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무엇이 더 좋은지를 죽음이라는 순간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곧 ‘좋은 기름’을 가진 사람(전 7:1)은 태어난 날을 크게 잔치하며 해마다 기억할 것입니다. 그는 ‘지금’을 곧 현재를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는 결코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 순간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의 순간입니다. 그에게 죽음의 순간이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기름을 다 앗아가는 순간 더도 덜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 곧 ‘좋은 이름’의 사람은 어떠할까요? 그에게는 태어난 날도 귀하고, 현재도 소중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더 귀중한 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게 될 순간입니다. 이 땅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시간도 복되지만, 이 땅을 떠나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그날은 더욱 복됩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은 날이 됩니다. 바울 사도가 그랬습니다. 그는 말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7-8)
바울 사도는 자기 생명의 촛불이 점점 약해져 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에 안타까워하지만은 않습니다. 도리어 최선을 다해 주어진 길을 힘써 달린 자신을 맞이하실 의로운 재판장 예수님을 만날 날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바울에게 가장 복된 날은 어떤 날이었을까요? 이 땅에서 육신의 생명을 얻은 날보다, 또 지금 살아가는 현재보다, 하나님 앞에서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그날 곧 죽는 날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는 삶을 산다고는 하지만, 궁극적인 의미에서 진정한 내일이 없습니다. 그들에게 최후의 순간은 곧 모든 것을 다 상실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진정으로 내일이 더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죽는 날이 태어난 날보다 더 좋고 더 축하해야 할 날이 되는 그런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태어난 날도 좋지만 죽는 날이 더 좋은 그런 인생이 될 때, 또 살아있는 이 순간도 좋지만 죽어 하나님 앞에 서는 그 순간이 더 좋은 그런 사람이 될 때, 그런 인생이 진정으로 복된 인생입니다.
정현구, 영원을 품고 오늘을 걷다(SFC)에서 간추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