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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왜 내가 원하는 걸 저 사람이 다 가진 거야?
by Tilly Dillehay2022-02-16

질투는 하나님의 우주가 본질적으로 희소성의 원칙을 따라 돌아간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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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 아버지는 나와 여동생을 아버지의 스튜디오로 데리고 가셨다. 내슈빌에 뿌리를 내린 대부분의 음악가나 프로듀서가 그렇듯이 아버지도 데모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춘 꽤 괜찮은 지하 작업실을 가지고 있었다. 마이크와 의자가 있는 방음 시설이 잘 된 어두운 부스와 공명판이 달린 또 다른 방이 있었다, 그리고 두 방 사이에는 두꺼운 유리창이 있었는데, 한 소절이 끝날 때마다 창 너머로 “엄지척” 사인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게 먼저 노래를 하라고 했다. 나는 작은 방에 서서 커다란 헤드폰을 통해 재생되는 트랙을 따라 불렀다. 그러나 몇 분 지나자 바로 흥미를 잃고 말았다. 헤드폰이 너무 꽉 죈다고 불평하기 시작했고, 아버지는 그냥 나가서 아무거나 하고 싶은 거 하며 놀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동생 소피의 차례가 되었다. 그리고 분명 그날은 아버지가 소피의 놀라운 목소리를 발견한 날이 되었다. 


아버지와 소피는 뭘 한 걸까? 몇 주가 흐르고 부모님이 저녁 식사를 위해 친구들을 불렀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소피와 했던 세션을 언급했고, 손님들은 호기심을 드러냈다. 다들 거실에 앉아 있었는데, 나는 왠지 끼고 싶지 않았다. 


노래가 시작될 때 나는 복도에 서 있었고, 녹음한 소피의 목소리가 허공을 채우기 시작했다. 


고작 일곱 살이었지만, 소피의 목소리는 또렷하고 강력했으며 또 절제되어 있었다. 곧 이어 나의 작은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고, 그럴수록 문밖에서 나는 더 몸을 움츠렸다. 일 분 정도 지나자 아버지가 볼륨을 낮췄다. 며칠 전 나는 왜 스튜디오를 떠났던 걸까? 왜 그렇게 빨리 그만뒀지? 내가 스튜디오를 떠나는 바람에 소피가 빛나게 될 것을 왜 그때는 예상하지 못했던 거지? 


타인이 안되기를 바라는 마음


녹음실의 단열재 냄새는 앞으로 몇 년 안에 내게 매우 친숙해질 것이다. 아버지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 아이들 모두를 포함시키는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교회 콘서트에서 아버지는 정기적으로 딸들을 무대에 올렸다. 


나중에 아버지는 연줄을 써서 우리 자매 모두가 다 어린이 프로젝트의 세션 가수로 일하도록  했다. 덕분에 우리는 향후 자동차 구입이나 대학을 위한 저축을 할 수 있었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는 재즈 커버 곡 CD 녹음을 위한 제작비를 지원했으며 항상 내 목소리를 특별한 방식으로 지지해 주었다. 비록 소피의 목소리에 비해 내 소리가 특징이 없고 파워에서도 뒤진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소피가 머라이어 캐리(Mariah Carey)에 비교될 수 있다면, 나와 비교될 가수는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내 여동생들은 ‘더 와일링 제니’(The Wailin’ Jennys)에 비교되었고, 아버지는 그럭저럭 그 모두의 팬이 되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가 내 인생에서 가장 빨리 피어났던 시기와 질투의 시절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수십 년을 지나서도 여전히 나는 복도에 서 있는 다섯 살 내 모습을 볼 수 있다. 질투 때문에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고 있는….   


나는 아버지가 사람들 앞에서 소피의 CD를 연주하지 않기를 바랐다. CD가 긁혔거나 잘못 놓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소피의 목소리가 그렇게 멋지게 들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날 집에 손님이 없기를 바랐다. 


사실 나는 소피의 목소리가 가진 영광이 사라지길 바랐다. 


중요한 건 불평등과 영광을 보는 눈


소피가 가진 영광스러운 목소리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에 자신의 영광을 새겼고, 인류에게는 두 가지의 몫이 있다.


사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다”(시 8:5). 사람의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빌린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한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하지만 진짜다. 하나님의 영광이 실재하기에, 사람―하나같이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갖 형상들로 바꾸어 놓았다(롬 1:16)―은 다른 사람의 영광에 감동하고 반응한다. 그게 아무리 적은 양이라고 해도 말이다. 우리가 동료 피조물에게서 발견하는 그 영광이 아무리 일시적인 형태일지라고 해도 말이다.


은사의 영광, 유능함의 영광, 지성의 영광, 아름다움의 영광, 예술적 재능의 영광, 부의 영광, 안정적인 관계의 영광, 이 모든 영광은 잠겨 있는 천국의 문에 살짝 손가락을 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감탄할 때도, 누릴 때도, 예배할 때도, 또는 (다섯 살짜리 틸리처럼) 공포와 증오를 느낄 때도, 우리는 반응하기 마련이다. 


어릴 적 내가 느꼈던 그런 공포와 증오에는 분명한 이름이 있다. 바로 질투이다. 


가장 겸손한 즐거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세기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의 세기에 비례한다. 우리는 영광을 누리기 원할 뿐만 아니라, 영광에 둘러싸여 있고 싶어 하고, 또 그 영광을 일부라도 나만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 욕망은 선하고, 피조물로서 자연스러운 욕망일 수 있다. 천국의 영광들에 관해 토론하면서,  C. S. 루이스는 천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고후 4:17)에 대한 생각을 하면 항상 불편하다고 말했다. ‘천국의 영광들은 도대체 어떤 영광일까? 명성, 동료들 사이에서 내가 얻고자 이런 헛된 것 아닐까?’ 루이스는 궁금했다.  무언가가 자신 속에서 깨달아지지 않는 한, 영광을 원하면서 또 겸손해지길 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는 느꼈다.


그간 내가 겸손이라고 착각했던 것 때문에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가장 겸손하고, 가장 어린아이답고 또한 피조물이 누릴 가장 커다란 쾌락을 제대로 누리지 못한 거 같다. 아, 그것은 다름 아니라 열등한 자만이 누리는 특정한 쾌락, 인간 앞에서 짐승이 느끼는 쾌락, 아버지 앞에서 아이가 누리는 쾌락, 스승 앞에 선 제자가 느끼는 기쁨, 그리고 창조주 앞에 선 피조물의 쾌락이다(영광의 무게, 37).

인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졌다(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그리고 이 과정에서 사람은 반드시 변화된다. 사람은 또한 자신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아버지께서 영광의 관을 그에게 씌워 주시고, 그에게서 영원히 기뻐하시는 그런 사람으로 지음 받은 것이다 


질투라는 작은 마음


우리는 가장 중요한 분의 눈에 들고 싶어 하고, 가장 중요한 분의 칭찬을 듣고 싶어 한다. 이것은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잘했다! 착하고 신실한 종아. … 와서, 주인과 함께 기쁨을 누려라”(마 25:21). 영광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변화되고, 광채를 발하고, 부끄러움 없이 그분의 영광을 즐길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를 원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눈에서 즐거움을 보도록 설계되었다.


여기 다섯 살짜리 나 자신과의 연결점이 있다. 두 번째 가인처럼 나도 내 누이가 지상의 아버지로부터 “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죄성에 가득한 불쾌한 반응을 보였다. 질투는 제로섬 세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아버지의 칭찬을 듣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질투는 하나님의 우주가 본질적으로 희소성의 원칙에 따라 돌아간다는 거짓말을 믿는 것이다.


질투하는 마음은 너무나 작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기쁨과 넘치는 사랑을 무한히 표현하시는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풍요는 모두에게 돌아가기에는 충분하지 않다고 진짜로 믿는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곧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의 일부(놀라운 재능, 아름다움, 기술, 직업, 친밀한 관계 등등)를 빌렸다면, 내게 돌아올 몫은 그만큼 적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무엇으로 질투를 없앨 것인가? 


영광에 굶주린 것은 헤드폰을 끼고 있는 어린 소녀들만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틈만 나면 아름다움과 빛과 명성을 좇는다. 우리가 나온 쇼를 시청하고, 우리가 부른 노래를 듣고, 우리 웨딩사진을 작품으로 만들어 줄 사진작가를 고르고, 호수 산책로를 하이킹하고, 우리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과 엮고, 내 근황을 소셜 미디어에 올리고, 아이들에게 뽀뽀를 해주고, 깊은 대화를 나누려고 수제 맥줏집에 들른다. 우리는 다 영광을 추구하는 자들이다. 바람의 기미를 살피고 지평선을 바라보면서 영광의 순간을 기다린다.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에 대한 속삭임을, 그것이 설사 틀리거나 희미할지라도, 쫓아가는 게 우리다. 


이렇게 쫓아다니다가 결국 좋은 소식을 마주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사실이라기에는 너무나 좋다.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차다. 


참 빛이 있었다. 그 빛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에서나, 육정에서나, 5)사람의 뜻에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에게서 났다(요 1:9-13)

우리는 집 밖을 서성이면서 우리가 아닌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영광을 받았다고 발끈한다.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가 방에 들어서기도 전에 다 떨어져버리지나 않을지, 이삭이 에서를 바라보면서 “너의 동생이 와서 나를 속이고, 네가 받을 복을 가로챘구나” 하고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시지나 않을지 의심한다. 이런 경우에도 괜찮을 영광이 있다는 생각을 우리는 못한다.  


누군가는 부자인데 나는 가난한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가시를, 다른 사람은 자녀가 있는데 나는 독신으로 지내야 하는 가시를, 별다른 노력 없이도 누군가는 걸작을 잘도 만들어 내는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그런 작품밖에 만들지 못하는 가시를, 어떤 영광이 뽑아버릴 수 있을까? 


질투는 영광 안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비록 불균등 자체를 없애겠다고 약속하지는 않지만) 이러한 불균등의 가시를 뽑아낼 영광이 분명히 있다. 이 빛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권리를 주었다. 그리고 이 권리는 놀라운 일을 행할 수 있는 영광이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 1:14).

아버지의 기쁨이 우리를 에워싸고 다른 모든 것은 없애버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로 인한 기쁨이다. 하나님의 영광 바깥에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형상으로 변화되었기에 누리는 기쁨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언젠가는 우리를 에워싸고 변화시킬 것이다.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어버리고, 주님의 영광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은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고후 3:18).

질투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마지막 날에, 질투는 영광 가운데 삼켜질 것이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원제: Why Do They Get What I Want?: Envy and the Eyes That Matter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질투하는 마음은 그 크기가 아주 작아서 그런 마음으로는 결코 기쁨과 넘치는 사랑의 표현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헤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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