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으로

교회

서해의 복음 등대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백령도 중화동교회

by 이종전 · 장명근2023-04-15

이 땅 첫 교회들을 찾아

대한 강토에 선 첫 세대 교회들을 찾아 떠납니다. 그 이야기들에서 우리 신앙의 근원과 원형을 찾아보려 합니다.

백령도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래한 첫 번째의 섬이고, 1884년 알렌이 의료선교사로서 들어오기도 전에 중국 주재 선교사들이 조선에 관심을 가지고 제일 처음으로 발을 디뎠던 곳이다. 


즉 백령도는 우리나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역사 최초의 순교자인 토마스(Robert J. Thomas), 그보다 앞서서는 카를 귀츨라프(Karl F. A. Gutzlaff)가 조선을 찾았을 때 첫 발걸음을 디딘 곳이다. 그들이 이곳에서 한문 성경을 전함으로써 사실상 이 땅에 복음을 처음으로 전하여준 곳이다. 그들이 이곳에 와서 복음을 전한 것은 사실이며, 그 열매가 맺힌 것은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이 땅은 이미 그들이 남겨준 말씀이 발아하지 못한 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훗날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을 때, 그때를 기다려 복음의 씨앗은 발아하였다. 그 결과로 현재 섬 주민들 가운데 적게는 65퍼센트, 많게는 80퍼센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이곳에는 제사를 지내는 집이 없고, 다른 섬의 경우에서처럼 없어서는 안 될 풍어제 같은 굿이나 대동제 같은 마을의 제례 의식도 없다.


290c94d94ac8a34a9647d617dd87fa76_1681479619_1663.jpg
 

이곳도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제 말기에 강제로 교회를 통폐합하는 과정에서 집회를 허락하지 않아서 잠시 몇몇 교회의 집회가 불가능했었다. 그러했음에도 1937년부터 시작한 백령성경학교는 백령도를 비롯하여 대청도, 소청도의 사람들에게 복음으로 살게 하는 능력을 가지게 했다. 이 성경학교는 겨울철에 2개월씩이나 계속되는 계절학기제 성경학교였다. 3개 섬의 젊은이들이 300여 명씩이나 모여서 함께 먹고 자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섬에서 많은 목회자와 장로가 배출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백령도에 복음의 씨가 자라게 된 것은 1896년 이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마을 사람인 허득(許得)이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그를 중심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는 문서로 확인할 수 있는 백령도 최초의 신자이고 중화동교회를 처음으로 세운 이다. 그는 당시 개화파 정치인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정3품 당상관-현 차관보급)라는 관직에 있었던 백령도의 실세였다. 그는 일찍이 진보된 서구문화를 받아들여야 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가 육지에 있는 동안 넓은 세상을 알고 성경과 문서를 통해서 기독교를 알게 되었다. 상당한 관심과 지식을 습득했지만, 국가가 금하고 있는 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기독교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표현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허득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은 1894년 갑신정변 때 정부와 정치를 바로 잡으려고 상서(上書)와 충언(忠言)을 올리다가 역적으로 몰려 이 섬으로 유배를 오게 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김성진(金成振)이다. 4-5명의 유배자들 가운데서 그가 허득의 사랑방에서 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에 머물면서 마을의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허득과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이곳으로 유배를 오면서 성경이라는 책을 가지고 왔고, 그것을 읽어보니까 사서삼경(四書三經)이 모두 성경에 근거를 둔 것 같다는 의견을 토로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허득은 자신이 이미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기꺼이 동의했고, 함께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갖도록 하자는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이에 두 사람은 1896년 6월경 동네 사람들을 모아서 예수를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함께 믿자고 다짐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위해서 성경과 신앙 서적들을 구해야 할 필요했기에 김달삼이라는 사람을 선정하여 서울로 보내기로 했다. 그러던 차에 바다 건너 황해도 장연에 서양 사람들이 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한다는 소문이 들려왔기에 일단 김달삼을 장연의 소래(松川)에 보내서 사람을 청하여 오도록 했다. 1896년 8월 20일경에 서경조(당시 소래교회 장로)와 홍종옥(집사), 오씨로 알려진 교인 등 3명이 이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8월 25일 마을의 서당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 것이 중화동교회의 효시이다. 서경조 장로 일행은 4주간이나 이곳에 머물면서 낮에는 전도하고 밤에는 성경을 가르치면서 기독교 구원의 도리를 깨우쳐 주는 일을 했다.


그들은 장연으로 돌아갔고, 다시 허득과 김성진을 중심으로 하는 이곳 사람들만 남겨졌다. 이때부터는 그들이 예배를 직접 인도하면서 자생하는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물론 김성진이 유배 생활을 마치고 돌아간(1897년[1]) 다음에는 허득이 예배를 인도했다. 그러다가 1899년에 현재의 터에 처음으로 예배당을 지었다. 6칸 초가 예배당을 장연의 소래교회를 짓고 남은 자재를 가져다가 지었다. 그 후 4차에 걸친 예배당의 신·개축이 있었다. 


1900년 9월에는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곳을 찾아와서 처음으로 세례를 거행했다. 이때 세례를 받은 사람은 허득, 허근, 최영우, 허윤, 허간, 허권, 김홍보 등이었다. 그러나 교역자가 없는 현실에서 1908년까지는 전도부인들이 교회를 지켰고, 그 후에도 영수와 조사들이 지켰다. 담임목사가 처음 오게 된 것은 1918년이다. 그 이후로 중화동교회는 다행히 목회자가 계속 사역해 왔다. 1918년 이전에는 간혹 찾아오는 선교사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장연교회의 서경조 목사가 중화동교회를 관리하는 형편이었다. 물론 일제 말기에는 교역자가 없거나 조사가 시무 하면서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중화동교회의 설립과 그 존재는 백령도를 비롯한 인근의 다른 섬들, 즉 대청도와 소청도 등지에 복음이 전해지고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만일 이곳에 복음의 씨앗이 심기지 않았다면, 이곳 섬 지역에 복음화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을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앙으로 살아가는 독특한 섬의 문화를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fbd6f9adb08634be9c34320cb207c11f_1681465883_6946.jpg 

중화동교회를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예배당으로 오르는 계단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언덕을 오르내렸을 수많은 이들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언덕에 오르면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향나무가 힘든 듯 기우뚱 서 있다. 언제 심은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교회의 역사만큼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배당은 깨끗하게 단장해서 먼 섬에 있는 예배당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다. 


마당에는 중화동교회 100주년 기념비가 있고, 또 하나의 비석은 백령도에 기독교가 전래하고 교회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공을 세운 이들에 대한 일종의 공덕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최초에 기독교가 전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과 그 과정에 대해서 간략하게 음각되어있다. 이 비석은 백령도 안에 있는 8개 교회의 장로 35명이 뜻을 모아 세운 것이다. 자신들이 사는 섬에 복음을 전해주고, 모교회의 역할을 한 신앙의 선배들을 기리는 마음에서 세운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종이 있다. 이 교회의 역사와 함께하였고, 일제 강점기에도 지켜낸 유서 깊은 종이다.

fbd6f9adb08634be9c34320cb207c11f_1681466119_0385.jpg 

예배당을 살피고 옆 마당으로 나가면 ‘백령기독교역사관’이라는 대리석 명패를 달고 있는 건물을 만난다. 이 낙도에 기독교 역사관이 있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중화동교회만을 생각하고 찾았던 이들은 역사관을 둘러보면서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일은 어쩌면 지방자치제가 실시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지방 정부가 활성화되면서 지방의 역사와 문화를 발굴하고, 그것을 각 지방의 문화유산으로 홍보하면서 중화동에 양인(洋人)들이 찾았던 역사와 함께 기독교가 전래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지방의 문화유산으로 역사화하는 과정에서 이곳에 기독교 역사관이 세워질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중화동교회가 속해있는 교단과 노회, 전국여전도회연합회가 협력해서 이러한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것도 기쁜 일이다. 낙도에 역사관을 세운다는 것에 대한 이해의 차이가 크기 때문에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접근성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가 힘든 곳이기 때문에 이런 곳에 돈을 쓴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더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fbd6f9adb08634be9c34320cb207c11f_1681465978_5171.jpg 

한편 여기에 역사관이 세워질 수 있었던 데는 백령도의 높은 기독교인 인구 밀도가 한몫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비록 전시물이란 것이 유물은 거의 없지만, 백령도의 일반 역사와 기독교의 전래 역사를 알아볼 수 있도록 자료를 만들어 관람할 수 있도록 해놓았다. 백령도에 기독교가 전해지는 과정과 기독교가 형성되는 과정을 연대기로 알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 2001년 11월에 세워진 이 역사관은 백령도 주민들에게도 백령도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전적으로 허간 목사의 기록에 의존한 것인데, 조선왕조실록의 고종순종실록(高宗純宗實錄) 편에는 1897년에 김성진 유배를 보냈다는 기록이고, 유배를 해제하는 것이 1906년으로 되어있으니 그 시간적인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이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카카오톡으로 보내기
  • 공유하기
  • 공유하기

작가 이종전 · 장명근

글 이종전 

이종전 목사는 고베개혁파신학교(일본), 애쉬랜드신학대학원(미국)에서 수학하고, 1998년부터 대한신학대학원대학교에서 역사신학을 가르쳤고, 현재는 은퇴하여 석좌교수와 대신총회신학연구원 원장으로 있다. 인천 어진내교회를 담임하며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장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C채널 ‘성지가 좋다’ 국내 편에서 역사 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다.


그림 장명근 

장명근 장로는 토목공학 학부(B.S.)를 마치고 미시간주립대학교에서 환경공학(M.S & Ph.D)을 공부했다. 이후 20년간 수처리 전문 사업체를 경영하였으며 2013년부터는 삼양이앤알의 대표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다. 취미로 그림을 그리고 있으며 정동제일교회의 장로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