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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용기

2월 5일 와플 QT_여호수아 17:1-18

2024-02-05

여호수아 17:1-18

더 많은 땅을 원하는 요셉의 자손들에게 여호수아는 산림지대로 올라가 개간을 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두렵습니다. 벧-스안과 이스르엘 골짜기 일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다 철전차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삶이 늘 평안하고 쉬운 길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두려움을 넘어 땅을 개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아무리 막강한 힘과 철전차와 같은 무기가 있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들을 충분히 쫓아낼 수 있습니다. 어떤 힘과 무기보다 강한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1 다음은 요셉의 장남 므낫세의 서쪽 반 지파가 분배받은 땅이다. 길르앗의 아버지인 마길은 므낫세의 장남이자 전 쟁의 영웅이었으므로 요단강 동쪽의 땅인 길르앗과 바산을 이미 얻었다. 2 그래서 요단강 서쪽에서는 므낫세의 나머 지 자손이 집안별로 땅을 분배받았는데 이들 집안은 아비에셀, 헬렉, 아스리엘, 세겜, 헤벨, 스미다 집안이었다. 이들 은 모두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의 남자 후손이며 집안 어른들이다. 3 그러나 헤벨의 아들이요 길르앗의 손자이며 마길 의 증손이자 므낫세의 현손인 슬로브핫은 아들이 없고 딸뿐이었으며 그들의 이름은 말락, 노아, 호글라, 밀가, 디르사 였다. 4 그들이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 앞에 나와 “여호와께서는 모세에 게 우리 지파의 남자들과 함께 우리에게도 땅의 일부를 주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그 여자들에게도 그들의 남자 친척들과 함께 땅을 분배해 주었다. 5 므낫세가 요단강 동쪽 에 있는 길르앗과 바산 외에도 열 구획의 땅을 얻은 것은 6 므낫세의 여자 자손들이 그들의 남자 자손들과 마찬가지 로 땅을 분배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길르앗 땅은 므낫세의 나머지 자손들에게 분배되었다. 7 므낫세 서쪽 반 지 파의 경계선은 아셀에서부터 세겜 동쪽 믹므닷에 미치고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가 엔-답부아 주민들의 땅에 이르렀 다. 8 답부아 일대의 땅은 므낫세에게 속하였으나 므낫세 땅의 경계 지역에 있는 답부아읍은 에브라임 자손에게 속하 였다. 9 다시 그 경계선은 답부아에서 가나 시내로 내려갔다. 그 시내 남쪽의 일부 성들은 므낫세 지파의 땅에 위치해 있어도 에브라임 지파의 땅이었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경계는 그 시내 북쪽 둑을 따라 지중해에서 끝났다. 10 그 래서 가나 시내 남쪽은 에브라임의 땅이었고 그 북쪽은 므낫세의 땅이었으며 그들의 서쪽 경계는 지중해였다. 그리고 므낫세 지파의 경계는 북서쪽으로 아셀 지파의 땅과 접해 있고 북동쪽으로는 잇사갈 지파의 땅과 접해 있었다. 11 잇사갈 지파와 아셀 지파의 땅에는 므낫세 서쪽 반 지파가 소유한 땅이 있었는데 그것은 벧-스안, 이블르암, 돌, 엔돌, 다아낙, 므깃도, 그리고 이 성들 주변의 부락들이었다. 12 그러나 므낫세 자손이 이 성들에 사는 주민들을 쫓아 내지 못하였으므로 가나안 사람들이 계속 그대로 살고 있었다. 13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력이 강해진 다음에 가나안 사람들을 굴복시켜 강제 노동을 시키고 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았다. 14 요셉 자손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말하였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오늘날 우리가 큰 지파가 되었는데 어째서 우리에게는 한 몫의 땅만 주 십니까?” 15 “여러분이 인구가 많아서 에브라임 산간 지대가 너무 좁으면 브리스 사람과 르바임 사람의 산림 지대로 올라가서 그 곳을 개간하십시오.” 16 “그 산림 지대도 우리에게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벧-스안과 이스르엘 골짜기 일대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은 다 철전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17 여호수아는 다시 요셉의 아들 에브라임과 므 낫세 자손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인구도 많고 막강하니 한 몫의 땅만 가질 것이 아니라 18 그 산림 지대도 소유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 땅을 개간하면 그 온 산림 지대가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두 여러분의 땅이 될 것입니다. 가 나안 사람들이 아무리 막강하고 철전차를 가졌다고 해도 여러분은 그들을 충분히 쫓아낼 수 있습니다.”
중년 가장의 시기에 참 곤혹스러울 때가 있다. 살면서 충분히 고통의 시기를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다시 마주해야 하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정도와 크기가 너무 버겁다는 생각이 들 때다. 왜 내 인생은 계속 힘들어야 할까,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돌보심에 대해 회의가 생긴다.

성경의 가장 깊은 감동은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세세하게 돌보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이 내 고통에 무관심하신 것 같다는 현실에 자주 마주친다. 마치 내 고통의 반응을 즐기시는 분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나는 성경의 말씀과 대치되는 극한의 순간에 그동안 믿어온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 마저 든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큰 고통은 반드시 한 번이어야 하고 이후의 인생은 풍족하며 넘기 쉬운 야트막한 동산이어야 할까? 내 인생의 고통은 더는 반복하면 안 된다는 믿음이 성경과 상관없는 믿음이 아닐까? 숱한 고통을 견뎌야 하는 서사는 성경에 차고 넘친다. 신앙인의 신앙인 됨은 믿음을 선택하는 용기에 달려 있다. 나다운 삶, 나에게 기쁨이 넘치는 삶을 택하라는 현 시대정신이 발현하는 용기는, 마치 내 만족을 향하라는 것으로 쓰임새가 바뀌어 있다.

오늘 성경은 좋은 땅을 많이 받으려 하지 말고 산림지대로 올라가 개간하라고 말씀한다. 비록 막강한 군사력을 지닌 가나안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하더라도 충분히 이길 수 있으니 용기를 가지라고 말씀한다. 나는 계속되는 인생의 고통과 맞서 싸울 용기가 있는가? 하나님이 돌보시지 않는다고 낙심하고 회의하는 데 머물러 계속 아파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실패는 성공의 반대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작성자 : 황교진 (작가, 『엄마는 소풍중』 지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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