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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명에 대한 세 가지 진실
by Ivan Mesa
2018-11-22
“저는 이 일에 소명을 받았습니다.”당신은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보통 자신이 어떤 일을, 왜 하고 있는지 설명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이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내적 부르심을 고백할 때 사용하는 신비로운 표현이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를 설명해 주는 구체적인 소명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확신을 느꼈다. 나는 삶의 목적지가 분명한 ‘인생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속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나는 혼란과 의문 속에서 소명에 대한 이해가 필요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많은 이들로부터 지혜를 구했다. 이 글에서 나는 소명에 대한 진실을 소개하고자 한다.1. 당신의 소명은 스스로를 위한 것이 아니다의심할 여지 없이 각 사람은 소명과 은사를 받았다. 소명에 대한 참된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개인의 만족을 위해 소명을 받지 않는다. 즉, 소명은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롬 12:4–5; 고전 12:12–31; 벧전 4:10–11). 바로 이 타자에 대한 초점은 팀 켈러(Tim Keller)가 ‘일과 영성’(Every Good Endeavor)에서 말했듯이 우리 시대의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본위적인 정신과는 잘 들어맞지 않는다. “우리는 자아 성취나 권력을 얻기 위해 직업을 선택하거나 업무를 수행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어떤 일을 하도록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힘을 부여 받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을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팀 켈러는 “무엇이 내게 가장 큰 수익을 얻게 해 주고 가장 높은 지위를 안겨다 줄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내가 가진 능력과 기회로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살피면서 다른 사람들을 가장 잘 섬길 수 있는가?”라고 묻도록 격려한다.그러나 우리는 직업과 소명을 혼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예를 들면, 목사와 같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둘의 개념이 뒤얽혀 있을 수도 있다. 소명은 종종 사회, 가족, 교회처럼 보다 넓은 영역들을 망라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진 베이스(Gene Veith)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어떤 이는 더 이상 직장에 다니지 않지만, 할아버지, 의식 있는 시민, 또는 교회의 장로로서 여전히 소명을 추구할 수 있다. 또 자녀 양육에 헌신하기 위해 직장을 포기하는 어머니, 일할 필요가 없이 부유하여 구제에 전념하는 사람, 몸이 불편하여 집 안에 머무르면서 크리스천으로서 자신의 에너지를 모두 기도에 쏟아 붓는 노인 등 자신의 소명을 직장 이외의 영역에서 발견하는 이들도 있다.”젊었든가 늙었든가, 몸이 약하든가 건강하든가, 성공적이든가 직장을 잃었든가 하는 상태를 떠나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소명을 수행할 수 있다. 당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하나의 단순한 방법은 그저 주님이 주신 은사와 능력으로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가장 잘 섬길 수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있어 이 소명은 직업을 통해 발견될 수도 있다. 또 다른 이들에게는 그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정, 이웃, 교회를 통해 발견될 수도 있다.2. 당신의 소명은 본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소명은 우리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소명은 부르심을 받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결코 우리는 자신을 부를 수 없다.하지만 내가 꽉 붙잡지 않으면 이 소명이 빠져나갈 것이라는 불안감이 생긴다. 따라서, 결단력이 부족한 자신에 대해 염려하게 된다. 또 하나님이 나를 어떤 일에 부르셨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나의 영안은 열려 있지 않기 때문에 방향을 상실하게 되거나 인생을 낭비하게 될까 봐 두려워한다.물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는 인간적 행위가 개입된다. 하지만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인도하심과 돌보심 아래에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떤 교회에 나갈 것인지, 어떤 도시에 살 것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것인지를 계획하지만, 그 발걸음을 인도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잠 16:9).또 하나님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소명을 확증해 주신다. 베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하나님은 여러 방편들을 통해 일하시므로 종종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혹 그들의 직업을 사용하여 소명을 확장시키신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다 보면, 그들로부터 인정과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때가 있다. 이때 당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시고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신”(엡 2:10) 신실하신 아버지가 계심을 신뢰해야 한다. 이 ‘선한 일’은 여러 시간에 걸쳐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다양한 소명들 속에서 이루어진다.우리는 모든 일에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다른 이들의 소명을 존중하고 함께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가운데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처럼 우리도 자신의 소명을 수행하는 것이다.3. 당신의 소명은 미래 시제가 아니다당신의 삶을 들여다보라. 소명은 죄를 제외하고 현재 당신의 삶을 이루고 있는 무엇이다.하나님은 선하신 계획 안에서 당신을 가정, 이웃, 교회, 직장에 속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음에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내일에 대해 불안해 하지 말라. 그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도록 우리를 부르셨음을 신뢰하기 바란다(마6:25-34). 나는 이 구절이 부분적으로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기 위해”(살전 4:11)라는 말씀과 같이 우리가 씨를 뿌린 곳에서 꽃을 피우게 된다는 내용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웬델 베리(Wendell Berry)의 좋은 삶을 위한 즐겁고 평범한 공식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속도를 늦추라. 주의를 기울이라. 좋은 일을 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자신이 있는 곳을 사랑하라. 자신이 거하는 곳에 머무르라. 적은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더 많이 즐기라.”거룩한 야망이나 미래에 대한 계획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에 있어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당신은 현재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는 데 힘써야 한다. 갈망의 변화나 타인으로부터의 제안, 혹은 상황의 변화 등 하나님이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일을 하도록 부르시느 그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주어진 자리를 지켜야 한다. 나는 소명이 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소명은 변할 수 있고 실제로 종종 변화한다. 우리가 변하는 것처럼 삶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소명은 종착역이 아닌 과정에 속한다. 그러나 어느 친구가 내게 말했듯이 “무엇인가 채우려고 빈틈없이 계획하기 보다는 현재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고 동요하는 세대에서 더 겸손하고 뿌리깊은 신앙, 보다 신실하고 꾸준한 사람들, 즉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는”(고후 5:9)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당신이 지금 이 화면에서 눈을 들었을 때 깎아야 할 잔디, 갈아 주어야 할 기저귀, 돌봄이 필요한 교회 구성원, 친구를 필요로 하는 낯선 이를 보게 된다면,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 필요들을 채워 주고 당신의 소명을 수행하기를 권한다.또한 소명에 대한 시기를 경계하고 신실한 일상의 단조로움을 폄하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섬기도록 오늘 당신을 부르셨다. 하나님이 결코 우리를 내버려 두시거나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약속하신 말씀을 기억하라(히 13:5). 그때 우리는 고통, 실망, 실패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신실한 종아마도 당신은 나와 달리 소명에 대한 혼란으로 영혼의 어두운 밤들을 겪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신뢰한다면, 당신에게는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할 소명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삶의 평범함 속으로 들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라. 바로 오늘, 우리 모두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되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Things Your Calling Is Not번역: 주영식
영성
신앙과소명
진실
직업
신실한종
그리스도
팀켈러
일과영성
진베이스
구원의 확신이라는 고민스러운 문제
by John Piper
2018-11-22
구원의 확신은 많은 크리스천들에게 고민스러운 문제다. 여기서 고민하게 되는 점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객관적 사실들의 진실 여부가 아니다(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신지,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위해 죽으셨는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아나셨는지, 그리스도가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하시는지 등). 이 객관적 사실들은 우리의 신앙에서 전적으로 중요한 기반이 된다. 하지만 실제로 구원의 확신이라는 문제에 있어 우리를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내가 개인적으로 구원을 받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주관적 확신이다.구원의 확신이 있는가?이는 ‘내가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고민으로 압축된다. 이 문제가 우리를 고뇌하게 만드는 이유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많은 이들이 자신은 구원받는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따라서 사람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이 따라온다. 나는 진정 구원받는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가? 나의 믿음은 진짜인가? 나는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는 믿음에 대한 잘못된 정의를 내리고 있는데, 이는 문제를 더 악화시킨다(물론, 그들은 선의로 그럴 수 있다). 즉, 구원받는 믿음이란 어떤 진리들을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결정에 불과한 것이라고 잘못 정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고 나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진리를 받아들이기로 결정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변화를 통하여 믿음의 참됨이 드러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함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얻으려 한다. 그들은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라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구원의 확신을 갖는 데에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게 된다. 이는 특정한 말씀을 부인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그들이 갖고 있는 최소한의 믿음에 대해서조차도 계속해서 고민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따라서, 이 같은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진리를 잃게 한다. 또한 가장 최악의 경우에는, 구원의 확신을 갖지 않아야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때때로 구원의 확신을 줄 것이다.새로운 빛, 새로운 안식우리는 기적적이고 심오하며 변화를 일으키는 믿음의 속성을 축소시키는 말아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참되다는 것을 보여주는 변화된 삶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거부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와 싸워야 한다. 이 싸움은 나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라는 객관적 보증과, 바로 그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주관적 보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객관적 보증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신"(히 10:14) 십자가 위에서의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주관적 보증은 ‘성화되는 과정’을 통해 밖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다.다음으로 우리는 구원받는 믿음의 두가지 정의를 깨달아야 한다. 첫째로, 믿음은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광(또는 아름다움)을 보는 '영적인 시각'이다. 즉, 죄인을 위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과 부활의 역사를 듣거나 읽게 될 때, 이 복음은 여러분의 마음에 그 자체로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확신하기 이전에도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에게는 이런 일이 있다. 나는 이 깨달음을 고린도후서 4장 4 절에서 얻었다. 바울은 사단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라고 했다. 믿음이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분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비추어 주시는 초자연적인 ‘빛’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 전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이 역사하심으로써 일어난다.믿음은 이 영광의 복음 안에서 ‘보장된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보장된 안식'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보장되지 않은 안식‘을 가진 사람들(구원받지 않았음에도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빛나는 영광을 보기 위해 그 분께로 나아오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영원한 벌에서 구원받기 위해 믿음을 선택할 뿐, 그리스도를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분으로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보장된 안식을 받을 없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영광과 복음의 빛을 보는’ 자들에게는 안식이 보장된다.빛이 비추는 곳우리는 복음의 빛이 드러나는 십자가와 또한 그분의 지속적으로 행하시는 사역을 계속 바라봐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엡 1:18). 더 나아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요한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국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이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이것이 우리 안에 풍성히 임하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Agonizing Problem of the Assurance of Salvation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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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못하면 어쩌죠?
by Keith Getty & Kristyn Getty
2018-11-22
우리는 “저는 노래를 못해요.”라고 말하는 사람을 종종 만난다. 이는 “노래하려 할 때 제가 원하는 소리가 입에서 나오지 않아요.”라는 말이다.어쩌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당신일 수도 있다. 당신은 어릴 때 노래하는 대신 입만 움직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기억할 수도 있다. 아니면 학교나 교회 합창단원은 당신이 가진 은사와는 그다지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도 있다.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마음만 있다면 당신은 노래할 수 있다. 하나님은 노래하도록 당신을 설계하셨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만큼 노래를 잘 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주셨다. 하나님은 정확한 음정보다 진심에 더욱 많은 관심을 쏟으시는 분이다. 기억해야 할 사실은 크리스천의 노래는 입술이 아닌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엡 5:19).하나님은 모든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신다나의 딸들이 함께 노래할 때, 첫째가 둘째보다 자신감에 있게 노래하고, 둘째는 막내보다 음정이 더 정확하다. 이런 현상은 이들이 자라면서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요점은 다음과 같다. 부모의 귀에는 자녀들의 모든 목소리가 중요하고 소중하다.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 역시 우리가 노래한다는 사실 자체와 우리가 무엇을 노래하는지에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가 얼마나 노래를 잘하는지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으신다. 교회에 전문성과 실력을 갖춘 합창단원들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의 진정한 합창단은 회중이다. 진정한 합창단은 심사가 필요치 않다. 모든 성도가 참여할 수 있고 또 참여해야만 한다.이러한 회중 합창단의 아름다움은 찬양으로 우리 목소리와 마음이 하나가 된다는 데 있다. 진리를 함께 노래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은 진정 행복한 일이다.나는 얼마 전에 미국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는 중국 선교사를 만났다. 우리는 함께 찬양을 불렀다. 그는 찬양을 마친 뒤, 성도들과 함께 자유롭게 노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에 대하여 말했다. 그가 살고 있는 중국에서는 찬양에 대한 강력한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 다시 노래하기를 온 마음으로 얼마나 기다렸던지요!”라고 감격하며 말했다. 당신의 목소리가 ‘전문가’ 수준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고백자’ 수준에는 속할 것이다.가진 것으로 최대한 노력하라그러나 역시, 우리가 연습할수록 더 잘하게 된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싶다. 그리고 우리는 진정으로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걷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걷기 위해서는 먼저 발로 서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말하기를 배우는 일에는 시간이 들고,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입을 열고 소리를 내야 한다. 음정에 맞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배우려면 시간이 들고, 우리는 노래를 연습함으로써 더 잘할 수 있게 된다.만약 자신의 음정이 한계에 도달해 노래에 조금 못 미치는 상태라면, 약간의 유머 감각이 유용한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모든 음을 조금씩 틀리게 부르는 특별한 은사를 갖고 있다(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거나 칭찬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격려하고 찬양하기 위해 노래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틀린 음을 웃어 넘기고 계속 노래할 수 있다.우리 밴드의 일원인 자크 와이트(Zach White)는 자기 아버지가 가족들에게 들려준 찬양에 대한 영감을 우리와 나누었다. 그의 아버지는 언제나 열정적으로 회중과 함께 노래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는 사실 세 음만 낼 수 있었다. 이름과 어울리지 않게 참 적은 음만 낼 수 있던 것이다(자크 와이트의 아버지와 이름이 같은 베리 와이트는 유명한 가수이다-역주). 그 세 음 마저도 음정이 정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회중 찬양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 것이다!크리스틴(Kristyn)의 노래를 14년 동안 가르친 킴 우드 샌더스키(Kim Wood Sandusky)는 여러 장르의 가수를 수십 년 가르친 전문가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는 모두 가수다. 우리 중 누군가는 아름다운 목소리와 정확한 음정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지만, 누군가는 자기 영혼으로 노래할 은사를 가졌다.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는 가수이다.”건강상 또는 선천적 문제가 있어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말할 수 없어 손 또는 하나님이 주신 다른 방법으로 노래할 수도 있다. 이는 모든 입술이 하나님을 향해 노래하는 그날까지 한마음이 되어 당신에게 주어진 방법으로 공동체를 축복하며 노래하는 방법이다. 우리는 회중이 노래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수화 사역에 감사를 표한다.교회여, 우리 함께 노래하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If I Can’t Sing?번역: 하늘샘
영성
예배
노래
목소리
가진것
최대한
노력
하나님
소중히
고백자
복음을 세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by Russell Moore
2018-11-21
딱 세 단어만 사용해서 비그리스도인에게 복음을 설명할 수 있을까? 몇 주 전에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 이런 질문을 올렸다. 그때 나는 "세 단어로 복음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에게는 성경 66권이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더 큰 도전이 되어, 그 질문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결론적으로 말해, 나는 세 단어로 복음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세 단어를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면 말이다. 그 세 단어는 바로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1. 주(Lord)‘주’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신성을 가리키는 말로서, 하나님은 통치하는 왕이시며 사랑의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곧 창조주로서 그분이 가진 주권을 우리에게 드러내신 일에 대한 의미를 포함한다. 만물이 다 예수님으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다(요 1:1-5; 골 1:16).또한 이 단어는 우리 생명의 절대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우리 스스로를 단절시키면서, 다른 주인들이나 황제들, 가령 파라오나 가이사와 같은 우상들을 지속적으로 선택하거나 만들어 냄으로써 인간이 처하게 된 곤경도 지적하는 의미를 가진다.2. 예수(Jesus)다음으로 ‘예수’라는 이름이 가진 의미는 이렇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1:21). 누가 말씀하시는가? 바로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누구에게 말씀하시는가? 다윗 혈통, 아브라함의 자손인 요셉에게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구원자를 보내시는 사건과 또한 그 이면에 있는 언약의 역사를 전달하는 메시지다. 이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지금 이 사람으로 집약되고, 이 사람이 바로 아브라함의 씨이며 다윗의 자손임을 전달한다.‘예수’라는 단어는 ‘구원’과 ‘죄’의 정의를 필요로 한다. 왜 우리에게 구원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그 둘이 함께 만나는 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사실을 의미한다(롬 1-3장). 이는 우리 죄에서 기인한 저주와 예수님이 어떻게 대속과 희생을 통해 그 저주를 받으셨는지에 대한 설명을 함축한다.또한 ‘예수’라는 이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백성’이라는 구절을 정의하는 일이 필요하다. 온 우주를 통치하는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나셨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그분은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 중에 거하시지만, 죄는 없으시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실 수 있고, 하늘의 성전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보혈과 기도와 생명으로써 중보하실 수 있다. 이는 곧 하나님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라고 반복해서 약속하신 그 언약의 말씀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하나님의 모든 약속들은 예수님 안에서 ‘예’와 ‘아멘’으로 나타난다(고후 1:20).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의 상속자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다면, 그 약속들은 완전히 우리의 것이 된다(갈 3:29). 하나님의 약속 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3). 이제 우리 모두는 예수님 안에서 “더 이상 외인도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엡 2:19)이다.성령에 의해 머리와 몸으로 연합된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예수’라는 단어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구원받아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3. 그리스도(Christ)마지막 단어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성(last name)이 아니라,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의 칭호다. 무엇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의 성령이다. 누구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하나님 아버지다. 무엇을 위해 기름 부음을 받았나? 왕권이다. 예수님은 아담과 다윗을 통해 예표되었던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합법적으로 소유하신 언약의 왕이시다. 그러므로 이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현실이 되며, 더불어 미래에 완성될 소망으로 다가온다. 이 왕권은 죽음과 지옥에서 해방된 온 가문의 장자로서(롬 8:29),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입증된다.‘그리스도’라는 단어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된 구원을 되돌아보았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을 되돌아보게 된다. 또한 우리는 창조된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예수님의 공동 상속자로서 미래를 바라본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만물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보여 주시고(엡 1:10-11), 우주적 사명의 완성을 그의 아버지께 넘겨 드림으로써,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도록 역사하신다(고전 15:28).우리는 사방에서 타락으로 파괴된 모습을 보며 신음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성령으로 빚어지고, 곧 도래할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교회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감으로써 현존하는 그분의 세계로 기쁘게 들어간다.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하고 봉사하며, 오실 왕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로서 세상을 향해 나가라는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간다.물론 할 말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성경 66권이 필요하다. 또한 성경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우리를 가르치시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우리는 많은 말씀이 필요하며,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말씀을 주신다.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이 세 가지 단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대화를 시작할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무릎을 꿇고 그 이름을 고백하게 될 것이다. 이 말씀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11).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You Explain the Gospel in 3 Words?번역: 고갑균
복음
변증
주
예수
그리스도
성경66권
하나님의음성
공동상속자
신성
절대근원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가?
by Dane Ortlund
2018-11-21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린양이나 비둘기 같은 영혼과 성품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크리스천의 마음이다”라고 기록했다. 우리는 그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많은 사람들이 에드워즈를 떠올릴 때 온유함을 떠올리지는 않는다. 에드워즈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주제는 아마도 ‘열정적인 청교도’일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은 온유함이 오늘날 교회가 필요로 하는 덕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온유한 성품은 오늘날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많이 경시되는 미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에드워즈는 그의 다이어리에 “나의 성품에 아름다움과 광택을 더하기 위해 더 많이 필요한 한 가지의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온유함이다. 나에게 온유함이 더해진다면, 나는 더욱더 다듬어졌을 것이다”라고 기록했다.그에게 이 말이 적용되는 진실이었다면, 그 말은 현재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온유함은 남성다운 것인가?어떤 크리스천 남성들은 온유함에 대한 저항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온유함을 여성스러움과 동일하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강함과 온유함은 상호배타적인 가치들로 보일 수 있다. 우리가 남자답게 가족과 교회에서 리더가 된다는 상상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온유함을 아주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온유함을 남성다움보다 앞세우는 데 있지 않다. 남성다움이라는 가치를 예수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먼저 올바르게 정의하는 데 있다. 결국 진정한 남성다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환전상들을 예배당에서 내쫓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자신의 제자들이 내쫓으려던 어린아이들을 기쁨으로 안아 주셨다(마 19:13-15). 이방인들에게 온유하게 대하셨고, 친구의 죽음에 대해 눈물을 흘리셨다(요 11:35). 또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남자답고 건강한 애정 표현을 아끼지 않으셨다. 요한복음 13장 23절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다고 기록한다. 이와 동일한 관계가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도 존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18).그러나 예수님의 남성다움은 자신의 신부인 교회를 위해 희생적으로 목숨을 내어 준 사건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사도 바울은 남편 됨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남편의 머리 됨과 예수 그리스도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일이 동일한 희생임을 언급하고 있다(엡 5:25-33). 이러한 희생은 남자답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남자다움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준다.미숙한 남성은 강압적이고, 부주의하며, 사랑이 없는 리더가 될 수 있다. 진정한 남자만이 온유할 수 있다.위풍당당함과 온유함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리더가 되고 싶어 하는 남성들이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그들이 닮아가는 형상인 그리스도의 영광이 경외로운 장엄함과 부드러운 온유함을 함께 결합시킨다는 사실이다.에드워즈는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장례식 설교에서 성도들이 천국에서 보게 될 그리스도의 모습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무한한 장엄함과 위대함만이 아닌 무한한 자비함과 낮아짐과 온순함을 특징으로 한다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국에서 그들을 격려하고 끌어안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위대함이 그들에게 공포가 아닌 기쁨과 놀라움이 배가 되는 일일 것이라고 설교했다.조나단 에드워드가 보기에 진정한 남성다움은 딱딱하고 강인한 겉모습과 부드럽고 연약한 내부를 가진 상태가 아니었다. 도리어 강철 같이 단단한 내부를 통해 아름다운 온유함이 겉모습으로 순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남성다움은 마초적인 모습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부풀리고 불완전한 모습을 완화하려 가식적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편으로 온유함은 비굴한 것이 아니다. 온유하지 않은 남성다움과 남자답지 않은 온유함은 피해야 한다.우리는 용감하지만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강인하지만 부드럽고, 남자답지만 온유한 삶을 쫓아야 한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성령님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하다.합당하게 행하기에드워즈는 에베소서를 통해 크리스천의 삶에서 온화함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논증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신 일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 후에, 이 사건이 개인 행동에 대해 무슨 뜻을 가지는지 설명한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_____과 _____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1-2).사도 바울이 빈칸에 어떠한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희생과 열정 또는 담대함과 용기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겸손’과 ‘온유’라는 말을 사용했다.에베소서의 1장에서 3장의 결론이 바로 이 부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 요점을 이해했다. 결론적으로 에베소서 1장에서 3장까지의 아주 높은 신학적 담론은 우리를 평범한 크리스천의 일상생활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화함의 향기가 있는 자리로 초대한다. 하지만 그 향기는 결코 일상적이지 않다. 그것은 놀랍고 초자연적이다. 왜냐하면 그 향기를 내뿜을 수 있는 자리까지 성령님이 인도하시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ant to Be Like Jesus? Be Gentle번역: 조현빈
영성
영적성장
에드워즈
온유함
남성다움
온화함
겸손
온유
하나님은 아무나 설교자로 부르지 않으신다
by Matt Hodges
2018-11-21
콜로라도의 한 교회가 올린 구인광고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은 스티븐 퍼틱(Steven Furtick)과 같이 최고의 설교자가 작성해 준 설교 원고를 외워서 읽을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당신은 어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강력한 힘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왜 그 설교자를 모방하지 않죠?”라는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물론 그들이 갖는 의문이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즉, 교회가 목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설교를 통한 특별한 의사소통 기술이다. 특히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하는 개척 교회 목사들이 이 논리에 취약한 편이다.비교의 위험교회 개척자는 늘 불안감을 안고 산다. 자신을 비슷한 형편에 놓인 다른 목사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우리는 날마다 온라인(소셜미디어, 팟캐스트, 설교 클립 등)을 통해 훌륭한 설교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온라인에서 듣거나, 읽은 설교들과 나의 최근 설교를 비교하게 된다. 물론 항상 자신의 설교가 그들보다 더 탁월하길 원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만큼 큰 좌절과 빠른 포기를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우리는 앞서 말한 설교자 구인광고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고 싶다면, 내가 ‘그 설교자’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설교자의 타고난 기질, 카리스마,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전개 방식, 확신에 찬 말투 등이 나에게는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설교자처럼 재미있게 말할 수 있지?’, ‘나도 그 설교자처럼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말겠어’ 등의 생각들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물론 탁월한 설교자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회 개척자로서 최고의 설교를 위한 노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특히 설교에 대해 특별한 은사를 가진 설교자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운다는 것이 모방하는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한다.아무 생각 없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은 자신의 강단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를 약화시키는 행동이다. 다른 설교자를 무조건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길 때 기억하면 좋을 두 가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한다.1. 설교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선 행위이다당신은 커뮤니케이터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설교자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일반적인 연설가 혹은 커뮤니케이터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설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갈 때 …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바울은 설교자의 확신에 찬 어조와 설득력 있는 언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행 17장). 바울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설교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궤변가들과 수사학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설득을 위한 스킬’들이 자신의 설교에서는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설교는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능력이 있었다.우리는 종종 다른 설교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설교를 꾸미려는 욕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는 설교의 능력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다.2. 하나님은 양떼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셨다 나는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가 교회 개척자들을 방 한 가득 모아 놓고 팀 켈러(Tim Keller)를 따라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당신은 그리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팀 켈러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바라셨다면, 하나님은 그분을 당신 교회의 목사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은 주로 지역 교회를 통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실 때는 설교단도 함께 맡기신다는 의미이다.이 말을 믿기 어려운가? 당연하다. 그러나 당신이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수차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당신은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살고 있는 장소나 직장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당신을 세우신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에게 맡기신 설교단에 대해 의심하는 목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 당신을 통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계획하시고, 당신을 선택하셨다. 만약 다른 사람을 원하셨다면, 그 사람을 당신의 교회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모방이 아닌, 성숙설교자로서 배움과 성장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종종 배움과 모방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아마도 당신의 교회가 생각만큼 부흥하지 못하거나, 다른 교회들이 먼저 부흥,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설교에 필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지금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마음속의 거짓과 싸우고,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을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선택하셨다. 당신이 믿는 그분은 가장 선하신 분이며,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이 당신과 교회의 주권자이심을 알고 설교하라. 분명 성령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주셨음을 알고 설교하라. 당신의 가치는 설교에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이 가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설교하라. 당신은 매주, 매순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특권을 가진 설교자임을 잊지 말고 설교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Didn’t Call Someone Else to Preach to Your Church번역: 김형용
목회
설교와교육
비교의위험
설교의능력
성령의역사
모방이아닌성숙
특권을가진설교자
배움과성장
팀켈러
구약과 신약의 그리스도
by Burk Parsons
2018-11-20
구약과 신약의 관계에 대한 다음과 같은 고대의 금언을 들은 적이 있다. “신약은 구약 속에 감추어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드러난다.” 이때 ‘감추어지다’라는 단어와 ‘드러나다’라는 단어가 신구약의 관계를 정확히 묘사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이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얻는다. 즉 신약은 구약에서 씨앗으로 심겨져 있고, 구약은 신약에서 활짝 꽃피운다는 진리이다. 그럼에도 신약은 단순하게도 ‘새로운 것’이라는 뜻으로 ‘신약’이라고 불린다. 신약은 단지 과거의 계시에 대한 주석이 아닌 새로운 계시이다. 신약은 단순히 초대교회 사도들의 구약에 대한 묵상을 기록해 놓은 전집이 아니다. 하나님은 실제의 시간과 공간에서 오랫동안 기다렸던 메시아와 그분의 약속된 나라, 그리고 새 언약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을 구속하시고 죄악 된 인간들을 감독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하나님의 계속되는 계시는 구약을 이해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사건은 아니었다.하나님은 과거에 행하셨고, 현재 행하고 계시며, 미래에 행하실 모든 일이 구약성경대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신약의 여러 지면을 통해 주권적으로 상기시키신다. 다시 말해, ‘말씀대로’라는 신약의 언급은 결코 가볍게 생각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계시의 진실성과 창조부터 영화까지 이어지는 구속사라는 파노라마를 보게 된다. 또 우리는 그 가운데 나타나는 신구약의 아름다운 조화를 바라볼 수 있다. 창조부터 영화까지의 모든 일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언약에 따른 것이다. 예수님이 엠마오로 향하던 길에서 두 제자에게 모든 성경에서 자신과 관계된 일들을 해석해 주실 때 직접 제시하셨던 내용을 하나님은 율법서, 선지서, 성문서라는 구약의 세 부분에 걸쳐 웅장하게 제시하신다.그러나 이 사실은 예수님이 구약의 모든 이야기에 숨어 계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찾기 위해 건전한 주해를 희생해가면서까지 구약의 모든 페이지를 파고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은 전체 구약이 그리스도를 가리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통해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그리스도가 성경의 모든 배경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계심을 알고 구약과 신약을 읽어 나가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hrist of the Old and New번역: 매일배움
복음
예수그리스도
구약
신약
감추어지다
드러나다
말씀대로
초대교회
계시
리더에게는 어떤 친구가 필요한가?
by Matthew J. Hall
2018-11-20
리더가 되는 일은 외로운 모험의 길을 걷는 것일까? 교계 안팎에서 리더십에 대한 권위 있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리더에게는 대체로 외로움이 따름을 알 수 있다.리더는 가끔 홀로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리더로 하여금 의사 결정과 중압감의 부담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CEO의 절반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교회 리더들도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교회 리더들에게는 짊어져야 할 고유한 부담들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우정은 필수요소이다. 나는 제한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부여 받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 축에 속한다. 나는 경험과 반성을 통해, 즐겁고 효과적인 리더십을 위해서는 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정은 운이 좋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 그 이상의 것이다. 우정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준다. 우정으로 인해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 감사하게도 교회 리더들도 그들을 위한 우정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역사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의 현명한 말을 들어보자. “위인들의 삶에서 우정의 질이나 결여는 그들에 대해 다른 특징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나는 종종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에서 살며, 우리가 오래된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라.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의 소명을 우정에 의존했다.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배워 나갈 세 가지 교훈이 있다.1. 참된 친구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 준다우리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닮았다. 그리고 그런 우정의 기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우정의 행위로써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진실을 말하기를 요청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서 경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가장 참되고 최상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우정은 이 진실을 반영한다.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 그리고 복음에 대해 진실을 말해 준다. 리더십은 판단을 내리고 현명한 조치를 내리는 일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리더가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나는 종종 나의 판단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했거나 불완전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때는 더 정확한 관점을 제공해 줄 참된 친구가 필요하다. 누군가 리더를 실망시킬 때, 그들을 해고하거나 관계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친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친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 대해 최선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필요한 경우, 친구는 공동체의 사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와 경고를 대신해 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친구가 필요하다. 오직 진정한 친구만이 리더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해 줄 수 있다.또한 친구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리더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취약하다. 죄와 교만은 자신의 약점들은 과소평가하고, 능력과 덕목들은 과장하는 일을 즐겨한다. 간혹 아부하기 위해서나 혹은 당신을 실망시킬까 두려워서 이런 사각 지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선지자적 용기를 가지고 리더의 책임을 지적한다. 당신은 친구를 교만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켜 주는 은혜의 선물로 보는가?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크리스천 친구는 우리에게 복음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우리 앞에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용어들로 복된 소식을 상기시켜 준다. 친구는 리더에게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매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은, 심지어는 리더로서의 역량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의 성공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임을 일깨워 준다. 진정한 친구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히 지속될 하늘의 것에 희망을 갖도록 우리를 도와준다.2. 참된 친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인다우정은 선호적인 사랑이다. 기독교적 우정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더 선호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참된 우정을 갖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은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문화를 요구하는 제도들과 조직들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복도에서, 회의에서, 사교석상에서 동료들을 만난다. 온정, 예의, 우호적인 선의의 문화는 분명 건강한 조직적 기풍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대화들과 순수한 거래 관계를 뛰어 넘는 참된 우정은 보기 드문 선물이다.그 이유는 만물의 태초에 기초하고 있는 오래된 진실이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창조되었다. 이 계획의 중심에는 사랑의 역동적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이기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거래의 기회로 삼게 한다. 그리고 안정, 동의, 확인, 쾌락을 위한 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화하게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 관계 속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은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우정의 상업화는 우리로 하여금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한다. 심지어 사람들을 일종의 서비스로 바라보게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있는 기쁨의 교제를 본받는 대신 우정은 훨씬 더 가치가 떨어지는 목적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우정에 있어 왜곡되고 편향되어 있다. 교회 리더들은 이기심이 교묘하게 우정으로 가장하는 구체적인 방식들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정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치명적인 모조품이다.3. 참된 친구는 당신의 리더십이 실패했을 때도 곁에 남는다일정한 시점이 되면 당신의 리더십은 약화될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패는 이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친구들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공의 시절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회사가 망하고 조직이 파산하거나 또는 당신이 더 이상 역량과 기술로 명성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성경에는 우정을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인생을 살다가 위기의 순간을 만나면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과 함께한다. 형제자매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정에는 우정을 훨씬 달콤하게 만드는 자발적인 성질이 있다. 친구는 우리를 거부하고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적인 역학은 우정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을 위한 잠재력이 드러나기도 한다.당신이 만일 리더이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다고 자만한다면, 너무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한편, 직업적 관계의 피상성과 기회주의적 성격을 너무 의식하여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훨씬 더 성경적이고 현명한 전략은 현실주의적으로 관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당신의 외로움을 악화시키고, 타인을 불신하게 만들며, 우정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현실주의는 당신에게 참된 우정의 가치를 밝은 눈으로 보게 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로 인해 실망감을 느낄 때, 환멸로부터 당신을 지켜 줄 것이다.참된 친구는 모든 이들이 떠났을 때에도 계속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충성과 신실함은 우리에게 더 큰 실재를 보여 준다. 즉 우정을 완전하게 지니고 계신 분, 바로 하나님이라는 실재를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한 찬송가의 가사가 이를 확실히 보여 준다. “죄인들의 친구 예수여! 내 영혼의 사랑 예수여! 친구들은 날 버리고 대적들은 날 해하나 구주는 날 온전케 하시네.”면식 관계와 친구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친구의 수는 적을 것이다. 사회관계망(SNS)과 유사 우정의 시대 속에서, 우리를 쉽게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유해한 모조품들이 존재한다. 당신에게는 아마도 수백 명의 ‘지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서넛 정도 밖에 없을 확률이 높다. 이 말이 실망스럽게 들리는가? 당신은 아마도 우정의 본질을 오해했거나, 잘못된 기대들로 인해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많은 이들이 C. S. 루이스가 우정과 교제를 구별한 설명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동료들에 의해 발생한다. 곧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고유한 보물(또는 부담)이라고 믿었던 어떤 통찰이나 관심, 혹은 선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순수한 교제로부터 출발한다.”다시 말해, 우정은 “뭐라고요? 당신도요? 나는 내가 유일한 줄 알고 있었는데”라는 말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Kind of Friend Every Leader Needs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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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은 성경적이고 아름다우며 실용적인 교리
by Jeff Robinson
2018-11-20
일부 교인들에게 ‘예정’이라는 단어는 변덕스럽고 나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은 자기 임의대로 인류 중 얼마는 구원하시고, (일찍 생을 마감한 영유아까지 포함하여) 죄인들은 영원한 멸망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다. 그래서 크리스천 중에는 예정을 저주로 여기는 이들도 있다.이런 교회의 소그룹 모임에서 목사가 예정에 대해 언급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그 목사는 쫓겨나거나 주먹다짐 혹은 그 이상의 심한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예정하시는 하나님은 반(反)민주주의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정을 청교도적인 종교의 산물이요, 16세기의 광적인 목사가 만들어 낸 교리적인 창작물로 여긴다. 그 후손들이 예정 교리에 근거해서 신학적인 ‘주의’(ism)를 만들어 냈다고 생각한다.이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교회들은 예정을 크리스천에게 중요한 성경 교리를 일깨워 주는 소중한 단어로 생각한다. 예정은 이 세상의 분자나 원자 혹은 그보다 더 작은 미세한 개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섭리적인 통제 속에 존재한다는 위로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주는 말이다. 그리고 예정이 주는 위로와 확신은 구원의 문제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성경적인 교리미국 종교 역사에서 몇 가지 교리들은 다양한 논쟁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예정 교리는 가장 분명하고 변증할 필요가 없는 교리이다. 왜냐하면, 에베소서 1장 5절은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라고 분명히 선언하기 때문이다. 또 에베소서 1장 11절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기업이 되었다”라고 말씀한다. 이 에베소서의 말씀은 로마서 9장과 요한복음 6장의 많은 부분들과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예수님의 대제사장적인 기도와 함께, 나를 자원하여 신학에 헌신하게 만든 말씀이다. 여기에 사도행전 13장 48절은 나를 완전히 그 앞에 엎드리게 했던 말씀이다.예정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또 그와 비슷한 교리인 ‘선택’은 여전히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이는 미움 받는 교리이기도 하지만,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는 교리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 해석가들은 예정 교리를 중요하게 다루어야 한다.그러나 많은 복음 전도자들과 목사들이 예정 교리를 방치해 둔다. 또 이를 통해 신학적인 열매를 거두려는 노력을 하지 않거나, 매우 문제가 많고 위험한 교리로 여기기도 한다. 그들은 예정 교리는 실용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들에게 있어 예정론은 그저 신학교 수업의 한 토론 주제일 뿐, 삶의 전반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주제이다. 그러나 예정론을 만들어 낸 사람으로 다들 잘못 인식하는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존 칼빈은 앞서 언급한 복음 전도자들이나 목사들의 생각과는 정반대의 말을 한다.“이 위대한 주제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단순히 까다롭고 격한 논쟁만 일으키는 주제가 아니다. 아무런 유익을 주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피곤하게만 하는 추상적인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경건한 자들의 섬김에 유익을 주는 주제이다. 왜냐하면, 예정 교리는 우리를 온전한 믿음에 이르도록 이끌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한량없는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한다. 예정 교리는 우리가 온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예정론에 관한 주제를 지금까지 가장 심도 있게 다룬 책을 쓴 로레인 뵈트너(Lorraine Boettner)도 이 사실을 인정한다.“예정 교리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갑고, 쓸모없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상한 교리들을 부자연스럽게 엮은 체계도 아니다. 오히려 예정론은 하나님이 인간과 맺는 관계에 대한 가장 따뜻하고 살아 있는, 가장 생명력 있고 중요한 설명이다. 예정론은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사랑을 갖게 하고, 삶의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도록 적용될 수 있는, 차원 높지만 실용적인 진리의 체계이다.”아름다운 교리예정은 아름다운 교리이다. 예정의 아름다움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예정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칼빈과 뵈트너가 지적한 것처럼, 예정은 크리스천의 삶에 중요하고도 실용적으로 적용되는 교리이다. 예정은 단순히 호기심을 가진 신학생들을 위한 토론이나 논쟁을 위한 주제가 아니다. 예정은 하나님의 성품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첫째, 하나님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세심하게 인류 역사를 써 나가신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우연히 일어나는 일들은 없다. 전능하고 선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의해 영원 전에 계획되지 않은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둘째,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인을 사랑하신다”라는 말씀이 실제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인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독생자를 십자가에 죽게 하셨다. 그로 인해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신다(롬 5:8).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지만, 자신의 생명을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내어주셨다(벧전 3:18). 예수님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다.셋째,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죄인 된 우리를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연약한 질그릇과 같은 자들을 선택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복된 소식을 땅 끝까지 전하게 하신다(롬 10:14-15).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바로 그들에게 죽음을 이기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는 놀라운 특권을 허락하신다.넷째, 하나님의 영광은 무궁하지만 인간의 영광은 무궁하지 않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지으셨다(사 42:8). 그러므로 인생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일과 관련되어 행해진다.또한 예정 교리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서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고, 죽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엡 2:1). 그러므로 우리가 예정을 무시해서 살면, 영적 영양 실조에 걸리게 된다.실용적인 교리사람들에게 자주 왜곡되어 온 예정 교리는 우리의 영적 진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다음 세 가지 방법으로 강화해 준다.첫째, 예정은 우리를 선택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구원이 안전하고 완전하게 이뤄졌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우리가 장차 받을 하늘의 기업은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근거를 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장차 받을 기업에서 떨어지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기업을 얻기 위해 해야 할 일은 없다. 또한 우리에게서 그 기업을 빼앗을 수 있는 존재도 없다(롬 8:31-39). 분명 수많은 위험과 수고와 유혹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백성들은 끝까지 보존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예정을 통해 배우는 진리는 매일 고난과 아픔의 인생을 살아가는 신자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이 진리로 인해 매일의 영적 전투를 치루느라 연약해진 성도들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당신을 확실히 지키실 것이다(요 10:28).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우리의 신앙을 세워가기 위해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듣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우리가 예정에 대해 들을 때, 성령은 우리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임을 확증하신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선택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영원하고 불변하며 선한 의지 때문임을 우리가 보고 알게 하신다. 무엇도 이 예정을 철회할 수 없다. 세상의 어떤 폭풍우도, 사탄의 공격도, 어떠한 변화나 육신의 결함이나 연약조차도, 하나님의 선택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안에서 그 원인을 찾을 때만 안전하다.둘째, 예정은 우리의 구원이 주권적이고 선하신 하나님께 영원한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과 슬픔과 핍박과 실패가 우연이 아님을 알려 준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호하시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찰스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고난의 사냥개는 하나님이 그들을 자유케 하실 때까지 재갈을 물고 있다.”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8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은 결코 늦게 오시지 않는다. 결코 다른 주소로 가시지도 않는다. 당신이 온전히 하나님의 일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고통은 당신을 아들의 형상으로 만들기 위한 그분의 끊임없는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늘 함께하시는 절대적인 주권은 인간의 근심을 위한 가장 좋은 처방이다.셋째, 예정 교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두렵게 하거나, 논쟁을 불러 일으켜 시간을 허비하도록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를 겸손하고 감사하게 한다. 왜 하나님이 나를 가족으로 선택하셨을까? 왜 나는 예수님을 믿는데 (적어도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이웃은 믿지 않을까? 왜 나는 교회를 중요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부모에게서 태어났을까? 왜 나는 매주일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할 수 있는 놀라운 특권을 가지고 있을까?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 밖에서는 설명할 수 없다. 그분은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셨다(엡 1:5). 내가 나를 구원한 것이 아니다. 나는 나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만들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이 나를 겸손하게 한다. 모든 순간마다 내 입술에 감사가 있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한 것이 없다. 내 인생이 이런 모습이 되기에는 자격이 없고, 철저하게 거리가 멀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지금의 나 되게 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늘 나에게 선을 베푸셨다. 하나님은 오랫동안 나를 참아 주셨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특별히 예정 교리와 씨름을 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전해야 한다.더 필요한 것은 없다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나도 처음 예정론을 접했을 때, 하나님을 피고석에 앉혀 놓고 불의를 피력했다. “하나님의 예정은 불공평합니다.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선택하고 어떤 사람은 버리실 수 있습니까?”이런 주장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늘 듣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이다. 하지만 참되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은 이렇게 불평하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 주시고, 오래 참으심으로 대하셨다. 결국 하나님은 나의 눈을 열어 쉽게 헤아릴 수 없는 예정 교리의 아름다움과 삶에 안정감을 주는 그 교리의 힘을 보게 하셨다.만일 하나님이 내가 따지고 들었던 바로 그 의(justice)를 따라 행하셨다면, 나는 그 의에 근거하여 지금 이 순간 지은 죄에 합당한 진노를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비롯하여,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에 넘치는 선물을 주셨다. 그 선물은 바로 ‘자비’이다. 우리 같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자비보다 더 필요한 것은 없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redestination Is Biblical, Beautiful, and Practical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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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가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도와준다
by Dustin Messer
2018-11-19
악의 문제는 오랫동안 크리스천에게 도전거리였다. 모든 이를 사랑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선한 피조물에게 고통을 허락하실 수 있을까? 물론 이 질문은 결코 논리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만일 나에게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 고통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혹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대비하기 위해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제안은 ‘미술관에 가라’는 것이다.미술은 늘 영성 형성과 교회 갱신의 주요 열쇠처럼 여겨졌다. 미술은 더 높이, 더 깊이 살펴보라고 우리에게 손짓한다. 캔버스나 찰흙처럼 일상적인 사물에서 초월성을 인식하도록 우리를 초청한다. 이러한 초월적인 경험은 악의 영향력을 경험할 때 느끼는 딜레마와 비슷한 딜레마를 우리에게 가져다 준다.악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라고 묻는다. 반대로 선(善)과 질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이러한 것들이 존재할 수 있을까?”라고 묻게 한다. 분명 우리는 초월적 기쁨의 순간에 세계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위기의 순간에서도 세계의 추함을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기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고통의 문제를 우리에게 준비시키는 일이다. 초월하여 보기위대한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레오나드 번스타인(Leonard Bernstein)은 그 사실을 아름답게 적고 있다.“베토벤은 놀라운 정확성으로 음악을 만들었다. 정확성 말이다. 음악은 진정한 그 무엇, 하늘에서 온 어떤 것, 우리가 마지막에 느낄 수 있는 힘, 혹은 이 세상에 정확하게 자리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거기에는 자체의 질서를 따르며 일관되게 진행되는 어떤 흐름이 있다. 그 아름다움은 우리가 신뢰할 수 있으며 결코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기독교가 말하는 세계에서 피조물은 성스럽다. 그것은 그 자체를 초월한 어떤 대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창조의 심포니에서 질서와 의미를 보는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비극의 한 가운데서 고통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없을 것이다. 음악, 그림, 조각을 감상할 때도 그 질서와 의미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예술은 현재를 넘어서 무한성을 보도록, 창조물 그 자체를 넘어서 창조자 그분 자신을 보도록 우리를 이끈다.이것이 C. S. 루이스가 ‘영광의 무게’(The Weight of Glory)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책이나 음악이 아름답다고 우리가 그 자체를 신뢰하면 우리는 배반당할 수 있다. 아름다움은 그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름다움은 그 대상을 통해 나오며, 그 아름다움은 다시 우리 안에서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아름다움과 과거의 기억들은 우리가 정말로 갈망하는 실체에 대한 좋은 이미지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잘못 인식하면,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대상은 어리석게도 우상으로 변해 버리고, 그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무너뜨린다. 거기에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 대상은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꽃의 향기, 아직 듣지 못한 선율의 메아리, 아직 방문하지 못한 나라의 소식일 뿐이다.”탈신화화된 서구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대상의 외양을 보고 분석하는 일은 배웠지만, 그 대상을 통찰하거나 초월해서 바라보는 일은 배우지 않았다. 이러한 문화적 현상을 객관주의, 과학주의, 실용주의 등 뭐라고 부르든지 결과는 뻔하다. 우리는 창조물을 단순히 자연 그 자체로만 보도록 훈련 받았다. 생명력 없는 해부의 대상이지 기쁨의 대상은 분명히 아닌 것이다.이런 문화에서 예술을 감상하는 작업은 이전보다 더 많은 훈련과 노력을 요구한다. 일단 진흙은 흙덩어리 그 자체로 보인다. 당신이 미술관을 방문할 때마다 같은 조각상 옆에 멈춰서는 훈련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당신은 그 진흙 덩어리가 뭔가 다른 것으로 변형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거기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물론 그 대상 자체가 변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그 흙덩어리를 보는 방식이 변한 것이다. 보는 방식은 보여지는 객체(the seen)에 의해서가 아니라 보는 주체(the see-er)에 의해 바뀐 것이다.잘 보는 일은 특히 방해를 많이 받는 시대에서는 의도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다. 조각상에서 흙덩어리 이상을 보기 위해서는 초고속 시대에는 흔치 않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물들을 존중하기 원한다면, 인내심을 가지고 보는 태도를 기를 필요가 있다.고통과 기쁨의 문제들예술 감상을 어렵게 만드는 조건들은 악의 문제를 어렵게 여기도록 만드는 조건들과 상통한다. 조각상에서 진흙덩이만을 보는 눈으로는, 큰 수술 후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변색과 흉터자국들만 보게 된다. 반대로, 미술관 벤치에 앉아 의미와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훈련된 눈으로는, 병원 침대에 누워 있지만 하나님의 피조물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거울로 보듯이 희미하겠지만 말이다.그렇다고 무언가를 열심히 보기만 하면 항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예술에서의 의미는 고통에서처럼 때로 포착하기 어렵거나 접근이 불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나 끊이지 않는 고난은 자주 비상식적이거나 불합리하게 느껴져 그로부터 의미를 전혀 찾아내지 못할 수 있다. 명백하게 예술적인 특성을 지닌 음악과 영화도 같은 식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술을 관찰하는 방법을 더 많이 익힐수록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의 의미를 더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예술은 현실을 바르게 보는 기술을 회복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진선미 안에 있는 질서와 결합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친숙하면, 그와 반대되는 추함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 있는 표준을 얻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기쁨의 순간에 의미를 찾는 일에 익숙해지면, 그와 다른 절망의 순간 역시도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의 문제를 깊이 묵상할 줄 안다면, 고통의 문제 역시 더 잘 다룰 수 있을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Art Can Prepare You for Sufferin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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