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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거룩한 7일간의 도전_5일] 진리를 붙들라
by 최성은2023-04-07

거룩한 7일간의 도전 “다시 부활하라! 


최성은 목사의 지구촌교회 2021년 고난 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설교문을 2023년 성주간 묵상을 위한 글로 재구성하였습니다. ▶설교 영상


1일(4.3) 두려움에서 벗어나라-베드로(마 26-69-75)

2일(4.4) 불신앙에서 벗어나라-가룟 유다(마 27:1-10)

3일(4.5) 회색지대에서 벗어나라-빌라도(마 27:11-26)

4일(4.6) 세속주의에서 벗어나라-주변 인물(마 27:27-44)

5일(4.7) 진리를 붙들라-백부장과 여인들(마태복음 27:45-56)

6일(4.8) 용감하게 행동하라-아리마대 요셉(마 27:57-66)

7일(4.9) 주님 거기 안 계신다(마 28:1-20)

마태가 기록한 제 육시는 지금의 정오, 낮 열두 시를 가리키는데,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제 삼시 즉 지금의 아침 아홉 시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침 아홉 시부터 정오까지 세 시간가량 온갖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면서 고난을 견디어 내신 것이다.


정오가 되자,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였다. 정오에 해가 나야 할 텐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했다는 표현은 요엘 2장 말씀처럼 마지막 ‘주의 날’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같이 변하는 종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때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참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로서 시험들 수 있는 외침이다. 시편에서 다윗이나 아삽이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면 어떻게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나? 정말 아버지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리실 수 있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버지 하나님도 아들의 고통에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개입이 보이지 않는다. 침묵하신다. 죄 가운데 있는 당신의 백성을 다시 찾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들 대신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 가운데, 가장 극한 고통 가운데 몰아넣으신 것이다.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아시고 또 스스로 자신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예언하셨어도 이 순간만큼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렇게 철저하게 외롭게 죽음을 맞으셨다. 


십자가에 당하는 육신의 고통도 있으셨지만, 예수님이 겪으신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영적인 분리일 것이다. 


또 한 가지 동시에 주님의 절규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외치신 예수님의 이 절규는 사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들, 빛이 무엇인지, 진리가 무엇인지, 사후의 삶이 무엇인지, 영생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용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아무런 소망도 없이 죽음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 고난 가운데 있는 모든 인생, 모든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주님께서 외쳐 주신 것이다. 그런 나를 위해서, 주님은 하늘 아버지 앞에서 절규하신 것이다.


나의 아버지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왜 나를 돌아보지 않으십니까? 왜 나를 이런 고통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까? 예수님의 절규는 곧 고난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부르짖는 절규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야만 했다. 그냥 하나님의 자리에서 ‘구원이 있어라’ ‘용서한다’ 이런 차원이 아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꼭 이 땅에 내려오셔야만 하나?’ 그러나 우리가 믿은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겪어보지 않은, 이해하지 못하는,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그런 반쪽짜리 신이 아니다. 


당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볼모처럼 내려보내신 하나님이시다. 가장 낮고 천한 곳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33년을 인간들의 친구가 되게 하시고, “죄인들의 친구”로 사시다가 가장 비참하게 모든 인간의 죄를 다 뒤집어쓰시고 고통 가운데서 돌아가신 분이시다.


예수님은 나의 슬픔을 아시는 분, 나의 질고를 아시는 분, 나의 허물을 아시는 분, 나의 수치를 아시는 분, 나의 상처를 아시는 분, 나의 고난의 깊이를 아시는 분, 나의 울부짖음을 아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가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구주라고 우리는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절규는 나의 죄의 형벌의 무게를 견디시면서 동시에 나의 아픔을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대신 외쳐 주시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의 외침이다.


이런 절규를 듣고 있던 어떤 사람이 이 주님의 이 모습을 불쌍히 여겨 스펀지에 포도주를 적셔서, 극심한 갈증과 탈수 현상에 계신 주님께 마시게 했다(48). 


그 와중에도 “이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예수가 또 무슨 기적을 베풀 수도 있겠다”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엘리 엘리”라는 주님의 외침을 주님이 엘리야를 부르는 것으로 들은 (이 말은 사실은 당시에 사람들이 생활용어로 쓰던 아람어가 아니라 히브리어이다) 그들은 말한다. “그래 어디 놔두어 보자. 엘리야가 와서 저 예수를 구원하는지 한번 지켜보자”(49). 유대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위험에 처할 때 선지자 엘리야가 와서 구원해준다는 미신이 있었다. 


정말 인간이 이렇게 잔인하다. 이 상황에서 사람들은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예수가 무엇인가 마지막 기적을 일으키는지 구경하려 든다. 마지막 순간까지, 사랑을 즐거워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 즐거움을 사랑하는 세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 큰 표적과 기적을 원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마 12:39-40)


이 말씀의 참된 의미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적을 안 보여주시겠다고, 기적이 필요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을 구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 아니다. 기적은 반드시 우리의 삶 가운데 필요하다. 그렇게 수많은 기적과 말씀을 통해 은혜와 사랑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적 속에 담겨 있는 참된 구원의 진리를 붙들기를 거부하고, 또 다른 재미를 찾는, 또 다른 기적만을 원하는, 기적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사랑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은혜의 주체가 누구인지를 외면하는 그 세대를 향해서 주님께서 채찍질하시는 것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주님께 다가와서 기적을 보여달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주님은 단 한 번도 기적을 베푸신 적이 없으시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는 인간들은, 그가 누구든 차별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적을 베푸셨지만, 죄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기적을 재미 삼아 부르는, 나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그러한 인간들에게 기적을 베풀지 않으시는 주님을 본다.


예수님께서 이제 마지막 숨을 몰아 내쉬며 크게 소리 지르시고 그의 영혼이 육신과 분리되셨다(50).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일 년에 한 번 대속죄일에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는 성전의 지성소와 성소를 잇는 커다란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완전히 갈라졌다(51).

 

성소의 휘장이 갈라진 것은, 이제 죄인된 나와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막힌 담을 예수님께서 다 없애 주셨다는 의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격려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 10:19-20)


그렇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몸이 쪼개지신 것이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다. 광야에서 맺은 피의 언약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완전하게 이루신 것이다. 율법을 폐했다는 것은,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모두 완성하셨기 때문에 더 이상 과거의 율법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필요가 없어서 폐기했다는 것이 아니라, 완성하셨기 때문에 율법을 이루어서 폐기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구약에 있는 율법을 지킨다고 하더라도 한점 흠 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사람이 없기에,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피를 흘리셔서 그 거룩한 보혈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진정한 성전이시고, 그분을 우리 가운데 모시는 우리의 삶도 주님의 성전이 되어 간다.


그리고 이제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죽었던 사람들이 무덤에서 일어났다. 잠자던 성도들이 일어났다(52-53). 


예수님의 죽음을 통한 이 마지막 기적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마지막 때에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 우리보다 주안에서 먼저 자는 자들이 먼저 이런 부활을 경험하며 육과 영이 다시 하나가 될 것이라고 데살로니가서는 우리에게 격려한다. 


지금까지 적어도 네 가지 이상의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 대낮이 칠흑같이 어두워진다. 성전의 휘장이 갈라진다. 땅이 진동한다. 그리고 자는 성도들이 무덤에서 일어난다. 


엘리야가 와서 어디 구해주나 보자! 재미 삼아 구경하던 자들, 그토록 예수님을 심하게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예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와 보라! 예수님을 비웃던 유대교 지도자들, 그들 모두 이 모든 장면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예수님 말씀처럼 이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는 여전히 이 진리를 붙들지 않는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사람을 매수하여 빈 무덤 사건을 은폐하려 한다. 진리가 선포되고 진리이신 그분이 앞에 서 있는 데도,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천지가 진동하는 데도, 죽은 자가 살아나는 데도, 예수님을 조롱하던 그들은 진리를 붙들려고 하지 않는다. 영적으로 교만하고 강퍅하면 이토록 진리가 앞에 있어도 보지 못한다. 눈을 가리고 보지 않는다. 귀를 막고 듣지 않는다.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유대인들은 이런 놀라운 초자연적인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놀랍게도, 이 모든 십자가형을 진두지휘하던 로마의 백부장과 그 십자가형의 집행을 도왔던 군인들이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고백한다(54).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잘 알아보아야 하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못 알아보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누구신지조차 모르는 이방인들은 진리를 알아본 것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시는 말씀들을 듣고서 예수님에게 죄가 없음을 발견한 것이다. 이 백부장은 수년간 십자가형을 집행해 왔을 것이다. 수많은 죄인이 죽어가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빌라도처럼 그는 예수라는 자에게서 어딘지 보통 사람과는 다른 무엇인가를 본 것이다. 어쩌면 특별히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있었을 것이다. 자기를 끔찍하게 형벌하고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 달라고 신에게 기도하는 자, 그것도 십자가상에서 그 모진 고통을 당하며 용서할 수 있는 이 사람이야말로 참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때, 이 사람이 숨을 거두자마자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지고, 죽었던 자들이 깨어난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진리를 붙드는 방법은 같다. 세상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순간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골고다 언덕에서 나타난 현상을 보고 두려워했다. 첫째 날 두려움에서 벗어나자고 했는데, 그 두려움은 사탄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기적과 권능을 보고 심히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것은 진리를 붙드는 유익한 두려움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끝까지 이 진리를 붙드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주님을 배반치 않고 끝까지 사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바로 당시 가정 사회적 약자이고, 가장 힘없는 여인들이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55-56).


무시무시한 십자가 사건, 조롱과 핍박의 연속 가운데, 오랜만에 가슴 따뜻해지는 장면이다. 예수를 섬기던 여인들이라 했다. 갈릴리부터 따라왔다고 했다. 많은 여자라 했다. 어느 교회를 보아도 여자 성도들이 많다. 아마도 에덴동산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깨어있는 여인들의 노력인듯 싶다.


도대체 이 시간에 예수님이 훈련하시고 가장 사랑하셨던 제자들은 어디 있을까?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직전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예수님이 사도 요한에게 맡기신 것을 보면 적어도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복음서는 누구도 다른 제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러한데, 오히려 형을 집행하던 이방인 백부장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 아무런 힘도 없는 여인들이 예수님을 끝까지 사랑했다. 오히려 여자들이 예수님께 의리를 지켰다. 그 여인 중에 한 여인은 막달라 마리아로 전해진다. 일곱 귀신 들린 여인이었는데 예수님이 치료해 주셨던 그 여인이다. 한 귀신도 아닌 일곱이나 되는 귀신이 괴롭혔으니, 얼마나 처참했겠는가? 그런데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녀를 예수님이 고쳐 주셨다. 이 여인이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며 주님의 임종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다.


연약한 여인들은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다. 군중에 끼어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고, 힘겨루기를 할 수도 없었고, 베드로처럼 칼을 빼 들 수도 없었고, 정치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끝까지 예수님을 붙들고 있다.


진리이신 예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힘도 아니고, 권세도 아니고, 돈도 아니고, 대인관계도 아니다. 답은 너무도 단순하다. 예수님을 구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이다. 내 손에 들려져 있는 것이 적을수록, 주님을 사랑할 가능성은 더 크다.


진리이신 하나님을 붙들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하라.


아무것도 없어도 그런 용기만 있으면 진리를 붙들 수 있다. 


기다리지 말자. 오늘 붙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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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성은

최성은 목사(PhD,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는 지구촌교회 담임목사이며, 지구촌미니스트리네트워크(GMN) 대표 및 (사)지구촌사회복지재단 대표이사로 섬기고 있다. 한국교회의 복음화 운동과 복음 생태계 마련을 위해 한국로잔위원회와 TGC코리아ㆍCTC코리아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대표 저서인 '뉴노멀 시대의 그리스도인'을 비롯하여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