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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에 가기 싫을 때
by Gaye Clark
2018-11-19
남편은 세상을 떠나기 몇 주 전에 말했다. “당신, 이제 직장을 떠나도 되겠어.” 내가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간호사로 출근한 첫날부터 가진 계획이었다.물론 남편의 죽음은 계획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가 나를 떠날 때, 두 아들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집은 수리를 위해 벽을 겨우 허물어 놓은 상태였다. ‘진정 이 때입니까, 주님?’ 많은 사람들의 추측과는 반대로, 생명보험은 나에게 특별한 부를 안겨 주거나 과부가 된 나의 삶을 지탱해주지 않았다. 남편의 죽음 이후, 나는 집을 이사하는 대신에 직장 생활을 여러 해 더 해야만 했다.내가 결혼할 당시에, 남편은 결혼 언약에 한 가지 약속을 덧붙이길 요청했다. 만약 그가 일찍 죽더라도, 나는 계속 내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나는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거나 후회하게 될 모습으로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했다. 사실 남편은 십대였을 때 암으로 진단받았다. 의학적으로는 치료되었지만, 그는 자신의 삶이 증기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인식하며 매일을 살았다.남편의 장례식을 마친 후에 나는 직장에 되돌아갔다. 가족과 친구들은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렴”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이 정말 듣기 싫었다. 나는 그때의 삶을 ‘계획하지 않은 계획’이라고 불렀다.내가 간호사로서 일을 하는 내내, 기도하며 떠나려는 계획을 세우곤 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직장은 내게 생계 수단이었다. 내가 직장 동료 및 환자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12시간씩 퉁퉁 부은 다리로 근무를 할 때에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고 계셨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시절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이집에 갈 때 아이들이 흘렸던 눈물, 내가 참여할 수 없던 학무보 참관 요청 공문, 그리고 가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던 여성성경공부 모임 등이었다.어쩔 수 없이 일하는 크리스천 직장인고린도후서 12장 9절이 적힌 액자가 침실 벽에 걸려 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말씀은 아침에 정말 일어나기 싫을 때, 내가 침대에서 떨치고 나올 수 있도록 도와준다.나는 신학적으로 세속적인 일의 중요성에 대해 배웠기 때문에 이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는지를 알고 있다. 에베소서 2장 10절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여전히 나는 무의식적으로 부차적인 선택의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50대에 전일제 직장에 복귀하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언젠가 한 젊은 간호사가 다가와서 “선배 간호사님,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나 말고 다른 선배 찾아서 물어봐.”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되돌아 갔다.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를 불렀다. “잠깐만, 무엇이 필요하지?” 우리는 함께 병실로 들어가서 어떤 환자의 손을 잡고 그의 농담을 들으며 웃었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눈물을 꾹 참고 미소를 지었다.내가 얼굴을 찡그리자 후배 간호사가 물었다. “왜요?” 그러자 나는 “그냥, 내가 오랜만에 직장에서 웃어 본 것 같아서. 고마워”라고 답했다.그날 이후로 나는 어려움이 있더라도 직장에서 즐거움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 노력 중 하나는 후배 간호사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투자하는 일이었다. 또 나는 지나온 길의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수많은 실수를 통해 배운 교훈들이 병원 정책에 반영되는 과정을 여러 차례 지켜봤다. 그 결과로 나는 신입 간호사들에게 자기비하에 관한 발표를 두 번이나 했다. 한번은 “정말로 실수를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라는 부제도 붙였다. 그 발표를 준비하면서 파워포인트에 성경 구절들을 찾아 넣었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롬 12:18)에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까지 ‘모든 것들’을 찾아 넣었다.그 ‘모든 것들’에는 인생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해 오는 비통함까지도 속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그 슬픔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에도 하나님은 나와 함께하셨다는 것이다. 한 간호사가 내게 말했다. “이 길에서 겪는 슬픔이 간호사를 만들지요.” 은퇴 계획올해 내 딸과 사위는 첫아이를 낳았다. 그들은 “엄마,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오는 걸 생각해 보세요. 우리 딸이 할머니 근처에서 자라면 좋겠어요”라고 사랑스러운 사명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사직서를 냈다. 9월 20일, 나는 이렇게 적었다."나는 내일 마지막으로 직장에 나갈 것입니다.우리가 항상 잘 어울린 것은 아니었습니다.눈물을 훔치며 집에 와서 내일은 절대 출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날도 있었습니다.그러나 나는 또 다시 출근을 했습니다.내 아들을 죽일 수도 있었던 초과민반응을 멈추게 해 준 일에 감사드립니다.아이들의 할아버지가 심한 심장마비를 겪기 전에 동맥을 열어줘서 고맙게 생각합니다.그리고 남편의 심장 수술에 문제가 생겨 그를 떠나 보내야 했을 때 나를 위로해줘서 고맙습니다.또 남편의 심장이 더 이상 뛰지 않을 때 나와 함께 울어 준 일도 고맙습니다.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을 때를 돌아 보면, 두 걸음 나아가면 한 걸음 후퇴하는 기분이었습니다.그러나 무엇보다 이곳에서 간호 전문인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에 마음 깊이 감사드립니다.대학병원에는 지칠 줄 모르고, 이 세상 누구보다 용감하며, 영감이 있고 지적이며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일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영웅들과 동등하게 일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어 감사합니다.내일 나는 대학병원을 떠날 것이며, 이제는 정말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우습게도 나는 항상 이 순간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그런데, 지금 나는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용기 있는 모든 이들에게, 나의 사랑하는 대학병원에게 하나님의 복이 임하기를 기도합니다."30년 넘게 일하며 배운 교훈이 하나 있다. 직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이다. 이 희생은 곧 ‘사명’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희생을 몸소 실천하셨다. 모든 크리스천은 그분의 길을 따라야 하지 않는가?나는 주님께서 오랜 시간 그 사명, 곧 희생의 기회를 포기하지 않게 하신 일에 감사한다. 주님은 나를 그분이 원하시는 자리에 두셨고, 그 자리는 바로 30년 가까이 출근한 대학병원이다. 이제 나는 주저함없이 그 시간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리고 확신한다. 내 직장은 “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던 길보다 더 나은 길”이었다고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You Hate Going to Work번역: 정은심
생활
직업
사명
감사
희생
은퇴
크리스천
하나님의계획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by Caleb Flores
2018-11-19
크리스천들은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미리 준비된 대답을 가지고 있다. 보통은 “죄로부터 나를 구원하기 위해 죽으셨습니다"와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종종 이런 대답을 들을 때마다 “그래서요?”라고 묻고 싶다. 하지만 이렇듯 귀찮게 하는 질문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나는 입으로만 믿는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와 결과에 대해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많은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죽음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 받는다면, 좋은 대답을 하지 못할 것이다.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거짓 교리들이 교회에 흘러 들어온다. 그리스도가 왜 죽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무엇이 성취되었는가에 대한 상투적인 표현들과 잘못된 가르침으로 인해 성경은 왜곡되고 있다.여기에 예수님이 죽으신 이유가 될 수 없는 네 가지 것들이 있다. 1. 예수님은 당신의 성공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당신의 건강, 부귀, 안전, 평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혹 당신이 현재 그런 상태를 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상태가 당신이 누려야 할 약속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영적인 징벌이 아닌 일시적인 평안을 주실 때도 있지만, 때로는 영적인 번성이 아닌 일시적인 고난을 주시기도 한다.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물리적 ‘축복’이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라고 하는 치명적이며 해로운 가르침을 주장한다. 이런 가르침은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종종 빈곤한 환경에서 극심한 박해를 당하는 크리스천들에게는 심한 범죄에 해당한다.예수님의 죽음은 자신의 의를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짊어졌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보여 주신다(엡 2:7). 이것이 바로 당신의 삶에 약속된 유일한 부요함이다. 이것은 독생자의 무한한 비용으로 당신을 구원하신,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을 알 때 찾아오는 기쁨과 평강이다.2. 예수님은 당신의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자유? 보수? 환경운동가? 동성애혐오자? 예수님의 이름은 이런 온갖 ‘사상’(ism)을 위해 사용되어 왔다. 우리 자신의 전통, 세계관, 또는 명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붙여 크리스천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예수님은 보수적인 공화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진보적인 민주당원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오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취임식이지, 우리 자신의 작은 왕국을 합법화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이용해도 좋다는 초대가 아니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나는 사회적, 정치적 명분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구원을 주지는 못한다. 죄악된 마음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영원한 죽음으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다. 결국 지나가는 이 세상에서 더 나은 어떤 삶도 제공해 주지 못한다.크리스천들에게는 최고의 메시지가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영광스러운 부활,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 나라라고 하는 복음이다. 바로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 복음을 설교하고 그 외의 다른 모든 문제들은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3. 예수님은 당신이 변화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변명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예수님은 우리의 변화를 위해 죽으셨다. 그분의 죽음 없이는 하나님 앞에서 그 어떤 칭의도 없다. 또한 우리의 적대적인 영혼을 고치시고 예배의 작은 행동들을 가치 있게 만드시는 성령의 오심도 없다. 예수님 없는 우리는 올무에 걸려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신의 죄악된 욕망의 노예들이고, 우리의 의지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대로 죄 가운데 남겨 둘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 오직 은혜를 베풀고자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게 하셨다. 이런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경험할 때 우리는 변화된다.그렇다면, 여전히 죄를 범할 것인가? 그렇다. 어리석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죄를 짓는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에 의해 신자는 인내하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 자신과 다른 지체들을 더 사랑하도록 성장시키고, 죄와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은 죽여 가실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매일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느리고 꾸준한 행진일 뿐만 아니라 급진적인 재조정이다.은혜는 우리를 구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킨다. 우리의 죄에 대항하여 예수님 편에 서도록 가르친다. 이 은혜는 당신을 회개하게 한다.4. 예수님은 단지 당신의 도덕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교회 주변을 둘러보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구원보다 도덕을 찾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은혜보다 율법을 원하는가?당신은 은혜에 대하여 알고 있는가? 이것은 소비자 상품이 아니다. 상품화할 수 없다. 은혜는 우리의 자율성의 부족, 즉 하나님에 대한 절대 의존을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이 완전히 자율적이고 독립적이라고 믿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그러나 은혜는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종교적인 바리새인의 마음은 예수님이 ‘이미 이루신 것’에 우리의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소리친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도덕적인 수준에 우리는 평안을 느낀다. 그런 다음, 그만큼 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려고 한다. 우리의 교만과 자기 의는 창녀와 포주의 죄 만큼이나 하나님을 불쾌하게 한다. 목사의 죄는 알코올 중독자 만큼이나 불쾌하게 만든다. 그들은 둘 다 십자가 밑에서 발견되는 구원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우리의 꿈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영원토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헤아릴 수 없는 부요를 상속받게 하셨다.예수님은 이 시대에 우리의 작은 사회적, 정치적 왕국을 세우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세대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기뻐하게 될 것이다.예수님은 우리가 계속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멈출 수 있는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선행으로 영적인 이력서를 쓰게 하려고 죽지 않으셨다. 그러나 우리는 사랑과 겸손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의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Things Jesus Didn’t Die For번역: 고갑균
복음
십자가
죽음
구원
축복
은혜
순종
사랑
예수님
설교는 왜 필요한가?
by Brad Wheeler
2018-11-16
지난주에 나는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 설교를 준비하는 데 약 25시간을 할애했다. 사무엘상 9-11장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 이 설교에서 나는 전체 본문을 먼저 읽고, 그 다음 40분에 걸쳐 그 의미를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를 회중에게 적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데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중이 나의 (때로는 고통스러운) 혼잣말을 들으려고 시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예전에 이런 질문들을 받은 적이 있다. 또는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질책하기도 했다. “왜 너는 예배의 다른 부분보다 설교를 특별히 중시하니?” “그렇게 하는 방식은 합리적, 이성적, 체계적 강론을 선호하는 서구 문화를 반영하는 건 아니니?” “네가 말하는 내용의 95%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성도들은 시간 허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하지만 지역 교회에는 설교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말씀을 듣는다나는 앉아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화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요란한 드럼 소리에 힘이 나며, 예술 작품에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야 한다.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 관계를 세우셨다. 이때 그들에게 함께 모여서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셨다(출 24: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대적들을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20마일 북쪽으로 나아가게 하신 후에 다시 둘로 나누어 각각 맞은편 절벽 앞에 세우셨다. 그곳의 깎아지른 듯한 두 산들이 자연적인 대강당 역할을 했다.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4-35). 남방으로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와중에 그러한 일을 행한 것은 의외의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전쟁이 아니고, 그들은 보통 민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창조한 말씀이 곧 자기 민족의 삶을 규정짓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전쟁 중에도 말씀을 놓지 않았다. 여러 해 후에, 요시야가 언약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때에도, 그는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었다(대하 34:30). 본토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였을 때,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나무 강단에 세웠다(느 8:4).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느 8:7), 에스라와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에 적힌 이사야서를 읽으신 후에 다시 그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눅 4:14-22).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복음과 관련된 다른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베드로의 공개적인 요엘 2장 강해를 통해서였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이 세워진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고(행 6: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했다(딤후 4:2). 이외에도 얼마든지 성경 속 예를 더 들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마음을 흥분하게 하지만, 우리의 귀는 영혼의 힘을 얻게 한다. 우리는 천국 문과 지옥 불의 장면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는 성경 읽는 방법을 가르친다얼마 전에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한탄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 크리스천으로서 용기를 지니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더욱 불거지는 성(性)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화적 태풍이 덮쳐올 때, 당신은 이에 대해 대항할 말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없다면, 이는 성경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성경에서 하는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성경을 도덕적 이야기 내지 이솝 우화의 종교버전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생활의 핵심으로 보전한다면, 특히 성경의 연속적인 본문을 연이어 설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면, 교인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성도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굳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실한 설교다. 곧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의 능력, 첫 아담의 실패, 희생 제사의 필요성, 둘째 아담과 새 에덴에 대한 약속을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설교를 들려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 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주는 설교가 필요하다. 내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그 말씀을 이를테면 채굴할 금이 가득한 광산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나가는 길에 주울 수 있는 몇몇 자갈들이 흩어진 작은 언덕 정도로 여겼다. 다행히도 나는 이후에 풍성한 성경 주제들을 세밀히 연결시키고, 또 그 모든 내용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들려 주는 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의 설교가 바로 금광을 캐내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고, 나는 비로소 확신과 용기를 지니고서 구약성경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와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을 때, 성도들이 성경 읽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교인들의 삶이 변화한다만일 설교 내용의 대부분을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 설교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 하지만 성도들은 들은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결혼, 재물 등에 관한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기억할 것이며, 이런 설교들로 인해 변화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설교 자체를 무익하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한편의 설교가 교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다. 설교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일까지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도들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한 번의 설교가 한 주를 지켜 주는 말씀인 것이다. 즉, 매주의 설교는 우리를 다음 주일의 예배로 이어준다.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시므로, 더 이상 설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y Preachin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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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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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웰스
느헤미야
은혜란 무엇인가?
by R. C. Sproul
2018-11-16
우리는 수십 년 전 리고니어 밸리스터디센터에서 추수감사절 카드를 보냈다. 거기엔 크리스천에게 전하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었다. “신학의 본질은 은혜이고, 성화의 본질은 감사이다.”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 사람과 하나님의 역할이 각각 무엇인가 논쟁할 때, 우리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은혜로우신지에 대해 이해하면 할수록, 그리고 하나님의 자비로 승리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은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다면, 감사의 이유도 바로 알지 못할 것이다. 은혜란 무엇인가? 우리가 어릴 때 배운 요리문답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은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조건적 호의다.” 은혜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해야 할 일은 은혜가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은혜는 공로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지금까지 은혜를 공로와 관련지어 생각해 왔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닌 줄 앎으로써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 은혜는 공로가 아니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바울은 로마서에서 잘 보여 준다. 그는 마지막 날에 우리가 처음으로 ‘완전함’과 ‘공평함’과 ‘절대적인 의’의 기준을 따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로마서 1장 18절에서 3장 20절에 걸쳐 설명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모든 입술이 그 말을 그치게 될 것이다. 정죄는 오직 죄인들을 향한 선언이기에 하나님의 심판대는 모든 타락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불러 일으킬 것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를 신뢰하는 사람들은 소망이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주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그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기 때문이다. 칭의는 의무를 행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칭의는 오직 예수님이 이루신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써 주어진 것임을 주목하기 바란다. 우리는 자랑할 것이 없다. 나의 행함이 아니라 오직 은혜에 의하여,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예로 든다. 아브라함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 선언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이다. 만일 그의 구원과 칭의의 기초가 칭찬받을 만한 예배나 순종에 있었다면, 아브라함에게는 자랑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어떠한 공로도 없었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믿음 뿐이었고, 그 믿음 자체도 선물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 엡 2:8-10).로마서 4장 4-8절은 이 사실을 명확히 설명하는 핵심 본문이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이 바울이 설명하는 은혜다. 일하는 자에게 은혜는 오히려 빚이다. 만일 은혜의 기초를 공로로 삼는다면, 이는 은혜 이전에 갚아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의미한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하루에 여덟 시간을 일하면 100달러를 주겠노라고 가정하면, 나는 당신이 여덟 시간을 일한 것에 대해 보상해야만 한다. 나는 당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의무를 이행한 것에 대한 몫을 받을 뿐이다. 당신이 계약을 지키면, 나는 그에 합당한 삯을 주어야 할 의무을 갖게 된다. 주님께 우리는 보상할 길이 없는 빚진 자다. 성경은 경제 용어를 이용해서 구속을 설명하는데, 우리는 값으로 산 것이 되었다고 말한다(고전 6:20). 하지만 우리는 그 값을 도저히 갚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 우리의 빚을 갚으실 수 있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을 보증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만 구원이 가능하다.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다. 우리는 어떤 자격도 없으며, 그리스도께서 오직 은혜로 그의 공로를 우리에게 베푸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믿음으로 받을 뿐이다. 즉, 은혜의 본질은 자발적인 베푸심이다. 조건이 있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은혜가 아니다.의인이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이고 온전한 기준은 하나님께만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매달려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 홀로 하나님의 정의로운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로를 가지고 계시며, 예수님은 그 공로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다. 우리 안에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칭함을 받을 어떤 것도 없다. 그것은 순전한 은혜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이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생길 것이다. 교회의 위대한 교사들이 알려 주는 참된 성화의 출발점은 우리의 죄인된 본성을 더 깊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더 깊이 알게 될 것이며, 사랑과 순종하고자 하는 자발적인 마음도 더해 갈 것이다. 은혜를 진정으로 이해할 때, 그리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공로로 죄인인 우리의 연약함을 덮으셨음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변화할 것이다. 윤리적인 삶을 향한 크리스천의 동기는 단순히 율법이나 규칙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윤리적인 삶을 향한 우리의 노력은 감사에 기초해야 한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그 점을 지적하셨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너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계명을 지키라.” 은혜, 즉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참된 이해는 항상 감사와 순종의 삶을 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Grace?번역: 강화구 (매일배움)
신학
교리
은혜
바울
로마서
믿음
아브라함
성화
질투를 정복하는 네 가지 방법
by Tilly Dillehay
2018-11-16
질투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죄 중에 유일하게 재미없는 죄다. 질투는 열등하다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시작해서 원한이라는 불쾌한 감정으로 진척되었다가, 결국 옹졸하거나 공격적인 다른 죄를 양산한다. 설사 질투가 원하는 것, 곧 다른 사람이 갖고 있는 좋은 면이 무너지거나 사라지는 것을 드디어 보게 된다 하더라도, 질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다른 부분으로 촛점을 옮겨갈 뿐이다.이중 어떤 부분도 두뇌의 쾌락 중추를 자극하지 않는다. 식탐, 탐욕, 색욕, 허영, 교만, 그리고 다른 유사한 죄악들은 적어도 그 죄만큼의 쾌락을 준다. 하지만 질투는 그 감정이 주인이 되고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죄다. 즉 질투라는 죄는 사람의 마음, 영혼, 생각, 에너지를 지배하지만 그 대가로 쾌락은 물론 그 무엇도 주지 않는다.질투를 벗기 위해 사랑을 입으라감사하게도 크리스천에게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 일이 권리인 동시에 의무다(엡 4:22-24).질투라는 죄와 싸우는 크리스천은 자신이 전쟁이 아닌 마음 속 작은 갈등을 겪고 있다고 잘못 생각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질투는 비밀로 숨기기 쉽고, 심지어 자신도 속일 수 있는 죄이기 때문이다. 또한 다른 죄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상상력이 질투라는 죄를 작은 것으로 착각하게 유혹하기 때문이다. ‘질투는 간음 정도로 위험하지는 않을 거야. 왜냐하면, 누구도 볼 수 없고 누구도 해치지 않으니까.’ 그런 뒤 질투가 또 다른 죄를 파생시키면, 우리는 질투라는 뿌리는 제거하지 않고 겉으로 나타난 행위만 잘라 내려 한다.이런 태도로는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질투를 심각하게 다루어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째, 성경에 의하면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을 보신다(삼상 16:7). 이는 질투가 ‘은밀한 죄’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판단인지를 보여 준다. 마치 태양 아래 두 사람이 어느 한명 숨김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하나님은 당신의 질투와 간음을 나란히 볼 수 있으시다. 은밀한 죄란 없다.둘째, 성경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 그 안에 머물지 않는다고 말한다. 예수님이 여러 번 말씀하셨듯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하기 때문이다(마 12:34; 15:18). 질투는 다른 모든 마음의 죄와 마찬가지로 행동으로 이어진다. 질투는 안전하지 않고, 가만히 있지 않으며, 불쾌한 행위와 함께한다.질투는 괴물이며,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는 영적 전쟁을 벌여야 한다. 에베소서 4장의 정신을 따르자면, 질투라는 죄를 ‘벗는’ 훌륭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덕목을 ‘입는’ 것이다. 여기에 사랑으로 질투와 싸우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1.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의 성공을 하나님께 감사하라예수님은 우리 원수에게 선을 행하는 방식 중 하나로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명령하셨다(마 5:43-48). 하지만 질투하는 마음은 친구조차도 원수로 만들어 버린다. 질투심은 친구나 지인이 당신의 행복을 위협하는 원수라고 믿게 만든다. 그 이유는 단순하게도 그 사람이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졌거나, 당신이 되고 싶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만약 이러한 상태 중에 있다면, 원수라 여기는 그 동료를 위하여 말씀에 순종해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할 때, 그 사람과 더불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주신 선물에 대해 함깨 감사하라. 다시 말해, 그 사람에게 성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2. 당신이 질투하는 그 사람이 더 성공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그렇다. 그 사람의 지속적인 성공을 위해 구체적으로, 그리고 특별히 질투하는 바로 그 부분에 대해 기도하라.모든 과목에서 좋은 점수를 받고 일류 대학에 진학한 친구가 있다면, 그가 그 학교에서도 공부를 잘하도록 기도하라는 뜻이다. 또는 당신이 무척이나 선망하는 스타일의 이성과 친구가 결혼을 했다면, 그 친구가 배우자와 더욱 친밀해지고 그 결혼을 통해 성장하도록 기도하라.곧, 자신을 위해 간구했을 만한 내용들을 가지고 친구를 위해 기도하라. 영적 안녕 뿐만 아니라 물질적 축복을 위해서도 기도하라.3.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즐거워하라우리는 물건이 아니라 지성, 미모, 은사, 대인 관계와 같은 그 사람만의 특색을 많이 질투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선물은 단지 받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이 함께 누리는 복이 될 수 있다.매력과 유머 감각을 가진 친구와 시간을 보낸다면, 당신은 신나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동료가 여러 사람 앞에서 강연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들음을 통해 지식을 얻을 수 있으므로 그에게 재능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일 당신의 형제자매가 음악을 잘 연주한다면, 좋은 음악을 접할 많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이처럼 오랫동안 피해 왔던 일, 곧 타인이 가진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에 익숙해지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선물들을 즐거워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아 보라.4. 당신이 질투하는 사람을 칭찬하라일반적인 상황에서 칭찬이란 무언가를 즐기는 행위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동시에 그것을 즐기는 ‘과정’의 일부이다. 따라서 친구나 지인이 받은 은사를 통해 내가 누리는 것이 있음에도 칭찬 없이 조용히 앉아만 있는다면, 이는 사실 부자연스럽다. 마치 좋은 것을 누리다가 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에베소서 4장 29절은 다음과 같이 명령한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하지만 이 명령과 다르게 질투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모든 칭찬 속에 가시를 담아 낸다. 그는 자신의 질투를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 어떻게든 험담을 만들어 낸다.본문은 이와 반대로 행동할 때 기쁨과 은혜의 영향이 늘어난다고 우리에게 가르친다. 우리는 질투하는 대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은혜를 끼치게 하는” 말을 해야 한다. 과연 가능할까? 과연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모든 좋은 선물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가능하다.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자유롭고도 자연스럽게 칭찬할 수 있다.질투가 끝나는 시간우리는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없다. 오직 성령만이 그의 약속처럼 우리 안에 사랑을 만드실 수 있다(갈 5:22). 우리 안에서 사랑은 지금도 흐르고 있으며, 마음속에 있는 다른 죄들을 밀어내고 있다.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자신이 새롭게 하실 세상에서 모든 질투의 흔적을 지우실 것이다. 단언컨대, 천국에 가면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이며, 무엇으로도 그 좋은 일을 전부 담을 만큼 넘칠 것이다. 핵심은 우리의 반응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에 반응하여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 동시에 주위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그 사랑이 역사하여 참된 기쁨을 낳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새로운 존재 방식이다. 질투는 지금 잠깐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고전 13:8-1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4 Ways to Conquer Your Envy번역: 하늘샘
생활
감정
질투
은밀한죄
영적전쟁
감사
간구
은사
칭찬
성령
자녀와 매일 ‘하나님 대화’를 나누라
by Julie Melilli
2018-11-15
탁자 위에는 지저분한 낙서들과 찢겨진 노트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부러진 연필, 지우개가루와 다 마신 음료수 병들이 한껏 구겨진 과자봉지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들리는 낮은 신음소리가 내게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지금 이곳은 범죄 현장인가?’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곳은 내가 사랑하는 고등학생 아들의 방이었다. 아들은 기하학 숙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팔로 머리를 감싼 아들이 주저 앉아 외치고 있었다. “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나와 눈이 마주친 아들은 자신이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 했는지 보여 주며, 자기가 선택한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맑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분명히 아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움이 필요했다. 안타깝게도 아들은 답을 찾지 못하고 막다른 골목에 도착해 있었다.나는 맛있게 요리하고, 울창한 정원을 가꾸고, 떨어진 셔츠단추를 달거나 바짓단을 줄이는 일은 잘 할 수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기하학 숙제를 할 수 있는 능력은 내게 없었다. 고등학교 때는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기하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자녀가 기하학 숙제와 같이 답하기 어려운 성경 질문이나 신학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나는 그때를 준비하기 위하여 이 글을 쓰고자 한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한 가지 강조하자면, 당신이 모르는 문제에는 답을 줄 수 없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확실히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하기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부모로서의 소명을 깨닫고, 신앙 교육에 도전하는 자세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어느 순간, 자녀가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할지 모른다. 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그에 대답할 준비가 항상 필요하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공부해야 한다. 어려운 신학 문제를 이해하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딤후 2:15), 소망에 관하여 묻는 자들에게 대답할 수 있도록(벧전 3:15), 주님께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약 1:5).그리스도인 부모에게는 자녀를 그리스도의 제자(마 28:19)가 되도록 가르칠 의무가 있다. 그렇다고 신학 학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니 얼마나 감사한가! 복음의 기초, 하나님께서 당신을 위해 하셨던 모든 일과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자녀에게 당신이 경험한 복음에 대해 알려 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성경과 신학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손 놓고 기다리지 말라. 말씀을 완벽히 이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약하고 흠이 있는 말(입술)을 사용하실 것임을 신뢰하라. 그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이 아닌 하나님께 달린 일임을 기억하라. 당신은 그저 자녀의 마음에 복음의 씨앗을 심고, 물을 주는 일을 하면 된다. 그 씨앗을 자라게 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고전 3:7). 당신에게 주어진 양육의 소명을 제대로 이해하고 수행하기만 하면 된다.이 모든 임무를 위해 당신은 예배의 자리에 나아가고, 신앙 서적을 읽고, 팟캐스트의 성경 강의를 듣고, 성경 공부에 참석하고, 영적 멘토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신 일을 깊이 이해할 때, 복음을 나누고 싶은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일상에서 자녀와 함께하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일단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성경 말씀을 따라서 행동해야 한다.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신 6:7-9)이제부터 ‘하나님 대화‘(God Talk)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대화는 내가 일상에서 자녀들과 이야기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다. 즉, 모든 이야기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줄 때, 그날의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은 정말 춥구나. 나는 주님이 만들어 주신 날씨를 기뻐하고 감사해.” 또 당신의 기도 제목을 아이들에게 나누고, 하나님이 어떻게 응답하고 계신지 아이들과 함께 점검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이들의 불평거리를 찬양과 감사로 바꿔 준다. “오늘도 학교에 갈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우리가 잠자는 동안에도 주무시지 않고 지키시는 하나님께 아이들과 함께 기도한다. “하나님, 이 밤도 평안한 쉼이 있도록 돌봐 주세요.”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일상 대화를 하나님에 관한 대화로 이끄는 것이 좋다. 짐작했겠지만, 하나님에 관한 대화는 예수님을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하나님에 관한 대화를 더 많이 할수록 당신은 자녀와 가까워질 것이다. 당신의 자녀는 이 대화를 통해 삶의 어려운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이제 당신은 자녀와 복음에 대해, 신앙에 대해 나눌 충분한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하나님을 삶의 주권자로 인정했으며 최고의 스승으로 삼았으니, 담대할 필요가 있다. 자녀가 “죄가 뭐죠?”라고 묻기를 기다리지 말라. 당신이 먼저 죄에 대해 가르치라. 그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친구나 동생과 다툴 때, 죄가 무엇인지 설명하라. 죄의 결과와 회개의 방법, 용서에 대해 말해 줘라. 일상생활 속 예화와 익숙한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있다면, 잘 정리하여 당신과 자녀가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바란다. 이해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사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같은 상황이 반복된다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복습해 보는 것도 좋다.하나님에 관한 대화가 힘들 때때때로 자녀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이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할 수도 있다. 그때 회피하거나 얼버무리지 말고, 당신도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음을 자녀 앞에서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부족함을 자녀 앞에서 인정하는 일은 큰 도전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도전으로 인해 낙담할 필요는 없다. 앞서 말했듯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 대화하지 않는 것보다는 답을 모르는 편이 더 낫다.마지막으로, 자녀와 이런 대화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부모에게 권면하고 싶다. 분명 당신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이 대화에 도전한다면, 당신의 자녀는 신앙 성장의 특별한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물론, 십대 자녀는 처음에는 ‘하나님에 관한 대화’의 시도를 비웃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 일련의 과정이 당신 마음을 괴롭힐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로 인하여 자녀와의 대화가 가능할 수 있음을 의심하지 말라.자녀에게 열린 마음과 들을 귀를 허락하셔서 말씀을 깊이 깨닫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하라. 비록 자녀가 당신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말하는 동안 딴짓을 하더라도, 분명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이야기의 서두에 등장한 기하학 숙제의 결말이 궁금하지 않은가? 결국 아들은 기계 공학을 전공한 이웃에게서 도움을 얻었고, 덕분에 꽤 좋은 성적을 받았다. 이 결말은 그 이웃이 기하학에 대해 잘 알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당신이 신학에 대해 ‘기계 공학을 전공한 사람’ 만큼의 전문가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녀의 바른 신앙 교육을 위해서라면, 전공자 만큼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자녀의 기하학 숙제는 학원이나 타인의 손에 맡길 수 있다. 하지만 자녀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일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주일학교 선생님이나 담당 교역자가 아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한 필수 구성원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자녀를 위한 첫 번째 신앙 선생님은 바로 ‘당신’이다.부모에게 자녀의 신앙 교육은 가장 큰 소명이고, 특권이며,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부모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 힘쓰는 우리 모두에게 능히 감당할 능력을 주시기를 기도한다.원제: Make ‘God Talk’ an Everyday Part of Family Lif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고갑균
가정
양육
그리스도제자
자녀의신앙교육
부모의특권
하나님에관한대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 원하신다
by John Piper
2018-11-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4)."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딤후 2:25).위의 두 본문을 통하여 나는 몇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지만, "혹 회개함을 주사"라고 기록된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는 않는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원하는 바를 모두 행하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바람 중 일부는 다른 조건들로 인해 실행하지 않으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의 지혜는 그분의 영광이 가장 충만하게 드러나는 방향으로만 발휘된다. 하나님이 모든 죄인에게 회개의 은혜를 주시지 않고, 일부 죄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데에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둘째, 진리를 알게 하심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본문은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주신 회개의 선물이 없다면, 우리는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서도 이를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으며 [그럼으로써]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회개를 통해 구원에 닿을 기회를 얻게 되며, 이는 또한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얻도록 이끈다.셋째, 여기서 본문이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란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볼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자연인도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진리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진리를 아는 것(지식)’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이에 대해 깨닫지 못한다. 그러면 자연인이 볼 수 없는 진리란 무엇일까? 자연인은 복음 안에 있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한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4).넷째,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보는 눈은 하나님이 주셔야만 한다. 우리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눈이 멀어 있다. 사탄은 우리를 계속 눈이 먼 상태에 머물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회개(복음의 진리를 보고 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주시면’ 우리의 눈이 열린다. 다섯째, 우리는 비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거나 전도해야 한다. 이때 우리의 기도 혹은 전도는 그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희망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는 역사를 기대하며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그들의 영적인 죽음과 사탄의 꾀를 극복할 능력을 가지셨다. 우리는 이 진리 위에 기도와 말씀의 증거를 붙들어 매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시기를 신뢰하며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한 사도의 가르침을 새기도록 하자.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롬 10:1). 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God Desires All to Be Saved and Grants Repentance to Some번역: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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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사람
구원
회개
진리
사도
가르침
하나님의선물
11세기의 개혁자
by Burk Parsons
2018-11-15
전승에 따르면, 1066년에 노르만족이 영국을 정복한 후, 노르망디의 공작인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의 왕좌를 차지했다. 그 결과로 영국의 황태자 에드가는 영국의 왕권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망명한 아버지와 함께 살았던 적이 있는 헝가리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에드가는 누이 마가렛과 함께 영국을 떠나 대륙으로 가기 위해 배에 올라탔다. 그러나 폭풍이 불어 배는 북쪽으로 밀려갔고, 스코틀랜드의 바위투성이 연안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의 왕 말콤3세는 그곳에 도착한 영국 가족을 크게 환대했고, 시간이 지나 에드가의 누이 마가렛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였다. 에드가가 영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계속 고투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과 스코틀랜드 백성을 위해 헌신했다. 스코틀랜드의 왕후 마가렛(1045-1093년)은 교회 역사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1세기 스코틀랜드에서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자다. 제1차 십자군 전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는 동안, 동방에서 교회가 분리되는 동안, 안셈이 마가렛의 고국인 영국에서 사역하는 동안, 마가렛은 남편인 스코틀랜드 왕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전설에 따르면, 왕후 마가렛은 한밤중에 왕궁을 조용히 빠져 나와 근처의 동굴에서 남편이 예수님을 믿고 회심하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남편의 왕국에 대한 반역을 꾸미는 것이 아닌가 의심받았다. 그러나 나중에 말콤이 기독교로 회심하고 변화되는 과정에서 마가렛은 다행히 혐의를 벗게 되었다. 말콤의 회심으로 그의 왕궁에 변화가 불어왔고, 궁극적으로 스코틀랜드 민족 전체의 변화가 이어졌다. 마가렛은 하나님이 크리스천의 성품과 거룩함, 그리고 예배의 본보기로 제시하신 경건한 여인이었다. 왕궁의 여인들과 스코틀랜드의 많은 여인들은 마가렛을 매우 존경하고 섬겼으며, 그녀를 겸손과 기도의 본보기로 삼았다. 마가렛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헌신한 ‘말씀’의 여인이었다(마가렛이 읽었던 복음서는 오늘날까지 영국의 가장 위대한 보물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으며, 옥스퍼드대학의 보들리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마가렛은 여덟 명의 자녀들을 낳고, 아홉 명의 고아들을 입양하여 양육했다. 또한 교회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수없이 많은 교회의 건축과 사역에 사재로 후원했으며, 특히 무너져가는 교회들을 찾아 활력을 불어넣었다. 마가렛은 주일 예배와 안식일을 지켰으며, 이에 감동받은 왕과 왕궁은 결국 그 예를 따랐다. 덕분에 그들에게 일요일은 예배와 안식 및 섬김의 날인 주일이 되었다. 마가렛은 종교개혁 이전의 개혁자였다. 그녀는 정의롭게 살았으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행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본이 되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n 11th Century Reformer번역: 김장복 (매일배움)
역사
중세교회
11세기
개혁자
왕후
마가렛
목회자는 성도들을 좋아해야 한다
by Gavin Ortlund
2018-11-14
애정은 목회 사역의 일부이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빌 1:8)라고 하거나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라고 말한다.애정은 친절함이나 사랑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 성경 구절에서 애정은 사모함(빌 1:8), 또는 극진히 생각함과 친애함(살전 2:8)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목회를 잘하려면 성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중압감이 있거나 목회를 오랜 시간 하다 보면 애정이 식기 쉽다. 부부가 의지를 가지고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듯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애정(예를 들어, 사모함, 극진히 생각함, 친애함)을 쏟아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1. 성도들의 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라아버지로서,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내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가족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이름을 외울 수 있다(가능하다면, 메모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으라). 교회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가능한 선에서 교회 아이들에 관해 이야깃거리들을 메모하고, 그중 최소 한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는 것도 좋다. 그들을 격려하고 대학에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길을 상담해 주어라.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시켜라.2. 성도들에게서 은혜의 증거를 찾아 축하하라목회자는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 쉽다. 목회자는 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에서 행하신 선한 일을 찾아 나누고 축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음 속 복음을 따라 불평없이 긴 시간 교회의 일을 감당하는 청년이 있을 수 있다. 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넘어지기 쉬운 죄를 잘 분별하여 삶의 본이 되는 오랜 교인이 있을 수 있다. 또 어쩌면 당신의 목회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새신자가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찮거나 사소한 일들이 아니다. 정말로 축하할 만한 일들이다. 이것들을 무시하지 말라.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라.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성도들에게 애정을 느끼기 쉽지 않다. 훌륭하거나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관계에 도움이 된다.3. 성도들의 일터를 방문하라성도들은 일터에 방문하여 관심을 표하는 목회자에게 감사와 친밀함을 느낀다.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이 ‘그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나면 성도는 당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 또 일터 방문을 통해 해당 성도의 동료들까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4. “사랑합니다”라고 많이 말하라나의 할아버지는 설교를 하던 중 잠시 멈추고, 성전의 곳곳을 둘러보며 “사랑합니다”를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물론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채 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나서 성도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라. 특히 이전에 불화와 갈등이 있던 사람이라면, 사랑한다는 표현이 서로 간의 신뢰와 선의를 다시 세우도록 도울 수 있다.나는 목회에서 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가진 치유의 힘은 죄의 파괴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5. 성도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라규칙적인 기도는 기본이지만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기 쉬운 일 중 하나다. 이를 위해 일정표나 시스템을 갖는 것은 분명한 도움이 된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나는 매일 아침 QT를 하고 난 후, 성도 중의 한 명을 위해 기도한다. 물론 당신은 다른 시간과 방식으로 기도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실천하고 있는 이런 기본적인 방식을 통해 각각의 교인을 기억하며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또 한 해에 모든 성도를 위하여 적어도 한 번은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교회의 크기와 성도의 수에 따라 여러 번 기도할 수도 있다.6. 성도들이 당신을 섬길 수 있게 하라슬프게도, 교회에는 목회자를 공격하려는 비판적인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회자를 진정으로 격려하기 원한다. 때때로 격려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거나 혹은 당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다. 격려자들과 기도의 병사들은 보통 비판자나 반대자보다 눈에 띄지 않거나 목소리가 작다.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을 꺼리고, 적정한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받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돌보는 목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한 지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감정적 담을 쌓는다면, 그들을 향한 애정은 조금씩 식어갈 것이다.만약 성도들이 당신의 아이들을 돌봐 주겠다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라. 죄책감을 갖지 말라. 성도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준다고 하면, (이것이 복잡한 일임을 알지만) 당신이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부탁하라. 당신이 진정으로 휴가나 안식년이 필요하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정직하게 말하라. 부글거림을 안고 당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건강한 목회를 추구하기 위하여 해고당하는 편이 더 낫다.7. 하나님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라성도들은 목자의 양떼다. 하나님은 질투하며 사모하는 남편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신다.“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아 8:6).만약 성도들과의 관계에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라. 당신 앞에 서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신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자신의 귀한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들의 가치를 드높이는 방식이다.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면, 목회자인 우리는 그들에게 온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Should Like People (Not Just Love Them)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애정
하나님의눈으로
목자의양떼
규칙적인기도
일터를방문
가족에게관심
사랑표현
칭찬하기
회개와 개혁
by R. C. Sproul Jr.
2018-11-14
개신교 종교개혁은 좋은 뜻으로 ‘그’ 종교개혁(the Reformation)으로 불린다. 마치 종종 일어나는 일에 1차, 2차를 붙이듯이 1차 종교개혁이나 2차 종교개혁과 같은 식으로 불리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나는 종교개혁을 언급할 때 “당신은 어떤 종교개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지 않는다. 종교개혁은 경우에 따라 교회 역사에서 일어나는 갱신이나 부흥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종교개혁은 단 한 번 일어났다. 그만큼 종교개혁은 일으키기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또 하나의 종교개혁을 갈망하는 우리는 그 개혁을 출범시킨 불꽃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종교개혁은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마틴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보름스 의회에서 연설할 때 시작되었는가?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혹은 그보다 이른 때인 루터가 성경을 연구할 때, 곧 칭의에 관한 핵심 본문을 주석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이 역시 맞는 답일지도 모른다. 또는 루터가 자신의 파문을 선언하는 교황의 칙서를 불길 속에 던져 넣기 전에 불보다 더 뜨거운 연설을 했을 때 시작되었는가? 마찬가지로, 그렇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일로 기념한다. 위에서 언급한 날 가운데 어느 한 날이 아니라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재한 날을 기념일로 삼는다. 95개조 반박문에 못을 박는 망치 소리가 종교개혁 출범을 알렸다. 만약 우리가 새로운 종교개혁을 바란다면, 이 반박문의 첫 번째 목소리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 첫 번째 반박은 다음과 같다. “우리의 주요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회개하라’고 하셨을 때, 이는 신자들의 삶 전체가 회개의 삶이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다시 개혁을 성취할 것이라면, 우리는 회개의 삶을 살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가 변화될 때, 비로소 이 세상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마음이 변화될 때, 여기 있는 우리의 교회도 변화하게 될 것이다. 변화는 우리가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에만 일어나기 때문이다.종교개혁의 큰 복 가운데 하나는 세상을 둘로 갈라놓는 관점을 파괴시킨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세상을 초월적 영역과 자연적 영역으로 갈라놓았다. 초월적 영역은 선하고, 자연적 영역은 기껏해야 중립적이었다. 종교개혁은 모든 신자의 제사장 직분과 우리의 모든 삶이 ‘코람 데오’ 곧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부각시켰다. 성경은 우리 선조들에게 영혼이 구원을 얻는 법만이 아니라 문화를 정당하게 다스리는 법, 노동을 이해하는 법, 경건한 자손을 양육하는 법 등에 관한 지혜의 원천이 되었다. 창조적인 영을 가진 필그림과 청교도는 광야에서 감당해야 할 사명을 성취하기 위해 대양을 건넜다. 이후에는 아브라함 카이퍼, 프란시스 쉐퍼와 같은 믿음의 영웅들이 더 넓은 영역에서 개혁의 기치를 들어 올렸다. 우리는 이 모든 복에 대해 감사해야 함과 동시에 조심해야 한다. 경건주의의 위험—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우리 주변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관점—에 대한 반동으로, 우리 가운데 많은 이들이 경건의 복을 무시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그들은 개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 바로 경건이라는 확고한 진리를 놓치고 말았다. 여기서 개혁을 이끄는 경건은 종교개혁의 경건임을 기억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자신의 영적인 힘으로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단순히 춤을 안 추거나, 술을 안 마시거나, 수다를 떨지 않거나, 데이트를 하지 않는 등 외양에 몰두하는 태도가 아니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참된 회개의 정신을 불어넣는 경건이다. 종교개혁의 경건은 낙타를 삼키고 하루살이를 걸러 내는 성향, 곧 우리가 자신의 죄는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다른 사람들의 죄는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행동을 거부한다. 대신 우리는, 루터처럼 자신의 죄에 대해서 하나님이 은혜로 덮어 주시기를 충분히 오랫동안 부르짖어야 한다. 그런 다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은혜 주실 것을 믿는 것이다.결국 교회를 종교개혁으로 이끈 것은 믿음이었고,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또 다른 종교개혁으로 이끌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변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결코 변화되지 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만이 우리를 거룩한 길로 이끌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거룩해지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깨달음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분명 종교개혁의 믿음은 우리 자신의 구원에서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온갖 문제를 향해 달려가지도 않았다. 오히려 종교개혁의 믿음은 구원 얻는 믿음에서 거룩하게 되는 믿음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회개하는 믿음으로 나아갔다. 그때 하늘이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예수님도 이와 똑같은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이런저런 일로 괴로워하거나 염려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불신자들이 하는 일이라고 우리에게 상기시키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부르심을 받았다. 회개와 믿음이 천국에 들어가는 참된 길이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소유하느냐의 문제다. 우리가 그 의를 소유하여, 다른 모든 것에 관해 끊임없이 걱정하거나 생각하는 일을 멈출 때, 비로소 길이 열리는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더하리라고 약속하셨다. 회개와 믿음의 삶,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전략’이 되어야 한다. 회개하고 믿으라. 그러면 개혁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다. 루터도 그렇게 말했다.“우리는 여기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도와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원제: Repentance and Reformation번역: 김귀탁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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