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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주일, 교회, 가정을 넘어 실천으로!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2

by 김경호2022-12-26

주일 아침,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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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  


반성.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주일/날/예배에 관한 크리스천 셰런Christian A. B. Scharen의 예리한 비판을 소개합니다. “주일 아침,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셰런의 비판은 스미스에게 그만큼 풀어야 할 까다로운 숙제입니다. 왜냐하면 한 시간 반 동안 드리는 예배가 그 이후 나머지 시간에 비하면 무엇인가를 형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스미스는 이런 까다로운 숙제를 왕을 기다리며에서 “대부 문제”라고 표현합니다. 대부 문제란 주일/날/예배와 실천의 모순을 의미합니다. 스미스는 “대부”The Godfather라는 영화에서 한편으로는 세례식을, 다른 한편에서는 그와 대비된 불법 거래, 협박, 착취, 폭력으로 결속된 가족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세례식과 폭력이 교차하는 상황 속에서 아이의 대부는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다음과 같이 축도를 받습니다. “평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주께서 당신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아멘.” 이 영화는 우리가 주일/날/예배를 드리지만, 잘못된 형성이 우리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세상에는 평생 주일/날/예배를 드리지만 성화의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주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안. 여기서, 스미스는 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을 제안합니다. 첫째, 주일 아침 예배의 시간은 제한되어 있지만, 그러함에도 이 시간은 밀도가 높고, 의미로 가득 차게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감안할 때 짧은 시간이라 하더라도 그 힘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 스미스는 문화에 대한 수도원적 절제를 제안합니다. 이것은 예배에 대한 몰입의 양보다는 살아 있는 본보기(몰입의 질)가 되어야 하고, 일부 문화에 대해 문화전쟁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자제하는 것입니다. 셋째, 날마다 예배하는 습관입니다. 이러한 날마다 예배하는 습관은 교회사의 풍성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날/예배의 실천을 넘어 양의 도전에도 맞서야 합니다. 즉 부엌 식탁, 기숙사 방, 대학 채플, 구내식당, 레스토랑, 나무가 우거진 길에서도 공동체적 실천이 일어나야 합니다. 주일/날/예배를 넘어서는 실천은 하나님의 나라를 실천하는 또 다른 기회입니다.


스미스는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주일/날/예배의 실천의 핵심을 모임, 들음, 사귐, 보냄이라는 네 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모임은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합니다. 예배와 달리, 예배로의 부름으로 시작되는 예배에서는 예배 가운데 일하시며 우리가 그곳에 있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받습니다. 예배로의 부름은 우리 삶에서 창조주의 으뜸 되심과 주권을 매주 재연하는 행위입니다. 들음은 하나님의 율법, 즉 우리 삶을 향한 그분의 뜻이 선포되는 것을 듣습니다. 여기서 율법은 괴로운 멍에가 아니라 오히려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것을 들을 때, 우리는 성경 이야기를 우리 이야기로 만들고 우리 자신을 구속 드라마의 등장인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번 얻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사귐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창조주와 만찬을 나눌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초대받았기에 그들과도 화해해야 합니다. 이는 사회적 실체, 심지어 정치적 실체의 재연입니다. 예배의 마지막 장인 보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 본래 받은 사명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삶아 숨 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세계라는 성전에서 살도록 보냄을 받습니다. 그리고 예배는 축복이자 가라는 명령을 담은 축도로 마무리됩니다. 칼뱅은 교회의 예배가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마음을 회복시키시고 우리를 새로운 이야기 안으로 이끄시는 영적 운동을 단계적으로 하게 만드시는 체육관이라고 했습니다. 이야기에 몰입할 때 (이 체육관에서) 성령이 당신의 습관을 바꿔 놓으실 것입니다.


교회/공간을 넘어서는 실천


반성. 명백한 교회의 실패.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성령의 사역이 가장 강력하고 열정적으로 이뤄지는 공간은 그럴 가능성이 가장 작아 보이는 곳, 바로 교회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은 교회의 실패입니다. 스미스는 왕을 기다리며에서, 이러한 교회의 현실에 대해 묻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가?” 그 이유는 우리가 성화와 변화를 위한 공간인 교회에 우선성을 부여하고 있지만, 교회 예배에만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경쟁하는 도제 살이에 예속되어 있고,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 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다니지만 동시에 노예무역에 종사하여 인간을 상품화하고, 그들을 비인간화시킵니다. 포르투갈 노예선은 이것을 필요악이라고 정당화시키고 그들의 수치를 숨기기 위해 밤에 몰래 아프리카 노예들을 배에서 내리고, 교회의 십일조라는 명목으로 두 흑인 소년을 교회에 노예로 바칩니다. 월리 제임스 제닝스Willie James Jennings는 이러한 관행이 국가로 인해 어쩔 수 없는 참여가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 시작된 내부 기획이라고 비판합니다. “교회와 성직자들이 신세계에서 국가의 세속적인 일에 참여했다거나 신세계의 시간적 질서에서 교회의 존재가 이차적으로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것이다. 아니다. 교회는 정복자들과 함께 들어갔으며, 에스파냐인 정복자들의 진영 안에서 그들과 더불어 진영을 세웠다. 인디오 세계의 질서 재편은 기독교적 형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기독교는 식민주의와의 공모를 막는 데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습니다. 이는 명백한 교회의 실패입니다! 


제안. 스미스는 반성적 차원에서 우리에게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교회론과 민족지학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크리스천 셰런은 “교회론으로서의 민족지학”이라는 형태로, 존 밀뱅크John Milbank는 “신학과 사회이론”이라는 형태로 제시합니다. 쉽게 말해, 신학자들이 놓친 이단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하게 하는 것이자, 더 나아가 민족지학자로서의 목회자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민족지학자로서의 목회자의 역할을 제안합니다. 첫째, “회중을 둘러싸고 있는 제국의 의례들을 읽어 내는 민족지학자가 됨으로써 회중을 섬기고, 성경적, 신학적 렌즈를 통해 회중이 후기 근대 민주주의의 의례를 읽어 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읽어 내는 것과 함께 해석도 필요합니다. 둘째, “지상 도성의 의례를 폭로하는 것과 함께 더 나아가 천상의 시민권을 계발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 시민권은 곧 우리에게 소명이자 부르심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신학자에게는 기독교 예배에 암시된 선(텔로스)에 대한 본질적, 성경적 전망을 설명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정/공간을 넘어서는 실천


반성. 스미스는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가정에 대한 반성을 표현합니다. 가정은 사랑을 키우는 공간이기는 하지만, 교회라는 첫 번째 가정 내에 위치시켜야만 가정에 영양분을 공급할 수 있고, 교회의 예전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일 아침의 예배와 주중에 우리의 실존을 규정하는 예배가 상호작용함으로써 가정을 넘어 교회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가정은 결혼에서부터 잘못된 형성의 시작점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혼은 급성장하는 결혼 산업과 함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결혼 자체를 과시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가 결혼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증거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혼의 소중함이 아니라 결혼의 화려함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는 노력보다 결혼식이라는 과시적 화려함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결혼을 과시하고, 사랑을 과시하지만, 그 이면에 배우자란 나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 줄 사람일 뿐입니다. 결혼은 일종의 과시이자 자기애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신혼여행은 둘만을 위한 것이고, 자녀는 결혼의 흥을 깨는 존재이므로 자녀는 천천히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결혼관은 가정을 하나님의 이야기 안에 위치시키지 못하고, 우리의 가정을 작은 교회로 만들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결혼과 신혼여행 이후에, 가정 예배는 형성적 힘을 가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의 형성이란 보호받는 가정이 아니라 세상으로 파송하는 또 다른 재정향의 공간으로서의 가정일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제안. 스미스는 가정에서 교회 건축하기를 형성하기 위한 몇 가지를 제안합니다. 첫째, 무엇보다 저녁 식탁 자리의 형성의 힘을 강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녁 식탁은 자녀들에게 세상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권할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재미를 우선으로 하는 청소년 집회와 프로그램은 사실상 자녀들이 교회와 신앙을 떠날까 봐 두려워하는 부모와 성인들의 창작품일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가정을 더 광범위한 하나님의 집 안에 자리 잡게 해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어른과 떼어놓는 방식이 모방과 형성의 기회를 제거하고, 어린이와 청소년들을 단순히 교회 안에 머물게 하려는 것이 곧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는 것인 줄 착각합니다. 따라서 스미스는 가정에서 청소년을 형성하는 교육은 교회 안 다른 곳(청소년부 예배실)이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 예배당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재미에 초점을 맞추는 모형은 다른 연령대의 계층과 어려움에 직면하고, 청소년과 어른들을 분리해 버리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따라서 재미를 추구하는 교육은 결국 소셜 미디어에 조장된 자아에 초점을 맞추게 됨으로써 잘못된 형성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가정은 교회라는 일차적 가정 안에 위치해야 하고, 교회는 우리가 습득한 자기중심주의를 바로잡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스미스는 가정에서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 형성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것은 “학생을 기독교 신앙 안에서 형성하고자 한다면, 먼저 형성하는 이들을 형성해야 한다. 즉, 우리가 먼저 재형성되고 변화되어야 한다.” 가정의 형성을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가 부모 자신의 형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덕은 반드시 본보기를 통해 흡수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가정과 교회를 넘어 창조세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세상을 창조세계로 이해하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부르심임을 깨닫는 것이다. 성령은 당신에게 들을 귀와 볼 눈을 주셨으므로 창조세계는 우리를 부르는 선물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한 방이요, 그 자체가 초대장이다.” 주일 날 드리는 예배가 교회와 가정이라는 공간을 넘어, 창조세계로 확장되기를! 

가정은 교회라는 일차적 가정 안에 위치해야 하고, 교회는 우리가 습득한 자기중심주의를 바로잡는 공간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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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