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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심판의 희망
2018-12-31
전도서 3장 16-17절 “또 내가 해 아래에서 보건대 재판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고 정의를 행하는 곳 거기에도 악이 있도다 내가 내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의인과 악인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니 이는 모든 소망하는 일과 모든 행사에 때가 있음이라 하였으며”이 세상이 전부이고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면, 인생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하다. 이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초월적인 목적도 없고, 옳고 그른 것도 없으며, 어떤 일에 대한 도덕적인 절대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제는 그릇된 것이 내일은 옳은 것이 될 수 있고(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된 판단도 불가능하다. 그런 경우에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의미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온전히 선하신 창조주가 존재하신다면, 삶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계획이 좀 더 온전하게 드러나고, 우연의 일치처럼 보였던 사건들의 목적이 밝혀지고, 모든 불의한 것이 옳게 시정될 때가 이르면, 겉으로 부조리하고 허무하게 보였던 삶이 영원한 의미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전도서를 이해하는 열쇠는 전도자가 전하고자 하는 매우 간단한 한 가지 요점, 즉 오직 하나님만이 삶의 의미를 부여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있다. 오늘의 본문도 마찬가지다. 전도자는 정의가 시행되어야 할 곳에 악이 종종 활개를 치는 현상을 발견했다. 우리도 그런 현실을 직접 목도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훌륭한 정의 체계를 갖춘 곳에서도 범죄자들이 불의한 재판관을 뇌물로 매수해 처벌을 받지 않고 풀려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의를 돈으로 사고파는 일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 범죄자들은 정의의 심판을 모면하고, 무고한 자들이 되레 처벌을 받는다. 예수님에 대한 재판이 가장 대표적인 본보기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을 때 거짓으로 증언했던 사람들의 진술은 서로 일치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그런 증언들을 듣고 예수님에 대한 재판을 철회해야 마땅했지만, 그분은 유죄 판결을 받으셨다(막 14:53-65; 신 17:6). 타락한 세상에서는 정의가 왜곡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정직한 무신론자라면, 이런 현실 앞에서 선이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거나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를 통해 어떻게든 권세를 잡아 자신에게 유리하게 사용하려고 할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우리의 존재가 소멸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 철저하고 완전한 무신론자는 거의 없다. 그 이유가 오늘의 본문에서 발견된다. 전도자는 세상에서 정의가 항상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실 날이 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 지식은 인간의 마음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데서 비롯된 결과다(창 1:26-28). 가장 노골적인 불신자들조차도 하나님이 만민을 심판하실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지식이 그들이 절망 속에 매몰되거나 독재자가 되지 않도록 막아준다.코람 데오완전한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아는 지식은 신자들에게는 큰 희망을 준다. 그 날이 되면 모든 것이 옳게 제자리를 찾고, 불의한 것이 모두 시정되고, 각 사람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신자들은 천국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완전한 복종과 그에 대한 보상이 그들의 것으로 간주될 것이기 때문이다(고후 5:21). 그와 달리 불신자들은 죄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보혈과 의가 그들의 죄를 가려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Hope of Final Judgmen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다른 사람들의 조언을 구하라
2018-12-28
잠언 20장 18절 “경영은 의논함으로 성취하나니 지략을 베풀고 전쟁할지니라”1944년 6월 6일은 20세기, 아니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날 중에 하루다. ‘D-Day’로 잘 알려진 그날에 연합군은 나치에게 점령된 프랑스를 해방하고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물리치기 위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감행했다. 16만 명 이상의 군대가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결국 상륙 작전은 성공했고, 연합군은 서유럽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그들은 그곳에서부터 차츰 ‘추축국’(이탈리아-독일-일본 연맹)을 패퇴시키며 2차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연합군이 그 계획을 실행하기 오래전부터 기대해 온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여러 달에 걸쳐 논의에 논의를 거듭한 결과물이었다. 연합군을 구성한 여러 국가의 최고의 전략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기밀을 수집하고, 물자를 마련하는 등, 성공적인 상륙 작전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해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전쟁의 역사에 정통한 사람들은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기 위해서 많은 논의를 거쳐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사실은 오늘의 본문으로 선택한 성경의 잠언에 담겨 있는 지혜를 잘 보여 준다. 오늘의 본문은 ‘지략을 베풀어’ 전쟁을 하게 하려면 먼저 많은 의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 전쟁을 이끄는 사람은 왕이었다(창 14:1-12). 이 잠언의 말씀은 그런 왕들의 전쟁을 비유로 삼아 잠언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에게 적용했다. 잠언은 본래 지혜로운 부모가 자기 자녀에게 주는 교훈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잠 1:8), 왕들의 전쟁을 비유로 삼은 내용을 너무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이 잠언은 왕들과 군대의 전쟁에도 직접 적용할 수 있지만, 그렇게 적용이 끝나면 안 된다. 이 잠언은 여러 종류의 어려운 상황에 직면한 다양한 유형의 지도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지도자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혼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사업가, 목회자, 공무원, 관리자, 부모 모두에게 이 잠언이 적용된다. 지혜로운 지도자는 항상 다른 사람의 조언을 구해야 한다.오늘의 본문은 아무 조언이나 다 받아들이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만이 우리를 인도할 수 있다(잠 1:7). 따라서 조언자나 정신적 스승을 선택할 때는 극도로 신중해야 한다.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은 큰 성공을 거두지만, 어리석고 경건하지 못한 조언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코람 데오인생에서 정신적 스승, 친구, 조언자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별로 없다. 평범한 지도자도 지혜로운 사람들과 어울리면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비록 지도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를 성공적인 부모와 직장인과 평신도가 되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지혜롭고 경건한 친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사귈 사람을 선택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우리 모두 늘 지혜롭고 경건한 조언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하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Our Need for Counsel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피조 세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
2018-12-27
시편 29편 3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존 칼빈은 시편 29편을 주석하면서 "온 천지에 드러난 일반적인 자연 현상 가운데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은 피조 세계의 질서를 통해 영광을 나타내신다. 심지어 평생 성경 한 번 읽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분께 경배와 감사를 드린다. 이런 사실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 분명하게 확인된다.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사실상 그렇게 많지 않다. 최근의 연구 조사에 따르면, 세계 인구 가운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2퍼센트도 안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로마서 1장 18-32절에 따르면, 심지어는 그런 사람들조차도 현실, 곧 스스로가 사실로 알고 있는 진리를 억지로 부인할 뿐이다. 진정한 무신론자는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행동은 곧 스스로의 양심과 지각을 통해 분명한 사실로 인식되는 진리를 고의로 거부하는 태도이기 때문이다.피조 세계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해 피조 세계가 창조주에 관해 증언하는 진실을 좀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원리를 보여 준다. 다윗은 "권능 있는 자들에게" 거룩하신 하나님께 경배하고 영광을 돌리라는 말로 이 시편의 서두를 열었다(시 29:1-2). 시편 29편에서 "권능 있는 자들"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과 하늘의 피조물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시 82:6; 89:6). 따라서 다윗은 그룹과 스랍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의 말에는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권능 있는 존재들이 하나님께 경배한다면, 우리는 더욱더 그래야 마땅하지 않겠는가?하나님의 권능은 말씀의 능력을 통해 나타난다. 말씀의 능력은 백향목을 꺾어 쓰러뜨린다. 나무들이 쓰러지는 이유는 제멋대로 구는 자연의 힘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때문이다(시 29:5). 하나님의 능력은 또한 부드럽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분의 능력으로 암사슴이 새끼를 낳는다(시 29:9). 그분의 능력은 동물들만이 아니라 삼림도 진동시킨다(시 29:9). 하나님은 육지와 바다와 공중의 짐승들을 다스리신다(욥 39장).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큰 죄에 해당한다.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짐승들에게 그런 능력과 영향을 미치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 무분별하고 터무니없는 일은 없다. 하나님이 자연의 현상을 섭리하고 다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불경죄에 해당한다. 들짐승들까지 복종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의 놀랍고도 탁월한 사역을 통해 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은 진정 혐오스러운 우둔함이 아닐 수 없다."코람 데오세상에는 무신론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창조주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 그러나 진정한 무신론자는 아무도 없다. 피조 세계의 질서 자체가 사람들에게 옳은 것을 행하라고 가르치며 모든 역사를 정해진 목적(곧 하나님의 영광이 온전하게 드러나는 방향)을 향해 이끄시는 창조주이자 위대한 설계자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분명하게 증언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d’s Glory in Creatio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거룩한 다윗 왕가의 보좌
2018-12-26
시편 45편 6절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며 주의 나라의 규는 공평한 규이니이다”결혼식은 크게 기뻐하며 축하해야 할 행사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현대의 결혼식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의 결혼식에 비하면 좀 시시한 편이다. 당시에 결혼식이 있을 때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모두 모여 며칠 동안 만찬을 즐기며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남편과 아내가 된 일을 성대하게 축하했다.평범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경우에도 결혼식을 그렇게 축하했다면, 왕의 결혼식이 어떠했을지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루어진 왕의 결혼식에 대해 상상에만 의존할 필요는 없다. 성경은 왕의 결혼식 관습에 관해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면, 여러 편의 시편이 작시되어 다윗 왕가의 왕이 결혼할 때 노래로 불렸다. ‘사랑의 노래’라고 불리는 시편 45편은 왕과 왕비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시된 시편 가운데 하나다.이 시편은 왕, 궁극적으로는 왕을 임명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다. 1-5절은 고대 이스라엘의 선한 통치자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찬양한다. 사람들이 통치자에게 기대하는 긍정적인 요소들에 해당하는 출중한 외모(시 45:2)와 전쟁을 지휘하는 능력(시 45:3-5)은 물론이고, ‘진리와 온유와 공의’를 강조하는 내용도 아울러 발견된다(시 45:4). 고대 사회에서 온유나 겸손은 대다수 사람들이 왕에게서 기대하는 덕목이 아니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왕은 주변 나라들의 왕들과 같은 왕이 아니었다(삼상 8장).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알려졌던 고대 이스라엘의 모범적인 지도자 모세처럼 부드럽고, 차분하고, 자애로운 힘, 곧 온유한 자질이 왕에게서 나타나야 했다(민 12:3). 더욱이 다윗 왕가의 왕들은 진리와 공의에 입각해 나라를 통치해야 했다. 그것은 왕 자신이 제멋대로 규정한 진리와 공의가 아니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은 통치자들이 스스로 백성들에게 옳고 그름을 정해 주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율법, 곧 이스라엘의 언약의 하나님이자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해야 했다(신 17:14-20).이런 사실은 다윗 왕가의 보좌를 하나님의 보좌로 간주하는 시편 45편 6절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하나님이 다윗 왕가의 왕들을 세우셨고,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나라를 다스렸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보좌는 사실 창조주 하나님의 보좌였다. 이것은 다윗의 후손이자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코람 데오우리가 경건한 지도자에게서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제압하더라도 목표만 달성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원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님이 온유와 진리와 공의를 추구해야 하셨다면, 다른 지도자들도 모두 그런 본을 보여야 마땅할 것이다. 이 점은 교회 안에서 특별히 중요하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는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겸손히 섬기는 사람을 세워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Divine and Davidic Thron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회복된 메시아
2018-12-25
시편 22편 22-23절 “내가 주의 이름을 형제에게 선포하고 회중 가운데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 야곱의 모든 자손이여 그에게 영광을 돌릴지어다 너희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여 그를 경외할지어다”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은 시편 22편을 읽을 때 그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시편 22편을 인용해 기도하신 일 외에도(마 27:46; 시 22:1),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이 시편의 내용 가운데 많은 내용이 현실이 되어 나타났다(시 22:7-8). 또한 십자가의 처형을 지켜보던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 시편 22편에 묘사된 행위와 똑같은 행위를 저질렀다(마 27:41-43). 시편 22편 16절은 다윗의 원수들이 그의 손과 발을 찔렀다고 말씀한다. 구약성경의 다른 곳에서 그런 일이 실제로 다윗에게 일어났다는 내용은 발견되지 않지만, 예수님의 손과 발에는 실제로 못이 박혔다(요 20:15). 다윗도 고난을 당하는 중에 심지어 입고 있던 옷까지 포기해야 할 극심한 가난을 겪었고(시 22:18), 예수님의 옷도 군인들이 제비를 뽑아 나눠 가졌다(마 27:35). 이밖에도 다윗은 거의 파멸의 직전에 이르러 혀가 입천장에 말라붙을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시 22:14-15). 그리스도 역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목마르다"라는 말씀으로 심한 갈증을 호소하셨다(요 19:28).이 시편이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문자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은 시편 22편 1-15절을 공부할 때 배웠던 요점, 곧 다윗과는 달리 예수님은 실제로 이 시편의 기도와 같은 완전한 절망을 경험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편에 구체적으로 묘사된 고난은 그리스도의 경우에는 단순한 비유가 아닌 십자가에 매달려 계시는 동안에 실제로 경험했던 현실이었다. 모든 고통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고통, 곧 죄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로 인해 그분으로부터 버림받으신 일도 엄연한 현실이기는 마찬가지였다. 만일 우리가 그런 고통과 심판을 받았더라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분의 처사가 불의하며 공정하지 못하다고 크게 불평하면서 저주의 말을 쏟아 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리스도는 그런 불평과 저주를 한 마디도 내뱉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 자기를 버리신 일에 큰 절망과 슬픔을 느끼면서도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셨다"(벧전 2:23). 그분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은 "화로다 나여! 버림 받고 말았도다"가 아니라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였다(눅 23:46).이런 사실을 이상하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온 마음을 다해 시편 22편을 기도하셨다면, 오늘의 본문에 기록된 대로 그 안에 승리의 기도도 아울러 포함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죄인들을 대신해 십자가에서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신 것은 단지 일시적인 일이었다. 예수님은 성부께서 영원히 자기에게서 얼굴을 감추지 않으시고, 결국에는 도움을 부르짖은 기도에 응답하실 것을 알고 계셨다(시 22:24).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자신의 형제들에게 선포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셨다(시 22:23-24). 이 모든 일이 그분의 부활을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코람 데오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인간으로서 버림을 받으신 상황은 영구적이지 않았다. 예수님이 무한한 가치를 지닌 속죄제물로서 자신을 아버지한테 겸손히 바치신 일은 그분이 우리의 죄값을 온전히 치르시고, 죄에 대한 하나님의 무한한 진노를 남김없이 감당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욱이 그분이 죄가 없으시다는 사실은 죄의 징벌로서의 사망이 그분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부활이 입증하기 때문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Messiah Restore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때가 차매
2018-12-24
갈라디아서 4장 4-5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을 공부하다 보면, 시편 2편, 22편, 89편, 110편과 같은 가장 중요한 메시아 시편들을 보게 된다. 그런 메시아 시편들과 지혜 문학의 다른 몇몇 본문들은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이신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메시아와 그분의 초림에 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과 함께 생각하면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다.기독교 신앙을 적대시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성경이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iad)와 같은 고대의 신화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과 신들이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는 고대의 이야기 사이에 공통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신약성경이 1세기 로마 제국의 이교도들이 전한 이야기를 토대로 하여 예수님에 관한 기사를 꾸며낸 책이라고 말하는 저술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학생들은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 인물들이 제우스나 헤라와 같은 상상 속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며 기독교 신앙을 공격하는 말을 듣곤 한다.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그런 비판의 말을 들으면 상당히 당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조금만 공부를 해 보면, 성경의 이야기가 고대 신화와는 사뭇 다르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는 고대의 신화는 실제 역사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일과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와는 달리 고레스의 칙령(스 1:1-4)이나 가이사 아구스도의 통치 시대에 일어난 예수님의 탄생(눅 2:1-7)과 같은 성경의 많은 기사는 실제 인물과 실제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통해 인간의 육신을 취하셨다고 가르친다(눅 1:14). 이것은 고대 헬라 사상가들이 결코 인정하지 않았던 개념이다.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며 역사적인 사실을 증언한다. 심지어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 속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5:14). 성경은 역사가 만사를 자기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권자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여 있다고 가르친다(엡 1:11). 때가 차매, 곧 하나님이 작정하신 때가 이르러서 메시아가 탄생했다(갈 4:4-5).코람 데오우리가 메시아의 강림에 관해 살펴볼 때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일어난 실제 역사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성경은 사건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과 상관없이 단지 영적인 진리를 전달하는 내용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모든 역사를 상세하게 전하지는 않지만, 참된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가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이루어져 왔다고 굳게 확신할 수 있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ully Right Time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처녀가 잉태하여
2018-12-21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타종교에도 성육신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무엇보다 성경은 고대의 신화들과는 달리 성육신을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진술한다(요 1:1-18; 빌 2:5-11). 신약 성경은 성육신을 영원한 현실로 간주한다. 성자께서는 성육신할 때만 인간의 육신을 취하고, 승천할 때 육신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원히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다. 성자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결합은 영원히 지속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님은 지금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이시다.성자의 성육신은 성령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눅 1:26-38). 이 역사적 사건은 그 일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역사 속에서 예언되었다. 오늘 본문은 지난 200년 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항상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였지만 19세기 이후로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그 주된 원인이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그런 풍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동정녀 탄생을 거부한다.이런 논쟁은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대립을 통해 절정에 달했다. 그런 논쟁의 와중에서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은 많은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에 굴복하더라도 성경의 초자연적인 믿음을 굳게 견지하며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메이첸은 신약성경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 곧 예수님이 일반적인 인간의 생식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마 1:18-25; 눅 1:34). 마리아에게 적용된 헬라어 ‘파르데노스’는 ‘동정녀’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이 용어가 사용된 이유는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불륜의 열매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뜻하지 않은 임신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결과였다(마 1:20). 따라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에 관한 근본 진리, 곧 그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코람 데오메이첸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면 다른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차례로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정녀 탄생은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은 인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면 그 이외의 초자연적 사건들마저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상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한 가지는 부인하고 다른 한 가지는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onceived in the Womb of the Virgi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최초의 복음
2018-12-20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육신해서 세상에서 사역하고, 살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일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증언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에도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역사 속에서 활동해 오셨다.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신학자들이 ‘원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으로 일컫는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의 의미와 그것이 성경의 나머지 내용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는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아마도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오늘의 본문과 그 전후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는 축복까지 허락하셨다(창 1-2장).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창 3:1-13).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단죄하고 심판하실 수도 있었다(창 3:16-19). 그러나 그분은 은혜를 베풀어 아담과 하와를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먼저 뱀, 즉 사탄에게 그의 머리가 상할 것이고, 그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4-15).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창조주는 영적 전쟁을 예고하셨다. 그분은 자기 백성에게 마귀가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마귀는 머리에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었다. 뱀이 땅에 기어 다니며 흙을 먹는다는 말씀은 그런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준다.여인의 후손은 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이 다 여인의 후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사탄의 후손에 속하기 때문이다(요 8:39-47). 마귀의 후손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은 사탄을 물리칠 여인의 후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도 죄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마귀를 정복할 후손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 여인의 후손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마귀를 정복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골 2:13-15). 그분 안에서 우리도 함께 마귀를 정복한다.코람 데오마귀에 대한 우리의 승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보장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이미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히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마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불못에 던져질 때까지 우리를 해치려고 발악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고 고난을 당할 때도 충실히 믿음을 지킬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사탄이 공격할 때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irst Gospel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내 발을 비추는 등
2018-12-19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건전한 조언과 지식이 담긴 책들을 책장에 가득 쌓아 놓고서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모든 지혜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본문이 기록되었든, 문장이 너무 복잡하든, 실제로 그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지혜를 약속하는 가르침이 그 책에서 아무리 많이 발견되더라도 조금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119편 97-104절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것을 읽고 묵상하는 자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는 힘을 지닌다고 말씀한다. 특히 105절은 성경의 계시를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로 묘사한다. 등불과 빛은 어둠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 등불은 어두운 방이나 깜깜한 밤이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앞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경도 영적, 도덕적 문제와 관련해 그와 같은 기능을 한다.성경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이유는 지도자나 교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확실한 방향을 보여 주는 고유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말과 모순된다. 존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하나님의 말씀 안에 불분명한 것이 있다면 [중략] 이 시인이 율법을 칭송하는 일이 전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떠서 보기만 하면, 그 안에서 확실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해서 적용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에서 이를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이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다고 말했다. 시편 119편 112절도 근본적으로 그와 동일한 가르침을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를 주는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 시편 저자가 지혜를 주는 말씀의 능력을 찬양한 일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마음을 기울인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112절).그런 결심은 상황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실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시편 저자는 큰 시련을 당하는 와중에 시편 119편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충실하기로 결심했다(106-111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코람 데오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늘 새롭게 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겠다고 결심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총명과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항상 주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모든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Lamp to Our Fee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세 가지
2018-12-18
잠언 6장 16-17절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하나님에 대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조차도 창조주께서 증오심을 품지 않는다는 견해에 동조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에 관하여 성경이 언급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잠언 6장 16-19절은 하나님이 특별히 미워하시는 것을 몇 가지 제시한다. 이 본문에 나열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죄만 멀리해도 그릇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특히 오늘의 본문은 그 목록 가운데 처음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미워하신다(17절). 이것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우리를 높이 생각하는 오만한 마음을 가리킨다(롬 12:3). 하나님이 교만을 미워하시는 이유는 교만이 창조주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우리 자신을 높이는 일은 이웃에 대해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신뢰하는 태도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겸손히 경외하는 태도와는 정반대다(잠 1:7).잠언 6장 17절은 또한 하나님이 “거짓된 혀”를 미워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창조주가 거짓을 말하는 혀를 미워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짓을 말하는 일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며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항상 말에 진실하시다. 따라서 거짓을 말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모욕하는 것이다. 또한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를 가한다. 거짓 증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다른 사람의 명예와 삶을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위협하는 행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신다. 이것이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이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 이유다(출 20:16).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으로 언급된 세 번째 죄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이다. 이것은 살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분명하다. 살인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한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27),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해치는 것은 그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살인은 하나님을 향해 증오심을 표출하는 행위인 셈이다.코람 데오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열거한 잠언 6장 16-19절을 읽어보면, 우리 모두가 그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의 죄를 지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잠시 그 사실을 생각해 보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절대 용납하지 않으시는 죄를 지은 적이 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런 행위를 좀 더 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를 잊지 말고, 그분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ree Things the Lord Hate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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