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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갈 때
by 양혜원2023-10-13

학교 앞에 짧게는 넉 달 길게는 여섯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이 있다. 오래전부터 내 머리는 파마도 염색도 하지 않고 그냥 단발 정도의 길이로 자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손질해도 추레해 보인다 싶으면 한 번씩 가는 주기가 넉 달에서 여섯 달이다. 주문하는 스타일은 늘 같다. 이전에 머리를 자르고 찍은 셀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한마디가 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 달 만에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머리 형태가 망가져 손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기르면 손질이 쉬울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지금 상태의 머리를 다듬고 조금 기르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추가 주문을 했다. 일하던 연구소 직원에게 소개받은 이 미용사는 만지는 손이 거칠고 말이 투박하다. 게다가 커트비도 비싸게 받는다. 하지만 머리를 잘 자른다. 반곱슬인 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서 삼각김밥 모양이 안되게 자르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그래서 그날도 그의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고 예쁜 머리로 거듭나길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머리 손질이 끝나면 휙 하니 가버리던 미용사가 평소와 달리 내 머리 형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두상이 변하는데,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란다. “예에? 머리에서도 콜라겐이 빠져나간다고요?” 처음 듣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말인즉슨, 두피에 콜라겐이 빠지면서 뼈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서 나이 들면 머리 손질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십 대 머리 만지는 사람은 쉽지요. 그냥 웬만큼 해도 이쁘게 나오니까.” 그는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미용실에 올 때마다 있었던 손님들이 최소한 내 또래 혹은 그 이상이었더랬다. 그러니까 이 미용사는 나이 든 손님의 머리를 만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나처럼 그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러 꾸역꾸역 찾아들 왔나 보다. 하지만 두피에서까지 콜라겐이 빠진다니…. 


관절이 뻣뻣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심지어 키가 줄어드는 신체 변화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노화의 현상이었고, 그런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마음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 머리 모양을 잡기가 힘들다니, 이건 뭐 머리카락 빠지는 거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신경을 쓰긴 어떻게 쓰는가. 머리카락이야 빠지는 게 눈에 보이기라고 하지,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콜라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콜라겐을 잡아둘 방법은 없고, 있다 한들 나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기술은 아닐 것이다. 혹 감당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까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본들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건 내가 돈이 있어 보질 않아서 하는 소리겠지만. 


개인적 감상이야 그렇다 치고,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게 있었다. 왜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이 다들 비슷한지. 한때는 아줌마들의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지만, 우리 세대가 아줌마가 되면서는 그래도 조금 다양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은 여전히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것은 제한된 신체적 자원 안에서 그나마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의 폭이 정말 좁기 때문이구나, 했다. 


흔히 노인이 되면 다들 비슷비슷해진다고 한다. 한때 똑똑했던 사람, 이뻤던 사람, 잘생겼던 사람,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비슷해진다.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어려워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그저 노인 혹은 늙은이로 통칭되는 이 그룹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생각이 있는지조차도 때로는 의심한다. 가까이에서 나의 부모님만 보아도, 동생과 둘이 앉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내색을 엄마에게 직접 내비치면, 너도 늙어봐라, 하는 말이 되돌아온다.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 같은 이런 반응을 접하면 내심 울컥하지만, 두피에서 빠지는 콜라겐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살짝 수긍한다. 어느 순간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도대체 노인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은 부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젊은 세대로부터 나온다. 한때 여성에 대한 지식도 여성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남성에게서 나왔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며 2백년이 넘게 여성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저항하는 노인 운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성에 대한 집단적 대상화에 민감한 여성학자들도 노인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노인들의 고루함만 뭐라 할 뿐.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나는 내심 두렵다. 왜냐하면, 노인을 변호하는 듯한 이 말이 마치 이미 누릴 거 다 누린 세대의 사람 사정 봐주자는 말처럼 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대는 노인을 미워하고, 노인들 자신도 그것을 감지한다. 


일본의 10년 후를 상상한 영화를 며칠 전에 보았다. 몇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였는데, 제일 첫 편이 노인에 대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기업체를 내세워 75세 이상이 된 노인들로부터 사망 신청서를 받기 시작했다. 돈이 있는 노인들은 괜찮았다. 그들은 계속 소비를 하기 때문에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들었고, 돌봐줄 가족도 마땅치 않은, 단지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부양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주 고객이었다. 신청을 내고 서명하면, 약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남은 기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배려였다. 큰돈이 아닌데도, 그 돈을 받은 노인은 이렇게 큰돈을 주냐며 기뻐한다. 그동안 생활의 곤궁함을 짐작하게 하는 대사이다. 자신이 죽기로 한 날 2주 전부터 먹을 약이라며 직원은 돈과 함께 그 약을 노인에게 내민다. 그리고 죽기로 한 날 시설에 찾아오면 작은 패치 하나를 목 부근에 부쳐주며 누워있으라고 한다. 고통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지 옆 칸에서는 빨리 죽여달라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스크를 낀 간호사가 와서 그의 시신을 내간다. 


도대체 인류는 무슨 생각으로 대책 없이 수명을 늘려온 것일까….


새삼스레 노인 공경하자고,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끝까지 부양 잘하자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회의 짐이라고, 나라의 정책에서부터 개념 있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시선에 대응하며 살아갈 나의 자세를 고민할 따름이다. 알다시피 이런 데에 역할 모델이 우리 세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려운 마냥 흰머리로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늙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떠오르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이다. 아들 요셉의 손에 이끌려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이 조상에 비하면 길게 산 게 아닌데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어 지금 신세가 이렇다고 말한다(창 47:9). 어쩌면 그는 제국의 왕 앞에서 예를 갖추느라 불편한 몸을 다잡으며 힘겹게 서서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걸음걸이도 편치 않아 요셉의 손을 붙잡고 겨우 그 앞까지 나왔을 것 같다.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내뺀 후에 원하는 아내를 얻을 때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다시 형과 화해하고, 제일 이뻐했던 아내를 제일 먼저 보내고, 자식들의 불화로 아들 하나가 죽은 줄 알고 살았던 그는 분명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험악한 세월. 그 어떤 고난도 주를 위해 이겨냈다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내 인생 돌아보니 참 험난했다고 스산하게 말하는 이 한마디에 묘한 울림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연로하신 분 중에서 자신이 산 세월이 험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분들도 나름의 맺힌 마디와 울분, 어두운 골짜기들이 하나씩은 다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 오십 초반인데도, 그리고 이 나라가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시대에 성장했음에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풍족한 시절에 태어나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크게 참지 않고 자란 이십 대의 아들도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라고 말하면, 분명 상처받겠지. 윗세대가 우리 세대를 보고 고생을 모른다고 하면 화가 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다 나름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또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렇다면 뭐, 굳이 늙는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마치 늙는 것에 바른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젊은이에게 젊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게 꼰대 짓이라면, 늙은이에게 늙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꼰대 짓 아니겠는가? 지나간 시대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의 경험을 넘겨짚으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면, 두피에 콜라겐도 안 빠져 본 세대의 경험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개척해가는 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 아니겠는가? 매뉴얼도 없이 아직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제일 앞에서 가고 있는 그들의 시행착오는, 이번 생은 처음인 다른 모든 세대의 경험처럼 적당히 개성적이고 적당히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기력 달린 그들의 소리가 워낙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을 뿐.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긴 노인이 많지 않기에 최근에 읽은 사노 요코라는 일본 작가의 책은 보물 같았다. 1938년에 태어나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어 큰 상도 받은 그는 2010년 72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읽은 책은 그가 암 투병을 시작하던 무렵인 60대 중반에서 후반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 바르게 늙으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생긴 대로 늙어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착한 할머니가 되지 못해 친구를 자꾸 잃는다고 하면서도 별로 착해질 생각이 없고, 반항할 때 가장 생기가 돈다. 암에 걸리니 지인들이 비싸고 맛있는 거 사 들고 찾아와줘서 좋고, 암보다 더 힘든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암은 그냥 덤 같은 것이라고 하는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문방구 할아버지가 친절할 때보다 꼬장꼬장할 때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개성 넘치게 산 만큼 개성 넘치게 늙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다 그런 것 아닐까. 자기 생긴 대로 살고 자기 생긴 대로 늙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 누구나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겠지만,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그것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잠시 아쉬워하다가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면서도 아직 마음으로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손이 거친 그 미용사를 또 찾아가 삼각김밥 머리가 되지 않게 잘라달라고 주문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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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양혜원

이화여대 아시아여성학센터 특임교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여성학 석사 수료 후 미국 Claremont Graduate University에서 종교학으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랜 세월 번역가로 일하면서 유진 피터슨, N. T. 라이트, 알리스터 맥스래스, C. S. 루이스, 헨리 나우웬, 미로슬라브 볼프, 일레인 스토키의 저서 등 90여 권의 번역서를 출간하였고, 유진 피터슨 읽기: 삶의 영성에 관하여, 교회 언니,여성을 말하다, 교회 언니의 페미니즘 수업, 종교와 페미니즘, 서로를 알아가다,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