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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주님, 다시 부흥을

팀 켈러의 ‘부흥’

by Tim Keller2023-04-01

버크넬 대학을 다니던 1970년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처음 2년간 내가 속했던 작은 IVF 모임에 참석하는 인원은 고작해야 다섯 명에서 열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3학년이 되었을 때 숫자가 갑자기 열 배로 증가했고,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휴대폰과 소셜 미디어는 말할 것도 없고 전화기에 자동 응답 기능도 없을 때였다. 특별한 전도 캠페인도, 또 어떤 미디어 매체도 없었다. 사실상 우리는 ‘운동’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적도 없었다. 그 어떤 지침도, 위원회도,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부흥을 공부하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목회를 결심하고 고든 콘웰 신학교에 들어갔다. 1972년 가을, 교회 역사가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그의 경력에서 처음으로 “영적 삶의 역학(The Dynamics of Spiritual Life)”이라는 과정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것은 부흥에 관한 역사적 연구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부흥에 관한 역사가였으며 또한 대각성 운동을 연구한 인물이었다. 그의 과목을 들으면서 나는 정말 놀랐는데, 다름 아니라 버크넬 대학교 캠퍼스에서 목격한 사건을 상당 부분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물네 살에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버지니아 작은 마을에 있는 장로교회(PCA)에서 9년간 목회했다. 그 후에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5년 동안 가르쳤다.


뉴욕시에 부흥이 일어나다


1989년 우리는 리디머 장로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그곳에 도착하고 5-6개월 사이에(1990년 초부터 1991년 말까지), 다시 ‘그 일’이 일어났다. 대학에서 목격했던 것과 거의 비슷한 역동성(dynamics)이었다. 같은 느낌이었고, 같은 냄새가 났다.


우리 교회가 성장을 거듭한 곳은 범죄로 인해 사람들이 빠져나가던 맨해튼 한가운데였다. 우리 교회에는 쇼핑족이 없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했다. 사실상 뭔가를 제대로 시작하기 어려운 장소였지만, 교회는 2년 만에 약 천 명이 예배에 참석할 정도로 성장했다.


당시에 비하면 지금 나는 훨씬 나은 설교자이다. 그러니까 그때 사람들이 우리 교회로 몰린 건 내가 설교를 잘해서가 아니었다. 게다가 교회 조직도 특별한 게 없었다. 직원도 많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그런 사건이 역사적으로 “부흥”이라는 말로 불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최전선과 오순절


부흥을 정의하는 다양한 표현이 있다. 그중 하나를 나는 최전선(frontier) 정의라고 부르겠다. 이 정의에 따르면 부흥이란 극도로 왕성한 전도가 이뤄지는 계절이다.


나는 1970년대에 남부로 이주한 양키였다. 고작 스물네 살 먹은 청년이었고, 회심한 지 불과 4년밖에 되지 않았기에 초신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복음주의 배경이 전혀 없었고 주류 루터교에서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남부 지역에서 만난 “부흥: 4월 21-27일”이라는 교회 광고를 보고 크게 놀랐다. “아니, 어떻게 저게 가능하지? 부흥이 4월 21일부터 27일까지 일어날 걸 저 사람들이 어떻게 알지? 그런데 4월 28일에 일어나면 안 되는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걸까?”


부흥에 대한 두 번째 접근 방식은 오순절(Pentecostal)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오순절-은사주의 접근 방식은 아마도 전 세계를 통틀어서 교회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형태일 것이다. 이 방식은 일반적으로 교회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강조한다.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세 가지 요소


나는 역사와 성경, 나의 경험을 통해서 부흥을 어떻게 정의할지 결론에 도달했다. 부흥은 인간이 하는 일이나 성령의 특별한 나타남이 아니다. 진정한 부흥은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이 강화되는 것이다. 


성령의 일상적 일하심은 죄의 자각, 회심, 확신, 그리고 성화이다. 이러한 일하심이 교회와 교단, 나아가서 도시와 국가 전반에 걸쳐서 강화될 때, 우리는 부흥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부흥이 일어났을 때는 다음 세 가지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1.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난다


성령께서 일을 시작하시면 따라오는 것은 회개와 확신이다. 평범한 그리스도인은 일반적으로 충분히 슬프거나 또 충분히 행복하지 않다. 나의 죄에 대해서 충분할 정도로 자각하지 못한다. 깊은 회개를 경험하지 않았기에 결코 수준 높은 확신도 맛보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이 나의 영과 더불어 증언하시면, 성령이 내 속에 오셔서 “이것이 진리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된다. 죄에 대한 깊은 자각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확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동은 잠든 그리스도인을 깨운다. 


2.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한다


부흥은 또한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을 회심시킨다. 교회는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착각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세례를 받았고, 등록 교인이며, 그중에는 임직받은 사람도 있다. 부흥이 일어나면 이렇게 고백하는 많은 사람을 만날 것이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알고 보니까 전혀 아니었어. 나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도 모르고 있었어.”


목사라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혀 풍기지 못하는 교인을 모를 수가 없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람이 구원받았는지 아닌지 확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따라서 부흥의 시대가 도래하면 성령께서는 목사가 결코 할 수 없는 역사를 이루신다. 


3. 확고한 불신자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


부흥의 시대에 교회는 성장한다. 지역 사회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잠자던 그리스도인이 깨어나고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회심함으로 교회가 아름다워지기 때문이다. 갑자기 교회가 매력 있는 곳으로 탈바꿈한다. 능력을 발휘하는 장소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발생한다. 


한편으로는 잠에 빠졌거나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과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웃에게 손을 내밀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부흥의 소문이 퍼져서인데, 다른 교회와 기존에 연결되지 않았던 사람들이 호기심 때문에 몰려온다. 또 다른 경우로는, 초대받고 오는 사람들도 있다. 


부흥은 교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부흥의 표시


지금까지 부흥과 함께 발생하는 일을 살펴보았다. 그럼 부흥에도 분명한 표시(marks)가 있을까? 


1. 복음이 회복된다


부흥의 시대에는 거의 항상 어떤 의미에서든 복음이 회복된다. 복음이 새롭고 생명력 있는 생생한 방식으로 믿고 전달된다. 또한 복음이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를 탈피한다. 이 두 가지는 복음의 양면에 있는 오류이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복음이 아니다. 또한 일단 구원만 받았다면 어떻게 살아도 괜찮다는 것도 복음이 아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그 믿음은 믿음뿐인 그런 믿음이 아니다. 거룩한 삶을 동반하는 믿음이다. 


거의 항상 부흥은 교회가 복음에 집중할 때 일어난다. 첫 번째 방향은 교회가 경직되고 기쁨이 없고 모든 것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복음 중심의 은혜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옮겨가야만 한다. 두 번째는, 교회가 진정으로 속죄를 믿지 않고, 지옥을 믿지 않으며,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이나 예수님이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받으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를 벗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해야 한다. 복음의 회복은 이 두 방향 중 한 가지의 형태로 일어난다. 


2. 회개가 일상이 된다


부흥은 회개가 일상이 되는 특징을 가진다. 한국 교회의 엄청난 성장을 이끈 부흥의 초기 단계는 20세기 초인 1905-1910년경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거기에는 회개가 큰 부분을 차지했다.


부흥이 일어나더니 여러 마을로 퍼져나갔다. 내가 읽은 기사에 따르면, 부흥이 퍼지기 시작했을 때 많은 지주가 놀랐다고 한다. 잠에서 깨어나 죄를 깨달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지주에게 와서는 그동안 훔치거나 속인 사실을 고백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회개이다. 


3. 예배가 거룩해진다


부흥의 또 다른 신학적 표시는 회중 예배의 성별이다. 몇 주 동안 24시간 내내 계속된 1970년 애즈베리 대각성에 대해서 들어보았을 것이다. 예배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고백하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랑 자는데 이제는 정말 그만두고 싶어요. 하나님께 내 죄를 고백합니다.” 휘튼 대학에서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이런 식의 공개적인 고백은 캠퍼스에 놀라운 영적 진지함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나는 이런 회개가 예배의 성화와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룩하게 구별된 예배라고 할 때, 내가 의미하는 바는 불신자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심을 아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을 보자. 마음에 감추고 있던 비밀이 드러난 불신자가 화를 내기는커녕 뭐라고 한다고 바울이 말하는가? 그 사람은 결코 “아, 정말로 열 받는데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하나님이 참으로 여기 계십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라고 고백한다. 불신자마저도 하나님의 임재에 압도된다. 이것이야말로 부흥의 신학적 표시이다.


4. 제자들이 늘어난다


부흥이 있는 곳에는 항상 교회 성장이 따라온다. 부흥 없이도 얼마든지 교회는 성장할 수 있지만, 교회가 성장하지 않는 부흥이란 있을 수 없다. 왜?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 친구들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부흥을 일으키는 방법?


지금까지 제시한 건 방법론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길 바란다. 지금까지는 신학적 표시이다. 그리고 앞에서 소개한 일화는 당신이 부흥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구체적인 이야기이다. 그러나 여전히 당신은 이런 궁금함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어떻게 부흥을 불러올 수 있을까요?”


존 웨슬리와 조지 윗필드가 주도한 18세기 대각성 운동을 보면 충격적인 방법이 있음을 단숨에 알 수 있다. 바로 야외 설교이다. 설교 스타일이 하나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1857년부터 1859년까지 뉴욕 시내에서 일어난 부흥은 야외 설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흥은 매일 도시 전역에서 있었던 평신도가 주도하는 정오 기도회를 통해 일어났다. 사람들이 기도회에 들어왔고, 복음을 들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같은 방법으로 나니아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옷장을 통해서 한 번 들어갔다면, 다시는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갈 수는 없습니다.” 부흥도 마찬가지이다. 로이드 존스는 웨일스의 부흥에 대해서 비슷한 지적을 했다. 수십 년 전에 부흥을 경험한 교회들을 관찰한 그는 많은 교회가 과거의 방법에 갇혀버린 비극에 빠졌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러나 확실한 효과를 증명했던 방법에서 벗어나는 건 어렵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하셔야 한다. “물론 하나님은 주권자이십니다”라고 당신은 기꺼이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종종 문화에 일종의 격변 또는 혼란을 일으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의 섭리 안에서 성령의 일상적인 역사하심을 강화하신다. 나는 우리가 있는 곳에서 그런 식으로 상황이 전개되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때때로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바로 그게 그분이 역사하시는 방식이다. 혼란이나 격변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부흥을 달라고 기도한다. 당신은 부흥을 위해 기도하며, “필요한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원제: ‘Lord, Do It Again’: Tim Keller on Revival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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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im Keller

팀 켈러(1950-2023)는 Gordon-Conwell Theological Seminary(MDiv)와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DMin)에서 수학했으며, 뉴욕 맨하탄 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초대 목사로 섬겼다. City to City와 Faith & Work, The Gospel Coalition을 설립하여 교회 개척, 복음 갱신, 복음 연합에 큰 역할을 했으며,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와 ‘팀 켈러의 센터처치’ 등 다수의 책과 수많은 컨퍼런스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복음적 변증가로 자리매김하며 전 세계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울림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