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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가 잉태하여
2018-12-21
이사야 7장 14절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타종교에도 성육신과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특하다. 무엇보다 성경은 고대의 신화들과는 달리 성육신을 역사 속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진술한다(요 1:1-18; 빌 2:5-11). 신약 성경은 성육신을 영원한 현실로 간주한다. 성자께서는 성육신할 때만 인간의 육신을 취하고, 승천할 때 육신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영원히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다. 성자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인성과 신성의 결합은 영원히 지속된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이신 주님은 지금도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딤전 2:5)이시다.성자의 성육신은 성령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역사하심으로써 이루어졌다(눅 1:26-38). 이 역사적 사건은 그 일이 일어나기 오래 전에 역사 속에서 예언되었다. 오늘 본문은 지난 200년 동안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항상 기독교 신앙의 핵심 교리 가운데 하나였지만 19세기 이후로 집중적인 공격을 당하고 있다. 초자연적인 것을 거부하는 계몽주의 사상이 그 주된 원인이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다. 교회 안에도 그런 풍조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기독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동정녀 탄생을 거부한다.이런 논쟁은 20세기 초에 이루어진 근본주의자들과 현대주의자들의 대립을 통해 절정에 달했다. 그런 논쟁의 와중에서 그레샴 메이첸(Gresham Machen)은 많은 사람이 자유주의 신학에 굴복하더라도 성경의 초자연적인 믿음을 굳게 견지하며 동정녀 탄생의 교리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메이첸은 신약성경을 정직한 눈으로 바라보면 누구나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 곧 예수님이 일반적인 인간의 생식 과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했다(마 1:18-25; 눅 1:34). 마리아에게 적용된 헬라어 ‘파르데노스’는 ‘동정녀’를 의미한다. 신약성경에 이 용어가 사용된 이유는 천사가 요셉에게 마리아가 잉태한 아이는 불륜의 열매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밝혔기 때문이다. 마리아의 뜻하지 않은 임신은 그녀가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의 사역에 의한 결과였다(마 1:20). 따라서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는 것은 그분의 인격에 관한 근본 진리, 곧 그분의 성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코람 데오메이첸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면 다른 초자연적인 요소들을 차례로 부인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정녀 탄생은 부인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인 사건은 인정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하더라도, 대개는 동정녀 탄생을 부인하면 그 이외의 초자연적 사건들마저 부인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상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유기적으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한 가지는 부인하고 다른 한 가지는 인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Conceived in the Womb of the Virgi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최초의 복음
2018-12-20
창세기 3장 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성자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성육신해서 세상에서 사역하고, 살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일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역사 안에 들어오셨다는 것이 신약성경의 증언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역은 성육신 이전에도 이미 역사 속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역사 속에서 활동해 오셨다.오늘의 본문은 그런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신학자들이 ‘원복음’, 또는 ‘최초의 복음’으로 일컫는 오늘의 본문 말씀은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구원의 계획을 선언하셨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본문의 의미와 그것이 성경의 나머지 내용을 통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먼저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하기 위해 오셨는지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아마도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오늘의 본문과 그 전후 내용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셨을 뿐 아니라, 에덴동산에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는 축복까지 허락하셨다(창 1-2장).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배신하고 금단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그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창 3:1-13). 하나님은 그들을 즉시 단죄하고 심판하실 수도 있었다(창 3:16-19). 그러나 그분은 은혜를 베풀어 아담과 하와를 곧바로 심판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먼저 뱀, 즉 사탄에게 그의 머리가 상할 것이고, 그는 여인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4-15).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선언이었다. 창조주는 영적 전쟁을 예고하셨다. 그분은 자기 백성에게 마귀가 궁극적으로 패배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마귀는 머리에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었다. 뱀이 땅에 기어 다니며 흙을 먹는다는 말씀은 그런 사실을 생생하게 상기시켜 준다.여인의 후손은 한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모든 후손이 다 여인의 후손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사탄의 후손에 속하기 때문이다(요 8:39-47). 마귀의 후손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들은 사탄을 물리칠 여인의 후손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도 죄에 오염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마귀를 정복할 후손이 되기에는 부적합하다. 여인의 후손은 궁극적으로 십자가에서 마귀를 정복하신 예수님을 가리킨다(골 2:13-15). 그분 안에서 우리도 함께 마귀를 정복한다.코람 데오마귀에 대한 우리의 승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확실하게 보장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가 이미 마귀에게 치명상을 입히셨기 때문이다. 사탄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이다. 그가 승리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그러나 마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에게 상처를 입혔기 때문에, 마지막 심판의 날에 불못에 던져질 때까지 우리를 해치려고 발악을 할 것이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하고 고난을 당할 때도 충실히 믿음을 지킬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사탄이 공격할 때는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인내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First Gospel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내 발을 비추는 등
2018-12-19
시편 119편 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건전한 조언과 지식이 담긴 책들을 책장에 가득 쌓아 놓고서도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그 모든 지혜가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모르는 언어로 본문이 기록되었든, 문장이 너무 복잡하든, 실제로 그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할 수 없다면, 지혜를 약속하는 가르침이 그 책에서 아무리 많이 발견되더라도 조금도 유익하지 않을 것이다.시편 119편 97-104절은 하나님의 율법이 그것을 읽고 묵상하는 자들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는 힘을 지닌다고 말씀한다. 특히 105절은 성경의 계시를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로 묘사한다. 등불과 빛은 어둠을 밝히는 데 사용된다. 등불은 어두운 방이나 깜깜한 밤이나 그와 비슷한 상황에서 앞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성경도 영적, 도덕적 문제와 관련해 그와 같은 기능을 한다.성경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보여 주는 이유는 지도자나 교사들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 자체가 확실한 방향을 보여 주는 고유한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이 우리의 발을 비추는 등불이라는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이 일반인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렵다고 주장하는 개인이나 단체의 말과 모순된다. 존 칼빈은 이렇게 주석했다."하나님의 말씀 안에 불분명한 것이 있다면 [중략] 이 시인이 율법을 칭송하는 일이 전혀 온당하지 않을 것이다. 눈을 떠서 보기만 하면, 그 안에서 확실한 빛을 발견할 수 있다.“하나님의 계시를 올바로 이해해서 적용하려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2장 9-12절에서 이를 분명하게 가르쳤다. 그는 하나님이 진리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눈을 어둡게 하신다고 말했다. 시편 119편 112절도 근본적으로 그와 동일한 가르침을 전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를 주는 능력을 지닌다는 사실은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을 지니게 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다. 시편 저자가 지혜를 주는 말씀의 능력을 찬양한 일은 "주의 율례들을 영원히 행하려고” 마음을 기울인 태도와 깊은 관계가 있다(112절).그런 결심은 상황이 어려울 때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실행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드러낸다. 시편 저자는 큰 시련을 당하는 와중에 시편 119편을 기록했다. 그러나 그는 원수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께 충실하기로 결심했다(106-111절).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코람 데오우리는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성령의 사역을 통해 창조주 하나님께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늘 새롭게 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또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실행하겠다고 결심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총명과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비록 이 세상에서 완전해질 수는 없지만, 항상 주님이 명령하신 모든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하나님이 그 모든 명령에 복종할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A Lamp to Our Fee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세 가지
2018-12-18
잠언 6장 16-17절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 곧 그의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이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하나님에 대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싫은 내색을 보이지 않는 할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과 같은 시대에는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조차도 창조주께서 증오심을 품지 않는다는 견해에 동조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원한다면, 그분이 미워하시는 것에 관하여 성경이 언급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할 필요가 있다. 잠언 6장 16-19절은 하나님이 특별히 미워하시는 것을 몇 가지 제시한다. 이 본문에 나열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곱 가지 죄만 멀리해도 그릇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특히 오늘의 본문은 그 목록 가운데 처음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하나님은 “교만한 눈”을 미워하신다(17절). 이것은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 우리를 높이 생각하는 오만한 마음을 가리킨다(롬 12:3). 하나님이 교만을 미워하시는 이유는 교만이 창조주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관계에서 우리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죄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우리 자신을 높이는 일은 이웃에 대해 큰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만을 신뢰하는 태도는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겸손히 경외하는 태도와는 정반대다(잠 1:7).잠언 6장 17절은 또한 하나님이 “거짓된 혀”를 미워하신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창조주가 거짓을 말하는 혀를 미워하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거짓을 말하는 일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정면으로 거역하며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순결하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항상 말에 진실하시다. 따라서 거짓을 말하는 일은 하나님의 진실한 성품을 모욕하는 것이다. 또한 거짓말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해를 가한다. 거짓 증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다른 사람의 명예와 삶을 파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들을 위협하는 행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신다. 이것이 십계명의 아홉 번째 계명이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 이유다(출 20:16).오늘의 본문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으로 언급된 세 번째 죄는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이다. 이것은 살인을 가리키는 표현이 분명하다. 살인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극악한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창 1:26-27),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을 해치는 것은 그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점에서 살인은 하나님을 향해 증오심을 표출하는 행위인 셈이다.코람 데오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열거한 잠언 6장 16-19절을 읽어보면, 우리 모두가 그 가운데 최소한 한 가지의 죄를 지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잠시 그 사실을 생각해 보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절대 용납하지 않으시는 죄를 지은 적이 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 그런 행위를 좀 더 자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행위를 잊지 말고, 그분을 거역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자.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ree Things the Lord Hates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기름부음 받은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
2018-12-17
시편 20편 7-8절 “어떤 사람은 병거, 어떤 사람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엎드러지고 우리는 일어나 바로 서도다”그리스도인들은 역사적으로 시편에서 예배를 위한 건전한 지침과 풍성한 신학적 가르침을 발견해 왔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시편을 통해 많은 유익을 누리지만, 시편이 이스라엘의 왕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실을 간과한다. 사실 시편은 왕을 위한 기도서다. 시편은 도처에서 왕의 구체적인 관심사를 다룬다.오늘의 본문은 시편이 왕을 위한 기도서라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시편 20편은 왕을 위한 기도로 작성되었다. 이 시편은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나라들과 하나님 앞에서 자기들을 대표하는 왕을 위해 바친 기도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회중이 "환난 날에" 왕에게 응답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내용으로 시작된다(시 20:1). 이 말은 전쟁을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시편 20편은 왕이 적들과 싸우러 나갈 때마다 백성들이 드렸던 기도다.이 시편의 전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대로 백성들은 왕이 아닌 주 하나님을 먼저 신뢰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에 왕을 구했던 본래의 그릇된 동기에서 벗어나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했다(삼상 8장). 왕을 요구한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모세 율법은 장차 왕이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게 될 미래를 예고했기 때문이다(신 17:14-20).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왕, 곧 겸손한 종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와 같은 왕, 곧 스스로의 힘과 재능을 자랑하며 영광을 누릴 왕을 원했다. 다윗은 그런 악한 욕망을 거부하고, 백성들이 자신의 재능과 전략이 아닌 하나님을 먼저 의지하도록 이끌었다. 이런 사실이 오늘의 본문, 즉 그가 왕을 위해 하나님께 드린 기도 안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다윗은 백성들에게 자기가 아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왕은 아무리 훌륭해도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다윗의 가장 위대한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는 다르다. 그분은 성육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스스로를 신뢰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신다. 그러나 인간의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은 모든 신적 영광과 특권을 포기하고, 하늘에 계신 성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을 사셨다(빌 2:5-11). 예수님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셨다. 성부께서는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분을 만민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세우셨다(롬 1:1-4).코람 데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온전히 신뢰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구원자이신 주님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모든 말씀으로 사셨다(마 4:1-4). 그분은 항상 성부 하나님을 섬겼고, 자기 백성을 위해 십자가를 짊어져야 했을 때도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의탁하셨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신뢰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알고 싶다면, 예수님을 바라보면 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고 그분을 전심으로 신뢰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aving the Lord’s Anointed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권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라
2018-12-14
잠언 1장 8-9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지난 몇 십 년 동안 반권위주의적인 정서가 서구 사회를 휩쓸어 왔다. 그런 풍조는 오락이나 광고를 비롯한 다양한 통로를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 가운데는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신뢰하지 말라’라는 유행어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다. 공손하지 못한 태도가 만연하고, 오래되고 전통적인 것보다는 새롭고 혁신적인 것이 존중을 받는다.물론 성경은 전통적인 옛 것은 무엇이든 다 선하다고 가르치지도 않고, 권위 있는 사람이나 위계적인 사회 질서가 항상 옳다고 주장하지도 않는다. 이교주의는 인간의 타락에서 비롯되었고, 역사 속에는 백성들을 억압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거부했던 독재자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성경은 그런 그릇된 종교와 경건하지 못한 권위자들을 단죄한다(출 20:3; 사 5:20; 계 13장; 19:19-20). 그러나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런 경건하지 못한 행위가 권위와 전통을 왜곡시킨 데서 비롯된 결과라고 가르치신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은 나이든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시고 권위에 복종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이유는 지혜가 사려 깊은 지도자들이 제공하는 질서와 경험을 통해 주어지기 때문이다.오늘의 본문은 그런 관점을 가르치는 많은 성경 본문 가운데 하나다. 솔로몬은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고했다. 그의 권고는 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가정을 이끌 미래의 가장들이 부모에게서 배우고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면, 그 외의 사람들도 그렇게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의 가르침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녀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한 십계명의 다섯 번째 계명이 이미 오래 전에 주어졌다(출 20:12). 모세의 율법이나 오늘의 본문이나 똑같이 부모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은 존중하고 다른 사람은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오늘의 본문은 부모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자녀들의 의무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부모의 의무도 역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은 경건한 지혜로 자녀들을 옳게 훈육해야 할 부모의 책임을 전제하고 있다. 신명기 6장 4-9절은 부모에게 하나님의 율법으로 자녀들을 양육하라고 명령한다. 만일 부모가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충실하게 가르치면서 경건한 지혜의 본을 보이지 않는다면, 자녀들이 오늘의 본문에 담겨 있는 가르침을 따를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오늘의 본문은 부모와 자녀들의 의무에 관해 말한다. 그러나 솔로몬의 말은 권위자와 하급자가 맺는 모든 관계에 확대 적용될 수 있다. 권위자들에게는 지혜롭게 복종하고 하급자들에게는 경건한 본을 보인다면, 모든 일이 형통할 것이다.코람 데오매튜 헨리는 오늘의 본문을 이렇게 주석했다. "세상의 재물과 권위가 아니라 덕스럽고 경건한 태도로 스스로를 가치 있게 만드는 사람은 참으로 귀하고, 또 귀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부모와 다른 사람들의 경건한 가르침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얻어지는 지혜의 삶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가장 값진 보석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빛날 것이다. 그런 삶은 구원하는 믿음을 지녔다는 증거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장차 "잘 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주님의 칭찬을 듣게 될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Heeding Godly Authorities번역: 조계광
간음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
2018-12-13
잠언 5장 18-19절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간음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파멸이 뒤따른다. 이것이 잠언 5장 1-14절이 결혼 서약에 불충실한 행위에 대해 길게 경고한 이유다. 그러나 간음의 유혹을 물리치려면, 단지 그것이 악한 행위라고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은 성적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거룩하고 명예로운 방법, 곧 결혼 관계를 허락하셨다. 배우자를 기뻐하고,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것이 순결함과 삶과 명예를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이다.오늘의 본문은 결혼 관계, 특히 부부 사이의 성적 친밀함을 강조한다. 부부 관계는 간음이 약속만 할 뿐 결코 주지 못하는 지속적인 만족을 느끼게 해준다. 15절은 결혼 관계를 자신의 우물에서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다. 이는 시원하고 오염이 되지 않은 물로 갈증을 달랜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이다. 그 우물은 정해진 소유주의 것이기 때문에 물의 출처를 확실하게 알 수 있다. 그런 물은 누구나 길거리에서 공동으로 마실 수 있는 물과는 다르다(16-17절). 길거리에서 공동으로 마실 수 있는 물은 출처를 알 수 없고 많은 사람이 손을 담그는 물이기 때문에, 불결하고 신선하지 않다. 이것은 아내와 창녀를 비유한 것이다. 아내를 즐거워하면 안전하고, 건강하고, 지속적인 만족을 얻을 수 있다. 창녀와 더불어 간음하면, 건강이 위험할 뿐 아니라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인생의 동반자가 아니라 단지 그녀와 동침한 ‘뭇 남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 만다. 이 비유는 아내를 즐거워하는 남편을 묘사하고 있지만, 아내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남편이 아내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아내도 남편을 즐거워해야 한다.남편은 젊었을 때 선택한 아내를 즐거워해야 하고, 아내도 젊었을 때 선택한 남편을 즐거워해야 한다. 지속적인 결혼 생활만이 이성 간의 관계와 사랑을 통해 추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이 진리는 창세기 2장 18-25절에서 결혼 제도가 처음 확립된 이후로 아내와 남편의 사랑을 묘사한 솔로몬의 아가서를 거쳐 그리스도께서 신부인 교회와 연합하여 마치 부부 관계와 같은 친밀함을 궁극적으로 성취하실 것이라는 요한계시록 19장 6-10절에 이르기까지 성경 도처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온전히 충실한 남편이시기 때문에, 오직 자신의 신부만을 즐거워하신다. 그분이 자신의 신부에게서 만족을 얻으시는 이유는 그녀를 선택해 티나 주름 잡힌 것이 없는 거룩한 상태로 만드시는 중이기 때문이다(엡 5:27-33). 우리의 결혼 생활은 그런 진리를 단지 불완전하게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충실하신 것처럼 우리도 배우자에게 충실해야 한다.코람 데오매튜 헨리는 이렇게 주석했다. "결혼한 남자는 아내를 기뻐해야 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단지 그녀가 자신이 선택한 아내이기 때문에, 곧 자신의 선택에 만족해야 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섭리를 통해 자기를 위해 정해주신 아내이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에 깊이 만족하며 아내를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녀가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배우자를 허락하셨다. 우리 모두 배우자를 즐거워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Standing Firm Against Adultery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균형 있는 삶을 통해 얻는 만족
2018-12-12
전도서 4장 4-6절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는 것이로다 우매자는 팔짱을 끼고 있으면서 자기의 몸만 축내는도다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는 것보다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더 나으니라”‘올바른 균형을 찾아라.’ 현대 서구 사회에서 상투적이 되다시피 한 개념이다. 우리는 일에 너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가정에는 너무 적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보다는, 둘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고 권고하는 말을 종종 듣는다. 우리 자신을 위한 시간과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시간의 균형을 올바로 유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상담사, 의사, 인적 자원 관리사, 광고업자와 같은 사람들은 ‘균형을 찾으라’는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올바른 균형을 찾으라는 개념이 상투적이 되다시피 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개념이 특히 구약성경의 지혜 문학에 나오는 중요한 성경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의 본문도 균형, 더 정확하게는 만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본문 가운데 하나다. 이 본문은 하나의 문학적 구성 단위를 이룬다. 전도자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이해하려면, 그가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는 문학적 장치를 파악해야 한다.전도자는 "모든 수고와 모든 재주로 말미암아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전 4:4)라고 말했다. 그는 시기심이 다른 사람들이 누리는 삶을 누리고 싶은 충동을 불러일으키거나 이웃보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월등한 위치에 올라서고 싶은 감정을 느끼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말하려는 궁극적인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적용한 대조법을 사용했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탁월한 노력을 기울이려고 애쓰는 사람은 모두 시기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열심히 하라고 권고한다(골 3:23-24). 열심히 일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모두 시기심 때문이라면, 성경은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라고 명령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한 동기에 이끌려 행동하는 것을 장려하는 셈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 가운데는 시기심에 이끌려 하는 일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전도자는 가르치려는 요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하고 나서 열심히 일하는 것과는 정반대되는 극단, 곧 게으른 사람을 언급했다. 그런 사람은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 자신의 몸만 축낸다(즉 스스로를 파괴한다). 전도자는 세상을 두루 관찰한 결과, 시기심에 이끌려 열심히 일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고, 게으르게 사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 없는, 곧 바람을 잡는 것과 같이 헛될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인간이 겪는 곤경을 극복할 수 있는 해결책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만족이 곧 그 해결책이다. 좀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거나(두 손에 가득 쥐려고 애쓰거나) 게으른 삶을 좋아하지 말고(팔짱을 끼고 있지 말고), 적당히 쓸 것이 있으면(한 손에 가득 쥘 것이 있으면) 만족을 느끼는 것이 인생을 잘 헤쳐 나갈 수 있게 해주는 균형 있는 삶이다.코람 데오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 끊임없이 애쓰는 것은 어리석다. 전도서 4장 6절이 가르치는 대로 그것은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을 가지고 갈 수 없다. 재물은 일시적이고 덧없다. 죽을 때는 모든 것을 남겨놓고 가야 하고, 또 그것을 위해 수고하지 않은 자들의 몫으로 넘겨주고 가야 한다(전 2:20-21). 두 손을 놓고 일하기를 포기하는 것도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 해결책은 하나님과 그분이 허락하신 것을 만족스럽게 여기는 것이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Pursuing Contentment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힘을 다해 일하라
2018-12-11
전도서 9장 10절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추수하는 날은 바쁘다. 햇빛이 있는 동안 건초를 만들어야 한다.” 매튜 헨리가 오늘의 본문을 주석하면서 남긴 이 말은 전도서를 쓴 저자의 생각을 잘 포착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이 가르치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곧 다가올 죽음의 현실을 생각하면 이 세상에서 일하는 시간이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짧다는 것이다.오늘의 본문을 ‘일중독’을 권장하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전도자는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열심히 일만 하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 아니다. 본문의 문맥을 고려하면, 전도자가 만찬을 즐기며 배우자를 즐거워하라고 말한 것을 알 수 있다(전 9:7, 9). 그는 적절한 휴식과 기분 전환과 오락의 필요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오늘의 본문은 그 점을 전제로 부지런히 힘을 다해 일하는 삶을 미덕으로 제시한다. 어떤 직업의 소명이 주어졌든지, 우리는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고전 10:31).그렇게 일해야 하는 이유는 스올에서는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전도서 저자는 다른 곳에서 내세의 심판과 사후 세계의 현실을 암시했지만(전 12:13-14), 오늘의 본문은 구약성경의 다른 본문들과 마찬가지로 좀 더 좁은 의미에서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다. 구약성경의 저자들은 스올을 사후에 가는 장소로 종종 언급했다. 이 용어는 단지 ‘무덤’을 의미할 때가 많다. 신약성경을 통해 천국과 지옥에 관한 좀 더 분명한 계시가 주어졌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언급된 스올의 의미를 너무 깊이 파헤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아무튼 스올은 모든 인간의 공통된 운명을 가리키는 의미로 간주된다. 선인이나 악인이나 모두 똑같이 무덤에 묻힌다. 일단 무덤에 묻히면, 죽기 전에 알고 있던 삶을 다시 살 수 없다. 스올에서의 삶은 죽음 이전의 삶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죽어서 스올에 가면 더 이상의 성장이나 다른 사람들을 섬길 기회를 누릴 수 없다.이런 관점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을 고려하면 다소 불완전하다. 그러나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생각하면, 그 안에는 많은 진리가 담겨 있다. 죽으면, 일도 끝난다. 더 이상, 하나님 나라를 위한 일을 할 수 없다. 설혹 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살아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방식과 똑같은 방식으로는 할 수 없다. 우리에게 내일은 보장되지 않았다. 따라서 현재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해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 모두, 기회가 있을 때 힘을 다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심히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코람 데오노동은 인류의 타락 이전에 제정되었다. 노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셨던 창조 질서 가운데 하나다(창 1:31). 따라서 내세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충분하다. 물론 죄인들에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권유하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이것은 현세에서 해야 할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사역에 해당한다. 따라서 우리는 할 수 있을 때 최선을 다해 복음 사역에 힘써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king While We Can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기도의 집
2018-12-10
이사야서 56장 7절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예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 찬양의 제사를 드리기 위해 그분 앞에 나갈 때 취해야 할 방식에 관한 성경의 전반적인 가르침을 고려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신약성경의 가르침만을 생각하지 말고, 구약성경의 가르침에도 똑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물론 구약 시대에 드렸던 예배의 방식이 신약 시대에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더 이상 동물 제사를 드리지 않는다. 히브리서 9, 10장은 예수님이 죄를 위한 마지막 희생 제물이셨다고 가르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성경에는 예배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원리가 제시되어 있다.예배에 관한 구약성경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성전이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이다. 기도가 사람들이 공중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는 성소의 기능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은 바로 그 기도가 교회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함께 모여 공동으로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신약 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장 먼저 했던 일이 기도였다(행 12:12).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의 경우에는 찬양과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성소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종종 개인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배웠다. 그러나 공동으로 모여 기도를 드리려면,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불리는 성소를 마련하는 일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그분의 이름을 부를 뿐 아니라 예배 시간이 아닌 때에도 신자들이 조용히 주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예배를 드릴 때 공동 기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은 영적 상태가 빈곤하다는 증거다. 현대의 교회들은 음악이나 설교에 대부분 초점을 맞출 뿐, 공동 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할 때가 많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창조주께 드리는 찬양에 초점을 맞추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다. 그러나 기도를 강조하는 것도 반드시 필요하다. 무릎을 꿇든지, 앉든지, 서든지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드리는 일은 그분을 섬길 수 있는 힘과 예배를 위한 축복이 전적으로 그분으로부터 주어진다고 고백하는 의미를 지닌다. 기도는 창조주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고, 그분의 긍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준다.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의지하는 자만이 그분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있다(눅 18:9-14).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스스로 내세울 공로가 아무것도 없고, 구원을 받으려면 오직 그분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이해한다.코람 데오개인과 교회의 기도 생활은 그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신학적인 진리는 정확하게 이해했더라도 기도 생활에 무기력하다면, 모든 것을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하고 있다는 진리를 마음으로 옳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하신 진리를 사랑하고 실천하기를 좋아하는 ‘말씀의 사람’이 되어야 할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House of Prayer번역: 조계광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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