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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와 놀라운 성취
by Keri Folmar
2018-11-12
린다(Linda)와 코니(Connie)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 모임에 규칙적으로 참여했다. 그들은 한 주도 빠지지 않고 모임에 참석하고, 꼬박꼬박 숙제를 했다. 그러나 성경 공부의 형태가 기존보다 더 집중적이고 복잡하게 바뀌자 모임에 참석하지 않게 됐다.그러던 중 반가운 변화가 생겼다. 린다와 코니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기쁨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성경 공부를 위해 매일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더 많은 것을 깨닫기 위해 참고 자료를 찾기 시작했다.성경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깊어질수록 타인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늘어났고, 더불어 성경 말씀 자체에 무척 집중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영적 성장으로 이어졌고, 궁극적으로는 전 교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는 무척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바른 성경 공부에 필요한 세 가지 유의점을 살펴보겠다. 1. 교회 중심이 되라교회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여성들은 강해설교를 통해 영혼의 양식을 얻는다. 그들은 교회에서 공급하는 신학을 통해 하나가 되며, 서로에게 힘을 주는 언약 관계에 속하게 된다. 교회 중심의 성경 공부는 여성들의 모임이 원활하도록 돕는 동력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돕는다. 나아가 교회 내 여성들은 교인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어감에 따라 전 교인을 세우는 큰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처럼 여성들을 위한 성경 공부가 개교회를 중심으로 정착할 때, 교회에는 여러 긍정적인 효과들이 일어난다.우리 교회는 성경 공부에 참석하는 여성들에게 교회의 다른 모임에도 참석하도록 권면한다. 우리는 그들을 교회에 초대하고 함께 헌신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한다. 함께 설교를 듣고, 서로의 신앙을 고백하며, 환영의 마음으로 섬기고 또한 섬김을 받도록 한다. 이는 대규모 강연뿐만 아니라 소규모 토론과 일대일 대화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 공부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그녀의 가족들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성장한다.공동체, 직장, 학교 등에서 벌어지는 봉사 모임 성격의 성경 공부는 불신자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만나도록 돕는 훌륭한 사역이 될 수 있다. 특히, 요즘에는 외부에서 진행하는 초교파 성경 공부 모임들이 많다. 그러나 여성들의 바른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성경 공부를 교회의 권위 아래 두는 것이 좋다. 2. 비디오를 끄라성경을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을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이다. 물론 일부 비디오 성경 공부는 신학적으로 확실히 도움이 된다. 하지만 비디오들은 종종 성경 말씀을 이해하도록 인도하기보다는 감정적 반응을 끌어내는 데 초점을 두기도 한다. 화려한 언변을 가진 강사들은 청중을 웃고, 울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말씀보다 그들이 말한 예화가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면, 성경 공부의 본질을 잃은 것이다. 또한 비디오를 통한 학습은 여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성경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 자신감을 잃게 만들 수 있다.두바이기독교교회연합에서는 기존에 시행하던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었다. 이를 대신해 보다 면밀하게 성경을 이해하고 여성의 삶에 직접 적용할 수 있도록 몇몇의 질문들로 구성된 교재를 채택했다. 우리 교회는 캐서린 닐슨(Kathleen Nielson)의 ‘살아 있는 말씀 연구’(Living Word Bible Studies)를 읽고, 신학에 기반을 두되 특별히 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찾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직접 교재(최근 마가복음에 대하여 쓴 두 권의 책)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책들은 여성들이 보다 친근하게 성경 공부를 할 수 있는 신학적 논제와 질문들로 구성되어 있다.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우리가 사용하는 모든 자료가 성경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여성들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 교재여야 한다. 이제 비디오 성경 공부를 멈추고,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공부하길 권한다.3. 자격을 갖춘 지도자를 찾으라과거 대부분의 성경 공부는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자원하는 이들이 스스로 선택한 교재를 사용해 성경 공부를 인도하는 식이었다. 그중 일부 지도자들은 심지어 크리스천이 아닌 이들도 있었다. 그들은 교회 장로들의 가르침이나 감독을 받지 않았고, 신학적으로 통일된 내용을 가르치지도 않았다.우리 교회의 어떤 지도자는 신앙이 구원의 필수요건임을 믿지 않기도 했다. 그 지도자가 진행하는 성경 공부 모임에는 40여 명의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힌두교인과 무슬림도 있었다. 모임에 참석하는 여성들 중 유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있음에도 참된 복음이나 진실된 신앙을 전파하지 않았다.리더십의 변화는 시간과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다. 우리 교회는 여성 지도자들에게 조직신학을 배우도록 돕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관찰하는 시간을 갖도록 독려하였다. 주로 과거에 성경 공부를 지도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재교육도 실시했다. 또한 성경 말씀을 좋아하며 교회에 헌신적인 여성들을 새로운 지도자로 양성하였다. 우리는 교회 전체의 문화를 변화시킴과 동시에 리더십의 구성원과 방향에 대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변화를 이끌었다. 그로부터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은 건강한 신학적 자질을 갖추고 있다. 이전보다 훨씬 큰 규모의 성경 공부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그것을 삶에 진지하게 적용한다. 그들은 이집트, 가나, 호주, 인도, 케냐, 부룬디, 아일랜드, 카자흐스탄,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온 지도자들이다. 눈에 띄는 공통점이 없지만,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그 사역의 가치하나님의 은혜로, 여성들을 위한 특별한 성경 공부가 전 교인들의 협업 속에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 중심의 성경 공부를 하고 있다.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과 지도자들은 신학적인 깊은 지식을 점차 쌓아가고 있음은 물론, 자신이 아는 것을 함께 공유한다. 성경 모임에 참여하는 여성들은 이 만남을 특별히 좋아할 뿐만 아니라, 이 시간을 통해 점차 삶 속에서 주님을 알아 가고 있다. 더 나아가 그들은 교회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제자 삼기 원하고 있다.여성을 위한 성경 공부를 강화하는 일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지혜와 인내가 필요하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과 마찰이 생길 수 있음도 기억해야 한다. 모임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규모의 성경 공부든 하나님이 주신 시간과 에너지를 가치 있게 사용하여 삶의 충만한 기쁨을 누리게 하는 길이 되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Not All Women’s Bible Studies Are Created Equal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사역
여성
성경공부
성취
교회중심
자격
지도자
가치
몸에 대한 열망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by Kendra Dahl
2018-11-11
건강, 운동, 다이어트는 새해 결심의 최상단을 장식하는 키워드로 매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잘 맞던 청바지를 움켜쥐고 이 옷을 다시 입겠다고 다짐하는 모습은 낯선 풍경이 아니다. 피트니스 연간 회원권이나 요가복의 세일은 우리의 결심을 더욱 부추긴다. 또한, 페이스북에는 몸매와 운동에 대한 게시물이 넘쳐난다.나 역시 살을 빼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어린 시절, 수영장에 가면 남자 아이들의 놀림이 두려워 항상 헐렁한 티셔츠로 몸을 가렸다. 그러다 열두 살 즈음에 다이어트에 성공했고, 친구들로부터 그토록 원했던 선망의 눈빛을 받을 수 있었다.그 이후로 내 몸매를 지킬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다 하리라 마음먹었다. 식이 조절과 운동, 심지어는 일부러 구토까지 하면서 이 모든 과정을 줄기차게 따랐다. 하지만 나는 애석하게도 몸매에 대하여 늘 부족함을 느꼈다. 거울 속의 나를 볼 때면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오래 보고 싶지 않았다.친구들보다 빠른 임신과 출산의 경험은 몸에 대한 불만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젊고 늘씬한 친구들의 몸에 비하면 나의 몸은 처지고 모양새가 없어 보였다. 물론 예수님을 알게 되면서 끊어질 수 없는 그분과의 관계가 내게 자신감을 주었고, 사랑하는 남편과의 강한 유대감이 마음에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내 안에 지속되어 온 몸매에 대한 왜곡된 인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 후로 여러 해가 지나고 사랑스러운 두 아이도 더 갖게 되었다. 그러나 거울 속 내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불평하는 자아와 크리스천으로서의 진정한 자아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 여러 신학자들은 로마서 8장을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손꼽는다. 이 장에서 우리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에 대한 신학적 가르침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안의 풍부한 교훈은 추상적이거나 서로 동떨어진 개별적 개념이 아니다. 하나의 크고 원대한 통찰로서 우리의 몸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잘 알려 준다. 이제부터 로마서 8장을 통해 하나님이 몸에 관해 알려 주시는 세 가지 진리를 살펴보려 한다. 이 교훈들이 당신의 내년 새해 다짐에 분명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1.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시는 하나님아름다움의 기준은 문화마다 다르고, 유행의 흐름에 따라 제각기 변화한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풍만한 하체를 아름답게 본다. 반면, 또 다른 문화권에서는 날씬함을 넘어 가느다랗고 마른 다리를 미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크리스천이 갈망해야 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성경은 이상적인 몸매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그 몸의 형태가 아닌 마음의 상태, 즉 우리에게 부족한 영의 모습에 대하여 가르친다. 멋진 몸매를 향한 열망은 결국 자부심에 대한 목마름이다. 늘어난 몸무게, 또다시 실패한 다이어트, 등록만 한 채 가지 않은 헬스장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을 정죄하는 점점 더 많은 조건들이 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이 정도면 자부할 만하다고 평가하기 위해 완벽에 가까운 기준을 세운다. 그리고 그 기준에 맞추려고 고군분투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로마서 8장 1절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이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주님이 주시는 이러한 자유는 나의 겉모습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그토록 바라는 신체적 화려함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몸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타인의 눈을 사로잡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가 아름답고, 섹시하고, 자신만만하고, 강하게 보이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역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눈을 두려워하며 동시에 갈망한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변치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그 사랑의 뿌리가 우리의 외양이나 행위에 있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사람들의 찬사나 사랑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쉽게 변하기 마련이다. 이상적인 몸매를 만드는 것과 그 결과인 타인의 선망은 결코 자아를 만족시킬 수 없다. 몸에 대한 욕구라는 주제 아래 영적인 문제와 죄성에 관하여 논할 부분들은 충분히 많지만 그중 다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나를 향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두려움이나 욕망의 외피를 벗어 던질 자유를 얻었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껍질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 정죄함이 없는 그 사랑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몸매는 눈에 보이는 모습이다. 우리는 늘 거울 속 자신의 몸매가 자부할 만한 모습이기를 바란다. 하지만 보혈의 은혜는 그 모든 정죄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를 자유롭게 한다. 타인으로부터의 정죄는 물론이요, 약한 자아가 스스로를 정죄하려 할지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더 크다는 사실을 기억하자.2.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8절에서 30절이 말하듯,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선(善)을 위하여 모든 일에 역사하신다. 하나님 보시기에 선을 이룬다 함은 우리의 성품이 변하여 점점 더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다.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관심을 어느 곳에 두어야 할지 잘 알려 준다. 멋진 몸매 만들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삶(혹은 거룩하지 못한 삶)과 어떠한 연관성도 없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4장 7절과 8절에서 우리의 몸과 거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바울은 우리가 가꾸고 훈련해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한다. 바울은 외양이 아닌, 하나님을 닮은 영혼을 가꾸는 데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더불어, 하나님이 우리의 거룩을 위하여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멋진 몸매를 만드는 시간 속에서 종종 반복되는 좌절에 부딪힐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황조차도 우리 영혼의 성숙을 위해 사용하신다. 당신은 식이 조절과 피트니스를 통해 성공과 실패를 오갈 것이다. 하나님은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속의 우상을 보게 하시고, 자만을 뿌리뽑으시며, 진정한 거룩을 이루도록 인도하신다. 이는 우리가 몸을 위하여 애쓰는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다. 내가 무려 354번째 다이어트에 실패했을 때이다. 하나님은 이날의 실패를 내가 주님의 자녀로서 한걸음 더 성숙해지는 데에 사용하셨다고 확신한다. 그분은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빌 1:6). 3.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우리의 몸로마서 8장 23절은 연약한 몸 때문에 마음으로 탄식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 준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에 이르기를 열망하고 기다린다. 더욱이 우리는 장차 받을 영광과 아프거나 죽지 않을 영원한 부활을 이미 약속 받았다. 하지만 육체는 여전히 약하고 실패하는 모습을 보일 뿐이다. 때가 이르기 전까지는 “아직 부활하지 않은” 세상 속의 육체로 살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 속에서 육체의 노쇠를 경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결국에는 죽음에 이른다.고린도교회를 향한 서신에서 바울은 우리의 몸을 멋지고 강하게 만들라고 권하지 않는다. “너희의 몸은 성령의 전이라.” 오히려 그는 교회인 몸으로 죄짓는 행위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 몸은 다른 무엇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고전 6:19-20). 그런데 매일 운동을 하는 것, 유기농 제품을 챙겨 먹는 것, 주님이 아닌 타인의 찬사를 갈망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해 몸을 헌신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인가?몸은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이루어가는 매체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분의 힘으로 성취하실 목적 때문에 창조되었다. 그렇기에 크리스천은 흙으로 빚은 연약한 몸 안에 복음이라는 보화를 담고 다니는 존재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러한 모습으로 만드셨을까? 우아하면서도 충격에 강한 값비싼 도자기처럼 만드실 수는 없었을까? 왜 하필 약한 질그릇의 형태로 만드셨을까? 그 이유는 몸의 약함으로 인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원대한 힘이 주님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이다(고후 4:7).함께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몸을 잘 관리해야 한다고 한 친구가 내게 당부했다. 만약 몸을 관리의 대상으로 본다면, 좀 더 강하고 멋진 신체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육체는 연약하지만 어떻게 관리하는가에 따라 물리적, 외양적 차이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을 관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겉모습이 아닌 역할에 있음을 재차 강조하고 싶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몸을 준비해야 한다. 즉, 우리 몸을 살아 있는 희생제물로 드리도록 관리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각 사람을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크리스천은 한낱 풀과 같이 시들어질 외양을 붙들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 살아가는 그분의 백성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 몸의 부활을 기다리며몸을 대하는 방식은 곧 영혼의 상태를 대변한다. 음식에 대한 강박, 인정에 대한 욕구, 멋진 몸매가 만족을 완성한다는 환상까지,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영혼의 상태이다. 물론 신체를 강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건강과 멋진 몸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도, 육체는 여전히 연약할 수 밖에 없다. 크리스천은 부패할 수밖에 없는 육신을 넘어 영원히 다시 살아날 그날을 고대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고전 15:42). 우리는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질 그날을 소망해야 한다. 그 소망 안에서 우리가 이미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롬 8:24).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s You Start that Diet: 3 Truths About Body Image번역: 정새롬
생활
건강
몸
정체성
정죄
영혼의성숙
성령의전
질그릇
부활
꾸준히 기도하라!
by John Piper
2018-11-11
기도에 힘을 쓰십시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깨어 있으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셔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할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서도 기도하여 주십시오. 나는 이 비밀을 전하는 일로 매여 있습니다. 골로새서 4:2-4.본문은 지금 우리도 들어야 할 기도에 대한 다섯 가지 지침을 준다. 첫째, 꾸준히 기도에 힘을 써야 한다. 흔히 우리가 특별 기도 주간에만 보여주었던 부지런한 모습을 평소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꾸준한 기도에는 강력한 힘이 있다. 예수님이 이야기하신 ‘간청하는 벗’(눅 11:5-8)이라든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눅 18:1-8)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꾸준함은 참된 성도의 삶을 검증하는 최고의 테스트이다. 나는 성도 가운데 60년, 70년, 혹은 80년을 꾸준히 기도해 온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이들이 많은 교회는 얼마나 복된가! 둘째, 기도에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한다. 아마도 바울은 이 지침을 겟세마네에서 일어난 일을 통해 배웠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하도록 요청했지만 그들은 잠들고 말았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네가 한 시도 깨어 있을 수 없더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막 14:37)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할 때 깨어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마음이 산만하게 흐트러져 이런저런 생각으로 방황하지 않아야 하며, 헛되이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중언부언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또한 진부하고 의미 없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욕망으로 기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더 나아가 무엇이 선한지에 대해서도 깨어 있어야 한다. 특별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기도에 관한 가르침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분명히 우리 안에 기도에 대한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돕지 않으시면, 우리가 스스로 기도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깨어 있을 때 경험하게 된다. 셋째,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나는 내가 기도하는 성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써 그 사람이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들을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더욱 감사함으로 기도에 매진하게 만든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넷째, 말씀의 문이 열리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기도할 수 있다. 먼저는 주일마다 마음의 문이 열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주중에 우리가 복음을 나눌 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 여자[루디아]의 마음을 여셨으므로, 그는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었다”(행 16:14). 이와 같은 일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 주일에도 주중에도 일어나기를 바란다. 다섯째, 그리스도의 비밀을 분명하게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이 경건의 비밀은 참으로 놀랍습니다”(딤전 3:16). 이 비밀을 전하도록 부름 받았다! 말씀을 전하는 직분을 맡았다! 그러나 이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는 일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일이다. 이 얼마나 내게 과분한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밀을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꼭 필요한 성경 말씀을 택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도록 기도해야 한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으로 전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하다. 그리고 꼭 자신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원제: Persevere in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매일배움
인내
꾸준한기도
꾸준히기도하라
감사하는기도
깨어기도하라
교회를 변화시키는 법
by Mark Dever
2018-11-11
종종 목사들이 내게,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 교회를 변화시키다가 분란을 조성한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 해임당하는 목회자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자로서 우리는 교회의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변화를 이끌기 위한 몇 가지 방안이 여기 있다. 가르치라, 지속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말씀을 가르치라 먼저, 교회의 변화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일어나야 한다. 여기서 설교는 교회의 변화를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교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성령이 사용하시는 방편은 꾸준한 강해설교임을 기억하라. 당신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이 교인들의 마음에 변화의 필요성을 심어주시도록 기도하라. 안타깝게도, 종종 목사들은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기도 전에 해결하기를 원한다. 회중에게 설명을 시도할 때 변화를 강요하는 목사들이 많다. 그런 행위를 리더십으로 착각하기도 한다. 목사는 우리에게 맡겨진 양들을 때릴 것이 아니라 먹여야 한다. 그들을 바른 방법으로 가르치라. 설령 당신이 제시하는 변화가 옳더라도, 시기가 적절한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옳다고 해서 곧바로 실행해야 하는 건 아니다. 변화를 지속하라 일터에서나 가정에서, 한 분야에만 헌신한다는 개념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젊은 세대가 추구하는 모델은 제한된 경로로만 올라가도록 이미 정해진 사다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무한히 펼쳐진 월드 와이드 웹의 모자이크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기를 추구한다. 우리는 다양한 경험을 높이 평가해야 하며, 각각의 경험이 서로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라고 교육 받는다. 목사는 교회 안에서 이와는 다른 모델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 그 대상이 부부이든, 가족이든, 친구이든, 교회이든, 이웃이든 간에 서로에게 헌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올바른 우선순위를 찾도록 회중을 돕는 일은 장기적인 (즉 때로는 여러 달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친) 인내의 견지에서만 가능하다. 목사로서 회중의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강압적인 성격이 아니라 여러 해에 걸친 신실하고 끈기 있는 가르침에서 나온다. 올해에 일어나지 않는 변화들이 내년이나 10년 후에는 가능할 수 있다. 장기적인 목표를 위해, 전략을 지혜롭게 세우고, 어떤 변화에 우선순위를 둘 것인지 주의 깊게 선택하라. 지금 가장 필요한 변화는 무엇인가? 또한 연기할 수 있는 변화는 무엇인가? 이와 관련하여 목사들은 성숙하면서도 장기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는 목사 임기를 고려한 사역에도 도움이 된다.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2, 3년 안에 결과를 도출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목사 임기가 길수록 현실적 안목이 더 향상되며, 이는 목사 자신과 회중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 변화를 위한 가르침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한 교회에 충분하게 오래 머물 필요가 있다. 만일 당신이 오래 머물 계획이 아니라면, 변화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후임자가 그 일을 끝내야 한다는 조건을 신중히 고려하기를 바란다.젊은 신학생일 때 나는 세 분의 성공회 목사들을 모델로 삼았다. 세 분 다 여러 해에 걸쳐 핵심적인 위치에서 강해설교를 했다. 리처드 시베스는 캠브리지와 런던에서 30여 년 동안, 찰스 시므온은 캠브리지에서 50여 년 동안, 그리고 존 스토트는 런던에서 50여 년 동안 사역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들 모두는 자신이 섬기는 교회를 세울 수 있었고, 오랫동안의 신실함으로 후배 목사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변화를 사랑하라 올바른 변화를 꿈꾸고, 이를 위해 가르치며, 그 과정을 오래도록 지속하기 위해서는 변화를 사랑해야 한다. 당신은 주님을 사랑하고 맡겨진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로마의 클레멘트는, “그리스도는 회중 위에 자신을 높이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고 마음을 낮추는 자들과 함께 하신다”라고 말했다. 회중을 거듭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끈질긴 보살핌은 오로지 사랑에서 나온다.조나단 에드워즈와 같은 사례도 있다. 회중이 그를 해임했기 때문에 그는 오랜 기간 목회할 수 없었다. 이처럼 어떤 이들은 짧지만 신실하게 목회직을 감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사례들을 이 짧은 지면에서 논의할 수 없다. 나는 어떻게 하면 가르치고, 지속하며, 사랑함으로써 회중을 성경적인 변화로 인도할 것인지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싶다.출처: www.9marks.org원제: How to Change Your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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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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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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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보다 큰 사역을 담당하는 제자들
by Don Carson
2018-11-09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14:12).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그분이 행하신 사역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되리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런데 여기서 ‘더 큰’(greater)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목을 끄는 놀랄만한 일들을 행하게 된다는 것일까? 사실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들보다 더욱 이목을 끌 만한 기적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분명 ‘더 큰’이라는 수식은 그런 내용을 의미하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더 큰’이라는 표현이 ‘더욱 많은’ 또는 ‘더욱 넓은’ 사역을 묘사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라면, 실제로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 ‘더 큰’ 일들을 행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전 세계에 말씀을 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을 목격했다. 또한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을 돕고, 교육했으며, 그들에게 식량을 전달했다. 이러한 발자취로 미루어 보았을 때, ‘더 큰’ 일들이란 제자들의 증언을 통해 회심한 자들이 그들의 변화된 모습을 세상에 전파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본문에서 예수님은 더 큰 일들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라고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거쳐 승천하시는 일은 바로 제자들이 수행하게 될 사명의 전제 조건이 된다는 뜻이다. 즉, 그분이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교회는 사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승천은 제자들로 하여금 그분을 증언하게 하실 약속된 성령 강림에도 필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요7:39; 15:26; 16:7-11).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더 큰’ 일들을 수행하게 된다.이런 설명 자체는 옳다. 그런데 그 의도라면, 왜 예수님은 ‘더 많은’(more)이 아닌, ‘더 큰’(greater)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을까?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특권예수님의 다른 말씀을 살펴보며 도움을 받아보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마11:11).예수님이 세례 요한과 다른 이들을 비교하며 강조하신 점은 그가 다른 이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큰 자이지만 아직 천국에 참여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요한이 소명을 받은 시점은 구속 역사(the history of redemption)에서 그보다 이른 시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천국에 참여하는 특권을 가진 자라면 그가 아무리 작은 자라도 세례 요한보다는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바로 이 ‘큰’이라는 개념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수식의 의미다. 곧 이미 시작된 종말의 시대(the already inaugurated eschatological age)에 들어가는 특권을 부여받은 상태를 가리킨다.이와 유사한 말씀을 요한복음 14장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때 예수님은 구속 사역의 일환인 ‘아버지께로 가는' 사건을 통해 구속 역사의 새로운 단계를 시작하고자 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은 밝아오는 종말의 시대를 위한 특수 사역을 수행하도록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 사역들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행하신 일들이 아니었다. 물론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그 사역들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하지만 이내 승천하셨으며 오순절 사건 후에는 (육신으로 함께하며) 그 사역을 수행하지 않으셨다.이는 제자들이 예수님보다 더 크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이 이루신 사역의 결과에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받았다는 차원에서 제자들의 사역이 예수님의 사역보다 더 크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성령을 보내시기 전까지 행하신 모든 일들은 필연적으로 미완성 상태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제자들의 사역은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이 완성된 이후에 펼쳐지는 새로운 상황에서 수행되었다. 즉 그들의 사역은 바로 그 성취의 시점(the moment of fulfillment) 이후에 수행되는 특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쟁취하신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지다이와 같이 위대한 광경은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모든 크리스천들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안 된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우리를 고독한 지경에 몰아넣지 않는다. 아무런 열매도 확신할 수 없고 약속된 복이라고는 오직 미래를 위해서만 주어지는 자리에 우리를 두지 않는다.오히려 이와는 대조적이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이미 승리가 쟁취된 싸움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not yet consummated), 이미 시작된(already dawned) 종말의 복을 알게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승리와 그분이 부여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사역을 완성하실 구주와 함께 새로운 무리를 불러내는 일에 미약한 노력을 더할 뿐이다. 이런 일들이 우리가 가진 소명의 진정한 측면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사역들도 이러한 광범위한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결국 이 모든 일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 “아버지께로 감”으로 인해 가능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 아버지를 드러내는 사역을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 사역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이루어졌다. 두 번씩이나 예수님은 앞으로 다가올 일을 생각하며 고통을 겪으셨다(요12:27; 13:21). 그러나 그 일은 예수님이 다음과 같이 제자들에게 말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14:1). 원제: How We Do Greater Things Than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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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소그룹을 교회로 볼 수 있을까?
by Sam Allberry
2018-11-09
소그룹 사역을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다. (통상 열 명 가량의) 소그룹은 성경 토론을 위해서, 또 서로에 대해 기도하며 섬기기 위해서 적합한 모임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반면 주일 예배에서는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별로 없다. 그래서 소그룹은 ‘서로’(one another)에 대해 행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활발하게 적용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소그룹에서는 서로 간에 신뢰를 형성하고, 통찰을 공유하며, 삶의 여러 문제와 어려움을 논의할 수 있다.그렇기 때문에 소그룹이 신앙생활의 구심점이 되기 쉽다. 더 나아가 간혹 소그룹 자체가 교회로 여겨지기도 한다.그런데 이런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만일 소그룹이 우리의 교회가 되면, 우리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교인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는, 교회가 소그룹의 역할을 담당할 정도로 작을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규모가 어느 정도여야 하는지를 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여기서 논의하는 문제는 건강한 교회가 소그룹을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물론 대신할 수 있다). 반대로 소그룹이 교회를 대신할 수 있는지의 여부이다(물론 대신해서는 안 된다).왜 안 될까?첫째, 하나님은 교회의 모든 가족을 통해 당신을 누구와 화목케 하셨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그룹은 교회 전체 구성원의 다양한 연령층과 배경을 반영하지 않는다. 반면에 주일의 공예배는 그 요소들을 반영한다. 이 차이는 중요하다.둘째, 소그룹이 할 수 있는 사역의 범위는 제한적이다. 교회는 많은 지체들로 구성된 몸이며, 각 지체는 저마다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교회의 전체 가족 안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은사와 사역이 소그룹에는 없다.셋째, 소그룹은 교회 리더십의 지도를 받지 못할 수가 있다. 따라서 어떤 교리나 행동의 문제가 발생할 때 소그룹 내에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더 나아가 소그룹에서는 교회의 연합을 보여주는 성찬식을 거행하기도 힘들다.그러므로 소그룹은 교회의 공적 예배를 ‘보완’하는 방안이 될 수는 있지만, 결코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소그룹을 지닌 교회이지 소그룹이 대신하는 교회가 아니다. 교회 생활의 중심은 소그룹이 아니라 전체의 모임이다.출처: www.9marks.org 원제: Can I View My Small Group as My Church?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모임
소그룹
구심점
제한적
보완
대체
적용이 없다면, 당신은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by Michael Lawrence
2018-11-09
도대체 강의의 요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경험이 있는가? 나는 대학에서 미적분과 씨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수학 전공자라면 그 강의를 명확하게 이해했겠지만, 영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추상적인 내용의 지겨운 강의였다. 현실 세계에 미적분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 세계를 왜 배워야 하는지 고민했다. 만일 당신이 수학 전공자라면,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해 토론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을 한 번 생각해보라. 설명 ≠ 적용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 대해 논의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매주 성도를 미적분이나 작곡을 배우는 신입생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교사처럼, 목회자는 맡은 과목에 대해 열정적으로 준비한다. 우리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동사 시제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성도에게 교차대구법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식 있는 번역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독법이 옳음을 증명하도록 공부한다. 하지만 이처럼 지식을 풍부하게 준비하고 전달해도, 성도는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을 충분히 설교하고, 성도 역시 그 지식을 흡수하지만, 정작 그 다음 우리는 회중에게 이와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러분에게 달렸어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이러한 접근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성도를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면 이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목자라면 성도가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첫째, 적용은 힘든 일이다. 문법이나 문맥의 분석은 쉬운 반면, 서로 다른 인간의 마음과 각각의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다. 둘째, 적용은 주관적이다.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거나 동사를 적당하게 배치하는 일은 객관적인 검토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말씀을 일상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식이나 문법처럼 객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셋째, 적용은 복잡하다. 성경 본문은 요점이 있다. 그러나 적용은 여러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수많은 상황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건 힘든 일이다. 넷째, 적용은 개인적이다. 하나의 본문을 다양한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할 때마다, 이내 포기하고 결국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고는 한다.이 모든 이유는 목회자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과 관계가 있다. 또한 능숙하지 못하거나 복잡한 일을 피하려는 습관과 연관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핑계에 대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다.적용 ≠ 자각하게 함 적용은 성도의 몫이며 궁극적으로 목회자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시각이 있다. 이는 설교에서 적용을 무시하는 다섯 번째 이유로서 위의 네 가지 경우보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보인다. 본문을 사람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 아닌가? 만일 설교자가 나서서 본문을 삶에 적용해 주려다가 실수한다면, 성도를 말씀의 갈고리에 거는 일에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또한 그러한 실패는 청중으로 하여금 적용의 책임을 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 않는가? 만약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책임지고 적용의 자리는 그대로 남겨둔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 아닌가? 성령은 설교자보다 훨씬 더 적용을 잘 담당하실 것이다. 오늘날 매우 존경받는 설교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러한 논리는 비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는 확신과 적용을 혼동한 예이다. 죄와 정의 및 심판을 자각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요 16:8). 성령 이외의 그 누구도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확신은 심령(heart)의 문제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이 몫을 인위적으로 담당하려 할 때 종종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안에서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기에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게 된다. 하지만 적용은 성령처럼 확신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적용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주해가 성경 본문의 문맥을 이해하게 돕는다면, 적용은 그 본문이 펼쳐지는 오늘의 실제를 탐구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적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골 3:16) 삶과 윤리를 만들고 알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경험한 틀 안에서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목회자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적용에 대한 범위를 넓혀주고자 노력할 때, 성도는 자신의 틀을 넘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범주까지 말씀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들을 때마다, 곧바로 복음에 대한 나의 소명을 떠올린다. 내게는 그것이 자연적이며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교훈적인 적용을 통해 오늘의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한 구절에 대한 적용의 범위를 이토록 깊고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말씀이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적용은 성령의 사역을 침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적용의 예는 다양하다.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한다. 또한 느헤미야 8장 8절에서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향해 율법책을 낭독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이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아는 지식을 넘어 말씀이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해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관심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계속된다.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언하셨다. 또한 산상수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듣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삶 속에서 행하라는 당부로 가득하다. 사도들의 서신 역시 실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도들은 장로에게 적용을 강조했으며, 장로나 다른 가르치는 자들은 실천적인 경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모범을 보였다(딤전 2:2; 4장).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3절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와 교사를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어떻게 주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킬 것인가? 바울은 적용을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로 생각했다. 몇 가지 예들 실제적인 적용의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살인을 저지른 후 이러한 죄를 덮고자 애쓰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성적인 부정과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적용에 적절하다. 하지만 간음이나 살인에 직면하지 않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 본문은 의미없는 말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윗의 죄를 통해 우리는 성도가 죄의 일반적인 패턴을 눈으로 확인하도록 도울 수 있다. 죄의 기만적이고, 우발적이며, 점진적인 특성을 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엄마, 할머니, 대학생, 회사원, 사업가, 또는 퇴직자로서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숙고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적용을 시도할 때, 목회자가 성도의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성도에게 해당 구절의 의미를 알려주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도록 방향을 이끌어 주면 된다.그 다음으로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4절을 읽어보자. 이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곧바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녀가 없거나 더 이상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듣거나 주변의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고만 해야하는가? 아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까지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도가 알도록 목회자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본문 속 부모에 대한 존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의 개념을 성도가 이해하고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인, 장로와 성도 모두가 경건한 권위와 관련하여 분명 배울 것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연령과 은사에 있어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보다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제124문에 대한 답).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으며, 동시에 삶의 다른 현장에서 권위를 행사하기도 한다. 사려 깊은 적용은 그 권위를 바르게 인정하고 행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적용이 없는 설교는 결코 설교가 아니며 단지 강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강의를 듣고서 그 요점을 혼동하도록 방치하여서는 안 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말씀의 적용에 힘써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No Application? Then You Haven’t Preached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설교와교육
비성경적
목회자
설교자
웨스트민스터대요리문답
적용
강해설교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반드시 교회에 나가야 하는가?
by 안환균
2018-11-09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입술의 고백에 그치지 않고 마땅히 삶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 진정한 믿음의 첫 번째 증거가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려는 사람은 학교에 가고, 병을 치료받고자 하는 사람은 병원에 간다. 그렇게 해서 함께 어울려 공부하거나 좋은 의료 환경을 제공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거기에 있는 교사나 의사와 같은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때 소정의 목적을 더 잘 이룰 수 있다. 이처럼 구원을 이루려는 사람들도 교회공동체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통로인 교회에 소속되는 것은 진실한 믿음을 갖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책임이자 의무이다. 정말 하나님을 믿고자 한다면 이보다 더한 요청에도 기꺼이 응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믿는데 교회는 나가기 싫다는 이들은 실제로는 그분을 온전히 믿기 싫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라는 사람의 믿음이 진짜라면, 그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교회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보다 내 삶에서 더 중대한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 그분을 만난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렘 29:13).그런 만큼 그에게는 적어도 교회에 나가는 일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아야 상식적이다. 교회에 나가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구도의 과정에서나 만난 이후의 신앙생활 여정에서 결정적인 축복의 통로이다. 자신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출 수 있다면 교회로 들어가는 입구가 너무 낮거나 좁거나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정교하고도 복잡한 창조물들의 신비를 통해 지성적인 창조주의 존재를 의식하고도 그분의 간섭을 받기 싫어 별 생각 없이 그냥 무신론자로 남으려 한다. 신을 인정하게 되더라도 교회 참여만은 꺼리는 이유 역시 간섭받는 삶이 싫어서이다. 그러나 신을 이론적으로 인정하기만 하고 인격적으로 믿고 자신의 삶 가운데 실제로 받아들이며 교제해나가지는 않겠다는 태도에는 진정한 구원이 없다. 일차적으로 구원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잃었던 인격적인 교제의 관계를 회복한 개개인이 곧 교회이며, 동시에 그 개인들의 모임 또한 교회이다. 그 교회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은 구원 받은 개인들이 서로 친밀한 교제의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그 공동체의 관계성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이뤄내 참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나가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기독교 신앙은 나와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출발하지만 나와 이웃과의 관계로 완성된다. 하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는 나와 이웃과의 올바른 관계로 표현된다. 그래서 “하나님만 믿으면 되지 교회는 왜 나가냐?”라는 물음은 어쩌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잘 모르거나 오해한 탓으로 갖게 된 의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교회에서 이러한 건실한 공동체성을 올바로 경험할 때 사회의 각 영역에 나가서도 올바르고 건강한 공동체성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신자들을 지체로 삼은 한 몸이다.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골 1:18).“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이러한 교회공동체에 한 지체로 참여하는 일은 각 신자가 경험한 구원의 진정성을 가늠하는 핵심 잣대라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이 참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동일하게 그 사랑을 아는 다른 신자들과 사귀고 싶어진다. 공동체가 아쉽지 않다면 신앙의 진정성을 재점검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더구나 교회가 한 몸이라면 그 몸에서 떨어져나간 손은 손의 본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그런 만큼 한 유기체의 한 지체인 신자가 생명력을 공급받으려면 그 본래의 몸체에 한데 붙어 있어야 한다. 여러 은사와 기질을 가진 다양한 지체들이 교회공동체로 함께 모여 서로 격려하고 용납하는 훈련을 하는 가운데 믿음이 자라고 각자의 삶 속에서도 신앙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교회를 한 유기체로 고안하신 하나님의 배려는 사랑이지 짐이나 부담이 아니다.천국에 가기는 각 개인이 가지만 천국을 이루기는 혼자선 불가능하다. 천국에 갈 사람은 먼저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의 방식을 훈련받아야 한다.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신앙생활은 목적지를 잃은 방랑생활과도 같다. 교회에 참여하기가 번거롭고 싫다고 해서 천국 훈련을 포기할 순 없다. 물론 무턱대고 교회만 열심히 다닌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건 아니다. 그 교회공동체를 통해 실제로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영적 영양분을 흡수하며 일상의 삶 속에서 믿음을 지키고 키워가야 한다.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그분께 매일의 내 삶을 온전히 맡기는 데로까지 나아가야 성숙한 참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인격적인 관계는 상호간에 주고받는 영향력이 없이는 올바로 성립되지 않는다. 교회는 바로 그러한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를 수평적인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더 풍성하게 맛보게 해주는, 하나님께 대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지체들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교회의 역할로 부여된 예배와 교제, 교육과 봉사, 전도와 선교는 모두 공동체적인 활동을 전제로 한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4-25).한 공동체로 모이게 하는 교회라는 구심점이 각 지체들이 각자의 일상 가운데로 흩어져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되는 삶을 지속시켜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성경에서 두세 사람은 증인의 최소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교회공동체를 염두에 두시고는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증인공동체인 교회를 무시한 개인적인 신앙생활만으로는 세상에서 건강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데 있어 무력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에만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진 개개인에게도 꼭 필요한 이유이다.더구나 교회공동체를 무시하는 이들에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권위로 다스림 받고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 또한 누릴 수 없다. 예수님은 교회에 소속된 지체가 죄를 범하면 그를 판단할 최종권위를 교회가 갖는다고 말씀하셨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7).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가려면 교회의 권위를 존중하며 그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규정한 말씀이기도 하다. 성경적인 공동체는 늘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예배 공동체였다. 기도와 말씀묵상을 통해 각자의 골방과 일상에서 드리는 개인 예배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한데 모여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는 더욱 귀하다. 무엇보다 혼자서도 신앙 생활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누리는 사랑과 기쁨의 공동체성을 온전히 경험하기 어렵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 됨과 같이 세상에 있는 신자들의 연합을 원하신 데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11).믿음 이후 공동체적인 신앙생활의 과정이 중요하다는 게 올바로 강조되지 않으면 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을 따라 “교회가 뭐 그리 중요하냐?”며 뛰쳐나가도 말릴 도리가 없다.교회는 단순히 기독교라는 한 종교의 ‘사원’ 같은 곳이 아니다.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관련하여 교회는 이스라엘과 연결되고, 이스라엘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하나님과 교제하며 동거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와 연결된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만나주신 에덴동산이 아브라함의 제단으로,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으로, 그리고 교회공동체로 발전했다. 이것이 장차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사 66:22).교회는 태생 자체가 종교로 출발하지 않았다. 그것은 인류사의 시작과 맥을 같이한다. 그것은 당신이 모태에서, 아니 태초에 에덴동산의 흙으로 창조된 이야기와 연결되고, 현재 당신의 삶과 죽음에 속속들이 아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원초적이고도 본질적인 어떤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존재의 완성과도 깊이 관련된 존재의 정점이기도 하다. 지난 인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전해져 온 각 나라와 민족마다 교회가 세워진 것 또한 예수님이 성경에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라고 예언하신 그대로 이뤄진 선교의 역사이다. 교회를 통해 이 명백한 인류역사의 대로에서 이탈하지 않는 참된 믿음과 구원의 복을 누리게 되길 바란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라고 하는 예수님의 몸 된 공동체, 즉 신랑이신 예수님의 신부 하나를 얻기 위해 온 우주와 인류 전체의 역사를 주장해오셨음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영화나 드라마가 그러하듯 인류 역사라는 대하드라마 역시 서로 사랑하는 신랑과 신부의 혼인식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릴 것이다.“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고전 3:21-23).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교회
교회생활
교회공동체
혼인잔치
천국복음
공예배
하나님 나라의 도래
by R. C. Sproul
2018-11-09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추가 설명이 없기로 유명하다. 더욱이 마가는 마태나 누가에 비해 예수님의 비유를 덜 소개한다. 그러나 마가복음 4장에는 네 개의 비유들이 나온다. 마가는 비교적 긴 내용인 씨 뿌리는 자의 비유로 시작하여 세 개의 짧고 간결한 비유들로 이어간다. 각 비유는 대부분의 비유들처럼 한 가지 핵심 개념을 분명히 제시한다. 이들 세 비유 모두는 하나님 나라에 관한 그 무엇을 가르친다. 마가는 이렇게 기록한다.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막 4:26-29). 씨 뿌리는 비유에서처럼, 이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파종과 씨에 대한 은유를 사용하신다. 그러나 여기서는 씨가 뿌려지는 여러 종류의 토양들에 초점을 맞추고 계시지 않으며 자연에서 벌어지는 놀라운 현상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밤새 비가 내린다. 다음 날에 햇볕이 따뜻하게 비췬다. 발아하여 작고 파릇한 싹이 나온다. 조만간 수확할 때가 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확산이 이 과정과 흡사함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작게 시작하지만, 우리의 관심이 다른 데 가 있는 동안에도 자란다. 씨앗의 성장처럼, 하나님 나라의 확장도 신비한 과정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전개된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감을 느낀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이 내게 별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당신의 나라 건설을 위해 나를 사용하시면 그것들은 영원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언행을 사용하실 수 있다. 한번은 예배 후에 내가 교회 문 앞에 서 있는데 한 젊은이가 다가와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15년 전에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교회에서 내 설교를 들었다고 했다. 그 예배 후에 그는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고 내게서 들은 대답을 그 이후로 줄곧 간직하며 살았다고 했다. “내가 귀가했을 때, 목사님 말씀을 내 머리 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고, 하나님은 그 말씀을 사용하여 저를 목회의 길로 들어서게 하셨어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이제껏 내가 사람들에게 했던 여러 가지 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주거나 상처를 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혼의 상처가 지금까지 남은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 말이 좋게든 나쁘게든 참으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많은 목사들이 사역을 그만둔다. 도덕적인 이유로 떠나는 이들도 있으나, 대부분은 회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떠난다. 그들은 자신이 헛바퀴를 돌리고 있는 것 같다고, 마음을 다해 설교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들은 이 비유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혹은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 3:7)는 바울의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록 설교자가 자신의 말의 결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의 신실한 설교를 사용하실 수 있으며 또한 사용하신다. 때로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우리와 우리의 말을 어떻게 사용하셨는지를 엿보게도 하신다. 여러 해에 걸쳐 나는 수많은 목회자 컨퍼런스와 세미나에 참석해왔다. 다양한 배경을 지닌 목회자들이 자신의 설교 경험에 대해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마다 나는 놀라움을 느낀다. 그들은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준비했으나 정작 강단에서 설교하면 교인들의 반응이 별로였던 경우에 대해 말한다. 또한 그들은 회중들이 여러 해가 지난 후에 그 설교를 기억하여 유익을 받은 사실에 대한 이야기도 한다. 그들이 보잘것없게 여긴 것을 하나님은 큰 유익을 위해 사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내 경험이기도 하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방식이다. 종종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봉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씨를 뿌리고 잠자리에 든다. 우리가 자는 동안 하나님이 씨앗을 발아시켜서 생명이 나오게 하며 마침내 온전한 수확을 거두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친히 거두신다. 우리는 봉사의 결실을 곧바로 보려는 생각을 억제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그 결실을 보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등불을 밝히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원하는 대로 사용하실 것이다. 원제: The Coming of the Kingdom 출처: www.ligonier.or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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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나라
마가복음
비유
설교
씨뿌리는자비유
직업을 선택할 때 해야 할 질문들
by John Piper
2018-11-09
1.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곧 모든 것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이 빛나시도록 이 직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2. 이 직업을 선택하면 나를 거룩하게 성장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3. 이 직업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소중히 여기는 데 도움이 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빌 3:7).4. 이 직업이 왕이신 주님을 거역하는 생각이나 감정, 행동을 부당하게 강요하지는 않는가?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고전 7:23).5. 이 직업은 내 삶의 패턴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 곧 아직 복음이 닿지 않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존귀하신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을 완수하는 데 의미 있게 참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가?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6. 이 직업은 내게 있는 최고의 에너지를 쏟을 만한 가치가 있는가?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전 9:10).7. 내가 이 직업에 수반되는 활동과 환경의 영향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존귀하게 되도록 내가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인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8. 이 직업이 나로 하여금 철저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발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직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빛을 상실하게 될 것인가?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9. 이 직업의 목표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당당하게, 신실하게 헌신하고자 하는 나의 삶의 방향성에 부합하는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10. 이 직업은 내가 이 세상에서의 짧은 인생을 마칠 때 삶을 제대로 투자했다고 느끼게 할 만한 일인가?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약 4:14).11. 이 직업은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으시고 값을 치르시고 사셨다는 나의 신앙에 부합하는가?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사 43:7). “[너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12. 이 직업은 만물이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한다는 궁극적인 진리에 부합하는가?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만물 위에 가장 뛰어나신 하나님을 위하여,존 파이퍼 목사원제: Some Questions to Ask When Considering a Job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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