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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주는 여덟 가지 교훈
by Mark Oden
2020-03-20
이탈리아 세 번째 도시인 나폴리는 내가 현재 거주하며 사역하고 있는 곳이다. 나폴리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해 이동이 폐쇄된 이탈리아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교회 예배를 포함하여 대규모 집회가 금지되었다. 결혼식, 장례식, 세례식 등 공적 모임이 모두 취소되었다. 학교와 극장, 박물관과 체육관 등 모든 공공장소가 문을 닫았다. 아내와 나는 방금 전 쇼핑센터에서 쇼핑을 마치고 돌아왔는데, 계산대 앞에서 2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이탈리아는 최근 ‘코로나19’ 누적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모두 중국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18일 현재 확진자 35,713명, 누적 사망자 3,000명, 역주). 그 결과, 이탈리아 정부는 전 국민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외출을 자제할 것을 권고했다.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위기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대응해야 하는 한다는 것이 답이다. 한편 우리는 이 폭풍의 눈을 들여다보며, “주님, 이를 통해 무엇을 배우기 원하시나요? 나를 어떻게 변화시키려 하시나요?”라고 물어 보아야 할 것이다.이런 상황에 ‘코로나19’ 사태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여덟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1. 인간의 취약성이번에 세계적으로 찾아온 위기는 인간으로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다(18일 현재 8758명 사망, 역주). 세계 모든 나라의 정부는 이 바이러스가 확산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결국 세계 전역으로 확산되고 말았다.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강력하고 전파력이 더 빠른 바이러스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 그러한 위협에 처한다면, 과연 인류의 종말을 막을 수 있을까? 대답은 명백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잊고 지내는 경우가 많지만, 인간은 참으로 연약하고 쓰러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이다.시편 기자의 말이 진실하게 들린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혹은 ‘코로나19’]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시 103:15–16).이러한 인간의 취약성에 대한 이 말씀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 땅에서 우리의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은혜로 여겨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2. 인간의 평등성‘코로나19’는 민족이나 나라의 국경에 상관없이 퍼지고 있다. 그것은 중국 바이러스가 아니다. 인류 전체가 경험하는 바이러스다. 아프가니스탄, 벨기에, 콜롬비아, 덴마크, 프랑스, 미국 등 150 여 개국에서 발생했다. 우리 모두는 인류라는 거대한 가족의 구성원이며,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창 1:17). 우리의 피부색, 언어, 억양, 문화의 다름은 이 유행병의 눈으로 보면 아무 의미가 없다.세계 각국의 눈으로 보면, 우리는 서로 다르지만, 바이러스의 눈으로 보면, 모두가 똑같은 존재이다.고난이나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로 인한 고통 가운데에서 우리는 모두 완전히 평등하며 말할 나위 없이 연약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3. 통제력 상실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이 잘 통제되기를 원한다. 운명을 다스리고 주도하고 싶어한다. 오늘날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삶의 중요한 부분을 통제할 수 있는 현실이다. 가정의 난방이나 보안 시스템을 원격 조정할 수 있으며, 핸드폰 앱에서 손가락으로 몇 번만 클릭하면 전 세계 어느 곳이든지 송금을 할 수 있고, 운동과 약으로 몸의 건강 상태도 조절할 수 있다.하지만 삶이 그렇게 잘 통제되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 환상일 수 있다. ‘코로나19’와 같은 일을 경험하면, 어쩌면 그것이 거품과 같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여기 이탈리아 당국은 이 바이러스의 확산 방지 대책으로 학교를 폐쇄했다가 개방하고 이제는 다시 폐쇄하고 있다. 우왕좌왕 하는 당국이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 지 모두가 불안을 느끼고 있다.우리는 어떤가? 살균제 스프레이로 무장하고 감염 위험을 줄이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런 행동들이 문제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는가? 단지 통제할 수 있다고 보는 환상일 뿐이다.4. 소외되는 고통우리 교회의 성도 한 분은 며칠 전 이탈리아 북부를 방문했다. 나폴리로 돌아온 그녀는 직장 동료들과의 저녁식사 모임에서 제외되었다. 최근 북부 지방을 다녀왔기 때문에 이 모임에 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다. 위험지역 근처에는 가지도 않았고, 코로나 바이러스 증상도 나타나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분명히 이러한 거리두기는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나폴리 중심에 있는 한 레스토랑 주인은 최근 검진을 받았다. 그는 ‘코로나19’ 확진을 받았는데, 비교적 건강한 상태지만, 이웃사람들의 꺼리는 반응 때문에 슬퍼졌다고 말한다. 한 신문은 그와의 인터뷰 기사를 게재하면서 이렇게 전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보다 더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도시 사람들이 그와 그의 가족을 대하는 방식이다”(Il Mattino, March 2, 2020).제외됨과 소외됨은 감당하기 어렵다. 인간은 관계적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현재 소외를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예수님 시대의 나병환자들은 이 경험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제로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격리되어 살아야 했으며, 그들이 살던 마을을 지나가려면,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쳐야 했다(레 13:45 참조).5. 두려움과 믿음의 다른 점현 위기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 이런 상황에서는 두려움에 휩싸이기가 매우 쉽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감염될 수 있는 장소가 주변에 널려 있다. 컴퓨터의 키보드, 들이 마시는 공기,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 그리고 구석구석, 모든 것이 우리를 감염시키려고 기다리고 있다. 공포를 느끼는가?이 위기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도록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두려움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이다. 믿음은 먼 하늘에 떠 있는 별이나 어떤 무명의 신을 믿는 것이 아니다.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또한 부활이며 생명이심을 믿는 것이다.예수님만 이 상황을 다스리시고, 이 폭풍 속에서 우리를 잘 인도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고 당부하신다.6. 하나님께 의지하고 기도할 필요성세계적인 위기 가운데, 개인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잘 대처할 수 있을까? 이 때 스스로 무용지물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할 수 있다.나라와 도시를 관리하고 있는 당국을 위해 기도하자. 환자를 치료하는 의료진들을 위해 기도하자. 확진 받은 사람들을 위해, 집 밖으로 나가기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험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기저질환이 있고 연로한 고위험자들을 위해 기도하자. 주님이 우리를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자.또한 예수님이 다시 오기를 기도하자. 그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새 창조로, 다시는 사망과 애통과 눈물과 아픔이 없을 곳(계 21:4)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기도하자. 7. 헛되고 헛된 삶“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 현실의 삶에 몰두해 있다 보면, 균형적 관점을 잃기 쉽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사람과의 만남과 각종 계획들, 일과 소망 사항들, 가정생활과 휴가 등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중요한 것과 긴급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고, 일상 가운데서 길을 잃을 때가 많다.아마도 이번의 위기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해보게 하는 듯하다. 무엇이 정말로 중요하고 어떤 것이 헛된 것인지를 가르쳐주는 듯하다.이 위기는 삶에서 정말로 고민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중요한 것과 무의미한 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프리미어 리그나 새로운 주방시설이나 인스타그램은 내 생존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코로나19’는 분명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 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8. 우리의 소망어떤 면에서, “‘코로나19’를 맞이한 현 상황 속에서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그리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미 더 치명적이고 확산이 빠른 바이러스의 존재에 대해 경고하러 오셨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누구도 피할 수 없도록 모든 사람들을 공격한 바이러스 말이다. 이 바이러스는 그냥 사망이 아니라 영원한 사망에 이르게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인류는 죄라고 불리는 세계적인 유행병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이 바이러스에 당면한 우리의 소망은 무엇인가?성경말씀은 ‘죄’라 불리는 바이러스로 감염된 세상에 들어오신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그분은 병자들과 함께 살면서, 방역복을 입지도 않고, 우리와 같이 똑같은 공기를 마시며, 똑 같은 음식을 드셨다. 그분은 사람들로부터-아버지 하나님에게서도-제외되고 소외된 상태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셨다. 병든 세상에 이 바이러스 해독제를 주시고자, 우리를 치유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다. 그분의 말씀을 들어보자.“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8 Things the Coronavirus Should Teach U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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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뉴스의 심리학적 이유와 성도의 대처법
by 노승수
2020-03-16
가짜뉴스는 왜 만들어지는가? 그것을 믿고 싶은 사람 때문에 만들어진다. 소문이란 원래 사실을 따라 퍼지지 않고 감정을 따라 퍼진다. 내가 믿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그 사람이 그럴 리가 없어!”로 반응하게 되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나쁜 소문은 “내 그럴 줄 알았어!”로 반응하게 된다. 이미 믿고 싶은 게 정해져 있는 것이다. 이 믿고 싶은 것에는 사랑과 미움이란 인간의 감정반응이 내재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데는 인간의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 아들러(Alfred Adler)는 “거짓말은 진실이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라고 했다. 사람들이 거짓말에 기울어지게 되는 데는 불안이 자리하고 있다는 말이다. 가짜뉴스는 우리 불안에 기생한다. 불안은 우리 내면에 적개심과 미움을 억압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기도 해서 가짜뉴스가 혐오와 배제, 분노와 적대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각 나라마다 가짜뉴스와 거기에 따라 붙어서 혐오와 배제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반복적으로 듣게 된 가짜뉴스는 우리가 혐오와 배제를 정당화하는 기폭제가 된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어느새 내게 사실이 된다. 가짜뉴스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 이유다. 그러면 어떻게 가짜뉴스는 우리에게 사실처럼 굳어지게 될까? 이것을 잘 설명해줄만한 심리학적인 실험이 있었다. 이 실험의 결과로 얻은 것은 “환상 진실 효과(The illusory truth effect)”라고 명명된 것이었다. 이 효과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이라고 믿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방어하기까지 하는 기제를 말한다. 1977년 미국 빌라노바(Villanova)대학과 템플대학에서 린 해셔(Lynn Hasher) 등이 고안한 실험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을 검증한 것이다. 피험자에게 60개의 문장을 주고 실험자들이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물은 후에 2주 후에 2차로, 다시 2주 후에 3차로 참과 거짓을 묻는 것을 같은 방식으로 반복했는데, 피험자들은 이미 읽은 익숙하고 친숙한 글을 얼마나 합리적인가에 관계없이 사실로 간주했다.1) 예를 들어, “첫 번째 공군 기지는 뉴멕시코에 세워졌다”, “농구는 1925년에 올림픽 종목이 되었다” 등과 같은 내용이었다.따라서 반복적으로 가짜뉴스에 노출되면 “환상 진실 효과”로 인해 가짜뉴스를 진실이라고 믿을 뿐 아니라 사실로 방어하기에 이른다. 사람은 생각보다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세계관으로 해서 다른 것을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게 된다. 가짜뉴스를 접했을 때, 인간의 인지과정은 새 정보를 이미 사실로 알고 있는 것과 비교하기 때문에 논리적이라고 느끼게 되고 반복된 새 문장은 반복되지 않은 문장에 비해 인지과정에서 처리하기 쉽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복되고 익숙해진 것이 사실관계 유무와 관계없이 더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렇게 가짜뉴스는 신자의 삶에서 소비되는 지경에 이른다. 그러면 신자는 가짜뉴스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요시다 도오루의 저서 ‘정치는 감정에 따라 움직인다(원제 : 감정의 정치학)’에 이런 표현이 있다. “인간은 이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목적을 설정하지 않으면, 합리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다.” 이 표현은 인간이란 존재의 정치 활동에 있어서 옳음과 좋음이 함께 경험되는 세계관이 있을 때, 합리성의 감정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장르가 다르지만 이 비슷한 말을 한 신학자가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가 ‘신앙감정론’에서 한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감정에 있다”는 표현이다. 원래 칼빈은 신앙을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것이며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진실성에 근거하는 것이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 지성에 계시되며 우리 마음이 인친 바 된 것”(Inst. 3. 2. 7.)이라고 말한다. 정치가 흑색선전과 온갖 우상이 난무하는 장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 감정적이고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을 때다.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고 했다(잠 29:18). 인간 내면의 불안으로 인해서 가짜뉴스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코로나와 같은 역병이 나돌면 인간의 불안은 더 극대화되고 그 기저에 깔린 적대감과 혐오는 가짜뉴스를 명분으로 세상에 역병처럼 퍼진다. 이런 문제에 대한 신자의 대처는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고하게 아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단지 지성으로만 그렇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음의 자리에 우리 좋음이 함께하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과거 이 나라의 세계관 운동은 학적이었다. 최근 세계관 운동이 주목하는 것은 습관이다. 습관이란 좋음을 따라 형성되기 마련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옳음이 그것이 우리 정서로서 활성화되는 그 자리에 참된 신앙이 있고 이 신앙의 자리야 말로 가짜뉴스에 대처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________________1) Hasher, Lynn; Goldstein, David; Toppino, Thomas (1977). "Frequency and the conference of referential validity"(PDF). Journal of Verbal Learning and Verbal Behavior. 16 (1): 107–112. doi:10.1016/S0022-5371(77)80012-1.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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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속의 교회와 국가
by 이승구
2020-03-13
지방 정부에서 ‘코로나19’ 사태의 추이에 따라, 특히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서 종교집회 금지명령을 검토한다는 말이 들려왔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특별히 여러 목사님과 대화하면서 그런 결론에 이르렀다는 것은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생각한다.교회 공동체는 본래 교우들과 온 국민의 건강을 보호하려고 노력하며 그 점을 늘 가르친다. 특별히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가르칠 때, 그것의 적극적 의미는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보호하고 증진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 공동체는 여러모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신경을 많이 써 왔고, 또 신경을 쓸 것이다. 필요시 제한 명령?혹시 필요하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그 “표현 방식”이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여겨서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한다. 행정부와 교회들이 함께 노력하고 있다는 내용의 협의 결과를 말할 수는 있다. 그런데 내용을 전달하면서 이에 따르지 않으면 “종교시설 집회 제한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표현을 하면,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을 제약할 수 있다”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 제기로 들리기에 이런 식의 표현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상당수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한다.국가와 교회의 구별국가와 교회는 각기 독립적인 기관으로 각각의 영역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하는 기관이다. 물론 중세 때나 지금 이슬람권과 같이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려고 시도한 때도 있었다. 나치와 일본 제국주의 시대, 공산사회처럼 국가가 교회와 종교 활동 전체를 통제한 적도 있었다. 이 모든 역사의 과정을 통해 국가는 국가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하고,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목적을 다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과적으로 국가와 교회는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독립된 기관이라는 이해를 발전시켜 왔다. 간단히 표현해서 ‘국가와 교회는 상호 독립적’이라고 했다(the separation of the state and the church). 정부와 국가는 독립적 기관으로 제 역할을 할 때 그것이 결과적으로 서로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유럽 역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역사를 가지고 시작한 미국은 처음부터 국가와 종교의 구별을 아주 분명히 하면서 활동해 왔다. 미국이 국교(國敎)를 가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요즈음 이것을 지키지 않으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고, 또 그것을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면 그들이 겪은 복잡한 역사를 반복하는 것이기에 우리가 불안해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있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성도들의 이중적 자격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은 동시에 국가의 국민이므로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하고, 더 좋은 국가가 되도록 힘쓰고 있다. 그래서 모든 성도가 국민으로서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 옛 변증론자들이 강조해 온대로 우리는 좋은 시민임이 틀림없다.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일은 우리가 잘 해낼 것이다.그러나 교회가 어떻게 활동을 할 것인지의 문제,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교회의 예배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교회 공동체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고 성경으로부터 배웠다. 이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 유럽은 수없이 많은 어려운 과정을 겪었고, 많은 피를 흘렸다. 그리고 얻은 결론이 국가와 교회의 분리라는 원칙과 실천이었다. 이 원칙이 무너지는 듯한 상황이 발생하는 순간 교회 공동체는 성경의 원칙이 버려지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매우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바라기는 우리나라의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가 예배에 있어서 어떤 강제력을 행사할 수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표현이나 그런 생각을 하지 말았으면 한다. 또한 교회의 성원들도 이 원칙, 교회의 문제는 교회가 결정하고 교회가 시행해야 한다는 원칙에 참으로 충실해야 한다.‘코로나19’ 사태는 극복될 것이고 별문제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번 일이 지난 후에라도 그 누군가가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 공동체의 활동에 제한을 줄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때, 그것은 결과적으로 매우 심각한 문제를 촉발할 수 있는 일이 된다는 것을 모두가 명심했으면 좋겠다. ‘코로나19’ 사태 정도가 아니라 더 크고 매우 복잡한 상황을 일으키게 될 것이다.교회 공동체의 정치적 주장?교회 공동체도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의 문제에 관여하여 이렇게 저렇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중앙정부든 지방 정부든 정부는 독립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의 성도들은 국가의 구성원이므로 개인 자격으로 다른 시민들과 함께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으로서,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그리하는 것이다. 개인들이 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견해를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단체를 구성해서 여러 의견을 말하고 여러 활동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교회의 이름으로는 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이름으로는 어떤 것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에 교회로서의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모든 교회가 일어나 피해를 무릅쓰면서 주장을 할 때 그것을 무겁게 여길 수 있는 최소한의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진보라는 사람들과 보수라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만을 해왔다. 현재 우리가 교회의 중요한 문제를 제기해도 전혀 듣지 않을 가능성이 많은 상황을 만들어 놓았다. 우리 스스로가 한 것이다.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어떤 주장을 하는 때의 심각성교회가 교회의 이름으로 국가에 어떤 요구를 할 때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명확한 교회의 활동을 외부 세력이 간섭하는 경우다. 이때는 우리가 모든 어려움을 각오하더라도 교회 전체가 한목소리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교회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경우다. 신사참배를 하면 예배당에서 예배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예배당을 폐쇄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모두 나서서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었어야 한다. 그러나 그때 구성원들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는 국가적 행사이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고 결의했고, 결국 몇몇 분들만 순교 당하고, 옥중 성도가 되었다. 우리에게 또 그런 일, 교회 전체로서 어떤 주장을 해야 할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그런 날이 오더라도 이전과 같이 순응해 버리고 몇몇 사람만이 어려움을 당하는 과거와 같은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이 사태를 일제하의 상황과 같다고 이야기는 것이 아니다. 문제는 어떤 경우에는 국가가 교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교회 구성원들의 의식 속에도 내재해 있다는 것이다.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정치 지도자들이 필요하다면 이런 정책을 쓸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적어도 성도들은 그것은 안 된다고 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은 기류가 감지된다. 교회로서 지체 의식이 더 분명해져야만 한다.부디 성도들 각자가 좋은 시민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에 충실할 수 있기를 바란다. 또한 우리의 교회 공동체가 교회의 성격을 잘 유지하고,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여러 활동을 제대로 해 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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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고백서들로 읽는 '코로나19'의 정국
by 장대선
2020-03-10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하여 시작된 일련의 사건들, 특히 신천지 집단의 일방적이고도 맹목적인 신앙의 태도에서 발생한 급격한 바이러스의 전파는 급기야 경기도지사의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단계에 이르게 했다. 국회에서도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는 등 파장은 그야말로 대한민국의 모든 종교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다.이와 관련하여 안타까운 것은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경기도지사 또한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는 점이다. 아울러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한 국회의원의 상당수도 기독교 신자이다. 즉 기독교 관원이라 할 그들이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확립하신 신앙과 양심의 자유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전혀 혹은 거의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혼란 중에도 현 정권에 대한 반대와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하는 일부 급진적 성향의 보수 기독교 단체들은 대정부 차원의 반대와 퇴진 운동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과 같은 대책을 신학적인 비평과 국가 권세와 교회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 이해하는 관점에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알 수 있듯이 ‘정교분리’(the separation of church and state)란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전혀 별개로서 규정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존재와 구성원들이 모두 국가라는 제도적인 영역 안에 포함된 이상, 교회와 국가의 관계가 완전히 별개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만 서로 교차하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 혹은 서로 교차할 수 없는 영역을 얼마만큼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이해와 규정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교회의 문제에 국가의 공권력이 관여해서는 안 되고, 세속정치에 교회가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철저한 정교분리가 교회의 바람직한 입장이라고 한다면, 미군정 하에서 교회가 받았던 적산가옥의 활용이나 군사정권 하에서 반공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역할로 받은 수많은 혜택은 전부 불법이며 정당하지 못한 것이다.사실 장로교회는 교회와 국가권력 사이의 적절한 영역설정에 성경적인 지침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의 시대로부터 17세기 개혁신학이 융성했었던 시기에 이미 충분한 경험과 신학적 검증 가운데서 적절한 영역을 설정한 것이다. 16세기에 이미 융성한 장로교단을 형성하고 있었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신앙고백(1559)에서부터 17세기 장로교회의 신앙 표준을 완성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 이르기까지, 장로교회는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적절한 관계가 어떠한 것인지를 충분히 입증하는 신조와 교회 정치의 원리들을 산출해 둔 것이다. 예컨대 프랑스 신앙고백 제39조를 보면, 관원의 역할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무질서와 정욕을 억제할 굴레로 세상에 세속정부와 법률을 세우셨다고 믿는다. [중략]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만 십계명의 두 번째 돌판 만이 아니라 첫 번째 돌판을 거스르는 범죄까지 억제하시기 위하여 관원들의 손에 검을 쥐어 주신 것이다.”라고 했다. 제40조에서도 관원에 대한 복종에 관하여 “우리는 관원들의 법률과 규칙에 따르며, 세금, 조세, 그 밖의 의무를 수행하고, 비록 그들이 불신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침해받지 않는 한 자율적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복종하는 멍에를 메야 한다.”고 했다. 벨기에 신앙고백(1561)에서는 제36조에서 위정자들에 관하여 “그들의 직책은 단지 국가의 복지에 관심을 두고 감시할 뿐 아니라, 거룩한 목회사역을 보호하며, 모든 우상숭배와 거짓된 예배를 제거하며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중략] 그러므로 위정자들은 어디서든지 복음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을 장려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명령하신 대로 모든 사람에게서 존귀와 예배를 받으시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647)에서도 제23장 국가의 관원에 관하여 서술하는 과정 중 3항에서 이르기를 “관원은 말씀과 성례의 집행도, 천국 열쇠의 권세도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관원은 교회에 일치와 평화가 유지되도록, 또한 하나님의 진리가 순결하고 온전한 상태로 간직되도록, 그리고 모든 신성모독과 이단들의 활동을 금지하도록, 아울러 예배와 권징에서 생기는 모든 부패와 악습을 예방하거나 개혁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모든 규례가 정당하게 확립되고 시행되며 준수되도록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또 그렇게 하는 것이 관원의 의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이처럼 이미 언급한 프랑스 신앙고백과 벨기에 신앙고백,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만 하더라도 교회와 국가의 위정자 혹은 관원들에 대한 분명한 역할과 한계를 규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수많은 개혁된 교회들의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에서 동일한 맥락의 문구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교회들은 이미 그에 관한 입장을 충분히 정리했다. 물론 현대사회의 관원들이 모두 기독교 신앙을 가진 것이 아니다. 대부분은 다종교국가로 존재하는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로교회의 신자는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얼마든지 적절한 실천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더욱이 교회의 신앙을 가진 관원들의 경우라면 더더욱 신앙고백에 근거하여 자신이 감당해야 할 적절한 실천이 무엇인지를 알고서 행해야 마땅한데, 안타깝게도 한국의 교회들에 출석하는 관원들의 대부분은 그렇게 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현실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0장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에 관한 일련의 항목은, 작금의 ‘코로나19’ 바이러스 정국 가운데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이나 무분별한 정치적 선동을 일삼는 일부 단체들에게, 그리고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는 현 실정에 대해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할 수 있는 지침들을 서술하고 있다. 선동을 주도하는 일부 세속정치 지향의 사역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한 종교집회 자제촉구 결의안’을 채택하고 ‘종교집회 전면금지 긴급명령’을 고려하고 있는 가운데 그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행해야 할 기독교 관원들에게는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을 살펴보아야 한다. 작금의 ‘코로나19’ 정국 가운데 깊이 엮여 있는 신천지 이단과 그들에게 빠진 자들에게는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을 통해서 분명하고도 성경적인 판단과 조언을 들어야 한다.교회의 사역자들과 신앙인들 가운데 이러한 신앙고백의 문맥을 특정한 시대, 곧 16세기와 17세기 유럽 지역의 종교․사회적인 특수성으로 이해하고 고려해야지 오늘 우리 시대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하는 견해를 흔히 볼 수 있다. 신앙고백은 단순히 그 시대의 영주들이나 관원들의 견해나 입김을 의식하여 작성한 것이 아니며,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그러한 견해를 결코 섣부르게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예컨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세와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자유는 서로 파괴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호 간에 서로를 지지하고 보존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핑계로 국가적인 권세든지 교회적인 권세든지 간에 어떤 합법적인 권세나 그 권세의 합법적인 행사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다.”라고 한 4항 초반부의 신앙고백이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종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그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기 위하여 보낸 총독에게 하라. [중략]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한 벧전 2:13-16절 말씀을 근거로 한 것이다. 또한 “하나님만이 양심의 주인이시며, 따라서 믿음의 문제이거나 예배의 문제이거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거나 벗어난 ‘사람의 가르침이나 명령’에 양심을 얽매이지 않게 하셨다. 그러므로 양심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믿거나 그런 명령에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를 저버리는 것이다.”라고 한 2항 초반의 신앙고백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한 행 4:19절 말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아울러 “그리고 ‘맹목적인 양심’과 ‘절대적이고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며, 이성도 역시 파괴하는 것이다.”라고 한 2항 후반부의 신앙고백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한 롬 10:17절의 말씀과 그 외의 수많은 성경 구절들에 근거하여 정리하며 고백한 것이라는 사실을 살펴본다고 한다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비롯한 역사적 신조와 신앙고백의 문구들을 그처럼 쉽게 시대적인 산물로 간주할 수가 없을 것이다.지금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일들 가운데서, 많은 신앙인이 의외로 간단하게 자신들의 신앙적 밑바닥을 보이는 것 같다. 즉 국가 위정자들에 관하여, 이단들에 대하여, 그리고 예배에 관하여 너무도 쉽게 자신들의 오류와 불신앙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일들이 결코 간단하고 짧은 생각 가운데서만 이뤄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속에 있는 믿음과 신앙의 기초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이 시대의 변화가 제시하고 있는 질문에 대하여 과연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올바른 답을 줄 수 있는지를 스스로 통찰하는 의미로서, 이미 역사를 통해 충분히 논의되고 검증되었던 신앙고백서와 신조들을 깊이 있게 탐구해 보는 차분하고 건전한 열정이 절실히 요구되는 대목이다. 섣부른 답변을 남발하기보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행 17:11-12)았던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과 같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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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by John Piper
2020-03-02
Podcasts_Ask Pastor John 특별 중계! 긴급 ‘코로나19’에 대한 존 파이퍼 목사의 팟캐스트 인터뷰를 아티클로 전합니다.[토니 랭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존 파이퍼 목사에게 묻다’의 특집 녹음을 위해 존 파이퍼 목사님과 함께 스튜디오에 있습니다. ‘코로나19’가 온 세계에 전파되고 있다는 신문보도가 헤드라인을 장식하고 있으며, 현재 53개국에 걸쳐 확산되고 있습니다. 감염자는 세계적으로 8만3천 명을 넘어섰습니다. 사망자 수는 거의 3천 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몇몇 국가에 확산되던 현상에서 이제 전세계적으로 유행처럼 퍼져가는 상황에 이르고 있습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부통령에게 미국에서 이 바이러스를 멈추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또 많은 이들은 절망적으로 봅니다. 바이러스 전파가 멈추지 않을 것이며 몇 달 동안 계속될 거라고 말합니다. 어떤 전문가들은 결국 많은 미국인들이 이 바이러스에 노출될 거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여전히 많은 추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세계 시장 경제가 빠르게 하락하고 있습니다. 수출입과 국제 무역 중단으로 다우존스 지수는 이번 주에 계속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헤드라인과 검증되지 않은 뉴스들로 정보에 대한 신뢰를 잃고 두려움에 빠지기 매우 쉽습니다. 이러한 국제적 불확실성이 이제 미국에도 도달했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 남부아시아에 사는 팟캐스트 경청자들로부터 현지의 최근 정보를 제공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싱가포르에 사는 한 남성이 이런 질문을 보내주었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 안녕하세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중국에서 시작하여 전세계 여러 나라를 감염시키는 양상으로 펼쳐지는 상황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싱가포르에 들어왔을 때, 정부와 시민들은 이에 대처를 잘했고, 우리가 힘을 합쳐서 잘 대응하여 국제적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대응은 엇갈렸습니다. 몇몇 교회는 예방 대책을 주지하면서 주일 예배를 지속해서 드렸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예배를 모두 중단했습니다. 몇몇 목회자들은 ‘믿으면 바이러스에 전염되지 않도록 하나님이 막아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목회자들은 ‘죄악 가득한 도시와 교만한 국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목사님, 크리스천들이 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는 이러한 상황을 성경 말씀에 근거하여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존 파이퍼]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물은 질문에 저는 성경에 근거하여 대답해보려 합니다. 우선 답을 하기 전에, 제가 여러분에게 의문을 품도록 잘못 말한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 중 하나는, 사람들이 고통에 대비하도록 돕는 것과 고통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것을 제가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누군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순간에 신학에서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구현하는 것을 구분했기 때문입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현재 죽어가고 있으며, 수십만의 사람들이 애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이 그분들의 삶과 시간적으로 잘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한 교회의 입장에 서 있다면, 지금 여기서 말할 때인지 아닌지를 분별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이제 받은 질문으로 돌아가 대답해 봅시다.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한 이해. 임상적, 역사적 사실과 성경이 말하는 명백한 사실로 시작합시다. 2004년 12월 26일, 주일에 인도양에서 일어난 쓰나미로 인해 20만 명의 사람들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여 예배드리던 사람들도 예외없이 쓸려내려 갔습니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크리스천들이 거기에 있었다면, 이러한 일은 크리스천들에게도 일어났습니다. 이제 성경적 사실을 봅시다. 마가복음 4장 41절은 “그(예수님)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8).그래서 이 두 사실-역사적 사실과 성경적 사실-을 함께 연결하면 이러한 진리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 자연 재해를 멈출 수도 있었으나 2004년에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항상 지혜롭고 옳으며 정의롭고 선한 것을 행하시므로, 그 치명적 재해 속에 지혜롭고 선한 목적을 가지고 계셨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이번 ‘코로나19’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힘에 대해서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그 바이러스가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다음에 어디로 갈 것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제지할 수도, 제지하지 않을 수도 있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 일이 일어난 배경입니다. 죄나 사탄, 질병이나 피해 그 어느 것도 예수님보다 강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주도권을 잃어본 적이 없으며, 원치 않는 일을 용인하도록 강요받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시 33:11).욥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욥 42:2). 그러므로 문제는 예수님이 모든 죄악되고 사악한 차원까지 포함하여 세상의 모든 재난과 질병을 감독하고 제한하며 인도하고 지배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 그리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성경에 근거하여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느냐 입니다.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우리가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4가지 성경적 근거들이 여기 있습니다.1. 타락의 결과로 탄식하게 된 세상아담과 하와를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인 우리의 몸을 포함하여 창조된 만물들이 타락과 허무를 경험할 것이며,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이 죽을 것이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으로 구원받은 크리스천들도 이러한 육체적 타락과 허무와 사망을 피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로마서 8장 20-23절의 요점입니다.“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다음 구절은 크리스천들에게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모든 창조물이 질병과 재해와 죽음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광의 자유를 물려받을 날이 오고 있습니다. 그때까지 크리스천들도-바울은 “성령을 받은 우리들도”라고 말합니다-타락과 허무와 질병과 재해와 죽음을 모든 창조물들과 함께 나누며 탄식할 것입니다. 탄식하며 (부활의 때에 일어 날)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면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천들에게 다른 점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 타락한 현실이 정죄함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은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합니다. 우리의 고통은 정화시키기 위함이지 징벌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살전 5:9). 우리는 어떤 특정한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람들처럼 질병으로 죽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원죄 때문에 모든 사람들처럼 죽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의 쏘는 것이 제거되었습니다(고전 15:55). 이것이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하기 위해 토대로 사용할 수 있는 첫 번째 사실입니다.2. 은혜로서의 질병하나님은 때로 그분의 백성들을 정화시키고 심판에서 구하시기 위해 질병을 주기도 하십니다. 그것은 정죄가 아니라 구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은혜 행위입니다. 이 점은 고린도전서 11장 29-32절을 근거로 합니다. 이 본문은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하는 점을 다루고 있지만, 그 원리는 더 폭넓게 적용됩니다.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주의 성만찬에 참여하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크리스천들]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질병과 연약함과 죽음으로]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어린 아이와 같이]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이제 그것을 충분히 이해합시다. 주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통해 사랑하는 자의 생명을 거두십니다. 예수님은 연약함과 질병을 치유실 때(마 4:23; 8:17; 14:14)와 그들을 천국으로 데리고 갈 때를 묘사하기 위해 똑같은 단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죄의 행보를 끊으시고 그것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그들을 천국으로 데려가십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이들은 질병으로 죽지만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고전 11:32)함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고린도에 있는 그분의 사랑하는 자들 몇 명을 그리 하실 수 있다면, 지금도 ‘코로나19’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에게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주의 성만찬을 잘못 사용해서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종류의 죄악된 행보에 대해서도 그리하실 수 있습니다. 모든 죽음이 특정한 죄 때문만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근거입니다. 3. 심판으로서의 질병하나님은 그분을 거절하고 스스로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특정한 심판을 내리기 위해 때로 질병을 사용하십니다. 두 가지 예를 들어드리겠습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헤롯왕은 스스로 높여 신이 되려했습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행 12:23).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모든 이들에게 그같이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교만한 우리의 많은 통치자들이 매일 바로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 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는 순전히 일반 은혜와 자비일 뿐입니다.또 다른 예는 동성애적 성교의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것은 로마서 1장 18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진노의 예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것이 세 번째 근거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길을 거절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심판을 내리기 위해 질병을 사용하실 수 있고, 지금도 사용하고 계십니다. 4. 하나님의 천둥소리모든 자연 재해, 즉 홍수, 가뭄, 메뚜기 떼, 쓰나미 혹은 질병 등은 심판을 내리려 하시는 하나님의 천둥소리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영원한 은혜로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 있든지 회개하고 그들의 삶을 바르게 하라고 부르시는 촉구입니다. 이 근거는 누가복음 13장 1-5절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성전에서 예배자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옆에 서 있던 사람 18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에게 그 이유를 듣기 원합니다. 제가 받은 질문처럼 말이죠. “좋아요. 예수님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해 좀 시켜주세요. 이 자연 재해와 그 잔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씀 좀 해주세요. 이 사람들은 그냥 그 옆에 서 있다가 죽었습니다.” 누가복음 13장 4-5절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옵니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이것이 이 순간 ‘코로나19’로 탄식하는 이 세상의 모든 개인들에게 주시는 예수님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경청하고 있는 여러분, 토니와 모든 사람들, 그리고 세상의 모든 통치자들, 이에 대해 듣는 모든 이들은 하나님의 “회개하라”는 천둥소리 메시지를 받고 있는 겁니다. (저는 중국 당국이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최근 읽은 기사에 따르면, 그들은 최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점점 가혹하게 대하고 억압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에 맞추기를 바랍니다. * 방송 직접 연결 Podcasts_Ask Pastor John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Do We Make Sense of the Coronavirus?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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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파이퍼
전염병 앞에 역사적 기독교회는 어떻게 했을까?
by 장대선
2020-03-01
일반적으로 교회는 구약시대로부터 항상 있어온 것이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바탕으로 하는 기독교회로서의 교회의 시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하신 바에 따라 사도들의 사역을 통해 형성된 소위 ‘초대교회’(Early Church)로 본다. 그리고 그 때에 사도들과 전도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하던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비상직원’(Extraordinary Officer)이라고 하는가 하면, 그 때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통상적인 교회의 직무를 감당하는 자들을 가리켜서 교회의 ‘통상직원’(Ordinary Officer)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의 직원들 혹은 사역자들은 통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이며, 그런 직원들에 의해 유지되는 교회는 통상적인 형태로 운영되는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운영과 관련한 치리규정들은 통상적인 운영의 원칙들과 규정들로 정해져 있다.그러나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이 항상 통상적이기만 한 것은 아닌데, 예컨대 전쟁이나 전염병 혹은 재해와 같은 비상적인 상황이 야기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들은 통상적인 교회의 운영을 기록한 여러 치리서들에서 쉽게, 혹은 세세하게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독특하게도 16세기 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에서는 이미 그러한 경우들에 관해 상당히 상세하게 기록한 것을 찾아볼 수가 있다.먼저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제10장에서는 “신실한 모임에서 행해진 신앙 행위에 관하여” 다루는 가운데, 3조에 명시하기를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 내용: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임직을 받을 때, 그리고 전국 총회의 소집에 관하여 의문이 생길 때,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가능하면 금식을 시행하도록 조언하며, 그들이 만장일치로, 편리하게 그것을 위한 시간과 장소를 정한다면, 가능한 한 많이 행할 수 있다.”고 언급하여 명시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또한 성찬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12장에서도, 10조에서 “성찬이 시행될 때와 마찬가지로, 잡다한 병자들이 들어올 경우 건강한 가운데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잔을 취하는 것을 조심하게 되므로, 이 경우에 목사와 장로들은 최대한의 신중한 태도로 이 일을 행하며, 경건한 질서가 유지되고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고 명시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공히 언급된 전염병의 상황에서 교회는 최대한 신중하고 성숙한 고려 가운데 행하도록 권장하되, 아울러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과 같은 특별하고 비상적인 행실 가운데서 그처럼 신중함과 조심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하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한 비상적인 위기의 상황에서 프랑스 개혁교회는 신중하고 조심스런 대책 마련뿐 아니라, 오히려 신실하고 간절한 기도와 금식으로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그런데 코로나 바이러스(COVID 19)로 말미암아 최근 한국의 교회들은 공예배 중지 및 예배당 폐쇄와 같은 초유의 일들을 급작스럽게 겪고 있다. 특별히 예배당에 모이는 집회와 행사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던 그동안의 교회 운영으로 볼 때에, 그처럼 공예배 및 각종 모임들을 중지하거나 잠정적으로 폐쇄하는데 따른 대비책 또한 실질적으로 갖추고 있지 못한 실정이기에, 그 충격과 혼란이 상당하다 하겠다.하지만 일찍이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에서는 그러한 경우에 “하루 혹은 그 이상의 날을 공적 그리고 비상 기도, 그리고 금식”을 하도록 했는데, “그러나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나 미신이 없이 행하며, 또한 이 모든 것은 이러한 섭리의 근거와 명분의 성숙한 고려 하에 행해야 한다.”고 하여, 그러한 기도와 금식이 결코 신비적으로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렇다면 그처럼 신비적이거나 미신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고려 하에 시행하는 비상 기도와 금식과 같은 것의 실제적인 시행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이었을까?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파악해야 하는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 가정예배모범’으로 흔히 알려진 웨스트민스터 가정예배모범(The Directory for Family Worship)으로서, “개인 및 사적 예배와 성도 간의 상호 교화를 위해, 그리고 가정예배를 소홀히 하는 일들을 책망코자 총회는 아래와 같이 지침을 마련하여 준수하도록 결의한다.”고 한 문구를 배경으로 한 개인 및 사적 예배, 그리고 가정예배를 지도하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의 역할이다. 즉 “본 총회는 개교회의 목사와 치리장로들이 개교회에 소속된 각 가정들에서 이 같이 중요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은 아닌지 부지런히 살펴보고 돌아보도록 명한다. 만일에 그러한 가정이 발견된다면 그 가정의 가장이 먼저 그 잘못을 시정하도록 사적인 권면이나 경고를 받아야 할 것이며,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러한 잘못을 시정하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 한다면 지교회의 치리회(혹은 당회)에 의해 엄중한 책망을 받도록 해야 한다. 만일 그처럼 책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가정예배를 소홀히 한다면, 그와 같이 심각하게 당회의 지침을 위반하는 그 강퍅함으로 인해 성찬을 받기에 합당치 못한 자로 간주되고 이를 뉘우치고 돌이키기까지 성찬참여를 금함이 마땅하다.”고 한 지침과 같은 맥락으로, 평소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적인 예배와 행사 뿐 아니라 사적이거나 개인적인, 그리고 각 가정에서의 예배를 통해서도 경건한 신앙을 유지하고 도모할 수 있는 훈련과 여건이 전제될 때에, “쓰라린 박해의 때, 그리고 전쟁, 전염병, 또는 기근, 또는 다른 괴로운 고통의 때”를 제대로 대비할 수가 있는 것이다.안타깝게도 우리의 신앙과 경건의 패턴에 있어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가정예배를 통한 신앙과 경건생활이다. 양적 성장을 위주로 하여 구성된 대부분의 교회들 가운데서 이처럼 사적이고 개인적인 경건생활, 그리고 가정에서의 경건생활을 유지하는 예가 드물며, 그조차도 지교회의 지도와 치리와는 거의 별개로서 철저히 개인적인 사안으로만 인식되어 있는 실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 동안 우리들이 드려온 예배와 공적인 모임들이 혹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것이었기에 공적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까지 내몰리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러한 재앙과 질병의 때를 극복할 사적이고 개인적인, 무엇보다 각 가정을 책임지는 영적인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지원이 교회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는지 진지하게 고려하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일 것이다.
코로나19
가정예배
기도
금식
경건생활
공적예배
성찬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하나님이 증오하시는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
by Steve Hoppe
2019-05-22
톰은 아내 사라의 외모에 일일이 간섭을 하며 자신의 취향에 따르도록 강요한다. 아내의 옷을 골라주고, 헤어스타일을 정해주며, 몸매를 유지하도록 식사량도 제한한다. 사라가 톰의 간섭에 대항하면, 그는 에베소서 5장 22절 말씀을 인용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미란다는 자녀를 과잉 보호하는 엄마다. 19살인 딸 케이트가 나쁜 친구들과 접촉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 홈스쿨링을 한다. 또한 딸이 운동이나 댄스 수업에 가지 못하도록 막고, 운전 면허도 따지 못하게 한다. 그녀는 자신의 양육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5장 33절 말씀을 인용한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빌은 아내 엔지가 원치 않을 때에도 성관계를 강요한다. 그는 관계 중 아내를 거칠게 다루고 가끔 때리기까지 한다. 빌은 고린도전도 7장 4절 말씀을 대며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이 세 가지 사례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배우자나 부모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를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의 사례들이 극단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실상은 이보다 더욱 심하다. 부부 생활 상담가이자 목사로서 나는 그간 가정에서 벌어지는 소름 끼치도록 끔찍한 영적 학대의 사례들을 경험하였다.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란 무엇인가먼저 가정의 영적 학대가 무엇인지 짚고 넘어가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다른 가족을 통제하는 데 성경 말씀이나 성경적 원칙, 영적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다.학대는 성적(빌의 사례), 신체적(빌의 사례), 사회적(미란다의 사례), 정서적(톰의 사례), 언어적, 경제적 또는 심리적 폭력의 성격을 띨 수 있고, 이 중 한 가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복합적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여기에 더해지는 문제는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기독교 신앙을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가해자의 굳은 마음이 말씀을 흐릿하고 이기적인 렌즈에 비춰 해석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의 진실을 왜곡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계명에 반하는 행위이다.영적 학대가 가정에서 많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영적 학대가 가정에서 이토록 자주 그 추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가족은 우리에게 기쁨부터 고통까지,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안겨줄 수 있는 강력한 관계성을 가진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족이 서로에게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만큼, 서로를 통제하고 싶은 유혹 또한 크다. 가정의 영적 학대자는 이런 악한 유혹에 넘어간 사람들이다.둘째,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는 비교적 그 현장을 감추기가 쉽다. 해가 지고 문이 닫히면 그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친구도, 친척도, 교회도, 그리고 경찰도 알 수가 없다. 이 때문에 가정 학대를 증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며 가해자들이 노리는 것도 바로 이 점이다. 영적 학대가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각 가정과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가정에서 영적 학대가 일어나는지를 알 수 있는 15가지 신호가 있다. 모든 신호가 포함됐다고 할 순 없지만, 이 체크 리스트는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만약 당신의 배우자나 부모가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아래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적 학대를 당하고 있다.1. 신체적 상해를 입힌다2. 성생활을 강요한다3. 모욕적인 말이나 욕을 한다4. 다른 가족으로부터 고립시킨다5. 협박을 한다6. 당신의 친구 관계를 비이성적으로 제한한다7. 재정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8. 다이어트나 운동을 강요한다9. 불합리한 이유로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10. 개인 이메일이나 SNS 계정을 통제한다11. 소그룹이나 교회 모임 등의 사회 활동 시 당신이 할 수 있는 말과 없는 말을 정해준다12. 방이나 옷장, 지하실에 당신을 가둔다13. 이동 수단을 차단한다14. 상담가나 멘토 등 신앙의 리더에게 연락하지 못하게 한다15. 당신의 죄에 대한 벌을 준다나는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이 모든 학대의 사례를 보았다. 하나님은 이를 증오하신다하나님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를 어떻게 바라보실까? 그분은 이를 명백하게 싫어하신다. 하나님은 모든 영적 학대를 증오하신다. 디도서 1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이단을 가르치는 유대인들을 꾸짖는다. 그들의 행위가 영적 학대와 매우 흡사하지 않은가?"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할례파 가운데 특히 그러하니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아니한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0-11, 16).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영적인 학대를 혐오하신다.침묵을 깨라영적 학대는 수 세기 동안 가정에서 행해졌지만, 이를 폭로한 피해자는 소수에 불과하다. 왜 다수의 피해자는 침묵하고 있을까? 적어도 세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첫째, 일부 피해자들은 자신이 학대를 당하는지도 모른다. 신앙이 어리기 때문에 아직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제대로 알지 못할 수 있다. 혹은 본가에서 비슷한 영적 폭력을 경험하며 자라서 이런 행동이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가해자를 너무 사랑하여 학대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유가 무엇이든, 많은 피해자들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아니 하지 못하는 것이다.둘째, 어떤 피해자들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가해자들은 종종 교회에서 존경 받는 장로나 목사 혹은 영적 리더, 심지어 의지할 대상인 부모 등의 위치에 있다. 그들은 대개 피해자들이 가지지 못한 신앙적, 관계적 자산을 공개적으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피해자들이 교회가 '영적으로 성숙해 보이는' 가해자의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은 입을 열지 않는다.셋째, 피해자들은 대개 두려워한다. 이 사실을 알렸을 때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아닌지? 상대가 사실을 부인할 뿐더러 피해 사실을 알린 것 때문에 더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영적으로 미성숙하다고, 혹은 정신이 이상하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악하다고 망신을 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외에도 충분히 가능성 있는 상황에 대한 걱정으로 피해자들은 공개적으로 학대의 실상을 알리는 것에 대해 꺼리게 된다.진작에 우리 목회자들과 교회 리더들은 모든 종류의 폭력에 대항했어야 했다. 여기엔 교회와 가정에서의 영적 학대도 당연히 포함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가정의 영적 학대는 생각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난다. 순진한 양이 매일 피해를 당하고 있다. 그리고 가정과 교회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다.그러므로 우리 모두 가정의 영적 학대를 몰아내기 위한 민감하고도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반드시 기울여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Hidden Epidemic God Hates 번역: 박현아
문화
사회이슈
영적학대
가정
피해자
증오
두려움
침묵
교회는 중독자에게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할 수 있는가?
by Kent Dunnington
2019-02-15
중독자들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가 있었다. 중독자들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이 중독자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중독자’ 개념, ‘중독’과 ‘중독 물질’에 해당하는 개념은 현대의 산물이다. 중독자라는 명사를 처음 사용한 기록은 19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현재 통용되는 중독이라는 개념은 분명하게 미국적 상황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개념이 미국의 금주 운동의 상황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편, 예전에는 중독자들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면, 오늘날에는 모든 이들이 중독자인 것처럼 보인다. 20세기 초에 중독의 개념이 형성된 이후, 이는 대중의 의식 속에서 동화되고 점점 더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 중독의 목록들은 점점 더 늘어났고, 이제 현대인들은 ‘중독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독은 우리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주요 중독(major addict)은 우리 시대의 무서운 질병이다”와 같은 말은 중독이 사회 전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방증한다. 중독의 보편화라는 개념은 특히 서구에서는 거의 모든 일상에서 사용되고 있다.작금의 한국 사회 역시 중독이라는 렌즈를 통해 자신의 행동을 살펴보려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가지에 중독되어 있을 가능성에 대해 걱정한다. 예전에는 달콤한 음식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여기던 것을 이제는 초콜릿 중독으로 보게 되었고, 또 사무실에서 오래 일하는 것을 이제는 일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정욕이라고 여기던 것을 현대에는 성 중독이라고 보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중독이 이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이유일까? 우리 시대와 문화가 중독 그 자체를 마치 매력적인 선택으로 보게 하고, 우리의 행동과 경험을 자연스럽게 중독이라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도록 만드는 이유는 정확하게 무엇일까? 사실 나는 중독이 현대성에 대한 구체화된 문화적 비평의 일종이며, 중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현대 시대의 선지자 역할을 한다고 믿는다. 교회는 무의식적이지만 선지자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교회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면, 교회의 고유한 문화가 어떻게 중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일조했는지, 교회가 이에 대한 대안 문화를 제공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대안 문화에 요구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점검해 보게 될 것이다. 중독이라는 매혹적인 우상중독은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우상의 한 형태이다. 다시 말해 중독은 그 대상이 곧 신이라는 거짓 약속을 아주 잘 이행하기 때문에, 독특하게 매력적이며 사로잡는 힘이 강력하다. 모든 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번영과 성취를 자신의 능력으로 달성하고 스스로 확립하게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다. 특히 중독은 우리의 시도가 거의 성공에 근접하게 하는 반역이기 때문에, 매우 강력하고 유혹적이며 매력적인 반역죄이다. 또한 너무나 극적이고, 총체적이며, 끊기 힘들만큼 집요하게 사람을 유혹하므로 중독은 막강한 우상 숭배로 쉽게 넘어간다. 따라서 중독자는 실제로 고통을 피하고 싶거나 기분 전환을 하기 원할 때,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평범한 오락에서는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성도들은 중독이라는 우상을 위협적으로 느끼고는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단지 중독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인식해서만은 아니다. 중독의 막강한 힘에 비해, 과연 복음이 그것을 이겨낼 만큼 매력적인지에 대해 스스로 의문이 들기 때문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가 교회에 나타나거나 목회자가 지난 10년 동안 포르노에 중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 크리스천들이 절망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상황들이 복음의 힘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기 때문이다. 복음은 정말로 이 모든 것들을 이겨낼 만큼 충분히 강력한가?하지만 이러한 위협감과 의구심의 뿌리는 복음의 힘 자체가 약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복음의 능력을 스스로 의심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독자와는 달리, 크리스천인 우리는 하나님께 마음을 온통 다 빼앗기고자 하는 열망도 부족하고, 거룩한 삶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도 적은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일에서 황홀함을 찾고자 하는 욕구 역시 중독의 수준에 다다르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 중독자들을 구해낼 만큼 능력이 있는지를 의심하는 그 마음의 뿌리이다. 평안한 교회를 위협하는 중독자들구약 시대의 선지자들처럼, 오늘날의 중독자들은 하나님을 향한 크리스천의 갈망이 미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심지어 평범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준다. 스스로의 신앙과 중독자들이 본인들의 우상에 완전하게 빠져있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불성실하고 불충분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중독자라는 존재 자체에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더불어, 스스로의 미지근한 신앙을 바라보며 우리는 크리스천로서 자신의 삶이 중독자에게 진정한 대안을 제공할 만큼 충분히 매혹적이고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깨닫는다. 그러나 여기서 생각의 깊이를 조금 더 확장시킨다면, 우리가 진정 중독자들처럼 하나님께 빠지기를 과연 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떠올릴 수 있다. 우리 중의 다수는 품위 있고 점잖은 신앙 생활을 원한다. 그런데 중독자들의 갈망이 우리의 신앙 생활을 반성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그 품위 있는 신앙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교회가 중독자들을 품고 자유케 되도록 돕는 행위에 대하여 반감을 갖는 상태에 이르른다. 혹시 중독의 문제를 말할 때, 기질적으로 중독되기 쉬운 사람이거나 혹은 절제력이 약해서 발생하는 일이므로 교회가 그들을 긍휼히 여길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 버리지는 않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 속에도 크리스천으로서 중독자에 대한 위와 같은 종류의 반감이 새겨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아야 한다. 오늘날의 사회에서 과연 교회가 중독자의 삶에 설득력 있는 신앙적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깊이 고민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교회가 중독보다 더 매혹적이고 강한 힘으로 하나님께 완전히 빠지는 삶을 구현해 낼 수 있는가를 고심해 보아야 한다. 복음의 좋은 소식은 예수님이 건강한 사람들이 아니라 병자들을 위해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눈먼 자에게 보게함을, 포로된 자에게 놓임을,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그리고 중독자에게 새 삶을 주러 오셨다. 이러한 메시지와 사명을 구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Addict as Modern Prophet번역: 정은심
문화
사회이슈
중독자
우상
유혹
복음
긍휼
소비주의에 저항하라
by Carl Trueman
2018-12-26
문화에 대한 상반된 목소리는 좌우 진영을 막론하고 현대 복음주의의 상징적인 주제가 되었다. 성경에 기반한 문화 저항론과 기독교 근본주의에 반대하는 문화 옹호론 사이에 문화가 논의의 중심에 있는 주제인 것은 분명하다. 현대 문화를 옹호하는 크리스천에 대하여 한 가지 당혹스러운 사실은, 그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문화’가 우리가 일컫는 대중문화, 특히 젊은이들이 거의 주도하는 영화, 인터넷, 음악 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들이 ‘문화’라는 말을 사용할 때,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염두에 두는 경우는 많지 않다. 오늘날 ‘문화’는 대중문화를 의미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개념이 공급과 소비로 대표되는 시장주의의 틀 안에 축소되어 있다. 음악이나 영화 등은 사회가 삶의 방식을 대대로 전승시키는 전통, 제도, 장치로서의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들에게 당장 잘 팔릴 것과 잘 팔리지 않을 것, 즉 상품성을 반영한다. 그러한 대중문화는 단순히 현대인의 기호를 반영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그들의 기호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내가 이 글에서 주장하고 싶은 바는, 우리가 문화에 대해 논의할 때 현대의 상투적인 관념 가운데 하나인 ‘현대 문화는 항상 변하고 있다’라는 관념을 거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관념이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현대 문화가 항상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한 변화 자체가 현대 문화이다. 오늘날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들(패션, 음악, 연예)은 늘 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 문화의 변치 않는 본질인 소비주의의 단면이다. 소비를 기반으로 세워진 사회에서는 그 집단을 유지시켜 나가는 본질적 엔진이 곧 변화이다. 의도적인 진부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상품과 이를 팔기 위한 시장, 새로운 것에 대한 탐욕 등이 문화를 급속한 변화로 이끄는 필수적 요인이다. 만약 이러한 요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 한 대의 텔레비전, 한 대의 냉장고, 한 대의 스마트폰으로 만족하고, 또 한 벌의 멋진 정장을 입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으레 그래야 하는 것처럼 2년에서 3년 사이에 스마트폰을 바꾼다. 자주 바꾸는 것이 좀 부담스럽더라도 우리는 삶의 많은 물질들을 계속해서 바꾸어 나간다. 이전 모델보다 기능적으로 더 나은 것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유행에 더 맞는 것으로 바꾼다. 심지어는 대중문화의 초국가적 대표들(청년문화와 스포츠)도 똑같이 급속한 변화에 종속되어 있다. 어떤 청년이 작년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싶어 하겠는가? 또한 국가대표 팀을 비롯해서 갈수록 많은 스포츠 팀이 유니폼 디자인을 매우 자주 교체한다. 이는 관중들로 하여금 최신 디자인의 유니폼을 구입하도록 유도하고, 더불어 그 유니폼을 입고 있으면 마치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기를 불어넣어 그 경기에서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 모든 변화는 내가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일종의 착시 현상과 같다. 세상은 영원히 변하고 있는 상태로 보일 것이다. 우리 눈앞에서 마치 어지럽고 변화무쌍한 그림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한없이 펼쳐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착시 현상일 뿐이고, 모든 세대가 자신에 관해 믿고 싶어 하는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神話)를 낳는 현상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순간은 독특하고 특별하며, 작년에 나와 세상을 지배했던 것은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이러한 문화 속에서 우리는 마치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변치 않는 일관된 한 가지 문화가 있다. 그것은 바로 끊임없는 변화를 숭배하는 소비주의 문화다. 이 소비주의 문화는 교회가 반드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대 문화의 본질이다.그러면 교회는 소비주의 문화에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방법은 하나다. 바로 그 문화에 저항하는 것이다. 교회는 지역 차원에서든 교파 차원에서든 반-문화의 행위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정책이나 TV 프로그램 등을 대상으로 선포한 ‘문화 전쟁’은 지금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교회는 기본적으로 문화에 저항할 필요가 있고, 이 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이 소비주의의 열매 안에 기독교 정통주의를 반대하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견고하거나 안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이 끊임없이 이동하거나 해체되거나 무너지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그와 정반대의 것으로 변화할 때, 고정 불변의 진리는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래서 의미의 참된 정의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세상이 물질적 소비를 따라 가는 방식과 세상이 진리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그 방향이 동일하다. 끊임없는 변화가 세상을 유지시키는 한 요소로 간주될 때, 이 변화의 문화는 불가피하게도 우리가 어떤 옷을 사야 할지를 결정하는 방법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시 말해, 변화의 미학이 곧 세계 전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결정짓는다.둘째, 소비주의가 끌고 가는 세상 속에서 모든 것은 상품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 안에서는 시장에서 내쳐지지 않을 상품을 찾는 것, 그리고 내 상품을 소비자가 사고 싶게끔 매력적인 것으로 포장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물론 이러한 문화 안에서 정통주의가 상품으로서 ‘팔리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팔린다고 해도 그리 오래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소비주의 문화는 정통주의를 손질하여 변화시키고, 재포장하고, 더 매력적인 것으로 탈바꿈시킴으로써 시장에 등장하는 다른 매력적인 상품들과 경쟁할 수 있도록 부추긴다.요약하면, 기독교는 그 자체로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이다. 즉 ‘하나님의 진리는 변하지 않고, 바울 당시의 예수님은 오늘날의 예수님이며, 하나님은 유일한 조물주이시고, 그 외의 존재는 모두 피조물이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기독교 정신은 소비주의 문화의 피상적인 특성과 근본적인 특성 모두에 저항한다. 피상적 특성이란 ‘안정된 것은 존재하지 않고 변화만이 진리라고 말하는 소비주의의 겉모습’을 말하고, 근본적인 특성이란 그 소비주의를 변함없이 유지시키는 방식인 생산자-소비자 형태의 사회구조적 역학 관계를 의미한다.이 즈음에서 우리가 한가지 눈여겨볼 부분이 있다. ‘혁명을 팝니다’(Nation of Rebels: Why Counterculture Became Consumer Culture)라는 흥미로운 책에서 조셉 히스(Joseph Heath)와 앤드류 포터(Andrew Potter)는 1960년대에 ‘노 로고’(No Logo)와 같은 표어의 등장을 통해 소비주의가 어떻게 반-문화주의마저 그들의 세계로 끌어들였는지 보여 준다. 1960년대의 미국에서는 브랜드와 소비로 점철되는 현대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이 부상했는데, 시장은 이를 ‘노 로고’라고 하는 또 하나의 유행으로 만들어 관련 상품과 이미지를 판매하는 전략으로 크게 성공하게 된다. 그렇게 반-문화주의가 상품이 되면서 그 진정한 저항 정신은 흔적 없이 종식되었을 뿐만이 아니라, 노 로고와 연관된 상품은 엄청난 시장 점유율을 기록했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진지하게 되짚어 봄으로써, 소비주의는 지금도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는 가장 강력한 문화의 힘 가운데 하나이고, 심지어는 소비주의에 저항하는 정신까지도 상품으로 바꾸어 버릴 만큼 강력한 존재임을 알려 준다.그러므로 교회가 단순히 변화에 변화로 대응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는 매우 조심스럽게 이 문화를 이끄는 동력들, 곧 상업적 마케팅, 탐욕, 능력과 성공에 대한 세속적 개념, 복음보다 다른 것에서 만족을 찾는 욕구 등과 교회가 어떠한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지만, 현대 정치에서 사용되는 말을 빌리자면, 우리는 행동은 지역적이되 계획은 글로벌하게 유지해야 한다. 지역 교회는 확실히 문화에 대한 저항 운동의 가장 기본적인 집단이다. 예컨대 매주 예배를 드리는 동안 사도신경을 낭송함으로써, 기독교는 다시 만들어지는 종교가 아님을 교회와 세상에 명확히 선포해야 한다. 묵묵히 그 자리에서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는 목사들은 자신의 직분이 더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 위한 사다리가 아님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최근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나 이런 저런 정치적 연설에 대해 공허한 통찰력을 전파하지 않고, 오직 복음 전파에 온 힘을 기울이는 일도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그렇게 공허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일은 장려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저항해야 하는 소비주의 문화의 가장 피상적인 증상에 불과하다.멈출 줄 모르고 변화하는 특성의 우리 문화는 진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다시 바꾸고, 재포장하는 가공할 만한 힘을 자랑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소비자에게 그 진리를 상품의 형태로 판매함으로써, 변화의 문화는 본연의 힘을 유지 및 확장시켜 나간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로서의 변화 자체가 아니라 그 기저에 흐르는 소비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변화는 빙산의 일각처럼 실제적인 위협이 아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위협은 수면 아래에 있음을 기억하라. 다시 말해, 교회는 모든 것을 거래의 대상으로 만드는 이 변화의 문화에만 저항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변화의 중심에 있는 본질적 특성에 저항하도록 부름 받았다. 저항해야 할 그 특성은 바로 소비주의다. 소비주의는 우리의 전체적인 경제적 관점과 행위를 장악하여 대중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삶과 사회를 지배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Consumer Culture Fuels Change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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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셉히스
크리스마스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by Matt Redmond
2018-12-24
요즘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기 힘들어 하는지 알고 있다. 스크루지의 이야기는 더 이상 한 편의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제는 당연한 일들이 되었고, 어쩌면 늘 그래 왔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시즌의 즐거움은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즐거움을 상상하기도 어려운 자들에게는 오히려 고통이 되어 왔으리라.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인데, 나는 누군가의 가족에게 일어난 슬픈 사건으로 인해 크리스마스가 얼마나 어려운 시간이 될 수 있는지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이야기에는 거의 극단적인 절망과 실패가 자리하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이 고통을 상기시키기 때문에, 즐거워하기란 불가능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후로도 나는 그 이야기가 잊혀지지 않는다.물론 이해한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날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휴일이란, 심지어 완벽한 상황 중에도 긴장을 유발할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꼭 암이나 이혼, 아니면 식사 자리에 빈자리가 생기는 문제가 없다고 하더라도 어려운 일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를 연중 가장 멋진 시간으로 만드는 요인이 동시에 그 시간을 가장 잔혹한 시간으로 만들기도 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도 그런 어려움에 잘 대비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그런데 이 글에서는 일반적인 통념과 조금 다른 생각을 말해 보고자 한다. 나는 어쩌면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거꾸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크리스마스가 행복한 사람들을 위한 날이라는 집단적인 문화 의식(collective cultural consciousness) 속에서 이날을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목가적인 분위기에서 가족들과 함께 벽난로 주변에 모여 앉아 행복해 하는 그런 날로 생각하는 것이다. 마치 웃을 일이 늘 많은 사람들만을 위한 날로 생각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가 정말로 그런 날인가? 그렇게 도심의 축복 가운데 살아가는 성공적이고 멋진 사람들은 휴일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소파에 기대어 크리스마스 시즌의 클래식 영화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우리는 마치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이다. 크리스마스, 곧 우리를 구원하는 자가 육신이 되어 찾아오셨다는 위대한 이야기는 모든 사람을 위한 소식이다. 특히, 구원이 필요한 이들을 위한 소식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알고 우리의 연약함을 끌어안기 위해 아기로 태어나셨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게 하시고자 먼저 우리와 같이 되셨다. 즉, 죽음의 두려움과 상실의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찾아 오신 것이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경배했다고 알려진 자들은 고상한 사회적 신분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지저분하며 생활과 노동에 짓눌린 목자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이들에게 무시당하는 자들이었다.예수님은 거울을 보면 추한 모습만 비추어지는 그런 자들을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결코 예쁘다는 말을 들어 본 적도 없는 딸들을 위해 오셨다. 크리스마스는 돈이 없어 ‘술집의 공연’이나 홀로 보러 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암 때문에 삶이 절망스럽게 된 자들을 위한 날이며, 그 외의 다른 삶은 불가능한 꿈처럼 보이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소셜 미디어밖에 친구가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흔들리는 결혼 관계로 인하여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미술 도구들을 갖길 원하지만 아버지가 계속해서 공사 장비만을 맡기는 가정에서 살아가는 아들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사망 선고를 앞두고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릇된 장소에서 사랑을 갈망하는 창녀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함께 있으면서도 세상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아이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실패한 꿈들에 갇힌 자들을 위한 날이다. 크리스마스는 가문의 명예와 재산을 탕진하여 가정으로 돌아가길 원하지만, 감히 자신을 너그럽게 받아 줄 곳이 없는 자들을 위한 날이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는 자녀들의 결혼 생활이 혼란 속으로 접어드는 상황을 지켜 보는 부모들을 위한 날이다.결국 크리스마스는 이 모든 죄인들에게 필요한 은혜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날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로 인해, 그 아기가 태어났을 때 뉘였던 구유는 절망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가장 희망이 넘치는 장소가 되었다. 그러니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크리스마스는 그날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날이다. 바로 그런 날이 크리스마스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ristmas Is for Those Who Hate It Most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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