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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3일]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2023-04-05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부터 36년까지 10년 동안 사마리아와 유대 전역을 다스린 로마 총독이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빌라도는 유대인들을 가혹하게 통치했고 그들을 경멸했다. 유대인들 역시 그런 빌라도를 무척 증오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대인들은 그렇게 증오하는 빌라도의 힘을 빌려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그들이 증오하는 이방인과도 타협하며, 그들 스스로 율법을 위배하는 악함 태도를 보였다.


잡혀 온 예수를 응시하며 빌라도는 이렇게 물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네가 옳도다.” 그리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고소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도무지 아무 말씀이 없으시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며 이렇게 말한다. “저들이 여러 가지 증언들로 예수 당신을 반대하는 이야기들이 들리지 않느냐?” 또 예수님은 침묵하신다. 빌라도는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법정에서는 누구나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변호하게 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자신을 전혀 변호하지 않으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뒤집어씌운 죄목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그런 죄목은 로마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유대 총독 빌라도에게는 로마 정부를 전복하려는 국가 반역죄로 예수님을 고소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행태인가? 만약에 예수님의 죄가 정말 그렇다면, 예수님은 오히려 유대의 독립을 위해 싸운 영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역사가들은 평가하기를 빌라도는 유능한 장수이면서, 로마 정계 진출을 꿈꾸는 정치가이면서, 사악한 협잡꾼이었고 말한다. 빌라도는 바보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예수라는 자를 시기해서 없는 죄목을 씌워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 걸 잘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에게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고 반문한다. 요한복음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했다고 여러 번 고백한다(요 18:38; 19:4, 6).


빌라도가 예수님을 바라보니 그의 눈은 맑고 선하고, 사람을 죽일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아무리 보아도 사람들을 선동하여 제국을 전복하려는 혁명가처럼 보이지 않았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그들이 시기하는 예수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머리를 굴려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려 한다. 유월절에 유대인 죄수 한 사람을 놓아주는 관행을 그는 활용하려 한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이 독립운동가인 바라바 예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바라바는 재미있게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졌다. ‘바라바 예수’는 유대 혁명가요 독립운동가였다. 빌라도는 유대인의 영웅인 바라바 예수와 지금 그들 앞에 있는 나사렛 예수, 둘 중 누구를 풀어주기를 원하는지 묻는다. 


빌라도는 예수님께 죄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지만, 예수님을 풀어줄 용기는 없었다. 그리고 자신이 죄 없는 사람을 죽였다는 오명을 쓰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는 유대인들이 스스로 선택하게 만듦으로써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참으로 영리한 모사꾼이다.


또한 빌라도는 이 예수 사건이 유대 전역에 가장 큰 이슈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만약에 예수를 풀어준다면, 유대 전역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민란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빌라도의 아내가 심히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사람을 보냈다. 재판을 하고 있는 자리에 빌라도의 아내가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알리고자 한 것이다. 빌라도의 아내는 그날 꿈에 나사렛 예수가 죄가 없는 사람인 것을 계시로 알고 괴로워했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 빌라도는 더욱 책임을 회피하기로 작정한다.

 

빌라도는 질문한다. “유대인들이여, 바라바 예수와 나사렛 예수 중 누구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들은 하나같이 “바라바 예수”라고 답한다. 빌라도가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 군중은 주저 없이 입에 거품을 물고 말한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이 무리 중 상당수는 얼마 전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예수를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라 외쳤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불과 며칠 후에 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지르고 있다. 


이들은 회색지대에 속한 사람들이다.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언제든지 자기에게 유익한 쪽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힘없이 잡혀 아무런 능력도 발휘 못하는 목수의 아들 예수를 보자, 좀전에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했던 사람들이 폭도로 변하여 입에 거품을 물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우리도 그 자리에 있었다.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예수님 사이에서 세상을 선택할 때, 우리는 또다시 주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일을 똑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대충이라도 신앙생활을 한다면 예수님 안 믿는 악한 사람보다는 덜 나쁘다? 가장 큰 착각이다.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삶에서 예수님을 배신하는 것이, 신앙이 없는 상태에서 모르고 하나님을 배역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쁘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두 가지 종류의 회색지대가 있다. 하나는 불신앙의 회색지대다. 바로 빌라도다. 그런데 두 번째는 신앙의 회색지대다. 믿으면서도 여전히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신앙이다. 누구보다도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그분이 내 눈앞에 나타나셔도 깨닫지 못하는 눈먼 신앙이다. 그들은 신앙의 회색지대에 살며 영적으로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빌라도의 눈에도 이것이 기가 막히게 보였다. 빌라도가 오히려 예수님을 변호한다. “유대인들이여, 어찜이뇨?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저 예수가 도대체 무슨 악한 일을 행했느냐?” 그렇게 파렴치한 정치꾼 빌라도가 오히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기적일 정도이다. 


이방인인 빌라도는 보는데,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유대인은 보지 못한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영적인 눈이 완전히 멀어 있다. 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눈이 멀고 더 악해져 있다. 


빌라도의 질문에는 귀를 막은 채 유대인들은 더 악을 쓰며 외친다(23절).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빌라도는 너무 놀랐다. 얼마나 유대인들이 소동을 치며 소리를 지르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는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하지 않으면, 곧 폭동이 일어날 것이라 감지한다. 빌라도는 두려웠다. 예전에 폭동이 일어나 로마 황제에게 밉보인 적이 있는 그였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 일을 약점 잡아 빌라도를 협박했다.


사도 요한은 이 일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요 19:12). 


예수님을 죽이려는 일념에 사로잡혀 유대 총독 빌라도까지 협박하는 용기를 보이는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이 사람들을 보라! 이들을 왜 “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들”이라 부르는지, 그 증거가 여기 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데리고 나와서, 리토스트론이라고 부르는 재판석에 앉았다. (리토스트론은 히브리 말로 가바다인데, ‘돌을 박은 자리’라는 뜻이다.)

그 날은 유월절 준비일이고, 때는 낮 열두 시쯤이었다. 빌라도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보시오, 당신들의 왕이오.”

그들이 외쳤다. “없애 버리시오! 없애 버리시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의 왕을 십자가에 못박으란 말이오?” 대제사장들이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황제 폐하밖에는 왕이 없습니다.” (요 19:13-15, 새번역)


신앙의 회색지대가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당연히 유대의 왕은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해야 맞는데, 그들은 빌라도보다도 더 가이사에게 충성스럽다. 진짜 그랬을까? 아니다. 그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회색지대의 신앙은 늘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무엇이든지 팔려고 들기 때문에, 애국심도 팔고, 하나님도 팔고, 그래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목적을 이룬 것이다.


그러면,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빌라도는 어떤가? 


유대 사람들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우리에게는 율법이 있는데 그 율법을 따르면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합니다. 그가 자기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서 다시 관저 안으로 들어가서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어디서 왔소?” 예수께서는 그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빌라도가 예수께 말하였다. “나에게 말을 하지 않을 작정이오? 나에게는 당신을 놓아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처형할 권한도 있다는 것을 모르시오?” (요 19:7-10, 새번역) 


그렇다. 성경이 기록하듯이 빌라도는 예수님을 놓아주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럴 권세를 가지고 있었다.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불신앙의 회색지대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는지 보라. 빌라도가 이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고서는 어떻게 행동했는지, 마태복음은 이렇게 기록했다.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마 27:24).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어디서 많이 듣던 말이다. 바로 가롯 유다가 뉘우치며 대제사장들에게 왔을 때 제사장들이 한 말이다. 그런데 이제는 유대인들이 그 똑같은 말을 되돌려 받고 있다.


손을 씻는 행위는 로마의 관습이 아니다. 그것은 유대의 관습이다. 빌라도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손을 씻는 유대의 의식을 행했다. 그래서 빌라도의 죄가 없어졌는가?


예수님 돌아가시고 2천 년을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한순간의 위기는 모면했는지 모르지만, 그때 그는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부당하게 재판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결국 그는 구원받지 못한 인생으로 어둠 가운데 슬피 울며 지내고 있다. 


회색지대 불신앙의 특징은 한순간에 위기를 모면하고자 검은색이나 흰색이 아닌 늘 회색지대에 머무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진리이신 하나님을 결코 선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어떤가?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25절).


예수님을 죽인 것은 단순히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뿐만이 아니다. 25절을 자세히 보라. “백성이 다….” 참으로 대단하다. 악을 행하는 데 참으로 용기가 대단하다. 자기들만 그 죗값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도 받겠단다. 


그만큼 나사렛 예수가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에 자신 있다는 것이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너무나 섬뜩한 맹세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믿음대로 되었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은 로마의 티투스 장군에 의해 함락되어 철저히 파괴되었다. 80년이 걸려 완공되었던 헤롯 성전도 불탔다. 무려 110만 이상의 유대인이 죽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갔다. 그리고 유대인은 나라 없이 1,900년을 떠돌아다녔다. 신앙의 회색지대의 삶의 결과이다. 


정치에는 회색지대가 있다. 경제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인간관계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철학과 문학에도 회색지대가 있다. 포스트모던은 분명한 색깔을 싫어하는 세대이다. 그래서 회색지대가 인기 있고, 신앙도 적당히 생활하는 회색주의가 유행이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라. 진리에는 회색지대가 없다. 세상은 늘 중간지대를 선호하지만, 진리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선과 악만 존재할 뿐이다.


북왕국의 악명높은 아합 왕 시절에 바알 숭배로 열을 올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엘리야는 이렇게 일침을 놓았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우리는 국적을 분명히 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가? 아니면 세상 나라의 백성인가? 회색지대에서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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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