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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베드로의 흑역사

3월 24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4-03-24
주말칼럼 - 베드로의 흑역사 

흑역사(黑歷史): 없었던 일로 치거나 잊고 싶을 만큼 부끄러운 과거.


“베드로는 `‘여보시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베드로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닭이 곧 울었다. 주님께서 몸을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 그는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말할 것이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으로 나가 한없이 울었다(누가복음 22장 60-62절).”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너무도 유명한 ‘흑역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분명 주일학교 아이들도 알 겁니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해마다 고난주간이 되면 다시 거론됩니다. 그래서 잊힐래야 잊힐 수 없습니다. 베드로에게는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잊고 싶고, 숨기고 싶은 기억이었을 테니 ‘흑역사’ 맞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을 감추지 않습니다. 심지어 네 개의 복음서 모두가 그 새벽에 있었던 일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6장, 마가복음 14장, 누가복음 22장, 요한복음 18장). 이미 초대교회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던 베드로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싶습니다. 참 대단들 합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베드로에게 “이 일을 기록할 겁니다. 괜찮지요?” 묻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만약 물었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했을까요? 제 생각에는 허락했을 것 같습니다. 그 새벽의 실패가 그를 새롭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 흑역사는 자신을 향한 주님의 신실한 사랑을 기억하게 했고, 자기 삶과 사역이 은혜 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기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신은 자랑할 것이 없는 자이며, 자신을 사랑하사 사도로 세우신 주님만을 높이기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흑역사’라는 단어의 정의에 어울리지 않게 자신의 ‘흑역사’를 드러냈으며, 심지어 간증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약함이 그리스도의 능력을 온전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에게 거하게 하는 통로임을 깨닫고, 약함을 자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장 9-10절). 베드로도 바울도,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 자유로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믿는 형제들이 120명쯤 모인 자리에서 베드로가 일어나 이렇게 말하였다 (사도행전 1장 15절).”  ‘흑역사’로 마무리된 복음서의 베드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도행전 1장에 등장합니다. 그는 주님이 세우신 사도로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기 위해 모인 120여 명의 제자를 이끕니다. 가룟 유다도 실패했고, 베드로도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이름은 사라지고, 한 사람의 이름은 교회의 설립과 복음의 확장에 쓰임 받는 일꾼으로 기록됩니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죄질의 차이일까요? 누구의 ‘흑역사’가 더 심각하고 어두운가의 문제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차이는 ‘흑역사’ 이후의 시간과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용서와 은혜에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낙심과 후회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사울왕과 다윗왕도 같습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지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에게 ‘흑역사’가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죄질에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를 통해 주신 말씀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였는지가 두 사람의 결론을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요한복음은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찾아오신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요한복음 21장).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세 번 대답했습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 사명을 주셨습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흑역사’를 다루어 주신 겁니다. 그가 그 새벽의 기억에 매인 자로 살기를 바라지 않으셨기에. 그날 이후, 베드로는 주님이 주신 사명에 헌신한 자로 살아갑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순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의 ‘흑역사’가 아닌 그의 ‘충성’과 ‘헌신’을 기억합니다. 베드로의 삶은 ‘흑역사’가 우리 인생의 결론을 만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흑역사’ 이후의 깨달음과 선택이 우리 인생의 결론을 만듭니다. 물론 ‘흑역사’가 전혀 없으면 좋겠지만, 우리 같이 부족하고 어리석고 연약한 자들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 한 분 외에는, 이 땅에서 살았던 모든 인간에게는 ‘흑역사’가 존재할 수밖에 없습니다. 


‘흑역사’는 우리의 발목을 잡는 걸림돌이 되거나, 우리를 파괴해 버리는 부정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과거에 매여 삽니다. 부서져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음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흑역사’는 은혜와 성장의 발판이 되고 도구가 됩니다. ‘흑역사’를 통해 완고하고 교만한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져 복음이 들어올 자리가 생기게 됩니다. 복음은 우리를 모든 매인 것에서 해방시키고, 오직 주님께 매인 사명자로 살게 만듭니다. 베드로의 삶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나의 흑역사는 무엇입니까? 그 흑역사는 내 인생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흑역사’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선택을 합시다. ‘흑역사’에 매인 자가 아닌 그리스도께 매인 자로 살아갑시다. 우리의 인생을 빚으시고 인도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지 나의 연약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빚어진 ‘흑역사’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샬롬이 있기를 바랍니다.




작성자 : 김건우 목사 (좋은씨앗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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