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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 필요했던 친구,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by Tony Merida
2018-12-06
우리는 바울의 삶에서 그가 복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굳게 믿는 모습, 그리고 그 복음을 위해서라면 고난도 기꺼이 감수하려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흔히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친구 관계에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이다. 로마 제국 전역을 다니며 교회를 개척할 때, 바울은 그 사역을 혼자 하지 않았다.바울은 풍성한 관계를 누린 사람이다. 그는 친구와 함께 여행하고 머물렀으며, 또 친구를 찾아가기도 했다. 바울은 그들과 함께 일하고, 함께 설교하며, 함께 매를 맞았다. 투옥되었을 때에는 심지어 그들과 함께 감옥에서 노래하기도 했다. 바울은 친구를 격려했고, 또 친구에게 격려를 받았다. 때로는 그들과 서로 다른 의견으로 논쟁하기도 했으며, 그러다가 다시 화해하기도 했다.사도행전을 조금만 읽어 봐도, 바울이 친구들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그들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바나바, 디도, 실라, 누가, 브리스길라, 아길라, 루디아, 오네시보로, 에바브로디도, 마가, 요한, 에베소 장로들에게 그런 섬김을 보였다.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서른 개가 넘는 이름을 나열하는데 목록 전체에서 애정이 흘러나온다. 이 목록은 복음의 결과가 무엇인지를 잘 나타낼 뿐 아니라, (인종, 계급, 성과 관련하여) 아름다운 어울림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그들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준다.오늘날 복음중심적 사역을 할 때, 바울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은혜에 집중했던 바로 그 설교 패턴을 우리도 동일하게 강조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친구에게 헌신했는지도 강조해야 한다.바울은 무엇인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숙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교제했다. 이처럼 위대한 사도조차도 친구들과 끊임없이 교제하는 데에 힘썼다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에 친구 관계로부터 얻는, 간단하면서도 아름다운 세 가지 유익이 있다.1. 교제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관계를 지향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 에덴 동산에서 모든 것이 영광스럽고 ‘심히 좋았지만’, 한 가지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혼자’라는 것이었다.이 시점에서 죄는 아직 등장하지도 않았다. 어떻게 낙원에 있는 사람이 부족함을 느낄 수 있었을까? 왜 그의 마음은 허전했을까? 팀 켈러는 다음과 같이 적절한 설명으로 우리를 안내한다.“하나님은 친구 없이는 낙원조차 즐길 수 없도록 우리를 만드셨다. 아담은 하루 종일 완전하게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그에게는 친구가 필요했다.”우리는 나무가 아닌 사람이기 때문에 친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친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죽을 때 마음 아파한다. 우리는 그들과의 교제를 그리워한다. 그리고 우리가 죽음을 앞두게 되면, 살면서 성취했던 것들(저술, 학위, 상패, 집, 열쇠 등)을 놓지 않으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사람을 붙잡고 싶어 할 것이다.사역, 특히 교회 개척이 당신을 비인간적으로 만들지 못하게 하라. 당신은 콘텐츠 제작자 이상의 존재다. 당신은 기계적으로 설교를 쏟아 내는 설교 로봇이 아니다. 또한 교회 개척은 론 레인저(Lone Ranger)처럼 황량한 전방에서 복음 사역을 홀로 이뤄가야 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친구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그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2. 위로하나님은 종종 다른 사람의 존재와 사역을 통해 우리를 격려하신다. 디도에 대하여 바울이 한 말을 기억해보라.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고후 7:5-6). 하나님은 바울에게 힘을 주고 그를 격려하기 위해 디도를 보내셨다.“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라고 고백하는 상황에서 과연 무엇이 필요할까? 바로 친구이다.우리 마음은 변덕스럽고, 죄성은 절대로 쉬지 않으며, 사탄은 맹렬하게 활동하고, 무엇보다도 복음의 진전이 시급하기 때문에, 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믿음의 싸움 속에서 연대의 중요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3. 기쁨바울은 로마에 가려는 계획을 알리면서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을 전했다. 바울은 로마의 교회로 보낼 긴 편지를 마치면서, 마음에 남아있는 여전한 바람을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와 사귐으로 기쁨을 [누리고 싶고]”(롬 15:24), “너희와 함께 편히 쉬[고 싶다]”(롬 15:32). 비록 바울은 편지로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지만, 더 깊은 기쁨과 안식은 직접 만날 때에야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다.사도 요한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우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이 1:12).그러니 페이스북 친구로 만족하지 말라. 우리는 전인적인 존재다. 온라인에서도 우리 자신의 일면을 나타낼 수는 있겠지만, 그 세계에서는 충분한 교제를 기대할 수 없다. 인터넷은 사람들과 직접 만나 함께 하는 일을 대체할 수 없다. 우리는 느끼고, 상상하고, 반응하며, 만지거나 움직이는 등의 비언어 행위를 통해서도 소통하는 사람들이다.최근에 나는 교회 리더들과 함께 처음으로 복음 잔치(Gospel Party)를 열었다. 우리 안에서 교회 개척자와 목사로 부름 받은 사람들을 모두 불러 이틀간 교제했다. 매우 격려가 되는 시간이었다. 뒤쪽 베란다에서 친구들은 웃고, 즐기고, 먹고, 기도하고, 울고, 생각하고, 꿈꾸고, 계획하고, 예배했다. 이 모든 일들을 함께 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죄인인 우리에게 친구가 되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 덕분이다.교제를 연습하라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사귄 친구와 복음의 동역자를 위해 시간을 할애하라. 교회 안의 친구와 깊이 교제하기 위해 힘쓰라. 다양한 네트워크나 교단 모임에 참여하라. (동역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디도 사역’을 추진하라. 그리고 우정에 관한 잠언 구절들을 적용하라.• 일관성: “친구는 사랑이 끊어지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를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 정직: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잠 27:6).• 긍휼: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 17:9).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 중 한 명은 ‘툼스톤’(Tombstone)의 닥 할러데이(Doc Holiday)다. 비록 그가 기독교 경건의 본보기는 아니지만, 그 영화에는 언제나 내게 감동을 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거기서 그는 와이어트 어프(Wyatt Earp)와 함께 ‘카우보이들’의 행패로부터 어느 지역을 구출해 내려고 할 때, 결핵에 걸리고 만다.하지만 그는 와이어트와 함께 싸우기 위해 사랑과 충성의 마음으로 병상에서 일어난다. 이에 터키 크릭 잭 존(Turkey Creek Jack Johnson)이 엄숙하게 묻는다. “닥, 왜 이러는 거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와이어트 어프가 제 친구이기 때문이죠.”복음 안에서 사귄 충성된 친구는 하나님이 주신 값진 선물이다. 그리고 이런 친구는 궁극적인 벗으로서 우리의 많은 죄를 가려 주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요 15:15). 이런 의미에서 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크리스천 우정을 실천하는 개개인을 통해 타인에게로 흘러가기를 소망한다. 더불어 우리가 교회를 개척함으로써 죄인의 친구 되시는 그분을 높이기를 소원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If Paul Needed Friends, So Do We번역: 하늘샘
생활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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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북
론레인저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가르는 표지
by Sean Michael Lucas
2018-12-06
오랫동안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이 회중 가운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를 분별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는 황폐한 시대도 간혹 있었다. 또한 그런 시대와는 달리 하나님이 움직이시고, 사람들은 영적 관심을 강렬히 나타내며, 뚜렷한 부흥의 역사가 도처에서 일어나는 대각성의 시기도 있었다.목회자들이 참 회심과 거짓 회심, 또는 참 부흥과 거짓 부흥을 구별하도록 지침을 제시하는 일은 바로 그런 각성의 시기에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기독교 사역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다. 간혹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가 교회에 등장했다가 사라지면 그에 맞추어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기도 한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는 참과 거짓을 판단하기 위한 바른 지침과 표지가 필요하다. 특별히 우리가 돌보는 사람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서라면 더더욱 말이다.영적 각성이나 진정한 회심을 구별할 때 사용할 수 있는 여러 가지 표지 가운데,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가 있다. 여기서는 진정한 회심과 부흥을 알아볼 수 있는 참되고 신뢰할 만한 표지를 제시하기 전에, 바로 그 거짓되고 그릇된 표지를 다섯 가지 예를 들어 지적하고자 한다.고조된 감정신앙적인 관심을 잘못 판단하게 하는 표지 중 하나는 고조된 감정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받거나 죄에 대해 압도적인 슬픔을 느낀다고 해서, 그런 감정이 반드시 회심이 일어났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강력하고 고조된 감정이 일어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 사례를 통해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월드시리즈나 슈퍼볼을 관람하는 사람들은 감정이 최고조에 오르는 경험을 하지만, 그런 감정은 영적인 운동이 그들 가운데 일어나고 있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열변을 듣는 시민들은 큰 기쁨을 느끼기도 하고 깊은 분노에 휩싸이기도 하지만, 그런 감정이 회심을 이끄는 역사임을 의미하지 않는다.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다. 당신이 과거에 드린 예배를 생각해 보라. 음악이나 설교가 마음 깊이 와 닿은 경우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감정이 움직이고, 그 순간 그리스도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리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대체로 삶에 중대한 변화를 일으킬 만한 의지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거룩한 삶을 새롭게 실천하게 만드는, 즉 성령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새로운 마음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감정은 고조될 수 있지만, 그러한 감정이 지속적인 열매를 맺지는 않는다.준비된 간증또 다른 그릇된 표지는 우리의 신앙 경험에 대해 미리 준비된 내용을 전달하는 간증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가 자신의 심적 변화에 대해 그 자리에서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는 경우, 우리는 그 간증이 참된 회심의 표지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존 번연(John Bunyan)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캐릭터 수다쟁이가 우리에게 경고하듯이, 단순히 신앙 경험이나 교리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사실이 곧 진정으로 회심하거나 각성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상 거짓 종교 체험을 한 사람들은 영적인 교만과 야심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열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본인의 경험을 사람들에게 말하기가 쉽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들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절박한 영적 상태에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일 수도 있다.성경 인용진정한 회심과 참된 부흥을 구별할 때 그릇되게 사용되는 세 번째 표지는 성경 구절을 길게 인용하는 능력이다. 이를테면, 진정한 영적 각성에 대한 증거로 흔히 인용되는 특정한 성경 구절이 마음에 즉각 떠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확실한 표지가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마귀도 사람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성경 본문을 인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시험했던 마귀가 그분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떼어놓고자 시편 91편을 잘못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예이다.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 동안은 즐겁게 받아들이지만, 결국에는 등을 돌리고 만다. 마태복음 13장은 돌밭으로 비유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겠지만, 시련의 때가 오면 거짓 회심자임을 드러내고 만다고 가르친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듣고 성장하는 듯이 보여도, 결혼생활이나 가정이나 직장에서 시련을 당하는 때가 오면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단순히 성경의 인용 또는 성경에 대한 관심이 표현된다고 해서, 참된 회심이나 부흥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는 없는 이유이다.영적 체험자신이 죄나 사탄으로부터 구원받았다고 느낄지라도 참으로 회심하지 못한 상태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누군가 본인이 영원한 심판에 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영적으로 깊이 염려하고 심지어 절망을 느낀다고 생각해 보자. 이는 영적인―심지어는 마귀적인―압박감에 해당하는 경우일 수도 있다.그러다가 갑자기 이적을 경험한 것처럼, 마치 마귀가 쫓겨나고 억압이 그치고 어떤 중독에서 벗어난 듯이, 자신이 문득 구원받았다고 느끼게 된다. 더 나아가 손이나 옆구리에 상처가 난 어떤 사람을 꿈이나 환상 속에서 만날 수도 있고, 그 사람을 그리스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체험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았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그런 경험이 확실한 회심이나 진정한 부흥을 위한 견고한 토대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는다.예배에서 느끼는 자유마지막으로 누군가가 예배를 통해 심적인 자유를 느낀다고 해서 이것이 반드시 회심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예배를 드리러 가고, 신앙 교육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부흥 집회에 참석하는 일은 그 자체로 회심의 증거가 되지는 않는다. 단순히 예배에 많은 군중이 모였다고 해서, 또는 그 사람들이 매우 열심히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부흥의 징후를 나타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아울러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느끼는 자유도 참된 신앙의 확실한 증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자유롭게 마음을 몸짓으로 표현하거나, 큰 소리로 노래하거나, 혹 설교 시간에 ‘거룩한 적막함’을 유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이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심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그분의 임재를 갈망하지만, 그러한 갈망이 회심이나 부흥의 확실한 표지는 아닌 것이다.지금까지 설명한 다섯 가지 표지들은 신앙적인 관심이나 진정한 회심 또는 참된 부흥을 잘못 분별할 수 있게 하는 그릇된 표지들이다. 따라서 이런 표지들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스스로의 영적 상태에 대해 잘못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참된 부흥, 진정한 회심, 그리고 영적인 각성을 확인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신뢰할 만한 표지들은 무엇인가?참된 표지들한 가지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은혜로운 감사’(a gracious gratitude)라고 불렀던 표지이다. 은혜로운 감사란 하나님이 나를 위해 하실 수 있거나 하신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자체 때문에 그분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참된 신자들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분의 성품을 묵상하고 그 인도하심을 기뻐하는 삶이 곧 제자의 길임을 알게 된다.또한 그들에게는 ‘거룩함에 대한 큰 기쁨’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맛보기 시작하고, 죄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느끼기 시작한다. 따라서 죄는 그들에게 점점 더 쓰디쓴 경험으로 다가온다. 성령이 그 마음 안에 거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사랑하도록 이끄시며, 하나님을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을 주시기 때문이다.하나님이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일하고 계심을 나타내는 세 번째 표지는, 그의 삶에 두루 퍼져 가는 ‘겸손’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분이신지를 아는 지혜가 있을 때, 신자들은 하나님 및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낮출 줄 알게 된다. 그러한 겸손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 그 사람의 마음에 거하시는 새로운 역사를 통해서만 생긴다. 진정한 회심은 항상 겸손을 수반하는데, 그 이유는 회심이 본질적으로 교만을 꾸짖고 자기 신뢰를 중단시키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구원자이신 그리스도의 일하심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의지하는 겸손을 갖게 된다.끝으로 하나님이 누군가의 삶에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지는 ‘거룩한 순종의 실천’이다. 성령님이 참으로 어떤 사람 안에 거하신다면, 결과적으로 거룩함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새롭게 일어난다. 거룩함에 대한 갈망은 단순히 내면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거룩한 삶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영역이나 문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기뻐하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하며, 말씀에 대한 순종을 즐겁게 실천하는 성도로 가득한 교회, 바로 그 교회가 진정한 부흥을 경험하고 있는 교회이다. 그러한 교회는 부흥의 실재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아름답게 보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살아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그러한 교회를 많이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한다.원제: True Revival and False Revival출처: www.ligonier.org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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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am Ramsey
2018-12-06
사무엘 러더포드(Samuel Rutherford, 1600-1661)는 “나는 고통이 있을 때면 지하실로 내려가 주님이 주시는 최고의 포도주를 찾는다"라고 말했다.교회 개척이 당신을 ‘고통의 지하실’로 내려가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고통은 일반적인 일이다.환경의 불확실성, 개인적인 죄, 성취되지 않은 소망, 비합리적인 요구, 가정에서의 영적 전쟁, “당신과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으나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핵심 멤버들, 바로 이 모든 요인들이 고통을 가져올 수 있다.‘나는 아니야! 내 지체들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다를 거야!’라고 말해봤자 소용없다.지난 22년 동안 내 삶은 교회 개척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었다. 처음에는 교회를 개척한 가정의 십대 소년이었고, 다음에는 실패한 교회 개척팀의 일원이었으며, 이제는 분립 개척을 추친하는 교회의 담당 목사이다.이 각각의 기간은 다양한 방식으로 달콤함과 고통, 승리와 시련의 시기였다. 이 지면을 빌어 나는 교회 개척자로서 처음부터 알았으면 좋았을 고통의 문제에 관하여, 세 가지 교훈을 중심으로 이야기하고자 한다.1. 고통이 피할 수 없는 문제라면,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다만약 고통 없는 삶을 원한다면, 교회를 개척하지 않아야 한다. 현재 당신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편이 낫다. 교회 개척은 잊어버리고, 사는 동안 그런 것은 없다고 생각해라.고통이 오고 있음을 안다면, 고통이 발생했을 때 그 충격은 줄어드는 법이다. 고통이 일반적인 경험임을 안다면, 자기 연민에 선제 공격을 가할 수 있다.자기 연민이 교회 개척자의 정서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좌절과 슬픔 및 실망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기 연민을 향해서 단호하게 ‘안 돼’라고 말해야 한다. 실수하지 마라. 교회 개척자가 된다는 것은 기꺼이 고통을 받아들이는 일이다.결국 우리 각자는 실망하거나, 배신당하거나, 비방을 받거나, 낙담하거나 오해 받거나 잘못된 소문의 대상이 되거나 반대를 받거나 우울해지거나 외롭거나 영적으로 소진될 것이다.당신이 영적으로 (유명한 권투 선수인) 플로이드 메이웨더(Floyd Mayweather)여서 당신 앞에 던져진 거의 모든 문제를 피해갈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 인생을 둘러싼 문제들이 당신을 로프로 밀어붙이고 곧 라이트훅으로 눕혀 버릴 날이 올 것이다.하지만 사역자가 상처를 쉽게 받는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이 그분의 최선을 이루시는 장소이다. 청교도 토마스 왓슨(Thomas Watson)은 이렇게 썼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눕히실 때에야 그들은 천국을 올려다 보게 된다.”이 사실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천천히 그러나 점점 더 그의 아들을 닮아 가도록 빚으실 때 고통을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예상하기 힘든 주님의 도구 중 하나가 바로 고난이다.2.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라면, 고통은 나를 돕는 종이 될 수 있다교회를 개척할 때 불가피하게 경험하는 온갖 어려움은 우리의 성화를 돕는 종이 된다. 왜냐하면, 그런 어려움은 우리가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부분을 드러내어 결국 변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고통은 훌륭한 의사가 잡은 메스의 날카로운 칼날과 같다. 그것은 우리 속에 아직도 잘못되어 있는 부분을 열어서 드러낸다.생각해 보라. 고난은 성공 이면에 위장해 있는 우상을 노출시킨다. 어려움은 마음 속 어두운 곳에서 여전히 자신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나르시시즘을 향해 빛을 비춘다. 실망은 비밀스럽게 유지되어 온 혜택과 권리를 수면 위로 드러내어 우리 인생 가운데 선을 이루어 간다. 우리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목회자로 하여금 사역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고통은 교만을 드러낸다.바울이 형언할 수 없는 하늘의 영광 속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의 결론을 놓치지 마라. 그 결론은 바울이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지 않기로 하신 육체의 가시를 고백하는 데 있다. 그는 가시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고후 12:7).고통은 우리가 자기를 신뢰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가르친다. 그래서 바울은 확신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6-17).무슨 뜻인지 이해했는가? 고통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시키는’ 일이다.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것을 현재의 성장과 미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신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실망, 반대, 실패에 정복당할 이유가 없다.나는 타비티 안야빌리(Thabiti Anyabwile)의 강의를 듣던 날을 기억한다. 그는 부흥에 필요한 고통의 역할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로 우리를 격려했다.“하나님은 자기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셨듯이, 당신의 고통에 대해서도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계십니다. 크리스천으로서 당신이 겪는 고통은 당신을 돕는 종입니다. 당신의 고통은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의 무게’를 감당하도록 당신 편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다음 번에 고통이 당신의 자리에 찾아온다면, 이렇게 말하십시오. ‘환영한다 나의 종이여. 나에게 하나님이 계획하신 영광을 이루어 달라.’”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경험하는 모든 사역의 실패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게 할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우리가 선물 받을 명품 포도주인 것이다. 3. 예수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바울이 그의 인생의 막바지에 당신과 식탁에서 마주 앉아 있다고 상상해 보라.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극복할 수 없을 듯한 어려움 속에서도 신실함을 잃지 않고 담대하게 살아 온 그리스도의 종이다(고후 11:23-28). 그는 성실했고, 믿음으로 선한 싸움을 이어왔으며, 이제 그 앞에 놓인 경주를 곧 마무리하려 한다.“바울이여, 당신의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고 또 묻는다. “당신은 고난을 당하면서도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까? 그 많은 고통 속에서 어떻게 복음 사역을 멈추지 않을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당신 자신을 그토록 쏟아 부을 수 있었습니까?”늙은 사도는 당신 가까이로 몸을 숙인다. 그리고 그의 미소 속에서 몸에 난 상처와 어울리지 않는 기쁨을 엿볼 수 있다. 그는 당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속삭인다. “비결을 알고 싶습니까? 그리스도로 충분합니다. 그분의 은혜 안에 있다면, 가시를 지녀도 좋습니다(고후 12:9). 그분의 사랑 안에 있다면, 불확실함 속에서도 안전합니다(롬 8:38-39). 그분의 강함 안에 있다면, 어떤 환경 속에서도 능력이 있습니다(빌 4:12-13).”바울은 인간 관계 속에서 배신을 당했고, 폭력적인 반대를 경험했으며, 계획이 무너지고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는 고통에 익숙했다. 하지만 사역에서 겪는 놀람이나 염려는 바울을 근본적으로 억누르지 못했다. 그는 만족의 비결을 배웠다. 그는 그리스도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배웠다.교회 개척자여, 앞에 놓인 골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잠시 마주치는 비탈길에 놀라지 마라. 어둠의 그늘이 강해지는 것처럼 보일 때, 자기 연민 속으로 뒷걸음치지 마라. 용기를 가져라! 주 예수님이 거기서 당신과 함께 하실 것이다(시 23:4). 당신은 반대를 받겠지만, 버림은 받지 않을 것이다. 당신은 쓰러지겠지만, 패망하지 않을 것이다(고후 4:9).부활하신 우리 왕의 임재가 교회 개척의 고통과 실망보다 더 실제적이고 소중한 현실이 될 때, 우리는 바울과 함께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모든 상황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Every Church Planter Needs to Know About Pain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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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개척
개척자
사무엘러더포드
고통
예수님
부활
왕의임재
바울
경고와 확신의 관계를 혼동하지 마라
by Andrew Wilson
2018-12-05
바울의 가르침은 수수께끼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는 우리에게 가르침을 받은 그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최종적인 구원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반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령의 은혜로 인해 우리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보호될 것이라는 '확신'도 드러낸다. 이 상반된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인가?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약속을 좋아한다. 안정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고는 싫어한다.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다.그러나 이와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경고를 좋아한다. 죄를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확실한 약속은 싫어한다.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또 어떤 사람들은 확실한 약속과 경고, 둘 중 한 가지에 치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존 칼빈과 같이 두 가지 모두에 중점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어떤 이들은 바울이 이 주제에 대해 혼란을 주게끔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말을 정중히 무시해도 좋다고 주장한다.경고와 확신의 조화경고는 실제적이다. 만약 성도들이 죄에 빠져서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확신도 실제적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지키실 것이다. 경고는 확신을 보증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수단이다. 바울의 확신에 따르면,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고, 죄를 회개하여, 결국에는 구원에 이를 것이다. 즉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경고에 반응하도록 일하실 것이다.경고를 통하여 확실한 구원에 이르는 은혜가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것이다.이 요점이 내 박사학위 연구의 결론이다. 그 중 결론 부분은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경고와 확신의 관계’(The Warning-Assurance Relationship in 1 Corinthians)라는 제목으로 최근에 출판되었다. 이 연구는 상세한 주석들과 더불어 칼빈주의자들과 웨슬리-알미니안주의자들을 함께 다루며 얻어낸 결과이다. 여기서 나는 목사이자 설교자로서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과연 그 관계를 이해하는 일이 목회 사역에 주는 유익은 무엇인가?경고와 확신에 대한 관점은 최소한 네 가지 차원에서 목회와 설교에 실제적인 도움을 준다.1.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확신을 가지도록 돕는다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어떤 실수를 저지르든지 간에,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간혹 목회는 실망스럽거나 심지어 환멸감을 느끼는 경험이 될 수도 있다. 때때로 우리(목회자)는 스스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상기하며, 우리가 목양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하지만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고린도 교인들처럼 성만찬 자리에서 술 취하고, 우상 숭배와 성매매를 일삼고, 서로 고소하며, 더 나아가 부활을 부인할 뿐 아니라, 근친상간까지 인정하고 자랑함으로써 환멸감과 좌절감을 주는 사람들을 섬겨 본 적은 없을 것이다.그러나 이 모든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 하나님은 미쁘시도다”(고전 1:8-9). 이 말씀은 우리에게 엄청난 위안을 준다.2. 성경의 경고를 비중 있게 설교하도록 돕는다많은 개혁 교회 목사들은 책망하거나 경고하는 말씀을 선포할 때 청중들의 반응을 우려한다. 그 말씀을 듣는 성도들이 마치 설교자를 은혜나 구원의 확실성을 불신하는 사람으로 생각할까봐 걱정한다. 그래서 로마서 8장보다 히브리서 6장을 설교할 때, 그리고 히브리서 6장보다 베드로후서 2장을 설교할 때 그런 염려에 더 빠지게 된다.그러나 바울의 경고가 크리스천의 인내를 보증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는 성경의 진리가 완전하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 경고를 담대히 선포해야 한다.하나님의 선택이 있으므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말도 안 되듯이,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성경의 경고는 필요 없다는 생각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나는 이 교훈에 대해 존 파이퍼가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Brothers, We Are Not Professionals)에서 다음과 같이 옮긴 표현을 좋아한다. “형제들이여, 성도들을 구원하십시오.”3. 교회 안에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올바로 대하도록 돕는다나는 교회에서 한 여성과 대화한 내용을 잊지 못한다. 그녀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질렀는지와 상관없이, 또 회개를 했는지 안 했는지와 상관없이, 자신은 완벽히 안전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안전하다는 생각에 빠진 채 안주하는 삶을 살고 있었고, 심지어 공격적이기까지 했다.나는 그녀에게 히브리서 10장 26-31절 말씀을 가지고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구원받지 못할 거라고 확실히 말해 주었다. 이처럼 성경적인 경고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회개를 하든지, 아니면 회개를 하지 않든지, 반드시 진지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적용되어야 한다.경고와 확신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후자를 약화시키지 않고도 얼마든지 전자를 강조할 수 있게 된다.4.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내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돕는다바울이 달음질하며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킨다고 고백했듯이(고전 9:24-27), 우리는 삶 가운데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기업을 보장하는 것은 자신의 노력이 아닌 성령의 사역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하나님의 사역과 인간의 노력은 모든 크리스천의 삶 가운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 1:29).우리는 내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사역을 이끌어 갈 수 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설령 시험을 거부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을 때나 혹은 그런 상황에 처한 다른 누군가를 상담할 때, 우리에게 큰 격려를 준다.이런 차원에서 고린도전서와 바울, 그리고 성경에서 엿볼 수 있는 경고와 확신의 관계를 이해하면, 우리는 목회와 설교 사역에 도움이 되는 실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성경이 강조하는 메시지 간의 균형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신학적인 유익도 함께 얻을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의 결과로,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목회자에게 주어진 명령이지만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은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고전 4: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Relationship between Warnings and Assurance-Don't Fumble It번역: 김형용
신학
교리
경고
확신
바울
실제적
고린도전서
사역
목회
설교
만일 당신이 교회를 떠날 생각을 하고 있다면
by Mark Dever
2018-12-05
떠나기로 결심하기 전에1. 기도하라. 2. 당신이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다른 도시로 이주하려고 하기 전에, 당신의 솔직한 생각을 현재의 목회자와 상담하라. 그리고 그의 조언을 구하라. 3. 당신의 동기를 살펴보라. 떠나려는 마음이 개인적인 다툼이나 실망 때문인가? 혹은 교리적인 이유 때문이라면, 그 교리적인 문제가 얼마만큼 심각한 정도인가? 4. 깨진 관계를 화목케 하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노력을 기울이라. 5. 여태까지 교회 생활에서 경험했던 모든 은혜의 증거들, 즉 분명한 하나님의 사역을 꼭 고려해보라. 만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전혀 볼 수 없다면, 당신 자신의 마음을 한번 더 점검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마 7:3-5). 6. 겸손하라. 모든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음을 인정하고, 사람들과 상황을 자애롭게 평가하라(나만 옳다는 명백한 증거가 없는 한, 상대방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해보라). 만일 당신이 떠난다면 1. 주님의 몸을 분열시키지 말라. 2.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조차 불만의 씨앗을 뿌려 두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하라. 당신은 그들이 현재의 교회에서 은혜 가운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험담하고 싶은, 또는 감정을 분출하고 싶은 마음을 잠잠케 하라. 3. 회중과 그들의 리더십을 위해 기도하며 축복하라. 이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라. 만일 상처를 입었다면 어렵더라도 용서하고자 노력하라. 당신이 용서받았듯이.출처: www.9marks.org원제: If You’re Thinking about Leaving a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교회
교회생활
기도
조언
교리
관계
은혜
겸손
주님
회중
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을까?
by Justin Taylor
2018-12-05
여기서는 초대교회의 세례라는 주제와 관련하여, 우선 교회사가 에버렛 퍼거슨(Everett Ferguson)의 975페이지짜리 대작, ‘초대교회의 세례: 첫 5세기 동안의 역사, 신학, 예전에 대하여’(Baptism in the Early Church: History, Theology, and Liturgy in the First Five Centuries)에서 결론적으로 설명한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가 존재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2세기 후반에 유아세례를 행했다는 명백한 증거는 없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입니다”(856페이지).그렇다면 유아세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까?“유아세례가 행해지지 않았다기보다는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내세울 만한 역사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뜻입니다”(856페이지).“많은 사람들은 이 역사적인 공백을 신학적인 또는 사회학적인 설명으로 대체합니다”(856페이지).왜 유아세례가 생겨나게 되었나요?“유아세례의 기원에 대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은 비상적인 관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앞둔 병든 아이들이 곧 천국에 들어가리라는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해 긴급적으로 행해지던 세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856페이지).언제부터 유아세례가 세례의 일반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까?“예비적인 차원에서 아기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 조금씩 늘어났습니다”(857페이지).“그렇게 유아세례는 일반적으로 용인되었지만, 그 타당성에 대한 질문은 5세기까지 계속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러다가 5-6세기에 들어서며 통상적인 관습으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857페이지).그렇다면 초대교회는 어떤 방식으로 세례를 베풀었습니까?“본 연구에서 수집된 증거를 종합적으로 분석해보면, 예외적인 경우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 주제에 관한 새로운 시각과 더불어 증거에 관한 일관된 해석을 얻을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당시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사용하던 (세례를 의미하는) 단어나 (물에 몸을 담그던) 유대교의 관습을 포함한 기독교 문헌들을 분석하였을 때, 거의 압도적으로 전신을 물에 담그는 세례가 일반적인 방식이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그러나 물이 부족하거나 병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어야 할 때는 예외였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의심의 여지없이 (동방) 그리스 지역에서는 4-5세기에도 행해졌고, (서방) 라틴 지역에서는 그보다 약간 덜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857페이지). 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은 (1) 초기 관습에서 변형된 것입니까? 아니면 (2) 이전에 존재했던 방식들 가운데 하나입니까? 또는 (3) 처음 3세기 동안 행해지던 방식이 그대로 이어진 것입니까?“본 연구의 결론에 따르면, (3)의 해석이 현재 가지고 있는 증거에 가장 부합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857페이지).“물 속에 잠기게 하는 방식을 누군가가 생각해서 고안해냈다면 모르겠지만, 문학과 미술 및 고고학적 증거들은 이번 연구의 결론을 지지합니다”(857페이지).다음으로 이 주제에 관한 또 다른 관점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번에는 앤서니 레인(Anthony Lane)의 ‘초대교회는 유아세례를 주었는가?’(“Did the Apostolic Church Baptise Babies?: A Seismological Approach,” Tyndale Bulletin 55, no. 1, 2004)에서 설명된 내용을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첫째, 초대교회가 유아세례를 주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한 입장을 확정짓기에는 1세기로부터 확보할 수 있는 직접적인 증거가 부족하다.둘째, 이에 대한 대안적인 접근은 초대교회 이후 바로 이어지는 속사도교회의 세례 관습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 관습을 낳을 수밖에 없었던 초대교회의 원인을 소급하여 연구할 수 있다.셋째, 3세기 초부터 그 이후 두 세기 동안 행해진 세례에 관해서는 명백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인 가정에서 나이와 상관없이 자녀들이 세례를 받은 경우를 포함하여 다양한 세례의 관습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넷째, 초기에 행해졌던 일반적이지 않은 다른 세례의 관습들을 원리상 비(非)사도적이라거나 잘못된 방식이라고 주장했던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다섯째, 비록 구전 전통(oral tradition)이 연구물로서 한계가 있기는 하지만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 그 전통을 고려하면, 교회가 다양한 방식들로 세례를 베푼 관습에 대하여 사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기원을 설명하는 편이 가장 자연스럽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Baptism in the Early Church번역: 조현빈
역사
초대교회
세례
유아세례
관습
방식
에버렛퍼거슨
앤서니레인
이 땅의 성전과 예수님의 빈 무덤
by Chad Ashby
2018-12-04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는 대제사장, 골고다, 두 강도, 빌라도, 군중, 십자가, 무덤, 그리고 예수님 자신과 같은 익숙한 요소들로 이루어진 친숙한 기사이다. 하지만 우리가 쉽게 간과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있다.마태에 따르면, 그 요소는 바로 성전이다.마태는 마지막 여덟 장에 걸쳐 성전을 16회 언급한다. 마태복음이 정점에 도달할 때, 성전이 중대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태의 서술이 십자가에서 성전을 지나 무덤으로 이동하는 흐름 속에는 독자들이 예상하기 어려운 문학 장치가 자리하고 있다.곧 마태는 전문가적인 스토리텔링 기법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무덤을 단순한 바위나 돌 그 이상의 것으로 볼 수 있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그 무덤은 바로 한 장의 성전 그림과 같이 묘사된다.성전 허물기예루살렘을 향하는 종려주일 가두행진 후에 예수님은 성전의 뜰로 자리를 옮기셨다. 그분은 성전이 부정한 것들, 즉 환전상이나 강도들의 행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예수님은 상을 뒤엎고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았고, 눈 먼 자와 저는 자를 고치셨다. 다음 날, 그분은 제사장들 및 바리새인들과 논쟁하셨고, 그들에게 지옥의 심판이 있을 것임을 선언하신 후 그 성전을 떠나셨다.이때 제자들이 성전의 외면적인 아름다움에 감탄하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마 24:2) 그리고 몇 장의 이야기가 흐른 후, 우리는 예수님을 붙잡고자 모의하는 대제사장들이 그분을 고발할 만한 내용을 겨우 한 가지밖에 얻지 못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그 한 가지는 어느 두 사람이 대제사장 앞에 나와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이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0-61).예수님은 성전을 무너뜨릴 생각이셨다. 이 장소는 자기 의로 가득한 그릇된 종교 지도자들의 오물로 채워진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성전을 회칠한 무덤으로 바꿔 놓았으며, 겉은 번쩍번쩍하고 깨끗하지만 속은 악으로 가득 찬 곳으로 만들었다. 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새로 짓고자 계획하셨다.휘장 찢기마태의 수난 이야기는 놀라운 변화로 끝이 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그를 향한 모욕이 가해지자, 예수님은 시편 22편의 말씀을 큰 소리로 외치셨다. 그리고 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셨다(마 27:50).하지만 클라이맥스는 여기가 아니라 그 마지막 날카로운 울부짖음이 성전에 울려 퍼지는 순간이다.“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마 27:51-52).이렇듯 수난의 일주일은 예수님이 성전 외부 뜰에서 격노하신 일로 시작된 후, 성전의 파괴에 관한 예언으로 이어지고, 하나님과 인간을 분리했던 휘장이 찢어지는 소리로 마무리되었다.성전에서 무덤으로요셉이라는 한 남자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했고, 그 시신을 세마포로 감싼 후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다(마 27:60). 마태는 여기서 무덤을 성전과 병행구조로 연결시키는 문학 장치를 사용한다. 곧 성전 벽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 무덤 벽으로, 불의 천사들로 수 놓인 휘장은 경비가 보초를 서는 큰 돌로 대치된다.이렇게 마태는 그 당시 성전의 이미지를 무덤에 투영한다. 마치 석관 상자인 언약궤가 두꺼운 휘장 뒤에 놓여 인간이 보지 못하게 감춰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인) 임마누엘 곧 예수님은 무덤의 입구를 막아 놓은 돌로 인해 우리의 시야에서 가리워 지셨다. 돌 휘장이 하나님과 죄인의 사귐을 막은 것이다.성전은 곧 죽음의 장소, 피가 흘려져서 항상 죄를 기억하게 하는 무덤과도 같았다. 또한 성전은 무덤처럼 악한 제사장, 거짓 가르침, 오물 같은 부패한 장사꾼의 부정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이 모든 것은 곧 큰 변화를 앞두고 있었다.빈 무덤예수님은 성전을 허물고 3일 만에 다시 세우기 위해 돌아오셨다. 돌 성전도 돌 무덤도 하나님의 임재를 영원히 가둬 놓을 수는 없었다.안식 후 첫 날이 되려는 새벽에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다(마 28:2).성전 휘장에 수 놓여 있던 천사들은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었다. 그러나 이번 천사는 반대로 주님이 계셨던 무덤으로 여자들을 이끌었다.“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마 28:5-6).휘장처럼 돌이 입구에서 제거되었다. 그리고 여자들이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하나님의 임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대제사장들이 작은 방에 하나님을 다시 가두려고 했지만, 예수님과 세상을 분리한 바위벽과 무거운 돌은 더 이상 그분을 가둬 놓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무덤을 떠나셨다. 성전이든 무덤이든 어떤 물리적인 벽도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더 이상 분리할 수 없었다.여자들이 두려움과 기쁨으로 무덤에서 떠날 때, 걸어오던 누군가와 마주쳤다.“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마 28:9).그렇다. 예수님은 무덤에서 나와 세상으로 오셨다. 마침내 하나님과 인간은 오래 전 에덴 동산에서 그러했듯이 다시 함께 걸을 수 있게 된 것이다.무덤에서 새 성전으로마태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돌을 모으라고 제자들을 보내신다. 부활하신 왕은 이제 차갑고 생명이 없는 돌로 된 무덤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 지어진 영적인 집, 곧 새 성전을 짓고 계신다. 그리고 깨끗하게 씻음 받고 제자의 길을 따르도록 부름 받은 사람들을 세상 곳곳에서 모으고 계신다.최고의 소식은 이것이다. 우리가 바로 그분의 성전이며, 이 땅에 심겨져서 번성하고 충만하게 될 정원(곧 회복된 에덴동산)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는 바로 이 살아 있는 성전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thly Temple and the Empty Tomb번역: 이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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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생활을 끝내는 다섯 가지 방법
by Josh Squires
2018-12-04
결혼 생활은 사역이다. 특히, 당신이 그 결혼 생활을 통해 장기적인 안정과 복음을 추구한다면 더욱 그렇다.반대로 결혼 생활을 끝내는 일은 어떨까? 믿기 힘들 정도로 정말 쉽다.얼마나 쉽게 가정이 파괴될 수 있는지 알게 된다면, 당신은 아마도 놀랄 것이다. 손쉬운 다섯 단계를 따르는 것만으로도,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가정 생활을 끝낼 수 있다. 여기에 그 방법이 있다.1. 완벽함을 기대하라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는 요한의 말(요일 1:8)을 깨끗이 잊어버려라. 대신, 배우자의 모든 죄를 부지런히 찾아내고 흠이 없는 상대를 상상하며 마음 속으로 무결한 상대와 배우자를 비교하라. 또한 배우자의 실패를 되새겨라. 모든 일이 배우자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일부분이 되게 하고 바울의 권면(엡 4:31-32)도 잊어버려라. 그래서 고통의 강이 그 삶에 휘몰아치도록 하라. 당신이 이 결혼의 피해자임을 기억하며 스스로를 위로하라.완벽함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 육체의 완벽함, 감정의 완벽함, 이성적인 완벽함, 그 모든 완벽함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고 배우자의 결점에 대해 심히 불쾌하게 여겨라. 일말의 희망이 보이려 할 때면, 그가 얼마나 여러 차례 실패했었는지를 상기시켜 주어서 수치심을 느끼도록 해주어라. 어제보다 나은 진전을 모두 과소평가하라. 그 어떠한 진전도 당신에게 상처를 줄 것이고, 당신은 그 진전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어쩌면 배우자가 당신이 기대하는 바에 부응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절대 그와 함께 축하하며 즐거워하지 말아라. 그 대신, 배우자가 겨우 ‘이제서야’ 당신의 요구에 부응해서 화가 난 모습을 보여라. 분명히 그의 부응 이면에는 (돈, 자녀, 섹스 등) 나로부터 얻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그 숨은 동기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 이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다. 당신이 불만족스러운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갈보리 언덕을 바라보지 말아라. 만약 갈보리 언덕을 그려본다면, 당신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완벽한 사람이 당신을 위해 십자가에 달렸음을 떠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2. 소통하지 말고 감정을 격하게 드러내라밝은 이모티콘은 당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것은 쉽게 속는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고, 상대에게 부드럽게 말하는 것은 약자들만 하는 행동이다. 덕을 쌓으라는 바울의 권고를 떠올리지 말아라. 그의 권고는 좌절 또는 혐오를 드러내지 못하도록 방해할 것이다. 당신의 감정만이 모든 진실의 심판자이니 항상 감정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게 만들어라. 지옥의 불길처럼 말이 거칠어지더라도 참지 말아라. 옳은 쪽은 당신이니까 당신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대화에 은혜(골 4:6), 사랑(벧전 3:10), 진실(엡 4:15)이 가득한가? 이러한 명령은 영적으로 탁월한 사람 또는 최소한 당신의 배우자보다는 더 능력 있는 사람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성내기도 더디하는”(약 1:19) 일에는 시간과 에너지가 필요하다. 소리를 지르거나, 발을 세게 구르거나, 거친 언어를 참지 말라. 흥분할수록 더 쉽고 빠르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 당신이 배우자의 말을 들을 시간은 없을 수 있지만, 당신의 배우자는 항상 당신에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3. 더 많은 선택을 생각하라언제, 어디서,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이 생길지 결코 알 수 없다. 사실 당신은 주님과 증인들 앞에서 서약했지만, 사람들은 그러한 약속이 순진한 행동이라는 것을 안다. 무엇보다도 배우자의 모든 결점을 미리 알았다면, 그런 약속을 했을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게으르고, 탐욕스럽고, 살기 가득한 우상 숭배자들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그러한 약속들을 주셨겠는가(롬 5:6-11)? 당신은 하나님이 하신 그와 같은 일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은가(엡5:1-2)?지금의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으며, 그 중 한 명이 당신에게 진짜로 오랜 만족을 줄 열쇠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현재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좋은 면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당신은 상대방의 많은 흠을 알게 되었다. 만일 당신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당신은 더 매력적이거나, 의사소통이 잘 되거나, 더 예술적이거나, 더 멋져 보이거나, 더 깔끔하거나, 그 무엇이든 더 괜찮은 사람을 얻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든 상관없다. 그러므로 당신도 앞으로는 더 잘 행동해야 한다. 체육관, 식료품점, 심지어 예배당 그 어느 곳에 있든지, 더 나은 배우자를 얻기 위해 배회하라.4. 자기 자신만 생각하라당신의 순간적인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 어떤 것도, 심지어 하나님조차도 당신의 행복보다 먼저일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더 닮아가도록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당신을 불만족스럽게 할 수도 있는 그런 하나님은 상상하지도 말아라(롬 5:3-5). 당신의 인생과 관련된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결혼의 유일하고도 궁극적인 목적은 당신이 섬김을 받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다른 사람을 섬기고(막 10:43-45), 다른 사람을 더 낫게 여기라고 당신을 부르셨지만(빌 2:3), 전혀 개의치 말고 ‘본인의’ 필요를 첫 번째로 두어라.당신의 가치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당신을 예수님이 선택하셨다는(빌 2:6-8) 사실에 달려 있지 않다. 그 가치는 최고의 수준으로 당신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배우자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되뇌어라. 지속적이고 효과적이며, 능률적이면서도 즉각적으로 당신을 섬겨줄 때에만 배우자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할 수 있다. 그 대가도 오직 당신이 편안할 때에만 허락된다.5. 도움을 구하지 말아라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수많은 상담가를 필요로 하겠는가(잠 15:22)? 당신에게는 그런 도움이 필요 없다. 당신은 지금 제3세계 빈곤의 해결책이나 암을 위한 치료법 따위의 거창한 주제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이 자신의 선한 언약을 인류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 만드신 ‘작은’ 공동체(즉 결혼 생활)에 대해 고민하고 있지 않은가(창 2:18-24)?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부유하거나 가난할 때에'라고 한 당신의 서약은 '그의 백성을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리라'라고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세상에 반영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결혼 생활은 간단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은 필요 없다.게다가,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결혼 생활에 연루되면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잘 사는 것처럼 보여지는 모습과 결혼 생활을 스스로 관리할 수 있다는 환상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상담가, 목회자, 멘토 등은 당신의 삶에 껄끄러운 진실을 조언할 수도 있다(엡 4:15). 심지어 그들은 당신의 배우자에게 어떠한 흠이 있더라도 당신에게 배우자로서의 소명에 부응할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롬 12:9). 행복하고 건강한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하고 있는 선배 부부들에게는 절대 조언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또한 아무리 많은 현실적인 조언도 당신이 수년간 훑어보았던 연애와 결혼 블로그보다 나을 수는 없다. 결국 모든 것은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결론을 가리킨다. 당신은 비참하며, 그 모든 문제의 원인은 배우자에게 있다. 어느 누가 도와줄 수 있겠는가?이것이 전부다. 작은 노력과 엄청난 우월감으로 당신은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다. 언제라도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그리스도가 자기 백성을 위해 보여주신 언약적 사랑의 강력한 이미지를 깨뜨릴 수 있다. 슬프게도 세상은 당신이 그처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Ways to Murder Your Marriage번역: 안재영
가정
결혼
완벽함을기대
감정을격하게
선택
자시만생각
도움
소통
성경을 암송해야 하는 이유
by John Piper
2018-12-04
몇몇 사람의 이야기를 먼저 하려고 한다. 간접적으로 들은 달라스신학교의 하워드 헨드릭스(Howard Hendricks) 박사의 이야기이다. 그는 자신에게 결정권이 주어진다면, 그 신학교에서 수학하는 모든 학생들이 졸업하기 전에 천 개의 암송구절을 완벽히 외우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남가주대학교 철학과 교수였던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이렇게 말했다. “성경 암송은 영적 성장의 절대적인 기초다. 신앙생활의 모든 훈련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성경 암송을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 암송은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는 기본이자 핵심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성경은 바로 입에 있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율법책이 당신의 입에 있게 할 수 있는가? 암송하면 된다.”또한 척 스윈돌(Chuck Swindoll)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성경 암송을 최고의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성경 암송으로 기도 생활은 강화될 것이고, 영성은 더 날카롭고 효과적이 될 것이다. 당신의 태도와 세계관은 변화하게 될 것이고, 생각은 깨어 있으며, 영적으로 민첩하게 될 것이다. 담대함과 확신은 고양될 것이고, 그 믿음은 견고해질 것이다.”‘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마틴 루터의 위대한 발견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있던 시절, 요한 폰 스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를 통해 말씀을 사랑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도 않은 채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 루터는 하루 만에 성경을 완독했다. 루터는 동료 교수인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Karlstadt)가 신학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물론 그 이후 수년 동안 성경책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고 지적했다. 수많은 성경 구절을 암송했던 루터에게 주님은 그의 눈을 열어 로마서 1장 17절의 이신칭의 진리를 보게 하셨다. 그 때 루터는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 즉시로 기억 속의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았다”라고 했다.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경 암송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고백했다. 그 고백과 확신의 이유를 몇 가지 들어보겠다.1. 성경 암송은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한다“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고후 3:18).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하려면, 우리는 지속적으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 바라봄은 말씀을 통해 가능해진다.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여호와의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자기를 나타내시니라”(삼상 3:21). 성경 암송은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지속적이고 분명하게 고정시키는 효과가 있다.2. 성경 암송은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한다“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9, 11). 바울은 우리가 “영으로써 몸의 악한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롬 8:13). 그 죽이는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엡 6:17). 죄는 몸을 악한 행실로 유혹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성경의 말씀을 기억하고, 죄의 유혹과는 비교할 수 없는 그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3. 성경 암송은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한다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암송하고 계셨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마 4:1-11).4. 성경 암송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권고의 말씀을 전하게 한다사람들이 당신에게 위로와 권고를 기대하는 중요한 순간에, 당신의 손에 성경책이 들려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암송이 필요하다. 마음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상대를 향한 놀라운 능력을 발휘한다. 잠언 25장 11절은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사과니라”라고 말씀한다.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가득 차 있을 때, 우리의 입에서는 경우에 합당한 축복의 말이 흘러나온다.5. 성경 암송은 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나눌 수 있게 한다비기독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는 성경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그 자체로 예리한 능력이 있는 성경 구절을 암송함으로써 우리는 복음을 네 가지 주제로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1) 하나님의 거룩/법/영광, 2) 인간의 죄/반역/불순종, 3)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 4) 믿음을 통해 거저 받을 수 있는 영생의 은혜. 이 네 가지의 주제와 관련된 구절들을 미리 암송해 두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것들을 나눌 준비를 하기 바란다.6. 성경 암송은 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과 교통하게 한다하나님과 교통하는 방법은 그분의 속성을 묵상하고, 감사와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며, 그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도록 도움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 그분의 진정한 성품을 알게 되어 주님과의 교제에 많은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하루 종일 다음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 103:8-14).이 단락의 제목(“하나님의 인격과 뜻을 즐거워하며 그분과 교통하게 한다”)에서 나는 ‘즐거워하며’라는 단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우리들 대부분은 영적인 감정에 있어서 무감각의 상태에 빠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할 때, 감정의 잠재력이 최대한으로 발휘된 수준에서 경험한 적이 없다. 이러한 상태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그 한 가지 방법이 성경에 있는 감정적 표현들을 암송하고, 주님께 그 표현을 고백하며 서로에게도 권하는 것이다. 그 감정들이 나의 일부가 될 때까지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시편 103편 1절을 암송하며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표현은 많은 사람들에게 일상적이거나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씀과 성경의 다른 감정적인 표현들을 암송하고 자주 고백함으로써 그 감정들이 나의 일부가 되기를 구하면, 우리는 그런 감정과 표현을 실제로 경험하는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감정적인 무감각에서 벗어나 올바른 찬양과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게 된다.물론 이 외에도 성경 암송을 해야 할 이유들은 더 있을 것이다. 나는 당신이 삶 속에서 그 이유들을 계속해서 발견해 나가기를 바란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Read Your Bible More and More번역: 매일배움
영성
묵상과기도
성경암송
그리스도
죄와의싸움
사탄과의싸움
위로와권고
하나님의인격
하나님의뜻
번영신학 속에 감추어진 신앙
by Jessica Hong
2018-12-03
2015년 11월의 어느 날은 내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일평생 담배를 피워 본 적이 없던 어머니가 폐암 4기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의사는 더 이상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다는 말과 함께, 길어야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생을 잘 정리하라고 조언했다. 충격적인 진단을 받은 어머니에게 소식을 들은 오랜 친구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그녀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었지만, 몇몇 친구들은 욥을 찾아온 친구들과 같이 어머니가 암에 걸린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다. “코니(Connie), 혹시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는 것은 아니야?” “과거에 끔찍한 일을 저질러서 벌을 받는 건 아닐까?” 심지어 한 친구는 어머니가 귀신에 사로잡혔다고 두 번이나 이야기했다.그러나 감사하게도, 어머니는 성경을 바르게 알고 있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 덕분에 어머니는 친구들의 어떤 말에도 동요하지 않았고, 그 후로도 16개월 동안 암과 싸우셨다. 그러나 그 사이 나는 어머니의 친구들과 비슷한 생각을 하며 믿음의 위기를 겪었다. 이유를 고민하다성경, 특히 욥기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왜 고통과 비극을 허락하셨는지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저 우리는 고통에 처한 사람들이 갖는 의문과 기도, 삶의 여정,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면서 깊어지는 믿음에 대해 배울 뿐이다. 그들이 왜 그런 고통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은 어디서도 듣지 못한다.나는 성경이 고통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죽을병에 걸렸을 때, 그 고통과 고난의 이유에 대해 하나님께 묻지 않을 수 없었다.고통에 대한 지속적인 질문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했다. 나름의 신학 지식을 토대로 마음 깊은 곳에 신앙의 전제를 세워 놓은 나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엄마의 친구들처럼 고통을 그 사람이 지은 죄의 결과로 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나의 사고방식이 번영신학(the prosperity gospel)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큰 믿음을 가진 사람은 매사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고, 남을 돕기 위해 충분한 재정을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재정, 건강, 지위 등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축복을 주실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과 축복을 연결시켜 생각하는 번영신학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이러한 깨달음 이후 어머니의 병을 대하는 나의 태도를 자세히 살펴보았고, 내 신앙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번영신학에 근접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기독교 신앙에 대한 나의 반응은 사실상 번영신학과 정반대의 모습이었다.고통을 피하다도대체 왜 하나님은 어머니를 죽을병에 걸리게 하셨을까? 이 끊임없는 물음은 내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믿음의 모습을 드러냈다. 숨겨져 있던 그 의식은 만약 내가 굳건한 믿음을 가진 크리스천이라면, 하나님이 반드시 건강과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니, 최소한 비극이나 고통은 허락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저 고통을 피하기 위해 믿음이 좋은 크리스천이 되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이런 노력은 나를 자연스럽게 번영신학의 늪에 빠지게 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믿음이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어머니의 병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잘못된 생각과 믿음을 제대로 보게 된 것이다. 이렇듯 고통은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한 숨은 생각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해 주었다.그동안 성취한 신학 학위와 풍부한 사역의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스스로 꽤 괜찮은 신앙을 가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믿음의 길잡이는 예수님과 나의 인격적이고 실제적인 관계보다도 내 안에 축적되어 있던 신학적 지식들이었다. 어머니의 병과 죽음 이전에 나는 이런 사실을 인식하지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말 감사하게도 고통이 내 삶 가운데 들어온 이후로, 나는 마음속 믿음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성장에 감사하다욥이나 내 주변에 존재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는 여전히 하나님이 왜 어머니에게 고통과 죽음을 허락하셨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그 시간 속에서 애통하는 동안 하나님은 내 안에 숨어 있던 비틀어진 복음을 마주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부끄러움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더 크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잘못된 견해를 하루라도 빨리 깨닫게 하시고, 고통을 통해 나를 다듬어 가심에 감사한다.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 감사한다. 더불어 이 모든 사실들을 지금 알게 하신 것에 감사한다. 또 나를 여전히 교회의 사역자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하고, 나의 비뚤어진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이 잘못된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 주신 은혜에 감사한다. 비록 나는 하나님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지만, 수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나를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y Hidden Trust in the Prosperity Gospel번역: 김형용
영성
신앙과소명
번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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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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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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