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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우리의 전도가 너무 작다

창조세계 돌봄으로서의 전도

by 김선일2023-05-08

우리에게 익숙한 전도의 개념은 사실 이처럼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를 알리는 것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그래서 창조세계와는 무관하게, 인간 중심의 영혼구원 사상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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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플리 미셔널

Simply Missional


탈교회화, 비종교화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교 과제로서 복음을 새롭게 제시합니다. 기독교의 변증 유산으로부터 오늘을 위한 복음 변증의 지혜를 발굴하고, 현대 한국의 문화적 표현들과 복음의 대면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전도를 뜻하는 영어evangelism는 ‘복음’(evangel)에 이념이나 행동을 뜻하는 어미(ism)가 붙은 말이다. 곧 전도는 복음을 전파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전도는 복음, 즉 좋은 소식이 무엇인가에 기초한다. 로마서 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3)라고 선언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하며 듣기 위해서는 좋은 소식이 전파되어야 한다고 말한다(롬 10:15). 여기서 그가 말하는 좋은 소식은 이사야 52:7을 인용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통치를 인류에게만 국한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골 1:20)을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신 사건이다. 즉, 구원의 좋은 소식은 인간뿐 아니라 만물의 회복을 포함한다. 선교학자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yder)의 책 제목처럼 “구원은 창조세계의 치유”(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이다.


전도사역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창조세계의 회복과 치유는 얼마큼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교회에서 피조물에 대한 돌봄의 과제를 예수 그리스도가 개인의 구주이심을 전하는 만큼의 사명으로 강조한 적이 있는가? 환경 주일과 같은 연례행사를 통해 그저 잊지 않을 정도로 언급되는 것은 아닌가? 기껏해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관심을 기울이고 실천해야 할 여러 윤리적 과제 중 하나 정도는 아닐까?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파가 우선이고,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은 그에 따른 부차적이고 결과적인 선행으로만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그나마도 최근의 기후 위기를 비롯한 환경문제에 대한 위협으로 부상했을 뿐 본래부터 복음 안에 내포된 메시지로 보는 인식은 여전히 낯설지 않은가? 


창조세계는 원래부터 항상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었다. 청지기의 책임을 맡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창조세계는 손상을 입었고 피조물은 신음하고 있다.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라진 땅은 인간 세상에서만 악이 창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음을 경고한다. “이 땅이 슬퍼하며 거기 사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호 4:3). 이 고통은 오늘날 더욱 확산되고 있다. 대기는 오염되어가고 가축들은 잔인한 방식으로 대량 사육과 도살을 당한다. 산림은 고갈되고 홍수와 기후 이변이 빈번해지면서 많은 인류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가 병들어 가는데, 그 지구에 존재하는 교회가 건강하게 생존하는 것이 가능할까?(Salvation Means Creation Healed, xiii) 스나이더는 창조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올바른 출발점이라고 한다. 교회의 가장 큰 관심은 구원인데, 이 구원이란 바로 치유된 창조세계다.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롬 8:21)을 원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그리스도인들은 인간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창조세계를 원래 의도된 모습으로 치유하는 사명에 참여한다. 그러한 치유 사역에 참여하는 자체가 복음, 즉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전도의 개념은 사실 이처럼 창조세계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를 알리는 것으로 확장되지 못했다. 그래서 창조세계와는 무관하게, 인간 중심의 영혼구원 사상에 머물렀다. 사람들을 교회라는 종교적 공간으로 더 많이 끌어들이는 것이 전도의 목적이 되었다. 한때 교회가 사람들의 사회문화적 욕구를 해소하는 기능을 한 적이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어렵고, 사회는 불안정하며, 문화적인 자원은 부족할 때, 교회는 고단하고 불안한 삶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곳이었다. 이때 환경에 대한 관심이 중요한 의제로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인생과 세계를 넓은 안목에서 접근한다. 환경은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도 중대한 실존적 과제다. 더 나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주변 세계를 규정짓는 환경이라는 관점을 넘어서, 인간도 더 큰 자연세계의 일원이자 일부로서 다른 피조물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는 생태적 감수성으로의 전환이 요청되는 시대다. 


이러한 생태적 감수성은 인간 또한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는 다른 피조물들에 대해서도 사랑의 주권을 발휘하신다는 성경적 신념과도 조화된다. 이는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이 설계하신 더 큰 세계 속에서 동료 인간 및 피조물들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소속감과 관계성을 부여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할을 다른 피조물들과 같은 대열에 놓거나, 심지어 자연세계를 신적으로 미화하거나 승격시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예배하는 성경적 세계관과 배치된다.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해와 달과 별들, 하늘 위의 모든 천체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배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기지 말라”(신 4:19). 기독교 생태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청지기 책임을 근간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구를 어머니로 모시거나 범신론적인 현대적 정령주의나 무신론적 생태주의와는 다르다. 죄로 인한 총체적 부패를 믿는다면, 훼손된 창조세계에 대한 영적 관심은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유의 주인이심을 믿는다면, 창조세계의 회복과 치유를 위한 믿음 또한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기독교 환동운동가 데이브 부클리스(Dave Bookless)는 생태계의 위기는 영적 위기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나의 지구를 부탁해, 앵커출판&미디어, 104). 


기독교 역사에서 의미 있는 영적 각성에는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이 수반되기도 했다. 5세기부터 8세기에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지역의 켈트인을 대상으로 한 선교사들은 꽃과 풀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을 알리고 사역에서 동물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13세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새들을 향해 설교하면서 피조물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역설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창조세계의 돌봄은 윤리적 실천의 문제이기에 앞서 본질적으로 구원에 내포된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복음전도는 어떻게 창조세계의 돌봄과 연결될 수 있을까? 


첫째, 창조세계 그 자체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증언한다.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 19:1)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키는 자연은총을 경험한다. 종교가 없는 이들도 초자연적 세계에 대한 감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자연의 신비와 장엄함과 마주할 때였다고 한다. 필자는 오래전에 한 유명한 기독교 수련회에 한 구도자와 함께 참석했다. 3박 4일의 프로그램은 시종일관 정교하고 체계적이었으며 중간중간 감동의 순간들도 있었다. 둘째 날 아침 식사 후 습관을 따라 산책하러 나갔던 필자는 수련회 봉사자에게 제지당했다. 주변이 산속이라 잠깐 하이킹하기에 좋을 것 같은데, 봉사자는 준비된 실내 프로그램만 열심히 참여하라며 우리를 돌려보냈다. 당시 필자는 동반했던 구도자와 신앙에 관한 대화를 하는 중이었고, 자연 속에서 함께 창조주를 묵상하려고 했지만, 그 계획은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현상은 교회의 수련회들에서도 자주 경험한다. 기껏 도심지를 벗어나 시간을 내어 자연과 가까운 곳으로 가서는 창조주 하나님을 더욱 생생히 묵상하는 시간은 갖지 못하곤 한다.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영광과 손길을 증언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 것일까?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선지자 요나에게 큰 물고기, 벌레, 바람을 통해서 그분의 뜻을 알리셨고, 고통 중에 있는 욥에게도 자연세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하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 교회는 생태적 감수성과 습관을 형성하는 공동체여야 한다. 창조세계의 돌봄은 개인윤리가 아니라 교회의 공동체적 윤리다. 교회의 공동체적 윤리는 만물을 회복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을 드러낸다. 우리의 교회 생활은 얼마나 환경에 민감하며 생태적 삶을 실천하고 있는가? 교회의 각종 행사와 의전에서 엄청난 일회용품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진 않는가? 음식과 에너지의 낭비는 어떤가? 교회학교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줄 때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러한 먹거리를 위해서 땀 흘려 수고한 모든 손길을 기억하게 하는가? 주일에 많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발생하는 자원 고갈과 대기 오염을 줄이고자 하는 고민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교회가 세상의 환경운동에 응답해서 솔선수범하자는 차원에서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증언하려면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과 사랑은 부차적인 윤리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적 소명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과제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생태적 감수성은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을 알리기 위한 기초가 된다.      


셋째, 우리는 창조세계의 돌봄에 참여하면서 영적인 돌봄에도 민감해지게 될 것이다. 생명에 대한 관심과 돌봄은 우리에게 생명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고 의존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너무 치여서 동식물을 돌보는 데로 관심과 취미를 전환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창조세계에 대한 돌봄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부터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여야 한다. 나의 지구를 부탁해에서 저자 데이브 부클리스는 자연과 교감하다 보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오용하거나 착취하는 일이 적어지고 인간에 대한 돌봄과 관심이 더욱 깊어진다고 말한다. “아내가 최근에 주민 텃밭을 분양받았다. … 놀랍게도 이 일로 아내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해졌다. 아내는 어린 씨앗에 물을 주면서 예수님을 새로 영접한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다. 잡초를 뽑을 때면 자신의 양심을 돌아보고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190-191). 오늘날의 삭막하고 단절된 사회에서 돌봄의 정신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갈급한 것은 진실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전도가 숭고한 명분을 지녔다 해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도 프로그램의 대상이 되어 그리스도인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진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전도를 위한 목적에서 관계를 맺는 것보다, 생명에 대한 관심과 존중을 내면화하는 훈련이 더 필요하다. 창조세계의 돌봄에 참여하면서 우리는 공중의 새와 들풀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를(마 6:26-30) 느낄 것이며, 그 하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20세기 기독교의 고전으로 꼽히는 J. B. 필립스의 책,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는 그 제목만으로도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며 신앙에 대한 관점에 각성을 준다. 창조세계와 복음전도의 관계에서도 이 제목을 패러디해 질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복음전도는 너무 작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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