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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알 것도 같고 알 만도 한데

1월 21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4-01-21
주말칼럼 - 알 것도 같고 알 만도 한데 

숲속 오래된 연못 소리 하나 없고

젖은 흙 위를 굴러다닌 막새기와

소매로 닦아주며 안아본다

늦가을 솔방울 하나 기척을 하네.

 - 조정권 <저물 무렵>


오래 두면 사진도 빛바래더랍니다. 빛바랜 사진을 바라보며 ‘사진도 늙는다’라고 노래한 시인이 있다지요. 시인은 사진 속에서 조차 ‘시간은 쉬엄쉬엄 흘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서두르는 법 없더랍니다. 서둘 게 없지요. 서둘지 않는다고 시간이 멈춰 서는 건 아니어서, 멈춰 선 액자 속으로 ‘시간은 쉬엄쉬엄’ 흐르더랍니다. 그렇게 흐르고 흐르다 보면 시간도 종점에 닿을까요. 그 종점에선 세상 만물 사진첩 안으로 ‘흑백’만 남을까요. ‘까망’과 ‘하양’만 남은 추억은 단출해서 여유로울까요, 허전해서 쓸쓸할까요. 


어쩌면 그게 또 그렇게 고마워서 눈물 나게 아름다울 수도 있겠습니다. 가을은 마술 같잖아요. 홀딱 넘어가거든요. 눈앞에 닿은 가을‘색(色)’에 반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가지각색, 제멋대로 피어난 색깔이 아니더랍니다. 형형색색, 하나같지 않으나 하나로 어우러진 순하고 배려 깊은 색감이지요. 그래서일 겁니다, 따뜻하고 포근해요. 그렇게 물든 가을 속으로 물 들지 않을 마음이 세상 어디에 있을까요. 미치도록 아름다워서, 그게 그렇게 쓸쓸하고 눈물 나는 건 아닐까요. 너무 예뻐서 슬플 때가 있거든요.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 하셨다지요. 그건 뭐 거스를 수 없는 이칩니다. 그런데 단풍이 마르면 나무도 시들까요. 모름지기 그럴 겁니다. 사진도 빛이 바랜다니까요. 시들지 않는 게 없어요. 뭐든 ‘저물 무렵’을 맞기 마련인데, 저무는 모습이 다 같아 보이진 않더랍니다. 가을처럼 곱게 저물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봄 진 자리의 지저분한 모습도 있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해요. 후두둑 꽃 진 자리는 지저분해 뵈는데, 우수수 낙엽 진 자리를 지저분하다 하진 않거든요. 그것도 마술 같네요. 


‘저문 자리’에서는 가짐이 조심스럽습니다. 그래야지요. 봄꽃 진 자리라고, 뵈는 대로 아무 말 함부로 해대면 못 씁니다. “너는 부르짖어 보라 네게 응답할 자가 있겠느냐(욥기 5장 1절)”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그 자리에선.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욥기 5장 8절).” 그렇겠지요, 누가 뭐랍니까. 그런데 ‘너만’ 그런 건 아닙니다. 지금 이 저물어 가는 자리에서 ‘나도’ 애타게 ‘하나님을 찾고’ 있어요. 당장 입맛에는 기가 막히지만 몸에 하나 좋을 게 없는 ‘라면’이 그놈의 ‘나라면’입니다.


“우리가 연구한 바가 이와 같으니 너는 들어 보라 그러면 네가 알리라(욥기 5장 27절).” ‘너의’ 연구에 경의를 표합니다만, 당신이 알고 있는 걸 몰라서 ‘내가’ 이러고 있는 건 아닙니다. 머리로만 아는 건 소용없다고요? 아니라니까요. 지금 ‘나는’ 온몸으로 알아가고 있어요. 당신이 연구하고 경험한 객관적 지표에 토를 달 생각은 없지만 ‘나도’ 내 나름으로 몸살을 앓으며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니까요. 그러니, 부탁하건대 ‘잠시’ 멈춰 주시면 좋겠네요. 옳다고 다 옳은 건 아니라는 걸 ‘알라고’ 내가 지금 이렇게 아픈 거니까요. 


“숲속 오래된 연못”에 ‘소리 하나’ 없더랍니다. 누가 거기까지 찾아가 ‘소리’를 얹겠습니까, 바보같이. 그게 뭔 소용이라고. 어디서 굴러먹던 ‘막새기와’ 한 장, 아직 젖은 흙을 묻히고 눈물만 삼키고 있을 뿐인데요. 뭐 한다고 거기까지 가서 그 꼴을 본답니까. 구중궁궐 맨 꼭대기에 앉은 ‘뽀대’ 나는 기와라면 모를까… 그걸 몰라온 게 아니라면 “젖은 흙 위를 굴러다닌 막새기와” 한 장, 가만히 품에 안고 소매로 닦아주면 돼요. 그러려고, 그러라고 ‘여기’에 온 겁니다. 그러면 “늦가을 솔방울”도 기척을 한다네요. 


봄꽃처럼 환하고 가을 단풍같이 예쁜 시절만 ‘욥’이 아닙니다. 지금도… 욥이랍니다. 꽃은 떨어지고 낙엽은 지는 것이겠지만, 꽃 떨어진 자리와 낙엽 진 자리에 남은 모양과 색깔도 한 편의 인생인 겁니다. ‘하양’과 ‘까망’만 남았다고 다 된 인생은 아니라니까요. “흑백은 어쩌면 모든 색이 다 빠져나간 뒤에도 남아 있으려는 마음”일 겁니다. 이러쿵 저러쿵이 다 쓸데없는 자리가 있어요. 알 것도 같고 알 만도 한데, 아직 잘 모르는 자리. 다 아는 척 거들먹거리지 말라고 남은 잎새가 나무 위에 떨고 있나 봅니다. 평강. 





작성자 : 오선미 소장 (한 예술치료교육연구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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