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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은 세계관을 위하여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3

by 김경호2023-01-07

과연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현재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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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지난 두 편의 글을 통해서 제임스 스미스의 세계관이 가진 장점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평하게,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점을 살펴볼 차례입니다.      


스미스의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고, 이는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다.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됩니다. 먼저, 출발점은 인간론입니다.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2)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or 정서)에 사로잡힌다. (3)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은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진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적으로 실천될 때 이루어진다.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비판 


먼저, 개혁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마음, 즉 “지-정-의”를 통해 실천(형성)해 나가는 존재로 이해해 왔습니다. 예배가 삶의 핵심인 것은 옳습니다. 그러나 형성은 예배만이 아니라 양육과 교제, 선교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 유기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이런 형성에는 철학적 인간론이 아니라 “영혼과 몸” 또는 “지-정-의”라는 성경적 인간론이 그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이런 전통적 견해로부터 이탈된 급진적 정통주의의 입장에서 욕망-사랑, 몸-습관을 통해 형성해 가는 철학적 인간론으로 설명합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의 입장이 과연 전통적인 개혁주의의 입장인지 이론적 측면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는 스미스의 주장에 대한 주요 비판점을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사랑,” “몸-습관-형성,” 그리고 “이야기-목적-상상력”이라는 세 가지 요소로 보고, 그 장단점을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합니다. 


비판 1: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한다. 인간은 예배로부터 시작되는 욕망하고 사랑하는 존재라는 점, 이것이 스미스의 세계관의 출발점입니다. 그 근거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빌려온 것입니다. 핵심 문장은 이것입니다: “사랑할 대상에 대해서 서로 합의함으로써 뭉친 이성적 존재들!” 그리고 여기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다”라는 명제가 나옵니다. 그러나 스미스는 자신이 차용한 이 근거 구절을 좀 더 복잡하게 서술합니다. 즉, 인간은 욕망하며 사랑하는 존재라고 말하며, 욕망과 사랑을 동일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하나님의 도성에서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 책의 8권 6장 각주 2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참된 사랑이라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이며 그렇지 않은 것은 욕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랑과 욕망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는 일방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이 책에서 사랑과 욕망을 구별하지 않았고, 에로스와 아가페도 구별하지 않으려 했다. … 이와 관련해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카리타스caritas와 쿠피디타스cupiditas 사이의 구별이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나는 이 둘 모두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는 델렉타티오delectatio라고 본다.” 여기서 스미스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으며,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해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에 부합하는지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맡긴다.” 나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정의한 사랑과 욕망의 개념을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스미스는 기존 용어가 가지는 의미와 정의를 자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비판 2: 인간은 자신과 사회적인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실천한다. 먼저, (1) 메를로퐁티는 지각을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지식의 기만적 단순성과 대조를 이루는 현장의 불분명하고 모호하며 거친 현실이다.” 조금 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지각은 판단과 분석,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입니다. 이런 지각을 메를로퐁티는 “신체적 앎”으로, “지식보다 앞서며 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일종의 지향성을 통해 환경을 헤쳐 나가는 행위자” 즉 “의식보다 앞선 선지식”preconcious knowledge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오랜 시간에 걸쳐 구축된 습관화된 몸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스미스는 몸의 작동이 행위자 자체에게 무의식적이고 숨겨진 것임을 강조합니다. (2) 부르디외는 메를로퐁티가 지각이라고 부른 것을 아비투스(습관)라고 명명합니다. 아비투스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집니다. 첫째, 아비투스는 영속적이며 치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비투스는 사회적 몸이 내 몸보다 우선합니다. 둘째, 특정한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전수된 이 성향은 ‘의식적 지향’ 없이 기능합니다. 그러나 아비투스는 의식적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적 지향이 의식적 지향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이러한 주장은 그가 인용한 근거자료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스미스가 인용한 메를로퐁티와 브르디외의 무의식적-자동적 형성은 형성의 한 면만 강조하고 있습니다. 일단 스미스가 인용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도덕적인 덕”이 “습관”을 통해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습관은 지성과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지성을 통해 더 탁월한 행위를 가지게 됩니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는 습관을 지성과 분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연결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근대의 존 듀이John Dewey의 인간본성과 행위에서도 발견됩니다. 듀이는 이렇게 간략하게 그 핵심을 말했습니다. “어떠한 습관 형성이든 예외 없이 지적 독특함이라는 초기 단계를 거치지만 지속적으로 성찰되지 않는다면 사유 없는 행동으로 끝나버린다.” 또한 “습관들이 서로 갈등하고 충동이 불러일으켜지면, 비로소 의식적 탐구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유와 습관은 분리되지 않고 연결됩니다.      

  

비판 3: 예배하는 인간은 이야기에 의해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힌다. (1) 이야기. 스미스는 인간을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향이 이야기에 의해 근본적으로 형성되는 서사적 동물”이라고 정의합니다. 이러한 서사, 즉 이야기가 우리의 감정적 지각 장치를 훈련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2) 이야기와 상상력. 이야기는 상상력으로 더 잘 이해가 되고, 철학적 인간론에서 이야기에 핵심 역할을 부여합니다. 따라서 “예전적 인간론은 이러한 몸/이야기의 결합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3) 이야기와 상상력과 목적. 또한 이야기는 “미학적 수단으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는 예전에 몰입하기 때문에 우리는 오랜 시간에 걸쳐 특정한 텔로스를 욕망하는 사람으로 형성된다.” 좀 더 명확한 문장은 이렇습니다. “예전은 좋은 삶의 수행된 그림,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랑과 갈망을 방향 짓는 왕국에 대한 전망의 상연된 수행으로서 은유와 서사와 드라마의 역학을 전달한다.” 종합해 보면, 예배는 이야기에 의해 상상력을 건드리며, 텔로스를 욕망하게 합니다. 그러나 스미스의 형성 개념은 이야기, 상상력, 목적과 연결된 논리입니다. 여기서 나의 고민은 스미스가 제시하는 이야기, 목적, 그리고 상상력이 포스트모던의 상황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따른 비판점은 이것입니다: 과연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현재 분리된 것으로 볼 수 있는가? 제임스 사이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근대의 가장 최근 단계로, 자연주의의 가장 최근 형태로 간주”하고, “포스트모더니즘 속에는 근대주의의 본질(신 없는 우주,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강조합니다. 또한 마이클 고힌과 크레이그 바르톨로뮤도 동일한 인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모던과 포스트모던이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지금 현시대의 상황은 네 가지의 징후로 나타납니다. 그것은 “포스트모던” “소비주의와 세계화” “남반구 기독교의 부흥” 그리고 “이슬람교의 부흥”입니다. 그러나 이 네 가지 가운데 실세는 포스트모더니즘만이 아닙니다. 아직도 현실 속에서는 우리의 사회, 정치, 경제생활의 많은 부분을 모더니즘이 형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세계화의 과정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측면에서, 대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야기”만으로는 이 시대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모던과 포스트모던이라는 두 가지 실세에 대한 인식하에, “이야기”와 “명제성” 또한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앨리스터 맥그라스의 주장이 우리에게는 큰 실마리가 됩니다. 맥그라스는 성경의 구조에서 교리(명제성)와 내러티브의 상관관계에 주목합니다. 일차적으로 성경 안에서 내러티브와 교리는 서로 얽혀 있습니다. 성경은 교리적 진술이나 추상적 원리라는 방식보다 주로 살아온 삶과 역사적 실존을 가리키는 내러티브 방식으로 서술됩니다. 맥그라스가 이 둘의 관계에서 주목한 점은 “내러티브에서 교리로의 전환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입니다. 맥그라스는 이 질문을 통해 그 상관관계를 설명합니다. 맥그라스는 구스타프 아울렌Gustaf Aulen의 고전적 속죄론인 승리자 그리스도,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의 논쟁(예수의 두 본성), 그리고 성육신 교리를 다루면서, 교리와 내러티브 사이의 상호작용이 있음을 분석해 냅니다. 이 상호작용은 한편으로는 “교리는 성서적 내러티브를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틀을 제공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교리는 임의적 틀이 아니라 내러티브에 의해 제안되고 암시되는 것입니다. 맥그라스는 내러티브로부터 제안되는 암시를 개념적 틀, 개념적 하부구조, 준-교리적 암시라고도 표현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내러티브는 일차적이고. 개념적 틀은 이차적입니다. 교리와 내러티브 간의 상호작용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새로운 차원의 해석으로 나아가며, 개념적 틀은 하나의 교리로 확장됩니다. 맥그라스의 교리와 내러티브에 대한 논증의 장점은 교리가 외부 출처로서의 계몽주의적 전제에 의해 연역된 것이 아니라(예를 들어, 아리스토텔레스의 의의 개념)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로부터 해석되고 추론됨을 제시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내러티브는 내러티브에서 파생되는 개념적 틀보다 근원적이며, 우월하며,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그러나 성경적 내러티브 자체만으로는 암시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결함이 있으며, 따라서 내러티브는 교리에 의해 해석되어야 한다고 제시한 것입니다.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 전체 평가. 긍정적 측면.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첫째,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형성되는 교육적 가치가 있습니다. 또한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의 형성과 함께, 이야기를 통해 상상력에 이끌리고, 목적에 사로잡히는 독특한 “매커니즘”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이러한 형성에는 역학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구체적으로 형성, 잘못된 형성, 대항적 형성, 경쟁적 형성과 같은 역학들입니다. 셋째, 이러한 형성의 왜곡을 바로잡기 위해, 교회론으로서의 민족지학을 제안한 점입니다. 부정적 측면. 그러나 스미스의 세계관이 제시하는 바에 부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첫째, 스미스의 모던과 포스트모던에 대한 인식에 한계가 있다는 점입니다. 그는 모던을 배제하고 포스트모던적 요소만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던과 포스트모던은 그런 식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셋째, 스미스는 그가 인용한 학자들의 주장을 선택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스미스가 인용된 학자들의 주장에는 대부분 지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스미스는 자신의 전제에 따라 의도적으로 그 사실을 배제한다는 점입니다. 끝.     

나의 고민은 스미스가 제시하는 이야기, 목적, 그리고 상상력이 포스트모던의 상황에만 한정하여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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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