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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한국 근대사를 품다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승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2-12-16

승동교회는 서울 중심에서 한국 근대 역사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었으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도 그 중심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은 매우 특별한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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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종로에 자리하고 있는, 이 나라의 근대사와 사회 변천의 중심에 있는 교회가 있다. 현재는 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 이전의 이름은 여럿이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곤당골교회, 홍문석골교회, 동현교회라는 여러 가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1893년 사무엘 무어(Samuel F. Moor, 1846-1906) 선교사가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이 있는 곳에서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된 것이 현재의 승동교회이다. 당시에는 그곳이 곤당골이라는 지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곤당골교회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신앙을 지키던 공동체는 1905년 현재의 종로 인사동으로 옮겼다. 


승동교회는 서울 중심에서 한국 근대 역사의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바람을 고스란히 받아내었으며,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도 그 중심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은 매우 특별한 교회이다. 그러함에도 피맛골(피맛길) 뒤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인지, 신흥 대형교회들이 많기 때문인지 이 교회에 관하여 많이들 알지 못한다. 하지만 승동교회의 역사는 한국 교회와 사회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곳이다. 근대화 과정에서 사회적 관습과 제도를 극복하게 하는 산실이었기 때문이며, 식민지 시대에는 독립만세운동의 한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장로교회 역사에서는 조선신학교(현 한국신학대학교)가 출발한 곳이었으며, 1959년 장로교회가 합동측과 통합측으로 분열할 때 합동측 총회가 모인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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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가 지배했던 조선조의 역사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유교적 가치관을 따르도록 했다. 그러한 가치관 중에는 극복해야만 했던 그렇지만 불문율의 제도로 고착된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신분제와 성별 의식이 대표적일 것이다. 신분에 따라서 교육의 기회가 달라짐은 물론이요, 입는 옷부터 직업까지도 마음대로 가질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는 동석하는 것조차 불가한 일이었다. 신분만큼이나 성별은 사람을 상하로 차별하는 중요한 잣대였다. 그러한 관습은 매우 경직된 사회를 형성하게 했다.


그러한 사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는 조선에 복음이 들어왔다. 이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더불어 서양의 교육 방법과 내용도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것은 조선의 사회 관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복음이 전해지던 초기에는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예배를 드려야 했다. 남자교회는 남자 선교사가, 여자교회는 여자 선교사가 따로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니 얼마나 불편했을까. 같은 교회인데 남자와 여자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예배했으니 말이다. 예배당 안에서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 가운데에 휘장을 쳤다. 시간이 좀 흐른 다음에는 아예 예배당을 ㄱ자 모양으로 지었다. 중앙 강대상을 중심으로 휘장이 없이도 남자석과 여자석을 나누어 놓겠다는 의도였다. 물론 그 이전에는 아예 남자와 여자가 모이는 교회가 달랐다.


신분과 성을 극복하고 하나의 교회에서 진정한 공동체가 되려면 유교가 남긴 가치관을 넘는 것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기에 처음 교회들은 이와 관련한 문제들에 직면했고, 이러한 것들을 극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과정은 많은 아픔을 동반했다. 


승동교회는 신분제도와 관습을 극복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준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백정(白丁)이라는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백정은 조선의 세종대왕 이후부터 도축하는 사람, 즉 돼지, 소와 같은 가축을 잡고 해체하는 사람이었다. 백정 신분을 가진 사람은 천민인 노비보다도 사회적 지위가 낮았다. 따라서 그들은 백정 마을에 살아야 했으며,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다.


당연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교회에 나와 일반인들과 동석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무어 선교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 세례를 주었다. 그러자 같은 교회에 다니는 일반인들과 양반들이 저항했다. 백정과는 신앙생활을 같이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백정과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들은 교회를 떠났다. 그러다가 양반 신분의 신자들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예배당에서 양반들이 앉는 자리를 앞에 두고, 백정들은 뒷자리에 따로 앉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무어 선교사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리고 다시 설득했다. 복음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인 것처럼 노예든 백정이든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니 결코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러한 무어 선교사의 가르침과 설득에도 결국 양반들은 이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백정 신분인 이 교회의 박성춘은 장로가 되었다. 신분 의식이 지배하던 사회 관습이 깨지면서 신분제도를 허문 것이다.


박성춘은 단지 장로가 된 것에 그치지 않았다. 1898년 10월 28일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서 박성춘은 “국정을 논하고 만민평등의 인권을 부르짖으며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백정들은 백정 박성춘이 연설한 것만으로도 감격했다. 백정 장로 박성춘이 안창호, 서재필 같은 지도자들과 같은 단상에서 연설했다. 이것은 곧 백정 신분의 해방을 뜻했다. 


더 나아가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본명 박봉출)은 세브란스의학교에서 1900년부터 1908년까지 공부하고 제1회로 졸업하여 1908년 조선인 최초로 양의사가 되었다. 박서양은 1917년 간도에 병원을 세우고 유일한 조선인 의사로 활동했다. 삼일운동이 일어났을 때는 만주 지역에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국민회에서 참여하였고, 독립군사령부 군의관으로 활약했다. 


또한 무어 선교사는 신분제도의 외적 상징인 의관을 신분과 관계없이 사용하도록 하는 역할을 했다. 무어 선교사는 처절하게 소외된 백정의 모습을 보고 고종 황제에게 백정도 갓을 쓸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다. 백정에게 갓이 허용된 날, 백정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갓을 벗지 못해 잠도 자지 못했으며, 갓을 쓰고 괜스레 길거리를 하염없이 걸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만큼 당시 남자들에게 갓은 신분의 상징이었으니, 백정들에게는 꿈같은 일이었다.

  

승동교회는 우리 근대사, 그중에서도 삼일운동의 중심에 있다. 대부분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곳은 태화관이고 만세운동이 전개된 곳은 탑골공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선언문이 준비되는 과정은 잘 알지 못한다. 승동교회는 서울 YMCA 건물, 태화관과 접하고 있으며, 길 하나 건너서 탑골공원이다. 이렇게 지리상으로도 중심이지만, 삼일독립만세운동의 주역들 가운데도 이 교회의 청년 김원벽과 당시 담임 목사 차상진 같은 이들이 있었다. 


김원벽은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재학하던 재원이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 세브란스의전, 경성공전, 경성전수학교 등의 학생 대표들과 함께 학생독립선언서를 발표하려고 기획했지만 삼일독립만세운동이 준비된다는 것을 알고 자신들이 만든 것은 폐기하고 삼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기로 했다. 김원벽은 승동교회 청년부와 연희전문학교를 대표해서 승동교회 밀실에서 각 학교의 대표들과 함께 모여 삼일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었고, 결국 일경은 승동교회와 정동교회를 수색하였고, 김원벽은 구속되어 옥고를 치러야 했다. 


1875년 양평에서 출생한 차상진은 31세(1906년)에 처음 교회에 나왔고, 4년이 지난 후 장로가 되었다. 그 후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17년 목사가 되어 승동교회 5대 담임자로 부임했다. 1919년 3월 5일 승동교회 청년 김원벽이 참여한 만세운동 현장을 보고 의분을 크게 느낀 차상진은 그달 14일에 12명의 지도자와 연대하여 ‘12인의 장서(長書)’를 작성해서 직접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제출했다. 그는 그 즉시 체포되어 8개월 징역형을 받았다.


차상진 목사는 개종한 후 목사가 되기 전에 이 교회에 출석하면서 1907년 동향 후배인 여운형에게 복음을 전했다. 마침 여운형의 집은 승동교회에서 멀지 않은 북촌에 있었다. 여운형은 차상진의 전도로 복음을 받아들였고, 1908년부터 승동교회에서 조사가 되어 곽안련(Allen D. Clark) 선교사를 조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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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동교회가 가지고 있는 역사에서 기억될 수밖에 없을 만큼 한국 교회사에서 중요한 것이 또 있다. 1938년 소위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에 저항하면서 자진 폐교를 단행한 후 서울에 새롭게 만들어진 조선신학교가 1939년 이 교회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 조선신학교는 1940년 정식으로 일제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개교하게 되었고, 해방 이후에 한국신학대학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니, 소위 한신의 출발지가 바로 승동교회이다.


해방 이후 교회를 재건할 때 북한지역의 교회가 함께할 수 없는 상태에서 우선 남한교회만 재건하는 것을 전제로 모인 남부대회도 이 교회에서 모였다. 또한 신학 갈등으로 한국장로교회가 분열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1959년도 합동측과 통합측이 분열할 때 그 분열이 결정되는 합동측 총회가 1959년 11월 23일 열린 곳도 이 교회이다. 

승동교회는 신분제도와 관습을 극복하는 과정의 어려움을 보여준 대표적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주역은 백정(白丁)이라는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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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