 내는 “분별력”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이상한 문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것을 잘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도 상당한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분별력”에 대해 살펴보며 온 세상이 문제이지만 먼저 교계를 들여다보고자 한다.복잡한 교계에 필요한 영적 분별력제일 안타까운 일은 교회가 비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면, 타락 이후 이 세상은 항상 문제투성이이지만 그것이 죄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을 알고, 특별 은총을 깨달은 그리스도인들은 성령님께 의존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생각하며 살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께서 정상적이라고 하는 방식대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도 여러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우리들도 사실 성경의 가르침을 잘 받지 않고, 성령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셈이다. 물론 우리는 교회가 이 땅 가운데서 완벽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교회 안에는 늘 알곡과 가라지가 같이 있으며, 또 참 성도라고 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을 따라서 어거스틴 이래로 바른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는 “복합적 공동체”(mixed community)라고 하여 왔고, 성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성화되어[단정적 성화, definitive sanctification] 있으나, 아직 아닌 상황에 있어서 우리는 동시에 점진적 성화(progressive sanctification)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이런 성경적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라면 적어도 교회는 항상 회개하면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을 고쳐서 항상 개혁해 가야 한다. 그런데 교회와 교계가 이런 모습을 잘 보이지 못하고, 오히려 더 깊은 문제 속으로 들어가는 오늘날의 여러 모습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더구나 개개인으로서는 개선의 가능성을 드러내지만 집단화되면 도무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은 죄악이 개인적 수준을 넘어 가면 더 심각해져 간다는 것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개개인도 심각한 문제이고, 그 개인들이 합하여 있는 집단들은 더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도 ‘도적적 인간과 비도덕적인 사회’(대한기독교서회, 2005)에서 사람은 개인으로보다는 한 집단의 일원일 때 죄를 범하기 더 쉽다고 지적했는데, 이 지적을 엄격히 말하면, 타락한 인간은 개인적으로도 비도덕적이고 심각한 죄와 부패성 가운데 있어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전혀 도덕적이지 않음을 먼저 분명히 하며 읽을 필요가 있다.아주 대표적인 예로 (엄격히 말하면 그런 일이 발생해서는 안 되지만,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자주 발생하는 일의 하나로) 개개인이 여러 복잡한 상황으로 인해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찾게 되는 정황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런 경우 참으로 좋은 교회 공동체를 만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단을 피해 나왔더니 또 다른 이단 집단에 속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건전한 교회를 만났다 해도 또 번복해서 이상한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더구나 어떤 종교적 집단이 어떤 결정을 할 때, 얼마나 이상한 결정을 하는 것이 많은지, 특히 그 종교적 조직이 비대한 경우에는 그 비대한 조직 내에서 개개인들은 아무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음을 우리들은 곳곳에서 발견한다.그러므로 일차적으로 교회 안에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에도 어떤 특정한 문제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분별력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대표적인 예로 요한의 다음 같은 권면을 들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요일 4:1). 이처럼 우리들도 성령님의 특별은총 안에서 참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어떤 정황에서든지 “정신없게” 되면 대개 일정한 방향으로 치닫게 되니, 그것이 분별력을 갖지 못하게 되는 대표적인 예가 된다. 아무 생각이 없든지, 너무 바빠서 어떤 것을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행할 때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옳지 않은 것을 행할 때 우리들은 “정신없다”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바울은 그의 사도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고후 11:23)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들은 이런 모든 “정신없음”이 우리에게서 발생하지 않도록 항상 정신을 차려서 모든 일에 직면해야 한다. 성경에서는 이를 “경성하여”(히 13:17) 또는 “깨어 있어”(마 24:42; 25:13; 막 13:33; 눅 21:36; 고전 15:34; 16:13; 엡 6:18; 골 4:2; 살전 5:6; 벧전 5:8)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매순간 참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경성하여 사는 것일까? 첫째로, 모든 것을 제대로 분별하는 판단의 기준이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어야 한다. 다른 것이 판단의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을 잘못된 길로 나가는 것이다. 특히 애매한 경우가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행하던 전통이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을 실제로 중요시 하지 않거나 성경을 읽고 생각해도 바르게 해석하지 않는 것은 결국 바르게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주장하고 나가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교회는 그동안 이런 잘못된 모습들을 많이 보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소에 계속해서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하나님의 경륜 전체(the whole counsel of God, 행 20:27)를 알아 가는 일에 힘써야 한다. 바르게 해석된 성경 말씀만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둘째로, 그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자신의 구체적 정황에 적용하는 일에서 가장 주요한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모든 정황에서 성령님을 의존해 성경의 바른 뜻을 깨닫고 적용해 가야 한다. 누가 가장 바른 방향을 향해 나가는 지는 바로 이런 시금석(criteria)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1) 과연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여 바르게 이해된 하나님의 경륜 전체에 따라 가는가? (2) 그렇게 하고 실천해 갈 때에 과연 성령님을 따라 가는가? (성령님을 따르는 인격적 모습이 과연 나타나는가? 그 삶의 열매가 성경과 성령님을 따름을 잘 드러내어 이 땅에서 성경이 말하는 교회를 잘 드러내는데 기여 하는가?)세상 문제에 대해서도 영적 분별력이 작용되어야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교회와 관련된 문제에 대해서 뿐만 이 아니라 이 세상의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도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영적 “분별력”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들은 이 세상 속에 살도록 부름을 받았고, 이 세상은 항상 아주 복잡한 상황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헤맬 때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주 명확한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런 방향을 향해 나가도록 부름 받고 있다.물론 이 세상은 우리가 성경에 비추어 성령님께 의존해서 나아가려는 방향을 따르지 않고, 항상 그와 반대 방향으로 나가 가려고 한다. 그러므로 복잡한 이 세상은 우리에게는 더 복잡한 문제를 드러내는 곳이다. 그래도 우리는 성경의 빛에서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인지,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시는 길로 나아가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때때로 그것을 놓치게 되는 것은 우리들이 세상이 나아가는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우리도 자기 욕심에 따라 나아갈 때 이 세상과 같이 암중모색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상황에서 참으로 정신을 차려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면서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제대로 적용해 주시기를 간구하면, 우리는 모든 정황에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제일 가까운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성경에 하나님의 뜻이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은 문제들도 있기에 성경의 원칙을 따라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는 오랜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원하는 바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종속시키는 과정을 통해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결국 하나님의 뜻에 좀 더 가까운 길을 알고, 그것을 추구하며 행해 나갈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복잡한 정황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은 정신을 차려서 성령님께서 밝혀 주시는 대로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가려고 해야 할 것이다.이 세상 사람들도 “일반 은총적 분별력”을 가지도록 기도하고 유도해야그러나 지금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만 이런 분별력을 가지면 되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 사람들도 결국에는 복음의 빛 안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빛으로 제대로 파악하고 그 길로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이렇게 복음의 빛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에, 또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아직 복음에로 돌아오지 않았기에 그 일을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 이전 상황에서의 일도 준비해야 한다.첫째로, 이 세상이 각기 자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옳다고 해서는 안 되지만, 타락한 인간들은 항상 그리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하면서 안타깝고 불쌍한 마음과 눈으로 이 세상이 각기 소견에 옳다고 하는 대로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하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세상이 이렇게 자기 길로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죄이고,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정죄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 뿐이다(성경의 기준이 없으면 우리는 전혀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세상의 문제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우리의 문제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세상이 자기들이 옳다고 하는 길로 나가는 것은 타락한 상황에서 그저 지난한 몸짓을 하는 것임을 알기에 참으로 불쌍히 여기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에게로 제대로 돌이키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을 불쌍히 여기면서 이 세상의 죄에 대해서 같이 안타까워하면서,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야 한다.둘째로, 그렇지만 아직 복음에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안에도 일반 은총 가운데서 상대적인 분별력이 작용되어 이 세상이 그래도 “상대적으로 살만한 세상”이 되도록 하는 일을 위해서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의 은총에 저항하지만, 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일반은총이 작용하여 세상에 “상대적인 선”(relative goodness)이 있고, “시민적인 선”(civil goodness)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세상도 상대적으로는 정직하고, 공정하고 바른 것을 추구할 수 있어야 하고, 상대적인 선을 향할 수 있어야 한다. 말뿐 아니라 참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이 세상의 다른 사람들이 제대로 판별해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그러려면 이 세상 안에도 일반 은총에 의해, 상대적으로 더 선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일반은총적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이는 성경의 빛 안에서, 성령님께 순종해야 하는 특별은총적인 영적 분별력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타락한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 옳은 것을 파악하게 할 수는 있는 것이다. 이런 일반은총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우리는 그래도 “생명을 위한 운동”(pro-life movement)을 할 수 있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운동, 건전한 사회를 위한 운동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 이런 상대적 분별력이 있기를 위해서도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나가면서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다. 그 복잡성 때문에 모든 것이 애매하고 모호하다. 그것이 이 세상이 타락한 세상임을 잘 드러내 준다. 아마도 모든 시대를 막론하고 각 시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가장 복잡했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것 같다. 노아 시대 사람들이 당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구약 계시가 그쳐지고 신약 계시가 주어지기 전에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시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1000년 기가 마쳐지고 다음 천년이 시작될 때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각 시대의 사람들은 다 자신들이 사는 시대를 문제투성이의 복잡한 세상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시기가 가장 복잡하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처럼 말이다.이런 복잡한 시기에 참으로 영적 분별력이 필요하다. 모든 정황 속에서 잘 분별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주신 계시의 뜻을 잘 파악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우리의 삶에 그 가르침을 잘 적용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문화
세계관
분별력
공동체
단정적성화
점진적성화
라인홀드니버
오직성경
일반은총
처음
이전
6
페이지
7
페이지
열린
8
페이지
9
페이지
1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