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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T 구원을 간구하는 기도
2019-01-28
시편 6편 4-5절 “여호와여 돌아와 나의 영혼을 건지시며 주의 사랑으로 나를 구원하소서 사망 중에서는 주를 기억하는 일이 없사오니 스올에서 주께 감사할 자 누구리이까” 큰 고난이나 시련을 겪을 때는 어떻게 하는가? 자신의 지혜로 피할 길을 찾으려고 애쓰는가?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삶이 부당하다고 불평하는가?고통을 당할 때 하나님의 백성이 의지할 대상은 하나뿐이다. 정확히 말해,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고통을 당할 때나 우리 자신의 죄나 그릇된 판단 때문에 고통을 자초했을 때, 우리는 항상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다. 시편에는 비참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으며 도움을 구하는 탄식의 노래가 가득하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시편 가운데 하나이다.다윗이 이 시편을 기록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고난의 원인이 개인적인 죄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시편 51편과 같이 용서를 구하는 탄식의 시편과는 달리 이 시편에서는 죄를 고백하는 내용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다윗은 불의한 고난을 당한 듯하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편에서 비록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받아들였다. 이런 모습은 교훈하는 바가 크다. 그는 하나님께 분노로 자신을 책망하지 말고, 진노로 자신을 징계하지 말라고 간구했다. 고난의 강도가 너무 심해, 마치 하나님이 진노의 징계를 쏟아 부으시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 틀림없다(시 6:1). 다윗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징계로 간주했지만, 자신을 벌하시는 의미로 징계를 베푸시지 말라고 간구했다. 왜냐하면 그런 고난을 당할 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스스로를 "악을 행하는" 자들과 구별되는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했다(시 6:8).성경에서 징계는 종종 개인적인 죄와 연관된다. 예를 들어 모세는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복종하지 않은 탓에 징계를 받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민 20:2-13). 그러나 성경은 징벌의 목적이 아닌 징계, 즉 단지 용서를 베푸는 차원을 넘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징계에 관해 가르친다(엡 6:4). 우리의 고난이 모두 특정한 죄와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모든 고난을 우리를 연단시키는 도구로 사용해 자신을 충실히 섬기도록 이끄신다. 그런 징계를 받을 때는 하나님 앞에 나가 슬픔을 토로하면서 고난을 극복하고 기뻐할 수 있도록 구원을 베풀어 달라고 간구할 수 있다. 다윗은 시편 6편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깊은 슬픔을 토로하고 구원을 간구함으로써 하나님이 기도를 들으시고 자신의 정당함을 옹호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에 도달했다(시 6:6-10).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새로운 기쁨을 얻을 수 있고, 평안의 확신을 가질 수 있으며,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코람 데오하나님의 주권을 기꺼이 인정해야만, 그분이 고난으로 징계를 베풀어 죄의 유해한 결과를 깨우쳐 주시고 그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게 만드신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으면 징계를 통해 우리를 자신에게로 더 가까이 이끄시며, 죄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일깨워 주신다. 하나님은 만사를 다스리시기 때문에, 우리의 고난조차도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이용해 선한 목적을 이루신다(롬 8:28).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Prayer for Deliveranc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옳지 못한 맹세와 서원
2019-01-25
출애굽기 20장 7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맹세와 서원의 문제와 관련해서는 생각해야 할 점이 많다. 일단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씀하셨지만(신 6:13),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뒤따른다. 맹세는 언제 해야 할까? 죄를 짓게 만드는 맹세도 정당한 것일까? 그런 맹세를 한다면 지켜야 할 의무가 있을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들도 있지만, 얼른 확실한 대답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도 있다.첫째, 맹세는 특별한 경우에만 필요하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은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사적이거나 공적인 상황에서 그분의 이름을 불러 맹세할 때는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 만일 약속을 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한다면, 창조주의 이름을 평범하거나 속된 것으로 취급할 위험이 있다. 물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게도 자신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나 또 다른 이런저런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를 징벌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경박하게 거론하는 죄가 무조건 묵인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할 때 각별히 주의를 기울인다면, 그 이름을 부적절하게 사용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고,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을 어기는 일도 없을 것이다. 약속을 할 때마다 맹세를 한다면 맹세를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하나님의 징계를 초래하는 일도 많아질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조심스레 사용하고, 결혼을 할 때나 하나님의 백성이 모인 언약의 공동체에 참여할 때와 같은 엄숙한 순간에만 맹세하는 것이 안전하고 지혜로운 일이다.둘째, 죄를 짓기 위한 맹세나 죄를 짓게 만드는 맹세는 허용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죄를 짓지 말라고 엄히 명령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48). 하지만 우리는 타락한 상태이기에 그런 완전한 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의롭다 하심을 받으려면,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지해야 한다(롬 3:21-26; 고후 5:21). 그러나 우리가 연약하다고 해서 죄를 짓는 일이 허용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런 차원에서 죄를 짓기 위한 맹세도 하면 안 된다. 죄를 짓기 위한 맹세는 옳지 못한 맹세이기 때문이다.마지막으로 오직 합법적인 맹세만을 지켜야 한다. 옳지 못한 맹세를 하지 않으려면, 맹세를 하기 전에 신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입다의 경우를 생각해 보라. 그는 딸을 희생 제물로 바치겠다고 성급하게 맹세했고, 결국에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그릇된 맹세와 그런 맹세를 지키는 어리석음을 보여 준 불행한 본보기가 되었다(삿 11:29-40).코람 데오친구들은 물론 심지어 가족들까지 자기들과 함께 죄를 짓자고 하며 압력을 가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우리의 충성심을 요구하고, 마땅히 알려야 할 비행을 묵인해 달라며 우리를 범죄에 연루시키거나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야”라고 말하면서 함께 범죄를 저지르자고 요구할 수도 있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우리가 죄라고 알고 있는 행위에 가담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할 수 있기를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Unlawful Oaths and Vow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하나님께 우연은 없다
2019-01-24
잠언 16장 33절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죄의 결과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을 우리의 형상대로 만들려는 성향이다. 우리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지만 단지 힘과 지혜가 훨씬 뛰어나실 뿐이라는 식으로 인간의 관점에서 그분을 생각할 때가 많다.물론 하나님은 많은 점에서 우리를 닮으셨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가 많은 점에서 그분을 닮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가르친다(창 1:26-27). 예를 들어, 성경은 하나님이 생각하고, 느끼고, 계획을 이루신다고 말씀한다. 그런 표현은 하나님이 최소한 어떤 식으로든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계셔야만 적절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하나님이 ‘생각’을 하시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생각은 무한하다. 하나님은 일어날 수 있는 일과 그 결말을 모두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와는 달리 가용한 정보를 바탕으로 논리적인 추론을 시도하지 않고, 모든 것을 즉각적으로 인지하신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보다 능력이 훨씬 더 뛰어난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과 우리의 차이는 본질적인 차이이다.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에게는 아무렇게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는 것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이 점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우리는 우연한 일처럼 보이는 사건과 상황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 우리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 곧 이유도 까닭도 없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흔히 경험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도 우리와 똑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바라보신다고(곧 하나님께도 우연과 같은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오늘의 본문은 어떤 문제에 관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고대 사회에서 종종 사용되었던 제비뽑기를 예로 들어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아무렇게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단 한 가지도 없다고 가르친다. (오늘날의 주사위 던지기와 똑같은) 제비뽑기처럼 순전히 우연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까지도 하나님이 미리 작정하신 것이다.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제비뽑기는 특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단이었다(레 16:8). 따라서 적절한 방식으로 제비뽑기를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하나님이 결정하신다는 잠언의 말씀은 그들에게 전혀 생소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제비뽑기나 종교적인 상황과는 무관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제비뽑기에까지 보편적으로 적용된다. 하나님은 우연한 사건들까지도 모두 통제하신다. 그분이 주권적으로 작정하신 한계를 벗어난 결과는 아무것도 없다(엡 1:11).코람 데오‘독자적으로 활동하는 분자’ 같은 것은 없다. 오늘의 본문은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많은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다. 우리에게는 아무렇게나 마구잡이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통제를 벗어날 수 없다. 그분은 만사를 다스리신다. 이런 사실은 참으로 큰 위로를 준다. 모든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아래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진실로 모든 일을 합력해 우리를 유익하게 하실 수 있다(롬 8:28).출처: www.ligonier.org원제: Lord Over Chanc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QT 영원히 굳게 선 하나님의 말씀
2019-01-23
시편 119편 89절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시편 119편의 저자는 고난 속에서 인내하며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했다. 성경이 생명을 주는 능력을 지닌 이유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영원하신 창조주에 관한 계시이기 때문이다(딤후 3:16-17).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을 주는 능력 외에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가르친다.구체적으로 말해, 성경은 선택받은 신자들에게 생명을 유지하는 능력을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드러낸다. 오늘의 본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체의 순환만큼이나 확실하고 불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땅에 비를 뿌리는 구름이나 늘 뜨고 지는 태양이나 달처럼 확실하다. 노아 시대에 땅을 보존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은 계절의 지속적인 순환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창 8:22). 내일이 올 것을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약속이 영원히 굳게 서리라는 것을 확실하게 기대할 수 있다.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계절의 순환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질지언정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심지어는 하나님을 마주하고 볼 수 있는 내세에서도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은 견고히 설 것이다. 그분의 약속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성취되어 영원히 확고하게 설 것이다(벧후 3:13). 우리는 영광 중에 거하면서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을 영원히 기억하게 될 것이다.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확실한 성품에 확고하게 근거하고 있기 때문에, 시편 저자는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라고 자신 있게 고백했다(시 119:90). 이 세상의 나라들은 왔다가 사라지고, 인간의 철학도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하나님의 진리는 영원할 것이다. 어떤 시대이든 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법은 절대로 없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을 강해하며 "하나님의 진리는 과거에나 앞으로나 시대가 바뀌면서 더 왕성하게 나타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성도들 사이에서 종적을 감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라고 주석했다.코람 데오하나님은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말씀을 변함없이 보존하심으로써 그 신실하심을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심지어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일 때에도 항상 그분의 약속을 굳게 믿고 후손에게 전달하는 충실한 남은 자들이 존재한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 약속의 말씀에 굳게 서는 남은 자들 가운데 속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s Sustaining Wor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피할 수 없는 질문
2019-01-22
에베소서 1장 4-6절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는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을 공부하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성경 본문을 많이 다루었다. 만사가 때가 있다는 전도자의 가르침에서부터(전 3:1-8) 하나님의 뜻만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잠 19:21) 지혜 문학은 창조주께서 피조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온전히 다스리신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주권을 옳게 이해하려면, 예정의 교리, 곧 하나님이 일어날 모든 일을 미리 작정하셨다는 교리를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마틴 루터는 예정의 교리를 ‘교회의 심장’이라고 일컬었다. 그 이유를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예정의 개념이 많은 곳에서 부당한 비난을 받고 있지만, 이 개념은 구원이라는 가장 중요한 문제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중에서도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오늘의 본문에서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위해 미리 예정되었다고 가르친다(엡 1:3-10). 물론 그의 설명이 성경에서 예정을 언급하는 유일한 말씀은 아니다. 사실, 창세기의 첫 장에서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성경 곳곳에서 이 교리를 가르치고 있다. 모든 신자가 예정의 교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예정을 믿고 아르미니우스주의자들은 믿지 않는다거나, 장로교인들은 예정을 인정하고 감리교인들은 부인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에서부터 루터교와 성공회를 거쳐 장로교에 이르기까지 모든 신학적 전통이 예정에 관한 가르침을 구비하고 있다. 예정을 둘러싼 견해의 차이는 예정의 교리를 믿고, 믿지 않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 차이는 예정의 근거, 가령 하나님의 단순한 예지이냐 그의 영원한 작정이냐의 문제와 개인의 구원까지 예정되어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오랫동안 개혁주의 전통은 예정에 관한 칼빈주의 교리가 성경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하고, 많은 위로를 줄 뿐 아니라,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옳게 강조하고 있다고 고백해 왔다.코람 데오개혁주의 전통은 예정의 교리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지만, 이 문제를 극도로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한다. 사람들은 예정의 교리를 잘못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칼빈주의자들조차도 종종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예정의 교리를 공부할 때는 신중을 기해야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 문제에 관해 가르치신 진리를 옳게 이해하는 일이 그분의 뜻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Inevitable Questio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악인들을 부러워하지 말라
2019-01-21
잠언 24장 1-2절 “너는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지 말며 그와 함께 있으려고 하지도 말지어다 그들의 마음은 강포를 품고 그들의 입술은 재앙을 말함이니라”인간은 누구나 사람들의 부러움 속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에서 성공하고 싶어 한다. 그런 욕망을 갖는 것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복종하면 형통한 삶을 살게 하겠다는 약속으로 자기 백성을 격려하셨다(수 1:7). 바울은 칭찬 받을 만한 것을 생각하라고 권고했다(빌 4:8). 그러나 성경은 그런 욕망(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덕분에 갖게 된 욕망)이 죄로 인해 왜곡되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타락했기 때문에, 부도덕한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명예와 성공을 거머쥐려는 유혹을 느낄 때가 많다. 젊은이들은 자기도 유명 인사들처럼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서 그들의 그릇된 행위를 모방하곤 한다. 또한 직장에서는 동료들을 짓밟고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려고 애쓴다. 다른 사람들이 그런 악한 방법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오늘의 본문은 그런 행위나 생각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잠언은 일상생활의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까지 언급하는 일은 당연하다. 악인들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그런 부러움 때문에 나도 조금이라도 그렇게 되고 싶은 마음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싶은 유혹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의 성공은 매혹적으로 느껴져도 절대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모두 악한 수단으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부러워하는 일은 옳지 않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악인은 본질적으로 물리적, 정신적, 감정적 차원에서 강포한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잠언을 읽어 보면,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를 올무에 걸리게 만들어 멸망을 자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잠 1:8-19).악인들은 강포할 뿐 아니라, 입으로 재앙을 말한다.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눅 6:43-45). 악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스스로가 거듭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그들은 정죄당할 것이다. 우리는 악인들과 연루되어 심판받을 위험을 자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매튜 헨리는 악인들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믿음을 비웃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는 등 항상 악한 의도를 지닌다. 그러나 결국에는 모두 그들에게 재앙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악인들과는 아무 관계도 맺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 그들을 부러워할 이유는 조금도 없다. 오히려 악한 행위를 보면 측은하게 여기거나 의로운 분노를 느껴야 마땅하다."코람 데오악인들이 형통하는 모습을 보면 실망을 느끼기 쉽다. 우리가 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악인들과 그들의 형통함을 부러워해서는 안 된다. 악인들의 성공은 일시적이다. 우리가 의를 위해 당하는 고난도 일시적이다. 영원한 세상이 오면, 악인들은 정당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Envying Evil Me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친구를 지혜롭게 선택하라
2019-01-18
잠언 22장 24-25절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울분한 자와 동행하지 말지니 그의 행위를 본받아 네 영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두려움이니라”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절제를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언급했다. 뛰어난 자제력, 곧 기분 나쁠 때마다 분노를 드러내지 않고 눌러 참아내는 태도는 마음속에서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물론 그런 사람은 의로운 분노를 드러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엡 4:26). 그들은 불의와 거짓에 맞선 정당한 분노와 사소한 자극에 인한 분노를 혼동하지 않는다.세상을 향해 항상 분노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멸망으로 몰아넣는다. 그들은 아무와도 어울릴 수 없기 때문에 진정으로 어려울 때 의지할 곳이 아무데도 없다. 그들은 직업의 기회를 잃고, 가족들을 수치스럽게 만들며, 온갖 종류의 문제를 일으킨다. 그러나 성령으로 행하는 사람은 그런 분노에 이끌리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곤란한 상황을 모두 다 피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실을 상기시켜 줌으로써 "노를 품는 자"와 "울분한 자"들을 멀리하라고 경고한다.오늘의 본문은 성미가 급한 사람들을 다룬다. 스스로의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위험하다.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했다가는 덩달아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신중하게 잘 분별하지 못하면, 우리 자신을 “올무에 빠뜨릴” 수 있다(잠 22:25). 어떤 상황에서든지 화를 낼 빌미를 찾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너무 가깝게 어울리면 그렇게 될 위험성이 높다. 남을 괴롭히기를 좋아하는 사람과 어울리는 사람들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는 친구를 사귄 까닭에 자신이 시작하지 않은 싸움에 휘말려들 가능성이 크다. 항상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을 친구로 둔 사람들은 예기치 않은 상태에서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그런 사례는 얼마든지 열거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말하려는 요점은 스스로를 통제하는 데 아무런 관심이 없는 사람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면, 끔찍한 결과를 자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오늘의 본문은 항상 분노를 품은 사람을 멀리해야만 그가 일으키는 일로 인해 우발적인 피해를 당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고, 또 그런 사람처럼 되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친구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항상 분노하기를 좋아한다면, 우리도 그렇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잠 22:25).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영적 성장이 크게 퇴보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람들과 사귈 때는 신중하게 가려 사귀어야 한다.코람 데오오늘의 본문은 세상을 완전히 멀리하라는 말이 아니라(고전 5:9-10), 친구를 신중하게 가려 사귀라는 지혜로운 권고이다. 성질이 나쁜 사람의 친구가 되어 그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런 성격을 극복하도록 돕는 일과 분노하기 좋아하는 성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그 마음을 통제하는 일에도 아무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일은 서로 전혀 다르다. 우리 모두 친구를 지혜롭게 선택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hoosing Friends Wisel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악을 없애는 징계의 회초리
2019-01-17
잠언 20장 30절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고통은 위대한 교사일 수 있다. 어린 자녀를 둔 부모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대로, 어린아이를 가르치려면 때로는 회초리를 드는 일이 필요하다. 그러나 징계를 베풀 때는 적절한 한계가 없이 어린 자녀를 학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자녀에 대한 징계는 분노가 아닌 사랑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적절하게 통제된 물리적인 징계는 사랑의 행위에 해당한다.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회초리를 아끼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하는 것이다(잠 13:24; 22:15; 23:13-14; 히 12:7-11).불순종하는 자녀에게 적절하게 물리적인 징계를 가하면, 불순종의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더 잘 깨닫게 만들 수 있다. 나쁜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사랑으로 징계를 베푸는 일은 자녀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준다.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대로, 물리적인 징계는 겉으로 드러난 나쁜 행동을 바로잡아 줄 뿐 아니라 때로는 내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상하게 때리는 것이 악을 없이하나니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느니라"(잠 20:30).물론 물리적인 징계 그 자체가 마음의 변화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종종 물리적인 고통이라는 용광로를 통해 우리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내적 변화의 필요성을 깨우치며, 우리 자신의 마지막 운명을 상기시켜 회개와 치유와 경건한 삶으로 이끄신다. 역대기에 나오는 므낫세에 관한 기사만 보더라도, 이런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아마도 므낫세는 고대 유다 왕국의 역사상 가장 사악한 왕이었을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그의 악행은 결국 쇠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결과를 낳았다(대하 33:1-20). 그 결과로 그는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하나님은 혹독한 물리적인 시련을 통해 므낫세가 믿음을 갖도록 이끄심으로써 고통이 삶의 다른 영역에 속한 문제는 물론이고,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위대한 스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셨다.좋은 부모가 사랑으로 물리적인 징계를 베풀어 자녀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그들에게 옳고 그른 것을 가르치듯이, 완전하신 하늘의 아버지도 그렇게 행하신다. 우리가 당하는 물리적인 고통이 모두 특정한 죄를 위한 징계라는 뜻은 아니지만, 고통을 당할 때는 마땅히 경각심을 느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죄를 뉘우치게 하는 수단으로 그 고통을 사용하고 계실지 모르기 때문이다.코람 데오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따가운 소독약이 상처를 치유해 새 살을 돋게 만드는 것처럼 엄한 책망은 많은 유익을 가져다 준다. 매는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어리석음을 제거하고, 그 안에 있는 악을 없애 준다." 우리처럼 강퍅한 죄인들은 고통을 통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교훈을 깨닫지 못할 때가 많다. 고통을 통해 정결하게 된다면,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해 우리를 유익하게 하고 계신다는 증거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Discipline’s Cleansing Ro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2019-01-16
시편 113편 4-6절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시편 가운데는 예전적인 목적으로 기록되었거나 사용된 시편이 많다. 오늘의 본문은 할렐 시편 가운데 하나다. 이 명칭은 ‘하나님을 찬양하라’를 뜻하는 히브리어 ‘할렐’에서 유래했다. 할렐 시편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라는 부름이다. 시편 113편은 ‘애굽 할렐’로 알려진 할렐 시편의 범주에 속한다. 시편 113-118편으로 구성된 애굽 할렐은 고대 이스라엘의 유월절 축제에 사용된 시편을 한데 엮은 것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 만찬을 먹기 전에 시편 114편과 함께 113편을 노래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이 관습을 지키고 있다.이 시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유월절에 적합한 찬송인 것을 곧 알 수 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구원하신 일을 찬양한다. 특히 이 시편은 하나님에 관한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함으로써 그분을 찬양하도록 이끈다. 첫째, 시편 113편 4-6절은 하나님의 주권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다(시 113:4). 하나님은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실" 정도로 지극히 높으시다. 인간 왕이 보좌 위에 앉아 있고, 백성이 그를 알현하려면 보좌가 놓인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지극히 높은 보좌 위에서 만물을 다스리신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통해 자신의 통치와 권위가 당시에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를 누렸던 바로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시고 그런 그에게 놀라운 권능을 나타내 오직 여호와만이 참된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심으로써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게 만드셨다(출 4:21; 7:1-5). 창조주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거부하는 바로를 굴복시키셨다. 하나님의 주권은 너무나도 위대해서, 바로는 하나님이 작정하신 시기가 정확히 이르렀을 때 이스라엘 백성을 풀어주어야만 했다(출 12:29-32).하나님의 구원과 비천한 자를 높인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내용은 이 시편이 유월절 축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유를 잘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수효가 많고 힘이 강력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었다"(신 7:7). 그러나 시편 113편 7-9절은 하나님이 작고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높이신다고 노래한다. 구원자이신 주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선택하실 때 그들이 지닌 영향력이나 개인적인 업적과 같은 것을 보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분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을 높여 왕들과 함께 앉히시고, 아이를 낳지 못한 탓에 집도 가족도 없는 여인들에게 자녀를 허락하신다.코람 데오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일으켜 세워 왕들과 함께 앉히신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자들에게는 그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하면, 하나님이 높이시는 가난한 자는 "심령이 가난한 자"(마 5:3), 곧 자신에게는 아무런 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빈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 구원의 필요성을 의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할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 Highly Exalte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2019-01-15
시편 89편 46절 “여호와여 언제까지니이까 스스로 영원히 숨기시리이까 주의 노가 언제까지 불붙듯 하시겠나이까”시편 저자는 시편 89편 1-37절에서 다윗과 그의 후손과 맺은 영원한 언약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능력을 찬양하고 나서 38절부터 갑작스레 어조를 바꾸었다. 그가 이 시편을 작시한 이유가 다윗 왕가의 위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시편의 역사적 배경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시편 저자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다윗 왕가에 닥친 큰 재앙 때문이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편이 작성될 무렵,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왕은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원수들에 의해 약탈을 당하고, 국토가 파괴되며, 전쟁에서 패배하는 등 큰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었다(시 89:38-45).하나님이 그런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 그분의 진노가 다윗과 그의 보좌를 향해 뜨겁게 불타올랐다. 시편 저자는 언제까지 진노를 계속 쏟아내실 것이냐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시 89:46). 물론 시편 저자는 왕과 백성이 당하는 고난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윗 왕가의 죄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다윗과 영원한 언약을 맺으셨기 때문에, 언젠가는 창조주의 분노가 만족되고 고난이 끝날 때가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그는 구원을 호소하며, 하나님이 인자하심을 베풀어 왕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간구했다(시 89:47-51). 이 부분의 내용은 매우 우울하지만, 마지막에는 강한 확신을 드러낸다. 시편 저자는 고난의 와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했다(시 89:52). 하나님이 개입해 왕을 구원해 주시기를 고대하는 시편 저자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고려하면, 이 시편이 메시아 시편에 속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대신해 그분의 진노를 감당하셨고, 다윗 왕가의 죄와 하나님이 선택하신 자들의 죄를 모두 짊어지셨다(롬 3:21-26). 그분은 원수들에게 모욕을 당하셨다(마 27:27-31). 예수님은 우리 대신 진노를 받으심으로써 다윗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그분의 인자하심을 밝히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려 영원한 왕으로 세우심으로써 다윗에게 한 약속을 온전히 이루셨다(빌 2:5-11).코람 데오하나님이 항상 약속을 지키신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증거를 원한다면, 다윗에게 하신 약속이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성취된 일을 보면 된다. 창조주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다윗 왕가에 대한 인자하신 사랑을 나타내셨고, 이로써 다윗과의 언약을 지키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많은 증거들과 더불어 성부 하나님이 항상 약속에 충실하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모든 약속을 지키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ow Long, O Lor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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