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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4일]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
by 최성은2023-04-06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태복음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마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사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생각 가운데 하나는, 내가 삶을 마감하는, 숨을 거두는 그 순간에 결국 이 세상에 속했던 것들은 단 하나도 내가 가져갈 수 없다는 신념이다. 


남미의 와오라니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다가 순교한 짐 엘리엇은 그의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것들을 위하여, 결국은 붙들 수 없는 그것들을 포기하는 자, 그는 결코 어리석은 자가 아니다.” 


우리가 결국 붙들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또 붙들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에는 붙들 수가 없는 것들, 이 둘을 분별하며 인생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인생을 가장 값지게 사는 사람일 것이다. 짐 엘리엇이 20대에 깨달은 진리이다.


마태복음 27장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그 주변에 있던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십자가를 바라보았는지, 그들의 대화와 반응을 살펴보자. 


고민하던 빌라도는 결국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내어준다. 총독 관저 안에 200명이 넘는 군대가 소집되었다. 잘 훈련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에게 먼저 채찍질을 가한다. 그 끄트머리에 납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 있는, 그래서 맞을 때마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지는 그런 채찍이었다.


사도 바울도 핍박당할 때 이런 채찍에 맞았다. 유대인의 태장은 40에 하나 적은 39대를 맞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다. 그러나 로마법에는 그런 자비가 없다. 죄인이 지칠 때까지 무자비하게 채찍을 휘둘렀다. 그런 채찍을 맞으신 예수님은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고 탈진한 상태셨다.


빌라도의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을 조롱하기 시작한다.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로마 장교들이 입는 홍포를 입힌다. 날카로운 가시로 면류관을 만들어 예수님의 머리에 씌운다. 그 가시에 찔린 머리에서 시뻘건 피가 얼굴로 흘러내린다. 주님의 오른손에 갈대를 들게 하고서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서 희롱하고 조롱한다.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철저히 조롱하고 재미를 보고 있다. 고문 기술자들은 양심이 마비되면서 사람이 고통받는 것을 즐긴다고 한다. 사탄이 아니면 누가 사람의 마음에 그런 마음을 주겠는가?


예수님의 무기력한 모습에 로마 군인들은 재미를 더해간다. 가학의 기쁨을 느낀다. 예루살렘에 주둔한 로마 군인들은 나사렛 예수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신기한 이적과 기사를 일으킨 사람, 다니는 곳마다 사람들이 몰려들고 특별히 유대의 권세 잡은 자들과 힘겨루기에서도 결코 뒤지지 않았던 나사렛 예수란 자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 놀리면서, 혹시나 어떤 기적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믿음 아닌 믿음을 내심 갖고서 그를 더 조롱한다. 그러면서 뭔가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소문과 전혀 다르다. 유대 독립운동가의 패기 같은 것도 없고, 자기변호도 없고, 발악도 없고, 계속 당하면서도 도무지 아무 말도 없다. 재미가 없다. 그럴수록 더 조롱하고, 더 괴롭히고, 더 핍박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의 수난이다: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내 등을 맡기며 나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나의 뺨을 맡기며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내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 50:6; 52:14-53:6).


다시, 무릎을 꿇고 있던 군인들은 이제 일어나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갈대를 다시 손에서 빼앗아 그걸로 예수님의 머리를 치면서 조롱한다. 홍포를 벗기고 도로 예수님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예수님은 자신이 못 박혀야 할 십자가를 지고 비탄의 길, 슬픔의 길, 비아돌로로사를 걸어 골고다 언덕까지 가셔야 했다. 빌라도의 집무실에서 골고다 언덕까지는 대략 1.5킬로미터 거리이다. 당시 십자가형을 당할 죄수들은 모두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길을 갔다. 그러나 너무도 심한 채찍과 구타로 이미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탈진하신 주님은 대략 45킬로그램이나 나가는 나무 십자가를 지기에 버거우셨다. 이미 피를 많이 흘리신 주님의 어깨에 지탱하기에는 너무 힘겨운 무게였다. 


그때 눈에 띈 사람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다. 북아프리카 출신인 시몬은 유월절 성지순례를 왔거나, 아니면 원래 팔레스타인에 거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가는 그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 라고 기록하고 있(막 15:21). 루포는 로마서에서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로마의 동역자일 것이다(롬 16:13). 지금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있지만, 지금 자신이 진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인지 모르지만, 그 “재수 없는 날”은 그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축복의 날이 되었고, 그의 자녀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로마에서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일꾼이 될 것이다. 


드디어 예수님은 골고다, 해골의 못이라는 곳에 도착하신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갈보리’도 ‘골고다’에서 파생한 말로, 같은 “해골”이란 뜻이다.) 마태는 지치신 예수님에게 쓸개를 탄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고 기록한다. 마가는 여기에 몰약이 들어있었다고 하는데, 어쨌든 마취 효과가 있어 고통을 줄여주는 포도주였다. 그런데 주님은 조금 맛보시고 거절하신다.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니라.” 이 대목을 묵상할 때마다 뭔지 모른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주님의 육신 또한 인간의 육신 그대로셨다. 그 육신의 고통을 온전히 다 겪으시면서 인내하시느라 몸부림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선하다.


이제 군병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두 손목과 두 발목에 대못을 박는다. 우리가 보는 유명한 그림들과 달리, 십자가는 우아하지 않다. 머리에는 가시 면류관이 찌른 피가, 등짝에는 채찍에 맞은 피가, 팔과 다리에는 대못에 박힌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온몸에 피가 흥건했다. 따귀와 주먹으로 맞은 얼굴은 일그러지고 부어 있었다. 아무런 옷도 걸치지 않은, 벌거벗긴 채 예수님은 겨우 세 개의 대못에 의지하여 매달려 있다.


누가 보아도 이 모습은 우리가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니다. ‘유대인의 왕’이라는 조롱 섞인 죄패가 보여주듯이, 로마에 대항했다가 실패한 반역자일 뿐이다. 지나가는 유대인들이 이 장면을 구경하다 머리를 흔들며 예수님에게 욕을 해 댄다. 아마도 이런 욕이었을 것이다. “꼴 좋다. 그렇게 까불고 다니면서 기적을 행하더니, 결국 다 사기였지. 자기도 구원 못하면서 무슨 헤롯 성전을 사흘 만에 헐어버리고 다시 짓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면 어디 지금 당장 자기부터 구원하고 그 십자가에서 내려와라!”(39-40절).


양옆에 달린 사형수들도 예수님을 욕하고 있다. 물론 그중에 하나는 마지막에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했지만, 모두가 예수님을 욕하고 조롱하고 있다. 인류 역사에 기록에 남을 만한 위대한 일을 하고서도, 이렇게까지 모든 사람에게 멸시와 조롱을 당하는 이가 또 있을까?


이제 마지막으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장로들, 산헤드린 공회원들이 이 장면을 놓칠 수 없다.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가? 그동안 저 예수 때문에 얼마나 당했던가?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대못보다 더 날카로운 혀로 예수님을 저주하고 조롱한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마 27:42-43). 


그들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분명히 알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기적도, 그가 선포하신 말씀도 다 들어서 알고 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권세와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보다 예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살피며 그를 따라다녔던 무리가 이들이다. 


종교가 세속화되면 철저하게 보이는 것에 집중하게 된다. 유대 지도자들은 철저한 세속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예수님께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그러면 믿겠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기적과 하늘의 말씀의 권세를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 보여달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도 더 큰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졸라댔다. 그때도 예수님은 거절하셨다. 


성경은 분명히 신앙의 본질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능력에 의해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우리에게 이야기한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세속주의의 특징은 늘 보여달라고 한다는 데 있다. 보았지만 또 보여달라고 한다. 축복을 받았지만 더 큰 것을 강요하고 요구한다. 즐거움을 보여달라고 한다. 돈의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성공을 보여달라고 한다. 권세를 보여달라고 한다. 기적을 보여달라고 한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에게 받았던 세 가지 유혹이 모든 세속주의를 대표한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믿음은 오히려 보지 못하는 것들을 바라보는 힘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의 육신의 고통 이상으로 로마의 군병들이 조롱하고 외치는 이 말들이 주님의 가슴을 더욱더 아프게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육신의 고통보다도 이런 것들이 더 예수님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디 거기서 내려와 봐라.” 어디서 들어본 말이다. 바로 광야에서 예수님께 사탄에게 받았던 시험과 비슷하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거기서 내려와 봐라.” 세속주의의 공격이다. 그 뒤에는 사탄의 어두운 음모가 숨어 있다. 


믿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는 너를 구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행했으면서도 왜 자신은 구원할 수 없는가?” 


하나님을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 보실 때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때로 고난을 받으면서 사탄에게 정죄 받는 그러한 내용들이다. 시편에서도 우리는 이런 구절들을 많이 발견한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면 너를 구원할 텐데.” 욥이 받았던 경멸과 조롱도 마찬가지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예수님의 이 외침에서 우리는 그 고통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지은 죄가 얼마나 깊고 넓으면 예수님께서 그 고통의 무게를 이렇게 표현하셨겠는가?: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죄의 형벌은 버림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완전히 끊어지는 것이다. 지옥의 모습이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지옥의 형벌이 어떤 것인지, 우리의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인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 있겠는가? 


세속주의는, 세상은 성공을 보여주기를 원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세속주의가 원하는 성공의 끝이 어디인지를, 죄의 대가와 결과가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세상이 원하는 성공 속에서는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의 결과, 세속주의 성공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몸으로, 그 고통으로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없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로부터 경멸과 조롱과 핍박을 받으시면서도, 이 모든 것을 두 팔을 벌려 감수하시는 주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육신의 눈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 이 세상을 이끌어가는 것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랑도 은혜도 긍휼도 용서도 자비도 이 세상을 이끄는 힘들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십자가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 물들어 있으면 아무리 보여주고, 아무리 들려주고, 아무리 노래를 불러도 깨닫지 못한다.


사랑을 즐거워해야 하는가? 즐거움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반드시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게 된다. 그것이 세속주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사랑을 기뻐해야지, 즐거움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현대는 세속적 쾌락주의에 물들었다. 질병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기독교 내부에도 세속주의의 물결이 거세다. 세속주의는 근본적으로 쾌락주의와 인본주의이다. 그래서 신이 이렇게 고통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원하지도 않는다. 사람이 중심이 된 세속주의는 이 고통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하나님이, 창조주가, 우리를 구원할 신이 어떻게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세속주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바로 그 모습이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이고, 내가 받아야 할 대가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죄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세세상의 모든 근본이 인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로마 군병들, 지나가는 유대인들, 양옆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다들 세속주의에 눈이 멀어서, 눈을 뜨고도,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도, 세속주의에 물들게 되면 우리의 심령도,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들, 하늘에 속한 것들을 경시하게 된다. 


예수님은 표적을 구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는 늘 끊임없이 표적을 구한다. 기적을 구한다.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마 12:39). 표적과 기적을 구하는 세대에게, 예수님은 오로지 십자가와 부활의 기적 외에는 더 이상 보일 기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눈을 뜨고도 믿지 못하겠지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은 부활하신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2-23). 또 바울은  “오직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갈 6:14)고 고백한다. 그의 삶의 모든 우선순위를 바꾼, 새롭게 변화된 바울의 신앙고백이다. 성공주의를 외치고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그러나 그 끝을 보지 못하는 이 세상이 살 수 있는 길을 그가 깨달았던 것이다.


세속주의 신앙은 보여주면 믿겠다고 하는 것이고, 참다운 신앙은 믿으면 보게 되는 것이다. 대신,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끊임없이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가르쳐 준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듦으로 믿게 되는 것이다.


16세기 청교도 목회자 제레미야 버러우즈는 세속주의를 경계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결국 숨을 거두게 되는 순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이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은 우리의 소유로 남길 수 없는 것에 여러분의 생각을 집중시키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 비참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는 세속적인 마음을 버리는 데 도움이 되는 몇 가지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힘으로는 가장 작은 죄의 모습도 제거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라. 오직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의지하라.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는 사실을 깨달아라. 결국 세상은 진리를 말해 주지 않는다. 즐거움을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만, 진리를 사랑하라고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세상은 불확실해서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살아갈 나의 시간은 제한적으로 정해져 있다. 사소한 일에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일에 최대한 시간을 투자하라.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것들을 친히 공급하신다는 것을 믿고 경험하라.


세속적인 것들이 틈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것들을 과도히 생각하지 말고, 죄로 인해 오히려 겸손해지고, 나의 삶 가운데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관하여 많이 묵상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다. 지금 여기가 바벨론이고, 지금 여기가 페르시아다. 그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한복판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우리에게 여기서 빛과 소금이 되라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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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