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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는 무엇을 위해 기도했을까?
by John Piper
2018-12-03
초대교회는 하나님이 그 백성들의 원한을 풀어 주시기를 기도했다.“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눅18:7).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해 주시기를 기도했다.“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하나님이 주신 말씀의 검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엡 6:17-18).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열어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엡 6:18-19).“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행 4:29).기적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했다.“주여 이제도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행 4:29-30).“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18).병든 자들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믿지 않는 자들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기도했다.“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누워 있거늘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매”(행 28:8).귀신을 쫓아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막 9:29).기적적인 구출을 위해 기도했다.“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행12:5).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행 12:12).“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행 16:25-26).죽은 자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했다.“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행 9:40).그의 백성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기를 기도했다.“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전략적인 지혜를 주시도록 기도했다.“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지도자를 세워 주시기를 기도했다.“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행 14:23).일할 사람을 보내 주시기를 기도했다.“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8).“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 13:2-3).다른 선교사들의 성공적인 사역을 위해 기도했다.“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롬 15:30-31).공동체의 연합과 화합을 위해 기도했다.“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만나서 격려할 수 있도록 기도했다.“우리가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 함이라”(살전 3:10).총명한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빌 1:9-10).하나님의 뜻을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골 1:9).하나님을 더 잘 알도록 기도했다.“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그리스도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위해 기도했다.“이러므로 내가 ...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너희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엡 3:14-15, 18-19).더 깊은 소망의 확신을 갖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8).능력과 오래 참음을 위해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9-11).그들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크신 능력을 깨닫도록 기도했다.“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6, 19).그들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했다.“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눅 21:36).더 큰 믿음을 주시기를 기도했다.“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막 9:24).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했다.“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마 6:13).“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마 26:41).하나님이 그들의 결심을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했다.“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그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기도했다.“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골 1:9-10).죄를 사하여 주시기를 기도했다.“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악한 자에게서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했다.“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at the New Testament Church Prayed For번역: 매일배움
역사
초대교회
존파이퍼
기도
무엇
믿음
복음
능력
기적
소망
우리의 신앙을 대중과 나누는 방법
by Tim Keller
2018-12-03
대학 시절에 나는 기독교 문학을 읽는 동아리에 참석했다. 거기에는 ‘의심하는 사람을 환영합니다’(Doubters Welcome)라는 제목의 소책자들이 있었다. 처음에는 그 제목에 놀랐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믿음에 대해 의심하는 크리스천을 보면 눈살을 찌푸렸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성경을 공부하면서 점차 균형 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만일 의심의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믿음의 도약을 이루기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인내와 자비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시 그 동아리에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적이고 의심하는 학생들이 초대되었고, 우리는 항상 크리스천과 비기독교인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갔다. 이후로 나는 항상 그와 같이 크리스천이 아닌 혹은 기독교 신앙에 의심을 가진 사람들과 어울러진 교회를 만들 수 있기를 소망했다.리디머장로교회(Redeemer Presbyterian Church)의 첫 모임 장소는 집이었다. 그 후 공공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고, 1989년 9월에 마침내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세상과 접촉하는 일’은 시작부터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였다. 리디머교회의 중심 가치 중 하나는 비기독교인 혹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자들에게 질문을 받고, 그들의 의심과 어려움을 존중하며, 또한 그들의 씨름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리디머교회 역시 해가 지남에 따라 그 일에 대한 내성이 생겼다. 하지만 우리는 이 교회가 불확실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질문을 적극 환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했다. 리디머교회는 세 개의 캠퍼스로 확장되었고, 각 교회의 목사와 지도자들, 그리고 직원들은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했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회중이 더 나은 청취자가 되고 자신있게 스스로의 믿음을 나누는 자들이 되도록 훈련의 기회도 열심히 제공했다.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는 이유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지 말 것을 강요하는 세속적인 시대에서, 자신을 크리스천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현대 문화에서 인식하는 신앙의 역할은 개인의 정서에 평안을 안겨주는 것이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변화시키는 거듭남이 전혀 아니다. 달리 말해,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복음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적대적인 반응을 갖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그래서 뉴욕 같은 대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친구나 이웃, 혹은 직장동료에게 자신의 믿음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을 받으면 당혹감을 느낀다. 즉, 도시인들은 대중을 향해 복음을 전파하기 어려운 문화 속에 살고 있다.그러나 리디머교회의 경우, 초창기부터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 바로 교회의 성도가 그들의 직장동료나 이웃에게 스스로를 크리스천이라고 공개하는 일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리디머교회는 대중을 향한 우리의 나아감을 계속해서 이어가고자 노력하고 있고, 이러한 정신을 꾸준히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과정은 때로 불편하고 어렵다. 동시에 비기독교인들의 요구 못지않게 기존 성도의 요구도 충족시켜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러나 외부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필요를 한발 양보하는 마음과 훈련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편협하고 자기 방어적이며 결국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이처럼 대중과 신앙을 나눌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복음이 가져다 주는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증인의 삶을 살아가게 하는 엄청난 힘을 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경이로움을 말하지 않을 수 있는가!둘째, 복음의 본질인 겸손은 우리가 비기독교인에게 나아갈 때, 우월감이 아닌 존경심을 가지고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선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비기독교인들에게 우리보다 나은 지혜와 자비를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셋째, 복음을 경험한 사람은 타인의 거부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은 복음을 전하는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 행위는 바로 비기독교인들과 관계를 맺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들이 교회로 나아올 수 있도록 관심을 갖는 것이다. 크리스천들은 전도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적으로 혹은 비인격적으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믿음을 공유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 믿음과 삶을 공유한다. 이런 복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강력하게 나타날수록, 교회는 비기독교인들을 자석과 같이 강력하게 이끌 수 있다(행 2:47).대중에게 다가가는 방법그렇다면, 우리는 실제로 이 일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첫째, 권위적이기보다는 지성적인 접근으로 믿음에 대해 나눠야 한다. 우리는 신앙 없음이 어떤 종류의 마음 상태를 의미하는지 깊이 고민해야 하고, 또 사람들이 단순히 진리에 대해 듣기만 하면 믿음을 갖게 되리라는 기대를 버려야 한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은 ‘왜’ 믿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다.둘째, 우리는 단번의 행사로 복음을 제시하는 접근이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과정’을 제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복음에 노출될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복음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제공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속한 상황 안에서 기독교에 대한 답을 찾아가도록 도울 수 있다.셋째, 우리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전제주의적’(presuppositional) 접근을 취해야 한다. 여기서 전제라고 함은 모든 사람, 심지어 회의론자들도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있다는 것이다(롬 1:18-25). 그러므로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진리에 대한 통찰력, 즉 하나님에 대한 단서를 그들 안에서 찾도록 도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여 어떻게 하면 그들이 창조자에게 돌아갈 수 있는지 그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과정’에 있던 한 사람이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막 9:24)라고 고백할 때에 따뜻하게 화답하셨다. 우리의 공동체도 이와 같은 고백을 들을 수 있기를 원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서 이런 일들을 해야 하는가? 어느 곳에서든 해야 한다. 리디머교회는 신앙에 회의적인 사람들을 위한 안내 매트(Doubters Welcome mat)를 모든 예배와 모임에 비치해두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듣고 또 나누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예배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들로 행해져야 한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이 예배 후에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공부와 활동을 제공함으로써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더 나아가 우리는 신앙 연수와 상관없이 누구나 서로 참여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여러 모임과 행사를 늘 사람들에게 열어 둔다.신앙을 대중에게 드러내도록 교인들을 훈련시키는 일은 곧 세상에 있는 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신앙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과 같다. 다시 말해, 이 훈련은 우리가 대중 지향적인 공동체가 되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수시로 나눌 수 있게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함께 기도하고, 동료들의 의구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들이 마침내 복음의 소망에 빠져들도록 해야 한다. 대중을 향해 나아가는 공적 신앙(Public Faith)은 건강한 크리스천의 결정적인 모습이다.리디머교회는 믿지 않는 자들과 떨어져 사는 것이 어려운 대도시에서 사역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을 받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 도시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자연스럽게 믿지 않는 친구들을 사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갖기 때문이다. 리디머교회는 그 출발부터 교인들이 “만약 내가 믿지 않는 친구들을 우리 교회에 데려온다면, 그들은 기독교가 얼마나 강력하고 합리적인지를 보고 놀랄 것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소원해 왔다. 우리가 이러한 생각과 행동을 계속해 나간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계속해서 변화시킬 것이다.참고공적 신앙(public faith)은 진정성 있는 관계를 전제한 개념으로서 우리 자신만의 사회적 · 영적 안전 지대를 넘어서는 신앙을 가리킨다. 궁극적으로 공적 신앙은 성령님이 우리의 관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신다고 믿는 태도이다. 비록 많은 크리스천들이 고립적인 혹은 개인적인 신앙인에 머무르지만, 우리는 모두가 더욱 공적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란다.개인 신앙(private faith)을 가진 사람은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 가깝게 지내지만 개인적으로 그 친구들에게 믿음을 솔직히 드러내지는 않는다. 고립 신앙(secluded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이 많지만,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은 거의 없다. 따라서 크리스천 공동체 안에서는 믿음을 드러내지만,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신앙을 나누는 일이 거의 없고 그들에 의해 도전을 받을 일도 없다. 공적 신앙(public faith)을 가진 사람은 크리스천 친구들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믿음을 가진 친구들과도 가깝게 지낸다. 또한 겸손하고, 따뜻하며, 대중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모든 이들과 나누고자 한다. 그리고 여러 친구들로 구성된 다양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ublic Faith-How to Share the Hope You Have in Christ번역: 김형용
복음
변증
우리의신앙
리디머장로교회
대중
크리스천
복음의본질
공적신앙
종교적신념
공동체
종교개혁 이전의 복음중심적 신학
by Gavin Ortlund
2018-11-30
최근 복음주의자들이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로 개종하는 일들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나 훈련을 받지 않은 자들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 중에는 신학을 공부한 목사와 교수, 그리고 복음주의신학회(The Evangelical Theological Society) 회장까지 포함되어 있다.물론 이 현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다. 개인의 경우는 각기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종종 회자되는 이유 중 하나는 로마 가톨릭이나 동방 정교회가 제공하는 깊이 때문이다. 침례교인이었던 어떤 사람은 ‘나는 왜 가톨릭 신자인가’(Why I’m Catholic)라는 웹사이트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 일을 교회사의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사건으로 설명했다. 한때 장로교인이었던 어떤 이는 ‘교제로의 소명’(Called to Communion)에서 자신이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된 일을 ‘정통 기독교’로 입문하는 과정으로 표현했다. 또 영국 성공회의 신자였던 한 사람은 ‘정교회로의 여정’(Journey to Orthodoxy)에서 동방 정교회의 예배 형식을 통해 사도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일이 얼마나 복된지를 묘사했다.개신교 진영 내부에서도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은 교파(가령 중도파에 해당하는 영국 성공회)로 이동하거나 예배와 영성에 있어 더욱 전통적인 형식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나보다 젊은 개신교 친구들도 대부분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를 신앙 서적으로 애독하지만,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의 책은 보려 하지 않는다. 찬송가 작사가 늘어나는가 하면, 많은 복음주의자들도 전통적인 형식을 강조하는 예배 달력(the liturgical calendar)에 흥미를 느끼고 있다.이러한 흐름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무엇보다도 포스트모던 세대들의 정처 없는 삶과 불안감이 주된 요소라고 생각한다. 현세대의 한 가운데에는 깊은 허무감, 고립감, 단절에 따른 불안감이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고전적이고 장엄한 것에 대해, 초월적이고 전통적인 것에 대해, 그리고 안정적이고 견고한 것에 대해 동경하는 마음을 품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복음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있다.올해 스물 아홉 살인 나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겪는 방향 상실, 다시 말해, 인생을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이 시대의 방황에 대해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립하기 위해 복음주의를 포기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 역사적 뿌리에 대한 목마름은 개신교와 복음주의에서도 충분히 만족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가톨릭(Catholic) 신자가 되지 않고도 공교회적(catholic) 신자가 될 수 있고, 또한 정교회(Orthodox) 신자가 되지 않고도 정통적인(orthodox) 신자가 될 수 있다.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한 복음중심적 사역’(gospel-centered ministry for the next generation)을 추진할 때, ‘복음적인’ 신앙과 ‘역사적인’ 신앙, 혹은 ‘복음중심적’ 사역과 ‘역사중심적’ 사역을 함께 추구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복음중심성(gospel-centeredness)은 그 자체가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복음주의자들과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사오늘날 복음주의자들이 사도 요한과 마틴 루터 사이의 교회 역사를 얼마나 안다고 생각하는가?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은 마치 교회사의 중요한 내용들이 1세기에서 갑자기 16세기로 건너뛰며 전개된 것처럼, 그 중간의 역사를 무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우리는 어거스틴(특히 그의 ‘고백록’)의 중요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일찍이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을 둘러싼 주요한 논쟁들이 있었다는 사실과 일부 용감한 순교자들이 그 논쟁들 배후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가끔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의 설교나 클레르보의 버나드(Bernard of Clairvaux)의 시를 감상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도 자주 우리의 전통이 지난 2 천 년에 걸친 견고한 역사라기보다, (몇몇 선구자들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의) 약 5백 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의식에 친숙하지 않은 시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9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언어가 아니라 실재하는) 복음중심성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을까? 오늘날 우리가 지지하는 목회 방식은 교회사 전체와 어떻게 연관될 수 있을까?오늘날 개신교인들이 이런 질문들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경향은 초기 종교개혁자들이나 개신교 진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사실 종교개혁자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개혁을 추구하는 것이지 재창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또한 참된 복음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일이 결코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루터나 투레틴처럼) 심지어 로마 가톨릭 신학에 대해 가장 공격적이었던 비판가들조차 하나님은 거대한 부패와 타락의 시대에도 항상 자신의 백성들을 지키셨음을 주장했다.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이 반종교개혁(the Counter-Reformation) 신조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어거스틴과 교부들에게 호소했을 때, 칼빈은 “누가 어거스틴과 교부들에 대해 신경이나 쓰는가?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종교개혁 신학과 교부 신학 사이의 연속성을 수립하기 위해 교부들을 열심히 연구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라는 모토는 성경이 최고의 권위임을 의미하지, 다른 것들이 무가치하다는 의미가 아니다.가족 앨범나는 개신교인으로서 종교개혁 신학이 복음을 수호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동시에 건실한 개신교인으로서 중세 기독교의 좋은 가르침을 배우는 일 역시 가능하다고 믿는다. 교회는 성곽들과 성당, 수도사와 수도원, 활과 창,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시대 동안 완전히 침체되어 있다가,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함께 갑자기 재부상한 것이 아니다. 까에드몽(Caedmon)과 샤를마뉴(Charlemagne) 및 초서(Chaucer)의 바로 곁에서 면면히 이어져 온 견고하고 안정된 기독교의 줄기가 존재한다. 수많은 전진과 후퇴, 부패와 개혁의 역사 속에서도 예수님은 항상 교회를 세워 오셨기 때문에(마 16:18; 사 42:4), 우리는 중세 신학으로부터도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그들의 가르침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기독교 후기 시대, 곧 방향을 잃고 헤매는 문화적 상황 속에서 좋은 목회 자료로 쓰일 수 있다.물론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프로테스탄트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는 위험한 일도 발생할 수 있다. 또 한편, 특정 교단의 가르침에만 고립되면 전체적인 기독교 전통과의 연결점을 상실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는 균형 있는 역사적 정체성이 필요하다. 우리는 불연속적인 부분을 인식하고 겹치는 부분들은 장려하면서, 최근의 5백 년과 그 이전의 1천 5백 년 양자에 모두 연결되어야 한다. 교부 시대의 어느 아프리카 신자가 한 말이 이를 잘 설명해 준다. “나는 기독교인이며 기독교에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이질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이 말이 종교개혁 이전 교회사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를 정확히 집어 준다고 생각한다. 이는 우리가 받은 유산과 정체성의 일부이다. 여기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는 가족 사진들이 정리된 앨범이다. 가족 앨범에는 다양한 사진들이 존재한다.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사진이 있는가 하면, 친척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운 삼촌과 함께 찍은 사진도 있다. 혹 결점과 흠, 또는 다른 문제들이 있더라도 나의 가족은 여전히 나의 가족이다. 나 자신을 그로부터 끊어내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나는 그들 없이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종교개혁 이전의 역사에 대해 인식하려면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까? 마크 놀(Mark Noll)의 ‘전환점: 기독교 역사의 결정적인 순간들’(Turning Points: Decisive Moments in the History of Christianity)이라는 책의 첫 여섯 장이 2차 자료로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도 세 개의 1차 자료들을 여기서 언급하고자 한다. 이 작품들은 모두 오늘날 개신교인들에게 널리 읽힐 만한 가치가 있는 고전적인 신학 자료들이다.1. 보에티우스(Boethius)의 ‘철학의 위안’(The Consolation of Philosophy)이 책은 교회사를 통틀어 가장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거의 잊혀졌다. 이에 대해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약 2백 년 전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이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발견하기란 어려웠다. 이 책에 맛을 들이는 것은 중세 시대에 동화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보에티우스가 524년 처형을 기다리는 동안 운문과 산문의 교차 형식으로 작성했는데, 여기서 그는 고통과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주제들을 탐구하고 있다. 5권에서는 하나님의 예지와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고전적 난제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논의만으로도 이 책은 읽을 가치가 충분하다.2. 그레고리 대제(Gregory the Great)의 ‘목회지침서’(The Book of Pastoral Book)칼빈은 이 책의 저자인 그레고리 대제(약 540-604년)를 본받을 만한 마지막 교황이라고 불렀다. 이 책은 목회신학의 고전으로서 모든 목회자들이 일독할 필요가 있다. 그레고리 대제의 주장에 따르면, 목회는 내면적 특성과 외면적 특성, 즉 이론과 실천, 명상과 활동, 금욕과 행정, 초월적 거룩함과 세속적 지혜 사이의 미묘한 균형을 요구한다. 이런 면에서 그의 글은 한 영역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강한 목회자들에게 유익한 일깨움을 준다. 이 책의 좋은 번역본은 초기 기독교 사상을 접하는 데 훌륭한 자료 역할을 하는 블라디미르신학교의 교부학 시리즈(Popular Patristics Series)에서 찾아볼 수 있다.3. 안셈(Anselm)의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안셈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기 위해 ‘존재론적 증명’을 제안한 인물로 유명하다. 이 책에 담긴 풍부한 신학과 열정적인 기도는 본 작품을 매우 유익한 읽을거리로 만든다. 나의 박사 학위 연구는 24-25장에서 안셈이 말한 천국 교리와 관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책에 대한 나의 기쁨과 놀라움이 바로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동기이기도 하다. 그런 차원에서 끝으로, 종교개혁 이전의 신학 작품들을 평가절하하는 이들에게 이 말을 하고 싶다. 잘 번역된 프로슬로기온을 찾아서 “들고 읽어라!”(tolle le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Searching for Gospel-Centered Theology Before the Reformation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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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일곱 가지 이유
by Dennis Johnson
2018-11-30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무엇일까? 만일 내가 지금보다 어린 나이에 이 질문을 받았다면, “예수님의 재림 시점을 알도록 도와주시기 위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또는 “중동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해”, “대환난에 대한 악몽을 일깨움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휴거를 놓치지 않게 하시려고”, “크리스천에게 논쟁거리를 제시하시기 위해”, 또는 그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시려고”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이들과는 다르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계시를 준 이유는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곧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은혜를 주사, 우리의 마음을 견고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에서 하나님은 (상징적으로 의미심장한 횟수인) 일곱 차례에 걸쳐 복을 약속하신다. 그 약속은 계시록의 메시지를 듣고 지키는 자들에게(계 1:3; 22:7), ‘주 안에서’ 죽은 자들에게(계 14:13), 방심하지 않고 깨어 있는 자들에게(계 16:15),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들에게(계 19:9),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계 20:6), 그리고 어린양의 피로 옷을 씻는 자들에게(계 22:14) 주어지는 복이다.계시록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계획에 대한 우리의 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는 매일의 삶에서 직면하는 영적 싸움에 승리하도록 우리를 무장시키기 위함이다. 내가 쓴 계시록 주석인 ‘어린양의 승리’(Triumph of the Lamb)의 말미에서, 나는 “이 책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아래 내용은 이 물음에 대한 나의 대답이다. 1. 계시록은 현재 상황의 이면을 제대로 보도록 도와준다흔히 우리는 정치적, 경제적 추세나 세계적인 위기 상황에 관한 뉴스에 근거하여 오늘날 진행되는 ‘전쟁’을 평가한다. 그러나 계시록의 환상들이 보여주는 역설은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고후 5:7)한다는 진리를 상기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기력한 어린양을 도살하는 사건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다 사자의 승리였다(계 5:5-10). 신실한 순교자들이 피를 뿌릴 때는 대적들이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계 11:7; 13:7), 순교자들은 사탄을 물리친 진정한 승리자들이었다. 곧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계 12:11) 아니하였다.2. 계시록은 대적들의 정체를 드러낸다우리의 대적은 생각보다 더 강하고 교활하다.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계 12:9). 그러나 여자의 후손이 와서 그 뱀을 물리치고 승천하셨다(계 12:5). 그러므로 사탄은 더 이상 참소하지 못한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그의 참소를 중단시켰기 때문이다(계 12:10-11). 십자가 사건으로 패배한 사탄은 지상의 교회에 그 분노를 터트린다(계 12:12-17). 그의 무기는 격렬한 핍박(짐승), 그럴 듯한 기만(거짓 선지자), 그리고 기만적인 쾌락(음녀 바벨론)이다. 따라서 강한 정부나 거짓 종교 또는 사치스런 방종이 ‘구원자’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지 말라. 이들은 당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계시록의 상징은 이처럼 사탄이 사용하는 무기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3. 계시록은 챔피언인 그리스도를 참된 영광 가운데 계시한다 제목이 말하듯이, 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다(계 1:1). 계시록은 예수님을 계시하고 우리의 마음과 소망이 그분을 향하도록 이끈다. 예수님은 계시록에 등장하는 모든 극적 장면의 영웅이시다. 또한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신성한 영광으로 빛나는 인자이시다. 자신의 부활로 사망의 열쇠를 움켜잡고 교회들 가운데 거하신다. 또 죽임을 당함으로써 승리한 분이고, 세계 만민을 구속하신 유다의 사자이시다. 또한 그는 모든 피조물로부터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천군의 대장으로서 대적들을 물리치고, 성도들을 보호하며, 용과 짐승들을 마침내 멸하신다. 우리의 챔피언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라는 약속으로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진다(계 22:20). 이에 대하여 우리는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화답한다(계 22:20). 4. 계시록은 참된 아름다움 가운데 우리의 모습을 보게 해 준다아시아 교회들에게 보낸 예수님의 메시지는 그분이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정확히 지켜 보시며(계 1:14; 2:18), 우리의 신실함을 칭찬하는 동시에 허물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계 2-3장). 이 세상의 교회들이 완전하지 않은 모습으로 있을지라도, 우리의 신랑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처럼 우리를 준비시키시며,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계 19:8) 입히기까지 쉬지 않으신다(계 21:2). 이처럼 계시록은 다가오는 결혼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까닭에 우리는 장차 온전해질 아름다움을 추구하게 된다(요일 3:2-3).5. 계시록은 고난 가운데 인내를 요청한다계시록의 원래 독자는 신앙 때문에 고난받는 크리스천들이었다. 그들은 궁핍, 비방, 투옥, 심지어는 죽음을 겪었다(계 2:9-10, 13).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받게 된 사탄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역사를 완결하실 때까지 성도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는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전쟁을 피하는 삶이나 고통 없는 인생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그분은 “세세토록” 살아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신다(계 1:18). 이 약속을 믿는 우리는 인내를 요구하는 왕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계 1:9; 2:2-3, 10, 13, 19, 25; 3:8, 10; 13:10; 14:12).6. 계시록은 타협이 오더라도 순수함을 지키라고 요청한다21세기의 여러 교회들처럼, 1세기의 어떤 교회들은 핍박보다 더 교묘한 위협에 직면했다. 사탄이 거짓 교훈을 퍼뜨려 성도들을 현혹시키려 한 것이다(계 2:15, 20). 또한 물질적 위안이 부르는 세속주의나 주변 문화로부터 유입되는 이교주의도 유혹적이었다(계 2:14; 3:17). 이처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교활한 공격은 지금 우리에게도 가해지고 있다. 쾌락과 번영을 우상화하는 마귀의 거짓에 대항하여, 계시록은 흰옷 입은 어린양의 신부가 될 자들에게 순전한 마음과 생활을 지키라고 요청한다(계 3:4-5, 17-18; 7:9, 14; 14:4; 19:7-8; 22:14-15). 7. 계시록은 우리가 복음을 증언해야 한다고 가르친다인내로써 순전함을 지키라고 요청하는 계시록의 당부는 그저 위험한 세상을 피하여 벙커에 숨으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증언하라는 계시록의 가르침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순교자’를 뜻하는 영어 martyr는 ‘증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티스’(계 2:13)에서 유래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섬에 있었다(계 1:9).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언하고 자신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는 증인으로 묘사된다(계 11:4-12). 그리스도의 증인들은 소심하게 침묵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만유의 주이심을 담대히 선언함으로써 고난 당하는 자들이다. 우리의 증언을 통해, 하나님은 계시록 7장의 환상을 성취하신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계 7:9-10).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이유는 가르침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키시기 위함이다. 계시록은 우리의 상황, 대적, 챔피언, 그리고 우리의 참된 정체성을 통찰하게 해 주며, 또한 순전한 소망 중에 인내하며 용기 있게 복음을 증언하도록 우리를 격려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even Applications of Revelation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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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에 대처하는 잘못된 반응
by Ashley Chesnut
2018-11-30
삶이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홀리(Holly)는 그녀가 싱글맘으로서 직면한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책임감 때문에 외롭고 지쳐 있었다.우리가 만났던 날, 최근 서른이 된 제시카(Jessica)는 비슷한 또래의 크리스천 싱글맘을 만난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그녀는 내가 독신으로서 고생하고 있는지에 대해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녀는 자기가 느끼는 외로움과 고통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원했던 것이다.이러한 대화는 주로 싱글인 사람들과 나누게 되지만, 외로움을 느끼는 대상은 비단 그들만이 아니다. 전업주부로서 하루 종일 아기를 돌보는 엄마도 외로움을 느끼고, 가정에서 홀로 신앙생활하는 10대도 외로움을 느낀다. 또한 선교사도 사역지에서 언어와 문화 때문에 외로움을 느낀다.외로움은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외로움이 삶에 불쑥 찾아온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여기서 나는 외로움에 대한 잘못된 반응들을 소개하고자 한다.1.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다본질적으로 우리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느끼고 관찰하며 고민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왜’ 그런 식으로 느끼는지를 인식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신학생 시절에 한 상담학 교수는 모든 감정은 신학적 표현이라고 말하곤 했다. 당신의 외로움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 그리고 현재 상황과 어떠한 연관이 있는가? 당신이 현재 갖고 있지 않지만 소유하기를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외로움의 뿌리가 될 수 있는 당신의 생각과 믿음에 대해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라.2.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대응한다외로움 그 자체는 죄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죄를 범할 수 있다.우리 교회에 출석하는 한 여성은 자신의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포르노와 자위, 그리고 지나친 의존 관계(codependent relationship)를 선택했다. 이 지나친 의존 관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외롭다고 느끼기 때문에, '내 사람'이라고 생각되는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감정이 생겼다. 그는 동성일 수도 있고 이성일 수도 있지만, 그가 누구이든 내가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나는 그가 내 외로움을 달래주고 만족시켜주면 좋겠다. 또한 나 자신을 중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고, 나를 위로해주기 원한다. 나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의존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붙잡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그런데 결국 이런 관계는 우상이 되었고, 그는 나에게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대상이 되었다.그리고 포르노와 자위에 대한 생각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나는 지루하고 외롭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감정을 진정시킬, 최소한 한동안 지연시킬 무엇인가를 찾을 것이다. 나는 스크린 속에 있는 사람이 나를 원하고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나를 위로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는 스스로 나를 자극해서 위로할 것이다.우리는 외로움을 느낄 때, 하나님 대신 사람이나 다른 무엇으로 관심을 돌리기 쉽다. 따라서 절망에 빠지려는 유혹, 건강하지 않은 관계의 추구, 자위, 하나님을 향한 분노 등 외로움이 부르는 건강하지 못한 행위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죄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방어벽을 쳐야 한다. 책임감을 갖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한다.3. 진리를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의 감정은 죄로 더럽혀져 있다. 따라서 단지 우리가 무엇을 느낀다고 해서 그것이 곧 사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감정은 무조건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고 검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당신이 외로움을 느낄 때, 무엇이 진리인지를 스스로 생각해보라.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신다. 하나님은 당신을 절대로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신 31:6).하나님은 당신이 어떤 느낌을 받는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매달릴 때 외로움의 고통을 느끼셨다(마 27:46; 사 53:3).하나님은 위로의 아버지시다(고후 1:3-4). 당신이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은 당신을 위로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신다(시 34:18).하나님은 당신의 상황과 고통에 엄청난 목적을 가지고 계신다(롬 8:28). 그 목적은 철회되지 않는다.이런 사실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알아야 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외우고, 스스로에게 설교하라.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으로 당신의 외로움을 즉시 해결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한다. ‘외로움의 길’(The Path of Loneliness)에서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외로움이 항상 치유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질 때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뀔 수가 있다. 외로움은 마치 귀중한 보물이 묻혀 있는 밭과 같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밭을 사야 한다. 혹 그 밭이 아름다운 초원이 아닌 황량하고 텅 빈 벌판일지라도, 거기에 보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주변의 모든 그림은 변하게 된다. 버려진 찌꺼기와 같이 잊혀진 그 땅은 갑자기 가능성이 가득한 장소가 된다. [중략] 이처럼 외로움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이는 행위을 통해, 전에는 아무도 원치 않는 잊혀진 땅과 같았던 외로움은 이제 보물이 숨겨진 장소로 변하게 된다.”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 또 당신을 선한 길로 인도하기 위해 외로움을 아름다운 경험으로 바꾸실 수 있다. 따라서 외로움을 하나님께 맡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야 한다. 만일 또 다른 외로움이 닥친다면, 당신의 구원자이고 친구가 되시는, 사랑 많으신 예수님께 그 외로움을 가지고 나아가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Unhealthy Responses to Loneliness번역: 김형용
생활
감정
외로움
인식
위로
진리
엘리자베스
용기
죄성
방어벽
진정한 개혁
by Burk Parsons
2018-11-29
각성(Awakening)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우리를 신앙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첫걸음이다. 각성은 주권적이고 은혜로운 하나님이 행하시는 강력한 일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는, 단순히 잠에서 깨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깨우신다. 각성은 중생과 부흥 및 개혁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영광스러운 일이다.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울 때에는 먼저 마음을 되살리고 거듭남의 선물을 주어서 결국 우리가 생명을 누리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살아 있으라!”라고 말씀하신다(겔 16:6). 그러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의 영혼을 정복하고 설득하신다. 성령은 완고하고 자기를 신뢰하는 돌 같은 우리의 마음을 뜯어내고 새롭게 하여 살아 있는 마음으로 바꾸신다. 이 새 마음은 기꺼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려는 마음이고, 그 아버지의 뜻에 부드럽게 반응하려는 마음이며,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 사랑의 노예가 된 마음일 뿐만 아니라 성령이 거하시는 마음이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는, 단일한 영혼의 부흥이든, 가정의 부흥이든, 공동체의 부흥이든, 아니면 어느 민족의 부흥이든 항상 부흥의 결과가 따라온다. 하나님이 부흥을 일으킬 때, 그분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는 깊은 회개를 하도록 만들어서 믿음과 회개 및 순종의 삶으로 인도하신다. 하나님이 일깨울 때, 그분은 참되고 오래도록 지속되는 개혁, 곧 개인과 가정과 교회의 개혁을 일으키신다. 그러나 우리는 각성을 계획할 수 없으며, 또한 각성을 일으키는 피상적이고 정형화된 계획을 세우려는 시도도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각성은 오직 하나님이 그 일을 작정하실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Jones)는 “부흥은 결코 광고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항상 스스로를 광고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자신의 주권적인 계획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자신이 원하실 때, 자신이 원하는 대상에게, 그 선한 뜻에 따라 각성을 일으키신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각성을 작정하는 것처럼, 각성의 방편도 정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의 목적을 주권적으로 작정할 뿐 아니라, 모든 목적의 수단까지도 정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깨우고자 정하신 방편들은 정기적인 주일 예배, 그리고 매일의 은혜 가운데 우리의 성장에 필요한 통상적인 수단들을 가리킨다. 즉,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세례와 성찬으로 행해지는 성례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이다. 이는 성령이 참된 회심, 참된 부흥, 참된 개혁을 일으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수단들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우리를 각성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 자신의 계획과 전략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과 바로 그 통상적인 은혜의 방편들을 통해 발현된다. 이때 우리는 코람 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그 얼굴 빛이 우리에게 비췬다는 약속을 의지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이 자신의 주권적인 지혜를 따라 그분이 기뻐하는 일을 정확하게 행하실 것을 신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rue Reformation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종교개혁
진정한개혁
부흥
각성
가정에서의 세계관
by John Tweeddale
2018-11-29
오랫동안 크리스천들은 가정을 삶의 중심으로 보았다. 가정은 큰 꿈을 가진 우주 비행사를 키우는 육아실이고, 영웅이 되고자 하는 자를 위한 놀이터이며, 미래의 여행가가 즐기는 성소이다. 또 가정은 두서 없는 대화, 커다란 웃음, 정성스런 식사, 견디기 힘든 시련, 많은 고된 일들을 통해 덕을 일구는 장소이다. 당신이 읽기를 배우는 어린이이든, 기숙사에 들어간 대학교 신입생이든, 이제 막 결혼해서 처음으로 아파트에 입주한 신혼부부이든,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이든, 여러 명의 아이를 키우는 요란한 가정에 속해 있든, 아니면 배우자 없이 인생을 항해하는 과부이든, 가정의 위안은 우리 삶의 안정제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 가정은 천국이 아니라 지구상의 지옥과 같다. 가정이 학대와 폭력과 조종의 가마솥인 경우, 그곳은 피신처가 아니라 달아나야 할 감옥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따뜻함의 경험은 고사하고 가정을 피난처로 삼아 본 경험이 전혀 없다. 크리스천들은 가정의 가치를 논의하면서, 타락의 죄책과 부패가 가족과 이웃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더불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다른 곳이 아니라 ‘우리의 거처’이신 하나님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시 90:1). 가정에 관한 신학을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두 가지 상반되는 오류들이 있다. 먼저는 가정 역시 타락한 세상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 안에서의 삶이 ‘모든 것’이라고 여기는 착각이다. 이런 생각을 가질 때, 그릇된 종말론에 빠지는 죄를 짓게 된다. 우리는 교회의 회중석을 채워야 하고, 세상의 대로로 나가는 모험도 해야 한다. 지상명령에 나오는 “가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정이라는 조용한 거처 속으로 숨고 싶은 유혹을 받는 이들에게, 가정에 안주하는 것은 자신의 취향과 전통에 따라 천국을 잘못 이해하는 행위임을 알려 준다. 우리가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8:36). 아브라함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야 한다(히 11:10).우리가 가진 한 가지 오류가 이처럼 가정을 이상화 곧 우상화하는 것이라면, 피해야 하는 또 다른 오류는 가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가정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적인 공간에서의 삶이 공적으로 행하는 활동과 (거의) 무관하다고 믿는 치명적인 함정에 빠진다. 그럴 때, 사적인 신념과 성품은 공적인 정책이나 생산과 무관하게 된다. 그 결과,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하는 일은 사업장에서의 성공과 무관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크리스천은 기도하는 골방이나 식사하는 식탁과 같은 사적 영역이 다른 모든 공적 영역의 탁월한 삶을 위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생산성은 경건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앞에서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나누는 장벽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요 34:21).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거룩하게 행동해야 한다(벧전 1:15).가정은 무분별한 욕구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장소가 아니다. 단순히 전통적인 가치를 보존하기 위한 보루도 아니다. 가정의 주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가 되는 것이다. 덕성을 함양하는 장소란 사적인 존재로서의 우리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또한 우리의 공적인 일을 촉진시켜 주는 공간을 의미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가정들에게 편지를 쓸 때, 아내, 남편, 자녀, 주인, 종 모두에게 육신의 자랑을 제거하고, 그리스도의 덕목들로 옷을 입으며, 말과 행위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 가르쳤다(골 3:1-4:1). 그는 또한 에베소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정에 대한 가르침을 헌신 및 예배에 대한 가르침(엡 5:1-21)과 영적인 전투에 대한 가르침(6:1-20) 가운데 놓는다. 그리고 베드로는 가정에 대한 권면을 교회에 대한 논의와 함께 말하는데(벧전 2:1-11; 2:12-3:8), 이는 가정생활이 결코 교회생활로부터 분리될 수 없음을 상기시킨다. 이 땅의 천국인 가정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활짝 피어나는 곳이어야 한다. 여기서 믿음은 십자가에 달리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소망은 세상과 육신과 마귀를 이기는 복음의 능력에 대한 기대를 가리킨다. 또한 사랑은 영광과 아름다움이 끝이 없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의미한다. 타락한 세상을 사는 크리스천 가정은 낙관론에 뿌리 내려야 한다. 그리고 이 낙관론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나라에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가정은 문화적인 전쟁이 벌어지는 황량한 전장과 같다. 교회가 참된 복음을 옹호하고 세속주의와 싸우는 동안, 우리는 가정에서 덕을 지키는 일에 힘써야 한다. 교회가 언덕 위의 도시로 남기 위해서는, 복음의 빛이 가정에서부터 밝게 빛나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ldview at Home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문화
세계관
가정
우상화
덕성
천국인가정
믿음소망사랑
복음의빛
그릇된종말론
우리의거처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by Guy Waters
2018-11-29
예수님을 능수능란한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거나 일반적인 가정에 도전을 제기하는 놀라운 내용이 많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 자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는 방식을 그저 인정해주시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영원한 진리에 관해 우리가 자신의 확신을 재점검하도록 하기 위해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들은 우리를 안심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요하게 만든다.예수님의 혼인 잔치 비유도 그런 역할을 한다.잔치이 비유는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푼 왕에 관한 이야기, 곧 천국에 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마 22:2). 혼인 잔치는 성경의 보편적 의미를 함축한다. 바로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자기 백성들을 모으고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거룩과 기쁨 가운데 자신의 임재를 누리게 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왕의 명령에 따라 잔치 초대장이 발송된다. 그런데 왕이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한다(마 22:3). 그들은 여러 변명을 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보낸 종들을 함부로 대했기에 왕은 그들을 벌한다(마 22:5-7). 그리고 다시 종들을 파견한다.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대”(마 22:9).여기서 예수님은 복음이 먼저 유대인에게로, 그 다음 이방인에게로 전해진다는 사실을 설명하신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결정적으로 거부했다. 이 거부 때문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심판을 공포하시고, 결국 로마의 군대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파괴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유대인의 거부는 복음이 이방인에게로 확장되는 과정으로 연결된다. 그렇기에 여기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마 22:10)라고 말씀하신다.그런데 이 잔치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한다.왕이 손님들 가운데 “예복을 입지 않고”(마 22:12) 온 자를 발견한다. 이 사람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유를 전혀 말할 수 없다. 왕은 그에 대해 종말론적 심판을 거행하며 사환들에게 명령한다.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마 22:13). 예수님은 이 비유의 의미를 나타내는 한 마디의 경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신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청함을 받은 자바로 이 의미심장한 최종 선언을 이해하는 것이 이 비유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의 뜻은 무엇일까? 답을 얻으려면, 우리는 여기서 사용된 ‘청하다’와 ‘택하다’의 뜻을 이해해야 한다. ‘청하다’라는 단어는 이 비유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헬라어 본문에서 종들은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게”(마 22:3) 하도록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 청함 받은 사람들은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을 의미한다(마 22:4, 8). 종들은 이방인들을 ‘청하여’ 오게 하도록 명령을 받는다(마 22:9). 14절에서 “청함을 받은”으로 번역된 단어는 3, 4, 8, 9절에서 ‘청한’으로 번역된 단어와 동일한 단어군에 속한다.이 패턴을 알면, 비유에서 언급되는 청함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청함은 종들, 즉 구약성경의 선지자들, 더 나아가 신약시대의 사역자들을 통해 부르시는 일, 바로 하나님의 초대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듣는 자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들이 그러했듯이, 이 명령을 거부하는 일도 발생한다. 예수님은 청함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책임져야 할 과실이 있다고 교훈하신다.택함을 입은 자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 자들은 누구인가? 예수님은 그들을 “택함을 입은” 자, 즉 헬라어 의미에 따르면 선택된 자라고 부르신다. 이들은 성부가 그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고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자들이다(엡 1:4). 오직 택함을 입은 자들만이 그리스도가 영광 중에 돌아오실 때 구속된 무리에 속할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이 있어야 청함에 진심으로 반응하게 되는 것이다.그런데 신약성경의 다른 본문들은 청함을 곧 택함이라는 의미로도 표현한다(롬 8:30; 딤후 1:9). 그렇다면, 어떤 이들은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은 받지 않았다는 말씀이 무슨 뜻일까?답은 성경 저자들이 ‘청하다’라는 말을 언급하는 방식의 차이를 이해하는 데 있다. 즉,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청하다’를 외적 의미로 언급하신다. 이는 복음의 메시지를 통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청함은 사람들에게 회개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 나오라고 부르는 명령이다.또 성경 저자들은 ‘청하다’를 내적 의미로도 언급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4절에서 내적 부르심을 언급하는데, 이는 복음의 외적 부르심을 통해 그리스도의 성령이 내면에서 효과적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역사를 의미한다. 이 내적 부르심은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게 한다. 외적 부르심은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되지만, 선택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때에 내적 부르심을 경험하게 된다. 그들에게 복음은 실제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롬 1:16).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처럼 우리를 놀라게 하고 동요하게 만드는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에게 전달하시려는 교훈은 무엇일까?첫째, 하나님이 그의 메신저를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이를 거절하는 일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부르심을 거절한 자들에게 심판날에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절하는 교묘한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외적 부르심에 입술로만 반응하고, 그 부르심으로 제시된 예수님은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거절 역시,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한다.여기서 나쁜 소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마음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하나님이 불가항력적인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부르심을 거부하는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따라서 우리가 외적 부르심에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 때문임을 기억해야 한다. 성령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하신다. 구원은 오직 은혜의 결과이다. 어쩌면 이 사실이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 수 있지만, 예수님은 그 불안을 통해 우리가 진리를 보도록 이끄신다. 즉 오직 은혜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하도록 이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하고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Did Jesus Mean by ‘Many Are Called, But Few Are Chosen’?번역: 이주일
신학
신약성경
청함
택함
교훈
잔치
그리스도
고린도전서1장24절
구약성경은 부활 소망을 가르치는가?
by Mitch Chase
2018-11-28
사복음서, 사도행전, 서신서, 요한계시록에는 공통점이 있다. 주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을 무찌르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복된 소망을 선포한다는 점이다(고전 15:26). 어쩌면 부활 소망이 온전히 신약성경에만 속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망’의 줄기를 잡아당겨 보면, 그 뿌리가 구약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처음부터 자기 백성에게 부활 소망을 허락하셨다.모든 사람이 구약성경에도 부활 소망이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인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반박하셨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 죽은 자의 부활을 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를 읽지 않았느냐”(마 22:29, 31). 우리는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구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가르침을 통해 죽음을 이기는 생명의 하나님을 바라보셨다.육신의 부활미래에 일어날 육신의 부활에 대해 가장 분명하게 다루는 본문은 다니엘 12장 2절이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다.” 예수님과 바울은 이 본문의 가르침에 동의한다(요 5:29; 행 24:15).부활 소망에 대해 말한 선지자는 다니엘 뿐만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육체적 부활에 대하여 예언했다.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그들의 시체들은 일어나리이다 티끌에 누운 자들아 너희는 깨어 기뻐 노래하라 주의 이슬은 빛난 이슬이니 땅이 죽은 자들을 내놓으리로다”(사 26:19).이사야 선지자는 ‘죽은 사람들은 티끌에 누워 잠자는 사람들이요, 부활은 그들을 깨울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는 땅이 생명을 낳는다는 표현으로 부활을 묘사한다. 무덤은 자궁이요, 죽은 자는 언젠가 새롭게 된 육신의 생명을 입고 나타날 것임을 드러낸다.미래에 있을 육신의 부활은 말로 선언할 ‘진리’일 뿐 아니라 노래할 ‘소망’이기도 하다. 시편의 저자는 지혜 있는 자와 무지한 자가 모두 죽을 것이지만(시 49:10),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시 49:10)라고 노래한다.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일은 곧 전인을 죽음에서 데려오는 일이다(시 16:10; 행 2:24-29). 나아가 저자에게 시편 71편의 부활은 위로이다. 저자는 과거에 겪은 고난과 미래에 있을 구원을 생각하며 선언한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우리를 다시 살리시며,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시 71:20). 하나님은 우리를 땅에서 일으키심으로써 다시 살리실 것이다.이러한 진술들에 담긴 부활 소망은 마치 정원 토양에 심긴 씨앗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실제로 우리가 창조된 목적을 고려해 보면, 부활 소망은 낯선 개념이 아니다. 창세기 2장에는 육체가 없던 아담과 하와가 주님에게 몸을 받았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처음부터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남자를 만드시고, 남자로 여자를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7, 21-22). 그렇게 지어진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반역한 아담이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와와 함께 동산에서 내쫓으셨다(창 3:22).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는 아담이 갖지 못한 영생을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이 동산에서 쫓겨남으로 인해 이 나무에 다가갈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죽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를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 나무로 인도하기 위해 마지막 아담이 오셨다. 그분은 나무에 달려 죽으시고(갈 3:13), 3일만에 생명 나무의 열매를 드셨다. 그리고 그분이 다시 돌아오실 그 때,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 우리 역시 그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게 될 것이다.다른 종류의 부활들간혹 우리는 죽음에 대해서 물리적 상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은 타락한 세상에 거하는 우리 삶의 면면을 통해 죽음을 묘사한다. 이 면면은 재난, 기근, 질병, 상실, 불임, 유배 등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러한 종류의 죽음들에 대해서도 부활을 허락하신다. 먼저 ‘유배’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살아난 마른 뼈의 환상을 보았다(겔 37:7-10).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의 땅으로 돌아오는 사건을 상징했다(겔 37:12).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배는 일종의 죽음을 의미했고, 그들의 귀환은 부활을 상징한다.‘불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자.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모두 각각 불임인 아내를 두었다. 자녀가 없던 라헬은 야곱에게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창 30:1)라고 호소했다. 이는 불임이 혈통(가문)의 죽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불임의 반대는 무엇인가? 죽음이 생명의 역사로 뒤바뀌는 일이다(롬 4:19). 따라서 하나님께서 족장들의 아내들이 겪은 불임을 해결하실 때마다 죽은 자궁과 혈통에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또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죽기 전에 구원하심으로써 생명부터 죽음까지 다스리는 그분의 능력을 보이셨다. 예를 들어,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기 위해 묶고, 이제 곧 칼날이 그의 몸을 관통하기 직전이었다. 하나님은 바로 이 순간 이삭을 대신할 정결한 제물을 주심으로써 그의 죽음을 막으셨다(창 22:4-13). 실제로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삭이 죽음에서 살아났다고 은유적으로 표현했다(히 11:19).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이 틀을 바탕으로 구약성경 전체에 걸쳐 부활 신앙을 그려낸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홍수에서, 요셉은 구덩이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에서,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에서, 다니엘은 사자굴에서, 유대인들은 하만의 계략에서, 요나는 거대한 물고기에서 구원을 받았다. 이처럼 재난으로부터 구원받는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죽음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적극적으로 보여 준다.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한다구약성경에 부활에 대한 전제와 이해가 없었다고 생각해 보자.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분이 약속을 성취하지 않으셨다고 오해하며 눈을 감을 것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이 족장과 그의 자손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지만(창 12:7; 13:15),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히 11:13). 그렇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약속의 말씀을 지키실 것인가? 바로 부활을 통하여 그들을 죽음에서 살리심으로써 지키실 수 있다. 부활하게 될 아브라함은 이 세상의 상속자로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모든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을 받을 것이다(롬 4:13). 그러므로 죽음은 하나님을 약속 불이행자로 만들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란 사실을 부활이 증명할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모든 크리스천은 부활 소망의 불변성을 신뢰하고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내세에 대한 약속들은 절대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셨지만 아직 성취되지 않은 소망이 남아 있다. 우리의 내면은 날마다 새롭게 변화하는 반면, 우리의 외면은 날마다 늙고 낡아진다(고후 4:16). 그러나 부활을 맞이하는 그날, 썩을 육신은 마침내 썩지 않을 몸을 입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후 4:16). 우리는 예수님이 죽음의 무덤을 탈출하셨으므로, 미래의 우리 역시 죽음이 아닌 영생에 이를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es the Old Testament Teach Resurrection Hope?번역: 하늘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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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당신이 꿈꾸던 대로 교회가 개척되지 않을 때
by Noel Heikkinen
2018-11-28
교회 개척은 당신의 영혼을 무척 힘들게 할 수 있다. 물론 지구상에는 물리적으로 더 위험한 직업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순전히 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교회 개척’의 위험성을 능가하는 직업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다른 손쉬운 일들을 그만두고 교회 개척으로 뛰어들고자 한다면, 먼저 무슨 상황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제대로 살펴보아야 한다.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이유들로 교회를 개척한다.1. 신앙 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을 보기 위해2. 자신이 사는 동네, 도시, 그리고 이웃이 활력 있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는 것을 보기 위해3. 자신의 교회로부터 새로운 교회가 계속해서 세워져 나가는 것을 보기 위해 이러한 목표들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며 가슴을 설레게 한다. 반면, 이를 성취하는 일은 특히 이제 출발한 교회로서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느리게 진행된다. 이러한 사정을 잘 알기에 나는 최근 한 교회 개척자가 보낸 짧은 이메일의 내용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척을 그만두고 싶습니다. 누군가가 여기서 나를 구해주기를 원합니다.”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이 문장을 통해 교회 개척이라는 사역이 열정적이고 경건한 사람에게도 무척 고되며 일상적인 지루함마저 안겨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의 수많은 교회개척자들이 그러하였듯이, 그는 새로운 교회를 향해 전력 질주했지만 정작 지속적으로 죄를 회개하고 복음 사역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힘들게 배웠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사실 교회에 오도록 초청받은 사람들조차 의심의 눈초리로 목회자를 바라보게 된다.이처럼 교회 개척자가 어렵고 느리게만 진행되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그 마음에 숨겨진 우상들이 쉽게 드러날 수 있다. 심지어 거룩한 야망을 통해서도 숨은 우상들이 드러날 수 있다.변함없는 구세주당신이 지친 사람들을 향해 매주 설교하는 바로 그 복음은 성도들 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은혜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하나만 상기해 보자. “예수님은 당신이 실망하는 그 순간에도 당신을 절대로 실망시키지 않으신다.”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실망시키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곧 세상을 떠나리라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이제 예수님 없이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 버거운 현실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족을 잃게 되고 회당에서도 쫓겨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더욱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해 주고 싶어도 말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에 슬퍼하셨다. 이는 낯설고도 무서운 현실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요 16:20).우리는 예수님이 여기서 자신의 죽음, 장사, 부활, 승천에 대해 말씀하고 계셨음을 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신 이 약속은 사도들이 개척한 그 시대의 교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2천 년의 시간이 지나 오늘의 우리가 개척하는 교회에도 동일하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힘들 것이다, 그리고 슬픔이 따라올 것이다슬픔은 이 세상의 구조에 얽혀 있으며, 교회 개척도 여기에 속한다. 교회 개척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 당신의 계획들은 실패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들은 당신에게 커다란 실망을 안겨 줄 것이다. 당신의 교회는 본인이 생각했던 모습이 아닐 수 있고, 아마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를 더욱 의미 있게 이해하도록 만든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요 16:22).예수님의 말씀대로 당신의 마음에는 기쁨이 가득할 것이며,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는 당신에게도 해당하는 진실이다. 그 기쁨은 누군가가 빼앗아 갈 수 없는 참되고 지속적인 경험일 것이다.그러나 교회 개척의 과정에는 기쁨과 동시에 슬픔을 느껴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 이를테면, 누군가가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기뻐함과 동시에 목회에 필요한 어려운 결정도 내려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게 된다.만약 당신이 현재 처한 상황 안에서 영적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면, 당신의 삶은 끝없는 혼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 수 있다.확실한 희망예수님은 이 모든 일이 우리의 현실임을 알고 계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의 삶, 특히 그분 자신을 세상에 알리려는 우리의 노력들이 환난을 초래할 것이라는 사실을 아셨다. 그렇게 우리가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임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고난 중에서도 평화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평화가 있다. 평화는 교회 개척이 가져올 폭풍 속을 뚫고 지나간다.교회 개척의 목표가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분명 환난이 따를 것이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라.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우리는 이 영광스러운 메시지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교회를 개척한다. 우리는 환난으로 가득 찬 이 세상 속에 거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기쁨과 평화를 얻게 되기를 소망한다.그러므로 마음을 강하게 하고, 잘 지켜야 한다. 교회 개척은 복된 일이지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잘못된 경우에는, 교회 개척을 통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우상이 세워질 수도 있다.교회 개척이 당신에게 예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의미하기 시작한다면, 일상은 곧 서서히 진행되는 죽음이 될 것이다. 또한 예수님이 당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면, 예배당의 빈 의자들은 점점 당신의 영혼에 상처가 되고 마음 속에서는 쓴 뿌리가 자랄 것이다.그러나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면, 지금도 그분이 당신을 사랑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 홀로 두지 않으신다. 그리고 분명 당신의 교회 개척에도 그분이 함께 하실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r Church Isn’t What You Dreamed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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