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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by Josh Howerton
2022-07-23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최근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면서 미국의 낙태권 찬성론자들은 크게 동요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리스도인들은 태아 생명에 대한 정의 실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며 기뻐하지만, 기독교 바깥에 있는 상당수의 우리 이웃은 이를 실존의 위협으로 느끼고 있다. 이들은 대법원의 결정이 위선적이고 심각한 국가적 비극이라고 비난하며 종교 단체로 공격의 화살을 돌렸다. 이들은 왜 이토록 불안해하는 것일까? 우리의 친구와 가족과 동료들이 한탄하는 이 결정을 신앙을 가진 우리가 환영하는 이유를, 어떻게 하면 그들에게 바로 알릴 수 있을까?사랑의 마음으로, 사실에 기초하여 이웃의 잘못된 통념에 접근해 보자. 다음은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 곧 잘못된 통념과 그에 관한 우리의 대답을 그 근거와 함께 제시한 것이다.신화 #1: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태아만 존중할 뿐이다.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옹호한다는 주장에 반감을 보인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태아만 옹호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태아만이 아니라 세상에 태어나 상처받고 소외된 생명 모두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는가? 다음의 수치는 “물론 그렇다”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도시 도처에 있는 위기 임신 센터 대부분을 그리스도인이 시작했다. 이 밖에도 그리스도인의 입양률은 미국 전체 평균의 두 배를 웃돈다. 가난한 이웃을 구제하는 비율도 일반 시민보다 그리스도인이 훨씬 높다.입양 비율 미국 전체 가구 2%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 5%출처: Barna Research, 2013 report기부지난 일주일 동안 가난한 이웃에게 돈, 시간, 물품을 기부한 적이 있다.주일마다 교회 가고, 매일 기도하는 그리스도인 65%그 외 1%출처: Pew Research Center, 2014 data신화 #2: 낙태를 반대하는 쪽은 남성이다.과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로 대 웨이드 판결을 파기한 것일까? 자궁이 없는 남성이 어떻게 여성을 대신해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게 할 수 있겠는가? 다음의 수치를 보자.아래의 그래프는 여성이 남성보다 낙태 반대론자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기정사실이 되고 있다. (한 예로 2014년 가디언 기사의 제목은 이렇다. “여성은 왜 낙태에 더 부정적인가?”) 신화 #3: 나의 몸, 나의 선택 “나의 몸, 나의 선택”은 낙태권 찬성 운동의 슬로건이다. 이 구호는 픽사 영화에도 등장한 바 있다. 낙태 찬성론자들은 태아는 여성의 발톱과 유사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려고 한다. 솔직히 이러한 관점은 과학이 태아 발달과 정체성에 관해 말하는 내용과 반대된다.뱃속의 태아도 그만의 고유한 DNA, 지문, 심장 박동, 사고, 감정, 고통과 쾌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태아는 다른 사람의 몸의 일부가 아니라 자신만의 뚜렷한 몸과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과학은 확증한다.신화 #4: 대부분 합당한 이유로 낙태를 한다.선의를 가진 낙태 찬성론자들은 미국 낙태 대다수의 사유를 강간, 근친상간, 빈곤, 심각한 신체적 또는 정신적 결함 등과 같은 끔찍한 상황에 돌린다. 그러나 다음의 낙태 통계 분석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유일하게 모든 낙태 사유를 상세하게 기술하는 플로리다주의 낙태 사유 통계를 보면, 2020년도 낙태의 75퍼센트 가까이가 특별한 이유가 없이 이루어졌다. 하나의 주에 국한된 결과이긴 하지만, 미국 전체 실정을 예증한다고 할 수 있다.플로리다는 해마다 주에서 일어나는 낙태의 사유를 모두 기록한다. 지난 2020년 플로리다에서는 총 7만 4,868건의 낙태 시술이 행해졌는데, 아래의 표는 각각의 이유와 그 비율이다.백분율 이유 0.01% 근친상간에 의한 임신 0.15% 강간에 의한 임신 0.20% 여성의 생명에 위협 0.98% 태아에 심각한 기형 1.48% 여성의 신체적 건강에 위협 1.88% 여성의 정신적 건강에 위협 20.4% 사회경제적 이유 74.9% 이유 없음(여성의 선택)신화 #5: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수많은 여성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미국의 낙태 찬성론자들이 로 대 웨이드 판결 이후 시대(post-Roe world)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임신하게 된 여성들이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많은 사람이 자궁외임신, 패혈성 자궁염, 유산을 경험한 여성들이 필요로 하는 보살핌을 받지 못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하게 될 것이라는 가설을 세운다.현실은 이렇다. 낙태를 강하게 규제하는 주에서도 산모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필요한 모든 절차를 반드시 따르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은 돕스 판결 이후 이러한 것이 바뀔 것이라는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낙태 반대론자도 낙태 찬성론자만큼이나 산모의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신화 #6: 낙태 반대 정서에는 백인 우월주의가 들어 있다.일부에서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의 폐기는 백인 우월주의라는 더 큰 질병의 징후라고 주장한다. 계획하지 않은 임신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이 소수 집단에게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특권이 있는 위치에서 백인 중산층과 상류층이 자기네 의견을 훨씬 더 수월하게 내세우기 마련이다. 그러나 인종이나 사회경제적 지위를 막론하고 낙태 반대론자들은 존재한다. 슬픈 사실은 1976년 이후 다른 어떤 인구 집단보다 소수민족의 어린아이들이 더 많이 살해당했다는 사실이다. 낙태 찬성 운동은 인종차별주의와 연관성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낙태 합법화 운동을 주도하는 Planned Parenthood의 설립자인 마가렛 생어(Margaret Sanger, 1879-1966)는 소름 끼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유색인종을 차별했다. 신화 #7: 대부분의 미국인이 낙태권을 지지한다. 대법원은 6대 3으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지만, 만약 이것을 일반 투표에 부쳤더라면 명백한 다수의 동의를 얻었을까? 미국은 일반적으로 낙태권 찬성이 다수 의견이라고 간주한다. 그렇다면 ‘돕스 판결은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 체제를 뒤엎은 것이라는 말인가?간단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미국인의 약 71퍼센트는 여성의 선택권을 어느 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아래의 그래프는 낙태 찬성론자와 반대론자 사이의 수치의 격차가 실제로는 상당히 근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합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역시 극소수의 사람들이 낙태는 예외 없이 항상 불법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머지 사람들은 중간 그 어디쯤 자리하고 있다. 이 둘이 합의에 이르는 것은 요원해 보인다. 대부분이 여성의 선택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제한에는 동의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말이다.임신 후기 단계에서는 낙태를 금지해야 한다는 입장이 증가한다. 임신 24주 이후의 낙태에 대서는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 법으로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보다 거의 두 배나 많다. 미국 성인들에게 물어보았다. 임신 6주가 되면 심장 박동이 감지된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6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2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6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9%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6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2%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초기가 끝나는 무렵인 임신 14주가 되었을 시점에 낙태는 법적으로...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1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15%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1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22%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1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19%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임신 24주가 되면 건강한 태아는 엄마의 몸 밖에서도 의학적 도움을 받아 생존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 시점에 낙태에 대해서 귀하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야 한다. 19%임신 24주에도 허용해야 한다. 3%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야 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7%임신 24주 전이면 허용해야 하고, 그 이후면 허용하면 안 된다. 18%일부 경우를 제외하고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임신 기간은 중요하지 않다. 6%임신 24주부터는 허용해서는 안 된다. 34%예외 없이 어떤 경우든 허용해서는 안 된다. 8%신화 #8: 낙태 금지가 낙태율을 줄이지 못한다.낙태 금지법은 효과가 있는가? 안전하고 합법적인 낙태 방법 부재로 혹 임신을 중지할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렇듯 낙태 금지법이 곧 낙태 감소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주장은 실용적이다. 그러나 낙태 반대론자의 입장은 실용성이 아닌 도덕성과 관계가 있다. 노예 해방 선언이 모든 주에 적용되지 않았다고 해서 실패라고 할 수 있는가? 노예제가 도덕적 악인 것처럼 낙태는 도덕적 악이다. 도덕적 악을 억제하고자 하는 모든 법률은 환영받아야 한다.더욱이 주 차원의 낙태 금지령과 함께 낙태율이 급감했다는 증거 자료도 있다.정직한 질문에 정직한 대답오늘날과 같은 정치적 극단의 시대에 정직한 질문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다. 또한 이러한 논쟁에 관련된 영적 전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사실에 근거하여 잘못된 가정과 주장에 맞서는 것은 이웃 사랑 실천에 꼭 필요한 일이다.우리는 은혜와 진리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는 가운데 이웃의 진리가 되어 버린 신화를 바로잡기 위해 겸손히 헌신해야 할 것이다. 우리 이웃의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삶을 위해서 말이다.원제: Debunk 8 Abortion Myth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by Anna Lynne Frazier
2022-07-16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낙태할 상황을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하겠지만 그래도 꼭 필요한 경우라면 낙태라는 선택권이 있으면 좋겠다는 게 한때 내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고 낙태에 대한 내 생각은 즉시 바뀌었다. 우리를 잘 아시고(시 139:13-18), 그분의 형상대로 만드신(창 1:27)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이상, 나는 낙태를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낙태를 찬성하는 쪽이었다. 낙태에 관한 내 개인적인 견해는 바뀌었지만 다른 여자에게까지 내 견해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나는 나 자신의 선택을 한 것이고,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선택을 하면 된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영어 교수가 프레데릭 더글라스의 회고록 미국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 삶에 관한 이야기를 과제로 내주었다. 그 책에서 더글라스는 자기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큰 절망을 준 이들은 다름 아니라 개인적으로 노예제도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굳이 남부 지역 노예제도에 저항하지는 않는, 남과 북의 접경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들 중에는 법을 따른다는 핑계로 탈출한 노예를 노예주에게 돌려주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추론은 이것이다: 나야 노예도 사람이라고 믿지만 내 이웃은 노예가 자기 소유물이라고 믿는다. 그러니 나야 결코 노예를 소유할 일 없겠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이 말이 나를 때렸다. 노예 주인의 법적 권리를 중시한다는 핑계를 대는 노예제도 폐지론자와 내가 하나 다를 바 없었다. 바로 그 순간에 나는 낙태 찬성론자에서 낙태 반대론자로 바뀌었다. 낙태는 반(反)여성적이다나는 낙태 합법 판결을 뒤집은 이번 연방대법원의 결정에 똑똑하고 사려 깊은 많은 여성이 애도하는 이유가 그 결정을 여성에 대한 공격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이 여자이기에 낙태가 여자에게 좋다는 생각은 매우 불쾌하다. 합법화된 낙태가 여자에게 해로운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1. 낙태 지지자는 여자에게 가장 좋은 건 남자처럼 되는 것이라고 간주한다. 우리 사회는 사실상 남자에 의해 형성된다. 대부분의 사회 기관을 설립한 게 남자이기에 모든 관점은 다 남자 중심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모든 여성 권리 투쟁은 여자에게도 남자와 동등한 권리를 달라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이런 관점은 법적 보호, 권한 부여, 노동력 접근과 관련해서는 아주 유용한 기준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남성이 가진 것을 얻으려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면 남자 중심으로 구조화된 사회를 더 영속시키는 부작용을 가져온다. 달리 말해서 여성만이 가지는 고유한 특징이 이바지하는 여성의 가치를 경시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를 형성할 수 있는 여성의 능력을 약화한다. 여자인 우리가 오로지 남자의 관점에 근거해서 무엇이 좋고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사랑스러운지를 정의할 때, 우리는 결국 본질적으로 여성적인 부분을 간과하고 평가절하하게 된다.여자도 성공하려면 남자와 같아야 한다고 믿는 세상에서는 계획하지 않은 임신에 대처하는 최선의 선택은 중단이다. 그러니까 낙태도 얼마든지 좋은 방법으로 보일 수 있다. 계획에도 없는 아빠가 되지 않으려는 남자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는데, 왜 여자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거지? 게다가 출산을 사회적, 직업적, 경제적 희생을 감수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느끼게 만드는 세상에서, 낙태는 오히려 권장해야 할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나는 이런 수준의 사회에 만족하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와 똑같이 가치를 인정받고 성공하고 또 행복하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태어나기도 전에 죽여도 된다는 세상, 설사 낳았다고 해도 경쟁하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버려도 된다는 세상의 의견에 나는 결코 찬성할 수 없다. 또한 여자가 출산과 모성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아니라 남자처럼 되려면 극복해야 할 책임과 부담으로 보는 생각에도 도무지 찬성할 수 없다. 나는 그런 세상이 싫다. 그런 세상을 보면서 통곡한다.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싸우고 싶다. 2. 낙태 찬성은 여성을 아기와 싸우게 만든다. 낙태 찬성자가 흔히 하는 주장의 하나가 낙태 반대자는 산모가 아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 지지자”라는 말이다. 누군가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엄마 편을 들지 아기 편을 들지 선택하라고 낙태 찬성자들은 요구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고는 임산부에게 너 자신 아니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삶 중에서 양자택일하라고 강요하는, 엄청난 부담을 안겨줄 뿐 아니라 잘못된 이분법이기도 하다. 엄마 대 아기라는 대결 구도는 엄마와 아기라는 기적적 관계를 부자연스럽게 뒤틀어 버린 비극적인 결과물이다. 적대적 관계와는 거리가 먼 엄마와 아기는 피조물 가운데서 가장 아름다운 유대 관계를 보여준다. 몇 가지를 살펴보자. 최대 9개월 동안 이 두 존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진다. 그 후에 두 사람 다 각각 개인으로서 성장하고 투쟁하고 또 성공하기 위한 일생을 갖게 된다. 임신은 결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매우 드물고 슬픈 상황을 제외하고는 결코 이 삶과 저 삶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그런 게 아니다. 엄마와 아기에게는 둘 다 살 수 있는 기회가 있지만 애초에 엄마의 자궁 밖에서 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아기를 죽인다면, 두 사람이 함께 사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3. 낙태 지지는 여성의 죽음을 허용하는 것이다.아기의 대략 절반이 여자이다. 이것은 낙태로 인해 파괴된 아기 중 적어도 절반이 여자로 성장할 어린 소녀라는 것을 의미한다. 매년 수백만의 소녀를 살해하면서, 어떻게 여성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리고 여전히 존재하는 남녀 차별을 고려할 때, 선택적 낙태로 인한 소녀의 죽음은 전 세계적으로 따진다면 50퍼센트보다 훨씬 더 높을 것이다.출생 시 성별 비율(SRB, 여성 100명당 남성 출생 수)을 추적한 연구에 따르면, (초음파 같은) 산전 진단 도구와 합법화된 의료 낙태가 더욱 널리 보급된 1970년대 이후 불균형이 큰 폭으로 증가했다. 일반적인 SRB는 여성 100명당 남성 105명 정도이다. SRB가 가장 높은 국가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국가이며, 그중 많은 국가에서는 아들에 대한 문화적 선호도가 높다. 이런 지역에서는 여자 100명당 남자 121명이고, 일부 지역은 무려 130명 이상에 이른다. 문제 지역(특히 중국과 인도)의 많은 인구를 감안할 때, 이러한 불균형이 드러내는 사실은 선택적 낙태로 인해 사망하는 여성의 숫자가 매년 무려 수백만 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메시지 전투우리는 지금 다른 아기는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내 아기라도 죽이는 게 지금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탈출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망가진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나는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하기를 거부한다. “낙태는 필수지요. 낙태 없이 여자가 어떻게 제대로 경쟁하겠어요?”낙태 합법을 금지한 대법원의 판단은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자궁에서 아이의 생명을 끝내는 것이 여자를 돕는 선택이라는 거짓말을 거부하는 데 이 결정이 이바지할 수 있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현재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낙태가 불법이지만 여전히 많은 주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합법이다. 법정 투쟁은 계속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은 또한 낙태를 둘러싼 메시지 싸움에도 전념해야 한다. 여자와 아기에게 가장 좋은 길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더욱 진실하고 더욱 영구적인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남자와 하나 다를 것 없는 같은 사람으로서 제공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로지 여자만이 고유하게 제공하는 가치를 인정하고, 기뻐하고, 또 존중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 여자는 싸워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출산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써나가야 한다. 그리고 여성의 권한 부여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의 생각도 재고해야 한다. 설혹 여자가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를 만나더라도 자신의 삶이 계속되려면 반드시 아기를 죽여야만 한다는 사악한 방정식이 결코 발을 붙일 수 없는 사회를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 아기를 가졌다 하더라도, 임신을 놓고 낙태라는 타협으로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여성으로서의 부르심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기꺼이 생명을 끌어안는 선택을 우리 여자는 하게 될 것이다. 원제: Why Overturning Roe Is Good for Wom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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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infree Brisley
2022-07-15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는 연방대법원에서 낙태권을 제안하는 새로운 판례가 나온 당일에 발표된 글입니다. 관련 기사·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로 대 웨이드’(Roe v. Wade) 판결이 뒤집혔다. 우리는 이날이 오기를 수십 년 동안 기다려왔다. 굉장히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 기념비적 사건의 의미를 한꺼번에 다 이해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번에 연방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 판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번 판결이 우리에게 가져다준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이 질문들을 고민하면서 나는 시편 126편을 떠올렸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에서 해방될 때의 기쁨을 노래한 축제의 시이다.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1절). 이 시는 오늘 우리가 기뻐해야 할 또 다른 구원을 찬송하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더 나은 이야기를 하자!시인은 하나님의 백성이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고백한다(1절). 우리도 때로는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비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히기를 꿈꿔왔었고 드디어 이 판결이 뒤집혔는데, 이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 꿈같은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처럼 지금 우리의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의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다”(시 126:2). 지금은 정말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시간이다. 그동안 우리가 부르짖은 기도와 이를 위하여 수고한 시간과 정치인들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를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서 수고한 형제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잠시 이 모든 것을 멈추고 오늘 일어난 이 일을 기뻐하며 축하하자!그렇게 함께 기뻐하면서 축하할 때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고자 때 우리는 그 사건과 관련 있는 사실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하려 한다. 어떤 이들은 9명의 대법관이 어떻게 투표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힘을 잃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어떻게 다시 목소리를 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것이다. 정치적인 전략과 복음주의권의 전략적인 투표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불의에 대한 정의의 승리를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목표가 성취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 일어난 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사실이다.이야기의 핵심시편 126편의 시인은 이스라엘의 구원의 이야기를 이렇게 노래한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리고 수많은 열방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바라보면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이라고 선포했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고백이 오늘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정말 기적과 같이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으셨다. 또한 하나님은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보다 더 위대한 일을 올 한 해 동안 행하실 수도 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아직도 주님께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실 수도 있다. 아마도 그리고 간절히 소망하기는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이 영적인 각성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러하였다면,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위하여서 정말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그런데 시인은 열방의 찬양을 기록하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았다. 어쩌면 사건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우리를 핵심에서 멀어지게 할지도 모른다. 시인은 구원의 구체적이고 자세한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누가 이 구원을 베푸셨는지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그는 반복하여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고 고백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힌 사건도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셨고 우리의 노력을 사용하셔서 위대한 일을 행하셨다. 이것이 이 사건의 핵심이다.그렇다고 구체적인 사안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당연히 감사하면서도 그분께서 이번에 사용하신 다양한 방법들을 자세히 살펴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연방대법원이 이번 판결을 어떻게 내렸는지 분석해야 한다. 우리가 이번에 얻은 것이 무엇이고, 앞으로의 낙태 반대 운동(pro-life movement)은 어떻게 전개되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이번의 판결을 통하여 우리가 얻은 것과 얻지 못한 것을 면밀하게 살펴봐야 한다.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방법을 자세히 검토해 보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다. 이야기에서 찬양으로그러나 9명의 연방대법관이 어떻게 투표했는지 이야기하면서 우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자! “왕의 마음은 흐르는 물줄기 같아서 주님의 손 안에 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왕을 이끄신다”(잠 21:1)힘없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다시 힘을 얻게 된 이야기를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시 103:6).정치적인 전략과 투표 전략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롬 13:1).악을 물리친 선의 승리를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악인들의 줄을 끊으셨도다”(시 129:4).우리의 목표가 이루어졌고 새로운 시대가 열린 이야기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자.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계 21:4-5).‘로 대 웨이드 판결’이 뒤집혔다. 주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통하여 일하시고 우리의 수고에 열매를 베푸셨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시편의 시인과 함께 이렇게 선포할 수 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내일이 되면 또 다른 일이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위대한 일을 선포하며 함께 기뻐하자.원제: Remember Who Overturned Ro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낙태권
낙태반대운동
프로라이프
승리의 팡파르가 아니라 긍휼을
낙태 판결 이후 교회가 해야 할 일
by James Forsyth
2022-07-09
미국 연방대법원은 지난 6월 24일 ‘도브스 대 잭슨 여성건강기구’(Dobbs v. Jackson Women’s Health Organization) 사건에 대한 판결을 내림으로써 그동안 미국에서 낙태권을 법적으로 보장해 온 ‘로 대 웨이드’ 판례를 무효화했습니다.관련 기사·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누가 뒤집었는지 기억하자!· 낙태 금지는 여자에게 좋은 일이다 · 낙태에 관한 여덟 가지 신화를 파헤치다 “나 임신했어.” 여자 친구의 말은 나를 충격에 빠뜨렸다.우리는 화창한 봄날 공원 잔디밭에 앉았지만 내 감정은 주변 분위기와 어울리지 못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만, 내 마음과 생각은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분명 뭔가 착오가 있을 거야.몇 초 지나지 않아 충격이 두려움으로 바뀌었다. 십대로서 우리가 나중에 겪게 될 일이 무엇일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인생이 결코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즉시 알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생각과 더불어 우리의 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지? 진짜 확실한 거야?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두려운 질문은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었다. 우리는 둘 다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부모가 된다는 건가? 우리는 둘 다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아이를 낳냐고? 우리에게는 이런 문제를 처리할 수준의 성숙함이 없었고, 애를 낳고 키울 돈도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실행한 첫 번째 단계는 의사와 약속을 잡는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확인했다. 의사가 말했다. “애를 지우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이 글을 쓰는 지금 내가 당시에도 지금처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깊은 확신을 재확인하고 따라서 의사의 제안을 즉시 거부하고 과감하게 다른 길을 개척했다고, 자신 있게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희망이 없는 십대에게 그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 낙태는 마치 해결책처럼 느껴진다. 판결 이후, 다음은?연방대법원이 낙태에 대해 헌법적 권리가 없다고 6대 3으로 판결했다. 낙태 허용 여부는 이제 각 주가 알아서 결정하게 되었다. 대략 절반의 주가 해당 주 내에서 낙태 시술을 아예 금지하거나 아니면 낙태 횟수를 크게 제한할 것으로 예상된다.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 판결을 환영해야 한다. 낙태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정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명에 부여하신 가치에 따라 결정된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 모든 인간의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과 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이 판결을 환영하는 만큼 또한 이 판결에 우리가 이제 어떻게 대응할지 돌아보아야 한다. 지금은 교회가 문화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축하고 좋아할 때가 아니다. 오히려 사랑을 향해 한 발 더 다가설 수 있는 순간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세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긍휼의 마음으로 무장을 해제하라. 낙태가 더욱 제한됨에 따라, 때로는 파트너의 지원을 받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혼자 감당해야 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여성이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느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제 희망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유일한 선택지가 사라졌다. 분명히 하자. 이 여성들은 그리스도인의 적이 아니다. 적이었던 적도 없다. 그들을 향한 우리의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해야 한다. 정치적 문화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는 팡파르가 판단하기 좋아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우쭐한 기분을 심어줄지도 모르겠지만 위기에 빠진 여성들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다. 더 나쁜 것은, 이런 자축 소리가 상처받은 여성들에게는 교회란 도움을 청할 데가 못 된다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지금은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을 닮아야 할 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과 똑같은 긍휼의 마음을 위기에 처한 여성들에게 보여주자. 2. 행동에 나서라.미국과 전 세계에서 수백만의 그리스도인이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미혼모를 지원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들을 사랑하기 위해 지치지 않는 사랑으로 영웅적으로 일하고 있다. 복음주의자의 특징이란 다른 게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라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음해가 만연해 있지만 이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수도 없이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이, 취약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소외당한 사람들이, 고향에서 쫓겨난 난민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도움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이 교회가 잘한다고 등을 두드려줄 때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더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지역 임신 여성 지원 센터에 연락하라.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격려하라.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라. 기부 금액을 늘리고 자원봉사에 나서라. 위탁 및 입양 기관에 연락해서 입양이나 양육을 고려하라. 이미 그런 사역을 하는 교회 가족에게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할 방법을 문의하라. 낙태 반대 사역을 생명이 달려 있는 일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지원하라. 믿음의 군병들이 이미 현장에서 싸우고 있다. 이제 우리도 각자가 행동해 나서야 할 때이다. 3. 협력하라.당신의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상처를 치료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지금이야말로 예배당을 정리해야 할 때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즉각적인 관심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도록 자선 사역을 위한 구조를 마련하라. 집세를 지원하고 식료품과 기저귀를 구입하고 미혼모를 도울 수 있는 행사를 열라. 외로운 사람이 아무도 생기지 않도록 우애를 쌓으라. 돕고 싶은 마음을 널리 알리라. 광고하라.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를 때 교회가 와야 할 곳이라는 걸 지역 사회가 알도록 힘을 쏟으라.교회가 교회다움을 보여줄 때낙태와 관련한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던 어느 교회 공동체 때문에 오래전 우리는 낙태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내 딸의 생명을 구했다. 그들은 두려운 십대가 행복한 부모가 되도록 도왔다. 내 딸을 처음 안았을 때, 그리고 그 아기가 내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생명의 무게를 느꼈다. 비록 2.7킬로그램에 불과했지만, 내 딸의 삶은 지금도 내게는 여전히 지속되는 영광스러움이다. 시간이 흘러 내 어린 딸은 다른 사람을 돌보는 간호사로 성장했다. 낙태하라는 의사의 조언을 따르지 않은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지금도 당시 두려움에 빠졌던 내 마음이 낙태라는 제안에 얼마나 솔깃했었는지를 부끄럽게 기억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족과 목사님, 그리고 지지하는 교인들을 통해 더 나은 길을 보여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다. 사랑은 그렇게 그리스도의 몸, 그의 영원히 아름다운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내 기도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사랑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교회가 교회다움을 보여줄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건 바로 고통받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의 긍휼을 보여주는 것이다.원제: After Roe, Choose Compassion over Culture W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낙태
낙태반대운동
프로라이프
생명존중
현대 신정주의의 불편한 목소리
by Andrew T. Walker
2022-06-27
공공의 장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감을 넘어 심지어 뻔뻔스러운 태도로 승리주의자처럼 행세하는 기독교 비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승리주의 기독교 비전은 문화 전쟁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독교의 패배에 진절머리를 친다. 세속주의의 타락, 변태, 비합리적 규범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이 기독교 비전은 “중립”을 가장한 세속주의가 사실상 이 시대의 실질적인 신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적 온전함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이 비전이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대로 제대로 파악하고 삶의 모든 부분에, 심지어 정부에까지 주님의 권위를 굳건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독교 비전이 미국의 사십 세 미만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 재건의 재탄생 또는 기독교 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신정(Theonomy)이다. 기독교 재건 또는 신정?T .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이 1994년에 쓴 에세이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 재건과 신정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기독교 재건은 문화를 기독교의 도덕적 토대에 보다 더 명시적으로 결합시키는,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모세 언약 속에 있는 민법적 요소를 현대 시민 정부에 적용하는 것이다. 신정주의자는 따라서 시민 정부가 단지 기독교적 지향점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약 속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구체적인 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 또 재건주의가 광범위한 문화 운동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특정한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드러낸다. 사실상 모든 신정주의자가 암묵적으로는 다 재건주의자이기 때문에, 기독교 재건과 신정에 대한 비판은 신정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주로 1970-80년대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신정 운동은 정치 참여와 홈 스쿨링 같은 주제가 급부상함에 따라 보수적 복음주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엄격한 성경적 정통주의, 정부 권한의 제한, 친밀한 가족 관계,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했다.신정과 관련 있는 여러 인물들 중에는 루사스 존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와 그레그 반센(Greg Bahnsen)이 있다. 러쉬두니가 쓴 세 권으로 구성된 ‘성경적 법률 강요’(The Institutes of Biblical Law)와 반센이 쓴 ‘기독교 윤리 속 신정’(Theonomy in Christian Ethics)은 이런 신정 운동을 태동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책이다. 데이비드 칠튼(David Chilton)과 게리 노스(Gary North)도 신정 운동의 주요 지지자이다. 신정 운동을 홍보하는 조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 이 운동은 분위기와 참여 방식에 있어서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 단순하게 정의할 때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신정은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가닥과 논쟁이 존재하며 신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각자 다 취하는 입장이 다르다. 물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법이 가장 위대하며 그 외 다른 모든 법은 다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정한 궁극적인 권위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권위의 불가피함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중립의 신화”라는 허울을 쓰고 세속주의를 정부와 법률 속에 포함시킨 것에 대한 신정주의자들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신정주의자들의 다양한 항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 프로그램으로서 신정은 오늘날 민법이 모세 언약에 따른 이스라엘 민사법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신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 표준에 따라”(By This Standard)라는 말은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구성하는 가장 높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버리는 순간 사회가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퇴보할 것이라는 신정주의자의 비판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점이 많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놓기 마련이다. 일반 형평 신정(General Equity Theonomy)은 모든 사람과 기관이 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는다. 러쉬두니 신정(Rushdoonian Theonomy)은 모든 민사적 법률 시스템이 모세 언약에 기반한 사법 형태를 구체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한다. 종말론에 대한 신정적 이해와 교회와 시민 질서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 말씀의 적용이다. 역사를 전형적인 후-천년왕국 시각으로 보는 경우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할 주님의 주권을 이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결실이 점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은 서서히 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의의 표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통치자들은 자연법칙의 원칙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법의 특수성을 현실 속에 적용해야 한다. “완전한 세부사항에까지 이르는 법의 존속 타당성”은 신정에 있어서 필요한 법률 사용을 설명한 반센의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제목이다. 그는 ‘기독교 윤리 속 신정’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구약의 민법(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법적’ 법칙들)은 범죄자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다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회 정의의 모델이다.”비록 교회와 정부의 관할권은 신정 아래에서도 분리되지만, 그 둘 다 시민의 의(civil righteousness)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고, 이 사실은 구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은 오늘날에도 도덕적 죄 및 사법적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이런 적용을 하기 위한 성경해석학은 무엇보다 모세 율법이 가진 지속적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죄와 사법적 범죄에 대한 성경 속 처벌이 오늘날 현대적 맥락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정은 해결책이 아니다이런 신정 운동과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과 시민권과 신성함뿐 아니라 영원한 권위와 영적 권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복음주의적 틀로서 신정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지한 비판이 있다. 요약하면 신정의 오류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이해를 뛰어넘는 해석학에 있다. 이 잘못된 해석학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타락한 정치 질서에서 교회의 역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신정은 승리의 종말론을 전달하기 위한 손쉬운 해석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신정은 종교를 도구화하고 교회와 국가 관계를 흐리게 하며 또한 종교적 반대까지도 위태롭게 만든다. 게다가 다른 언약이 드러낸 일반은총과 자연법칙의 혜택으로 인해 이제 굳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주장이 신정이라는 사실도 이미 증명되었다.적지 않은 보수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복잡한 해석적 문제를 분석하는 대신, 해석학으로서 신정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가장 간단한 검증은 그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를 오해함으로 잘못된 적용을 도출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신정은 이스라엘 민법의 배경이 되는 도덕적 힘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신정은 신권으로 통치되던 이스라엘 시대가 끝난 후 이스라엘 민법의 세부 사항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고찰해야 하는 언약적 단절(covenantal discontinuity)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나라와 맺은 관계와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진 관계의 독점성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는 애초에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민법이 현대 시민 정부의 모델이 된다고 믿고 있는 신정은 이스라엘과 십계명 이전부터 있었던 도덕법의 존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은 제6계명이 금지하기 전부터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파괴하는 살인은 태초부터 금지된 것이었다(창 1; 4; 9). 살인 금지는 창세부터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자연법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영원한 법은 신성한 법으로 표현된다. 십계명은 자연법칙을 드러내는, 시대를 초월한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공식적으로 성문화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정이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신권으로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기능했고 또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형태와 실행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이스라엘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율법의 도덕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결과 율법 준수의 의무를 단지 특정 시간과 장소에만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으며, 특히 신약성경은 그 중 아홉 개가 그러하다고 확증하고 있다. 더욱이 신정은 오늘날에도 민사 처벌을 적용하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형벌 체계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신정이 신권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의 고유 시스템을 현대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해석학은 정태적(static)이며, 구속사 전체를 통해 성경이 분명히 일시적이라고 결론을 내린 한 시대의 법을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오류이다. 잘못된 신학적 태도다른 문제는 신학적 자세와 관련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전자가 즉위와 승리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고통과 상실의 신학이다. 신정은 근본적으로 영광의 신학이다.명시적이든 아니든 교회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가의 여부는 문화가 기독교 규범을 얼마나 채택하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신정은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결코 주변으로 밀려난 교회를 향해 외칠 신학이 아니다. 신정은 그럼 지금 중국이나 이란에 있는 교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정이 하는 주장은 믿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문화에 대한 원한까지 갖도록 만드는, 문화에 대한 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한 극단적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에 불과하다.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문화가 승리와 패배,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놓고 오로지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이분법으로만 보게 될 때 결과는 언제나 유토피아 아니면 절망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영광과 십자가를 동시에 포용해야 한다. 이런 패러독스 안에서 사는 것은 당연히 복잡하지만, 이런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 함으로 보다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한다. 신정이 교회와 국가 사이에 공식적인 통합을 원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교회와 국가는 서로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서로의 권위를 강화시켜야 한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종교가 정부의 하녀가 되거나 또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은 나쁜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을 자유롭게 선포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좋은 결과이다(딤전 2:1-2).유럽의 중세 시대를 엄밀히 신정 시대였다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연합에 대해 한 가지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연합이 얼마나 좋지 않은가이다.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갈망하는 그리움에 가까운 짙은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교회와 국가가 한통속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교회와 국가가 연합했을 때 교회의 순수함이나 종교적 반대(religious dissent)가 고양된 사례이다.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통일성의 매력은 종교의 자유가 희생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하한선은 필수적이다. 모든 종교가 법에 따라 동등하게 인정받지 않는 한, 특정한 종교 단체는 반드시 회원 가입과 사회 참여의 기초로 원하는 엄격한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가톨릭 대 개신교이든 아니면 개신교 대 다른 개신교이든, 어떤 한 그룹은 언제나 종교적 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배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 국가가 간섭하도록 허용했던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의 태도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서 통치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없었고, 나는 결코 그 당시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신정이 우리 사회의 무법(lawlessness)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정이 제시하는 대안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고, 또한 그 대안이 영속적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신학적 일관성이 빠져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정이 옳아서 역사가 그들의 주장대로 기독교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왜 세상은 지금 정반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서구 문화가 점점 더 이교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점 더 믿음을 잃어 가는 걸까? 아니면 주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사용하여 알곡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상호 호환적 관계를 유지함으로 가져다주는 결과는 시민종교의 바탕이 될 뿐 아니라 문화적 결속을 위해서 쓰임받는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신정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그럼 사회에 대한 도덕적 표준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존경을 받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모든 사회가 말세를 살고 있으며 또한 머지 않아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도 이러한 수준의 재생성(regeneracy)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 입법을 하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자율성과 인간의 이성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자연법칙과 영원한 법칙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건전한 원리도 찾을 수 있다. 신정을 거부한다고 제대로 만들어진 세속법 속에 얼마든지 신성한 법칙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J. 버드지스제위스키(J. Budziszewski)는 이렇게 썼다. “살인 금지와 같이 자연법칙 속에 포함된 신성한 법의 일부는 정부가 제정한 법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덕적 불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창조 패턴에 더 잘 부합하고 노아 언약, 자연법칙, 그리고 성경(딤후 3:15-17)에서 강조하는 원칙과 더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최고이다. 모든 사람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의 시민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좀 더 현실적인 정치적 성찰을 위한 더 나은 출발점은 모세의 언약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확증하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이 제공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구조와 설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의 이해와 더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법이 포함된다(시 19:1-3; 롬 1:32; 2:15).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도덕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심어 놓은 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사회에서 진정한 도덕적 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 언약의 적용이 아니라 창조 속에 담긴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도록 돕는 특별한 계시이다. 계시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여러 규범이 선포되는 분야와 선포되는 방법에 관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신성한 명령을 드러내길 기대하는 것은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곳에서는 좋게 들리겠지만, 신정은 종교적 소수를 이등 시민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법 표준의 원천으로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당국이 등장하는 예는 없다.도덕적 반란 속에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국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국가가 그 국가의 정당성을 특별 계시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불편한 긴장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정부는 특별 계시에 복종하는 지도자와는 별개로 정의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존재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말했고, 그는 또한 그런 주장을 할 때 조금도 모세의 언약에 의존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교도 통치자들도 얼마든지 정의롭게 통치하는 게 가능하다(비록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완전한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는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세상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법 내에서는 신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왜? 성경 어디에서도 종교적 합의가 확보된 사회에서 정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 합의가 있다면 좋겠지만, 정의의 표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항상 애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타락했고, 지금은 종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에 앞서서, 언약의 특수성 없이도 더 나은 도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자연법칙을 주신 이유이다. 살인이나 수간과 같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굳이 이스라엘의 민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계시를 통해 드러난 창조 언약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정은 구약의 형법을 오늘날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잘 활용한다면, 현대 국가는 무엇보다 정당한 명령과 신중하고 현명한 형사적 제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금지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형하지 않고 수감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과 같은 약속을 통해, 굳이 이스라엘과 똑같은 형태를 갖추지 않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도덕 체계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노아 언약에 대한 데이비드 벤드루넨(David VanDrunen)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창 8:22) 창조세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모호하더라도 자연법칙과 일반 은총을 통해 이 땅을 운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이 비록 우리에게 문화적 지배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의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불일치, 고통, 문화적 갈등은 종교적 제약을 벗어난 국가들로 인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종교적 합의를 공유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가 기독교 이상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정부가 그러한 약속을 반영하는 것은 좋지만,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정부의 정통성을 기독교의 인정 여부와 연결하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라성경적 충분함을 지키겠다는 선의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신정은 성경이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 개념을 확장했다. 신정은 구속 드라마가 아닌 결의론에(역자 주: 보편적인 규범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특정 경우에까지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결정하려는 기술) 더 집중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신정주의자라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전체가 갑자기 또 다른 대부흥을 체험하고 기독교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할 건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신정적 의제를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의 고백을 인용하자면 대답은 이것이다. “자유로운 사회 속 자유로운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이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어떤 시민 권력의 방해가 없이 진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우리는 정치적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가치를 능가할 수만 있다면 사탄은 기꺼이 시민종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도덕적 국가까지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넘치는 국가를 보기 원한다. 거기에는 공무원도 포함한다. 그러나 단지 정부가 우리 사명의 대상이 아니다. 변화된 정부는 모세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법칙을 고수하는 변화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미국 문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지고 비뚤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에 대해 도덕적으로 반항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정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신정은 미국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로 향하는 게 단순히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신 22:8). 우리는 구속받을 문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타락한 문화를 향해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구속받은 개인을 찾고 있다. 신정의 아이러니는 이론적으로 볼 때 그 주창자들이 엄격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장려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은 국가 지원의 보조금에 의존한다. 신정은 또한 국가에 의존한 복지 지원을 실행한다. 국가의 허락이 없이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신학적 시스템은 결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구조와 사명과 일치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신정이 얼마든지 자유시장 경제학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통계주의 신학에 그칠 뿐이다. 성경과 문화에 대한 신정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게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 및 충분성에 대한 경외심을 덜 갖는다는 의미일까? 결코 아니다. 논쟁의 핵심은 무신앙(unbelief)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의 구속-역사적 시대에 신정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모든 위조품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이며 참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런 성경 자체가 거부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문화 변증이라는 임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원제: American Culture Is Broken. Is Theonomy the Answ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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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능력
문화변증
시민종교
정교분리
무함마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by A.S.Ibrahim
2022-06-17
나는 이집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이웃이나 학교 친구 중에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주변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이 이름―그들의 예언자의 이름―이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또한 이 이름이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난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많은 무슬림들이 이 나라로 오고 있는 이때, 이 나라 그리스도인은 무슬림들이 그들의 예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무함마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두어야 할 아홉 가지를 여기 소개한다. 1. 무함마드는 거의 확실히 실존 인물이었다.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메카에서 태어났고, AD 632년에 메디나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삶에 관한 정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그가 죽고 두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그의 삶이 문서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목격자 진술은 없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록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더라도. 무함마드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7세기에 몇몇 그리스도인이 아랍인들에게 나타난 한 설교자에 관하여 기록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람을 거짓 예언자로 규정했다. 그가 칼과 전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2.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40세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알라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고서 예언자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계시를 받는 과정에 어떤 인간적인 개입도 없었다고 무슬림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무슬림 내러티브 자체가 무함마드가 9-12세 사이에 시리아에서 그리스도인 수도사를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 수도사는 그에게 기독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하여, 무함마드가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는 바로 그때, 그는 그의 아내의 사촌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사촌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히브리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역사 자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3.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에게 무하마드는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 (성경의 예언자들의 포함하여) 수많은 예언자들 중에서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예언자이다. 무슬림들은 그를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으로 여긴다. 역사의 기록은 이러한 이상적인 인물상에 의심을 보내지만(누구든 그의 의심스러운 행동과 문제가 많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무슬림들은 여전히 무함마드를 공경하고 그가 오류가 없는 인간이었다고 믿는다. 4. 무함마드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살았다. 무함마드는 53년간 메카에서 살았고, 그 뒤에 10년간 메디나에서 살았다. 메디나에서 예언자가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때부터, 그는 약 13년간 거기서 살면서 종교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수년간의 실패와 가센 압박 끝에,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이주하여 거기서 마지막 10년의 삶을 살았다. 메디나에서 그는 세력을 다지고 자원을 모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군사령관이자 정치가가 되었다. 5. 무함마드는 많은 비무슬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메카에서는 미약했고 쉽게 공격받은 그였지만,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는 막강한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무슬림 자료들은 그가 다양한 집단에게 십여 차례 군사공격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공격을 받은 무리에는 다신론자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공격들을 통해 무함마드는 강력한 아랍 부족 지도자가 되었고, 이로써 많은 부족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복종”과 “항복”을 의미한다. . 6. 무함마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꾸란은 무함마드의 유일한 기적은 꾸란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알라가 무함마드를 보낸 것은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과거 세대의 사람들이 기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함마드에게 준 유일한 기적은 꾸란이라고,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고 알라는 말한다. 그러나 후대의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과 교류하면서 무함마드가 행한 기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필요성을 느꼈다. 모세도 예수도 기적을 행했다면,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무함마드도 똑같이 기적을 행했어야 했다. 이슬람 경전과는 모순된다 하더라도 말이다.7. 무함마드는 여러 아내와 첩을 두었다.무함마드는 여러 여자와 결혼했다. 그 정확한 숫자에는 이견이 있지만, 9-12명과 결혼했다. 그에게는 많은 첩과 여종도 있었다. 무슬림들은 그가 여러 여자와 결혼한 것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여자와 결혼한 데는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무함마드의 아내들 중에는 눈에 있는 여자도 여럿 된다. 카디쟈는 무함마드의 아내들 중 가장 부자였다. 사우다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아이샤는 가장 어렸는데, 무함마드는 사우다가 여섯 살 때 혼인했고 아홉 살 때 신방을 차렸다. 자이납은 무함마드 양자의 아내였다. 알라가 그 입양을 파기하고 무함마드에게 자이납을 아내로 맞으라고 했다. 사피야는 유대인인데, 무함마드가 그녀의 부족을 공격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인 다음에 그녀를 아내로 취했다. 8. 그는 독살되었다.무슬림 자료들은 무함마드가 자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독살되었다. 수니 무슬림들은 한 유대인 여성이 무함마드를 독살했다고 규정한다. 한편, 일부 시아파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아내 두 명이 공모하여 그를 살해하고 그들의 아버지들이 무함마드를 계승하여 아랍인들을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예언자가 독살됐다는 이야기는 알라가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은 무슬림 자료들에 있는 독살설은 꾸며낸 것이라고, 무함마드는 자연사했다고 주장한다. 9. 무함마드의 무덤은 메디나에 있다. 무슬림 자료들은 또한 무함마드가 고향 메디나에서 죽었고 거기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무슬림들은 그의 무덤 때문에 메디나가 복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 이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그 도시”(곧 무함마드의 복 받은 도시)라는 뜻이다. 물론,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에 관하여 할 이야기는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슬림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동료와 교류할 때 이러한 기본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걸 알고 싶은 이들은 내가 쓴 A Concise Guide to the Life of Muhammad(무함마드의 삶에 관한 간결한 가이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슬람의 이 예언자에 관하여 배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의 소망을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더 잘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Muhamma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교회 떠난 이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까?
교회의 재발견
by Stephen Witmer
2022-06-11
꽤 오래 전 일이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교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내가 담임하던 교회를 다니던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착실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통화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자기는 지금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많게 말했다. 아, 이건 그 후로도 내가 여러 번 겪은 경험이다. 당신에게 그토록 소중한 무엇(우정, 사역, 파트너십, 교회 가족)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느끼는 아픔 말이다. 그 몇 년 뒤 또 다른 한 통화는 좀 웃기다. 사실 본심은 참 착한 사람인데도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보니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에는 속과는 다르게 거칠게 말을 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한 여자와의 통화였다. “누구세요?” 그녀는 내 전화에 거칠게 물었다. 그녀가 내게 건 전화를 못 받아서 리턴콜을 하는 거였기에, “나 스티븐인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거칠게 “스티븐 누구요?”라고 했고, 나는 “스티븐 위트머요”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때 그녀는 내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문장을 내뱉었다. “ㅈㄱㄹ, 스티븐 위트머가 누구야?”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전화해서 리턴콜을 하는 목사라고 말하자, 그녀는 몹시 당황해 했다. 지난 18개월을 돌이켜보면, 지금 말한 두 대화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 안에 굳건히 서서 다른 사람을 돕고 희생하며 또 교회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교회를 떠나고 관계를 끊으며 아예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교인이 교회와 관계를 끊고 성경 읽기와 기도를 중단하려면, 코로나 전염병보다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다 신앙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아, 위트머 목사님이시군요”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내가 “ㅈㄱㄹ, 스티븐 위트머가 누구야?”라는 말에 놀랐던 것처럼, 나는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을 보며 그때와 비슷한 거리감을 느끼고 충격에 빠진다. 교회 재발견을 위한 가이드오늘날 많은 목회자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이곳저곳 떠도는 교인을 어떻게 다시 신앙의 교제 속으로 다시 끌어들일까?” 나는 기독교 저자이자 지도자, 또 장로이기도 한 두 사람이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단지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뿐 아니라 방황했던 이유까지도 정확하게 드러냄으로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다. 교회를 위해 이 주제를 다룬 이 책, 교회의 재발견: 그리스도의 몸이 필수적인 이유를 쓴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전염병, 정치·인종 갈등, 백신 및 마스크 분쟁 등을 겪은 후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 콜린 핸슨과 조너선 리만은 말한다. 사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당신의 인생과 삶을 만든다(23).이 책은 당신이 교회를 재발견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는 삶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 다른 지체와 결합하여 사는 기쁨; 오늘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속 하나의 벽돌이 되어 세상 문화에 거스르며 사는 능력 있는 삶(24).이 책은 교회를 재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리스도의 몸이 왜 중요한지 깨닫도록 할 것이다(147).고작 150쪽의 책을 가지고 핸슨과 리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교회론을 제공한다. 책을 드는 순간 빠져들게 만드는 뛰어난 글 솜씨와 더불어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까지 담긴 이 책은 매력적이고 훌륭한 자료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배척과 추방이라는 주제가 교회 권징의 방편으로 제시될 때, 교회와 성경 신학이라는 깊은 주제는 소홀하게 처리된다(96). 아주 훌륭한 지적이다. 이 책은 다양한 인용이 가능하다. “최악의 상황을 맞은 당신에게 도전을 주지 못하는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당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144). (당신의 구미에 맞을 20가지 추가 인용문은 여기를 참고하라.)단순한 구성도 이 책의 장점이다.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로 각 장이 구성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2장) • 그 모임은 그리스도의 하늘 왕국의 대사관이다(3장) • 그들은 기쁜 소식과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선포하며(4장) • 지정하신 규례를 통해 서로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확언하며(5장)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드러낸다(6장) • 하나로 연합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7장) • 온 세상 가운데(8장) • 장로들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9장) 개요가 명확하다는 것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는 데에 어렵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미 교회에 관한 리먼의 다른 글을 읽었거나, 특히 9Marks 자료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한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다지 새로운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이 가져다주는 독특한 공헌은 오히려 견고하고 성경적 교회론을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요즘과 같이 중요한 시기에 한 권으로 묶어서 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권의 책 이상이 필요하다팬데믹 이전보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더 풍성한 성경적 이해를 가진 교인으로 교회가 넘치기 바라는 저자의 열망을 나도 똑같이 느낀다. 이 책이 그 점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일어나려면 수백만 명의 마음에서 변화가 생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이 책과 같이 좋은 책 몇 권이 출판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무엇보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다시 실감한다. 생각이 행동을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교인이 무슨 깊은 생각을 해서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슨 깊은 생각을 했다고 교회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제임스 K. A.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단지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라 몸을 가진 피조물이며,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종종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습관의 힘을 옳게 지적했고, 나는 지난 18개월 동안의 목회 경험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실히 발견했다. 교회 안 가는 게 일단 몸에 익자 다시 교회 가는 습관을 들이는 게 힘들다는 고백을 하는 교인이 적지 않다. 그건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습관의 힘이라는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한다.)그렇다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다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습관과 리듬을 몸에 익힐까? 찰스 더히그(Charles Duhigg)가 쓴 Power of Habit(습관의 힘)의 한 구절이 도움이 된다. “습관이 자리를 잡으려면,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믿음은 그룹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조너서 리먼의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리먼은 성령께서 자신을 교회로 이끈 이유가 설교와 지역 교회(복음과 복음 사회)의 교인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시만 해도 리먼은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고백한다. 성령이 그를 교회로 이끌기 위해 사용한 것은 복음과 복음 사회,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모인 교인들이었다는 것을. 교인을 교회로 이끄는 게 무엇인가는 질문과 관련해 리만의 경험이 책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적인 대답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요한 건,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습관을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기억하자. 주의 깊고 성실하며 노력하는 목회자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돕도록 그리스도인을 준비시키라이게 사실이라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가 질문이 떠오른다. 같은 교회를 다니던 교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에,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최소한 그 답의 일부는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 공동체인 우리가 먼저 주도권을 잡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들을 추적하고 둘러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상기시켜야 한다. 자, 이제 이 책이 의도하는 독자에 관련해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서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아예 독자로 가정하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니까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가 바로 교회를 재발견해야 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이 책을 읽을지 궁금하다. 누가 사준다고 해도 읽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좀 덜 직접적이고, 또 보다 조절된 방식으로 쓰일 때 더 효과가 있을 거 같다. 이 책의 성공은 당신 같은 사람이 읽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TGC 서평을 읽는 사람, 이미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왜 꼭 다녀야 하는지 흔들리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하는 사람이 읽을 때 이 책은 가장 효율적으로 쓰일 것이다. 이 책은 가장 먼저 당신에게 교회에 대한 명확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 책을 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가 준다고 해도 읽지 않을 주변 사람에게 교회의 아름다움과 필요성을 전달하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자신이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다시 말해서, 지금 이 순간 이 유용한 책의 존재는 좋은 기독교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오늘을 사는 교인들이야말로 이 책 교회의 재발견이 묘사하는 교인으로 살아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그건 단지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교회의 재발견Rediscover Church: Why the Body of Christ is Is Essential콜린 핸슨, 조너선 리먼“교회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이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예배 장소가 갑자기 폐쇄된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생활을 건너뛰고 온라인 예배조차 소홀히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치·인종 갈등을 포함한 양극화 문제는 적지 않은 교인을 교회로부터, 또 서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모이기를 다시 다짐할 때이다. 교회의 재발견에서 콜린 핸슨과 조너선 리먼은 교회가 신자와 하나님의 선교에 필수인 이유에 대해 논한다. 말씀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두 저자는 독자에게 하나님이 왜 모이라고 하는지, 진짜 의도를 보여준다. 개인으로 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 쇼핑과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로 대표되는 이 시대에도 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신자에게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는지, 그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하라. 여기를 클릭하시면 두 저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원제: How Can We Bring Back Those Who’ve Drifted from Churc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의재발견
교회의의미
팬데믹
방황하는교인
교회의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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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전도의중요성
교인훈련
교회이탈
팀 켈러를 상황화하자
by Trevin Wax
2022-06-09
몇 주 전에 나는 (1) 문화 전쟁의 간략한 역사, (2) 예의와 신념을 갈라 놓는 경향, (3) 우리가 지금 “부정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심층 고찰, (4) 왜 이런 사실이 내게는 과거로부터 기인한 폭발처럼 느껴지는지, 그리고 (5) “부정적인 세계”라는 틀(framework)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렌즈의 변경, 이런 순서로 시작하는 신-종교 우파(neo-Religious Right)의 부상에 관한 시리즈를 시작했다. 다음 칼럼에서 나는 어떻게 공적 생활에 유익하고 충실하게 참여하는지에 대해 좀 더 규범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논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팀 켈러 목사의 문화 접근 방식이다. 제임스 우드의 팀 켈러 비판제임스 우드(James Wood)가 쓴 “팀 켈러에 대한 내 관점은 어떻게 달라졌는가”(How I Evolved on Tim Keller)는 정치 참여와 관련하여 복음주의적 “제3의 길”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켈러에 관한 가장 건설적인 비판으로 유명하다. 우드는 이렇게 썼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욕을 덜 먹고 싶어 하는 복음주의적 열망은 현 정치적 순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우드는 지금 교회가 기존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전적으로 뒤집어 놓은 사회가 만들어낸 “부정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아론 렌(Aaron Renn)의 평가에 동의한다. 켈러의 전략은 [기독교에 대해] “중립적인” 사회에서는 그나마 효과가 있었지만 “부정적인” 세계에서는 효과가 없으며, 그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종종 그를 실질적인 선택과 양보가 이루어져야 하는 싸움에 발을 담구고 손을 더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싸움에서 한 발 떨어진”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드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세기 전환기에 이미 맨해튼은 기독교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았고, 한참 전부터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국 여러 지역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몇 년에 걸쳐서, 맨해튼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지금 우리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켈리의 경고를 들어 왔다.)우드는 후속 글 “이것은 팀 켈러에 관한 글이 아니다”(This Article Is Not About Tim Keller)에서 켈러에게 분명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 글의 목적은 켈러의 사상 구조가 “제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전유된” 나머지, 부족주의를 피하려는 고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도덕적 동등성을 암시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비판하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우리에게는 상당한 양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안하고 싶다. 이를 본회퍼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더 잘 적응하고, 그 안에서 ‘책임 있는’ 행동이 어떤 모습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우드의 두 번째 글을 뉴스레터 독자를 위한 Trevin's Seven의 링크 목록에 넣었다. 그건 그가 쓴 모든 내용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과 같은 문화적 상황에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판을 주로 하는 대화에조차 내가 관심이 많고 마음이 열려 있는 건, 팀 켈러의 영향이다. 나는 팀 켈러 때문에 비판에 열린 사람이 되었다. 나는 우드의 칼럼이 다음 두 부류로부터 공정한 고려와 평가를 받기 바란다. (1) 팀 켈러를 문화에 대한 구식(심지어 ‘비현실적 진보주의자’(closet-progressive)라고까지 부르는!) 접근 방식의 대표자라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 그리고 (2) 팀 켈러를 신성시하고 비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켈러의 공적 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증오와 두려움 또는 불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정당화와 방어첫째, 팀 켈러가 수십 년간 사역에서 내내 강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히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변화의 능력이다.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인해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진리가 마음에 스며들 때, 우리는 더 이상 비판에 방어적이고 독선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내 성품과 관점에 남아 있는 결점을 다른 누군가가 드러내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속물근성에 빠질 때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만약에 정치적 계산이나 공적인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켈러의 제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켈러가 강조하는 은혜와 그 능력을 배반하는 것이다. 사역 모델 검토둘째, 모든 사역 모델은 결국 다음 세대 지도자에 의해 검토되고 변경되며 때로는 거부되기도 한다. 켈러는 다양한 사역 모델에 대해 글을 썼고, 다양한 사역 철학에서 드러나는 과잉을 비판했다. 모든 사역 모델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으며, 이를 지적하는 데 켈러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 비판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목회 모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와 문화에 대한 켈러의 접근 방식이 젊은 복음주의자의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켈러가 가장 경계하는 건, 한 가지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다른 모든 것에서 통찰력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를 배제하는 태도이다. 어떤 문제에 관한 자신의 말이 “마지막 결론”이 되어 이 시대에 유일한 믿을 만한 접근방식으로 신성시되는 것을 켈러가 가장 경계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상황화와 사역셋째, 켈러는 상황화의 중요성과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자세, 접근 방식 및 관행을 조정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가 오해하는데, 상황화는 결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사는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질문에 그들이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경의 대답을 주는 것이다. 아무리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강력한 호소와 논증을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몇 년 전 나는 팀 켈러와 변증론, 교리 교육의 필요성, 문화 변화 및 사역 대응과 같은 주제를 토론하는 그룹에 참여한 적이 있다. 토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자신의 과거 설교가 오늘 토론 모임에서 하루 종일 다룬 내용에 관한 훌륭한 모델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다음 세대는 자신과 다른 사역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렇다고 팀 켈러가 자신이 설교한 방식이 틀렸다고 유감을 표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의미한 바는 다음과 같다. 다음 세대에 필요한 것은 팀 켈러의 방법이나 접근 방식을 단순히 답습(model)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가 논의한 모든 방식으로 응답하는 설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흉내 내지 말고 상황화하라는 것이다!세워야 할 시간넷째, 우리보다 먼저 간 신실한 신앙 선배와 단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을 내다보고 나아간다면, 젊은 복음주의자는 교회를 잘 섬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우리의 작업이 그들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작업을 넘어서야 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의 문화적 상황(moment)에 맞지 않는 측면에는 수정까지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담론이 신학자, 작가, 지도자, 목사 또는 정치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좋은 쪽” 또는 “나쁜 쪽”이라는 범주에 집어넣는, 한마디로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접근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든다. 단지 최신 신학적 입장이나 정치적 제안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실하고, 성경에 뿌리를 둔, 게다가 신학적으로 유익한 목사나 신학자를 배제한다면, 우리는 지혜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이미 구축한 명성을 허물고 그 위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종종 온라인에서 반대자를 향해 “무지하다” 또는 “사악하다”라며 경멸하는 목사와 신학생을 보면서 큰 실망을 느낀다. 켈러는 이런 식의 조롱을 받는 쪽이었다. 하지만 켈러를 모델로 삼는다는 사람 중에서도 켈러가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대우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식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접근 방식은 전도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까지 가로막는다.교회의 사계마지막으로, 팀 켈러의 글을 활용해서 우리는 교회가 속한 “계절”에 따라 가장 좋은 정치적 자세가 무엇인지에 관해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다. 교회의 계절을 설명하는 켈러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겨울: 과거 기독교가 없었던 문화와 교회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교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다. 독특하고 활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공동체를 만나기 힘들다. 복음의 열매는 없다. 오늘날 많은 문화권에서 교회는 전쟁에 휘말리고 영적으로 취약하다. • 봄: 과거 기독교가 없었던 문화에서 교회가 곤경에 빠지고 심지어 핍박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성장하고 있는 상황(예: 중국 교회)이다.• 여름: 니버(Niebuhr)가 “동맹 교회”(allied church)로 묘사한 상황이다. 교회는 대중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기독교 문화가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많은 그리스도인이 문화 생산의 중심지에서 활동한다. • 가을: 오늘날 서구 교회의 상황이다. 탈-기독교 문화에서 교회가 점점 소외되어 가고 있으며, 교회의 독특성을 강화하고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 맺는다. “교회는 우리가 가진 확신과 가장 잘 맞는 모델 속에 거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신에 필요한 ‘도구’는 우리의 은사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문화적 계절과 맥락에 따라 다른 도구까지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다시 말해, 켈러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은사를 가장 잘 적용하고자 하는 다양한 교회와 개인을 향해 열려 있다.비판에 열린 자세팀 켈러에 대해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식이다. 팟캐스트 Mere Fidelity의 최근 에피소드에서 켈러는 기독교가 결코 이념적 범주에 쉽게 들어맞는 종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중도가 아니라 ‘극단의 결합작품’(patchwork of extremes)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 대한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켈러의 잦은 경우처럼, 신학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모두와 평화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끔은 좀 과하다”고 켈러는 스스로 인정했다.하나님이 많은 사역 모델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자기 인식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확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사역의 열매는 말씀에 충실한 설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향후 50년 팀 켈러의 방법과 모델 중 무엇이 살아남더라도, 그가 지향한 개방성과 호기심이라는 특성만은 점점 더 부각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Let’s Contextualize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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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미래
교회의사계
죽은 제3의 길, 살아 있는 제3의 길
by Chris Watkin
2022-06-04
“제3의 길”(the third-way)이 무엇일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는데, 얼마 전 “제3의 길-주의”(the third-wayism)이라는 용어가 특정 기독교 사역, 특히 팀 켈러를 비판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다.[1] 내가 대충 이해한 바로, 이 말은 지금 사회에 만연한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양자 대결 구도의 정치적 또는 문화적 대안을 거부하고 제3의 다른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입장을 말한다.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 데 나는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특히 더 다른 이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에는 일면 귀를 기울일 요소도 있지만, 한편으로 많은 오해와 모순, 순진한 발상들로 가득하기도 하다. 제3의 길이 무엇인지와 더불어 무엇이 아닌지를, 그리고 각종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그 길이 각종 논쟁에 대한 건전하고 성경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내가 생각하는지에 관해서 네 가지 요점을 (또는 권고를) 가지고 설명하겠다. 1. 제3의 길 주의라고 모든 게 다 같지는 않다 제3의 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은 점부터 이야기하자. 이 비판에서는 크게 두 가지가 주로 제기된다. 첫째, 항상 중간을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진리가 서로 반대하는 양쪽 진영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가정하기에 모든 정치적 또는 문화적 불일치에 관한 토론에서 양쪽 모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절충하는” 접근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용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중용과 달리 성경은 분명한 대립(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빌 2:12-13)을 이야기한다. 정통과 이단은 신경 쓰지 않고 양측의 차이만 좁혀 가면 된다는 생각은 단지 잘못된 문화적 참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배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제3의 길은 이런 식으로 조잡하게 절충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길의 사고방식은 기존의 이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들기보다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모든 주제에 관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성경이 있는 그대로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과 함께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와 의미 있는 대화를 가질 수 있다. 제3의 길에 관해 확인된 두 번째 비판은 스스로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모든 입장을 거부하고, 모든 논쟁과 싸움을 초월해 자기네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신선놀음을 하다 보니 이웃 사랑을 단지 성결의 문제로 축소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입장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고 대신 모든 입장을 다 깔보는 게 제3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사실이라면, 제3의 길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식의 조잡한 풍자화는 팀 켈러와 같은 사상가가 펼쳐가는 사역의 전부도 또 실체도 아니다. 위조지폐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돈을 다 금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종종 엉터리 제3의 길이 있다 해서 모든 “제3의 길-주의”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2. 근대성은 이원론에 의해 체계화된다더 나은 성경적 제3의 길에 관한 사례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대 서구 문화가 선천적으로 이원론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 기호와 사물; 주체와 대상;• 미신과 계몽;• 타율성과 자율성;• 편견과 자유사상;• 전통과 현대.목록은 더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원론의 지배를 받는다.• 제1세계와 제3세계;• 정복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해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구호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과 구호 받을 자격이 없는 게으른 빈민.이 같은 패턴에 따라 미국, 영국, 호주 정치는 좋든 싫든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이원론 중 그 어느 것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경 말씀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근대성이 가져온 이원론은 종종 해를 입히고 폭력적이다. 그런 이원론을 거부하는 건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는 것이다. 3. 제3의 길은 첫 번째 길이다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이 현대의 세속 문화가 제시하는 이원론에 단순히 반응하는 수준에서 사후약방문식으로 세 번째 대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의 길”이라는 용어에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현대의 이원론은 훨씬 더 복잡한 성경적 실재를 축소시킬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왜곡한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하는 공의와 자비가 드러나는 사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끝까지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가? 주를 찬양하라. 그러하시다. 그의 크신 긍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다. 사도 요한이 간결하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은 반은 공의이고 반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시다. G. K. 체스터턴은 성경이 말하는 급진적인 “제3의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우리는 두 개의 합성이나 타협을 원하지 않고 절정에 이른 그 두 가지를 모두 원한다는 것, 말하자면, 사랑과 분노가 모두 붙타는 상태를 원한다. … 이 조합의 아이디어가 지정 정통신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독자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통신학은 그리스도가 요정처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아닐 뿐더러, 켄다우로스처럼 반쪽은 인간, 반쪽은 동물의 존재도 아니고, 100퍼센트 사람인 동시에 100퍼센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2]두 가지 다 에너지의 정점에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갈라지고, 그 결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어떤 분열을 일으키는지 한번 살펴보라. 하나는 자비와 이해에 바탕을 둔 형벌 제도이고 또 하나는 정의와 형벌에 기반을 둔 형벌 제도이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추구한다면, 그건 오늘날 서로 다른 현대 주장의 차이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도리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경의 그림을 현대의 세속적 모델이 쪼개서 왜곡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많은 이단처럼,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그들은 진리의 일부를 취하여 마치 전체 진리인 양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님의 성품 속 풍부한 복잡성은 제3의 길이 아니라 첫 번째(창 1:1)이며, 이런 하나님의 길을 공개 담론에서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제3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떨어져 나온 원래의 첫 번째 길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4. 신학은 정치와 다르다이런 저런 세속적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성경을 직접 적용하지 않는 모습을 책임의 포기, 즉 중요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과 정치를 혼동하는 것이다. 신학적 참여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성경의 복잡한 진리, 그러니까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 대한 포괄적인 이야기와 그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현대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정치가 만들어내는 각종 범주 및 구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그러나 정치적 현실이 다루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이런 것이 가장 큰 질문이다. 다음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할까?신학적 측면에서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과 인류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실로 완전한 관점을 제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한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한 정당에 투표하고 또 심지어는 선거 운동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정치적 비전과 용어는 결코 그 정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그 정당이 성경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때 지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단지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내가 정치적으로 열정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누구누구의 정치적 푸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권고: 단지 한두 사람의 글에 제자훈련 또는 사역을 걸지 말라이 글에 나온 비난은 주로 팀 켈러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켈러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일종의 화해자이다. 진짜 논쟁을 즐기는 사역자들은 따로 있다. 그러나 괜찮다. 어차피 교회는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21세기에 “나는 켈러를 따른다”라고 해서 1세기에 있었던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나 “나는 게바를 따른다”보다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는 일꾼”(고전 3:5)의 한 사람일 뿐이다. 누구라도 그 사람의 사역이 이룬 성공 또는 문화적 통찰을 유일한 길로 취급한다면, 그 잘못은 그 사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팀 켈러의 독서는 광범위하고 다종다양하다. 그는 단지 한 사상가나 한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팀 켈러 또는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도 이원론에 빠지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내가 기독교적 성장과 이해력을 키우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켈러주의자’(Kellerist)가 되지 않음으로써 그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게 “제3의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등록하겠다. [주]1. 가장 최근의 예는 다음과 같다. James R. Wood, “How I evolved on Tim Keller,” First Things, 5/6/22. https://www.firstthings.com/web-exclusives/2022/05/how-i-evolved-on-tim-keller일찍이 제3의 길은 논한 글은 다음 글을 보라. Chad Hall, “Third Way Faith,” Christianity Today, 10 October 2008. https://www.christianitytoday.com/pastors/2008/october-online-only/third-way-faith.html.2. Chesterton, Orthodoxy, 296. [역주: G.K.체스터턴의 정통(아바서원), 208쪽에서 인용]원제: The Third Way is Dead. Long Live the Third 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3의길
팀켈러
중용
근대성의특징
이원론
G.K.체스터튼
스마트폰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어떻게 가로막는가?
by Trevin Wax
2022-05-19
17년째 찾지 못하고 있다.이따금 부모님 댁에 갈 때면 온 다락방을 어지럽게 뒤져 보고 서랍 여기저기를 열어 봤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8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시트콤이 담겨 있는 테이프였다. 내 형제들과 교회 친구 몇몇의 도움을 받아 직접 각본을 짜고 촬영한 것이었다.25년 전 일이다. 우리는 내 방 절반을 거실처럼 꾸며 놓고 드라마를 찍었다. 대본을 써서 서로 나누고 주제곡을 녹음했다. 관객 웃음소리까지 삽입했다. 그동안 옛날 라디오 시트콤을 따라 라디오 드라마 여러 편을 녹음했던 터라, “더 룸”(The Room)은 우리의 첫 작품은 아니었지만 다년간 기른 우리의 창의력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어린 시절의 창의성내가 녹음이란 것을 처음 시작한 건 12살 때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장비가 더 좋아졌다. 처음에는 큼직한 스피커 두 대와 테이프 하나를 넣을 수 있는 휴대용 라디오로 시작해서, 이후에는 재생과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카세트 데크를 사용했다.녹음을 시작하고 2년 동안 옆집에 살던 존과 함께 나는 ‘트레빈과 존의 쇼’라는 타이틀로 100편이 넘는 에피소드를 녹음했다. 남동생 허버트를 주연으로 한 스핀오프도 찍었다. (동생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스티브 얼 커 같은 사랑스러운 괴짜 캐릭터를 연기했다.)한번은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과부 역할에 여동생을 섭외하여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작품 제목은 ‘사람들은 켈리를 좋아해’였다.) ‘트레빈 쇼’는 40편이 넘는 에피소드를 녹음하여 두 개의 시즌으로 내보냈는데, 이야기가 길어진 만큼 많은 인물의 변화를 그려내야 했다. 결국 부모님과 형제, 사촌, 교회 친구들까지도 목소리 배우로 투입해야 했다. 이들의 연기는 대본과 상관없이 흘러갈 때도 많았다. 14살쯤 되었을 때 이제 “토크 라디오”(talk radio)로 발전했다. 어느 오만한 영국인(“제트 데이비스”)이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난 정치 사건들을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는데, 내 동생에게 그 영국인 역을 맡겼다. 그러나 역시 내 최고의 작품은 ‘더 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비디오의 세계에 진입했다!드디어 찾다10월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비디오테이프를 찾았다. 당장에 필요한 장비를 사들여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복원한 영상 앞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형제들과 어린 조카들은 어린 시절 우리의 창의성을 엿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몇 년이 지나 보게 된 이 영상이 음질이나 화질 면에서 좋을 리가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리가 어렸을 때 아이폰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열다섯 살이던 그때는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 전이었다.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아이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 생각조차 안 하지 않았을까. 그때에도 이미 내 친구들 거의 다 슈퍼 닌텐도나 닌텐도 64를 하느라 바빴다. 대본을 쓰고 드라마 녹음을 한다거나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가족도 비 오는 날이면 비디오 게임을 하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특히 여름에는 더욱) 야외 활동을 하면서 보냈고,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창의적인 활동을 찾아서 하려고 했다.어린 시절의 창의성을 잃는다?오늘날 스마트폰은 과거보다 아이들이 창의성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 같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창의적인 결과물 또한 만들어 내고 있는가? 가끔은 그렇다.우리 아이가 마인크래프트에서 만들어내는 세상은 경탄을 자아낸다. 슈퍼마리오 메이커에 아이가 직접 만든 스테이지는 또 어떤가? 나도 이걸 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이 우리 다음 세대의 창의력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는 것 같다. 마트에 가면 쇼핑 카트 안에서 주변은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아이패드에만 푹 빠져 있는 어린아이들을 지나치게 된다. 혹시 다음에 정지선에 서게 되면 주위의 차 안을 한번 살펴보라. 아이고 어른이고 청소년이고 너나할 것 없이 들고 있는 기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빛이 그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심각하게도 운전하면서 문자를 하는 사람도 있다.물론 우리는 기술이 가져다준 모든 혜택에 감사해야 한다. 오늘날 기기들의 성능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다.그러나 혹 스마트폰의 사용이 창의성 계발의 도구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상상력 발달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어떨까? 작은 아이폰 화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으니 우리 주변의 실제 세계에는 무신경해지거나 우리 자신이 가진 창의성의 깊이를 탐색해 보려는 시도와는 점점 멀어진다면? 우리 다음 세대도 마당에서 상상의 요새를 만드는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 폭풍우 친 다음 날 물이 차오른 계곡을 누비는 스릴을 알 수 있을까? 전쟁과 성곽, 왕의 통치 기록까지 완벽하게 갖춘 자기 마음대로 만든 왕국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까?창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재치 있는 틱톡을 보거나 재미와 교훈을 주는 인스타그램을 보라. 얼마나 창의적인지 모른다. 이런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하는 일이 지금보다 수월했던 때는 없다.다만 스마트폰이 이전보다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긴 하지만 이런 문화 환경이 오히려 우리의 창의성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루한 순간에는 다들 어김없이 휴대폰을 들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토디 헨리(Toddy Henry)가 ‘여백’(negative space)이라고 부른 공간을 없애고 있지는 않은가?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활동적인 순간들 사이사이의 시간은 아이디어와 통찰력이 형성되고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는 때이다. 당신의 삶에서 무력감과 집중력 저하가 지속되고 해야 할 일을 놓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 곧 느린 속도감과 여백이 주는 유익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당신의 삶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지루함은 문제가 아니다.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다.얼마나 많은 잠재력 있는 작가들이 모험 이야기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뮤지션들이 더는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키보드에 앉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유능한 건축가들이 요새나 나무로 된 집을 더는 만들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주변의 세계를 관찰 한번 해보지 않고 성인이 될까? 요즘 아이들은 손에 들린 작은 스크린의 세계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세상이 기대하고 있는 예술의 탄생, 다음 세대의 정신 건강과 감정 건강, 그리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즐겁게 해 줄 재미 가득한 상상력을 지켜 주려면, 부모들이여, 부디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기를 바란다.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자녀도 나중에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창의성이 맺은 열매를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는 함께 오래도록 만끽하게 될 것이다.원제: How Smartphones Stifle Childhood Creativ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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