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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성도들의 귀감으로 세운 충청권 선교의 교두보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공주제일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3-15

충청 내륙선교의 중심 공주제일교회는 이 지역의 모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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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충청권 선교는 상대적으로 늦었다. 선교 거점을 공주에 마련하기까지는 사실상 긴 시간이 걸렸다. 이 지역 선교를 위한 시도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개종한 이들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 채 있었고, 이따금 찾아오는 권서인이나 선교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들의 신앙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철저하게 은둔하기를 자처했던 조선의 역사가 그랬듯이, 지방의 작은 고을을 형성하고 살면서 양반이기를 자처하고 있던 공주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그곳에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별히 이 고을 사람들에게 선교사들이 다가가고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실제로 공주에 복음이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까지는 10여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는 곧 그만큼 오랜 시간 복음 전도를 위한 다양한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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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시도는 이미 1892년부터 있었다. 1893년 윌리엄 벤튼 스크랜턴(William Benton Scranton, 시란돈) 선교사는 수원과 공주를 중부권 선교의 거점으로 만들기 원했고, 그 일을 위해서 유치겸 전도사를 공주에 보내 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 수 있을지 가능성을 확인하도록 했다. 하지만 여의치 못했고, 1896년 스크랜턴 자신이 공주지역의 선교책임자로 파견받았다. 그리고 1897년부터 두 차례 공주를 직접 방문해서 선교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조사를 했다. 그 과정에서 1897년 5월에는 어머니 메리 플레처 스크랜턴(Mary Fletcher Scranton) 선교사와 함께 공주를 순회하기도 했다. 


이때까지도 아직 완전한 거점이나 공동체를 확보하지 못했다. 1898년 공주지역 담당이 스크랜턴에서 스웨어러(Wilbur C. Swearer, 서원보) 선교사로 바뀌었다. 스웨어러 선교사는 보임되자마자 1898년 가을부터 공주지역을 두 차례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렇게 수고하기를 몇 년의 시간이 더 흘러서야 스웨어러는 1902년 가을 공주 봉황동에 있는 초가 한 채를 매입할 수 있었다. 이것이 사실상 오늘의 공주제일교회의 출발이다. 이렇게 공주에 선교부가 터를 잡기까지 꼭 10년이 걸린 셈이다.


스웨어러 선교사는 그 초가를 마련함과 동시에 그곳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김동현 전도사를 파송했다. 그는 1895년 경기도 시흥의 무지내교회를 세우는 출발점이었던 인물이며, 그 이후에 권사로서 수원의 종로교회가 출발하는 시점에서도 역할을 했다. 그러한 점에서 특별하게 쓰임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스웨어러 선교사는 그를 신뢰하여 공주 선교를 위한 교두보를 만들라는 특명을 주어 파송한 것이다. 하지만 김동현은 이곳 공주에서는 사실상 실패했다. 과거 수원의 종로교회를 세우는 과정에서 그는 투옥당했고, 스웨어러와 스크랜턴, 그리고 외교관 신분인 알렌의 구명 노력으로 겨우 풀려한 적이 이었다. 그 이후에 그는 어떤 트라우마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사실상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적극적이지 못했던 것 같다.


마침 1902년 원산 선교지가 정책적으로 북감리교회 선교부 관할에서 남감리교회 관할로 이관됨에 따라서 1903년 원산에서 활동하던 의료 선교사 맥길(William B. Mcgill, 맥우원)이 원산에서 철수하면서 공주로 파송되어 가세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인 1904년에는 샤프(Robert Arther Sharp) 선교사 부부가 가세하여 명선학교(영명학교)를 설립하였다. 1906년에는 윌리엄(Frank Earl Cranton William, 우리암)이 공주에 와서 명맥이 끊어진 명선학교를 다시 세워서 오늘의 영명학교가 있게 했다. 그밖에 테일러(C. Taylor), 반 버스커크(James Dale Van Buskirk) 등이 공주에 파송되어 교회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이렇게 공주는 내륙중심의 선교 거점도시가 되었고, 그 중심에 공주제일교회가 있다.


충청 내륙선교의 중심 공주제일교회는 이 지역의 모교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많은 신앙의 유산을 남겼다. 1914년 통계를 보면 등록 교인 총수가 833명에 이르는데, 얼마나 폭발적인 성장 과정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만큼 교회의 영향력이 지역사회에 크게 미쳤다는 것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이 있기까지 전해오는 귀한 이야기가 오늘에까지 귀감이 되는 것은 지나칠 수 없는 신앙의 유산이다. 그 이야기는 공유할수록 더 큰 은혜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기에 여기에 소개하여 그 은혜를 이어가고자 한다. 먼저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옆구리에 낀 사람)로 알려진, 그러나 그의 이름은 알 수 없는 한 사람에 의해서 세워진 초기(두 번째) 예배당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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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평양에서부터 시작된 대부흥 운동은 한강 이남으로 전해지는데, 여기 공주에도 그 부흥 운동의 여파가 이르렀을 때, 비록 초기에 전도가 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폭발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성장은 예배당이 비좁아지는 문제를 동반하게 되었다. 부흥 운동과 함께 공주에 자리 잡게 되는 의료선교팀의 활동으로, 공주제일교회로 더욱 많은 사람이 모여들게 되었다. 따라서 비좁은 예배당을 시급히 해결해야 했지만, 신자들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당시 일반인의 생활 수준이라는 게 정말 형편없었던 것은 물론이다. 그렇기에 공주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급히 예배당을 지어야 한다고 보고하고 예산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 본국의 해외선교부도 세계 각처에서 들어오는 선교비 요청에 충분히 응대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예배당 건축을 위한 예산확보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공주제일교회가 성장하고 있다는 소식은 기뻤다. 그때 예산확보 때문에 고민하고 있던 감독을 찾아온 한 신사가 있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는데, 우산을 옆구리에 끼고 나타난 그 신사에게 감독은 대화 중에 자연스럽게 조선의 공주라고 하는 곳에 당장 예배당이 필요한데도 건축비를 보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마음을 나누었다. 무심히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신사는 건축비에 충분한 액수의 돈을 감독에게 내놓고 홀연히 떠났다. 그가 거액을 내놓았을 때 감독은 그의 이름을 물었지만, 그가 감독에게 남긴 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법이지요!”였다. 그렇게 이름도 모르고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전해준 돈으로 지은 예배당이 1909년 5월에 준공된 ㄱ자 벽돌 예배당이다. 당장 300명 넘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 공주지역에서 가장 큰 양옥이기도 했다.


무명의 협산자가 전해준 돈으로 지은 예배당은 공주를 거점으로 하는 선교의 상징과 같은 건물이 되었다. 이렇게 1909년에 지은 공주제일교회 예배당은 이름을 모르는 한 신사가 남긴 돈으로 지을 수 있었는데, 선교부로부터 돈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헌금한 사연까지 전해짐으로써 공주제일교회는 이 예배당을 “협산자 예배당”이라고 불렀다. 낯선 이름이기는 하지만 예배당이 지어지기까지의 사연을 알고 나면 그렇게 불러야 했던 것에 충분히 공감하게 된다. 


또 하나는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등록문화재(제472호)로 지정된 구(舊) 예배당이다. 1931년에 벽돌로 지은 이 예배당은 공주의 상징이라고 할 만큼 고풍스러운 자태와 함께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협산자 예배당이 지어진 다음에도 폭발적인 성장은 이어졌고, 이내 새로운 예배당이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의 박해는 공주라고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일제의 박해는 교회, 신앙, 나아가 학교와 선교사의 활동까지 크게 위축시켰다. 그렇지만 공주에서도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영명학교와 제일교회를 중심으로 한 항거가 1919년 4월 1일 공주 장날을 기해서 폭발했다. 담임 목사를 비롯한 제일교회 신자들과 영명학교 교사들과 학생들 모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비폭력 저항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1920년대는 상대적으로 교회의 양적인 성장보다는 교육과 의료사업의 영향이 크게 미치면서 지역사회에 기독교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을 깊이 심어 주었다. 주로 선교사들이 세운 진료 기관과 영유아들을 위한 보육시설, 영양실조에서 비롯된 각종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영양식 보급 및 식량문제 해결을 위한 농업기술 보급 활동을 통해서, 당장 생존과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해결해 갈 수 있도록 하는 돕는 일을 한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1931년에 붉은 벽돌 예배당을 새로이 봉헌했다. 이 예배당을 지은 이후 일제의 한반도 강압 통치가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1936년부터는 예배의 자유까지도 침해받기 시작했다. 나아가 배교를 강요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고 선교사들이 강제 추방당하면서 교회에 따라서는 폐교당하기도 하고, 예배 자체를 하지 못하게 되는 교회도 생겼다. 예배를 허락받은 경우에도 국민의례를 빙자한 배교 의식이 전제되기도 했다. 1931년 준공된 이 예배당도 1941년부터 해방을 맞을 때까지는 폐쇄되어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려운 시대 상황에서도 이 예배당은 자력으로, 공주제일교회 성도들의 손으로 건축되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예배당의 크기나 자재를 고려하면 상당한 예산이 필요했지만, 순전히 성도들의 헌금과 헌물로 충당한 것이다. 당시 그들인 드린 헌물 곧 부동산은 2011년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할 때도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중심에 당시 양두현 장로와 부인 지누두 권사가 있다. 공주제일교회에는 특별한 기념비가 몇 있다. 목회자나 순교자 같은 이들의 것이 일반적인데, 이 교회에는 특별히 양두현 장로와 부인인 지누두 권사를 기리는 기념비가 크게 자리 잡고 있다. 1931년 예배당을 건축하기에 앞서 이미 새로운 예배당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양 장로 부부는 논 1만 8,282평과 밭 2,681평을 건축을 위한 헌물로 드렸다. 당시에 논의 가치는 어떤 재산보다 컸다. 그들이 바친 논은 100마지기에 이르는 땅이었고, 밭 역시도 보통 사람이라면 쉽게 내놓을 수 없는 큰 재산이었다. 새로운 예배당을 짓고서 이 교회 성도들은 양 장로 부부의 섬김을 기리기 위해서 1931년 5월 기념비를 예배당 마당에 세웠다.


양 장로 부부의 이러한 섬김은 그 후 이 교회의 귀감이 되어 후배 신자들 역시 큰 부동산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마치 전통처럼 이어감으로써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들을 수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했다. 1931년 황하명 성도가 별세하면서 논 10마지기, 홍누두 성도 밭 7,665평과 논 8,216평, 대지 678평, 임야 10,000여 평을 드렸다. 이렇게 드려진 부동산은 2011년 지금 사용하는 새로운 예배당을 건축할 때 그 일부를 매각해서 20억 원을 마련하여 비용으로 사용함으로써 80년이나 지난 후손들에게까지 그 혜택을 주었다. 따라서 이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마련하면서 홍누두 성도를 기념하는 비석도 세워 선배의 신앙을 기억하게 했다.


일제 말기에 폐쇄되어 사용하지 못했던 이 예배당은 1945년 해방과 함께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나, 이번에는 1950년 6.25사변을 겪으면서 크게 파괴되는 피해를 보고 말았다. 1950년 8월 전쟁 중에 폭격을 맞아 예배당이 반지하만 남고 사실상 파괴되었다. 인민군은 교회만큼 주둔하기 좋은 건물이 없었기에 예배당을 숙소와 보급품(무기) 창고로 사용했고, 그 때문에 미군이 반격하는 과정에서는 다시 폭격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처참하게 파괴된 예배당은 전쟁이 끝난 뒤인 1956년에 증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할 수 있는 대로 옛 모습을 온전하게 복원하기 위해서 남겨진 것은 그대로 살려내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건축 자재와 복원을 위해서 미군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복원을 위한 자재를 조달하기 위해서 협산자 예배당을 헐어서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너무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 후 1979년 예배당이 비좁아서 다시 한번 증축했다. 이 과정에서 이 예배당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프로테스탄트교회 예배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남규 작가의 작품으로 삼위일체 신앙을 형상화한 스테인드글라스이며, 유리 벽돌처럼 하나씩 찍어내어 만드는 공법을 사용한 작품이다. 예술성과 종교 문화적인 가치가 높게 평가되는 작품으로써 이 예배당의 특별함을 더하게 해주는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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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선교 교두보로써 공주제일교회는 일찍 설립된 만큼 이 교회를 통해서 성장하거나 거쳐 간 교계의 지도자와 정치, 교육, 의료, 문화계의 많은 지도자가 있다. 복음 전도의 교두보이자 다양한 영역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를 배출한 산실이었던 이 교회의 무게감이 더 크게 느껴진다.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에서 촬영한 영상도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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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