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이슈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가상의 우정
by John Muether
2018-12-11
여러분은 아마 이 글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다. 이는 필자의 글이 지루하기 때문만은 아니다(물론, 어떤 독자에게는 지루함 때문일 수도 있다). 이 예견은 사람의 집중 시간이 얼마나 짧은 가에 대한 믿을 만한 통계에 근거한다.구글이 미국인들을 바보로 만들고 있다는 '애틀랜틱 먼슬리'(The Atlantic Monthly)의 도발적 주장은 다소 과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대 검색 엔진인 구글 및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들은 분명 우리의 심리를 더 불안하고 산만하게 만들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오늘날의 디지털 사회 안에서 이전만큼 집중력을 갖기 어려워졌다. 멀티태스킹 작업은 우리의 사고를 단편화하고, 문자 메시지의 끊임없는 도착은 조용히 반성할 시간을 방해한다. 불과 글 몇 문단을 읽기도 전에 집중력은 금새 사라지고 만다. 오늘날의 우리는 심오하고 사려 깊은 독서 습관을 잃어버렸다.핸드폰, 이메일, 블로그, 트위터, 그리고 앞으로 등장할 더 새로운 것까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전자시대의 핵심적인 특징이다. 우리는 고민할 겨를도 없이 이들이 삶을 장악하도록 받아들였다. 그 결과, 우리는 독서 습관을 빼앗긴 것 외에도 최소한 두 가지를 더 잃었다. 첫째는 우정 관념이 하찮은 것으로 변했고, 둘째는 공동체 의식이 감소했다.1,035명에 달하는 페이스북 친구를 가진 동료가 있다. 페이스북 기준에 따르면, 그 정도 수는 그리 많은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친구들 중 일부는 거짓 관계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처럼 많은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이스북의 목적은 넘쳐나는 나의 일상적 정보를 과시하는 정도다. 예를 들면, 오늘 당신이 받은 내시경 검사 결과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데도 어김없이 페이스북 게시를 통해 내게 알려진다. 반면, 여러분과 진짜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당신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왜 트위터를 통해 알아야 하는지 의아하게 여길 것이다.아무리 페이스북을 통해 친구들을 ‘관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더라도, 이 많은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역시 내가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페이스북 친구들을 모았는데, 약 400명 정도이다. 그런데 그 중의 4분의 1은 만나 본 적도 없는 관계들이다(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완전히 모르는 사람과 채팅을 나누었던 적도 두 번 정도 된다). 이러한 교제는 사실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나는 몇 년 동안 만난 적이 없는 친구들에게 이메일을 보낼 때, “곧 만나기를 바란다”라는 문구로 마무리하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온라인 친구들에게 이 말은 결국 상투적인 문구가 되고 말았고, 더이상 그 말을 붙이지 않는다. 이 경험은 진짜 우정이란 실제 만남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전자 문화는 정신을 산만하게 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인간관계를 멀리 갈라놓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역설은, 전자 문화는 우리를 가까운 사람들과 분리시키는 한편, 먼 사람들과는 연결시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과 거리를 극복하고 “다시 연결되었다”라고 헛된 자랑을 하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고립되고 있는 것이다.이런 과학 기술의 피상성은 전자-갈등(e-conflict)의 확산으로도 증명된다. SNS로 메시지를 주고받는 사람의 상당수는, 심지어는 오랜 친구와도 심각한 불통을 겪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소소한 온라인 유머라고 생각한 컨텐츠를 친구에게 보냈다가 “장난이 심하다”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 이유는 내가 보낸 유머에는 단지 컨텐츠만 있을 뿐 그것을 전달하는 나의 표정이나 태도, 언어, 혹은 억양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8장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대면해서 화해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또한 소셜 네트워크는 우정을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우리는 보이기 위한 욕망으로 친구들을 모집한다. 또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주목을 끌게 될 때, 독자적인 온라인 인격이 조심스럽게 형성된다(심지어는 다중 정체성과 젠더 벤딩[성 역할 파괴]까지 생긴다). 크리스틴 로젠(Christine Rosen)은 “네 자신을 알라”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이 사이버 문화 속에서는 “네 자신을 나타내라”라는 말로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사이버 문화 속에서 수치심이 거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꼬집은 것이다. 나를 드러내는 일에 거침이 없는 이유는 새롭게 공유되는 엄청난 양의 무의미한 글들 속으로 나의 어제는 곧 묻혀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로젠은 페이스북을 “단조로운 독특성, 판에 박힌 개인성, 특이한 동일성을 가진 매우 둔한 곳”으로 묘사한다.우리가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에서 보내는 시간은 참된 친구들과 글을 주고받으며 깊게 교제할 시간을 빼앗아 간다. 클릭 한번으로 수십 명의 친구들을 ‘참견할’ 수 있는데, 왜 손으로 편지를 쓰고 전달하는 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겠는가? 게다가 꽃이나 선물을 보내려 해도 사이버 꽃은 실물보다 훨씬 싸거나 값이 아예 없다. 이 모든 특성이 결국 우정을 경쟁으로 둔갑시킨다. 나는 언제 내 친구의 계정에서 ‘좋아하는 소수 그룹’ 안에 속할 수 있을 것인가?이상의 모든 사례에서 보듯 우정은 실리적인 목적으로 변할 때 값어치를 잃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참된 우정을 성취할 수 있을까? 교회 공동체, 가족, 또는 우리가 사랑하고 섬기도록 명령받은 이웃과 달리, 우정은 독특한 근거에 따라 전개된다. 우정은 선택을 필요로 하고(가족은 선택하지 않는다), 또 높은 수준의 신뢰, 존중, 그리고 일정 부분 사생활의 공유까지 요구한다. 요약하면, 참된 우정을 위해서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지난주에 일 때문에 한 젊은 여성과 이메일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그녀가 옛 친구의 조카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우리가 연락한 것을 삼촌에게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왔다. 그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우리가 한 것이 연락인가? ‘연락하다’라는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인가? 우리가 지금 친구인가? 여기서 잠시 페이스북으로 돌아가자면,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인 것이든 상상적인 것이든 얄팍한 친근함을 기초로 친구와 친구(또는 친구의 친구)를 서로 맺어 준다. 그것은 관계와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흐르는 물과 같다. 다시 돌아와, 어쨌든 그 친구가 20년 넘게 당신과 연락이 끊겼던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각자가 서로에게 우선적으로 연락할 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나는 소셜 네트워크의 몇몇 긍정적 측면까지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예를 들면, 오늘 아침, 내게 무척 기쁜 일이 있었다. 페이스북을 통해 '테이블톡'(Tabletalk)의 편집자이자 나를 오래 참아 준 크리스 도네이토(Chris Donato)가 건강한 둘째의 아빠가 되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흠, 아마 그것 때문에 그는 내가 기고문의 기한을 넘긴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스북은 이미 확립된 관계를 돕는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페이스북을 통하여 온라인으로 맺은 친구 관계는 과연 어느 만큼의 지속성을 갖게 될 것인가? 여기서 두 가지 추가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페이스북을 통한 연락이 진정 필수적이고, 더 중요하게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교제하는 친구들과 견줄만한가?소셜 네트워크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 매체들이 거듭 강조하는 약속을 굳게 믿는다. 그 약속이란 SNS가 잃어버린 공동체를 되찾게 해 주고,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 생긴 관계적 균열들을 매워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을 확고하게 지키는 곳은 교회 말고는 그 어디에도 없다. 교회가 교인들을 향해 갖고 있는 열망은 개인이 진정한 친구들에 대하여 품는 열망을 그대로 반영한다. 교회들이 얼마나 필사적으로 그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 애쓰는지 알게 되면 실로 놀랄 것이다. ‘전자시대를 살아가는 목사들’은 종종 인터넷을 통해 공동체를 세우는 데 열심이다. 하지만 내가 아는 건강한 교회들은 성도 간의 직접 교제를 온라인 모임으로 대체할 생각이 전혀 없다고 강조한다. 이것이 정확히 교회가 할 일이다. 많은 학자들이 인터넷을 통한 관계의 활성은 현실 세계의 관계를 희생시켜야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셰인 힙스(Shane Hipps)는 ‘깜박이는 픽셀’(Flickering Pixels)에서 이렇게 말한다.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실제적 소셜 네트워크—교회나 어떤 가정에서의 식사 혹은 친구들과의 점심 같은 모임—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으려는 욕구를 잠재우는 알약과도 같다. 당신이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로그인을 할 때, 종종 진정한 소통에 대한 혼란이나 욕구가 찾아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러한 감정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잠잠해지고, 결국 공동체가 아닌 혼자만의 교회에 남게 되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나 홀로 볼링’(Bowling Alone)이라는 책의 저자인 로버트 퍼트남(Robert Putnam)은 사이버 교회를 회의적으로 보는 학자 가운데 하나다. 온라인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은 정말로 다양하다. 하지만 가상 공간에서의 동질성은 사실상 사이버 문화 특유의 격리성이 단지 공동체의 가면을 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퍼트남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사회 자본인 공동체가 약화되어 가는 현상을 (인터넷으로는) 절대 되돌려 놓을” 수 없다.실제의 공동체가 불편함이나 비효율성을 갖고 있는 것과 달리, 가상의 공동체는 참여만큼이나 탈퇴도 무척 쉬운 이점을 갖고 있다. 마치 이메일에 답장하지 않는 것처럼, 매우 간단하게 온라인 공간에서 사라질 수 있다. 또 조금이라도 불편한 온라인 친구는 단 한번의 클릭으로 ‘친구 목록’에서 삭제시킬 수도 있다. 이런 퇴출 전략을 가진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는 생활 방식 집단(life-style enclave, 역주—로버트 벨라[Robert Bellah]가 처음 사용한 말로 일부 생활 방식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모여 외모, 소비, 레저와 같은 공통적인 요소를 통해 자기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집단을 가리킨다)보다 공동체적 연대감이 훨씬 약하다. 한 사회학자는 온라인 소셜 네트워크를 ‘네트워크화된 개인주의’로 매우 적절하게 묘사했다. 물론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는 인터넷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터넷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를 극대화시키고, 이 사상들의 부정적 단면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장악하도록 만든다.따라서 여기서 우리가 받는 도전은 멀티태스킹, 분할 화면, 신호음 등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화에 강력히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칼빈대학의 쿠엔틴 슐츠(Quentin Schulze)는 "과학 기술이 우리의 영혼에 미치는 장단점"을 잘 구분하라고 권면한다. 당신을 실제로부터 격리시키는 과학의 진보를 경계하라. 이것이 당신의 영혼, 지성, 그리고 교회에 유익하다. 우리는 관심 분야를 확대시키고 친구들과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기 위해 지금의 환경을 바꿀 필요가 있다.여러분이 이 글을 끝까지 읽었다면 작은 출발을 한 것이다. 그럼 이제 다른 글들도 여유를 가지고 한 번 읽어 보라. 그리고 연필을 들어 친구에게 편지도 써 보라. 문자 메시지나 블로그에 쓰는 것은 반칙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Virtual Friendship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문화
사회이슈
가상
집중력
페이스북
셰인
욕망
우정
우리가 모르는 빈곤 이야기
by Joe Carter
2018-11-13
25년 전, 유엔 총회(United Nation General Assembly, UNGA)는 매해 10월 17일을 “빈곤퇴치를 위한 세계인의 날”로 선포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 결의의 목표는 “전세계의 빈곤(poverty)과 절대적 가난(extreme poverty)을 근절하기 위한 대중의 인식 제고”이다. 월드뱅크(World Bank)에 따르면 절대적 가난은 하루를 1.9달러 이하로 살아가는 상황을 의미한다. 당신은 지난 30년 동안 전 세계에서 절대적 빈곤층의 비율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고 있는가? (1) 증가했다, (2) 감소했다, (3)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 간단한 질문을 통해 절대적 가난에 대한 당신의 이해를 점검해 볼 수 있을 것이다.답은 (2)번이다. 지난 30년간 절대적 빈곤층은 조금 줄어든 정도가 아니라 유의미하다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감소했다. 불과 1980년대만 하더라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44퍼센트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으로 고통받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수치는 10퍼센트 미만으로 대폭 하락하였다. 그러나 정답을 (1)번, 증가로 예상한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기독교 여론조사기관인 바나그룹(The Barna Group)의 2014년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명 중 8명(84%)이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 현상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3분의 2에 해당하는 67%의 사람들은 오히려 증가를 예상했다. 더욱이 이 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68%에 달하는 대중들이 앞으로 25년 동안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대답하였다.하지만 이러한 비관적 전망과는 다르게 희망적인 관점을 제시한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로 실천적 크리스천들이다. 바나그룹의 정의에 따르면, 실천적 크리스천이란 실제로 주일예배에 참석하고, 자신의 삶에서 종교적 믿음이 매우 중요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특히, 그중 비교적 젊은 40세 이하의 그룹에서는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48%의 사람들이 빈곤 퇴치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40세 이상에서 일반 대중은 32%만이 희망적 시각을 밝힌 반면, 이 나이대의 실천적 크리스천들은 역시 그보다 높은 37%가 낙관적 전망을 내비쳤다. 빈곤 퇴치를 희망적으로 볼 수 있는 이유가난의 전 지구적 감소 현상 속에서 크리스천들은 희망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지난 몇 십년 동안 빈곤 계층의 국제적 감소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 가난의 퇴치 역시 다가올 미래에 우리가 실현할 수 있는 목표가 될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의 그래프는 인류의발전(HumanProgress.org)이라는 단체가 작성한 것으로서 절대적 가난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치적으로 비교한 표다. 주황색 선이 절대적 빈곤 인구를 의미하고, 파란색 선이 그렇지 않은 인구를 의미한다. 선을 따라 계속 왼쪽으로 이동한다면, 아마도 두개의 선이 마주하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래부터 1820년대까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절대적 빈곤 아래에 놓여 있었다.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세계 인구의 일부는 최저생활선 이상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경제의 부흥을 맛보기도 했다. 하지만 부의 생산은 지극히 한정적이었고, 절대다수에게 빈곤은 현실이었다. 그 예로, 1820년대에는 대략 11억 명의 인구가 지구상에 존재했는데, 이 중 약 10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의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태는 오랜 시간 지속되었는데, 이는 위의 표에서 두 개의 선이 1820년부터 1950년 즈음까지 좁혀지지 않고 거의 나란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70년대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경제 성장과 함께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빈곤 문제 연구가인 맥스 로저(Max Roser)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대략 1970년대부터 경제의 성장과 빈곤 인구의 감소를 경험하고 있다. 분석에 따르자면 … 1970년대에는 22억 명의 사람들이 절대 빈곤의 상태로 살아갔으나, 2015년에는 그 수가 7억 5백만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절대 빈곤층의 수치가 1970년대와 비교했을 때 거의 3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또한 이러한 감소율은 1990년대 이후부터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로저의 분석에 따르자면, “1990년에 20억 명 수준이었던 절대적 빈곤층은 2015년 기준, 7억 5백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는 평균적으로 계산했을 때, 1990년부터 2015년까지 25년 동안 매일같이 13만 7천 명의 사람들이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러한 사실은 지난 25년 간 매일 아침마다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을 법한 굉장한 일이다. 개발을 통해 세계의 모습이 이토록 놀랍게 바뀌고 있다. 물론 전체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에는 그 변화의 속도가 긴 시간 속에서 매우 천천히 진행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절대적 빈곤층의 유의미한 감소는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성취 중의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 성취를 계속해서 이어나갈 수 있는가?어떻게 하면 빈곤의 문제를 줄여나갈 수 있을까?1990년 유엔의 새천년개발계획(UN’s Millennium Development Goals)은 2015년까지 빈곤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었다. 이 목표는 원래 계획했던 시기보다 5년이나 앞당겨서 달성되었다. 그리고 2015년, 유엔과 월드뱅크가 공동으로 수립한 새로운 개발 목표는 2030년까지 전 세계를 대상으로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는 일이다.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 계획일까?이 야심찬 목표는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먼저, 1990년 이후에 경험한 빈곤의 감소는 인도와 중국의 경제 성장에서 기인한 부분이 크다. 1990년 51%에 달했던 인도의 절대적 빈곤 인구는 현재 20%대로 떨어졌다. 중국의 경우는 더욱 눈에 띈다. 1981년 기준으로 88%를 기록했던 절대적 빈곤 계층은 오늘날 무려 2%대로 낮아졌다. 이는 두 나라의 빠른 경제 성장이 있었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하지만 이와 동일한 성장이 현재 높은 빈곤율로 고통받는 다른 나라들도 동일하게 경험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대내외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사하라 이남 지역의 아프리카를 예로 들자면, 대내적으로는 부패와 전쟁으로 신음하고 있고, 해외 원조가 오히려 자원 수탈의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다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대내적 상황과 국제 질서 및 무역에 해당하는 대외적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 해당 지역의 국가들은 지난 30년간 빈곤 인구의 증가세를 보인 유일한 대상으로 남아있다(비록, 아프리카의 인구 대비 절대적 빈곤 계층의 ‘비율’은 1981년에 비하여 적게나마 줄어든 상황이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서 빈곤인구의 ‘수’ 역시 2배로 늘어났다).절대적 빈곤의 급락 혹은 종말 유엔과 월드뱅크가 제시한 원대한 목표가 달성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지구상의 모든 인구가 실제로 가난을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통계상으로 완전 고용을 이룬 상태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마찰적 실업’(노동력 수급이 일시적으로 불균형한 상태가 되어 생기는 실업. 전체 노동인구의 약 4% 정도의 비율로 발생)이 발생하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가 쉽다. 통계적으로는 절대적 빈곤이 ‘종식’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의 마찰적 빈곤(약 3%부터 8%까지 예상)은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다. 전 세계의 인구가 2030년에는 83억 명에 이를 것이라는 예측을 바탕으로 계산해보자. 절대적 빈곤의 종말을 이룬다고 가정하더라도 약 2억4천9백 명에서 6억6천4백 명 가량의 사람들이 여전히 빈곤의 삶 속에 남게 된다. 전 세계의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1.9달러 이하의 돈으로 살아가는 현실을 고려했을 때, 절대적 빈곤의 완전 퇴치는 어쩌면 달성하기 힘든 환상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힘을 모을 때 바람대로 그에 근접한 성취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때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이 있다. 절대적 빈곤의 종식을 달성하더라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삶의 기본적인 필요에 실제적으로 닿을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한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인구가 절대 빈곤의 상태 속에 놓여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 비율을 8%대 이하로 계속해서 줄여갈 수 있다면 이는 무척이나 고무적인 성취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2030년까지 절대적 빈곤을 퇴치하기 위해서는 가늠하기 힘든 정도의 큰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임할 때, 이는 이룰 수 있는 목표가 된다. 만약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취를 경험할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이 인류에게 주시는 형언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을 목도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Best Global News You (Probably) Haven’t Heard번역: 정새롬
복음
율법
그리스도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팀켈러
신앙
사회이슈
문화
육아와 술에 대한 우리의 농담
by Tilly Dillehay
2018-11-01
집 근처 가게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구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엄마의 맥주타임.” 혹은 “육아에 지친 엄마를 위하여.” 술병 뿐 아니라 커피를 마실 때 사용하는 컵도 예외는 아니다. “쉿, 이건 와인이에요.” 술과 육아에 관한 농담은 온라인에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주변의 크리스천 엄마들도 술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사진이나 영상을 자주 보내온다. 예를 들어 “엄마란 자녀의 사랑으로 힘을 얻고, 커피로 마음을 채우며, 술로 세월을 버틴다” 등의 것들이다. 물론 술에 중독된 친구는 없지만, 그래도 축하할 일이 생기면 “와인타임!”을 외치며 엄마들만의 저녁 모임을 갖곤 한다. 이처럼 엄마와 술을 연결 짓는 농담은 슬프게도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말 그대로 육아는 너무 고되다. 너무 힘들기 때문에 그 고된 과정을 이겨내기 위해 술에 의존하려는 것일 터이다. 또한 가벼운 농담을 통하여 긴장을 풀고, 감정을 재조정하며, 더불어 서로를 심심히 위로하는 행위일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목적은 술을 마시는 행위에 대해 논하고자 함이 아니다. 음주에 대해 우리가 입으로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를 고민해 보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 입술의 문”에 “파수꾼을 세우기”(시 141:3) 원하신다. 따라서 육아와 술을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우리의 언어 문화가 누구에게 어떻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엄마의 역할을 감당하는 크리스천 자매들에게 부정적 영향을 준다 “겉으로는 웃었지만 저는 그런 농담들이 무척이나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크리스천이면서 엄마인 한 여성의 말이다. 하룻밤 한잔이던 음주 습관이 이제는 세 잔이 되었다며 이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술에 대한 농담을 들을 때 대부분 웃어넘기지만 사실 그런 말은 결코 좋은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서로를 자연스럽게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죠. 온종일 힘든 육아를 버텼기 때문에 위로의 술이 필요하다고 잘못된 길을 부추기고 있어요.”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농담을 주고받는 방법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 5:4). 술이 스트레스 완화제로 인식되는 세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육아의 고단함을 음주로 잊자는 접근은 꽤 그럴 듯 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러한 농담들은 “성령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엄마의 고된 하루에는 술이 반드시 필요하다”라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 준다. 또한 육아와 음주에 관한 사진을 재미로 공유하는 문화도 크리스천 엄마들에게 걸림돌이 될 수 있다. 혹여 그들이 술의 남용이라는 죄에 도달했을 때조차 진지한 도움을 청하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술을 농담처럼 가볍게 다루는 분위기 속에서는 누군가의 음주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주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나의 문제도 진정으로 받아주기를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크리스천에게 포도주는 감사함으로 받는 선물이다. 따라서 힘든 오늘을 잊게 하는 약으로 술을 인식한다면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시 104:15) 위하여 포도주를 주셨다. 하지만 이를 성령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혹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바라봄으로써 얻게 되는 거룩한 기쁨과 혼동해서도 안 된다. 2.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반기독교적 메시지를 전파한다 육아와 술의 관계를 농담으로 결부시키는 오늘의 문화는 미디어를 통해 점점 더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다음은 ‘Babble’이라는 이름의 맘카페에 올라온 사라(Sarah Cottrell)의 고백이다. “머리 아픈 수많은 일들을 엄마라는 이유로 끝도 없이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정말이지 힘들어요. 저 역시 다른 엄마들처럼 지친 하루의 끝을 습관처럼 인터넷과 술로 달랬어요. 그런데 매일 밤 한 잔이었던 습관이 어느새 다섯 잔이 되었더군요.” 리지(Liz Tracy)는 <뉴욕타임즈>에 육아의 고충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그녀는 만약 술에 대한 기호가 없다면 스트레스와 싸울 다른 방편을 반드시 찾아야만 한다고 언급했다. “살인 사건 시리즈를 시청하는 것이 제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항우울제 복용, 상담 치료, 글쓰기, 그리고 마트에서 카드를 마구 긁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영혼을 회복시키시며, 성화의 과정을 통해 그분의 자녀를 점점 강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해결책은 마음에 와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실제 우리는 어떠한가? 음주에 대한 유머를 주변에 전달함으로써, “그리스도만으로는 만족을 얻을 수 없다. 육아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다”라는 메시지를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이는 리지가 제시한 TV 시청보다 도움이 되지 않는 방법이다. 3. 금욕주의적 성격의 크리스천에게 시험이 된다 크리스천 중에는 여러 이유로 절제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가 세상에 물들지 않으려는 열망 때문일 수도 있고, 알코올 중독에 대한 스스로의 경계 때문일 수도 있다. 술에 대한 억눌림이 있는 성도들 역시 음주에 대해 금욕을 실천할 것이다. 여기서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자들이란 바울이 언급한 마음이 연약한 자들을 의미한다. 주님이 주신 모든 음식이 깨끗하지만 제사 음식을 우상 숭배로 여겨 먹지 아니한 자들처럼,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을 마음이 연약한 자 혹은 술에 대해 억눌림이 있는 사람으로 지칭할 수 있다. 음주에 대한 농담을 마치 마음이 연약한 자들이 극복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문화로 오해하는 사람들은 바울의 충고는 새겨들어야 한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하지 말라. 만물이 다 깨끗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한 것이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롬 14:20-21).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언제나 사랑으로 귀결된다. 바울의 충고대로 술에 대해 억눌림을 가진 자들과 함께 있다면 그들의 마음이 곤란하지 않도록 우리가 술을 삼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쳐 주는 실천적 사랑이다. 따라서 술에 대해 금욕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음주와 관련된 농담 또한 삼가는 것이 사랑의 행위가 아닐까? 우리의 잔이 넘치나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그저 잠시 웃고 지나가는 농담이 아니라 훨씬 더 근원적인 기쁨으로 채워져야만 한다. 엄마로서의 고된 하루를 더 이상 커피나 술로 달래지 말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언약이 내일의 새 힘이요, 진정한 기쁨이 되어야 한다. 약함 속에서 피난처인 주님께로 향할 때 우리의 잔이 넘치는 것을 경험할 필요가 있다. 농담과 진실은 거리가 멀다. 삶 속에서 우리의 입술을 통해 진실로 고백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만이 구원자라는 사실이다. 오늘의 피난처가 아이들이 잠든 후 마시는 시원한 한 잔의 술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크리스천은 진정한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증거해야 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Mommy Drinking Is No Joke 번역: 정새롬
문화
사회이슈
육아
음주
절제
반기독교적
성찬식
처음
이전
열린
16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