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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우상숭배와 회복
2019-02-13
시편 78편 65-66절 “그 때에 주께서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포도주를 마시고 고함치는 용사처럼 일어나사 그의 대적들을 쳐 물리쳐서 영원히 그들에게 욕되게 하셨도다”신자들이 죄를 짓고 교회가 종종 영적으로 쇠퇴해진 모습을 보면, 오늘날의 언약 공동체가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히 불충실한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오늘날의 교회가 직면하는 문제들을 과소평가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을 과대평가할 필요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역사를 돌아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보다 더 불충실하던 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실을 기억하면, 좀 더 현실적인 눈으로 우리의 시대를 바라보며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에 감사할 수 있다. 시편 78편을 통해 과거의 신자들이 하나님께 불충실했던 사실을 알면, 우리 세대를 객관적인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이 시편의 저자인 아삽은 광야 세대의 불충실함을 길게 언급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들을 노예 생활로부터 해방하는 과정에서 애굽에 내렸던 갖가지 재앙을 열거하면서 그들의 어처구니없는 실패를 강조했다(시 78:40-51; 출 7:1-12:32). 이스라엘 백성은 그런 모든 표징을 목격하고서도 하나님의 지혜로운 통치와 주권적인 사랑을 거부했다. 결국 광야 세대 가운데 갈렙과 여호수아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14:35-38; 신 1:34-38). 우리는 그런 사실을 통해 최소한 두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직접 눈으로 봐야만 그분께 충실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믿음을 굳게 유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과거에 행하신 일을 통해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영적 경험이 창조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거는 아니다. 구원의 증표는 현재의 믿음이다.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실 때만 놀라운 권능을 베푸신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 당시에도 큰 기적을 베풀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시 78:51-55). 그러나 가나안 세대도 감사할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애굽에서 나온 첫 번째 세대가 실패한 것처럼, 약속의 땅에 거주한 가나안 세대도 하나님과의 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지 못했다. 아삽은 사사기와 사무엘상에 기록된 일들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우상 숭배를 저지르고, 온갖 고초를 겪었던 일을 상기시켰다(시 78:56-64).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마지막 몇 구절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하나님은 강한 용사처럼 일어나 사사들을 통해 자기 백성을 구원하셨다. 그것은 장차 이스라엘의 이상적인 왕을 통해 베푸실 놀라운 구원을 예고하는 의미를 지녔다(시 78:65-66; 삿 2:16-18; 삼상 7:3-17; 삼하 7:1).코람 데오오늘의 본문은 우상 숭배로 인해 실패한 이스라엘의 역사에 주로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결론 부분에서 하나님이 일어나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용기를 준다. 언약의 공동체가 깊은 타락의 수렁에 빠졌을 때조차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충실히 지키신다. 우리는 이를 구실로 죄를 짓기보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Idolatry and Restoration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자애롭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지식
2019-02-12
시편 139편 13-14절 “주께서 내 내장을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나이다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심히 기묘하심이라 주께서 하시는 일이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다윗은 시편 139편을 통해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전지하심을 묘사하면서, 창조주의 지극히 탁월한 위엄에 깊이 압도되었음을 드러냈다. 그는 하나님의 그러한 속성을 단지 철학적인 개념으로 논하지 않았다. 다윗의 표현은 마음 깊이 그분을 사랑하고 신뢰함에서 우러나왔다.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은 그에게 큰 확신과 기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으며, 다윗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을 신뢰했다. 이와 같은 모든 사실이 이 시편의 19-24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편재하심과 전지하심을 논한 1-12절의 내용에 근거한다. 또한 이어지는 16절은 모든 일을 정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포괄적인 계획과 작정을 언급한다.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다윗의 날은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었고, 이는 그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이미 그의 인생이 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다른 성경 구절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이 인간의 날수를 정확하게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히스기야 왕이 병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다(사 38:1-5). 이런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행위를 미리 고려한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일 히스기야가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하나님은 그의 수명을 연장해 주지 않으셨을 것이다. 히스기야가 기도한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그가 기도하도록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작은 일조차도 자신의 뜻대로 결정하신다(엡 1:11). 하나님은 우리와는 달리 지식만 있고 행동은 하지 않는 수동적인 관찰자가 아니시다. 하나님이 피조물에 대해 모두 알고 있는 이유는 친히 만사를 작정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주권에 따라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시편 139편 13-16절은 앞서 언급한 하나님의 임재에 관해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서 이를 참으로 가깝고 친밀하게 묘사했다. 특히 하나님이 탯속에서 다윗의 형질을 완성하셨다는 표현은 마치 직물을 짜는 사람이 이불을 만들면서 실이 얽히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세세한 모든 것까지 일일이 돌보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태아를 바라보는 관점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이 탯속에서 태아를 만들고 계신다는 것을 알면, 우리는 단지 편의상의 이유로 태아의 생명을 빼앗지는 못할 것이다.다윗은 하나님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임재와 지식을 이해한 후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시 139:19-24). 하나님은 우리의 무조건적인 신뢰와 사랑을 받으시기에 지극히 합당하다. 우리는 오직 그런 존재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오늘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한다.코람 데오하나님의 성품을 알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될 뿐만 아니라 죄를 멀리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다. 존 칼빈은 "우리가 육신적인 안일함에 빠져드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특별하게 창조하셨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별하게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에, 우리가 그분의 소유라는 것을 좀 더 뚜렷하게 의식할 수 있다. 우리는 그분의 자녀와 소유로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닮아가야 한다(마 5:48).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s Loving, Personal Knowledge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협력의 힘
2019-02-11
전도서 4장 9-10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주석학자들은 창세기 1-2장에서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가 갑자기 달라진 사실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한 단계씩 이루실 때마다 지으신 것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나서 그의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창 2:18). 하나님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와를 창조하셨고 결혼 제도를 확립하셨다(창 2:18-25).창세기는 남녀의 상호 보완과 결혼을 통한 동반 관계의 중요성을 조명한다. 굳이 성경의 관점을 빌리지 않고 세상사만 살펴보아도 공동체의 유익성과 필요성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오랫동안 친구나 가족 없이 혼자 있는 것은 좋지 않다. 함께하는 이들이 있을 때 우리는 더욱 즐겁고 안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전도자가 오늘의 본문에서 언급한 이 세상의 근본 진리다.전도자는 고대인들이 여행을 하던 상황에서 빌려온 비유를 적용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라는 진리를 가르쳤다. 한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구덩이에 빠진 상황에서 그를 꺼내줄 친구가 없으면 부상이나 야외에서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 탓에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또한 여행자가 혼자서 잠을 자면 추운 밤을 따뜻하게 견뎌내기도 어려웠다(전 4:11). 물론 11절은 부부가 침대에서 함께 누워 자는 상황을 가리킬 수도 있다. 게다가, 고대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여행할 때 강도나 도둑들에게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강도에게 저항하기 어렵지만,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은 능히 맞설 수 있었다(전 4:12).인간은 공동체 안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우리는 혼자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가 더 강하다. 공동체를 건설해 서로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 더 강하게 성장할 수 있고, 하나님께도 더욱 충실할 수 있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둘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보다는 함께 있을 때가 더 행복하고, 혼자서만 지내는 것보다는 함께 있어야 더 즐거울 수 있으며, 서로가 서로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 또한 함께 힘을 합치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도 더 높아진다."코람 데오하나님은 우리를 개인적으로 구원하신다. 다른 사람의 믿음에 의존해 구원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공동체에 속하게 하셨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교회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우리가 성장하고 형통하는 데 필요한 교제를 허락하신다. 혼자서 믿음의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다.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이루려고 노력하는가? 하나님의 종들과 교제 나누는 시간을 정기적으로 가지는가?출처: www.ligonier.org원제: Strength in Numbers번역: 조계광 (개혁된실천사)
QT 절망 중에도 변치 않는 희망
2019-02-08
시편 22편 1-2절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 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시련을 당하는 가운데 기도하고 또 기도해도 구원의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 때는 사방이 온통 어둠뿐이고, 하나님이 나의 부르짖음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시련의 암흑 속에서도 계속 기도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는 증거이다.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히 13:5)을 굳게 붙잡을 수 있는 이유는 구원이 아무리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이 시대의 성도들만 그런 암울한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이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조차도 하나님께 버림받은 심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암울한 시간 속에서도 언약의 하나님,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높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도우리라고 하신 약속을 결코 잊지 않았다(시 22:3-5).다윗은 극심한 외로움을 느꼈지만, 시편 22편의 기도와 같은 완전한 절망을 맛보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인생의 가장 큰 위기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사울은 통치 기간 중에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그는 자신의 칼로 자결했고 그가 죽이려고 했던 다윗은 살아남았다(삼상 31장). 또한 압살롬의 반란도 다윗이 아닌 압살롬의 죽음으로 끝났다(삼하 18장). 우리 중에서 시편 22편의 기도와 같은 완전한 절망을 경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성자와 연합한 사람은 가장 극심한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이 결코 외면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와중에도 그분과 화목을 이룬 우리의 상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롬 5:1; 히 12:3-11). 그러나 시편 22편의 기도와 같은 완전한 절망을 경험한 사람이 단 한 사람 존재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 버림받은 심정을 느끼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런 현실을 직접 경험했다. 그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복음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편 22편을 기도했다고 전한다(마 27:46).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진정으로 버림받은 상태, 곧 하나님이 그 얼굴빛을 완전히 거두신 암흑의 상태를 감내해야 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그토록 두려워하셨던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마 26:36-46). 그분이 겪으신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그분은 자기 백성을 대신해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당하셨다. 존 칼빈은 그리스도가 고뇌한 이유는 단지 죽음 때문이 아니라 "모든 죄인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저주를 의식하셨기 때문"이라고 주석했다.코람 데오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에 대한 저주를 감당하신 것은 큰 신비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 신비가 구원의 핵심에 놓여 있다. 성자는 믿음으로 자기와 연합한 사람들의 죄를 위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을 감당하셨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얼굴빛을 거두실까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성자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를 향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과 정의를 밝히 드러내는 증거이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essiah Forsake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미련한 아들과 슬기로운 아내
2019-02-07
잠언 19장 13-14절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요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집과 재물은 조상에게서 상속하거니와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느니라”가정은 가족들의 피난처가 되어야 한다. 관계가 평화롭고 모든 일이 형통해야만 그런 가정이 될 수 있다. 가정에 다툼이 많으면 가족들은 집에 머물러 있기보다는 멀리 피해 달아나고 싶은 심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잠언은 이런 현실을 다룬다. 잠언에는 가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기쁨과 슬픔을 다루는 내용이 많다.오늘의 본문은 그런 내용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은 가정을 이끄는 지혜에 대한 조언으로, 부모들에게는 자녀를 현명하게 양육하고, 남자들에게는 슬기로운 아내를 찾으라고 권고한다. 저자는 먼저 "미련한 아들은 그의 아비의 재앙"이라고 언급한다 . 미련한 아들은 가정을 지혜롭게 세워가지 못하므로 아버지가 늙었을 때 의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잠 21:20). 미련한 아들은 가족들의 좋은 평판을 실추시킨다. 엘리 제사장이 경험했던 것처럼(삼상 2:12-26), 그런 아들은 가문을 수치스럽게 만들고 물려받은 유산을 헛되이 낭비한다.아울러 오늘의 본문은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라고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의 가옥은 지붕을 나무판자와 막대기를 가로세로로 겹쳐 이은 후 진흙과 같은 재료를 덧발라 만들었다. 따라서 비가 많이 올 때 지붕이 새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니었다. 지붕 아래를 안식처로 삼아 몸을 보호하기를 원해도 지붕이 새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와 도와가며 잘 살기를 원해도 다투는 아내는 남편을 힘들게만 만들 뿐이다.미련한 아들과 다투는 아내는 재앙이지만, 상속받은 유산과 슬기로운 아내는 축복이다(잠 19:14). 모든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경제적인 지혜를 잘 활용하면 자손에게 물려줄 재물을 얻을 수 있겠지만, 슬기로운 아내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일이다.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잠 19:14). 가정을 잘 꾸려나갈 뿐 아니라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신중하고 슬기로운 아내는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다(잠 31:10-31). 지혜로운 남자는 자기보다 더 훌륭한 여자를 찾아 결혼한다. 그들은 남편을 유익하게 하고 집안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경건한 아내를 허락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한다. 지혜로운 남편은 그런 아내가 귀한 보물, 곧 값을 따질 수 없는 진귀한 보석과 같다는 것을 알고, 그런 아내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한다.코람 데오결혼한 남자라면 아내가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가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또 결혼한 여자라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 남편이 자신을 귀하게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만들어야 한다. 아직 미혼으로서 배우자를 구하는 상황이라면, 남자는 하나님께 지혜로운 아내를 구해야 하고, 여자는 지혜가 뛰어난 아내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Foolish Sons and Prudent Wive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참된 회개와 기도
2019-02-04
고린도후서 7장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기도를 드리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회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다.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은 ‘회개’로 일컬어질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태도를 구별한다. 그 가운데 하나는 ‘후회’이다. 후회는 하나님께 죄를 지은 일에 대해 슬퍼하는 감정이 아니라, 징벌을 두려워하거나 약속된 축복을 잃게 될 상황을 슬퍼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가룟 유다가 그런 슬픔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배신으로 무고한 피를 흘리게 만든 일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을 알고 깊이 후회하며 모든 것을 본래의 상태로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랐다(마 27:3-10). 그러나 유다는 그리스도께 저지른 잘못을 슬퍼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징벌을 초래한 것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한 것이 자신의 문제라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단지 징벌을 두려워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대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목을 매달았다.다른 하나는 ‘통회’인데, 이것이 곧 참된 회개에 해당한다. 죄를 회개하는 사람은 가장 우선적인 문제가 하나님을 거역한 잘못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통회하고 자복한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신이 징벌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이 원하시면 얼마든지 징벌을 내리실 수 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용서의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나가 죄를 슬퍼하는 이유는 용서의 희망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용서를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의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울이 오늘의 본문에서 묘사한 대로, 경건한 슬픔을 느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어겨 큰 불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한다.우리는 시편 51편에서 가장 전형적인 통회의 본보기를 발견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노라고 진심으로 인정했고, 그분이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고백했다(시 51:3-4). 회개할 때 그런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 죄를 진정으로 뉘우칠 수 없다.코람 데오죄로 인한 징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다. 성경은 죄를 지으면 징벌을 받는다고 경고한다. 그러나 징벌을 두려워하는 것만으로는 참된 회개에 이를 수 없다. 우리는 다른 무엇보다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죄를 뉘우쳐야 한다. 우리의 죄가 가증스러운 이유는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이키지 않을 때 정죄를 받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을 거역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회개할 때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춰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rue Repentance and Prayer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이 게시물은 최고관리자님에 의해 2019-07-15 18:38:19 아침 8시 매일 큐티에서 복사 됨]
QT 마음의 정성이 담긴 예배
2019-02-01
창세기 4장 3-5절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성경은 많은 주제를 다룬다. 그 가운데 어떤 주제들은 다른 주제들에 비해 더 자주 언급된다. 종종 언급되는 주제에는 하나님의 성품, 메시아의 사역, 죄로 인한 인간의 부패,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 등이 포함된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분을 찬양하는 노래로 구성되어 있고, 잠언은 신자의 특징인 경건한 경외심을 강조한다. 심지어 전도서까지도 서원과 이를 지키는 예배의 문제를 다룬다(전 5:4-7). 성경의 이러한 주제는 예배에 관한 지혜 문학의 가르침을 좀 더 폭넓은 문맥 안에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성경은 하나님이 예배를 드리는 형식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그런 형식만으로는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릴 수 없고 가르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찬양과 사랑이 우러나는 진정한 예배가 필요하다. 주님은 형식과 절차만을 갖춘 예배에 만족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성경의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입술로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마음은 그분에게서 먼 사람들을 엄히 꾸짖었던 이사야의 말을 인용하셨다(마 15:8-9). 하나님은 말과 마음의 참된 상태가 온전히 일치하는 종들을 원하신다. 그분은 형식적으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참된 마음에서 우러나는 헌신과 경배를 바라신다.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하나님은 인류의 초창기에 드려진 예배를 통해 그런 진리를 밝히 드러내셨다. 가인과 아벨은 각자 다른 희생 제물을 드렸는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인은 "땅의 소산"을 각각 제물로 바쳤다. 그런데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고,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다. 그 이유는 아벨이 좀 더 나은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대 사회에서 목자는 천대를 받을 때가 많았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을 받으신 이유는 첫 새끼, 곧 양 떼 중에 가장 좋은 처음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 아벨은 자신의 소유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바쳐 하나님을 다른 무엇보다 더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그와는 달리 가인은 첫 열매를 바치지 않았다. 그의 예배에는 진정한 마음이 결여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가장 좋은 처음 것은 자기의 몫으로 챙기고 남은 것을 바쳤기 때문이다.코람 데오그리스도인들이 매주 예배를 드리는 일은 참으로 좋은 관습이다. 그러나 예배가 규칙적인 습관으로 변하면, 예배 중에 다른 생각을 하거나 예배에 온 마음을 쏟지 않고 형식만 갖추는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따라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마음과 생각을 모두 하나님께 집중시키려고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 온전히 하나님만을 생각하며,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from the Hear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간음의 덫
2019-01-31
잠언 5장 3-4절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요즘 세상에는 모든 것이 신속하게 변하기 때문에, 오늘날의 인간이 3,000년은 고사하고 100년 전의 인간과도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세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매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고, 기술 혁신은 우리를 크게 편안하게 만들었다. 개인과 국가 간의 의사소통이 1세기 전보다 훨씬 더 수월해 졌으며, 우리는 세계의 다양한 면모를 이전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이런 변화는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의 관점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이 세상을 보던 방식과는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이 과거의 사람들과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 살았던 사람들과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삶의 의미를 찾는다. 즉, 옛 사람들을 유혹했던 죄가 지금도 여전히 위세를 떨친다. 모든 것을 성적으로 희화시키고 포르노그래피와 같은 유해물이 만연한 오늘날의 문화적 현상은 비판해야 마땅하지만, 옳지 못한 성적 관계나 행위를 추구하는 인간의 성향은 솔로몬의 시대는 물론 인류의 타락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사실은 간음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오늘의 본문은 음탕한 여자가 결혼한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지만, 그와 반대로 음탕한 남자가 결혼한 여자를 유혹하는 상황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유혹자의 말은 꿀처럼 달고 가장 좋은 감람유와 같이 부드럽다. 이 두 물건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귀하게 여겨졌다(레 20:24; 24:2). 그 말은 마치 인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달콤하고 멋진 행복을 약속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유혹자의 말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달콤한 행복은 거기에 없고, 씁쓸한 고통만이 있을 뿐이다. 더욱이 간음은 생명이 아닌 죽음으로 귀결된다. 이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간음을 저지르다 붙잡힌 사람을 사형에 처한 율법을 가리키는 내용으로 보인다(레 20:10). 그러나 간음이 중죄로 간주되지 않는 시대에도 간음은 여전히 삶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는 가정과 결혼 생활을 무너뜨리며 그 파괴적인 영향이 질병처럼 확산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간음은 행복을 주겠다는 약속을 이루지 못하고 오로지 불행으로 귀결될 뿐이다.특히 심각한 결과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간음이 당사자를 파멸로 몰아넣는다는 것이다(잠 5:14). 언약 공동체 안에서 간음죄를 저지른 사람들은 큰 수치를 받으며, 간음은 심지어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도 매우 치욕스러운 행위로 간주된다는 것을 기억하라.코람 데오간음은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부부가 이혼하고, 당사자의 평판이 실추되며, 직업을 잃을 수도 있다. 자녀들은 간음을 저지른 부모를 더 이상 존경하지 않는다. 간음이 그런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회개하고 그 죄에서 돌아설 때 용서받을 희망은 있지만, 간음은 당신의 삶을 거의 파멸로 이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Trap of Adulter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도망치는 악인들
2019-01-30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죄를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중단하지 않으면, 암이 전이되는 것처럼 인격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에 이른다. 죄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다. 거듭난 신자가 죄를 뉘우치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된다. 그 이유는 죄가 성령을 근심하시게 만들기 때문이다(엡 4:30). 더욱이 죄는 인간의 정신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친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 불안이나 공포에 시달리게 된다.이것이 오늘의 본문("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이 가르치고자 하는 요점이다. 은밀한 죄로 인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말씀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은밀히 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또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계몽이 덜 된" 사람들이나 하는 일이므로 그분과 무관한 삶을 살아도 무방하다며 애써 마음을 달래려고 해도, 고백하지 않은 죄가 마음속에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창조주께서는 만물을 지켜보시고, 선인과 악인을 감찰하신다(잠 15:3). 이 진리는 아무리 무시하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양심에 기록된 진리이기 때문이다(롬 2:12-16). 하나님이 만물을 지켜보고 계시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죄, 특히 거듭 반복되는 은밀한 죄는 뛰어 달려들어 우리를 덮치려고 위협하는 듯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하나님이 혹시나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지 않을까 두려운 나머지 마치 주위 사람들이 그분처럼 모든 진실을 알고 있을 것 같은 생각에 시달린다. 모든 사람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심할 경우 대인관계를 기피하는 편집증적인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매튜 헨리는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을 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이 자기를 대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참된 즐거움을 누릴 수도 없고, 자신감이나 용기를 가질 수도 없으며, 오직 심판을 두려워할 뿐이다. 죄는 인간을 겁쟁이로 만든다.“아이러니하게도 죄인들은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죄를 짓지만, 결국에는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의인들은 노예적인 공포가 아닌 자녀의 공경심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발각될까 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들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고 고백한다. 의인들을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은밀한 죄는 없다. 의인들은 원수들이 자신의 비밀을 폭로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행동할 수 있다.코람 데오민수기 32장 23절은 우리의 죄가 스스로를 찾아낼 것이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이 말씀의 진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은 죄가 있다면 두려워하며 살 수밖에 없다. 우리의 죄를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것뿐이다. 죄를 서로에게 고백하면 두려움과 편집증적인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우리의 죄를 공개하면 죄를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생기고, 은혜로 구원받은 죄인으로서 정직한 태도로 그리스도 앞에 나설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light of the Wicke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용서의 축복
2019-01-29
시편 32편 1-2절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하나님이 베푸시는 용서의 은혜를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순수한 기쁨을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나서 이 시편을 기록했다. 이스라엘의 왕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크게 기뻐하며 영혼의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그의 시편은 고백과 회개와 용서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중요한 교훈을 전한다. 아울러 그가 쓴 이 시편은 칭의라는 성경의 교리를 가르치는 핵심 본문 가운데 하나이다.다윗은 용서받은 사람의 복스러움을 묘사하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그는 용서가 죄를 가려주어 더 이상 정죄를 당하지 않게 해준다고 말했다(시 32:1-2). "가려진"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용서라는 사랑의 행위를 통해 수치를 가려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일단 자기 백성의 죄를 용서하면, 더 이상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그들의 수치를 가려 자기 앞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신다.3-5절은 다윗이 하나님께 죄를 고백하고 나서야 비로소 용서를 받았다고 말씀한다. 회개와 용서는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그냥 하나님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그분의 은혜로운 주권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용서를 받는다. 죄를 고백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피해 도망쳤지만, 죄를 고백하고 난 뒤에는 오히려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피난처를 찾는다(시 32:6-11).바울은 로마서 4장에서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그는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전가되면, 죄인의 죄가 그의 죄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 그분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되고, 우리의 죄는 삭제된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의 행위를 근거로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 행위는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의롭다 하심을 받는 공로가 될 수 있다. 존 칼빈은 시편 32편 1-2절을 주석하면서 "다윗이 찬양한 죄 사함은 행위의 의를 철저히 무너뜨린다"라고 말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행위에 근거해 우리의 의를 내세우려고 하면, 용서의 축복을 받을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은혜로만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사실은 흔들릴 수 없는 확실한 교리이다. 이는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문이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라고 말했다.코람 데오우리의 칭의를 위해 값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참으로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는 단지 한 가지 축복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뿐 아니라, 그분의 충실한 복종으로 인해 주어진 온전한 권리와 특권에 동참한다.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도록 허락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믿음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다. 그런 믿음은 폭풍우 속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닻과 같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lessing of Forgivenes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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