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예술과 문화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70년 세월 그리스도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다
by Russell Moore
2020-11-06
얼마 전 C. S. 루이스(C. S. Lewis)의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이 출판된 지 70주년이 되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앞으로 다가올 세대에 대해서 ‘나니아 연대기’(The Chronicles of Narnia)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묻기에 아주 적절한 때를 만난 셈이다. 우리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 루이스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니아는 아직까지도 우리의 상상 속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단순한 대뇌 네트워크나 변연계로 이뤄진 존재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표지판(signposts)을 찾도록 창조된 존재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논리적 이유나 실용적인 지혜 또는 계몽된 자기 이익이라는 측면에서만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더 깊은 차원을 다루고 있다. 바로 사자의 포효 앞에서 두려움에 떠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력을 통해 그 느낌을 알도록 하는 것이 복음이기도 하다. 기독교 변증론을 다룬 책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 무엇인가에 대한 설문 조사를 하면 나이나 배경에 관계없이 서구 사람들이 거의 항상 일등으로 꼽는 책이 바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이다. 턱을 쓰다듬으며 이런 현실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글쎄, 사실은 말이야”라며 반론을 제기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러나 순전한 기독교로부터 진리를 알게 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책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 아니다. 물론 그 책 속에 담긴 하나님에 대한 변증이야말로 실로 긴 시간동안 아이를 공격하는 독수리와 같은 많은 비판을 견뎌온 게 사실이지만 말이다.많은 사람들에게 순전한 기독교가 아직까지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그 책이 활자에 담긴 저자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대 종교가 가진 냉소주의와는 달리 우리에게 정치적 의제나 종교 제품을 판매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 목소리가 전하는 것은 진리에 대한 증언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되신 분에 대한 증언이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론자를 설득하거나 또는 흔들리는 기독교인을 다시 확신 속에 거하게 하는 루이스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옥스포드에서 받은 고전 연구가로서의 훈련이 아니라, 아이들을 작은 방과 가로등 기둥을 지나 나니아 왕국의 수도인 케어 페러벨(Cair Paravel)과 그 너머로 인도했던 경험이다. 오늘날 생존하는 가장 존경받는 판타지 작가인 닐 게이먼(Neil Gaiman)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는 루이스가 “숨겨놓은 정통 기독교에 관한 의제”에 관해서 배우고 싶었던 흔들림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루이스의 작품을 인정한 많은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작품이 루이스가 창조한 마법의 세계에 많은 빚을 지고 있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나니아 관련한 책들이 주는 이상한 점의 대부분은 마치 그 책 속 이야기가 사실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마치, 실제 사건이 발생한 곳에서 기록된 보고서 같이 느껴진다.”나니아 속에 등장하는 “장소”는 사람들 사이에서, 특히 판타지 장르에 가장 익숙한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루이스의 동료 잉클린(Inklings)조차도 J.R.R. 톨킨(J.R.R. Tolkien)의 작품에 나오는 중간계와 같이 신중하게 구성된 창작물과 비교할 때, 나니아는 루시가 옷장을 통과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스, 로마, 북유럽 신화 및 그 이상과 합쳐진 유대와 기독교 우주론은 아예 산타클로스(Father Christmas)로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니아는 대중문화에서 70년 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평생에 걸쳐 나니아를 사랑하는 사람들과는 인생 전체를 함께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겉보기에 혼란스럽고 황당한 신화가 주는 단점이 오히려 장점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 우주 안에서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우주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또한 우주를 구성하는 대부분은 아마도 “암흑 물질”일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진짜 장소”라는 게 항상 일관되고 예측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 우리는 사실 상상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정말로 이상한 우주 안에서 살고 있으니까. 기쁨에 놀라다나니아의 기이함, 차와 벽난로 등의 친숙함으로 표현되는 기이함은 여전히 이 책을 매력있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이다. 현대주의자(modernist)든 또는 근본주의자든 간에, 많은 기독교 변증가들은 학문적 합리주의나 문명적 헤게모니 또는 좌파, 우파 또는 중도의 정치적 이념 등을 활용해서 무엇보다 기독교를 친숙하고 이해하기 쉽게 만들려는 데에 치중했다. 그러나 나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루이스는 그가 살았던 세대에게 있어서 복음을 받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은 복음이 너무 신비해서가 아니라 복음이 너무도 친숙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다의 사자(The Lion of Judah)는 어느새 잘 길들인 강아지가 되어 있었다. 성경 속의 서사는 이제 너무도 익숙해져서 어느 존경받는 문화의 대본책과 구분이 안 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롭게 들리지 않는 그런 복음을 좋은 소식으로도 듣지 않게 되었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를 상상의 세계로 던져서 주일학교 스테인드글라스 속 이미지를 다 벗겨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누구라도 처음으로 그 이야기가 가진 진정한 힘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는 용을 피해서 진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은 사람도 갈기가 다 깎인 채 스톤 테이블에서 죽은 아슬란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그렇기 때문에 사악한 에드먼드를 미워하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사실상 그와 내가 별반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달달한 터키 과자 로쿰(Turkish Delight)에 중독된 우리를 회복시키는 것과 같은, 에드먼드에 대한 아슬란의 말을 읽을 때 그 속에 담긴 은혜 때문에 우리는 또 한번 놀라게 된다. “여기에 당신의 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희망이 다시 부풀어 오르는 걸까? 심지어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가지는 이유는 사람들이 바로 이 말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슬란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녀의 마법이 약해지고 있습니다.”루이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 진리를 잘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양심을 보호하고 또한 직관을 형성한다. 뉴스를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내가 원하는 이미지에 맞지 않는 소식은 필터링해서 제거함으로 나 자신의 이성을 “조작(spin)”한다. 그러나 스스로를 보호하던 안전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기쁨에 놀라게 된다. 나단 선지자가 어린 암컷 양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원한 것은 다윗과 이성적인 논쟁을 하는 게 아니라 다윗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여 감정적으로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이었고, 그랬기에 다윗은 그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그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예수님은 이야기와 이미지, 그리고 각종 비유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용서는 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진리를 정형화하거나 또는 도덕적 적용으로 요약하는 대신 “한 남자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라고 시작하는 이야기가 펼치는 더 깊은 수준의 깨달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바울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단순히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여전하다”라는 말을 하는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접붙여진 가지도 살아있는데, 하물며 뿌리가 죽겠느냐?”나니아 기독교인스톤 테이블은 십자가, 하얀 마녀는 악마, 마술사의 조카는 창세기처럼, 나니아 연대기가 단지 해독(decode)할 게 많은 우화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지속되는 게 아니다. 나니아가 아직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우리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데리고 가고, 또한 우리로 하여금 진짜를 느끼는 게 어떤 것인지 처음으로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나니아 이야기가 아직까지 우리 곁에 있는 이유는 겨울 땅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정신의 눈이 녹기 시작하고 성령의 바람이 그가 뜻하는 곳에서 불기를 기다리는 인내심이 담긴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세속화 시대에 나니아처럼 새로운 시작을 출발하기에 좋은 장소도 없다. 하지만 물론 이 70년이나 된 이야기가 우리에게 필요한 전부는 아니다. 루이스는 아이들에게 여분의 방은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포털이 아니라고 말했다. “당신은 그 경로로 다시 나니아에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애초에 거기로 가려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 도달하는 건 당신이 의도적으로 가려고 노력하지 않을 때에나 가능한 것이니까요.” 그래도 나름 장수했다고 성경이 인정하는 나이가 70세이다. 우리는 이야기꾼 루이스로부터 배운 복음,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그 복음을 더 깊이 고찰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더 깊이 또 더 높이” 올라가야 한다. 스크루테이프 세계(Screwtape world)에서 나니아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The Chronicles of Narnia Still Grips Our Imagination, 70 Years Later번역: 무제
문화
문화예술
나니아연대기70주년
기독교변증
순전한기독교
CS루이스
JRR톨킨
근본주의자
스쿠르테이프세계
암흑물질
카이퍼 통신 8: 영역 주권은 신정주의적인가?
by 김은득
2020-10-22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지금으로부터 140년 전 1880년 10월 20일에 화란 자유대학교(Vrije Universiteit)를 설립하면서 ‘영역 주권(Souvereiniteit in Eigen Kring)’이라는 취임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 유명한 연설 문구를 일생에 한번쯤은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풀러 신학교(Fuller Seminary) 전 총장 리차드 마우(Richard Mouw)는 정작 유명해진 이 연설 레토릭(rhetoric)에도 불구하고, 저의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해선 그 누구도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사실 마우의 지적은 미국 개혁주의를 향한 것이었지만,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할만한 그런 비판입니다. 신정주의적(theocratic) 뉘앙스를 지닌 그런 레토릭이나 용어들이 유명해지면서, 제 영역 주권 사상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각각 미국과 한국에서 기독교 정부/국가(Christian State)를 추구하는 운동이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설립식 자체는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에서 상징적으로 이뤄졌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신교회(Nieuwe Kerk)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은 암스테르담의 가장 주요한 광장인 담 광장(Dam Square), 그것도 바로 왕궁(Royal Palace) 옆에 위치한 교회인 것뿐만 아니라 1815년부터 시작된 왕족의 대관식이 예외없이 이곳에서 치뤄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마치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Westminster Abbey)이나 미국의 워싱턴 내셔널 대성당(Washington National Cathedral)과 같이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 기관이라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는 역사적으로 네덜란드가 자랑스런 기독교 민족/국가(Christian Nation)임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있어 국가(Nation)는 법적 구속력을 가진 정부 기관으로서의 국가(State)라기 보다는 민족(People)에 가까운 단어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유럽에서 민족주의가 발흥하면서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민족-국가(Nation-State)로 변모하였습니다. “신교회가 차지하는 국가(민족)적 위상” 혹은 “한 국가(민족)을 대표하는 종교기관”에서 언급되듯이, 국가와 민족은 혼용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국가 교회(National Church)라고 할 때, 정부 기관에 포함된 국가 교회도 존재하지만, 그렇지 않은 국가 교회, 즉 민족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교회도 있음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생각에 암스테르담의 신교회(Nieuwe Kerk)는 어느 국가 교회에 속하는 것일까요? 정답은 둘 다입니다. 원래 신교회(Nieuwe Kerk)는 도르트 총회 이후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적인 국가 교회인 화란 개혁 교회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나 1816년 빌렘 1세의 일반 조례 이후 화란 개혁교회가 정부 기관의 감독 아래 들어가면서 민족을 대표하는 교회에 정부 기관에 속한 국가 교회의 색채가 덧입게 됩니다. 이것은 대표적으로 유아 세례 증서가 신앙 고백을 따른 결과이면서도 더 나아가 유아의 출생을 증명해 주는 공문서라는 것에서 잘 드러납니다.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이면서 정부기관에 속한 교회인 신교회(Nieuwe Kerk)에서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쳤으니, 어쩌면 제가 신정주의자라고 보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1886년 정부기관에 속한 화란 개혁교회와 결별함으로써, 교회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교회(free church)가 되어야 함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1886년 애통(Doleantie) 교단의 출범은 사실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을 점거하고자 제가 당회실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린 사건에서부터 출발합니다. 1886년 1월 5일에 저는 당회원으로서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실에 들어가고자 했는데, 당회실 문이 어떤 열쇠로도 열리지 않도록 목재 패널로 덧붙여져 있었습니다. 몇 시간을 허비하다가, 다음날 아침 변호사들을 대동한 채, 저는 그 패널을 직접 톱질하여 떼어버립니다. 바로 이 사건으로 인해 저는 화란 개혁교회에서 면직을 당하게 되고, 저와 함께 면직된 분들과 더불어 애통 교단이 출범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신교회(Nieuwe Kerk)의 당회를 신교회(Nieuwe Kerk) 자체가 운영하는가 아니면 정부 기관과 결탁된 국가 교회의 운영을 따라야하는가의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저희가 국가 교회와 결별한 가장 큰 이유는 교회는 국가의 하부 기관이 아닌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왕으로 고백하는 신자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영역 주권 원리가 국가와 교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함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신앙의 순결을 위해 기꺼이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대두된 문제는 국가 교회와 결별한 애통 교단이 어떻게 화란 민족을 대표하는 공교회가 될 수 있는지 여부입니다. 화란 민족에게서 개혁파 교인들이 공공성을 획득하려면, 교회(교단) 내부에만 갇혀 지내서는 안되고, 적극적으로 세상에서도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런 이유로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게 하라고 개혁파 교인들을 독려한 것입니다. 저 역시 정치 영역에 직접 참여하여 오랜 상원 의원 활동뿐만 아니라 반혁명당 당수 및 수상에 이르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정치적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것은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먼저 정교분리를 강조했던 프랑스 혁명 이후, 신정주의적 기독교 정부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저 역시 영역 주권을 통해 교회는 정부의 권력과 어떤 결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다음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적인 세속 정부를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정치 영역의 주권은 얼마나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각자의 신앙 양심에 걸맞게 가장 정의롭고 공공선에 최상으로 기여할 만한 정치인을 지지하고 투표할 수 있습니다. 또한 기독 정치인으로서 적극적으로 정치 영역에 들어가 정의와 공공선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권이 삶의 모든 영역 가운데 드러나는 것”이 제 평생의 신학적 비전이었다면, 이 비전을 이루는 것에 있어서 영역주권이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은 정치적으로도 엄청납니다. 당시 네덜란드 정치 영역은 모더니즘이라는 하나의 꽃으로만 도배된 정원과 같았고 다른 꽃 특히 종교적 색채를 띠는 꽃은 그 정원에 심겨질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정치 영역이나 공론장에서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 아래 기독교적 양심이나 목소리가 제거 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침묵을 강요받는 화란 개혁파 대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기독교 사회로부터 세속적으로 변해버린 정치 세계에 어떻게 적응할지, 또 무엇보다 어떻게 하나님의 주권이 그 세계에서 드러나게 할지에 대한 해답이었습니다. 저의 해답은 영역 주권(sovereignty in its own sphere)이었는데, 모든 삶의 영역의 절대적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각각의 인간 삶의 영역(예를 들어,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 영역 주권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정치 영역은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에 적합하다면, 어떤 이데올로기나 사상을 가졌든지 간에 누구나 자유롭게 그 영역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치 영역에서 누구든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는 것에 있어서 자유롭게 경쟁하면서 그 영역 자체의 권위를 획득하고 책임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영역 주권이 함축하는 구조적 다원주의(Structural Pluralism)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제 레토릭이나 용어가 유행하면서 저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 즉 신정주의자로 묘사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언급했듯이, 주권이라는 용어는 어떠한 방해나 반대 없이, 아니 반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뛰어넘어 사실상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의미합니다. 당연히 이런 권한은 성경적으로 오직 하나님에게만 존재합니다. 문제는 이런 영역 주권을 마치 하나님께서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한 것으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정치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정의와 공공선에 더 기여했는지, 학문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진리에 충실했는지, 예술의 영역에서 주권은 누가 더 아름다움에 기여했는지에 있는 것이지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부여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제 레토릭 자체가 전투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해서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공적 영역을 모더니즘의 손아귀에 내버려둔 채, 개인 영성과 교회 활동에만 만족하는 개혁파 교인들을 각성시켜서 하나님의 군사로 세워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확실히 해두어야 할 부분은 제가 그런 전투적 이미지와 레토릭을 사용한 것은 기독교인으로 구성된 청중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모든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이는 내 것이라!’ 라고 외치지 않는 영역은 단 한 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문구는 불신자들도 포함된 공론장에서 외친 것이 아니라 칼빈주의 원칙에 따른 기독교 사립대학을 설립하는 역사적 현장에서 부르짖은 연설입니다.한국의 성도 여러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삼위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를 넘어서 정치적 영역에 들어갈 때, 굳이 이런 신정주의적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울지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주권이 성경적 용어일지라도, 불신자들이나 더욱이 안티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공론장에서 전투적인 레토릭을 사용하여 불필요한 논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각 영역 자체에 창조 때부터 부여하신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신뢰한다면 각 영역에 걸맞는 탁월한 사람이 되십시오. 바로 정의를 실현하고 공공선에 기여하는 탁월한 기독 정치인 혹은 기독 시민이 되십시오. 학문의 영역에서 탁월한 지식인이 되시고, 예술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예술인이 되십시오. 직장의 영역에서 실력 있는 직장인이 되시고, 종교의 영역에서 신실한 기독교인이 되십시오.
문화
세계관
영역주권
화란자유대학
리차드마우
신정주의
신교회
국가교회
다원주의
공공선
니체가 맞았다
by Tim Keller
2020-10-18
톰 홀란드(Tom Holland)는 본격적인 기독교 역사에 대한 책이라기 보다는 근대 서구 문화가 형성되는 데에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조명하는 책을 한 권 썼다. 그는 기독교가 끼친 영향을 “역설”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건 아주 적절하다. 왜냐하면 첫 번째로 기독교 교회는 바람직한 교회상을 보여주는 데에 처참할 정도로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 무엇인가를 놓고 서로 간에 심하게 분열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에 관한 연구로 상을 받기도 한 역사가이자 고대 헬라어 번역가, 또 기록가이기도 한 홀란드는 이런 교회의 슬픈 역사를 낱낱이 보여준다. 비록 기독교 신앙이 가진 몇 가지 측면에 관해서는 깊은 존경을 갖고 있는 저자이지만, 그렇다고 그는 결코 교회를 옹호하는 변증가는 아니다. 결론은 이것이다. 홀란드가 쓴 책 ‘도미니언 : 기독교는 어떻게 서양의 세계관을 지배하게 되었는가?’(Dominion: How the Christian Revolution Remade the World)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의 책은 쉽게 읽을 수 있고 또 무엇보다 정말로 탁월하게 서술된 사례들을 통해서 현대 서구 세속 문화의 중심이 되는 가치와 우선순위가 사실상 기독교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대부분 교육받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버리고 있고, 또 대중 속에서 종교 자체가 심각한 후퇴의 길을 걷고 있는 지금도 사회 전반을 향해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만연한 영향력으로 인해서 교회의 실패를 비난할 때 조차 우리는 기독교의 가르침과 믿음을 먼저 확인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이다. 생명을 주는 유일한 길홀란드는 프리드릭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가 처음 선포한 기본적인 사상에 대해서 길지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나열한다. 니체는 유럽의 지식인이 기독교를 거부하고 스스로를 과학적 자유 사상가로서 만들어나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건 달리 말해, 하나님 없이 삶을 사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는 그런 사람들이 여전히 인권, 모든 사람이 가진 동등한 존엄성,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의 가치, 그리고 인간 모두를 돌보고 옹호할 필요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이 큰 가치이며 서로에 대한 용서를 중요시하고 있다고 니체는 믿었다. 달리 말해 하나님이 없다는 그들이 여전히 절대적인 도덕적 가치를 믿는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한데, 특히 약한 자에 대한 억압이 잘못되었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이러한 모든 사상은 기독교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상은 동양 문화에서 생긴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사상을 처음 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라면서 비웃었다. 홀란드는 여러 사례를 통해서 앵글로 색슨, 프랑크 족(Franks) 그리고 게르만과 같은 고대 이교도가 지배하던 유럽의 수치-명예 문화(the shame-and-honor cultures)의 기준에서 볼 때, 기독교가 주장하는 원수를 사랑하고 또 가난하고 약한 자를 보호하라는 가르침은 결코 당시 사회에 뿌리내릴 수 없는 이질적인 사상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사상은 자신의 형상대로 모든 존재를 창조하신 단 하나의 인격적 신이 존재하고 또한 희생적인 사랑으로 인간에게 오셔서 죽으신 구세주가 지배하는 우주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는 한, 그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사랑은 오로지 기독교적 세계관에서만 자랄 수 있고, 다른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는 의미가 없었다. 만약에 우리라는 존재가 적자 생존의 과정을 통해 우연히 생긴 것이라고 믿는다면, 절대적 도덕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삶의 중심은 사랑이 아니라 권력과 지배일 수밖에 없다. 기독교의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오로지 그 길만이 인간이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니체는 선언했다.니체가 이런 논증을 펼쳤을 때, 그는 미치광이로 매도당했다. 자유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세계는 우리가 교회의 지배에서 멀어지고, 또 교회가 조장하는 미신과 편견을 버리는 길만이 현대 세계가 노예 제도를 종식시키고 인권을 고양하고 경험적인 과학을 발전시키며 성적인 자유를 증진시키는 길이라는 식의 서사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그러나 지난 오십 년간 비록 느리지만 확실하게 학계를 주도하는 학자들은 니체가 맞았다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통찰력의 보석코넬 대학교의 브라이언 티어니(Brian Tierney)는 보편적 인권과 모든 개인의 평등에 대한 사상을 만든 것이 계몽주의 철학이 아니라 창세기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이루어진 창조를 서술한, 기독교 정경을 만든 12세기 학자들이라는 점을 보여주었다. 오클라호마 대학의 카일 하퍼(Kyle Harper)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섹스는 서로 간의 완전한 합의 하에서만 이뤄져야 한다는 생각은 기독교를 통해 세상에 등장한, 실로 놀라운 새로운 개념임을 보여주었다. 역사가들(홀란드를 포함해서)은 로마의 마지막 이교도 황제 줄리안이 급증하고 성장하는 기독교에 맞서 이교도를 되살리려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교도들은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멸시했고, 그와 반대로 기독교인들은 병자, 고아, 가난한 사람들, 버려진 유아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 결과 대중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향했는데, 가난한 자들을 위한 당시의 자선은 실로 기독교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는 고유한 것이었다. 다른 학자(홀란드를 포함해서)들은 현대 과학의 탄생도 세상이 환상(illusion)이라는 동양적 사고와 달리 이 세상을 실재한다고 말하는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지금도 작동하는 우주의 법칙을 만드신 존재에 의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노예 문제에 관해서는 교회의 기록이 섞여있다. 많은 유럽인들이 기독교 신앙의 우월성을 근거로 타 지역을 정복하고 식민지화 했다. 그리고 널리 알려졌듯이 교회 대부분은 아프리카 노예 거래에 연루되어 있다. 그러나 홀란드는 대부분의 역사가들이 인정하는 몇 가지 사실을 지적한다. 그중 하나는 노예 제도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게 현실이라는 점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노예 제도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니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와 같은 기독교인들이 성경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바로 깨닫게 됨으로 시작되었다. 두 번째는 노예 해방과 노예 제도 폐지가 비록 너무도 느리게 진행되었지만, 그런 운동을 주도한 이가 다름 아닌 퀘이커와 같은 기독교 단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홀란드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왜곡해서 학대와 착취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악용하던 그때에 조차도 기독교 속에는 오히려 억압자들에게 역효과를 안겨다 주는 놀라운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반복적으로, 테노치티틀란(Tenochtitlan) 운하를 통과하든, 매사추세츠 하구에 정착하든, 트란스발(Transvaal)로 깊숙이 트레킹을 떠나든, 자신들이 쫓아내고 있는 사람들보다 자기네가 다 우월하다고 믿던 유럽인들의 확신은 기독교에서 비롯되었다. 그럼에도, 반복해서 [중략] 식민지 주민과 노예들에게 가장 확실한 목소리를 제공한 것은 [중략] 기독교였다. 그런 역설은 실로 심오했다.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제국을 건설하는 그 어떤 정복자 중에서 지금껏 그 누구도 식민지 관리자의 명령에 따라 고문을 당하다가 죽음에까지 이르는 모습으로 그런 정복을 이룬 이는 없었다. 지금까지의 정복자 중에 그 누구도 [중략] 권력의 개념 자체가 문제가 될 정도로 양면적이기 그지없는 권력의 상징을 [중략] 만들어낸 이는 없었다”(504).홀란드의 책은 여기서 나열하기에는 너무나도 많고 훌륭한 이야기와 통찰력의 보석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더 큰 정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믿음이 주는 희망이야말로 실로 독특한 기독교 사상이라는 점을 배우게 된다. 사실,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정교 분리라는 개념 자체가 세속 세계에 의해 교회에 강요된 것이 아니라, 원래 어거스틴(Augustine)에 의해 발전되었으며 또한 기독교가 근본적으로는 문화적 유연성을 지지한다는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을을 알게 된다. 기독교는 결코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그러니까 어떻게 옷을 입고, 먹고, 살고, 일해야 하는지를 세세하게 지시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홀란드는 심지어 미투(#MeToo) 운동 조차도 애초에 남성에 대한 성적 이중 기준을 요구하지 않았던 최초의 기독교적 성 혁명이 이 시대에 맞게 드러난 것이라고 주장한다.궁극적인 질문책의 마지막에 가서야 아주 짧지만 홀란드는 책 내용 전체를 아우르는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정말로 이런 인본주의적 가치(humanistic values)가 정말로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기독교의 믿음을 저버리는 사회에서는 이런 가치 조차도 점점 더 그 의미를 잃어가는 건 아닌가? 홀란드는 이렇게 썼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이성이나 과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교 진화의 독특한 과정에서 나온 게 사실이라면-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신이 죽었다면서, 신을 떠나는 현실 또한 그런 진화 과정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그런 인본적인 가치가 단지 죽은 신의 시체가 드리우는 그림자에 불과하지 않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단지 신화에 불과한 게 아니라면, 도대체 인간이 갖고 있는 이 도덕성의 기초는 무엇이란 말인가”(540)? 홀란드는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개개인의 세속인이 매우 도덕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전적으로 헌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크게 볼 때, 그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한 사회의 전반을 떠받치는 가치 체계가 사실상 기반으로 삼고 있는 믿음 자체를 내던지는 사회가 어떻게 그 가치가 여전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무신론자에게 다가가기’(Atheist Overreach)를 쓴 크리스천 스미스(Christian Smith)와 ‘자아의 근원’(Sources of the Self) 그리고 ‘세속적 시대’(A Secular Age)를 쓴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같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가치가 지속될 수 있을지 여부에 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다. ‘마음의 습관’(Habits of the Heart)을 쓴 로버트 벨라(Robert Bellah)도 동일한 주장을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점점 더 버리면서도 인본주의적 가치를 지킬 수 있을까? 무신론자 조지 씨알라바(George Sciallabba)는 테일러의 책을 리뷰하면서 이 질문이 최소한 우리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미덕을 굳게 붙잡는 데에는 때때로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희생은 초월적인 정당화 또는 어떤 동기를 필요로 하는 것 같다. 그리고 거기에 바탕이 되는 가장 일반적이고 또 가장 논리적인 동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다. 그게 아니면, 테일러는 이렇게 신중하게 논증을 펼친다. 현대의 자유는 초월성에 대한 거부를 수반하기 때문에 현대인이 가진 미덕은 전적으로 우발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도 인간이 오랫동안 선할 수 있을까? 그 점에 대한 테일러의 의심은 엄청나다. 그리고 또한 거기에는 빠르게 생겨나는 나의 불편함도 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은 비록 재치있고 잠정적으로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력하고 개연성 있게 표현된 테일러의 의심이 사실이라면,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상이 애초의 토대에서부터 잘못되었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나는 고백한다. 아마도 이런 의심을 가지고 평생 살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새로운 이해(Chastened Understanding)톰 홀란드는 모든 장에서 기독교와 세속주의에 대해서 사람들이 갖고 있는 오해를 깨어부수고 있다. 그는 수 없이 많은 실패를 반복하는 교회를 위한 그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는 또한 세속 사람들이 자신의 가치가 이성과 과학적 조사의 결과이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self-evident)인 양 착각하도록 놔두지도 않는다. 이런 극단적인 주장을 펼치는 양측이 다 홀란드로부터 배울 수만 있다면, 이들 간의 대화는 앞으로 훨씬 더 유익해질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반영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ietzsche Was Right번역: 무제
니체
톰홀란드
근대인권
문화
세계관
유신론
인본주의
도덕
그레고리우스
도미니언
성 혁명 가운데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by Sam Allberry
2020-10-09
10월 8일자 아티클을 통해 살펴본 문화적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 이제 우리는 다음 일곱 가지 제안을 받아들여야 한다.1. 잘 들어야 한다목양 사역에서 가장 저평가 받는 구절 중 하나가 이것이다.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잠 18:13). 몇 장 지나면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구절이 또 나온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모략은 깊은 물 같으니라 그럴지라도 명철한 사람은 그것을 길어 내느니라”(잠 20:5). 누군가가 어디에서 왔는지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에 잘 들어야한다. 우리의 마음은 “깊은 물”이다. 누군가가 내게 준 첫 인상과 처음 말은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그들을 움직이고 있는 것의 극히 작은 부분을 드러낼 뿐이다. 잘 들을 때 우리는 비로소 수면 아래 상대의 마음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볼 수 있게 된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면(상대가 좋아한다고 추측하지 말고 반드시 물어보라), 우리는 그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떤 과정을 겪어서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바로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들이 그 과정에서 경험한 기복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무엇을 그들과 나눌지, 또 언제가 가장 좋은 시작점이 되는지를 아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특히 인생 과정에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라면,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예수님에 관해서, 상처받은 사람일수록 그런 예수님에게 의지하는 게 얼마나 좋은지를 이야기하는 게 좋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면, 성 문제에 관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모두를 얼마나 겸손하게 만들고 또 동시에 도전을 주는지에 관해서 말하는 게 좋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과 더불어 삶에 있어서 불안함 그리고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이야기를 하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함으로 예수님이 우리의 숨겨진 정체성을 어떻게 드러내시고 우리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 항상 만족감을 주는 그 생수를 어떻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게 좋은 방법이 된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을 때 생기는 위험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않고 반사적으로 계속 떠든다는 데에 있다. 상대가 민감해하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고 혼자 떠드는 건 우리의 무감각함을 드러낼 뿐이다. 2. 모든 사람에게 다 말할 수 없는 건 특정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라얼마 전 캐나다의 한 일반 대학에서 연설을 했는데 그 후 한 학생이 다가왔다. “저는 게이이고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는 다른 대학에서 소수자 옹호 그룹을 운영했습니다. 당신의 책을 읽고는 한 목사님과 함께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생긴 나는 도대체 무엇이 그로 하여금 기독교에 흥미를 느끼게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잠시 생각하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이 다른 모든 사람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이 나를 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끌었던 소수자 옹호 그룹이 기반으로 삼고 있는 구호는 바로 이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다르다. 조만간 퍼레이드가 있는데, 당신들은 우리를 도와야 한다. 페레이드를 여는 달(month)이 되면 우리는 어떤 회사가 우리를 가장 많이 후원했는지도 알아볼 것이다.”하지만 예수님의 메시지를 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다른 사람과 다르고 싶지 않았다. 가장 본질적인 수준에서 볼 때, 예수님의 메시지는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도 동일했다. 그 순간 나는 평등에 자부심을 느끼는 현대 문화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결코 얻지 못하는 진짜 평등이 복음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이 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기독교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 한 그룹에 대해 하나의 규칙 세트가 있고, 또 다른 그룹에 대해서는 또 다른 세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게이 커뮤니티를 미워하고 비난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소수자를 자기들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한다고 가정한다. 이런 오해를 바로 잡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복음이 우리 모두를 어떻게 평등하게 만드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평등하게 대우하신다. 우리 모두는 다 타락했고 특히 성적인 면에서 엄청나게 망가졌다. 우리 모두는 다 무질서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누구도 이 성적인 영역에서 완전하지 않다. 예수님을 바로 따르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특정한 성적 욕망을 거절하고 부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성 정체성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결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 우리 중 누구도 내가 누구인지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그렇기에 잘못된 곳에서 존재의 가장 깊은 의미와 자아 감각을 찾는 어리석은 실수를 범한다. 성별 위화감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육체적으로 부서진 형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중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얕보는 입장에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또 다른 형태로 타락한 성소수자가 우리 눈에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우리 중 누구도 괴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심하게 왜곡되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놀라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다 같은 경험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타락을 겪은 몸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나는 성별 위화감과 같은 고통을 경험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런 위화감이 주는 고통을 겪는 사람이 내가 자신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기 원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이 무엇인지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무엇인지 나는 그들로부터 배워야 한다. 모든 성적인 죄가 똑같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성적 죄는 다른 죄보다 더 끔찍하다. 그 중 어떤 죄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거룩한 연합을 드러내는 창세기의 청사진에서 크게 벗어난 사실을 대표하기도 한다. 수간은 간음보다 더 심각하게 벗어난 죄이고, 동성애는 이성애보다 더 심각한 죄이다. 그러나 타락한 세상에서 우리 중 누구도 우월감을 느낄 근거가 없다. 우리 모두는 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비춰볼 때 비극적일 정도로 부족하다. 따라서 특히 서로의 관계를 만들어가는 초기 단계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지 말라. 그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복음의 측면을 설명하기 전에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려주라. 그렇지 않다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취급받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3. 모두에게 적용되는 제자도의 대가를 인정하라소수자의 길을 떠나서 믿음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 치르는 제자도의 대가는 더 큰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자도의 대가는 모두에게 다 동일하게 크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해서는 안 된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누구든지’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누구라도 다 우리가 가진 깊고도 은밀한 욕망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말해야 한다. 예수님은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정체성(identity)” 앞에 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self)”이라는 단어를 “부인해야 한다” 앞에 놓았다.이런 부르심은 자세히 설명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을 따를 때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고 하셨고(35절), 그분에 대한 순종이 생명을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영광스러운 역설은 이런 상실을 겪음으로써 사실상 우리는 진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다. 자아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우리는 내 자신이 적어지는 게 아니라 가장 진정한 내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제자도로 인해 치러야 하는 대가가 단지 소수자 배경을 가진 그리스도인에게만 더 엄격하게 적용된다면 그건 잔인하고 부당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제자도로 인해 치르는 대가가 소수자 배경을 가진 사람에게 크다면, 그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4.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여주라내 친구는 평소에는 너무도 예뻐하는 두 살 딸이 있는데 식사 시간이 되면 예쁘지만은 않다고 한다. 글쎄, 도전감을 느끼는 시간이라고나 할까? 두 살짜리 아기는 음식 투정이 많을 수밖에 없고, 자녀가 잘 먹고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입장에서 음식을 들고 던지기까지 하는 아이의 밥 먹이는 시간은 힘들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치 이런 두 살짜리 아이처럼 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의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정해놓았는데, 성경이 말하는 성적 윤리가 바로 그런 하나님을 증명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하나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대상은 무작위인 거처럼 보인다.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성경이 왜 그것을 말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합리성과 선함이 있는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금지시킬 때에는 항상 더 중요한 뭔가를 보호하시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우리는 부정적인 것 뒤에 있는 긍정적인 부분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임의적이지 않을 뿐더러 우리에게 가장 좋은 생명이 되는 것을 주기 위함을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이 뭔가를 거절할 때 마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뭔가를 허락하신다. 우리가 결혼과 인간의 성에 대한 성경적 비전, 특히 결혼과 성이 단지 인간을 넘어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줌으로 사람들을 감동시키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오늘날 깊고 죄악된 욕망과 싸우는데 필요한 완전한 영적 자원을 제공하지 못할 것이다.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가 수세기 전에 우리에게 상기시켰듯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애정이 분출하여 밀어내는 힘”이다. 반박만으로는 설득할 수 없다. 비 성경적 사고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진리로 마음을 깨울 수 없다. 5. 성경 줄거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궁극적으로 결혼은 성경적-신학적 주제이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의 결혼으로 시작하고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의 결혼으로 끝난다. 처음 결혼은 마지막 결혼을 가리킨다.한 남자와 한 여자가 모인 정원에서 성경의 줄거리가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를 위해 만들어졌다. 남녀가 모여 하나가 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모든 인간의 결혼이 작별을 고하고 예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궁극적인 결혼을 위해 무대를 떠날 때, 결국 하나가 될 하늘과 땅의 궁극적인 결합의 그림이다. 이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지만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이다. 결혼한 사람이든 독신자이든 이건 이 땅을 사는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이야기이다. 결혼이 복음의 형태를 가리키고 있다면 독신은 복음의 충분함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와의 연합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유일한 결혼이기 때문이다.그렇기 때문에 결혼의 정의를 훼손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성경 전체의 내용에 반하게 된다. 우리의 결혼 신학은 복음에 대한 이해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결혼에 대한 견해를 바꾼 교회는 궁극적으로 복음에 대한 견해를 바꾸게 되고, 그렇지 않은 교회를 나는 여태까지 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은 또한 인간의 성에 대한 우리의 모든 신학적 성찰과 토론의 핵심을 상기시킨다.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 않더라도, 성경이 결혼에 대해서 말할 때면 반드시 이성애라는 맥락 안에서만 유일하게 경건한 행위로 받아들이는 점을 고려할 때, 성경이 동성애에 관해서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는 자명하다. 성경은 우리에게 동성애 신학을 제공하지 않는다. 단지 결혼 신학만을 제공한다. 그리고 바로 그 자체가 복음 신학이다. 6. 계속해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우리는 예수님의 삶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 중 가장 완전하고 완전한 사람은 결혼하지도 않았고 연애도 하지 않았으며 성관계도 없었다. 따라서 적절한 맥락에서 볼 때, 성이라는 게 좋은 선물이지만 인간으로서 온전한 성취를 이루는 데에 반드시 필수적일 필요는 없다. 완전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 성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게 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손상하게 되고, 그건 바로 성경이 경고하는 적그리스도의 영이 되는 것이다(요일 4:3).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는 결혼 이외의 성관계는 죄이고(마 15:19-20, 외 유사 구절), 단순한 행동이 아닌 성적 욕망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것이며(마 5:28), 결혼은 남자와 여자 사이에 가능하다고 가르쳤다(마 15:19-20). 그리고 결혼에 대한 유일한 경건한 대안은 독신 생활이라고 가르쳤다(마 19:10-12). 우리는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결코 성 윤리에 있어서 중립적이지 않았다. 이런 예수님의 입장에 찬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문제는 단지 교회, 복음주의, 기독교와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과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예수님의 이런 입장을 외면할 수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결혼과 성에 대한 예수님의 입장을 믿는다. 누군가가 결혼에 대한 내 견해를 버리도록 하려면 그 사람은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견해를 버리도록 설득해야 한다. “음악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춤추고 있는 무용수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그리스도가 우리 기독교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한 세상 사람들은 결코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우리가 무엇을 믿는 사람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분만이 궁극적이고 지속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요 6:35). 사실상, 바로 이 점을 알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인간 속에 성욕을 창조하셨다. 인간 속에 더 깊고 강력한 갈망이 있을수록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이 그것을 채울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성욕을 만드셨고, 성욕이 예수님을 향한 하나의 통로가 되도록 하신 것이다. 성적인 만족이나 현대의 우상은 결코 우리의 갈망을 채울 수 없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먹이고 채우시는 유일한 분이다. 7. 복음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로마서 1장의 앞 구절 사이를 읽으면, 로마교회의 신자들은 바울이 자기들한테 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복음 메시지는 제국의 여러 지방에서 결실을 맺었지만, 그 중에서도 로마에서 특히 큰 열매를 맺었다. 그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자 정점이었다. 로마는 헬라적 사고와 영향력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복음이 제공할 수 있는 게 무엇이었을까? 그렇기에 바울은 자신에 로마에 쉽게 가지 못하는 게 결코 마음이 꺼려서가 아님을 분명하게 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을 부각했다.“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9-16, 밑줄은 저자의 강조).당시 로마 기독교인이 다른 로마 시민들을 보면서 저들에게는 복음이 통하지 않겠구나 라고 느끼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소수자들을 보면서 느끼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들에게만은 복음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모든 죄인이 다 똑같을 뿐이다. 하나님에게는 소수자들을 위해서 특별히 더 고려해야 할 그 어떤 추가적인 은혜와 능력이 필요하지 않다. 문화적으로 변하는 세상을 보면서 우리의 역할이 단순히 “있는 자리를 지키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추수할 곡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성정체성
성경적결혼
동성애
성혁명
복음
제자도
거룩한연합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by Sam Allberry
2020-10-08
서구 세계가 섹슈얼리티와 성 정체성 문제와 관련해 극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비밀이 아니다. 이십 년 전만 해도 동성간의 결혼이 결코 대중적으로 인정받을 거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라는 주제 또한 결코 주류 사회가 관심을 가질만한 대상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세상이 변했고 현대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제 이러한 변화를 보다 공정하고 포용적인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진보의 필수 신호이자 바꿀 수 없는 선(good)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변화는 당황스럽기만 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세상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고 또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다르게 만들어졌다는 기독교적 견해가 비록 서구 사상으로부터 크게 지지받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합법적인 것으로는 간주되었다. 그러나 이제 전통적인 기독교적 사고는 점점 더 사회를 위험하게 만드는 것으로까지 간주되고 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일까?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지금부터 나는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우리 속에서 발생한 최소한 네 가지의 변화를 제시하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대응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방안을 제시하겠다.1. 도덕적 직관이 바뀌었다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는 그의 획기적인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에서 우리의 도덕적 신념이 합리적인 이유가 아니라 직관적인 이유로 만들어지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는 도덕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직감적으로 안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라는 반응을 유도하는 인간의 직관은 무엇보다 지난 십 년 사이에 아주 많이 바뀌었다. 특정한 도덕적 미각이 새로운 싹을 틔우더니 작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행동 과정이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가 아닌가의 여부, 자유롭게 하는가 억압하는가의 여부 그리고 공정한가 차별적인가의 여부가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었고, 바로 이런 요인이 우리의 도덕적 결론을 결정한다고 하이트는 주장한다. 이런 변화를 감안할 때 서양 문화가 왜 동성 결혼을 그렇게 빨리 받아들였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새롭게 싹을 틔운 도덕적 미각 중 첫 번째를 적용해보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가 아닌가? 길거리에서 서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성애 커플이 결혼한다고 할 때, 그런 경우 과연 내게 어떤 불이익이 발생할까? 두 번째로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건 누가 봐도 자유를 보장하는 게 아니라 억압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또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 세 번째로,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것은 매우 불공평해 보인다. 어떤 커플은 자유롭게 결혼할 수 있는데, 어떤 커플은 그렇지 않다면, 그걸 어떻게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이런 시각으로 바라보면,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것은 직관적으로 옳은 것 같다. 그렇기에 한때 동성 결혼에 반대했던 많은 사람들조차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각을 바꾼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동성 결혼에 대한 기독교적 추론이 왜 그토록 쉽게 무너지는지도 알 수 있다. 기독교는 변화하는 인간의 새로운 도덕적 직관을 전혀 고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아직까지도 현재를 사는 세속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을 도덕적 추론에 호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복음주의 교회가 과연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하는지 여부에 관한 TV 토론을 본 기억이 있다. 교회에서도 동성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여자 토론자는 청중들이 듣기에도 매우 설득력 있고 간결한 주장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내가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도 축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축복하는 사랑, 당연히 교회도 축복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여기에 반해서 상대 토론자로 나온 복음주의 진영의 목사는 계속 앵무새처럼 이 말만을 반복할 뿐이었다. “하지만 성경에 보면 결혼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이 틀린 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은 시청자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하는 무언가에, 그러니까 시청자들이 전혀 인정하지 않는 성경의 권위에만 호소하고 있다는 게 문제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주장에 대한 응답은 이렇게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게 우리 인간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인정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다라는 말은 하나님이 우리보다 사랑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계시기에 사랑이 무엇이고 사랑에 어떤 순서를 매겨야 옳은지 알기 위해서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방향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2. 우선순위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세속적인 사람들은 소수자(LGBTQ+, 소수 인종과 성소수자를 의미하는 단어)를 향해서 자행되었던 과거의 차별을 되돌아보고 끔찍해한다. 우리는 이제 과거에 동성애 공포증과 게이 커뮤니티의 악마화로 인해 그들이 받았던 끔찍한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미테이션 게임(The Imitation Game)’과 같은 영화와 ‘트랜스페어런드(Transparent)’와 같은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우리 문화가 한때 명백하게 희생양으로 만든 사람들을 향해서 이제는 오히려 연민을 가진다. 여러 면에서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변화에 박수를 보낸다. 왕따와 이런 식의 괴롭힘은 성경적으로 볼 때 결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 자행되었던 차별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수치심은 이제 교차 현상으로 이어졌다. 과거에는 사회가 주는 피해로 인해 소수자가 침묵해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이제는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피해자 위치를 하나의 특권으로까지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교차 지점에 있는 누군가가 그런 소수자 지위를 하나 이상 가지고 있다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공공 광장에서 가지는 신뢰도는 이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이것은 결코 평등한 경쟁의 장이 아니며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불공정의 현장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흑인, 여자, 레즈비언이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남자, 백인, 이성애자보다 더 큰 울림을 갖는다. 이러한 역학 변화는 또한 소수자가 정서적 또는 심리적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한 필요 이상의 큰 우려를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얼마 전 나는 한 일반 대학 캠퍼스에 있는 기독교 단체에게 성생활과 복음에 대해 강의를 하도록 초대를 받았는데, 그 캠퍼스의 소수자 옹호 단체가 반대 시위를 조직했다. 강의가 시작되기 직전에 나는 시위자들을 만나 그들의 우려를 들었고, 내가 행여라도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있는지를 알아보았다. 그들이 그 모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걱정은 행여라도 그 모임에 참석한 동성애 기독교인이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그들이 말하는 상처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좀 더 알아보았더니, 아무리 온유하게 표현을 해도 단지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사실 자체가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대학 캠퍼스에서 소위 말하는 진보적 사고라는 게 사실은 왜 그렇게도 많은 검열을 자행하는지 알 수 있다. 누군가의 관점이 해를 끼친다면 그런 관점은 더 이상 거론될 수도 또 토론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은 그냥 침묵하거나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3. 성과 결혼에 관한 생각이 바뀌었다이런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을 통해서 이뤄졌고, 바로 이 측면에서 볼 때 성적 혁명은 1960대로까지 거슬러간다. 첫 번째로 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지금 섹스를 출산과 연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섹스는 이제 단순히 즐거움의 방법이고 굳이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질 필요가 없다. 이것은 초음파 기술의 발전과 함께 아직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감수성 및 발달 등에 대한 의학적 이해가 점점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낙태에 찬성하는 로비가 왜 그렇게 열광적인지를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 궁극적으로 낙태는 태아에 관한 게 아니다. 아이를 낳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즐거움만을 주는 섹스를 하는, 바로 그 권리에 관한 것이다. 두 번째로 결혼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바뀌었다. 현재 많은 서방 국가들이 동성 결혼을 합법적으로 인정하는 현실이 도래하기 한참 전부터, 결혼에 대한 생각은 훨씬 더 중요한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결혼은 이제 더 이상 자녀 출산을 포함해서 평생 지속해야 하는 거룩한 약속이 아니다. 그 대신 결혼은 이제 사실상 유연성을 가진 하나의 낭만적인 계약이다. 상대를 향해서 가지고 있던 낭만적인 감정이 사그라드는 순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또는 두 사람이 동시에 얼마든지 파기할 수 있는 게 결혼이 되었다. 따라서 결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득세하는 한 굳이 상대 배우자가 이성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혼이 단지 낭만적인 감정을 누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동성 결혼을 금지하는 것은 누가 봐도 불공평한 처사이다. 4. 인간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다오늘날, “진짜” 당신은 당신 자신이 내면 깊이 있다고 느끼는 바로 그 사람이다. 우리 시대의 영웅이 가지는 서사는 자신의 내면을 깊이 탐구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한 다음에,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발견한 것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진짜”는 오로지 당신만이 발견할 수 있고, 다른 그 누구도 당신을 대신해서 당신이 누구라고 말할 수 없다. 여기에 덧붙여, 인간이 가진 몸은 전적으로 우연의 결과이다. 무신론적 진화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몸은 ‘당신’이라는 존재가 붙어있는 물질 덩어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거기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의미나 의미가 있을 수 없다. 실제로 진화는 이렇게 주장한다. 물리적인 것은 얼마든지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고. 그런 주장이 맞다면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던 몸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가진 몸이 우연의 결과에 불과하다면, 몸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에 비록 몸이 내 정체성을 표현할 수 있는 캔버스임에도 불구하고, 몸은 그 어떤 식으로도 결코 나의 정체성을 결정하지는 못한다. 이런 네 가지 변화는 우리가 사는 이 문화적 시대를 탐색할 때 매우 중요한 사실을 드러낸다. 성 윤리와 성 정체성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적 이해는 결코 기이하거나 구식이 아니다. 그건 단지 지금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위험할 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변화들이 단지 세속 사회에만 영향을 끼친 게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다니는 많은 교인들의 의식 깊숙이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스물다섯 살 아래의 청년이라면, 이런 생각이야말로 그들이 숨 쉬고 살아온 산소이다. 이런 생각은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현실 그 자체이다. 결론은 이것이다. 교회에는 지금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는 게 성경적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점이다. 동시에 비록 성경적으로는 확신하지만 감정적으로는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그건 설득력이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10월 9일 아티클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로 이어집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re to Find Hope and Help amid the Sexual Revolution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성정체성
동성애
성혁명
결혼인식변화
독신의가치
소수자
조너선하이트
카이퍼 통신 7: 영역 주권의 역사적 배경
by 김은득
2020-09-13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최근 코로나로 인해 교회와 국가의 관계(the relation between church and state)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신학적 고민에 대한 반가움은 잠시였고, 그런 이슈와 연관해 영역 주권을 강조했던 저나 바빙크에 대한 언급조차 없었다는 사실에 허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물론 제가 마르틴 루터,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 등처럼 언급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을 질투하거나 여러분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정교가 완전히 분리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굳이 크리스텐덤 세계를 살았던 신학자들의 저작을 전용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생길 뿐입니다. 그런 세계의 사람들은 정부가 참된 종교의 예배를 증진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정부가 특별히 선호하는 종교만이 참된 종교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잘 알려지다시피, 가톨릭 국가들은 가톨릭을 참된 종교로, 개신교 국가들은 개신교를 참된 종교로 여겼습니다. 더 나아가 개신교 내에서 독일은 루터란을, 네덜란드는 개혁파를, 잉글랜드는 성공회를 거의 국가 종교(National Church)로 우대하였습니다. 이렇게 정교가 일치된 사회에서 정부의 구성원(magistrates)들은 사실상 국가 종교의 일원들이었기에, 교회와 관련된 국가의 의무, 즉 참된 종교의 예배를 증진시키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 이후, 유럽 전역에 정교분리의 원칙이 적용되기 시작했는데, 네덜란드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나폴레옹의 대리 정부였던 화란의 바타비안 공화국(Batavian Republic, 1795-1815)은 도르트 총회(The Synod of Dort)에 의거해 화란 개혁 교회(Nederlands Hervormde Kerk, NHK)가 누리던 특권적 지위를 폐지하였습니다. 물론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새로운 유럽 질서를 구축한 비엔나 회의(The Congress of Vienna)를 통해 오라녀 왕가(The House of Orange)의 빌렘 1세(King William I)가 네덜란드 왕국의 군주로 복귀하면서, 국가 교회로서 화란 개혁 교회(NHK)의 지위가 회복됩니다. 문제는 빌렘 1세가 민족국가(the nation-state)를 신속히 구축하는 과정에서 바타비안 공화국의 중앙집권정책을 계승하면서 발생했습니다. 바로 1816년 화란 개혁 교회(NHK)를 정부 기관의 감독 아래 두는 일반 조례(Algemeen Reglement)를 제정한 것이었는데, 그 조례에 의하면 교회의 궁극적 존재 목적은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고 실천하는 것뿐만 아니라, 군주에 대한 존경과 애국심을 고양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 당시의 유럽 전체가 민족주의 의식이 서서히 고양되고 있던 터라, 이런 교회의 국가 종속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적었습니다. 네덜란드의 경우, 흐로닝언(Groningen) 대학교의 신학자들은 외래적 요소를 제거하고 참다운 화란식 기독교 사회(a genuinely Dutch Christian Society)를 추구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민족주의적 가치 판단에 따라, 흐로닝언 신학자들은 전통적인 칼빈주의 신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14세기의 공동생활 형제단(the Brethren of Common Life)이나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에라스무스(Erasmus), 메노나이트 교단(the Mennonites), 코케이우스(Johannes Coccejus)등과 같이 화란 출신들을 칭송하였습니다. 이런 흐로닝언 신학은 군주에 대한 존경와 애국심을 고양시키려는 빌렘 1세의 종교적 이상과 맞아 떨어지면서 화란 개혁 교회(NHK)를 대표하는 공적인 신학이 되었습니다. 1859년 흐로닝언 학파에서 존 칼빈과 얀 라스키(Jan Laski)의 교회론을 비교하는 에세이 대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바로 그 에세이 대회에서 제가 우승하면서 신학자로서 제 첫걸음을 띄었고, 이 에세이를 확장하여 쓴 글이 제 박사 논문(칼빈과 라스키의 교회론)이 된 것입니다. 그 대회를 개최한 흐로닝언 학파는 라스키가 칼빈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인데, 라스키가 화란 출신인 에라스무스와 친밀했고, 엠덴(Emden)과 런던(London)의 화란 교회들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흐로닝언 학파의 문제는 바로 기독교 진리보다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더 우선시하는 문제에 직면합니다. 진리가 진리 자체로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민족주의 가치에 따라 받아들여지기도 혹은 버려지기도 합니다. 또한 엄밀히 말해, 이런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야 말로 화란 자체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19세기 유럽의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빌렘 1세의 종교적 조례로 인해 화란 개혁 교회를 감독하는 장관(Ministry of Public Worship)이 임명되었고, 이로 인해 생겨난 권력과의 밀착 현상을 흐로닝언 신학이 더욱더 강화시켰다는 점입니다. 1834년 국가 권력에 종속된 화란 개혁 교회(NHK)의 부패와 위선을 고발하면서 분리(Afscheiding)로 알려진 저항운동이 일어났습니다. 헨드릭 드 콕(Hendrik de Cock)이라는 흐로닝언 지역의 한 목회자가 참된 교회로의 회복을 위해 칼빈과 도르트 총회가 고백했던 신조와 예전, 교회 정치로 복귀해야함을 주창했고, 그 지역의 가난한 농부들, 자영업자들, 저학력 민중들이 가세하면서 일종의 계급 투쟁 양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드 콕의 참된 교회에 대한 강조는 빌렘 1세의 화란 개혁 교회(NHK)가 몇몇 소수의 엘리트 집단으로 구성된 거짓 교회(valsche kerk)임을 고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저항 운동은 화란 개혁 교회(NHK)와 정부 모두에게서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이 분리 운동에 참여한 모든 교회들의 모임은 금지되었고 그런 교회에 속한 목회자들은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분리 운동에 참여한 자들은 스스로를 십자가를 지는 교회(churches of the cross)로 지칭하면서 종교의 자유(freedom of religion)를 위해 기꺼이 그런 희생들을 감내하였습니다. 이 분리운동이 주축이 되어 탄생한 교단이 바로 바빙크의 모교단인 기독개혁교회(Christelijke Gereformeerde Kerken, CGK)입니다. 바빙크는 이 분리운동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무엇보다도 분리 운동의 영예와 영광은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바로 자유 교회(a free church)가 되는 것이었다.” 당시 정부와 교회 내 엘리트들 간의 결탁을 생각해 볼 때, 예배의 자유를 위해 기꺼이 모든 권리들(특히 자녀들이 정규 학교를 다닐 수 없었음)을 희생하는 태도야말로 분리운동이 강조하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또한 실제적으로 이 분리 운동은 당시 화란의 공적 세계에서 별 볼일 없는 대중들(kleine luyden)을 위한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칼빈주의는 외세에서 도입된 그런 사상이 아니라, 그들의 실제적인 삶에 목적과 의미를 제공하는 생동감있는 삶의 원칙이었습니다. 다소 종교적 엘리트들이 생각한 민족의식과 달리, 분리 운동에 참여한 일반 대중들에게 칼빈주의는 스페인의 가톨릭 왕조에서 네덜란드를 해방시킨 그런 사상적 원리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바빙크는 “칼빈주의는 네덜란드라는 하나의 국민을, 하나의 민족성을, 하나의 공화국을 형성해 왔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분리 운동은 그들의 관점에서 거짓 교회와의 분열에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번 시작된 분열의 마인드 셋은 계속해서 분리 운동의 내부 분열들을 부추겼고, 거짓 교회와 결탁한 타락한 국가와의 결별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만일 네덜란드가 하나님을 등지고,… 만일 타락한 정부가 신실한 성도들을 박해한다면, 거룩한 나라가 아니라면, 적어도 종교의 관용이 있는 나라로 떠나는 것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그러나 바빙크는 그 자신이 분리 운동의 후예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경건주의적, 분리주의적, 분파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했습니다. 그는 예배의 자유를 이상적 모토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모국을 떠나 미국을 향해 나아가는 이민의 물결에 대해서 “그런 경향성 역시 기독교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기독교의 전체 진리를 대변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바로 국가와 사회, 예술과 학문 모든 네덜란드의 공적 영역을 타락의 상태로 내버려두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개혁하는 어떤 노력도 행하지 않고 이민을 떠나는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등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소개하고 싶은 운동은 반혁명당(anti-revolutionary party)의 사상적 모체가 된 화란의 문예적-영적 부흥 운동(Reveil)입니다. 시인 빌럼 빌더데이크(Willem Bilderdijk)는 프랑스 혁명으로 대변되는 이성 중심의 계몽주의를 외세적이라고 비판하면서,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학, 특히 시적 상상력을 통해 화란의 민족의식(Dutch national soul)을 일깨웠습니다. 또한 그에게 화란의 민족의식은 네덜란드를 이스라엘처럼 선민으로 택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빌더다이크의 시적 상상력은 네덜란드의 역사에 근거하는데, 구체적으로 80년 전쟁(the Eighty Years’ War) 동안 가톨릭 스페인 정부로부터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화란 칼빈주의자들의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해방 투쟁과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이런 부흥(Reveil)운동에 속한 자들은 칼빈주의 민족 국가(a Calvinist national state)와 칼빈주의 국가 교회(a Calvinist national church)를 실현하는 것을 그들의 비전으로 삼았습니다. 부흥(Reveil)운동은 칼빈주의를 네덜란드의 민족적 정체성과 연결하는 면에서 분리(Afscheiding) 운동과 일치하지만, 분리 운동의 분열주의(schism)와는 거리를 두었습니다. 그러나 부흥(Reveil)운동은 국가 교회(volkskerk)의 신정주의(theocratic)적 이상향을 고수한다는 면에서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는 비전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부흥(Reveil)운동을 구체적인 사회정치적 프로그램으로 변환시킨 것이 판 프린스테러(van Prinsterer)와 저의 반혁명당입니다. 지난 카이퍼 통신: 도대체 칼빈주의가 뭐길래에서 언급했듯이, 국가와 교회와 관련된 칼빈주의 교리는 저와 바빙크를 통해 정교분리의 현대 사회에 걸맞게 변화됩니다. 바로 영역 주권(Sphere Sovereignty)의 교리를 통해 교회와 국가 간 관계에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 영역 주권 교리는 진공 상태에서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다음 회에서 구체적으로 다룰 예정인데, 다소 판 프린스테러가 어렴풋이 구상한 것을 제가 완성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흐로닝언, 분리 운동, 부흥 운동은 제가 영역 주권 교리를 완성하는데 있어서 역사적, 사상적 배경이 됩니다. 저는 위에 언급된 학파와 운동들처럼, 모국에 대한 애정 가운데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도르트 신조나 부흥 운동이 소망하는 정부와 교회가 연계되는 신정주의적 이상향을 부정합니다. 더욱이 정부와 교회가 결탁하여 타락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저 역시 국가 교회와 결별하여 새로운 교단(Doleantie)을 설립하였습니다. 교회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바로 자유 교회(free church)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교회가 행사할 수 있는 모든 자체의 권리를 희생함으로 참된 교회가 무엇인지를 몸소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을 등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국가와 사회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하고 개혁해야 합니다. 칼빈신학교의 존 볼트(John Bolt) 교수가 쓴 책의 타이틀 ‘자유로운 교회, 거룩한 나라: 아브라함 카이퍼의 미국적 공공신학’(A Free Church, A Holy Nation: Abraham Kuyper’s American Public Theology)이 잘 보여주듯이, 교회는 자유 교회로, 국가는 거룩한 나라로 개혁하는 것이 제가 평생토록 추구한 비전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교회가 국가를 거룩하게 회복하기 위해서 어떻게 국가와 관계할지 다루는 것이 바로 영역 주권의 원리입니다.
문화
세게관
영역주권
흐로닝언신학
분리운동
부흥운동
자유교회
거룩한나라
도르트총회
바빙크
세속적 정의와 비판 이론에 대한 성경적 비평
by Tim Keller
2020-09-11
당면한 문제 정의라니? 도대체 무슨 정의를 말하는 건가? 하지만 요즘처럼 정의에 대한 요구가 드센 적도 없다. 그러나 정의에 관해서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있다. 정의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이 당신과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성경적인 정의이다. 성경 속에 실로 오래되고 풍성하고 또 포괄적이며 매력적인 정의에 대한 개념이 들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른다. 성경적인 정의는 여러 면에서 세속적인 정의와 다르다. 그럼에도 성경 안에 풍성하게 드러난 성경적인 정의에 대해서 알고 있는 기독교인이 별로 없다는 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런 현실은 다음 두 가지 면에서 문제를 일으킨다. 첫 번째로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예외없이 ‘정의를 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교회가 당연히 감당해야 하는 소명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그 결과 정의와 한 발 떨어진 교회에 실망한 젊은 기독교인은 결국 세속적인 측면에서 정의를 바라보게 되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삶을 왜곡시키게 된다.정의의 역사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는 그의 책 ‘누구의 정의? 어떤 합리성?’(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에서 정의와 관련해 우리가 지금 처한 어려움을 잘 설명했다. 정의에 관한 모든 이해 뒤에는 언제나 다음 세 가지에 대한 철학적 믿음이 있다. 그것은 ① 인간의 본성과 목적, ② 도덕 그리고 ③ 실제적인 이성 - 즉 사물이 무엇인지 또 진정한 믿음을 어떻게 합리화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이다. 지금까지 인류에게는 다음 네 가지 기본이 되는 정의에 대한 역사가 있다. 전통 개념(호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성경적 개념(어거스틴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을 성경적으로 통합한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계몽주의(특히 로크, 칸트 그리고 흄), 그리고 마지막으로 현대의 자유주의적 접근법이다. 초창기 계몽주의 사상가는 도덕과 정의에 대한 근본을 하나님 또는 종교에서 찾는 대신 오로지 인간의 이성에서만 찾았다. 데이비드 흄(David Hume)은 우리의 사고와 느낌과 관계없이 모든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절대적인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도덕적인 결정은 굳이 이성보다는 감정에 충실할 때 더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사실상 오늘날에는 그런 흄의 사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고 그의 후계자들은 그의 사고를 더 논리적인 결론으로까지 끌어올렸다. 즉, 모든 도덕적인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기준에 근본을 두는 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 뿐 아니라 개인의 감정과 선호도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이런 생각이 얼마나 틀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유명한 손목시계 예화를 통해 그는 애초의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시계가 ‘좋은 시계’인지 ‘나쁜 시계’인지 결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시계의 목적이 무엇인가? 시간을 알려주는 것인가 아니면 못을 박는 것인가? 후자라면 시간은 틀려도 튼튼하기만 한 시계가 ‘좋은 시계’일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에게 목적이 무엇인지 규명되지 않는다면 결코 무엇이 선이고 악이라고 말할 수 없고, 결과적으로 정의를 제대로 논할 수도 없다. 세속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인간은 그냥 우연히 생긴 존재에 불과하다. 그런 인간 중에서 스스로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인간이 있다면 좋은 것이지만, 문제는 그렇지 않은 인간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무엇을 근거로 당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데이비드 흄의 후계자들이 만든 정의에 관한 현대 이론에 따르면 대답은 이것 뿐이다. “우리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야.” 근본의 문제매킨타이어에게 많은 세속적 학자들은 이렇게 반박했다. “인간에게 굳이 어떤 근본은 필요하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권리가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상식’이니까.” 성경적 정의에 대한 간략한 요약1. 공동체 : 다른 사람들도 내가 가진 부에 대해서 권리를 가진다. 그렇기에 나는 자진해서 부를 나눠야 한다성경은 인간 세계를 상호간에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구약학자 부르스 왈트케(Bruce Waltke)는 잠언이 말하는 ‘의로운 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의로운 자는 자신에게 해가 되더라도 공동체에 유익이 있도록 하는 사람이고, 악인은 공동체에 해를 입히면서라도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다.”2. 평등 : 모든 사람은 다 고귀함을 가진 존재로 평등하게 대우받아야 한다“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 뇌물이 부정한 이유는 가난한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가에 따라서 더 우월하게 취급받게 하는 시스템은 하나님 앞에서 가증스러운 일이다. 레위기 19장 13절과 신명기 24장 14-15절도 불평등한 임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3. 공동 책임 : 나는 다른 사람이 지은 죄에도 책임이 있고 또 때로는 그 죄와 관련이 있다하나님은 종종 한 개인의 죄를 가족 또는 그가 속한 집단에게도 물었다. 그렇기에 다니엘은 그의 조상이 지은 죄까지 회개했다(단 9). 이런 사례는 사무엘하 21장, 여호수아 7장, 그리고 민수기 16장에도 잘 드러난다. 특히 사무엘상 15장 2절과 민수기 23장 3-8절을 보면 하나님은 과거 조상의 죄를 현재의 사람들에게 묻고 있다. 왜 그런가? 거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① 집단적인 책임 : 아간의 가족(수 7)은 도둑질을 하지 않았지만 아간이 범죄하는 인간으로 자라는 데에 일조했다. 성경은 가족이 한 인격을 형성하는 데에 얼마나 중요한 책임을 가지는지를 여러 번 강조한다. 그렇기에 개인의 잘못은 단지 그 개인의 잘못으로 끝나지 않는다. ② 집단적인 참여 : 죄악된 행동은 단지 자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둘러싼 모두에게, 심지어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대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렇기에 출애굽기 20장 5절을 보면 하나님은 죄의 책임을 후손에게도 물으신다. ③ 제도화된 죄 : 사회적인 제도는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을 더 우대하는 쪽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형사 제도에서(레 19:15), 상거래에서 생기는 고금리에서(출 22:25-27; 예 22:13) 그리고 턱 없이 적거나 지연되는 임금에서(약 5:4; 신 24:14-15) 얼마든지 불공정한 사례들이 발생한다. 일단 이런 시스템이 제도화되면 일개 개인이 저지르는 것 보다 더 큰 악이 일어난다.4. 개인적인 책임: 나는 내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진다. 그러나 그로 인한 모든 결과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① 나의 결과 : 성경은 결코 누군가의 성공 또는 실패를 단지 그 사람 개인이 취한 선택의 결과로 바라보지 않는다. 가난은 개인의 실패로 인해서 오기도 하지만 환경적인 이유로 발생하기도 한다(잠 6:6-7; 23:21; 잠 13:23; cf. 출 22:21-27).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결과를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② 나의 죄 : 집단적인 죄와 악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구원을 좌우하는 궁극적인 책임은 다 개인에게 있다고 강조한다(겔 18). 신명기 24장 16절은 이 점을 분명하게 한다. “아버지는 그 자식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자식들은 그 아버지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지 않을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 죄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할 것이니라.” 그런 면에서 에스겔 18장은 집단적인 책임에 너무 많은 강조를 할 때 빠질지도 모르는 운명론에 대해 경고를 하고 있다. 집단적인 죄라는 현실이 결코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도덕적인 책임까지 면죄하는 것은 아니다.5. 옹호 : 우리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특히 관심을 쏟아야 한다어느 누구라도 차별해서 안 되지만(신 19:15), 그럼에도 특히 더 가난한 자들에게 관심을 쏟아야 한다(사 1:17; 시 41:1). “너는 말 못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 너는 입을 열어 공의로 재판하여 곤고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할지니라”(잠 31:8-9). 가난한 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세상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그렇기에 우리는 특히 더 그들을 위해 신경을 써야 한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 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지고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거나 학대하지 말며 이 곳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렘 22:3). 예레미아 선지자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약한 계층을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고 있다.정의 이론의 스펙트럼우리 문화를 지배하는 정의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크게 다음 네 가지의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이 모든 이론은 다 세속적인 이론인데 다음 두 가지 가정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①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의 생각과 달리 이 이론은 하나같이 이 세상에는 정의가 뿌리를 내릴 초월적이고 도덕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고 간주한다. 이 이론은 예외없이 다 테일러가 주장한 “내적 기초(immanent frame)”에 그 근거를 두는데, 한 마디로 도덕적 가치가 무엇이고 또한 정의가 무엇인지 규정하는 것은 다 인간이 생각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② 이 모든 이론은 인간 본성을 백지 상태로 바라본다. 애초에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초를 가진 상태에서 태어나지 않기에, 나중에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인간은 얼마든지 재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1.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 – ‘자유’ 공정한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증진시킨다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과도한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정부의 역할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작은 정부를 지향한다. 개인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정부가 통제하지 않는 자유로운 시장을 주장한다. 자유지상주의는 극도의 개인주의를 지향하는데, 그건 다름 아니라 모든 인간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고 그렇기에 개인에게 발생하는 모든 결과는 온전히 다 개인의 선택 또는 노력에 의한 것이라는 기본적인 확신 때문이다.성경적 분석 :가장 먼저 자유지상주의는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가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개인은 단지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닐 뿐더러 게다가 인간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존재이다. 게다가 자유지상주의는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발생하는 가난이라는 현실도 경시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개인의 자유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이 죄악된 세상이 만들어가는 불평등한 사회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두 번째로 자유지상주의는 죄가 얼마나 이 세상에 만연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정부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인간이 만든 자유 시장이 정부보다 더 타락할 수 있다는 점은 경시하고 있다.세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자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얼마든지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존재이다. 인간이 단지 자기 개인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의지를 발휘해 타인을 사랑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이 사상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진정한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했지 스스로에게 속하지 않았다. 우리의 주인은 하나님이다. 2. 자유주의- ‘공정성’ 정의로운 사회는 모든 구성원에게 공정성을 증진시킨다언론, 재산 그리고 종교의 자유를 중시하는 자유지상주의와 달리 자유주의는 개인의 권리를 교육과 의료복지에까지 확대한다. 자유주의가 자유지상주의와 특히 다른 점은 정부의 역할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인데, 정부가 세금 부과 뿐 아니라 시장 관여를 통해서 부를 훨씬 더 잘 분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 관점 또한 기본적으로는 자유 시장을 가장 선호한다. 자유주의는 평등한 결과를 지향하는 게 아니라, 모든 개인이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평등한 기회를 지향한다. 그렇기에 개인마다 다른 결과는 결국 개인의 노력 및 노동 윤리에 따른 것이라고 바라본다.성경적 분석 :많은 학자들이 이미 밝혔듯이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인간 권리에 대한 믿음과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은 다 기독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렇기에 자유주의 관점은 오로지 성경과 기독교가 들어간 사회에서만 만날 수 있다. 따라서 기독교인이라면 이 관점에 얼마든지 찬성할 수 있지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다. 자유주의는 진화에 바탕을 둔 현대 사상과 결합함으로 수많은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첫 번째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 해체의 위기까지 불러오고 있다. 그렇기에 혹자는 자유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개인의 자유와 이기심을 상쇄할 수 있을 정도로 사회에 종교적 영향력이 큰 사회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오히려 종교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상황이다. 두 번째로 정의가 단지 개인의 권리만을 지키는 것이라면 그보다 더 높은 도덕적인 절대성은 없다는 것이고, 그 결과 권리와 주장(rights-claims)이 충돌할 때 해결할 길이 막막해진다. 자유주의적인 입장에서 볼 때 페미니스트와 트랜스젠더가 충돌할 때, 누가 이기는 게 맞는 걸까? 그리고 어느 한쪽의 승리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다는 것인가? 단지 숫자? 아니면 돈? 세 번째로 인간의 합리성은 결코 공정한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합리성에 근거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다고? 오히려 인간의 합리성은 가난한 사람을 더 착취해서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다. 3. 공리주의 – ‘행복’ 공정한 사회는 최대 다수에게 최대의 행복을 보장한다세 번째 이론은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과 관련이 있는데, 오늘날 세속적인 사회를 사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 생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정의의 핵심은 최대의 숫자가 최대의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 결국 이 이론 또한 ‘도덕적인 절대성’이 아닌 ‘실질적인 합리성’에 근거하고 있다. 즉, 뭔지는 몰라도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게 등장한다면, 그게 바로 정의라는 것이다. 물론 공리주의는 행복을 추구하는 경우에도 결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는, 일종의 제한을 두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공리주의는 다수결주의이다. 더 많은 사람이 좋아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오늘날 투표라는 방식으로 드러나고 있다. 공리주의는 앞서 살펴본 개인을 중시하는 두 가지 사상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공리주의는 오히려 개인의 권리를 다수의 행복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본다. 그래서 이런 말까지 있다. “개인의 권리를 믿는 사람은 아마도 공리주의자가 아닐 것이다.”성경적 분석 :첫 번째로 공리주의는 창조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개인의 존엄성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극소수가 감옥에 들어감으로 대다수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도 공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문제될 게 없다.두 번째로 죄에 대한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기에 대다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악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어리석고 악한 일도 얼마든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에 대한 깊은 인식이 없이는 단지 육체를 즐겁게 하는 거짓도 얼마든지 행복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추구한다는 “피해 원칙(harm principle)”도 얼마든지 소수에게 악용될 수 있다. 대다수가 소수를 향해서 이렇게 말한다면 말이다. “이건 피해가 아니야.” 과거에 인종차별이 차별이 아니라 오히려 흑인을 위한 ‘보호 조치’라고 주장했던 이들이 있다. 그게 말이 되는가? 도덕적인 절대성이 없는 상태에서 소수의 행복에 대한 보장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4. 포스트모던 – ‘권력’ 공정한 사회는 압제 받는 사람들을 위해 지배 그룹의 권력을 전복시킨다칼 막스(Karl Marx)의 가르침에서 시작한 네 번째 정의 이론은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이라고 불린다. 포스트모던 비판 이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첫 번째로 사회의 모든 불평등은 불공정한 사회 구조와 시스템 때문이다. 해결책은 사회 정책 자체를 바꾸는 것이지 결코 개인적 차원에서 가능하지 않다.두 번째로 모든 예술, 종교, 철학, 도덕, 법, 미디어, 교육 등등은 다 이성 또는 진리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라, 오로지 사회적 압력(social forces)에 의한 결과이다. 모든 것은 다 당신이 가진 계급의식과 사회적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종교적 교리도 다른 것들과 결부해서 사회적인 지위와 부를 획득하게 한다.세 번째로, 그렇기에 모든 현실은 언제나 권력의 문제로 귀결된다. 계급은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 있다. 만약에 당신이 백인이고 남자, 또 이성애자라면 당신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다. 그 반대라면 당신은 가장 취약한 위치에 있고 그 중간에는 실로 다양한 계급의 사람들이 존재한다. 중요한 것은 힘없는 계층에 가까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장 위대한 도덕적 권위와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권력을 가진 계층은 어차피 그 권력으로 눈이 먼 상태이고, 결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그들은 그 권력을 포기해야만 한다.네 번째로 권력을 가진 계층은 ‘진리 주장(truth-claim)’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를 통해서 지배력을 더 강화한다. 학계는 “학문의 자유”를, 기업계는 “자유 기업”을, 과학계는 “경험적 객관성”을 그리고 종교계는 “신성한 진리”라는 가면을 쓰고 있다. 그들이 쓰고 있는 이런 가면을 벗겨야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지배 계층이 장악하고 있는 이런 언어를 전복해야 한다. 다섯 번째로 문화도 사람들처럼 상호교차성으로 인해 구성될 수 있다. 다른 문화보다 더 뛰어나거나 뒤떨어진 문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문화조차도 얼마든지 더 나은 문화와 뒤떨어진 문화로 간주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개인의 권리와 개인의 정체성은 핵심이 아니다. 부와 권력을 나누는 사회로 개편하는 데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자유주의 사상은 방해가 될 뿐이다.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된 개인의 정체성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오로지 집단 정체성과 집단 권리만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성경적 분석 :첫 번째로 전반적인 주장이 다 말이 안 된다. 다른 거 떠나서 한 가지만 보자. 가장 취약한 계급이 사회를 재편성해서 가장 권력있는 계급이 된다면, 그 계급은 왜 계속 거기 있어야 하는가? 그 계급 또한 다시 축출되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두 번째로, 너무 단순하다. 이 관점은 인간을 내재적으로 선하거나 또는 백지 상태로 본다. 그렇기에 인간 속 모든 악은 다 사회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단순한가?세 번째로, 이런 주장은 인간성 자체를 훼손한다. 포스트모던은 인류 전체를 동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대신 인종과 어떤 민족에 속했는가를 더 중시한다. 네 번째로, 그렇기에 이 사상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가진 죄성을 부정한다. 성경은 만연한 죄가 이 세상 전체를 뒤덮고 있다고 한다. 어떤 민족이 또 어떤 문화가 죄를 더 짓거나 덜 짓는 게 아니다. 죄성에 오염된 모든 문화는 예외없이 자신만의 우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은 이런 성경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특정 인종 또는 민족에게 더 죄가 있다는 식의 생각은 얼마든지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극을 초래한다.다섯 번째로 포스트모던은 특정 그룹 간의 용서와 평화 그리고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이런 시각은 지배(domination)에 치중하게 된다. 언론의 자유 그리고 종교의 자유와 같은 자유주의 가치를 단지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장치로만 파악하는 포스트모던 사상은 사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불의한 상황을 인간 차원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보고 인간을 악마화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스스로를 구원자로 간주하면서 궁극적으로 우리를 구원할 구원자가 가져다줄 정의로운 사회를 기다리지 않는다. 성경적 정의를 다른 대안들과 비교하기첫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다른 모든 사고 체계 속에서 발견되는 정의의 문제를 해결하고 제대로 소화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속적인 이론은 앞서 살펴본 성경적인 정의가 가진 다섯 가지 측면의 일부만을 해결할 뿐이다. 그 어떤 이론도 다섯 가지를 다 포괄하지는 못한다. 두 번째로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들을 무시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각각의 대안적 견해와 모순된다. (a) 성경적 정의는 다른 대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기초가 탄탄하다. 왜냐하면 도적적인 절대성을 가진 하나님의 성품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대안이 기초로 삼는 것은 바람처럼 흔들리는 인간이다. (b) 성경적 정의는 인간의 상태에 대해 훨씬 더 심도 깊은 분석을 제시한다. 그 결과 불의가 다른 이론들과는 달리 훨씬 더 복잡한 상황 때문에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c) 성경적 정의는 현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범주에 맞지 않는 부와 소유권의 특성에 대한 독특한 이해를 제공한다.세 번째로, 성경적 정의에는 지배에 대한 보호 장치가 내장되어 있다. 정의가 구현되려면 무엇보다 모든 개인과 모든 문화에 적용되는 도덕적 절대성이 필요하다. 사회가 만들어낸 진리와 도덕성에 의존할 때 지배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로지 기독교만이 특정 세력의 지배를 전복시킬 수 있는 진리 주장을 제시한다. (a) 기독교는 모든 답을 다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얼마든지 미스테리가 존재한다. 이 세상과 인간은 복잡하고 근본적으로 여전히 신비의 대상이다. (b) 기독교는 결코 우리의 주장을 따르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 싸우지만 궁극적으로 정의를 가져다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c) 성경의 하나님은 그 누구보다 약자의 하나님이다. 네 번째로 오로지 성경적이 정의만이 권력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급진적으로 파괴적인 사고를 가져다준다. 자유주의자까지도 포스트모던이 맹목적으로 지향하는 권력 형성에 대해서 비판한다. 이런 상황에서 오로지 성경적인 정의만이 권력에 대한 바른 이해를 줄 뿐 아니라, 권력의 부패에 대해서도 경계하도록 한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는 사회의 가장 밑바닥 계층의 가난한 자로 왔다. 그는 사회적 권력을 가진 엘리트층으로부터 갖은 고초를 당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자신의 모든 능력과 특권을 포기한, 자신의 “영광”까지 포기한 하나님을 만난다. 왜? 그는 그런 모습으로 약하고 힘없는 인간들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이다(빌 2:5-8). 그리고 그는 인간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다시 부활하셔서 영광을 받으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을 받으셨다(빌 2:5:9-11). 약하고 힘없는 자들을 위해서 모든 능력을 기꺼이 포기했기에 예수님은 다시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성경적 권위는 오로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기독교는 결코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구분이 필요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기존의 질서를 전복시킨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당신의 능력을 다 포기하고 오셨듯이, 우리도 권력에 관해 변화된 태도를 가지게 된다. 이 세상에 성경적 정의와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기독교인은 팥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권을 파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대신 기독교인은 자신의 장자권을 높이 들고 정의를 행하여야 한다. 긍휼함을 사랑하고 겸손한 자세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미 6:8).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원제: A Biblical Critique of Secular Justice and Critical Theory번역: 무제
문화
세계관
정의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
공리주의
포스트모던
성경적_정의
세속적_정의
세상 문화 속 기독교 메시지를 찾아서
by Joshua Chatraw
2020-09-07
삶 전반에 스며든 기독교적 이야기 덕분인지 몰라도, 서구에서는 한때 기독교가 타당하다고 여겨졌다. 일류 교육 기관, 매일의 습관과 일상의 대화에서 하늘 나라, 초월적인 도덕성, 죄, 최후의 심판 그리고 궁극적 구원의 가능성 등의 이야기가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당시 문화의 일상을 구성하는 암묵적인 배경이 되었고,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형성하는 기본이 되었다. 최소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 더 정확하게 말하면 성경 속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대단히 가능성 높은 선택지였을 뿐 아니라, 기독교적 믿음은 사회 전반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졌다. 많은 신자들에게 기독교는 의심 보다는 신빙성이 훨씬 더 높은 종교였다. 물론 당시라고 비판이 없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런 비판은 결코 비중 있게 간주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의 사고에 깊이 파고든 문화적 서사는 크게 바뀌었다. 그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이 ‘상식’이라고 보는 것도 달라졌다. 보이지 않는 천국, 최후의 심판, 나를 부인하고 옛 자아를 죽이라고 명령하는 선한 하나님, 그리고 배타적인 구원의 길 등은 이제 설득력 없는 이야기로 들린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복음은 틀린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과거가 남긴 억압적인 유산(oppressive leftover) 정도로만 취급된다. 물론 우리 기독교인은 여전히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상대해야 하는 세상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이런 사회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교회가 만난 첫 도전, 그러니까 교회를 집단적인 두려움과 혼란으로 이끄는 비 안정적인 첫 번째 문화적 변화가 아니다. 강력하게 기독교화 된 제국, 로마가 주는 궁극적인 희망에 젖어있던 많은 교회 지도자들과 회중들에게 임박한 로마의 멸망은 당황 그 자체였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어거스틴(Augustine)은 누구나 당연하게 느끼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전혀 다르게 반응했다. ‘하나님의 도시’(City of God)에서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 조차도 하나님이 준비한 큰 이야기 속의 일부로 바라보았다. 그런 시각은 그에게 대규모 사회 변화와 기독교에 대한 비난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과 평안함을 제공했다. 그가 취한 접근 방식은 눈앞에 닥친 진짜 압력을 단지 이겨내야 하는 도전으로만 여긴 게 아니라, 하나의 기회로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그를 둘러싼 이교도의 도전 속에서 그는 도리어 오로지 그리스도의 이야기만이 풀어낼 수 있는 기회로 보았고, 그 기회를 잡고 싶은 열망에 강하게 사로잡혔다. 심각한 문화적 위기를 맞아 어거스틴이 보여준 굳건한 신학적 태도는 서구 세계가 지금 맞이하고 시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동시에, 내가 특히 좋아하는 워커 퍼시(Walker Percy)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 시대가 기독교 왕국(Christendom) 때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오래 전 기독교 왕국 때에는 모두가 다 기독교인이었고, 그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시대가 제공하는 이론과 소비의 생존자는 누구나 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자(St. Anthony)처럼 사막을 헤매는 나그네(wayfarer)이다. 그건 다시 말해, 어디로 가야할 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복음의 문화적 흔적우리는 이제 당면한 도전 뿐 아니라 탈 기독교를 향해 가는 서구 사회 속에서 기회까지 살펴보아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기독교가 과거의 오래된 유물로 강등된 사회에서 조차도, 아니 그런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그들이 좋아하는 이야기가 사실상 알게 모르게 접하는 복음의 흔적, 기독교 속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다. 예를 하나만 들자면, 해리 포터 시리즈의 성공은 복음의 여파가 어떻게 오늘날 가장 사랑받은 문화 속에서 여전히 숨쉬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물론 이 이야기를 세계적인 현상으로까지 만든 데에는 여러가지 요소가 작용했지만, 콘스탄스 그래디(Constance Grady)와 아자 로마노(Aja Romano)는 이 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끈 가장 큰 요소에 대해서 확고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사회 현상으로까지 성공한 것은 그 시리즈가 수백만 명이 사랑하는 스토리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수백만의 사람들이 언젠가는 탈출하기를 꿈꿔 왔던 세계, 거대한 마법 세계를 소개했다는 것이다.”그러나 이 이야기를 그토록 매혹적으로 만든 것이 단지 마법의 주문 또는 퀴디치(quidditch) 경기는 아니었다. 저자인 J. K. 롤링(J. K. Rowling)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볼 때, 종교적 유사점은 이야기 속에서 명백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녀는 해리의 부모, 덤블도어의 어머니와 누이의 비석에 있던 마지막 책 속에서 다음 성경구절 두 개를 인용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 15:26),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1). “따라서 해리가 고드릭 할로우(Godric’s Hollow)의 비석에서 발견한 이 두 개의 구절은 해리 포터 전체 시리즈를 거의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해리 포터라는 서사는 그렇기에 두 개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는 이야기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 생명을 버린 어머니의 사랑과 그가 사랑하는 모든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 기꺼이 죽음을 향해서 가는 그 아들의 이야기이다. 물론 이 이야기 속 구세주는 해리 포터이다. 극적인 순간을 맞을 때면 앞을 가로막는 악 때문에 언제라도 죽음에 이를 수 있었지만, 결국은 살아 돌아와서 악을 물리친 젊은 마법사 해리 포터이다. 일단 복음이 문화라는 피투성이 속으로 스며 들어오게 되면, 아무리 회의론자와 비관론자라고 해도 순간 순간 복음을 만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독교 윤리가 가진 억압적인 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더불어 우리의 이성과 상식을 사용해서도 얼마든지 바른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가 보여주고 있는 현실은 이 사회가 여전히 도덕적 감수성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주는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19세기 말을 살았던 철학자, 기독교에 특히나 비판적이었던 프레드릭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경우에도 같은 시대 무신론자를 주목했는데, 그가 보기에 그런 “세속적인” 사람들조차도 완전히 기독교가 주는 이야기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오늘날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기독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서구 기독교 마인드오랫동안 세속 진보주의자로 활동한 역사가 톰 홀란드(Tom Holland)는 자신이 한 때 갖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십 대 시절에 이미 사라졌지만, 인간이 가진 삶에 관한 가장 근본적인 본능(fundamental instincts)은 기독교 이야기의 유산으로 이해할 때에만 말이 된다는 고백을 최근에 한 적이 있다. 그가 쓴 책, ‘도미니언’(Dominion)은 우리 문화가 가진 도덕적 이상이 어떻게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고, 그의 아들이 모든 인류를 위해 죽었으며 또 거기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 노예나 자유인 그리고 남자와 여자도 없다는 성경의 주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지를 서구 역사 전체를 살펴보면서 개관한, 하나의 거대한 역사 여행이다. 인권, 취약한 인간을 향한 공통된 관심, 인간 평등, 성적 절제, 겸손에 대한 존경, 그리고 도덕적 진보 자체에 대한 보편적 관심사는 기독교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발전시킨, 우리 사회가 공통으로 지향하는 몇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홀란드는 이런 아이러니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예배당 장의자가 점점 더 비어가는 게 지금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과거 기독교에 단단히 매여있다.”(콜린 한센[Collin Hansen]과 홀란드의 인터뷰가 실린 ‘가스펠바운드’[Gospelbound]를 들어보라)간단하게 말해서, 믿지 않는 당신의 친구는 당신 생각보다 훨씬 더 ‘기독교적’일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은 이미 특정한 기독교적 이상과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고 있는 수준만으로 그들 속에 믿음이 있다는 식의 섣부른 가정을 하는 건 경솔하다. 그들에게는 보다 더 나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홀란드 자신도 서구 문명의 미래가 우리 모두가 다 공유하고 있는 역사를 얼마나 더 잘 이해하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현대인이 가진 도덕적 열망은 이성으로부터 기인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과학으로 인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적 발전의 독특한 과정이다. 그 과정은 또한 유럽과 미국에서 점점 더 많아진 숫자의 의견에 따라 신을 죽은 존재로 만든 과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그게 시체의 그림자가 주는 가치보다 어떻게 더 나을 수 있는 걸까? 단순한 신화가 아니라면, 지금 우리가 가진 도덕성의 기초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건 올바른 질문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홀란드는 그렇다고 모든 신화가 다 비진리(untrue)는 아니라고 암시한다. 그러나 그가 생각하는 “신화가 사실이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독교적 상상에 사로잡혀우리가 현대를 살아가는 계몽된 사람이지만, 이야기는 여전히 만국 공통어이다. 그냥 그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문화는 우리 속에 내재한 다른 세상을 향한 갈망을 자극하는 상상의 이야기에 계속 사로잡히게 된다. 자유주의 휴머니스트가 보여주는 전 인류를 향한 도덕적 사랑 이야기에서부터 롤링이 들려주는 희생적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듣고 싶고 또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에 비춰볼 때 우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비록 탈 기독교 문화(post-Christian cultures)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결코 복음이 가진 매력의 메아리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말이다.왜 현 시대에서도 죄책감, 도덕적 용기, 희생, 구원, 그리고 부활이라는 주제가 가장 세속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까지도 뛰게 만드는 것일까? C. S. 루이스(C. S. Lewis)와 J. R. R. 톨킨(J. R. R. Tolkien)의 이야기는 이 질문에 대답을 준다. 톨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위 단계의 창조자”(sub-creators)이다. 그렇기에 무의식 중에 우리는 창조자를 계속 흉내내고 있으며, 창조자가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그 궁극적인 이야기의 메아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인류의 잠재력은 이야기를 포기함으로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가진 유일한 진실된 이야기, 이 세상 모든 이야기를 밝혀주는 그 진짜 이야기를 받아들임으로 가능하다. 급변하는 문화의 조류 속에서도, 또 방향성을 상실한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행히도 우리의 마음에는 뭔가 더 나은 이야기를 갈망하고 있다. 바로 복음이라는 진짜 이야기 말이다. 오늘날 전시되고 있는 수많은 세속적인 이야기는 그 구성이 허술하여 생명력이 길 수가 없다. 한번은 무신론자 철학자인 존 그레이(John Gray)가 한 세속적인 휴머니스트에 관해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휴머니스트는 인권과 같은 높은 도덕적 이상의 토대를 찾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말하기를 그 휴머니스트 신화는 다름 아니라 종교에서 빌려온 것이었고, 결코 오래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결코 길게 지속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시대를 앞서가는 무신론자 지성인의 입에서 나오는 뜻밖의 고백, 현재의 세속적인 신화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을 인정하는 말을 들으면서 나는 약간이나마 희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야기를 전할 준비를 하라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 눈앞에 힘든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고 두려움에 떠는 건 결코 기독교인이 취할 자세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진짜 이야기, 가장 위대한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를 알고 있다. 그 이야기는 1500년 전 어거스틴 시대를 휩쓴 이교도의 이야기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또한 오늘날 경쟁하는 세속적인 신화들보다도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믿음, 희망, 그리고 사랑으로 무장한 우리의 소명은 복음으로 초대하는 법, 복음을 모르는 이에게 “와서, 진짜 이야기가 주는 실체를 맛 보고 또 눈으로 보라”라고 초대하는 변증법을 배우는 것이다. 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보다 더 실천적인 방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인사이드 아웃”이라는 이름 붙인 구조가 담긴 책, ‘더 나은 이야기를 말하기(Telling a Better Story)’를 썼다. 퍼시가 알려주는 것처럼, 오늘날 세속적인 이야기 속에서 발견하는 허술한 구성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속주의의 대본이 제시하는 얕은 수준을 뛰어넘는 뭔가를 찾도록 만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야 말로 오늘날 “표지판이 필요한 사람”인 것이다. 그렇기에 기독교 왕국이 무너진 것이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근대가 주는 뒤늦은 기회는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 즉 복음을 잔해 밑에서 파내어 이 표지판이 지난 시간 내내 가리켜온 그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를 다시 한번 세상에 보여주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y Unbelievers Are Probably More ‘Christian’ Than They Realize번역: 무제
무신론자
이야기
진리
문화예술
해리포터
복음전도
기독교적상상력
기독교왕국
JK롤링
가스펠바운드
지혜롭게 뉴스 대하기
by Bryan Weynand
2020-09-05
COVID-19 전염병과 인종 차별에 대한 항의, 그리고 이 둘을 둘러싼 미디어 회오리 바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새로운 긴장을 고조시켰다. 올바르고 현명하게 행동하기 위해서는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지만, 과도하게 뉴스를 접하는 것은 도리어 불안과 분열, 다툼 그리고 좌절을 유발하기도 한다. 무한한 정보 선택이 가능해진 미디어 환경에서, 누구나 다 어느 정도의 편견이나 당파성(agenda-driven bent)을 가지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그리스도인이라면 “지식 다이어트”라는 면에서 보다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타락한 세상 속 저널리즘그리스도인이라면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지혜를 키우는 능력에 있어서 오늘날 과도하게 넘치는 뉴스 매체가 얼마나 큰 악재로 작용하는지를 인식해야 한다. 닐 포스트만(Neil Postman)은 1985년 출판한 ‘죽도록 즐기기’(Amusing Ourselves to Death)에서 매체의 변화가 대중적 대화의 내용과 본질에까지 해를 끼쳐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문화가 소비하는 뉴스 형태가 주로 활자 매체에서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한 시각 매체로 바뀌면서, 우리가 나누는 대화 또한 보다 더 피상적이고 변덕스러워졌다. 그 결과 미묘한 언어의 뉘앙스를 고려하며 절제하기 보다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뉴스를 더 선호하게 되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예 인터넷으로 가속화된 변화는 이제 근본적인 차원에서 우리가 나누던 담론을 훼손시켰다. 오늘날 미디어 환경이 가짜 뉴스, 조작되는 클릭 수, 당파적 구호 등으로 가득한 지뢰밭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저널리즘이 남아있다. 그런 저널리즘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의도성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그런 수고가 조금도 아깝지 않은 것은 그것이야말로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거친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를 보호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적 미덕을 통해 미디어 소스를 평가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혜로운 미디어 소비를 위해 고려할 점들1. 진실하나님은 거짓을 멸시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똑같이 거짓을 혐오하기를 원하신다(잠 13:5). 소셜 미디어에 허위 사실이 적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허위 사실이 소셜 미디어 뿐 아니라 기존 미디어에서도 등장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오늘날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뉴스 주기 환경 속에서는 종종 가장 전문적이고 노련한 기자조차도 진실하고 정확한 기사를 쓰는 게 쉽지 않을 정도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런 급박한 환경 속에서도 진실을 구분하기를 원하신다. 또한, 무비판적으로 가짜 뉴스를 받아들이는 것은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잠 17:4). 우리는 진실된 정보와 정직한 생각을 전달하는 데에 최우선 가치를 두는 매체를 찾아야 한다. 정보의 출처와 정작 자기네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를 훼손하는 경우에조차도 진실만을 전달하는 매체 말이다. 2. 분별 성경은 종종 성숙한 기독교인의 열매 중 하나로 절제를 꼽는다(벧전 1:13; 딤전 3:2; 딛 2:2). 이 구절들은 우리가 무슨 말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무슨 말을 하지 않는가에도 그리스도인의 지혜가 달려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잠언 17장 27절은 이렇게 말한다.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냉철한 자는 명철하니라.” 우리는 오로지 진실만을 가려서 말하는 미디어, 자기네가 말하고 싶은 결론이 아니라 확실한 근거에 기초한 결론을 보도하는 매체를 찾아야 한다. 자기네가 보도하고 싶은 결론에 불을 지펴주는 팩트만을 선별하는 매체가 아니라, 팩트가 인도하는 대로 보도하는 매체를 찾아야 한다.3. 겸손양극화가 빚은 가장 심각한 영향 중 하나는 내가 지지하는 진영의 주장은 무조건 옳고 반대편의 주장은 무조건 틀리다는, 맹목적인 수준에 가까운 확신이다. 이런 태도를 견지하는 매체를 특히 주의해야 한다. 겸손하게 살고 또 생각하라고 부름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엡 4:2), 우리는 아무리 힘들더라도 세상의 패러다임을 옆으로 밀어놓을 수 있어야 하고 또 세상의 유행을 기꺼이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영웅과 악당”이라는 서사가 아니라 표면 아래 숨은 이면(nuance)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 상황이 가진 지속적인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포용하는 매체를 찾아야한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보기에 지혜로운” 태도를 취하지 않게 되며 또한 맹목적으로 한 쪽 편만 드는 위험도 피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될 때 공개 토론에 임하는 모두가 다 예외없이 내면 깊은 곳까지 죄로 물든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롬 12:15-16). 4. 평안 하나님은 다투기를 미워하고 분노를 물리치며(시 2:4), 평화를 이루도록 우리를 부르신다(마 5:9). ‘나라들은 어떻게 분노하는가(How Nations Rage)’에서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은 이렇게 말했다. “공공 문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세상 문제를 지배하려는 간절한 욕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발견하는 신기하고 매력있는 확신을 반영해야 한다.” 다툼은 예수님에 대한 확신을 훼손함으로써 영혼을 감염시키고, 불의를 통해 교회를 훼손시킨다. 물론 평안이라는 말은 지금 흔히 접하는 미디어, 특히 시청자를 즐겁게 하고 시청률을 유지하기 위한 주요 메커니즘으로 분노를 불러 일으킨 특정 케이블 뉴스 쇼와는 크게 대조된다. 이런 쇼를 시청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질적인 단계1. 활자 뉴스와 사설을 우선시하라포스트만이 주장한 대로, 특정 맥락 안에서 논리적으로 잘 정리된 사실과 사상을 적극적으로 사고하면서 이해하려면 활자화된 글이 가장 적합하다. 이와 대조되는 게 바로 수동적인 사고를 하도록 만드는 디지털 이미지와 비디오이다. 이런 미디어를 통한 메시지는 내용이 제대로 정리되지도 않을 뿐더러 맥락과 상관없는 경우도 적지 않다. 2. 헤드라인만 읽고 끝나지 말라대부분의 현대 미디어 소스는 클릭으로 수익을 창출한다. 페이지를 보는 사람 숫자에 수익이 달려있다. 이런 수익 구조를 가진 미디어일수록 독자가 페이지의 첫 단락만 보고 바로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는 게 회사에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뉴스를 읽어서는 안 된다. 현명한 미디어 소비는 단지 헤드라인만을 읽는 게 아니라 내용 안에서 더 많은 맥락과 뉘앙스를 읽어내는 것이다. 특히 오도하기 쉽거나 도발성이 높은 주제라면 더더욱 그래야 한다. 그렇기에 단 한 번의 클릭이 아니라 자세히 읽는 독자가 많아져 수익이 오르는 구조를 가진 매체를 찾도록 하라. 3. 당파를 나누는 매체를 피하라특정 이슈가 가진 여러 다양한 관점을 다 반영하는 매체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자기에게 유리한 렌즈를 통해서만 이슈를 해석하는 매체를 피해야 한다.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매체를 테스트해보라. 이 소스는 필요하다면 자신이 선호하는 당과 개인 그리고 주장까지도 비판할 용의가 있는가? 우리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는가? 또는 그와 반대로, 오로지 자기 편에 도움이 되고 적에게 불리한 가정(assumptions)만을 반복해서 추론하는가? 중요한 차이점은 다음과 같다. 많은 출처가 이미 입증된 철학적 또는 신학적 (당파가 아닌) 경향(bent)에 따라 논평을 제시하고, 그렇게 하는 게 해당 매체를 판단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TGC의 경우는 기독교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이 그 렌즈를 통해 현재 사건과 여러 다른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4. 너무 많이 읽지 말라당신이 습득하는 지식 식단에서 미디어를 어느 정도 소비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고, 미디어도 다이어트를 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라. 수동적 태도로 인터넷을 헤매는 대신 정기적으로 확인할 만한 신뢰할 수 있는 몇 개의 소스를 신중하게 선택하라. 우리는 지금 24시간 끊임없이 뉴스가 쏟아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매일 발간되는 뉴스보다는 그보다 덜 자주 발간되는, 최소한 하나의 간행물을 선택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사건이 나올 때마다 조건 반사하는 식으로 성급하게 반응하는 뉴스 속보를 지양하고 대신 신중한 분석을 담은 기사를 찾아서 읽도록 하라. 기술은 우리가 굳이 알 필요도 없고 또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는 정보에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만들었다고 포스트만은 주장했다. 21세기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더 넓은 세상에서 자행되는 불의에 눈을 감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또한 동시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단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 때문에 굳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나쁜 소식이 주는 부담까지 짊어질 필요는 없다. 구속받은 백성으로서 우리는 가진 영향력 내에서 영향을 발휘하면서 살도록 창조되었다.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은 열광적인 뉴스 세계에서 개인적인 정신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 뿐만이 아니라 기독교 선교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제자 및 제자 만드는 사람으로서 선교를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는 매체를 찾아야한다. 뉴스 미디어를 제대로 분별하는 것(또는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하면, 미디어에 대한 올바른 분별력은 오늘날 세계에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증인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원제: How to More Wisely Consume New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세계관
문화
소셜미디어
가짜뉴스
미디어소비
당파성
닐포스트만
저널리즘
코로나19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by 이춘성
2020-08-24
현대의 정의론: 공정과 정의많은 사람은 정의(justices)를 공정(fairness)과 같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해 정의는 반드시 공정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정치철학자인 존 롤스(John Rawls)는 이러한 주장을 이론으로 발전시켜 정치, 경제에 적용하였다. 모든 사람은 동일 조건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것이 공평이며 정의라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마다 타고난 배경과 능력이 다르다. 그런데 자신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닌, 태어날 때부터 주어지거나 결정된 조건이 자신의 능력으로 인정받는 것은 경쟁에서 불공정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롤스는 단순히 기회만 동일하게 주는 것만으로는 공정과 정의를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존 롤스에게 불공정이란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의미한다.롤스는 정의롭지 않은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모든 사람이 무지의 장막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부모의 도움과 같은 선천적 조건이 그 사람의 능력을 판단하는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채용시험에서 모든 조건을 공개하고 면접을 보는 것보다 성별, 출신지, 학력과 학교, 인종, 나이를 모르는 상태에서 블라인드 면접을 하는 것이 공정하고 정의롭다는 것이다. 롤스는 공정이 정의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공정이란 조건을 같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출발의 조건, 아니면 과정의 조건 둘 중에 어느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먼저 현실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출발선에 설 수 없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출발을 아무리 같게 만든다고 하여도 같을 수 없다. 마사 누스바움(Martha Nussbaum)은 롤스의 정의는 장애인을 제외한 정상인을 위한 정의라고 비판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과정을 요구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하였을 때, 누군가는 더 노력해서 남들보다 앞설 것이다. 그런데 과정의 공정성을 들어, 남보다 노력해서 일찍 도착한 사람에게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이것을 공정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학자는 공정성은 각각의 사람마다 다르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흑인에게는 흑인의 공정성, 여자에게는 여자의 공정성, 남자에게는 남자의 공정성, 장애인에게는 장애인의 공정성이 모두 다르다는 것이다. 정의론의 다양성세상에는 정의에 대한 이론이 매우 다양해서 그 이론들을 모두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기독교 윤리학자는 성경의 정의 개념조차도 열 개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의의 개념이 다양하다는 것은 그만큼 사람들 각자가 원하는 정의가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이 자신은 정의롭지 않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는 이유는 세상이 정의롭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자신이 원하는 정의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각자의 정의에 대한 생각들이 다르기 때문에 타협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인정하고 동의하며, 받아들이는 정의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예수님의 시대의 유대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하나님과 성경이 가르치는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자 했다. 하지만, 이들도 서로 동의할 수 있는 정의의 개념을 정립하지 못하였다. 이들 또한 자신과 자신이 사는 시대에 따른 가변적이고, 어쩌면 이기적인 정의의 개념을 만들어 자기들끼리 서로를 의인이라고 부르는, 위선적인 삶을 정의로운 것으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20절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이 아무리 정의에 대한 다양한 이론과 개념을 만들어도, 결코 정의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정의로서 ‘더 나은 의’라고 부르신 그 정의란 무엇일까?더 나은 정의팔복(마5:3-12)에는 의, 정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단어인 디카이오수네(δῐκαιοσῠ́νη)가 두 번 나온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6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10절). 팔복의 구조를 보면, 정의에 대한 복인 네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은 앞의 1, 2, 3번째의 복의 결론과 5, 6, 7번째 복의 결론이다. 이것은 문학적 구조상 ‘정의’라는 덕목이 팔복이라는 집을 떠받치는 두 기둥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의미다.1) 죄를 응시하는 정의팔복을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 팔복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자다. 둘째로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에 고통하고 아파하는 자다. 셋째로 “온유한 자”는 자신 안에 분노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다. 이 세 가지 복은 모두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깨닫는 것과 관계되어있다. 죄를 바라보는 자는 자신 안에 정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정의를 갈구하게 된다. 이것이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의 상태다. 그러므로 정의는 죄를 바라보고 아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와 예수님의 정의의 차이점이다. 세상은 죄를 바라보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모두가 동의하는 규칙과 윤리를 찾는다. 게임의 법칙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가르치신 정의는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죄를 바라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정의의 규칙을 만든들 소용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우리 모두가 이기적인 목적에 따라 정의를 이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2) 세상을 불편하게 하는 정의다음에 이어지는 세 가지 복은, 정의로 충만해진 신자를 향한 복이다. 다섯 번째 복은 정의에 충만하면 타인의 어려움과 궁핍을 보고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여섯 번째 복은 정의로 가득하면 마음이 청결하여, 하나님을 대면한다. 일곱 번째 복으로 정의는 화평(평화)을 추구하게 한다. 그가 가는 곳마다 평화가 일어나고, 불화한 사람들을 화해시킨다. 그런데 세상 속에 이기적이지 않은 정의를 추구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세상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상상해보라. 세상은 그를 어떻게든 몰아내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출현은 자기들이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탁월한 정의 앞에서 이기적이고 상대적인 정의는 빛바랜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래서 예수님은 여덟 번째 복으로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가르치신 것이다.예수의 정의팔복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는 규칙이나 윤리의 항목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고 응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예수님의 정의의 첫 단계는 우리 안에 정의가 하나도 없다는 것, 정의를 규정하고 만들 능력이 전혀 없는 전적인 무능을 깨닫는 것이다. 그 두 번째 단계는 정의에 굶주리고 배고픈 우리에게 정의를 먹여줄 어떤 존재를 요청하고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예수님이 정의를 공급해주고 채워주신 후에, 이기심이 이타심으로 바뀌고, 평화를 사랑하며, 이런 가치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의 본질은 아니다.예수님의 정의의 본질은 네 번째 복에 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먹고 마셔서 배부를 것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마가의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같이 식사하신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6-28)예수님은 자신의 살과 피, 바로 예수님 자체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이것과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를 비교해보자.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체의 구조상 수미쌍관(인클루지오)을 이루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윤리인 팔복, 이를 관통하는 주제인 ‘정의’가 마태복음의 후반부에서 가시적이며 육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예수님 자체다. 예수님이 정의다. 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도덕철학이나 윤리학과 같은 이론이 아니라 인격 그 자체다.그리스도인의 정의그리스도인에게 정의란 예수님 자체다. 윤리적 항목이나 원리가 아니다. 윤리나 도덕은 정의 자체이신 예수님을 먹고 마신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며 열매다. 이것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이유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않고, 그분을 통째로 먹고 마시는 놀라운 일, 그 신비를 경험하지 않고 그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윤리적인 삶을 산다하여도 그 안에는 정의가 없다. 반대로 정의의 열매가 없는 자는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성경을 잘 알아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일이 없는 자, 곧 정의가 없는 자다.우리는 지금 도처에서 한때 천사처럼 보였던 사람들의 추락을 보고 있다. 가장 낮은 자들을 위해 평생 헌신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늘에서부터 추락하는 것을 목격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 살고 있다. 이들은 종교인, 정치인, 교육자 등 다양하다. 멀리서 보면 정의롭던 사람이 가까이 가면 악취가 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하지만 그들보다 우리가 더 낫다고 할 수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를 복 받은 자라고 예수님이 선언하신 이유는 우리 안에 정의가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복 받은 자라는 선언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여전히 예수님의 몸과 피를 갈구하는 존재라는 의미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언제나 자신의 살과 피를 나누어 주시고 먹고 마시게 하신다. 또한 예수님은 실패하고 낙망하여 다시는 정의로운 삶을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우리가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의지하여 의인의 삶을 살도록 하신다. 우리의 의, 정의는 우리 것이 아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정의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구호도 윤리 운동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에서 시작하여 신비로 끝난다. 이러한 신비가 없는 정의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이상일 뿐이며 여기에 닿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 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는,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신비가 빠진 윤리 운동이었다. 이런 운동은 필연적으로 위선과 외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시간, 교회는 수많은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한 공명선거 운동을 비롯한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윤리 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인인 청년들은 기독교 세계관을 공부하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원대한 꿈을 품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회가 처한 상황은 교회가 윤리적이지도 않고, 세상을 바꿀 만한 능력도 없다는 비판이다. 이 시점에 우리 스스로 자문해 봐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부르짖던 정의의 정체가 무엇이었냐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외치던 정의가 예수님의 정의였는지, 아니면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윤리 운동들 중 하나로 결국 위선으로 막을 내린 그런 유의 세속의 정의였는지 자문해 봐야 한다. 성찬의 신비가 사라진 정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정의보다 더 나을 수 없다. 그런 정의로는 하나님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문화
세계관
공정
정의
정의론
팔복
인격
성찬
윤리운동
기독교세계관
처음
이전
6
페이지
7
페이지
8
페이지
열린
9
페이지
10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