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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by 최창국2023-08-26

12세기의 영성가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는 신자의 영적 성숙에 따라 경험하는 하나님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하였다. 


제1 단계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기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 사랑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온 인격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마 22:37-40). 


제2 단계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을 받고, 환난 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타산적 사랑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기복신앙에 머무르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이기도 하다.


제3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나의 영적인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그 자체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제4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 알아 나를 사랑하는 단계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제2 단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여기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둘째 단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창조주의 사랑에 의해 압도된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계시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충만한 자신을 의미한다. 


제2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지만, 제4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내가 가진 소유나 명예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나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나의 자랑할 만한 것이 내 자존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다.


버나드가 제시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가리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정체성의 덫에 빠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모든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가 계시된다고 이해하고, 모든 영적 유혹은 이 근본 진리를 의심하고, 그 밖의 다른 정체들을 믿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행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눅 3:21-22)는 말씀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깊은 방식으로 체득하게 된다. 


나우웬에 따르면, 광야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눅 4:1-13)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진정한 정체성을 앗아가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의 진짜 자기(true self)를 가짜 자기(false self)로 대체하려고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은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자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자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 권세에 절하게 만들 수 있는 자다”라고 유혹하였다. ‘네가 하는 것이 곧 너다. 네가 가진 것이 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다’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라고 선언하신다. 나우웬은 영적 삶의 가장 큰 적은 자기 거부라고 진술한다. “삶의 가장 큰 덫은 성공이나 인기나 권세가 아니라 자기 거부, 자신의 참 존재를 회의하는 것이다. 성공과 인기와 권세도 과연 큰 유혹일 수 있으나 그 유혹의 질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 우리를 무익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를 믿게 되면, 성공과 인기와 권세가 어느새 매력 있는 해답으로 다가온다”(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 51).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을 망각할 때, 수많은 형태의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된다. 자기 거부나 부정의 유혹은 때로는 교만의 형태로 때로는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부정은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나친 자만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거부는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


버나드가 설명한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기복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진짜 자기를 가짜 자기로 대체하기 쉽다.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자기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감각적인 소유와 성과와 인기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자기를 가짜 자기로 쉽게 대체한다. 물론 우리에게 소유와 성과와 인기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자기 부정의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 가짜 자기로 대체 될 때 무엇보다도 낮은 자존감에 노출되기 쉽다. 가짜 자기는 우리를 끊임없는 욕망과 비교의 터널로 끌고 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버나드가 제시한 제4 단계의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단계다. 이 사랑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나 소유에 따라 우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 사랑에 이를 수 없고, 감각적인 우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게 되므로 가장 복된 자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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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