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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이유
by Ric Rodeheaver
2018-11-28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할까? 아마 전이라면 아니라고 답변했을 것이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제공해야 하고, 어두운 현실로부터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장례식은 분명 어두운 현실이다.자녀들을 보호하려는 이와 같은 마음은 일반적이기도 하고 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성경 속 지혜는 우리의 관습적인 생각과는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려가야 하는 세 가지 긍정적인 이유를 생각해 보자.1. 장례식은 죽음이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자녀들에게 알려 준다우리 자녀들은 삶 속에서 죽음을 경험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아이들은 죽음을 비현실적인 단면으로 경험한다. 예를 들면, 컴퓨터 게임에서 죽음이 멋지게 포장되거나, 혹은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이 아무렇지 연출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에 대해 점점 무감각해진다. 다시 말해, 우리 자녀들이 대중 문화를 통해 죽음을 많이 접하면 접할수록, 죽음이라는 개념은 그들에게 더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또한, 사회적으로도 점점 더 죽음이 주는 슬픔을 지우는 문화가 발달함으로써 아이들은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의 예만 보아도 그 미세한 변화가 감지된다. ‘무덤’이라는 말이 ‘묘지’가 되었고, 이제는 ‘추모공원’이라는 장소도 생겼다. ‘장례식’은 ‘추도식’이 되었고, ‘생애 축하행사’라는 용어가 생겼다. 과거에는 묘지가 보통 교회 뜰에 있었기 때문에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은 죽음이 언젠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올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수많은 묘지들은 이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더 깊이 숨어 들어가고, 그중 대부분은 사람들의 일상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우리의 문화가 갈수록 젊음, 건강, 활력, 그리고 죽음과 노화를 방지하는 음식 등에 집착하는 현상을 생각해 보라. 이러한 이유로 우리의 자녀들은 죽음이 세상에 실재하는 악이라는 사실을 잘 배우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장례식은 자녀들에게 생명의 유한함과 그 무게를 충분히 깨닫도록 돕는다.2. 장례식은 슬픔이 무엇인지를 자녀들에게 보여 준다우리는 자녀들과 재미있게 노는 법을 알고 있다. 그에 반해, 그들과 함께 우는 법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자녀들을 삶의 기쁨에만 노출시키고, 시련은 철저히 피하도록 양육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죄의 결과로 신음하는 이 세상에서 그들을 제대로 준비시키고 있는 것일까(롬 8:28)? 죽음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슬픈 감정을 회피하거나 절제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히 감정적으로 무너져 내리거나 슬픔을 전혀 주체하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삶 속에서 슬픔이나 절망의 감정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인생의 어려움을 헤쳐나갈 훈련의 기회를 잃는 것이다.자녀들은 상실을 느낄 필요가 있고, 솔직하게 그 감정을 겪어 나가야 한다. 또한, 우리가 슬픔에 빠져 있는 모습도 볼 필요가 있고, 어둠의 순간에도 부모가 하나님께 기대는 자세 역시 눈으로 봄으로써 배워야 한다. 상실을 함께 겪으면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주권’ 그리고 ‘고통’의 문제에 대해 자녀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일은 그들의 신앙을 강화시킨다. 그 뿐만 아니라 그 세 가지 주제가 늘 등장하는 이 세상에서 자녀들을 미리 준비시킬 수 있는 적절한 훈련의 과정이 되기도 한다. 장례식은 죽음을 대면할 때 슬퍼하는 방법과 그리스도의 빛에 소망을 두는 방법을 알도록 돕는다(요 11:25).3. 장례식은 자녀들이 어둠 속에서 복음을 볼 수 있도록 돕는다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가장 밝게 빛난다. 장례식보다 삶에 대해 더 명백한 깨달음을 주는 경우는 없다. 자녀들을 장례식에 데리고 갔을 때, 나는 그들에게 복음의 중요성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칠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 장소에 참석함으로써 아이들 스스로 그것을 보고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들에게서 은혜와 소망의 결심을 볼 수 있었던 반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는 엄청난 슬픔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소망의 목소리와 더불어 절망의 흐느낌도 한자리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그들은 어렸기에 이러한 차이점을 정확하게 분별해 낼 수는 없었지만,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표정과 눈빛은 그들이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미 차이점을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냈다. 바로 이와 같은 경험이 복음의 씨앗을 싹트게 하는 대화의 옥토를 만든다. 삶과 죽음, 영원, 그리고 예수님과 그가 주시는 구원이 왜 중요한지를 나눌 수 있는 대화 말이다. 장례식이 다른 경험과 차별되는 이유는 바로 이처럼 자녀들이 복음의 능력과 필요를 이해하도록 돕기 때문이다.장례식은 참석하기 쉬운 행사가 아니다. 장례식은 감정을 뒤흔들고 비극적인 죄의 결과를 상기시킨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지혜와 소망이 자라도록 하기 위해 바로 그와 같은 경험을 사용하실 수 있다(전 7:1-4). 부모로서 우리는 자녀들이 삶의 어두운 면을 보며 살아가기 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 속에 거하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악 된 이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그로써 진정한 소망 안에서 담대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모든 기회를 찾아보아야 한다. 그것이 장례식이더라도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Reasons to Take Your Children to Funerals번역: 정은심
가정
양육
장례식
삶의일부
죽음
영원
예수님
구원
슬픔
복음서 간의 불일치는 성경의 무오성을 약화시키는가?
by Robert Plummer
2018-11-27
우리는 성경이 선지자들이나 사도들에 의해 기록되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원하신 대로 정확하게 기록되었을까?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다. 히브리서를 예로 들어보자. 여기서 저자는 시편 95편을 언급하며, 두 명의 저자를 그 시편에 적용한다. 처음에는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히 3:7)라고 하다가, 나중에는 “다윗의 글에”(히 4:7)라며 동일한 시편에 대해 두 저자를 언급한다. 이는 성경의 오류일까? 아니다. 히브리서는 이중 저작, 즉 성경의 공동 저작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둘 다 옳다.하나님은 완벽하게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을 전하실 수 없다. 성경이 확언하는 모든 내용은 완전하게 진실이다. 크리스천은 이 진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네 개의 복음서를 나란히 펼쳐 놓고 보았을 때, 표면상 불일치하는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을 세심하게 읽는 독자는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도대체 왜 이렇지? 어떤 문제가 생긴 걸까?”복음서들이 불일치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서로 다른 목격자에 의해 같은 사건이 역사적으로 재진술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증인의 서술은 요약, 부분적 보고, 대안적 표현(paraphrasing), 자료의 연대기적 재배열 등을 거치게 된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서 정확히 이런 식의 증언을 발견할 수 있다.복음서들이 모순을 포함하는가?1세기 인물인 히에라폴리스의 파피아스(Papias of Hierapolis)는 복음서의 기원에 관한 통찰을 제공한다. 예를 들어, 그는 마가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다고 상술한다. 파피아스에 의하면, 마가는 초기에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지만 후에 베드로의 설교 전체를 기록했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상황적 이유로 인해 그는 기록에 있어서 연대기적 순서를 반영하지 않았다. 최초의 독자들은 복음서가 연대기적 순서로 기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리 역시, 성경을 읽을 때 연대기적 순서의 뒤바뀜이 있다는 특징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한다.그러므로 현대의 독자들이 복음서를 엄격하게 연대기적인 기록으로 간주한다면, 복음서의 기록을 ‘실수’로 인식할 수도 있다. 이러한 독자들은 저자들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복음서에서 찾으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 4장과 마태복음 4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시험 이야기를 비교해 보자. 같은 시험이 두 복음서에 동일하게 나타나지만 차이점이 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마지막 시험은 사탄이 예수님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 세상 왕국을 주겠다고 하는 내용이다. 반면, 누가복음은 사탄이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시험하면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각기 다른 순서로 시험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강조점을 달리 하는 것이다. 마태는 산을 중요한 모티프로 사용한다. 그래서 5-7장에 걸쳐서는 산상설교를 상세히 설명할 뿐 아니라, 마지막 장에서는 산꼭대기에서 예수님이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을 보여준다(마 28:16-20). 이런 측면에서 사탄의 마지막 시험도 산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반면, 누가는 예수님 안에서 새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관점을 강조했기에 성전 모티프에 관심이 깊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의 성전 시험을 마지막에 배치했다.이렇듯 마태와 누가는 단지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의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어떤 복음서도 사건을 기술하기 위해 연대기적 특수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독자들은 과거 성경의 저자들이 연대기적 서술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진리가 반드시 정확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얼마 전, 약국 주차장에 세워 둔 아내의 미니밴 배터리가 방전되었다. 다행히 내가 나의 경차를 가져다 주어 아내와 세 아이들은 집으로 갈 수 있었고, 그 사이 나는 미니밴을 지키며 수리공을 기다렸다. 그 다음날 이 사건에 대해 설명할 일이 발생했다고 가정해보자. 만약, 이메일을 보내기 위함이라면 다음과 같이 쓸 수 있다. “어제 제 아내의 미니밴이 주차장에서 고장났습니다.” 하지만 선약이 있던 다른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합니다. 제 차가 어제 고장이 났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이웃에게는 또 다르게 설명할 수도 있다. “아내는 어제 본인의 차가 고장나서 제 경차를 운전했습니다.”수백 년이 지난 후에 사람들이 위와 같이 그 묘사가 조금씩 다른 세 가지 경우의 설명을 듣게 된다면, 아마 내가 거짓말을 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의 아내에게는 미니밴이 있는가, 아니면 경차가 있는가? 무슨 차가 그녀의 차이며, 도대체 어떤 차가 고장난 것인가?” 구어체에서 ‘차’(car)는 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운송수단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혼이라면, 남편의 소유는 아내의 소유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내 이름이 그녀의 미니밴 호칭일 수도 있다. 엄밀히 말하면, 미니밴은 내 차이지만, 아내가 항상 몰고 다닌다.당신이 고장난 차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상세히 조사한다면, 내가 부분적인 사실만 언급했거나 서로 다른 면을 강조해서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도 거짓은 아니다.이는 복음서의 상세한 내용들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가 된다.마태복음의 계보와 누가복음의 계보 사이의 차이를 주목해 보라. 마태복음 1장과 누가복음 3장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서로 다른 이름들을 담고 있다. 특히, 요셉으로부터 시작해 그를 이어가는 세대들에서 그렇다.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 차이에 대해 상세히 논의했다.300년대 전반에 글을 쓴 유명한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Eusebius)는 성경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설명하며,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Julius Africanus)의 견해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명했다. 율리우스는 16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이스라엘을 방문해 예수님의 이복 형제자매의 육체적 후손들과 인터뷰를 진행하고 초기 사람들의 증언을 인용했다. 아프리카누스에 따르면, 계보상 불일치는 ‘계대 혼인’(곧 죽은 자의 형이나 아우가 그 형제를 대신해서 미망인과 결혼하는 제도) 때문이었다. 구약성경의 율법이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나, 그들은 과부가 된 여성을 위해 이 제도를 마련했다. 만약 남편이 죽으면, 그의 형제가 과부와 결혼할 수 있었다. 이 결혼에서 태어난 자식들은 죽은 형제의 이름을 이어갔다. 이 제도는 법적인 계보와 생물학적인 계보를 둘다 만들어 냈다. 따라서, 율리우스는 법적 계보를 따르느냐, 생물학적인 계보를 따르느냐에 따라 계보상에 불일치가 존재한다고 주장했다.더 자세히 보기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계보들은 두 가지를 설명한다. 첫째, 계보의 복잡성은 우리의 삶이 얼마나 복잡한가를 반영한다. 따라서 면밀한 연구에서 표면상의 불일치가 관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째, 초기 크리스천들은 불일치처럼 보이는 부분들을 감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성경의 신뢰성과 권위를 기준으로 삼아 그에 대해 가능한 해결책들을 제시했다.만약 당신이 성경에 회의적인 독자라면, 스스로 갖게 되는 질문에 대해 정직해야 한다. 염려되는 부분을 놓고 기도하라. 성경 본문을 주의 깊게 연구하라. 그 본문의 출처에 대해 질문하라. 이렇게 솔직한 질문을 한 후 답이 필요하다면, 도움을 구하는 데 두려워하지 마라.기억하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사랑이 가득한 하늘 아버지이시다. 그분은 당신을 속이거나, 무언가를 숨기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당신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이미 역사 속에서 완전한 삶을 사셨다. 더불어, 죄인인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죽게 하시고 또 보내심으로써, 자신의 계시에 관한 확실하고도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우리에게 주셨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Do Inconsistencies in the Gospels Undermine Scripture’s Inerrancy번역: 이주일
복음
변증
복음서
성경의무오성
진리
정확성
시편95
다윗
베드로
선교사가 직면하는 공통의 문제
by Mark Pfuetze
2018-11-27
기독교 상담가이자 신학교 교수로서 나는 오랜 기간 수많은 선교사와 협력할 수 있는 특권을 누렸다. 선교사들마다 그들 각각의 독특한 경험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이 당면하는 문제에는 공통점이 있음을 확인했다. 바람이 있다면, 그들이 직면하는 문제를 교회와 선교사가 함께 다루는 것이다.여기에 선교사가 공통적으로 직면하는 문제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았다.1. 대인 관계의 갈등선교사는 종종 팀원과의 갈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불행하게도, 이러한 갈등은 쉽게 커지고, 선교 사역을 늦추거나, 심지어 팀 전체를 해체시킬 수도 있다.선교에서 갈등을 다루는 일은 필수적인 사역에 속한다. 일부 선교 단체는 이를 잘 수행하고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분쟁을 효과적으로 중재하거나 이 과정을 위한 훈련 및 체계가 부재하다. 이를테면, 개인 상담을 통해 갈등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도록 돕는 안전 시스템을 찾기 힘들다. 선교사가 배치되기 전, 상담과 훈련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자기 인식과 정서적 근육을 향상시키는 데에 도움을 줌으로써, 갈등이 닥쳤을 때 보다 유연하게 처리하도록 준비시켜 주기 때문이다.2. 정서적으로 폭력적인 리더들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폭력적인 리더는 선교팀에 큰 해를 끼칠 수 있다. 그러한 리더가 의도하는 바는 파악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자주 팀 안에서 혼란과 의심을 악화시킨다. 특히 선교팀이 가정이나 후원 조직과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선교사는 강압적인 지도자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우리가 인간의 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이런 현상에 반드시 당황할 필요는 없다.어떤 이들은 내가 과장한다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교회와 선교 단체 모두에서 이런 유형의 문제를 자주 보았다. 목회자가 곁길로 가거나, 동역자 대신 목표에만 집중할 때 이러한 현상이 종종 나타난다. 그는 죄의 길을 걸으면서도 자신의 길이 하나님의 길이자 옳은 길이라고 믿는다. 그러한 리더는 지배하고 통제하는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의 일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인 것처럼 합리화한다. 교회와 선교 단체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이런 파괴적인 패턴을 잘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 교회는 죄악된 행동을 사랑으로 대면하고, 동시에 그 피해자들을 보호하도록 부름 받았다.3. 과거의 트라우마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트라우마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과거의 트라우마가 상담 중에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다가 선교 현장에서 쉽게 발현되는 경우도 있다. 선교 단체는 선교사가 임무를 위해 떠나기 전에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상담을 받도록 도와야 한다. 공통적으로 너무 흔한 트라우마 중 하나는 바로 성적 학대다. 한 통계에 따르면 18세 이하에 해당하는 인구 중 여성의 3 분의 1과 남성의 4 분의 1이 성적 학대를 경험했으며, 이 수치는 음란한 문화에서 더욱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이런 통계가 사실이라면, 다수의 선교사들 역시 성적 학대의 경험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선교사는 이런 치명적인 트라우마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늦어도 선교 현장에 가기 전에 그 심리적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4. 수행 압박감선교사는 파송 단체에게 자신의 정신적 혹은 정서적 상태에 관해 말하기를 두려워할 수 있다. 선교사는 종종 ‘최고의 크리스천’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자신의 약점에 대해 정직하면 안 된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거나 재정 지원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다. 교회 또한 외적인 성과에만 치중하여, 선교사가 자유롭게 본인의 인간적인 모습이나 상한 내면의 문제들을 나눌 수 없도록 제한적이고 일방적인 문화를 형성하기도 한다.나는 선교사가 영적으로 성숙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선교사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완벽하지 않으며, 그에게도 거룩하게 성장할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어느 시점에서는 전문 상담가를 찾아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나는 선교사가 개인적인 문제를 털어놓고 지속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선교 단체들이 그 인식을 점차 높여가는 중이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교회는 선교사가 부정적인 반응에 대한 두려움 없이 문제를 상담할 수 있도록 안전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하여 연구하고 해결 방안을 만들어 가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5. 기독교적 상담에 대한 접근성 부족 많은 선교사가 전문적이고 지속적인 기독교 상담을 받는 것이 쉽지 않다. 몇몇 선교 단체는 전문적인 상담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이는 일반적으로 제한적이어서, (1) 단기간의 집중 상담을 위해 상담가가 특정 지역으로 이동해야 하거나, (2) 선교사가 상담가를 만나기 위해 선교지를 떠나야 한다. 선교지에서 상담가와 주기적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다.이러한 요구로 인해 국제 상담 네트워크(Global Counseling Network) 및 갓스피드 리소스(Godspeed Resources)와 같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는 제3자 상담 기관도 생겨났다. 이러한 단체들은 자격을 갖춘 기독교 상담가가 매주 선교사와 얼굴을 마주 보며 상담을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다. 이런 시스템은 선교사가 선교지에 있는 동안 자신의 문제를 꾸준히 털어놓고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선교사의 상담을 위해 넉넉한 재정을 유지하는 선교 단체나 교회는 많지 않다. 하지만, 상담 프로그램은 선교사를 파송하는 단체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여야 한다. 각 선교사가 경건하고 비밀스러운 환경에서 충분한 상담을 받을 수 있도록 자금을 마련해야 한다. 교회와 선교 단체가 총체적으로, 즉 경제적으로, 영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선교사를 후원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Challenges Missionaries Face—and How Your Church Can Help번역: 고갑균
선교지침
갈등
분쟁
폭력적리더
트라우마
압박감
기독교상담
대인관계
선교사
문제
분노 죽이기
by John Piper
2018-11-27
결혼생활에서, 분노는 영혼을 파괴하는 행위로서 정욕과 라이벌 관계에 있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나는 분노가 정욕보다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분노는 다른 여러 종류의 동지애까지도 파괴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분노를 품고 있다. 분노가 위장술에 능하기 때문이다. 의지력으로 격분을 억누를 때, 분노는 표면 아래에서 들끓는다. 또 영혼의 치아는 좌절로 부득부득 갈린다. 분노는 마치 상처 입은 것처럼 보이는 눈물로도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눈물은 마음의 상처를 더해 줄 뿐이다. 우리가 싸우지 않기로 결심할 때, 분노는 침묵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분노는 까다로운 비판과 가차 없는 비난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분노는 분노하는 사람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종종 분노는 잘못된 원인에 근거하여 정당화되기도 하는데, 그에 대한 예를 성경에서 잘못 찾기도 한다. 가령 예수님도 분노하셨다든가(막 3:5), 바울도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라고 말했다며(엡 4:26) 분노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타락한 사람들이 선한 분노를 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라고 말한다(약 1:19-20). 그리고 바울은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 2:8), 또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라”라고 말한다(엡 4:31). 그러므로 인생의 가장 큰 전투 가운데 하나는 단지 분노의 표현을 컨트롤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높은 단계인 ‘분노를 없애는’ 것이다. 이 전투에서 도움을 얻고자 한다면, 아래에 제시하는 아홉 가지 성경적인 무기로 무장해야 한다. 첫째, 분노할 수 있는 마땅한 권한을 지니신 그리스도가 오래 참음의 본보기로서 십자가를 어떻게 참으셨는지 생각해 보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둘째, 당신이 얼마나 많은 용서를 받았는지, 얼마나 많은 긍휼을 입었는지를 생각해 보라.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32). 셋째, 자신의 죄악을 생각하고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5). 넷째, 과연 자신이 마귀에게 자리를 내어 주기를 얼마나 원치 않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 성경은 마음속의 분노가 마귀에게 문을 열어 주고 들어오라고 초청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 4:26-27).다섯째, 자기 학대의 어리석음을 생각해 보라. 분노하는 사람에게 그 분노가 미치는 수많은 해로운 영향들을 생각해 보라. 영적인 영향, 정서적인 영향, 신체적인 영향, 그리고 관계적인 영향까지도 분노에 영향을 받는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잠 3:7-8). 여섯째, 자신이 분노한 죄를 믿음직한 친구에게, 또한 가능하다면 당신을 분노하게 만든 사람에게 고백하라. 이것은 크나큰 치유 행위이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약 5:16).일곱째, 당신의 분노를 마음속 교만과 자기 연민의 차단제로 사용하라.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으로 대체하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여덟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실 은혜를 신뢰할 때 그분이 모든 것으로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사랑으로 반응한다면, 그 사람까지도 당신의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아홉째, 하나님이 당신의 정의를 옹호하고, 모든 일을 당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잘 해결하실 것임을 기억하라. 당신을 화나게 하는 사람이 지옥에서 대가를 치르든지, 아니면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이미 대가를 치르셨다. 당신이 보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중에 보복하실 것을 고려하면) 그 사람의 죄에 대해 두 번 처벌하는 셈이거나, 십자가에 대한 위반이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롬 12:19).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출처: www.ligonier.org원제: Killing Ang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복음
감정
분노
그리스도
본보기
용서
긍휼
들보
마귀
자기학대
초대교회 성도들도 이상한 사람들로 여겨졌다
by Michael Kruger
2018-11-26
만약 우리가 기독교의 여러 측면들을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바라보는 문화에서 살아간다면 기분이 어떨까? 단절감이나 좌절감까지는 아니더라도 기운이 빠질 것이다. 만일 당신이 이처럼 고립되거나 홀로 있다고 느끼는 크리스천이라면, 이 말을 해주고 싶다. 현재 당신이 겪고 있는 상황은 과거부터 존재해 온 것이다. 처음부터 크리스천은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존재였다.특히 2세기 기독교의 네 가지 특징인 예배, 교리, 행위, 저술은 로마인들에게 비록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꽤 독특하게 여겨졌다. 이 네 가지 특징은 오늘날에도 기독교를 배척하는 자들로부터 눈총을 받는다.1. 기독교 예배초대교회 예배의 근본적인 성격은 ‘배타성’(exclusivity)으로 표현할 수 있다. 예수님만이 예배의 대상이었다. 다른 어떤 종교적 대상도 기독교 예배에서는 허용되지 않았다. 성도들은 오직 왕이신 예수님께만 전적으로 헌신하는 예배를 드렸다.로마인들은 국교 이외의 사적인 종교 의식에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시의 로마 정부는 종교를 전혀 개인의 영역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제국의 성공과 번영을 지켜 주었던 로마의 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일은 그 당시의 시민으로서 중요한 의무였다.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 일은 사회적으로 무례한 행위로 인식되었을 뿐 아니라, 신들을 불쾌하게 만들어 국가를 위기에 빠트릴 위험까지 있다고 판단되었다.따라서 초대교회 성도들이 여러 신을 섬기는 당시 로마의 종교 의식을 거부하게 되면서, 함께 살아가는 다른 동료들의 안녕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를 지닌 것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타키투스의 ‘연대기’(Annals)에 따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간을 증오하는 자들’이라고 불렸다. 그 결과,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주 심각한 박해로 고통을 받았다.2. 기독교 교리정치적 박해 외에도 초대교회 성도들은 상당한 ‘지성적 박해’(intellectual persecution)를 받았다. (특히 성육신 개념과 같은) 기독교 교리는 우습고 어리석은 사상으로 취급받았으며, 로마의 지식인들에게는 논할 가치가 없는 내용으로 간주되었다.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예배하는 행위는 로마인들의 눈에 극도로 심각한 정신 이상적인 행동이었다. 당시 십자가 처형은 수치와 거부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왜 굳이 그런 모욕적인 고통에 처한 사람을 따라야 하는가?따라서, 루키아노스, 갈레노스, 프론토, 켈수스와 같은 사람들은 이 ‘새로운’ 종교를 향해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비단 십자가에 달렸던 자만이 아니라, 그 가르침까지도 조롱했다.3. 기독교 행위초대교회 성도들은 믿음의 내용만이 아니라 ‘행동하는 방식’(how they behaved) 때문에도 로마인들에게 배타적으로 여겨졌다. 특히 그들의 독특한 성 윤리는 당시 문화 속에서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로마인에게는 성적 파트너를 여러 명 취하고 신전 창녀들과 관계를 맺는 일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런 관습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예를 들어, 터툴리안은 당시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관대하며 자신의 소유를 서로 나누는지를 강조함으로써 기독교의 합법성을 변호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온 마음으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이 땅의 재산을 서로 나눕니다.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지만, 아내만은 아닙니다.”그만큼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들이 배우자를 공유하는 일은 윤리적으로 이상한 관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적 순결에 헌신한 다른 예들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Epistle to Diognetus), ‘아리스티데스의 변증’(Apology of Aristides), ‘미누키우스 펠릭스의 변증’(Apology of Minucius Felix)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4. 기독교 저술초대교회 성도들은 성경이 신앙생활에서 차지하는 독특한 지위 때문에 로마인들에게 특이한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오늘날에는 성경 중심적 종교가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2세기에는 이러한 특징이 기독교를 유별난 종교로 보이게 만들었다. 고대의 종교들은 일반적으로 글로 기록된 문헌과 그렇게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형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따라서 기독교는 로마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들은 기독교가 정확히 무엇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분명히 로마인들의 눈에 그 종교는 낯설어 보였다. 실제로 ‘책을 좋아하는’ 특성 때문에 기독교는 철학에 가까워 보였다. 결과적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다른 학파처럼 학문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했다.고유성을 신실하게 지키라이처럼 배타적 예배, 논쟁적 교리, 도덕적 행동, 그리고 책에 대한 집중은 처음부터 기독교를 이상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이 요소들은 기독교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를 핵심적으로 보여준다.우리는 2세기 성도들의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약하고, 어리고, 박해 받던 교회가 살아 남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제국 전체로, 더 나아가 전 세계로 확장되었기 때문이다.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잃어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기독교의 고유성을 지키는 데 신실했다.만약 오늘날 우리도 그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키는 일에 신실하다면, 초대교회가 이룬 것과 동일한 소망을 품을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Early Christians Were Odd, Too번역: 이주일
역사
초대교회
성도
크리스천
문화
예배
교리
고유성
정체성
특성
우리 신앙은 역사적으로 검증 가능하다
by Kathy Keller
2018-11-26
‘도븨라이, 노 프로븨라이’(Doveryai, no proveryai)라는 러시아 명언이 있다. 이 명언은 다른 언어들로 번역되어 더 유명해졌다. 그 뜻은 ‘신뢰하되 검증하라’이다. 이는 주로 다양한 국제 협상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어 왔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표현이다. 신뢰하지만 검증하고자 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신뢰는 정말 좋으나,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을 때 더욱 큰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이 명언이 크리스천의 삶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신앙을 ‘쉽게 믿을 수 없는 것을 믿기 위한 도약’(leap of faith)이라고 정의한다. 또 다른 사람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의 말처럼 ‘신앙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는 것’(Faith is believing in what you know ain’t true)이라고 정의한다. 둘다 그럴듯한 표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신앙에 대한 이와 같은 정의가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자 한다. 크리스천의 신앙에는 신화나 사실이 아닌 것, 혹은 거짓이 포함될 여지가 없다. 인생이 거칠고 비참할 때, 하나님의 진리만이 안전을 보장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꾸며진 이야기가 아니다최근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역사적이면서도 검증 가능한 사실에 있을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신앙이 존재한다. 그중 유일하게 기독교만이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역사적 실존 및 그가 했던 말과 행동에 기초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만일 그가 죽지 않고(즉 실제로는 모든 사람이 인정할 만한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증거도 없었다면(곧 다른 사람들이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부활해서 걷고, 이야기하며, 음식을 먹고, 제자들과 교제한 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7, 19).‘불쌍한 자’인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회의론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만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각자의 필요를 채워 주는 일이라면 나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위안과 평화를 주는 행운의 토끼발(lucky rabbit’s foot)과 같은 부적을 가지고 살기 때문이죠. 당신에게 예수님이 그런 훌륭한 부적이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적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내게 믿음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이때 회의론자들이 간과하는 것은 크리스천의 신앙이 예수님의 실제적인 말과 행동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예수님이 행하신 많은 일들이 실제가 아니라면, 우리의 신앙은 헛것이다. 다른 모든 종류의 신앙, 심지어는 과학, 교육, 정치 권력 등에 뿌리를 두는 신앙이라고 하더라도 이들의 기초이자 존재의 의미는 좋은 교훈(the good advice)에 국한된다. 다른 종교들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만약 당신이 특별한 삶을 위해 중요한 규칙들을 잘 지키고 선한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당신의 인생은 분명 더 좋아질 것이다. 그런 삶은 인류 문명에도 괄목할 만한 진보를 가져다 줄 것이다. 그로 인해 당신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훌륭한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혹 지금 당장에 보상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는 당신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예를 들면, 죽음 이후의 세상에 산다든가(이슬람), 환생의 삶을 경험한다든가(힌두교), 무존재(non-existence)의 평화를 누린다든가(불교), 아니면 ‘뉴욕타임스’에 당신의 부고가 게재되는 보상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다르다. 이 신앙은 성경의 윤리적 교훈에 근거하지 않는다. 물론 성경에도 윤리적인 가르침이 있다. 하지만 크리스천은 자신의 신앙, 회복을 향한 소망,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를 어떤 한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둔다. 그러므로 만약 예수님이 실제 역사 가운데 살고, 죽고,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그분을 따르는 이들은 만들어진 이야기(a fairy tale)나 쫓으면서 평생을 허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바보처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처럼 말이다.베토벤과 목격자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목격자들을 열거한다. 바울은 엄격한 로마식 교육을 받은 유대인이었다. 철학과 성경에 정통한 자였다. 그러나 믿음을 증명하는 일에는 자신의 교육 배경이나 지식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부활을 실제로 보았던 그 목격자들로부터 믿음의 확신을 이끌어 내었다.나 역시 이런 믿음의 증거들에 대해 깊이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마태복음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솔직히 나는 그 부분을 이미 잘 알고 있었고 익숙한 본문이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울 점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생각은 틀렸다. 잠시 독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나는 일탈적인 생각을 자주 한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다.나는 낡은 러닝머신에서 운동하며 생각하는 일을 즐긴다. 그것도 대부분 베토벤의 에그몬트 서곡(Egmont Overture)을 들으면서 말이다(다행히도 나의 오래된 러닝머신에는 이 음악 감상을 방해하는 TV가 달려있지 않다). 이 서곡은 내가 가장 즐겨 듣는 음악 중에 하나다. 나는 그 음악의 마지막 부분, 승리 파트를 들으며 상상한다. 말하자면, 그 마지막 부분을 예수님의 부활을 재현하는 훌륭한 사운드 트랙으로 여기며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때 내가 상상하는 내용은 대략 이런 식이다. 천사들이 돌을 굴리고 예수님은 부활한 몸을 입고 기뻐하며 걸어 나오신다. 그리고 자신이 인류의 구원자이며 죽음에서 부활한 첫 열매가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이런 상상을 하며 음악이 끝나는 부분에서는 스스로 지휘자가 되어 합창단원에게 부활의 승리를 표현하는 나팔을 불도록 사인을 준다.그런데 나는 그때 마태복음의 부활 기사를 읽으며 내 상상과는 다른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부활 이야기에 따르면,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돌을 굴려낸다(그 돌은 몇 톤이나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덤 테투리에서 입구 쪽으로 갈수록 경사는 더 높았다. 아마도 돌이 굴려져서 입구가 막히도록 설계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는 돌을 다시 밖으로 굴려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내가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그때(즉 천사가 돌을 굴려 냈을 때) 예수님이 무덤 밖으로 걸어 나오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 대신에 천사가 예수님의 무덤을 방문하러 온 여인들에게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마 28:6), “먼저 갈릴리로”(마28:7) 가셨다는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마태가 기록한 예수님의 부활 장면을 세상 사람들이 잘 사용하는 표현으로 설명하자면, 엘비스는 이미 쇼를 끝내고 공연장을 떠난 것이다(천사가 돌을 굴려 내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을 떠나셨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천사가 돌을 움직이도록 기다리실 필요가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은 인간이셨지만, 자신을 싼 수의를 통과해서 돌로 봉해진 무덤 밖으로 나가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분이었다(요 20:19). 다시 말해, 예수님이 무덤을 나가실 때, 천사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천사는 ‘왜’ 돌을 굴렸을까? 만약 천사가 돌을 굴리지 않고 무덤을 막고 있는 돌 위에 그대로 앉은 채,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살아나셨느니라”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메시지를 들은 여인들이 천사의 말을 믿었을까? 아마 믿었을 수도 있고,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쩌면 천사는 여인들이 믿을 수 있도록 매우 설득력 있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설득력 있는 천사의 말을 직접 듣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누구나 볼 수 있는 빈 무덤이 거기 없었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증명될 수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빈 무덤을 보지 않은 채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으로부터 헛것을 보았다고 취급 받았을 것이다. 예수님의 시체가 여전히 무덤 안에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천사가 돌을 굴려야 했던 진짜 이유이다. 천사는 예수님이 무덤에서 나가시도록 돌을 굴린 것이 아니다. 천사의 행동은 우리를 무덤에 들어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이 말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신뢰하되 검증하라.’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과 그 안에 놓여 있던 수의를 직접 보았다고 증언할 수 있는 목격자들에 의해 검증될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기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 신앙은 천사가 무덤을 열어 줌으로써 시작된다. 그리고 거기서 빈 무덤을 살펴보고, 예수님이 더 이상 그 자리에 계시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검증된다.그러므로 늘 질문하고 의구심을 표출하길 바란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에 의문을 가지는 일을 두려워한다면,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역사는 성경을 뒷받침한다.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 부활은 모든 것을 바꾼 역사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Our Faith Is Historically Verifiable—Or It’s Nothing번역: 김재덕
복음
부활
검증
진리
천사
무덤
역사
성경
실패가 없으면 성장도 없다
by Cole Huffman
2018-11-26
누군가에게 “네가 하는 모든 일이 실패하길 바래”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 사람을 경멸하는 일이 될 것이다. 혹 약간만 실패하길 바란다고 말하더라도 결과는 마찬가지다.피겨스케이트 선수였던 스콧 해밀턴(Scott Hamilton)은 1984년에 메달을 딴 이후, 오랫동안 이 종목의 분석가로 활약해 왔다. 2018년 동계올림픽 기간에 스콧에 대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는 이렇게 언급하였다. “선수 생활동안 내가 넘어진 횟수를 계산해보니 41,600번이나 되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나는 41,600번 다시 일어났다.” 그는 이 일이 가능했던 이유에 대해서 넘어지면 무조건 일어나도록 단련된 ‘강한 정신 근육’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정신 근육은 실패할 때 만들어진다. 물론, 다시는 일어설 수 없는 결과를 가져다 주는 비극적인 실패도 있다. 그러나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선수는 수천 번 넘어져야 한다. 해밀턴의 점프와 백플립이 완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년간의 연습과 대회에서 수도 없이 넘어졌고 다시 일어섰기 때문이다.린든 존슨(Lyndon Johnson) 대통령의 대변인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실패로 인해 심각하게 실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백악관 집무실에서 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악관 일은 실패를 고통스럽게 인식하지 않는 이들에게 맡기기에는 너무나도 중대한 책임이 따른다고 믿었기 때문이다.영적인 근육도 마찬가지다. 여러 사람들 가운데 특히 목회자들은 곳곳에서 실패를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지해야 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 자신의 실패에 가슴 아파하며 나눌 줄 알아야 좋은 목회자이다. 나는 목회자를 무너뜨리는 도덕적 실패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는 게으르거나, 조직적이지 못하거나, 능력이 부족하여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만성적 실패를 언급하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도 소명에 필요한 역량, 곧 실패를 통해 학습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 목회자는 학자의 정신, 어린아이의 마음, 그리고 코뿔소의 가죽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왜 코뿔소의 가죽인가? 물론 당신도 다른 사람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바로 그 사람들이 간혹 비평과 공격으로 당신을 실패하도록 몰고 가는 상황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실패를 모조리 피한다면, 당신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언젠가 항불안제의 후유증에 대해 웃으며 설교했던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가볍게 여겼지만, 내 말을 듣고 한 젊은 엄마는 울었다. 그녀는 자신의 전 남편이 그녀의 아버지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했고, 그 결과 신경안정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나는 그녀를 실망시켰다. 하지만 그녀는 감사하게도 나를 용서했다. 그 과정에서 나는 교인들의 상처에 관해 알게 되었다. 실패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었을 무언가를 그 날의 실수를 통하여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유일한 방법그 무언가를 배울 다른 길이 없었기에 실패를 통해 배워야만 했던가? 이는 난해한 문제이다. 한번은 누군가가 말했다. “화가 났을 때 말하라. 그러면 정말로 후회하게 될 말을 할 것이다.” 나도 그래본 적이 있는데, 바로 설교할 때였다. 나는 그 날의 설교를 정말 후회한다. ‘그 주일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하고 자주 생각한다.나는 실패한 교회개척자이다. 몇 년 전 개척된 이 교회는 다행히도 잘 되어가고 있지만, 오늘의 결과는 내 덕분이 아니다. 나는 모든 힘을 여기에 쏟아 부었지만, 내가 이 사역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어떤 이들은 내 아이의 문제를 보며 내가 양육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마약 치료센터에서 내가 만나 본 대부분의 부모들은 스스로를 양육의 실패자로 여긴다. 그런데 중독자를 둔 부모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자녀들을 중독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시도하는 방법들이 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녀들이 더 실패하지 않도록 그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잘못된 방식으로 그들을 돕고자 노력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자녀들을 계속 실패하게 만든다. 아마도 부모의 직관에는 반대되겠지만, 우리 자녀들은 홀로 있어야만 한다. 그가 공동체의 도움을 받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런 도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엄마와 아빠가 주체가 되어 그들을 회복으로 이끌 수는 없다. 그는 그 공동체에서 자신의 두 발로 서서 회복의 길을 홀로 걸어가야 한다. 내가 잘못된 양육의 길을 걸어보지 않았더라면, 이런 실패에 대해 결코 알지 못했을 것이다.실패에 관한 한, 나는 결정론자가 아니다. 나는 소망주의자이다. 나는 젊은 목회자나 부모들에게 “도중에 실패하기를 소망합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성장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성공이며, 실패 없이는 성장이 가능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성장이 실패로부터 자동적으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그러나 늘 도움만 받는다면,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그러므로 실패할 때 주님께 감사하자. 실패의 원인이라든가 그 실패가 가져오는 고통이나 혼돈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겸손과 감사와 인내를 배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Leaders, the Way Up is Down번역: 정은심
목회
난관
실패
정신근육
린든존슨
영적인근육
성장
감사
겸손
인내
선한 행실과 증인으로서의 삶
by Don Carson
2018-11-23
주님은 그리스도인의 증인 된 삶을 설명하기 위해 빛이라는 은유를 사용한다(마 5:14-16). 그리스도인들은 어두운 세상의 빛이다.예수님은 물리적인 빛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한다. 언덕에 드리워진 ‘도시의 불빛’, 그리고 등잔 밑에 드리워진 ‘등불’이다. 여기서 도시의 불빛은 자주 오해되곤 한다. 어떤 이들은 마태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록하면서, 멀리 떠오르는 도시의 모습에 대해 혼동하여 적절치 못한 예를 넣었다고 생각한다. 그 실례가 의미는 있어도 예수님이 말씀하신 빛과 관련해서는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산업화 이후 빛과 전기가 너무 흔한 세상에 살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비평의 오류라고 할 수 있다.빛의 중요성그들은 어둠의 특성을 잘 모른다. 캐나다에서는 도시나 마을에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으로 캠핑을 갈 수도 있다. 구름이 낀 날이라면, 그 곳은 완전히 어둠으로 덮인다. 코앞도 안 보인다. 그런데 100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도시가 있으면, 어둠은 조금 옅어진다. 도시의 불빛이 구름에 반사되기 때문에 완전히 어두웠던 밤이 더 이상 그렇게 황량하지만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숨겨질 수 없다. 그들이 비추는 선한 빛은 절대적으로 캄캄할 수밖에 없는 그 어둠을 약화시킨다.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막대한 양의 전기. 하지만 전력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면, 우리는 어둠이 얼마나 공포이며 모든 악의 상징이 될 수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도시로부터 퍼져나가는 불빛은 분명 그 어둠을 이전보다는 좀 더 견딜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빛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므로 기름 램프의 불빛이 깜박거린다고 그냥 문질러 꺼버리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타고 있는 심지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아주 작은 불빛일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 빛이 없어서 완전히 캄캄하게 된다면, 그 작은 불빛은 놀랍게도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출 만큼 영향력을 갖는다(마 5:15).선한 행실의 중요성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 5:16).본문 속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두운 세상에서 비추는 이 빛은 어떤 빛인가? 이 문맥에서는 개인에게 도전하거나 교회에게 선언하는 메시지가 잘 읽혀지지 않는다. 여기서 그 빛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행하는 ‘선한 행실’을 의미한다. 곧, 단 몇 사람이라도 그들을 보며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인식하도록 만드는, 그래서 그들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선한 행실이다.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그분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어진 일을 게으르게 하여 그들의 고용주를 도적질하지 않으며, 또한 탐욕과 인색함으로 그들이 고용한 일꾼들을 강탈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돕는 일을 우선하며, 가시 돋친 말로 되돌려 주는 일을 꺼려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발전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며, 지저분한 유머는 싫어한다. 또한 그들은 진실하며 참된 마음으로 위로하지만, 거만한 정치인 같은 자기중심적 자세나 세속적인 사람의 자유분방한 태도 모두를 거절한다. 그들은 담대함으로 의를 추구한다.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증인의 모습을 잃었으며, 그 모습을 되찾는 일에도 민감하지 않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세상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이 신실하게 선포되던 시절에는 사람들이 변화되어 세상의 빛이 되었다(마 5:14). 그들은 세상의 빛으로서 감옥 개혁, 의료 봉사, 노동 조합, 주류 판매 통제, 노예 폐지, 미성년 노동 폐지, 고아원 설립, 형법 개혁 등 모든 영역에서 의를 이루어가는 선봉에 섰다. 바로 그들의 선한 행실로 인하여 세상에 드리워진 어두움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시인하는 자들이 자기 유익보다는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때 일어났다.“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Christian Witnesses with Good Deeds번역: 정은심
영성
신앙과소명
선한행실
증인
삶
빛
중요성
주님
그리스도인
제자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by Thomas Schreiner
2018-11-23
성경의 내용이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 누구나 인지하는 바이며, 실제로도 그러하다. 또한 성경은 창조, 타락, 구속, 그리고 완성이라는 흐름의 특징을 갖는다. 이 이야기는 창조로부터 새 창조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회심은 어느 부분에 들어갈까? 그것은 구속 부분에 속한다. 분명, 회심이 성경 이야기의 핵심 주제인 건 아니다. 성경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대목은 회심이 지향하는 ‘목적’ 부분에서 나타난다. 이 목적은 우리가 지음 받은 목적이기도 하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히 즐거워하기 위해” 창조되었다. 장차 새 세상이 도래할 것이며, 거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며 그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계 22:4). 동시에, 회심은 성경 이야기의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심하지 않고는 새 창조의 일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에서 마주하게 되는 매우 분명한 결론은, 우리를 구속하시고 흑암의 지배로부터 건져 내신 하나님을 천국에서 영원히 찬양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의 삶 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구원 사역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가 올리는 찬양의 주제가 될 것이다.이스라엘의 역사는 성경 줄거리의 방대한 부분을 차지하므로, 왜 회심이 그 이야기의 기본이 되는지를 여기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회심과 이스라엘 이야기 이스라엘의 역사는 사실상 아담으로부터 시작된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다스림으로써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지어졌다(창 1:26-28).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에서 그분의 대리 통치자여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신뢰하며 순종함으로써 그의 통치권 아래에서 만물을 다스려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에 반역했으며, 창조주께 찬양과 감사를 드리지 않고 피조물인 자신들을 숭배했다. 그 불순종의 결과로 아담과 하와는 죽게 되었다(창 2:17). 그들은 죄를 짓는 순간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었고, 회개하지 않는 한 ‘영원한’ 죽음에 처해질 운명이었다.죄를 범한 이후, 아담과 하와에게 근본적으로 필요한 일은 회심이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상태일 때, 그들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리거나 그분의 축복을 세상에 확산시킬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자의 후손이 뱀과 뱀의 후손을 이기리라고 약속하셨다(창 3:15). 초기 인류 역사는 인간들의 철저한 죄악을 보여준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의 아들과 딸로서(롬 5:12-19), 그리고 뱀의 후손으로서(마 13:37-38; 요 8:44; 요일 5:19) 세상에 들어온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들만이 사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다. 예컨대, 가인은 의로운 아벨을 살해함으로써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었다(창 4:1-16).악의 힘이 얼마나 강했을까? 노아 당시의 세상에는 여덟 명의 의인들만 남았다! 인류는 철저히 악했고, 창세기 6장 5절은 죄가 만연한 상태를 증언한다. 뱀의 후손이 땅을 지배했지만, 하나님이 홍수로 죄인들을 멸함으로써 당신의 거룩하심과 통치권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새로운 시작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황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창 8:21). 바벨탑 사건은 새 창조가 아직 이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창 11:1-9). 세상은 여호와를 사랑하는 사람들에 의해 다스려지지 않았다. 즉, 새 창조는 새 마음 없이는 도래할 수 없었다.바벨에서 사람들이 흩어지고 심판 받은 후에 아브라함이 부르심을 받았다(창 12:1-3). 악한 세상에서 다시 한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이 사람은 복을 약속 받았다. 다시 말해, 가나안을 새로운 에덴으로 만드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아브라함은 아담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후손이 될 것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결과적으로 온 세상으로 확산될 계획이었다. 아담과 하와가 행하도록 부르심 받은 대로, 그는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세상을 다스리도록 부르심을 받았다.우리는 이 이야기의 전개 과정이 길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약속들은 거의 2천 년이 지나도록 성취되지 않았다. 창세기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에게 약속되었던 그들의 후손에 초점을 맞춘다. 이 족장들은 가나안 땅을 물려받지 못했으며, 온 세상에 확산되는 축복을 보지도 못했다.출애굽기로부터 신명기까지 이어지는 이야기에서는, 애굽 종살이로부터 이스라엘이 해방된 사실을 회고한다(출 1:15). 이제 하나님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스라엘의 후손을 향한 약속을 성취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일종의 새 에덴인 가나안 땅으로 이끄셨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적 통치가 실행될 계획이었고, 만민은 하나님의 통치권 아래에서 백성의 의와 평안과 형통을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애굽을 떠났던 세대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20-38). 그들은 애굽으로부터의 위대한 구원과 하나님의 모든 표적 및 기사들을 본 후에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길 거부했다. 애굽으로부터 구출된 이스라엘 백성 중의 대부분은 완고하고 반역적이었며, 자신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진정으로 알지 못했다(고전 10:1-12; 히 3:7-4:11). 그들에게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경외하며 그분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마음의 할례, 즉 회심이 필요했다(신 30:6).광야 세대 이후에 일어난 후손들은 예전 세대가 실패한 일에 성공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신뢰하고 순종했으며,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았다(수 21:45; 23:14). 이제 이스라엘은 그들의 새 에덴에서 살며 여호와의 통치 아래에서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삶을 보여줄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과 속 벌레는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여호와를 향한 이스라엘의 순종이 오래 가지 않았던 것이다. 사사기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만민에게 복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이방 민족들을 모방하고 이교적인 삶의 방식에 빠져들었다. 이스라엘이 회개했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구원하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들은 죄악으로 되돌아가기를 반복했다.이스라엘은 무엇을 해야 했나? 아브라함에게 약속이 주어진 이후로 거의 1000년이 지났다. 엄청 늘어난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 땅에 살았지만, 전 세계적인 축복에 대한 약속은 실현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처럼 왕을 원했고, 그들이 세울 왕이 이스라엘을 구원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삼상 8:5). 사울이 왕으로 임명되었을 때, 그는 아브라함처럼 또 한 명의 새 아담이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울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여호와께 반역함으로써 왕의 자리에서 추방되었다(삼상 13:13; 15:22-23).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통치는 사울의 통치로 실현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후 다윗을 왕으로 임명하셨고, 그는 사울과는 달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 나라를 다스렸다(삼상 13:14). 하지만 밧세바와의 간음과 우리아 살해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축복을 온 세계에 임하게 할 대행자가 아님을 드러냈다(삼하 11장).솔로몬이 즉위했을 때에는 새 창조의 낙원이 곧 눈앞에 닥친 것처럼 보였다(왕상 2:13-46). 그는 평화 중심의 통치를 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장엄한 성전을 지었다(왕하 3-10). 솔로몬이 이처럼 처음에는 지혜롭게,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백성을 다스렸지만, 시간이 지나자 여호와를 멀리하고 우상숭배를 행하였다(왕상 11장). 그 결과, 이스라엘은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고(왕상 12장), 오랫동안 죄악으로 빠져들었다. 이후, 이스라엘은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그리고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 갔다(왕하 17:6-23; 24:10-25:26). 아브라함의 소명 이후로 약 1500년이 지나도록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땅과 후손 및 축복에 대한 약속들은 성취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더 이상 가나안 땅이 아닌 유배지에 머물렀고, 그들은 온 세계를 복 되게 하는 역할을 감당하지 못한 채, 세상 나라들과 다름없는 모습이 되었다.왜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갔을까? 무엇이 문제였는가?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그들의 죄 때문이라고 거듭 가르친다(사 42:24-25; 50:1; 58:1; 59:2, 12; 64:5). 여호와께서는 이사야서에서 새 출애굽과 새 창조를 약속하신다. 하지만 새 출애굽과 새 창조는 오직 죄 사함의 역사 안에서만 이루어 질 계획이었고(사 43:25; 44:22), 또한 이 용서는 여호와의 종의 죽음을 통해 현실화될 예정이었다(사 52:13-53:12). 예레미야도 같은 진리를 가르쳤다. 이스라엘에게 필요한 것은 할례 받은 마음이었다(렘 4:4; 9:25). 달리 말해서, 그들에게는 거듭남과 회심이 필요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마음에 자신의 법을 기록하여 그들로 하여금 순종하게 할 새 언약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31:31-34).이와 동일하게, 에스겔도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의 죄를 정결케 하시며, 그들의 돌 같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실 그 날을 내다보았다(겔 36:25-27). 그들의 변화된 마음은 성령의 사역에 따른 결과일 것이며, 이로 인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길을 걷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주전 536년에 포로로 살던 땅으로부터 돌아왔지만, 선지서들에 나오는 위대한 약속들이 완벽하게 실현되지는 않았다. 이스라엘은 학개, 스가랴, 에스라, 느헤미야, 그리고 말라기 시대에도 고투를 벌였고, 약속된 성령의 사역이 아직 전개되지 않았다. 그들은 한 왕을 기다리고 있었고, 새 창조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다.회심 없이는 이스라엘이나 세상을 향한 축복도 없다지금까지 살펴본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죄 사함과 할례 받은 마음 없이는 새 창조와 새 출애굽도 누릴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들은 이스라엘의 죄와 반역 때문에 실현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여호와의 뜻을 거듭 불순종하고 거역한 일들로 점철된다. 이스라엘에게는 죄 사함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이사야는 고난 받을 종을 예언함으로써 그러한 죄 사함이 실현될 것임을 가르쳤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성령의 초자연적인 사역, 즉 회심이 필요했다.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회심이 바로 이스라엘의 역사, 곧 성경 이야기의 기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스라엘과 세상에 약속된 복은 그들의 회심을 떠나서는 결코 얻을 수 없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Conversion and the Story of Israel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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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일곱 가지 이유
by Christopher Ash
2018-11-23
나는 모든 크리스천들은 시편을 통해 기도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만약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시편으로 기도해야 하는 다음의 일곱 가지 이유를 읽어 보기를 바란다. 1. 시편으로 기도하면, 기도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모든 크리스천은 기도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또 기도에 관해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눅 11:1). 비록 거듭난 후일지라도,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주님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의 구조는 시편에 기반을 두고 있다. 시편은 주기도문의 주제들이 더 확장되고 구체화된 기도이다. 물론, 모든 시편이 다 기도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모든 시편은 여러 측면에서 기도의 틀을 만들고 발전시키도록 도움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교회는 시편으로 기도했다. 우리 역시 그들의 모본을 따를 필요가 있다(엡 5:19).마틴 루터는 그의 ‘시편’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선생님이 모본을 작성하여 학생들에게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나 짧은 글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치듯이, 하나님도 시편을 통해 기도의 언어와 기도하는 방식을 미리 마련해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가 하늘 아버지와 기도로 소통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신다.”2. 시편으로 기도하면, 풍성한 성경의 진리에 반응하며 살도록 훈련된다하나님은 우리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기뻐하며 사는 법을 배우도록 성경에 있는 모든 놀라운 진리를 시편 속에 가득 채워 놓으셨다. 초대교회 교부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성경의 각 권이 각각의 특별한 과일을 가진 정원이라면, 시편은 성경 각 권에 있는 모든 종류의 과일들이 자라는 정원이다. 나는 이런 이유 때문에 여행자들이 과거에 성경을 통째로 들고 다닐 수 없는 곳에서는 신약과 시편을 가지고 다녔을 것이라고 생각한다.시편을 통해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반응하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시간을 투자하는 것은 충분한 가치가 있다. 우리가 시편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운다면, 기도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진리의 각 부분을 깨닫는 귀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3. 시편으로 기도하면, 인생의 모든 여정에서 항상 기도하는 균형 잡힌 기도자가 된다시편은 모든 성경의 가르침을 축약해서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의 경험에 대한 다양한 측면을 드러내 주기도 한다. 내가 만난 어느 학생은 시편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경험을 묘사하고 이해하며 느낄 수 있도록 감정의 색깔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팔레트와 같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그림의 기본만 배운 어린이는 그저 몇 가지 색만 사용하여 그림을 그릴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그림을 배우게 되면, 점차 자신만의 섬세한 색조를 나타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정서도 시편에 점점 젖어 들어감에 따라 어린아이의 단순한 경험을 넘어서서 점점 더 풍부하고 복잡 미묘한 내면의 삶을 경험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칼빈은 그의 ‘시편 주석’의 서문에서, 시편을 “영혼의 각 부분에 대한 해부”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시편은 어떤 사람이든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한 가지의 감정만을 말하지 않고, 그 감정을 거울 속에 보이는 것처럼 고정되게 표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시편에는 성령님이 각각의 사람에게 깨닫게 하시고자 하는 인생의 수많은 감정들이 표현되어 있다. 이 감정들은 모든 사람들이 삶 속에서 당면해야 하는,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고 우리 내면에 출몰하는 모든 종류의 고통, 슬픔, 두려움, 의심, 희망, 걱정거리, 혼란스러움 등이다.”4. 시편으로 기도하면, 무질서한 애정(affections)이 하나님의 선한 질서 속에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우리는 무질서한 애정을 너무 많이 가지고 인생을 산다. 싫어해야 마땅한 것들을 갈망하고, 깊이 갈망해야 할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의 의지가 본성이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실 가장 필수적인 일은 우리의 욕망을 변화시켜서 하나님 자신이 원하시는 것을 우리도 원하도록 만드시는 일일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허락되는 때와 곳에서만, 우리의 마음이 변화하게 될 것이다.영국 성공회의 ‘공동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있는 고전적인 기도문 중 한 편을 살펴보자.“전능하신 하나님, 죄인의 통제되지 않은 의지와 애정에 질서를 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하나님,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이 명한 것을 사랑하고, 당신이 약속한 것을 갈망하는 은혜를 주십시오. 그래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참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과 시선을 확실히 고정하고 살 수 있게 해 주십시오.”시편이 바로 이 일을 해 준다. 시편은 우리의 애정을 개선하여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사랑하게 하며 복음의 약속된 축복을 깊이 갈망하게 한다. 5. 시편으로 기도하면, 쓰린 감정이 달콤해 질 수 있다우리가 자신을 적대감, 괴로움, 분노 혹은 절망에 방치할 때,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의 내면을 파괴하고 삶 전체를 씁쓸하게 만든다. 시편은 이런 어두움의 감정들을 기꺼이 수용해서 오히려 새로운 생명을 주는 정서로 변화시킨다.칼빈이 언급하듯이, 시편은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가르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이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우리의 본성을 가장 아프게 하고 쓰리게 하는 고난이 도리어 달콤한 경험이 되도록 각자를 성장시킨다. 이러한 변화가 가능한 이유는 그 고난이 그리스도를 따를 때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6. 시편으로 기도하면, 개인주의적 경건에 치우칠 위험에서 보호받는다서구 문화에서 기독교는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 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기독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우리’란 모든 시대마다 세상에 존재해 예수 그리스도의 전체 교회를 의미한다. 시편을 바로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란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시편이 나에게 적용된다는 사실도 깨닫는다.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한다.“시편을 읽을 때마다, 당신은 지금까지 존재한 수많은 충성스런 증인들과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며,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과 같다. 당신이 지금 읽는 시편은 이전에 수천 번, 수백만 번 언급된 말씀이다. 당신이 시편을 읽거나 노래하거나 기도할 때, 당신의 오른편에는 모세와 미리암이 함께 서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으며, 당신 앞에는 다윗과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있다. 또한 당신 뒤편에서는 제롬과 어거스틴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더 나아가 루터와 칼빈, 그리고 수없이 많은 신자들의 음성이 울려 퍼진다.”7. 시편으로 기도하면,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욱 뜨거워진다마지막으로, 시편은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의 여정에서 우리의 차가워진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치료제이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이 나를 전율케 하고, 식어진 마음을 뜨겁게 해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때로 우리의 가슴은 매우 차갑고 무감각하며 열정과 뜨거움이 전혀 없을 때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차가워진 영혼의 상태가 다시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달아오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시편을 읽어야 한다.나는 이 글을 통해 당신이 시편으로 기도하는 것을 시작하기 바란다. 또한, 내가 오랜 시간 시편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샘솟는 애정을 공급받았듯이, 당신도 동일한 복을 누리기를 고대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7 Reasons You Should Pray the Psalms번역: 김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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