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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뉴스 가짜 복음의 시대 그리스도인들에게
by 김형익
2020-10-01
가짜 기도제목?언젠가 잘 아는 분으로부터 카톡 메시지를 받았다. 인도의 한 지역에서 무슬림들에 의해 교회당들이 불타고 교인들이 죽임을 당하고 있으니 긴급기도를 부탁하는 메시지였다. 매우 구체적으로 사건의 날짜들이 적혀 있었고, 이 기도제목을 널리 알려달라는 전언까지 있었다. 고약한 버릇이랄까, 그 뉴스를 검색해보았고 그 지역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똑같은 기도제목이 수년 전부터 유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기도제목에 언급된 지역은 무슬림 지역이 아닌 힌두교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 기도제목을 보낸 분에게 이것을 어디서 알게 되었는지 물어보았고, 그분은 이것이 가짜 기도제목이었으며 자신이 경솔하게 행동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신도 이와 비슷한 경험들을 해보았으리라. 기도제목 만이 아니라, SNS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가짜 뉴스들이 퍼날라지고 있는가?비록 가짜라도, 그것이 기도하자는 것이었고, 그래서 우리가 힘써 기도하였다면 그리고 선교지에 대한 관심을 더 가질 수 있게 되었다면 그로써 유익한 것이 아닌가 라고 반문하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참되신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민 23:19).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물건을 팔아넘기려 하는 속이는 장사꾼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참된 지식에 근거하여 참된 동기를 유발시키시고 참된 결과를 얻어 내신다. 가짜 뉴스의 시대가짜 기도제목은 그나마 양반(?)이다. 우리가 퍼나르는 뉴스들 중에는 기도제목이나 건강에 관한 뉴스들도 있을 수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 뉴스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종종 노회의 단체 카톡방이나 혹 개인 메시지로 가짜 정치 뉴스를 공유하는 목사들도 있다. 한 번만 검색해보면, 가짜 뉴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만한 내용들도 적지 않다. 이런 가짜 뉴스의 폐해는 개인의 의식과 생각과 행동에 미치는 심각한 수준을 넘어 사회 전체를 거의 붕괴시킬 정도다. 가짜 뉴스들은 그 제작자의 의도를 따라 사람의 의식을 조종하고 행동을 부추긴다. 그리고 사회(심지어 교회조차도)를 혐오와 멸시로 양분시키고 파괴한다. 단지 비중 있는 정치인의 말이라고 해서, 또는 오랜 역사를 가진 언론이 쓴 기사라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없는 사회에서, 저마다 자칭 전문가가 되어 뉴스를 해설하고 사실과 자기 의견을 구분하지 못한 채 뭔가를 퍼나르는 사람들은 부지기수(不知其數)다.퍼나름의 문화가짜 뉴스의 전성시대를 특징짓는 문화가 퍼나름의 문화다. 퍼나른다는 말은 그 뜻 그대로라면 어떤 물질을 퍼서 날라야 하는 일이기에 많은 수고를 전제하는 일이다. 그럴만한 분명한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하지 않을 일이고,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판단이 섰을 때 하는 일이다. 그러나 퍼나르는 대상이 유형의 물질이 아닌 말과 글이라면 그건 다른 문제다. 발을 가지지 않은 말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전파될 수 있는지는 동서고금의 만인이 인정하는 바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 말이 전파되는 범위와 속도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떤 소식이 하루 만에 전세계로 퍼져나가는 시대다. 지난 6월, 그룹 블랙핑크의 신곡 '하우 유 라이크 댓'(How You Like That) 뮤직비디오가 유튜브 뮤직비디오 사상 최단 시간에 1억 뷰를 돌파했다는 뉴스가 나왔다(이건 진짜 뉴스일 것이다!). 6월 26일 오후 6시에 공개된지 32시간 만에 1억 뷰를 돌파한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퍼나름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던 대기록이다.문화적 컨텐츠도 따져볼 것들이 있겠지만, 그 내용이 의도된 가짜 뉴스라면 그것이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거짓이 만드는 결과는 혼란과 혐오와 다툼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의도를 가지고 거짓말을 지어내거나 퍼나르는 일을 명백히 금하셨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출 20:16).” 하지만,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사람에 대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것을 퍼나르는 일이 허용될 수 있다는 말씀은 아니다. 퍼나르기 전에 고려해야 할 실제적 지침들 SNS 덕분에 퍼나르는 일은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시대가 되었다. 단 몇 초 만에, 수많은 지역, 수많은 사람에게 퍼나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인 당신이 무언가를 퍼나르기 전에 혹은 당신의 생각을 공시(公示)하기 전에 고려해야만 할 사항 몇 가지를 성경의 원리를 따라 제안하고 싶다. 1. 언제나 사실을 먼저 확인하라.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면 퍼나르지 마라. 특히 익명으로 쓰여졌거나 인용된 글은 퍼나르지 않는 것이 좋다. 그 내용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는 글이다. 2. 사실관계를 확인했다면, 당신이 그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했는지를 확인하라.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하지 못한 내용이라면 퍼나르지 마라. 많은 학자들, 많은 이론이 언급되었다고 해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3. 사실을 확인했고 내용을 충분히 파악하고 이해했다면, 그것이 미칠 영향을 생각하라. 사실이라고 해서 언제나 좋은 결과만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특히 사람에 관한 판단의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4. 그러므로 사람에 관한 사실일 경우, 한 번 더 조심하라. 그에 대한 거짓 증거가 되지 않을지 한 번 더 생각하라. 5. (퍼나르기가 아니라) 자신의 어떤 판단을 공시하려면, 충분한 자료들을 가지고 내린 판단인지 다시 자문하라. 6. 그 판단을 글이나 말로 공시할 때, 당신의 글도 퍼날라질 수 있으며, 당신이 거짓말쟁이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가짜 복음의 문제우리 사회 속의 가짜 뉴스의 문제만큼이나 교회 안에서의 가짜 복음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것이 가짜 뉴스이든 가짜 복음이든 뿌리는 동일하다. 모든 거짓, 모든 가짜의 원천은 주님께서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신 마귀다(요 8:44).바울 사도의 복음 사역으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를 흔들어댔고 무너뜨리려고 한 것은 가짜 복음을 가지고 들어온 거짓 교사들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펜을 들었고 편지의 처음부터 무서운 저주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갈 1:6-8). 사도들의 시대에 거짓 교사들이 전한 가짜 복음의 문제는 비단 갈라디아 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게도 이렇게 말해야만 했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속이는 일꾼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탄의 일꾼들도 자기를 의의 일꾼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대단한 일이 아니니라 그들의 마지막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가짜 복음의 문제는 사도 시대 이전, 에덴동산의 뱀에게서,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쉬지 않고 나타났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류 교단에 속한 교회들에서 선포되는 가짜 복음의 문제 역시 심각한 수준이다. 교회라고 다 믿을 수 없고 목사라고 다 믿을 수 없으니, 성도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와 목사를 분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고, 열매로써 그들을 분별하라고 말씀하셨고(마 7:15-16),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요일 4:1).”고 말씀하였다. 분별이 필요한 말씀들유튜브나 팟캐스트 또는 웹상에는 매주일 수많은 설교가 올라온다. 물론 거기에는 가짜 복음이 섞여 있고 그 설교들을 퍼나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당신은 어떻게 진짜와 가짜를 분별하는가? 설교의 영역에서도, 성경에 근거한 팩트 체크가 필요하다. 베뢰아 사람들이 했던 것이 말하자면 성경에 근거한 팩트 체크였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가짜가 넘치는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존재 바울 사도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고 에베소 사람들에게 권면하였다(엡 4:15). 그리스도인은 거짓을 말하여 혐오를 조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넘쳐나는 가짜로 불신이 팽배한 이 사회에서, 나는 믿을만하고 신중하고 신뢰할만한 사람들의 존재를 보고 싶다.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이 사회 속에서 그런 존재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두워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는 세상에서 빛이 되고, 참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참이라고 하는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이 되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참 뜻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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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양심을 따라 하겠다’는 말에 관하여
by 김형익
2020-08-28
신학은 진공 속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신학은 지난 2천여 년의 역사 동안 교회가 직면한 상황들 속에서 성경을 붙들고 씨름한 결과다. 이 말은 성경의 진리가 시대에 따라 변한다는 말이 아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가 직면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지금 전세계가 겪고 있는 코로나19 팬데믹도 예외가 아니다. 불현듯 찾아온 이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정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었고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고마운 면도 없지 않다. 책상 앞에서는 결코 생각할 이유가 없던 문제들에 대해서 말이다. 이런 시대를 제대로 살아가려면,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은 정말 생각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교회가 코로나19 상황에 강제적으로 떠밀려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슈들은 하나 둘이 아니다. 하지만 좀 더 본질적인 문제 하나를 생각하고 싶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가파른 속도로 늘어나고 있고, 사실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 감염원 중 하나로 교회가 매일의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는 상황에서 주일예배를 예배당에 모여서 드려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의 방역 지침을 준수하여 영상예배의 형식으로 드릴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쉬운 결정이겠지만, 모두에게 그런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이런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성경이 기준이라고? 물론 당연히 성경이 기준이다. 그런데 다들 성경이 기준이라고 말하지만, 내리는 결정들은 다르고 심지어 논쟁까지 벌이는 상황이 아닌가? 며칠 전, TGC코리아 작가로 활동하는 고상섭 목사가 페이스북에 포스팅한 글의 첫 두 문장이 눈에 확 들어왔다.“옥한흠 목사님이 에베소서를 순장반에서 강의하실 때, 이런 말을 하셨다. ‘여러분, 자기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과 상식이 부딪치면, 신앙적으로 생각되는 일을 따르지 말고 상식을 따르세요’”십분 공감하는 말이다. 문제는 성경에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과 신앙 양심을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신앙 양심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명시적으로 드러내 주신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가령, 살인, 간음, 도둑질, 이웃에 대한 거짓 증거, 탐욕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들이다. 그러나 이렇게 명시적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나 그 적용에 있어서 특수한 상황이 주어질 때 우리는 신앙 양심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흔히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본래 개신교의 출발에는 보름스(Worms) 제국 의회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유럽의 통치자들 앞에서 마르틴 루터가 했던 그 용감하고 멋진 말이 있지 않은가!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니기 때문입니다.(My conscience is captive to the Word of God, I cannot and will not recant anything, for to go against conscience is neither right nor safe.)”하지만, 우리가 신앙 양심에 따라 결정하고 행동하면 된다고 말할 때, 타락한 인간의 양심이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양심은 마르틴 루터가 말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하고, 그 말씀에 의해 형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새뮤얼 아네슬리의 말이다(Samuel Annesley, “How May We Be Universally and Exactly Conscientious?” Puritan Sermons, 1:13,14).“양심은 때때로 거짓 규칙을 참된 규칙으로, 오류를 하나님 뜻으로 파악함으로써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무지를 통해 기만을 당한다. 때로는 올바른 규칙을 그릇된 행동에 잘못 적용함으로써 현실에 대한 무지를 통해서도 기만을 당한다. 나쁜 정보를 가진 양심은 사람의 전통과 거짓 교리를 신적 권세를 가장해서 하나님 뜻이라고 제안한다. … 양심을 거스르는 일은 언제나 악하다. 또 오류에 빠진 양심을 따르는 것도 악하다. 하지만 안전하고 선한 중도가 있다. 그 길은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잘 채워지며 그런 양심을 따르는 길이다.” 양심이 하나님께서 인간 안에 심어 놓으신 감독자라고 할지라도, 양심이 선한 양심으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통해 그 말씀과 일치하도록 길들여져야만 한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염려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동의하듯이, 오늘날 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다. 신자의 양심은 양심을 찢어 마음의 내면을 드러내주는 설교를 통해 일깨워져야 하는데 그런 설교를 들을 수 있는 강단이 많지 않다. 조엘 비키는 제임스 패커를 인용(James Packer, Quest for Godliness_Crossway,1990, p.48)하여 이렇게 말한다. “청교도에 따르면, 강력한 설교자의 한 가지 표지는 사람들의 양심을 ‘갈기갈기 찢어서’ 사람의 내면의 바닥에 무엇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21세기 초 한국 교회 강단에서 이런 설교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우리는 더더욱 ‘신앙 양심에 따라 행동하겠다’는 말을 조심히 써야 하지 않을까? 자칫 이런 표현은, “아, 나는 그냥 내 고집대로 하겠습니다”라는 말로 들릴 수 있지 않겠는가?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가르침을 받아야하고 나아가 찢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정기적으로 그리고 자주 점검되어야 한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에게 자기 점검(self-examination)이라는 영적 습관은 생경하기만 할 것이다. 자기 점검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이라는 대계명을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있는지 면밀히 살피는 영적 습관이자 훈련이다. 조금 가슴 아프기는 하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 보려고 한다. 목사들은 어떤가? 정상적인 목사라면 신학교(신학대학원)에서 성경과 신학의 훈련을 받고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된다. 목사로 안수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성경을 설교하고 가르치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이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며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자신의 삶의 절대기준으로 삼아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중세 말 성경을 읽을 줄도 모르는 사제들이 있었다면, 오늘날에도 성경과 신학의 훈련이 거의 전무한 목사들, 성경 대신 자기 소견을 따라 목회하는 거짓 목사들이 즐비하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신앙 양심에 따라서’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으면 솔직히 겁이 덜컥 난다. 무엇을 말하려고 그는 신앙 양심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나는 신앙 양심에 따라 하기로 했다”는 말은 조심히 사용해야 하지 않을까? 오히려 “성경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 비록 그 뜻조차도 주관적으로 해석할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면 최소한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할 수 있고 조금 더 하나님의 뜻에 가까이 갈 수 있는 여지가 있지 않겠는가? ‘신앙 양심에 따르겠다’는 말이 ‘내 고집대로 하겠다’는 의미로 들리거나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던 사사시대의 말처럼 들려서야 되겠는가? 신자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선한 양심’(딤전 1:5,19)과 ‘깨끗한 양심’(딤전 3:9; 딤후 1:3)으로 빚어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본연의 자리에서 세상의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시작할 수 있으리라. 이 지리하고 괴로운 코로나19 팬데믹의 상황이 지나간 뒤에, 우리는 마르틴 루터가 말한 것처럼,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은 일도 아니고 안전한 일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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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돈영
2020-08-26
새로운 환경‘아차’하면서 집으로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동네 마트를 향하다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 집으로 되돌아갔던 일이 몇 번인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동안 마스크를 써 본 일이 없다. 내가 마스크를 쓰는 것은 낯설고 새로운 일이며, 번거로운 일이다. 반복되는 실수에 급기야 현관문에 ‘마스크’라고 크게 써 붙였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요즘은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다. 집을 나설 때 열쇠와 지갑을 챙기듯이 마스크를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낯설고 불편하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했던 일이 계속 반복되면서 몸에 밴 것이다. 거리에나 식당, 영화관, 마트 등 모든 공간에서 마스크를 쓴 사람들을 볼 때면, 원래부터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던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변했다. 환경에 ‘적응’한 것이다.전망하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사회의 많은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함께 하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모이기를 힘쓰는 데 제동이 걸렸다. 예배드리고 식사하는 것이 조심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그뿐 아니다. 성도의 교제와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도 적신호가 켜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가? 어려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고대하며 다양한 전망을 이야기하고 의견을 내놓는다.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사회, 과학, 의학 등 각 분야의 전문가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현재 상황과 향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고 전망한다. 이런 정보와 전망을 통하여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전망을 한다. 어떻게 예배할 것인가, 어떻게 성경을 교육하고 다음 세대를 양육할 것인가, 어떻게 성도와 교제할 것인가 등 많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한다.그런데 이런 전망과 대안을 듣다 보면 불편한 마음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방안은 온라인, 영상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중요한 대안이고, 중요한 방안이다. 그러나 ‘포스트 코로나’ 혹은 ‘위드 코로나’의 정답이 온라인만은 아닐 것이다.시작은 비슷하다오랜 시간 함께 직장 사역을 했던 분 중 비슷한 시기에 개척한 두 교회가 있다. 두 곳 모두 직원들이 교인이 되어 개척한 곳이다. 성도의 대부분은 직장과 연관된 사람들로 이전에 신앙생활을 해본 경험이 없는 이들이었다. 그야말로 맨땅에서 처음부터 시작하는 교회인 셈이다. 두 교회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한 곳은 최대한 성도를 배려하고자 했다. 매일 직장에서 보고 주일에도 봐야 하니 예배 외에는 최대한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것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해주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교회 청소와 봉사, 식사까지도 외부의 사람을 썼다. 매주 식당에서 배달한 음식을 먹고, 짧게 설교하려고 애썼다. 주보를 만들거나 안내하는 것, 예배당 정리하는 것도 혼자서 직접 했다. 예배시간 외에 어떤 모임도 만들지 않았다. 대다수가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이니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되었다. 반면에 다른 곳은 매일 직장에서 보지만 교회는 또 다른 공동체라고 생각했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이기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청소와 봉사, 식사 준비 등 역할을 나누고 그에 맞는 역할을 하도록 했다. 주일에는 강해 설교와 성경공부 시간을 가졌고 필요에 따라 주중에 모이는 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적응’한다3년 정도 지났을 때, 두 곳은 분명하게 달라져 있었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었다. 공통점은 두 곳 모두 교회 공동체를 떠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열정적으로 처음에 동참했던 사람의 절반 정도가 떠난 것 같다. 물론 나간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고 새롭게 들어온 사람도 있어서 전체 수의 변화는 크지 않았다. 떠나간 이유도 분명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무언가 불만이 있거나 본인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너무 할 일이 없어서 나갔거나 반대로 맡겨진 일이 부담스러워서 나갔을 것이다.반면에 분명한 차이가 눈에 보였다. 배려를 많이 했던 곳은 3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더 불안해졌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예배의 순서를 맡은 사람조차도 예배에 늦거나 고의로 빠지기도 했다. 여전히 봉사하는 사람은 없다. 식당에서 배달해오는 밥을 먹은 후 삼삼오오 모여 차를 마시며 수다를 떨거나, 각자 갈 길로 흩어지기 바쁘다. 식사 후 그릇을 정리하는 일을 돌아가면서 하도록 했지만, 하는 이가 없다. 남은 뒤처리는 오롯이 교역자의 몫이다. 예배와 봉사를 위한 담당자가 정해져 있으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붙잡아 놓고 교육을 하거나 강요하지 못한다. 부담스러워 할까, 혹시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이다. 아니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곳은 제법 조직적인 모습이었다. 예배를 준비하는 사람, 식사를 준비하고 설거지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예배당 청소를 하는 사람까지 각자가 맡은 역할을 감당했다. 예배 후에는 성경공부 모임이나 다른 소모임을 갖기도 했다. 물론 리더로 세워진 몇몇 사람이 주도해서 여러 가지 일을 했지만, 다른 이들도 자연스럽게 동참하는 것을 보면 크게 거부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평일에는 리더 모임과 소그룹 성경공부 모임도 진행된다고 한다. 이들도 교회 생활은 다 이렇다고 생각하고 있다.작은 차이 큰 변화두 곳 모두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로 시작했다. 3년이 지난 후,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다. 한쪽은 리더로서 활동하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능동적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쪽은 여전히 어린아이와 같이 보살펴야 하고, 혹시 떠나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그들이 가진 내면의 신앙은 어떤지 알 수 없으니 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습은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두 곳을 언급하는 것은 어느 쪽이 바람직한 목회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적응’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두 목회자의 출발은 비슷했다. 바르게 목회하는 것을 소망했고, 처음 믿는 성도들이 든든한 신앙인으로 서기를 바랐다. 여느 목회자와 같이 성도들을 사랑했다. 다만 표현하는 방식이 조금 달랐고, 중요하게 여기는 바가 조금 달랐을 뿐이다. 성도를 생각하고 위하는 방법이 달랐을 뿐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배려’한 것이다.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잘 적응하고 바른 믿음을 갖도록 ‘교육’한 것이다.적응하더라두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말을 한다. 사람들이 ‘적응하더라’고 말이다. 신앙생활을 한 번도 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어느 쪽이든 처음 경험하는 것이다. 무엇을 하든 새롭고 낯선 일이라는 것이다. 매 주일 예배에 나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예배에 익숙해지기까지 많은 잡음이 있었다고 한다. 왜 아니겠는가.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적응하면서 태도가 달라졌다고 한다. 새로운 것이 몸에 익숙해지면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배려가 어색하지만 편해서 좋다고 여겼다. 하지만 익숙해지니 당연한 것이 되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무언가 봉사를 하는 것이 불편했지만 익숙하고 적응하니 당연한 것이 된 것이다. 우리가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이러한 모습을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새로운 상황에 어떤 방법 혹은 어떤 절차를 내놓아도 결국 그것을 접하는 이들에게는 새롭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쉬운 일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이 되고, 좀 더 복잡한 일도 적응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겠는가? 목회자로서 무엇을 생각하며 코로나 시대의 대안을 마련해야 하겠는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겠는가? 그 답은 모두가 알고 있다. 바로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이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당히 섞어 놓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편의성, 접근성, 다양성, 재미와 감동 등이 가장 우선순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오직 성경, 바른 신앙을 갖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정상인듯 비정상인 상황에서우리는 지금 정상인듯 그러나 비정상적인 상황에 있다. 예배와 찬양을 마음껏 하기 힘들고, 침을 튀기며 큰 소리로 부르짖던 기도시간이 그립다. 예배 후 삼삼오오 모여 밥을 먹으며 수다 떨던 시간과 오랜만에 만난 성도를 꼭 안아주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그러나 이러한 비정상적인 시간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모일 수 없어서 영상으로 예배할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움은 흐려졌다. 빨리 끝나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한다. 그것에 적응하고 있다. 주일 시간이 많이 남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이 정상적으로 변하는 것이다.이럴 때 ‘포스트 코로나’를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점검해야만 하는 것이다.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니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온라인 예배’, ‘온라인 성경공부’, ‘온라인 수련회’ 등 지금 상황에서는 좋은 대안이다. 그러나 ‘온라인 성찬’, ‘온라인 세례’, ‘온라인 교회’ 등 점차 확장된 개념으로 시도하는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정말로 그것이 바른 것인지, 최상의 방법인지 고민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하고, 교제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도록 하는 데 있어서 최고의 방법인지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다. 만일 바르지 않은 것이라면 버려야 한다. 포기하는 것이 맞는 것이다. 조금도 아쉬워하지 말고 돌아보지도 말아야 한다. 번거롭고 불편한 것, 비효율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올바르게 예배하고, 말씀대로 사는 방법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택해야만 한다. 비정상적인 시간을 보내며 힘들어하는 성도들이 많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더 많이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배려하고, 조금 더 쉽게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서 쉬운 방법을 제시하겠는가? 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 그것을 위해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포스트 코로나’는 ‘온라인’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방안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쉽지 않더라도, 불편하더라도, 혹여 돌아가서 시간이 걸릴지라도 바른 것을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 누구나 성경을 읽고, 성직자가 아닌 그리스도께 고백하고, 가운을 벗고 설교단에 서는 일 등은 그것이 바른 신앙이라고 확신했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쉽게 가는 길을 버리고 바른 것을 위해 불편함을 감수했다. 아니 목숨까지도 내놓고 대항해서 변화시킨 것이다.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바른 신앙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고 여겼던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다. 거창하게 개혁이라는 이름을 달기보다는 내게 맡겨주신 곳에서부터 고민해보자. 전해 들은 것을 어떻게 바르게 전달할 것인지, 그리고 무엇이 바른 것인지 말이다. 목숨을 거는 것은 아니더라도 불편하고 번거로울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자. 무엇을 하든 결국 적응할 것이다.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생길 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방식’이 아닌 ‘방향’을, ‘형식’이 아닌 ‘본질’을 고민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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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도 우상이 될 수 있는가?
by 고상섭
2020-08-21
팀 켈러는, 고대의 우상숭배란 머리에 뿔 달린 악마에게 경배하는 것 또는 신상에게 절하는 것이었지만 오늘날의 우상숭배는 다른 형태로 찾아온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우상이란 나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대개의 경우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좋은 것이 한층 더 좋아질수록 우리 내면 깊숙한 곳의 욕구와 희망이 충족되리라는 기대감을 더욱 부풀리게 된다. 무엇이든지 특히 삶에서 가장 좋은 것이야말로 짝퉁 하나님, 혹은 거짓 신이 될 수 있다. 결국 우상이란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 당신의 마음과 공상의 세계를 하나님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있는 것, 하나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주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거짓 신들의 세상, 25쪽)정치가 우상이 될 수 있다그런 우상의 종류 중에 현대에 자주 대두되는 것이 바로 이념과 정치다. 특히 오늘날 한국 교회에서 유념해야 될 부분이 바로 정치적 발언과 정치에 대한 관심이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방탕한 선지자’에서 요나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이 더 많은 사람이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네가 어디서 왔으며, 네 나라가 어디며, 어느 민족에 속하였느냐?”라는 질문에 요나는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라고 대답한다. 질문에는 민족에 대한 질문이 세 번째 질문이지만, 요나는 ‘히브리 민족’임을 첫 번째로 대답한다. “요나는 자신의 민족을 가장 먼저 밝히고 그 다음에 종교를 밝혔으니, 그가 속한 민족이 그의 자기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추론할 수 있다.”(방탕한 선지자, 71쪽)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모성애와 애국심 같은 충동은 선한 것이고 반대로 성욕이나 투쟁 본능 같은 것은 나쁘다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다. …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대해 부당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모성애, 애국심은 좋고 선한 것이지만 이것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을 때 더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정치가 우상이 된 증거 정치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면 하나님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러면 어느 한쪽 정당을 절대 선으로 어느 한쪽 정당을 절대 악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생긴다. 정치가 우상이 되면 나와 의견이 다른 상대방을 단순히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악한 사람으로 간주해버린다. 또한 자신들의 학파나 당파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이고 완벽한 해답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이런 사고는 기독교 교리를 전면 거부하는 사상으로 결국 잘못된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한때 공산주의를 신봉했던 사람들은, 악이란 환경의 부산물이므로 환경을 개선하거나 제거하여 악을 없앨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했다.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의 교리와 반대되는 이론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과 정치의 바른 관계 팀 켈러는 ‘방탕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인들과 정치의 바른 관계에 대해 이야기 했다. 첫째, 교회와 정치를 분리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공동선 또는 공공선을 위해 일하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정치를 초월해서 복음만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정치적으로 되지 않으려는 선택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선택이 될 수 있다. 정치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이미 피력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미국교회는 정치적으로 되지 않기 위해 노예제도에 침묵하기도 했다. 둘째, 개별 그리스도인은 정치에 참여해야 마땅하지만, 교회 자체가 하나의 정당을 유일한 기독교 정당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만약 목회자가 강대상에서 특정 정당을 지지하게 되면, 사람들은 회심을 하려면 예수님을 믿을 뿐 아니라 특정 정당의 지지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인상을 받을 수도 있다. 또한 정치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지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교회가 정치적 현실에 대해 발언할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명확한 것에 대해서는 교회의 이름으로도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 가난한자를 학대하는 것 등의 분명한 도덕적 명령을 위반하는 행태에 대해서는 분명한 반대의사를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특정한 그리스도인 집단이 도덕적 이상을 구체적인 사회 안에서 정확히 어떻게 추구하는 것이 최선일지에 대한 생각은 성경의 원리를 넘어 지혜와 분별의 영역일 때가 많다. 정부를 축소하는 것이 좋은지, 확대하는 것이 좋은지, 자본을 시장에 맡기는 것이 좋은지, 정부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이 좋은지 등에 대한 내용은 성경에 명확히 제시된 영역이 아니다. 최고의 사회 정책들은 이 양극단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성경은 모든 시간, 장소, 문화에 딱 들어맞는 그 지점을 정해주지는 않는다. 또 교회가 특정 정당과 연계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윤리적 일괄 거래’(Ethical Package Deals) 때문이다. 현대의 정당은 모든 사안에서 적절한 입장을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공식 입장을 전부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 입장을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느 한쪽 정당의 정책이 좋다고 말하게 되면 그 하나의 정책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 정당의 모든 정책을 다 좋아하는 것처럼 청중들은 느끼게 된다. 이것이 교회가 가지는 딜레마이다.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있다고 할 때, 성경의 기준으로 보면 두 정당 모두의 정책 중에는 지지하는 정책과 지지할 수 없는 정책이 섞여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섬기고, 노동자들이 대우받는 사회를 원하지만 동시에 결혼 전에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노동자와 억울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은 진보적으로 보이지만, 결혼 안에서만 성적인 관계를 허용하는 입장은 보수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사회 문제에 대해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현대의 정치적 지형과는 100 퍼센트 들어맞지 않는다. 그래서 어느 한쪽의 선택지로 몰리게 된다. 어느 한쪽의 정책이 성경과 맞지 않다고 해서 그 정당의 모든 정책이 성경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다. 동일하게 어느 한쪽 정책이 성경과 일치한다고 해서 모든 정당의 정책이 성경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리디머교회의 교인들에게도 개별적으로 정당에 참여하여 정치활동을 하라고 권면한다. 그러나 모든 정당의 정책을 다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며, 공공선을 위해 노력하라고 말한다. 아브라함 카이퍼도 ‘제도적 교회’와 ‘유기적 교회’를 구분하면서 제도적 교회로서의 사명은 말씀과 성례를 시행하고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풀고 제자를 삼는 것이지만, 유기적 교회로서의 사명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을 살아내는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면 정치와 상관없는 이원론으로 세상의 죄악에 방관하든지, 이와 대조적으로 정치에 너무 깊이 관여하여 아주 세세한 정치적 사안까지 위압적으로 입김을 불어넣으며 심지어 입법 활동까지 하려는 모습을 보일 수가 있다.교회는 정치 집단이 아니다. 교회를 통해 힘의 방식으로 세상이 변화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자 개인이 어느 정당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정책의 지지자가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지혜와 분별이 필요하다. 복음보다 정당의 지지가 우상이 되면 우리가 복음을 선포할 때 한쪽 지지자들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정치는 중요한 영역이지만, 정치가 우상이 되지 않도록 균형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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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념과 포괄적 차별금지법 논란
by 이승구
2020-08-19
특히 문제가 되는 세 영역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현행 법률로도 잘못을 드러내고 시정하고 구제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번에 제안된 법률안은 이렇게 차별을 금지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기본적으로 이 법안에서 “가족 및 가구의 형태와 상황”과 “사상 또는 정치적 의견”, 그리고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등도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 것에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에 근거한 차별을 이 법안이 언급한 점이다. 이것의 심각성을 발의된 법안에 근거해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1. 소위 차별 피해의 내용이 법안을 발의한 한 국회의원은 그 주요 내용을 설명하면서 “직접차별 뿐만 아니라 간접차별,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 및 집단에 대하여 신체적ㆍ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및 차별의 표시ㆍ조장 광고 행위를 차별로 금지함(안 제3조제1항2호부터 제5호까지)”라고 하고 있다. 대개 이 법안을 설명하면서 제3조 1항 1호를 중심으로만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법안이 말하는 차별 금지에는 “교육기관 및 직업훈련기관에서의 교육·훈련이나 이용에서”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주는 행위 및 차별의 표시ㆍ조장 광고 행위”도 차별이라고 적시하고 있다. 더구나 3조 1항 5호에 의하면, 소위 네 가지 영역에 대한 언급이 없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광고 행위”도 다 “금지 대상 차별의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광고”라는 말을 어디까지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 5호는 상당히 많은 것을 문제로 삼을 수 있는 조항이 된다. 2. 소위 차별 피해를 받았다고 주장되는 경우에 적용되는 과정(1) 본인이 “성적지향, 성별 정체성”으로 인해 차별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차별 행위의 피해자”)은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할 수 있다(41조 1항). (2) 국가인권위원회는 이에 대해서 “피해자의 신청에 의하여 또는 직권으로 시정명령을” 할 수 있다(42조 1항)그러므로 어떤 차별 피해 사례가 진정되면 일차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의 판단에 의한 권고가 주어지는데, 이 때 “동성애가 잘못되었다”고 계속해서 주장하면, 그에 대한 시정명령이 주어지는 것으로 되어 있다. (3) “시정권고를 받은 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권고를 이행하지 아니하는 경우 시정명령 및 시정명령 불이행시 3천만원 이하의 이행강제금을 부과할 수 있도록”(안 제41조부터 제44조까지) 한다고 했고, 이 이행강제금이 반복해서 부가될 것으로 여겨지니 이에 따라 복잡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4) “위원회는 차별행위로 인정된 사건 중에서 피진정인이 위원회의 결정에 불응하고 사안이 중대하다고 판단하는 경우에는 당해 사건의 소송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함(안 제49조)”이라고 했다. 이에 비해서 소위 차별 가해자는 자신이 모든 소송비용을 감당하여야 한다.(5) 그리고 “법원이 피해자의 청구에 따라 차별의 중지 등 그 시정을 위한 적극적 조치 및 손해배상 등의 판결을 할 수 있도록 함(안 제50조)”이라고 했으니, 앞서 언급한 이행강제금 뿐만 아니라 후에 법원이 다른 법들과 특히 이 법에 근거하여 내릴 판단에 근거해서 손해 배상금도 지불해야 하는 형태로 법이 구성되어 있다. 특히, “차별행위가 악의적인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고의성, 지속성 및 반복성, 보복성, 피해의 규모 및 내용 고려하여 판단), 통상적인 재산상 손해액 이외에 별도의 배상금(손해액의 2배 이상 5배 이하)을 지급할 수 있도록”(안 제51조) 되어 있다.더구나 이 법안은 피해를 받았다는 입증 책임이 피해를 받았다고 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해했다고 하는 자들에게 주어져 있다. 제52조는 “이 법률과 관련한 분쟁해결에 있어, 차별행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피해자가 주장하면 그러한 행위가 없었다거나,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이 아니라거나, 정당한 사유가 있었다는 점은 상대방이 입증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3. 특히 동성애 등의 문제와 관련한 이 법안의 문제점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동성애 등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법안이 말하는 바를 드러내고, 그 문제점을 지적하도록 하겠다.첫째, 이 법안은 성별에 대해서 “성별”이란 “여성, 남성,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한다.”(제2조 1항)고 하여 대한민국 법 중에서 최초로 “그 외에 분류할 수 없는 성”을 성별로 인정할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현행 헌법이 “양성 평등”을 말하던 바를 “성 평등”으로 대체하려는 그 동안의 지속적인 노력을 아주 구체화하는 시도다. 그런 의미에서 이는 현행 헌법과 모순된다고 판단할 수 있다. 현행 헌법은 “그 외 분류할 수 없는 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법안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2조 4항에서는 성적 지향을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등 감정적·호의적·성적으로 깊이 이끌릴 수 있고 친밀하고 성적인 관계를 맺거나 맺지 않을 수 있는 개인의 가능성을 말한다.”고 하니, 이 법이 통과되면 이성애 뿐 아니라 동성애와 양성애도 다 같이 우리 사회 안에서 있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마땅히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 된다. 후에 구체적으로 논의되겠지만, 각급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동성애나 양성애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근거가 이 법안에 의해서 완전히 제거되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여기면서 어떤 가르침이나 충고를 하게 되면 그것도 차별을 한 행위로 판단되어 그에 따른 조치를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성별 정체성”도 “자신의 성별에 관한 인식 혹은 표현을 말하며, 자신이 인지하는 성과 타인이 인지하는 성이 일치하거나 불일치하는 상황을 포함한다.”(제2조 5항)라고 하고 있으니, 직장과 특히 학교 등 공적 영역에서 자신은 여성이라고 주장하려는 남성에 대해서 이상하다고 표현을 하는 행위도 차별을 한 행위로 간주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공적 영역에서 동성애자나 양성애자에 대해서 그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경우는 그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어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범죄를 한 것이 된다. 이 법안의 발의자들의 의도에 따르면, 이 법안으로 우리 사회가 이성애뿐만 아니라 동성애와 양성애 등을 모두 정당하고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4. 특히 각급 학교와 교육에 대한 이 법안의 문제점특히 교육과 관련하여 이 법안은 많은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신학교에서 성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근거로 동성애나 양성애를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자는 학생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한다든지, 학업 과정 중 그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해서 전혀 조치를 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경우에는 학교가 처벌 대상이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31조). 그러므로 이것은 기독교 계통의 각급 학교와 특히 신학교에는 참으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하는 법안이고, 기독교 계통의 학교와 신학교들이 자신들이 믿는 바대로 할 수 없도록 하는 법안이다.또한 교육 내용에서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니, 이 법안에 따르면 기독교 계통의 각급 학교와 신학교에서도 자신들이 믿는 바와는 달리 동성애와 양성애도 다 평등하게 여겨야 한다고 교육하게 되어 있다. 5. 과연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문제가 없을까?대개 이 법안에 대한 저항을 없애기 위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동성애는 죄”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들 홍보한다. 그러나 우선 다음 몇 가지 정황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첫째, 동성애자들이 퀴어 축제를 하는 경우에 이런 모임을 반대한다고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동성애는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문제가 된다. 3조 1항 5호에 의하면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 대한 분리·구별·제한·배제·거부 등 불리한 대우를 표시하거나 조장하는 광고 행위”도 금지 대상 차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공적인 영역에서 동성애 비판을 전혀 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다.둘째, 기독교 계통의 교육기관에서 행하는 설교 중에도 동성애가 죄라고 주장하게 되면 그것은 이 법에 저촉되는 것이어서 문제가 될 수 있다.셋째, 각 교회 공동체의 예배 실황이 공적으로 노출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온라인으로라도 어떤 사람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설교를 듣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정신적 차별을 받았다고 진정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그 교회의 성도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동성애를 비판하는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같은 조항에 근거해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하는 경우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어떻게 판단할지도 모르는 것이다.대개 국가인권위원회가 다시 그리하지 말라고 권고할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 “성경이 그렇게 말하니 나는 어찌할 수 없다”고 주장하면 앞서 말한 일련의 피해 구제 과정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성경에 충실하고자 하는 목사들은 “고의적으로,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자들로 판단될 것이고, 결국 이 법안이 규정한 것을 어긴 범법자가 될 것이다. 이것이 이 법안을 발의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결국 교회마저도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침묵하게 하려는 것이다.물론, 지금은 일단 교회 단체를 설득하기 위해 교회의 설교 중에는 그렇게 말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국가인권위원회의의 설명을 존중하면, 이런 정황은 차차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에서 제시한 첫째, 둘째 문제는 이 법이 통과되고 나면 당장에 발생할 문제다. 그러므로 이 법안이 통과되면 교회조차도 여러 면에서 피해를 받게 되고, 종국적으로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이렇게 변한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하는 매우 잘못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또한 어떤 교회 공동체 사역자 중에 어떤 분이 동성애자로 드러난 경우, 이 법안에 근거해서 자신은 계속해서 교회에서 사역할 것을 주장한다면 이 법안이 통과된 상태에서는 교회 공동체가 그 사역자의 사임을 요구할 수 없고, 이를 요구하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 정관에 미리 명시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동성애자를 교회의 직원으로 받을 수 없다는 정관의 내용을 과연 어떻게 판단할지도 모를 일이다. 6. 나가면서: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열 명의 국회의원이 발의한 이 “차별 금지법”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 국가를 개조하려고 하는 것인지를 우리는 정확히 인식해야 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차별금지법이 국가인권위원회가 말하는 평등법이라는 제목으로든지, 또 다른 의원들의 안으로 제안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를 반대하는 일을 할 때 절대로 화내거나 분노를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항상 사람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성별, 장애, 나이, 언어,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국적, 피부색, 출신지역, 용모 등 신체조건, 혼인여부, 임신 또는 출산, 형의 효력이 실효된 전과, 학력, 고용형태, 병력 또는 건강상태, 사회적 신분 등을 이유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을 분리, 구별, 제한, 배제, 거부하거나 불리하게 대우하는 행위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들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잘 느낄 수 있도록 사람을 존중하며 사는 일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사랑으로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그러나 성경이 동성애나 양성애 같은 것은 옳은 것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죄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 말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우리들은 하나님 때문에 이런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도 이런 삶의 형태를 취하여 그 몸과 삶이 경험하게 될 큰 문제들과 어려움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야 할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다. 또한 이런 사람들이 잘못된 데서 벗어나 바른 길로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최선을 다해서 이 사회가 동성애와 양성애를 있을 수 있는 것으로나 정당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가 되지 않도록 애를 써야 할 것이다.
문화
사회이슈
포괄적차별금지법
장혜영의원
성적지향
성별정체성
국가인권위원회
동성애
십계명
비디오 게임하는 그리스도인
by 박용기
2020-08-17
코로나19 여파로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7월 문화체육관광부 ‘2020년 게임이용자 실태 조사’(한국 갤럽)에 따르면, 10세-39세 남성 88.5퍼센트, 여성 78퍼센트가 정기적으로 게임을 한다고 응답했다. 최재붕 교수는 그의 저서 ‘포노 사피엔스’에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 시청자 수는 1천만 명 정도였지만, 2017년 베이징 온라인 게임 ‘롤드컵’ 결승전 경기 시청자 수는 8천만 명에 달했다고 강조했다. 비디오 게임이 폭력성, 시간 낭비, 경쟁성, 대인 기피증, 중독성 등 부정적인 측면을 유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요즘 10-30대들은 게임을 통해서 친구들과 소통하고 협동심, 성취감, 사회성을 배우고 있다. 코로나19로 게임 인구가 증가하는 때에 그리스도인들이 비디오 게임을 어떻게 선용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실천 사항을 나누고자 한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은 인간기독교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이슬람은 단일신 알라를 믿는다. 이슬람의 알라는 초월성, 전지성, 전능성을 가진 홀로 존재하는 신이다. 이런 알라를 닮은 이슬람 사회는 획일적, 권위적, 복종적, 독재적 사회 문화와 정치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반면 기독교는 초월적, 절대성, 유일성뿐만 아니라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상호 협력성, 존중성, 관계성을 본질적 속성으로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 교회가 절대 진리를 믿고 주장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존중과 협력, 다양한 은사들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았기 때문이다. 욕설, 비난, 경쟁, 폭력, 악플이 난무하는 게임판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상대방에게 매너, 배려, 협력, 사랑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어두운 게임 문화 속에서 빛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2. 악한 시대의 시간을 구속(救贖)하는 인간바울은 에베소에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권면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 헬라어로 “아끼라”는 ‘엑스아고라조’이다. ‘엑스’는 ‘~부터’, ‘아고라’는 ‘시장, 광장’ 이다. 세월을 아끼라는 의미는 시장에서 좋은 물건을 골라서 구입하듯이, 매일 주어진 시간을 선용하여 좋은 기회로 만들라는 의미다. 킹제임스 영어 성경에서는 “세월을 아끼라”를 “Redeeming the time”(시간을 구속하라)로 번역했다. ‘구속’은 노예를 값을 주고 사서 자유롭게 풀어주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시간을 ‘구속’하라는 의미는 악한 문화 속에서 노예처럼 사용되고 있는 시간을 다시 찾아와서 주님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라는 의미다. 성령님이 신자의 내면에 오셔서 활동하시면 습관적으로 정신없이 살던 삶에서 깨어나 정신을 차리게 된다(눅 21:36). 여가를 위한 게임 시간과 영적 건강을 위한 경건의 시간에 균형을 맞추게 된다. 게임 시간에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엿보게 된다. 그리스도인은 반복적, 습관적인 게임 시간을 구속하여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3. 문화를 변화시키는 인간1세기 소아시아의 수도 에베소는 아데미 여신상을 제작하는 비즈니스가 번창했고 마술사, 점치는 자들이 넘쳐나는 우상숭배의 도시였다. 바울이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말씀을 가르치자, 마술사들은 복음을 깨닫고 자발적으로 수억 원 가치의 마술책을 모아서 불태웠다(행 19:10,19). 아데미 여신상 비즈니스 매출액도 급감했다(행 19:27). 에베소 도시에서 복음은 개인의 구원을 넘어서 도시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를 변화시켰다(행19:23).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이러한 현상을 “the world upside down”(행 17:6, KJV)으로 표현했다. 현재 출시되는 상당수의 게임들이 반성경적인 폭력성, 자극성, 경쟁성, 중독성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대니얼 스트레인지(Daniel Strange)는 ‘복음과 문화 사이(두란노)’에서 "문화는 소명이다 … 문화를 창출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성, 나아가 그분의 위대함을 뽐내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입은 신자는 세상 문화에 맞서 하나님의 기준과 영광에 맞게 문화를 회복시켜야 하는 소명감을 갖게 된다. 2019년 2월 최철규 집사는 어린이와 청소년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만화로 읽는 천로역정(생명의말씀사)’을 6년의 산고 끝에 출간했다. 어린이 소요리문답, 성경 암송, 성경 스토리, 천로역정 등과 같은 건전한 콘텐츠로 게임을 개발하여 보급하기를 기대해 본다.4. 자녀들과 게임하는 부모얼마 전 필자는 스마트폰 앱에서 자녀들이 하는 게임을 직접 다운받아 해보았다. 초등학생인 둘째 아이가 그 모습을 보고 “아빠가 게임을 하니까 너무 좋아”라며 방방 뛰었다. 아이들이 좋아하고 즐기는 게임을 부모가 지속해서 부정한다면 아이들은 자신이 부정당한다고 생각하고 의기소침해질 수 있다. 몰래 게임을 하면서 수치심과 죄책감까지 느낄 수 있다. 어른 세대는 어릴 때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놀았지만, 요즘 애들은 게임을 하면서 친구들과 하루 종일 논다. 시대와 세상이 바뀌었다. 부모들이 먼저 아이들이 좋아하는 게임을 인정해 주고 그 게임에 대한 장점을 찾아 칭찬해 준다면 아이들은 뛸 듯이 기뻐할 것이다. 자녀들은 ‘그 이야기 좀 더 해주세요’라며 계속 부모님과 대화하기 원할 것이다. 아이들의 눈높이로 내려가서 그들을 인정해주고 공감해준 후, 절제하면서 게임을 선용할 수 있도록 자녀들을 지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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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요석
2020-08-15
“내가 과연 어떻게 되었을진 잘 모르겠지만, 죽는게 쉽진 않겠지만 … 많이 미안해 엄마 그냥 미안하단 말밖에 못하겠네. 내 얘기는 아무도 몰랐으면 해. 창피하고 못났고 한심하니까 …”위의 글은 2020년 7월 30일에 스물다섯 살이란 젊은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한 배구 선수의 마지막 글이다. 그녀는 2013-2014시즌 프로배구 선수로 데뷔했을 때 별을 딴 듯 기뻐하였다. 하지만 주전이 아닌 백업과 다른 포지션의 대체 선수로 뛰면서 자신의 기량을 100퍼센트 펼치지 못했고, 그때마다 “네가 리베로냐”, “네가 배구 선수냐” 등의 악플에 시달렸다. 그녀는 7월 12일에 있었던 마지막 인터뷰 영상에서 “계속해서 (악플에) 시달리고 부담감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분석도 많이 했는데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며 감독님께 찾아가 “너무 힘들다”, “악플 때문에 힘들다”라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시즌이 종료되기 전에 은퇴를 결심하고 팀을 떠났다. 하지만 “돈 떨어졌다고 복귀할 생각하지 말라”는 식의 악플이 이어졌다.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먹던 수면제의 복용량이 점점 늘어났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운동도, 경기도 하기 싫었다. … 다 내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마음도 그렇고 어긋나 있었다”라고 마지막 인터뷰에서 토로했다.IOC 유승민 선수위원은 8월 3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 “스포츠 뉴스 댓글 금지법” 발의를 요청하였다. 포털사이트 다음과 네이버는 연예 뉴스 댓글 폐지를 이미 작년 10월과 올해 3월부터 시행하였다. 다음과 네이버는 8월 7일부터 스포츠 뉴스 댓글도 잠정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그 선수의 죽음으로 인해 그나마 이런 조치가 가능했다. 그런데 연예인과 스포츠 선수를 향한 댓글이 폐지되면, 앞으로 악플은 사라질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한 나라의 정신과 도덕과 절제의 수준은 급격하게 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는 이번 코로나19 대감염 속에서 “K-방역”이란 호칭을 들으며 경제와 방역과 인터넷 보급망 등에서 세계적 수준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잿더미가 되어 세계로부터 구호를 받던 나라가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 안에 선진국이 되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언론의 감시 기능과 여야의 치열한 경쟁도 중요한 이유에 속한다. 언론은 여러 분야의 잘못을 지적하고 나름 대안을 제안함으로써, 여와 야는 상대방의 조그마한 잘못도 비난하고 자신들의 방법을 자랑함으로써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였다.그런데 언론과 정당의 감시와 비판 기능이 도를 넘어 종종 비난과 악담으로 이어졌다. 일반 국민까지도 인터넷 뉴스에 댓글을 달 수 있고, 유튜브 제작으로 수익 창출이 되면서 악플과 과장과 왜곡으로 그 대열에 참여하였다. 조회수와 시청률과 지지율의 제고에 관심이 많은 언론과 정당과 유튜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것이면 자극적인 제목과 내용으로 사람들을 충동질하였다. 일반 국민도 아무런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연관이 없는 사항임에도 연예인과 운동인에 대한 험한 악플을 집요하게 생산하였다. 그 결과 그 선수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고, 유명 연예인과 정치인과 공인 중 일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났을 때 정당한 비판과 징계를 받기보다 언론과 정당의 과다한 비난과 악플러들과 유튜버들의 모욕과 조롱을 피해 극단적 선택을 하고 있다. 비평은 시, 소설, 수필, 희곡과 함께 문학의 5대 장르에 속한다. 비평가는 비평 대상에 대하여 정확하게 미추(美醜), 선악, 장단, 시비를 평가해야 한다. 그러려면 대상에 대한 정확한 관찰과 치열한 사고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비평가가 먼저 좋은 철학과 시대정신을 탑재하고 있어야 한다. 어찌 보면 창작보다 더 어려운 것이 비평이다. 창작자의 관점을 넘어서는 참신하고 다양한 관점들을 탄탄한 철학 사상과 풍성한 사례에 근거하여 제시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수준과 다양성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결혼식 주례처럼 작품의 장점만 이야기하는 주례사 비평은 새롭고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자기 식구 감싸기의 짬짜미로 사회 전체를 답보와 퇴보에 빠지게 한다. 따끔한 지적과 통찰이 없는 비평은 창작자와 사회 전체의 질을 저하시키므로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결점만 들추어내고, 가능성을 짓밟고, 인격 모독과 성 희롱과 악담으로 가득 찬 비평과 댓글은 인격을 부수고 살인에까지 이르는 살상무기다. 당사자만 아니라 그 비평과 악플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이렇게 비난하여도 괜찮은 것이란 잘못된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또 다른 비난자와 악플러를 꾸준히 생산하여 우리 사회를 더 황폐하고 더 악하게 만들므로 역시 없어져야 한다.사람은 실수하기 마련이고, 서로 다른 관점을 갖기 마련이다. 실수와 다른 시각에 대하여 기본적인 존중과 수용이 없다면 우리 사회는 서로를 물고 뜯는 형국이 될 뿐이다. 자신이 상대방을 공격하고 물 때는 괜찮겠지만, 그 칼날이 반드시 자기를 향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살아야하지 않는가? 조그마한 실수와 죄라도 짓는 날에는 엄청난 비난과 악플에 시달리므로 늘 긴장하고 남을 의식하고 새로운 시도를 주저하게 된다. 매 앞에 장사 없듯, 비난과 악플에 장사가 없어, 쌓이다 보면 어느덧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겪게 되고, 극단적 선택에 이를 수 있다.건전한 비평과 선플에 그리스도인이 누구보다 앞장서야 한다. 일만 달란트의 죄와 실수로부터 용서 받은 자가 신자들이지 않은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지금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우리의 부족함과 잘못을 격려하여 주시지 않는가?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음에도 가혹한 비난과 악플이 아닌 생명과 부활이라는 사랑과 세움으로 가득 찬 판결문을 받은 신자들이 어찌 조롱과 모욕과 희롱이 배인 비난과 악플로 공격할 수 있는가?예수님은 형제에게 노하고, 바보라고 말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자는 살인에 해당하여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마 5:22) 말씀하셨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살인하지 말라”는 여섯 번째 계명이 “평화롭고, 부드럽고, 예의 있는 말과 행동”을 요구하고(제135문), “격동시키는 말”을 금지한다고(제136문) 서술한다. 바로 평화로운 말은 생명을 살리고, 격동시키는 말은 생명을 죽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우리가 최근에 격동시키는 비난과 악플에 의하여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는 아홉 번째 계명이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보존하고 조장하고, 마음으로부터 오직 진실만을 말하고, 고자질과 아첨과 중상을 하는 자들을 좌절시킬” 것을 요구하고(제144문), “이웃의 진실과 명성을 해치고, 거짓 증거를 제공하고, 진실을 외면하고 억압하고 악의적으로 말하고 왜곡하고, 부당한 침묵을 유지하고; 진리나 공의에 대해 편견을 갖도록 의심스럽고 애매하게 왜곡하고, 틀림과 거짓과 중상과 험담과 고자질과 냉소와 욕설을 말하고, 가혹하고 편파적으로 비난하고, 작은 실수들을 악화시키고, 약점을 쓸데없이 찾아내고, 거짓 소문을 내고, 악한 의심을 품고, 불명예와 추문을 기뻐하는” 것을 금지한다고(제145문) 서술한다. 신자라면 각 계명의 요구와 금지 사항들을 읽을 때 마음속 깊이 파고들지 않는가?통제되지 않는 혀는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고, 불의의 세계이고,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고, 죽이는 독이다. 신자는 마음속의 독한 시기와 다툼을 말과 글로 자랑하면 안 된다.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면 안 된다. 이러한 지혜는 하늘의 것이 아니라 땅의 것이고, 정욕과 악한 영의 것이다. 시기와 다툼이 묻어나는 글과 악플은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을 발생시킨다. 건전한 비평과 선플은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가져오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약 3장). 신자들은 인터넷에 올리는 짧은 글과 댓글에서도 절제함을 갖추어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좋은 내용도 중요하지만, 화평과 관용이라는 기본적 자세는 더 중요하다. 의도치 않게 틀린 내용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거두어들일 수 있지만, 악의가 담긴 비난과 악플은 주워 담을 수 없다.치열한 경쟁과 일등주의가 일상화된 우리나라는 전쟁과 천재지변이 없는 한 앞으로도 선진국 대열에 머물 것이다. 하지만 그 경쟁과 효율주의로 인해 억눌린 마음과 팽팽한 긴장은 배출구를 찾아다닐 것이고, 쉽게 비난과 악플로 표현될 여지가 많다. 신자는 이런 치열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완충재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들과의 경쟁에서 일등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에게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이는 것은 더 중요하고, 이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고, 더 크게 발전하게 한다.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대한민국의 자살률 완화는 신자들이 일등의 경쟁에서 승리할 때가 아니라 화평과 관용과 선한 열매를 보일 때 이루어진다. 기독교야말로 사회 전체에 새로운 관점과 통찰이 담긴 건전한 비평을 제시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미 그런 내용은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십계명의 각 항목에 대하여 서술한 요구와 금지 사항에 풍성히 나와 있다.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귀한 보물을 사장시키고, 잠시 도움이 되는 자극적이고 가벼운 내용에 심취하고 있다.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는다.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잠 15:23), 또한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다(잠 25:11). 신자는 바로 이런 말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 일등의 실적을 올리려고 하기보다 기쁨의 대답을 주려하고, 악플 대신에 선플을 다는 화평과 관용의 삶을 살아 사회에 맑은 물을 흘려 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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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이 죄라고 성경은 말한다
by Tim Keller
2020-07-15
성경은 사실상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 아무런 메시지를 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대 사상가들이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인종”과 “백인”은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기 때문이다. 1400년대 전까지 많은 유럽의 국가들은 자신들을 하나의 인종(백인)으로 보기보다는 각기 다른 종족과 국가적 집단으로 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영국 사람들은 독일이나 프랑스 “인종”을 자신들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로 인식했다. 그러나 아프리카 노예들이 거래되기 시작하면서, 흑인을 포함해서 백인이 아닌 인종들과 대비되는 “백인”이라는 생각이 점차 자리를 잡아감에 따라, 그 생각은 노예 제도를 정당화하는데 활용되었고, 또한 결코 고대에서는 찾을 수 없는 강력한 인종적 근거를 만들어냈다. “백인”이라는 생각은 새로운 것이다. 첫 번째로, 이 생각은 추상적이고, 종족적인 정체성과는 달리 당신이 사는 장소와 문화에 근거하지 않는다. 당신에게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아일랜드인이나 독일인 또는 스웨덴인이 아니라, 백인이라는 사실이다. 엄청난 수의 아일랜드인과 이태리인이 미국에 들어오기 시작하던 1800년대 중반과 후반, 그들은 자신들을 “백인”이라고도 또 미국에서 가장 다수를 차지하는 인종의 일부라고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궁극적으로 그런 인정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로, 지금 현재 네 개 또는 다섯 개로 구분되는 인종을 단지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나누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제는 인류 전체를 아주 확실한 계층으로 더 빠르게 분류하는 방법이 생겼다. 이런 근대의 발전은 아주 치명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인종 차별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인종에 대한 생각이 노예제도와 식민주의를 합리화하기 위해 백인들이 근대에 만들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성경이 부족주의나 민족적 편견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는 게 당연하지만 인종 차별에 대해서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늘 보고 있듯이, 자신을 높이 올리고 합리화하려는 인간의 깊은 욕구는 자연스럽게 “타자화(Othering)”라는 형태를 만들어낸다. 그 결과 어떤 특정 집단의 사람들을 골라 당신과 비교해 더 열등한 사람들로 규정하는 것이다. “타자화”는 성경 전반에 걸쳐서 드러난다. 우리가 잘 아는 바리새인을 한번 보자. 누가복음 18장에는 다른 사람들을 “얕잡아보는” 그들의 모습이 나온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1절). 말 그대로 이 바리새인은 여기서 “타자화” 행위를 하고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분류해서 계층을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다른 이들을 경멸함으로 자신을 높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종적인 “타자화” 행위는 아니다. 그럼 성경에 인종 차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가? 나는 나온다고 믿는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베드로가 거부했을 때, 그는 다름 아니라 현대의 인종 차별주의자가 하는 행동을 한 것이다. 베드로는 그들의 종족적 또는 국가적 배경과 관계없이 이방인을 어떤 범주에 포함시킴으로 그들을 “인종화” 했다. 또한 우월한 인종과 열등한 인종으로 계층 구조를 설정했고, 그러고는 그들을 “타자화”했다. 현대에 생긴 “백인”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성경이 인종 차별을 다루지 않는다는 주장이 가진 위험 중 하나는 오로지 백인만이 억압적인 “타자화”를 할 수 있다는 은근히 암시를 던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온 모든 사람들은 각 대륙마다 예외 없이 자신들의 고유한 버전의 인종화 및 “계층화” 대상을 가지고 있다.인종 차별은 개인적인 죄만이 아니라 집단적인 죄이기도 한 것인가오늘날 인종 차별과 관련해서 가장 논란이 되는 점은 인종 차별이 과연 ‘시스템적인’ 또는 ‘구조적인’ 인종 차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런 주장이 함축하는 바는 인종 차별에는 고의적이고 개인적인 차별도 있지만, 동시에 소수 인종을 배제하고 억압하는 지배적인 인종 그룹이 지지하는 사회 구조적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사회 구조적 차별 구조를 지탱하고 있는 개인들은 결코 자신들이 그런 차별 시스템을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더러, 결코 의식적인 인종 차별적 생각이나 행동도 하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이런 주장이 사실인 경우에 도출되는 결론은 이것이다. 비록 한 개인이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수 인종을 억압하는 구조의 해체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한, 집단적인 차원에서 그 개인은 여전히 유죄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옳은가? 지금까지 내가 설명한 대로 보자면, 그 대답은 예스라고 생각한다. 이 세상에는 시스템적이고 개인적인 인종 차별, 두 가지가 다 존재한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첫 번째 이유는 성경이 개인과 집단의 죄와 책임, 두 가지를 다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인들, 특히 미국 백인들은 자신들이 직접 뭔가를 잘못하지 않은 이상 잘못된 상황에 대해서 책임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면에서 훨씬 더 실제적이다. 다니엘은 선조의 죄를 회개했다(단 9). 아간의 가족은 아간이 개인적으로 저지른 절도죄 때문에 모조리 몰살 당했다(수 7). 서구의 개인적인 관점과 달리 성경은 우리의 성품과 행동이 순전히 우리 개인의 결정으로만 이뤄진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한 사람의 성품은 많은 부분에서 가족과 공동체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아간의 가족은 아간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와 관련해 깊은 관련이 있었고, 그렇기에 그들은 아간의 죄에 공범자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다니엘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공동체의 결과물임을 인식했고, 그렇기에 자기 자신도 공동체가 지은 죄에 가담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신명기 23:3-8와 사무엘하 21:1과 같은 본문은 죄를 지은 개인이 죽고 난 이후에도 하나님은 그 죄를 나라와 백성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성경이 이 세상에 불의한 사회 제도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잠언 10장에서 12장까지를 보면, 한 개인의 무책임이 누군가를 가난에 빠뜨릴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많은 구절이 나온다(잠 10:4; 12:17). 그러나 잠언 13장 23절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거니와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가 있느니라.” 간단히 말해서, 성경은 가난과 불의를 결코 개인의 행동 또는 결정의 탓으로만 돌리지도 않지만, 동시에 그렇다고 모든 잘못을 무조건 다 사회 구조의 책임으로만 돌리지도 않는다. 성경은 또한 부유한 이들만을 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사법 제도, 시장 가격을 조작하는 사업 관행, 그리고 불공정한 노동 관행을 비난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지금 다루는 주제와 관련한 마지막 다음 글에서 다룰 한 가지를 잠시 미리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우리 문화에는 정의와 관련해서 서로 경쟁하는 여러 이론이 있다. 각각의 개인에게 그들에게 합당한 몫을 나눠주는 것을 정의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이들은 기본적으로 모든 가난과 범죄가 시스템적인 불의의 결과로 볼 뿐, 결코 개인의 책임으로 보지 않는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사회적 불의 때문에 시위한다는 사람들이 도리어 기물을 훼손하는 행동을 보면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관점이 있다. 동시에 또 다른 관점은 시위 중에 기물을 훼손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도덕적이 책임이 없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회적 구조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두 번째 견해는 불평등한 결과를 결코 개인 행동의 결과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 관점에 따르면 이 사회 모든 부조리는 언제나 사회적 압력에 의한 결과일 뿐이다. 기독교인이 당면한 어려움은 이것이다. 첫 번째의 보수적인 관점이 성경이 요구하는 수준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거부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무조건적으로 두 번째의 진보적인 관점을 다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관점이 만들어낸 용어까지 가감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은 다 세속적이고 축소지향적이며, 무엇보다 단순하다. 성경이 말하는 정의는 개인적인 차원과 시스템적인 차원, 두 가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아니, 그것보다도 훨씬 더 높은 수준이다. 인간은 단지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존재를 넘어서 영혼과 육체를 가진 존재다. 실로 신약성경이 말하는 “세상(kosmos)”은 단지 물질적인 세계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요 3:16), 영적인 실재,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아름답게 창조된 이 세상 속에서 가짜 신들을 만들어내는 타락한 인간의 필연적인 성향까지 포함하고 있다(요1 2:15-16). 성경적 관점에 따라서 “정의를 행하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엄청난 기도와 복음 전도를 필요로 한다. 정의에 대한 성경적 견해는 개인의 책임과 사회 구조에 전적으로 중점을 두면서도 이 세계가 축소하고 있는 대안적 견해를 훨씬 뛰어 넘는, 인간 생활에 대한 풍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스템적인 인종 차별이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은 백인을 선호하고 백인이 아닌 사람은 배제하는 관행을 제도화함으로 일어난다. 어떤 관행이 제도화 될 때, 애초에 그 관행을 시작한 사람이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관행이 여전히 계속될 수 있도록 남은 사람들은 강화된 구조를 만들어낸다. 여기 몇 가지 예가 있다.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은 지역 재산세로 운영된다. 돈이 없는 가난한 동네는 따라서 질이 낮은 학교를 운영하게 된다. 수준 낮은 교육은 결국 그 동네의 가난을 더 부추기게 되고, 학교를 운영하는 데 투자되는 자원은 점점 더 적어진다. 미국에서 흑인의 가난 지수는 전체 인구와 비교해서 두 배가 더 높고, 열악한 학교 재정 지원 시스템은 결과적으로 흑인 커뮤니티를 더 불평등한 덫에 걸리게 만든다. 공식적이라는 면에서는 덜 하지만, 문제적이라는 면에서는 조금도 덜 하지 않은 또 하나의 예를 살펴보자. 비즈니스를 하다보면 당신이 아는 사람 또는 당신이 아는 사람이 아는 사람을 뽑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우리 중 대부분이 갖고 있는 사회적 관계라는 게 거의 다 인종과 사회 계층에 따라서 결정되다 보니, 결국 권력을 가진 사람들(보통 혜택을 많이 받는 백인 계층)이 신규 인원을 뽑을 때는 같은 인종과 같은 계층의 사람들을 구하기 마련이다. 그 결과 동일한 자격을 가진 능력있는 다른 인종과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그 자리에 들어갈 방법이 없어진다. 훨씬 덜 비공식적이지만 그 파급력만큼은 실로 엄청난 시스템적인 불의의 형태는 이 나라의 문화적인 프로세스가 어떻게 미국 내 백인들이 다른 인종을 불신하도록 만들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최근 뉴욕타임즈는 프랑스가 인근 유럽 나라보다 코로나 사태를 훨씬 잘 처리했는데, 프랑스 국민은 다른 나라의 국민보다 지도자에 대해서 훨씬 더 부정적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어느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그 이유는 이렇다. “리더십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 사회를 형성하는 구조적인 요소다.” 이런 불신은 수백 년에 걸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프랑스 문화 깊이 자리잡은 채 수백 만의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또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내려오고 있다. 미국의 경우, 백인이 아닌 인종에 대한 불신, 특히 흑인에 대한 불신은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구조적이고 그 뿌리가 매우 깊다. 그 불신의 감정은 수도 없이 많은 방법을 통해서 백인이 아닌 인종을 대하는 학교 선생, 은행 직원, 그리고 회사 사장의 일상 생활 속에서 드러난다. 특정 그룹을 대하는 영향력과 권력을 가진 이러한 모든 인물들이 보이는 태도 하나 하나가 모여서 결과적으로 타인종을 교육적, 심리적, 경제적, 또 물리적으로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형법상 흑인이 같은 죄를 지은 백인에 비해서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흑인은 더 자주 구금 또는 체포되고, 같은 죄를 지은 백인에 비해서 더 무거운 형량을 받는다. 정책을 바꾸고 또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경찰서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통해서 경찰 개혁을 위한 여러 노력이 정부 최상위로부터 있어왔다. 그러나 같은 종류의 잔인한 사고가 그치지 않는 현실을 보면 최소한 사법 시스템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백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불평등한 대우의 구조적 측면이 얼마나 널리 퍼져 있고 확고한지를 잘 알 수 있다. 인종 차별을 회개하며인종 차별을 회개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편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가장 먼저 회개해야 할 주 대상은 하나님이다. 모든 죄는 결국 다 하나님, 하나님의 뜻 그리고 하나님의 선한 창조에 대항하는 것이다. 당신이 보다 더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 이웃을 향한 사랑, 새 창조, 그리고 은혜의 복음을 훼손한 것이 있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회개하라. 그러나 동시에 “나쁜 의도를 가지고” 고의로 지은 죄만을 회개하도록 우리가 부름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시 19:13).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그렇기에 우리는 행여라도 우리가 거의 의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종적인 타자화”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마음을 다해서 회개해야 한다.다니엘서 9장과 또 다른 곳에서 만나는 집단적 회개와 비슷한 모습을 미국에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여러 다양한 제안이 있지만 그 중에서 하나만 언급하겠다. C.S. 루이스(C.S. Lewis)는 그의 책 ‘네 가지 사랑(The Four Loves)’에서 이렇게 말했다. 과거를 아예 없었던 일로 쓸어버리는 순간 나라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타락하게 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어떤 사회 이론에 따르다 보면 미국 역사와 관련해서는 좋은 말을 할 게 없다. 그러나 집단적 회개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가 지금까지 다양한 인종 집단을 향해 어떻게 대해왔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그의 책 “배제와 포용(Exclusion and Embrace)”에서 우리가 어떤 특정 집단을 사회에서 배제하는 데는 최소한 네 가지 방법이 있다고 했다. 첫 번째가 “제거”인데, 말 그대로 죽이거나 아니면 완전히 쫓아내는 것이다(홀로코스트를 생각하라). 두 번째가 “지배”인데, 특정한 테두리 내에서 관리하기 위해 그들을 분리하고 테러를 행하는 방식이다. 세 번째가 “동화”인데, 자신들의 고유한 특색과 문화를 버리고 대신 지배층의 문화 규범을 받아들이는 개인만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네 번째가 “포기”인데, 특정 그룹의 필요를 채워주지 않을 뿐더러 그들의 권리도 보호하지 않는 방식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국은 최소한 이 중에서 세 가지의 배제 형태를 흑인들에게 행사했고,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지금도 이런 배제 관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이런 역사를 추적하고 또 그 역사를 인정하는 것은 집단 회개의 한 부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우리는 회개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마 3:8). 인종 차별이라는 죄를 회개하고 거기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데는 다양한 방식이 있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회개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회개의 열매가 진짜인가의 여부가 달려있다. 인종 차별에 대한 집단 회개를 한다고 할 때, 젊은 2세대 중국 이민자가 앵글로색슨 백인과 동일한 책임감을 가지고 회개해야 할까? 물론 인종 계층 구조화의 지속적인 제도화 과정의 일부로 아시아인이 “백인” 범주로 인정받는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기는 하다. 기독교인이 인종 차별에 대한 회개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두 군데의 핵심 장소가 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이다. 미국 내 모든 커뮤니티가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교회가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나 회개의 열매를 맺는 한 방법은 교회 지체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 더 많이 자신의 권력을 희생하고, 또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조금 더 손길을 내어줌으로써 교회 밖 세상에서 사람들을 나누고있는 인종적 또 문화적 장벽이 교회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길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능력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내 말이 아주 듣기 좋을 것이다. 그러나 역동적이고 다인종에 다종족 교회를 이끄는 것은 실로 어려움으로 가득한 사역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 아주 좋은 책이 최근에 나왔다. 어윈 인스 주니어(Irwyn Ince, Jr)가 쓴 ‘아름다운 커뮤니티: 일치, 다양함 그리고 최고의 교회(The Beautiful Community: Unity, Diversity, and the Church at its Best (IVP, 2020))’이다. 나온 지가 좀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움이 되는 책으로 조지 얀시 (George A. Yancey)가 쓴 ‘한 몸, 한 영혼: 성공적인 다인종 교회를 위한 원칙(One Body One Spirit: Principles of Successful Multiracial Churches (IVP, 2003))’을 추천한다.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은 인종적 불의와 싸우고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것을 위한 방법은 너무나도 많아 하나하나 이름을 열거하기 힘들 정도다. 내가 보기에 이 싸움에서 가장 우선이 되어야 할 분야는 교육적 평등과 형사 소송에 있어서 사법적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개혁을 성취하는 것이다. 후자와 관련해서 도움이 되는, 두 권의 탁월한 책이 있다(둘 다 학구적인 독자를 위해 쓰였다). 윌리엄 스턴츠(William J. Stuntz)가 쓴 ‘미국 형사 사법 제도의 붕괴(The Collapse of the American Criminal Justice System (Harvard, 2011))’와 앤쏘니 브래들리(Anthony B. Bradley)가 쓴 ‘과도한 형사소송과 집단 수감의 종말: 문화 사회를 위한 희망(Ending Overcriminalization and Mass Incarceration: Hope for Civil Society (Cambridge, 2018))’이다. 사법 제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뭔가 변화를 만들고 싶은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인 학자가 쓴 이 두 권의 책은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다. 출처: https://quarterly.gospelinlife.com원제: The sin of racism번역: 무제
문화
사회_이슈
인종차별
회개
죄
타자화
팬데믹
CS루이스
홀로코스트
인종차별은 구원의 원칙을 훼손하는 죄
by Tim Keller
2020-07-09
성경적으로 말하면, 죄는 하나님의 뜻과 영광에 모자란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죄는 하나님의 율법과 성품을 거스르는 것이다(요1 3:4; 롬 3:23). 그렇다. 인종 차별은 죄다.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영광을 거스르기에 죄라는 사실을 최소한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1. 하나님의 형상 때문이다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기에(창 1:26-28), 인종 차별은 누구나 다 평등한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는 신성한 진리를, 생각과 말로 그리고 행동으로 거스르는 죄다. 진리가 훼손되는 여러가지 방법 중 하나가 야고보서 3장 9절에 나온다. 그것은 사람을 향해 욕을 하는 것, 그러니까 누군가를 존경심 없이 마구 지칭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훼손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살인하지 말라”(마 5:21)고 했을 때, 그 의미는 누군가를 향해 혐오감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라가” 또는 “바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사실상 어기고 있는 것이고, 그 결과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는”(마 5:22) 위험에 처하게 된다. 지금 기준에 비추어서 볼 때 이건 좀 심하다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살인하지 말라는 이 여섯 번째 계명 뒤에 숨은 진짜 의미는 사실상 야고보서 3장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기본 교리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한 집단을 평등하지 않게 대하는 것, 즉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경과 사랑 그리고 보호로부터 그들을 소외시키는 것은 분명한 죄다. 단지 인종에 근거해서 누군가를 불평등하게 대하는 것이 아무리 널리 퍼진 관행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일 뿐이다. 어떤 특정 인종이나 국적이 내재적으로 더 우월하다고 간주하고, 그 결과 다른 인종이나 국적을 (1) 불공정하고 불의하게 대하거나, (2) 기만하거나(‘라가’의 의미 중 하나는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nobody]이다), 또는 (3) 적극적인 경멸감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죄며, 그런 사람은 “지옥불에 들어가는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법은 그의 성품에 근거하고 있다. 주님은 말 그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는”(신 10:17) 분이다. 이 구절이 나오는 문맥은 다름 아닌 인종과 계급에 관한 내용이다.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신 10:17-18). 사도행전 10장 34절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신다”는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나라나 인종을 근거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종과 국적을 근거로 편을 들거나 차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죄가 된다. 2.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 때문이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율법을 다음 두 가지 “대계명”(마 22:36-40)으로 정리했다. 두 번째 계명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한 사람의 예를 들었다. 그 사람은 큰 위험과 희생에도 불구하고 인종과 종교가 다른 사람의 육체적인 필요와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었다(눅10:25-37). “너희도 나가서 이렇게 하라”고 예수님은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명령은 내가 나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향한 것과 동일한 관심과 존경심으로 인종과 국가 그리고 계급과 소속집단이 다른 모두를 대하라는 것이다. 두 번째 대계명과 관련해서 존 칼빈(John Calvin)은 이 계명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교리와 겹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칼빈 시대에 외국인은 얼마든지 멸시받아도 되는 존재였고, 또 도덕적이지 못한 사람은 무시받는 게 당연하다고 간주되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까지 굳이 힘들게 도와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다음의 놀라운 글에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다 주님을 대하듯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에 관해서) 말하자면, 당신은 그에게 아무런 빚진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를 깨달을 수 있도록, 그를 그 위치에 두셨다. 당신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 사람한테 내가 이렇게까지 해 줄 필요는 없습니다. 이보다 훨씬 못한 것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당신 때문에 당한 수모가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중략] 사람들의 사악한 의도를 보지 말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도록 하라. 하나님의 형상은 그들의 죄를 깨끗하게 지우고 그 대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위엄을 향해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도리어 그들을 사랑하고 포용할 수 있도록 만든다”(기독교강요 II.8.6).이 글은 인종 차별 또는 모든 종류의 편견에 경종을 울린다. 칼빈은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 점을 스스로 깊이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이웃에게 빚진 자이기에 그들을 향해 친절을 베푼다는 면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이 허락하는 한, 그 어떤 한계도 정해서는 안 된다”(기독교강요 II.8.7).3. 새 창조 때문이다갈라디아서 말미에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갈 6:15). “할례나 무할례”는 바로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를 의미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바울에게 이런 구분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여기서 어떤 절대적인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다른 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진 유대 혈통을 향한 사랑과 그에 상응하는 자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예를 들어, 롬 9:1-5).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핵심은 인종 또는 종족의 차이는 새 창조에 비교할 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도대체 새 창조란 무엇인가? 새 창조는 완전히 새롭게 된 물질 세계, 그래서 죽음도 고통도 눈물도 전쟁과 불의함도 나아가서 죄와 수치까지 깨끗하게 사라진 세상을 의미한다(사25:7-8; 65:17-25). 그런 세상은 이 세상이 끝날 때 세워질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그런 세상의 일부가 현재로 앞당겨져서 이미 구현되었다는 것이다. 헤르만 리델보스(Herman Ridderbos)는 갈라디아서 6장 15절에 나오는 새 창조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하나님 왕국의 새로운 현실. 그리스도로 인해 도래하는 새로운 세상은 단지 미래의 종말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계 21:1–5, 3:12; 막 14:25), 이미 현재에도 해당한다. 이런 새 창조는 이미 인간 속에 만들어졌다. 새 창조는 무엇보다 선물이다. 그러나 그 선물은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많은 기독교인은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죗값을 치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했고,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위대한 증거라고만 생각하기 쉽다.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큰 메시지가 숨어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롬 4:25). 이런 식의 부족한 생각은 구원이라는 선물을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바라보도록 만든다. 새로운 피조물이 된 내가 이제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으로 충분하고, 굳이 그 이상은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미래에 있을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23)로서 부활했고, 우리에게는 성령님을 선물로 보내주셨다. 따라서 성령님은 어떤 의미로 볼 때, 미래에 만날 새로운 세상과 우주에 대한 일종의 “보증금(downpayment)” 또는 “선지급금(first installment)”인 셈이다(고후 1:22; 5:5; 엡 1:14-16).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우리는 영으로 또 생명으로 예수님과 한몸이 되었을 뿐 아니라 같은 예수님을 믿는 다른 이들과도 이미 한몸이 되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앞으로 만나게 될 미래의 세상과도 한몸이 되었다. 그 세상은 바로 모든 고통과 눈물 그리고 불의와 악, 나아가서 죄가 없는 세상이다. 이 세상 마지막 때에 온 우주를 정화시킬 그 능력은 새로운 탄생(cf. 마 19:28과 딛 3:5에 동일하게 나온palengensia라는 단어)을 통해서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만드는 바로 그 능력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단지 구원받은 개인을 품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세상은 폭력과 갈등 그리고 전쟁과 불의가 사라진 새로운 종류의 인류(a new humanity)가 사는 세상이다. 새 창조의 능력은 부분적이나마 이미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그렇기에 리델보스는 이 선물이 “그에 합당한 과제와 함께 주어진다”고 말했다. 우리는 죄와 어둠의 옛 세상을 따라 행동하면 안 된다. 앞으로 다가올 빛의 세상(롬 13:11-14)에 어울리게 살아야 한다. 새로운 미래 세상이 어떠할지 알 수 있는 하나의 표시가 바로 인종, 종족 그리고 나라 간의 갈등과 모든 반목 및 폭력이 종말을 맞는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 주시며 이르시되 내 백성 애굽이여, 내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라”(사 19:25).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질 때 주님 앞에서는 모든 인종이 다 평등하게 된다는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사야가 새 창조를 표현할 때(사 65:25), 그는 모든 나라들과 이 땅의 모든 왕들이 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가 될 것이라고 했다(사 60:1-7). 모든 나라의 왕들이 다 그들의 영광을 하나님의 도시로 들고 온다고 요한계시록 저자가 썼을 때(계 21:24), 또 하나님의 백성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계 7:9)으로 구성되었다고 썼을 때, 계시록 저자는 바로 이사야서에 있는 이 메시지를 반복한 것이다. 마지막 새 창조가 가져다 줄 이런 놀라운 비전은 우리 개개인을 구분하는 ‘민족성(peoplehoods)’과 국적에 여전히 중요한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개인적인 특징은 너무도 중요하기에 없어지는 게 아니라 새 창조 이후에도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특징을 여전히 간직한다고 해도 우리의 부활한 몸은 완전히 정화될 것이고, 옛 몸이 약함과 썩음이 없는 새 몸으로 바뀌는 것처럼 죄성이 가져다주던 모든 해악은 깨끗하게 정화될 것이다. 우리 기독교인이 해야 하는 과제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이런 미래, 새 창조의 증인이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서 그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해야 한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새 창조를 삶에서 실천하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인종 간의 평등을 고취시키고, 또한 인종 간에 발생하는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갈 3:26-28) 구분이 없기 때문이다. 4. 오직 믿음으로 인한 은혜로만 의롭게 되는 복음 때문이다인종 차별이 죄라는 사실을 이해할 뿐 아니라 거기서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인종 차별이 복음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 은혜로 인한 구원이라는 그 기본적인 원칙을 훼손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직시해야 한다. 리처드 러블레이스(Richard Lovelace)는 ‘영적인 삶의 역동성(Dynamics of Spiritual Life)’에서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자신들의 공로 또는 의로움 때문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진리를 단지 머리로만 이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질적인 차원으로 나아가면, 사실상 기독교인 대부분은 “그들의 삶 속에서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단지 다음과 같은 기독교인에 불과하다. “하루하루의 일상에서 의롭다함(justification)을 받기 위해서 그들은 사실상 자신들의 성화(sanctification)에 의존한다….. 성실함, 과거의 회심 체험, 최근의 종교적 성과 또는 상대적으로 적은 고의적인 불순종 횟수 등에 근거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인정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끌어낸다.”자신의 가치와 안정감을 확보하는 데 그리스도가 의롭게 하시는 역사함 대신 자신의 업적이나 혈통 또는 행동에 의존하는 사람은 “급진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된다고 러블레이스는 주장한다. 인간은 누구나 내면 가장 깊은 곳에서 나 자신이 결코 선하거나 사랑스럽고 또 가치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느끼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을 높여주는 감정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리려고 노력하게 되어 있다. 이런 식의 불안함(insecurity)은 여러 형태로 표출되는데, 흔히 오만과 교만, 자기 혐오와 수치심, 또는 타인을 향한 자기 방어적인 비판으로 드러난다. 은혜가 주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당신이 경험하게 되는 가장 쓴 열매가 바로 인종 차별이다. 러블레이스는 같은 책에서 이렇게 썼다. “그들은 자기들의 안정감을 강화하고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문화가 다른 타인종을 자연스럽게 증오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의 인종만을 같은 편에 속하는 멤버십으로 고정시킨다…. 자신들의 문화만이 가치있는 대상이 된다. 그들의 문화는 마치 자기 의심을 방지하기 위한 갑옷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상 그리스도의 구원하심에 대한 전적인 믿음이 아니고는 결코 제거될 수 없는, 육신까지 쪼개고 들어가는 정신적 속박이다.”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종과 문화는 일종의 자기 의로움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하게 생각하고, 저기 사는 “저 나라 사람들”과 내가 결코 같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 말은 결국 자신에게 더 익숙한 그 문화를 도덕적 절대성과 명예로운 훈장감으로 바라본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교회에서 하는 여러 방식들, 즉 감정 표현, 찬양, 예배 시간의 길이, 서로가 대화하는 방식 등등은 단지 문화적으로 우리에게 익숙해진 형태일 뿐이지 결코 성경의 지시 사항이 아니다. 그럼에도 은혜의 깊은 데까지 이르지 못한 우리는 우리가 지향하는 예배 방식만이 기독교인으로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바른 길”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우리 눈에 생소한 다른 문화의 예배 형태를 경멸한다. 우리는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우리 스스로의 의로움을 수선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와 다른 인종과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을 은밀하게(또는 노골적으로) 경멸한다.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할 말을 다 하고 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본 바울이 근거로 삼은 논지의 핵심은 왜 이웃을 사랑하지 않느냐는 것도 아니었고, 또 왜 하나님의 형상을 존중하지 않느냐도 아니었다(물론 바울은 얼마든지 이런 논지를 전개할 수도 있었다). 그의 논지는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우월감이 주는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결코 “복음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는 우리 자신에 관한 다른 모든 것을 다 떠나서라도, 우리 모두를 죄인인 동시에 또한 은혜의 수혜자로 동등하게 바라보는 복음을 훼손한다는 것이다(갈 2:14-16).지난 몇 년간 인종 차별에 관한 좋은 신앙 서적이 많이 나왔지만 거기에는 한 가지 결함이 있다. 그것은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뜻에 거스른다는 설명을 하지만, 아쉽게도 왜 신학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자가 되는지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없다는 점이었다. 다들 하나같이 인종 차별이라는 태도와 행동에만 포커스를 맞추었지, 거기서 단 한 걸음도 더 들어가지 못했다. 그런 책들은 결국 인종 차별주의자(또는 인종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회 구조가 주는 문제점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는 그렇지 않은 우리보다 도덕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으로 그치고 만다. 이것은 위험하다. 인종 차별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재적으로 자연스럽게 인종 차별주의자보다 우월하다고 느끼게 되고, 그 결과 타락한 인류로서 공통으로 느껴야 하는 죄성에 대한 감각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홀로코스트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간에 한 집단이 다른 어떤 집단을 도덕적으로 열등한 존재라며 악의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런 판단은 언제라도 소외와 학대에 대한 정당성을 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가, 비록 끔찍해도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된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와 정체성을 내세우는 죄성의 증거라고 생각한다면, 우리 역시 타락한 인류의 일부라는, 부인할 수 없는 죄성에 대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없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저지르는 치명적이고 파괴적인 죄성의 발현이라는 차원으로 인종 차별을 바라볼 때, 그나마 이런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마저 잊을 때, 인종 차별에 연루된 사람을 향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는 커녕 서로 간의 분열만을 더 깊게 만드는 방법, 그들을 향한 비난 뿐이다. 바울이 베드로에게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지 않는다고 꾸짖었을 때, 바울은 베드로를 망신주거나 또는 그가 강제로 바울의 뜻을 따르도록 압력을 행사한 게 아니었다. 바울은 단지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인종 차별이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라는 점을 깨닫도록 도왔을 뿐이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겸손과 희망의 방법이다.출처: 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sin of racis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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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바이러스는 언제 처음 생겼을까?
by 정요석
2020-07-02
나는 일주일에 한 번 요양원에 가서 설교를 한다. 노인들을 돌보는 요양원인지라 외부에서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유입되지 않도록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발열체크와 손소독을 하고, 종사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근무한다. 가족의 면회도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제한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렇게 6개월 정도 방역을 철저히 하니, 어르신들이 코로나19만이 아니라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까지 예방되었다. 그간 어르신들이 독감 등에 걸린 것이 외부에서 드나드는 사람들을 통해 바이러스가 유입된 결과였음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친분이 있는 의사들이 요사이 환자들 수가 많이 줄어서 의원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민들이 생활방역을 실천하며 감기와 같은 잔병에 잘 걸리지 않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코로나19가 종식되어 국민들의 면대면 접촉이 활발히 이루어질 때 병원 운영도 정상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국민들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외부의 바이러스가 본인과 거처로 유입되지 않게 생활방역을 실천하면 안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가 언제 처음 발생했을까? 코로나19는 중국 우한에서 발생했다는 주장이 강하게 있고, 중국 당국은 이에 맞서 우한을 방문한 외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방역당국은 확진자가 발생할 때마다 어느 경로를 통해 감염되었는지 파악하여 더 이상 감염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해외 입국자들도 모두 확진 여부를 검사함으로써 그들을 통하여 국내에 바이러스가 유입되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19, 2012년의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2002년의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등은 모두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들인데, 지구상의 최초의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서 처음 생겼을까? 지구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했을까? 아니면 우주 어디에선가 이 지구로 유입되었을까?나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땅이 저주받는 벌을 받았을 때 바이러스도 생겨났거나 아니면 최소한 바이러스가 생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다고 생각한다.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이 밭의 채소를 먹고 사는데, 땅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니 그때부터 사람은 얼굴에 땀을 흘려야 그 소산을 먹게 되었다. 이것은 단순히 땅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뜻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긴다는 의미다. 사람의 몸도 100 퍼센트의 소화와 연소가 이루어지지 않아 소변과 대변과 노폐물과 땀 등이 발생하고, 그것의 축적으로 피로와 병과 노화가 발생하고 끝내 죽는다. 사람이 사는 모든 곳과 하는 모든 일에는 100 퍼센트 완성과 만족이 존재하지 않고,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발생한다.바이러스는 계속 같은 유형을 유지하지 않고 변형된다. 전염력과 치사율이 더 높은 형태로 변형될 수도 있고, 더 낮게 변형될 수도 있다. 도대체 바이러스는 어떠한 체계로 이러한 변형 형태를 결정할까? 그간 지구에 등장하여 몇 년씩 강력하게 활동하면서 많은 생명을 앗아간 바이러스들은 그 활동 기간과 종식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러한 질문은 자연스럽게 현재의 코로나19가 앞으로 몇 년 동안 지속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또 코로나19의 종식 이후에 더 강력한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할 것인가라는 질문도 낳는다.나는 코로나19가 몇 년 내에 극복되리라 생각한다. 현재보다 의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도 스페인 독감을 비롯한 여러 전염병이 몇 년의 시간 경과 속에서 해결되었듯, 코로나19도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몇 년 후 더 강력한 전염력과 치사율을 가진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유형의 자연 재해도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공짜로 주신다. 공기, 햇빛, 중력, 물, 부모의 사랑, 인식 능력 등은 사람들이 노력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홀로 일하시며 사람들에게 주신다. 하나님은 이 모든 일을 밝히 보이지 않고 행함으로써, 사람들은 이 필수불가결한 일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인지도 모른 채 자신들의 권리로 안다. 호의가 세 번 반복되면 권리로 안다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은 자연의 선물에 더욱 적용된다.하늘이 닫혀 비가 없는 것, 기근과 전염병의 발생,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와 메뚜기와 황충이 나는 것,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싸는 것,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는 것(왕상 8:37), 이 모든 것들이 땅의 저주로 말미암은 가시덤불과 엉겅퀴에 속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하여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어, 사람들의 큰 죄악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불가결한 것들을 계속하여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들이 이 모든 것들을 자신들의 권리로 착각하고 하나님의 진리가 아니라 자극적인 욕망과 뒤틀린 정욕을 추구할 때 하나님은 이것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두신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임을 잠시나마 깨닫고 자신들의 악행을 주춤하도록 잠시 은혜를 거두신다.하나님은 코로나19 이후에 지진이나 기근이나 전쟁이나 가뭄이나 황충 등으로 인류를 경고하실 것이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그들의 죄악성을 주춤케 하신 하나님은 그간 허락하신 은혜들 중 하나를 잠시 거둘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누구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큰 일이고 선물임을 더욱 깨달아, 세상 사람들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질 것이 아니라(요일 2:16),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아야 한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가진다면 코로나19로 인한 불편함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충분히 이겨낼 수 있고, 그간 감사하지 않은 많은 것들을 감사하며 경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발열체크와 손소독과 마스크 착용은 바이러스를 차단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앞으로 백신이 개발되면 코로나19를 예방하는 데 성공할 것이다. 하지만 인류는 체온계와 소독제와 마스크 등의 생산 그리고 백신 개발 등에서 서로를 배려하고 더불어 살려는 마음 대신에 과도한 경쟁에 매몰된다면 비록 코로나19 종식에는 성공할지 몰라도 더 강력한 자연재해나 세계전쟁을 겪을지 모른다. 인류는 단지 외부의 바이러스가 침입하지 않도록 신경 쓸 것만 아니라, 내부의 죄가 외부로 크게 발현되지 않도록 신경 써야한다. 이것이 열왕기상 8장 37절에 나오는 재앙들을 물리치는 지름길이다. 물론 근본적 처방은 자신들의 죄인됨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의탁하며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즐거워하고 널리 전하는 것이다. 지금도 태양의 햇살보다 더 풍성하게 끊임없이 유입되는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없다면 사람들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죄악으로 인하여 인류는 몇 번이나 멸망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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