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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삶
2019-03-04
잠언 19장 17절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성경의 윤리는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행위를 높이 평가한다. 예를 들어, 모세는 농부들에게 밭의 농작물을 남김없이 추수하지 말고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남겨두어 그들이 굶주리지 않게 하라고 명령했다(레 19:10). 선지자들도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는 사람들에게 거듭 엄중한 심판의 말씀을 전했다(사 3:13-15).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이 가난한 이들을 관대하게 대하는 자들에게 보상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한다.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있다. 경제적으로 곤란에 처한 자들은 누군가의 관대한 행위를 되갚을 여력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다. 더욱이 그런 행위를 되갚아 줄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다.다시 말해,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과 같다. 오늘의 본문은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한 주석학자는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것이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인 이유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의 생계 유지는 그분의 명예가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창 1:26-27).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셨다(시 140:12). 그분은 어려운 자들에게 베푸는 것이 곧 자기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궁핍한 자들에게 각별한 애착을 기울이었다. 따라서 도움이 필요한 자들에게 베푸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행위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베푼 것을 되갚아 주실 것이고, 장차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보상을 허락하실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선 행위가 아닌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천국에 갈 수 있다. 구원은 오직 구원자이신 주님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구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선을 행하는 자에게 보상을 내려 주신다.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일에 관심을 기울일 뿐, 그릇된 자만이나 다른 세상적 이익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올바른 동기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성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코람 데오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행한 일을 결코 잊지 않으신다. 가난한 자들이 기본적인 생필품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고 또한 다양한 방법으로 이 땅의 빈곤 해결에 손을 내민다면, 그것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이들을 적절하게 보살피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들이 가난을 겪는 이유가 다양한 것처럼, 획일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해결책은 없다.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물질적인 부족과 영적인 빈곤에서 모두 벗어나도록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또 실천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Lending to the Lord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세상의 구속
2019-02-28
스바냐 3장 9절 “그 때에 내가 여러 백성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여그들이 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한 가지로 나를 섬기게 하리니”하나님의 날이 성취할 최종 목표는 그분을 완강하게 거부하는 자들의 멸망이 아니다. 죽음과 재앙의 다른 편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성경에서 흔히 드러나는 주제이다(레 26장; 사 11장; 53장; 요 10:1-18). 스바냐는 이 생명이 세상 모든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약속한다. 게다가 이 생명은 유대인과 이방인, 나라와 나라를 가르는 구분을 뒤집을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 본문은 세상 사람들이 합심하여 하나님과 그분의 자녀들을 대적하지 못하도록 주님이 그들의 언어를 혼란스럽게 만드신 바벨의 이야기를 반영한다(창 11:1-9). 언어는 사람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경계 중의 하나로서, 이 경계는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이 바벨에서 내리신 언어의 변화 때문에 발생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날에 그분은 세상 모든 인간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이로 인해 의사소통 문제는 없어지고, 모든 족속과 방언의 온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을 섬길 것이다(습 3:9). 또한 성경은 그 날에는 바벨의 저주와 완전히 반대되는 일이 벌어진다고 언급한다. 오랜 옛날 인류가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려 하자 하나님이 그들을 온 지구상에 흩으셨지만, 그분은 자신을 경배하는 모든 이들을 한 곳(하나님 나라)으로 이끄셔서 그분을 사랑하고 섬기게 하실 것이다(습 3:10).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은 이 날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구원받았기 때문이다(살전 1:10).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날에 받을 영원한 생명을 확신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가 수치를 당하지 않게 된다고 약속 받았기 때문에 또한 기뻐할 수 있다. 우리가 행위대로 판단받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롬 2:6-11),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치를 주려 하심이 아니다. 이는 순종을 더럽히는 우리 마음속의 아주 작은 교만과 그밖의 악까지 제거하기 위함이다(습 3:11).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을 영화롭게 하실 때, 우리는 정결과 겸손을 얻게 된다.코람데오그리스도를 신뢰하면 우리는 죄의 권세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의 나라로 이끄시고 영화롭게 하실 때, 비로소 죄는 완전히 없어지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죄에 넘어가지 않도록 역사하신다. 이것이 복음의 한 부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언젠가 죄의 존재 자체를 제하실 것이다. 우리는 이 진리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다른 이들에게 날마다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Redemption of the World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지혜의 본질
2019-02-27
잠언 9장 10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지혜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문화는 세상에 없다. 물론 지혜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실제로 다 지혜로운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사회에서 대대로 전해지는 금언과 잠언을 사랑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욱이 지혜를 원하는 인간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고 철학의 기원과 역사를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철학'을 뜻하는 영어 단어 'philosophy'는 '사랑하다'를 뜻하는 헬라어 동사 '필레오'와 '지혜'를 뜻하는 헬라어 명사 '소피아'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역사적으로 단순히 지식을 늘리거나 논쟁의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고대 헬라인을 비롯해 후대의 서양 철학자들이 철학을 연구한 목적은 선하고, 참되고, 아름다운 실재와 세상에서 올바르게 사는 데 필요한 행위의 원리를 깨우치기 위해서였다.성경도 지혜를 중요하게 여긴다(잠 23:23). 그러나 성경은 고대 헬라 사상가들과는 사뭇 다른 각도에서 지혜에 접근한다. 고대 헬라 사상가들은 지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매우 뒤늦게 유일한 신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했던 신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과는 공통점이 거의 없었다.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이 단지 지혜의 끝이 아닌 시작이라는 사실을 의식했다. 오늘의 본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잠 9:10)라고 말씀한다.여기서 말하는 '경외'는 원수에 대한 두려움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경외'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리킨다. 그런 경외심은 공경심과 숭앙심으로 표현된다. 그것은 구원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 위해 그분이 계시하신 말씀을 삶에 적용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지혜로우면서 동시에 무지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지혜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어떻게 올바르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지혜와 지식이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지식이 없으면 지혜도 존재할 수 없다.코람 데오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에 지혜롭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관해 더 많이 알수록 지혜의 토대가 우리의 삶 속에서 더욱 공고해지고, 하나님이 계시하신 진리에 따라 상황을 분별하는 능력이 배가된다. 우리는 성경 읽기, 설교, 말씀 교육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지혜롭게 되기를 원한다면 성경의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Is Wisdom?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지혜 문학의 목적
2019-02-26
시편 1장 6절"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구약성경 속 지혜 문학은 특별한 주제들을 강조한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은 지혜를 얻으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한다는 것이다(잠 1:7). 이 경외심은 하나님을 생각하며 느끼는 막연한 두려움이 아니다. 창조주의 속성과 사역을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이 가르치는 경외심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마음과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발현된다. 시편 1편은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오늘의 본문은 축복에 대한 선언과 관련이 있다. 한 주석학자는 성경이 가르치는 축복은 우리가 힘써 얻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이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될 것이라는 축복을 받게 된 이유는 그가 그렇게 될 만한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축복은 우상들을 섬겼던 그에게 주권적으로 주어졌다(수 24:1-2). 물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면 큰 축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시편 1편이 가르치는 순종은 행위로 공로를 세움으로써 축복을 얻으려는 노력이 아닌,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써 우러나는 순종을 가리킨다.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배우고 성장하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밤낮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한다(시 1:1-2).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어떤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죄를 피하려고 분투하는 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해야 한다. 하루에 한 번 시간을 내서 하나님과 함께 보내는 "경건의 시간"은 그것이 아무리 유익할지라도 시편이 말하는 묵상에 해당하지 않는다.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묵상이란 온종일 하나님의 율법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수 1:8). 하나님의 복된 종들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자리에 눕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계명을 묵상하며 그것을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실천할지 생각한다. 그런 식의 묵상이 이루어지면 우리의 삶 속에서 반드시 순종의 열매가 맺히기 마련이다.하나님은 의인들의 길을 유심히 지켜보신다(시 1:6). 의인들이 하나님을 섬길 때, 그분은 지극한 관심을 기울여 그들을 지켜보신다. 또한 하나님은 무심코 지켜보기만 하지 않으시고, 자신의 종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신다.코람 데오존 칼빈은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할 때만 그분을 옳게 섬길 수 있다. 각자의 판단에 따라 신앙생활을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경건의 기준을 확립해야 한다." 하나님의 축복을 지속적으로 받아 누리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생각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판단하지 말고 그분의 계명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은 성경에 계시된 그분의 도덕법을 통해 알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urpose of Wisdom Literature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다윗 왕이 섬겼던 위대하신 하나님
2019-02-25
시편 89장 8절“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주를 둘렀나이다”신약성경에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약성경은 시편이다. 특히 89장을 읽어보면 그 이유를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다윗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과 그분의 성품을 높이 찬양함으로써 메시아의 영광을 드러낼 뿐 아니라, 하나님이 다윗 왕가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행하신 사역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이 시편의 저자는 솔로몬 시대에 뛰어난 지혜로 이름을 날렸던 에스라인 에단이다(왕상 4:31). 그는 창조주의 '인자하심'을 찬양하며 서두를 여는데(시 89:1-2), 인자하심은 히브리어인 '헤세드'를 번역한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헤세드는 변함없이 충실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윗 왕가와 그의 후손을 충실하게 보살피신 은혜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지는 그분의 선한 사랑이 모두 이 헤세드에서 비롯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인자하심을 따라 다윗과 그의 후손이 자기 백성의 지도자가 되도록 선택하셨고(시 89:3-4), 다윗 왕가를 처음 세우신 이후로 그 명맥을 계속 유지시켜 주셨다. 다윗의 보좌를 영원히 세워주겠다는 약속은 오직 이를 약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충실히 지켜질 수 있다. 만일 여호와,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많은 신들 가운데 한 분이라면 그분의 백성은 하나님의 언약을 온전히 신뢰할 수 없었을 것이고, 또한 다른 세력들이 그분의 계획을 방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여호와는 유일하고, 참된, 살아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전능하신 창조주로서 하늘과 땅의 기초를 건설하셨다(시 89:11). 이에 따라 모든 피조물은 소유자이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치에 복종하고 그분의 통제를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다윗의 하나님이자 우리의 하나님인 그분의 계획을 방해할 수 없다.하나님이 선택하신 왕과 백성이 그분 안에서 높임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은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진정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시 89:16-18). 하나님은 다윗의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시고, 온전하게 보호하실 것이다. 히포의 어거스틴은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자요, 우리의 빛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빛 안에서 안전하고, 그분의 빛 가운데로 걸으며, 그분의 의로우심을 통해 높임을 받는다. 그분이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보호하시며, 우리에게 우리의 능력이 아닌 그분 자신의 능력을 허락하신다."코람 데오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이해하면 그분의 약속을 굳게 붙잡을 수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전지전능하고 지극히 선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 그분의 거룩한 목적이 성취되지 못할까 봐 의심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기억함으로써 그분이 주실 충족을 온전히 믿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에 관한 성경의 교리를 배우는 중요한 이유이다. 항상 기억하라.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에 대해 이해하면, 그분을 향한 우리의 믿음과 섬김이 더욱 강해질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King David’s Might God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성령의 열매
2019-02-22
갈라디아서 5장 16-17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인간은 범상치 않은 것, 특이한 것에 열광한다. 오늘날 사람들이 방언이나 치유의 은사, 예언의 은사에 열광하는 현상도 그런 차원에서 본다면 크게 이상하지 않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더 의로워지거나 더 경건해지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부분들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적용하는 성령의 주요 역할 중 하나가 우리의 성화, 즉 거룩 안에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이루는 것이라고 거듭 이야기하기 때문이다(벧전 1:1-2). R. C. 스프로울 박사는 성경에서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을 ‘거룩한 영’(Holy Spirit)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물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도 거룩하시지만, 성경에서 ‘거룩한 아버지’나 ‘거룩한 아들’이라는 호칭을 쓰지는 않는다. 이런 차이점은 우리를 실제로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특별한 역할을 부각시킨다.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능력이 임할 때, 우리는 삶에서 성화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열매를 추구하는 삶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부분은 추구의 대상이 '은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갈 5:16-17).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육체와 성령의 대조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대조가 아니라 우리의 타락한 상태와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심령의 대조이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죄의 권세는 깨졌고, 우리는 의롭다고 칭함을 받으며 용서받는다. 그러나 죄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우리가 죽거나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도 계속 있을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하면서도 육체적 욕망과의 싸움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성령 안에서 행하라고 굳이 명령을 할 필요 조차 없을 것이다. 로마서 7장과 요한일서 1장 8-9절과 같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온전한 거룩을 위해 부단히 죄와 싸워야 함을 분명하게 언급한다.한 성도에게 성령의 은사를 전부 주시지는 않으므로(고전 12:1-11), 어떤 그리스도인도 모든 성령의 은사를 다 가질 수는 없다. 그러나 모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일은 우리의 임무이다. 우리는 삶에서 갈라디아서 5장 22-24절에 기록된 모든 열매를 다 이루어야 한다.코람데오성화의 과정에서 열매를 맺는 기준은 완벽함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화롭게 되기 전까지는 완벽한 거룩함을 이루지 못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부족하게나마 삶에서 사랑과 희락, 화평을 비롯한 성령의 열매가 자라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ruit of the Spirit번역: 차수정 (개혁된실천사)
QT 나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
2019-02-21
전도서 9장 12절 “분명히 사람은 자기의 시기도 알지 못하나니물고기들이 재난의 그물에 걸리고새들이 올무에 걸림 같이인생들도 재앙의 날이 그들에게 홀연히 임하면거기에 걸리느니라” 우리는 서점에서 '자기 계발' 도서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결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열 가지 단계, 사업의 성공을 보장하는 몇 가지 원리, 최고의 리더가 되는 방법 등을 약속하는 책들이 즐비하다. 그런 책들은 한결같이 번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이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있는 것처럼 말한다. 심지어 교회도 그런 견해에 동조하며, 인간의 힘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다고 가르친다. 어떤 저자들은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성경을 인용하면서 '축복에 이르는 성경적인 방법'이나 그와 비슷한 내용의 논리를 제시한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을 약속한다고 말한다(신 28:1-14; 마 6:33). 그러나 몇 가지 간단한 단계를 거치기만 하면 세상에서의 성공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여긴다면, 이는 하나님의 축복과 주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곡해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를 섬기는 자들에게 좋은 것을 베푸시지만, 오늘의 본문은 다양한 축복과 우리가 이루는 번영의 정도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고 가르친다. 성경은 지혜로운 계획과 부지런한 노력을 거듭 강조한다. 세상적으로 말하자면 이 두 가지에 충실할 때, 성공의 가능성은 높아진다. 그러나 우리의 계획과 노력이 모두 좋은 결과를 낳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전도서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시기'와 '기회'라는 두 가지 강력한 요인에 영향을 받는데(전 9:11), 이는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시기를 정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섭리를 의미한다(전 3:1-8). 우리가 아무리 신중하게 계획을 세우고 노력하더라도, 가장 빠른 자가 경주에서 질 수 있고, 가장 강한 군대도 싸움에서 패배할 수 있으며, 가장 똑똑한 사람도 굶주리거나 가장 학식이 높은 사람도 지위를 얻지 못할 수 있다. 겉으로 볼 때 아무렇게나 마구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과 사건들이 고리처럼 이어지면서, 자신이 원했던 최상의 의도가 예상치 못하게 좌절될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고난을 예견하거나 예방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성공은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이 작정하신 뜻에 달려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코람 데오 오늘의 본문은 계획이 필요없고, 성공을 위한 노력도 불필요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전도자의 목적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들고, 피조 세계에서 우리가 차지하는 위치를 옳게 인식하도록 돕는 데 있다. 우리는 부지런하고 지혜로워야 하지만, 만사를 온전히 통제할 수는 없다. 주권자는 우리가 아니고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생의 계획을 세울 때, 우리는 자신의 행위보다 하나님을 신뢰해야만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Not in Our Hands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의 참 의미
2019-02-20
마태복음 5장 37절"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구약성경의 시가서는 온순한 말을 장려하고(잠 15:4), 음탕한 사람들의 달콤한 말을 경계하는 등(잠 5:3), 혀의 사용에 관해 많은 가르침을 베푼다. 또한 시가서의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에는 성급히 맹세를 내뱉고 이를 지키지 않는 행위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포함된다(전 5:1-7). 기독교 공동체는 맹세와 서원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이해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많은 성도들은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정죄 받음을 면하라"라는 야고보서 5장 12절 말씀을 기억한다.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는 마치 야고보가 어떤 상황에서도 맹세와 서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낀다. 실제로 기독교 신학의 전통 가운데 일부는 이 구절을 그런 의미로 이해하기도 한다.그러나 이러한 결론은 나머지 성경의 가르침을 옳게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신명기 10장 20절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명령한다. 야고보는 모든 맹세를 금지하지 않았다. 만일 그랬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모순이 생긴다. 그렇다면 그는 무슨 의미로 이런 말을 했을까? 야고보의 가르침은 바로 오늘의 본문에 해당하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거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예수님은 피조물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옳으면 옳다고 하고 아니면 아니라고 하라고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그런 가르침을 베푸신 이유는 1세기의 유대인들 가운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맹세는 절대적이지만, 그분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이름으로 서원했다면 이는 절대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맹세와 서원에 관해 가르치신 요점은 진실을 말하고, 의도한 바를 끝까지 실천하라는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하기 위해 피조물로 약속하고 맹세를 지키지 않는 것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존중하는 자세가 아니다(요 14:6). 예수님과 야고보의 요점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고 마음대로 어길 수 있는 약속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약속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코람 데오창조주께서는 마음의 동기에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신다. 하나님은 책임을 면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 놓고 약속을 남발하는 행위에 속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약속을 하기 전에는 먼저 신중하게 자신의 마음을 살피고, 진정으로 행할 결심이 있을 때에 이를 말과 실천으로 옮겨야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Promises of the Tongue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충실한 복종
2019-02-19
시편 119장 141절 “내가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나 주의 법도를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모든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며 박수갈채를 보낼 때, 아무런 반대가 없고 대중의 의견이 호의적일 때는 담대히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어렵지 않게 경건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나를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어떠할까? 나의 편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그리스도께 충실히 복종한다면, 그것은 곧 나의 인격이 순전하고 또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이다.시편 119편과 율법의 영광을 설명한 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면, 저자가 항상 그를 지지하는 상황에만 놓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종종 창조주의 율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다. 원수들은 거짓으로 그의 인격을 깎아내리고(시 119:67, 78), 또 박해를 행했다(시 119:86, 95). 그러나 그런 고통의 와중에도 저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미천했지만"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잊지 않았다(시 119:141).시련과 환난은 믿음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시금석이다. 고통을 감내하며 그리스도께 충실하면, 그분을 믿는 믿음이 진실하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그런 신앙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수 있다. 야고보 사도가 시험을 당할 때 기뻐하라고 말한 이유도 시험이 우리를 굳세게 하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때문이다(약 1:2-4, 12). 만약 예수님을 고백하는 믿음 때문에 고난 받는 상황에서 편안한 삶을 얻고자 하나님의 율법을 잊는다면, 믿음의 진실성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시편의 저자처럼 "미천해도" 하나님의 계명을 기억하고 따른다면, 자신이 진정으로 주님의 소유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존 칼빈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섬기는 사람은 [중략] 세상에서 처한 상황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프고 두렵더라도 굳세게 버틴다"라고 주석했다.삶이 형통할 때는 누구나 충실할 수 있다. 인내하는 참 믿음은 시련 속에서 굳게 버틸 때 비로소 그 진가를 드러낸다. 물론 우리 자신에게는 충실하게 버틸 수 있는 힘이 없다. 환난 속에서 인내하려면 하나님의 성령을 온전히 의지해야만 한다.코람 데오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많은 곳에서 오랫동안 "미천한" 소수로 취급 받아야 했다. 서구 사회에서는 아직 형식적으로나마 기독교를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 위에서 조롱이나 멸시를 피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주님께 충실하고자 노력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향한 섬김의 힘을 위로부터 받게 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ithful Obedience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인내의 덕목
2019-02-18
전도서 7장 8-9절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한 자들의 품에 머무름이니라”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원하는 것을 당장에 얻고 싶어 한다. 결과나 만족을 위해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는 생각은 우리에게서 모두 사라졌다. 그러나 인내는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다. 그 덕목은 성령의 열매에 속한다(갈 5:22-24). 성경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인내를 권고하는 내용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오늘의 본문은 교만한 마음보다는 참는 마음이 더 낫다는 말을 하며 인내를 권유한다. 또한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다는 말과 함께 고난의 와중에서도 인내하기를 권고한다. 고난의 끝(즉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을 통해 이루고자 하시는 목적)이 더 낫다는 사실을 알면, 시련과 환난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다. 히브리서 12장 11절은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말씀한다.매튜 헨리는 오늘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인내하는 마음과 교만한 마음이 대조되고 있다. 왜냐하면 겸손이 있는 곳에 인내가 있기 때문이다. 인내하는 자들은 하나님에게서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고백하며 어떤 일에 대해서든 감사한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겸손히 낮추고, 좋은 것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분이 우리를 사랑으로 징계하실 때도 기꺼이 감사할 수 있다.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기를 원하지 않으면 마음속에서 분노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겸손히 인내하면, 그런 분노를 물리칠 수 있다. 그런 분노는 어리석은 자의 증거이다(전 7:9).코람 데오인내가 없으면 절망하기 쉽고, 절망은 분노로 이어질 수 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과 성령의 사역에 주의를 집중해서 인내하는 마음을 기르면 좌절하지 않고 어리석은 마음의 증거인 분노를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왜냐하면 불의한 분노는 온갖 죄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고난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의 약속을 굳게 붙잡음으로써 사랑과 인내로 잘 견뎌낼 수 있기를 기원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Virtue of Patience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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