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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조선 유교의 중심을 흔들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안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4-03-20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한반도의 선교 역사에서 경상도 지방은 선교 루트가 조금 다른 접촉점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선교구역에 따른 영향이 지배적이긴 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또한 경북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서 조금 늦게 복음이 전해지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주요 도시들이 1900년 이전이거나 적어도 1900년대 초기에는 복음이 전해지는 데 비해서 안동지역은 조금 더 늦은 편이다.


안동 읍내에서 최초 교회는 1909년에 설립된 안동교회이다. 안동지역에는 1908년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부가 1908년에 설립되고 소텔(Chase C. Sawtell) 선교사가 정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복음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1907년 대구 선교부에서 부임해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1년 뒤에 안동선교부가 설치되면서 27세의 나이에 자원하여 미지의 안동에 주재하는 선교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안동지역에 북장로교회 선교부가 설치되기 전 부산에 선교부를 마련한 베어드(William Martyn Baird)와 대구 선교부에서 활동했던 아담스(James Edward Adams)가 이미 1890년대부터 순회전도를 했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베어드는 1893년에 이미 이곳을 순회하면서 전도했고, 아담스는 1902년에 순회하던 중 읍내 장터에서 복음을 전했다.


하지만 안동의 경우도 다른 지역과 다르지 않게 읍내보다는 외곽지역에 먼저 교회가 설립되고 나중에 읍내로 복음이 전해졌다. 즉 안동 읍내가 아닌 일직면 국곡교회(1902), 풍산면 풍산교회(1902) 등이 먼저 설립되었다. 그리고 1903년에는 바렛(William Marshall Barrett)과 브루엔(Henry Munro Bruen) 선교사가 순회 선교를 하면서 와룡면 방잠교회(1906), 이듬해에는 영주 지곡교회(1907)를 각각 설립했다. 이처럼 중심인 안동 읍내보다도 먼저 주변에 복음이 전해졌고, 그 열매가 맺혀 교회들이 설립된 것은 안동 읍내의 유교적 정서와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1908년 안동선교부가 설치되고 소텔 선교사가 주재하면서 복음을 전한 결과 원입 교인들이 생겼고 예배가 시작되었다. 따라서 1909년 한 초가에 7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현재의 안동교회가 시작되었다. 그 시작은 읍내에 살면서 개인적으로 복음을 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교회가 읍내에 없었기 때문에 영주의 지곡교회까지 왕래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아담스 선교사가 풍산교회의 권서인 김병우를 안동으로 보내 서문밖에 5칸짜리 초가를 구입하게 해서 그곳에 서점을 열게 하고, 동시에 신자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함으로써 시작된 것이 오늘의 안동교회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담스와 김병우는 이 교회의 설립에 있어서 실제로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처음 예배를 주관한 김병우(권서인) 외 강복영, 원홍이, 권중락, 박끝인, 정선희, 김남홍 등이 1909년 둘째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는데, 불과 1년이 지난 1910년에는 70명이 회집하는 교회로 성장을 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1월에 시작된 이 교회는 그해 11월 더 이상 권서인에 의해서 인도될 수 없다는 판단과 함께 웰번(Arthur Garner Welbon) 선교사와 김영옥 조사가 안동에 주재하면서 이 공동체를 이끌게 되었다.


웰번 선교사가 주재하게 되면서 1910년 선교사 주택을 마련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공동체는 더욱 성장하게 되었다. 그곳이 현재 안동교회 교육관 자리에 있었던 한옥이었다. 그러나 예배 처소는 선교사의 주택이 옮겨지는 것과 함께 옮겨 다니다가 1911년 ㄱ자 초가 11칸 규모의 예배당을 지어서 예배를 드렸다. 두 번째로 지은 예배당은 1914년 2월에 완공한 현 안동교회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 목조건물로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했다. 그리고 공동체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1937년 현재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을 지었다. 물론 해방 이후 1959년 증축은 했지만 그 규모나 예배당 디자인이 특별한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규모의 예배당을 지을 만큼 많은 신자가 모였고, 그 영향력 또한 매우 컸다는 것을 알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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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안동교회 예배당은 건재하다. 석조건물로서의 위엄과 멋을 가지고 있어서 지나는 이들의 눈을 멈추게 한다. 그런데 이 예배당은 우리나라 근대건축사에 있어서 크게 영향을 미친 보리스(William Merrell Voris) 선교사가 설계했고 건축 시행은 화교인 왕공온(王公溫)이 맡았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양식 건축을 위한 조적이나 석공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따라서 보리스 선교사가 국내에 남긴 건물들 대부분은 중국인들이 시공을 맡았고, 설계와 감리는 보리스와 그의 제자인 강윤이 맡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현재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안동교회 석조 예배당은 국내에 보리스가 지은 180여 채의 건물들 가운데 지금까지 남아서 사용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물 중 하나이다. 


특별히 안동이 어떤 곳인가? 한마디로 조선시대를 지배했던 실세들의 고향이다. 안동 권씨, 안동 김씨, 예안 이씨, 풍산 류씨 등으로 대변되는 권세가들의 고향이고, 전통문화와 재력까지 대단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 기독교 복음이 들어갔고, 그 공동체가 발전하면서 유교의 정서와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안동을 변화시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 선교 초기에 세워진 교회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것들 가운데 하나가 민족을 깨우치는 일과 식민지 시대에 앞장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이다. 안동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백성이 주권을 갖는 개념은 유교를 국교로 삼았던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물론이요, 한반도 전 역사에 존재하지 않던 사상이었다. 그 이유는 한반도에 명멸했던 많은 나라들, 그리고 그 역사를 이어 개국한 조선까지 모두가 군주국가로 역사를 이어왔기 때문이다. 군주국가에서 국민은 국가의 주인의식을 가질 수 없다. 다만 군주를 위해서 존재하는 백성, 신민(臣民)으로서의 위치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선교사들을 통해서 깨닫게 된 국민 의식과 특별히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국가의 개념을 형성하게 되면서 교회와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독립과 관련한 일들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깨달은 사람들이 먼저 나서지 않으면 안 되는 의식이 자기 안에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안동 읍내에 유일한 교회로서 신문물을 접촉할 수 있었고, 신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이 앞장서서 안동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동경에 유학하고 있었던 강대극이 일본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한 후 돌아와 안동 군청 서기 김원진과 당시 안동교회 담임인 김영옥 목사, 그리고 김중희 장로와 만세운동을 모의하였다. 또한 안동교회 설립을 주도한 김병우 장로의 아들이면서 연희전문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김재명이 고향에 내려와서 교회 지도자들과 청년들이 비밀리에 모의했다. 또한 교회 여성 지도자 김정숙, 김병규, 이권애 등이 계명학교 여학생들과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를 만들어서 3월 18일 안동 장날을 기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이 사건으로 안동교회 신자들로서 김병우 장로는 2년 형을 받았고, 김익현은 1년 형, 김재성, 김계한, 이인홍, 황인규, 권점필 등은 6개월 형을 받고 복역했다. 안동교회 신자들이 주동이 된 이 사건은 안동 시민들에게도 크게 자극을 주었고, 독립운동에 대한 성원이 더해졌다. 그러한 의미에서 안동교회는 어려운 시기에 나라의 독립을 외치며 분연히 나섰을 뿐 아니라 안동 시민을 깨우는 일에 앞장서는 모습을 남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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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안동교회는 지역을 깨우는 일에 앞장섰다. 초기 선교부의 정책도 교육시설을 운영하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실시했던 것처럼 교회가 시작되자마자 1911년에 교회 내에 초등학교 과정인 계명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했다. 3년제로 남녀 학생들을 모아 가르치기 시작했고, 1927년 5년제로 학제를 바꾸어서 일제가 요구하는 학교의 면모를 갖추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을 깨닫게 했다. 선교사들과 안동교회 신자들 가운데 가르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봉사했다. 1937년도 재학생이 남자 76명, 여자 56명, 총 132명이 공부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학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계명학교(초등과정)가 지역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서 안동에 중등 과정의 학교가 필요함을 느끼게 되었고, 1924년 경안중학교를 설립했다. 처음 교사 4명에 학생 100여 명이 입학하여 공부했다. 하지만 이 학교는 안동교회만이 아니라 노회 차원에서도 힘을 모아서 제대로 된 중등 과정의 학교로 양성하기를 원했지만 재정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안동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고 먼저 배운 자로서 각각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도록 하는 일에 보이지 않게 나름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이후에는 1948년 유아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을 자처하여 교회 내에 현 교육관 자리에 있던 건물에 안동 최초의 유치원을 개원해서 어린 시절부터 복음을 알게 하고, 기독교 차원의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그리스도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도왔다. 시대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때인지라 담임인 김광현 목사와 당시 안동지역 애국부인동지회 부회장이었던 최매지, 보모 이금석 등이 뜻과 힘을 모아서 함께 유아교육을 시작했다. 훗날 애국부인동지회는 유치원 운영에서 손을 떼면서 자연스럽게 교회가 감당하는 교육시설로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안동지역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 많은 것을 알아 교회가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신용협동조합을 결성하여 운영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자 노력했다. 1965년에 창립한 이 신용금고는 초기 가입자 34명이었고, 출자금은 4,260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신용금고를 통해서 경제적 약자들이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교회는 이 일을 통해서 실제적인 경제적 도우미로서 역할을 한 셈이다. 


또한 안동선교부가 설치되면서 선교사들은 안동교회를 중심으로 또 다른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병원 사역이다. 초기에 부임한 선교사들은 대부분 복음전도자들이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주재하면서 선교사들의 집은 예배 처소이면서 주중에는 진료소가 되었다. 1909년 1월 교회가 시작되었고, 그해 10월 1일 선교사의 주택에서 진료를 시작했으니 거의 같은 시기에 의료사업도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이 현 성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때 의료선교사로 부임한 사람이 플레처(Archibald G. Fletcher)였으며, 1910년 크로더스(John Y. Crothers) 선교사가 안동에 부임하여 교회와 병원을 세워 나갔다. 특별히 크로더스는 국광 품종 사과와 보리 사과 100여 그루를 들여와서 처음으로 재배하게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사과, 특별히 대구 사과를 유명하게 한 장 본인으로 알려졌으니, 이 또한 우리의 먹을거리와 농업경제에 결정적인 전환과 엄청난 도움을 주었다. 


성소병원은 스미스(R. K. Smith)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해서 1914년 현 위치에 베이커기념병원을 신축함으로써 경북 내륙지방에 획기적인 의료혜택을 줄 수 있는 시설을 마련했다. 베이커(Cornelius Baker)는 당시 돈 1만 달러를 기증해서 병원 건물을 짓게 했고, 경북 최초의 종합병원을 만들 수 있게 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택호로 사용하여 기념병원으로 명명했다. 그 후 성소병원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경북 내륙지방에 소외된 사람들을 살피면서 영혼과 육신에 도움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을 살피면서 챙김으로써 복음 전도에 크나큰 역할을 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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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